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의 영을 함양하는 방언기도
우리가 하는 방언은 여러 가지 형태를 취하는데 이 부분을 크게 나누면 은사로서의 방언과 영의 기도로서의 방언이 있습니다. 은사로서의 방언은 표적으로서의 방언과 예언으로서의 방언 즉 통역을 위한 방언과 각종 능력을 행할 수 있게 하기 위한 촉매로서의 방언 등이 있습니다. 개인적인 방언은 영의 기도로서 성령과 내 영의 기도가 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거듭나는 순간 우리의 영은 활동을 하며, 따라서 영의 언어로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알 수 없는 말로 기도하는 것은 영으로 기도하는 것이며, 이 기도는 영은 열매를 맺지만 육신으로는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방언은 일차로 영에게 유익한 것이며, 방언이 통역이 되지 않으면 우리의 육체는 아무런 유익을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육체에는 무익하고 영에는 유익한 방언을 모든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해야 하는 까닭은 우리는 육으로 살 뿐만 아니라 영으로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육체의 유익은 약간 있지만 영의 유익은 범사에 유익합니다. 그러므로 영적 삶을 살아가야 하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방언은 무척 중요한 것입니다. 이 방언이 은사로서 또는 개인적인 유익을 위한 수단으로써 주어지며, 누구든지 방언으로 말해야 하며,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가운데는 여전히 방언을 말할 수 없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뒤에 설명하고 우선 은사로서의 방언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은사로서의 방언은 흔하지 않습니다. 다른 은사 역시 그러합니다. 우리 교회 안에는 은사를 받은 사람이 많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도움을 받고자 살펴보면 많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귀신들려 고침을 받고 싶어서 축사 사역자를 찾으려면 그리 쉽게 만나지지 않습니다. 병이 들어 신유 사역자의 도움을 받으려고 해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평소에는 막연하게 많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닥치면 너무도 희귀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능력 행하는 사람은 대중에 알려졌지만 그를 통해서 치유를 받는 일은 다른 의미를 가집니다. 이런 사람은 신유의 은사와는 다르기 때문에 그들이 행하는 치유와 축사는 보여주기 위한 것이며, 불신자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어 믿음으로 나오게 하기 위한 보여주는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영혼의 깊은 문제까지 다루는 신유 사역자와는 다릅니다.
은사로서의 방언은 다양한 방언을 말할 수 있다는 점이 독특합니다. 각종 방언이라고 기록한 성경말씀에서 보듯이 은사로서의 방언은 다양한 방언을 말할 수 있습니다. 치유를 위한 방언과 축사를 위한 방언이 다릅니다. 성령이 임재해서 말씀하시는 방언도 다릅니다. 자신이 평소에 하던 방언과 전혀 다른 음색과 억양과 사용되는 단어가 다릅니다. 방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한 가지 방언을 말하지 않고 때에 따라서 목적에 따라서 방언이 바뀌며 주체가 바뀔 때마다 방언이 수시로 다르게 나옵니다. 통역을 위한 방언 즉 예언적 방언의 경우 통역이 되며, 그 의미를 깨닫게 되어 예언하게 되는 것입니다. 방언의 은사는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교회를 섬기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치유, 축사, 예언, 영분별 등과 같은 은사들을 더욱 강력하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런 은사를 받은 사람은 예외 없이 방언의 은사를 동시에 받거나 먼저 받습니다.
각종 은사를 제대로 활용하기 위해서 영의 기도는 물론이거니와 그 은사가 지니는 독특한 성향을 드러내기 위해서 방언은 필수적인 것입니다. 다른 은사를 행할 때 우리의 의지와 지식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주신 능력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능력을 가져온 영과의 대화를 위해서 각각 다른 방언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방언 통역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방언이 통역될 때 우리는 천사와 대화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며, 주의 영과 대화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 우리는 방언의 은사로서 가능하며 단순히 우리 영의 기도인 개인적인 방언은 우리를 세우기 위한 것이며, 우리 영이 하나님에게 기도하는 단순한 개인적인 기도입니다.
은사로서의 방언은 흔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하는 방언기도는 우리 영이 하는 기도라고 보면 될 것입니다. 이 방언은 단조로운 것이 일차적인 특징입니다. 간혹 통역이 되지만 대부분은 통역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방언에는 계시와 지식과 지혜의 말씀을 포함하지 않기 때문이며, 단순히 자신의 영을 강건하게 하기 위한 함양(edification)이 주된 목적입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이 하고 있는 방언은 이런 목적으로 주어진 것이며, 이는 우리가 일상으로 기도할 수 있는 것처럼 누구든지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방언은 육성처럼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방언이 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사모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고, 하고자 하는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은사로서 주어지는 방언은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이 없지만 개별적인 함양을 위한 방언은 구하고 두드려야 합니다. 우리의 유익을 위한 요소들은 대부분이 우리가 열심히 구해야 하는 법칙의 적용을 받습니다.
믿음도 강해지기 위해서는 구해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믿음을 더해 주시기를 간구해야 함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눅 17:5, 고전 12:31)). 이렇듯이 구해야 하지만 억지로 흉내 내듯이 일부로 만들어서 해서는 안 됩니다. 인위적으로 방언을 흉내 내어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방언학교가 있다는 말을 들었지만 확인한 바가 없는데 의도적으로 혀를 굴려 이상한 발음을 내는 훈련을 한다고 합니다. 이 역시 바람직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방언은 하나님이 은혜로 부어주시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전부 은사로 보아서는 안 되며, 개별적인 방언은 우리 영을 강하게 할 목적으로 주시는 것이며, 영의 대화를 수월하게 하기 위해서 주시는 것이므로 열심히 방언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방언은 다른 영적 요소들처럼 사용할수록 풍성해지며, 더욱 깊어집니다.
우리 가운데 방언으로 기도하지 못하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구하고 찾아야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은사라는 생각으로 적극적으로 구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구한다고 해도 끈질기게 구하지 못합니다. 기도 응답은 어떤 것은 쉽게 얻어지지만 어떤 것은 오랫동안 끈질기게 간구해야만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끈질긴 기도를 통해서 얻는 것이 더 많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쉽게 허락하시지 않는 것은 도대체 무슨 까닭일까요. 주께 헌신하고자 하는 순수한 열정으로 구하는데도 쉽게 허락하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 같아서는 어서 주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병 고침을 받기 위해서 얼마나 간절히 기도합니까? 주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교회 부흥을 얼마나 간절하게 소망하며 기도합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응답되지 않아 우리의 마음이 녹아내리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위해서 간구함에도 불구하고 쉽게 응답되지 않는 까닭은 하나님의 신비이며, 이것이 하나님 됨의 특성입니다. 사람들 마음 같아서는 모두 주고 싶고 다 들어주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해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이 다른 까닭입니다. 어쨌든 우리는 계속 간구해서 방언을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방언을 받은 사람은 자신의 영을 강하게 하기 위해서 방언으로 많이 기도해야 합니다. 방언은 중보기도의 수단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간구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서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있는 보이지 않는 장애물들이 제거되는 것입니다. 이 보이지 않은 효과는 우리의 영 안에서 나타납니다. 우리의 영이 하나님으로부터 더 많은 말씀을 받을 수 있으며, 그렇게 되면 우리는 주님의 인도하심을 더욱 풍성하게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 영이 강해지면 그곳으로부터 나오는 신호가 강력해집니다. 이는 방언으로 기도할 때 마음이 뜨거워지며, 헌신하고자 하는 믿음이 우러나오며, 평안한 마음이 되어 시련을 이길 수 있게 됩니다. 근심과 두려움이 사라지고 주님의 평안으로 가득 채워집니다. 이런 함양의 은혜는 묵상과 관상 기도로도 얻어지는 것이며, 방언기도는 쉽게 얻을 수 있는 편리함이 있습니다. 개인적인 방언기도는 통역을 할 수 있으면 더욱 은혜롭습니다. 모든 방언이 다 통역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지만 자신이 하는 기도 가운데 부분적으로 통역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지식의 말씀처럼 자신의 내면에서 어떤 생각들이 떠오르며 방언과 동시에 그 생각이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만들어갑니다. 방언을 말하면서 머리는 어떤 내용을 가진 이야기로 채워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자신이 알고 있는 내용이 아니며, 머리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영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방언이 단조롭고 더듬거리는 수준이 아니라 사용되는 단어는 풍부하지 않아서 반복되지만 그 흐름은 매끄럽고 유창하여야 합니다. 자주 끊기고 거친 발음이 나온다면 이는 아직 성숙하지 못한 것이며, 더 많이 방언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방언으로 기도하면서 생각은 육체적이라면 이것은 내 지성과 감성이 영으로 향하지 못하고 분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영 안에서 기도하며, 그 영을 집중해서 살피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방언으로 기도하며 방언에 생각을 집중시키고 그 언어를 살펴야 합니다. 성령이 충만해지면 우리는 방언에 몰입하게 되며, 영에 모든 것이 집중됩니다. 이런 상태가 되어야 방언의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방언기도에 몰두하면 우리의 지성과 감성은 영으로부터 오는 신호에 민감해지며, 그 신호를 이성적으로 깨닫게 됩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과의 대화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방언기도는 많은 훈련이 필요합니다. 먼저는 성령충만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하고, 영의 작용에 따라서 방언의 흐름이 다르게 나타나는 변화를 가져올 수 있어야 합니다. 방언기도를 함으로써 우리 영이 활발해지며, 영이 운동력을 얻어 우리 기도를 주체적으로 이끌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육성으로 기도하는 시간이 줄어들기 때문에 하나님께 아뢰어야 할 것을 다 하지 못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하게 되지만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겉사람의 기도보다도 주님은 우리 속사람의 기도를 더 귀하게 여깁니다. 바울은 개인기도에 누구보다도 더 많이 방언으로 기도한 사람입니다. 영으로 기도하는 것이 우리 기도의 본질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는 영의 호흡이며, 이런 차원에서 방언기도는 많이 해야 합니다. 속사람이 강건해져야 주님으로부터 인도함을 받기가 쉬워집니다. 그래야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더 확실하게 확신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 다른 사도들보다 더 많은 영적 지식과 경험을 하게 된 배경에는 방언기도가 있습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더 많이 방언으로 기도했다고 말하는 ‘누구보다도’에는 다른 사도들을 의식하고 한 말입니다. 그가 평범한 성도들과 자신을 비교하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기둥사도들과 비교함으로써 자신의 사도성(apostleship)을 옹호했습니다. 이렇듯이 여러분도 그 어떤 영성 사역자보다 더 많이 방언으로 기도하고 있다고 스스로를 인정할 수 있습니까?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생활을 하다보면 하루에 한 시간도 기도할 수 있는 시간을 내기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방언기도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작업을 하다가 쉬는 시간에, 출퇴근하는 시간에, 누구를 기다리는 시간에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시간이 나면 핸드폰을 들어다 보면서 게임을 하거나 문자를 쓰거나 합니다. 핸드폰에 시간을 너무도 많이 빼앗기고 있습니다. 그런 시간에 방언으로 기도하십시오. 우리의 목적은 주님과 늘 가까이 하면서 그분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사업을 어떻게 할까 하고 고민하기 보다는 어떻게 해야 주님의 음성을 더 잘 듣고 그분과 친밀한 대화를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합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나신 분이 우리를 지키시고 인도하실 것입니다.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기 위해서 우리는 방언으로 기도하는 시간을 많이 만들어야 합니다. 시간을 허비하지 마십시오. 이 역시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하고 게임에 몰두하지 마십시오. 핸드폰 문자에 매달리지 마십시오. 전철에 앉아서 살펴보면 젊은이들은 핸드폰을 들고 거기에 정신을 모두 쏟고 있습니다. 핸드폰을 바라보는 눈을 주님에게 향하게 하십시오. 여러분을 인도하시는 분이 주님이십니다. 그 분을 향해서 몸과 마음을 다 열어놓으십시오. 그래야만 주님의 사랑이 우리 안으로 들어온답니다.
'<<< 조직 신학 >>> > - 성 령 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령의 증거(내증) (0) | 2020.02.29 |
---|---|
하나님과 영적인 교통 (0) | 2020.02.29 |
사탄 마귀―실재하는 악한 인격체 (0) | 2020.02.29 |
성령에 관해서 (0) | 2020.02.27 |
[짧은글] 영적 전쟁 (0) | 2020.02.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