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포교회 성장요인으로서 박영선의 목회와 강해 설교에 대한 연구... 성도들이 서로 기다리며, 서로를 용서하고, 서로에게 미래의 기대를 가지며 함께 걷는 자세를 서로 가져야 한다."고... 현황 제 2 부 박영선의 강해 설교 서론 본 논문의 제 2부에서는 박영선의 목회에서 강해 설교로 강조점을 옮기고자 한다. 남포교회 성장요인으로서 박영선의 목회와 강해 설교에 대한 연구 제 1 부 박영선의 목회 서론 1. 목회자 박영선의 형성시기와 한국교회의 배경 (1) 출생과 어린 시절 (2) 소명 형성과정(1967-1975) (3) 신학연구 시기와 한국교회 경험(1976-1981) (4) 외치는 소리로서의 메시지와 한국교회의 반응(1981-1984) (5) 남포교회의 개척과 성장시기(1985-1999현재) 2. 남포교회 설립과 그 성장의 역사 (1) 남포교회 설립과 초기 성장시기(1985-1987) (2) 남포교회 예배처소 이전과 비약적 성장시기(1987-1995) (3) 남포교회 성장의 계속(1995-1999현재) (4) 남포교회 교인들의 성격과 특징 3. 남포교회 목회에 나타난 박영선의 목회적 특징 (1) 말씀 중심의 목회 (2) 행정과 조직 중심이 아닌 교회편제 및 운용 (3) 과업 중심이 아닌 교인들의 인격적 성숙을 강조 (4) 가정의 확대로서의 교회실현 (남자 중심의 교회구조) (5) 목회자들의 배양과 교회개척으로의 연결 4. 박영선의 남포교회 목회의 한국교회에서의 위치 (1) 말씀의 강해와 적용 모델을 제시 (2) 목회 모델을 제시 (3) 한국교회의 복음이해에 대한 반성적 모델을 제시 제 2 부 박영선의 강해 설교 서론 5. 박영선 연속 강해 설교와 청중의 성격 (1) 주일 아침예배 강해 설교와 청중의 성격 (2) 주일 오후예배 강해 설교와 청중의 성격 (3) 수요 저녁예배 강해 설교와 청중의 성격 (4) 박영선 강해 설교의 출판 현황 6. 박영선 강해 설교에 나타난 신학구조와 개념들 (1) 하나님 중심 주권(신론) (2) 인간과 죄의 이해(인간론) (3) 칭의와 구원의 이해(기독론과 구원론) a. 복음에 대하여 b.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c. 은혜에 대하여 d. 믿음에 대하여 e. 구원에 대하여 (4) 성화와 교회의 이해(교회론과 성도의 삶) 7. 결론 제 3 부 부록 1. 박영선의 연표 2. 남포교회의 연혁 3. 박영선의 저서 제 1 부 박영선의 목회 서론 1985년 1월 7일, 서울 강남구 개포동 소재의 상가건물 지하공간은, 지난 1-2년의 짧은 기간동안에 급속히 알려진 한 목회자, 박영선 목사를 중심으로 설립한 남포교회 창립예배를 기념하러 모인 300여명의 교인들로 가득했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한 것처럼, 대부분이 단순히 창립예배를 기념하기 위해 출석한 단회적인 참가자들일 것이라는 예상을 뛰어넘고 등록교인의 숫자는 계속 불어갔고, 창립 후 2년이 채 못되는 기간동안 등록된 교인들은 1천 여명으로 불어났고, 5년 후에는 3천 여명의 등록교인으로 증가하였으며, 창립 14년이 지난 1999년 초 현재 전체 등록교인은 7천 오 백 여명(주일학교 1천 여명은 별도)에 이를 만큼 놀랄만한 증가를 계속하고 있고, 이 추세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남포교회의 이 같은 성장은 실로 경이적인 것이기 때문에, 특히 교회성장 그 자체에 큰 관심을 주목하는 경향이 있는 한국교회의 관심을 끌기에 아주 적절한 대상이 되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사실 일반적인 한국의 대형교회의 성장을 이해하는데 제시되는 몇 가지 기준들은 주로 목회적 방법론의 적용과 교회의 조직운용 등에 기인하는 특징들을 분석하는 데에서 찾아왔다. 보통 제자훈련의 방법론이나 선교 지향적인 전투적 훈련, 그리고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설교나 은사주의 운동 등이중요한 개념들로 제시되어 왔다. 그러나 남포교회의 예외적인 급성장과 박영선의 목회는 위의 일반적 대형교회의 성장에 적용되는 기준들과는 전혀 다른 패턴을 보인다고 말할 수 있다. 예컨대 남포교회가 교회의 조직을 강조하거나 교회성장을 위한 어떤 방법론을 사용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박영선의 목회 역량에 있어서도 은사운동의 기능적 활용이나 대중적 집회성격의 강조와는 무관한 패턴을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남포교회의 성장요인은 어떻게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가? 이는 박영선의 목회철학이 반영되는 남포교회의 목회적 특징들을 분석하고 이해하므로 가능할 것이다. 중요한 개념들로 제시되어 왔다. 그러나 남포교회의 예외적인 급성장과 박영선의 목회는 위의 일반적 대형교회의 성장에 적용되는 기준들과는 전혀 다른 패턴을 보인다고 말할 수 있다. 예컨대 남포교회가 교회의 조직을 강조하거나 교회성장을 위한 어떤 방법론을 사용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박영선의 목회 역량에 있어서도 은사운동의 기능적 활용이나 대중적 집회성격의 강조와는 무관한 패턴을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남포교회의 성장요인은 어떻게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가? 이는 박영선의 목회철학이 반영되는 남포교회의 목회적 특징들을 분석하고 이해하므로 가능할 것이다. 본 논문의 제 1부는 남포교회 성장의 한 요인을 설명하는데 필요한 주제로서 박영선의 남포교회 목회의 성격과 특징을 설명하려는 목적으로 구성되었다. 즉 목회자로서 박영선의 어떤 특징이 남포교회의 목회를 통해 나타났는가를 살펴봄으로써, 그것이 남포교회의 성장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하는 문제에 답하는 것은 물론, 더 나아가 제 2부의 주제인 박영선의 강해 설교를 분석하고 해석하는데 중요한 목회적 상황의 이해를 마련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1장에서는 목회자로서 박영선의 형성시기와 한국교회의 배경이라는 주제로 그의 성장과정과 소명형성과정, 그의 신학연구, 그리고 남포교회 설립과 발전 등을 다루고자 한다. 여기서 그가 한국사회와 한국의 역사 속에서의 한국교회를 어떻게 이해하고 어떤 방식의 목회적 소명의식을 깨닫게 되었는가하는 점과 함께, 한국교회의 기독교 복음 이해를 형성해온 몇몇 특징들이 한국사회의 전통적 문화적 영향의 관련성에 비추어 논의될 것이다. 2장에서는 남포교회의 설립과 그 성장과정을 역사적으로 설명하고 이에 대해 통계적 자료를 제시하므로써 현재까지의 남포교회 성장과정의 현황을 제시할 것이다. 여러 다양한 통계들이 남포교회의 성장과정을 비롯하여 교인들의 성향을 이해하기 위해 제시될 것이며, 이것 또한 제 2부에 다루게 될 강해 설교에서 청중들의 구성과 성격을 이해하도록 도와 줄 것이다. 3장에서는 남포교회의 목회에 나타난 박영선의 목회적 특징을 다루게 될 것이다. 이 장에서는 남포교회를 구성하고 운영하는 목회패턴 뿐 아니라, 남포교회의 목회를 통해 지향해 나가는 박영선의 목회철학과 교회모델까지도 설명하게 될 것이다. 끝으로 제 1부의 마지막 장인 4장에서는 박영선의 남포교회 목회가 전체 한국교회의 흐름 속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가 하는 점이 논의될 것이다. 다시 말해, 지금까지 박영선의 남포교회 목회모델이 어떤 점에서 한국교회에 공헌해왔고, 또 앞으로도 어떤 면을 더 공헌할 수 있을 것인가를 살펴 볼 것이다. 1. 목회자 박영선의 형성시기와 한국교회의 배경 (1) 출생과 어린 시절 박영선 목사는 1948년 11월 1일 평안남도 평양에서 부친 박근식과 모친 백연옥 사이에서 3남 2녀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증조부는 한국에 온 최초의 미국선교사에 의해 개종된 기독교 신자였으며 조부께서는 독립운동가였고, 외조부 역시 교회를 목회 하던 목회자로 친가와 외가 모두 한국교회의 초기에 개종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난 것이다. 그의 부친은 책임감이 강한 인물인 반면에, 모친은 가난한 목회자의 딸로 자라 보수적인 성품을 지녔으면서도 친화력 있는 인물이었다. 박영선이 태어난 시기는 오늘날의 의미에서도 한반도의 현대적 갈등이 시작되던 때였고, 해방직후 남북한이 신탁통치를 받으며 각각 독립국가를 건국하려던 때였기 때문에, 급격한 변화와 혼동의 상황이 이어지던 상황이었다. 그의 부모는 이미 공산화가 되어버린 북한당국에 의해 숙청대상으로 몰려 평안북도 구성에서 평양으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곧이어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그의 가족들은 다시 서울로 월남하여 서울 회현동에 정착하게 되는데, 1.4후퇴로 명명되는 월남 당시 일부 그의 가족은 북한에 남게되어 이산가족이 되고 말았다. 서울에 정착한 부친은 전기설비공사를 운영하는 등 남다른 사업수완으로 경제적인 안정을 이뤘다. 그는 이런 아버지의 성품을 따라 매우 모험적이고 창조적인 재능이 두드러졌는데, 서울고등학교 재학시절 교내 브라스 밴드부에서 활동한 점이나, 해병대에 자원 입대한 점등은 그의 그 같은 성격을 잘 반영해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서울의 도심지 중앙에 위치한 회현동의 성도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며 자랐고, 여기서 복음의 진리에 대한 전통적인 한국교회의 가르침을 접하며 기독교 신앙의 가르침에 있어 보다 자유롭고 정확한 이해를 갈망하는 고민을 키워가기도 했다. 더구나 그가 자란 회현동은 새벽부터 밤이 늦도록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활발하게 상거래를 하는 한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남대문시장이 있는 곳으로서 그곳에서의 많은 경험들은 그에게 인생의 치열한 교육장의 역할을 충분히 감당했을 것이라 여겨진다. 박영선이 성장하던 50년대의 한국은 오랜 전쟁 후 폐허로부터 재건을 시작한 시기이며, 60년대는 5.16혁명 이후 관-주도적인 산업화의 과정을 거치며 경제적 성장을 활발히 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이 시기의 한국은 해방 전까지의 약 50여 년 동안 받아왔던 일본의 영향에서 벗어나려던 시기였고, 그 대안으로 미국의 영향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과도기였기 때문에, 성장 시절의 박영선은 한편으로는 한국의 전통적 가치관이 화석화되어 가는 현상을 목도하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식 신문화의 도전에 의해 생긴 한국사회와 교회의 기독교적 가치의 공황 사이에서 한국교회가 浮游(부유)하며 분열되는 시기를 경험하였다. 비록 그가 한국교회의 초기 기독교 집안의 유산을 타고났을지라도, 격동기의 한국사회를 경험하면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에게 있어 기독교적 성장 배경은 오히려 교회 안에서의 한국적 사회윤리의 강조와 전통가치의 보수 지향적 패턴을 강화하는 시각에 대해 비판적 열린 통찰을 형성하는 기회를 제공해 주었을 뿐 아니라, 기본적으로 교회에서 가르침을 받는 메시지가 비현실적이라는 점 때문에 교회에 대한 친화력을 가질 수 없었다. 어린 학창시절의 박영선의 학업수행능력은 매우 뛰어났다고 할 수 있다. 그는 공부 이외에 주어지는 다양한 경험들에 대해서도 기꺼이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그러다가 고등학교 1년 때에 신앙의 갈등을 겪으며 방황의 시기를 맞게 되었다. 이 시기까지 분명한 점은 그가 목회적 소명에 대해 도전 받았던 직접적 계기는 아직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2) 소명형성 과정 (1967-1975) 이 시기는 박영선의 목회적 소명을 확인하는 시기로 그를 이해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시기이다. 사실 그의 목회적 소명은 긴 방황의 인생과정에서 경험된 것들과 함께 점진적으로 확인된 내용으로 주어진 게 사실이지만, 이 시기의 그의 경험들은 그 진폭이 매우 크고 불규칙하다는 점에서 이후의 그의 설교를 통해 반영되는 관점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할 것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박영선은 1969년 3월 한양대학교 공과대학 전기공학과에 입학하는데, 이는 아마도 부친의 가업에 의해 쉽게 선택된 것이라 여겨진다. 대학에 입학한 그는 전공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1969년 5월 해병대에 지원하여 군복무에 들어가 1971년 2월 갑작스런 수술 뒤 후유증으로 의병제대를 하는데, 이를 계기로 이후부터 그는 만성적인 건강장애를 호소하며 지내게 된다. 제대 후 복학한 그는 2학년이 끝날 무렵인 1972년 12월 개인적인 체험과 함께 하나님의 목회에로의 부르심을 깨닫게 되는데, 이를 자신의 소명으로 확인하기까지는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계속되었다고 한다. 대학을 졸업하였지만 부모님의 반대로 신학교 입학을 미루던 1975년, 박영선은YFC (Youth For Christ)에서 간사로 일하다가, 1976년 3월 총회신학원에 입학한다. 따라서 이 시기의 특징은 박영선이 방황시기를 끝내고 목회적 헌신의 결정을 이루었다는 점이다. 그의 방황은 청년기의 자기 선택적 불안정성에서 시작되어 자기를 찾아가는 과정이었던 반면, 어느 순간 하나님과의 대면에서부터 시작된 그의 소명은 계속 이어지는 떨칠 수 없는 그분의 간섭에 대한 자기의 포기훈련이요, 포기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3) 신학연구 시기와 한국교회 경험 (1976-1981) 사실 이 기간의 박영선은 신구약 성경을 조망하는 성경학을 비롯하여 교리적인 체계와 그 밖의 전문 신학수업을 위해 온 정열을 불태웠으며, 이제까지 경험하고 이해한 한국사회와 교회의 다양한 삶의 패턴들에 대해 체계적인 정리를 마친 기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 먼저 그가 입학한 총회신학원의 성격을 살펴보는 것이 그의 성경관을 비롯한 신학적 입장을 이해하는데 도움될 것이다. 총회신학원은 1901년 평양신학교로부터 시작하여 몇 차례의 한국교회의 교단분열을 거치는 동안 보수적인 신학성향을 유지했던 박형룡, 박윤선 등의 청교도적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학자들이 중심이 된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의 교단에 소속된 신학교로서 한국교회의 보수주의를 대표하는 신학교였다. 더구나 총회신학원은 성경의 교리나 가르침을 엄격한 경건주의와 근본주의의 패턴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었다. 사실 이러한 신학교의 분위기는 한국사회의 유교적이고 보수적인 성향에 상당한 호응을 받아 한국교회의 주류적 흐름을 형성하기까지 했다. 따라서 박영선이 총회신학원에 입학해서 신학에 몰두할 수 있었던 주된 근거는 이 학교가 표방하는 보수적 성경관의 전제에 긍정적인 평가를 한 것이지, 경건주의적이고 근본주의적인 신학훈련을 받기 위함만은 아니었다. 그는 보수적인 성경관의 태도로 성경 자체의 하나님 말씀으로서의 절대적 기준을 강조하는 것과, 성경을 해석하여 다양하고 변화하는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을 적용하는 데에서도 그 기준을 요구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하나님 말씀으로서의 성경에 대한 인정이 기독교 신학의 출발점이어야 된다는 강한 전제를 가진 그가 보수적인 성경관을 표방하는 총회신학원에 입학한 사실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이 시기의 그는 성경을 이해할 통로로서의 신학연구에 집중하여, 신학교의 교과과정을 중심으로 전체적인 신학조망을 훈련했다. 사실 총회신학원은 보수적인 장로교신학교였기 때문에 전통주의적 성경해석과 경건주의적 청교도주의의 신학에 기울어 있었다. 그러나 박영선은 성경관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절대적 계시를 인정하고 믿는 입장이었지만, 많은부분에 있어서 한국교회의 전통주의와 근본주의적 성향에 대해 일정한 거리를 두고자 했다. 예컨대, 한국교회의 전통주의적 보수신학 경향이 절대적 계시로서의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기초 위에서 형성된 성경관일지라도, 기독교가 전래된 이래 지난 100여 년간의 한국교회는 기독교적 성숙의 과정으로서 일관된 흐름을 보였다기 보다 많은 극단적인 사회적 사건과 경험을 통해 때로는 폭발되고 단절되며 급격한 변화를 보이면서 기독교 복음의 본래적 가르침과 이상을 왜곡해왔다고 볼 수 있다. 기독교 복음을 받아들인 초기의 한국교회의 경우, 한국의 전통문화와 갈등을 빚으며 복음과 문화의 적대적 입장에서 복음을 사수하고 믿음을 지켜냈다고 한다면, 일제의 식민지배체제 아래의 상황에서는 민족복음의 전투적 입장과 북한 공산주의의 기독교탄압의 분위기 속에서 더욱 근본주의적 열심으로 기독교 복음의 생존적 싸움으로 전개되는 모습을 띠게 되었다. 그런데 이 같은 성향은 한국전쟁 이후 평화시기가 도래하게 되자 그 패턴을 달리하게 되는데, 한국교회가 교회의 부흥이라는 목표를 설정하여 전도운동과 선교운동으로 전환되어 이전 시대의 동일한 근본주의적 열심을 불태우게 된 사실은 이를 잘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운동성은 한국교회와 신학에 영향을 끼쳤는데, 총회신학원의 경우도 이러한 근본주의적 태도와 경건주의적 사고의 영향권에 있었다. 이점에서 박영선이 보수적인 성경관을 표방하며 동시에 경건주의적이고 근본주의적인 신학을 강조하는 총회신학원에 입학한 사실은 마치 호랑이를 잡기 위해 호랑이 굴에 뛰어든 경우로서, 하나님의 계시로서 말씀인 성경연구를 중심으로 한국교회의 복음이해가 근본주의의 열성신학적 태도를 적절히 분석하고 그에 대한 적절한 대안을 제시하기 위한 의도가 있었다고 말할 수있겠다. 따라서 박영선은 이 기간동안 목회자로서의 신학훈련을 통해 우선적으로 성경연구에 몰두하는데, 특히 한국사회와 한국교회의 역사적 맥락에서 성경과 복음의 신학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재조명하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다시말해 그는 성경본문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성경 그 자체의 연구와 동시에 그 본문이 이해되고 해석되는 현장으로서의 맥락을 중요한 과제로 설정하고 연구에 집중했으며, 더 나아가 성경본문의 메시지가 오늘날의 청중들에게 그대로 다시 읽혀져야 한다는 믿음으로 성경을 조명하고자 노력했다. 성경본문의 메시지는 오늘날의 정황에서 이해되고 해석되어야 하기 때문에, 성경본문의 배경에 대한 문헌학적이고 신학적인 이해를 전제로 그 본문의 해석자와 그 청중이 속한 시대정신과 이해구조의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어야 했다. 그에게 있어 후자의 준비는 이미 소명 형성과정의 시기에 다양한 경험을 통해 그 문제의식을 고취하고 있었으며, 전자에 대해서는 이 신학연구 기간의 탐구를 통해 자기 자신의 독자적 이해패턴을 갖고자 노력을 경주한 것이다. 박영선은 이 기간동안 성경본문의 연구와 더불어 개혁신학의 기초라 할 수 있는 종교개혁신학의 칭의의 구원론과 성화의 교회론에 대해서 역사적 이해를 위해 일관된 시각을 형성했다. 그것은 개신교의 기원으로서 기독교 복음의 이해에 결정적인 출발점으로 인식되기 때문이었다. 특별히 그는 이러한 종교개혁신학이 어떤 경로를 통해 한국교회에 전수되었는가를 주목하고, 근대 이래의 교회사와 신학사를 교리적 전수의 연관과 함께 살펴야 했다. 그가 발견한 한국교회의 모체로서 교회와 신학에 영향을 끼쳤던 일차적 모델은 19세기의 북미 청교도적 장로교였는데, 20세기초엽 프린스튼 신학교에서 일어난 논쟁인 독일적 자유주의와 미국의 근본주의의 갈등에 있어서 각각 전자는 이성주의적 신학으로 후자는 도덕주의적 신학으로 평가할 수 있는 미국교회와 신학의 영향이 한국교회에 직접적으로 연결되었음을 주목한 것이다. 그에게 있어 한국교회의 특징은 미국교회와 신학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따라서 한국교회와 기독교 인식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미국교회와 신학, 그리고 미국의 문화를 이해하는 것은 매우 필요하였다. 사실 미국은 한국이 1945년 해방된 이래, 그때까지 영향을 받아왔던 일본을 거절하며 그 대안으로 택한 우방국가였다. 1950년부터 일어난 한국전쟁에 참여한 미국은 한국에 대해 뗄래야 뗄 수 없는 혈맹국가로 발전했고, 이와 함께 많은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은 미국을 한국교회와 신학의 모델로 선택하였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박영선은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한국교회와 신학의 뿌리를 찾는 과정에서 미국교회 너머에 있는 유럽의 교회와 신학을 이해하고자 노력했다. 기독교 복음에 대한 적절하고도 균형잡힌 합의를 만들어 내었던 16세기의 종교개혁 이후, 근세의 이성주의적 명료함과 전통주의적 정통성이 빚어낸 갈등과 함께 개혁교회와 신학을 스콜라주의적 형태와 이신주의적 형태로 변형시켰던 17세기의 독일과 화란의 신학형태를 전제로 하여, 잉글란드의 정치구조논쟁을 둘러싸고 전개된 교회론적 논의의 부정적 결과인 청교도 운동의 영향으로 미국의 기독교회 출범은 경건주의적 운동성향에서 시작되어 종교적 자유이상과 잘 융화된 것임을 이해할 수 있는 시각을 형성했다. 이점에서 그는 과연 한국교회와 신학이 성경말씀의 적절한 이해와 교회사의 균형잡힌 교훈을 기초로 하여 본래적인 기독교 복음의 에이전트로서의 성경적 교회의 모습을 형성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의식에 답하려 했다. 이는 기독교 신학과 한국교회의 정체성을 이해하는 작업과 동시에 주류적 기독교회의 역사적 패턴을 분석하고 분류하는 작업이 수반되었다. 따라서 박영선의 신학수업은 비록 한국교회의 성격을 이해하는 것을 전제로 시작했을지라도, 개혁신학의 복음과 교회이해를 다양한 역사적 신학의 모델에 비춰 수행했기 때문에 그 내용의 분량이 많을 수밖에 없었고, 이 때 제한된 여러 조건과 상황 속에서 이를 감당한 결과 건강을 크게 헤치게 되었다. 1979년 2월 총회신학교를 졸업하고 1980년 목사가 된 박영선은 몇몇 전통적인 분위기의 한국교회에서 말씀을 설교하며 봉사할 기회를 갖게 된다. 그러나 이 기간 동안의 목회적 경험은 비록 짧고 간접적이며 단절적이었지만, 그의 한국교회의 정체성과 체질에 대한 이해를 보다 분명히 했을 뿐 아니라 많은 면에서 자신의 성경본문 중심의 메시지 전달에 대해 뚜렷한 목적의식을 확인하기도 했다. 사실, 이 시기부터 그의 설교는 성경을 보는 시각의 독특성이나 성경 자체에 대한 풍요로운 메시지 전달이 많은 청중들의 반향을 불러일으키곤 했다. 그러나 그의 설교가 많은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면 줄수록 당시의 전통적인 교회들은 그의 설교를 제도적으로 소화하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한국문화적 차원에서의 전통적이고 경건주의적인 교회들은 그의 설교가 교회의 권위를 손상시킨다거나, 교회 내의 권위와 질서를 위협한다고 인식하기까지 했다. 왜냐하면, 이미 그의 설교가 기존의 한국교회의 정서에 맞게 행해지는 패턴이 아니었을 뿐 아니라, 그가 젊은 부목사로서 많은 교인들에게 설교를 통해 성경을 보는 관점과 메시지 전달의 천재적인 재능을 인정받으면 받을수록 기존 교회 내의 다른 권위 그룹에 의해 강하게 견제되기 일쑤였던 것이다. 비록 그 스스로가 기존 한국교회의 전통적 제도의 산물이었을지라도, 그가 시도한 기독교 복음의 한 걸음 진전된 소개는 아직 한국교회의 제도적인 성향 때문에 충분히 소화할 수 없는 형편이었고, 그는 이런 준비되지 않은 한국교회의 현실을 통감하며 경험했던 것이다. 이런 과도기의 박영선은 목회자로서의 훈련과 자세보다는 성경과 복음을 설교하는 설교자의 훈련과 자세가 더 확인되는 시기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가 1982년 1월 미국 버지니아 린치버그의 리버티 신학대학원에 유학하여 기독교교육학 석사(MA)를 공부한 사실도, 그의 성경과 복음을 가르치고 설교하는 훈련의 연장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사실, 그의 미국유학은 신학연구의 확대라기보다 한국교회와의 연관으로서 미국교회와 신학, 그리고 미국문화에 대한 경험으로 더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일차적으로 한국교회에 대한 영향사적 배후에 대한 관심을 가진 그는, 또한 기독교 복음과 현대문화적 적용의 모델로서 미국교회를 비판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더구나 이 시기의 연구 분야였던 기독교 교육에 대해서도, 그가 이제까지 연구하고 경험한 성경적 메시지의 전달을 강화하는 도구로서 의미 있는 배움이기도 했다. 따라서 박영선의 신학연구와 한국교회에 대한 경험의 시기는 박영선의 이후 목회사역에 나타나는 한국교회에 대한 인식의 배경이 형성된 시기로서 그의 다양한 메시지의 단편적 조각들이 발견된 시기였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의 성경본문에 대한 이해와 해석의 강조와, 그 작업을 통해 확인되는 성경의 메시지의 분명한 내용, 그리고 목회자로서 그 메시지에 대한 헌신으로서의 말씀을 전달하는 설교의 소명과 책임이 인식되는 시기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4) 외치는 소리로서의 메시지와 한국교회의 반응 (1981-1984) 1982년 8월 박영선은 미국유학으로부터 조기 귀국했는데, 이에 대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그의 한국교회를 말씀으로 섬기겠다는 소명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기간의 얼마동안 그는 제도적 교회에서 뿌리 내리지 못하고,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일 뿐이었다. 전통적인 한국교회가 그에게 목회의 기회를 제공하지 못하던 이 시기에 그의 말씀사역은 경기도 '아멘기도원'에서 비로소 시작되었다. 당시, 한국의 유명한 설교가로 널리 인정받던 이동원 목사(현 지구촌교회 담임목사)의 '아멘기도원' 집회에서 초청강사로 불려간 박영선은 아브라함을 비롯한 창세기의 족장들을 새롭게 해석하는 메시지로 큰 반응을 일으켰다. 이제까지 한국교회의 설교자들이 시도해온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요셉 등에 대한 해석들은 주로 그들의 신앙의 영웅됨에 그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러나 박영선은 창세기의 본문을 추적하고 분석하여 그 족장들의 삶을 오늘날의 일반적인 신앙인의 삶과 비교함으로써 성경의 인물들을 너무 쉽게 영웅시하는 우리들의 시각을 교정하는데, 그 족장들의 생애를 우리와 동일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통해 간섭하시고 역사 하셨던 '하나님의 열심'을 깨달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여기서 그의 첫 번째 책의 제목이 된 '하나님의 열심'의 개념이 한국교회에 소개된 것이다. 아멘기도원 집회 사건 이후로 박영선은 한국교회에 급속히 알려지게 되는데, 여기저기의 영향력 있는 모임에서 그를 초청하여 그의 새로운 시각의 메시지를 듣는 일이 많아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그때까지 교회에서 목회자나 설교자로 사역하지는 않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메시지의 영향이 지속적일 수 없었다. 그러던 중 그는 1982년 9월 서울 신반포동 소재의 남서울교회에 청빙을 받고 교회의 터 위에서 정기적인 설교와 목회의 기회를 경험하게 된다. 더구나 당시 남서울교회의 담임목사이던 홍정길 (현재 남서울은혜교회 담임목사)은 83년 6월부터 1년간 안식년 외유 기간동안 박영선에게 임시 담임목사와 설교자로 위촉하였는데, 이 기간이 그에게 있어 목회와 설교의 경험을 정리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가 남서울교회에서 행한 첫 번째 설교 씨리즈는 구약 사사기의 입다를 비롯한 사사들에 대한 새로운 조명이었다. 하나님의 일군으로 부름받은 사사들 역시 영웅적 인물이라는 선이해를 갖기보다 오늘날의 신자들인 우리 자신들과 같은 인물이라는 전제를 갖는 게 하나님의 일하심을 이해하는 성경적 관점이라고 역설했다. 그들 사사들은 신앙의 영웅이라기 보다 오히려 연약성이 더욱 두드러진 인물들임에도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간섭하시는 도구로 소명을 주시고 이끌어 주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창세기의 족장들부터 시작되는 구약의 인물들을 장기간에 걸쳐 씨리즈로 설교했다.그는 역시 이 설교들에 대해서도 성경인물들을 이해하는 새롭고 신선한 관점으로 하나님의 열심이라는 컨셉트에 초점을 맞췄다. 성경에 기록된 신앙적 모델의 인물들을 대할 때, 그들을 들어 쓰신 하나님의 이유와 의도를 우선적으로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통적인 관점에서 신앙의 모델이 된 성경인물들의 이야기는 종종 쉽게 미화되어왔다. 그러나 이제 박영선의 메시지는 성경인물의 인간적인 성공과 업적이 아니라 그들의 실패와 연약함을 균형 있게 이해하도록 함으로 사실상의 성경기록의 목적인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자리로 청중들을 이끌었던 것이다. 이 시절의 박영선의 설교는 아마도 가장 날카롭고 원색적인 표현과 강하고 높은 톤의 외침이었을 것이다. 그가 이 시절에 행한 자신의 설교를 스스로 회상하며 "당시 설교할 때의 심정은 정말 비장했고,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다 전할 수 없는 안타까움까지 있었다"고 했다. 박영선이 남서울교회에서 임시담임목사로서 설교하던 1년 동안 약 1,500여명의 성도들은 2,400여명의 성도들로 증가했는데, 그들 대부분은 서울의 강남에 소재한 이 교회의 새롭고 젊은 설교자인 박영선의 설교를 듣기 위해 몰려든 성도들이었다. 이 같은 변화와 함께 박영선 개인의 목회와 설교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이 시기의 남서울교회 사역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1980년대의 서울의 지역적 특성과 한국사회의 변화를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1980년대 중반 한국사회는 새로운 사회변화와 더불어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일어난 경제적 발전으로 인해 전통적인 사회적 구성이 변화의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한국교회 또한 1984년 선교 100주년을 맞이해 대대적인 전도와 선교의 열정에 취해 있었고, 신도들은 날로 증가추세를 보이고 있었다. 서울의 경우, 역사적으로 중심부 역할을 해온 한강의 북쪽 (강북) 사대문안의 기능이 경제적 변화와 주거환경의 향상으로 인해 그 무게중심이 한강 남쪽 (강남)으로 이전하던 때였다. 이때 많은 교회들이 강남으로 이전하거나 개척을 시작하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런데 이 같은 교회의 변화와 관련하여 당시 강남의 지역적 특성들은 다음 몇 가지로 살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비교적 교육수준들이 높은 거주자들이 정착한 곳이다. 둘째, 경제적으로 생활수준이 높은 거주지역이라 할 수 있다. 셋째, 전통적이고 보수적이며 권위적인 생활패턴 보다는 개혁적이고 개방적이며 이해될만한 생활패턴을 선호한다. 끝으로 아직도 개발도중에 있는 지역이기 때문에 교회와 관련해서 무한한 가능성이 있던 곳이다. 그런데 남서울교회는 바로 이러한 강남지역에 소재했고, 박영선의 설교는 이 지역의 교인들에게 설득력 있는 충격적인 시각의 메시지라 할 수 있었다. 그의 성경본문에 대한 새로운 접근과 분석, 그리고 그 본문해석의 내용을 교인들의 구체적인 생활에 적용할 수 있도록 설교하는 패턴은 그의 설교의 특징이었던 바, 비록 그가 손쉽게 해석하고 설명하는 특출한 재능을 지녔다고 할지라도 그 전체적인 과정은 매우 어려운 성경본문에 대한 분석과 해석의 제안이었기 때문에 청중들의 수준도 매우 중요한 상호작용의 요인이라 할 수 있었다. 사실 그의 설교에 대한 이 첫 번째 단계의 선풍적인 반응은 남서울교회라는 강남의 새롭게 부각되는 지역에 소재한 상황에서 나왔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예컨대, 그의 이전 교회들은 그의 동일한 설교를 들었을 때, 교회의 권위그룹이 앞장서서 비판적인 입장을 보인 반면, 이 교회에서는 그의 설교에 대해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반응을 보인 것이다. 이에 대해 '남서울교회 20년사'는 다음과 같이 박영선 설교의 특징을 기록하고 있다. "박영선 목사의 말씀의 특징은, 첫째 서구식 사고방식과 분석적인 접근방식으로 도출한 내용이 많아 핵심이 명확한 강해 설교였고, 둘째는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이 나를 찾아오시고 인도하심을 강조하였고, 셋째는 후련한 청량감과 감동을 주는 설교였다. 사실 박영선이 인식한 자신의 역할은 목회자로서라기 보다는 설교자로서의 위치였던 것 같다. 따라서 그는 설교를 통한 말씀 봉사에 대해 그의 관심을 쏟았을 뿐이었다. 아마도 이 시기의 그의 설교만큼 청중들에게 원색적이고 강렬한 표현을 구사하는 외침은 그 어디에서도 찾기가 드물 것이다. 그의 설교는 사실 도회지에서 울려 퍼지는 광야의 외지는 자의 소리였다. 그의 말을 빌리면, "이 시기의 나는 설교할 때마다 마지막일 것이라는 절박감이 있었고, 무엇보다도 내가 받은 하나님 말씀의 깊고도 강도높은 뜻을 어떻게든 전달해야겠다는 비장함이 있었다. 아마도 내가 인식한 나의 역할이 외치는 자의 소리가 아닌가 했다"는 것이다. 이 시기에 박영선은 설교자로서 한국교회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남서울교회에서 주간에 행해지던 그의 저녁강의 시간에는 남서울교회의 성도들만이 아니라 타교회의 신자들이나 신학생들이 몰려와 그의 간결하게 절제된 주제별 강의를 들었다. (5) 남포교회의 개척과 성장시기 (1985-1999현재). 사실 박영선은 남서울교회에 있을 때까지만 해도 목회에 대한 소명이나 구체적인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그는 자신의 역할을 목회자로서라기 보다 설교자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계속해서 설교자로서 교회를 섬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이 같은 생각은 새로운 국면의 상황에서 결정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1984년 9월 남서울교회의 담임목사 홍정길 목사가 안식년으로부터 귀국하게 되면서 그의 교회개척을 의논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 '남서울교회 20년사'는 "홍정길 목사가 귀국했을 때는 상당수의 성도들이 박 목사의 설교에 익숙해져 있었고, 이것이 박 목사의 남포교회 개척의 계기가 되었다"고 말한다. 1984년 말, 당시 강남의 끝이라 할 수 있는 개포동지역에 상가건물 지하에 장소를 구하고 1985년 1월 첫째 주에 남포교회를 창립하게 된 것이다. '남포교회'의 '남포'라는 말은 전기가 들어오기 전에 사용되던 한국 전통의 불빛인 '남포'(Lamp)와 교회발생론적으로 남서울교회에서 분가된 개포동의 교회라는 의미로 '남서울개포'의 첫 자와 마지막자를 뽑아 '남포교회'라 명명한 것이다. 남포교회가 설립되면서부터 박영선은 이제 광야의 외치는 자로서보다 지속적이고 균형 잡힌 목회자로서의 연속 강해 설교를 시작하였고, 그의 성경본문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설교를 듣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남포교회는 창립과 더불어 개척교회가 아닌 중형교회로 시작할 수 있었으며, 해를 거듭하여 계속 놀랄만한 교회성장을 하게 되었다. 여기서 주목할 사실은 박영선의 남포교회 개척의 의미가 그 교회나 개인의 차원을 뛰어넘어 한국교회 전반에 대한 모종의 의미를 지닌다는 점이다. 소위 박영선 스타일이라고 일컫는 그의 성경본문의 강해와 메시지 전달방식, 그리고 목회철학 등이 전체 한국교회의 전통적 흐름에 비추어 보면 아직은 낯설지라도, 주로 전통적인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해오던 교인들이 남포교회의 설립과 더불어 모여든 점이나 그들이 박영선의 목회가 지향하는 바의 새로운 안목에서의 기독교 복음의 가르침과 신앙인들의 실천적 삶의 자세에 대해 기존의 한국적 문화와 전통이 개입된 부분들을 벗고자 노력하는 점은 바로 한국교회의 체질변화를 고대하던 그룹들의 반응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사실 남포교회에 등록한 교인들은 처음부터 주로 다양한 기존 전통적인 교회에서 가르침을 받은 교인들이었고, 이들은 거의 박영선의 설교를 듣고 그의 말씀강해의 독특한 메시지에 사로잡힌 사람들이었다. 비록 많은 사람들이 남포교회에 출석하면서 첫 단계의 신앙생활을 시작했을지라도, 더 많은 사람들의 경우에는 이미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해오던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은 박영선의 설교가 새로운 신자들에 대해서는 물론 오래된 신앙인들에 대해서도 깊은 인상을 줄만큼 특별한 시각과 내용을 담고 있었음을 생각하도록 한다. 이점에서 박영선의 남포교회개척이 갖는 의미는 한국교회에 성경본문을 중심한 설교와 이를 통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증거 되는 목회적 헌신이요, 그의 강해 설교와 남포교회의 성장은 아직도 많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메시지에 목말라하고 있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더구나 박영선의 남포교회 목회가 갖는 의미는 한국교회에 전수되고 있는 강한 정신적 성향이라 할 수 있는 열심주의적 구원관과 완전주의적 윤리관이 성경본문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의해 극복의 대안을 제시한다는 차원에서 결정적이라 할 수 있다. 예컨대, 기존의 남포교회의 목회와 설교를 통해 박영선은 한국교회가 일반적으로 추구해온 경향이라 할 수 있는 윤리적 성화의 훈련에 대해 기독교 복음의 존재론적 이해를 제시하는데 공헌했고, 기독교 복음의 이해를 근거로 교회 안에서 근본주의적 운동성을 추구하던 한국교회의 패턴을 신앙적 삶의 실천을 통한 성화의 강조를 강조하는데 공헌하기도 했다. 박영선은 자신의 목회와 강해 설교를 통해 한국교회가 이제까지 100여년을 지나는 동안 전도와 다양한 신앙훈련을 통한 외형적 성장을 추구해 왔다면, 이제부터는 한국교회가 간과해왔던 신앙인들의 내적인 성숙과 현실적이고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신앙인다운 태도를 드러내며 살도록 가르치고 훈련해야 된다고 믿었다. 이제는 기독교 복음의 헌신을 열심과 운동성으로 표현하기 보다, 일상적이고 다양한 현실에서 신앙인의 자연스러운 삶의 태도와 실천을 통해 드러날 수 있도록 성숙한 복음에의 헌신을 가르쳐야 한다고 믿었다.이점에서 박영선의 의의는 한국교회의 전체적인 맥락에서 이해하고 조명해야 할 것이며, 이를 위해 다음 장에서는 남포교회의 설립과 그 성장과정에 대한 역사를 보다 자세히 살펴보도록 할 것이다. (1부끝) 남포교회 성장요인으로서 박영선의 목회와 강해 설교에 대한 연구 2. 남포교회 설립과 그 성장의 역사 (1) 남포교회 설립과 초기 성장시기(1985-1987) (2) 남포교회 예배처소 이전과 비약적 성장시기(1987-1995) (3) 남포교회 성장의 계속(1995-1999현재) (4) 남포교회 교인들의 성격과 특징 2. 남포교회의 설립과 그 성장의 역사 (1) 남포교회 설립과 초기 성장시기 (1985-1987) 남포교회의 설립과 성장을 살펴볼 때, 아마도 그 설립과정과 성장패턴의 속도와 규모는 한국교회사 뿐 아니라 세계교회사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만큼 특별한 모습을 보인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남포교회가 초고속 성장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신앙생활을 하고있던 사람들이 성경 강해를 중심으로 모여 교회가 성장했기 때문이다. 이점에서 남포교회는 종종 오랜 기간에 걸쳐 성장해온 교회처럼 인식되기도 한다. 남포교회의 설립과 성장과정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초기 설립기간을 살펴보도록 하자. 1984년 10월 교회설립을 결정한 박영선은 이 교회설립에 동참하기로 뜻을 모은 몇 가정을 중심으로 개척을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그는 교회설립을 준비한 소수의 위원들과 함께 서울 강남구 개포동 소재의 상가 지하공간 (약 110 여평)을 임대하여 교회설립을 위한 준비를 하다, 1985년 1월 첫째 주일에 창립예배를 보았다. 이 창립예배에는 남서울교회에서 참여한 50여명의 성도들과 지난 1-2년의 짧은 기간동안에 박영선의 설교테이프를 듣거나 소문을 듣고 온 250여명 등 300여명의 성도들이 참여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이들이 단지 창립을 축하하기 위해 단회적으로 출석한 참가자들일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거듭되는 주일마다 등록교인들을 늘어갔고, 창립 6개월이 지나며 곧 500여명에 이르렀으며, 1년이 되면서 600여명의 등록교인으로 성장하였다. 사실 이미 박영선이 남포교회의 목회를 시작할 때는 많은 사람들이 그의 명성을 인지하기 시작하였다. 이전 남서울교회 시절에 행한 그의 설교와 성경공부가 테이프로 녹음되어 빠른 속도로 보급되고 있었고 또한 책으로 출간되어 널리 읽혀지고 있던 때였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평범하지 않은 그의 설교 스타일과 성경을 보는 안목에 대해 주목하였고, 유별난 존경심을 갖기까지 했다. 그들이 남포교회의 설립소식을 들었을 때, 박영선의 설교를 듣고 배우기 위해 자발적인 참여자가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남포교회는 비록 갓 시작한 창립교회일지라도 규모 상으로는 보통 중형교회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더구나 매주 새로운 교인들이 등록을 했기 때문에 비약적으로 성장하는 교회가 당면하는 문제가 생기기도 하였다. 예컨대 설립 된지 불과 1개월이 채 안되어 늘어나는 교인들로 인해 비좁은 장소를 해결하기 위해 60평을 추가로 임대하여 본당을 확대했다. 그러나 표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3개월이 지난 4월 둘째 주부터 늘어나는 교인들을 위해 예배를 2부로 나눠 드리게 되었다. 창립 7개월 후에는 예배장소 이전을 위한 기획위원회가 조직되었으며, 8개월 째에는 60평을 추가 임대하여 교육관 및 사무실로 이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같은 확장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교인들의 증가로 남포교회의 예배처소의 문제는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었다. 창립 1주년이 되면서 표 2에서와 같이 예배를 3부로 나눠 드렸지만, 여름철이 되면서 냉방시설이 되어있지 않은 예배처소는 매주 홍역을 치르듯 어려움의 연속이었다. 고육지책을 모색하던 남포교회는 1986년 6월부터 8월까지의 여름기간 동안 숙명여자고등학교의 허가를 받아 학교의 대강당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대부분의 교회들과는 달리 남포교회의 교인들은 교회가 마련한 신앙생활을 위한 훈련과정 등 교회성장을 위한 프로그램을 거쳐 등록하고 정착한 것이 아니었다. 남포교회의 성장을 살펴볼 때, 매우 독특한 교인등록의 패턴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사실 그 패턴은 초기 시절만이 아니라 계속된 남포교회의 교인등록 패턴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할 수 있다. 그들은 일차적으로 박영선의 설교를 듣기 위해 교회에 출석하였다. 표 2 : 예배 구분 횟수 (1985. 1 - 1987. 4) 예배 횟수 기 간 장 소 1 부 1985. 1 - 1985. 4 개포동 1, 2 부 1985. 4 - 1985. 12 개포동 1, 2, 3 부 1986. 1 - 1986. 6 개포동 1 부 1986. 6 - 1986. 8 숙명여고 강당 1, 2 부 1986. 9 - 1987. 4 개포동 그들은 자발적으로 또는 가족이나 친구의 권유로 박영선의 설교를 듣기 위해 남포교회에 출석했다. 그들은 박영선의 설교를 통해 기독교 복음의 새로운 조망을 경험하게 되고, 그 메시지에 승복되어 신앙의 성숙을 위해 교회에 등록하고 정착하곤 했다. 따라서 남포교회의 교인등록 패턴은 박영선의 설교듣기와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 같은 남포교회에 등록하는 교인들은 크게 두 종류의 그룹으로 나뉜다. 첫째, 초기 시절에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이 그룹은 이미 타 교회에서 오랜 신앙생활을 하던 신자들의 경우이다. 이들은 이미 기독교 복음의 핵심과 교회에 대한 인식이 있던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대부분이 이미 기존 교회에서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박영선의 설교가 기독교 복음의 이해에 대해 한 단계 발전된 소개라는 강한 인상을 받았고, 이것이야말로 그들이 갈망해왔던 복음의 소개인 것을 확인했다. 둘째, 처음 기독교 복음을 접하는 초신자들의 경우가 있다. 이들은 가족들을 따라 처음 교회에 출석하여 박영선의 설교에 인상을 받고 계속 출석을 하면서 복음을 깨우친 사람들이다. 이들은 비록 기독교의 종교적 이해가 없었을지라도 박영선의 기독교 복음의 소개가 손쉽게 이해할 수 있는 가정적 사회적 배경의 예화를 통해 전달될 때, 기독교의 본질에 대한 선명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된 사람들이기도 하다. 요약해서 정리하면, 남포교회는 설립 초기부터 이미 박영선을 알고 있던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다. 남포교회의 설립 초기에 있어 성장의 주된 배경은 이미 박영선의 설교스타일이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이 시기에 참여한 교인들은 주로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해오던 사람들이었으며, 이는 박영선의 남포교회 설립이 한국교회의 전체적인 맥락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는 사실을 반증할 것이다. (2) 남포교회 예배처소 이전과 비약적 성장시기 (1988-1995) 앞에서 살펴 본대로, 개척하면서부터 남포교회는 등록교인들의 계속된 증가로 예배처소의 심각한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주어진 여건 속에서 가능한대로 임대건평을 넓혀가며 대처하는 것도 개척 2년째에 접어들면서 역부족이었다. 더구나 여름철이 되면 다양한 방법으로 대처를 했을지라도 비좁은 공간에서 많은 사람들이 함께 예배를 보는 열기로 높아진 실내온도 때문에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이미 앞에서 언급한 대로 (표 2 참고) 예배를 1.2.3부로 나눠 드렸지만, 등록교인들이 계속 증가했기 때문에 비좁은 공간의 상황은 이내 비슷하게 되었다. 1987년 창립 2주년이 되자 남포교회는 예배당 건축위원회를 발족시켰고, 당시 1986년 아시안게임을 위해 지었다가 게임이 끝난 뒤 일반 분양된 잠실 아시아선수촌 상가의 431.7평과 69.7평을 분양 받게 되었다. 1987년 4월 19일 남포교회는 현재의 장소인 잠실 아시아선수촌으로 옮겨와 입당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현 위치인 잠실 아시아선수촌으로 예배당 처소를 옮긴 남포교회의 성장은 계속 되었다. 사실 남포교회는 예배당 처소를 옮긴 이후에 본격적으로 성장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1987년 4월 예배당 처소를 옮길 때 약 1000여명의 교인들이 있었는데, 1990년까지 매년 500여명, 600여명, 700여명이 증가하게 되었고, 1991년부터 1994년까지의 기간은 등록교인들의 증가가 약간 둔화되긴 했을지라도 매년 평균 400여명이 증가하였기 때문이다. 실로 놀라운 성장신화를 계속한 것이다. 표 4 : 예배 구분 횟수 (1985. 1 - 1987. 4) 예배 횟수 기 간 장 소 1 부 1987. 4 - 1987. 10 잠실 아시아선수촌 1, 2 부 1987. 10 - 1990. 12 잠실 아시아선수촌 1, 2, 3 부 1991. 1 - 1995. 2 잠실 아시아선수촌 이렇게 성장이 계속되게 되자 남포교회는 예배당 처소를 옮긴지 1년이 채 되기도 전에 예배를 두 차례로 나눠 드려야 했다. (표 4 참고) 그리고 역시 표 4가 보여주는 것처럼, 교인들의 증가로 이 같은 문제가 계속되자 1991년 1월부터는 다시 예배를 3부로 나눠 드리는 등, 증가되는 교인들과 반비례되는 예배당 규모를 해결하려는 자구책 역시 계속되었다. 이 시기의 남포교회 등록교인들의 패턴을 조사해 볼 때, 등록교인들의 주거지역이 초기 시기보다도 더욱 확대된 지역적 분포를 보인다는 점은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다. 이는 이광희가 그의 아티클 "어떤 프로그램도 말씀 강해보다 우선할 수 없다"에서 지적한대로 남포교회가 단순히 예배당 처소를 잠실로 옮겼기 때문이 아니라, 박영선의 설교가 점차로 널리 알려지게 되어 보다 넓은 지역에 있는 사람들이 남포교회로 출석하게 되었고, 이들이 결국 등록하게 되는 패턴을 보인다. 남포교회가 개포동의 초기 시기에는 주로 박영선을 이미 알고 있었던 사람들을 중심으로 성장했던 반면에, 잠실의 아시아선수촌 시기에는 박영선의 목회와 설교가 점차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결과로 보다 폭 넓은 지역과 계층의 사람들이 참여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즉, 남포교회의 성장은 지역적 특성과 관련되기 보다 박영선의 설교와 관련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표 8에서 보는 것과 같이 남포교회에 등록한 교인들 중 많은 사람들의 출석이유는 단연 박영선의 설교 때문이다. (표5) 남포교인들의 등록이유 사실 이 시기의 남포교회 성장은 전체 한국교회의 맥락에서 볼 때 매우 두드러진 모습을 보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대부분의 교회들이 1980년대 후반이 되면서 성장이 둔화되었고, 1990년대에 이르러서는 성장이 멈추게 되었으며, 1990년대 중반 즈음에는 교인감소 현상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비록 1990년대에도 일부 성장하는 교회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이 시기에 교회성장이 놀랍게 진행된 남포교회의 경우는 매우 예외적인 상황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남포교회의 경우, 한국의 개신교 역사에 있어 전통적으로 인식되어 온 교회성장 프로그램이라 할 수 있는 전도에 대한 열심과 제자훈련 등 다양한 강조를 하지 않고도 성장했다는 점이다. 이점에서 남포교회의 성장은 분명히 다른 성장하는 한국교회와 차별된다. 이 차별은 전체 한국교회의 틀 속에서 몇 가지 특징과 함께 설명될 수 있겠다. 첫째, 남포교회의 성장은 박영선의 탁월한 강해 설교에 근거한 것이다. 박영선은 남포교회 창립부터 계속하여 강해 설교를 시도했고, 남포교회의 계속된 성장은 이 설교에 대한 기존의 한국교회의 신자들의 반응이기도 했다. (표6) 남포교회 교인들의 등록패턴(남/여) 표 7이 보여주듯이, 남포교회의 교인들은 이미 신앙생활을 하던 사람들이 박영선의 설교를 듣기 위해 그들의 전통적인 교회로부터 이적한 경우가 많다. 물론 이 시기에도 많은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이 강해 설교를 시도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박영선의 경우, 본 논문의 제 2부에서 살펴보겠지만, 성경 본문을 분석하는 통찰과 함께 많은 사람들이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전달능력이 뛰어났다. 남포교회에 출석하여 박영선의 설교를 들은 청중들은 성경 본문의 생생한 강해와 현장감 있는 적용에 하나님의 실재성을 확인했다는 것이다. 둘째, 이 기간의 남포교회 성장이 다른 교회들과 차별되는 요소로 박영선의 목회가 권위주의적이지 않은 특징을 들 수 있다. 특히 박영선은 설교를 통해서만 아니라, 교회의 행정에 있어서도 권위주의적 구조를 피했다. 사실, 이 시기는 일반적인 한국교회가 전통적인 유교사상과 문화의 영향으로 권위주의적이라는 평을 듣고 있을 때였고, 점점 비판적인 주제가 되고 있었다. 그러나 누구든지 남포교회에 등록한 교인들은 그 교회가 계급적인 구조에 의해서나 또는 계급적인 관계에 의해 지탱하고 있지 않음을 알게 되고, 이러한 사실로부터 복음의 진정한 자유함이 주는 능력을 경험한 사람들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주저 없이 남포교회를 선택하여 등록했다고 볼 수 있다. 셋째, 일반적으로 한국교회가 과업 지향적인 것에 비해, 남포교회는 교회 그 자체의 교회됨과 신자의 신자됨을 지향한 점이 구별된다. 박영선은 남포교회가 계속 성장하여 소위 대형교회가 되었음에도 계속해서 교회의 교회된 모습을 유지하도록 역설한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 행하시려는 일은, 그 교회를 통한 일련의 사업들이 아니라 그 교회로 자기 백성들을 부르시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교회를 통한 업적이 아니라 교회에 근거한 당신의 백성됨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남포교회의 입장은 성장하는 대형교회들이 다양한 과업을 설정하여 교인들에게 열심을 강조하는 것과는 크게 대조를 이룬다고 할 수 있겠다. 한국교회의 많은 사람들이 교회성장의 프로그램에 열심 있는 참여를 강권 받아온 점에 비추어 볼 때, 박영선의 목회방침은 교회론의 개혁 모델링을 제시하는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이 시기의 박영선의 설교가 주로 교회성장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교인의 신앙적 성숙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게 볼 수 있다. 아무튼 이 시기는 남포교회가 비약적으로 성장한 시기였고, 박영선의 강해 설교와 그 메시지가 한국교회에 뿌리를 내려간 시기였다. 즉 이 시기에 남포교회가 성장한 것은 새로운 시각과 관점으로 성경본문을 면밀하게 다루는 강해 설교를 통해서도 교회가 성장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는 것이었고, 그 중심에 박영선이 있었던 것이다. (3) 남포교회 성장의 계속 (1995-1999현재) 창립 초기부터 계속해서 성장해온 남포교회는 현재까지도 성장을 계속하고 있다. 더구나 최근 5년간의 남포교회 성장은 주목할만한 규모를 보여오기까지 했다. 이 기간동안 전체 한국교회의 성장은 이미 교인감소현상이 나타나고 있었던 점과 비교해 본다면, 이 같은 남포교회의 성장은 매우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겠다. 몇몇 교회를 제외한 거의 모든 교회들이 성장이 멈추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교회성장의 위기를 느끼던 이 기간동안 과연 어떤 이유로 계속적인 성장을 보일 수 있었을까? 표 7에서 보는 바와 같이 1995년 1월 당시 4,600여명의 등록교인은 4년이 지난 1999년 1월 현재 7,500여명의 성인 등록교인으로 증가되었다. 약 3,000여명 가까이 증가하게 된 것이다. 더구나 위의 표 7은 1997년도와 1999년 사이에만 약 2,000여명이 증가했음을 보여준다. 실로 놀랄만한 교회성장의 역사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기간동안 남포교회가 성장한 주된 이유는 역시 일관되게 확인되는 박영선의 강단메시지의 영향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이 기간 중 폭발적인 성장이 일어났던 1997년과 1999년 사이의 기간은 다른 이유로 설명이 보충될 수 있을 것이다. 이 기간은 한국이 한국전쟁 이후 최대의 국가적 시련을맞은 한국의 경제위기기간 이었기 때문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삶을 신앙의 기준으로 반성을 시도하였고, 그 결과 교회를 떠났거나 옮겨간 사람들이 말씀을 따라 교회로 몰려왔는데, 남포교회의 경우도 이에 속한다. 따라서 남포교회는 계속된 성장으로 인해 이미 예배횟수를 4부까지 늘렸지만, (표 8을 참고) 예배당처소의 공간은 여전히 증가되는 교인들의 숫자를 따라가지 못하는 현실이다. 표 8: 예배 구분 횟수 (1995. 3 - 1999 현재) 예배 횟수 기 간 장 소 1, 2, 3, 4 부 1995. 3 - 1999. 8 현재 잠실 아시아선수촌 이 기간의 남포교회의 성장은 남포교회를 한국교회의 흐름 속에서의 위치를 자리 매김 하는 의의를 가진다고 볼 수 있다. 남포교회의 성장이 박영선의 강해 설교에 의존된 특별한 형태를 띠고 있다는 사실은 소위 박영선의 메시지와 남포교회의 성장이 한국교회의 전체적인 맥락에서 일련의 복음이해의 계보를 형성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더구나 남포교회의 성장이 박영선의 메시지에 의한 결과라는 사실은 성장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행사하지 않고도 오직 말씀선포만으로 교회성장이 가능하다는 모델링이 되기도 하다. (4) 남포교회 교인들의 성격과 특징 그러면 지난 15년 동안 남포교회의 놀라운 성장을 이룬 주체가 박영선의 강해 설교 메시지라 한다면, 그 객체라 할 수 있는 남포교회 교인들의 성격과 특징을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남포교회 교인들의 성격과 특징을 살펴볼 때, 가장 중요한 점 중의 하나라 여겨지는 것은 신앙적 특성에 대한 설명일 것이다. 남포교회 교인들의 신앙적 특성이야말로 남포교회의 놀라운 성장에 대한 설명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이미 언급한 것처럼, 대부분 남포교회의 등록교인들은 이미 한국의 기존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사람들이다. (표 6에서 볼 수 있듯이 77.5%의 등록교인들이 이미 다른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다 이적했을 정도이다.) 이들은 대부분이 오랜 신앙생활을 통해 기독교 복음을 접한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는 또한 성경과 기초적인 기독교교리에 대한 전이해가 전제되어 있다는 뜻도 된다. 더구나 박영선의 강해 설교가 기독교 복음에 대한 초기적 이해에 초점을 두어 설교하는 전도 설교와 대조를 이룬다는 점에서, 이들은 이미 신앙적 입문의 단계를 거친 사람들일 뿐 아니라 교회생활에 대한 경험을 소유한 사람들이기도 하다. 사실 박영선의 강해 설교는 일단 성경본문에 대한 원래적 의미를 풀어가는 작업으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기독교 복음에 대한 전이해가 없이는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남포교회 교인들의 성격과 특징 중에서 두 번째로 고려할 점은 남자교인들이 더 많은 성별분포이다. 이같은 남포교회의 성별분포는 일반적인 한국교회의 그것과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한국교회들은 교인들 중의 대다수가 여성교인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히 대부분의 한국교회는 남성에 비해 여성들이 더 많이 교회에 적극성을 보이며 참여하였고, 이에 따라 남성들은 일부를 제외하고 교회에 출석조차 하지 않는 숨는 현상이 두드러져 왔다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많은 한국교회의 현실은 남자에 비해 여자들이 복음을 더 잘 수용한다는 편견에 사로잡히기도 하였다. 그러나 남포교회의 경우, 균형을 잃은 한국교회의 이러한 현실에 대해 숨어있는 남자교인들이 교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강조하는 설교를 하였고, 또한 교회의 목회적 패턴도 이를 반영하도록 했다. 남자교인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우리는 남포교회의 성장이 가정의 균형을 잘 유지하는 가운데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가정적 균형감은 소위 온 가족의 기독교적 정체감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세 번째 특징으로 노년층에 비해 젊은 장년층이 두텁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표9을 참고) 이것도 대부분의 한국교회의 연령별 구성비와 비교해 볼 때, 남포교회는 매우 젊은 구성원을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는 두 번째 특징이 가정적 안정감을 확인할 수 있는 것임에 비해 남포교회의 사회적 안정감을 확인하는 바로미터이기도 하다. 네 번째로 고려해 볼 남포교회 교인들의 특성은 비교적 높은 학력수준을 보인다는 점이다. (표10를 참고) 사실 기독교 복음의 수용이 높은 학력, 또는 지적 능력과는 무관한 것임은 분명하지만, 이 특징은 남포교회의 성장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기 때문에 중요할 것이다. 예컨대, 남포교회의 급속한 성장의 주된 요인이 박영선의 설교 메시지이고, 그것이 전도 설교라기 보다는 매우 분석적인 강해 설교이기 때문에, 비교적 많은 사람들이 높은 학력을 나타낸다는 것은 설교의 이해를 위한 차원에서 그 특성을 가진다고 하겠다. 마지막으로 논할 수 있는 남포교회 교인들의 특성은 사회-경제적 입장과 환경이 비교적 안정적인 수준을 나타낸다는 점이다. 교인들의 직업적 분포를 나타내주는 표11을 보면, 가장 많은 비율을 보이는 직업은 회사원으로서 이는 안정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많음을 가리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남포교회 성장요인으로서 박영선의 목회와 강해 설교에 대한 연구 이대원 3. 남포교회 목회에 나타난 박영선의 목회적 특징 (1) 말씀 중심의 목회 (2) 행정과 조직 중심이 아닌 교회편제 및 운용 (3) 과업 중심이 아닌 교인들의 인격적 성숙을 강조 (4) 가정의 확대로서의 교회실현 (남자 중심의 교회구조) (5) 목회자들의 배양과 교회개척으로의 연결 3. 남포교회 목회에 나타난 박영선의 목회적 특징 (1) 말씀 중심의 목회 남포교회의 비약적인 성장이 박영선의 말씀강해에 기인한 것임은 이제까지 우리가 줄곧 생각해온 관점이다. 즉 남포교회의 성장은 박영선의 메시지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1장에서 언급한대로, 이제까지 대부분의 한국교회는 구원 그 자체만을 강조하는 메시지가 지배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거기에 교회성장을 위해 전도의 실천과 헌신을 강조하는 메시지가 더해지는 게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그러나 박영선의 메시지는 성경본문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을 근거로 신자들이 현실적인 삶의 현장에서 보다 성숙한 신앙인격을 갖도록 도전하는 특징을 보인다. 이 같은 말씀 선포는 보다 고급한 신앙인격으로 성숙할 것을 원하는 한국교회의 신자들에게 충격을 주었고, 결과적으로 이들이 박영선의 메시지를 사모하게 되었고, 목회에 참여하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면, 과연 박영선은 남포교회를 목회 하는데 있어 말씀 선포, 또는 강해 설교의 메시지에 얼마나 큰 비중을 두고 있는가? 말씀에 대한 강조가 그의 목회적 특징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라고 한다면, 그 강조는 어느 정도의 내용을 가지는가? 그리고 남포교회의 성장과 관련해서 말씀에 대한 강조라는 특징이 어떤 역할을 가지고 있는가? 사실, 박영선은 남포교회의 목회에 있어 가장 중요한 핵심 사역이 말씀 선포라고 믿었을 뿐 아니라, 말씀선포에 가장 우선적인 비중을 둔다. 일반적으로 한국교회는 목회에 있어 중점사항을 전도나 선교, 또는 교회성장 등의 일로 삼는 경향이 있다. 이는 자연히 목회의 초점을 하나님의 백성된 사람들 자체에 비중을 두기보다 그들을 통해 행해지는 과업에 관심을 보이게 되었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볼 때, 한국교회는 전도와 선교사업을 통해 교회의 업무를 극대화하는 경향을 보이게 되었다. 그러나 박영선은 남포교회의 목회에 있어 말씀선포의 사역을 최우선으로 둔다. "교회는 끊임없이 가르치는 일을 해야 한다. 가르치는 것의 첫 번째가 설교다.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의 다른 모든 일들은 성도들이 깨달은 신앙을 자기 것으로 만들게 하기 위해 주어진 어떤 일들일 뿐이다." 말씀선포야말로 교회의 최우선적 사명이요, 교회로 교회 되게 하는 존재이유이다. 말씀선포를 위해 교회가 세워지고, 말씀선포에 의해 하나님의 백성인 교인들이 양육되며, 말씀선포를 계속 수행하는 것이 교회가 계속해서 감당해야 할 사명인 것이다. 박영선의 말씀선포에 대한 이 우선권은 남포교회의 목회적 특징과 핵심 사역을 이루게 하였다. 더구나 그는 말씀선포에 대한 비중을 남포교회 목회의 핵심원리로 삼았을 뿐 아니라, 그에 말씀선포의 질적 수준과 내용도 매우 두드러진 모습이었다. 제 2장의 표 0에서 볼 수 있듯이 많은 남포교인들이 남포교회의 특징으로 박영선의 말씀 강해를 드는 것은 바로 이런 사실을 확인해주는 것이다. 실로 박영선의 말씀선포는 놀라운 은사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그의 말씀선포에 대한 이러한 강조는 남포교회를 말씀이 풍성한 교회, 말씀이 살아 역사 하는 교회, 말씀의 교회가 되게 했다. (2) 행정과 조직 중심이 아닌 교회편제 및 운용 남포교회의 목회가 말씀선포의 중심으로 지탱되고 있다는 사실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행정과 조직의 비중을 극소화한다는 점으로 연결된다. 남포교회가 교회편제 및 운용적인 특징으로서 행정과 조직 등 관리적인 면이 약하다는 지적은 쉽게 인정되는 사실이기도 하다. 그러나 남포교회가 행정과 조직관리를 약하게 의도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행정과 조직은 말씀에 따른 양육을 돕기 위해 필요한 만큼만 운용할 뿐이다. 내용과 형식을 전치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결과적으로 남포교회는 말씀과 교육의 내용에 대한 강조로 인해 행정과 조직이 약화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일반적인 한국교회는 행정과 조직을 교회성장의 방편으로 간주해온 것이 사실이다.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행정과 조직관리에 집중하여 교회성장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교회 안으로 일반 사회의 경영관리를 도입하여 효율성을 높이는 교회까지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교회의 본질로서의 말씀사역의 초점을 약화시키는 경향을 보이게 된 것이 또한 사실이다. 이점에서 박영선은 성경이 요구하는 신자의 본질 또는 신앙의 본질을 교회가 바로 인식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물론 남포교회도 교회의 본질인 말씀사역을 위한 내용을 지원하는 차원에서의 행정과 조직은 기본적으로 유지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문제는 행정과 조직이 말씀사역을 돕기 위한 차원에서 필요하다는 점이고, 그 반대로 행정과 조직을 통한 목회운영을 지양하는 것이다. 만일 잘 짜여진 행정과 조직을 통해 교회성장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에 못지 않게 그 행정과 조직을 유지하고 다듬기 위해 많은 에너지와 시간을 들여야 하기 때문에 주객이 전도될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행정과 조직을 필요이상으로 갖추게 되면 그것을 위해 교회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말씀사역이 방해받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많은 한국교회가 경영원리에 따른 행정과 조직을 통한 목회운영을 시도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남포교회는 이 같은 사회적 경영원리를 지양하기 위해 최소한 필요에 의해서만 행정과 조직을 생각하고 있다. 더욱이 박영선은 그의 로마서 강해에서 율법의 의미를 다루는데 있어, "원래 율법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이 만족하실만한 영광스럽고 거룩한 수준이나, 유대 바리새인들의 율법주의적 이해는 그것으로 자기를 치장하는 쪽으로 갔다."고 지적함으로, 단순히 규범을 지키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 본질적인 정신이라는 원리를 끌어낸다. 즉, 교회의 목회에 있어 그 본질을 추구하는 것으로서 방해받는 차원의 행정과 조직은 과감히 줄이고, 목회를 돕는 차원에서의 기본적으로 필요한 행정과 조직을 구성하고자 한다. 사실 행정과 조직의 짜임새를 갖춘다면, 목회의 효율성을 보다 높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경영과 관리적인 개념으로 목회를 끌어간다면 교회는 보다 효과적으로 이끌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들은 교회의 본질을 망각하기 쉬운 방법들이고, 교회의 본질인 말씀사역과 신자들의 인격적인 성숙을 약화시킬 소지가 다분하다고 말할 수 있다. 교회는 이점에서 경영합리화를 시도할 그런 기관이 아니다. 오히려 교회는 합리주의적인 사고에 의존하지 않는다. 예컨대 박영선은 이에 대한 설명을 다음과 같이 한다. " 교회는 가능한 한 일을 여러 사람이 하게 해야 한다. 열 사람이 할 것을 세 사람이 하게 하는 것이 경영 합리화이다. 백만 원 들 것을 십만 원 들게 하는 것이 경영 합리화이다. 하지만 교회는 세 사람이 할 것을 삼백 명이 하게 한다. 이 사람이 와서 청소하다 어질러 놓으면 다른 사람이 와서 청소하다가 또 깨뜨리고... 하나님은 나중에 이렇게 계산하실 것이다. 너는 유리창을 갈아 끼웠고, 너는 청소를 했고, 너는 휴지를 주었고, 너는 천정을 고쳤느니라." 여기서 교회를 지배하는 원리는 결코 경영합리화일 수 없다. 교회의 목회사역은 경영합리화를 통한 효율성을 자극하고 극대화시키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로서의 신자들을 불러모으고 삶을 나누며 하나님의 요구에 맞는 삶의 모습을 배워가기 위해 모든 비효율성과 비능률적인 반복된 시행착오를 용납하는 그런 공동체를 지향한다. 그는 또 "교회는 경영합리화를 하는 곳이 아니다... 왜냐하면 누구에게든지 다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할 기회를 주어 거기에서 본인의 신앙이 크기 위하여, 그리고 교회가 가지고 있는 모든 책임들이 그에게 훈련의 과정이 되도록 도와줘야 하기 때문이다. 교회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커야 한다."고 말한다. 교회는 치밀한 계획과 조직에 의해 운영되어야 할 사회경제적 경영의 장소가 아니다. 이러한 박영선의 교회이해는 남포교회의 목회에 있어 관리나 경영적이지 않은 특징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남포교회가 관리나 경영을 강조하지 않는 특징을 보인다는 말은 그것들을 주된 뼈대로 인식할 수 있을 만큼 두드러지게 프로그램화하거나 에너지를 집중시키지 않는다는 말이지, 목회를 위한 교구 및 구역편성이나 다양한 성경공부모임 등을 소홀히 한다는 뜻은 아니다. 박영선의 목회적 특징에 나타난 강조점은 사실 말씀강해에 기초하여 그 말씀을 배우고 삶에 실천하도록 돕는 범위와 차원 내에서 교회의 교육체계를 수립하는 것이기 때문에 필요에 의한 만큼만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남포교회는 목회실적을 점검할만한 어떤 관리를 취하지 않는다. 예컨대, 교인들이 출석하는 현황이나 헌금, 구역모임의 실적도표 등을 작성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이 모든 것들을 자율적인 참여와 실행에 맡긴다는 점이다. (3) 과업 중심이 아닌 교인들의 인격적 성숙을 강조 사실 대부분의 한국교회가 교회의 존재근거를 복음전도와 선교에 두고 있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전체로서 한국교회도 피 선교 120여 년만에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루었을 뿐 아니라, 세계 전역에 선교사를 파송 하는 일에 큰 몫을 감당해왔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교회마다 전도와 선교라는 안과 밖 복음전도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고, 이것은 마치 하나님의 절대명령에 순종하는 최우선의 자세인 것으로 가르쳐 왔다. 더구나 많은 한국교회들이 이러한 자세를 교회성장을 위한 조건부적 사업으로 간주하기까지 하면서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이라 가르쳐왔던 이 일들을 과업 지향적인 프로그램으로 인식하고 실천하는 형편에 이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남포교회는 그 어떤 전도나 선교 프로그램을 강조하지 않는다. 비록 전도나 선교가 전통적으로 교회의 중요한 이념적 사명임이 분명하나, 그러한 것들 또한 기본적으로 말씀선포에 포함된 세부사항일 뿐, 독자적으로 온 교회의 에너지를 집약시킬 만큼 유별난 강조를 하지 않는다. 박영선은 이에 대해 "일의 기능적인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을 통일시키고자 하시는 커다란 계획안에 가장 중요한 내용인 인간회복,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거룩과 영광의 회복이 초점으로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교회의 사명은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는 것인데, "이는 doing에 관한 문제가 아니고 being에 관한 문제이다.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가,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시는가 이것이 성경의 초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는가는 그 무엇이 일로서의 무엇이 아니라 그 무엇을 할 수 있는 being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가 전도나 선교를 강조한다고 할 때, 신자들 자신이 그 일을 할 수 있는 존재(being)가 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기본적인 태도의 전환이 없을 때는 그 일을 이루기 위하여 "다른 재주를 동원해서라도 그 일을 이루기만 하면 되는 재주꾼들만 양성하는 셈이다." 그래서 박영선은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교회가 전도를 강조하면 전도를 할 수밖에 없는, 다시 말해 주를 사랑하고 죄인을 불쌍히 여기는 하나님의 마음에 동참한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누가 많이 불러 왔느냐만 중요해진다. 교회가 교회 노릇을 하기 위해 선교사를 보내야 된다는 것은 맞다. 그러나 선교사를 백 명 보내기로 작정했으면 선교사를 백 명 보내는 열심, 주의 기뻐하시는 일에 동참하는 주를 사랑하는 마음이 되어야 하는데, 백 명의 선교사를 보낼 돈을 가진 교회가 되는 싸움을 한다." 더욱이 박영선은 "성경이 말하는 신자의 본질은 뜻밖에도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어떤 변화를 가지라는 것이다." 이점에서도 역시 신앙은 being에 관한 문제지 doing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 행함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됨에 관한 문제다. 그는 교회와 신자의 근거로서의 존재를 최우선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종종 속고 있다. 왜냐하면 열매가 맺히는 것과 그 열매를 소원하는 것을 혼동하기 때문인데, 신자의 본질이나 신앙의 본질은 내가 기독교적 열심을 갖고 있고 주를 위해 어떤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하든지 그것에서 성령의 좋은 열매가 나와야 한다." 남포교회의 목회과정에서 드러난 박영선의 목회관은 분명히 외형적인 구조의 발전이 아닌 신자들의 내면적 성숙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남포교회의 성장은 이러한 그의 목회관이 반영된 경우이기도 하다. 그는 교회가 발전한다는 말처럼 애매한 말은 없다고 한다. 그는 "교회가 발전한다는 척도로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교인들의 신앙이 성숙해 나간다는 점이다."고 강조한다. 따라서 남포교회는 전도와 선교에 대한 열심 이전에 일상생활에 투영되는 신자들의 인격적 성숙을 강조하는 목회를 지향하는 특징을 가진다. "성경은 우리를 목표로 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성품을 완성하는 것, 우리를 영광스럽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음을 늘 기억하라." 교회의 목표는 곧 우리 자신이다. (4) 가정의 확대로서의 교회실현 (남자 중심의 교회구조) 여기서 우리는 박영선의 목회철학 중의 가장 핵심적인 대목의 하나인 교회를 가정의 확대로 보는 관점을 생각할 수 있다. 그에 따르면 교회는 조직이 아니라 가정공동체이다. "교회는 훈련소나 학교가 지향해야 할 일정 수준의 신앙훈련을 위해 효과적인 운영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가정에서의 인격적인 삶이 부딪치는 관용과 기다림과 시행착오가 반복되는 그런 하나님의 비밀스런 기관이다." 따라서 교회구성원들간의 관계에 있어서도 비로소 한 몸이요, 지체인 사실을 인정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가정 안에서의 관계가 인격적이듯, 교회 안에서의 관계는 곧 가정에서의 관계처럼 되어야 한다.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이 부모자식의 관계로 유비 되고, 성도들간의 관계는 형제로 유비 되어진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해서 한 몸으로 불러 함께 지어져 가도록 부르신 부름만이 교회를 지배해야 하는 것이다. 이점에서 교회는 조직이 아니라 가정모델이다. 박영선은 이런 가정모델을 위해 "성도와 성도들이 서로 기다리며, 서로를 용서하고, 서로에게 미래의 기대를 가지며 함께 걷는 자세를 서로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가정에서와 마찬가지로 교회는 시행착오가 용납되는 곳이요, 훈련과 연습이 용납되는 곳이다. 세상이 그러하듯 사회적 조직체에서는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다. 세상은 두 번의 기회를 주지 않는다. 그러나 교회는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도 용서해주는 곳이다. 가정이 학교나 훈련소와 다르듯, 교회는 성도들의 인격적인 관계가 기초되기 때문에 삶을 나누며 서로를 격려할 수 있어야 한다. 실패를 위로하고, 성장에 같이 참여하며, 함께 책임을 나누는 그러한 가정의 모델만이 성도들의 인격적이고 신앙적인 성숙을 도울 수 있다. 이에 대해 박영선은 "교회가 거듭해서 실수를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아무래도 좋기 때문이 아니라 교회는 결국 하나님을 닮는 자리로 성도들을 함께 인도하는 곳이기 때문"이라 말한다. 그는 더 나아가서 "교회는 세상적인 것을 연습하는 곳이 아니라 거룩을 연습하는 곳임이 증명되기도 해야 한다."고 한다. 이러한 교회의 가정적 모델에 의해 남포교회는 가정에서의 가장인 남자성도들의 역할이 적극적으로 권장되며, 참여가 강조된다. 교회의 직분에 있어서도 남자성도들을 기준으로 교회의 가정적 모델을 따라 부부가 함께 봉사할 수 있는 체계가 있다. 예컨대 남자성도들 중 장로에 피택된 성도의 경우, 그는 가장으로서 그의 가정을 대표해서 더 큰 가정인 교회를 섬기는 것이기 때문에, 남자성도들의 교회직분에 따라 그 가정의 여자성도에게 권사의 직분을 수여하기도 한다. 이는 교회가 가정으로서 남자성도들이 가장으로서 교회의 여러 활동에 참여할 것을 권하는 취지에서 비롯된 남포교회만의 제도이다. 사실 남포교회의 가정구조의 교회적용모델은 자체적으로 매우 독특한 구성을 형성한다. 일반적인 한국교회와는 달리, 남포교회에 나오는 남자성도들은 매우 자발적으로 교회의 여러 봉사직분에 참여하는데, 이들은 남포교회의 남자성도 중심의 교회구조에 대해 매우 긍정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다. 이들이 교회에서 주도적으로 봉사에 참여하는 것을 통해 가정에서의 질서를 회복하는 것은 물론 남포교회의 가정적 모델의 구조를 형성하는 특징을 드러내기도 한다. 교회는 가정을 건강하게 하고, 가정의 차원에서 교회에 참여하는 것을 통해 교회가 확대된 가정임을 확인하는 특징은 남포교회만의 모습이다. 교회의 봉사구조를 가정모델에 따라 구성함으로서 교회가 갖는 권위와 질서구조를 가정과 평행 되게 함으로서 진정한 의미에서 교회와 가정의 수평적 일치를 만든 것이다. (5) 목회자들의 배양과 교회개척으로의 연결 박영선의 남포교회 목회과정에서 확인할 수 있는 특징 중 교회의 분립개척은 한국교회에서 매우 찾아보기 힘든 경우일 것이다. 남포교회의 설립 이후인 지난 15년 동안 6개의 교회가 분립개척 되었는데, 이는 매우 중요한 박영선의 목회적 특징이다. 박영선은 남포교회의 목회를 통해 같은 성경의 안목으로 함께 사역해온 동료교역자들에게 차례대로 교회개척을 권면하고 지원해왔다. 사실, 이러한 교회 개척을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문제가 선결 되어야 한다. 첫째, 교회개척을 담당할 준비된 교역자가 있어야 한다. * 표 12 : 남포교회 지원 교회개척 현황 순 서 설 립 교 회 이 름 담임목회자 설립연도 설립교회지역 1 전 원 교 회 박 선규 목사 1987년 서울, 양재동 2 남 정 교 회 주 성호 목사 1990년 서울, 문정동 3 평 안 교 회 박 종언 목사 1993년 서울, 대치동 4 남 산 교 회 김 기홍 목사 1995년 경기, 일산 5 분당남포교회 박 동준 목사 1997년 경기, 분당 6 구미남포교회 이 종수 목사 1998년 경기, 분당 7 남 송 교 회 김 명국 목사 1999년 서울, 가락동 새로운 교회를 개척할 교역자는 남포교회에서 박영선의 성경적 안목과 목회를 배우고 말씀사역에 헌 신한 목회자로서 일정기간 남포교회의 목회에 깊이 참여한 경험한 사람이어야 한다. 즉, 남포교회에서 함께 사역하고, 함께 교회론을 나눈 목회동역자로서, 이들이 이제 독립적으로 교회를 목회할 역량을 갖춘 목회자로서 준비가 되었다고 여겨지게 될 때, 비로소 교회개척의 임무를 부여하는 것이다. 표 12에서 보듯, 지난 15년 동안 7개의 교회가 7명의 남포교회 출신 교역자들에 의해 설립되었다. 둘째, 새로운 교회설립을 위해서는 그 교회에 참여하게 될 최초의 설립교인들이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남포교회에서 함께 신앙생활을 해오던 교인들 중 본인의 의사에 따라 새로 설립되는 교회에 참여하고자 하는 성도들을 적극 권장, 격려한다. 이들은 각기 개척되는 교회의 중추적인 일꾼들로 활동하게 된다. 이점에서 남포교회의 성도들은 교회설립에 대해 늘 열려있는 자세로 교회가 하나로서 보편적인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고 있는 모습을 보며 배울 기회를 갖는다고 말할 수 있다. 더구나, 새로 설립되는 교회의 교역자 입장에서도 본교회의 성도들이 함께 교회개척준비에 동참한다고 할 때 여간 힘을 얻는 게 아니다. 셋째, 새로운 교회설립을 위해서는 재정적 후원이 필요하다. 예배당 시설을 확보하고, 여러 가지 부속장치들을 포함하여 일시에 많은 재원이 들어가기도 하고, 또한 담당 교역자의 사례 등을 포함한 인건비지출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남포교회는 모교회로서 새로 설립하는 교회의 여러 경비를 지원할 뿐 아니라, 그 교회가 자립하게 될 때까지 재정적인 지원을 계속한다. 따라서 박영선의 남포교회 목회를 중심으로 지속하는 교회개척운동은 이제 얼마간 정착되어, 남포교회 자체적으로도 "교회설립 준비위원회"가 구성되기까지 한다. 이 준비위원회는 교회개척을 보다 효과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구성된 남포교회 내의 부속기관이다. 한국교회의 현실에 비추어 볼 때, 매우 찾아보기 드문 이 위원회는 남포교회에서 새로운 교회를 설립하여 개척독립 하려고 할 때, 처음부터 실무적인 일을 함께 의논하는데 설립목회자로 선정된 교역자를 도와 교회의 예배당 장소 물색과 재정적인 지원계획과 집행, 그 밖의 교회건물의 시설작업 등을 주도적으로 일한다. 이러한 일을 하는 동안 준비위원회는 새로 개척되는 교회에 참여하고자 하는 성도들을 찾게 되고, 일정한 시기가 되었을 때에는 이들에게 자연스럽게 교회의 준비업무를 이양하는 것이다. 즉, 교회설립 준비위원회는 교회가 개척되는 기간동안 새로운 교회가 잘 준비되도록 돕는 한시적인 기관이다. 그러나 사실 일반적으로 볼 때, 한국교회에서 이러한 형제교회들의 설립과 유기적 관계를 계속 갖는 경우는 매우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대부분의 한국교회가 교회성장을 목적하고 대형교회를 추구하기 때문에, 교회의 분립에 대해서는 관대한 입장을 가지지 못하는 형편이다. 박영선은 이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비판적이다. "교회마다 경쟁을 하고 기업화되고 하는 경향은 교회 자체의 본질이 변질된 느낌을 지울 수 없도록 한다... 우리가 경험하는 대로 오늘날 큰 교회가 자꾸 서는 이유는 예수를 믿는 교인들이 일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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