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께서 복음의 말씀을 통해 죄와 허물로 죽었던 영혼을 살려 새로운 생명을 주시면 생명을 받은 인간은 필연적으로 의식을 가지고 하나님을 향하여 돌이키게 되는데 그 돌이킴을 회심이라고 합니다. 이 돌이킴은 인간본성의 돌이킴으로 회개와 믿음 안에서 하나님을 향한 돌이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중생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서 사람의 무의식 세계에서 시작됩니다. 이렇게 중생의 역사가 무의식 세계에서 시작되면 반드시 의식 세계의 회개와 믿음으로 나타나는데 그것이 바로 회심입니다. 회심은 중생의 결과로 나타나는 필연적인 돌이킴으로 맨 처음의 회개와 맨 처음의 믿음을 의미하므로 반복되는 회개와 반복되는 믿음과는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1. 회심의 세 측면
생명을 얻은 인간이 하나님을 향하여 돌아선다고 할 때 이 돌아섬은 지. 정. 의의 세 요소가 전인적으로 반응하는 인격적인 돌아섬입니다. 첫째 지적인 측면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 앞에 한없이 더럽고 무가치하고 비천하고 무능하고 부정한 자기 자신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생깁니다. 이 인식으로 말미암아 그러한 상태가 죄임을 알게 되고 그 죄가 하나님을 한없이 불쾌하게 만드는 것도 깨닫게 됩니다. 둘째 자신이 직면한 자기의 죄에 대한 분명한 인식은 유감 정도가 아니라 죄에 대해 깊은 슬픔을 느끼게 합니다. 이 경건한 슬픔이 죄로부터 자신을 돌이키게 하며 하나님을 향해 돌아서게 하는 정적인 요소입니다. 셋째, 의지적인 측면으로 자신의 죄로 인하여 상처 입은 하나님과 다른 사람에 대하여 죄를 겸허하게 고백하고 죄를 증오하여 죄로부터 피하기 위해 자기부인과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이 뒤따르게 됩니다.
비록 연약함에 둘러싸여 있고 실패를 거듭할지언정 믿음 안에서 주를 향한 순례자의 삶을 옹골차게 시작하게 되는 것이 회심의 의지적인 요소입니다. 이렇게 볼 때 회심은 성령의 은밀한 공작으로 이루어지는 내적소명과 중생과 달리 그리스도인 개개인에게 발견되는 변화된 삶의 양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강도는 개개인의 차이가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경우는 자기 자신도 그 변화를 감지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태어날 때 자기가 태어난 것을 모르고 훨씬 지나서 자각하고 알게 되는 것처럼 회심도 그럴 수 있습니다. 특별히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난 경우는 더욱 그럴 수 있습니다.
2. 회심의 두 국면 - 하나님의 일 사람의 일
회심은 하나님의 일인 동시에 사람의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이키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회심하지 못합니다. 애5:21절의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우리의 날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과 같게 하옵소서.”라는 말씀처럼 우리의 돌이킴의 원인은 하나님입니다(행11:18, 딤후2:25). 비록 회심이 중생의 외형적 증거이긴 하지만 중생을 통하여 우리의 무의식 가운데 심겨진 새로운 생명은 오직 하나님께 의존함으로서만 계속적으로 유지되고 존재하게 됩니다. 그런 면에서 회심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돌이키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돌아설 수 없습니다.
그러나 회심은 우리의 일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겔33:11)의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돌이키라고 하실 때 우리가 회개하고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회심은 하나님의 일인 동시에 사람의 일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돌이키라고 할 때 사람의 행동으로 돌이킴을 훨씬 많이 강조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돌이키다’는 의미를 지닌 구약의 ‘슈브’는 사람이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의미로 74번 사용되고 하나님이 사람을 돌이킨다는 의미로는 5번만 사용되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후크마는 그런 의미로 중생이 하나님의 사역이라면 회심은 사람의 사역이라고 구별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안토니 A. 후크마, 개혁주의 구원론, p.189)
통상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회심의 이러한 두 국면을 능동적 회심과 수동적 회심이라고 불렀는데 하나님께서 중생한 죄인으로 하여금 그의 의식적 생활에서 회개와 믿음으로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하시는 것을 능동적 회심이라고 불렀고, 중생한 죄인이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회개와 믿음으로 하나님에게로 돌아서는 결과적 행위를 수동적 회심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두 가지가 진리입니다. 우리는 역설의 어느 한 면도 버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돌이킴의 원인이 하나님이지만 하나님께서 돌이키게 하실 때 우리도 그분께로 돌이켜야 합니다.
3. 회심의 두 형태
참된 회심은 오직 한번만 일어나는 결정적이고 단회적인 성격이지만 그 형태는 다양한 측면에서 설명될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보편적인 구별은 점진적인 돌이킴과 급진적 돌이킴으로 구별하는 것입니다. 급진적인 경우는 바울, 루디아, 빌립보 감옥의 간수 같은 위기적인 회심의 경우이고 점진적인 경우는 디모데, 언약 가정들의 자녀의 일반적인 경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점진적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회심의 과정이 단계적이고 점진적이라는 말이 아니라 언약의 가정 안에 태어나서 언제 회심했는지 자신이 모른다는 차원에서 하는 표현입니다. 점진적인 돌이킴이라고 표현해도 그것이(생명 얻는 회개와 구원 얻는 믿음) 단번에 하나님께로부터 임하고 그로 말미암아 동시에 성도에게 심긴 것임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회심에서 말하는 맨 처음의 믿음은 오랫동안 씨름해서 조금씩 얻는 것이 아니고 단번에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어둠에 있다가 빛으로 쑥 들어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학 상 쓰는 ‘믿음의 씨(semen fidei)’라는 말을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에게 확실히 승인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것이 들어가 있으니까 그 다음에 하나님 나라의 여러 경륜의 내용이나 하나님의 크신 약속에 대해 차례차례 깨닫고 자꾸 더 믿어 가는 것을 의미하는 말로 믿음의 씨라는 말을 쓰는 것이지, 그 사람이 아직 구원받기에 부족한데도 그것이 들어가서 조금 씩 조금씩 자라서 어떤 시기가 지나니까 비로소 형체를 온전히 이뤄서 그 사람에게 구원의 사실이 발생했다는 의미로 쓰는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생명이 들어가면 즉시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이 되고 그렇게 되자마자 그에게 들어간 그 말씀을 진리라고 믿고 받게 됩니다. (김홍전, 구원의 신앙, p95-98)
엄격하게 말하면 그 사람이 언제 새로운 생명을 받았고 언제 회심했는가는 아무도 단정해서 말할 수 없으며, 회심하는 순간 죄에 대한 진정한 슬픔을 소유하는 것은 맞지만 모든 사람이 동일한 종류의 감정적인 회심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주변에는 오직 위기적 회심만이 진정한 회심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모든 사람들이 동일한 방식으로 회심하는 것이 아니기에 그렇게 일정한 패턴의 규격용 회심을 설정하는 것은 심히 위험한 일이며 성경이 그것을 지지하지도 않습니다.
4. 회심의 두 요소
위에서 확인했듯이 성경에 나오는 ‘회심’이라는 단어를 살펴보면 두 가지의 요소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죄악 된 삶에서 돌이켜 행동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변화를 의미하는 회개의 요소와, 그 죄에서 돌이켜 앞으로 하나님을 향해 살아가는 믿음의 요소가 그것입니다. 앞의 것을 회심의 소극적 요소라고 한다면, 뒤의 것은 회심의 적극적 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회개와 믿음은 이러한 상이한 요소들 때문에 구별은 해야 하지만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 존 머레이의 말처럼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는 믿음은 회개하는 믿음이며 생명으로 이끄는 회개는 신앙적인 회개입니다.
구원받는 믿음은 회개 속에 깊이 잠겨 있고 회개 역시 믿음 속에 깊이 스며져 있습니다. 구원의 과정에서 진정한 회심(결정적인 방향의 전환)은 오직 한 번만 일어나지만(역사적인 개혁교회가 강력하게 강조하는 바는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입니다. 그러나 이 믿음이 들어갔다고 해서 처음부터 아주 위대한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니고 그 사람의 장성의 그릇에 따라 차츰 족적을 나타내고 열매를 내게 됩니다.) 이것은 새롭고 거룩한 삶의 시작이므로 그 이후에도 계속 회개와 믿음의 생활을 통해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회개와 믿음 중 어느 것이 먼저인가를 말할 때 믿음을 먼저로 보는 사람이 있고(칼빈, 핫지 등) 회개를 먼저로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존 머레이, 박형룡 등).
출처 :개혁주의 마을 글쓴이 : gr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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