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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와 칼빈의 교회론 비교

에반젤(복음) 2020. 2. 23. 20:59



루터와 칼빈의 교회론 비교

 

김진태

 

제 1 장. 들어가는 말

 

제 2장 루터와 칼빈의 교회론 비교

 

1.루터의 교회론

 

1)말씀의 교회

2) 참교회와 거짓교회

3)교회의 직책

4)교회의 궁극적인 목적

 

2.칼빈의 교회론

1)교회의 필요

2)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

3)교회의 직책

4)치리

제 3 장. 맺 는 말.

 


 


 

제 1 장. 들어가는 말

 

교회에 대한 고백은 사도 신조의 중요한 조항 중의 하나였다. 성부와 성자와성령에 대한 고백이 있은 다음에 성도의 교제(communio sanctorum)라는 말로 고백되었다 즉 그리스도의 교리를 적용하는 교리(구원론)는 자연스럽게 교회으로 귀결된다. 왜냐하면 교회는 그리스도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의 복에 참여하려는 자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사역을 통하여 사람들을 자신에게 연합시키고 그들에게 참된 믿음을 주어서 그 교회를 자기의 몸 곧 성도의 무리를 구성한다는 것이 개혁주의의 개념이다. 로마 카톨릭 신학에서는 교회론이 다른 어떤 교리보다도 앞선다. 그들에 의하면, 교회는 성경을 산출하는 도구이므로 성경보다도 앞선다고 말한다. 또한 교회는 모든 초자연적인 은사들을 수여해 주는 자라고 말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교회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한다는 것이다. 그들의 최대의 강조점은 신자의 공동체로서의 무형교회가 아니고, 신자의 어머니(mater fidelium)로서의 유형교회에 있다. 종교 개혁은 이같은 로마 카톨릭교회의 교회론과 결별하면서 다시 한 번 영적 유기체로서의 교회에 주목하였다. 종교 개혁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 성령의 새롭게 하시는 역사와 별도로 교회가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구속론과 성령론을 교회론보다 앞서 논의하는 것이 논리적이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이와 같이 종교 개혁자들은 그리스도 중심으로 교회론을 이끌어 나갔던 것이다. 특별히 루터와 칼빈은 종교 개혁의 선두 주자로서 그들이 내세운 교회론이 지금 오늘날에 있어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애비스(PaulD.L.Avis)는 종교 개혁자들의 신학에 있어서 교회라는 저작에서 루터와 칼빈을 다음과 같이 대비시켰다. 루터는 일차적으로 그리고 열정적으로 복음의 순수성에 대해 관심을 가졌으며, 칼빈은 교회의 순수성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루터의 생애의 모든 위기들은 복음을 중심으로 일어났으며, 칼빈의 모든 위기들은 교회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여기서 애비스가 잘 대비시킨 것처럼 칼빈의 노력이 순수한 교회를 확립하는 데 기울어진데 반해 루터의 노력은 순수한 복음을 확장하는 데 기울어져 있다. 그래서 교회에 대한 루터의 가르침은 때때로 모호하기도 하고, 그리고 시간의 경과에 따라 변화하기도 한 것처럼 보인다. 애비스의 이러한 견해처럼 루터와 칼빈 간에는 교회에 대한 여러 가지 교리에 대한 차이점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루터와 칼빈의 교회론에 대한 각자의 이론을 살펴본 후에 그들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고찰해보고자 한다.

 

 

제 2장 루터와 칼빈의 교회론 비교

 

1. 루터의 교회론

 

1)말씀의 교회

 

루터의 교회에 관한 생각은 그의 종교개혁적인 활동의 시기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루터가 「사편강의」를 썼을 때에 교회론에 관한 그의 관심은 ‘말씀의 들음’에로 집중되어 있었는데, 종교개혁적인 작업에 본격적으로 들어서면서부터는 가톨릭의 교회개념과 관련하여 ‘교회의 권위’에 대해서, 그리고 ‘만인제사장설’에 관하여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개신교회를 확고히 확립한 후에는 직분론이나 교회법에 관심을 가졌고, 직분론에 있어서도 초기에는 만인제사장설을 바탕으로 해서 교회의 직분이해를 전개하였다면, 말기로 갈수록 목사직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루터의 교회론을 일반화해서 설명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터의 교회론의 가장 핵심적인 개념을 들라고 한다면, 그것은 ‘말씀’(wort)이라 할 수 있다. 그의 교회론을 알 수 있는 중요한 문서인 Von den Konziliis und Kirchen에서 그는 교회를 ‘거룩한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하였다 이를 풀이하여 그는 교회란 “기독교적이라고 거룩한 백성들의 모임이며, 이 백성들은 그리스도를 믿는다.”라고 하였고, 또한 교회란 “기독교인이며 성스러운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라고도 하였다. 교회를 성도들의 모임이라고도 한 그의 표현은 신앙고백의 ‘거룩한 공회’와 직결되는 개념인데, 이 거룩함을 그는 바로 ‘말씀’과 연결시키고 있다.

 

루터는 교회를 ‘복음의 피조물’이라고 하였으며, 루터의 교회이해에서는 궁극적으로 말씀의 절대적인 우위성을 확인할 수 있다. ‘말씀’이야말로 그에게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본질적인 근거이다. 그는 카톨릭적인 입장에 반하여 교회의 권위를 교황이나 공의회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있다고 보았다. 루터는 말씀을 교회위에 놓았다. 교회는 철저히 말씀 아래에 존재하는 기관이기 때문에 말씀이 없다면 교회는 교회로서의 본래적인 사명을 잃는 것이고, 교회의 권위도 잃게 되는 것이다.

 

2) 참교회와 거짓교회

 

말씀의 절대적인 우위성을 갖는 루터의 교회론은 그의 참교회와 거짓교회에 대한 이해에서도 확인된다. 루터의 루터는 가톨릭적인 교회를 비판하고 새로운 또 하나의 교회를 세운 사람으로서 참으로 하나님의 원하시는 참교회란 무엇인지 묻고, 그것과 그렇지 않은 거짓교회를 구별하는데 관심을 가졌다.

 

루터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의 교회’와 교화이 머리가 되는 ‘교황의 교회를’구분하면서, 참교회는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시는 교회라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이와 더불어 루터는 교회를 하나의 세상적인 기관으로 보는 관점을 부정하였다. 그에게서 교회는 인간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시고 또한 몸이 되는 교회로서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이 다스리는 곳이다. 또한 루터는 참교회는 꼭 사람의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교회가 인님을 시사하였다. 참 교회는 참믿음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어서 눈에 보이지 않게 숨겨 있다고 하였다. 성례가 집전되고 세례가 행해지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여지지 않고 또한 예수가 머리가 되지 않는다면 그것을 참교회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루터가 참교회와 거짓교회를 구별하는 궁극적인 기준을 ‘말씀’에서 찾았다는 사실이다. 그는 참교회는 ‘참 사도적인 교회’라고 하였는데 이 참 사도적인 교회의 척도는 ‘말씀’에 있다고 하였다. 그의 참교회 개념은 어는 특정의 교단이나 교회를 지칭하기보다는 어느 교회도 궁극적인 목표로 삼아야 할 교회상, 즉 참 사도적인 교회로서 말씀이 바로 선포되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3)교회의 직책

 

(1)만인제사장

 

루터의 직분론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만인제사장설’이다. 루터는 종교개혁의 초기부터 ‘만인제사장’이라는 참으로 획기적인 직분구조의 패러다임을 제시하였다. 그는 구교의 교권주의를 비판하면서 평신도들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적인 직분을 감당해야 한다고 함으로써, 평신도와 제사장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가 있을 수 없음을 천명하였다. 이것은 그가 기독교인 내부의 계층구조를 근본적으로 거부한 것이라는 의미심장한 뜻을 내포하고 있다. 그는 로마의 교권주의를 장벽에 비유하였는데 로마의 세 가지의 장벽의 갖고 있다고 하였다.

 

그 첫 번째 장벽은 세상의 세력이 밀고 들어오면 영의 세력은 세상의 세력보다 높기 때문에 세상의 세력은 그럴 자격이 없다고 맞서는 것이다. 두 번째 장벽은 그들을 성경으로 비판하고 정죄하면, 성격을 해석할 수 있는 권한은 오직 교황에게만 있다고 맞서는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 장벽은 그들을 공의회를 통하여 정죄하려 할 때, 공의회를 소집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교황 하나뿐이라고 맞서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루터는 모든 기독교인은 이미 제사장의 직을 받았다는 만인제사장설을 제시하였다. 그는 제사장이란 기독교인됨과 연결되는 것으로 이해하면서 기독교인이 되는 외적인 관문인 ‘세례’와 내적인 증거인 ‘믿음’이 인간을 제사장이 되게 하는 관문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만인제사장 개념으로 루터는 먼저 하나님과 기독교인 사이에 제사장을 토한 중재가 필요치 않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 그리고 모든 기독교인은 제사장으로서 스스로 하나님의 계시말씀을 받아들이고, 이를 해석할 수 있으며, 다른 사람의 영적인 구원을 위하여 헌신할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였다.

 


 

(2)영적인 직분

 

루터는 만인제사장 개념과 나란히 교회의 공식적인 기능을 위하여 공적인 직분, 즉 영적인 직분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모든 기독교인은 원칙적으로 제사장이라는 이해를 바탕으로, 공적인 사제직이란 만인제사장의 바탕에서 누구나 선택되어서 수행할 수 있는 직분임을분명히 하였다. 단지 교회 안에서 필요한 공적인 예배를 인도하기 위하여 직분자가 필요한데, 교회가 이를 위하여 준비된 사람을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그에게서 성직은 하나의 기능직, 특수한 임무수행을 위하여 교회에 의하여 선택된 직분이고, 그렇기 때문에 공적인 성직은 무엇보다 교회와 교인들을 위한 ‘봉사’라는 차원에서 이해되어져야 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영적인 직분에 관한 입장을 바탕으로 하면서 루터는 영적 직분에 관한 다음과 같은 그의 기본 입장을 제시하였다: “교회는 감독과 목사 혹은 설교가가 있어서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과 세례, 성찬과 고해시의 죄사함을 공식적으로 행해야 하는데, 그들은 이를 교회의 이름 때문에, 그리고 무엇보다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세우셨기 때문에 해야하는 것이다.”

 

루터가 제시하는 영적직분의 형태는 감독과 목사 혹은 설교가이다. 그는 목사와 설교가를 구별하여 따로 생각한 것이 아니고, 목사 혹은 설교가로 그 명칭이 서로 다를 수 있음을 시사하였다. 목사 혹은 설교가의 기능은 그에 따르면 ‘공적인 말씀의 선포’ 와 ‘성례의 집행’이다. 루터는 다른 곳에서 목사의 기능을 ‘말씀선포’와 세례, 성찬, 그리고 열쇠라고 하기도 하였는데, 영적인 직분의 핵심적인 기능은 그의 교회이해와 연결시켜 볼 때 공적인 말씀의 선포로 집약된다. 그리고 성례의 올바른 집행이란 결국 성례를 말씀에 입각하여 집전하는 것을 의미하므로, 그에게서 영적 직분, 즉 목사의 핵심적인 기능은 넓은 의미에서 말씀의 선포라고 할 수 있다.

 

감독의 직이란 아주 특수한 경우라서 루터는 이에 관하여 아주 간단히 서술하고 있다. 교황에 대한 많은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는 감독의직을 거부하지는 않았는데, 이는 성격이 감독의 직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루터의 직분론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영적인 직분자와 평신도들 사이에 어떤 존재론적인 차이를 부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영적인 직분은 교회 안의 특별한 기능을 수행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고, 따라서 이 직분은 교회가 선택하여 위임할 수 있으며, 직분자가 그 기능을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대로 수행하지 않을 경우에 교회는 그를 직분에서 해임시킬 수도 있다.

 

4. 교회의 궁극적인 목적

 

영적인 나라인 교회는 인간의 영적인 구원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으면서 이 목적을 위하여 ‘말씀’과 ‘성령’이 다스리는 곳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표현을 바탕으로 해서 볼 때, 루터가 교회를 ‘말씀의 교회’로 보고 성직인 목사의 핵심적인 과제를 말씀의 선포로 보는 것도 인간의 영혼을 구원한다는 교회의 궁극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겠다.

 

 

 

 

 

 

 

2. 칼빈의 교회론

 

1)교회의 필요성

 

칼빈은 교회를 먼저 하나님이 일정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통로로 사용하기 위하여 세우신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데, 그 목적이 바로 우리를 그리스도와의 연합에로 부르시고 그 일치를 계속 유지시키시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칼빈은 약한 인간은 하나님에 관한 이해능력에 있어서 부족할 수밖에 없는데, 그러한 인간에게 하나님은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통로로 자신을 계시하시고 계속적으로 성장시키기 위하여 교회를 세우셨다고 하였다. 교회를 통하여서 인간은 자신과는 본질적으로 다르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가까이 느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는 그에게 ‘아콤모다치오 데이’, 즉 하나님이 인간의 이해능력에 맞추어 자신을 조절하여 계시하시는 인간을 위한 ‘눈높이 교육’이다. 그가 교회를 평생 동안 완전을 향하여 가는 도상, 즉 성화의 과정에 있는 신자들을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세우신 기관이라고 본 것은 그가 교회를 ‘모든 신자들의 어머니’라고 칭하고 있는 것에도 여실히 드러난다. 그는 어머니가 자녀를 양육하듯이 교회는 신자들을 평생에 걸쳐 양육하고 보살피는 곳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칼빈의 교회의 필요성에 관한 사고에서는 ‘양육’의 개념이 매우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2)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

 

칼빈은 교회를 단순히 눈에 보이는 건물이나 현존하는 신도들의 공동체로 보는 것을 넘어서 모든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의 무리’라고 하였다 이 공동체는 물론 살아 있는 신자들 뿐 만 아니라 죽은 사람도 포함하여 모든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 포함되는 하나의 통일적인 교회의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루터에게 있어서 참교회는 참 사도적인 교회로 하나님의 말씀이 이 참 사도적인 교회를 재는 척도라고 한 반면에 칼빈에게서 참교회란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들의 무리이다. 칼빈에게서 하나님의 선택이란 인간에게는 숨겨져 있는, 오로지 하나님만 아시는 사건이다. 그래서 칼빈에게 있어서 참교회는 눈에 ‘보이는 교회’가 아니라, 하느님만 아시는 ‘보이지 않는 교회’이다.

 

칼빈에게서 참교회란 이 가시적인 교회의 테두리 안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가시적인 교회의 필연성에 대한 그의 입장은 결국 교회 밖에는 죄의 용서도 없고, 구원도 없다는 그의 표현 속에 극명하게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이 그의 은밀한 선택으로 그의 백성을 선택하셨고, 이 백성들이 ‘보이지 않는 교회’를 이루지만, 하나님은 그 백성들을 한순간에 완전하게 만드시지 않고, 교회의 양육과 교육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성숙시키기 위하여 ‘보이는 교회’를 세우신 것이다. 보이는 교회는 따라서 종말론적인 완성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을 필연적으로 완수하여야 하며, 이 땅에서 존립해야 할 의미를 가지는 하나님의 기관이다. 따라서 칼빈에게서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는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3) 교회의 직책

 

칼빈의 교회는 직분을 중심으로 하는 교회이다. 루터의 교회가 원칙적으로 만인제사장설을 바탕으로 하는 교회라면, 칼빈은 이보다 훨씬 강하게 직책 중심의 교회개념을 전개하였다고 할 수 있다. 칼빈은 교회의 직책과 그 직책을 맡은 자 는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세워졌다고 하였다. 하나님이 그의 교회를 친히 세우신 것처럼 그 안의 직분자들도 친히 세우셨는데 이것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일을 맡기기 위함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칼빈에게 직분이란 철저히 하나님이 그의 교회를 다스리시기 위하여 쓰시는 도구와 같은 것이다. 교회는 외적인 인간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통하여 가르치지만, 이를 하나님이 내적인 성령의 역사로 조명함으로써 가르치시는 것이다. 이러한 가르침을 위하여 하나님은 직분자를 세우셨고, 성령의 힘을 통하여서 직분자에게 그 직분을 감당할 수 있도록 역사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칼빈은 직분자란 그의 직분을 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히 선택된 자이고, 이 선택에 대한 소명의식을 가지고 있는 자이어야 한다. 루터와 달리 칼빈에게는 성직자와 평신도, 교인들과 직분자라는 구별이 뚜렷하다. 그에게 직분은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선택과 소명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으로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이 소명은 이중적으로 일어나야 하는데, 먼저 하나님 앞에서 개인적이고 내면적으로 생기는 확신을 바탕으로 한 소명이고, 이와 나란히 교회 앞에서 공식적으로 받는 소명이 그것이다. 내적인 소명은 결국 외적이고 공적인 직분에로 연결되어야 하고, 교회는 소명예식을 통하여 그 직분에로의 하나님의 부르심을 공식적으로 확증하여야 한다.

 


 

4) 치리

 

칼빈의 교회론에서 특별히 주목할 것은 ‘치리’이다. 칼빈은 교인들이 계속해서 올바른 기독교적 삶을 살아가는데 교회가 필요한 도움과 행정적인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이를 위하여 ‘치리’라는 개념을 제시하였다. 여기서 확인되는 ‘치리’의 라틴어 단어는 ‘디스시플리나’이다. ‘디스시플리나’는 어원적으로 훈련이나 교육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를 독일어권에서는 ‘쭈흐트’로 변역하고 있는데, 이것 역시 교육 혹은 훈련이라는 뜻을 내포하는 단어이다. 다시 말해서 칼빈에게서 치리는 그 어원상으로 볼 때 이미 교회의 교육적인 차원, 즉 삶의 훈련을 지칭한다.

 

그래서 칼빈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교회의 영혼이라면, 치리는 교회의 힘줄과 같아서 몸의 각 지체를 연결시킨다고 하였다.

 

치리는 ‘아버지의 회초리’와 같이 잘못된 사람들을 바로잡고 이를 통하여 교회 전체를 바르게 서도록 하는 기능을 한다. 그는 성도들의 신앙생활을 계속적으로 지도하고 특별히 그들이 죄악된 삶에로 퇴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삶과 윤리적 차원에서 주는 교회의 계속 교욱적인 도움이 곧 치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제 3 장. 맺 는 말.

 


 

지금까지 루터와 칼빈의 교회론을 통하여 그들의 입장을 살펴보았다. 특별히 교회론에 나타난 그들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살펴봄으로써 올바른 교회론을 정립하게 되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이 연구를 통하여 교회에 대한 가장중요한 점은 루터나 칼빈이 모두 가시적 교회와 불가시적 교회를 구분하고 있지만 이 두 교회는 두개의 다른 교회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단지 하나의 통일된 교회의 두 가지 상이한 속성을 나타내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제는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단지 표면적인 교회를 떠나서 교회에 대한 더 깊은 내면의 의미를 찾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교회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과 해방의 행동을 증거하고, 그것을 인간의 역사 안에 화육시키기 위하여 존재한다. 교회가 이 사명을 충실히 수행하려면, 그리스도 안에서 전 인류를 부르시고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그들을 그리스도와 친교를 맺게 하며, 이로써 그 자신과 화해하게 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 고백, 복종을 날마다 새롭게 해야 한다. 성령에 의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신비한 연합, 친교를 상실하고 그것을 무관심하게 여긴다면, 교회의 생명력은 고갈된다. 교회와 세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떠나서 그리스도인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를 떠난 사람은 잘려나간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말라 버린다. 여기에서 우리는 말씀을 듣고 복종하며 기도하고 실천하는 교회를 생각해야 한다. 특별히 교회에서의 기도는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기도함으로써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 영광의 영역으로 끌어올려지고, 세계를 지탱하며 구원하시는 주님과 사귈 수 있다. 그러므로 기도는 하나님의 생명과 빚이, 그의 능력이 흘러들어오는 통로이고 수문이다. 교회가 하나님을 증거하고 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그리고 기도와 명상을 하는 것은, 인간과 세계의 구원과 해방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해서이다. 교회는 이 사명의 수행자로서 출현되었고 존재한다. 참된 영성의 교회는, 역사안에서의 하나님의 결정적이며 최종적인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적 선교에 온몸으로 참여한는 데서, 그 여생의 참됨과 현실성을 나타낸다.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교회는 인간을 억압하는 악과 타협할 수 없다. 그 교회는 불의와 싸우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과 연대한다.

 


 


 


 


 

[참고문헌]

 

양금희 저, 종교개혁과 교육사상, 한국 장로교 출판사, 1993.3

도날드 매킴 편저, 이종태 역, 칼빈신학의 이해 , 서울:생명의말씀사, 1991.5.

빌헬름니젤, 이종성,김항안 역, 비교교회론 , 서울:대한기독교출판사,1993.

이종성 역, 칼빈의 신학 , 서울:대한기독교서회,1973.

오토 베버, 김영재 역, 칼빈의 교회론 ,서울:풍만출판사,1985.

이종성, 교회론 제1권, 서울:대한기독교출판사,1989.

죤 칼빈, 편집부 역, 기독교 강요 제4권, 서울:기독성문출판사,1993.

지원용 편, 루터사상의 진수 , 서울:컨콜디아사,1992.

 

 

 

 

 

 

 

이성호(미 칼빈신학대학)

 

 

만인제사장 교리는 종교개혁이 이룩한 위대한 산물이다. 하지만 이 교리를 너무 피상적으로 이해하여 오해가 생기는 경우가 참으로 많은 것 같다.

 

첫 번째 오해는 카톨릭은 만인 제사장 교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판단하는 것은 너무 성급한 것이다. 성경은 분명히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다 (벧전 2: 9)"라고 선언하고 있다. 따라서 만인 제사장 교리를 부인하는 것은 성경을 부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카롤릭의 근본적 오류는 제사장직을 두 개로 구분하는 것에 있다. 그들은 일반(common) 사제직과 목회적 사제직(ministerial)을 구분한다. 전자는 세례를 통하여 모든 신자들에게 부여되지만, 후자는 성직 임명을 통하여 사제들에게만 부여된다. 그리고 이 두 차이는 단지 정도의 차이가 아니라 본질의 차이다. 따라서 카톨릭의 입장은 한편으로는 만인 제사장을 인정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부정하고 있다. 성경은 그 어느 곳에서도 제사장직을 그와 같이 2분법으로 나누지 않는다.

 

두 번째 오해는 만인제사장 교리를 만인 평등설 비슷하게 이해한다는 것이다. 요즘 이 교리를 어설프게 이해한 젊은이들은 이 교리에 근거하여, 목사와 평신도 사이에는 아무런 구분도 없다고 주장하면서, 설교도 돌아가면서 하고 성찬이나 축도도 균등하게 하는 것이 만인 제사장설에 더 충실하다고 말한다. 그래서 칼빈이나 루터 보다는 제세례파들이 보다 성경에 충실하다고 생각한다.

 

만인 제사장 교리에 대한 카톨릭의 오류도 문제이지만 두 번째의 오해도 교회를 심각하게 파괴시키는 견해이다. 무엇보다 만인 제사장 교리는 만인 목사설이 아니다. 어느 종교개혁가들도 만인 제사장 교리를 통해서 아무도 차별없이 목사나 직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개혁가들이 만인 제사장설을 주장한 궁극적 이유는 교인들의 평등이 아니라 교회의 연합을 이룩하기 위한 것이었다.

 

카톨릭 교리에 따르면, 교회 안에는 두 종류 (order)의 그룹이 존재한다. 하나는 영적인 존재, 즉 성직자이고, 다른 하나는 세속적 존재, 즉 평신도들이다. 성직자는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에 있고, 특별히 성례전을 행사할 수 있는 권능을 보유한다. 종교개혁가들이 보기에 이런 구분은 교회의 연합을 현저하게 깨뜨린다. 교회의 몸이 하나이면, 그 몸의 종류도 하나여야 한다. 따라서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분은 이 점에서 사라져야 한다. 모든 신자가 제사장이며, 따라서 모든 신자가 영적인 존재이다.

 

하지만, 만인 제사장 교리가 신자의 기능 혹은 직분의 구분을 무시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모두가 제사장이기 때문에, 예배시간에 모두가 설교를 하겠다고 나서면 어떻게 되겠는가? 돌아가면서 설교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한 사람은 이 말하고 다른 사람은 저 말을 하면 교회가 어떻게 되겠는가? 성경은 분명히 모든 성도가 제사장이라고 하지만, 직분의 구분도 동시에 분명히 명시하고 있다. 이 구분은 어떤 종류나 존재의 구분이 아니라 기능상의 구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개혁신학은 카톨릭과는 달리 목사와 평신도의 본질적인 구분을 반대한다. 목사는 평신도와 다른 어떤 종류의 특별한 은혜를 받은 사람이 아니다. 또한, 세속주의적 민주주의 교회관에 반대하여, 기능적인 구분을 매우 엄격하게 한다. 예를 들어, 설교는 목사만이 하는 전통을 강하게 발전시켜 왔다.  만인 제사장 교리를 제대로 이해한다면, 아무나 능력있고 은사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설교하게 할 것이 아니라, 각자에게 부여한 소명을 잘 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목사가 해야 할 일이 설교라면, 주부는 가정의 일을, 농부는 농사를, 회사원은 회사의 일을 잘 하는 것이다. 이렇게 다양한 직분 속에서, 모든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으로 한 주님을 섬긴다.

 

결론:  목사가 지나치게 특별 대우를 받거나 아니면 목사 고유의 직이 지나치게 무시당하여 교회가 큰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다. 주의 교회는 항상 좌우에 치우칠 위험에 빠질 수 있다. 만인 제사장 교리가 균형있게 이해 될 때, 주의 교회는 든든히 서 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