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2부-기혼자/새 카테고리

[스크랩] 기억되는이름(제직헌신예배)

에반젤(복음) 2020. 10. 3. 00:03

기억되는이름

롬16:1-16

 

예수믿는사람의간절한소망은

하나님이나를 사랑해주시는소망이고

하나님이나를 기억해주시는 소망이며

하나님이나를 사용해주시는 소망일것입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두 사람을 들라면 뭐니뭐니해도 예수님과 바울일 겁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기독교가 시작되었다면,

바울은 기독교를 세계화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사람입니다.

 

물론 바울을 예수님과 같은 격으로 논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교통통신이 발달되지 않은 그 시대에 도보로 로마제국 전 지역을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하였던 그가 없었다면 기독교는 세계종교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방인을 향한 바울의 선교 열정에 우리는 탄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같은 전도자는 기독교 역사상 전무후무하지 싶습니다.

하지만 바울도 동역자가 없었다면 자신의 사역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이 그것을 잘 말해줍니다.

바울은 자신을 도운 스물일곱명의 이름을 일일이 열거하면서

그들에게 문안하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이 이름들을 묵상하면서 초대교회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그려보려고 합니다.

우선 이름 앞에 붙어 있는 수식어들이 눈에 띱니다. ‘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은

너희를 위하여 많이 수고한

내 친척이요 나와 함께 갇혔던

이런 수식어들을 보면서 새삼 깨닫습니다. ‘

이런 돕는 사람들이 주위에 있었기에 바울은 자신의 선교적 사명을

제대로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이구나!’하고 말입니다.

주의 일을 하다가 바울도 낙심할 때가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낸 두 번째 편지에서 자신이 겪은 고통을 적고 있습니다.

환난, 궁핍, 매맞음, 갇힘, 난동, 자지 못함, 먹지 못함 등. 그런 일을 겪을 때마다

바울은 포기하고 싶은 적도 많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그는 떠올렸을 겁니다.

 

자신을 위해 목숨까지 내놓은 브리스가와 아굴라를,

자신과 함께 갇혔던 안드로니고와 유니아를. 그러면서 다시 힘을 냈을 것입니다.

첫째로; 오늘 바울이 열거하고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부자들?

많이 배운 사람들? 지위가 높은 사람들? 그렇지 않습니다.

 

1)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3)

나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안드로니고와 유니아(7)

주 안에서’ 내 사랑하는 암블리아(8)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동역자인 우르바노(9)

그리스도 안에서’ 인정함을 받은 아벨레(10)

나깃수의 가족 중 ‘주 안에’ 있는 자(11)

주 안에서’ 수고한 드루배나와 드루보사(12)

주 안에서’ 많이 수고하고 사랑하는 버시(12)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13)

 

2)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새롭게 발견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기적과 초자연적 현상을 좇는 사람이 아닙니다.

 

율법주의자도 도덕주의자도 아닙니다.

남들보다 약삭빠르고 처세에 능한 사람도 아닙니다.

 

3)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깨달은 사람이요, ‘

위로부터 난 사람’임을 아는 사람이요, ‘

하나님의 형상’을 자각한 사람이요, 죄에 대해 죽고 하나님께 대해 살아난 사람이요,

부활 생명으로 죽음의 세력을 극복하며 사는 사람이요, 영적 살림을 시작한 사람입니다.

4) 그리스도인은 예수의 가르침대로 살려고 애쓰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자신을 헌신한 사람입니다.

그러기 위해 성서의 가르침을 배우고 묵상하고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요즘 한국교회에서는 예수 없이도, 성경을 배우지 않아도,

하나님의 뜻을 위해 헌신하지 않아도 믿음 좋은 기독교인 행세를 할 수 있습니다.

키에르케고르라는 철학자가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 신앙에 대해 명쾌하게 지적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인간의 실존을 심미적 실존, 윤리적 실존, 종교적 실존 셋으로 나눕니다.

심미적 실존은 쾌락과 즐거움을 추구합니다.

윤리적 실존은 율법과 도덕을 추구합니다.

 

종교적 실존은 무엇을 추구할까요?

그에 따르면 종교적 실존은 종교성A와 종교성B로 나뉘어집니다.

그에게 있어서 종교성A는 율법을 추구하는 유대교요,

종교성 B는 복음을 따르는 기독교입니다.

어찌 보면 유대교는 합리적인 종교입니다.

율법을 지킨 만큼 축복을 받고, 선행을 한 만큼 상급을 받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종교성A인데

 

(1) 오늘날 한국교회는 종교성A에 머물러 있는 것 같습니다.

내가 주일성수를 한 만큼,

기도를 한 만큼,

헌금을 한 만큼,

봉사를 한 만큼 상급과 축복을 받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2) 이것은 일종의 업적주의입니다.

그렇다고 주일성수, 헌금, 봉사를 하지 말라는 게 아닙니다.

상급과 축복을 바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기쁨과 감사의 표시로 하는 것이지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새로운 정체성을 얻고,

새로운 사명을 깨닫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으니 너무 좋아서 하는 것입니다.

이뿐 아니라

(3) 한국교회는 초자연적인 현상과 은사에 집착하고 있습니다.

불치병을 고치고, 방언을 하고, 점치듯 예언을 하고….

그러나 이런 현상은 모든 종교에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키에르케고르가 말하고 있는 종교성A에 속한 것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그보다도 못합니다.

그가 말하는 종교성A란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서 최소한 선하게 살려고 노력하면서

남에게 피해는 주지 않으려고 노력하기 때문입니다.

 

이와는 달리 초자연적인 현상과 기적, 은사와 축복을 추구하는 신앙은

남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 나만 잘 살면 그뿐이라는 이기심과 관련될 때가 많습니다.

(4) 하지만 계명을 추구하든 기적을 추구하든 이것은 아직 기독교가 아닙니다.

한 마디로 말해 기독교는 예수를 그리스도(메시아, 구세주)로 믿는 종교입니다.

 

단순화시켜서 말하면 우리와 똑같은 인간 조건 속에서 살았던

어떤 한 인간을 하나님으로 믿는 것입니다.

 

이 믿음에는 예수라는 인간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부활)을 믿는 것이 포함됩니다.

이러한 믿음 앞에서 이성의 논리와 합리성은 좌초되고 맙니다.

이것은 이성으로 증명할 수 없고, 영적으로만 깨닫고 믿음으로 고백할 수 있는 진리일 뿐입니다.

 

이러한 것을 가리켜 키에르케고르는 '파라독스(paradox)'(자기모순) 라고 했습니다. '

역설(逆說)이라는 말입니다.

기독교는 이 역설을 믿는 종교입니다(종교성B).

바울을 도왔던 사람들이 바로 역설의 진실을 깨달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예수를 구주로 받아들였고,

하나님의 아들로 믿었으며,

그분 안에서 자신을 새롭게 발견했던 것입니다.

 

오늘 헌신예배를드리는 0 0 교회가

부흥하는 교회,

성장하는 교회,

사회봉사도 많이 하는 교회 이전에

무엇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의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를 신앙과 삶의 기초로 한 교회,

그분을 모퉁이 돌로 서로 연결된 교회,

그분을 머리로 하여 하나님 나라를 함께 꿈꾸는 교회,

이 얼마나 아름다운 교회입니까?

둘째로; 바울이 열거한 이름들에서 우리는 ‘

그리스도의 안에서 이루어진 활동’을 볼 수 있습니다.

 

교회의 ‘일꾼’으로서

여러 사람과 바울의 ‘보호자가 되었던’ 뵈뵈,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 ‘

너희를 위하여 많이 수고한’ 마리아, ‘

나와 함께 갇혔던’ 안드로니고와 유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인정함을 받은’ 아벨레,

주안에서 ‘수고한’ 드루배나와 드루보사,

주 안에서 많이 ‘수고하고 사랑하는’ 버시….

바울을 도왔던 사람들의 활동은 ‘보호, 희생, 수고, 인정’ 네 가지입니다.

 

첫째; 상호 보호 입니다.

 

기독교는 많은 오해와 박해를 받으면서 자랐기 때문에

서로 보호해주지 않으면 믿음을 지킬 수 없었습니다.

오늘날도 그리스도인들은 서로를 보호해줘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홀로 복음적 가치관을 따르며 살아간다는 것은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서로 보호하고 격려해줄 수 있는 믿음의 공동체가 필요한 것이요,

그것이 바로 교회인 것입니다.

둘째;상호 희생 입니다.

 

희생 없이 기독교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의 상징인 십자가 자체가 희생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인간을 위한 희생, 의인의 죄인을 위한 희생!

이 십자가의 희생은 순교의 역사로 이어졌습니다.

베드로의 순교,

야고보의 순교,

바울의 순교….

바울을 위해 목숨까지 내놓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희생.

복음이라는 대의를 위한 희생이 없으면 교회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셋째;상호 수고 입니다.

 

교회는 신자들을 서로 격려하고 보호해주는 곳일 뿐만 아니라,

복음적인 가치관으로 이 세상을 변화시켜야 하는 사명을 갖고 있습니다.

 

하비 콕스라는 신학자는

교회를 ‘하나님 나라의 아방가르드(전위대)’라고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모든 시대 모든 역사적 상황 속에서 자신의 선교적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교회는 하나님의 일을 기획하고 실천하는 데 온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

사업에 전념하는 이상으로, 자녀교육에 열성을 쏟는 것 이상으로

주의 일을 감당하는 수고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넷째;상호 인정 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일을 하되 주님이 인정해주시는 일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수난예고를 하셨을 때 베드로가 그럴 수 없다고 하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구나!” 무서운 말씀입니다.

많은 노력과 돈과 열정을 쏟아 일을 했는데 하나님이 인정하시지 않는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습니까.

 

이런 일이 한국교회에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드러내기보다 인간을 드러내려고 할 때,

하나님의 뜻보다는 욕망을 성취하려고 할 때,

복음적 가치를 구현하는 것보다는 외형적⦁양적 성취와 업적주의에 치우치려고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일을 외면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인정과 관련하여 한 가지 덧붙이자면

성도들은 교회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을 인정해줘야 합니다.

아무리 보잘 것 없고 하찮은 일이라도 그렇습니다.


셋째로; 바울이 열거한 아름다운 이름들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관계’가 어떠한지를 볼 수 있습니다. “

 

내가 사랑하는 에베네도,

 

주안에서 사랑하는 암블리아,

 

사랑하는 스다구,

 

주 안에서 많이 수고하고 사랑하는 버시…”

 

아무리 큰 희생이 있고,

아무리 많은 수고가 있어도 예수의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리 영적 체험을 많이 하고,

아무리 믿음이 좋고,

아무리 지식이 많고,

아무리 많은 구제를 하더라도 예수의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사랑 없는 성도의 교제는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하므로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면서”(빌2:2-4)

 

출처: 점촌 반석 교회            글쓴이: 별난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