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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분별에 대한 고찰

에반젤(복음) 2020. 2. 27. 10:46



<영적 분별에 대한 고찰>




-목차-



1.분별의 필요성


 -서두-


 (1)왜 많은 크리스챤들이 신비체험을 다루는 간증에 열광하는가

 (2)'나' 또는 '우리'와 다른 의견을 존중하라


2.분별의 중요성


 -서두-


 (1)사도 시대 이후 이 세대의 영적 분별은 더욱 중요하다.

 (2)분별의 방법


3.결론


4.기타








1.      분별의 필요성





최초의 영적인 사람은 아담이었다. 그러나 아담이 아내로 인해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는 죄에 대한 결과로 사망의 검은 구름이 드리워졌다. 그런 면에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탕으로 한 철저한 분별 있는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 없다.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에 없는 말을 뱀에게 하였다.(창3:3) 이는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있게 숙고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간교한 뱀은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간파하지 못한 하와를 유혹하는데 결국은 성공했고(창3:4-5), 그 결과로 아담까지 범죄의 자리로 인도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이 비극적인 결과는 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큰 교훈을 가져다 준다. 사단은 하나님의 사람들에겐 말씀 밖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해 유혹한다는 점이다. 사단은 최고의 지혜로 창조된 영적 존재로 사람의 자유의지 속에 녹아 있는 자존감을 그럴듯한 유혹의 말로 충분히 끌어내는데 성공했다. 이는 자신 이후로 창조된 사람의 약점을 그만큼 잘 알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선악과란 언약의 징표를 두시지 않았다면 사람들은 하나님의 완전한 보호를 받는 애완 동물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톰슨관주역)


따라서 사단의 사람보다 뛰어난 지혜와 간교한 점을 생각할 때 영적 분별에 대한 필요성과 중요성을 매번 강조해도 결코 지나침이란 말은 있을 수 없다. 현 시대에는 자유주의신학에서 파생된 많은 서적들 못지 않게 신비체험의 많은 간증 매체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여기서 무엇보다 깊이 있게 생각하고 고찰해야 할 점은 이러한 서적들과 매체들에 열광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같은 우리 그리스도인이라는 점에 있다. 여기에서 본인이 생각하고자 하는 부분은 영적 체험이라 말하는 범람하고 있는 신비적인 체험과 은사에 관한 것이다.



(1)왜 많은 크리스챤들이 신비체험을 다루는 간증에 열광 하는가



첫째로 자신이 경험해 보지 못한 세계를 다른 사람의 경험을 통해 대리만족하려는 경향이다.


이는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다. 한 예로 영화를 감상하거나 소설을 읽는 사람은 그 모든 사실들이

허구란 것을 알면서도 내용 속에 묻어져 있는 지극히 현실적인 감각에 매료된다. 여기서 영화나 소설의 내용들이 비록 판타스틱한 일을 그리거나 현실의 삶과 판이하게 다르다 해도 거기서 평범한 일상에서 느낄 수 없는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로 신비적 체험을 믿음에 대한 척도로 여기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점이다.


이단종파에 휩쓸린 많은 사람들이 바로 이 '신비'스런 일들에 현혹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현존하는 모든 신비스런 체험신앙이 모두 이단이란 말은 결코 아니다. 나를 포함한 많은 크리스챤들이 예수를 나의 구주로 믿어 의심치 않는 것도 하나의 신비스런 일이기 때문이다.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지나친 은사주의와 체험강조도 위험한 것이며, 또한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모든 은사를 부인하는 이성주의적 신학과 지나친 교리주의만을 주장하는 것도 합당하지 않다.


셋째로 성경에 나타난 표적과 기적에 대한 갈증의 표출이다.


요즘 같이 합리주의적이고 보편적인 이성적인 삶을 중요시 여기는 세대에서는 자신이 경험해보지 못한 표적과 기적, 그리고 신비체험에 대한 기사나 글에 더욱 예민해진다. 이러한 일들에 관심을 집중하다 보면 신비주의적 신앙에 물들기 쉽다. 이는 미신적인 것에 지나치게 예민해진다는 점이다.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나타내시는 방편 중에 하나가 초자연적인 표적과 기적인 것은 분명하지만 지나친 표적과 기적에 대한 무분별한 집착은 예수신앙을 신비신앙으로 변질시킬 우려 또한 간과할 수 없다. 수많은 표적과 기적을 행하셨던 예수께서 왜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다 하셨고(마12:39), 마가복음에서 깊이 탄식하시며 이 세대에게 표적을 주지 않으리라(막8:12)란 말씀까지 하셔야 했는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는 예수자신이 바로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베푸신 가장 큰 표적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크리스챤은 예수가 믿어지는 것 자체가 바로 이 세대에 가장 큰 표적을 맛보고 있는 것과 다름없음을 확고히 해야 한다. 그 이상의 표적에 대한 목마름은 은사에 대한 사모함이 아닌 욕망으로 변질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사단은 이러한 약점을 이용하여 광명의 천사로 거짓 은사와 이적으로 속일 수 있음을 절대 간과해서는 안 된다.


(2)'나' 또는 '우리'와 다른 의견을 존중하라



특정적인 리더자나 인물을 따르는 사람들의 문제점이 그 외의 사람들의 시각을 무시한다는 점이다. 이는 매우 위험적인 것으로 그들 스스로가 자신이 따르는 한 사람을 우상화로 만들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생각을 달리 하는 사람들과의 대화통로를 아예 막아버리거나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일반연예인의 펜카페 못지 않은 폐쇄성을 가졌다는 공통점이 있다.



-전두환장군의 카페들


제 5공화국이라는 드라마가 방영되면서 여러 포털 사이트에 전두환장군을 찬양하는 사람들이 모여 만들어진 카페들이다. 이 곳에서는 전 전대통령을 비하하는 의견이나 질타하는 소리는 절대 용납되지 않는다. 물론 이러한 카페들의 목소리들은 드라마에서 광주시민들을 향한 리얼리티에 가까운 군부의 압제장면이 방영되면서부터 전대통령을 성토하는 목소리가 높아지자 그나마 수그러들었다.


-천국카페


토마스 주남의 '천국은 확실히 있다'란 책을 선전하고 그 책에 열광하는 사람들이 모여 만든 천국카페이다. 이 카페의 정회원이 되기 위해서는 거부하고 싶은 질문에도 '예'라고 할 수 있어야만 하고, 카페규칙에도 위 책에 대한 다른 이견이나 그 책이나 저자를 우려하는 의견은 용납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문구들을 볼 수 있다.


-일반 연예인의 펜카페들


주로 십대로 이루어지는 이 카페들은 한번 들어가 본 사람들이라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추종하는 연예인에 대한 비난의 글 하나만 올라와도 십대들의 댓글에서는 무서우리만치

저주하는 글들과 욕설들이 난무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카페들이 생겨나는 공통된 목적은 자신이 인정하고 사랑하며 존경하는 사람에 대한 애정을 같은 마음을 품고 있는 사람들과 나누고자 하는 목적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이들이 간과하는 점은 진정한 커뮤니티에 대한 개념이다. 그것은 자신들이 애정을 가지고 지켜보는 사람에 대한 다른 시각에 관한 배려가 없다는 점이다. 십대들의 그러한 감정적 단순성은 인정한다 하더라도 지성인이란 이름으로 또는 크리스챤이란 이름으로 만들어진 이러한 자신들만의 공동체에는 찬성할 수 없다.


모든 공동체는 특히 크리스챤 공동체들은 이단과 사이비로 모든 교파에서 판단된 사람들을 제외한 모든 성도들에게는 서로 다른 시각을 가진 의견을 존중하는 가장 기본적인 틀인 서로간의 배려가 있어야 한다. 이는 겸손을 말하는 사람들의 지극히 기본 된 자세이며 분별하는 지혜의 가장 기초되는 요소이기도 하다. 본인 또한 이러한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사람이지만 반드시 인식은 하고 있어야 한다. 좋은 리더는 입술보다 들으려는 귀를 중히 여긴다는 말이 있다. 이는 리더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적용시켜야 할 덕목이다.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가져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부정적인 의견도 주의 깊게 살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성경적으로, 또는 인격적으로, 상식적으로, 이 셋 중에  맞지 않는 다른 주장이나 의견에는 단호하게 대처할 필요성이 있다. 나눔과 들음은  하나님의 '의‘와 ’온유‘가 원칙이 되어야 한다. 이와 같은 점을 깨는 다른 주장이나 의견은 아무리 성경적인 주장이라 하더라도 좋은 열매를 얻기 힘들다.





2.      분별의 중요성



분별은 곧 아는 것에 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정도 안에서만 분별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린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성 외에 감성과 감성 외에 이성만이 옳다고 말할 수 없듯이 이 두 가지 모두를 최대한 활용할 줄 아는 것이 바로 영적 분별의 기초가 된다. 파스칼의 의견을 들어보자


'사람은 모든 것에 대해 알 수 있는 모두를 알아 만능(보편적)일 수는 없으므로, 모든 것을 조금씩

알도록 해야 한다. 하나의 사물에 대해 다 알기보다는 모든 것에 대해 얼마간씩을 아는 것이 훨씬

나으니까 말이다. 이러한 보편성이 가장 좋다. 두 가지를 가질 수 있다면 더욱 좋겠지만, 골라잡아야 한다면 후자를 골라야 한다. 세상 사람들도 그것을 알고 그렇게 하고 있는데 이는 세상 사람들도 대개 훌륭한 판단자이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진리를 발견하는 데 소용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적어도 자기 생활을 가다듬는 데는 소용되며, 또 이보다 더 당연한 일은 없다.'


분별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자신을 아는 일이다. 이는 쉬워 보이면서도 어려운 일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의 영적 상태와 수준, 말씀을 대하는 태도와 성경을 이해하는 시각이다. 이는 주관적일 수밖에 없으므로 '나'와 입장을 같이 하는 책들이나 글뿐만 아니라 나와의 시각과 사고개념이 다른 서적이나 주장에도 왜 다른가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분별의 지혜는 성경을 바로 보는 넓은 시각과 신앙의 선배들이 물려준 유산을 읽는 것과 듣는 것에서부터 조금씩 열려진다. 이를 위해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공부하기를 원하시며, 듣기를 원하신다. 성도들 중에 성경을 지극히 편식하며 자신만의 성경으로 만드는 것을 어렵지 않게 보게 되는데, 이는 들으려 하지 않고 자신만의 좁은 신학에 머물러 남을 자신의 잣대로만 평가하게 만드는 심각한 오류를 범할 수 있다. 믿음도 들음에서 시작되듯이 분별의 지혜도 마찬가지이다. 성령의 기본적 역사는 듣게 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분별케 하신다. 듣지 않고, 보지 않고는 분별할 수가 없다. 분별이 필요한 일에 관하여 듣지 않고, 보지 않고 말하는 것은 성령을 기만하는 행위이다. 기도를 할 때도 주께 일방적으로 간구하는 것으로만 끝난다면 이는 진정한 기도라 할 수 없다. 기도에도 듣는 훈련이 필요하다. 기도 할 때 주의 뜻을 듣는 다는 의미는 방언이란 은사의 통역만을 의미함은 아니다. 그보다 기본적인 들음이란 기도 후에 갖는 묵상의 시간이다. 묵상이란 기도와 함께 말씀 속에 감추어진 보배를 찾는 것이라 하겠다. 이는 침묵 속에 이루어지는 깊은 성찰이며, 발견이다. 크리스챤은 특히 내가 한 체험과 내가 받은 것이 참이라는 영적 교만이나 아집에 사로잡혀 있어도 안되지만 영적인 면에서 전혀 모르는 문외한이 되어서도 안 된다.

무엇보다  일명 ‘직통계시’라는 자신 안에서 들려지는 내적인 음성에 사로잡혀 남의 충고를 아예 무시하거나  영을 분별할줄 안다며, 상대에 관해 거리낌 없이 영적인 상태를 판단하는 자들의 말에는 절대 귀 기울이지 말아야한다. 속히 그들에게서 떠나는 것이 유익이다.

분별은 중요하다. 자신의 영적 상태와 교회의 영적 상태를 볼 줄 아는 이 귀한 지혜야 말로 갈수록 혼탁해지는 이 시대에 가장 중요하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1)사도 시대 이후 이 세대의 영적 분별은 더욱 중요하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의 성령강림 사건은 놀라운 일이며 하나님의 크신 은총이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성령의 활동하심은 믿는 자들에게 계속해서 나타났다. 많은 사람들이 성령의 사람임을 자처하며 일어났지만 그들의 결과와 성취된 일에 있어 모두가 성령의 사람은 아니었다. 사단은 끊임없이 교회 내에서 크리스챤 공동체 내에서 활동하며 유혹한다. 사단이 가장 즐겨 하는 방법이 바로 복음을 유대율법주의와 신율법주의(혼합복음)에 가둬놓으려 한다는 것과 신비적 체험과 은사란 명분을 이용하는 것이다. 이 방법은 말씀 속에서 여전히 자유함을 맛보지 못한 성도들과 표적에 목말라하는 성도들을 유혹하는데 가장 좋은 방편이기도 하다.


첫째로 영적 분별을 말함에 있어 바울이 언급한 은사들(고전12:4-10)중 일부 은사자들이 주장하는 영들을 분별하는 은사만을 강조할 수 없다.


지혜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으로 역사하는 성령의 은사도 분별함에 있어서는 초석이 되는 은사이다. 은사자의 영이 은사자에 의해 제재를 받듯이(고전14:32) 모든 은사는 서로 균형적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지혜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에 관한 은사는 성경 말씀의 의도와 섭리하심 그리고 성경말씀의 내용과 의미를 바르게 깨닫게 하여 삶 속에서 지혜롭게 적용시키는 은사로서 폄하 받을 은사들이 아니다.



둘째로 개인적인 신비체험과 그에 따른 보여지는 은사에 치중하는 것은 위험하다.


많은 신앙인들이 영적으로 피폐해지는 까닭은 보여지는 신앙을 따름에서 기인하는 경우가 많다.

신비체험을 많이 했다는 다수의 사람들의 공통점은 은사위주로 흐르는 경향이 짙다. 여기에 많은

크리스챤들이 그들이 가졌다는 은사에 자신도 활용 되어지기를 원하며 의지하게 된다. 예수점쟁이란 말들이 그냥 나온 말이 아님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어떠한 일에 있어 먼저 주께 무릎 꿇어 기도하기를 가르치기 보다는 사람을 의지케 하는 것을 방치하며 오히려 그러한 일을 독려하는 일까지 스스럼없이 행하는 이들은 참 은사자가 아님을 분명히 인지해야 한다. 직접적인 계시라 불려지는 근거 없는 은사를 성경 위의 선생으로 두는 사람들이 적잖게 있음 또한 알아야 한다.

영적으로 이들에게 매인바 된 사람들은 쉽게 헤어나오질 못하고, 늘 이러한 선생들의 젖을 찾는다.

이는 아주 어리석은 신앙이다.


셋째로 천국과 지옥에 관한 넘쳐나는 간증 글에 대한 지나친 관심은 영적 성장에 결코 도움이 될 수 없다.


육이 죽은 후에 가는 천국(낙원)에 대한 지대한 관심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불신자나 믿는 자나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 천국 간증 글이 불신자들에겐 주님께 인도되는 계기로, 믿는 자들에겐 위로와 소망을 줄 수 있는 긍정적인 면도 없지 않아 있으나 많은 부작용 또한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가장 큰 부작용은 복음을 신비적 체험신앙, 기복신앙, 환상신앙으로 왜곡되게 만든다는 점이다.


-다음은 국제종교연구소(탁지원소장)의 현대종교에 실린 기사내용이다.-


1980년대 후반, 한국교계는'천국성회'와 '천국간증'등 천국여행 간증이 전국을 휩쓰는 통에 몸살을 앓았었다. 특히 『내가 본 천국』의 저자이자 비성경적이고 불건전신비주의라는 비판을 받았던 펄시 콜레가 88년 5월 한국에서의 집회를 다녀간 이후에 이경수, 이장수, 박영문, 박현, 성경애, 이경순 등 천국간증자들이 기승을 부렸었다. 더구나 펄시콜레를 초청해 함께 집회를 인도했던 사람이 지금은 이단으로 규정된 이초석, 김모애 부부였으며, 펄시콜레의 저서 『100가지 천국 비밀』을 번역한 이장림 씨가 다미선교회를 이끌며 1992년 휴거소동을 일으켰던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당시 이로 인해 나타났던 폐해는 말할 수 없을 지경으로 개인적인 삶이 망가진 것은 물론이고, 이후 교회에서는 요한계시록은 물론 종말론에 대해 거론하는 것조차 어려워졌다. 사후세계를 말하는 천국간증은 누구나 궁금해하는 주제이기에 그 열기가 식을 줄 모르고 오늘까지 계속되고 있다. 98년 만민중앙교회 이재록 씨가 주장한 천국의 보좌임재설과 샘터교회 김정희 씨(2002년 사망)의 천국간증, 천안주찬양교회 김성광 씨(본지 2003년 8월호)의 입신교육 등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단.사이비 뿐만 아니라 기성교회에도 '천국간증'이 범람하고 있어 성도들의 각별한 주의가 요구되는 것이 사실이다.


이 외에 냉동실에서 3일만에 살아나왔다는 모권사의 간증은 병원을 밝히지 않는 다는 구설수에 올랐다가 결국 거짓으로 판명되었다. 여의도00교회에서 문제시 되었던 처녀부활사건도 거짓으로 밝혀진 바 있다.

-국제종교연구소(탁지원소장)의 현대종교-


위의 기사내용 외에도 90년대 초반에 많은 교회를 순회하며 간증했던 인천모교회의 어린 쌍둥이형제들이 보았다는 천국과 지옥에 관한 간증도 있었다. 그 아이들이 만났다는 예수는 한국의 통일이 90년대에 이루어진다고 말한 내용도 있다. 거기에 그들이 받았다는 중동지역의 언어와 방언 글들 또한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몇 년 전부터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구00집사의 천국간증 또한 여러 구설수에 오르고 있는 상황에서 이러한 증빙되지 않은 간증자들을 무분별하게 불러들인 목사들의 책임 또한 묻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이다. 간증자들을 세워 당장에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기만 하면 된다는 한탕주의가 몰고 올 파장은 두고두고 좋지 않은 결과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영적인 리더자들은 주지해야 한다. 만일 그러한 간증자들이 허구이고 사이비였음이 세상 모두가 알도록 드러난다면 교회는 불신자들로 하여금 사이비라는 비난의 화살을 피할 수 없는 동시에 교회들 스스로가 오히려 전도 길을 막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본질이 아닌, 비본질적인 즉 부차적인 것에 열광하게 만드는 것이 과연 주님이 원하시는 전도의 한 방편인가 심각하게 고려할 필요가 있다. 또한 일시적인 감정적 희열과 성령의 감동가운데 전적으로 내려주시는 은혜는 분별해야 한다. 어떤 간증들은 비성경적이기까지 한 이러한 간증자들을 왜 많은 한국교회지도자들이 계속 세우는 가를 한번쯤은 생각해보아야 한다. 성경 속에 나타난 예수보다도 개인적인 체험바탕의 예수에게서 더 큰 희열을 느낀다면 자신의 신앙을 점검해 봐야 한다. 여기에는 항상 영적 함정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목사님은 '달콤한 유혹이긴 하다'는 솔직한 고백을 남겼다. 그들이 만났다는 예수가 현 교회 지도자들의 구미에 맞는 말만 해주기 때문이다. 헌금과 십일조강조, 목사에 대한 순종강조, 거기에 불신자들에게도 눈이 확 뜨이는 천국과 지옥에 관한 내용들이니 말이다.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고전1:22~23)

   


요즘 카페에서 1만에 가까운 회원을 자랑할 만큼 많은 크리스챤을 열광케 만든 토마스주남의 '천국은 확실히 있다'란 책도 천국과 지옥에 관한 내용이다. 천국의 모습이 마치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상류층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은 천국의 장면들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이는 저자가 원하는 이 세상에서의 꿈과 같은 삶(동화같은 삶)을 천국의 모습으로 그대로 저자의 환상으론 녹아내린 듯한 인상을 가질 수밖에 없다.  지금의 세상과 별다르지 않은 천국의 모습을 그냥 넘어간다 하더라도 저자의 고백들과 성서에서 말하는 것과 상통하지 않는다는 점이 곳곳에 눈에 띈다는 점이다. 거기에 저자 자신의 일상적이지 못한 몸짓에서는 더더욱 하나님의 임재란 것을 느낄 수 없다. 이는 어찌 보면 무속인의 신들림 같은 현상과도 흡사하다.


-여기에서 비성경적인 책 속의 내용을 살펴봄으로서 이 책의 저자가 자신에게 역사한 거짓된 환상을 얼마나 분별하지 못하고 있는가에 대한 근거를 생각해보고자 한다.-


(몇 년 전부터 성도들 사이에서 지금까지 여전히 큰 관심을 일으키는 책이기에 비록 내용이 길어진다 하더라고 이 책에 관한 나름대로의 생각을 첨가함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P50


진동이 가라앉으면서 주님은 내 방을 떠나셨습니다.


-P68


'내가 지금까지 해왔던 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웃고 비명을 지르고 울고 몸을 흔들고

땀을 흘리는 일을 번갈아 하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P150


두 세시간 동안 몸이 심하게 진동한 후에는 현기증이 납니다. 나는 정신이 빙빙 도는 것 같고

심한 어지러움을 느낍니다. 때로 이 느낌이 너무나 강하면 걷기조차 힘들 정도가 됩니다.

내 삶에 주님의 기름 부으심이 한 번 임하면 그 위력으로 인해 나는 때로 며칠 동안 음식을

먹지 못했습니다. 나는 수면 부족과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한 탓에 기운이 없고 몸이 여위어

갔습니다. 자주 구역질을 했고, 배와 관절에 통증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매일

나를 찾아 오셨다가 떠나시기 전에 나의 통증을 치료해 주시곤 했습니다.


-P333


'이같이 유별난 일은 나를 아주 지치게 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내가 주님 앞에서 일어섰다

무릎 꿇는 동작을 한 차례에 일곱 번씩 하게 하시고 잠시 쉬었다가 다시 반복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P335


'내 몸은 흔들리고 경련을 일으키며 들어 올려지고 땀이 마구 흘러 내렸습니다.'



위의 내용 외에도 저자의 몸에 일어난 이와 같은 비슷한 표현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

무속인들의 말을 들어 보면 신이 들어오기 전에 상당한 육체적 떨림과 동시에 온 몸에 심한

경련이나 심한 움직임을 동반한 육체적 피로가 엄습한다. 그 후 신이 떠나면 그 모든 움직임은

일상으로 돌아온다. 저자의 이 '유별난' 현상들은 성령의 임재보다도 무속인이 말하는

귀신역사와 너무도 일치하는 점이 많다.


저자가 자신의 몸에 일어나는 진동에 관한 말씀으로 행전4:31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를 인용하였다. 이 말씀은 사람의 몸에 관한 진동을 표현함이 아니다. 이는 장소를 말함임을 알아야 한다. 베드로와 바울과 실라의 사건으로 볼 때 이는 주변 장소에 나타난 실제적 역사이다. 그 밖의 많은 진동에 관한 구절들도 모두 사람의 몸이 아닌 장소를 의미함을 알아야 한다. 저자의 표현대로라면, 큰 성령의 역사와 천사의 인도를 받았던 사도시대의 많은 신앙의 선배들 중에 적어도 저자의 몸에 일어나는 신들림 현상과도 비슷한 성령의 임재에 관한 언급이 있어야 하는데 단 한 명도 저자와 같은 현상에 관한 언급이 없다.


하나님의 영이 어떠한 몸의 일정한 움직임이나 이상한 몸짓을 한동안 지속한 후에 임한다는

내용은 성경을 통 털어 어디에서도 볼 수 없다. 다니엘이 이상을 보고 난 후 혼절한 일(다니엘8:27)같은 경우는 사람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큰 이상과 환상을 보고 난 이후에 육체에 나타난 증상이지, 이상을 보기 전에 미리 혼절하거나 앓아누운 것이 아님을 밝히 알아야 한다. 그러나 저자는 이와는 반대로 예수가 찾아오기 전 약 30분에서 그 이상의 시간을 늘 이상한 몸짓으로 흔들며 몸에 기운을 빼는 동작을 반복한다. 이는 주로 명상수련이 많은 인도나 무속신앙에서

말하는 영접술과 같은 것에 오히려 가깝다.

여기서 생각해야 될 부분이 과연 성령님이 이교도와 무속인들의 접신술과 같은 귀신의 역사와 거의 동일한 방법으로 역사하시는가 이다.


성령의 역사는 신들림 현상과 같은 행동과는 거리가 멀다. 물론 때로 성령의 큰 감동으로 기뻐 뛰며 춤을 출 수는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성령이 기쁨을 부어 주시기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또한  예배 중에 지체들을 어지럽히며 역사하시지는 않는다. 성령은 자유함과 이적의 영이시기도 하지만, 절제의 근본이 되는 분이며, 또한 상식(삶의 기본 예의 및 지식)을 아시는 분이시며, 질서의 영임을 알아야 한다.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살후2:9~12)


불의란 무엇인가 성경에서 말하는 불의는 바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과 ‘제대로 알려 하지 않는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전자는 불신자들에게 해당하는 것이요, 후자는 믿는자들에게 해당하는 것이다. 우리 지체된 모두는, 사도바울의 말을 듣고도 ‘이것이 정말그러한가’ 상고했던 베뢰아사람들처럼 항상 하나님을 ‘제대로 알아가기 위한’ 지적인, 영적인 것을 탐구하는 것에 노력해야 한다.


사단은 사단의 특징적인 역사가 있다. 제 아무리 성령의 역사를 잘 흉내 낸다 해도 분명 허점은 있는 것이다. 사단의 이러한 특징적인 역사는 바로 일상과 동 떨어진 비이성적인 행동과 비성경적인 역사이다. 이는 곧 웬만한 세상적인 상식으로도 알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즉 이유 없는 두려움, 그리고 외부의 강압 없이 심적, 육체적으로 힘들게 하거나 지치게 하는 것, 비상식적인 행동 등을 들 수 있다.


 -P69


저자가 처음 주님과 천국에 갔다 와서 나눈 대화 중 십일조에 관해 말하다.


'십일조를 하지 않는 자녀들은 불순종하는 자녀들이다'


저자가 만난 주님은 십일조를 하지 않는 자녀들을 불순종하는 자녀들이라고 못 박고 있다. 그렇다면 초대교인들과 십일조를 하고 있는 않는 서양교회들 즉 교회자체적으로 십일조를 정관화 또는 의무화하지 않고 있는 대부분의 개혁적인 서양교회 교인들은 모두가 불순종하는 자녀들인가 하는 점이다. 이는 곧 한국교인들과 일부 미국교회 그리고 외국에서 십일조를 의무화하고 있는 한인교회에 몸담고 있는 교인들만 순종 잘하는 자녀들이란 결론이 도출된다. ‘사랑’이 식은 자녀들을 문책하는 말이었다면 이해될 수 있는 말이지만, 물질적인 측면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을 불순종하는 자녀들로 예수가 말했다는 사실은 납득하기가 힘들다.


한국교회는 장로교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교단이 십일조를 당연하다는 듯이 헌납하고는 있지만, 구약의 십일조정신대로 대부분의 헌금을 구제에 지출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운영과 목회자의 생활비, 그리고 예배당건축에 주로 쓰여지고 있다. 건축헌금은 건축헌금대로, 선교헌금은 선교헌금대로, 구제헌금은 구제헌금대로, 명목헌금을 하고 있음에도 십일조 또한 건축헌금으로 때론 교회행사비로 십일조의 사용처가 명확하지 않다는 것은 대다수의 교인들도 아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저자가 만난 주님이란 분은 그러한 현 교회사정을 잘 알고 계실 것인 만큼 말라기선지자와 같이 당시 랍비나 제사장들에게 외쳤던 것처럼 자녀들이 헌납한 십일조를 십일조같이 쓰지 못한 지도자들을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지 말라’고 했었어야 더욱 신빙성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P384~P386


여기에서 저자는 예배인도자의 동의 없이 예배 중에 찬양대가 있는 곳으로 나아가 갑자기 춤을 춘다. 물론 저자는 성령의 감동이었다 말한다. 이런 급작스런 저자의 행동을 목사가 저지시키게 된다. 여기서 집에 돌아 온 저자가 만났다는 주님의 말을 봅시다.

'사탄이 그 안에 들어갔기 때문에 그가 너를 믿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나의 성령을 소멸시켰다. 너는 그 교회에 다시는 가지 말아라'

이로 인해 그녀와 남편은 4년 동안 몸담아 왔던 교회를 떠나게 됐다는 내용이다.


목회자는 장로와 함께 예배뿐 아니라 교회내의 질서를 치리하는 은사적인 직분자이다.



그러한 목회자의 예배중 절제에 대한 의미에서 나온 행동을 저자가 만났다는 주님은 그 목사의 행위에 대해 '사탄'의 행위이며 '성령을 소멸시켰다'라 말한다. 하나님은 자유한 하나님이시기도 하지만, 질서의 하나님이며 절제시키시는 하나님이심을 누차 강조해도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 이러한 내용들을 보면서도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미 비본질적인 것에 완전히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이러한 천국체험이란 간증 매체나 신비적인 은사나 간증을 통해 사단이 이루고자 하는 것은 바로 본질에서 벗어난 비본질적인 것에 관심을 집중시키려 함에 있다. 이는 사단이 구약시대에서부터 신약의 시대인 지금에 이르기까지 반복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계략임을 깨달아야 한다.


토마스주남의 '천국은 확실히 있다'란 책의 비본질적인 내용에 지금까지도 열광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마지막으로 저자가 즐겨 인용했던 계시록 속의 또 다른 말씀으로 끝마치고자 한다.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계18:4)




- 또 하나의 의문 베리칩-



사단의 또 하나의 특징은 어떠한 방법을 통해서든지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급함을 가지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한 궤계를 경계하는 말씀을 바울은 이미 서신을 통해 기록하였다.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 혹 영으로나 혹 말로나 혹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쉬 동심

하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아니 할 그것이라'(살후2:1~2)


위의 서신 내용에서 바울은 재림에 관한 확고한 자신의 심정을 밝히고 있다. 예수의 재림은 결코 누군가 제시한 기한이나 때에 오는 것이 아니며, 또한 누군가 사도의 이름으로 혹은 영으로 말한다

 하더라도 쉬 동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다. 얼마전에도 베리칩으로 인해 재림교회나 휴거를 신봉하는 이들로 인해 더욱 이슈화된 베리칩이 666이라는 주장들에 동요하는 사람들에게도 필요한 말씀이라 하겠다.


그러한 주장을 펴는 자들이 영으로 말한다 하더라도 사도의 이름을 빌어 말한다 하더라도 즉 성경구절을 이용하여 나타낸다 하더라도 결코 휩쓸리지 말란 의미이다. 지금의 베리칩은 메모리기능만을 갖춘 것으로 이 칩이 666이라 주장하는 사람들의 말대로 유전자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사람의 유전자와 같은 용도로 칩이 사용되기 위해서는 훨씬 업그레이드된 칩으로 개발되어야 하며, 기존에 팔에 칩을 이식한 사람들도 다시 재이식해야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설사 베리칩이 666의 증표라고 하더라도 이 통제장치가 모든 사람들에게 사용되어지기에는 현재로서는 전무하다. 기독인뿐만아니라 일반사람들도 칩 이식에 대해 심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강제적인 요소가 없는 한 누구도 강제적으로 이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이 있기 위해서는 전 세계적으로 단일정보망과 세계초유의 단일정부가 들어서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각기 나라별로 독립된 정부가 있고, 독립된 정치가 있기에 사실상 현재로서는 꿈에서나 가능한 일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세계적인 정세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그 동향을 보자면 이러한 문제가 급한 일인지 아니면 아직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는 문제인지를 대략적으로 알 수가 있다. 뭔가 과학적으로 이슈가 될 만한 일이 생길 경우 자주 이러한 점을 목격하게 되는데, 쉽게 동요하고 당장말세가 온 것처럼 불안해하지 말아야한다. 


계13:8절 말씀처럼 녹명되지 못 한자들은 짐승에게 경배할 것이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은

결코 사단의 노예로 전락될 수 없음을 증거하고 있다.


또한 대부분의 휴거에 집착하는 교회나 사람들은 대부분이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을 신봉하는 사람들로 학자에 따라 예수재림에 대한 여러 학설이 있다는 것 또한 참고해야 된다고 생각된다. 우리나라도 교단에 따라 천년설에 대한 학설 중에 세대주의적 전천년설만이 아니라 역사적전천년설이나 무천년설이나 후천년설등을 인정하는 교단이 있는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당연한 것처럼 알고 있는 이 세대주의적 전천년설도 하나의 학설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구원 받은 이후에 행실에 따라 상급이 주어짐은 이미 성경에 기록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점은 주님이 명한 선한 행실(사랑)보다 어떠한 제도적인 행위 중심(기복적인 변질된 복음과 율법주의)이나  헌금(십일조)에 대한 강조내용을 유명 간증자들이나 부흥목사들에게 자주 듣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러한 내용들은 일단 의심해야 한다.


그들이 만났다는 예수가 그의 자녀들을 다시 율법 속에 가두려는 말을 했다는 이러한 내용에 난 찬성 할 수 없다. 율법의 본질인 예수께서 예수님 스스로가 완성한 율법을 다시 뒤로 돌리는 말을 하셨다는 것은 이해되지 않는 일이라 본인은 생각된다. 성경이 말하는 참 하나님과의 관계는 신약시대에 와서 예수와 나와의 관계로서 완성되었다. 구약에서 제시하는  나와 율법과 제사, 제물과의 관계가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구약의 율법은 예수라는 큰 빛으로 인해 그 빛 안에 녹아 든 작은 빛의 개념으로 보는 것이 옳다. 즉 새포도주는 새부대에 담아야 하는 것처럼 이전에 낡은 부대에 다시 담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예수라는 ‘새부대’ 즉 그림자가 아닌 ‘빛’으로 오셨기 때문이다. 율법에 관한 논의는  여러 곳에서 제시되고 있는 만큼 그 의견들 또한 분분하다.


그러나 많은 목회자들이 설교의 참고서로 삼고 있는 매튜헨리도 자신의 주석을 통해 예수의 십자가복음을 믿고 성령을 받았음에도 다시 유대의 율법적인 관습을 버리지 못한 자들에게 ‘신앙의 퇴보’라는 표현으로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하는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말하고 있으며, 그 외 여러 서신서를 통해 밝히 말하고 있다.


안타까운 점은 말씀의 본질인 예수의 이 ‘복음’을 순전한 복음 그대로 가르치지 못하고 수 십 년 동안 지금까지도 변질된 복음(기복,샤머니즘, 신율법주의)로 가르쳐 온 부흥사들이나 목회자들의 책임이 상당히 크다 할 수 있다. 잘못된 은사자들 또한 이러한 왜곡된 복음으로 말미암아 우후죽순처럼 늘어났다. 지금도 주위에서 ‘어느 기도원가면 용한 은사자를 만날 수 있다’라는 말을 쉽지 않게 들을 수 있다. 교인들이 이러한 샤머니즘적인 신앙관이 내재된 말을 거리낌 없이 하고 있다는 것에 심히 안타깝다. 목회자들이 수직적인 교회법과 교단에 얽매여 사실상 제대로 된 복음을 가르치지 못하고 있는 것 또한 심각한 문제이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후로, 율법의 굴레가 아닌 새로운 법, 즉 ‘사랑’이란 한 명제 안에 그 분의 모든 뜻이 녹아있는 놀라운 이 ‘복음’을 안고 살아가게 되었다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기쁨이요, 형용할 수 없는 감격스런 일임에도 지금 한국의 많은 교인들은 잘못된 지도자들과 잘못된 은사자들로 인해 진리 안에서 참자유함을 소유하는 삶이 아닌, 공동체에 필요한 최소한의 제도적인 조직체계를 이용한 강압과 헌금강요가 새로운 율법의 굴레가 되어 어깨에는 큰 멍에를 지고 영적으로는 헤어나오지도 못할 정도로 병들어 가고 있다.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히10:1)



(2)분별의 방법



첫째로 사단도 성령을 흉내 낸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사단도 방언을 줄 수 있고, 고칠 수 있으며, 능력을 나타낼 수 있음을 주시해야 한다.

또한 사단도 하나님의 말씀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성경은 어떠한 신비적인 은사보다도 말씀 속에서의 하나님 섬김을 강조하였다.


'너희 중에 선지자나 꿈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네게 보이고, 네게 말하기를 네가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좇아 섬기자 하며 이적과 기사가 그 말대로 이룰지라도 너는

그 선지자나 꿈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순종하며 그를 경외하며 그 명령을 지키며 그 목소리를 청종하며

그를 섬기며 그에게 부종하고'(신13:1~4)


위의 말씀에서 기록자는 이적과 기사가 거짓 선지자의 말대로 성취된다 해도 그런 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말라고 기록했다. '너희 중에' 이것은 곧 타 민족의 우상 숭배자를 말함이 아닌

당시 이스라엘 민족 내에서 일어난 거짓선지자를 말함이다. 그들이 여호와를 몰라서 일어났다는 의미가 아니란 점에서 주의 할만하다. 또한 '다른 신' 이란 의미를 지금의 성령시대에 적용한다면

말씀에서 벗어난 신비신앙을 말할 수 있다. 현 교인들이 예수의 이름 외에 다른 이름은 쉽게 받아 들이진 않지만, 모두가 아는 같은 말씀을 가지고 거기에 가장 예민한 신비적인 요소와 기적과 같은 은사적인 능력으로 함께 온다면 쉽게 분간하지 못하고 휩쓸리게 됨을 지적할 수 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너희에게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말라 그들은 너희에게 헛된 것을 가르치나니, 그들이 말하는 묵시는 자기의 마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렘23:7)


위에 예레미야 선지서에 나타난 말씀과 같이 옛 이스라엘 민족내에도 거짓 예언자가 있었던처럼

현 시대에도 자기의 마음과 생각에서 말미암은 환각적인 묵시(계시)나 계산적인 예언이 많다는 것을 깊이 있게 고려해야 한다. 


흔히 은사자들이 가장 기본적인 은사 중에 하나라고 말하는 방언도 바로 사단이 애용하는 하나의 도구란 사실을 교회사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1776년 미국 뉴욕주 트로이 부근에 앤 리가 설립한 쉐이커 공동체는 남녀가 나체로 춤을 추며 방언을 했다. 이단적인 카톨릭 사도교회에서도 방언을 했다. 몰몬교의 장로들도 미국 유타주의

그들의 성전을 봉헌할 때 방언을 했다. (Robert G. Gromacki, The Modern Tongues Movement, pp. 5-29; Schwab, pp. 4-7)



지금의 우리 한국의 수많은 신비주의를 쫓는 이단종파들에게도 나타나는 이 방언이란 은사는 그들에게서도 하늘의 은사라며 활용 되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방언이나 그 외 방언을 동반한 은사들 모두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참된 은사라고 사실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객관적 증거는 없다.

그러나 이러한 은사자들의 교회 공동체내에서의 모습 속에서 이들이 받은 영이 하나님의 영인가 아니면 거짓된 영인가를 다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분별할 수 있다. 특히 강요적으로 은사를 목적으로 하는 집회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참된 집회나 모임이라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둘째로 말씀과 함께 하는 삶 속에서 기도와 경험을 바탕으로 한 영적 훈련에 있다.


어떻게 분별해야 할 것인가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영적 분별의 원천은 영적 정결함에 있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3:3)


성령이 모든 면에서 선생이 되게 하려면 자신을 비워야만 하는 자아의 몸부림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나의 자아는 고개를 숙이고 오직 주의 영만이 나의 확실한 선생이 되시는 것이다. 이 문제에 정통한 사람은 없다. 사도바울도 ‘날마다 죽는다’란 표현을 썼던 것처럼 누구도 자아와의 싸움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항상 이긴다고 보장할 수도 없다. 늘 성령의 인도하심을 간구 할 수밖에 없는 나약한 사람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은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사람으로 자신을 변모시키는 놀라운 주님의 은총이기도

하다. 곧 주님의 모습을 닮아가는 삶을 살고자 몸부림 칠 때 성령께서는 나를 가르치시며 이끌게

되는 것이다.(글을 쓰고 있는 본인도 이러한 면에서 늘 부족함을 절감한다.)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요일5:7)


자아가 완전히 바닥에 주저앉았을 때 성령은 하늘의 일들을 증거하기 시작하신다. 개인적인 역사로는 방언과 통변과 통역, 예언의 은사를 통해 내적인 음성으로 들려 질 수도 있으며,  공적인 역사로는 성령의 역사를 증거하는 책이나 매개체를 통해 역사 할 수도 있다. 여기서의 매개체는 하나님이 인정하는 리더일 수도 있으며, 먼저 살다간 신앙의 선배의 유산을 통해서도 보여질 수 있다. 즉 성령은 내적인 영의 음성으로도 나타시지만, 일종의 매체(사람이나 서적들)을 이용해서 마음의 감동으로 증거하시기도 한다.


고든스미스는 분별의 기술이란 책머리를 통해 '분별은 하나님과 춤을 추는 것이다'란 표현을 썼다.

하나님과 춤을 춘다는 것은 곧 성령과의 일치 된 삶을 말하는 것이다. 성령과 일치되는 삶이란

어떠한 초자연적인 신비적 요소를 말함이 아니다. 이는 성령의 열매(갈5:22~23)를 향한 삶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고든스미스의 고백은 참으로 멋진 고백이라 여겨진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는 최고의 도구이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기도는

일방적인 나의 간구로 끝나는 것이 아닌 듣는 기도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기도에 익숙하지 않은

크리스챤들은 기도에 대한 훈련도 필요하다. 때론 단 몇 분의 침묵기도가 몇 시간 동안 소리 높여 외쳐댄 기도보다도 크게 느껴질 때가 있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16:13)


예수께서 아버지의 뜻과 상충되는 교훈을 주시지 않은 것처럼 성령께서도 아버지와 예수님의 뜻에

어긋나는 인도 사역을 하시지 않는다. 이는 성경에서 나타난 그 이외의 ‘신비현상’이나 ‘계시’를 말한다. 특히 ‘성령님이 내게 직접 말씀하신다’는 자들을 경계해야 하며, 영분별을 할 줄 안다면서 다른 지체의 영적인 상태를 쉽게 말하며 정죄하거나 가르치려하는 자들을 경계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린 요즘 성령의 이름을 빙자하여 복음의

본질을 왜곡시키는 거짓예언 활동에 현혹되지 말아야 한다(톰슨관주역)


자아가 완전히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힌 사람의 특징은 자신이 스스로 나서서 하나님의 일을 하려는

것이 아닌 성령께서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신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절제가 반드시 동반되어야 한다.  간혹 성령의 뜨거운 임재를 맛 본 사람들이 교회에서 직분자들의 충고와 권면을 무시하는 경우를 볼 수 있는데 이는 절제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무지함이다.


참 영의 메시지와 은사를 받았다 증거 할지라도 절제와 더불어 교회와 지체들에게 덕을 세우지 못한다면 이는 낙엽과 같이 이리저리 떠돌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지게 된다. 이러한 경우 대부분의 은사자들이 교회공동체 생활에 적응을 하지 못하고 기도원 같은 곳으로 은신하게 되는 것을 보게 된다. 은사자들을 대하는 직분자들과 지체들의 태도 또한 중요하다. 직분자들과 지체들은 철저한 검증 없이 은사자들을 신비주의라 정죄하며 소외시키는 것도 온당하지 못하며 반대로 검증 없이 무조건 수용하는 것도 문제된다.  우린 주로 스스로 사역을 감당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므로 늘 성령께 의지하려는 성찰이 있어야만 한다. 직분자들 뿐만 아니라 영적 은사자들의 삶은 사역위주가 아닌 주님과의 관계 속에서 늘 참다운 생수를 공급 받아야 한다.


성경의 선지자적 예언들이 주로 대언자의 입장에서 이스라엘을 향한 선포였다면 현 시대의 은사적 예언은 주로 개인을 향한 경우가 많다. 물론 상황에 따라서 이 시대를 향한 책망도 많이 나타나고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분명한 것은 성령의 사역은 믿는 자들을 향한 평강이요, 예수를 통한 구원사역임을 확실하게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영은 살리는 영이시며, 결코 죽이는 영이 아니며, 겁을 주거나 공포감을 주시는 영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이 점에 있어 성령의 사람이라 칭하며 믿는 자들에게 겁을 주며 권위주의 의식을 강하게 드러내는 자가 있다면 이는 성령의 역사가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고든스미스는 분별함에 있어서 누구보다 깊은 통찰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의견들을

통해 분별하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가장 기본적인 태도가 무엇인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경험하는 내적인 격려의 목소리가 모두 하나님의 목소리인 것은 아니다. 우리가 받는 모든

영감을 성령께서 주시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성령의 주관적인 증거는 성경을 통해서 그리고

교회 안에서 주시는 성령의 객관적인 증거를 통해 균형이 잡혀야 한다는 것이다.'


'근본적인 헌신과 성경에 의해 새로워진 마음, 그리스도인 공동체 속의 삶이다. 이것은 모두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우리 삶에 반드시 필요한 요소이다.'


'성령의 내적 증거가 존재한다는 것을 확신한다고 해서 모든 내적 자극이나 감정이 하나님의

성령으로부터 온다는 말은 아니다 살전5:19절에서 사도바울은 "성령의 불을 끄지 마십시요"(영역)

라고 말한 다음 21절에서는 "모든 것을 분간"(영역)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결론-




영적 분별력이란 궁극적으로 크리스챤 공동체 안에서 행해지는 사단의 계략을 간파할 수 있는 지혜를 말함이다. 이 분별의 지혜는 성령의 특별한 은사(고전12)로 오는 경우도 있지만, 많은 부분 영적인 훈련과 경험을 통한 지혜의 말씀으로 오는 경우가 많다. 영적 분별의 기본은 받는 것이 아닌 듣는 것에 있다 할 수 있다. 듣는 이들은 생각하게 되고 여기에 말씀적용이 이루어져야 한다. 말씀적용에서 아무런 흠이 없다면 자신이 활용하고자 하는 분별에 대한 행동이 공동체내에서 덕이 되는 것인가를 살펴야 한다. 나에게만 덕이 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나'를 나타내는 사단의 도구로 전락할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분별력의 사람은 독선적이거나 배타적이어서도 안 되며 늘 자신을 향한 다른 이견을 들을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하다. 만일 나에게 나타난 세밀한 성령의 음성이나 깨닫게 하는 말씀이 있다 하더라도 그 내용들이 진리 위에 굳게 서있는 교회내의 직분자들과 은사자들이 거부하거나 인정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깊이 있게 고려할 줄 아는 자세도 필요하다 하겠다. 그러나 본질이 흐려진 왜곡된 복음과 권위의식만으로 충만한 지도자, 또는 직분자들에게 독립적인 직분에 대한 다양함을 인정하지 않고 어떠한 직분을 특별화하거나 헌금강요 및 착취에 가까운 행동들에는 단호히 대처해야 마땅하다. 우리는 분별을 통해 나의 신앙적 삶이 교회라는 주님의 공동체내에서의 참된 순종의 삶인가 아닌가를 살펴야 하고, 또한 참 복음에는 한없는 순종자로, 거짓 복음에는 방관자가 아닌 주님의 담대한 군사로서 확실한 목소리를 발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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