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성경강해***/- 갈라디아서 강해

갈라디아서 개론

에반젤(복음) 2019. 12. 12. 22:04



            

랄프 P. 마틴, 『신약의 초석 II』 원광연 역 (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5), pp. 221-240.
H. 웨인 하우스, 『차트 신약, 연대표 및 배경사』 박용성 역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1), pp. 130-133.

1. 갈라디아서의 중요성
신약학의 가장 격렬한 토론 주제: 바울과 유대교와의 관계 = 바울의 율법관: 바울의 은혜 구원론이 어떻게 발생했으며 유대교와 어떻게 관계되며 바울신학 전체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가? 그 참된 의미는 무엇인가?

E. P. Sanders, Paul and Palestinian Judaism. Fortress Press. 1977.

_____________, Jesus and Judaism. Fortress Press. 1985.
_____________, 『예수와 유대교』 황종구 역.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4.
_____________, 『예수 운동과 하나님 나라 - 유대교의 갈등과 예수의 죽음』 이정희 역. 한국신학연구소. 1997.바울과 팔레스타인의 유대교
_____________, 『바울, 율법, 유대인』 김진영 역.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5.

샌더스(E. P. Sanders)는 바울이 당시 유대교를 정확히 이해했는가를 묻고 기독교 복음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하여 유대교를 그리지 않았겠느냐고 의문을 제기하며, 바울이 유대교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고 결론 내린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유대교의 율법을 그리스도로 대치하여 새로운 종교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는 바울이 유대교나 율법에 대해서 말하는 것과는 달리 당시 유대교 역시 행위에 의한 구원을 전하기보다는 은혜에 의한 구원을 주장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러한 그의 입장을 스스로 언약적 신율주의(Covenantal Nomism)라고 칭하며, 예수와 당대의 유대교 문헌을 통하여 종교적 패턴을 연구해 본 결과 크게 두 가지 패턴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고 주장한다. 첫째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에 들어가는 문제(Getting in)요, 둘째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자신의 신분을 유지하는 문제(Staying in)이다. 전자가 하나님의 언약과 그의 은총에 기인한다면, 후자는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인간의 마땅한 응답이다.113)

레이세넨(Rais?nen), 『바울과 율법』 바울 서신에서 율법에 대한 언급이 서로 상호 모순적이어서 바울의 율법관을 정립할 수 없다. 바울은 오직 유대교를 반대하기 위한 그 한 가지 목적을 위하여 임기응변적으로 인용하였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들은 프로테스탄트 신학 전체에 대한 커다란 도전으로 이 토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서신이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이다. 그런데 갈라디아서는 로마서보다 더 율법에 반대하는 신학이 더 강하게 나타나 있어서 갈라디아서에 대한 연구가 이러한 토론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특히 갈라디아서의 연대가 상당히 중요한데, 그것은 바울의 율법신앙이 점진적으로 발전했는가 아니면 다메섹 도상에서 한꺼번에 온 것인가를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2. 갈라디아서의 수신지 - 갈라디아서의 연대 결정에 있어서 중요한 논점
1) 문제의 요점: 바울과 바나바가 1차 선교 여행 때 방문했던 로마 지배 하의 정치적 의미인 남부 갈라디아 주에 있는 성도들에게 갈라디아서를 쓴 것인가 아니면 2차 3차 선교 여행 시에 세웠던 지리적인 의미인 갈라디아 즉 고울 사람들이 세웠고 B. C. 25년에 비로소 로마 영토로 편입되었던 북부 지역 사람들에게 갈라디아서를 쓴 것인가?
2) 해결책의 요점
학설
“갈라디아”의 의미
선교여행
시기
주장시기
북부갈라디아설
지리적 의미
(부족 이름)
2,3차 선교여행
바울 사역의 후기 저술
전통적 견해
남부갈라디아설
정치적 의미
(로마의 행정구역)
1차 선교여행
바울 사역의 초기 저술
현대적 견해

3) 북부 갈라디아설
지지 이유
반대 이유
1. 누가는 로마의 정치적 통치 지역 개념보다 지리적 개념에 입각해 있으므로, 바울 역시 선교여행지역에 맞춰서 제목을 정했을 것이다.
1. 누가는 “브루기아 지방인 갈라디아 땅”(행 16:6)이라는 표현과 “갈라디아 지방인 브루기아 땅”(행 18:23)이라고 표현하여 이것 가지고는 지방명인지 통치 지명인지 결정하기 어렵다.
2. 제 1차 선교 여행 기간 중에 육체적 질병에 대한 언급이 없다(갈 4:13).
2. 제 2, 3차 선교 여행 시에도 질병에 대한 언급이 없다. 바울의 많은 박해와 질병에 대해서 누가나 바울은 잘 기록하지 않고 있다(고후 11-12장)
3. 돌탕 맞은 이야기를 포함하여 박해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
3. 바울은 그의 몸에 자신의 신앙과 증거를 겪은 흔적이 남아 있다고 말하며(갈 6:17), 눈 고통의 어려움(갈 4:13-15)도 돌탕 사건의 후유증일 수 있다.
 
4. 18세기까지의 교회의 일관된 입장이었다.
4. 2세기 루가오니아 갈라디아 지방이 독립하고, 3세기 말 남부 갈라디아는 비시디아 안디옥을 수도로 하고 이고니온을 제 2도시로 하는 비시디아 주로 편입되어 갈라디아 주가 축소, 으레 북부 지역만을 갈라디아로 이해하게 되었다.
5. 만일 1차 여행 중이라면 “그 후에 내가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렀으나”(갈 1:21)로 쓰지 않고 “그때 내가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가서 드디어 너희에게 이르렀다”라고 써야 했을 것이다.
5. 바울의 표현은 단지 사변적(思辨的)일 뿐이다.
6. 바울이 루가오니아인이나 비시디아인에게 “어리석도다 갈라디아인이여”(갈 3:1)라고 쓸 리 없다. 당대 저술가들은 갈라디아 사람들과 주변 종족들을 명백하게 구분하고 있다.
6. 루가오니아나 비시디아가 정치적 의미의 행정 구역으로서의 갈라디아의 소속이었다면, 가능한 표현이다.
7. 갈라디아라는 지명은 아시아나 브리기아, 비시디아처럼 지리적인 의미이지 정치적인 의미로 사용될 수 없다.
7. 바울은 가끔 정치적 의미를 가진 로마의 식민지 주 명칭을 사용하곤 한다.
8. 바울은 정치적 지명보다는 지리적 지명으로 이 지명을 언급한다. 그리고 갈라디아라는 지역은 북부에 있다(롬 15:31; 고후 1:16; 갈 1:17, 21; 살전 2:14).
8. 바울은 정치적 의미인 식민지 주 명칭도 사용한다. 마게도니아(고전 16:5), 아가야(고전 16:15), 아시아(고전 16:19)와 연관하여 갈라디아를 식민지 주 명칭으로 사용한다(고전 16:1).
9. 북부 갈라디아에 정착한 사람들은 극서부로부터 이주한 사람들로 겔트족 출신이며 헬라어로 갈라테, 로마어로 갈리라고 불리며, 그 성격은 변덕스러운 성격으로 바울이 말하는 “당신들은 매우 빨리 변합니다”라는 표현이 가이사와 키케로의 글에서도 발견된다.
9. 갈라디아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변덕스러운 사람들”로 볼 수는 없다.

4) 남부 갈라디아설
지지 이유
반대 이유
1. 바울은 정치적 의미의 지명을 사용하는 반면 사도행전은 지역적 명칭을 사용한다.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은 갈라디아를 언급하며(16:1), 마게도니아(16:5), 아가야(16:15), 그리고 아시아(16:19)를 정치적 의미의 행정 구역들로 언급한다.
1. 바울은 지명을 쓸 때 정치적 의미보다는 지리적 개념을 더 잘 사용한다. 셀류크스 왕조의 수리아 대신에 수리아를 사용하고(갈 1:21), 수리아 안에 로마의 큰 식민지 주인 안디옥, 예루살렘도 포함된다. 그러나 유대 지역의 그리스도인들을 언급할 때 그는 유대 지역을 생각한다(고후 1:16; 살전 2:14). 아라비아라는 용어 역시 나바트족의 왕국 이름이 아니라 지리적 개념이다(갈 1:17).
2. 바울은 이미 사도행전에 언급된 교회들에게 편지를 쓰는 것이지 전혀 생소한 교회에 대해서 쓰는 것 같지 않다.
2. 골로새 교회와 같은 경우 사도행전에 전혀 언급이 없다.
3. 바울의 적들로서의 유대인들은 타우르스 산맥 남쪽의 남부 갈라디아 지역의 조밀한 인구 집중 지역에로 바울을 훼방하러 왔을 것이다. 왜냐하면 북부 지역은 토양이 척박하고 인구가 희박하여 흩어진 유대인들이 정착하고 회당을 설치하기 쉽지 않았다.
3. 우리는 예루살렘에 올라온 바울의 시기자들의 정체에 대하여 아는 바 없다.
4. 바나바에 대한 언급(갈 2:1, 9), 특히 안디옥에서의 실수(갈 2:13)는 남부 갈라디아 지역 내에서만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바울과 함께 한 바나바는 1차 선교 여행 때이지 2, 3차 선교 여행 때가 아니다.
4. 고전 9:6을 보면 바울이 바나바를 고린도 교회에게 언급하지만, 그가 그 교회를 방문했다는 증거는 없다.
5. 예루살렘 총회의 결의에 대한 언급이 없기 때문에 그 이전에 갈라디아서를 기록하였을 것이며,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 등 남부 갈라디아인들을 향하여 썼을 것이다.
5. 이 총회에 대한 언급은 바울 서신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심지어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나 복음에 관한 것조차 나타나지 않는다. 바울은 총회의 결정이 자신과 복음에 대한 최종적인 승리로 보지 않은 듯하다.
6. 베드로의 실수에 대한 이야기(갈 2:11-14)는 총회 이후보다는 이전의 사건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6. 수년전 고넬료의 집에서 행한 성령의 증거보다도 최근 총회 결정이 있었기에 바울이 베드로의 실수를 더 꾸짖지 않았겠는가. 그러니 총회 이후가 더 타당하다.
7. 정치적 의미인 로마 식민지 주 갈라디아에는 교회가 많고 그 안에 유대인들도 많았지만, 지리적 개념의 갈라디아에는 유대인들을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바울이 유대인들을 먼저 찾아 갔으므로 남부 갈라디아 지역으로 갔을 것이다.
7. 유대계 그리스도인(3:2-3, 13-14, 23-24; 4:2, 5; 5:1)으로 지칭되는 갈라디아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에 대한 일반적인 칭호이다. 그러므로 갈라디아인이란 말의 의미는 비유대계 기독교인이란 뜻이다(4:8; 5:2-3; 6:12-13).
8. 행 20:4에서 바울은 더베의 가이오와 루스드라의 디모데와 같이 정치적 의미인 갈라디아 식민지 주로부터 온 자들과 함께 무리를 짓는다. 고전 16:1에서 갈라디아에서 모아진 헌금을 이야기하며 지역적 의미의 갈라디아를 말하지 않는다.
8. 행 20:4은 고전 16:1처럼 신자들이 왔었을 것으로 예상되지만 아가야로부터 온 신자에 대한 언급은 없다. 가이오 역시 마게도니아 사람으로 보인다(행 19:29; 20:4).
9. 갈라디아서에 의하면 사도가 갈라디아 교회를 세우게 된 이유는 그들 나라가 바울의 통과를 막았기 때문이라고 암시되어 있다. 그렇다면 정상적인 도로망이 잘 나와 있지않은 북부 지역보다는 우요 도로망이 구비되어 있고 많은 짐을 갖고도 쉽게 여행할 수 있는 남부 갈라디아 지역이었다고 볼만하다. 남부 갈라디아는 인구가 밀집되어 있기에 교회를 세울 만 했다.
9. 단지 복음 전파만을 위하여 갈라디아로 간다는 것은 바울의 선교 전략과 어울린다. 중심 도로에서 벗어나 비두니아 지역에로 바울이 간 것에 대하여 주목해 본다면 바울이 북부 지역으로 가지 않을 이유도 없다.

5) 결론: 갈라디아서의 수신지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가 비록 북부 갈라디아이지만 제 1차 선교 여행에서 남부 갈라디아에 복음을 전한 직후인 바울 사역의 초기에 갈라디아서를 집필했을 가능성이 크다.

3. 갈라디아서의 기록연대: 바울의 율법 신학, 칭의 구원론이 유대주의와의 논쟁에서 점차 발달했는가? 아니면 원래부터 바울 복음의 중심이었는가를 결정하는 데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갈라디아서의 기록 연대는, i) 만일 48년경에 기록된 최초의 바울 서신이라면, 바울이 펼친 구원론이 바울신학의 중심이라고 주장하기 쉽고, ii) 만일 55년경에 쓰였다면 바울은 원래 은혜로만 구원된다는 구원론을 가지지 않았는데, 안디옥에서 바울과 베드로, 바나바와의 대 논쟁과, 갈라디아 유대주의자들과의 시비를 거치면서 이 신학을 전개하게 되었다고 주장할 수 있게 되어, 이신칭의는 복음의 핵심이 아니라 우연한 논쟁의 산물에 불과한 것이 된다.

1) 갈라디아서 내에 시간에 대한 언급이 있다.
4:13. 내가 처음에 육신의 연약함으로 복음을 전했다고 갈라디아에 복음을 전한 상황을 말한다.
“처음에” - 갈라디아에 적어도 두 번 갔다는 뜻
“원래” - 갈라디아에 1번 갔다는 뜻
1:6 이같이 속히 = 복음을 선포한 지 얼마 안 되어서(직후에) - 이른 연대에 도움이 되는 구절

2) 남부 갈라디아는 로마 행정 구역으로서의 갈라디아로 첫 선교 여행 직후 48-49년 즈음이고, 북부 갈라디아는 지역 종족 이름으로서의 갈라디아로 1차 선교 여행보다는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를 말하여 후기 연대를 가리키게 된다.

3) 갈라디아서와 사도행전과의 관계 속에서 연대를 추정할 때,
① 갈라디아서 1-2장은 자서전적 언명으로 예루살렘에 두 번 방문한 것을 언급하고 있다.
1:18-24. 다메섹 도상의 체험 후 3년 만에(만 2년 정도) 베드로와 한 두 주 같이 지냈다.
2:1-10. 14년 후 자기와 바나바가 한 편이고,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이 한 편이 되어 공식적으로 선교 지역을 나누었다. 그리고 서로의 복음과 선교 지역에서의 열매를 인정한다는 의미로 교제의 악수를 하였다. 더 이상 요구한 것이 없다. 다만 구제 헌금만을 부탁했을 뿐이다. 이러한 언급이 사도적 회의의 성격을 지닌 것을 볼 수 있는가?
② 사도행전에서는 예루살렘 사도 회의까지 세 번의 예루살렘 방문을 말한다.
9:20-34. 다메섹 도상에서의 체험 후
11:27-30. 구제 헌금을 가지고
15:1ff. 예루살렘 사도 회의
갈라디아서 2장의 예루살렘 방문이 행 11장의 방문인가 아니면 행 15장의 방문인가? 전자라면 갈라디아서의 기록 연대는 선교 여행 직후, 사도 회의 전일 것이고(48년), 후자라면 사도 회의 후 후기 연대가 될 것이다.
③ 사도행전 15장의 사도 회의 방문과 갈라디아서 2장의 방문 사이의 비교
사도행전 15장
갈라디아서 2장
공적 회의
사적 협의
유대 관습에 대한 언급과 조정
없음
3번째 방문
2번째 방문

④ 사도행전 11장과 갈라디아서 2장 방문 사이의 비교
1. 사도행전 11장은 갈라디아서 2장에 있는 그와 같은 모임에 관하여 전혀 언급이 없다.
2. 바울의 부조 방문 때는 안디옥에서 할례 문제가 전혀 제기되지 않았을 때이며, 바울의 본격적인 선교 여행 전이었기 때문에 갈라디아서 2장에 나타나 있는 문제가 아직 제기될 상황이 아니었다. 또한 갈라디아서 2:2은 바울의 본격적인 이방 선교가 이미 시작된 것을 보여준다. 선교 대상의 분할 합의 역시 이미 교회의 파송을 받아 제 1차 선교 활동을 시작하기 전으로 보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3. 사도행전 11장의 방문 때에는 요한의 형제 야고보가 헤롯 아그립바 1세에게 순교 당하기 전이었다. 그런데 예루살렘의 기둥들의 언급에서 예수의 형제 야고보만 언급되어 있으므로 야고보의 순교 이후로 보아야 할 것이다.
4. 갈라디아서 2:1-10은 예루살렘 회의의 주제가 된 할례 문제를 취급하고 있지만, 2:11-21은 할례 문제가 아니라 유대인과 이방인의 식사 교제의 문제이기에 바울의 베드로 책망 사건은 예루살렘 공회의 이전으로 보기보다는 이후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114)
⑤ 학자들의 견해
1. E. P. Sanders - 바울이 거짓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거짓말 한다면 자신의 복음이 무너지는 것이다.
2. 사도행전이 한 사건을 두 사건으로 적은 것이다.
3. F. F. Bruce - 구제헌금 방문 시이다. 그렇다면 갈라디아서의 연대를 일찍 추정할 수 있게 된다.

4. 갈라디아서의 정황(Setting): 1:6-9; 5:10-12
1) 일단의 거짓 선생들이 갈라디아 교회에 침투하여 그리스도인이 된 자들을 자신의 거짓 복음으로 유혹하는 것에 대항해서 바울이 편지를 쓰고 있다.
거짓 선생들의 정체는 유대 율법과 의식을 지키도록 요구(2:16; 3:2, 21; 4:21; 5:4)하고,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설득(5:2; 6:12, 13)하는 유대주의자들이었을 것이다.
2) 바울은 자신의 복음과 사도직이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며 예루살렘 지도자들과 독립된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함으로 거짓 교사들이 바울의 사도직과 그 권위를 공격한 것으로 추측된다.
3) 4:810에서의 “초등 학문”(elementary spirits) = 원초적 힘들, 영적 힘들에 대한 언급을 통하여 거짓 교사들이 영지주의자들이라고 주장된다(L?tgat, J. Ropes).
① 영지주의는 점성술이나 헬라의 혼합 종교에 영향을 받았다.
② 영지주의는 2원론으로 영과 육을 분리하고, 육은 영의 감옥이나 무덤으로 생각한다.
③ 영이 육으로부터 해방되어 이데아의 세계로 상승하는 것을 구원이라고 여기고, 그러한 구원은 지식으로 이루어진다고 믿었다.
④ 영을 육에 가두는 신들을 속이거나 구슬리어 비밀스러운 지식을 가지게 되면 이미 구원을 확보했으므로 육으로는 아무 것이나 할 수 있다는 방종주의와 육은 아무 것도 아니므로 육신의 소욕을 부인해야 한다는 금욕주의로 발전되었는데, 갈라디아서의 거짓 교사들은 방종주의적인 영지주의자들인 것처럼 보인다.
4) R. Jewett의 신약성경에 대한 사회학적 고찰
① 갈라디아서를 40년대 중반 이후의 팔레스타인의 정치 사회 환경에 입각하여 생각함
② 열혈당원 운동(대로마항쟁운동)의 배경에서 이해하여 반이방주의, 쇄국주의적 국수주의적 유대주의의 열혈당원들이 다윗 왕조를 재건하여 하나님의 직접적인통치<신정(神政)>을 회복하려고 함
③ 유대인들로서 이방인들과 교류하는 자들이 원수들이며, 그 대표적인 자들이 바울과 같은 그리스도인들이었다.
④ 바울의 마지막 예루살렘 방문 시 바울이 우려한 것은 이러한 열혈당원들의 위협이었다(롬 15장의 기도 제목, 불순종하는 자들의 손에서 구원해 주시도록 자기를 위한 기도와 헌금을 받아주므로 교제가 끊어지지 않도록) - 바울이 헌금을 걷은 이유도 선지서의 예언인 이방인들의 종말론적인 순례 사상의 완성을 이루기 위한 의도가 보인다. 그것을 거절당하면 자신의 선교 사역이 허사가 될 수 있었다.
⑤ 예루살렘은 열혈당원들의 운동으로 극우 분위기가 압도적이 되어 예루살렘의 유대 교회 자체는 보수화되고, 바리새적 열혈당적 분위기가 대부분이 되었다.
⑥ 야고보가 이러한 교회의 보수적인 지도자로서 이방 선교를 도외시하거나 위험시 했을 가능성이 크다.
⑦ 바울은 이러한 상황에서 자신의 복음과 사도직이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증명하여 예루살렘 지도자들과 독립적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자신을 인정하였음을 강조한다(갈 1-2장). 그리고 이어서 이방인에게 선포한 복음의 내용을 해설한다(갈 3-5장).

5. 갈라디아서와 다른 바울 서신과의 관계
1) 갈라디아서와 로마서
① 공통점
주제
갈라디아서
로마서
칭의론
 
 
합 2:4 인용
3:11
1:17
아브라함 인용(창 15:6)
3:6
4:3
선교 비젼의 성취(창 12:3; 18:18)
3:8
4:17
영과 육의 비교
5:16-17
롬 7-8장
하나님의 아들 기독론 및 구원론
4:6
8:15ff.
율법 요약
5:14
13:6

② 차이점:
1. 로마서가 차분한 논증임에 반하여 갈라디아서는 격정과 심한 논쟁, 분노가 포함되어 있어서, 성질 급하게 쓴 서신으로 그 독특성을 지니고 있다.
2. 갈라디아서에는 칭찬하는 구절이 하나도 없다(1:6, 고전 1:, 감사의 인사가 있고, 은사에 대하여서도 감사)
3. 갈라디아서에는 “꾸중하기 전의 칭찬”(Captatio benerolentiae)이 없다.
=> 로마서가 갈라디아서보다 뒤에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2) 갈라디아서와 고린도후서
① 공통점: 사도성을 변호하며, 복음을 공격하는 유대적 거짓 교사들이 예루살렘을 자랑한다.
② 차이점: 갈라디아서가 사도성보다는 복음을 변호하는 것에 반하여 고린도후서는 복음보다는 사도성을 변호하나 적대자들은 비슷하다.

3) 갈라디아서와 데살로니가전후서
① 공통점이 없다. 갈라디아서의 기록 연대를 초기로 잡을 경우 기록 연대가 비슷하다.
② 차이점: 데살로니가전후서가 49년경에 기록되었는데, 주제가 재림을 기다리다 일찍 죽을 경우에 대한 상담이 들어있으며,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는 권면이 있어서 임박한 재림에 대한 주제가 강력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칭의론은 없다. 반면에 갈라디아서는 칭의론이 주제이고, 임박한 재림에 대한 소망이 약하거나 없다.
③ 초대 교회의 신앙과 신학의 발전의 모델을 가진 자는 데살로니가전후서가 이른 연대이지만 갈라디아서가 후기 연대라고 주장한다. 임박한 재림에 대한 소망이 약해진 연후에 갈라디아서가 기록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후기 연대가 분명한 요한계시록은 재림 사상이 가득하며, 비교적 이른 연대인 로마서나 빌립보서에 역시 재림에 대한 열망이 그대로 있다.
④ 학자들 중에는(W. Wrede) 데살로니가전후서와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를 비교해서 원래 바울의 복음이 칭의론이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안디옥에서 베드로와 논쟁하고, 갈라디아에서의 논쟁을 거쳐 점차 칭의론이 발전했다는 것이다.
⑤ 슈바이처(A. Schweitzer)는 바울의 중심 신학이 그리스도의 신비주의(Christ mythicism)라고 주장하여, 그리스도와 죽고 부활하여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이 바울 신학의 중심 내용이라고 주장한다. 바울 신학의 주 분화구는 그리스도 신비주의이고, 갈라디아서나 로마서의 칭의론은 부차적 분화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는 바울의 윤리는 그리스도와 연합 사상에 근거하며 구원론에서는 윤리학이 나올 수 없다고 본다. 그러나 그리스도 신비주의는 칭의 구원론의 내용과 동일하다. 이 둘이 하나인 것이다.
⑥ 데살로니가전후서나 고린도전후서에 역시 칭의론이 농축되어 나타난다(살전 2:9-10; 고전 1:30; 고후 5:21). 그 교회에서 문제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전개하지 않았을 뿐이다.
⑦ 각 서신서들의 주제는 바울 신학의 발달과 연관된 것이 아니라 그 교회의 문제와 관계가 있다.

4) C. H. Dodd는 바울의 종말론이 발전했다고 주장하며, 고전 15장과 고후 5장이 분수령이라고 주장한다. 고전 15:45f.에서 바울은 눈 깜짝할 사이에 산 자들이 변화될 것을 말하며 자신도 살아있는 우리 속에 포함시키지만, 고후 5장에서는 재림 이전에 죽을 가능성을 내다본다. 더 나아가서 빌립보서 1장에서는 죽어서 더 가까이 가기를 원하게 된다. 이러한 모습은 바울이 예수의 임박한 재림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되리라고 기대했으나 고후 1장에서 언급된 말할 수 없는 고난(죽음에 직면한 고난)을 받은 후 재림 전에 자신이 죽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진지하게 생각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에 대한 묵상이 시작되었고, 결국 개인적 파루시아를 생각하여 죽음으로 말미암아 각 개인이 그리스도를 만나게 된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고 주장한다.

6. 갈라디아서에 나타난 바울의 대적자들
1) 전통적 견해: 유대인의 율법과 의식을 지키지 않고서는 완전한 구원을 얻기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유대화를 고집하는 기독교인들로 이들은 할례를 이스라엘의 언약 공동체, 심지어 새 이스라엘의 일원이 되기 위한 증표로 이해한다.
2) 그들이 대변하는 유대교, 혹은 유대적 기독교에 ⓐ “초등학문” 또는 하늘의 권능들에 대한 모종의 경외 행위 등이 포함되어 있었고, 따라서 ⓑ 이교도의 예배와 혼합된 상태였을 것이라는 암시가 있다(4:3, 8f.). ⓒ “날과 절기”를 지키는 것은 유대인 절기만을 가리키기보다 행성의 운행이나 천체의 별자리 표적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4:10). 또한 ⓓ 개인적이며 공동적인 윤리적 책임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전혀 쓸 데 없다고 보며, ⓔ 사사로운 생활과 사회적 행실에 있어서 방종에 빠지고 이기적인 자세를 가진다고 하더라도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는 도덕관을 가지고 있다(5:13-26). 그들은 ⓕ 동료 신자들에 대해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고 또한 ⓖ 공동체에 속한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판단하는 태도를 가졌다(6:1-10).
① W. Schmithals: 그 교사들이 주입시키려 했던 유대주의는 영지주의적 다양성을 가진 것으로 할례를 구원에 필수적인 의식으로 보는 동시에 도덕적 책임에 대해서는 이완된 자세를 가지는 것이었다고 주장
② F. R. Crownfield: 할례에 하나의 상징적인 가치를 부여하는 일단의 유대주의의 혼합주의적인 한 형태이다.
③ 바울이 전혀 다른 두 부류의 적대자들과 투쟁하고 있다.
W. L?tgert: 바울이 전통적인 유대주의적 율법주의자들과 도덕법에 대해 이완된 견해를 가진 영적 열광주의자들의 전혀 다른 두 부류의 적대자들과 투쟁하고 있다고 주장.
W. Marxen: 바울이 한편으로는 바리새주의적 율법주의와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에서 윤리적 이완을 불러일으킨 반 율법주의적인 경향과 싸우면서 자신의 복음을 수호하고 있다고 주장.
④ Robert Jewett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세 율법의 종교적 주장들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는 주장과 “그리스도의 법”이 계속적으로 적용된다는 사실, 그리고 도덕적 이완을 도무지 용납하지 않는 성령의 다스리심에 대한 주장은 너무 대조적이어서 그 두 가지를 함께 묶을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그 배경으로 당시 열심당의 민족적 봉기가 맹렬히 타오를 때의 상황에 초점을 맞추어 설명하려고 한다. 그는 당시 유대 그리스도인들 중에 충성된 유대인으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입증하기 위한 방식으로 할례를 강조하고,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과의 관계를 끊음으로 자기들 내부에서의 반대를 벗어나며 유대 지방의 열심당의 정서를 가진 유대인들의 분노를 피하려는 시도가 있었을 가증성에 착안하여 갈라디아서의 바울의 대적자들을 설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