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충만의 가장 뚜렷한 증거
고린도전서 12장 31절 - 13장 3절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오늘날 사람들이 초자연적인 은사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초자연적인 은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 관련하여 극단적인 가르침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방언이 성령세례의 필수적인 증거라는 것입니다.
방언의 은사가 존중되어야 하고
또한 방언이 성령세례의 하나의 증거는 되지만 필수적인 증거는 아닙니다.
그러므로 방언을 하지 않는 분들에게 방언을 하라고 강요하지도 말고(bid not),
방언은 하는 분들에게 방언을 하지 말라고 금하지도 말아야 합니다(forbid not).
방언이 성령세례의 필수적인 증거라는 것이 왜 극단적인 가르침일까요?
1. 그러한 가르침은 하나님 그분보다
외적인 현상과 특이한 경험에 더 관심을 가지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도의 지상 최고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가르침은 그 목표에서 이탈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심령이 방황하게 되고 산만하게 됩니다.
2. 그러한 가르침은 성령께서 은사를 주실 때
그분 자신의 주권에 따라 가장 알맞은 은사를 주신다는
성경의 가르침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은사가 방언이라는 은사 오직 하나밖에 없다면
방언이 성령세례의 필수적인 증거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은사는 많이 있고 다양한 모습을 띄고 있습니다.
3. 그러한 가르침은 사랑의 영보다 능력의 은사를 강조하여
우리를 실제적이고 유용한 삶으로부터 분리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성령의 은사에 대한 바람직한 태도는 무엇일까요?
1.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계획에 가장 알맞게
나에게 가장 알맞은 은사를 주실 것이라는 점에서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역과 예배에서 은사를 연습하는 것은
고린도전서 14장에서와 같이 조심스럽게 통제되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4장을 보면 방언 문제와 관련해 3가지 원리를 제시합니다.
1) 교화(순화, 순응)의 원리입니다.
영적으로 보탬이 되지 않는 방법이 강요되어서는 안됩니다.
2) 질서의 원리입니다.
혼란, 방종, 과도한 감정들은 모두 회피되어야 합니다.
3) 절제의 원리입니다.
"예언하는 자들의 영이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고전 14:32)
2. 성령께서는 감정이 통제를 벗어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감정이 어느 정도 절제되도록 하고 특별히 사랑을 추구해야 합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정신적 균형상태를 유지하게 하시며,
우리의 상식과 의지가 철저히 말살되기를 원하지 않으며,
어떤 최면 상태로 들어가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러한 상태보다는 사랑의 은혜를 추구하길 원합니다.
사랑은 무엇입니까?
우리 믿는 사람들이 추구해야 할 가장 높은 고지입니다.
사실상 사랑은 성령충만 자체를 나타내 주는 것이며,
성령충만을 얻게 하는 가장 위대한 수단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보면 12장에서
사도 바울은 죽 은사 얘기를 하다가 마지막으로 말합니다.
"내가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여기서 제일 좋은 길이란 제일 축복된 길을 말합니다.
그 제일 좋은 길은 사랑의 영의 인도를 받아
다른 사람들을 축복해 주는 존재가 되는 것임을
바로 이어서 나오는 고린도전서 13장이 말해줍니다.
중세에 거룩한 성배를 찾자는 열풍이 있었습니다.
거룩한 성배란 주님께서 성만찬 때 사용했던 컵을 말합니다.
어떤 기사도 그 컵을 찾겠다고 성을 나서는데
성문 밖에서 문둥병자가 물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는 그냥 뿌리치고 거룩한 성배를 찾아 길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찾을 수 없었습니다. 수년간 헛수고만 하고..
지친 마음과 몸으로 다시 성으로 돌아오는데
성문 앞에서 몇 년 전 문둥병자가 또 물을 달라고 했습니다.
불쌍한 생각이 들어서 그 문둥병자에게 정중하게 물을 건네주는데
갑자기 문둥병자의 모습이 예수님으로 변했고,
그 순간 그 물이 담긴 컵이 거룩한 성배로 변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성배를 찾는 가장 좋은 길은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사랑으로 연약한 자를 돌보는 일이었습니다.
기도제목이 있으면 때로는 그 기도제목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180도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려서 사랑의 손길을 펼쳐 보십시오.
어떤 때에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더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기도제목에 집착하는 것은 잘못된 동기에 의한 경우가 많고
또한 집착은 하나님의 뜻에 순응하려는 넉넉한 여유를 빼앗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좋은 길은 사랑의 영을 통한 길입니다.
그러면 마치 상대방만 좋은 것 같고 나는 손해보는 것 같지만
그것이 가장 선하고, 가장 좋고, 가장 축복된 길입니다.
성령충만의 가장 위대한 증거는 사랑하는 태도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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