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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 강해설교의 원리와 실제

에반젤(복음) 2020. 2. 7. 11:17



강해설교의 원리와 실제

 

 

한국교회강해설교연구원

 

로이드존스는 설교는 항상 신학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그의 설교의 첫 번째 근본 원리이며 이 근본 원리는 설교학적인 특성보다는 신학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다. '로이드존스의 설교의 근본적인 차이는 구조나 형태보다 그 메시지의 내용에 있다'라고 머레이가 지적하는 바는 옳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설교의 내용을 결정짓는 그의 해석학적 원리와 방법을 본문과 설교자라는 제목으로 집중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오늘날 로이드존스는 '독보적인 학자'(Marshall,1972:282)로 인정받고 그의 설교는 '미래에 어떤 강해 설교자도 무시할 수 없는"(Bruce,1974:125)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강해 설교자로서 그의 합법적인 위치가 인정되는데 비해서 그의 설교의 해석학적인 평가는 희귀한 현상이다.

 

 

I. 성경 접근법

 

1. 고백적 접근

로이드존스는 성경의 본성을 기본적으로 칼빈주의이고 개혁주의적인 전통의 빛속에서 이해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성경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이 행하신 일에 대한 계시오, 기록이요, 설명입니다. 성경은 죄악된 세계 속에 살아가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목적의 계시입니다. 그 자체가 그러하다고 주장하며 책마다 하나님의 계시입니다(1978 B.82).

 

다른 곳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또한 말합니다.

이 책에 대한 주장은 절대적으로 독특합니다. 세상에서 그와 같은 책은 달리 없습니다. 모든 다른 책들은 인간의 소산물입니다. 그것들은 인간 의지와 이해와 통찰력의 결과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있는 한 그것이 하나님이 말씀하신 기록이라고 주장합니다. 그 메시지에 관해서는 계시를 주장하고 그 메시지가 기록된 방법에 대해서는 영감을 주장합니다(1983A:98). 하지만 하나님의 교회가 오늘날과 같은 것은 약 1840년 이후로 유럽의 신학교에서부터 시작해서 학문과 학식이 계시의 위치를 점령했기 때문이라고 그는 믿는다. 성경은 더 이상 하나님으로부터 온 계시로 여겨지지 않고 현대의 진보된 학문적 지식이 새로운 권위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새로운 운동에 관련해서 특히 금세기에는 교회가 존경하는 경향이 생겼다고 본다. 그 결과 학자가 최후의 권위를 갖게 되었다. 로이드존스의 분석에 따르면 이 전적으로 다른 접근방식이 교회 내에 영적 생명의 통로를 막았다고 본다. 따라서 오늘날 긴급하게 요청되는 것은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라는 믿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영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성령께서 성경의 저자이십니다. 그것은 사람이 기계적으로 기록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이 사람들을 붙잡으셔서 그들을 인도하시고 영감 하셔서 계시를 주시고 오류 없이 그 계시를 기록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 저자이시라는 의미입니다(1977A:327).

다른 경우에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그 교리는 이 사람들이 성령에 의해서 전적 통제되어 잘못으로부터 보호된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진리의 지식에 인도되었을 뿐만 아니라 진리의 표현에도 인도함을 받았습니다. 그들 자신의 개성이 충분히 발휘되었지만 성령에 의해서 통제되었기에 궁극적인 결과가 보장됩니다(1983A:99).

그래서 그 기록 자체가 영감된 것이다. 그리하여 성경은 단순한 인간적 기록이나 말이 아니라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숨결을 불어넣으신 말씀이요 사실 하나님 자신의 말씀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된 말씀이기 때문에 우리의 설교나 삶에 있어서, 교리나 세계관에 있어서 어떤 측면에서든지 권위를 가진다.

 

나아가서 다른 부가적인 계시가 필요하지 않다. "모든 것은 주어졌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모두 다 얻을 수 있습니다"(1981:189). 성경은 신앙과 행위의 모든 문제에 있어서 충족하다. 동시에 그들이 기록한 것에는 실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성령에 의해서 인도되었기 때문이다.

로이드존스는 오늘날 교회의 상황의 주요 요인은 성경의 신적.완전적 영감에 대한 신념과 신앙과 행위의 모든 문제에 있어서 궁극적인 권위에 대한 믿음을 지난 세기에 버렸기 때문이라고 다시금 지적한다.

불행히도 기독교회 안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성경은 더 이상 충족하지 않다. 현대 학자들의 (1981E:186)고 사실상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점차적으로 복음주의 교계 내에서도 소위 학식에 대해서 상당한 양보를 하고 있다. 그럴 때 "문제가 된 것은 성경의 영감과 무오설에 대한 교리를 상실하는 것이다"(Henry,1980:160).

 

오늘날 상황에 대한 그의 분석과 함께 성경의 성격에 대한 로이드존스의 고백적인 접근의 참된 가치를 바로 인식해야만 한다. 불트만 이후에 전제 없는 해석은 불가능하며 동시에 소망스런 것도 아니라는 것은 잘 알려진바 있다. 전제는 한 사람의 해석 과정에 있어서 언제나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전제는 전 이해가 다 타당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성실한 해석은 성경에 일치한 전 이해로 접근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앞에서 보여준 바와 같이 로이드존스의 성경에 관한 전 이해는 개혁주의 고백과 일치하는 것이다.

성경의 신적 성격에 대한 그의 고백적 접근은 성경에 대한 경외적인 접근으로 인도하는 것은 명백한 일이다.

 

2. 경이적인 접근

로이드존스는 성경에 대한 바른 접근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성경은 독특하기 때문에,"다른 어떤 책을 접근하듯이 접근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무릎꿇지 않고 성경을 읽어서는 안됩니다"(1981B:22) 한 사람의 성경에 접근하는 태도, 성경을 읽는 마음 가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음을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어떤 부분을 접근해도 "정신"을 가져야만 한다. 두려움과 떨림, 겸손함이 없이는 성경을 풀기에 전혀 적합하지 않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성경에 접근할 때는 상당한 주의와 듣고 배우려는 마음, 말씀을 받으려는 경건한 기대감을 가져야만 한다.

계시란 그 정의부터 인간의 지성을 넘어선 것이요. 성령의 도움 없는 이성으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어떤 것을 의미한다."여기에는 자연적 이성을 가지고 나아갈 수 없습니다."(1983A:174) 성령만이 인간으로 이 계시를 이해토록 한다.

 

로이즈존스의 외경적 접근을 최소한 두 가지 실제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약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진지하게 대한다면 우리는 연구와 준비와 기도가 절실히 필요함을 알게 될 것입니다(1981C:193).

기독교의 초기부터 이런 호소는 듣기 원하는 자에게 주어져 왔다. 아퀴나스는 어려운 성경구절을 만나면 금식하며 기도하곤 했다. 루터는 열심히 기도하면 반 이상 연구한 것으로 생각했다. 칼빈은 기도야말로 하나님의 무진장한 부요의 샘물을 성도들의 눈앞에 끌어올리는 두레박이라고 믿었다. 핑크는 바로 이 점이 많은 사람이 실패하는 것이라고 경고한다. 판 데르 발트는 동일한 경고를 한다. "전에 성경 기자를 인도하셨던 동일한 성령께서 오늘도 여전히 성경해석자들의 기도의 응답으로 그들을 인도하신다"(Van der Walt,Tj.1973:17,첨가된 강조).

 

로이드존스가 성령의 조명을 위한 기도를 호소하는 것은 열심 있는 연구를 대체하도록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세심한 준비와 성령의 기름부음은 양자 택일사항이 아니라 상호보완 사항입니다"(1982C:305).

최근 성경 해석학의 임무는 더 이상 본문 설명에 머물지 않고 본문의 신빙성에 대한 판단과 본문에 표현된 견해가 옳은지를 판단하는데 가지 나아가고 있는 실정이다(Gaffin,1969:133). 이러한 경향에 반대해서 로이드존스는 "우리는 성령의 판단아래 있어야지 성경을 판단하는 위치에 있어서는 안된다"(1981B:31)고 주장한다.

 

로이드존스는 현대 복음주의의 맹점이 여기에 있다고 본다.

제가 보기에는 현대 복음주의의 허점은 경건 문제에 있습니다. 한때 영성으로 불리우던 것을 상실한데 있습니다. 우리 복음주의는 너무 젠체하고 자만하고 너무 건강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의 손아래 겸비해진다는 생각은 사라져 버렸습니다. 우리는 거짓 지성주의의 영역에 너무 깊이 빠져있습니다(Henry, 1980:161).

우리가 오늘날 메마른 많은 강단들과 대조적인 그의 설교를 생각하면, 그 방대한 양과 그 질을 생각한다면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충분한 이유가 있다. 그의 설교는 이런 경외적 접근으로부터 나온 것임을 망각해서는 안된다.

 

3. 구원적 접근

로이드존스는 성경에 접근할 때마다 성경의 기본 목적을 염두에 두고 있다. 성경의 의도는 인간에게 구원의 지식과 경건한 삶의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는데 있다(딤후 3:15,16). 하지만 이것은 성경을 개인 구원의 교과서라는 좁은 의미로 생각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성경의 구원의 목적을 염두에 두면 성경 연구에 있어서 몇 가지 실제적인 유익을 가져다준다.

(1) 해석자로 하여금 성경의 사소한 사항에 빠져서 시간을 보내는 위험에서부터 보다 중요한 메시지를 파악하도록 도와준다.

(2) 한 구절이나 한 단어의 하나의 가능한 해석만 취하도록 해석자에게 강요할 필요가 없다.

(3) 성경을 단어 위주보다 교리위주로 연구하도록 해석자를 도와준다.

마지막으로 이 항에서 다루어지는 문제는 어떤 의미에서 자명한 것이다. 하지만 너무 자주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서 실패한다. 그리하여 성경의 구원적인 혹은 실제적인 목적은 개혁주의 학자들에 의해 강조되고 있지만 동시에 설교자들마다 그 실제적인 해석 과정에 있어서 귀담아 들어야만 할 것이다.

로이드존스의 성경 전반의 방식에 관한 우리의 연구로부터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성경에 대한 첫 접근 방법이 정당하지 않으면 어떤 원리와 방법도 설교자를 하나님의 말씀의 현존적 이해라는 해석적 목표에 도달하는데 도울 수 없다.

 

로이드존스에 따르면 해석학의 분수령에 속한 문제는 두 접근 방식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다. 성경을 종교적인 통찰력을 가진 사람들의 전집으로 보고 비평적으로 접근하는 방식과 인간을 통해서 인간에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의 기록으로 성경을 보고 경외심을 갖고 접근하는 방식이다. 그 결단으로부터 설교자는 어떤 해석 원리와 방법을 선택할 것인지 결정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어떤 해석도 전이해 없이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성경에 관한 해석자의 신념은 그의 해석 과정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필수적인 것을 로이드존스는 분명해 했다.

 

II. 본문 접근방법

 

1. 만족할만한 이해의 필요성

설교자는 반드시 성경의 해석자이다. 그의 임무는 엄밀히 말해서 두 과정을 포함한다. 그는 먼저 본문이 본래적인 청중에게 무엇을 의미했는지를 파악해야만 한다. 다음 그 본문이 신자들이 실존적 현재에 대해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해해야만 한다.

대개 첫 과정을 해석9exegesis), 두번째 과정을 해설(exposition) 이라고 부른다. 전자는 의미에, 후자는 의의에 관심을 갖는다. 하지만 촤일즈(Childs,1970:141)의 말을 빌리면 "본문이 의미했던 것과 그것이 의미하는바는 분리할 수 없이 연결되어 있고 둘 다 성경 해석학의 임무에 속한다." 불트만과 더불어 대부분의 현대 학자들은 원 저자의 정황과 현대 독자의 정황 사이의 차이를 왜 오늘날 해석이 긴급히 필요한지에 대한 기본 이유에 제시한다. 마샬이(Marshall, 1980:9) 지적한 바와 같이 그들의 일반적인 경향은 두 정황 사이의 차이를 지나치게 강조하고 두 정황사이에 있는 동질적 요소를 과소평가한다.

 

로이드존스는 두 정황의 문화적, 역사적인 차이에 의해서 해석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불변하는 영적 정황의 차이 때문이라고 본다. 물론 우리가 20세기에 살기에 문화적 언어적 차이가 있고 그것으로 인해 해석작업이 더 복잡해 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로이드존스는 두 정황의 차이를 지나치게 강조하므로 진리를 왜곡시키지 않고 있다. 오히려 그는 해석 작업의 출발점을 바른 지평에 두도록 돕고 있다.

로이드존스는 설교자가 설교하기 전에 본문에 대한 만족할만한 이해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만족할만한 이해'라고 할 때 그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문제야말로 현대해석학에서 가장 활발히 논의되는 주제의 하나이다. 로이드존스는 이 문제에 대해서 현학적인 대답을 직접 하지 않고 있지만 그의 설교를 통해서 실제적인 대답의 일말을 제시한다.

 

로이드존스에게 있어서 진리의 지적인 이해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보았으나 만족할만한 이해는 진리에 대한 지적인 동의 이상이다. 그에게 있어서 만족할만한 이해라고 하는 것은 진리에 대한 이해와 동시에 표용을 의미한다. 본문의 진리를 참으로 이해한다면 거기에 상응하는 열정이 있어야 한다.'진리는 열정을 산출해야 합니다. 그리고 진정한 신앙고백에는 감정과 느낌이 있습니다"(1980:251). '진리 이해는 나의 열정, 나의 관심, 나의 사랑, 나의 전 존재가 거기에 관련해야 합니다. 나는 그 진리를 내 모든 것으로 사모해야만 합니다"(1978B:193). 그러므로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신자로서 우리는 바울의 서신을 감동하지 않고 읽을 수 없습니다. 감정이 우리를 휩싸고 사로잡아야 합니다. 그러할 때 우리가 서신서에 나타난 진리들을 아는지 판별할 수 있습니다"(1978B:288).

 

요약하면 로이드존스에게 있어서 진리의 이해와 포용은 나눌 수 없는 전체 -하나님의 말씀과 만족할만한 이해-의 두 측면이다. 이렇게 해석의 목표를 설정하는데 있어서 로이드존스는 그의 스승인 조나단 에드워즈와 일치한다. 조나단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본문의 의미는 그 객관적인 내용과 해석자의 개인적인 삶을 위한 의의라는 두 면으로 구성된다(Edwards,1979A:237)고 에드워즈는 말한다. 그러나 이 거룩한 열정은 '바르게 조명된 이성과 영적으로 하나님에 속한 것들을 이해하는데서부터 생겨난다"(Edwards,1979A:281). 그에게 있어서 해석의 목표는 정당하게 조명된 이성으로 말미암아 이러한 거룩한 열정을 획득하는 것이다.(Anon,1977:361).

이 면에 이어서 칼빈 역시 로이드존스와 정확한 동일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독특한 통찰인 경건의 신학(theologia pietatis)이란 해석학적 방법은 자주 망각되고 있다. 그 결과로 진리와 실천,추상적이고 이론적인 인식과 구체적인 적용 사이에 괴리를 만들고 있다. 하지만 칼빈의 강요, 특히 2장에서는 그와 같은 분리를 거부하고 있다.

 

우리의 삶과 아무런 관계를 맺지 않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무슨 소용이 있는가? 우리의 지식은 우리로 하여금 먼저 두려움과 경건을 가르쳐야 하고 다음으로 그 지식을 우리의 안내자로, 교사로 삼아 모든 좋은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구하는 것을 배우고, 얻은 후에는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께 고마움을 표현하도록 배워야 한다(Calvin 1967A:39-40).

참된 개혁주의 해석학에 있어서 해석의 목표는 언제나 여기에 있다. 진리의 만족할만한 이해는 해석자의 전 인격-먼저 그의 지성을, 그리고 그의 감정을 마지막으로 그의 의지를 - 에 영향을 미쳐야 한다. 진리의 바른 이해는 경외심과 두려움, 기쁨과 찬양 속에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인도해야 한다. 로이드존스에 따르면 해석자의 가슴 깊숙한 속에 살아 계신 하나님을 예배토록 하기까지는 본문의 진리가 참으로 이해된 것이 아니라고 본다. 주어진 본문에 대한 만족할만한 해석을 위해 지금껏 생각해온 것은 본문의 바른 해석을 위한 필수적 전제 조건이지만 그 자책 바른 해석을 창출하는 것은 아니다. 만족할만한 이해라는 마지막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 해석의 실제적인 과정이 요구된다. 로이드존스에 의하면 이 실제해석 과정에서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것이 하나 있다. 해석자는 반드시 본문에 정직해야 한다.

 

바른 해석을 하는데 가장 흔한 실패의 원인 중 하나는 자기 이론을 가지고 성경에 접근하여 그것을 본문에 억지로 갖다 맞추는 것이다. 그러므로 해석자는 최선을 다해 공정함과 열린 마음으로 성경에 대하여만 한다. 마샬은 (Marshall, 1972:282) 로이드즌스 자신이 놀라우리만큼 정직한 해석자인 것을 인정하고 있다. 로이드존스는 문제를 어물거리거나 회피하지 않고 정직하게 모두를 대하고 있다. "성경의 어떤 문제는 우리가 끝까지 알 수 없는 것도 있습니다"(1983A:216)라고 로이드존스는 정직하게 시인한다. 비록 입장을 달리하기는 주저하면서도 필요한 경우, 본문에 대한 정직성이 그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강요할 때는 과거의 유명한 해석자들과 입장을 달리하는 용기를 갖고 있다. 어떤 때는 칼빈, 카이퍼, 하지 등과 입장을 달리 하기도 한다. 그의 정직성의 결과로 전통에 덜 메인 보다 독창적인 해석이 가능했음을 알아챌 수 있다.

 

2. 분석학적 접근

본문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으로는 본문을 분석하는 것보다 더 유익한 방법은 없다고 로이드존스는 믿는다. 왜냐하면 예컨대 바울의 편지들에는 항상 특정구조가 내재하고 있으며 팔복에도 특성 순서가 있기 때문이다. 문장마다 우연히 거기에 배치된 것이 아니고 영적, 논리적 귀결에 따라서 성령의 영감으로 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의 분석적 접근의 목적은 본문에 내재한 특정한 구조를 발견하는 것이며 거기에 따라 본질적인 메시지를 파악하는 것이다. 하지만 본문의 종속적인 위치에 있는 한 타당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객관적이고 지적인 의미로서 분석 자체에만 관심을 갖는다면 이는 잘못된 것이다.

로이드존스에게 있어서 강해는 반드시 자연적이어야 하고 인위적이어서는 안되며 본문에서부터 나온 것이어야 함은 분명하다. 인위적인 무리한 단계까지 로이드존스는 개략적인 구조에 대한 관찰로 나아간다.

로이드존스는 설교마다 대개 본문 분석을 하고 있다. 그의 설교에서 기능은 본문에 대한 배경과 해석적 정황을 제공하는 것이다. 분해하는 과정에 있어서 로이드존스는 일반적인 분석을 개별적인 분석보다 먼저 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권하고 있다. 첫째로, 전체에 대한 일반적인 분석을 하고, 그 다음 문단에 대한 개략적인 분석을 한 다음 마지막으로 세부적인 부분에 대한 세밀한 분석을 해야 한다.

 

3. 문법적 접근

로이드존스는 성경해석에 있어서 가장 유서 깊은 방법인 역사적, 문법적, 해석 방법을 충분히 활용한다. 이 방법은 본문을 해석할 때 그 역사적 기원과 문법적 구조를 살피는 것이다.

문법적 접근의 목표는 문법의 규칙에 따라서 의미를 결정하는 것이다. 로이드존스에게는 문법적인 의미란 단어나 구절이나 문장의 단순하고 평범하고 일상적이고 정상적이고 문자적인 뜻을 살피는 것이다. 그는 문자의 의미가 뒷받침되지 않는 의미 부여를 하는 어떤 접근 방식도 그 타당성을 부인한다.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은 원 저자가 의도한 의미를 찾아야 하며 평범하고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 그가 실패로 어떻게 문법적인 접근을 하는지 다음과 같은 측면을 살펴보자.

 

1) 원본과 역본의 고려

그의 문법적 접근은 첫째로 사본에 대한 고려를 포함한다. 사본의 증거는 대개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나 때로는 최선의 사본도 어떤 말들은 포함되어있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만약 다른 곳에서 분명히 발견되는 그 말들이 나타내는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것이 제일 좋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그의 신학적인 입장을 본문으로 읽어 들어간 것이라고 평가할 수밖에 없다.

원본에 대한 고려와 함께 그는 여러 가지 번역본들을 살펴본다. 강단에서는 흠정역 성경을 사용하지만 연구를 할 때는 여러 가지 다른 번역들을 활용한다(70인역,the Revised Version,the Revised Standard Version, the Engligh Revised Version,the New English Bible,뿐만 아니라 다음과 같은 개인역들도 사용한다.The Scofield Bible Moffat,J.N.Darby,J.B.Phillips 등) 원문의 보다 나은 번역을 위해서 이런 역본들을 활용하며 보다 분명한 의미를 밝히는데 사용한다. 때로는 역본에서 생각된 단어들과 부정확한 번역들을 지적하기도 한다.

로이드존스는 새 번역의 가치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 자신이 새 번역들을 사용하지만, 주의해서 그리고 비판적으로 사용한다. 어떤 번역은 이미 번역자들의 신학적 편견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번역이라기 보다는 해석이 되고 말았다고 지적한다.

 

2) 문법과 기초 사항 고려

로이드존스는 헬라어의 뉘앙스를 알고 사용하고 있다. 그는 끊임없이 헬라어의 성, 수, 격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자주 동사의 시제나 태에 대해서 관심을 쏟는다. 동시에 이런 면만 지나치게 주의하는 것도 위험하다고 바로 지적하고 있다.

원어 자신의 가치에 대란 로이드존스의 평가를 들어볼 만하다. 그는 원어 지식은 중요하지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원어 지식 아니라고 생각한다. "원어 지식은 정확성을 위해서는 매우 커다란 가치가 있습니다. 그것이 모두이지 그 이상은 아닙니다. 원어 지식은 정확성을 보장하지는 않지만 증진시킵니다."(첨가된 강조,1982C:116).

 

3) 어휘론적 측면의 고려

개별 단어에 대한 정당한 이해를 하기 위해서 로이드존스는 어휘 의미론(lexical semantics)을 활용한다. 그의 설교에는 때때로 안트(andt)의 깅그리히(Gingrich)의 헬라어영어 사전이나 "권위 있는 그림 - 쎄이어(Grimm-Thayer)사전"으로부터 헬라어 단어의 실제적인 어원적 의미의 정의를 인용하기도 한다.

통치론적 언어학(diachrinic Lingusitics)에 호소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지에 대해 의심을 할지 모른다. 특히 1961년 제임스 바아(james Barr)의 획기적인 저서인 [성경 언어의 의미론]의 발간 이후에 의미론에서 어원을 연구하는 것이 타당한 방법인지 의문을 가질 것이다. 그러나 바아(Barr)든지 소쉬로(Ferdinand de Saussure)든지 아무도 통시론적 언어학을 부당한 것으로 배제하지 않았음을 기억하는 것이 필요하다. 로이드존스의 로마서 3장25절 "화목"이라는 제목의 설교를 보면 라더미헤르(Radmacher,1971:24)가 지적하듯이 단순히 한 단어의 가능한 의미를 찾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전체 가르침을 살피므로 정당한 통시론적 연구의 좋은 예를 발견할 수 있다.

헬라어 단어의 의미를 결정하기 위해서 로이드존스는 통시론적 언어학뿐만 아니라 공시론적 언어학(synchronic liguistics)도 활용하고 있다. 물론 그는 이와 같은 전문 용어들을 사용하고 있지 않지만 그의 설교를 보면 이와 같은 활용을 여러 곳에서 하고 있다. "신약 성경에 나오는 동일한 단어의 활용의 예를 살펴봄으로서 이 말을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1978B:192)."신약의 빛 속에서 이 말은.. 그러한 의미와 함축적인 뜻으로 대개 사용되고 있습니다."(1980:200).

 

4) 구문론적 측면

로이드존스는 '연결의 문제' 즉 접속사의 특별한 주의를 하고 있다. 그의 설교에는 여러 가지 접속사의 기능들을 계속적으로 설명한다. 그의 해석 실제를 살펴보면 접속사는 때로 중요한 이해의 열쇠로서의 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접속사는 단어나 문장이나 문단에 포함된 사상들을 연결시켜주기 때문이다. 그의 접속사에 대한 고려 즉 구문론적 측면에 대한 고려는 해석학에 있어서 합법적이고 유용하다 왜냐하면 접속사는 그들이 연결시키는 사상들의 관계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5) 형태론적 측면

로이드존스는 형태론적 문제에 대한 그의 관심을 바울의 논증 형태를 설명하면서 나타내고 있다.

영감에 대한 우리의 견해는 다른 저자들이 갖는 문제의 차이를 허용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기계적인 구술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저자들의 지성과 생각, 문제와 그 모든 것들을 성령께서 절대적으로 통제하는 것을 믿습니다. 성령께서 그들을 완전히 통제하셔서 오류로부터 벗어나게 하십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그들에게 기계적으로 구술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문체의 차이라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점과 관련해서 언급하고 싶은 것은 저자의 문체의 차이를 특성이 남아있지 않은 번역은 좋지 번역이 아닙니다(1975A:159). 문체에 대한 관심뿐만 아니라 헬라어 어순을 중요하게 파악하고 있다.

 

4. 문맥적 접근

로이드존스는 문맥적 접근을 '해석의 척도'라고 생각한다. 그는 그의 책 설교와 설교자들에서 다음과 같은 권면을 한다. "여러분은 본문을 그 문맥에서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본문에 정직해야만 합니다"(1982C:201).비록 거기에서 이 문제를 '절대적인 법칙'으로 생각한다. 문맥이라고 할 때 나는 역사적 정황(the historical context) 이고 다른 하나는 언어적 문맥(the linguistic context)이다. 그러나 이 둘은 서로 범위가 겹칠 수밖에 없다.

 

1) 역사적 정황

(1) 일반적 역사적 정황

로이드존스는 어떤 단어나 구절을 설명할 때 원 청중의 사고세계라는 정황 속에서 한다. 청중의 사고 세계라는 정황 뿐 아니라 그들의 생활의 정황으로부터 설명한다.

(2) 특수 역사적 정황

본문이 형성된 역사적 정황에 대한 그의 고려는 저자와 원 청중의 상황에 대한 지식을 요구한다. 로이드존스는 그의 산상보훈 설교에서 첫 설교를 산상보훈 설교에서 첫 설교를 산상보훈 전체에 배경과 서론을 제공하는데 할애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다른 설교마다 로이드존스는 본문을 그 특수한 역사적 정황에서 설명한다.

동일한 것을 신약 서신서를 고려할 때에도 찾아 볼 수 있다. 로이드존스는 가끔 신약 서신의 가르침이 그 메시지가 누구에게 주어진 것인지를 살펴보는데 실패하므로 잘못 해석된다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인다.

 

2) 언어적 문맥

성경의 상이한 장르를 인정하는 것이 언어적 문맥에 포함되는 것은 당연하다. 로이드존스는 이러한 것에 주의를 기울여 비유라든지, 예언이라든지, 시라든지 하는 문학적인 장르를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로이드존스가 문맥을 언급할 때는 특정한 본문이 나타나는 언어적인 문맥을 주로 의미한다. 여기서는 최소한 네 가지 범위가 다른 언어적 문맥에 그가 주의를 기울이는 것을 살펴보겠다.

(1) 근접한 문맥

(2) 주제별 문맥

때로는 및 구절로서 하나의 주제별 문맥이 형성되기도 하지만(마5:3-10)

대개는 한 장과 일치한다(마6:7). 한문단 속에 있는 중심주체에 의한 해석은 로이드존스의 특징에 속한다.

(3) 특정저서 및 저자 단위의 문맥

로이드존스는 즐겨 특정 저서나 저자 단위의 문맥을 해석학적인 배경으로서 취급한다. 그의 산상설교집에서 마태복음 5장 3-7절은 하나의 단일한 해석학적 단위로서 취급한다. 로이드존스는 자주 산상보훈을 세세한 부분을 다루기 전에 전체로서 고찰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로이드존스의 해석학의 원리는 뒤에 다시 논의될 것이다.

로마서와 에베소에 대한 그의 설교에서는 동일한 저자의 평행 구절이나 전정경적 문맥을 살피기 전에 특정한 저서 단위의 문맥을 해석학적 단위로서 먼저 살피고 있다. 달리 말해 그는 가까운 문맥에서부터 먼 문맥으로 살피고 있다.

(4) 전 정경적 문맥

최종적이고도 가장 광범위한 언어적 문맥은 전 정경과 그 범위가 일치한다. 그러므로 그는 다루고 있는 본문을 설명하기 위해서 성경의 다른 부분을 자유롭게 활용한다. 그가 전 정경을 언어적 문맥으로 취급하는 것은 신앙의 유비와 성경의 유비에 대한 그의 확신에서부터 나온다.

그리하여 로이드존스는 성경은 반드시 다른 성경으로 풀어야 하고 또 성경은 반드시 성경으로 비교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3) 근접 문맥의 기능

로이드존스는 "당면한 여러분 본문의 정확한 의미를 문맥이 가끔 결정합니다. "(1976A:11)라고 분명히 말한다. 만약 한 본문을 해석하는데 두 가지 선택이 있다면 로이드존스는 근접한 문맥에 의해서 근접한 문맥을 사용하기도 한다. 때로는 어떤 헬라어 단어가 순수히 언어적인 입장에서 두 경우로 번역이 가능할 때 택일하기 위해 근접한 문맥을 활용한다. 그리고 만약 한 단어가 순수히 언어적인 입장에서 두 경우로 번역이 가능할 때 택일하기 위해 근접한 문맥을 활용한다. 그리고 만약 한 단어가 성경 여러 곳에서 여러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을 때 그는 생각하기를 근접한 문맥이 그 의미의 정확한 측면을 보여 준다고 믿는다.

 

예외가 있지만 그는 대개는 동일한 문맥에서 동일한 단어에 동일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는다. 때로는 "성경의 다른 부분"에 나오는 동일한 단어라도 '다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확실한 증거가 없을 때는"(1979A:70)동일한 의미를 부여한다. 많은 잘못된 해석은 문맥을 무시하고 단어나 구절에만 집착한 결과라고 로이드존스는 주장한다. 그에게 있어서 한 구절의 의미는 언제나 근접한 문맥에 의해서 결정된다.

한 구절의 근접한 문맥은 바른 이해를 하는데 결정적이라는 것은 해석학의 공리이다. 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문맥을 살피는 것은 바로 성경적 해석에 있어서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본문의 의미에 대한 로이드존스의 근본적인 접근 방식에 관한 우리의 연구로부터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로이드존스는 결코 본문해석의 기본 방법들을 어느 것도 하나 소홀히 하지 않는다. 기실 그는 그 방식들에 성실하게 집착하고 있다. 그는 본문 해석을 하기 위해 먼저 본문을 분석적으로 접근하며 본문의 문법적이고 문맥적인 의미에 우선권을 강조한다.

그러나 로이드존스의 강점은 기본적인 방법들을 나열하는데 있지 않고 설교자로서 그것을 자기 설교에 있어서 보여주었다는데 있다. 로이드존스는 해석에 있어서 기본적인 단계를 신실하게 따랐기에 오늘 우리가 아는 설교자가 되었다.

 

 

III. 본문 해설법

 

 1. 영적인 접근

앞에서 우리의 목표는 본문의 의미에 대한 로이드존스의 특징적인 접근을 지적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엄밀히 말하면 그의 주해의 방법에 관한 것이다. 지금 여기서 우리의 임무는 본문이 오늘날 사람들에게 주는 의의에 대한 그의 특징적인 접근 방법을 살피는 것이다.

영적인 접근이라고 부를 때는 그 의미를 결정짓는 방법에 관한 측면을 보다. 강조하는 것으로 영적 직관이나 영적 이해를 통해서 의미를 파악한다는 뜻이다. 또 교리적 접근이라고 부를 때는 어떻게 그것을 그리스도안의 삶에 적용하느냐 하는 규범을 강조한다.

 

1) 성령의 사역으로 말미암는 영적 의미

본문의 의의에 관련한 로이드존스의 첫 째 특징은 영적인 접근이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정확성이 먼저 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을 영적 의미입니다. 특정 단어에 대한 여러분의 이해에 정확성을 결정짓는 것은 궁극적으로 학식이 아니고 그 구절의 영적 의미입니다. 권위 있는 학자들이 대개는, 어쩌면 일반적으로 서로 완전히 불일치하는 것을 여러분들은 발견할 것입니다. 의미는 궁극적으로 정확한 학문에 의해서라기 보다는 영적인 직관, 영적 이해력에 의해서 결정되어지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사도 요한이 요한일서 2장 20,27절에서 말하는 기름부음입니다(1982C:201). 로이드존스는 성령의 사역이 성경의 이해에 절대적으로 필수적임을 분명히 한다.

 

동일하게 성령만이 이 말씀을 '해석'하게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성령님의 사역입니다. 이 말씀과 관련된 모든 것은 처음부터 끝가지 성령의 사역의 결과입니다. 한 사람이 자연적인 의미에서 얼마나 탁월하든지 그 능력은 성경을 해석하는데 그를 도와주지 않습니다. 그가 천재일 수 있고 학자일 수 있습니다만 이 일에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진리는 '영적으로 분별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영적으로만 해석되어야만 합니다. 성령 하나님 자신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그리고 어떤 사람도 우리를 도와 줄 수 없습니다(1977A:327-328).

사람들은 성령의 조명에 의해서 규정한 진리의 어떤 것을 이해하고 섭리할 수 있으며 그것은 문법의 영역이나 지적인 영민함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으로부터 들을 준비를 해야만 하고 가르침을 받으려고 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2) 성령의 조명하시는 사역과 기도

본문의 영적 이해를 위해서 로이드존스는 많은 시간을 기도와 묵상에 보내야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에베소서 1장 18절의 설교에서 바울이 그리스도인들을 위해서 드리고 있는 기도라는 사실로부터 다음과 같은 원리를 유추해 낸다.

첫째로, 신자들은 이 세상에 사는 한 성령의 조명하시는 사역이 항상 필요하다. 그가 유추한 두 번째의 원리는 영적 지식은 분명히 점진적이라는 것이다. 세 번째 원리는 우리의 이해의 눈을 밝혀주시도록 계속적으로 기도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3) 영적 의미와 성령의 동질성

로이드존스는 계시는 단번에 주어진 것이므로 성경 안에 주어져 있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오늘날 설교자에게 있어서 필요한 것은 성령의 조명이라는 것을 분명히 한다. 하지만 이 조명은 해석자의 영성의 정도에 따라서 점진적으로 일어나는 것으로 본다.

그러므로 해석자 편에 있어서 성령의 동질성은 주어진 본문의 영적 의미를 보다 잘 이해하는데 있어서 결정적이라는 사실을 말할 수 있다. 본문을 기록하게 한 동일한 성령을 소유하지 않는 한 해석자는 결코 본문의 영적 의미를 이해할 수 없다. "성경을 이해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입니다"(1976C:79)라고 그는 도전한다.

오늘날 해석학에 관한 너무 많은 논의들이 기교의 문제로 전락되었기에 로이드존스의 영적인 접근법은 우리에게 귀중한 것을 생각하게 한다. 이전 세대와 비교해 볼 때에 우리의 문제는 해석에 있어서 기교의 부족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영적으로 충분히 성숙되어 있지 않는 것이 본문을 올바로 해석하는데 실패하게 하는 요인이다.

 

2. 교리적 접근

 

1) 주해적 연구의 목표

로이드존스에게 있어서 주해적 연구의 목적은 교리의 도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문자에 관한 단순한 지식"(1978B:106)에 만족하거나 '주해의 기계적 부분'(1983A:64)에 머물거나 하는 위험을 피하고 '본문의 원리와 교리를 발견하는" (1978B:106-107)일에 실패하지 안도록 조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로이드존스는 교리라는 용어를 '주제','진리'혹은 '메시지'라는 말과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한다.

주해적 접근을 한 다음에 로이드존스는 교리에 강조를 둔다. 이 방법은 설교자에게 본문을 향해 "하나님께서 본문 속에 자신에 관해서 무엇을 계시하시는가"(Van der Walt JJ.1985B:60) 하는 질문을 던지는 판 데르 발트의 하나님의 자아 계시를 강조하는 것과 조화를 이룬다. 이 교리적인 접근 문제에 대해서는 로이드존스는 청교도 설교 방식과 사도 바울을 추종하고 있다. 이 교리적인 접근은 많은 현대학자들에 의해서 해석학의 적법한 절차로서 추천된다.

 

2) 본문의 핵심

로이드존스의 교리적 접근의 마지막 절차는 특정 본문의 주된 핵심을 발간하는 것이다. '아무 것도 본문의 주된 핵심을 붙잡도록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것이 드러나게 하십시오"(1982C:203)라고 말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계속하고 있다.

본문의 주된 핵심, 주된 메시지에 우리가 도달해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지나치게 강조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여러분을 인도하게 하시고 그것이 여러분을 가르치게 하십시오. 본문의 핵심에 귀를 기울이고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질문하면 그것이 여러분의 설교에 부담이 되게 하십시오(1982C:204).

주어진 본문에 여러 가지 교리가 있을 수 있지만 로이드존스는 항상 어느 것이 본문의 가장 핵심 메시지인지를 묻는다. 만약 본문의 주된 핵심을 발간하면 그의 해석학적 임무는 사실상 완성되는 것으로 간주한다.

 

3) 질문하는 기술

본문의 주된 핵심에 도달하기 위해서 설교자는 자기 본문에 질문하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로이드존스는 설교를 준비하는 전 과정에 있어서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고 단언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설득한다.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십시오. 왜 그는 그렇게 말했을까요? 왜 그는 이런 특정한 방법으로 그것을 말했을까요? 그가 노리는 것은 무엇입니까? 무엇이 그의 목적입니까? 설교자가 배워야 할 기본적인 것 가운데 하나는 그의 본문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본문이 여러분에게 말하고 여러분 역시 본문에게 말해야만 합니다. 본문을 향해서 질문을 던지십시오. 이것은 가장 유익하고 흥미진진한 절차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절대로 본문을 강요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에게 떠오른 생각이 여러분은 만족시키고 감격시켜 이 특성 본문에 억지로 갖다 맞추는 일이라면 그런 짓은 하지 마십시오. 본문을 왜곡시키기보다는 차라리 좋은 설교를 희생시키십시오 (1982C:201-203).

 

질문은 던지는 기술은 성경적인 해석학의 전통에 있어서 귀하게 여겨져 왔다. 본문 연구에 있어서 이 방법은 좋은 결실을 가져다주는 묵상 방법이다. 해석학적 순환이란 개념에 대한 최근의 강조점은 이 전통 있는 기술과 이질적인 것은 아니다. 티셀턴(thiselton) 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해석학적 과정에 있어서 '순화(써클)'은 해석자가 그의 예비적인 질문을 본문에 던질 때 시작한다. 그러나 그의 질문이 최선의 것이 아닐 수 없기 때문에 본문의 주제 대한 그의 이해가 처음에는 한정될 수도 있고 예비적일 수도 있고 때로는 왜곡시킬 가능성조차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은 다시 해석자에게 되돌려서 말해준다. 그것이 해석자를 해석하기 시작하고 그 자신의 상황과 질문에 대해서 빛을 비춰준다. 그의 처음 질문들을 본문 자체의 빛에 의해서 개정되고 보다 더 적절한 질문을 하게 되어 본문 자체는 보다 분명히 알아들을 수 있도록 이제 말하게 된다. 이 과정은 계속되어서 해석자가 점차적으로 본문의 보다 깊은 이해를 하게 된다(Thiselton,1977:316).

 

3. 검증 절차

로이드존스는 검증 절차에 두단계에서 주석을 사용한다. 첫째는 해석 과정에 있어서 - 본문에 나오는 단어의 정확한 의미와 본문의 주된 핵심을 발견하는데 주석이나 사전을 사용해서 자신의 이해를 확증한다. 둘째로 설교를 구성한 다음 정확성을 위해서 한 번 더 주석에 돌아가서 그가 한 것을 점검한다.

로이드존스는 문법적이나 문맥상으로 아니면 신학 전통상 두 가지 이상 해석이 가능할 때 기독교인의 경험을 타당한 시금석으로 사용한다. 로이드존스는 그리스도인의 경험을 기본적인 시금석으로 사용하지 않고 부가적으로 시금석으로 사용한다. 달리 말해서 그는 이것을 확인하는 시험으로 사용한다. 만약 특정해석이 그리스도인의 경험과 일치하면 올바른 것으로 그 해석을 간주한다는 것이다.

 

4. 그의 특정적인 해석 원리

1) 성경은 성경으로 풀어야 한다.

지금껏 로이드존스의 해석의 기본 방법을 연구해 왔다. 이 마지막 부분의 임무는 그의 특징적인 해석 원리를 그려내는 것이다. 최소한 두 가지 특징적인 원리를 추적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원리들간의 관계는 상호 배타적이라기 보다는 상호 연속내지 상호 중복적이다. 양 원리는 모두 근본적으로는 로이드존스의 문맥에 대한 일관성 있는 강조를 반영한다. 말하자면 전정경적 문맥과 주제적 문맥에 대한 강조이다. 해석학의 척도(the canon of interpretation) 라고 양대 원리를 설명한다.

성경은 성경으로 풀어야 한다는 가장 기본 원리는 그의 해석학적 실제 속에 내재되어 있다. 이것을 부정적으로 정의하면 어떤 성경도 다른 성경과 모순되게 해석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긍정적으로 정의한다면 성경은 성경과 비교해서 해설하고 밝혀야만 한다는 의미이다.

 

 이 원리의 배후에는 로이드존스의 설교와 신학과의 관계에 대한 견해가 내재하고 있다. 그는 설교자는 단일체인 전 성경적 메시지를 잘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달리 말해서 "설교자는 성경신학에 정통해야만 하고 나아가서 조직 신학을 바로 알아야만 한다"(1982C:66),조직 신학에 대한 좋은 기반을 갖는 것이 설교자에게는 무엇보다도 필요하다고 그는 생각한다. 이 조직 신학은 설교의 배경과 설교를 통제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

다.

 

로이드존스는 난해한 구절을 해석하는데 성경을 성경으로 비교하는 것보다 더 좋은 법칙은 없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주어진 본문에서 두개 이상의 상이한 해석이 가능할 때 그 중에 한 해석이 성경의 다른 부분과 조화를 이루고 나머지 해석은 배치될 때 전자가 바른 해석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신앙의 유비라는 이 원리는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된 말씀이 라고 하는 이해에 기초하고 있다. 이는 스푸로울이 지적한 바와 같다. "만약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된 말씀이라면 ,신앙의 유비는 해석에 있어서 선택 사항이 아니라 필수 항목이다"(sproul,1978:48).

하지만 이 원리를 내세우기 전에 대답해야 할 근본적인 질문이 있다. 현대의 설교자들은 과연 얼마나 많이 성경을 통독했는가? 한 부분도 생략하지 않고 매일 성경을 읽지 않고는 이 원리는 한갓 공염불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로이드존스가 이 원리를 일관성 있게 적용한 비결을 그가 끈질기게 매일 성경을 읽었다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

 

2) 성경 안에 있는 모든 말들은 그 문맥 안에서 이해해야 한다.

로이드존스의 해석의 두 번째 근본 원리는 이렇게 압축될 수 있다. "성경 안에 있는 모든 말들은 그 문맥 안에서 이해해야 한다"(1980:242).

앞에 나오는 첫 번째 원리를 배타적으로 강조할 때 설교자는 손쉽게 그가 가진 교리 체계를 특정 본문에 강요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의 첫 원리는 두 번째 원리에 의해서 균형을 갖추어야 한다. 어떤 특정 구절을 해석할 때도 총체적인 진리에 의해서 통제되어야 하지만 동시에 설교자는 그 해석이 특정 구절로부터 나온 것인지 아닌지를 점검해야만 한다.

어떤 해석은 성경 전체의 빛속에서는 바를 수 있지만 특정문맥에 있어서는 바른지 어떤지를 살펴야 한다. 달리 말해서 설교자의 해석은 항상 성경적이어야 하는 동시에 문맥에 적합해야만 한다.

로이드존스는 이 해석을 구체화하기 위해서 해석학적 과정에 있어서 두 가지 기본적인 해석법칙을 사용한다.

 

(1) 보다 큰 문맥의 주도적인 주제의 빛 속에서 모든 명제를 해석하라. 로이드존스는 문단 단위의 문맥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 문단의 특정한 본문의 해석의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만약 주어진 본문의 어떤 명제의 해석이 보다 큰 문단의 주도적인 주제와 모순될 때 그것을 올바른 해석으로 수용하지 않는다.

로이드존스의 마태복음 7장 주해는 이 경우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로이드존스가 지적했듯이 이 장을 서로 내적인 관련이 거의 없는 격언체의 구절들의 집합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로이드존스는 7장을 내리 흐르고 있는 심판이라는 주도적인 주제를 강조하므로서 그러한 견해의 피상성을 설득력 있게 반박한다. 7장의 모든 구절은 이 심판이라고 하는 주도적인 주제에 의해서 해석되어야 한다.

이 법칙의 또 하나의 예증은 로마서 7장1절에서 8장 4절에 걸친 그의 설교로부터 살펴볼 수 있다. 거기에는 율법 그 기능과 한계라는 주도적인 주제에 의해서 그의 모든 주해가 결정되어 진다. 이 법칙에 의해서 로이드존스는 로마서 7장에 해석 역사에 있어서 무언가를 분명한 공헌을 하고 있다. 그의 방법의 확실한 이점은 세세한 문제에 빠져버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법칙은 현대 이론들에 의해서 지지를 받고 있다. 티셀턴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언어의 범위를 이해하는 데는 우리는 문장을 이해하기 위해서 단어를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별 단어가 지니는 힘을 이해하는데는 전 문장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달려있다. 그러나 이 원리는 확장되어야만 한다. 문장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문단이나 장이나 저자 전부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증진시킨다. 그러나 전체에 대한 이해는 다시금 우리의 문장에 대한 이해를 한정하고 교정한다(Thiselton,1977:314).

 

(2) 세세한 부분을 살피기 전에 전체적으로 구절을 살펴라. 로이드존스는 어떤 가르침을 살필 때에도 전체적인 데서 부분적으로 나아가는 것이 현명한 법칙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것만이 나무로 인해서 숲을 보지 못하는 위험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산상보훈의 해석과 관련해서 이 법칙을 특별히 중요하게 여긴다. 그는 이 법칙을 또한 성경의 다른 부분을 해석할 때에도 일반적으로 적용한다. 로마서나 에베소서 주해와 관련해서도 동일한 법칙을 적용하고 있다.

 

 전체에 대한 일반적인 관심을 갖기 전에 세세한 특정 구절로 뛰어드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 자신의 말로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성경을 해석할 때에 부분으로 들어가기 전에 마음속에 전체를 가지는 것은 항상 좋은 방법입니다. 우리는 전체에 대한 개념과 관련이 없이 부분을 해석해서는 안됩니다 (1979A:7).

이 방법은 의사로서 그가 받은 훈련을 반영하고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노련한 의사는 환자를 대할 때 의사가 해야할 첫째 일이 그를 전체적으로 살피는 것이라고 항상 가르쳤습니다. 의사는 특별한 불평을 듣기에 신속하기보다는 전체적인 인상을 살피고 나서 특정한 부분으로 가야만 합니다. 이것이 성경을 두고도 마찬가지입니다(1982A:12-13).

 

결론

로이드존스의 특정적인 해석원리에 관한 우리의 연구로부터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로이드존스는 새로운 해석원리를 소개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전통적인 해석 원리를 새롭게 생각하게 만들었다.

 

1) 성경은 성경으로 풀어야 한다.

 

2) 성경에 나오는 모든 말은 그 문맥에 따라서 이해해야 한다.

그가 따르는 근본적인 해석원리는 각각 성경적 해석학의 공리이다. 아무도 그 타당성을 반박할 자가 없다. 하지만 로이드존스의 경우에 이어서 특정적인 점은 이 원리를 그의 실제 설교에 있어서 해석학적 방식을 적용하는 점에 있다.

로이드존스는 이 해석학적 공리들을 그 자신의 성실한 실천으로부터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보여주고 그 원리를 적용하는데 대한 방법론적인 지침을 제공하는 성공했다. 균형 잡힌 두원리의 탁월한 활용은 그로 하여금 '강해설교의 왕자'로 만들었다.

 

3) 로이드존스의 해석학적 연구로부터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해석학의 핵심적인 문제가 명백해졌다.

(1) 로이드존스에게는 성경에 관한 해석자의 신념은 그의 해석 과정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필수적이다. 어떤 해석도 전이해 없이 할 수 없다.

(2) 로이드존스에게는 설교자가 성경을 해석해야 할 필요로 근본적으로 문화적 차이 때문이 아니라 죄의 결과로 인한 영적 무지 때문이다.

(3) 로이드존스에게는 해석의 최후의 지식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본문에 대한 만족할만한 영적 이해를 하는 것이며 관여한 해석자의 인격에 영향을 주어야만 한다.

(4)로이드존스는해석과정에있어서 현대 해석학의 "맹점"(Lindsley,1984:487)이라고 정당한 고려를 하고 있다.

(5) 따라서 로이드존스는 기도를 해석 과정에 있어서 불가별한 것으로 분명히 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기도를 통한 겸손한 청취는 기록된 하나님의 뜻을 사람에게 조명하는 그 분의 정상적이 통로이다.

(6) 로이드존스가 한 설교를 위한 가장 실제적인 큰 공헌은 질문을 던지는 기술이라고 부른 묵상의 방법이다.

(7) 끝으로 다음과 말하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만약 설교자가 로이드존스의 해석학적 원리와 방법에 충분한 시간과 주의를 기울인다면 그는 현금의 당면한 딜렘마로부터 오늘날 "최대의 신학적인 문제"(Gaffin,1969:129)로부터 벗어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경탄과 두려움과 기쁨과 찬양의 느낌"(Poythess,1978:198)을 회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