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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삼위일체론과 이단들

에반젤(복음) 2020. 2. 21. 13:21


삼위일체론과 이단들


옮겨온글 입니다


1. 믿음의 종류

(1) 은혜, 체험에 의한 믿음: 뜨거움
(2) 교리, 신학등 지식에 의한 믿음: 차거움

이단에 대한 세미나나 강의에 초청받아, 삼위일체에 대한 강의를 해보면 항상 이런 두가지의 공통된 질문이 나온다. 첫 번째는 "인위적으로 사람들이 무슨 공의회같은 곳에서 만든 삼위일체같은 교리나 신학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는 질문이다.
특히 여호와의 증인들 같은 곳에서는 "삼위일체란 용어는 성경에 없다"고 주장하며, 삼위일체란 인위적으로 만든 교리라고 주장한다.
또 양태론을 주장하는 이단들이 주로 그러한 주장을 하는데, 그들이 입을 모아 "삼위일체론이 필요없다"고 하는 것은, 정통교회의 삼위일체론이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 그들 나름대로의 양태론적 삼위일체론이 필요없다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삼위일체라는 용어는 물론 성경에 없다. 그러나 삼위일체라는 이론 자체는 분명히 성경적이다.
성경에 기록된 내용을 그대로 체계화시키고 정리한 것이 삼위일체이기 때문이다.
삼위일체가 만들어진 배경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자칫 오해가 갈 수 있는 대목이다.
이에 대한 자세하고 구체적인 설명은 뒤에서 하게될 것이다.

두 번째 질문으로는
다음과 같은 주장이 있는데, "삼위일체같은 차가운 교리와 신학따위를 몰라도, 얼마든지 주님만 믿고 뜨거운 은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좋은 믿음이란 두가지의 조화와 균형에 의한 믿음이어야 한다.
너무 뜨거운 은혜만을 강조하면 이단이나 다른 영에 미혹될 수가 있으며, 교리와 신학만을 강조하면 신앙이 아니라 차가운 학문이 되어 버리며, 자신이 소속한 단체만의 폐쇄적인 교리에 의한 믿음이 될 수가 있다.
그러나 뜨거운 은혜만을 사모하는 맹목적인 믿음도 바람직한 믿음이 아니다.
우리는 먼저 믿음의 대상을 정확히 알고, 말씀에 근거한 균형있고 분별있는 믿음을 갖어야만 한다.
체험과 은혜가 말씀을 벗어나면 이단에 미혹되어지며, 너무 기적이나 표적같은 가시적인 체험만을 강조하다보면 신비주의로 흐르는 경우가 종종 있다.

버뱅크는 기독교의 심장은 삼위일체로부터 시작되어진다고 말하였는데, 삼위일체란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경을 통하여 보여주신 자신의 특별계시이다.
하나님이 누구인가를 정확히 아는 믿음으로부터 시작하자.

그렇다면 왜 삼위일체와 같은 교리와 신학이 왜 필요할까?
그 이유는 아래 네가지로 압축되어진다.

1) 이단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2) 자신의 신앙성숙을 위하여
3) 교회의 표준을 위해서
4) 불신자에게 올바른 전도를 하기 위하여

2. 이단이란 무슨 뜻일까?

문자적인 의미로 보면 처음과 중간은 같은데 끝이 다르다는 것(異端)이다.
원래 성경적인 용어로서는 "하이레시스"이며 이 단어의 뜻은 "선택"이란 의미로 "당파. 종파"를 가르킨다.
예를 들면 사두개인의 당파(행5:17) 바리새파(행15:5)에도 사용되었고 "우리 종교의 가장 엄한 파"(행26:5)라는 구절에도 사용되었다. (하이레오마이: "자력으로 취하다"에서 파생된 단어임) 이단이란 뜻은 교회의 전통적인 의미로 "어긋나는 가르침"을 말하며 "다른 교훈" 혹은 "다른 복음"을 말한다. 즉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유1:18)를 말한다.

초대교회의 이레니우스는 정통이란 말을 "어느 곳에서나 항상 모든 사람에 의하여 믿어진 바"라고 정의하였고, 이단에 대해서는 "올바른 교리의 표준에서의 이탈"이라고 정의하였다. 20세기 이단학의 권위자로 알려진 윌터마틴은 "어떤 특정인의 그릇된 성서해석을 중심으로 형성된 종교집단"이라고 정의하였다.

성경이 기록될 당시, 즉 초대교회때에도 거짓교사나 거짓선지자가 있었으며, 다른 교훈과 다른 복음이 있었다.
그 당시에도 성경을 가감하는 자들이 있었기에 요한은 그것을 경고하였고(계22:18-19), 베드로는 성경을 무리하게 해석하는 자들은 멸망을 받는다고 책망하였다(벧후3:16)
바울은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말했으며(갈1:6-9), 예수님 자신은 거짓 그리스도에 대한 경고를 말씀하셨다(마24:23-24)
예상외로 성경은 다른 복음과 미혹, 거짓 선지자나 거짓 그리그도에 대한 경고를 상당히 많이 언급하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들의 특징은 언제나 "가만히 들어 옴"에 있으며 말씀을 변질시켜 왜곡시키는 데에 있다.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
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고후11:4)

다른 예수가 있고, 다른 영이 있으며, 다른 복음도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성경적으로 올바른 교리란 양을 양육하는 울타리의 역할을 한다. 울타리는 양이 밖으로 나가는 것을 막기도 하지만, 다른 짐승이 우리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방지하기도 하는 것이다.
다른 예수와 다른 영과 다른 복음은 언제나 부분적인 한 측면만을 확대, 강조하려고 한다.
성경전체가 말하고자 하는 뜻보다는 자신들의 주장과 유사한 한 구절만을 찾아 오직 그 구절만을 인용하기를 즐겨 한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것을 성경적이라고 잘못 오해하기가 쉽다.
창세기만을 강조하거나, 계시록만을 지나친 풍유로 해석하며, 종말론, 구원론의 한 부분만을 지나치게 강조하기도 하고, 마귀론만을 강조하기도 한다.
천사를 지나치게 강조하기도 하고, 표적이나 이적같은 가시적인 것만을 지나치게 강조하기도 한다.
아홉 마디의 일반적인 진리를 외면하고 한마디의 부분적인 구절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서 일반적인 진리를 특수한 의미로 바꾸어 버린다.
우리는 나무와 숲의 관계에서 나무만을 보고 숲을 보지 못하거나, 숲만을 보고 나무를 보지 못하는 경우를 배제하여야 한다.
올바른 교리와 신학은 성경에서 비롯되어야만 하며, 성경을 체계적으로 정리 요약한 것으로써, 울타리의 역할을 한다.

기독교의 이천년 역사는 끊임없이 이단과의 싸움이었다.
삼위일체론도...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에 대한 논리도.... 모두 이단과의 싸움으로 야기된 논리였으며, 정경이라는 오늘날의 신약성경도 결국은 영지주의자와 마르시온이라는 이단들의 무분별한 성경의 채택을 대항하기 위한 투쟁의 결과이었다.
로마 카톨릭의 구교는 신교라는 현재의 우리들과 싸움으로 분리되었다.
즉 이단과 정통의 싸움은 항상 누가 성경적인가로 분별하여야만 하며, 그것은 영적전쟁으로 비유된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6:12)

3. 삼위일체론(신론)

AD318년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장로 아리우스는 그리스도가 "비존재로부터 피조되었으며, 존재하지 않았을 때도 있었다"고 주장함으로서 알렉산더 감독과 대립하여 초대교회를 분열시켰다.
AD 325년에 이단으로 정죄된 아리우스는, 성자는 어느 순간에 성부에 의하여 창조되었고, 성자는 성부와 유사하지만 본질적으로 동일하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즉 예수가 하나님과 유사본질인가 동일본질인가 라는 문제가 대립되어진 것이다.
장로 아리우스와 감독 알렉산더의 두 사이에서 시작된 날카로운 신학적 대립으로 교회 분열의 문제가 대두되자, AD 325년, 318명의 감독들이 모이게 된 니케야회의가 황제에 의하여 소집되었고, 회의 도중 알렉산더 감독의 죽음으로 인하여, 그 당시 서기이며 집사였던 청년 아타나시우스와 아리우스의 대결로 계속되었으며, 황제의 비호와 많은 감독들의 정치적인 동조가 있었던 아리우스에 비하여 청년집사 아타나시우스는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토론이 계속되어진다.
결국 니케야회의는 힘이 없었던 아타나시우스 집사가 아리우스 장로와의 토론을 승리하게 됨으로서 "성자는 피조된 것이 아니며 성부와 동질이다"라는 니케야 신조가 계승되어지게 된다.

아타나시우스는 아리우스장로와 논쟁 끝에 무려 다섯 번을 유배당하였다가 다시 돌아왔으며, 돌아올 때마다 지지자들에게 열렬히 환영을 받는 상황이 연출되었으며, 결국 아리우스장로가 이단으로 정죄되고, 아타나시우스는 말년에 자신의 알렉산드리아 교구에서 존경을 받으며 평안한 시간을 갖게 된다.
당시의 유명한 유행어는 "아타나시우스는 세상을 반대하고, 세상은 아타나시우스를 반대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아타나시우스의 어려운 토론 상황을 잘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항상 성경이 최종권위가 되어지는 것이다. 그가 승리한 것은 그의 주장이 성경적이었기 때문이다. 아리우스는 자신의 주장을 명백히 논리적으로 주장하지 못하였고, 여러번 자기 주장을 번복하기도 하고 말을 바꾸면서 오직 외부적인 정치적 공세로 아타나시우스를 압박해 나갔던 것이다.

니케야회의에서는 아타나시우스가 아리우스와 대결함으로서 삼위일체의 초석을 확립하였고, 콘스탄틴노플회의에서는 양태론자 사벨리우스의 견해를 반대함으로서 양태론을 비성경적인 논리로 확정짓게 되고, 에베소회의에서는 네스토리우스(양성론자)와 단성론자가 대결하게 되었는데, 네스토리우스가 추방을 당하게 되며, 유티케스(단성론자)가 예수는 신성만을 갖고 있다고 주장함으로 회의가 난장판이 되어 버렸으나, 500여명의 각 지역의 교회 감독들이 참여한 칼케톤회의에서는 그리스도는 변화와 혼합이 없이 두 (인성과 신성의) 본성을 한 위격안에 연합하여 갖고 있다고 확인하게 되므로써, 삼위일체와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에 대한 논리가 매듭되어진다.
즉 325년 니케야 회의, 381년 콘스탄티노플 회의, 431년 에베소 회의, 451년 칼케톤 회의에서 삼위일체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에 대한 결론이 150년이란 시간을 통해 일단락되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 후로부터 2000년동안 이 논리들은 숱한 이단들에게 비난과 공격을 받아왔으나, 단 한번도 성경적인 논쟁에서 패한 적이 없었다.

"그리스도는 참하나님이요, 참 인간으로서 신성과 인성은 혼돈치도 않고 바꿀 수도,
나눌 수도 없고, 가를 수도 없다."

4. 잘못 해석한 난해한 성경구절의 예

그렇다면 과연 어느 성경구절이 예수의 신성을 부정케 하였는가?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1:4)

이 문장만을 부분적으로 인용하여 예수가 나중에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고 주장하는 이단들이 있다. 즉 부활 이전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었고 부활 이후에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주장하는 이단들이 있으며, 예수가 30세가 되고나서부터, 즉 세례를 받은 후부터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고 주장하는 이단들도 있다. 그러나 이 문장은 바로 앞 문장을 함께 보아야만 한다.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롬1:3)

다시 말하여 "예수님은 육신으로 볼 때에는 다윗의 혈통이었다"는 말은 예수님의 인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육신(사륵스)과 성결의 영(프뉴마)은 대조되는 단어로서, 육신으로 보면 다윗의 혈통에서 났고, 영으로 보면 부활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는 것을 말한다.
즉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신성은 일반 사람들에게 감추어져 있었으므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보지 않았다. 그런데 (일반 사람들이) 예수님을 육신적으로 보면 예수님은 다윗의 혈통이셨고(예견된 메시야라는 의미), 영으로 보아도 부활함으로서 (일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인정되다"는 단어는 헬라어 "호리조"로서 "공표하다, 선언하다. 결정하다"는 해석이 보다 분명하다.
영어로는 "be declared"(NIV, KJV)와 "to define correctly" 의 뜻이다.
예수님은 육신적으로 보아도 다윗의 혈통으로 구약의 예언을 이루었으며, 영적으로 보아도 능력으로 부활하심으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모르는 일반 사람들의 눈으로도) 하나님의 아들임을 선언하셨다는 의미인 것이다.
또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는 문제가 되는 문장은
다음과 같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골1:15)

이단들은 항상 보편적인 성경구절 대신에 특수한 구절이며 부분적인 구절만을 강조한다.
예수님이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셨다"는 이 구절만을 강조하여 예수님이 피조물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독생자, 장자라는 "프로토토코스"(First born)이라는 용어는 성경에서 자주 등장하는데, 그 말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예수님의 신분적인 지위와 신성을 의미하는 데에 사용되어진다. 그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앞구절은 예수님이 피조물이라는 주장을 도리어 황당한 주장으로 만들어 버린다.
오히려 15절 바로
다음의 16절은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라고 언급하고 있으며, 17절에 보면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라고 언급하고 있다. 참고(요1:1-3, 롬9:5. 요8:56-58-출3:14,)
그러나 이단들은 부분적인 단어 하나만을 확대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