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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반젤(복음) 2020. 10. 3. 20:59

주기도문 강해

하늘에 닿는 기도

1. 머 리 말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신 그 주님께서 우리가 어떤 내용으로 기도하기를 바라실지는 자명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우리 마음대로 기도합니다. 아직 주기도문도 제대로 외지 못하는 초신자가 갖고 있는 기도 제목이나 주기도문을 줄줄 외는 기성 교인들이 갖고 있는 기도 제목이나 별 차이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친히 기도를 가르쳐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무도 기도를 배우고 있지 않다는 단적인 증거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자기들 나름대로의 기도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우리 기독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어느 종교에나 공통적으로 있는 종교 행위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라도 자기에게 있는 본성적인 종교심에 근거해서 얼마든지 기도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신봉하는 종교가 없어도 관계없습니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본래적인 욕구에 의해서 얼마든지 기도할 수 있는 우리들을 모아놓고 주님께서 특별히 기도를 가르쳐 주셨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기도가 우리의 자연스런 욕구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에 맞춰서 다듬어지기를 바라신다는 뜻입니다. 비록 우리는 땅에 속하여 살지라도 우리의 기도는 땅에 매어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연결되기를 바라십니다. "기도"라는 종교 행위를 동원해서 자기의 세속적인 욕망을 신령한 방법으로 이루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육신으로 이 세상에 계셨을 적에 친히 구하셨을 만한 것들을 우리 역시 구하여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기도문은 단지 암송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마땅히 간구해야 할 기도의 내용이고 지향하여야 할 푯대입니다.

그런데 교인들이 기도하는 것을 보면 다분히 인본적이고 무속적입니다. 형식으로서의 "열심"은 있는데 그 열심 안에 마땅히 들어 있어야 할 "내용"은 없습니다. "무엇을" 기도하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고 "어떻게" 기도하는지에만 신경을 곤두세웁니다. 새벽같이 일어나서 기도를 하기도 하고 밤을 새워서 기도하기도 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밥도 안 먹고 기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물론 기도는 간절해야 합니다. 새벽기도나 철야기도, 금식기도가 필요 없다는 얘기는 결코 아닙니다. 자기의 기도에 대해서 "이만하면 됐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지금보다 훨씬 더 열심히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밤을 낮 삼아 기도해야 하고 밥 먹을 겨를도 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한 가지 조심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누군가가 열왕기상 18장에 있는 내용을 얘기하면서,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간절히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불로써 응답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때까지 간절하게 기도하자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백 번 지당한 얘기 같지만 유감스럽게도 말도 안 되는 얘기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바알 선지자와 아세라 선지자는 간절하게 기도하지 않아서 응답을 받지 못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때 바알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 선지자 400명은 자기들의 몸에서 피가 흐르도록 기도했습니다. 적어도 "간절함"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그들도 결코 엘리야에 못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기도를 들을 대상이 없었습니다. 기도는 물론 간절해야 하지만 그에 앞서 "하나님"에게 초점이 있어야 합니다.

하다못해 부모가 자식에게 용돈을 주는 경우에도 "용돈을 구하는 태도"보다 "용돈의 용도"가 훨씬 더 중요합니다. 부모의 관심은 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그 돈을 받아가는 자식에게 있습니다. 하지만 철없는 아이들은 이것을 모릅니다. 그들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용돈을 받아내느냐" 하는 것에만 있습니다. 그래서 경우에 따라서는 거짓말을 하기도 하고 심통을 부리기도 합니다. 무슨 수를 쓰든지 간에 용돈을 받아내기만 하면 됩니다. 용돈으로 인하여 주머니가 두둑해지는 것만 알고 용돈을 매개로 하여 자기가 철이 들어야 하는 것은 모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식의 사고가 천국 백성이 된 다음에도 여전히 잔존하는 것입니다. 전부 다 "하늘 보좌를 움직이는 기도"를 하려고 합니다. 마치 기도를 사이에 놓고 하나님과 싸움을 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본래는 기도를 들어줄 마음이 없었는데 자기의 끈질긴 기도를 버티다 못하여 결국 두 손 들게 만드는 것이 잘하는 기도인 줄 압니다. 하나님과 자기가 같은 편이라는 의식을 도무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각설하고 주님께서 친히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가 자의적으로 하는 기도는 주님 보시기에 함량 미달이라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기준으로 우리의 기도를 고쳐야 합니다. 우리 마음의 소원을 바꾸어야 하고 무엇보다도 그런 기도를 드릴 만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이러니칼하게도 우리와 우리 입에서 나오는 주기도문이 따로 놉니다. 기도는 우리에게서 분리된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녹아나오는 것이라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못합니다.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주기도문은 자기의 생각을 언어로 표현한 것이 아니라 단지 숙지하고 있는 내용을 입으로 웅얼거리는 것에 불과합니다.

"안녕하세요"라고 말하는 앵무새를 가리켜서 "인사성이 밝다"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앵무새가 인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기가 훈련받은 대로 소리를 내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는 주기도문이 바로 그렇더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에 실린 내용은 지난 98. 8. 12 - 8. 15에 있었던 청년회 수련회 때 강해했던 내용들입니다. 무엇보다도 주기도문을 그저 암송만 하는 것이 아니라 주기도문으로 기도를 하게 하고 싶었습니다. 모름지기 주기도문으로 하여금 진정 주기도문이 되게 하고 싶었습니다. 외고 있는 구구단으로 시험만 보고 마는 것이 아니라 슈퍼에서 물건을 살 때도 쓰는 것처럼 외고 있는 주기도문으로 예배 시간에 암송만 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기도를 하게 하고 싶었습니다.

물론 제가 이해하고 있는 내용이 주기도문의 모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이해하고 있는 부분은 굳이 %로 표현할 수도 없을 정도로 미미한 분량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일년 반 전에 설교했던 내용을 정리하다 보니 그 사이에 군데군데 아쉬운 부분이 보이더라는 사실입니다. 굳이 욕심을 부린다면 성경에 대한 저의 이해가 더욱 깊어져서 수 년 내에 주기도문을 다시 한 번 더 강해해 보고 싶습니다.

끝으로 이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어떤 모양으로든지 유익한 자극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두 손을 모읍니다.

 

2. 주기도문

 

 

 

여러분들은 이제 예수를 믿은 지 얼마나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기도하면서 한 번도 울어 보지 않은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교회에 등록한 지 이제야 겨우 일주일 지난 사람은 물론 그런 경험이 없겠습니다만 어느 정도 교회에 다닌 연륜이 있는 사람이라면 현재 그 사람의 신앙 수준에 관계없이 간절한 마음으로 울면서 기도를 했던 경험이 누구에게나 다 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찬송을 부르면서 울어 보지 않은 사람도 아마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혹시 주기도문을 외면서 울어 본 적이 있습니까? 기도하면서 울어 본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는 흔한 경험입니다. 자기의 설움이 복받쳤을 수도 있고 자신의 죄가 안타까웠을 수도 있고 아니면 자기의 부족한 모습이 주님께 너무 죄송스럽거나 주님께서 자기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이 감격스러워서 울 수 있습니다. 찬송가를 부르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하는 평범한 기도가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친히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으로 기도하면서 울어 본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주기도문은 분명히 기도 중의 기도입니다. 인간의 지혜에서 나온 미사여구의 나열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아무런 감동도 주지 못합니다. 더 정확히 말씀드리면 우리가 거기서 아무런 감동도 받기를 거부합니다. 왜냐하면 너무 일상적으로 반복되어서 그렇습니다. 너무 자주 반복되다보니까 그 중요성이 퇴색한 것입니다.

제가 어렸을 적에는 짜장면을 언제 먹었는지 그 날짜를 기억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 먹은 짜장면은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먹은 날은 달력에 표시를 할 만큼 특별한 날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른이 된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짜장면이 그다지 별미도 아닐 뿐더러 그런 것을 기억할 만큼 한가하지도 않습니다.

주기도문이 바로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친히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이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목사님이 안 계셔서 축도를 할 사람이 없을 때 축도 순서를 대신하는 정도로밖에 자리 매김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사람인 목사가 하는 축도보다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주기도문이 오히려 격이 낮다는 착각이 들 만한 일을 교회가 범하고 있습니다.

실현 가능성은 전혀 없는 얘기입니다만 주기도문을 매 예배 때마다 외게 하지 말고 분기에 한 번씩만 욀 수 있도록 규제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아주 특별한 날에만 주기도문을 욀 수 있게 해서 주기도문이 어느 만큼 귀한 기도인지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 "다음 주일은 주기도문을 욀 수 있는 주일이다" 하고 주기도문을 외기 전에 금식기도를 하든지 작정 기도를 하든지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다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한 마디 하고는 눈물이 왈칵 쏟아져서 더 이상 기도를 이을 수 없을 정도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예전부터 했었습니다.

기회만 주어진다면 주기도문의 중요성만큼은 꼭 목청껏 외쳐 보고 싶은데, 그 주기도문은 마태복음 6:9-13에 있습니다.

 

 

 

 

3.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우리는 주기도문을 욀 때 무작정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하고 줄줄 욉니다만, 그 앞에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는 말이 먼저 있습니다.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시면서 주님은 먼저 우리에게 "이렇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걸 외고 예배를 마쳐라"거나 "이런 주문을 외라"가 아닙니다. 주기도문은 분명한 기도입니다.

여러분은 마음속에 어떤 기도 제목을 갖고 있습니까? 일단 수험생 같으면 대학 입학을 위해서 기도할 것입니다. 어머니가 병상에 오래 누워 계신 경우라면 어머니의 건강을 위해서 기도할 것입니다. 선교사로 나갈 비전을 품고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사역을 위해서 기도할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언제나 자기 마음의 소원을 놓고 기도합니다.

주기도문이 바로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는 말을 다른 말로 바꾸면 "그러므로 너희는 이러저러한 마음의 소원을 가져라"는 뜻이 됩니다.

어떤 수험생이 대학 합격을 놓고 기도한다고 가정하십시다. 그 수험생은 자기가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 소원입니다. 그러면 그 수험생은 그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안하고 오로지 기도만 하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 수험생의 하루 일과도 그 수험생의 절실한 기도 제목과 일맥 상통할 것입니다. 일단 만사 제치고 열심히 공부를 할 것입니다. 어쩌다가 게으름을 피웠다고 해도, "내가 이러면 안 되는데......" 하는 자책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니까 주기도문을 시작하면서 "이렇게 기도하라"는 얘기는 일단 "이런 마음의 소원을 가져라"는 뜻이고, 또 그 얘기는 "이렇게 살려고 노력하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얘기는 "나를 본받아라"는 얘기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께서 주기도문의 삶을 사셨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기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모릅니다. 철이 없을 적에는 바지통과 바지 길이를 어떻게 하고 또 머리 염색은 어떻게 할 것인지가 아주 심각한 문제가 됩니다. 외출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 여부가 거기서 결정됩니다. 하지만 부모의 관심은 그렇지 않습니다. 애가 고2가 되고, 고3이 되면 그런 잡다한 문제에는 신경을 끊고 오로지 공부에만 신경 쓰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 둘 중에 어느 쪽이 더 나은 관심인지 우리는 다 압니다.

기도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소원해야 할지를 우리가 모릅니다. 어떤 것을 소원하는 것이 우리에게 가장 복된 것인지를 우리가 모르니까 주님께서 그것을 우리에게 직접 가르쳐 주셨는데, 그것이 주기도문입니다.

각설하고 처음에 "이렇게 기도하라"는 말로 주기도문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말의 의미에는 아무런 손상도 가지 않게 하면서 본래의 의미를 더 구체적으로 나타내려면 이 말 앞에 어떤 말을 덧붙일 수 있겠습니까?

예를 들어 어떤 사람에게 볼링을 가르치면서 "이렇게 해봐"라고 얘기했다면, 그 앞에 어떤 말이 있었겠습니까? "이렇게 해봐"라는 말 앞에는 "그렇게 하지 말고......"가 가장 잘 어울립니다. "그렇게 하지 말고 이렇게 해봐"를 줄인 말이 "이렇게 해봐"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는 말도 그 앞에 "그렇게 기도하지 말고"라는 말을 넣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결국 이 말씀은 "너희는 그렇게 기도하지 말고 이렇게 기도하라"는 뜻이 되는데, 이러한 주장에 논리적인 모순이 없으려면 "어떻게 기도하면 안 되는지"에 대한 설명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마6:5-8)

어떻게 기도하면 안 되느냐 하면, 우선 외식하면 안 되고 그 다음에 중언부언하면 안 됩니다. 결국 "이렇게 기도하라"는 얘기는 "외식하는 기도나 중언부언하는 기도를 하지 말고 이렇게 기도하라"는 얘기입니다. 외식하거나 중언부언하는 것이 예수를 제대로 만나지 못한 사람들이 범하는 대표적인 실수입니다.

본문에 따르면 일단 외식하는 기도는 바리새인들이 즐겨한다고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이런 실수를 했다는 사실을 지금 우리에게로 옮기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신자는 신자인 것 같은데 뭔가 잘못된 사람들이 이런 기도를 한다는 얘기입니다. 또 중언부언하는 기도는 이방인들의 기도라고 했습니다.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기도라는 뜻입니다.

외식하는 기도의 단적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기도할 때 떨린다는 사람이 있는데, 그 경우가 바로 그렇습니다. 기도를 하는데 대체 왜 떨리겠습니까?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라면 떨릴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관심이 하나님이 아닌 사람에게 있으니까 떨린다는 얘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자기가 얼마나 유창하게 기도하는 사람인지를 자기 기도를 듣는 모든 교인들에게 증명해 보이고 싶으니까 그렇습니다. 자기의 기도 문맥이 어느 만큼 매끄러운지를 교인들이 채점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으니 당연히 떨릴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예배 때 기도 순서를 맡은 사람이 지나치게 길게 기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잘못된 기도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물론 혼자서 기도할 때는 길게 해도 상관없습니다. 한 시간이건 두 시간이건 얼마든지 좋습니다. 하지만 예배 때의 대표기도는 말 그대로 예배기도입니다. 예배를 위한 기도여야 합니다. 일률적인 기준은 없지만 대략 3분을 초과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예배 때의 기도가 5분을 넘어가면 사람들이 같은 마음으로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지루함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누군가가 지루하게 생각한다는 얘기는 비록 자기는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있을는지 몰라도 이미 예배를 방해하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더 말씀드리면 식기도를 길게 하는 사람은 정말 꼴불견입니다. 밥 한 그릇 앞에 놓고 "높고 높은 보좌 위에 앉으시사 낮고 천한 우리 인간을 보살펴 주시는 창조주 아버지 하나님"은 대체 왜 찾습니까? 그냥 "감사히 먹겠습니다" 하고 국 식기 전에 먹으면 됩니다. 그런데 왜 그런 거창한 기도가 나오느냐 하면 평소에 기도를 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평소에는 전혀 기도를 하지 않다가 모처럼 기도를 시키니까 자기가 아는 모든 기도 용어가 한꺼번에 총동원되어서 그렇습니다.

죄송스런 말씀입니다만 실제로 교인들이 기도하는 것을 들으면 참 기도들을 못하십니다. 문장이 매끄럽지 않다거나 신령스런 이미지를 풍기는 용어가 적게 나오거나 말을 더듬어서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무슨 기도를 해야 하는지를 아예 모르고 있어서 그렇습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드리는 예배에 기도 순서가 몇 차례나 들어갑니까? 우선 처음에 하는 예배기원기도가 있습니다. 그 다음에 예배 중에 하는 대표기도가 있고, 설교기도와 헌금기도가 있습니다.

맨 처음에 하는 기도는 말 그대로 기원기도입니다. "하나님, 저희들이 이제 예배를 드립니다. 이 예배를 받아 주십시오" 하는 것이 기원기도의 내용입니다. 특별히 길어야 할 이유가 없을 뿐더러 길면 오히려 공해입니다. 기원기도를 하면서 죄를 회개하고 설교에 은혜 받게 해달라고 간구하고, 설교자를 위한 기도를 하고, 미참한 발걸음을 재촉하는 기도를 하면 대표기도를 할 내용이 없어지게 됩니다. 예배를 위한 기도 순서가 뒤에 있으니까 기원기도에서는 단지 하나님께 예배를 받아주십사 하고 아뢰는 기도를 하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헌금기도도 그렇습니다. 말 그대로 헌금기도입니다. 봉헌된 물질을 하나님께서 친히 흠향하여 주십사는 기도를 드리고 또 우리가 물질만 드리는 것이 아니라 삶을 같이 드릴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면 됩니다.

그런데 교인들이 하는 기도를 보면 예배 시작할 때의 기원기도나 예배기도나 헌금기도가 전혀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식사기도까지도 기도의 패턴이 언제나 일정합니다. 자기가 하는 기도 용어가 언제나 고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쩌다 첫돌감사예배나 장례예배 때 기도를 하라 그러면 평생을 교회에서 보내신 장로님들도 쩔쩔매곤 합니다.

본문에서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를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기도를 가르쳐 주신다는 얘기는 결국 기도는 배우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앞에서 제가 열거한 오류들이 나타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기도를 배운 적이 없습니다. 어떻게 기도를 해야 잘하는 기도인지에 대해서 궁금하게 여겨본 적도 없습니다. 순전히 들은 풍월로 기도를 하다 보니까 자기만의 기도 레파토리가 따로 고정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고정된 기도 내용을 매끄럽게 줄줄 외면 그것이 잘하는 기도인 줄로 착각합니다.

또 중언부언하는 기도는 불신자들이 범하는 오류입니다. "기도"라는 용어를 쓰기는 했지만 우리가 하는 기도와는 구분되어야 합니다. 중언부언이라고 하면 말에 조리가 없이 같은 말을 계속 반복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런 뜻이 아닙니다. 대표적인 모습이 "비나이다 비나이다"입니다. 큰 바위나 고목에서 정한수를 떠놓고 치성을 드리는 것이 중언부언의 단적인 예입니다. 기도를 듣는 대상이 꼭 하나님이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지극한 정성으로 누군가를 감복시키면 됩니다. 산신령이든 용왕이든 아무라도 좋으니까 자신의 지극한 정성에 동천지감귀신(動天地感鬼神)하여 떡두꺼비같은 아들 하나만 점지해 달라는 것이 중언부언하는 기도입니다.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이것은 기도의 형태는 취했을는지 몰라도 기도가 아닙니다.

그런데 이와 유사한 착각을 교회에서도 합니다. 우리가 열심히 기도를 하면 하나님께서 원래는 그런 기도를 들어줄 마음이 없었지만 우리의 지극한 정성에 감복해서 하나님도 결국 마음을 바꾸는 것으로 오해를 합니다. 그래서 기도의 내용에는 전혀 신경을 안 쓰고 그저 어느 만큼 간절하게 기도했는지만 따집니다. 걸핏하면 밥 안 먹고 잠을 안 자면서 하나님께 떼를 써서 하나님을 설득하려고 합니다.

혹시 하나님과 우리의 아이큐가 비슷하다면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만 우리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일단 우리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입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들어줄까 말까를 고민해서 결정한다는 것도 우습고, 이랬다저랬다 변덕을 부린다는 것도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기도를 한다는 얘기는 하나님의 마음에 동참한다는 얘기입니다. 하나님을 설득하거나 떼를 써서 하나님의 마음을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깡패 두목이나 해결사를 찾아가서 부탁하는 내용과 관공서에서 정상적으로 제기하는 민원의 내용은 서로 다를 것이 자명합니다. 우리의 기도도 그래야 합니다. 돌이나 나무, 산신령에게 치성을 드리던 내용을 그대로 들고 와서 아뢰는 대상만 하나님으로 바꾸는 것이 기도일 수 없습니다.

물론 우리의 일상사가 전부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음을 고백하는 의미로 그런 기도가 나올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이나 섭리와는 전혀 상관없이 무조건 자기의 욕심을 이루는 것에만 관심이 있는 것은 곤란합니다. 기도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라면 그 내용도 당연히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것이어야 합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한테 기도하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에게는 기도할 자격이 있습니다. 또 "이렇게 기도하라"는 말 속에는 "내가 응답하겠다"는 약속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응답도 준비하지 않고서 무작정 기도부터 하라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흔히 우리 주변에서도 그런 얘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야, 나한테 말만 해"라고 하면 이 얘기가 무슨 뜻입니까? 말만 하면 언제든지 들어주겠다는 자기의 의사 표현입니다. 결국 "이렇게 기도하라"는 얘기도 그렇습니다. 이렇게 기도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들어주실 의향이 있으십니다. 그래서 그 의향에 우리 뜻을 맞추게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기도를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기도를 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에게는 충분히 복된 것입니다. 피조물인 우리가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감히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복된 것입니다. 이 내용은 뒤에 다시 나오니까 그때 가서 설명드리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주기도문을 그 당시 모든 사람에게 가르쳐 주신 것이 아닙니다. 오병이어 기적을 행하실 적에 스무 살 넘은 남자만도 오천 명이 있었으니까 여자와 아이들을 합하면 대략 이만 명은 되었을 텐데, 그렇게 많은 인파를 모아 놓고 이 기도를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만 가르쳐 주셨습니다. 결국 이 기도는 예수님께 헌신된 사람들만 드릴 자격이 있습니다. 아무나 드릴 수 있는 기도가 아닙니다.

어차피 우리 주님도 모든 사람이 이런 기도를 할 것을 기대하지 않으십니다. 오직 우리에게만 해당되는 얘기입니다. 오직 우리에게만 해당된다는 얘기는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하든지 간에 거기에 대해서는 신경 쓸 일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우리만 잘하면 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한 구절 한 구절 살펴보면 우리 예수님의 생애가 그대로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또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하여 기꺼이 십자가를 지셨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사시다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기 위하여 기꺼이 죽으셨습니다. 친히 그 몸으로 직접 우리의 생명 양식이 되셨고,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시려 그 몸을 기꺼이 화목제물로 드리시고, 십자가의 죽음으로 모든 시험을 이기시고 악을 물리치셨습니다.

그러니까 주기도문으로 기도를 드리려면 이런 예수님의 생애와 삶을 흉내내고자 하는 마음의 결단과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우선 주기도문은 하나님에 대한 부분과 우리에게 대한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까지가 하나님에 대한 부분이고,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가 우리에게 대한 부분입니다.

이러한 순서에서 알 수 있듯이 기도의 우선 순위는 우리의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우리의 관심도 언제나 이 순서를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 일단 하나님이 우선입니다. 기도라는 형식을 통하여 하나님께 무엇을 구하기 이전에 먼저 자기가 하나님의 면전에 있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제아무리 다급한 소원이 있다고 해도 이것보다 급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처지, 필요, 영혼 구원을 위한 관심사나 혹은 주님 보시기에 합당한, 주님의 일을 이루기 위한 마음의 소원이 있다고 해도 그것이 기도에 있어서의 1순위는 아닙니다.

영어로 보면 그 뜻이 더 잘 나타납니다. 주기도문을 영어로 보면, Our Father which art in heaven, Hallowed be Thy name, Thy kingdom come, Thy will be done in earth......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자주 반복되는 Thy는 2인칭 소유격을 나타내는 your의 옛말로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결국 이 내용이 전부 다 하나님에 대한 기도임을 알 수 있습니다.

* Hallowed be Thy name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겨져야 합니다.

* Thy kingdom come 당신의 나라가 임하여야 합니다.

* Thy will be done in earth 당신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처럼 주된 관심사가 언제나 하나님입니다. 또 세심하게 보면 모든 표현이 수동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수동태라는 얘기는 뒤에 by 이하가 생략되었다는 뜻이고, 생략된 by 이하 즉 ours(우리)에 의해서 이 모든 일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이처럼 주기도문에는 우리가 참여하고 감당하여야 할 책임과 역할이 도도하게 흐르고 있습니다.

이런 흐름으로 하나님에 대한 내용이 나온 다음에 우리들의 문제로 일용할 양식과 사죄의 간청 그리고 시험 극복이 등장합니다.

여기서 일용할 양식은 현재적인 문제입니다. 죄의 용서를 구하는 것은 과거의 문제이고, 시험에 들지 않게 해달라는 간구는 미래에 속한 문제입니다. 결국 이렇게 보면 주기도문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전부 다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고백하며 아울러 자기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는 기도입니다.

또 주기도문은 "아버지"로 시작해서 "아버지"로 끝나는 기도입니다. 처음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시작해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라는 말로 끝났습니다.

또 하나의 특징은 "우리"라는 단어가 상당히 자주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주기도문에서 가장 많이 반복되는 단어가 "우리"입니다.

종합해 보면 주기도문은 나의 필요보다 하나님이 우선이고, 아버지로 시작해서 아버지로 끝나고, 나 개인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우리 공통을 위한 기도라는 것으로 개략적인 윤곽을 잡을 수 있습니다

 

 

4.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피조물에 불과한 우리가 감히 온 우주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에게는 모든 것이 충분하다는 말씀을 앞에서 잠깐 언급했습니다.

어거스틴이 한 얘기 중에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마음대로 하라"는 얘기가 있습니다. 하나님만 사랑하면 나머지는 전부 다 멋대로 해도 된다는 얘기가 아니라 무슨 일을 할 때마다 "이것이 과연 하나님을 사랑하는 원칙에 기인하는가?" 하는 질문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모든 면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 것은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주어진 책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은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에 대한 자연스런 반응입니다.

만화에 보면 집에서 기르는 개가 자기 주인을 부를 때 "형님"이나 "누님" "아저씨"라고 부르지 않고 언제나 "주인님"이라고 부릅니다. 아무리 개를 아끼는 사람이라고 해도 사람과 개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간격이 있습니다. 물론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도 넘을 수 없는 격차가 있습니다만 그것은 우리 나라 문화에서만 그렇습니다. 히브리 문화에서의 아버지와 아들은 동질성을 나타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미워한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해서 스스로 하나님과 자기를 동일 선상에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감히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애완견을 기르는 집에서는 주인 여자를 "개의 엄마"라고 칭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전화를 받는 주인 남자에게 개가 꼬리를 치면서 달려들면 개를 멀리하느라고 "엄마에게 가 있어" 하면, 개는 그 말을 알아듣고 여자에게로 갑니다. 여자가 엄마면 남자는 아빠가 될 것입니다. 자기들 스스로 개 아비가 되고 개 어미가 된 것입니다. 개를 사랑하는 집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입니다. 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꺼이 개의 자리까지 낮아진 것입니다. 그리고 남들이 자기를 개 아빠, 개 엄마로 부르는 사실에 대해서 전혀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개 아비가 아니라 개자식이라고 부르면 그때는 화를 냅니다. 개 아비나 개자식이나 따지고 보면 개와 동류입니다만 거기에 담겨 있는 뜻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스스로 자기를 개 아비라고 부르는 것은 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개와 동류가 된 것이지만, 누군가가 자기에게 개자식이라고 부르는 것은 일방적으로 자기를 모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버지"라는 호칭을 허락한 것이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들, 딸로 받아들이십니다. 하나님 입장에서는 엄청나게 낮아지신 것입니다만 하나님께서는 기쁨으로 그 호칭을 즐기십니다. 이 사실은 개를 키우는 집에서 그 집 주인 아저씨는 개 아빠가 되고, 주인 아주머니는 개 엄마가 되는 것 정도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우리와 개는 같은 피조물이지만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창조주와 피조물이라는 뚜렷한 격차가 있기 때문입니다.

공장에 고용된 종업원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애초에 계약된 임금밖에 받을 것이 없습니다. 세 끼 밥 먹여 주고 재워 주면 그것도 감지덕지할 일입니다. 몸이 아파도 마음대로 게으름을 부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집 아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매일 사고나 치면서 돌아다녀도 나중에 부모의 유산을 상속받습니다. 무슨 일을 어떻게 했느냐가 아니라 신분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자식은 종업원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고귀한 신분을 타고난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만큼 고귀한 신분으로 인정해 주시면서 우리 입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기를 원하십니다.

어린애가 있는 집은 다 그렇습니다. 겨우 옹알이를 하는 애를 붙잡고 "아빠 해봐, 아빠- 아빠-" 하고 계속 말을 시키다가 아이의 입에서 "아부부부" 하고 아빠 비슷한 발음만 나오면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습니다. 출근한 남편에게 전화를 걸기도 하고 친정에 전화해서 자랑을 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부모의 심정입니다. 자기 애의 입에서 "아빠"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우리 하나님도 우리 입에서 "아버지" 소리가 나오기를 기다리십니다. 갓 첫돌이 지난 어린애 붙잡고 "아빠" 소리가 나오기를 바라는 젊은 부부의 심정 정도가 아니라 훨씬 더 간절한 목마름으로 우리 입술에서 하나님을 향한 "아버지"의 호칭이 나오기를 바라십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을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굳이 수식어를 붙이면 "여호와 하나님"이나 "창조주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 그런데 주기도문에는 "하나님"이라는 호칭이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나올 만한 자리에 전부 다 "아버지"가 나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아버지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주기도문은 하나님을 부르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 짧은 한마디는 적어도 우리에게 세 가지 사실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일단 하나님은 아버지입니다. 또 아버지는 아버지인데 하늘에 계신 아버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입니다. 나 한 사람만의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아버지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하늘은 장소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만일 장소적인 개념으로 제한하면 하나님은 하늘에만 계시고 땅이나 바다에는 계시지 않은 분이 되는데 그럴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하늘에만 계신 분이 아니라 무소부재하신 분입니다. 결국 여기서 말하는 "하늘"은 장소가 아니라 능력이나 영광, 권위, 위엄을 땅과 대조하여 표현하는 단어입니다.

땅의 아버지도 물론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지만 사랑의 규모가 다릅니다. 땅의 아버지는 온전하지 못하지만 하늘 아버지는 온전하십니다. 하물며 능력은 아예 비교할 바가 아닙니다. 영원성에서 차이가 납니다.

사랑만 있고 능력이 없는 것은 참 골치 아픕니다. 배가 고플 때 같이 굶는 것이 사랑의 표현입니다. 반대로 능력은 있는데 사랑이 없는 것도 문제입니다. 배고프다고 칭얼거렸다가는 따귀를 얻어맞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어느 한 쪽만 있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를 위해 아들을 주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 그 아들을 다시 살리실 만큼 능력도 있으십니다.

제 딸이 네 살 때 일입니다. 엄마 신발을 신고 계단에서 놀다가 넘어져서 머리가 깨졌습니다. 머리에서는 피가 흐르고 애는 아프다고 우는데 저는 고작해야 애를 들쳐 안고 뛰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더 있다면 병원까지의 택시비를 낸 것이 전부입니다. 아프다고 우는 애를 안고 있는 아빠의 마음은 찢어질 듯 아팠습니다만 아무런 대책이 없었습니다. 대신 아파줄 수도 없고, 아픔이 사라지게 할 수도 없었습니다. 극명하게 나타나는 땅의 아버지의 한계입니다.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떡과 물 한 가죽 부대를 취하여 하갈의 어깨에 메워 주고 그 자식을 이끌고 가게 하매 하갈이 나가서 브엘세바 들에서 방황하더니......(창21:14)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스마엘을 내보내는 장면입니다. 아들을 광야로 내보내는 아브라함의 가슴은 무척이나 아팠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딴에는 아들을 챙겨준답시고 챙겨 주었는데, 떡과 물 한 가죽 부대가 고작이었습니다. 이것이 육신의 아버지가 해줄 수 있는 전부입니다.

가죽 부대의 물이 다한지라 그 자식을 떨기나무 아래 두며 가로되 자식의 죽는 것을 참아 보지 못하겠다 하고 살 한 바탕쯤 가서 마주 앉아 바라보며 방성대곡하니......(창21:15-16)

이번에는 하갈의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은 아버지랍시고 해준 것이 떡과 물 한 가죽 부대뿐이었는데 어머니 하갈은 광야에서 죽게 된 상황에 처한 아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고작해야 마주 앉아서 우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하나님이 그 아이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하갈을 불러 가라사대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시니라(창21:17-18)

이것이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이스마엘은 언약의 후손이 아닙니다. 그러니 이스마엘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아버지가 아니라 단지 하나님입니다. 그런데도 육신의 아버지인 아브라함이나 육신의 어머니인 하갈이 해준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해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이나 하갈의 재주로는 열 번을 죽었다 깨도 그 아들을 통하여 큰 민족을 이루는 일은 흉내도 내지 못합니다. 땅의 부모와 우리 하늘 아버지 사이에는 영원함과 온전함, 권세와 능력에 있어서 이런 엄청난 격차가 있습니다.

그 다음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에서, "우리"라는 말이 나옵니다. 우리 나라 말로는 이런 부분에 대한 설명이 애매합니다. 가령 "이 분이 제 아버지입니다"를 영어로 하면 "This is my father"입니다. 그런데 "This is my father"를 다시 우리말로 옮기면 "이 사람이 우리 아버지입니다"가 됩니다. 공동체 의식이 강한 민족 성향에 기인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만 어쨌든 우리말에는 1인칭 복수의 형태를 갖는 표현이 많습니다. 우리 아버지, 우리 어머니, 우리 집, 우리 애인...... 전부 다 그렇습니다. 영어로 하면 our가 아니라 my인데 우리말로는 전부 다 "우리"입니다.

그런데 주기도문에서 말하는 "우리 아버지"는 정말로 "우리 아버지"입니다. 일상적인 표현으로 말하는 "우리 아버지"가 아니라 말 그대로 our Father입니다. 하나님은 공유적인 하나님입니다. 나한테만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아버지입니다. 하나님이 공유적인 분이라는 얘기는, 일단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비이기적이어야 한다는 말과 연결됩니다. 여러 명이 모여서 식사를 하는데 전부 다 속으로 "하나님, 제가 제일 많이 먹게 해주세요" 하고 기도하면 하나님으로서도 참 난처한 일입니다.

어떤 애가 자기 방에서 열심히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어머니가 흐뭇한 마음으로 아이의 기도를 엿들었는데, 기도 내용이 좀 엉뚱했습니다. "하나님, 미국의 수도가 뉴욕이 되게 해주세요. 하나님, 미국의 수도가 뉴욕이 되게 해주세요." 하고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한 어머니가 그 이유를 물었더니 대답이 가관이었습니다. 학교에서 시험을 봤는데 자기가 미국의 수도를 뉴욕이라고 썼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스갯소리입니다만 이런 경우가 같은 맥락입니다. 열심히 기도해서 객관적인 진리를 자기 욕심으로 덮어버리는 것은 기도의 형식은 빌렸을는지 몰라도 본질을 벗어난 기도입니다. 완곡하게 표현하여 기도라고 했지만 더 냉정하게 말씀드리면 이미 기도가 아닙니다.

기도는 절대 이기적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자기한테만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18:19-20)

전에 사역하던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떤 분에게서 기도 부탁을 받았습니다. 고3 수험생인 딸의 대학 진학을 위해서 기도해 달라면서 집에서도 마태복음 18:19-20의 말씀을 붙잡고 열심히 기도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기도하면 뭐든지 들어주신다고 했으니까 딸과 함께 둘이서 합심하여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는 것이 그분의 말씀이었습니다.

이 경우가 바로 그렇습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겠다"고 하셨는데, 왜 굳이 두세 사람이 같이 모여야 합니까? 원래 하나님은 우리가 어디에 가든지 항상 같이 계신 분입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굳이 우리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두세 사람이 같이 모일 것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 같이 모이려면 일단 뜻이 같아야 합니다. 어느 한 쪽이 이기적인 생각을 가지면 안 됩니다. 여러 명이 모여서 식기도를 하는데 "하나님, 제가 제일 많이 먹게 해주세요" 하는 기도로는 같이 합심할 수 없는 것처럼 두 사람이 합심할 수 있는 내용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바로 거기에 아버지의 뜻이 있습니다.

또 주기도문을 잘 보면 "우리"라는 말이 주격으로는 거의 쓰이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할 때만 주격으로 나오고 나머지는 전부 다 소유격이나 목적격으로 나옵니다. 주기도문은 우리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무엇인가를 하기 위한 기도가 아니라 우리에게서 무엇인가가 이루어지기를 간구하는 기도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힘을 내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드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한테서 내부적으로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가 변화되어야 하고 우리가 바뀌어야 합니다.

구원은 하나님과 1:1의 관계에서 얻습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개별적인 문제입니다. 자기가 어떤 단체에 속해 있다는 이유 때문에 덩달아 구원을 얻는 법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구원 얻은 다음의 신앙생활은 교회라는 이름으로 모여서 단체로 합니다.

단체로 모여서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불편한 점이 많습니다. 자신의 신앙에 도움이 되는 사람은 몇 없고 순전히 방해가 되는 사람만 꽉 차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도 저 사람만 없으면 교회 다니는 것이 훨씬 더 재미있겠다 싶은 사람이 한둘이 아닙니다.

실제로 그런 불평을 여러 번 들었습니다. 교회에만 오면 짜증나게 하는 사람들 때문에 신앙생활을 제대로 못하겠다고 하면서, 차라리 분위기 좋은 교회로 옮기면 마음 상할 일도 없고 훨씬 편안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얘기를 한두 번 들은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 얘기는 옳은 얘기가 아닙니다. 분위기 좋은 곳에서 평온한 마음을 유지하는 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아무도 자기를 건드리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 혼자 거룩한 표정으로 찬송하고 오는 것이 신앙생활이 아니라 짜증날 수밖에 없는 환경에 있으면서 그것을 어느 만큼 감수하느냐 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하다 못 해 연애를 해도 늘 즐겁고 행복한 것이 아니라 때로는 삐치기도 하고 다투기도 하는 법입니다. 때로는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자존심 싸움도 하면서 그 모든 과정을 통과해야 비로소 사랑이 결실되는 법인데 신앙생활을 한다는 이유로 언제나 그윽한 분위기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섣부른 단견입니다. 그것은 신앙생활이 아니라 신앙생활이라는 이름을 빌린 종교적인 연출입니다.

공부를 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정상적인 학력을 지닌 중학생이라면 구구단을 외는 것은 더 이상 공부가 아닙니다. 구구단을 한 군데도 안 틀리고 자신 있게 외웠다고 해서 따로 실력이 늘지도 않습니다. 적어도 중학생이면 골치가 아플 때 아프더라도 머리 싸매고 일차함수나 이차함수를 공부해야 자기 실력에 보탬이 됩니다. 영어 공부를 해도 그렇습니다. "I am a boy" "You are a girl"을 백날 해도 그것으로는 실력이 늘지 않습니다. 보다 어려운 것을 공부해야 합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지고 볶고 자기 몸으로 직접 부대끼면서 그 속에서 인내를 배우고 온유와 겸손을 배워야 합니다. 아무도 없는 산에 가서 혼자 거룩한 마음을 유지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명상한 거룩을 산 아래로 갖고 와서 실제 생활 가운데서 그것이 나타나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생활을 꼭 모여서 합니다. 모이지 않으면 신앙생활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협동심 같은 것은 혼자 있으면 훈련이 안 되는 덕목입니다. 겸손, 온유, 절제......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겸손해야 할 환경, 인내해야 할 환경, 절제해야 할 환경에 먼저 노출되어 있어야 합니다. 아무런 자극도 없는 곳에서 자기 혼자 마음 편한 것이 신앙일 수 없습니다. 먼저 자기에게 그 어떤 자극이 있어야 하고, 그런 자극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정당하게 반응함으로써 신앙이 자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하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마치 아버지 같은 친근함을 기초로 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섬기는 신에 대한 친근함은 우리 기독교인에게만 있는 특성입니다.

하나님 없이 사는 이방인들도 자기들 나름대로의 신을 섬기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있어서의 신은 친근한 이미지를 풍기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공포의 대상입니다.

사람이 만든 신화 중에 제일 잘된 것이 그리스 신화입니다. 거기에 보면 본래 인간에게는 불이 없었는데 그것을 불쌍히 여긴 프로메테우스가 제우스 몰래 인간들한테 불을 갖다 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우스가 그 사실을 알고는 진노해서 프로메테우스를 큰 바위에다가 묶어 놓고, 매일 독수리가 와서 프로메테우스의 간을 쪼아먹게 했습니다. 간을 다 쪼아먹으면 그 다음날 새로운 간이 생기고, 그럼 독수리가 와서 또 쪼아먹고, 다음날 다시 간이 생기고...... 결국 프로메테우스는 날마다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 먹히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는 얘기가 그리스 신화에 있습니다.

이런 신화를 만들게 된 사람들의 심리적인 배경이 무엇이겠습니까? 사람들이 생각하는 신은 본래 인간들에게 우호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에게 불이 생기는 것을 싫어해서 불을 준 신을 더 센 신이 처벌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이 절대자에 대해서 갖고 있는 선입견입니다. 이방인들이 상상하는 절대자는 사람들이 감당 못할 능력은 있는데 성품이 별로 고상하지를 못합니다. 사람들에 대해서 우호적이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 크신 위엄과 영광, 권능에도 불구하고 우리한테 아버지로 친근하게 다가오시기를 원하십니다.

지금은 대통령에게도 "각하"라는 존칭을 붙이지 않는 추세입니다만 얼마 전만 해도 "각하"는 대통령에게만 붙이는 존칭이었습니다. 한때는 군대에서 별만 달아도 "각하"라고 했습니다. 자기가 모시고 있는 상급자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최대한 듣기에 달콤한 존칭을 쓰기도 했겠습니다만 그런 존칭을 듣는 사람도 그 존칭이 싫지 않았다는 반증입니다.

사람들은 전부 다 높아지기를 원합니다. 남들보다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호칭에서부터 자기의 위상이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황제폐하, 수상각하, 상감마마 등이 전부 다 그런 표현들입니다. 심지어 조선시대에는 용상, 용루, 용안, 용포, 짐, 과인, 옥음, 수라...... 임금을 위한 용어가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이 모두가 임금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적용되면 당장 대역죄로 다스려질 단어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높임 받아 마땅한 분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아버지처럼 친근하게 다가오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기 자신을 소개하는 가장 흔한 표현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도 하나님이고 이삭에게도 하나님이고 야곱에게도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소개하는 표현이 어찌 이것밖에 없겠습니까? "단지 말씀으로만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 "노아 때에 홍수로 세상을 쓸어버린 하나님" "소돔과 고모라를 유황불로 심판하신 하나님" .......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려면 이런 식으로 표현하는 것이 훨씬 더 효과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엄청난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기를 원하십니다. 능력에 액센트를 둔 표현보다도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올 수 있는 표현을 훨씬 더 좋아하십니다.

저에 대한 호칭은 "전도사"입니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만 만일 "전도사"라는 호칭이 굉장히 듣기 힘든 호칭이라고 가정하십시다. 엄청난 자격 요건이 있는 소수의 특권 계층만 전도사가 될 수 있다 치면, 남들이 저에게 "전도사님!"이라고 부를 때마다 제 기분이 흐뭇해질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제 딸이 저에게 "아빠"라고 부르지 않고 "전도사님"이라고 부르면 그것은 듣기에 달콤한 호칭이 아니라 푼수 떨지 말라고 야단칠 일입니다. 전도사가 제아무리 높은 자리라도 애한테는 아빠입니다.

하나님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라고 불러주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때마다 하나님으로부터 "그래, 맞다. 네가 바로 내 아들이다" 하는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같은 맥락으로 "하나님, 제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는 가슴 벅찬 감격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러야 합니다.

물론 우리가 집에서 아버지를 부를 때마다 자기가 아버지를 부른다는 사실에 대해서 가슴 벅찬 감격을 느끼지는 않습니다. 그저 일상적인 습관으로 부릅니다. 말을 배울 무렵부터 항상 "아빠" "아버지"라는 표현을 썼기 때문에 그 호칭에 대한 새삼스런 감격이 있을 수 없습니다.

어떤 부잣집에 양자로 입양된 고아가 있다고 하십시다. 어제까지만 해도 고아원의 천덕꾸러기였는데 하루아침에 자신의 운명이 바뀌어서 부잣집 도련님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자기에게 찾아온 엄청난 행운이 미덥지 않아서 혹시 이것이 꿈이 아닐까 하는 마음으로 자기 볼을 꼬집어보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어지간해서는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자기를 입양해 준 사람에게 "아빠!"라고 불러보면 됩니다. "아빠"라고 불러서 "응"하고 대답하면 자기가 정말로 그 집 아들이 맞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부를 때마다 그런 것을 느껴야 합니다. "내가 정말로 하나님의 자녀로구나" 하는 가슴 들뜬 희열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우리가 어느 만큼 감격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에만 국한되는 내용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연결하여 감격해야 하는 만큼 하나님께도 우리와 연결된 부분이 있게 마련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생계를 책임질 의무가 있습니다. "아빠"하고 불렀을 때 "응"하고 대답한 사람은 자기에게 "아빠"라고 부른 아이를 양육할 책임이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하셨다는 얘기는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 인생을 책임지기로 작정하셨다는 뜻입니다.

양자로 입양된 고아가 자기를 입양해 준 사람에게 "아빠"라고 부르는 것으로 변화된 자기의 신분을 확인했으면 그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하루아침에 고아에서 도련님으로 변화된 자기의 신분을 확인하고는 으리으리한 그 집 거실에 들어가서 평소에 하던 대로 각설이 타령이나 하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한창 깡통을 두들기다가 잠깐 무료해지면 또 "아빠!" 하고 불러 보고, "응" 하는 대답을 듣고는 다시 각설이 타령을 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어색합니다. 변화된 신분에 어울리는 변화된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완성된 변화는 아니더라도 완성을 향하여 만들어져 가는 모습은 당연히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만 우리를 양육할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역시 하나님의 자녀답게 자라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만일 제 딸이 누군가에게서 "야! 쟤는 정말 전도사 딸답다"는 말을 듣는다면 아마 그 말은 제 딸이 들을 수 있는 칭찬 중에 가장 큰 칭찬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칭찬을 들으려면 공부를 잘하거나 달리기를 잘하는 것 말고 하나님과 연결된 쪽으로 잘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한테도 이런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다운 모습, 하나님의 딸다운 모습이 있어야 하고, 또 자기에게 그런 모습이 있다는 것을 가장 큰 자랑거리로 삼아야 합니다. 또 그런 자랑을 들으려는 노력이 항상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서는 하다 못 해 탤런트를 닮았다고 해도 좋아합니다. 차인표를 닮았다거나 김희선을 닮았다고 하면 모두들 좋아합니다. 탤런트를 닮았다는 말이 세속적인 기준으로의 칭찬이라면 하나님의 성품을 닮았다는 얘기는 우리 기독교인이 들을 수 있는 가장 큰 칭찬이어야 하고 또 가장 듣고 싶은 칭찬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속한 채로 살아가려면 굳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필요가 없습니다. 비록 육신은 이 세상에 속하여 살고 있을지라도 하늘에 속한 사람처럼 살아야 하니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부잣집에 입양된 고아는 일단 깡통을 버려야 합니다. 고아원에 있을 적에는 한 번도 불러보지 못한 "아빠"를 부를 때마다 자기에게 있는 부잣집 아들과 동떨어진 모습을 하나하나 버려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때마다 혹시 자기 자신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기에 부족한 모습은 없는지를 늘 확인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기도문을 욀 때마다 무신경하게 말하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기도가 아닙니다. 진짜 자기에게 하나님의 아들다운 모습, 하나님의 딸다운 모습이 있는지 더듬어 보고 혹시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딸이라 칭함 받기에 부족한 모습이 있으면 그때마다 팔을 찍어내고 눈알을 뽑아내는 심정으로 그것을 하나씩 제거하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