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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목사의 위상, 바로 정립할 때

에반젤(복음) 2020. 2. 23. 21:35



원로목사의 위상, 바로 정립할 때

 


지금 한국교회는 또 하나의 새로운 풍속도(風俗圖)를 그려주고 있다. 원로목사와 담임목사의 갈등,바로 그것이다. 6 ? 25 사변 때 대거 월남한 교인들에 의해 한국교회는 괄목할만한 성장을 했다. 고향과 정든 교회를 빼앗긴 그들이 도처에 사력을 다해 교회를 세움으로 남한 교회는 30배,60배,100배로 결실케 되었다. 특히 앞장서서 모든 물질과 몸을 다 바치다 싶이하여 설립한 목회자들은 그 교회야 말로 생명 전부라고 할 정도로 짙은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교단 헌법에 의해 70세를 정년으로 해서 은퇴하고 원로목사가 제도화되기 시작한 70년대,80년대부터 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원로목사의 입장에서 보면 전 생을 바쳐 이룩한 교회에 대한 지나친 애착심과 새로 부임한 담임목사 간에 보이지 않는 세력 마찰은 어느 의미에서 자연스러운 일일지 모른다. 의술의 발달로 한국인의 수명이 길어짐으로 70세 정년을 넘어선 나이지만 아직도 높은 산을 청년회원들과 오를 정도로 펄펄한 건강을 가진 분들이 수두룩하다.
그런데도 생명과 다름없는 교회를 떠나 강제로 고려장을 지내듯 어느 아파트에 처박아 두는 것은 견딜 수없는 노릇일 것이다. 그러다가 자연히 교회에 관심을 나타내게 되면 담임목사 쪽에서는 간섭으로 여겨져 과잉반응을 보이게 되는 것이 처음에 일어나는 마찰이다. 그것이 점점 누적되다 보면 마침내 큰 덩어리로 화하여 교회를 위기로 몰아넣고는 하는 것이 여기저기서 나타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한국장로교 각 교단의 으뜸이 되는 영락교회(통합측),충현교회(합동측),경동교회(기장측)가 시작이라 할 수 있고, 몇 년 전에는 광성교회의 원로목사와 후임목사의 갈등이 결국 교회가 양분되고 법적 분쟁으로 이어지는 보기 흉한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그 이후 크고 작은 수많은 교회들이 원로목사와 담임목사 간에 갈등으로 그가 선임한 후임자들이 사임하고 있다는 것은 너무나 가슴 아픈 일이다.
더욱 원로목사 수가 급증하고 있기에 앞으로 이러한 갈등들은 더욱 심화될 것이 분명하다.필자가 속한 예장 통합측 서울노회만도 107교회 중 13명이나 되고 필자의 동기들(장신대63회) 56명 중 20여명이 원로목사가 되어 있는 형편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한국교회가 원로목사의 위상을 시급히 정립할 때가 온 것이다. 원로목사를 어떻게 예우해야 되며, 원로목사는 자기가 생명처럼 여기는 교회와, 자기에 이어 목회하는 후임목사에 대해 어떻게 대해야 교회에 덕이 될 것인가를 분명히 해야 할 시기가 온 것이다.

원로목사가 교회 사역에서 떠나야 교회가 새로워진다.

원로목사와 담임목사 간에 갈등의 원인 중의 하나가 한국사회는 공의보다는 인정에 약하다는 점이다. 표면적으로는 옳고 그름을 따지면서도 사실 큰 실세를 이루는 것은 지연(地緣),학연(學綠),혈연(血緣)이다. 같은 고향,같은 학교 출신, 같은 친척이라는 이유만으로 할 수 없는 일도 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한국사회이다.
그런 의미에서 원로목사는 20년,30년을 장기목회 하는 동안 각 가정의 온갖 애환과 함께 하며 끈끈한 정을 맺기 마련이다. 결혼주례,돌,유아세례,자녀합격,가족의 사고와 입원,부모님의 장례 등 온갖 슬픔과 기쁨에 동참하는 동안 깊은 정이 쌓인다. 그런 끈끈한 정이, 구태의연한 설교를 하든지,목회행정이 짜임새가 없어 무질서하든지,좀체 교회가 성장이 되지 못한 채 여러 해가 흐를지라도 감히 정면으로 따질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아니, 그 목회자에게서 수세(水洗)를 하고 결혼 주례를 받은 처지요,더욱 그 목사의 안수 하에 중직(重職)이 되었다면 때로 못마땅한 일이 있더라도 감히 고개를 들고 직언(直言)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러다가 은퇴하는 날이면 아마 상당히 자유로움을 느낄 것이다.
새로 부임한 담임목사가 우유부단하던 전임자와는 달리 적극적이고 단호하며,설교도 화려하고도 명쾌하며 오늘의 상황에 맞아 떨어지도록 외칠 때,그리고 교회는 날로 성장하여 조직이 방대하여 갈 때,얼마나 신이 나겠는가?
그러나 그것도 잠깐,담임목사가 급성장을 위해 연달아 무슨 사순절 40일 새벽기도회,전도폭발,총동원주일 몇 천 명 돌파 등등 이벤트 위주로 교인들을 몰아세울 때, 당회장실은 으리으리하게 꾸미고,무슨 예식 때면 화려한 박사가운 입기를 즐겨할 때,승용차가 교인들의 수준에 비해 너무 고급스러워 보이기 시작할 때, 그리고 가까이 가면 웨인지 차가운 느낌이 들기 시작할 때,그때부터 도시의 차가움에 지친 사람이 고향의 포근한 맛을 그리워하듯 무능한 것 같아도 한없이 포용해주던 원로목사의 품이 새삼 그리워지게 마련이다.
바로 여기에서 지도력의 누수현상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또한 빛이 강하면 그늘이 진하게 생기듯이 강한 지도자 밑에서 반대측도 있게 마련이다. 그중 어느 분이 원로목사를 찾아가 담임목사의 문제를 앞뒤는 생략하고 알맹이에 말을 보태서 쇼킹하게 늘어놓기도 한다. 너무 과시적인 데만 열을 올리므로 생기는 불화,독단적인 태도,호화사치판의 재정운영, 그리고 비윤리적으로 보이는 개인적인 이야기들을 나열한다.
이 때 만약 원로목사가 그 미끼에 넘어가 ‘그래서야 되는가?’라는 한 마디를 했다면 이 사람은 교회에 돌아가 ‘원로목사님이 담임목사에 대해 대단히 노여워 하더라’고 과장해서 퍼트릴 것이다. 이 말은 반드시 담임목사에게 전달될 것이고 담임목사는 ‘아니,목회를 맡겼으면 전적으로 일임해야지,왜 노인이 일일이 간섭인가?’라면서 대단히 화를 낼 것이요, 이 말도 원로목사에게 자연적으로 전해지기 마련이다.
가뜩이나 초창기 부임 당시에는 자주 찾아오던 담임목사가 자리가 잡혔다 싶은지 노골적으로 외면하고 있는 것에 소외감을 느끼던 차라 이런 말을 들을 때 노여움이 폭발하기 일쑤이다. ‘이름도 없는 자를 불러다 저만큼 키웠더니,은혜를 이런 식으로 갚는가. 그새 호랑이를 키웠구나’라는 식의 공방전이 계속되는 동안 사탄은 더 기승을 부리고 결국 교회는 어둔  골에 깊어 빠져들 것이다.
그 싸움에서는 아무 힘이 없어 보이던 원로목사가 힘이 있어 보이던 담임목사를 압도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인정이라는 무기 때문임을 발견하게 된다. 원로목사와 담임목사 간에 이런 갈등이 심화되면 결국 교회는 시험에 빠지면서 분열의 위기를 만나게 되고 심함 경우에는 담임목사가 사임하거나 사회법정으로 비화되어 교회의 추태를 사회 앞에 보이게 되는 것이다.
아니 된다. 원로목사가 진정 교회와 양떼들을 사랑하거든 과감히 모든 사역에서 손을 떼야 한다. 그래야 후임목사가 자기 능력을 마음껏 꽃피울 수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을 점령 시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대권(大權)을 맡기시고 모세를 데려가셨다. 만약에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대권을 물려주고 함께 가나안 땅에 입국했더라면 모세의 권위에 눌리어서 여호수아는 지도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더 나가서 여호수아의 지도력이 부진할 때마다 모세를 향한 민중의 쏠림현상이 강하게 나타났을 것이 분명하다.
하나님이 이를 아시고 모세를 데려가셨던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 결과 여호수아는 몇 번의 실수가 있었지만 그러한 시련을 잘 극복함으로 엄청난 지도력을 나타냈고, 결국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엄청난 업적을 남겼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원로목사들은 후임자에게 목회권을 넘긴 이상 교회 제반 사역에서 멀어져야 교회의 덕이 되는 것이요, 후임자의 지도력이 강해질 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할 것이다. 목회자마다 다 스타일이 다르다. 자기가 선택한 사람이라도 자기와 같을 수가 없다. 그가 하나님의 뜻에 크게 위배되지 않는 한 될수록 간섭은 피해야 덕이 된다.
또한 어느 목회자나 모든 교인에게 만족을 줄 수가 없다. 그러므로 때로 불만을 가지고 일부러 온 자이든지,결혼주례를 했기에 인사차 왔든지,심한 경우에 당회원 몇 명이 목회자의 결정적인 실수를 가지고 집단불만을 표하러 왔든지 간에 담임목사 편에 서서 변호하고 순종하도록 권유하는 일이 필요하다. 그것이 곧 교회의 유익이 되는 것이요,이 소식을 전해들은 담임목사도 큰 감동과 선한 결심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런 원로목사를 오래 모시고 싶지 않은 담임이 누가 있겠는가?
또한 한 가지 부언하고 싶은 것은 설교 문제이다. 원로목사들 중에 은퇴한 후에 매주일 본 교회에 참석하고 자의든 타의든 간에 한 달에 한 번이든,아니면 더 자주 설교하는 경우를 본다. 장기목회 하던 입장에서 단번에 담임목사 체제로 변화되는 것은 교회성장에 혹 문제가 생길까 우려해서 하게 되는지 몰라도 아무래도 오래 끌어서는 안 될 일이라고 본다.
담임목사의 입장에서는 설교가 대단히 중요하다. 필자의 경험에서 보면 한 주간 지내는 동안에 그 주간에 반드시 해야 될 말씀이 있음을 발견한다. 성경연구나 기도하는 중이든, 누구와 상담을 하든지,혹은 심방을 하는 도중에 마음에 불붙는 말씀이 있다. 그것을 전하지 못한 채 원로목사가 설교를 해버린다면 교회에는 손해가 될 것이다.
주일 아침 설교가 은혜가 넘치면 한 주간 동안 교회의 모든 운영이나 각 가정이 윤활유를 칠한 것처럼 순조로운 느낌이 든다. 그러나 속된 말로 설교를 죽을 쑤고 나면 이상하게 여기저기서 시험의 기운이 싹트는 것을 발견한다. 그런 의미에서 담임자는 깊은 기도 속에서 양떼들을 살피며 필요한 자양분을 찾기 위해 애쓴다. 그런데 은퇴한 분이 그 시간을 차지해 버린다면 어찌될 것인가?
고(故) 임택진 목사는 “저는 23년 간 사역하던 청량리중앙교회를 교회를 그만두면서 분명히 공언하기를 ‘나는 이 교회 헌금의 의무는 하겠으나 출석의 의무는 안 하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좀체 안 갑니다. 작년에도 두 번 갔습니다. 잘 안 가는 이유는 담임목사님에게 부담이 되기 때문입니다. 교인도 될수록 안 만나려고 합니다. 주례를 해 준 교인들이 진심으로 ‘왜 아니 오느냐’고 아쉬워하는 말을 하지만,목사는 들리지 않는 말도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라고 했다.
이 말 속에 모든 해답이 들었다고 본다.
바울도 분파의 기운이 있는 고린도교회를 향해 권고하기를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3:4)”고 했다.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기고 교회를 향한 간섭을 줄이면 줄일수록 담임목사와 교회는 더욱 성숙하고 발전하게 될 것이다.

필자의 원로목사 체험담

홍익교회에서 33년을 목회하고 유능한 후임자에게 목회를 맡기고 은퇴한 지 4년 째 되어간다. 은퇴한 후에 교회로부터 멀리 떨어져 사는 것이 덕이 된다는 선배들의 권유에 따라 덕소에 위치한 아파트로 이사했다. 어느 원로 목사는 은퇴한 후에도 매주 본 교회 예배에 참석하는 것은 물론이고 한 달에 한번 설교를 한다고 한다. 심지어 어느 분은 원로목사실을 두고 사사건건 간섭을 함으로 담임목사가 소신껏 목회하는 데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고 한다.
아무리 자기의 전생을 바쳐 성장시킨 교회일지라도 그런 식으로 사역의 끈을 놓지 않는다는 것은 노욕(老慾)이 아니겠는가? 사울왕의 재판(再版)이 아니겠는가? 하나님이 이루신 일을 자기의 업적으로 돌리는 교만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시무 시에 그런 모습을 비판하던 필자는 은퇴예배 시, 마지막 인사를 하면서 교인들에게 될수록 찾아오거나 전화하지 않도록 신신 당부하고 대신 담임목사 중심으로 교회발전에 힘쓰라고 힘써 권고했다.
또한 앞으로 결혼 주례나 장례 집례는 물론이고 일절 교인들의 가정행사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다만 시무 시 충성했던 중직들의 장례식에는 참석할 것이라 했다. 교인들의 입장에서는 30년 이상 맺어진 관계를 냉혹하게 끊는 모습에 너무나 섭섭한 생각을 가질 수 있겠으나 후임목사 중심의 교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처신이라고 생각했다.  
아울러 매주일 가까운 교회 출석하고 있다. 담임목사의 요청에 따라 전반기와 후반기에 한 번씩 설교하고, 그리고 특별한 행사 때 참석하는 정도이다. 사실, 정들었던 교회를 떠나서 주일날 다른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너무나 힘든 일이다. 필자가 소속된 교단 교회에 출석하면 담임목사가 알고 자꾸 예우를 갖추려고 신경 쓰는 모습에 번거롭기 짝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젊음을 다 바쳐 이룩한 교회가 후임목사를 중심으로 더 성장 발전하는 일이라면 필자가 다소 힘든다 할지라도 견딘다는 것이 교회의 덕이 되지 않겠는가? 무엇보다도 가장 조심할 때가 담임목사가 부임한지 3년이 지난 다음이다. 처음 부임하여 3년은 허니문(honey-moon) 기간이다. 그 기간 동안은 웬만한 허물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후임목사가 전임자 때보다 더 교회를 성장시켜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3년 동안 너무나 밀어붙이는 목회방법으로 일관하다 보면 교인들은 상당히 지치는 느낌을 가지게 마련이다.
그 때에 전임자의 여유 있던 목회 방법이 왜인지 그리워지게 되면서 담임목사 지도력에 불만을 느끼기가 쉬운 것이다. 그 때가 원로목사가 가장 조심할 때이다. 한해 두 해 지나면서 원로목사에 대해 교인들의 관심이 멀어지므로 섭섭한 마음을 품고 있던 차에 교인들이 찾아와 담임목사의 목회방법에 대해 불만을 토할 때에 쉽게 동조하기가 쉽다. 그 때에 단호한 태도로 담임목사를 옹호해 주어야 교회는 든든히 서가는 것이다.
때로 원로목사들의 모임에 가면 자기 후임자에 대해 노골적으로 불평하는 분들을 만나게 된다. 들어보면 너무나 하찮은 내용이다. ‘자기를 무시했다.’ ‘누가 주례를 부탁했는데 담임목사가 반대해서 못하게 되었다.’ 등등 따위이다. 시무할 때는 상당히 대범하던 분이었는데 어떻게 저렇게 옹졸해 지고 있는가 싶은 안타까운 생각이 들게 된다.  
다행히 은퇴 후에 필자는 여기저기 교회에서 설교하는 일과 대리당회장 역할을 하는 일로 바쁘게 보낼 수 있었다. 또한 은퇴 후 시작한 인터넷 웹진 ‘소리’(www.cry.or.kr)에 매주 한국교회를 위해 글을 싣는 일과 다른 분들의 글들을 담아 편집하는 일만으로 많은 시간이 필요하고, 시무 시에 제대로 누리지 못했던 여행이나 여러 가지 취미활동(독서, 사진, 바둑, 산책, 스포츠, 영화)을 통해서 남은 삶을 풍성하게 엮어가고 있다. 이처럼 본 교회 사역으로부터 멀리하고 후임목사에게 전적으로 맡길 때 후임목사 중심으로 교회가 날로 발전하는 모습을 보고 있다.  

 

홍익교회 김태복 원로목사

 

 

-월간목회, 2011년 11월호,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목사님 중에 한 분으로

 신대원 시절 교육전도사로 섬기던 교회의 담임목사님이셨다.

 인격적으로 닮고 싶은 목사님이시다.

 지금은 은퇴하시고 원로목사님이 되셔서 바른 원로목사의 상을 보여주고 계시는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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