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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트만의 삼위일체론

에반젤(복음) 2020. 2. 21. 13:35



몰트만의 삼위일체론

  


 

1. 기독교적 일신론의 비판


1) 일신론과 단일군주론

초대교회 변증가들 이후부터 선포되어온 한 분 하나님 ` ` 영향으로 인해 삼위일체론은 삼위일체론은 일신론적 사고방식의 위협을 완전히 떨쳐 버리지 못하였다. 한 분 하나님은 단일군주론( --> )으로 이어졌고, 로마의 정치적 단일 군주체제를 옹호해주는 매력적인 종교적 이데올로기로 작용하였다. 그러나 엄격한 일신론은 어떠한 모양으로든지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할 수 밖에 없다.


2) 일신론적 기독교(종속론 Subordinatianism) : 아리우스

하나님은 가장 높은 실체로서, 그는 나누어질 수 없기 때문에 진술될 수도 전달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중간 존재가 필요한데 이 중간 존재로서의 예수는 최초의 피조물로서 처음 태어난 아들이라고 불릴수 있으나, 독생자라고 불릴수는 없다고 보는 문제를 안고있다.


3) 기독교적 일신론(양태론 Modalism) : 사벨리우스

하나님은 단 한분으로서 그의 계시와 구원의 전달의 역사에 있어서 세가지 형태를 취한다. 성부의 양태속에서 창조자로, 성자의 양태속에서 구원자, 성령의 양태속에서 생명을 주시는 자로 나타난다. 양태론은 겉으로 보기에는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한 이론이나, 본질적인 것은 단 한분하나님이요, 세 인격은 한 인격(아버지)의 활동 양식으로 격하되어 버린다.


4) 삼위일체론의 기초 형성 : 터툴리안

하나님은 영원전부터 한 분이지만 혼자는 아니다. 한분 하나님은 수적인 혹은 일원론적인 단일성이 아니라 그 자체안에서 이미 구분되어 있는 단일성이다. 아들과 성령은 세계의 창조와 구원의 사역을 목적으로 아버지로부터 나온다. 그러나 이 목적들이 성취 되었을 때 아들과 성령은 아버지되신 일자(一者) 안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그의 이론은 경륜적인 면에서만 삼위일체적으로 생각할 수 있지 내재적인 면에서는 삼위일체적으로 생각 할 수 없다.


삼위일체론의 인식의 출발점


1. 삼위일체되신 하나님에로의 접근


1) 최고 실체로서의 하나님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우주론적 증명은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최고 실체로 이해한다. 세계의 유한성으로부터 출발하여 최고의 무한한 존재에 도달하는 방법은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제기된 다섯 가지의 우주론적 증명이다. 즉 최초의 운동자, 최초의 원인, 필연적 존재, 가장 큰 존재의 개념, 최고의 이성의 개념에 도달하는 방법이다. 이 결과 하나님을 최고의 존재로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점에 대해 몰트만은 본래 토마스가 증명한 것은 하나님의 존재가 아니라 신적인 것의 본질이었다. 따라서 그의 답변도 신적인 것은 무엇인가의 문제였지 하나님은 누구인가의 문제가 아니었다. 우리가 이 최고의 실체를 하나님이라고 반드시 불러야 할 필요성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 증명의 힘을 통하여 최고의 존재로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몰트만은 "모든 사람들이 이 실체를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모든 사람들의 의견일치로부터 유래하며, 이것은 토마스 자신에 의하면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상대적으로 보편성을 가진 언어 사용이 제공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15)




2) 절대 주체로서의 하나님


위에서 언급한 우주론적 하나님 증명의 방법은 근대에 와서 진부한 것이 되었다. 우주론적 하나님 증명의 방법은 질서 잡혀 있는 코스모스를 전제하는데, 인간 중심의 현실은 더 이상 세계를 하나님의 코스모스로 생각하지 않고 인간 인식의 한 소재로 이해한다.16) 이성과 침략과 노동을 통하여 인간은 자신을 세계의 주체로 만들었다. 근대에 와서 인간의 관심은 최고 실체로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 주체에 있게 되었다.


세계를 궁극적으로 비신격화시키고 수학화시킨 데카르트의 견해에 의하면 "인간은 감각적으로 중재된 모든 경험을 의심할 수 있다. 그러나 의심하는 것이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의심할 수는 없다. 사고하면서 그는 자기 자신을 직접 의식하게 된다. 이러한 자기 확실성이 흔들릴 수 없는 확실한 기초이다. 그러나 그는 유한한 존재로서의 자기를 의식한다. 따라서 그의 자기 의식과 함께 무한한 존재의 관념이 이미 함께 정립되어 있다. '내가 존재하며 한 완전한 존재의 관념이… 내 안에 있다는 사실로부터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아주 명확하게 증명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루돌프 불트만은 실존철학의 기본명제로써 자기 자신에 관하여 자기 자신으로부터 말할 때에만이 하나님에 관하여 말할 수 있다고 하였다.17)


몰트만은 근대의 이러한 하나님 개념의 출발점과 목표는 인간을 주체로 이해하는 것과 인간의 모든 인식과 관계에서 인간 주체성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18) 즉 근대 철학에서 하나님은 인간의 주체의식을 확인시켜주는 절대 주체의 하나님과 다름 아니다고 주장한다.


3) 삼위일체되신 하나님


교회의 전통적인 삼위일체론은 기독교전승과 신조에서 유래한다. 신약성서의 증언은 필연적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개념을 발전시켰다. 아들로서의 예수의 역사는 오직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역사로 이해될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여기서 몰트만은 기독교 삼위일체론은 앞에서 살펴본 가장 높은 절대 실체로서의 하나님 개념과 절대 주체로서의 하나님 개념에 비하여 그 특징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즉 삼위일체론은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에 관하여 새로운 사고의 원형을 초래하는가의 문제에 관심을 갖는다.


이 점에 관해 몰트만은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터툴리안 이후 전통적인 삼위일체론은 어딘가 하나님의 단일성이 강조되어 왔다는 점을 먼저 지적한다. 즉 터툴리안에 의해 표상된 한 실체-세 인격(Una substantia-tres persona)이란 순서에서도 그렇고, 토마스 아퀴나스 이후 서방 신학의 정설처럼 된 '한 분 되신 하나님에 관하여(De Deo uno)', 그리고 '삼위일체되신 하나님에 관하여(De Deo trino)라는 순서 자체가 그렇다는 것이다. 즉 신학은 언제나 하나님은 한 분이라는 점을 먼저 증명하며, 그 다음에 그분의 삼위일체를 증명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절대 실체인 한 분 하나님은 부동하여 고난을 받을 수 없는 분으로 이해하게 만들었는데 이것은 희랍철학의 구도를 벗어나지 못한다고 본다. 전통적인 신론이 십자가에서 당하신 아들의 고난과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하여 말한다 할지라도 감히 역사 속에서 고난당하신 하나님에 대해서는 말해질 수 없다는 것이다.19)


다음으로 몰트만은, 헤겔 이후부터 기독교의 삼위일체는 절대 주체라는 보편적 개념으로 표현된다고 보았다. 이 경우의 삼위일체는 '한 주체-세 존재 양식'으로 표현되며, 이것은 결국 양태론적인 성격을 띄게 된다. 이 개념에 의하면 단 하나의 신적 주체는 세 가지 존재 양식 안에서 각기 다른 방법으로 자신을 전달한다. 즉 하나님은 아버지를 '나'로, 아들을 '자아'로, 성령을 아버지의 나 자아의 동일성으로 이해한다.20)


몰트만은 "오늘날 삼위일체론의 새로운 연구는 철학적이며 신학적인 전통과 비판적으로 대결할 때만이 가능하다. 과거의 실체의 삼위일체론으로 복귀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과걱의 존재의 사유의 우주론으로 복귀한다는 것은 근대로 전환한 이후의 이 시절에 있어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근대의 주체의 삼위일체론을 계속하는 것도 별로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근대의 주체의 사고는 점차 힘과 의미를 상실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 중심적 사고는 최근의 상대주의적 셰계론으로 위축되고 있으며, 인간 중심적 행동은 사회적으로 폐기되어 가고 있다"고 주장한다.




2. 삼위일체론적 사고의 장소


우리는 앞서 몰트만이 삼위일체의 하나님에로 어떻게 접근하는지 살펴보았다. 이 장에서는 삼위일체론적 사고가 필연적으로 성립되는 구체적인 장소에 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삼위일체론의 장소는 '사고의 사고'가 아니라 예수의 십자가이다. "직관없는 개념은 빈 것이다. (Kant) 삼위일체론적 하나님 개념의 직관은 예수의 십자가이다. "개념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Kant) 십자가에 달린 그 분의 직관의 신학적 개념은 삼위일체론이다. 삼위일체론의 내용적 원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십자가의 인식의 형식적 원리는 삼위일체론이다.21)


이처럼 몰트만의 삼위일체의 출발점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안에서 삼위일체론적 사고가 시작된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아버지의 내어줌이다. 아버지께서 그의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며, 그리하여 내어주시는 아버지가 되신다. 아들은 이 죽음에로 버림을 당하며, 그리하여 죽은 자들과 산 자들의 주가 되신다.22) 아버지를 통하여 버림받은 가운데서 아들이 당한 고통과 죽음은 아들의 죽음에 대한 아버지의 고통과는 다른 고통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죽음은 간단히 성부수난론적으로 이해하여 '하나님의 죽음'이라 이해될 수 없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와 그의 하나님과 아버지 사이에 일어난 것을 파악하기 위하여 우리는 삼위일체론적으로 생각하여야 한다. 아들은 죽음을 고통당하며, 아버지는 아들의 죽음을 고통당하신다. 여기서 아버지가 당하는 아픔은 아들의 죽음만큼 큰 것이다. 아들이 당하는 아버지의 상실은 아버지께서 당하시는 아들의 상실과 상응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되신다면, 아들의 죽음에서 그는 그의 아버지되심의 죽음을 고통당하시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삼위일체론은 하나의 유일신론적 배경을 극복할 수 없다


4. 맺는 말

몰트만 교수는 특히 한국과 인연이 깊은 분이다. 한국을 여러 차례 다녀갔고 또 한국 학생들을 지도하여 여러 명의 박사를 배출하기도 했다. 그는 암울한 유신 독재의 시기부터 지금까지 우리에게 희망과 정 치적 책임적 삶의 근거를 제시하여 격려를 주어 왔고, 제3세계의 고통받는 백성들과 함께 한국 백성의 고난에 깊은 정신적 연대감을 표시 함으로써 위로를 주어 왔다.

그의 책임적인 응답의 신학은 몰역사성, 내세성, 개인주의에 빠져 있는 한국교회를 각성시키는 예언자적 충격을 주어왔고, 종말론적 희망에 투철하면서 역사에 책임지는 교회, 고난 속에서 제자도를 실천하는 교회, 항상 갱신되어야 할 교회, 민주화 인간화 정의 실현에 투신하는 교회를 독려하고 있다.

또 다른 한편으로 그는 기독교의 그 어떠한 유산도 쉽게 내버리지 않고 거기에 활력을 주려고 노력하는 가운데서 한국 교회로부터 많은 것들을 배우려고 한다. 한국 교인의 활기찬 모습, 정치적 항거와 고난, 한국 교회의 영성을 그는 높이 평가한다. 그의 신학은 직접, 간접적으로 정치신학, 흑인신학, 해방신학, 민중신학에 영향을 미쳤고, 또 이 신학들로부터도 도전과 자극을 받고 있다. 특히 그는 한국의 민중 신학을 유럽에 소개할 뿐만 아니라 솔직하고 분명한 비판도 들려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