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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신학박사 이현채 학장의 조직신학 종말론

에반젤(복음) 2020. 2. 21. 11:20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신학연구원

 

                                                 조 직 신 학

(종 말 론)

                                                 


차          

 

서론적 고찰  .......................................................................................  1

 

1편 개인적인 종말론   ................................................ 7

 

1장  육체적 죽음  ..........................................................................  7

 

2 장 중간기 처소  ......................................................................... 13

 

3장 중간 상태   ...........................................................................  18

 

2편 일반적 종말관  .................................................. 21

 

1장 그리스도의 재림   .................................................................. 21

 

2 장 천년 왕국  ............................................................................ 32

 

3 장 부활  .................................................................................... 44

 

4 장 최후의 심판  ......................................................................... 46

 

5 장 최후 상태  ............................................................................ 47

 

요           약  ...................................................................................  54

 

 

종    말    

서론적 고찰

 1. 종말론

 종말론이란 역사의 진행이 종결되고 하나님의 모든 구원 사역이 종결되어서 완성된 후 하나님께서 영광을 보시는 새로운 세계로 함께 들어가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완성을 다루는 조직신학의 분과이다. 종말론을 내세 론이라고 하는데 종말론이라고 해야 옳다. 그리고 종말과 종말론이라는 구분을 어떻게 하느냐? 종말은 창조를 가리켜 시간적으로 말할 때 역사의 과정을 거치는 여기에서 시작하여 저기의 끝에 이른다는 말이다. 그러나 종말론의 이해는 시간적인 끝만 말하지 않고 시간의 과정에서 시간 안에 있는 모든 사건들을 포함하여 그것보다 더 큰 것이 없는 의의를 갖는 사건을 종말론이라고 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종말론적이요 부활하심이 종말론적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구원역사가 끝에 완성되지 않았고 역사의 중간에 완성되었다. 즉 십자가와 부활은 역사의 중간에서 이루어졌고, 그보다 더 큰 구원이 없으므로 이러한 구원사역을 종말론이라 한다. 종말론을 이러한 의미로 접근하지 않으면 사건 중심으로 흐르기 때문에 예수님을 놓친다. 예수님으로부터 새로운 세계와 새 생명이 도래된 의미로 종말론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의 생명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도입하셨다. 역사 중에 예수님 외에 어떤 사건에 의해서 그와 같은 사건이 도입된 적이 없다. 그러므로 역사에서 구속보다 더 큰 사건이 없어서 종말론적이라고 말 한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의 권세와 종말에 나타날 권세가 별개가 아니다. 동일한 권세가 완전히 성취된 형태를 아는 것이다.

 1). 초대교회의 종말론적인 삶

 우리는 종말을 생각하면 일이 다 끝난 마지막 때 그것만 생각한다. 즉 종말이 저 먼 곳의 이야기이다. 그래서 지금 나와는 무슨 상관이 있는가? 해야 할 일이 다 끝나고 그 후에 자연적으로 올 것인데 별로 상관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종말론이 지금 우리의 생각에는 조직신학의 부록이다. 즉 조직신학을 배우고 졸업하기 전에 배우는 부록과 같다. 그러나 초대 교인들은 종말의 관점으로부터 자기들의 모든 생을 전개했다. 정말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기상과 함께 주님이 꼭 오실 줄 알고 잠을 자는 기대감에 살았다. 현실적으로 내일 예수님께서 오실 것으로 생각하고 오늘 살고 오는 잠을 자는데, 경쟁에서 이긴다는 생각이나 온갖 죄악을 범하면서 살았겠는가?

 

 소망의 신학을 제창한 몰트만도 이 이야기를 많이 강조한다. 우리가 초대교회 그리스도인과 같은 신앙에서 살았으면 오늘 현 세계가 이렇게 되겠는가? 라고 몰트만이 그의 ‘소망의 신학’ 처음 부분에서 그렇게 질문을 제기한다. 그러나 몰트만은 초대교회 종말론 이야기를 제기하는 것이 아니다. 소위 보수신학의 챔피언이라 하는 보스(G. vos)라는 사람도 그의 저서 ‘바울의 종말론’에서 모든 신학을 종말론에서 전개해야 된다고 했다.    

 2) 몰트만의 종말론

 그는 소망의 신학에서 기독교 종말론을 아주 강하게 질타하고 있다. 이제 종말이 되면 예수님이 재림하고 죽은 자가 살아나고 심판을 하고 그리고 세상을 정화한 다음에 새 하늘과 새 땅이 도입된다. 이러한 전통적인 교리는 그에 의하면 꿈같은 이야기요 신화적인 이야기라고 한다. 그는 말하기를 그 때에 임하는 그 나라의 관점에서 현 세상을 변화시켜야 되지 않느냐고 하면서 변화시키는 과정의 방법에 새로운 마르크스주의의 투쟁이론을 많이 도입했다. 폭력을 정당화 하는 이론에 있어서는 우리가 도저히 좇을 수가 없다. 그러나 모든 현상이 최상의 하나님 뜻이라고 하는 안일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좋은 경종이 된다.

 3) 개혁신학에 있어서 종말론의 의의

 종말론은 한낱 저 멀리의 문제만이 아니다. 그러나 실제로 전개해 놓은 종말론의 내용이 그렇게 부록 정도로 취급하고  전개한다. 그러나 종말론을 그렇게 부록으로만 보면 안 된다. 우리가 몰트만을 조심해야 되겠지만 보스도 그렇게 이야기 한다. 저 하나님의 나라가 마지막에 나타나니까 우리는 현세에서 어떻게 해도 좋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바른 자세가 아니다. 종말에 하나님의 나라가 나타나니까 현상은 그냥 용인해 주는 것은 옳지 않다.

 하나님의 나라는 공의와 화평이 완전한 나라이다. 우리의 목표가 이 하나님의 나라인데(물론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의 손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완전한 하나님 나라를 자기의 손으로 이루신다. 그러나 역사의 과정에서 자기의 나라가 시간 내에서 실현되도록 하셨다. 하나님께서 역사의 과정에서 그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그 책임을 우리에게 맡기셨던 것이다.

 

 4) 한국적 상황에서 종말론적인 삶의 필요성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꾸 핍박을 하고 힘들게 하면 거기서 벗어나기가 어렵다. 그러나 청교도들이 미국으로 건너갈 때 그렇게 크고 무서운 죄를 범하도록 해서 미국으로 간 것이 아니다. 그 양심을 조금씩 건드려 주일 성수를 온전히 성수하지 못하도록 하기 때문이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자유를 억제하였는데 그들은 마음껏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무작정 떠나다보니 미국을 만난 것이다. 그러면 우리 한국 사회는 그리스도인에게 핍박하지도 않은데 무슨 문제가 있느냐? 하고 핍박이 없음을 감사하겠지만 핍박을 한다면 괴로운 일이다. 공무원들을 주일날 동원해서 일을 시킨다고 할 때 사표를 내고 나오면 일자리가 없다. 이 때에 교회가 어떻게 할 것인가?  왜 교회가 가만히 있는가? 총회도 감투를 쓰기 위해서는 앞서겠지만 나라가 주의 법을 어길 때 가만히 있을 것이다. 왜 그런가? 오히려 정치가 하는 일에 종교가 간섭한다고 할 것이다. 부당하게 교회를 침해할 때 교회가 정부를 향한 외침은 정치에 간섭한 것이 아니다. 우리 사회의 정치와 경제 문제에 있어서도 교회는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러면 교회가 밖으로 나가서 외치며 시위를 해야 하는가? 이래라 저래라 하는 식으로 항의하는 것보다 하나님 말씀에 법에 의해서 어떻게 하는 것이 바른 정치이고 바른 경제 운영인지 원리를 제시할 수 있다. 이는 정치를 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치는 법을 따라서 행해야 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주신 복음의 권세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상을 바로 잡는 것이다. 우리에게 임할 영광의 나라의 관점에서 이 현 세계가 전개되도록 우리가 일을 해야 한다.

 5) 재래 조직신학의 종말론의 약점

 재래 조직신학의 종말론의 전개는 그냥 역사적 전개를 다루고 만다. 지금은 우리가 고난 받고 괴로워도 참고 지내가가 재림 날 잘 되면 그만 이라는 식이다. 현실이 힘들고 어려워도 종말에 가서 천년 왕국이 오면 잘 먹고 잘 입으며 왕 노릇까지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이 초대교회 이후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충만하다. 그래서 어거스틴이 그 아름다운 필치로 천년왕국이 너무 육욕적이고 현세적이어서 모두 교회 밖으로 추방해버렸다. 말하자면 그것은 아직 그리스도적이 아닌 것이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그리스도인은 천년왕국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 땅위에 천년왕국에 대한 동경과 염원이 사라지지 않았고, 소수의 분파들을 통해 남아 있었다. 세속화된 형태지만 공산당의 공산주의 국가도 기독교 천년왕국의 세속화 형태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자기들이 본래 가지고 온 유산에서 나온 것을 그렇게 현세적으로 세속화해서 표현하다가 보니 공산주의가 된 것이다. 그렇지만 그 목표는 동일하다. 그 천년왕국의 축복의 때를 자기들의 손으로 실현해보겠다는 것이다. 불란서 혁명도 이와 같은 동일한 목표를 추진한 것이다. 이것을 밝힌 철학자가 칼 바르트이다. 그는 1932년에 그 책을 썼는데 “18세기 철학자들의 하늘의 도성”이다.

 

 우리는 천년왕국에 간 후가 아니라 현재의 삶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나타나도록 해야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는 종말론을 공부하는 자세이며 천국을 선취하는 신앙인의 자세이다.

 2. 종말

 1) 종말의 의의

 세계와 모든 역사의 종말은 창조하심의 완성이며 새 역사이다. 여기에 새 역사라고 했는데 재래 의미의 새 역사는 아니다. 왜냐하면 그 때는 시간과 영원이 통합한다. 시간이 영원에 통합된 그러한 형태가 어떤 형태이냐? 쉽게 말하면 시간이 정지된다. 시간이 정지된 것이 어떤 형태일 것인가에 지금은 알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것은 시간 안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어려운 것이 종말이요 그렇기 때문에 그 영원의 상태가 어떨 것인가는 말하기 어렵다. 그 새 역사라 할 때 시간이 계속되는 의미로는 아니다.  

 2) 종말의 근거

 종말은 반드시 심판을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다. 그러한 의미로는 타락 때문에 혹은 그리스도의 구속 때문에 종말이 필연적인 것으로 보지만 타락이 없었어도 역사는 완성에로 간다. 창조의 성격상 그리고 처음 하나님의 경륜 때문에 완성에 이르게 되어 있다. 타락이 없고, 그리스도의 구속이 없었어도 역사는 완성된다. 혹은 모든 피조물의 세계는 완성이 될 것이다. 창조가 완성 형태보다 보시기에 좋은 것, 일종의 출생 형태로 출현되었기 때문에 창조사역의 완성인 영원으로 안착하여 시간을 초월한다.

 

 3) 종말 시기의 조건

 창조 속에 들어 있는 보화와 무한한 가능성들이 모두 개발되고 마지막 선택 받은 자가 출생할 때 완성에 이른다. 언제 역사가 끝나느냐? 마지막 선택 자가 부름 받을 때 끝난다. 참으로 확실하게 말하고 싶지만 종말이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옛날에는 기차나 자동차로 인체의 해가 있다고 20킬로 이상은 금했지만 지금은 아마도 비행기로 로켓으로 대치되거나 콜롬비아, 챌린저호로 대치할 교통수단의 연구가 마쳤는지 모르는 세상이다. 들은 말로는 정류장만 있으면 된다는 식이니 놀랄 일이다. 꽝 하고 쏴 올린 후 지구를 몇 바퀴 돌다가 단추를 누르면 인천공항에 내려서 시간을 보면 30분 걸린다. 그리고 현대 인체 의학이나 인체 공학이 말하기를 사람이 늙어서 죽은 사람이 아직 없다고 한다. 모든 기관이 고루 만기가 된 것이 아니라 어느 한 장기 기능이 마비되어 죽는다. 그래서 오래 사는 비결이 무리하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물질적인 것 말고 인간 안에 정신적인 것도 무한한 가능성들을 모두 개발하는 것을 포함한다.

 계시록 2124절에 왕들이 그 영광을 가지고 그 성문으로 들어오고 민족들이 그 영광을 가지고 그 성문으로 들어온다. 이 때에 각 민족들이 이룩한 문화의 업적들과 인간의 덕을 개발한 것도 모두 포함된다.

 이렇게 창조 후에 된 모든 것들이 정화되어 새 하늘과 새 땅에 포함된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은 하나도 탈락하지 않는다. 그래도 거기에는 예외가 있다. 타락한 천사들, 사람들 중의 유기 자들은 여기에 포함되지 못한다. 때문에 회복이고, 혹은 은혜인 것이다. 새로운 것으로 창조하지 아니하고 그 손으로 지으신 것은 하나도 떨어져 나가지 못하게 하신다. 하나님이 지으신 것은 어떤 것도 종말에 탈락되거나 없어지지 않는다.

 4) 종말과 정화

 종말 이전까지는 전 창조가 저주아래 있기 때문에 자기의 가능성을 모두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범죄 한 후 우리 아담의 후손은 늘 죄의 속성에 살고 있지만 종말에는 죄의 근원이 모두 제거되고 저주가 제거된다. 저주가 완전히 제거되면 사물의 아름다움은 말할 수 없이 크다.

 

 지금은 왜 아름답지 못한가? 저주가 아직도 가려져 있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본래대로 영광도 찬란하지만 더 높은 영광의 자리로 올라간다. 다시 말하면 저주만 없어진 상태가 아니라 완성의 단계에 이르는 것이다. 그런데 종말 이전까지는 창조가 정화되지 않았으니 선에로 나가는 것이라 해도 각 분야에 악이 끼어 있다. 아무리 잘해도 냄새가 나는 게 있고, 아무리 잘한다고 해도 인간의 냄새가 나는 게 있음은 창조가 정화되지 않음이다. 죄가 모두 제거된 것이 아니니 악이 함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선을 지향하는 면에만 악이 있느냐? 그렇지 않다. 악한 사람들에게도 선이 있다. 사람은 사단이 아니다. 악인도 사단이 아니다. 현세는 많은 경우에 속고 속이는 것이다. 즉 바리새인들이 나쁜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이 잘한다고 열심을 내지만 진리와 반하는 쪽으로 나쁜 짓과 잘못된 생각을 했기 때문에 나쁜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원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개혁을 많이 해야 될 사람은 자기 자신이라고 고백하는 자이다. 우리는 개혁이 마쳐지면 완전한 성화의 끝이라는 것을 잊지 말고 가슴이 뛰는 자가 되자.

 5) 종말론과 그리스도

 종말론은 그리스도에게서 전개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제까지의 재래 조직신학인 바빙크와 벌콥의 종말론을 읽어보면 마지막이니까 역사의 진행이니 이렇게 혹은 이렇게 진행되고 있는 것뿐이지 예수님과 연관해서 종말론이 전개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창조와 구속을 이루셨기 때문에 그가 세계 역사를 종결하신다. 그가 역사의 주관자이다. 어떻게 말하면 그리스도가 역사의 목표이다. 그래서 그분이 역사를 완성하신다. 때문에 종말론은 그리스도에게서 기독론 적으로 전개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역사가 완성되면 어떻게 되느냐? 그때 은혜가 자연의 질서로 통합된다. 은혜와 자연이 별개로 존재하지 않고 하나로 통합된다. 그래서 구속의 흔적이 없어지지 않은 것이며 오히려 그 형태가 드러난다.

 6) 종말에 대한 바른 태도

 종말에 대한 과도한 기대에 집착해 있는 한국 교회의 종말론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종말에 대한 과도한 기대로 예수님을 닮고 그 법을 따르며 분부한 것들과 그리스도인의 중요한 사명을 회피하거나 망각하면 안 된다. 카위퍼는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이 성도들에게 합당하나 그리스도인의 사명을 회피할 명목이면 불가하다고 했다. 얼마 전만 해도 아무리 노력해도 보람이 없어서 빨리 천국이라는 곳을 가려고 했다. 그런데 지금은 예수님이 오시면 좋겠다는 사람이별로 없다.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려야 하지만 재림 때문에 우리가 발목이 잡혀서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건설해야 되는 사명을 회피하면 그것은 바른 태도가 아니다. 그리고 종말의 날을 헤아리는 것도 우리의 바른 태도가 아니다. 세대주의 계통의 목사들이 열심히 다니엘서부터 풀어가지고 연대와 사건을 모두 기록하면서 날짜를 계산하여 가르치는 명수가 많다. 그런데 그 일은 우리의 일이 아니다. 내일을 마지막의 날로 알고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 주일 예배할 때만 정성을 다하고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살다가 집에 돌아오면 해방된 것처럼 살아서는 안 된다.

 

 제 1편 개인적인 종말론

 종말이란 어떤 형태이든지 중요하다. 여기 마지막 종말론, 일반 종말론, 보편 종말론도 중요하지만 개인의 종말론이 더욱 중요하다. 보편 종말론 때문에 개인의 종말론이 더욱 중요하다. 자기가 어떻게 살고 갔느냐가 자기의 운명을 확실하게 결정한다.

 제 1장 육체적 죽음

 제 1절 육체적 죽음의 성질

 육체적 죽음이 무엇이냐? 죽음이란 영혼과 신체의 분리, 즉 영혼과 신체가 분리되는 것이다. 그것뿐만 아니라 산자의 세계에서 영원한 격리이다. 산자의 세계를 떠난다. 죽음은 신체와 영혼의 분리로 육체적 생명의 종결이다. 분명한 죽음이란 것이 존재의 소멸이나 중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생의 자연적 관계들에서 분리된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천국에 있는 영혼들도 죽은 자에 속한다. 왜 그러느냐? 생의 자연적 관계들에서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산자의 세계에서 분리된 것이 죽음의 특성이므로 하늘에 있는 영혼들도 이곳에서는 죽은 자로 치부한 것이다.

 그리고 육체적 죽음과 영혼의 죽음은 구별된다. 그런데 지금은 일차적으로 육체의 죽음을 말하지 영혼의 죽음을 말하는 사람이 없다. 죽으면 영혼이 어떻게 될 것을 누가 생각하는가? 눈에 보이지 않은 영혼이 잘되는 상태를 모르니 육이라도 120년까지 살아보려고 노력한 것이 아닐까? 한심한 것은 육체가 잘되는 것이 나타나야지 영혼이 잘된 증거라는 것이다. 그러니 한국에서는 예수님을 잘 믿어도 가난해서는 안 된다. 좋은 집도 사고 많은 재물을 모아 부자로 살며 건강해야 한다.

 

2절 죄와 죽음과의 관계(왜 죽는가?)

 1. 펠라기안파와 소시니안파

 이들에 의하면 사람은 본래 죽도록 창조되었다. 그러니 창조 내에 죽음이 포함된다. 죄를 지어서 죄의 값으로 죽게 된 것이 아니고 이미 죽는 형질로 창조되었다. 그러므로 죽음은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것이다. 사멸의 법에 종속되었기 때문에 죽도록 운명되어 창조되었다고 한다.

 지금 현상만 살펴보면 사실 죽지 않을 존재가 어디 있는가? 죽지 않을 사람도 없거니와 죽지 않을 생물이 어디 있는가? 현상만 보면 모두 죽게 되어 있으니 죽음이 처음부터서 사람의 형상 구조에 본래적으로 포함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사망이 온 것은 죄 때문이다. 하나님의 저주로 온 것이라고 분명하게 진술한다.

 2. 헬라 철학

 헬라 철학은 몸은 죽고 지성적인 영혼만이 불멸이라고 말한다.

 3. 로마 가톨릭

 로마교회는 영혼의 불멸뿐만 아니라 육체를 하나님 형상에 넣어서 처음부터서 몸의 불가사성을 말한다.

 4. 개혁파

 개신교의 개혁교회에서는 우리의 몸이 외적으로 상해를 가하지 않는 한에는 죽지 않게 창조되었다고 말 한다. 완전한 영생에 이르는 것은 구속의 관문을 통과해야 되는 것이었다. 인간은 생명의 연속을 방해하는 요소가 없는 한 계속 존재한다. 즉 인간이 죽음의 씨를 가진 상태로 창조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죽음이란 아담의 범죄로 왔고 그 원죄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죽음은 하나님의 정하신 죄의 값으로 온 형벌이고 저주이다. 하나님은 공의로 범죄 한 인간에게 죽음을 부과하셨던 것이다.

 제 3절 죽음의 도입 과정(수명 단축의 원인)

 카위퍼가 그의 종말론에서 미생물의 경우를 예를 들어 본래 육체의 불가사성의 가능성을 말한다. 어떤 미생물의 경우에는 계속 분열함으로 원형은 바뀌어도 생명의 보존은 계속된다. 자꾸 둘로 분열을 하고 그러한 과정에서 처음 형태는 없어져도 분열한 작은 형태의 조그만 생물들은 분열한 형태로 남는다. 하나가 있었으나 둘로 변하면 처음 하나는 없어졌지만 또 둘로 분열함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 것이 또 분열하면 또 분열하고 그 처음 형태는 없어져도 계속해서 살아 있다. 모체가 죽는 것이 아니라 분열해서 다음 세대로 또 그 다음 세대로 넘어간다. 그렇게 보는 한 가사적으로 창조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고등 동물의 경우에는 모체가 죽고 그 씨를 통해 존속한다. 씨를 계속 내는 것도 자기가 영구하지 못하므로 결국 자기 보존의 방법이다. 원래 인간의 육체는 외부에서 죽음을 가져오거나 상해를 가하지 않는 한 계속해서 살수 있게 창조되었다. 그런데 그것을 결정적으로 방해하는 요소가 무엇이냐? 죄이다. 그러므로 죽음은 부자연스러운 것이지 하고 싶어서 하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2) 죽음의 도입 과정

 하나님께서 이 죽음의 과정이 이루어지도록 여러 가지 섭리적인 조치를 취하셨다. 첫째 부패: 창조할 때는 부패하지 않도록 창조하셨다. 그런데 하나님의 저주가 임하여 부패한 것이다.  둘째 생체조직들의 퇴화이다. 셋째 낙원에서의 기상 조건의 변화: 기상 조건은 사람의 생명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열대 지방에서 문명이 나온 법이 없다. 지금은 과학으로 증명할 길은 없지만 타락 이전에는 어떻게 생겼을까? 지금 같이 혹은 언제든지 살기 좋게 따뜻했느냐? 모를 일이지만 그때는 대기층뿐만 아니라 대기층 속에 수중대가 있어 가지고 태양열과 해로운 광선 즉 우주선이 많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했다. 그래서 낙원시대에는 항상 상온을 유지하도록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넷째 전자장의 세력 약화: 이것이 결정적인 원인이다. 가령 아담이 살았을 때 소위 전자장의 크기가 한 600가우스 쯤 되었다면 지금 전자장의 가우스가 0.62가우스 밖에 안 된다. 그 때에는 외부에서 들어오는 우주선 맞으면 피해가 되는 우주선의 유입이 거의 없었다. 지금은 전자장이 약화되어 우주선을 반사하지 못하니 우리의 대기권 속으로 들어온다.  하나님께서 죽음을 도입하실 때에 여러 가지 섭리적인 조치를 취하셨는데 점진적으로 전자장의 세력을 약화시켰다. 그래서 빨리 죽게 된 것이다. 불로장생을 꿈꾸며 좋은 것을 먹는다고 하면 약간의 세월을 더 살아갈 수는 있으나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한다.

 

다섯째 육식을 허락하심: 육식의 허락은 수명 단축의 근본 원인이다. 육식 동물이 오래 살지 못하고 초식 동물들이 오래 산다. 안식일 교인은 거의 채식을 하니 병이 적고 수명이 길다. 육식이 많은 경우에 질병의 원인이다. 힘을 냄과 동시에 수명의 단축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3) 물리학에서 발견한 하나님의 저주의 법칙

 (1) 열역학 제 1법칙: 에너지 보존의 법칙으로서 창조의 종결로의 표현이다. 창조에 에너지가 증가되지 않고 그 총화를 이룬다.

 (2) 열역학 제 2법칙에서: 활용의 가능 에너지 감소의 법칙으로서 하나님의 저주로 인하였다. 1법칙은 창조가 계속되지 않음을 시사하고 이 창조가 해체되고 파괴되는 것이 제 2법칙이다.

 열역학 제 1법칙은 모든 과학적인 변화 과정에 있어서 그 변화전과 후가 에너지의 총화는 같다는 것이다. 에너지의 증감이 없다는 말이다. 지금 물리학에서 발견한 제일 보편 법칙이 무엇이냐?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다. 모든 물리학 법칙 중에서 제일 보편한 법칙이 열역학 1법칙과 2법칙이다. 1법칙은 에너지가 바뀔 뿐이지 에너지의 양이 증가되지 않는다. 즉 총화는 동일하다. 우리가 아는 진화론이 여기에서 장례식을 한다. 진화는 자꾸 발전해서 유치한 곳에서 복잡한데로 올라가는 것이 진화론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려면 에너지가 아주 가속적으로 보강되어야 이루어진다. 에너지 없이 되는 일이 없고 힘을 가해주어야 모든 영향력이 이루어진다. 에너지가 가산되지 않고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물론 이것이 이 우주를 폐쇄체계로 보느냐? 개방체계로 보느냐의 관점에 따라 다르지만 현재까지 나온 물리학 법칙에 의하면 에너지의 증가는 없다. 그러므로 창조는 계속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열역학 제 1법칙에 의하면 창조는 종결되었다. 열역학 제 2법칙은 엔트로피법칙인데 에너지의 감소 법칙 혹은 무질서로 가는 법칙이다. 자연을 그냥 두면 항상 질서를 잘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이 끝나면 그것이 해체되어 버린다. 인간 사회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우주의 조직들이 해체되고 일을 못 이루는 정지 상태로 가서 에너지가 가용 에너지 상태에서 비가용 에너지 상태로 바뀐다. 그것이 엔트로피 법칙인데 왜 이렇게 되었느냐? 이는 하나님의 저주로 점점 더 해체과정으로 가고 있다. 그러므로 진화론은 엔트로피 법칙에 의해서 반박할 수 있다. 물론 어린아이들이 탄생하여 힘이 솟는다. 그러나 남자는 35세부터 하향 곡선을 긋는다. 계속해서 새로운 에너지가 증가한 아주 건강한 세포를 만들지 못한다. 그게 다 엔트로피 법칙 때문이다.

 

 제 4절 죽음의 의의

 1. 일반 세상에서 죽음의 의의

 누구나 죽기를 싫어하며 영구히 살기를 바란다. 어느 경점에서 죽는다고 생각하면 기가 막힌다. 사람들은 죽음이 가까이 오면 죽는다는 것을 아는데 그 죽음을 느낄 때 얼마나 절망적일까? 죽음 건너편을 보장해줄 무엇이 있는가? 인간적인 이성으로 생각하면 실존주의에서 말하듯이 죽은 후에 무가 되면 간단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니 살려고 발부둥치는 것은 죽을 때 그 눈에 미래 세계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저 건너편의 세계는 어느 민족이든 그 나라 민속학적으로 한결같이 죽음 건너편을 말한다. 죽음 과 건너편의 세계 외에는 민족들의 설화가 없다. 어느 민족이나 그들 나름대로 장례식의 문화가 있다는 것은 내세를 증거 하는 것이다. 자연과학에서는 그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 자연과학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현상에서 볼 수 있는 것 우리의 감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세계뿐이다. 믿음의 영역을 신화라고 해서 너무 허무맹랑하다고 하며 신빙할 수 없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자연과학자도 죽기 싫어하고 죽은 다음의 세상을 기대하기 때문에 죽음은 인간에게 비정상적이며 부자연스러운 것이라고 한다. 하이덱거에 의하면 모든 사람들은 죽음이 있다고는 알지만 자기는 죽지 않고 누군가가 죽는다는 삶은 아직 실존주의 삶이 아니다. 무덤을 보면서도 자기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다. 남이 수술을 받을 때는 의술이 발달한 것이요 자기가 받을 때는 의술이 형편없고 죽게 될 때는 의술의 한계성에 절박감을 느낀다. 좋은 환경과 영광스러운 것들도 진짜가 아니라고 죽음을 자기의 문제로 받아드릴 때 비로소 자기의 실존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죽음이라는 허무 앞에서 죽으면 어찌 되느냐가 전부이니까 죽음 앞에서 본래의 자기를 실현하며 성실하게 살려고 노력한다.

 2) 성도에게 있어서 죽음의 의의

 

 (1) 죄의 억제 방편이다.

 죽음이 없으면 담대해 져서 범죄가 더욱 가증된다. 복음이 왜 좋으냐하면 죄를 억제하기 때문이다. 죽을 것이니 죄를 삼가 한다. 죽음을 생각하고 심판 주 만날 생각을 하면 담대히 죄를 짓지 못한다. 단명은 불행한 일이지만 축복이라고 할 때 죄를 억제하기 때문일 것이다. 장수할수록 세상에 능하고 죄를 많이 짓는다.

 (2) 성화의 종결이다.

 죽어서 영과 육이 분리되므로 죄를 지을 수 있는 기관이 없어진다. 아무리 죄짓고 싶어도 더 이상 죄가 성립되지 않는다. 성화의 완성은 영화이며 부활 때에 성취된다.

 (3) 죽음이 가까웠다는 의식은 하나님의 심판에 대비하여 살게 한다.

 종교 개혁자들은 하나님 앞에서라는 의식이 아주 깊었다. 하나님이 보고 있는 가시적인 공간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 죄를 마음대로 범할 수 없고, 경찰이 보고 있다고 해도 죄를 금하지만 목격자가 없다면 자기소욕대로 자연스럽게 죄를 범할 수 있다.  오늘날 성도들과 지도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살고 있음을 인식하고 죽음을 생각하면서 살아간다면 그것이 심판에 대비한 삶일 것이다. 우리가 은혜를 받고 은사를 받으면 자연을 억압하거나 능가하는 것이 아니다. 자연을 자연 되게 하고 회복하는 것이 은혜이다. 독신생활과 금욕주의를 반대하는 이유가 하나님이 세우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제 5절 죽음의 해결

 1. 일반 은총의 역사

 하나님은 일반 은총의 역사를 제재하시고 억누르심으로 인류 사회를 존속하게 하셨다. 현금의 죄악에도 인류사회가 존속하고 있는 것과 지구가 지금까지 보존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다. 지구는 인간과 생물을 살게 하는 유일한 횡성이다. 그런데 인간은 개발과 발전을 구실로 자연 질서를 파괴하고 녹지대를 없애고 대기와 물을 오염시킴으로 인간의 생명을 파괴하고 단축시킨다. 지금은 많은 수확과 크고 좋은 과일을 얻기 위해 자연 질서를 파괴한다. 하나님의 은혜로 유지되는 생태계를 파괴하고 그 결과를 자기와 후손에게 물려준다. 그리스도인들의 할 일은 이 자연 질서를 돌아보고 보호하는 것이며 정치, 경제, 사회, 문화와 예술과 각 분야의 학문 등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게 하는 일과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모든 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정화시켜야 한다. 이 모든 분야가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구속 때문에 유지 보호되는 것을 알리고 하나님의 통치인 천국이 이 땅 위에 확장되게 해야 한다.

 

 2. 특별 은총의 역사

 그리스도는 특별 은혜로서 악의 근본인 사단의 세력을 정복하셨다. 죄로 인한 하나님의 저주아래에서 완전한 해제는 종말에 그리스도를 통해서이다. 이를 보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그렇게 큰 의의를 갖는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죽음의 법을 깨뜨려서 새 생명이 도입되게 했다. 지금 우리가 종말에 살고 종말론적인 생이 주리 중에 들어와 있다. 그런데 우리가 그 생을 가진 자로 살지 않고 이 세상이 마지막인 것처럼 산다.

 3. 종말에서의 완전한 해결

 왜 아직도 예수 믿어도 질병이 있고 고통이 있는가? 저주가 아직 해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악의 근본은 종말에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제거된다. 그러면 죽음과 질병이 없어진다. 그 때 새 생명이 그 세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영원히 힘 있게 살 수 있게 된다.

 

  2장 중간기 처소

 제 1절 중간기 처소의 천국과 지옥

 1. 중간기: 개인의 죽음부터 마지막 종말까지의 기간인데 우리가 죽어서 마지막 부활할 때까지가 중간기이다.

 2. 중간기 처소: 죽은 자의 영혼이 예수님의 재림과 육체의 부활을 기다리고 있는 곳이 중간기 처소인데 종말에서의 천국과 지옥으로 동일한 장소일 뿐이며 시간이 멈추어진 곳이다. 이러한 곳 외의 다른 중간 지점은 없다. 로마교회에서는 음부 낙원 혹은 연옥이 있다고 하는데 이는 아직 최후 심판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개인의 운명이 아직 모두 확정되지 않은 것으로 생각을 하니 지옥에 갈 사람이지만 아직 지옥으로 가도록 판결이 안내려졌으니 음부에 가고 또 천국에 갈 사람이 최후의 보상 선언이 없어서 낙원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중간기 상태는 천국과 지옥뿐이다. 그러므로 연옥과 림보 등은 성경적인 근거가 없는 것이다.

 

 3. 지옥의 실제성

 그러면 천국은 하나님이 계신 곳인데 지옥은 어디냐? 한문으로 땅 지자와 옥 옥자이니까 땅 속에 있는 옥이라는 감옥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 직경이 약 6.600 km 이니 약 3.000 km 내려가면 거기에 태양만큼이나 뜨거운 게 있는데 거기가 지옥인가? 현대과학이 발달한 사회에 천국이 어디 있고 지옥이 어디에 있느냐에 무어라고 답변하겠는가? 로마교회에서는 신앙은 신앙이고 과학은 과학이라고 한다. 천국은 하늘 멀리에 있다고 하면 그만이지만 지옥을 그렇게 하면 안 된다. 지옥이 희랍어로 게헨나 인데 글자 그대로 풀면 흰놈의 골자기이다. 그 곳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신의 제단 불을 피워 놓고 그 위에다가 아이를 얹어 놓고 태워서 바알 신에게 바친 곳이다. 왜 그렇게 하느냐? 바알 신은 생산의 신, 풍요의 신이라는 무지함의 소행이었던 것이다. 지력이 떨어져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을 모르고 아이를 바쳤던 것이다. 즉 곡식을 얻기 위하여 아이를 바친 것이 얼마나 끔찍한 죄악인가? 그리고 지력 때문이므로 곡식도 얻지 못함이 아닌가? 이렇게 이방인들에게는 자연세력이 신이요 그 자연세력을 의인화 한 것이 신이다. 이렇게 바알 신에게 흰놈의 골짜기에서 제사한 행위에서 게헨나라는 지옥이 나왔다. 그렇다면 지옥을 보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야 하나? 예루살렘도 지금은 바알 신에게 불태워 제사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금해도 우상숭배를 해결하지 못했는데 바벨론 포로생활 중에 해결되었고 귀환한 후 우상의 문제가 제기되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은 흰놈의 골자기가 없다. 지옥은 있는 것인가? 어디에 있는가? 있다고 믿으면 있어지는 것인가? 땅 속에 있는 것인가? 즉 하나님께서 시간이 흐르지 않은 곳에 분명한 장소에 지옥을 두셨으니까 있는 것이며 우리가 믿는 것이다. 천국에 간 사람과 지옥 간사람 모두 안보이지만 어느 쪽은 인정하고 어느 쪽은 부인할 수 없어도 지옥은 확실하게 있다.

 제 2절 중간기 처소로 음부와 낙원에 대한 바른 이해

 소위 낙원이나 음부가 따로 있어서 낙원은 재림 전에 성도가 천국 가기 전에 있는 곳이고, 음부는 불신자가 지옥에 가지 않고 있는 곳으로서 완전한 형벌도 없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스올이나 하데스가 곧 지옥이고, 낙원은 곧 천국이다. 죽은 자의 운명은 벌써 죽을 때 모두 결정된다. 천국 아니면 지옥이다. 우리말의 음부로 번역된 구약의 스올이나 신약의 하데스는 의인이나 악인이 동일한 운명에 차하게 되는 장소로서 형벌도 상급도 아닌 약화된 의식과 침체한 활동이 없는 장소이며 침울한 곳이라고 하는 것이 통속적인 이해인데 이는 잘못이다.

 

 2. 낙원

 낙원은 무엇인가? 성경에서 그리스도만이 낙원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그러므로 낙원이 메시야의 거소이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심으로 형장 밑에 조롱하는 사람들과 못 박은 사람들이 듣도록 자기가 메시야이심을 증거 하는 복음으로 독특한 언어를 사용하셨다. 신약에서 예수님 외에 아무도 낙원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사람이 없다.  

 제 3절 중간기 처소의 연옥, 조선림보 및 유아 림보의 비판

 1. 연옥

 원어 상 연옥은 지옥이 아니다. 숙정하다에서 온 말로 정화의 처소이다.

 1) 로마교회의 견해

 로마 가톨릭에 의하면 완전한 자들의 영혼은 즉시 천국에 들어가고 대다수의 성도들은 세례를 받았지만 죽을 때에 아직 죄책 하에 있기 때문에 연옥에서 불로 정화하는 과정을 겪어야 한다고 했으나 비성경적이다. 또한 정화 기간은 개인의 경우에 따라 다르며 지상의 가족이나 친족들의 기도와 선행, 특히 미사에 의해서 기간이 단축되며 고통이 감해진다고 한다.

 2) 연옥설의 기원과 현대 신학의 경향

 현대 신학자들은 지옥을 연옥, 곧 묶어 놓는 곳이라고 한다. 일찍이 지옥이 정화된다는 이야기가 오리겐의 주장에서 나왔는데 그의 말에 의하면 만유가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이니 결국은 하나님께서 모두 구원시키기 때문이라고 했다. 오리겐에 의하면 만유가 회복되어 원상으로 되돌아간다. 험한 죄악 세상은 하나님으로부터 탈락이다. 그래서 탈락을 회복시키되  모든 피조물이 원상으로 되돌아가니 지옥에 있는 자들뿐 아니라 사단도 모두 원상적인 영의 상태로 되돌아간다는 신학이 오리겐의 주장이다. 현대신학에서는 바르트의 후계자들이 오리겐의 이론을 주장한다.

 바르트는 그리스도가 대표로서 선택되고 유기되어, 그리스도의 선택 때문에 그리스도의 인성에 동참한 자들은 모두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즉 그리스도에게 모든 사람이 유기되었고 그리스도로 모든 자들이 선택되어 구원에 이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옥이 정화하는 임무를 모두 마쳤다면 그 소임을 다한 지옥이 종말에는 없어진다는 것이다.

 

 3) 비판

 성경에는 연옥의 근거가 없다. 그러므로 배척한다. 연옥을 천주교가 큰  비중을 두면서 추정해도 성경말씀에 근거가 없기 때문에 비성경적이다. 우리는 중간기 처소로 연옥이 없기 때문에 비성경적인 연옥을 배척한다.

 연옥에 있는 동안에 헌금과 기도와 미사를 하면 천국으로 귀환 한다고 가르치기 때문에 죽은 망자를 위하여 신부님을 찾아가서 옛정을 못 잊어 연옥미사를 드리고 연옥에 있는 남편이나 아내를 빨리 천국으로 올려야 되니 몰수헌금이 있고, 그 헌금 때문에 로마교회 물질이 풍요로운 것이다. 남미에 가면 성당 주변에 판자촌과 천막들은 몰수헌금으로 모두 바치고 난후 대책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영결미사로 바치고 살길이 없으니 교회 주변에 모여 천막을 치고 산다. 로마교회는 살아생전에 헌금을 안 해도 죽을 때는 교회로 들어가는 길이 열려 있다.

  한국교회의 상황

 우리나라도 비슷하다. 지옥에 대한 설교는 하지 않고 축복설교만 하는 것이다. 지옥이 있어야 회개하고 죄가 무서운 것을 아는데 축복의 설교로 삶을 무디게 만든다. 현실이 좋고, 하는 일이 좋은데 무엇이 부족해서 회개, 지옥을 생각이나 죽음과 몇 년 후의 일을 앞당기느냐의 식이 되었다. 그러므로 지옥이 없는 일에는 자유주의와 보수주의가 같은 것이 되어 간다.

  2. 조선 림보

 1) 로마 교회의 견해

  그리스도의 피가 구약 백성들에게 없었기 때문에 구약 백성들은 천국에 갈 수 없고, 조선림보에 가서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후에 저들을 위해서 음부에 내려 오셔서 옥문을 열고 함께 천국으로 데려갈 것을 대망하고 있었다. 즉 아브라함부터 세례 요한까지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이전에 죽은 모든 구약 성도들의 영혼이 그리스도의 부활까지 대망 상태로 머물러 있는 곳이다. 왜 그러느냐? 십자가가 지금부터 이천년 전에 있었다. 그 이전에는 그리스도가 피를 흘리지 않았기 때문에 속죄가 없다. 그리스도 십자가 이전에는 구약의 모든 성도들이 조선림보에 있다가 그리스도가 지옥에 강하하여 그들에게 찾아 가셔서 옥문을 열고 데려가셨다고 주장한다.

 

  2)비판

 역사적인 사고로 생각한다면 그렇게 할 수도 있으나 이것을 우리가 배척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경륜 내에서 이미 중보자의 의가 구약 백성에게 전가되어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이미 중보자의 의가 되는 그리스도의 피가 그들에게 적용되었다는 것이 히브리서의 가르침이다. 시간을 초월하여 그 의가 역사 한다. 하나님의 경륜을 떠나서 발생된 것은 없다. 하나님의 경륜과 분리되어서 일어난 사건이란 것은 창조 세계에는 없다. 하나님의 경륜 내에 있는 그리스도의 의가 그의 백성들에게 전가되어 천국에 간다. 아브라함의 품에 있음이 천국이다. 여기서 아브라함의 품은 인명이 아니라 믿음의 조상이라는 자리에 굳게 서있는 천국의 대명사로서 아브라함이다.

  3. 유아 림보

 1) 로마교회의 견해

 로마 가톨릭은 기독교인이거나 이교도를 불문하고 세례를 받지 못하고 또 선악을 행하지도 않고 죽은 어린아이들은 원죄가 없기 때문에 지옥도 아니고 천국의 축복에서도 제외된 곳에서 구원의 소망도 없이 억류되어 있으나 그곳에서 자연적 재능들을 사용하여 하나님을 알고 자연적 행복을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유아 림보는 목회자의 입장에서 보면 호소력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어린아이가 신생아 때 죽었다는 것은 최고의 스트레스이며, 부모로서 마음이 얼마나 아프겠는가? 그럴 때 목회자가 찾아가서 예배를 인도하며 지옥에 가지 않았다고 하면서 고통이 없는 곳에서 잘 있다고 하면 좋을 것이며 위로가 되겠지만 비성경적이며 잘못된 신학이다.

 2) 비판

 개혁파에서는 영아 구원 교리와 유아 림보도 배척한다. 왜냐하면 죄의 보편성 교리에 배치되기 때문이다. 어린아이라도  스스로의 범한 죄는 없지만 모두 원죄아래 매여 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죄인으로 출생하는 것이다. 그래서 선악을 분별하기 전에 죽은 유아는 구원 받을 수 있거나, 혹은 구원받을 수 없다란 말은 바르지 못하다. 왜냐하면 식물인간도 있고, 유산된 자도 있기 때문에 선택의 교리로 설명해야 바르다. 선택 받은 아이의 경우 죽기 직전에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초자연적인 공작으로 중생하여 죄과가 제거된 구원이다. 선택 자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만 구원이다.

 

   3 장 중간 상태

  1절 영혼 수면 설

 1. 견해

 재세례파와 어빙파와 럿셀파들은 사후에 영혼이 계속 존재하되 수면 상태에 있다고 주장한다. 성경에 사람이 죽으면 잔다고 표현하니 그것을 근거로 죽으면 의식 활동이 끝나서 부활 때 다시 시작하는 것으로 주장한다.  

 2. 비판

 1) 성경적인 근거

 성경의 잠은 죽음을 표현한 말씀이다. 죽은 자들을 산자의 편에서 보면 잠자는 것 같은 형태로 있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한 것이고, 성경은 영혼이나 육체가 사후에 잠을 잔다고는 단 한번도 표현하지 않았다. 잠자는 사람의 무의식, 무 활동 상태이니 현세 활동에 참여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죽은 자를 이해하지 못한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혼이 실제로 수면하는 상태로 있는 것이 아니다. 성경이 말한 사후세계는 천국과 지옥에서 의식적 생활을 마지막 부활의 날까지 누리고 있음을 강조한다. 영혼이 수면하는 것이 아니라 천국에서는 기쁜 의식이고 지옥에서는 슬픈 의식이 있을 뿐이다.

 2) 과학적인 증거

 영국 경험론에서는 영혼이 독립된 존재가 아니고 두뇌의 기능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두뇌가 상하면 못 깨어나고, 두뇌를 마취해 버리면 죽은 자와 같기 때문에 경험론을 앞세우지만 비신학적이다. 경험론으로 접근하면  영혼이 있다고 할 수 없다. 우리의 견해는 두뇌는 영혼과 독립된 존재로 있고, 그리고 두뇌 없이도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영혼은 사후에도 존재하되 왕성한 활동은 생전처럼 할 수 없으나 기억과 인지와 지각하는 것은 자유로운 것이며 영혼도 출생과 창조가 있다.

 3) 신학적인 근거

 신학적인 근거로 영혼 수면 설을 반대할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가 중단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살아 있을 때 주신 은혜가 죽었다고 쉬시면 안 된다.  그러므로 우리를 구속한 그리스도의 은혜가 사후에도 그 영혼과 함께 있다. 예수님의 은혜는 일시적이 아니요 영원한 은혜이다.  

 

 제 2절 멸절설과 조건 영생 설

 1. 멸절 설

 인간은 불멸의 존재로 창조되었으나 죄인은 그 불멸성을 박탈당하여 사후에 의식적 실존을 누릴 수 없는 파멸에 이르니 곧 죽음은 무로 돌아가는 것이라는 이론으로 비성경적이다.

 2. 조건적 영생 설

 불멸성은 인간의 생득적 자질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믿는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사이다.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은 자는 무화된다는 양자택일이 있을 뿐이다. 일부는 사악한 자의 사후에 제한된 기간에 의식적인 고통이 있을 것임을 가르치기도 한다. 조건적 영생 설은 본래 우리가 불사하도록 창조된 것이 아니고, 예수 믿는 공로로 불사 성을 얻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불신한다면 생명이 끝나는 것이다. 이는 악인들에게 좋을 것이나 신학적으로  조건적 영생 설은 문제가 많다.

 3. 비판

 1) 영생의 성격은 불멸만이 아니다.

 멸절설과 조건적 영생 설은 성경에서 죽을 것, 파멸, 멸망 등의 위협적인 용어를 비존재로 귀속하는 무화를 뜻한다고 한다. 이는 영생이 불멸성과 다르며, 크고 풍부한 의미를 지닌 것이 영생이란 것을 모르는 소치이다. 성경은 죄인들에게도 성도들과 같이 그들의 현존이 계속된다고 가르친다.

 2) 하나님의 공의 때문에 영벌이 있다.

 위의 두 설을 왜 반대하는가? 악인은 죄로 영생이 박탈당하여 멸절하고 성도는 믿음을 조건으로 영생한다는 설은 하나님의 공의를 말살하는 의견이기 때문이다. 선인은 상을, 악인은 벌을 받아야 한다. 또 악인의 형벌에 등급이 있는데 멸절은 영벌의 가능성을 말살해 버린다. 형벌에는 고통과 죄책이 있는데 의식의 종식은 형벌로 볼 수 없다. 악인은 하나님의 엄위와 영광을 훼손했으니 형벌을 받아야 하고, 의인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섬겼으니 영생과 영광을 받는다. 만일에 악인이 벌을 안받는다면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 아니시다. 심판을 받으면서 할 말이 있는 사람도 많이 있을 것이나 그때에는 나는 아무개 옆에 살았는데 복음을 듣지 못했습니다가 통하지 않을 것이요 하나님의 창조가 헛되지 않으며 공의와 사랑을 밝히 드러내실 것이다.

 

  3절 제 2의 시련 설  

 1. 견해

 죄 가운데서 죽은 자들이 구원에 이르도록 죽은 후에도 중간 상태에서 회개하고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는 계기가 주어진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경우에는 그는 사멸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 안에 주어진 구원을 끝까지 거절할 때만 정죄되는 것이다. 인간의 영원한 상태가 죽음과 부활의 중간기에서 취한 태도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이지 심판의 날까지 변경될 수 없을 만큼 고정된 것은 아니라 한다.

 2. 비판

 1) 죽은 자의 운명은 변경될 수 없다. 지옥에서도 천국에 올라갈 기회가 있다는 말은 연옥 설보다 더욱 악하다. 영원한 운명은 그 사람의 육신의 생이 결정한다. 천국간 자나 지옥간 자나 그 운명이 고정되어 있어서 더 이상 변경이 없다. 자기의 영원한 처소가 죽음 직후에 확정된다.

 2) 복음의 권세는 현생에서 택한 자를 능히 구원시킨다. 2의 시련 설에 의하면 지옥에 갔어도 또 한번의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기회가 있다. 이 교리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구속이 복음으로 완전하지 못하며, 복음의 권세가 확실하고 능력 있는 것이 아니므로 커다란 권세가 없고, 능히 구원할 자를 구원치 못하신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들이 지옥에 가서 보니 모든 것을 알게 되어 모두다 예수님을 믿을 것이요 모두 구원을 받으면 선택교리는 어떻게 이해를 할까? 이러한 악한 교리들은 심판을 싫은 자들이 만든 사단적인 이론이다. 복음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이고 전능하신 분이시니 구원할 자를 능히 구원하신다.

 3) 죽은 자의 영혼이 귀신이 되는 것이 아니다.

 요즘 귀신설이 분분해서 억울하게 죽은 자들이 공중에 떠돌아다닌다고 한다. 소원을 풀어 준다면 그 처소로 돌아간다고 한다. 하지만 사람이 죽으면 그 운명을 결정된 상태에서 죽음이 온다. 죽은 자가 산자와의 경계를 넘나들지 못함이 성경의 증언이고 할 일이 있을 때는 간접적으로 천사를 동원하신다. 산자와 죽은 자를 넘나드는 영체들은 무엇인가? 죽은 자라는 귀신이 아니다. 악한 영들의 활동이 종말까지 허락되었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죽은 자의 영혼의 처소가 정해졌기에 나사로를 보내라고 했다. 우리 민속 신앙은 원한이 많은 사람과 처녀 귀신이 두렵다고 본다. 나타나 보이는 현상은 죽은 자가 하는 것 같으나 악한 영들이 죽은 자의 한을 미끼로 한풀이를 하는 것이다.

 

 

 제 2편 일반적 종말관

  1. 일반적 종말의 의의

 구속주가 구속을 이루셨으므로 심판주의 자격으로 심판하시고 역사를 완성하신다. 역사의 완성 자가 바로 구속 중보자이시다. 심판하신이가 바로 구속을 이루시는 것이다. 역사를 완성하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을 도입하신다. 그리고 구속 받은 인류, 혹은 창조를 아버지 앞으로 인도하신다. 그 때 하나님이 만유 안에 만유가 되신다. 그러면 하나님은 처음 창조의 목표에 도달하신다.

 2. 창조와 완성의 비교

 첫 창조가 지향하는 목표에 이르니 구속은 창조의 회복이다. 낙원의 표준을 능가한 그리스도의 은혜 때문에 낙원의 상태를 훨씬 능가한다. 영광의 광체가 상상을 초월하게 능가한다. 현세도 저주와 죄의 권세가 흑암으로 물들이지만 하나님의 저주를 걷어버리면 비교할 수 없이 월등한데로 이르러 간다.

 3. 일반적 종말과 그리스도

 그리스도께서 심판 후 새 하늘과 새 땅을 도입하시며 그 영광스러운 재창조가 완성되면 그 완성된 창조를 아버지 하나님께 인도할 때 구속은 완결된다. 더 이상 구속의 중보로 역사하시지 않는다. 그 후에 영원 세계에서 하나님과 백성간의 신인의 연합의 중보자로서 일하신다. 이 때 하나님의 뜻이 인간의 뜻과 일치하고 하나님의 형상이 되어 하나님을 반영한다.

  1장 그리스도의 재림

 제 1절 재림 전의 대 사건들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을 약속하셨다. 그러나 재림은 그 시간과 때를 아무도 예상할 수 없다. 그러나 요사이 능력이 있고 탁월한 부흥사들과 미국의 철두철미한 세대론 자들은 이 비밀을 벗기려고 한다. 바벨론으로부터 시작해서 도식을 그려가며 세대가 이렇게 되어가니 예수님은 곧 오신다고 하면서 연대의 계산을 시도한다. 그리고 666이 짐승의 수라고 하더니 요즘은 컴퓨터가 666이라고 한다. 재림의 바른 자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믿고 우리가 재림을 예비하고 사는 것이지 날자 계산하는 것은 옳지 않다. 세대론 자들은 종말이 가까울수록 비밀이 벗겨져서 예측할 수 있다고 하나 그것은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의 표적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희미한 앎의 지식으로 이방인의 부름과 이스라엘의 회심과 큰 배도와 재난 그리고 적그리스도의 출현이다.

 

 1. 이방인을 부르심

 이방인을 부르심으로 전 세계적으로 복음이 편만한 상태를 말한다. 이것이 어느 정도까지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지금은 복음이 전 세계적으로 편만해지고 있으나 이것이 각 나라마다 한 사람의 선교사를 파송하거나 모든 나라와 인류 한 사람에게까지 한결같이 복음이 전해져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 생각으로는 복음이 국민생활에 힘이 되어 표적이 되어야 할 것 같은데 이를 강조하면 후 천년기설에 도달한다. 그러므로 시대와 지역적인 의미에 있어서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들이 모두 구원받을 수 있도록 전파되는 것이라 할 것이다. 바울도 로마 천지를 누비며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면서 종말이 곧 임할 것으로 알았으나 그 후 2000년이 흘렀다. 시대마다 종말을 고하는데 언제 종말이 올 것인가? 이방인의 부르심이 어느 정도까지인가? 이는 몰라서 말할 수 없고, 오직 우리의 세대가 마지막인줄 알고 복음을 편만하게 전해야 옳을 것이다. 성도에게 있는 예수님의 재림은 전체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준비해야 할 것이다.

 2. 이스라엘의 회심

 신구약은 선민 이스라엘의 미래에 있을 회심을 말한다. 로마서 11장은 이 사건을 시간의 종말과 연관 시켰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국민적으로 전체가 회개할 것이라고 추정하나 온 이스라엘이라는 표현은 고대 언약백성 중에서 선택하신 많은 무리를 가리키는 말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많은 성도가 세상 끝 날에 예수님께로 돌아오리라는 것을 가리킨 듯하다.

 1) 이스라엘의 회복과 귀환

 

 이스라엘에 대한 에스겔의 예언은 옛날 섬김으로 돌아가서 나라를 이루면서 그 때 메시야를 영접해 들인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역사의 달력과 같은데 1.200만 명 중에 900만 명이(러시아에 300, 미국에 600) 돌아가지 않고 있다. 이방인의 수가 차기까지 있을 것이라고 본다. 국가적으로는 회복되었다고 하나 돌아가지 않고 있다.

 2) 이스라엘의 회개

 예수님 재림전의 이스라엘의 회심을 전제로 이스라엘 나라가 회복된다. 나라를 이루면서 그때 메시야를 영접해 드린다. 천년기론 자들에 의하면 복음의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강제적 권세에 의해서 회심한다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맞지 않다. 말하자면 천년 전기론 혹은 세대론 자들에 의하면 유대인들의 회심이 재림 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재림을 보고 회심을 한다. 즉 재림으로 회심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는 그 구원의 길이 복음인데 복음의 권세가 아닌 물리적으로 하는 것인가? 그러므로 예수님 오시는 것을 보고 즉각적으로 회심을 하는데 그것은 다분히 천년 전기의 천년왕국이 전제되어 있는 이야기이다. 우리는 재림을 보고 하는 회심이 아니라 복음의 권세로이며 천국에 있는 자나 천사가 아니라 사람의 입을 통한 복음의 권세로 구원을 받는다. 성경의 전체적인 증거에 의하면 예수님 오시기 전에 민족이 회복 될 뿐만 아니라 그때 가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것으로 말했다. 이것이 언제 성취될 것인가는 확실치 않다. 지금은 유대인들이 모계 중심으로 개종하는 추세이다.

 3) 이스라엘의 의의

 유대인들이 자꾸 기독교로 돌아오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원칙적으로 구원사적인 측면에서 보면 그리스도의 출생으로 이스라엘이라는 역할과 존재 의의를 다했다. 즉 구원이 이스라엘에서 남이란 그리스도 출생을 말한다. 만약에 이스라엘에서 구원이 나면 예수님은 왜 오셨나? 예수님에게서 구원이 난 것이다. 성경에서 단수는 예수님으로 이해함이 좋다. 하나님을 이겼다는 것은 성자님이 성부님의 공의에 만족을 드리고 자기 백성을 구원함을 말한다. 구약의 목표가 그리스도이며 그리스도의 출생으로 목표가 이루어졌지만 그 민족이 없어지지 않았다. 이는 선민의 사명 외에 또 다른 평범한 사명이 있기 때문이다.  

 

 4) 이스라엘의 메시야 주의적인 교육

 이스라엘은 공기관의 교육이 19세기까지 접근을 못하도록 했다. 그래서 회당에서 토라를 가르치는 교육만 하다가 교육의 제한이 해제되었다. 그때부터서 유대인들이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이스라엘의 교육효과는 많은 석학들을 배출하여 천재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유는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을 배우기 때문인데 지금도 그들은 주간은 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야간은 회당에서 토라를 배우므로 천재를 많이 배출한 민족이다. 그 비결은 메시야 주의적인 교육으로 천재 교육이 된 것이다. 우리나라 교육은 돈하고 직결되는 곳에 가라고 하지만 그들은 불합리한 세상을 보다 좋은 세상으로 만들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 노력케 한다. 우리나라도 천재교육은 성경을 읽도록 하고 둘째는 그리스도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도록 가르쳐야 될 것이다. 공부에서 공부! 유명한 대학과 학과를 선택케 함이 삼류인간을 만들어 인류 대학을 나오게 하니 문제가 많은 것이다. 출세와 풍요롭게 사는 것보다 인류 문화에 기여하고 더 낳은 인류사회를 위해서 일할 사람을 길러야 할 것이다. 자기만 잘되려는 사고를 버리고 누구나 수고한 대로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급선무이다. 그리스도 왕권이 실현되도록 교육을 해야 한다. 한국 교회 성도가 일천 이백만이라지만 앞으로 사천만이 되어도 사회가 불변한다면 이기주의가 문제이다. 진정한 의미로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변화되어 이 사회가 바른 사회가 되도록 헌신하는 그런 환경에서 하나님의 도우심과 고상한 동기에 의해서 충동될 때 자기 역량을 발휘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기독인들이 사회에 뛰어들어 살기 좋은 나라를 위해 헌신적으로 일하고 천재성이 발휘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형편은 기복신앙 때문에 시간만 있으면 복을 달라고 교회당에서 철야와 금식을 하는 형편이다. 또한 공교육도 어서 빨리 성경을 가리켜야 할 것이다.

 3. 큰 배도

 여기 배도라고 함은 어느 개인이나 단체가 타락한다는 것이 아니라 세계가 기독교를 반대하는 입장에 뭉쳐진다는 뜻이다. 성경에 이만만은 2억을 말하는데 문자적으로 해석할 때 그런 군대를 동원할 나라는 중국, 인도, 러시아일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 정치력은 기독교에서 이탈해 가면 지도력을 잃게 된다는 것을 유념하자.

 

 4. 큰 재난

 이것도 막연하다. 얼마나 재난이 커야 하는지? 세계 2차대전의 싸움이 끝날 때쯤 사람들은 마지막 전쟁일 줄로 알았다. 그런데 지금은 3차 대전이 일어나면 국지전이 아니라 전면전이라고 하면서 핵무기들이 터지면 생존할 수 있을지 의문이 많다. 그런데 일류 역사에서 재난과 전쟁이 없을 때가 있었나? 때문에 어느 정도의 재난인지 알 수가 없지만 큰 재앙이 예상되고, 재난의 계속은 사람의 마음속에 참신앙의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재림 직전의 7년 대 환란은 재림 직전의 큰 핍박을 말한다. 교회가 휴거되는 것이 아니라 통과한다. 교회가 존속 할 수 없을 만큼 잔해를 입는다. 종말의 징조와 심판의 예고로서 앞서 있을 표적과 기사들은 성도에게는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 불신자들에게는 신진 세력의 출현을 대망케 한다. 그 고난의 시작으로 재림하시며 우주를 재생으로 이끈다.

 5. 적그리스도의 출현

 1) 적그리스도의 출현의 배경

 필연적인 사실이며 역사 발전의 귀결이다. 정치, 경제, 종교의 중앙집권적 경향과 과학문명, 기술발달로 인하여 적그리스도 출현이 가능해진다. 적그리스도는 정치 경제 종교의 권력을 모두 장악한다. 히틀러 식으로 발전한다는 것이 아니라 정치와 경제가 밀착되어 있다. 적그리스도는 과학 문명이 아니면 불가하다.

 앞으로 적그리스도가 전 세계적으로 통치하게 될 때 빵과 완전한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듯함의 강함이 입증되어 자연히 부상하게 될 것이다. 한국의 자칭 메시아들 같이 스스로 종교의 영향력을 발휘하여 내가 해야겠다는 식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빵이 많고 쾌락이 넘쳐나도 초자연 세계와 단절되어 살기 때문에 마음속에 평화가 없고 우리에게도 믿을 것을 달라고 하며 신적 세력의 출현을 대망한다. 그럴 때에 “보라 내가 빵과 안전을 보장하니 나를 믿으라.”고 표를 찍어 달라할 것이다. 자연적인 추세로 적그리스도가 정치, 경제, 종교 권까지 사로잡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2) 적그리스도의 사역

 적그리스도 출현 때는 전 민족적으로 그리스도의 교회를 핍박하여 지상에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나라를 박멸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모든 민족, 모든 세계의 종족이 모두 힘을 합해서 기독교 세계를 박멸하려고 노력한다. 이는 사단이 그리스도의 사역을 시작한 것의 증명이다.

 

 그런데 천년 전기 론에 의하면 적그리스도가 그리스도의 천년 왕국을 마감한다고 하는데 이는 그리스도가 재림 후에 직접적으로 신적 통치를 하는데 적그리스도가 나와서 싸워 그리스도의 통치를 종식 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천년기가 잘못된 것이다. 천년 왕국이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통치로 지상에서 다스리심을 피조물인 적그리스도의 세력이 그렇게 무너진다는 것이 잘못이다. 어떻게 예수님의 직접적인 통치에 적그리스도가 나타날 수 있느냐? 이는 천년 왕국이라기보다 교회를 모든 민족적으로 전 세계적으로 대항해서 기독교를 박멸하려는 시도일 것이다. 그것이 언제 일어날 것인지를 알지 못한다.

 3) 적그리스도의 정체

 적그리스도가 누구이며 언제 나타날지 이것은 아무도 말할 수 없다. 기독교 초기 2세기 최초의 조직신학자인 이레네우스가 적그리스도에 대해서 많이 설교했다. 그는 예를 들어서 이러한 사람들은 적그리스도의 화상일 수 있으나 누가 진짜 적그리스도인지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대항한 적그리스도 영은 이미 그리스도의 사업을 파괴하는데 열중한 자들의 노력을 통하여 사도 시대부터 나타났었고, 이러한 노력들은 다른 조직체가 나타날 때까지 계속하여 진행하다가 사단이란 적그리스도 출현으로 그 절정에 이른다. 그리스도의 재림 전에 예루살렘에 성전이 건립되면 기독교와 유대교 계통에서 적그리스도가 나올 것이다.

  2절 재림 자체

 재림은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시고 고난을 당하신 그 몸으로 지상에 나타나셔서 가시적으로 다시 오시되 세상을 심판하여 악을 궤멸하고 구원을 완성하는 창조를 완전히 회복하시는 구속사역의 완성자로 오심을 말한다.

 1. 재림의 시기

 1) 시기의 징조

 종말이 언제인가? 이는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 성경은 표적과 기사가 반드시 재림 전 에 있을 것으로만 분명히 하셨지 언제인가는 모른다. 시기와 징조들을 추측으로 가까이 왔다고 말할 수 있어도 재림 직전의 징조라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다. 그런데 두 가지 분명하게 말 할 수 있는 것은 아브라함 카위퍼에 의하면 예수님 재림하시기 이전에 마지막 피택 자가 출생하고 예수님을 믿을 것이라고 한다. 개혁신앙에 의하면 이 세상이 구원의 마지막 기회이니 마지막 피택 자들이 출생을 한다는 것이다. 그게 누구냐? 그리고 언제인가? 이도 모르는 일이다. 이는 사단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또 복음뿐만 아니라 이 창조의 가능성이 개발된 후에 재림하실 것이다. 가장 확실한 것은 우리가 예측하지 못할 때 갑자기 오신다는 것이다.

 

 2) 종말시대

 사도들은 주님의 재림이 가까이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 까닭은 오순절의 성령강림의 역사가 종말의 시작을 알리기 때문이다. 즉 십자가와 부활이 종말 시대를 도입했다. 우리의 삶에 종말의 생이 도입되었다. 성령님께서 임하심은 종말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며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종말의 기간이 끝난다. 오순절의 성령님의 강림이 그리스도의 영적 체험이다. 그런데 그렇게 영적 재림으로 오시는 것이 아니고 육체적으로 오시는 것이다. 도표 식으로 나열해보면 왼쪽에 옛 시대, 오른쪽은 새 시대라면 그 가운데 옛 시대와 새 시대의 교차지점에 초림과 사도시대로부터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포함하여 재림하실 때까지가 종말시대이다.

 2. 재림의 양식

 1) 인격적 양식

 재림의 찬란한 묘사들을 상징적으로 해석하여 그리스도의 사상과 원리가 점진적으로 사회를 지배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현대 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한다. 우리의 견해는 인격적 재림이 영적으로 오심이 아니고 신과 인의 위격이 친히 오신다. 그렇다면 영적으로 오심은 언제 오셨나? 영적으로는 오순절에 오신 것을 영적으로 오셨다고 말할 수 있다(성령님이 그리스도의 영으로 구속사역을 완성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다). 그리고 그의 신격과 인격으로 친히 오시는데 실제로 신, 인의 위격으로 오신다.  

 2) 형태적 재림

 오순절에 성령님으로 오신 영적 강림이 아니라 친히 육체로 다시 오심을 말한다. 영육을 가진 중보자의 위격으로 오심이 개혁신학의 정의이다.  

 

 3) 가견적 재림

 지금도 재림이 이미 되었다고 한 사람들이 있다. 럿셀파는 1914년에 이미 불가견적으로 재림을 하셔서 현재 공중에 계신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럿셀파 내에서도 논쟁이 많다. 사실 왔다고 하지만 가견적으로 온다고 했는데 언제 온다고 계산을 해도 오시지 않으니 문제가 많다. 문제는 그래도 교파가 유지되는 것을 보면 기이한 일이다. 형태적이란 반드시 가시적으로, 보이도록 오시는 것이다. 번개가 동에서 서에 번쩍이듯이 만민이 일시에 볼 수 있도록 오심이 재림이요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재림이다.

 4) 돌발적 재림

 징조들이 재림에 앞서 나타나는 것이지만 재림은 어디까지나 돌발적이고 불시 적이다. 분파의 특징들은 재림하시는 날을 대강 추정해서 언제 오는 것을 확정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스라엘의 회심과 만민에게 복음의 전파됨과 재난과 전쟁의 발발 등이 있어야 하고 또한 적그리스도가 출현해야 하는 등을 재림의 표증으로 삼는다. 그렇다고 해도 확실하게 연대를 추정할 수 없다. 많은 경우에 언제쯤 오신다고 계산을 하는데 그것이 이단들과 분파들의 특징이다. 가마솥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기울었으니 일이 곧 진행될 수 있을 것으로 보지만 그 때가 언제인가?

 임신을 하면 해산은 정해진 것이다. 요즘은 계산이 정확해서 날짜를 알아도 해산을 할 때에 모두 예정일에 나오는 것이 아니다. 조금 늦거나 혹은 빠르듯이 예수님의 재림도 임박한 줄로 알고 예비함이 지혜로운 방법이다. 천년기 중의 약점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종말 시대가 도입된 것에 대한 의식이 약하다. 그러니 천국에 대한 선취가 없는 것이다. 때문에 재림의 시기에 대해서 날과 시간을 정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 아니다. 다만 경성해 있다가 강림하시면 맞이할 뿐이지 언제라고 말하거나 앉아서 기다리는 것은 잘못이다.

 5) 영광스러운 승리의 재림

 예수님께서 하늘의 구름을 타고 천사들의 호위와 함께 하늘나라 성도들의 수행을 받으며 함께 오신다. 그는 모든 악의 세력을 정복하신 왕이시기 때문에 심판주로 오심이요 가장 높으신 승귀의 신분과 최고의 영광에 이른다. 이렇게 항상 승리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다도 신과 인의 중보자로서의 이야기이다.

 

 3. 재림의 양식

 1) 창조의 회복의 완성

 재림의 목적은 우리가 항상 심판만 생각하는데 물론 심판이 곧 구원이니 심판이 중요한 면을 나타낸다. 그렇지만 더 정확하게는 구원의 완성, 창조하신 피조물의 회복을 완성하시기 위해서 오시고, 심판을 수행하시고 세상을 정화하심으로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을 도입하신다. 그리고 악을 심판하고 불로 정화시킬 때 우리의 영혼도 그 불에 의해서 정화 된다고 한다. 그러한 불이 현재로서는 어떤 불인지는 알 수가 없다.

 2) 정화의 의미

 불로 정화한다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인가? 사단과 지옥에 악한 세력이 새 인류의 거소인 천국에는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그 원인을 제거하는 것을 말한다. 완전 정화로 다시 오염될 수 없도록 하신 것일 것이다. 즉 더 이상 악에 빠질 가능성이 없다. 완전히 가능성이 제거된다. 그러므로 죄를 범하려고 해도 범하지 못하는 상태이며, 그 죄가 육체에게 어떤 것도 줄 수 없는 상태이다. 영화되지 않은 지금은 죄가 우리들을 유혹하며 망하게 하면서 육의 소욕을 주기도 한다. 영화된 후에는 타락을 소원할 수도 없고 되지도 않은 상태이다. 그렇게 아름답게 변화된 삶이 정화의 몫이다.

 3) 남녀의 성의 구분

 구원이 완성되니 재생산이 없다. 거기서는 장가나 시집이 없고 자녀를 낳는 것이 없다. 그렇다면 성의 기관이 제거되느냐? 출산은 없어도 남과 녀의 그 인격들이 형성되었으므로 성의 기관은 유지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또한 신체적 불구도 정상으로 회복된다.

 4) 하나님의 충만한 임재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럽게 심판주로 오심으로 승귀 하신 분의 최고 영광에 이른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럽게 오심은 하나님의 임재가 이 창조에 충만해진다. 그리고 성전이 하나님 자신이니 성전이 별도로 필요하지 않은 거소이다. 그리스도는 새로운 인류를 새롭게 창조하여 완전히 그 안에 거하시기 위하여 다시 오신다.    

 4. 스킬더의 하늘 개념

 

 스킬더는 자기 책 “하늘이 무엇이냐?” 라는 책에서 현재의 하늘 처소가 천국의 종착이 아니라고 했다. 우리 모두는 천국은 저 하늘이라고 한다. 그리고 하늘에 간다고 한다. 죽으면 하나님 나라에 갔거나 간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천국은 저 하늘에 있고 땅은 여기에 있는데 마지막 거소인 천국은 어디인가? 하나님이 계신 보좌가 저 하늘에 있고 신천 신지는 여기에서 전개되면 하나님 보좌는 어디에 있느냐? 우리 모두는 계신 곳으로 가야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신다는 말이냐? 그렇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스킬더에 의하면 지금 하늘의 보좌도 거기가 궁극적인 곳이 아니다. 여기라고 하는 곳에 충만히 거하시게 되니 지금 떨어져 있는 하늘하고 여기 신천 신지의 하나님의 거소가 합쳐진다. 계시록에 보면 새 예루살렘이 하늘로부터 내려온다. 천국이 공중에 매달리지 않고(천년기론에 의하면 공중으로 내려오고 우리가 휴거해야 한다) 땅으로 내려온다. 이 때에 7년 환란이 시작된다. 지구는 온갖 더러운 죄악이 많은 고로 잠간 오셔서 천년 왕국 할 때만 사용하신다. 큰 도시마다 죄가 많이 있는 곳이 세상인데 이 세상에다 하나님의 보좌를 놓고 설치된 보좌에 앉으시고 우리가 지상에 산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리고 보좌라고 할 때 솔로몬의 보좌를 생각하는데 여섯 개의 계단이 있고 각 계단과 각 층마다 사자 한 쌍이 지키고 있는 것이 그리스도의 왕권인가? 이는 그리스도의 왕권에 대한 상징이요 예표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메시야 왕권과 보좌는 물리적으로 앉아 계시는 그런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우리에게 충만해진다는 것이다. 지금은 하나님이 계신 곳도 모르지만 그 때는 확실하게 앎이 발생하고 새 창조를 완성하여 그 안에서 완전히 거하시는 것이다.  

  5.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충만한 임재

 1) 낙원에서의 하나님의 임재

 본래 창조가 하나님의 영광의 무대이다. 그 영광의 무대가 의미 없이 보기에 좋았다는 그러한 무대로 창조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무대에 세워진 사람이 영광을 증거 하는 증인으로 세워진 무대요 그 영광을 하나님께 바쳐야 하고 찬양을 성별해서 드리는 책임과 의무를 가지고 있는 무대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창조의 무대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드려야할 자로 아담이 서 있다. 마치 제사장으로 세워진 자는 죄인이 오면 하나님과 화해케 하듯이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드려야 했다. 모든 창조가 그렇지만 특별히 낙원에서 하나님의 임재가 가장 뚜렷한 곳에서 아담은 하나님을 섬겼다. 때문에 하나님의 임재가 거기에 있었고 아담이 하나님을 섬겼는데 그 낙원이 하나님을 섬기는 첫 번째 성전으로서 기능을 행사했다. 그런데 범죄로 타락을 해서 낙원이 훼손되었어도 그 성전의 기능은 훼손되지 않아 후손으로 제사의 제도가 내려감이 은혜이다. 바른 제도로 계승되었는데 그것이 오랜 세월을 거쳐 완성된 이스라엘의 성막과 성전이다.

 

 2) 성전에서 하나님의 임재

 성전이 하나님의 임재의 처소이다. 그리고 거기서 하나님을 섬기고 제사하는 곳이다. 그러나 거기 제사는  임시적이었다. 주권적으로 하나님이 거하시기 때문에 혹은 백성과 약속했다고 해서 거기에 부착하거나 마력적, 기계적으로 계신 것이 아니다. 이렇게 불완전한 임재가 임시적이다.

 3) 성육신과 하나님의 임재

 성전이 하나님께서 임재 하시는 처소로 임시적이셨으나 친히 성자 하나님이 성육신하심으로 그의 신성이신 하나님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충만히 임하셨다. 바울이 골로새서 1장에서 충만 이라고 했고 2장에서 신성의 모든 충만 이라고 했는데 그 충만 혹은 신성의 충만은 하나님 자신의 거대성을 말한다. 하나님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 친히 그리고 완전히 계셨다. 그 계심은 완전하고 항속적인 임재이다. 성령하나님도 임하시면 항속 적으로 임하신다. 거기에 그저 계시다가 아니 계시는 것이 아니라 본체론적으로 계신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가 하나님의 성전이다. 이를 앎이 발생하면 더 이상 돌과 나무로 지은 성전이 필요 없게 된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청결케 하실 때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냐고 질문할 때 이 성전을 헐라고 하셨다. 그러면 삼일 만에 일으키리라고 하신 것이다. 성전을 말할 때 자신의 인성인 육체로, 그리고 자신의 신성인 본체로 성전을 옮기시면서 주의를 집중하시며 자신의 몸에로 성전이 이월되었음을 분명히 하셨다. 그러므로 더 이상 돌과 나무로 지은 성전의 불필요성을 밝히신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 육의 관점에서 볼 때에 성령님을 충만(다스림과 담지 자로 충만), 한량없이 받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그러한 면에서도 또 다른 하나님의 완전한 성전이다. 그래서 너희가 헐라고 했고, 결국 로마인의 손으로 완전히 성전을 훼파하게 하셨다.   4) 교회와 하나님의 임재

 

 그리스도 몸 안에 충만하게 임재 했던 그 성령님이 이제 속죄 받은 새 인류에게 오셨고,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의 마음과 몸이 하나님의 성전이 되고, 그들이 모이는 교회가 성전이 되었다. 이것을 종말론적으로 확대하면 종말에는 사람들 마음과 사람들 가운데 거하시되 그 임재가 충만한 임재요  영구적인 임재이다. 그러므로 돌과 나무로 지은 성전이 필요치 않다.

 

  2장 천년 왕국

 제 1절 천년왕국의 문제

 1. 미국과 한국 교회의 천년전기와 세대 론의 경향

 박형룡 박사님의 조직신학 책은 벌콥의 조직신학을 기초로 서술했는데 천년전기에서 는 자유롭게 하시면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인 무 천년설의 자리에 천년전기 론으로 대치하셨다. 미국에도 보수교회의 80%가 천년 전기 입장이다. J. N. Darby라는 사람이 19세기 중엽에 영국에서 성경공부를 시작하고 성경을 다시 해석하는 법을 세웠는데 그때 성경해석으로 채택한 법이 소위 문자적이고 세대론 적인 해석이었다. 그리고 미국에 전도 여행을 가서 미국 보수주의 교회들에게 그 세대 론을 열심히 가르쳤다. 그 후에 스코필드라는 좋은 제자를 만났고 스코필드는 “스코필드 관주 성경”을 만들어 세대 론의 각주를 달았다. 그래서 미국의 종말론은 세대 론에서 보완된 천년전기에 머물고 있다. 우리나라는 미국의 구레인 박사가 평양 신학교에서 무천 년을 가르쳤다. 그러나 그 이후 건너온 선교사들이 문자적인 해석으로 천년전기를 가르쳐서 문제가 발생했다. 문제는 미국과 한국이 천년전기를 가르치는데 이는 장로교의 핵인 웨스트민스터 신앙을 고백할 때 종말론은 웨스트민스터를 따르지 않음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2. 무 천년기론과 천년기론의 비교

 종말의 도식에 있어서 무 천년하고 천년기하고 어떻게 다르냐? 간단하게 말하면 무 천년은 예수님의 재림, 부활, 그리고 심판, 새 하늘과 새 땅이다. 재림은 공중 재림, 지상 재림, 부활도 천년 전의 부활, 천년 중간의 부활, 천년후의 부활, 심판도 천년 처음에 심판, 천년 중간기의 심판, 마지막의 심판, 그런 것이 아니라 심판은 한번이요 부활도 한번, 재림도 한번,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이 도입된다. 그것이 성경적이다. 중간에 천년기가 끼어 있지 않다. 천년전기는 계시록 201절로 6절을 기초로 천년 왕국이 있을 것을 주장한다. 207절에서는 사단이 나와서 그 세력이 커지니 천년기가 종결되고 그 후 에 최후의 심판이 이루어진 다음에 새 하늘과 새 땅이 도입된다고 하는데 재림과 부활과 심판이 복잡하다.

 

 그렇다면 무 천년이란 언제 생겼느냐? 천년 전기가 있었을 때 무 천년이란 말은 없었다. 다만 재림, 부활, 새 하늘과 새 땅이 도입된 것이 전통으로 내려왔다. 그런데 세대 론과 천년전기가 일어나서 자기들의 이론을 주장하니 성경적으로는 천년 기가 없고 무 천년이라고 반박하자 무천년이라는 이름이 된 것이다. 그렇지만 무 천년이란 2천년 공교회의 신앙고백에 있어서는 종말론에 한번의 재림, 한번의 부활, 그리고 심판과 새 하늘과 새 땅이다. 이는 동시에 일어나는 사건들이기 때문에 현재의 하나님의 영적 왕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로 직접 넘어간다고 주장한다. 즉 실제적인 숫자로 천년 기간을 부정하고 그리스도의 초림부터 재림까지의 복음의 권세를 천년왕국이라고 본다. 종교개혁의 표준적 종말론과 로마교회의 종말관도 무 천년기이다.

 3. 천년기설의 배척 이유

 천년기론은 공교회의 태도가 아니다. 공교회의 고백도 아니었다. 전통적으로 공교회는 무 천년을 고백해 왔다. 그래서 교리사가 필요한 것이 아닌가? 세파와 세속에 동화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어느 날 작은 분파들에 의해서 천년 기가 시작되었다. 칼빈도 천년 기에서 주된 요점이 무엇이냐? 에 그리스도의 통치는 영원한데 천년기론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통치기간을 지상 재림 천년에 한계를 두는 것은 불가한 것이라 했다. 그리고 천년기론에 의하면 구원에 실패해도 또 한번의 기회가 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막은 자들을 다시 구원하시는 것이 중요하느냐? 말씀의 권위가 훼손되는 것이 중요하느냐? 그리고 많은 말을 하면 그 것이 가치 있는 것으로 오해가 있을 것으로 알아 더 이상 논하지 않았던 칼빈이다.

 배척이유

 1. 그리스도의 왕국은 영원한 왕국이다. 천년에 국한함이 비성경적이다. 그리스도의 출생과 수태 때 천사가 그의 아비 다윗의 왕국을 그에게 주리니 그의 나라가 영원하리라고 하였다. 예수님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다. 그 왕권에 사단이 끼어들어 훼방을 놓고 그런 것이 아니다. 지금도 다스리신 예수님의 통치를 알아야 한다. 수정된 천년 기에는 지금 우리가 그리스도의 왕권아래 있지만 수정 전에는 그리스도 왕권이 천년에 국한했다.        2.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신적 통치가 천년 후에 적그리스도의 세력에 들어간다. 그리스도의 왕권이 무너지니 불가하다. 그리스도께서 이 지상에 오셔서 다스린다고 하는 말은 신적인 직접적인 통치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신적 통치가 적그리스도의 세력인 피조물의 세력에 의해서 중단된다고 하는 것은 불가하다. 어찌 하나님의 직접적인 통치가 피조물의 대항에 의해서 중단될 수 있는가? 때문에 천년 기는 바르지 않다.

 

 3. 구속은 창조의 회복이어서 낙원의 표준에 부착할 뿐 아니라 그 영광을 능가한다. 그런데 천년 전기 론에 의하면 여기서 살다가 또 다른 곳으로 간다. 그리고 그 다음에 또 다른 처소로 옮겨진다고 하니 이것이 불가하다. 구속은 창조의 회복이니 이 회복된 장소가 우리의 거소인데 이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천년기가 바르지 않다.

 4. 세대 론과 천년기론은 피 제사의 복귀를 말한다. 왜 피의 제사를 복귀하는 것이 맞지 않는가?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속하시는 일이 세대론 자들의(스코필드 7세대 구분) 주장처럼 무흠 시대라는 처음 낙원에서는 선악과로 양심시대인 에덴 동쪽에서 정부가 출현하기 전까지 그 때는 양심에 의해서, 그래도 안 되니 니므롯 때부터 아브라함의 소명 이전까지 인간 정부에 의해서 정부의 세력으로 한번의 시취 기회를 주어 구원에 이르게 하고, 그 후에는 약속, 언약 시대이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약속 때부터 시내 산에서 율법을 받을 때까지는 약속을 믿음으로 약속에 의해서 구원을 받았고, 약속을 믿지 않아 실패해서 시내 산 언약을 주었고 그것이 율법시대이어서 그 율법을 지키므로 구원을 얻는데 그 율법에 실패하니 마지막에는 은혜시대라 해서 은혜로,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고 마지막에 천년 왕국이 오는 것이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짐승이라는 피의 제사로 구원하신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단번에 흘리신 피로 세상을 구원하시기로 정하셨다.    그러므로 구약의 모든 역사는 이스라엘만의 역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세우신 것으로 구원을 준비하시는 역사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존재 의의는 어디에 있느냐?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과 그의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사명을 다한 것이다. 이스라엘과 우리가 동일한 가운데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구원을 받게 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이 궁극적이요 또 종말론적이다. 다른 구원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보다 큰 구원이 없는데 천년 전기에서는 피 제사로 복귀한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 구속이 간주곡으로서 은혜시대만 효력이 있고, 재림하시면 그 때는 또 왕국 복음을 전파하여 그 유대인의 법으로 피의 제사를 통해서 구원을 얻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택한 백성이니 언젠가는 돌아올 것으로 보아야 하지만 피의 제사 도식은 확실하게 아니다. 성경이 말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이 내신 유일한 구원이고 마지막 구원이다. 피의 제사 복귀는 그리스도의 구속을 헛되이 하고서만 가능한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떻게 천년기론을 정당한 것으로 받을 수 있는가?

 

 제 2절 천년 후기설과 그 비판

 1. 천년 후기 설

 천년 왕국 후에 그리스도의 재림이 발생한다. 천년왕국은 현재 우리가 사는 복음시대에 나타난다. 두 종류의 설이 있다. 점차적인 세계 복음화로 복음의 능력과 권세가 개인의 영혼뿐 아니라 사회제도와 조직을 변화시켜 복음의 지배가 이루어진 풍부한 영적 축복의 사회적 시기가 마지막에 천년 동안 전개되고 그 다음에 사단이 쫓겨 가고 짧은 기간의 배도, 악의 세력과의 무서운 싸움으로 최종적인 투쟁이 있은 다음에 그리스도의 재림, 일반적 부활 최후 심판 등의 사건이 동시에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이사회를 복음의 능력으로 개조시켜서 정말 의와 공평히 지배하는 사회를 만든다는 것이다. 이는 사회 복음주의하고 같은 것이다. 그래서 라우신 부시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미국의 사회 복음주의가 천년 후기 설을 주장했다. 그 때에는 미국 사회의 분위기가 경제문제만 기독교적으로 해결되면 종말이 올 줄로 알았다. 복음이 미국 사회를 지배하며 모두 사랑이 많아 돕기를 쉬지 않고, 외국에 보조를 하고 살기 좋은 미래를 만들어가니 천년 후기 설을 좋아 하게 되고 신학자들도 담대하게 외칠 수 있는 호소력을 얻었다. 그러나 오늘 날은 사회 진화론으로 흘러 천년 왕국이 복음 전파와 성령님의 역사에 의해 도입되지 않고, 교육과 사회 개혁을 통하여 인간 스스로가 새 시대를 가져온다고 한다. 결국 의와 화평이 지배하는 축복의 시기가 천년이라는 것이다.

 

 3. 비판

 1) 이스라엘의 존재 목적

 이스라엘 자체를 택하시고 세계의 지배권을 주고, 세계의 영화를 다 보게 함이 아니다. 이스라엘로 하나님께 봉사케 하고 택한 그릇이기 때문에 더 잘되는 것을 세계만방에 과시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에게 복을 약속하신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의 존재 목적은 하나님께서 모든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하는 구원의 섭리에 의해 봉사자와 조력자인 도구로 서 있고, 세상의 구원자로 오실 예수님을 출산할 어머니와 같은 모태와 태반으로 삼은 것이다. 이스라엘을 통하여 이세상의 구원자를 보내기 위함과, 세계를 구원하시려는 섭리와 구속 경륜의 성취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출산과 세계를 향한 복음전파는 이스라엘이 그 사명을 다한 증거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사명을 마친 이스라엘을 버리시느냐? 사명이 끝났기 때문에 버리신 것이 아니라 메시야가 오셔서 특권이 없어지고 복음에 있어서는 이스라엘과 이방인이 똑 같이 구원의 대상으로 서 있는 것이다.

 2) 구원이란 복음을 믿음으로 성취된다.

 예수님의 재림 때 그 영광의 광채를 보고 이스라엘이 회심한다고 하는 것은 복음의 권세로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계획하신 하나님의 구원 경륜에 맞지 않고 섭리에도 전적으로 배치된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능히 구원하시기 때문에 어떤 세력을 보이시거나 물리적인 행사에 의해서 구속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파는 유다에게 보여 주셔서 사랑하는 제자의 배신을 안보시면 좋겠으나 그렇게 하시지 않으셨다. 재림을 보고 그 때 예수님을 믿는다면 우리의 복음이 사람을 구원하는데 충분한 능력이 아니란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 116절로 17절의 말씀에서 복음은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다.

 하나님께서 구원할 자들을 이 복음으로 구원하시고 다른 것으로 하시지 않으신다. 나사로를 심부름시키려는 부자에게 모세와 선지자라는 복음으로 구원된다고 분명히 하셨다. 모든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는 능력이 바로 복음이다. 바울을 자기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음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분명하게 말했다.

 

 3) 그리스도의 통치

 천년 동안 예수님의 권세로 직접 다스리시는데 직접 신적인 통치를 하는 그 일이 사단과 그의 군데에 의해서 악한 자들, 즉 피조물들의 공격에 의해서 창조주의 통치가 끝나는 것은 이론적 이단이다. 하나님을 모독하는 비 신앙인의 자세이다.  

 4) 영화된 성도

 영화한 성도와 죄인이 어떻게 죄와 죽음이 날뛰고 있는 지상에서 같이 살아갈 수 있는지 설명을 못한다. 영화된 성도와 죄인이 어떻게 살 수 있느냐? 우리는 영체가 된다. 불신자들은 계속적으로 우리의 현재 상태로 의식주가 필요하다. 그들은 회사를 다니며 결혼도 하고 살아야 되는데 우리는 같은 집에 살면서 하나는 영체로 하나는 사람으로 살 수 있겠는가? 예수님의 제자들도 실망하고 이해하지 못한 것이 이런 것이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니 같이 있어도 될 줄로 알았다. 그런데 다른 방법으로 대해 주시고 다른 방법으로 같이 계시니 이해를 못한 것이다.

 5) 보편 부활

 의인과 악인의 부활 사이에 천년의 간격과 세 번, 네 번의 부활과 심판을 말하나 성경은 의인의 부활과 악인의 부활을 말하고 심판의 일시성과 동시성을 말한다. 천년 기간을 주장한 자들은 의인은 부활하고, 성도만 변화하며, 악인은 불변한다고 가르친다. 양과 염소를 고르는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심판을 하신다. 모두를 한 번에 그것도 종말론적으로 행하신다.  

 6) 교회는 다윗의 왕국의 회복

 선민들은 다윗 왕국의 영광스러운 재건이 메시아의 날에 이루어진다는 구약의 예언을 근거로 하여 그리스도가 심판과 구원의 완성이 아닌 지상적이고 민족적인 메시아 왕국을 세우기 위하여 오셨으나 유대인들이 거절하자 재림 때까지 연기하면서 구약의 선지자도 모르는 교회를 간주곡으로 세우셨다는 원리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초림도 인류 구원을 위한 궁극적 사역이 아니라 유대나라의 회복이 그 근본 목적이었다. 우리의 입장에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이 궁극적인 하나님의 길이다. 그러므로 잘못되었다. 민족의 왕국이 아니라 신령하고 우주적인 것이 신약의 계시이다.

 

 야고보가 이 백성들을 그리스도의 교회에 편입하는 것으로 다윗 왕국의 회복을 말할 때 분명히 아모스와 구약의 여러 선지자들을 인용해서 “내가 후일에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일으키리니”라고 말 할 때에 그 무너진 장막을 다시 일으킨 것을 야고보가 사도행전에서 해석하기를 예루살렘 땅에 옛날의 영화를 구하는 그와 같은 지상 왕국의 회복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나라에 혹은 그리스도의 교회에 이방이 편입됨을 다윗의 장막을 회복시키는 것으로 해석을 했다. 우리가 어떻게 사도의 해석을 넘어갈 수 있는가? 이렇게 예수그리스도의 오심이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궁극적인 사역인데도 불구하고 유대나라와 그 지상적 회복을 목적으로 이해를 한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을 궁극적인 혹은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구원이 아닌 것으로 만드는 것이니 그릇된 것이다.

 7) 복음의 권세

 교회도 간주곡으로 재림 때까지만 존재한다. 왜냐하면 복음으로는 대대적으로 인류를 구원하기에 부족하기 때문이라 한다. 이스라엘 민족이 재림을 보고 메시야로 영접하고, 그리스도의 직접통치를 위한 재림으로 인류가 대대적인 회심을 한다고 주장한다. 결국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한 구원의 복음은 궁극적이고 종말론적인 것이 아니라 임시적이고 일시적으로 만드는 이론은 잘못된 것이다.

 8) 이 땅은 선민만이 아니라 새 인류의 영원한 거소로 창조이다.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이 땅에 영원히 거하고 교회는 저 공중 어디로 가는 것이 아니라 이 창조가 곧 우리의 거소이다. 구속은 창조의 회복이라고 늘 강조했는데 우리 몸만 회복이 된 후 다른 곳으로 가고 이 땅은 버리는 것이 아니다. 마치 겨처럼 날려버린다고 했으니까 없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진다고 하니 모두 없어진 것으로 이해하는데 그것이 아니라 이 창조를 그렇게 완전히 정화하시니 그 과정이 그와 같다는 재창조를 말한다. 즉 새 하늘과 새 땅은 영화된 인류가 살기에 합당한 거소를 만드는 것이다. 이 세상과 지구를 흔적도 없이 하고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니다. 계시록에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고 했다. 즉 창조의 일부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하는 것이다. 만물을 새롭게 하는 일이 이미 끝났다. 그러므로 요한 계시록에서는 모든 일이 끝이 났다고 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다고 했다. 하나님의 장막이 여기에 사람들과 함께 있다. 그러면 천국이 저 위에 있는데 어떻게 여기에 같이 임하는가? 그 때는 공간의 제약이 철폐되니 여기에 하나님의 성전이 분명히 하늘에서 내려온다. 지금 현재의 천국하고 지상의 도성하고 합치는 것이다. 두개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합쳐진다.

 

 9)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효력

 피의 제사 복귀는 그리스도의 제사를 무가치한 것으로 만든다. 피의 제사에 복귀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궁극적인 하나님의 구원이라고 하는 것을 무너뜨려야 가능한 것이다. 구약의 제사는 원본이고 예수님의 제사는 간주곡이라는 이론이다. 이는 기독교를 근본적으로 거부하고 근본에서 무너지게 하는 것이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십자가의 효력이다.

 10) 세속적인 천년기의 소망

 어거스틴은 천년기설이 육욕적이고 현세적이어서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고 해서 배척했다. 성경을 잘 이해하지 못한 자들이 속아서 천년 왕국, 잘 먹고 잘사는 영광을 보고 불신자들을 다스리고 그렇게 하자는 것인데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성경을 다시 쓰기 전에는 될 수 없는 일이다. 우리가 알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종말론적이고 궁극적이기 때문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구원에 필요한 계시도 궁극적이다. 물론 종말에 가면 그것도 필요가 없다. 그러나 새로운 성경이 다시 기록되지 않는다. 이상한 것은 위와 같이 무지한 말들과 설들이 왜 우리 가운데 있고,  그리고 연구만 하는 석학들에게 남아 있는지 참으로 묘한 일이다.

 4. 여호와의 증인의 지상천국과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천국의 비교

 우리가 살고 있는 지상이 하나님 나라가 된다면 여호와 증인과 무엇이 다른가? 여호와의 증인은 그들이 전하는 복음을 온 세상이 다 받으면 이라는 조건이 있다. 모든 사람이 받으면 그때부터서 영생으로 들어간다. 그러므로 불가능을 시도한 것이다. 맞지 않은 것은 어떻게 모든 사람이 복음을 모두가 받을 수 있는가? 하나님은 택한 자만이 구원에 이른다고 하신다.

 

 여호와의 증인에게서 열심히 사는 것, 규모 있게, 질서 있게, 열정적인 전도와 새신자반의 태도는 본받을 만하나 그들에 의하면 모든 사람이 여호와의 증인의 복음을 받아들이면 그 때부터 세상이 영생하도록 영원히 존재하게 된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말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때가 차면 이 세상을 심판하시고 완전히 정화하신다. 그러면 죄악이 완전히 제거되고 정말 새로운 생을 살게 된다.

 제 5절 계시록 20장의 해석에 대한 문제(천년왕국)

 1. 성경 해석의 원리

 성경을 해석할 때 부분은 전체에 의해서, 전체는 부분에 의해서, 해석하고 조명한다. 불분명한 부분은 명료한 부분에 의해서 해석하는 것이 원칙이다. 또 상징적으로 기록된  부분을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산문을 상징적으로 해석하면 안 된다. 그러므로 계시록 201절로 6절은 상징적으로 하늘의 광경을 말하고 있다. 지상적이나 국민적인 팔레스타인에 있게 될 왕국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20장에서만 6번이나 천년이란 말이 나오는데 이것을 상징적으로 해석할 수가 있느냐? 며 천년 전기 론의 대표적반박이다. 그러나 횟수에 있지 않고 상징을 말할 때 상징적이라 한다.

 2. 계시록의 숫자에 대한 해석

 1) 144,000의 해석

 그렇다면 144.000과 같은 원리도 글자대로 해석을 해야 할 것 아닌가? 그런데 우리 민족만 해도 천만의 성도이다. 그리고 기독교 2천년 역사에 예수 믿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모두 구원을 받지 못했나? 박태선의 구원론은 시온성이란 자기 아래 144.000이라고 했다. 한국교회가 괘씸죄를 적용하면서 상징적으로 보는 눈이 뜨인 것은 이단이 도와준 것이다.

 또 다른 이론은 유대인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의 숫자라고 하는데 그들이 국민적으로 돌아온다고 해도 144.000으로 되겠는가? 어림도 없다. 144.000은 구약의 12지파를 상징하고 신약의 12제자로 표시한 교회의 대표에 10의 완전수 세제곱을 한 완전한 하나님의 구원 수를 말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곧 구약의 백성과 신약의 백성의 총수를 상징적으로 말씀하신 것으로 보아야 된다.

 2) 24보좌의 해석

 

 하늘나라에 보좌가 24개 밖에 없다면 그 많은 성도들이 어디에 앉을까? 천국에 들어가기만 해도 되겠지만 하나님께서 고생시키려고 의자를 없게 하신 것일까? 아니다. 구약의 교회를 대표하는 12하고, 신약교회를 대표한 12 사도를 말하기 때문에 구약교회와 신약교회의 대표를 24 보좌로 말씀하신다. 곧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은 총수가 24 보좌라 한다.

 3) 666의 해석

 지금도 문자대로 받은 사람이 있고, 혹은 컴퓨터가 적그리스도로서 666이라는 자가 있다. 초대교회에서는 이레네우스가 666을 해석할 때 적용될 수 있는 자가 많다고 했다. 느브갓네살, 초대교회의 네로 등이 있다. 현대신학에서는 히틀러, 얼마 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키신저가 666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아랍과 이스라엘을 화해시켰기 때문이다. 아랍은 이스라엘의 적이니까 멸절해야 되는데 화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666의 해석에 대한 확실한 정답은 모르지만 육일 창조로 시작되고, 진행된 후 창조가 완성될 때 악의 세력을 대변한 상징적인 숫자가 666이라고 말한다.

 3. 계시록 20장의 해석

 1. 사단의 결박과 감금

 본문은 천사가 하늘에서 쇠사슬로 사단을 결박한다. 거라사 귀신들린 사람도 쇠사슬로 묶어 놓았지만 끊어버렸다. 헐크만 돼도 끊어버릴 것이다. 사단은 얼마나 힘이 강하겠는가? 제일 강한 쇠는 스텐이고 불에 녹지 않는 쇠는 없다. 하늘의 제철소에서 가장 강한 쇠를 만들어 묶는다고 하자, 사람은 귀신들린 사람이라 묶는다고 하지만 사단은 영물인데 어떻게 묶겠는가?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이 상징적으로 기록한 것이다. 특히 숫자와 나라들에 관해서 모두 짐승으로 표기함은 로마의 박해를 면하기 위해서이다. 즉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나라들을 짐승으로 표시했다. 근본주의자들은 성경이 정확 무 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니 글자대로 믿고 이해하고 해석한다. 함부르크에 가면 미가엘 교회가 있는데 거기에서는 사단을 묶지 않고 천사 장 미가엘이 방패를 들고 창을 잡고 사단을 짓밟고 있다. 그런데 그 방패에 십자가가 그려져 있다. 그 창도 십자가 모양인데 헥토르가 사용했던 유명한 창으로 사단을 누르고 있다. 미가엘과 사단에 대한 무지이다. 미신적인 사단의 놀음에 속을 때 교회에서부터 속은 것이다. 사단의 정복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죄의 권세가 깨뜨려질 때 사단을 정복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방패와 창이 아닌 피를 조각해 놓을 것인가? 예수님의 이름과 예수님의 능력보다 본체론적인 예수님이 사단의 무장을 해제한 것이다. 백번 피를 흘려 죽어 주셨어도 예수님이 안계시면 사단은 일어난다는 것을 잊지 말고 미신 행위에 속지말자. 예수님이 계시고 그 피의 권세는 사단으로 더 이상 하늘에 있지 못하게 하니 그는 쫓겨난 것이다. 그러면 사단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모른다. 예수님을 영접한 심령에 사단이 없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거소가 불분명함이 하나님의 보좌가 있느냐의 질문과 같이 대답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리고 민족들을 미혹하니 천년동안 감금함은 그리스도의 피 흘림의 권세로 사단의 권세를 제재하는 것을 말한다. 그 기간이 얼마동안이냐? 문자적인 천년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선포되고 있는 동안은 사단이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며 교회를 전체적으로 박멸하지 못한다. 상징적으로 표현하면 천년동안이라는 기간은 피를 흘리시고 사망권세를 이김부터 재림 때까지 무저갱에 갇혀 있기 때문에 만국을 미혹치 못한 것이다. 무저갱이란 끝이 없는 함정인데 어디에 준비해 두셨을까? 천년동안 내려가는데 어떻게 가두었을까? 영체도 머리끝이 쭉 올라가고 무서운 곳의 함정일까? 모두 세상기준으로 보여준 상징이다. 사단은 만국을 미혹할 수 있는  힘이 있었는데, 복음의 권세로 재림 때까지 그리스도 교회를 박멸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천년 왕국의 의미이다. 그러면 묶는 것은 무엇이냐? 물리적인 사슬이 아니라 예수님의 복음의 권세이다. 세대 론과 천년전기 론의 맹점이 공포 불안을 안겨주는 심판을 말하나 공포를 이기는 복음에는 약하다는 것이다.

 

 2. 그리스도의 통치의 동참

 그리스도의 왕권의 통치에 동참하는 것이 무엇이냐?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는 목 베임 받은 자들로 순교자들은 천국에 가서 그리스도의 통치에 동참하는 것인데 이를 첫 부활로 말한다. 그리고 거기 본문에 분명히 목 베임을 받은 자들이라고 했지, 부활한 자들이 아니다. 그러니 아직 그들이 죽음의 상태에 있는 것이지 산자의 상태가 아니다. 그들의 영혼이 살아서 그리스도의 통치에 동참한다. 둘째는 성도들의 경우인데 우리가 지금 기도하므로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이 어떻게 역사해서 좋아졌는지는 몰라도 우리가 기도하면 세계 역사가 변한다. 소원을 성취해달라고 기도를 열심히 하지만 예정해 놓으셨는데 왜 기도 하는가? 가만히 있어도 되는 것을 왜 기도하는가? 급하니까 한다. 좀 느긋해 져서 인내심을 길러야 되는데 성격이 급해 기다리지 못한다. 대부분의 기도는 안 해도 될 것과 빨리 달라는 것이며, 내년에 받을 것을 앞당겨 받는 그러한 것이 아니라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반듯이 역사하신다. 예정과 경륜과 어떻게 조화 하는지는 지금 여기서 생각할 수 없고 정말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면 역사하신다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우리의 일에만 상관해서 기도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신다.

 

 3. 첫째 부활과 둘째 부활

 첫째 부활과 둘째 부활이 나오는데 첫째 부활은 무엇이고 두 번째 부활은 무엇인가? 여기에서 무 천년 자들이 천년 전기론 자들에게 많이 공격을 당한다. 왜냐하면 둘째 부활은 글자대로 둘째 부활로 받는데 첫 부활은 두 가지로 해석한다. 1. 죽은 자들 특히 순교자들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그리스도의 통치에 들어가 동참하는 것이다.  2. 중생을 첫 부활로 한다. 천년기간 동안 첫 부활이 있고 끝나고 마지막 두 번째 부활이 있는데 여기 중생을 부활이라고 하니 영해를 한다고 비난을 받는다. 영해한 다는 말은 들어도 이는 바른 신학인 것이다.

 4. 1.000

 천년이란 10의 완전수를 세 번 곱한 것이다. 즉 초림부터 재림까지의 복음이 선포되는 기간을 말한다.  골로새서에 보면 그 권세 잡은 자들이 피 때문에 모두 발아래 복종케 했다. 144.000도 문자대로 받고 그 뒤에 허다한 무리를 셀 수도 없으니 셀 수 없는 것이 상징적이니 허다한 무리를 무시해야  될 것이 아닌가?  

 5. 만국을 미혹한다.

 사단이 풀려난 다음에 만국을 모아 미혹한다. 전 세계적으로 기독교를 박멸하도록 진행된다. 히틀러가 유대인들을 핍박하고 많은 사람들을 죽였어도 지금 전 세계적으로 전체의 인류가 단합해가지고 그리스도의 교회를 박멸하려고 하는 일은 아직 진행되고 있지 않다. 숫자를 보면 기독교가 많은 것 같아도 정직하게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되나? 모두 무늬만 같은 기독교라 자기의 무늬가 드러날까 봐 위장하려고 언제 어떻게 핍박하면서 사단의 도구로 쓰임을 받을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기독교를 향한 대적은 이방종교가 아니라 기독교 안에 있는 것이다. 성경을 잘 알고 종교 의식인 예배당에서 예배만 잘 드리면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심장을 가지고 변화되어야 한다. 시대가 어려우면 계시록 강해가 많고 그 여파는 곧 재림 하시니 예수님 만날 준비만 하는 성도가 있다. 우리들의 마음과 삶 속에서 천년 기간에 대한 소망을 빼버려야 그리스도의 마음이 되는 것이다. 온갖 보석의 집으로 기복신앙에 사로잡혀서 예수님을 언제 섬기고, 예수님께 언제 영광을 돌리면서 예수님의 심장으로 살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