<<<강해설교이론>>>/ - 산상수훈 강해

애통하는 사람들은 복이 있나니

에반젤(복음) 2020. 10. 8. 01:32

애통하는 사람들은 복이 있나니

 

우리 이제 두 번째 복을 생각하게 되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세상은 이와같은 진술을 우스꽝스러운 진술로 여기며 피하고 싶어한다. 두통거리를 잊고, 등을 돌려 피해 할 수 있는대로 행복하기를 원한다. 하지만 복음은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라고 한다. 참으로 애통하는 자들만이 행복하다는 것이다. 누가복음 6장에 나오는 애통함은 화를 선언함으로써 이 세상의 웃음과 유쾌함과 행복을 정죄하고 있지만 이 말씀은 애통하는 사람들에게 축복과 행복과 기쁨과 평화를 약속한다.

 

우리는 여기서 영적 의미의 애통을 취급하고 있다. 이것은 어떤 사람의 죽음으로 인한 애통함이 아니다. 우리의 자연적 삶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이것은 속세에서는 찾아 볼 수 없으며 그것과 현격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이것이 과거와 신약성경에서는 그러했지만 오늘의 교회에서는 분명하지 않다. 이것이 분명하지 않은 원인는 가짜 청교도주의에 대한 반동이다. 이것은 가장된 경건의 모양으로 나타날 때가 허다했다.

 

따라서 신앙생활은 거의 비참한 것이라는 인상을 주고 기독교인은 매력이 없다는 인상을 주었다. 다른 원인은 사람들을 끌어 들이려면 우리가 일부러 밝고 명랑한 모양을 가장해야 한다는 생각이 유포되어있기 때문이다. 내부에서 비롯되는 삶 대신 그 무엇으로 가장하고 또 어떤 모습을 나타내려고 애쓰는 모든 노력은 여기서 기이하는 것이다. 최종적 원인은 잘못된 죄의식과 잘못된 죄론 때문이다.

 

이것은 기독교인의 기쁨의 참 성격을 이해하는 못하는 데에도 원인이 있다. 이것이 전도문제 이를 때에 중대한 문제로 대두되는데 죄와 기쁨에 대한 교회의 이중개념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에 교회가 전도에 실패하고 있는 것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산상설교는 부정적인 면부터 시작한다. 즉 성령으로 충만해 질 수 있기 전에 우리의 심령은 가난해져야 한다. 죄의식은 필연적으로 개심에 선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구원의 참 기쁨이 있기 전에 죄의식이 있어야 한다.

 

기쁨을 찾으려 애쓰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있다. 그들은 기쁨을 체험할 수 있기 전에 정죄의식을 가져야만 한다는 사실을 보지 못하였다. 그들은 죄론을 좋아하지 않고 죄론을 미워한다. 정죄의식을 떠나서 기쁨을 원하지만 이것은 불가능하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뜻을 알아보자. 우리는 주님의 형상과 모범을 닮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볼 수 있는 한 가지는 주님이 웃었다는 기록을 볼 수 없다. 주님은 슬픔을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가 되어야 했고 실제 나이보다 훨씬 더 들어보였다는 징후도 있다.

 

다른 예로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볼 수 있다. 자기에 대해 비탄에 잠긴 나머지 고통중에 울부짖는 사람이었다. 기독교인은 모두 이와같이 되어야한다. 바울은 마음의 법과 몸의 지체들의 법과의 사이에 이와 같은 갈등을 충분히 알았다. 이것들이 비참한 싸움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린도후서 5장에서는 이 장막 집에 사는 동안 우리는 무거운 짐에 눌려 신음합니다 라고 말하며 우리는 이 하늘에서 오는 우리가 살 집을 우리 위에 덧입기를 사모하면서 이 장막 집에서 신음하고 있습니다라고 서술했다. 여기는 유쾌함과 쾌활함이 없다. 젊은 그리스도인들도 그들이 얼마나 행복한가를 세상에 보여 주기 위해 항상 얼굴에 밝은 미소를 띠울 정도의 기쁨을 나타내려고 가장해서는 안 된다.

 

애통한다는 것은 심령이 가난한데서 필연적으로 따라 오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과 그의 성결을 대면하고, 내가 살아야 할 삶을 응시해 볼 때 나는 나의 철저한 무능과 절망을 본다. 내가 나의 영의 상태를 볼 때, 이것은 즉각 나를 애통하게 한다. 자기와 대면하고 자기와 자기 삶을 참으로 검토하는 사람이면 자기 죄 때문에 필연적으로 애통해야 할 사람이다. 자기안에 있는 여러 악의 원리들을 의식하고 싸움이 지체들 속에 있음을 발견하며 그것을 미워하고 그것 때문에 애통한다.

 

기독교인은 여기에 머무르지 않는다. 참된 기독교인들은 다른 사람들의 죄 때문에도 애통하는 사람이다. 다른 사람들 속에서도 같은 것을 보고 사회 상태와 세계 상태에 관심을 갖는다. 우리 주님이 애통하신 까닭도 이와 같다. 그는 죄가 우리에게 죽음을 가져오고 삶을 망쳐놓고 불행하게 만든 것임을 보셨기 때문에 나사로의 무덤에서 우셨고, 예루살렘 성을 보고 애통하셨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 역시 바로 죄 그 자체의 성격 때문에 애통해야 하며, 죄가 세상에 들어와서 이런 무서운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에 애통해야 한다.

 

자기의 죄의 상태 때문에 참으로 애통하는 사람은 회개하려는 사람이다. 자기의 철저한 죄성과 절망을 보고 구세주를 찾고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구세주를 발견한다. 이 일은 밤낮 계속되는 일이다. 성령께서 그의 완전한 만족의 대상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그에게 계시할 때는 사람이 이 철저한 절망 속에 있는 자기를 볼 때인 것이다.

 

그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가 자기 죄를 위해 돌아가셨으며 하나님 존전에 그의 변호인으로 서 계심을 본다. 그는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완전한 준비를 보며 즉각 위로를 받는다. 기독교인의 생활은 이런 식으로 애통과 기쁨이, 슬픔과 행복이 교차하는 삶이다.

 

이런 즉각적인 위로만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또 다른 위로, 복된 소망이 있다.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들로 삼으시고 우리의 몸을 온전히 속량해주심을 기다리며,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했다. 기독교인은 세상을 바라보고, 자기 자신을 바라볼 때 불행하다. 그는 심령으로 신음하며 죄의 짐을 느낀다. 하지만 그는 즉각 위로를 받는다. 그는 다가오는 영광을 알고, 그리스도께서 돌아오실 날이 올 것을 안다.

 

애통하는 사람, 그는 슬픈 사람이다. 하지만 비참한 사람은 아니다. 그는 심각한 사람이지만 엄숙한 사람은 아니다. 신중하지만 퉁명스럽지 않고, 위엄있지만 그 위엄은 따스함과 끌어 당기는 힘이 있다. 그는 항상 신중하다. 하지만 심각을 가장하지 않는다.

 

참된 기독교인은 비탄이나 유쾌한 모습을 가장해야 할 사람이 아니다. 삶을 심각하게 바라보며, 영적으로 응시한다. 삶 속에서 죄와 그 결과를 본다. 그는 속으로 신음하지만 그리스도를 체험함과 장차 올 영광 때문에 행복하다.

 

근본 심각하고 근본 행복한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거룩한 기쁨이요, 심각한 행복이다. 이것이 애통하는 사람, 기독교인이다. 심오한 죄론과 차원 높은 기쁨의 교리, 이 둘이 합하여 이렇게 애통하며 동시에 위로를 받는 복되고 행복한 사람을 만들어 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