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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수훈과 팔복

에반젤(복음) 2020. 10. 8. 01:22

산상수훈과 팔복

- 김영규 목사 (성덕중앙교회)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5:1-3)


산상수훈 에 대하여

오늘 부터는 산상 수훈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마태복음 5장~7장을 산상수훈, 혹은 산상보훈이라고 합니다. 이런 이름이 붙은 것은 예수께서 산 위에 오르셔서 가르치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산이라고 하니까 무슨 백두산이나 한라산을 상상하실지 모르지만 그냥 평범한 야산입니다. 이스라엘에 가면 갈릴리 호수 북편에 가버나움 유적이 있습니다. 거기서부터 평평한 언덕을 한 참 오르면 8복 교회라고 이름 붙인 예배당 건물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산상수훈을 가르치신 장소로 추측되는 곳입니다. 갈릴리 호수는 水面의 높이가 해발 마이너스 400미터입니다. 그러므로 거기서부터 한참 올라와도 실상은 산이라기보다는 높은 언덕 정도입니다.

산상수훈은 여러 면에서 모세의 율법에 대조됩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산위에서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율법과 산상수훈의 과정은 상당히 다른 면이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은 해발 2000미터가 넘는 시내산 꼭대기에서 주어졌지만, 산상수훈은 평범한 야산에서 주셨습니다. 모세는 아무도 접근할 수 없는 상태에서 홀로 말씀을 받았지만 산상수훈은 여러 제자들이 함께 받았습니다. 모세의 율법은 10계명으로부터 시작되지만 산산수훈은 축복론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전체적으로 본다면, 모세가 율법을 받을 때의 모습은 상당히 제한적이고, 엄격하고, 심판적입니다. 반면에 산상수훈은 개방적이고, 자유롭고, 축복 지향적입니다.

내용상으로도 모세의 율법과 산상수훈은 상당히 대조적입니다. 첫째로, 모세의 율법이 현세적 지상적이라면 산상수훈은 내세적 천상적입니다. 구약 율법의 모든 심판과 보상은 현세에서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산상수훈의 심판과 보상은 미래적이고 종말적입니다. 즉, 영적 이스라엘,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되, 주로 예수님이 다시 오실 종말과 내세에 주어집니다. 둘째로, 모세의 율법이 外面的 축복을 많이 언급한다면, 산상수훈은 內面的 축복에 치중합니다. 즉, 구약의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서의 번영이 중심 주제입니다. 그러나 산상수훈의 청중들은 천국, 하나님 나라에서의 번영을 목적으로 삼고 있습니다. 구약의 축복이 육체적인 것들이라면 신약의 축복은 영혼에 관한 것들입니다.

산상수훈의 청중들은 누구일까요? 오늘 말씀에 보면 두 부류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1절) 첫째는 “무리”()이고, 둘째는 “제자들”()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를 통해서 항상 이 두 부류가 등장합니다. “무리”들은 주로 예수님의 기적을 보려고 좇아 다닌 사람들입니다. 병고침을 받으려고, 혹은 오병이어의 기적과 같은 신기한 일을 보려고 몰려든 사람들입니다. 제자들은 12제자, 혹은 70인 제자들과 같이 주님의 교훈을 받고 따르던 사람들입니다. 무리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이미 다 떠나버렸습니다. 감람산에서 승천하실 때에 남았던 무리는 모두 500여명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가룟 유다를 제외하고 다 주님을 계승했습니다. 모두가 예수님을 전하다가 순교했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어디에 속합니까? 무리입니까, 제자입니까? 무리와 제자가 함께 주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과의 거리가 서로 다릅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1절) 무리는 멀리 있었고 제자들은 가까이 나아왔습니다. 무리는 주님의 말씀을 귀로 들었지만 제자들은 마음으로 들었습니다. 무리는 구원과 별 상관이 없었지만 제자들은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무리는 예수님의 行蹟에 관심이 많았지만 제자들은 가르침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2절 말씀을 보세요.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2절) 입을 열어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행동이고, 둘째는 말씀입니다. 무리들은 항상 예수님의 행적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어떤 기적을 행하실까? 어떤 병자들을 어떻게 고치실까? 어디 사시고 어떻게 사실까? 그러나 제자들은 주님의 교훈과 가르침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오늘 말씀에 예수님이 입을 여신 것은 의미 있는 일입니다. 행동만 하시지 않으시고 진리를 가르치셨습니다. 이것은 대단이 중요합니다. 행동은 눈으로 관찰됩니다. 즉, 예수님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가르침은 예수님의 내면과 신분을 알려줍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외형을 보는 자들이 되지 말고, 예수님의 내면, 예수님의 신분을 보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무리들의 관심은 예수님의 신분에 있지 않고, 단지 그가 행하는 일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시든지 그다지 중요하지도 않았고, 별 상관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단지 그가 기적을 행한다는 게 중요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기적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이 누구신가? 그것이 가장 중요했습니다. 예수께서 인기 절정에 있으실 때에 제자들에게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고 하느냐?”(마16:13)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16:15)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신분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이런 점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이 행하신 35 가지 기적들 중에 단지 8 가지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대신에 그는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열심히 소개합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14:6) “나는 세상의 빛이라”(요8:12) “나는 양의 문이라!”(요10:7) “나는 선한 목자라!”(요10:11) “나를 믿는 자는...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요7:38)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10:30) “나의 주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20:28)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오늘 여러분의 관심은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님이 누구신지 관심이 있으십니까? 아니면 예수가 누구이든지 상관 없으니 복만 많이 주면 그냥 좋습니까?


팔복에 대하여

산상수훈의 첫 부분은 축복론입니다. 축복론이 서두에 나오는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 자녀들은 하나님께 복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인생은 당연히 복된 삶을 누려야 합니다. 불행하게 사는 것은 하나님 뜻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복은 우연히 굴러들어오는 요행이 아닙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얻어지는 생산품도 아닙니다. 인생의 복은 오직 하나의 근원에서 옵니다. 바로 하나님입니다. 인생의 복은 오직 하나님이 주십니다. 하나님 외에는 인생에게 복을 주실 분이 없습니다. 하나님 믿는 사람은 이미 복을 받은 사람들이요, 현재에도 복을 받고 있고, 장차 복을 받을 사람들입니다. 산상수훈은 천국 백성의 삶을 가르칩니다. 그 서두가 바로 천국 백성의 복을 밝히는 것입니다. 오늘 나는 복된 사람입니까? 아니면 불행한 사람입니까? 축복관에 따라서 인생이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팔복은 단순히 누가 복이 있는지 없는지를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진정 어떤 것이 복된 인생인지를 밝혀주려는 것입니다. 누가 복 있는 사람입니까? 오늘 여러분은 복 있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지질이도 복이 없는 사람입니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기왕에 축복 얘기가 나왔으니 한 번 따져 봅시다. 여러분은 지금 그리스도인으로서 복을 받으셨습니까? 아직도 받을 것이 많습니까?

우리 한국 사람들 복 받는 것 굉장히 좋아합니다. 복만 준다면 양잿물이라도 마십니다. 어제 마감된 서울 시내 어떤 주상복합 건물 청약률이 250대 1이 넘었습니다. 돈이 복이다! 우리 동양 사람들이 복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다섯 가지입니다. 壽 富 康寧 攸好德 考終命 즉, 장수, 부귀, 평안, 덕스러움, 편안히 죽는 것, 등입니다. 여러분도 이런 복을 받으시면 좋겠습니까? 묻는 사람이 바보지요. 당연히 좋아합니다. 그러나 여기에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모든 초점이 현세에 있습니다. 내세가 없습니다. 오직 현세에서 잘 되는 것만이 축복의 전부입니다. 이런 가치관 때문에 죽기 살기로 주상 복합 청약에 달려드는 겁니다.

성경의 축복관은 상당히 다릅니다. 구약 시대에는 현세적인 보상에 관심이 많은 듯하지만 실상은 그렇지도 않습니다. 구약의 축복관은 오히려 신앙 중심, 하나님 중심적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23:1)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입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고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시1:1-6) 예수님의 축복관도 마찬가집니다. 다만 예수님의 축복관은 구약에 비해서 더욱 내세적이고 영적입니다. 예수님은 천국에서의 보상을 아주 많이 언급하셨습니다. 주께서 다시 오실 때에, 천국에서, 아버지 집에서, 영생, 혹은 생명으로, 주시는 것이 주님의 축복입니다.

“팔복”이란 이름이 붙여진 것은 “복이 있나니”(μακαριος)란 구절이 여덟 번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우선 팔복의 내용부터 보겠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마5:3-10) 누가 복이 있습니까?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 오늘 이 말씀에 여러분은 해당사항이 있으십니까? 아, 나는 정말 복된 사람이구나! 여기 나타난 축복의 특징이 뭡니까? 눈에 보이는 것은 하나도 없어요. 전부가 내면적인 것들입니다. 외적 조건이 복이 아닙니다. 오직 내적 조건, 즉 영적 상태가 그 사람의 복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축복의 본질입니다. 축복의 본질은 육체적 조건이 아니라 영적 상태라는 점을 명심하십시오. 행복하다, 혹은 불행하다 하는 것은 조건에 대한 반응이 아닙니다. 마음의 상태입니다. 내 마음, 내 심령이 어떤 상태에 있는가 하는 것이 나의 모든 행복과 불행을 결정합니다. 이것은 대단이 중요한 사실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잘못된 祝福觀을 가지고 있어요. 로마의 카타콤베에 가면 초대 교회 교인들의 유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거의 300년 동안을 세상과 단절하고 지하 동굴에서 생활했습니다. 세상에서 잘 사는 법을 몰라서 그랬을까요? 그들이 바랐던 최고의 축복은 영혼 구원이었습니다. 현세든지 내세든지, 하나님과 함께 사는 삶이 최고의 축복이었습니다. 세상의 어떤 부귀영화보다도, 어떤 좋은 조건보다도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이 더 큰 축복이었습니다. 그냥 그렇게 理性的으로 생각만 한 게 아닙니다. 정말 행복을 느끼면서 살았어요. 그러니까 300년 동안 지하에서 살 수 있었지, 그냥 생각만으로 살 수 있었겠습니까?

이것은 오늘의 기독교인들에게 상당한 도전이 됩니다. 요즘 우리가 간증하라고 하면 모두가 육체적으로 잘 된 것만 얘기합니다. 육신의 병을 고친 것만 간증하고, 마음의 병을 고친 것은 간증거리가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갑자기 떼돈을 번 것만 간증하고, 돈이 없어도 얼마나 행복하게 사는지는 전혀 간증거리가 되지 못하고 있어요. 높아진 것만 간증하고 낮아진 것은 간증하지 않습니다. 유명해진 것만 간증하고 무명해도 행복한 것은 간증하지 않아요. 세상에서 잘난 것만 간증하고 못났어도 행복한 것은 간증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답지 못한 것입니다. 팔복에 참여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진정한 복을 받기 원하십니까? 진정한 복은 외적 조건이 아닙니다. 마음입니다. 영적 상태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영적 상태는 어떠십니까? 불행을 느끼십니까? 영적 상태가 틀려먹었기 때문입니다. 불행을 느낀다면 먼저 영적 상태를 고치세요. 팔복의 상태로 영혼을 뜯어 고치세요. 그러면 하늘이 무너져도, 산이 떠나가도 행복하실 겁니다. 할렐루야! 이 말씀을 전하니까 10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고 속이 후련합니다.

팔복에서 주어지는 보상들이 무엇입니까?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천국에서 시작해서 천국으로 끝납니다. 천국은 우리가 받은 축복의 전부입니다. 천국이야말로 최상의 축복입니다. 천국을 소유하는 것보다 더 큰 축복이 없습니다. 꼭 내세에 들어가는 것만 얘기한 것이 아닙니다. 천국은 주님을 모시는 순간 내 마음에서 먼저 이루어집니다. 천국이란 하나님이 임재하신 곳입니다. 천국이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을 소유하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최상, 최고의 복입니다. 천국 다음으로 나타난 보상들이 무엇입니까? 위로 받는 것, 땅을 기업으로 받는 것, 배부른 것, 긍휼히 여김을 받는 것, 하나님을 보는 것,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받는 것 등입니다. 그런데 이런 축복들도 자세히 보면 다 천국과 관련된 것들입니다. 거의가 현세적이거나 외적인 조건들은 아닙니다.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것은 주로 장차 들어갈 천국을 비유한 것입니다. 배부르다는 말도 육신의 배가 부르다는 말이 아니라, 마음의 만족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팔복의 보상들은 모두가 영적이고 내세적인 것들입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가 예수 믿음으로 받을 복은 모두가 천국 뿐입니다. 오늘 우리가 바라는 것들과는 상당히 거리가 멉니다. 오직 한 가지 하나님이 계신가 안 계신가에 따라서 모든 것이 결정됩니다. 더 극단적으로 얘기한다면 인간에게 유일하고 가장 중요한 복은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고 사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최고의 상급이요, 기업이요, 최고의 보상입니다.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15: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23:1)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합3:17-18)


팔복으로 전환하라

저는 팔복을 묵상하면서 이런 생각을 합니다. 요즘 “paradigm 의 변화”란 말을 많이 합니다. 패러다임이란 말은 미국의 과학사 학자이자 철학자인 Thomas Khun이 “과학혁명의 구조”(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 1962)란 책에서 제시한 개념입니다. '패러다임'은 '사례·예제·실례' 등을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언어학적인 개념입니다. 즉 으뜸꼴·표준꼴을 뜻하는데, 이는 하나의 기본 동사에서 활용(活用)에 따라 파생형이 생기는 것과 같은 어법 체계를 말합니다. 쿤은 패러다임을 한 시대를 지배하는 과학적 인식·이론·관습·사고·관념·가치관 등이 결합된 총체적인 틀 또는 개념의 집합체로 정의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교회에 출석하고 세례 받고 예배에 참석하는 것으로 다 되는 게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패러다임의 변화가 있어야 됩니다. 생활 방식, 가치관, 세계관, 인생관이 다 혁명적으로 뒤집어지고 바뀌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즉, 팔복이 그리스도인이 누릴 진정한 복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가치 체계로 인생을 바꿔야 됩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이 뭐라고 하든지 행복을 느끼고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바꿔 말하면 우리는 이미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현재에도 복을 받고 있습니다. 장차는 최상을 복을 받을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뭐가 잘못된 것입니까? 우리의 마음의 패러다임이 잘못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우상주의자들의 패러다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례 받고 매주 예배에 참석하는 데도 여전히 패러다임은 세상 철학입니다. 자본주의, 상업주의, 현세주의, 물질주의, 출세주의의 패러다임이 우리의 삶의 틀입니다. 겉은 예수 쟁이인데 삶은 세상 속담대로 살아갑니다. 수염이 석자라도 먹어야 양반이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다! 뭐니 뭐니 해도 money가 제일이다! 요즘 유일한 패러다임은 경제 아닙니까? 모든 것이 경제 중심으로 움직입니다. 배만 부르게 해 준다면 뭐든지 OK입니다. 그것이 바로 호세아의 부인이었던 고멜의 가치관입니다. 고멜은 어떤 불륜이든지 말든지 옷 주고 양식 주는 남자라면 무조건 환영했습니다. 그런 패러다임을 가지고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는 없습니다. 진정 복을 누리고 싶다면 삶의 패러다임을 바꾸시기 바랍니다.

성 프란시스의 부친은 아들이 프랑스 사람처럼 부유하게 잘 살기를 바랬습니다. 그래서 아들의 이름을 프란시스라고 지었습니다. 그러나 프란시스는 젊은 시절 허랑방탕한 생활을 했습니다. 철이 들 무렵, 27세 되던 해, 1209년 2월 24일 포티운쿨라라는 작은 교회에서 기도를 하다가 주님의 말씀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지 말며,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마) 그는 이 말씀대로 신발과 지갑과 지팡이를 모두 던져 버렸습니다. 부친의 유업을 물려받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입는 옷차림으로 평생 사랑을 실천하는 데 몸을 바쳤습니다. 프란시스의 부친은 아들의 이런 모습에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아들이 입고 있는 옷까지 다 벗어놓고 나가라고 했습니다. 프란시스는 속 옷 까지 다 벗어 놓고 맨 몸으로 나갔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인이면 그리스도인의 패러다임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겉모양만 예수쟁이이고 마음도 생각도, 생활도 예수 쟁이가 아니기 때문에 문제가 있습니다. 교회는 다니는데 행복하지 않습니다. 예수는 믿는데 모든 게 불안합니다. 진정한 예수쟁이가 되세요.

팔복을 배우는 분들이 아니라, 팔복으로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부터 시작하는 산상수훈이 그냥 철학이나 사상이 아니요, 여러분의 삶이 되기시 바랍니다. 그래서 정말 복이 있는 자요, 복을 느끼면서 복되게 사는 복된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자료: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