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성경강해***/- 고전,후서 강해

[스크랩] 연구 1 고린도 교회의 분쟁(고전1-4장)

에반젤(복음) 2019. 12. 16. 08:35




       

연구 1 고린도 교회의 분쟁(고전1-4장)

고린도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은사에 풍족하게 되었다. 그들은 말과 지식 등 뚜렷한 은사들을 자랑하며 뚜렷하지 않은 은사들, 특히 바울의 십자가 고난의 은사들을 경시하게 하였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과 복음 그리고 그의 사도적 사역이 철저하게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기초함을 논증한다.

 

1. 하나님의 지혜와 세상의 지혜(고전1,2장)

 

본문은 고린도 교회의 분쟁이 세상의 지혜로 하나님의 지혜를 오해한 것을 바울이 수정해 주는 내용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은사들을 자랑할 때 어떻게 대했는가? 고린도 교회의 분쟁의 근본 원인은 무엇인가?

 

1) 끝까지 견고케 하실 주님

바울의 사도권이 신적 기원을 가진다고 강조되는 것은(고전4:15 ; 고전9:1,2) 고린도 교회가 바울의 사도권을 의심하기 때문이다. 바울이 교회의 통일성을 강조하는 것은 고린도 교회, 특히 '신령하다는 자들'이 바울과 모든 교회와 스스로를 구별시키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은혜를 주신 것, 특히 모든 구변과 지식으로 풍족하게 하심을 감사하는데 그 감사는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를 더욱 견고케 하게 되어 그들이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감사의 내용에서 그들이 주의 나타나심을 기다려야 하고 그리스도의 날까지 주와 교제하며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될 것을 은근히 촉구하고 있다.

 

2) 세상철학에 기초한 지혜와 성령으로 계시된 지혜

바울이 '온전히 합하라'고 권면하는 것으로 볼 때 고린도 교회에 분쟁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 완전히 분리된 상태는 아닌 것 같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분쟁 문제가 본질적으로 지혜 문제에 있음을 지적한다. 고린도 교회는 교회 지도자들을 지혜의 선생으로 보고 그들이 '말의 지혜'가 고린도인들의 지혜 있음을 자랑하게 만들기 때문에 그들을 선호하면서 바울에게는 적대적이다. 그래서 바울은 구원을 주는 복음은 세상의 지혜, 즉 말의 지혜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지혜, 즉 '십자가의 도' 자체에 있음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지혜는 하나님의 미렴함, 즉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되었고 또한 세상의 미련한 것들, 즉 고린도인들을 택함을 통해서도 계시되었다. 그러므로 바울이 세상의 말과 지혜로 하지 않고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만을 전하는 복음 전파는 하나님의 지혜를 계시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바울은 철학적 지혜로 복음을 이해하려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지혜인 십자가의 복음은 성령을 소유한 자들에게만 계시됨을 강조한다.

 

2. 그리스도에 기초하여 분쟁을 해소함(고전3장)

 

본문은 스스로 신령하다면서 분쟁하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될 것을 권면하는 내용이다. 고린도 교인들이 신령하지 못한 증거는 무엇인가? 고린도 교회가 자랑해도 되는 것은 무엇인가?

 

1) 신령한 자가 되는 것과 분쟁이 있는 것

바울은 하나님의 지혜인 십자가의 복음으로 고린도 교회의 분쟁의 원인을 해소시키려고 했다. 이제 다시 고린도 교회 안에 시기와 분쟁이 있는 것과 신령한 자들이 되는 것은 배타적인 요소임을 밝힌다. 그 교회의 분쟁의 원인은 구체적으로 교회와 지도자의 다양성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바울은 농사 비유에서 사도들은 스스로 자랑할 수 없음을, 건축 비유에서 사도들은 유일한 기초인 예수그리스도 위에 조심스럽게 짐을 지어야 할 것 그리고 성도들은 하나님의 성전인 것을 알고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함을 촉구한다.

 

2) 모두 그리스도의 것

고린도인들은 지혜의 사도들의 이름으로 분쟁하면서 그들에 속해 있음으로 인해 스스로 지혜 있음을 자랑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의 소유자임을 자랑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바울은 성도들이 현재 구원받았음을 기독론적 관점에서 깨달아야 할 것을 권면한다.

 

3. 고린도인들과 그들의 사도(고전4장)

 

본문은 고린도인들이 복음과 교회 그리고 교회 선생들의 역할을 신학적으로 오해한 점, 특히 바울의 가르침과 사도적 권세에 대한 오해를 다루는 내용이다. 사도는 누구의 종인가? 참사도된 표시는 무엇인가? 고린도인들이 잘못됨 복음에 기초하여 바울을 적대할 때 바울은 어떤 태도로 권면하고 있는가?

 

1) 참사도의 표시

바울은 자신의 사독적 권세를 주장하기에 앞서서 먼저 종으로서의 사명을 보여 준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인 것을 보여 준다. 그리고 고린도 교인들이 사도들, 특히 바울에 대해 판단하는 것을 경고하고 오직 주의 심판의 날에 드러나기까지 기다려야 할 것을 권면한다. 그리고 자신의 참된 사도됨의 증거를 제시하는데, 그것은 십자가 고난의 신학으로서 고린도인들의 영광의 신학과 대조된다.

 

2) 호소와 권면

바울은 그의 사도적 권세와 고린도 교회의 잘못된 행동과 신학을 수정할 권리를 다시 주장한다. 그러나 그의 태도는 아버지와 자녀의 비유를 통해 호소하는 태도로 변증한다. 아버지의 사랑으로 호소함에도 불구하고 태도의 변화를 보이지 않는다면 매를 가지고 갈 것이라고 경고한다. 바울은 철저히 종말론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기대하지만 단순히 기다리지 않고 철저히 현실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어긋나는 모습을 수정하고 있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의 복음 전파로 세워지고 하나님의 모든 은사로 풍성해졌다. 그러나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모든 은사들, 특히 말과 지혜의 은사를 헬라적 개념으로 오해하여 스스로 신령한 자로 자랑하는데 사용하였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의 풍성한 은사는 인정하지만 그 은사들을 자신을 자랑하는데 사용하는 잘못된 태도를 수정하고 자신의 고난의 사역을 모범으로 제시하고 있다.

1. 십자가의 도의 이중성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에게는 그들의 결여된 영적 분별력으로 인해 미련한 것으로 취급되는 반면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믿는 신자들에게는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을 말함으로써 십자가의 도는 그것을 대하는 자의 태도에 따라 그 성격을 달리하는 이중적인 성격을 갖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고전1:18-25). 사실 십자가의 도는 불신자들에게 미련한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바울은 그 이유를 유대인과 헬라인이라는 두 민족의 특성과 관련시켜 설명하고 있다. 유대 민족은 출애굽 시대부터 예수께서 사역하실 당시까지 끊임없이 이적과 기사의 역사 속에서 살아왔으므로 그들의 종교 역시 표적을 통해 확립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참표적이 되신 예수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알아보지 못하였으며 오히려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많은 사도들의 증언에도 불구하고 예수그리스도를 메시야로 인정하기를 거부하였다. 그러한 의미에서 십자가는 유대인들에게 거리끼는 것이 되었다. 또 헬라인들은 철학적 지혜 속에서 모든 만물의 근원을 캐고 인생의 해결책을 찾으려 했으며, 이성적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은 배격했다. 다라서 헬라인들에게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는 복음, 즉 '십자가의 도'는 미련한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역을 믿는 신자들에게 십자가의 도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요, 참지혜가 된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도의 이중성이다.

 

2. 고린도 교회 분쟁의 분파

 

1) 바울파

바울의 이름으로 모이는 자들은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설립자였으므로 바울을 존경한 나머지 파당을 형성하였을 것이다. 더욱이 바울의 사도권을 도전받았으므로(고전9:1-3) 그를 변호하기 위해서 바울파가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교회내에서 주류적인 파당을 형성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2) 아볼로파

아볼로는 헬라 문명의 중심지중 하나인 알렉산드리아 출신 유대인으로 학문이 많고 구약성경에 능통했으며 웅변에도 능하였다(행18:24-28). 그러나 그의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은 요한의 세례밖에 모를 정도로 미미하여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게 가르침을 받은 후에야 비로소 바른 신앙을 갖게 되었다(행18:25,26). 그런 후에 그는 고린도에 와서 사역을 했는데 (행18:27,28 ; 행19:1) 그런 그가 고린도 교회에 한 당파에 이름을 제공하게 된 것은 그의 해박한 지식과 헬라적 세련미 때문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 당파의 사람들은 철학을 좋아하고 이성적인 경향의 사람들이었다. 주의할 것은 바울과 아볼로를 훌륭한 동역자로 생각했다(고전3:4-9). 뿐만 아니라 아볼로도이 분쟁에 휩싸이지 않기 위해 에베소로 와서 고린도에는 돌아 가려 하지 않았다. 이로 보아 바울이나 아볼로는 이 분쟁과는 무관하며, 오히려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이 스스로 파당을 만들고 분쟁한 것으로 여겨진다.

3) 게바파

이 파가 어떻게 베드로의 아랍어 표현인 게바라는 이름으로 모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아마도 이 파를 형성한 사람들은 베드로에게 직접 세례를 받은 유대인들이거나 아니면 바울의 사도권을 인정하지 않고 사도중 으뜸가는 베드로를 지도자로 모시고자 하는 의도를 가진 사람들로 보여진다.

4) 그리스도파

정확히 규정하기 어려운 파당으로 바울이 그리스도파에 속할 것이다. 그러나 이 파는 보편적인 의미에서의 그리스도파가 아니다. 왜냐하면 보편적인 면에서 본다면 다른 세파의 사람들도 그리스도파에 속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바울이 자신의 말에 따라 그리스도에 속한다면 바울도 자신이 꾸짖는 파당에 속하게 되므로 자기당착에 빠지게 되며 바울파와도 모순되게 된다. 따라서 이 파는 분명히 대립되는 한 파당을 형성하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고린도 교회의 그리스도파는 게바파와 성격이 유사한 율법주의자들이거나 주님의 형제요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였던 야고보와 그 형제들을 추종하는(고전9:5) 파이거나 다른 세 파에 휩쓸리지 않으면서 그 세 파에 대항하는 세력을 형성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만든 파일 것이다. 분명한 것은 그리스도라는 이름 아래 모였지만 배타적인 파당을 형성해 고린도 교회의 분쟁에 참여한 것이 분명하며, 그들 자신들은 그리스도와 관계되어 있음을 주장하는 영적 교만을 서슴치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