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성경강해***/- 예레미야 강해

[스크랩] 예레미야 (개론)

에반젤(복음) 2019. 12. 28. 11:11


                       예레미야(개론)




1. 예레미야의 생애와 시대적 배경
솔로몬의 죽음 및 왕국 분열 이후의 유다 왕국 역사는 네 차례의 종교 타락과 세차례의 개혁으로 나타났다. 요시야 (주전640-609)는 마지막 선왕 (善王)이었다. 그의 통치기간 중에 있었던 유명한 마지막 개혁은 율법서의 발견이 그 동기가 되었다. 그 후의 유다 역사는 계속되는 정치적 도덕적 그리고 종교적 타락의 역사인데 결국에는 바벨론 포로가 되고 말았다. 이러한 타락은 선지자 예레미야의 활동기에 일어났다. 주전 612년에 수도인 니느웨가 함락된 후 앗수르 제국은 붕괴되었고, 바벨론이 문명 세계의 지배자가 되었다. 예루살렘에서는 두 패가 다투었다. 애굽 지지파는 애굽이 세계의 지배자로 재등장하고 있으며 따라서 유대인들은 바벨론의 공격에 대항하는 방파제로 애굽을 의지해야 한다고 믿었다. 바벨론 지지파는 계속적인 민족 생존의 댓가로 바벨론에 항복할 것을 촉구하였다. 선지자들은 유대인들이 애굽도 바벨론도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을 신뢰하라고 권고하였다. 예레미야는 요시야의 개혁 이후 5년째인 요시야왕 13년 (주전626년)에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는 바벨론 포로 초기까지 계속해서 활동하였다. 그는 애굽에서 생을 마쳤는데 그 시기는 예루살렘 멸망 (주전 587년)후 몇 년 뒤였던 것 같다. 요시야는 주전 609년에 바로느고를 저지하려다가 실패하고 므깃도에서 사망하였는데, 바로느고는 위기에 처한 앗수르 제국을 지원하러 가는 길이었다. 요시야의 아들 여호아하스가 예루살렘에서 아버지의 왕위를 계승하였다. 느고는 여호아하스를(재위 3개월 만에) 애굽으로 내쫓고 여호야김(주전 609-597년)을 왕으로 삼은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여호아하스가 바벨론 지지파라고 믿었던 것이 명백하다. 강력한 통치자이면서 사악한 인간이었던 여호야김은 예레미야를 침묵케 하려고 애를 썼다. 그의 통치기간 중에 예레미야는 그의 첫번째 책을 기술하였는데 이것을 여호야김이 불살라 버렸다 (예레미야 36:27-28). 또한 이 기간 중에 갈그미스 전투가 발발하였는데(주전 605년), 이 전투에서 애굽이 바벨론의 왕자인 느부갓네살예 의해 격퇴되었으며 느부갓네살은 바벨론 왕이 되었다. 곧 이어 팔레스틴의 정복이 일어났다. 이때에(다니엘을 포함한) 일부 히브리인들이 바벨론으로 추방되었다. 그 후 여호야김이 바벨론을 배반하였고 유다에는 많은 재난들이 잇달았다. 이처럼 불안정한 가운데 여호야김은 11년을 통치하고 죽었는데 이는 궁내 알력으로 인한 희생이었던 것 같다. 여호야김의 아들인 여호야긴 (고니야, 여고냐, 여고니야라고도 표기됨 - 예레미야 22:24,28; 24:1; 27:20; 29:2)이 아버지의 왕위를 계승하였다. 석달 뒤에 바벨론 사람들이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유다의 주요 인사들 및 기술 공들과 함께 여호야긴을 바벨론으로 잡아갔다 (주전 597년). 37년간 감금되었다가 여호야긴은 바벨론의 감옥에서 풀려났다. (왕하 25:27). 느부갓네살은 여호야긴을 대신하여 여호야긴의 삼촌인 시드기야를 왕으로 임명하였다. 시드기야는 11년동안 느부갓네살의 봉신(封臣)으로 왕위에 있었다. 그는 성격이 나약하였으나 귀족들의 위협으로부터 예레미야의 생명을 보호하였고 예레미야의 권고를, 비록 실행할 능력이 전혀 없었다 할지라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도 또한 어쩔수 없이 바벨론을 배반하였다. 시드기야왕 9년에 느부갓네살은 예루살렘에 대한 최후 공격을 개시하였다. 2년후인 주전 586년에 그 성읍은 점령되고 파괴되었다. 시드기야는 두 눈이 뽑힌채 예레미야의 수많은 동향인들과 함께 바벨론으로 잡혀 갔다. 예루살렘 멸망 후 유다에서 일어난 사건들에 대해서 우리는 예레미야서(40-45장)로부터 알수 있다. 예레미야 및 대다수의 일반 백성들은 그달리야 치하에서 유다 땅에 남게 되었는데 아달리야는 유대인으로서 바벨론의 꼭두각시 총독이었다. 그달리야가 암살되는 등의 내적 혼란이 있은 후에 애굽 지지파의 잔존자들인 어떤 유대인들은 애굽으로 도망하였는데, 예레미야로 하여금 그들과 함께 가도록 강요하였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애굽에서 생을 마쳤다. 예레미야의 죽음은 히브리 왕정 역사의 종말을 가져왔다. 포로들의 유다 귀환을 허락한 고레스의 조서는 국가체제의 제 2기를 열었다.

2. 예레미야의 인간됨과 메시지
제사장 예레미야는 가장 불행한 시기에 선지자직에의 부름을 받았다. 요시야의 개혁은 끝났고 유다는 마지막 타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그가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을 때 그의 메시지가 구원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책망의 메시지라는 것이 암시되었다. 40년 이상의 장기간에 걸친 그의 활동은 심판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일찌기 그의 종들을 선지자로 세워보내셨으나 이스라엘은 주의를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 이제 신명기 28-30장에서 배교한 민족에 대하여 예언된 최후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바벨론은 유다를 점령하려 하였고 백성들로서는 자신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항복하는 것이 최선일 것이었다. 이러한 메시지는 맹렬한 민족주의가 자신들이 물고 늘어져야 할 전부가 되었던 백성들에게 전해졌을 때 완전히 배척되었다. 예레미야는 쓸데 없이 참견하는 자요 반역자로 간주되었고, 백성, 귀족 및 왕들은 번갈아가며 그를 죽이려 하였다. 우리는 다른 어떤 선지자들의 인간됨보다도 예레미야의 인간됨을 더욱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다. 그가 계속되는 배척과 박해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맡은 직무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 것은 인간의 기개(氣槪)와 하나님의 은혜 모두에 대한 찬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