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성경강해***/- 빌립보서 강해

[스크랩] 빌립보서 연구

에반젤(복음) 2019. 12. 10. 19:11



        

빌립보서 연구


 

1  위치와 도시의 형성

  마케도니아의 첫 성인 로마의 식민지이다.  에게해에서 내륙으로 약 16 키로 정도 떨어져 있다.  이곳의 이름은 빌립 대왕의 이름을 따서 붙여진 이름이며, 이름의 뜻은 우물, 샘이다. 이곳에는 수많은 산으로부터 내려오는 셈이 있는 곳이다.  금과 은이 많이 나던 곳이며 페니키아 상인의 무역의 중심지였다.  동서로 이르는 관문으로 전략적 요충지이기도 하다.  기원전 356년에 마게도냐 왕 필립 2세가 사람들을 이주시켰다.  그 후에 여러 번 정복 과정을 걸치면서 로마의 식민지가 되었다.  로마의 삼두정치의 동맹자인 옥타비우스와 안터니우스와 레피투스는 로마의 공화주의자인 부르터스와 카시우스사이에 전쟁을 치루어 삼두정치의 동맹자들이 승리하였다.  옥타비우누스가 실권을 장악하여 퇴역한 군인들을 이곳에 주둔시켰다.  이로 인하여 이곳 시민들은 로마의 시민권을 누리며 모든 권리를 누리며 살았었다. 바울은 이런 곳에서 살았던 저들에게 하늘의 시민권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1834년 5월에 두 명의 미국인 선교사가 이곳을 방문하여 바울과 실리가 매맞던 자리이며 시장과 원형극장의 모습을 살펴보았으나 완전히 볼 수가 없었다.


2.  빌립보 교회의 설립

이곳의 지명은 바울의 옥중 서한의 편지로 일약 유명해진 곳이나 복음이 유럽에 전파된 최초의 장소이다(행 16:7~10).  바울은 이곳에서 소아시아 지방의 비단 장사 루디아를 개종시키고, 귀신들린 처녀를 고쳐 주고, 그녀를 고쳐 준 일로 인하여 고난의 경험인 감옥에 투옥된 상태에서 간수장이를 회개시켜 침례를 베풀었다.  이곳의 교회 구성 요원들은 특별한 사람들은 아니다.  바울은 이곳을 행 20장 1~6절에서와 살전 2: 2에서 빌립보를 들린 것을 말하고 있다.


3.  편지를 기록했던 연대와 장소

기록 장소는 로마이다.  그가 감옥에 갇혀서 매어 있을 때이다.  바울은 이곳에서 만 2년을 보냈다.  이 편지가 쓰여진 때는 그의 형 만료 시였다.  자신은 자신의 운명이 어떻게 될 바를 모르고 죽을 것도 각오한 상태에서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다시 만나 볼 것을 기약하고 있다.  기록 시기는 AD. 61, 62년경으로 보며 AD. 64년에 박해가 임하였다.


4.  편지의 성격과 형태

에바브로디도를 통해서 빌립보 교인들에게 보내어진 글이다.  그는 감옥 중에 있는 믿음의 스승을 위하여 파송되어 온갖 어려운 일을 도맡아 해 온 일군이었다.  그가 이곳에서 병이 들었다.  바울은 그에 대하여 2장 26, 27에 고심한 흔적을 보여준다.  병이 나은 즉시 저를 빌립보로 보내었다.  바울은 자신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이 글을 썼다.  그는 남을 위해서는 살게 되기를 희망하고 있다.  또한 그는 결코 자기를 위해서 살고자 하지는 않았다.  그는 그리스도가 자기 안에서 존귀케 되기를 바란다.

이 서한은 부드럽고 친절한 내용의 편지로 “놀라운 것들의 서한”으로 불리어진다.  편지에는 보낸 이의 정신과 인간 됨됨의 인격이 엿보아 진다.  다른 편지들에는 비난과 꾸짖음이 있으나 이곳에는 오직 감사함과 칭찬만이 있다.  빌립보 서한은 교리의 전달이 아닌 사랑과감사의 표현을 다룬다.  빌립보 교회가 바울에게 끼쳐 준 은덕 때문이다.  저들은 가장 어려운 고통을 받고 있는 바울을 시련 때에 도운 자들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을 평소에 실천한 교회이므로, 바울은 저들을 상대로 칭찬을 아끼지 아니하였다.  이 글에는 사랑하는 양을 놓고 자신의 생명이 죽어 가는 것을 느끼는 순간에도 바울은 저들을 위해서 살기를 희망하는 마음의 굳센 의지를 보여준다.  본서에는 기쁨이란 단어가 16번 나온다.  그리스도 안에서 어떠한 고난과 역경이 임한다 하더라도 기쁨을 가질 수 있다는 격려의 서한이기도 하다.

  이제 이 편지를 읽노라면 아래와 같은 느낌을 가지게 된다.

① 하늘이 멀지 않은 것같이 금방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느낌을 갖는다.

② 무거운 죽음의 정죄를 받게 될 순간에 처한 운명이면서도 죽음을 눈 앞에 두고 쓰는 편지로 엄숙함, 친절, 애정의 무한함을 뭉클 뭉클 솟게 한다.

③ 저들의 친절을 기억하는 바울의 정신을 보이며, 저들의 번영을 위해 인자를 베풀며 감사가 넘치는 말로 마치 부드럽고 친절한 권면을 발하는 아버지의 느낌을 갖는다.

④ 사도로서의 권위와 권위 있는 상사의 입장에서 발한 말이 아니라 다정한 우정으로 말하는 아버지의 언어를 풍기게 한다.

⑤ 죽음을 남겨 두고 있는 그로서, 사랑하는 자들을 향하여 줄 수 있는 최고한의 애정이 담겨 있다.  이 글은 오랜 세월을 두고라도 우리 모두에게 동일한 권면과 충고로 아로새겨진다.


5.  내용 전개

1장에서는 편지의 문안에 이어 자신의 고난에 참여한 빌립보 교회에 대하여 감사하며 저들을 위하여 기도한다.  자신이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이 복음 전파에 도움이 되었다고 하면서 자신을 염려하는 저들에 대하여 도리어 위로한다.  저들에게는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하라고 한다.

2장에서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는 권면을 남긴다.  그러기 위하여는 겸손하여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길 것이며 사랑으로 화합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의 죽음을 본받아 삶의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자신을 위하여 수고한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의 사역을 소개하고 저들을 존귀히 여기라고 한다.

3장에서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가져야 한다.  할례를 강조하는 유대주의자들의 신조를 버리고 그리스도를 좇아가는 달려감의 생애를 살 것이다.  형식적인 율법을 준수하고자 하는 경향에서 벗어나야 한다.

4장에서는 그리스도의 평강의 마음 자세를 가져서 분쟁과 다툼이 없어야 하는 바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뻐하는 삶을 지녀 하나님의 평강을 소유할 것이다.



1장


1-2절.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의 이름으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감독과 집사들에게 문안드리는 인사의 말임

디모데와 바울의 관계 - 초기 선교 여행 때에 동참자이며(행 16: 1), 바울은 이곳에서 이곳에서 디모데와 에라스도 두 사람을 마게도냐로 보냈다.  에베소에서 있었던 일을 술회하며, 그 후에 예루살렘에 가던 중에 떨어뜨려 놓았다.(행 19:21).  이 때까지 줄곧 바울의 동행인이 되다가 행 20:1~에 다시 만나 아데나까지 함께 가는 동행인으로 합류하였다.  바울은 디모데를 믿음에서 낳은 아들로 부른다.  따라서 디모데는 바울의 제자가 된 것이다.  디모데의 어머니는 유대인이며 아버지는 헬라인이었다.  외조모가 독실한 그리스도인이었다.  이 글을 쓰던 당시는 바울은 투옥을 당하였고, 디모데는 스승을 돕기 위하여 많은 수고를 아끼지 않던 자로 여러 달 동안 그와 있었음으로 잘 알았던 자이다.

  바울은 이 서신을 쓸 때에 독특한 양상을 보인다.  그는 모든 편지 서문에서 자신의 신분을 꼭 밝혔었다(갈 1: 1, 엡 1: 1, 고전 1: 1, 고후 1: 1).  그러나 이곳에서는 그러한 것을 초연하고 있다.  이 글은 사랑과 칭찬의 편지이므로 격식과 자신의 신분을 굳이 애써서 밝힐 필요가 없는 것으로 이미 다 아는 사이에서 연유된다.  바울은 이곳에서 자신을 예수의 종이라고 부르고 있는 겸손을 보여준다.

  종의 개념 - 헬라에서는 사업상 거래로 행하여졌다.  종은 성전 창고에서 구매 값으로 지불되었으며, 소유자는 그 종과 함께 성전으로 간다.  소유자는 그 종을 사서 신에게 판다. 그러면 그 종은 특별한 사람의 소유가 된다.  이렇게 해서 그가 실제적으로는 자유케 된다. 비유에 사용된 종의 개념은 신이 자신을 샀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바울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샀다고 했다.  값으로 산 바 되었다고 고전 6:20에 말씀하며 롬 6:18에서는 자유케 되었다고 하였다.  그가 자유케 된 사실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그리스도의 소유로서 자신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을 위하여 몸을 버리신 예수를 사랑하고 있다.  이것은 가상이 아니라 참 실재이다.  우리들은 죄와 사단에게서 구속을 받았다.  또한 그러므로 율법과 육의 행위에서 벗어나 주님에게 지배받도록 되어져 있다.  이 말은 그리스도 예수와 연결된 것으로 예수의 복종된, 인정된 소유를 의미하며, 강제적인 의미는 없으며, 그에 속한 자로서의 면모를 보인다.  그리스도 예수란 인간이 아닌 하나님이신 그를 생각하는 말로, 거룩하시고, 전능하시고, 그의 마음속에 통치하시는 신으로서의 말씀하시는 자이시다.

  편지에서의 문안 대상으로서 맨 먼저는 성도이다.

성도 -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어 부르심을 자로서의 성도(롬 1: 7)이며, 이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어져 가는 신자를 말한다.  원래는 히브리어의 ‘카다쉬’(???)로 ‘분리’, ‘봉헌’이란 뜻이다.  즉 거룩하게 쓰여지기 위하여 갈라놓은 것들로 하나님께 바친 것이다.  즉 그리스도인은 생활과 생각에 있어서 거룩한 자가 되어야 한다.  베드로는 벧전 2: 9에 택한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자, 그의 소유된 백성이라고 부른다.  성도란 마음과 행동에서 거룩한 이상을 추구하는 관계를 가져야 한다.  그래서 실제로 거룩히 되어 가는 경험을 가져야 한다.  신분상에 있어서 유대인이 된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바울은 이 말을 그리스도와 자신의 생애를 밀접하게 연계시킨다.  그리스도 안에서란 말을 이 책에서는 8번을 사용하고 그의 편지에서는 37번을 사용하였다.  그리스도 예수는 41회, 주님 안에서는 43회 기록하였다.  모든 것이 주님 안에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사는 것, 죽는 것, 행동하는 것 그 모든 것이 주님 안에서이다.  하나님께서는 도처에 죄악으로 얼룩진 도시 속에서 당신의 성도를 가지고 계신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이 말은 한없는 고무적인 말씀이 된다.  우리는 이와 같이 교회 속에서 산다는 것이 참으로 큰 특권임을 감사하여야 한다.  서신의 둘째 문안 대상으로는 감독과 집사이다.

  감독 - 교회를 치리 감독하고 인도하는 교회 치리자로 목사급에 해당되는 직분이다.  이곳 교회는 꽤나 큰 교회로 발전된 인상을 주고 있다.  감독은 장로로 불리어졌다.  한 교회가 크면 여러 장로가 있었으며 아직도 이곳에서는 원시교회의 초창기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바 장로는 주로 그 사람의 인격, 인품을 가미해서 불러진 말이며 직책으로는 감독이라고 하였다.  오늘날 원로 목사를 Elder라고 부르는 원리와 같다.

  집사 - 종을 뜻하는 ‘디아코노스’(διακ?νοι?)이다.  그리스도의 종으로서의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맡은 자이다.  섬기는 자로 사역자들, 새 언약의 일군된 자들을 명명한다.  교회의 재정을 담당하며, 아픈 자들과 가난한 자들을 방문하여 감독보다는 작은 일로 소규모의 일을 맡았다.  처음의 선교 여행 이후 10여년 만에 훌륭하게 교회가 성장한 모습을 보여준다.  2절에는 문안이 먼저 나오지 않고 기도가 나온다.  그만큼 사랑의 애정이 지대한 것을 보여준다.  이는 저희들을 축복하고 싶은 마음의 여지를 보여준다 . 은혜와 평강에 대한 기원에서 은혜와 평강이란,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멸망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고 구원하는 호의를 가리킨 말이다.  평강은 은혜에서 온 소산이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화목이 이를 이루어 낸다. 평강이란 글월은  바울의 서신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빼놓을 수 없는 문안의 인사말이다.


3절 -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한다.  이는 자기의 하나님이 빌립보 교인들을 행하여 크신 일을 하게 된 것에 대해서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그저 사람에게 받은 것이면 그 앞에서 칭찬하기 일수이다.  저희들의 불우한 환경 형편 가운데에서라도 받은 물질적 도움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임을 마음속 깊이 느끼고 있는 것이다.


4절 - 그는 간구할 때마다 기쁨으로 항상 간구한다.  바울은 사랑과 동정을 받은 것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저들을 위하여 간구하는 일을 한다.  간구하는 것은 도움을 받기 위하여 하는 것이 아니라 준 사람의 입장에서 받을 것이 있기 때문에 간구로 답하고 있다.  그것은 바울 자신이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의 기도를 통해서 받게 될 그러한 종류의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항상 기도하면서 저들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기도함에서 어느 누구 하나라도 빼놓지 않고 있다.


5절 - 간구함에 대한 이유를 밝히고 있다.  너희들이 처음부터 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내가 전한 말을 가지고 교제함을 인함이라고 한다.  복음이란 예수의 말씀인 바 예수님이 발하신 살아 역사하는 능력이다.  그것이 저희를 착한 일을 하게 하고 있다.  너희들이 예수님을 가지고 있으므로 복음이 요구하는 완전한 충만한 사람으로 만들음을 내가 확신한다고 한다.  이것은 저들의 신앙의 여일한 믿음을 가리킨다.  그들이 들은 바 복음의 말씀에 저들은 진정으로 자유케 만든다.  그래서 저들은 다른 사람들과 같이 교제하며 필요한 것들을 서로 나누어주고 복음의 유지를 위해서 적극적으로 힘을 쓴다.  저들은 교회의 생명인 친교를 잘했던 자들이다.  복음은 같은 신조를 가지게 하며 공동 운명을 지니고 살아가는 자들이다.  복음의 친교는 꾸준한 것이다.  사도들은 이것을 잘 감당하였다. 사도의 정신이 이곳까지 뻗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것들이 감옥에 있는 바울에게 동정의 구호기금을 보내게 했다.  우리는 3-5절에서 여러 가지 사실을 유추하게 된다.

① 복음 사역자들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기쁨이 무엇인지를 보인다.  요한은 요 3서 1장 4절에 진리 안에서 행하는 기쁨보다도 더 즐거움이 없다고 한다.  이것은 농부가 수확에 가지는 기쁨이다.  선생들이 학생들에게서 바라는 품행의 단정과 덕스러움,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바라는 효도와 성공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나 진리 안에서 바라는 즐거움보다 더한 기쁨은 없는 것이다.  목사들이 교인에게서 바라는 것들은 경건, 평화, 축복의 사람으로 종교적 열성을 보고 싶어한다.

② 잘 할 때에는 칭찬을 하여야 한다.  칭찬은 자만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아첨이 아닌 진정한 참 그대로의 평가이다.  선하게 되기 위한 칭찬을 하여야만 한다.  물론 잘못하였을 때에는 나무람이 따라야 하나 칭찬은 좋은 목적을 위하여 사용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바라는 것은 기쁨이다.

③ 우리는 친구들을 떠나 멀리 떠나 있을 때에라도 나를 위해서 베푼 온정, 친절 등을 기억하여 저들의 평안을 희구하기 위한 끊임없는 기도를 드릴 것이다.  상대가 위협과 고통과 화를 당하고 있을 때에 저들은 기도의 절대적인 도움이 필요 된다.


6절 - 빌립보 교인들을 상대로 하여 갖는 확신을 말한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심을 우리가 확신한다고 하였다.  이곳에서의 확신은 강한 언어를 구사하고 있다.  충만하게 되어 좋게 설득되어지는 것을 확신함이다.  그가 말한 진리의 전적인 수긍이며 그것은 그리스도 자신의 일이다.  바울 자신의 의지나 어떤 대리로써 되어질 일이 아닌 하나님에 의하여 될 일이다.  인간이 하는 일에는 그러한 절대적인 확신을 가질 수가 없다.  이루게 한다는 말은 ‘에피테레세이’(?πιτελεσει)로 완전을 향하여 가지게 함, 완전케 하는 것, 끝까지 계속되어질 수 있는 것으로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지속적인 과정에서 끝마쳐지게 될 미래를 보게 한다.  이것의 성취 과정은 우리를 은혜로부터 떨어지기 않도록 우리를 보호한다.  시작하신 예수께서 종국적인 온전한 완성으로 성취를 우리 안에 이루게 할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의 날은 심판의 날이다.  그 날은 당신의 것을 불러모으는 날이다.  그 날을 맞기 위하여 우리들은 인내하여야 한다.  이는 언어로서는 더 이상 나타낼 수 없는 가장 완전한 표현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에게 할 것들을 나타낸다.  착한 일을 시작하신 그리스도께서 언급한 것들로는 우리로 하여금 다음의 것들을 생각나게 한다.

1. 하나님만이 홀로 한다.  인간은 너무나 변하기 쉬운 존재이며, 방향이 없는 생애를 살며 시험에 빠지지 쉬운 존재이다.

빌 2:13 -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행하게 하신다.

히 12: 2 - 온전케 하시는 이이시다.

히 13:20, 21 - 평강의 하나님이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 자기의 뜻을 행하신다.

2. 이루심은 하나님 편에 있다.  이에 대한 결과로서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영혼 속에서 은혜의 역사를 행하신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계획대로 가치가 있는 일들을 자신이 이루신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는 일들의 열거로는,

롬 8:29, 30 - 미리 아신 자들로 하여금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신다.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신다.

요 10:27~29. 영생을 주시고, 멸망치 아니하시고, 빼앗는 자 없다.

히 6:17~20. 우리를 위하여 약속하시고, 맹세로 보증하시고 다시금 이 일에 성취를 이루셨다.  이와 같은 성취를 위해서는 하나님의 끊임없는 관심과 지도에 신뢰를 가져야 한다.  우리는 주께서 하실 일을 허락하여야 한다.

히 3: 6 -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다.


7절 - 이와 같이 생각함이 마땅하다고 한다.  그 이유를 가리킬 때에 너희가 내 마음에 있다고 한다.  너희가 내 안에 있고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은 저희들을 생각하는 목자적 관심을 드러내는 말이다.  저희들을 진실한 그리스도인으로 구원받는 자들로 믿는 마음이다.  내 마음에 있는 너희란 말은 저희들의 친절한 증거를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있음이다.  ‘생각한다’는 말은 지적인 생각과 관심을 갖는 마음의 상태를 의미하는 ‘프로네인’(φρονε?ν)이다.  따라서 이 말은 저희들의 구원을 바라는 열망이다.  저희들의 행동이 구체적으로 나타남은 바울이 감금당한 상태에서 자신을 시중하였고 복음을 변명하였던 때문이다.  바울은 심문을 받을 때에도 자신을 도운 것을 기억하고 복음을 알리기 위하여 노력한 모습에 깊은 인식을 가지고 있다.  복음은 들었지만 흔들리게 하는 자들이 있게 마련이다.  이런 상황에서 흔들리는 신앙을 굳게 해주고 있다.  바울은 저들을 가리켜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라고 한다.  바울은 자신과 함께 축복을 나누어 갖게 될 것을 기원하고 있다.  저들이 바울을 도운 일은 구속주의 입장에서 도운 것으로 평가될 일이다.  이곳에서 사용된 ‘매임’, ‘변명함’, ‘확정함’ 모두는 법률 용어이다.


8절 - 너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나의 증인이라고 한다.  이는 애정 깊은 사랑과 보기를 열망하는 마음을 하나님만이 안다는 뜻이다.  이는 누구를 통해서 알아달라고 하는 일이 없다.  심장은 ‘스프랑크나’(σπλ?γχνα)로 간, 폐 등으로 내장이며 정서의 발원이 되는 곳으로 깊은 애정이 있음을 가리킨다.  사 16:11에 애정과 동정, 염원을 나타낸 말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속시키기 위해서 가지신 그러한 강한 열정이다.


9~11절. 저들을 위한 애정의 표현에서 기도로 나아간다.

1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함

  사랑 - 사랑은 교회에서 있어야 할 내면상의 단합이다.  서로들을 아끼고 동정하고 의무와 책임을 가지며 감사를 나타내며 상호간의 사랑 속에서 하나님이 목적을 달성하여 하나님이 우리의 증인임을 발견토록 하여야 한다.  말로만 하는 애찬, 애정은 열매 없는 무성한 나무와도 같은 것으로, 별로 실속이 없는 것이다.  바울은 기도함으로 저희들의 행복을 바라고 최대한의 가질 수 있는 것들을 바라며 하나님께로 가져가는 영적인 사랑에 Key point를 맞추고 있다.  이곳의 사랑은 ‘아가페’ 사랑이다.  형제, 우애의 사랑이 아닌 하나님의 것으로의 이웃에 대한 사랑이다.  여기에서의 사랑은 한 곳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지식적으로 또한 총명으로 더욱 풍성하게 되는 성질이다.  사랑은 맹목적인 육욕적 사랑이 아니라 지식적인 애정을 소유한 것으로 하나님의 요구에 합치된 것이라야 하며, 더욱 더 높은, 마치 샘의 근원에서 흘러나오는 것처럼 흘러야 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봉사의 연결로 나아가는 넘치는 사랑이다.

총명 -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는 지각이다.  도덕적인 감수성과 영적인 이해력의 기능, 양심을 유지하며 도덕적인 것에 지배를 받는다.

지식 - 경험적인 지식으로 구원하는 진리에 개인적인 이해가 따라야 한다.  이는 경건한 생애에 나타난다.

요 17: 3 - 영생은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엡 1:17 - 계시와 지혜의 정신으로 하나님을 안다.

   4:13 - 하나님을 믿는 것과 아는 일(지식)에 다 하나가 되어야 한다.

2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름

  선한 것은 ‘디아페론타’(διαφ?ροντα)로 본래 ‘다르다’, ‘뛰어나다’ 라는 의미로 ‘중요한 것’이나 ‘뛰어난 것’, ‘최선의 것’을 뜻한다.  분별하다는 ‘도키마제인’(δοκιμ?ζειν)으로 시험한다는 의미를 지닌 저들의 본성을 시험하기 위한 금속을 노출시키는 과정을 말한다.  저들은 참되고 진실된 순수함을 지니는 인격자가 되어야 한다.  조잡한 것으로부터 분리를 뜻한다.  이것이 인간 편에 사용될 때에는 선악의 구별이 된다.  선악에 대한 구별이 없는 자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가 없다.  그리스도인은 믿어서 막연하게 구원이나 받는다는 개념을 가질 것이 아니다.  바울은 더욱 더 참된 그리스도인의 개념을 가지도록 무장시킨다.  가장 최상의 것만을 지니는 것이 그리스도인 삶이다.  진실이란 ‘에리크리네스’(ε?λκρινε??)로 태양 빛이란 ‘헤일레’와 ‘크리노’의 합성어로 본다.  완전 무결한 태양 빛으로 시험하다라는 의미로 깨끗하고 투명한 티 없는 순진성을 가리킨 말이다.  엡 6:24, 벧후 3: 1, 고전 5: 8 등에 순수한, 순전함과 누룩 없는 떡으로 한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순전함을 받으라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 말은 더 이상 의심할 바 없는 것으로 그리스도인 성품에 적용할 때에는 거짓이 없는, 보충함이 없는, 위선이 없는, 잘못이 없는, 세상 정신이 없는 죄 없는 동기 자체가 밝은 것이다.  이는 사람에게서 바랄 수 있는 최고의 것으로, 실은 그리스도인에게서나 바랄 수 있는 것이다.  어떠한 사람이 이런 진실함에 이를 수 있음에 대한 답으로는,

① 진실되게 회개한 사람 - 본능에 의해서 충동으로 살아가는 자연적인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② 동기가 불순하고 이기심이 없다.

③ 행동면에서 궤계가 없고 이중성이 없다.

④ 언행 일치의 사람이다.  이와 같은 자가 세상의 빛이 되는 자이다.

허물없이 - ‘아프로스코포이’(?πρ?σκοποι)로 ‘넘어지지 않는다’,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의 의미를 지닌다.  생각으로나 행동으로, 대화로 사람들에게 길을 잃게 하지 않으며 흠 없는 생애를 표현함이다.  우리들은 이것을 그리스도 오시는 날까지 기대하는 것이다.

3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함이다. 의의 열매는 갈 5:22의 나오는 성령의 열매이다.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한다.  빌립보 교인들은 바울에게 도움을 주는 일로 그로부터 이러한 기도의 지원을 받게 된다.  열매는 우리의 품성의 시금석이다.  열매로 사람을 알게 된다.  의는 죄가 없을 뿐 아니라 적극적인 열매로 믿는 사람들의 생애에 나타나는 그리스도인의 의로운 품성의 임재이다.  그리스도 안에 연합할 때에 열매가 생겨난다(요 15: 1~5).


12절 - 자신의 기원을 알린다.  바울은 자신이 감금당한 사실이 복음의 진보를 가져왔다고 한다.  진보란 “프로코펜”(προκοπ?ν)으로 비난과 박해 속에서도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빌립보 교인들은 바울에 대하여 매우 염려했었다.  그러나 실상 바울은 그렇게 까지 염려할 사항은 아니었다.  바울은 재판을 받는 동안 특별한 처우를 받고 있었다.  자신을 지키는 군사가 있었으나 자신은 셋집에 유하면서 자신을 찾아온 사람들을 영접하여 복음을 전하는 일을 쉴 사이 없이 하였다.  지금 바울을 사람들로부터 거짓 진술을 당하여 가이사 앞으로 끌려가게 됨으로 인간적인 어느 면으로 보면 하나님의 뜻을 세우는 일에 장애로 보여지지만 이런 중에서도 복음의 진보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바울은 하나님의 섭리로 감옥 중에서도 도움을 받고 시련을 통해서도 복음을 증거하기 위한 준비를 가지게 된다.


13절. - 자신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된다.  시위대는 황실에서 파송된 군대이다.  바울은 상엄한 군대의 분위기 아래에 갇히어 있었다.  자신의 매임은 그리스도 때문이었다.  그는 그리스도를 설교하였으며 단지 그리스도인이란 것 때문에 억울한 고소를 당하여 왕 앞으로 가게 된 것이다.  시위대란 ‘프라이토리오’로 지방에 있는 통치자의 막사, 집정관의 거주하는 집, 바울을 심문하는 사법자들의 권위, 바울을 심문하는 군사 등의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황제의 궁정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곳의 온 시위대란 멀리 로마의 황실까지 번져 난 모습을 보게 한다.  나중에 바울의 무죄가 알려져 사면을 받게 된다.  그러나 복음이 어디까지 알려졌는지는 상세하지가 않다.


14절 - 바울의 위의 일로 인하여 된 일이 형제 중 다수가 바울의 매임으로 인하여 주안에서 신뢰하여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하게 외친다.  바울이 당한 일이 기독교 신자들에게 용기를 주고 있다.  바울이 역경을 당하여 실망하여 복음이 증거가 아니 될까봐 노심초사하였으나 그러나 양상은 틀렸다.  멀리 로마에서도 많은 신자들을 확보할 수 있었다.  주안에서 신뢰를 가진 자들은 주와 함께 더불어 연합한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킨다.  저희들이 가진 마음의 상태를 살펴보면,

1) 바울이 복음을 증거하다가 매여 있는 사실에 저들은 분발하여 진리를 위해서라면 그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결의를 다짐하고 있다.

2) 바울이 감금된 일로 인하여, 복음이란 많은 사람들에게 은혜를 끼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3) 저들 모두가 바울의 말씀을 들었던 자로 저들은 평안한 중에서도 더욱 복음을 담대하게 외치게 되었다.  담대히 말하다는 ‘아포보스……랄레인’(?φ?βωσ…λαλε?ν)으로 현재시상으로 위험의 상태가 계속해서 존재하는 상태에서도 용기를 가지고 지속적으로 행하는 모습이다.


15-17절. 말씀을 증거하는 양상.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한다.  이러한 모습 속에서는 두 무리의 양상을 보여준다.  착한 뜻으로 하는 이들은 바울이 그리스도를 알리기 위하여 세움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는 자이다.  복음은 사랑과 충정에서 자발적으로 되어지는 일이지 강압으로 될 일이 아니다.  저들은 그리스도의 지상 명령의 말씀을 그대로 순종하여 따르는 것이다.  이곳에서 투기와 분쟁은 그 사유가 무엇인지는 잘 나타나지 않으나 바울의 영향에 대해서 투기하고 분쟁하는 무리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저들이 교리상에는 서로 일치했으나 개인적으로는 적대 감정을 가지며 바울을 해하려 한 자들이다.  바울의 영향력을 묵살시키고 저희들의 영향을 높이고자 하여 고통을 더하게 하려고 순전하지 못한 방법으로 하였다.  다툼이란 ‘에리데이아스’(?ριθε?α?)로 ‘에리듀오’와 ‘에리도스’에서 유래된 용어이다.  당파심을 위해서 돈을 받고 일하는 사람을 지칭한다.  직분을 맡은 자가 일을 할 때에 헌신적 동기에서 함이 아니라 이기적인 목적과 야망을 가지고 개인의 이익을 가지고 일하는 무리들이다.  저들은 바울의 주장을 싫어한 자들로, 유대인 교사들이나 공언하는 그리스도인들이었다.  저들은 그리스도의 종이 아닌 자로 어려움과 분쟁만을 일삼던 자들이다.  바울에게는 조금도 동정심이 없는 자들이다.  반면에 착한 뜻으로 하는 자들은 순수한 동기에서 하던 자들이다.  바울의 囹圄로 된 몸을 대신하여 복음을 잘 증거하고 있다.  바울은 후자의 사람들로 인하여 마음의 위로를 받고 있는 것이다.


18절 - 바울의 폭 넓은 아량을 보이고 있는 바, 바울은 낙천가이다.  바울은 어떤 사람들에 대하여 두려워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상대의 동기를 문제삼지 않았다.  자신에게 설령 해를 입힌다 하더라도 그리스도의 이름만 증거된다면 더 이상 문제시 삼지 않았다.  우리들은 이런 형편 가운데에서도 복음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남에게 들리어져서 영혼을 구원하는 것만 되면 되는 것이다.  바울은 오직 그것만을 기뻐하였던 자이다.  우리들은 이곳 형편 속에서 바울이 사면초가 된 외로운 모습을 본다.  그러나 그는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에는 흔들림이 없다.  자신의 처지는 어떻게 되던지 그리스도가 알려지게만 되면 자신은 아무렇지도 않다.  여기에서 배울 교훈은 모든 부류의 사람과 기쁨을 함께 갖는 일이다.  우리가 비록 아프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이 건강한 일로 인해서 기뻐하여야 하며, 내가 비록 인기가 없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이 인기를 얻게 되면 기뻐하여야 하며, 나보다 다른 사람이 더 능력을 지니게 되어 오히려 그리스도를 잘 전파될 때에는 기뻐할 것이다.  이러한 태도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가질 태도이다.


19-21절. 자신의 구원에 이르는 길이 무엇인지를 밝히며 자신이 사는 생애의 모습 속에서 그리스도가 존귀케 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움으로 그의 구원에 이를 줄 안다고 하였다.  구원의 삼대 요소는 첫째로, 자기에 대한 것은 잊어 먹고 기쁨으로 살면서 남을 인정하며 그리스도를 높이는 정신을 갖을 것이며 둘째로, 기도의 역사를 갖는 일이다.  기도의 역사로는 몬 1:22 - 오네시모에 대한 중재로 저희를 맞이할 수 있는 기회를 얻기 위한 기도, 고후 1:11 - 얻은 은사를 나누어 가짐, 롬 15:31,31 - 구원을 알게 하고, 섬기는 자신의 봉사를 믿는 자들이 맞이하는 데에 기도가 따르며 세 번째는, 성령의 도우심이다.  성령이 없는 자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우리가 그의 아들이 되면 하나님께로부터 아들의 영을 받게 된다(갈 4: 6).

  바울이 말하는 구원은 감옥에서 풀려 나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그는 감금의 고통이 은혜의 수단임을 알았던 자이다.  그리스도의 인내로 자신의 시험을 견디도록 하신 성령의 필요성을 직감하고 있는 것이다.  AA(사도핵적) 54 쪽에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취급하심에 영생을 위한 준비에 거룩한 품성을 갖게 하는 훈련으로서 되어진 것임을 말할 때에 “고통 자체는 성화시키는 능력이 없다.  이것은 영혼을 더욱 괴롭게 할 것이다.  고통이 주는 잠재적인 능력이 있는 바, 영적인 훈련을 받을 수 있도록 고통을 견디게 하는 방법이 중요하고 이 일을 성령이 뒷받침하고 있다”라고 하였다.


20-28절. 성령의 도우심으로 살게 되는 모습을 나타낸다.

20절 -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않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죽든지 살든지 내 몸에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함이다.  바울은 자신이 구하고 바라는 것에는 석방에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는 단지 복음만을 높이고 있다.  사람의 생명 자체는 이차적이다.  그가 아무리 무서운 고통과 시험을 받고 있다 하더라도 그리스도의 정신을 배반치 않겠다고 하는 굳은 결의를 보인다.  황제 앞에서도 담대하게 그리스도만을 증거하겠다고 한다.  자신이 죽고 사는 것은 상관 밖의 일이며, 죽고 사는 것이 그리스도안에 있다고 한다.  그는 죽는 순간에도 마음의 평안의 안식처를 연상하고 있는 것이다.  어떠한 일에든 부끄럽지 않으려고 하며 그리스도의 이름만을 존귀케 하려고 한다.  우리의 생애가 이렇게 되어야만 한다.

21절 -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므로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한다.  이는 자신의 생애의 목적이 자신 안에 그리스도가 살게 됨이다.  내 안에 그리스도인 정신이 충만케 되어 산다는 것은 인간적인 요소가 전혀 없는 것이다.  그는 학문이나 돈, 인기 따위에는 연연하지 않는다.  한가지 마음은 광부가 광맥을 발견하기 위하여 애를 쓰듯이 오직 그것에만 전념하고 있다.  이곳에서 사용되는 죽는 것이라는 ‘아포다네인’(?ποθανε?ν)은 부정과거로 ‘죽은 후의 상태가 아니라 죽음이 완료되지 않은 상황을 의미한다.  바울이 언제라도 죽음을 당할지 모르는 긴박한 상황에 처하여 있음을 보인다.  산다는 말은 현재 부정사로 계속적인 매일의 생애가 그리스도 안에 관계되어진 삶이다.  자신의 존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이해될 자라고 한다.  자신의 생각, 지식, 소망, 열망 이 모두가 다 그의 것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고후 10: 5 -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복종케 한다.

롬 6:11-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 산다.  이런 일은 이미 그리스도인 생애의 초기 때에 침례를 받을 때에 일어난다.

롬 14: 7 - 자기를 위해서 사는 자도 죽는 자도 없다.

롬 8: 2 -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된 삶을 살을 것임

갈 3: 3 - 우리의 생명이 하나님께 감추어진 바 됨

갈 2:20 -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생애임

벧후 3: 7~11절. 그리스도의 소망을 따라 사는 생애를 가짐

* 우리가 이러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여야 하나?

① 가능한 한 그리스도를 알아야 한다.

엡 3:19 - 그리스도의 사랑과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알려 하여 기도함

빌 3:10 - 내가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과 그의 고난에 참여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에서 부활에 이르려고 한다.  이는 안일한 상태에서 될 일이 아니며 교회에 나온다고 해서 되는 일도 아니다.  성경에서 배우고 살아가는 생애에서 나타나야 한다.

② 그리스도를 닮아야 한다.  생애의 모델로 성령이 우리 마음을 사로잡아야 한다.

③ 가능한 한 그의 종교를 알린다.  우리가 가진 재능과 예물을 적절한 곳에 사용하여 헌신     을 바침

④ 그리스도를 기뻐할 목적을 가진다.  바울에게는 그리스도만이 그의 생활 철학에서의 으뜸이었다.  그리스도인 생애를 산다고 하면서 인간적인 냄새를 풍기게 하는 것처럼 구역질나는 것은 없다.  바울은 21절에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하였다.  바울은 자신의 슬픔. 괴로움은 상관하지 않았다.  유익이란 말은 ‘유리한’ 이란 뜻으로 영어의 profit 이다.  삶보다 죽음에서 얻어질 수 있는 유리한 것을 말함이다.  이것은 개인적인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다시금 살아야 될 목적을 차분하게 24절 이후에 전개시킨다.

그리스도인이 죽음에서 얻을 수 있는 것들 - 죽음이 지상에서의 모든 괴로움이 끝나는 것이다.  이는 또 하나의 세상을 향하여 잠자는 상태로 쉬게 되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죽으면 그 모든 것이 끝난다.  그러나 바울은 죽음을 인생의 무상으로 보지 않으며, 죽음에서도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있는 길이 있고 또한 영원한 안식도 희구하고 있다.

22절 - 육신으로 사는 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가릴지 나는 모르겠다고 한다.  이 말에 대한 해석으로는,  1 그러나 육신으로 사는 것이 어려움을 통해서 내게 유익이 있는 것이지마는 그러나 무엇을 할지를 모르겠다.  2 육신으로 사는 것이 내 운명이다.  사는 것에는 나의 수고와 댓가를 지니게 한다.  그러나 나는 무엇을 할지 모르겠다.  즉 과거와 같이 고통과 근심이 따른다.  이런 중에 나는 무엇을 할지를 모른다.  3 육신으로 사는 것이 내게 무슨 열매가 있다는 말인가? 라는 의미로, 무엇을 택하여야 될지 모르겠다는 의심 가운데서 결정을 바라고 있다.  학자에 따라서 이러저러한 견해를 취하나 대개 1의 견해로 육으로 살아 복음을 전달할 수 있는 유용성을 말하나 진실로 그 무엇을 어떻게 하여야 될지를 모르겠다는 의미이다.  바울은 이 질문에서 매우 난처한 입장에 빠져 있으면서도 삶이냐 죽음이라는 심각한 선택을 하면서 결말을 갖는다.


23-25절. 자신이 두 사이에 끼어 있다고 하시면서 한편으로는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것이 더 좋다고도 한다.  그러나 내가 육신 중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다고 한다.  두 사이에 있다는 말은 압축을 받고 있는 모습으로 짓눌리고 있는 상태에서 헐떡이며 어떻게 하여야 할지 몰라 매우 당황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마치 닻을 내려 배로부터 올라오는 순간에 바람이 불어 배를 바다로 내모는 상태가 바로 자신의 처지이다.  떠나서란 말은 풀어놓는다는 의미를 지닌다.  배가 정박한 상태에서 떠남이다.  이는 바울이 육신의 장막을 떠나는 죽음을 연상하고 있다.  이와 같이 모든 것을 잊고 싶어하는 마음을 보이고 있다.  죽는다면 모든 것을 잊을 것이고, 주님은 영원히 만나서 기쁨을 충만하게 가질 것이다.  그의 마음먹은 비중을 보면, 더욱이란 말이 강조된 것으로 보아서 죽음을 예비하고 있으며 또한 죽는 것을 더 바라고 있다.  그의 죽음은 단순한 죽음으로 죽게 되면 지니게 될 안일한 속셈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있고 싶은 열망이다.  바울의 생각에는 죽음이 100% 자리잡고 있는 듯 보이나 그의 생각이 갑자기 바뀌어지고 있다.  24절에는 내가 사는 것이 너희를 위해서 더욱 유익하다고 한다.  즉 그가 살아서 복음을 전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다른 지역으로 복음을 선포하여야만 되었고, 권면들을 통하여 교회들을 세워야 하였다.  이러한 일들을 위해서는 죽는 것보다는 사는 것이 교회를 위해서는 더욱 바라직한 일이었다.  이제 나는 분명히 이런 일들을 위해서는 자신을 죽여야만 된다고 한다. 25절에는 너희의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해서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안다고 한다.

  바울은 자신이 사는 목적을 명확히 알은 사람이다.  그는 남을 위해서 사는 자였다.  바울이 나이가 들었고 자신의 입장에서 죽음을 택한다고 하여도 그 누가 저를 나무랄 자가 없을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를 인하여 풍성히 거하게 함이라고 한다.  믿음의 진보와 기쁨이란 단어는 매우 귀한 말이다.  이는 사람이 죽고 싶은 때에라도 살아야 됨을 생각나게 하는 구절이다.  부모가 자식을 위해서 자식이 부모를 위해서, 친구를 위해서, 연인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 삶의 윤리가 있다.  우리 목회자도 신자와 교회를 위해서 살아야 할 때가 더욱 많은 것이 사실이다.


27절 - 저희들에 대한 설교의 말씀으로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고 한다.  합당하게 생활하라는 말은 원문에 ‘폴리튜오’(πολιτε?ω)로 국가를 다스리는 시민으로서의 삶. 국가의 법과 관습에 따라서 처세하는 삶이다.  신자는 국가의 국민의 한 사람으로 모든 법이나 질서, 권위에 순복하여야 한다.  이는 교회의 생활, 집단생활, 사회에서의 생활 모든 부서에 관련되어 있다.

복음의 합당한 생활이란 무엇을 규정한 말인가?

① 우리의 모든 행동 - 대화, 사업 관계, 옷차림, 생활 방식, 오락 등

② 모든 세상 유희에서 구분되고, 세상 명예와 부를 추구함에서 돌린다.  사람들에게 빛과 소금으로의 영향을 끼친다.

③ 복음의 원칙과 규정들을 계속 공부하고 익히고 연구해서 더욱 발전시켜야 한다.  복음에 합당한 생활은 최상의 최선의 생활이다.  여기에서 우리들은 종교를 기쁨으로 맞게 된다.  이것을 모르면 참 자유가 없다.

  27절 하단부터 28절까지는 자신이 저들에게서 바라는 바를 실린다.  내가 가보나 떠나 있으나 일심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아무 일이든지 대적하는 자를 위하여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일심으로 서서는 단합의 원칙을 말한다.  성경상의 차이를 하나로, 의견상의 대립을 하나로, 교회는 둘이 될 수가 없다.  한 마음, 한 생각에서 힘의 연합이 온다.  ‘서서’란 말은 군사용어로 ‘스테코’는 굳게 서는 것이다.  빌립보는 군사적 식민지로 모든 적들을 막는 방어 요새지였다.  교회도 역시 거짓과 기만으로부터 보호를 받으려면 무장과 방어적 태세가 필요하다.  칼빈은 단합은 교회의 우수한 점들의 하나라고 하였다.  교회는 진정한 상태에로 보전시키는 비결이라고 한다.

  복음의 신앙을 위해서 협력함이란, 복음이 나누어진다면 그것은 이미 복음이 아님을 뜻한다.  이는 성도의 생활이 아닌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역사할 원천을 제공하여야 한다.

  대적하는 자는 반대자, 초기의 유대인들이다.  바울은 저들로부터 심신의 고통을 받았었다.  두려워한다는 말이 놀라듯이 놀란다는 뜻이다.  공포심을 느낄 만한 일이 있을 때에는 참아서 주님의 권고를 들어야 한다.  미리 겁을 먹지 말 것이다.  이것이 저희에게는 멸망의 빙거가 된다고 하였다.  반대하는 자는 그 반대하는 일로 멸망을 당한다.  오늘날 교회 내에서 내분을 일으키고, 헐뜯고, 하나님의 종에게 온갖 비난과 악행과 비방을 조성하는 자들이 있다.  양을 사랑하지 못하는 목자들, 지도자들, 교회 내에서 병든 양들, 위의 말씀을 따르지 못하는 자들은 그것으로 인해서 스스로 멸망을 자초하고 만다.  그러나 믿는 자들에게는 그러한 일들이 구원의 빙거가 된다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때가 되면 너희들은 높이고 구원을 받게 한다고 한다.  교회는 간악한 자들을 인하여 도무지 떨지 말 것이다.


29절 - 그리스도께서 은혜를 주신 이유를 말할 때에 이는 그를 믿을 뿐만 아니라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함이라고 한다.  주님의 은혜는 그를 더욱 믿어야 할 경지로 이끈다.  따라서 어떠한 고난 가운데에서라도 참고 인내하여야 한다. 그러다 보니 핍박도 있게 된다.  핍박과 고난은 단련의 한 과정이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시험과 역경 가운데에서 더욱 주님을 믿는 자이다.

* 고난과 관련된 성경의 말씀들

롬 8:17- 자녀이면 고난도 함께 받는다.

디후 2:10- 그러므로 내가 택하신 자를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저희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얻게 하려 함이로다.

디후 3:12- 무릇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행 5:41-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대하면서 공회를 떠난다.

골 1:24-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벧전 4:13-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낼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다.

약 1: 2-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뻐하라.

막 10:30-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나중에 영생을 받는다.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진토를 버리는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우리가 그리스도 때문에 고난받는 것이 특권인 것의 이유

1 그리스도를 고통 속에서 닮을 수가 있고 그와 연합이 된다.

2 내가 주님의 것임을 알게 된다.

3 믿음의 선한 싸움에 참여하게 된다.

4 더욱 더 영광을 받도록 된다.


30절 - 너희에게도 같은 싸움이 있음을 너희가 내 안에서 보고 들었다고 한다.  바울은 빌립보에서 매를 맞고 갇힌 바 된 것을 일찍이 저들이 알고 있었다.  살전 2: 2에서도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말했다고 하였다.  저희에게 당할 싸움에 대하여 자신의 것과 동일한 것으로 여기며 두려워하지 말라고 한다.

* 빌립보 1장의 총괄

① 그리스도의 참된 정신을 반영한다.  그리스도의 참된 정신이란 서로 돕고 기도함이다.

② 어려운 환경, 부당한 감금 중에서도 아무러한 불평도 없이 자신의 생애는 어떻게 되든지 자신의 영향을 감소시키지 않으며, 복음을 위해서 전진하며, 자신의 장차 죽음의 운명에 대하여 대비하는 자세를 보여준다,

③ 바울은 어떠한 대적도 없다.  기도를 통하여 저들을 돕고 저들을 위하여 간절한 기도를 드린다.  그가 그토록 현실의 고통에서 다소 떨어져 주님과 영원히 함께 있을 간절한 소원을 가지나 자신 앞에 놓여진 신자들을 생각하며, 저들을 위해서라면 더욱 남아 있어 자신의 불편을 감수하면서라도 저들과 다시금 합류하여 신앙 안에서 저희들을 위해서 살고자 한다.

④ 핍박을 통해서라도 구원을 받는 이치를 설명한다.  그것이 은혜의 수단으로 고난에 참여할 수 있음을 설득한다.


2장


본 장은 그리스도인의 의무 수행에 관한 권면과 그리스도인 덕에 대한 예시인 그리스도인 생활의 헌장을 다룬다. 내용 구분으로는,


ㄱ 1-4절 : 다툼과 분쟁을 버리고 서로들 한 마음, 한 뜻으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것으로 정신을 가짐


ㄴ 5-11절 : 그리스도의 모범을 통해서 저와 같이 됨


ㄷ 12-13절 : 근면과 하나님의 역사를 통해서 구원을 얻을 것을 권면함


ㄹ 14-16절 : 다툼과 시비가 없이 하나님의 흠 없는 자가 될 것을 말함.  그리하여 바울의 수고가 헛되지 않기를 바람


ㅁ 17-18절 : 바울의 희생을 보인다.  저희들의 복리를 위하여 자신을 바침과 저들과 함께 기뻐할 것을 말한다.


ㅂ 19-24절 : 저들에 대한 관심으로 디모데를 보냄.  디모데는 저들을 위할 수 있는 자이며 사도의 사랑의 증거로 보내어진 자이다.


ㅅ 25-30절 : 에바브라 디도를 보냄.  그는 바울을 돕던 자이다.  바울이 저를 보냄은 저들을 위로하기 위함이다.


1-3절. 그리스도인 생활의 지속으로 그리스도인 단합과 겸손을 장려한다.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 있거든 이란 말은 가정적 조건문이 아닌, 있는 사실 그대로를 말함이다.  이 구절에서 받는 동사는 4절 이하의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에 연결된다.  바울이 이런 말을 하게 되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이다.  그리스도의 위로한 그리스도만이 줄 수 있는 말할 수 없는 기쁨의 유산이다.  궁극적인 위로는 항상 어느 때나 고통가운데에서라도 구주로부터 받는 것이다(고후 1:5).

사랑에 대한 위로 - 상호에 대한 사랑처럼 행복을 가지게 하는 더 귀한 것은 없다.

성령의 교통 - 서로 참여하는 복음의 교제, 서로의 단합, 사랑과 열성을 갖게 한다.

긍휼과 자비 - 부모가 자식에 대하여 가지는 마음으로 모든 슬픔과 괴로움에 함께 하는 생   각이다.  자비는 복수로 순수한 애정의 임재를 나타내는 개인적인 온정이다.

  바울은 이와 같은 일을 할진대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을 말한다.  이것들이 바울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는 일이다 라고 한다.  하여야 할 일에 대한 열거로,

마음을 같이 하여 - 영혼 구원 사업에 같은 한 생각을 품음이다.  계획이나 의견이나 감정에 완전한 연합됨이다.  교회 내에서 불일치를 배격한다.

같은 사랑을 가지고 - 서로 각기 사랑하는 사랑과 애정을 가리킨다.  저들의 의견이 다를 수 있으나 사랑에서는 연합한다.  같은 마음과 같은 뜻을 온전히 합하기 위해서 가져야 할 것이다.  사랑의 대상은 예수이다.  그리스도인은 사랑의 대상이 똑 같아야 한다.

뜻을 합하여 - ‘쉼프쉬코이’(σ?μψυχοι)로 영혼을 같이 하여 라는 의미로 인격의 근저에서 나오는 깊은 관심이다.  영혼의 합일은 참으로 귀한 말로, 한 정신으로 행동함이다.

한 마음을 품어 - 서로 조화된 감정으로 같은 목적으로 바치어진 한 생각으로 마음의 연합, 감정과 계획의 하나로 다툼이 없는 것이다.  주님의 기도에 나타난다(요 17장).  한 마음이 되지 않고는 주님을 안다고 할 수가 없다.  믿는 사람 사이에는 여러 마음이란 있을 수가 없다.

TM. 489 - “하나님의 사업은 백성들이 연합하여 같이 뜻을 모아 단합할 때 번영한다”고 하였다.  우리들 각자는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기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다른 사람의 일을 돌아보는 것이다.  우리 가운데에는 자만의 마음이란 필요하지가 않다.  어떠한 육체적 힘이나 지식의 우월함이나 숫자로, 어두움의 세력을 동반하여 대항하려는 식으로 야망으로 할 수가 없고, 다른 사람을 헐뜯고자 하는 외적인 면(재능, 열성)으로만 되는 것이 아닌 오직 진리만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한 목적만이 필요하다.

허영으로 하지 않음 - 허영은 ‘케노독시안’(κενοδοξ?αν)으로 없다 라는 의미의 ‘케노스’(κεν??)와 영광이란 말의 ‘독사’(δ?ξα)의 합성어이다.  이는 헛된 생각으로 자신만을 높이는 것으로 텅 빈 것이다.  지식과 힘, 재주 등은 인간이 가지기 쉬운 것들이나 교회를 세우는 데에는 아무런 도움도 안되고 오히려 교회를 파산하게 한다.  교회는 이런 것들을 다 버려야 하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를 남보다 낮추어야 한다.

겸손함을 지닐 것 - 자만과 반대가 되는 말로,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줄 수 있는 최상의 것이다.  겸손은 자기를 보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강조하여도 지나침이 없다.  겸손은 남을 존경한다.  이것은 자신의 결점을 보게 됨으로 남의 결점을 보지 않는다.  참으로 겸손한 사람은 자신의 겸손을 느끼지 못하는 자로 그는 단순히 하나님과 자신과의 바른 관계에서 구속의 합당한 계획에 자신을 올려놓고자 애를 쓸 뿐이다.


4절 - 자기 일만 할 것이 아니라 다수의 복리를 위해서 한다.  이는 다른 사람의 일에 필요 없이 관여함이 아니라 저들이 선을 이룰 수 있도록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미 자신만을 위해서 사는 사람의 속성을 넘어선다.  따라서 다른 사람의 바라는 바를 무시하지 않는다.  자신의 편협심, 이기심을 다 제거하고 다른 사람의 번영을 구한다.  자기와 생각이 같지 않다고 해서 타인을 업신여기지 말 것이며 험담하지 말 것이다.  남의 사사로운 일에 간섭하지 말고 저들로 하여금 당하는 어려운 일에 동정하여 자발적인 봉사를 갖도록 할 것이다.  이상의 것은 영적인 관심들이다.  교회에 속한 자들로서의 보살핌 이것이 내가 잘 되는 비결이다.  이곳의 돌아보다의 ‘스코푼테스’(σκοπο?ντε?)는 목표와 목적을 바라본다는 뜻이다.  목적의 내용에는 이익이나 생활의 어려움이란 해석이 있고, 또는 동료 그리스도인들의 은사나 자질들도 내포된다.  내용의 의미는 타인들을 잘 보살펴서 상대의 이익과 유익함을 도모한다는 뜻이다.  여기에는 죄인을 인도하는 책임도 따른다.  세상의 모든 것은 교회에 달려 있는 것이다.  저희들을 깨우쳐서 오시는 그리스도를 알리고 그리해서 주님을 준비하게 하여야 한다.  바울은 이런 일로 인해서 자신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5-8절. 여지껏 연합에 대한 것을 강조하면서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말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마음을 품으라고 한다.  이 말은 주님이 가지신 겸손을 말하는 바, 그의 도덕적 성품과 이타적인 봉사와 구속사업을 성취시키기 위하여 나타낸 겸손이다.  그 분은 누구인가?  본문에는 종전에 잘 사용되던 예수 그리스도란 말이 그리스도 예수라는 말로 바뀌어졌다.  이는 빌립보 교인들에게 인간이신 그리스도의 겸손을 돋보이게 한 용어이다.  예수께서는 인간을 위하여 높은 영광의 보좌를 떠나신 분으로 예수에 대한 인식이 인간적 이론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속사에 대한 이치를 깨닫도록 하기 위하여 자신의 겸손을 영감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는 근본이 하나님의 본체이시다.  근본이란 세상에 존재하시기 전을 가리키는 말이며, 본체는 ‘몰페’(μορφ?)로 하나님의 형체로 하나님의 성품이나 본질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모든 것을 포함한 원래의 모습을 가리킨다.  그 원래의 모습이 어떠한지는 신비에 속한다.  바울은 이 사실을 뒷받침하면서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심을 암시한다.  이 표현은 하나님과의 관계와 갖는 것으로 하나님으로서의 성품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가 겸손함으로 자기 비하로 종의 형체를 지녔다.  그의 원래의 모습을 잠시 살펴보면, 예수의 변화산에서 보여준 원래의 모습은 썩은 육신의 모습이 아니다.  요 17: 5에서는 예수께서 아버지와 함께 가지고 있던 영화로서 영화롭게 하여 달라는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신성의 면을 말한다.  그는 사람이 아닌 인간이 되시기 전의 상태이다.  이 형체는 사람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영화와 위엄을 상징하고 있다.  딤전 6:16에는 인간이 접근할 수 없는 빛 가운데 거하시는 분으로 성육신 하시기 전에 모습을 보인다.  그러한 하나님께서 동등한 것으로 취할 것을 여기지 아니하신다.  즉 하나님과 동등 됨을 바라는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으셨다.  즉 그는 하나님이었으나 종의 형태를 가져서 사람과 같이 되신 것이다.  취한다는 부당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뜻으로는 ‘탈취한다’, ‘잡는다’, ‘열심히 구한다’, ‘붙잡는 것’, ‘빼앗는 것’의 뜻을 지닌다.  그에게는 하나님과 동등 하려는 바람을 마음속에 품지 않으셨다.  실상 그는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분이셨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음을 강조하는 말이다.  예수께서는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자신의 권리와 위치를 포기하는 모습을 보여주셨다.  7절에 자기를 비었다는 말은 사람들처럼 경멸히 여김을 받을 것을 나타낸다.  ‘비어’라는 ‘에케노센’(?κ?νωσεν)은 아주 비인 상태로 모든 지위와 영예를 다 버리고 비참한 말구유에서의 탄생을 나타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본성과 완전하심 그 모두를 버렸다는 말은 아니다.

  주님은 가장 거룩하고 진실되고 흠이 없는 생활을 사신 분이시다.  그는 하늘 영광을 잠시 벗어나서 마치 해가 어두운 구름으로 덮어 가리어진 상태로 있다가 원 상태로 되살아난 일식의 현상과도 같다.  잠깐 동안의 변화는 있을지언정 그의 종국은 원래대로 돌아가실 분이시다.  그러던 분께서 그가 가장 낮은 인간의 신분으로 오셔서 엄청난 죽음의 자리까지 나아가는 과정을 본 구절에서 설명하고 있다.

사람들 같이 되었고 - 이는 가장 낮은 신분 묘사이다.  히 2:17에는 형제같이 되었다고 했다.  그는 완전한 사람인 것같이 완전한 신이시다.  인성인 면이 그의 신성을 조금이라도 격하시키거나 그에 대한 믿음을 약화시키지 아니한다.  주님이 사람과는 똑같지는 아니하다. 단지 유사성을 말한다.  외적 모양은 그러했지만 실재의 내면은 그렇지 아니하다.  외적인 모양은 우리와 같이 배고프고 갈증을 당하였으나 그래도 그는 여전히 하나님이셨다.  인간으로 오신 면을 강조할 때에 제자들 사이에서 누가 크냐는 다툼이 있었을 때에 자신은 섬기는 자로 오셨다고 하였다(눅 22:27).  그러나 그는 율법에 자원하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다(히 10:7-9).  그 분의 오신 목적은 하나님의 뜻을 이행하심이다.  그는 자원하여 죽으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행하셨다.  십자가는 명예로운 죽음이 못 되는 가장 악독한 저주의 상징이다.  십자가는 고통을 받고 죽어 가는 것이다.  주님의 죽으심은 이삭의 죽음을 연상케 한다.  이삭은 번제단에 자신의 몸을 올려놓았다.  기꺼이 복종하는 태도는 그의 생명을 보존받기 위한 목숨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준수함이 먼저였다.  그가 사단의 시험을 받을 때 자신의 능력으로 사용한 것이 아닌 성령으로 이기셨다.  DA. 119쪽에서는 이 경험은 우리로 하여금 성령에 의존하여 이길 것을 말씀하신다.  “사실상 주님의 죽으심을 우리가 이해할 수만 있다면 모든 것에서 변화함이 이르러 온다.”  십자가에 대하여 말씀한 구절인 고전 1:23에는 헬라인에게 어리석은 것이며, 유대인들에게 거치는 돌이다.  십자가의 죽음의 형별은 로마 사람에게는 결코 지우지 않았다.  그러나 주님께서 지신 것은 우리들 자신을 위하여 지신 것으로 우리의 자아를 보게 한다.  낡고 거칠은 온갖 수모와 저주의 상징인 죄와 죽음의 상징이다.  이것이 나와 우리 사이에 죄를 지적하여 이기심이 사라지게 한다.


9절 - 이러한 주님의 겸손의 정신 때문에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말하고 있다.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다.  실상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오른 손으로 올리움을 받으셨다.  그가 원래 있었던 영광의 보좌로 다시금 올리움 받으시고 우주의 통치자로 군림하셨다.  그의 이름은 구속자, 구주, 그리스도,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하나님의 아들 등 이외에도 수많은 이름들이 있으나 이곳에서의 이름이 무엇인지는 잘 모른다.  그의 지위와 신분과 호칭은 뛰어나다.  ‘지극히 높여’의 ‘휘페?소센’(?περ?ψωσεν)은 위로의 뜻인 ‘휘페르(?π?ρ)와 높은 곳인 의미를 지닌 ‘?소스(?ψ??)’의 합성어이다.  엡 1:20, 21에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보이고 있다.  다시 살리시고, 오른 편에 앉히시고, 이 세상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을 주장하는 자이시다.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했다고 한다.  이 이름에 대한 일반적인 추론은 4가지이다.

1 특별한 타이틀보다는 영화와 존엄을 나타내는 말이다.  시 34: 3, 29: 2, 54: 6.

2 ‘야훼’ - 신약에서는 주라 불리운다.

3 사랑 받는 인간적인 이름의 예수

4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성과 신성을 지닌 이름이다.


10-11절.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 모두가 예수의 이름에 무릎을 끓게 하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게 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였다.  무릎을 끓음은 경배와 찬양을 드림이다.  입으로 주라고 시인함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으로 간주된다.  하늘에 있는 것은 하늘에 있는 존재들로 천사와 하늘의 온전한 의인들이며, 땅에 있는 자는 인간들이며, 땅 아래 있는 자는 죽은 자나 타락한 천사들로 본다.  이상의 표현은 온 우주를 망라한 것이다.  우리 인간들의 생애의 목표와 지침이 무엇인지를 설명한다.  아직도 이상의 것은 성취되지 않았다.  사 45:22에는 구원에 대한 종국적인 우주의 찬양이 실려 있으며, 계 5:11-12에서도 모든 피조물이 그리스도가 통치하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대쟁투 영문 666~670에서는 사단과 그의 부하들이 예수의 발 앞에 엎드려 하나님의 방법이 의로움에 대하여 공경하고 있다.

  5절에서 11절까지의 중요한 교훈은 겸손이다.  겸손은 자기의 영광을 희생하는 것이며, 영광을 얻으려고 하는 것은 교만으로 싹이 튼다.  높아지기를 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을 잃어버리는 스스로 속는 행동이다.  무디는 하나님의 은혜와 선물은 위로 쌓는 것이 아니라 아래로 내려 쌓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는 내려가면서 더듬어야 가질 수 있다는 말이다.  하늘 집은 높으나 들어가는 데에는 낫다고 하였다.  이는 낮은 곳에서부터 시작됨을 가리킨다. 중국의 선교사로 훌륭한 일을 하였던 밀네는 선교사로 가려면 종으로 가라고 하였다.  그는 기쁨으로 준행하여 따라 나섰다.  낮은 데에서부터 처하는 것이 큰 자리로 올라서게 된다.


12절 - 바울은 그리스도의 겸손함을 갖도록 말한 다음, 사랑하는 자들에 대하여 자신의 염원을 말한다.  구원을 이룸에 대한 독려로 항상 복종하고 두렵고 떨라고 한다.  지금 이 말씀을 듣는 저희들은 바울에 대하여 깊은 존경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그 무슨 말이라도 듣고자 하였다.  그는 저들에게 내가 없을 때에라도 더욱 힘쓰라고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황공하게 생각하며 늘 순종할 것을 나타내고 있다.

  여기에서의 구원을 이룸은 스스로의 힘으로 얻는 개인의 역사를 말함이 아닌 순종을 통해서 받는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을 말한다.  복종하는 마음은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얻어진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하나님의 율법을 준행하기 위해서 오셨다.  나 없이 할 때에라는 말은 사람의 인정을 초월하고 있다.  없을 때 충성하는 것이 더욱 값진 일이다.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에 유의를 하여야 한다.  이미 얻은 구원인데 왜 이루라고 하셨는가?  구원이란 하나님과 우리와의 공동 역사이다.  우리가 게을리 하면 상실된다.  구원의 개념은 죄를 범한 죄의 정죄로부터의 구원, 죄로부터의 구원, 죄를 벗어난 종국적인 구원이 있다.  이러한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들이 요한다.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필요되는 이유의 열거

①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이유이다.  새 마음을 가져야 하며 좁은 문으로 들어갈 것이다.  죄의 사슬을 꺾고 회개하여야 한다.

② 자신의 생명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자신의 생명이 누구로부터 침해받을 권리도 없고 자신의 생명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③ 우리의 친구가 나의 구원을 이루는 것이 아니다.  구원은 내 자신의 문제이다.  저들이 나를 위하여 기도와 동정을 베풀어 줄 수는 있으나 구원은 온전히 나와 주님 사이의 문제이다.

④ 구원에는 나의 진지한 노력과 경건이 요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은 완전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구원은 행위에 의한 개념은 아니다.  엡 2: 8에는 믿음을 통해서 은혜로 구원을 얻음을 말하며, 롬 6:11~16에서는 죄 있는 생애를 살지 말라고 한다.  은혜 아래에 있는 자답게 사는 생애의 방법을 보여준다.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얻기를 사모하고 애를 쓰나 받지를 못한다.  성경은 개인들의 노력을 요구하고 있다.  눅 12:24 -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골 3: 9- 옛 사람을 벗어버릴 것이다, 히 12: 1- 무거운 짐을 벗고 인내할 것이다, 약 4: 7- 악을 제어하며, 마 24:13- 끝까지 견디라고 한다.

⑤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에 참여하여야 한다.  어떠한 참여인가?  하나님과 우리와의 연합이다.

1) 하나님이 지시한 말씀에서 구원을 받기 위한 진지한 노력이 요한다.

2) 참된 회개로 죄의 사슬을 풀음

3) 구주를 믿고 신뢰함

4)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김

5) 악한 친구들과 모든 악한 생활의 습관들을 버린다.

6) 세상의 모든 악과의 유혹을 피하여 마지막까지 견딘다.

  이상에서 밝힌 바와 같이 생활의 근본 목적이 고정되어진 다음에야 구원이 온다.  이것을 이루는 데에는 두려움과 떨림으로 이루라고 권면한다.  이 말은 자신이 잃어버릴 수 있는 위험을 느끼기 때문이다.  마치 배의 침몰과도 같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세상에는 수많은 위험과 유혹이 있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있다 하더라도 내가 잃어버려진다는 순간의 걱정과 염려를 가질 필요가 없다.  단지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면 된다.  겔 14:20에서는 구원은 각자가 이루는 것으로 남이 절대로 구원을 주지 못한다.


13-18절.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일의 열거와 저희들이 하여야 할 일을 제시하며 바울 자신의 마음을 술회한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단어는 ‘에네르곤’(?νεργ?ν)으로 현재분사로, 하나님께서 진정한 힘을 부여하시며 우리의 결심과 소원까지도 인도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관심 이상으로 우리에게 관여하신다.  그는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우리들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신다.  그의 하시는 일이란 우리에게 강제하지 아니하신다. 또한 우리의 뜻을 전적으로 무시하지도 않으신다.  단지 그의 기쁘신 뜻을 위해서 하신다. 구원의 행위에는 우리의 도움이 따른다.  하나님께서 줄 수 있는 일로는 죄의 관습을 깨고, 참된 회개를 종용하고, 마음을 개발하며, 진리를 향하여 걸으며, 반역에서부터 보호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반대하지 아니하시고 우리에게 새 힘을 주신다.  그는 우리에게 격려하는 일을 한다.  농부가 과수를 재배하기 위해서는 땅에 비를 내리시고 가지와 순을 솟게 하고 꽃을 피우는 하늘의 섭리와 함께 결실을 모은다.


14절 - 우리 인간이 하여야 할 실제의 생활 자세를 언급한다.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할 것이다.  원망은 불평과 같은 뜻이다.  성경에 나타난 불평과 원망의 모습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에서의 사건이다.  시비는 마음속에 의혹을 품은 원망의 결과에서 생겨난다. 사람에 대한 원망과 말다툼,  시비가 하나님까지 나아가게 된다.  흠이 없이는 혼합됨이 없는, 진실된, 꾸밈이 없는 이란 뜻으로 전반적인 무흠을 말한다.  순진은 인격의 내적 순결과 전혀 해됨이 없음이다.  이것이 믿지 않는 자와의 구별된 도덕적 산물이다.  어그러지고 구부러진 세대는 패역된 세상을 말한다.  이는 일차적으로 사상과 행동이 배역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적용된다.  바울 시대의 세상의 형편이 모두가 다 이러하였다.  저희들의 사상, 생활 관습, 종교 모두가 이러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저들을 흠이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빛들로 나타낸다고 하신다.  세상의 빛은 세상을 위험에서 건지시며 그 주위에 있는 모든 죄악을 환히 비춘다.  그래서 죄악을 지적하며 거룩하게 하는 일을 한다.  사 60:1, 2에는 마지막 때의 큰 빛의 역사를 언급하고 있다. 

  생명의 말씀은 복음을 일컫는다.  복음이란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종교적 제도와는 상반되는 것으로 인간 세상에 널리 알리는 것이다.  밝힌다의 원말은 ‘에페콘테스’(?π?χοντε?)로 ‘단단히 붙들다’ 와 ‘제시하다’ 로 세상에 드러낸다의 의미로 사용된다.  세상을 밝히기 위해서는 복음을 굳게 붙잡지 않으면 안 되는 이치를 보인다.  빛은 생명이다(요 14: 6, 8:12).  또한 복음의 본질은 빛이다(엡 5: 8).  믿는 자들은 주 안에서 빛이 되며,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향한 증인으로 존재한다(사 43:10).  그리스도인들은 생명의 말씀을 굳게 붙잡을 때에 빛이 된다.  생명의 말씀은 빛이며 복음이다.  복음은 말함으로서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것은 죄를 비난하며 거룩함의 가치를 증거한다.  바울은 저희들의 구원을 위하여 부모 된 입장에서 신앙을 살도록 열성을 다 하였다.

  그리스도의 날이란 주님이 오실 때를 말하며 그 날은 심판의 날이기도 하다.  믿는 자들은 거룩한 생활을 하여 주님을 맞게 된다.  바울은 저희들에게 나로 자랑할 것이 있게 하라고 한다.  17절에는 자신의 기뻐함이 무엇이지를 말하며 저희도 그 기쁨에 함께 할 것을 바란다.  자신은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자신을 관제로 드릴지라도 기뻐하겠다고 한다.  믿음의 제물은 빌립보 교인들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생활을 제물에 비유했다.  관제란 대제사장의 직무로 쏟는 일이다.  쏟는다는 행위는 희생과 관련된 용어로 하나님께 헌신하는 맹세로 술을 뿌린다(민 15: 5 ; 28: 7,14).  바울은 이곳에서 자신의 목숨을 직접 희생할 각오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바울은 이 말씀이 병적인 감상에서 나온 말이 아니다.  자기가 당한 고통이나 사는 일이 저희들의 유익을 위해서 하는 일이며, 그는 저희들의 경건함을 위한다면 자신의 목숨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보고 있다.  그는 저들의 예배가 하나님께 바치어질 것을 기대하는 바 저들의 믿음의 강화를 위해서 기뻐할 것을 말한다.  함께 기뻐함을 갖는 생애가 바로 그리스도의 생애이다.  18절에는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할 것을 명한다.  이는 서로 연합된 마음의 자세이다.  이러기 위해서는 죽음도 슬퍼하지 말고 죽음을 또한 두려워하지도 않아야 한다.  그는 저들을 위해서라면 명예로운 죽음도 각오하고 있다.  우리들은 풀다크의 영웅전에서 나오는 한 용감한 아데네 전쟁터에서 한 사람이 마라톤 전쟁의 승보를 알리면서 군중 앞으로 뛰어들면서 ‘기뻐하시요, 우리 모두 기뻐하라“고 하면서 죽었던 기록을 연상하게 된다.


19-24절. 디모데를 보내고자 하는 바울 자신의 염원을 살리는 이유를 열거하고 자신도 가기를 주안에서 확신함을 전하고자 한다.  디모데는 빌립보 교회의 사정을 잘 아는 자임으로 그곳의 소식을 전하여 줄 수 있는 자이며, 그를 통하여 자신의 마음을 위로받기를 바라고, 자신의 사정을 그곳에 알려 저들에게도 동일한 위로를 받게 하려 한다.  바울은 1: 27~30에서도 자신의 소원을 실린 바 있었다.  이제 디모데를 통해서 저희들의 소식을 다시 듣기를 희망하고 있다.  20절에는 디모데가 어떠한 자인 줄을 밝힌다.  그는 나와 같이 뜻을 같이하여 너희 형편을 나와 똑같이 생각할 자이다.  교인의 형편을 잘 이해하여 들어 줄 자처럼 귀한 자는 없는 법이다.  오늘날 참으로 이와 같은 자가 우리 중에 과연 얼마나 있는가?      디모데의 사람 됨됨에 대하여는 딤전 1: 2에 믿음 안에서 나은 바 된 아들로 칭하고 있다. 그는 빌립보에서 바울과 같이 수고한 자로 그는 다른 부류의 사람과 같지 아니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가 바울 곁을 떠나갔다.  그렇게 됨은 자신들에게 부닥칠 위험을 느껴 자신의 안일만을 생각하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그는 예수의 일 만을 생각하던 자였다.   디후 4 :6에는 도망간 자들이 열거되고 있다.  그는 영적 아버지를 모신 자로 디모데의 믿음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라고 말한다.  디모데는 빌립보를 방문하여 저들과 평소에 친분이 있던 터였다.  저의 수고는 마치 자식이 아비에게 함같이 복음을 위해서 종노릇하는 삶을 살았던 자였다고 한다.  22절의 예수의 일이란 그리스도 왕국에 속한 것을 추구하는 일이다.  저희들의 생애에서 기쁨이 되기 위한 방편으로 자신의 일도 버려야만 된다.  또한 위험도 각오하는 일이 따른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여서 절로 되어질 일은 아니다.  디모데는 원래 신사적이며 온화한 마음을 가진 자였다.  23절부터는 바울 자신의 심정을 실린다.  자신이 감금당한 상태에서 어찌 될른지를 모른다고 한다.  ‘보아서’의 ‘아피도’(?φιδω)는 다른 사실들을 접어 두고 한가지 일에만 집중한다는 의미로, 바울의 관심이 자신에 대한 재판 결과에 있음을 보인다.  바울은 디모데를 보내고 싶은 마음으로 이 글을 전한다.  자신이 죽게 되면 그 어떠한 일도 할 수가 없다.  그러나 자신의 석방을 고대하면서 이제 감금한 상태에서 풀려나면 곧 교회로 같이 갈 것을 기대한다.  그는 사건의 진전 상태를 관망하고 있는 것이지, 그 어떤 변덕스러운 마음을 가짐이 아니다.  이는 서로 외로울 때에 사람을 소개하여 교통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자신도 속히 가기를 주안에서 확신한다고 한다.  주 안에서 바란다는 말의 의미는 자신에 대한 미래의 계획과 바람이 주님의 것과 일치되기를 기원하는 마음의 표시이다.

            

25-30절. 에바브로 디도에 대한 소개를 다룬다.  바울을 저들에게 그를 보내어야 할 필요를 상기하면서 그가 어떠한 자인 줄을 밝히고 있다.  에바브라 디도는 빌립보 출신이다.  이 서신을 빌립보 교회에 전달한 자이다.  그에 대하여 기술하기를 다섯 가지로 나타낸다.

1. 나의 형제 - 신앙을 함께 공유하며,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으로 같은 애정을 나눔

2. 함께 수고함 - 동역자로 복음 증거를 위하여 함께 수고하는 일에 동참하므로 교회를 세우는 일에 온갖 수고를 아끼지 않음

3, 함께 군사된 자 - 대적자들과 계속 싸우는 일군으로 고난을 당함을 나타냄

4. 너희 사자 - 문자적인 의미로 ‘사도’인‘ 아포스톨론’(?π?στολον)로 보냄을 받은 자이다.

5. 나의 슬 것을 돕는 자 - 봉사자의 의미로 빌립보 교인들이 바울의 필요를 도와주기 위하여 보낸 자임

  저가 한 일은 너희 무리를 위하여 간절히 사모했다.  이는 그의 애정적 관계를 묘사함이다.  그러던 그가 그만 병이 걸렸다고 하였다.  이곳에 ‘간절히 사모하다’는 말은 ‘에피포돈’(?πιποθ?ν)은 강렬한 열망을 의미한다.  빌립보 교인들을 만나 보고 싶어하는 열정어린 마음과 자녀가 엄마의 젓을 원하는 그러한 갈망된 마음이다.  그가 지닌 병이 무엇인지는 잘 모른다.  육체적인 질병일 수도 있고 정신적인 병일 수도 있다.  저는 자신의 병이 저희들에게 알려진 것을 알고 심히 근심하고 있다.  그가 겪는 심한 근심은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아데모논’(?δημον?ν)이다.  그가 자신만이 지닌 육체적 질고로 인하여 아픔을 갖는 일은 아니다.  그러던 그가 돌연 나음을 얻게 된다.  에바브라 디도의 병은 기적에 의하여 치유된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는 하나님의 긍휼로 그가 살아났다고 한다.  사도들도 자신들이 아픈 일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이었다.  바울이 그러했다.  바울은 자신의 동료가 병들어 죽게 된 그를 눈 앞에 두면서도 근심만 가질 뿐이었다.  디도의 병에 대한 증상도 없고 치유의 과정도 없다.  단지 하나님 자신의 긍휼로 나음을 얻게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살리사 자신의 근심도 면하여 주었다고 하나님께 감격하고 있다.  바울이 그에 대한 애정은 참으로 컸다.  그가 할 일을 다하지 못하고 자기 때문에 그가 죽는다는 것을 자기로서는 생각하지 못할 일이다.


28절 - 그를 더욱 급히 보내기로 하였다.  저를 보냄으로 자신의 근심을 잊게 하겠다고 한다.  그가 회복하여 나음을 얻은 지 얼마 안 되는 시점에서 바로 보낸 것이다.  바울의 근심을 더는 방법은 빌립보 교인들이 저를 봄으로 마음에 기뻐함을 가지면 되는 일이었다.  바울은 어떻게 보면 근심이 많은 자였다.  그것은 남들의 영혼에 대하여 아픔을 가진 마음이다.  교역자로서 이는 매우 필요한 것이다.  스콧트란드의 맥킨 목사는 저희의 양을 위해서 일평생을 울었다고 한다.  여기에서는 교인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전까지는 결코 근심을 놓지 않은 목사의 진면을 보여준다.


29절 - 저희들이 할 일을 제시한다.  모든 기쁨으로 저를 위하여 영접하며 또 이와 같은 이들을 존귀히 여기라고 한다.  주님을 위해서 수고하는 자들에 대한 존경과 존귀히 여김이 교회의 의무이다.


30절 -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는 일이라고 한다.  이 말은 빌립보 교인들을 책잡는 말로 저희들의 무관심을 탓하는 말도 아니다.  저들은 자기의 필요한 모든 것들을 도와 준 자들이었다.  감옥에 갇혀 있는 자신을 생각하고 저희들의 소식을 전하여 주어야 하였는데 그 일을 저희들이 할 수 없었던 차에 그 일을 에바브라 디도가 한 것이다.  당시에 로마까지 오는 길은 위험한 도보의 여행으로 죽음의 위협이 있는 일이었다.  그가 교회의 명을 받아 왔는지는 잘 모르나 그의 자원한 마음이 있었던 것으로 본다.  그는 참으로 어느 누구도 교회에서 못할 일을 행한 자로 성경의 역사 위에 불후의 업적으로 남게 된 것이다.  생명을 내걸고 내딛는 선교의 발걸음이 이처럼 귀할 수가 없다.  ‘돌아보지 아니한’의 ‘파라볼류사메노스’(παραβολευσ?μενο?)는 도박사가 돈을 따기 위해 모험‘을 하거나 ’탐험가가 값진 것을 얻기 위하여 생명을 거는 위험‘과도 같은 일에 자신을 투신하는 것을 뜻하였다.



3장

본장은 율법에 대한 경계의 장으로 거룩한 생활에 대한 권면이며 큰 보상을 얻도록 장려하고 있다.  또한 주님의 봉사로 헌신케 한다.


1절 - 종말로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한다.  종말로는 마지막을 의미하는 말이 아니라 새로운 주제를 소개하려고 할 때에 바울이 잘 사용한 단어로 ‘이제는’, ‘더 나아가서’, ‘덧붙여서’란 뜻을 지닌다.  주 안에서 기뻐함은 그리스도인 된 자들의 의무와 특권이다.

저들이 기뻐하여야 할 이유는 저들이 저들의 주를 가지고 있는 때문이다.  주님은 죽음을 해결하신 분이시다.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일들의 열거

벧전 1: 3 -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심

로 14: 9 - 산 자와 죽은 자의 주가 되심

로 8 :23 - 몸의 구속을 기다리게 함

마 1:21 -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심

로 6: 4 -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함

요 1서 1: 7 - 죄를 용서함

요 1서 2: 1 - 대언자를 가짐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부와 재물의 취득이 아니다.  주님과의 교통을 말한다.  그를 통하여 죽음과 죄악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영생의 소망을 가지게 되어 이것 이상 더 좋은 것이 없다.  그리스도인 생애에는 슬픔과 우울함이 있을 수 없다.  바울은 내가 같은 말을 쓰는 것이 수고스럽지 않다고 한다.  내가 비록 옥중에서 이와 같은 글을 쓰고 있는 불편과 수고가 있다 하더라도 전에 말씀과 지금 이곳에서의 글이 저희들에게 즐거움과 기쁨이 되기만 한다면 반복해서 씀이 지루할 것이 없다라는 뜻이다.  바울은 스승의 마음 자세에서 저희들의 안정을 도모하는 방편이 되고자 한다.  또 한편 글을 전하는 수고를 통하여 저들이 주시하여 할 것을 상기한다.


2절 - 삼가야 할 대상들로 개들, 행악하는 자, 손 할례당을 지적한다.

개들 : 주인 없이 떠돌아다니는 무리이다.  저들은 찌꺼기와 시체를 먹었으며 더럽고 부정한 짐승이다.  위의 표현은 매우 부정한 상태와 비열하게 보일 때에 사용하였다.  삼상 17:43에 다윗이 골리앗을 상대로 사용한 말이며,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개로 불렀다.  마찬가지로 마호? 교도들은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을 개로 불렀다.  개란 부끄러움이 없고. 신중하지 못하고, 악의를 지니고, 싸움을 잘하고, 만족하지 못하는 혼란만 입히는 자들이다.  여기에서는 유대주의자들로 순수한 복음을 좇지 않고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손상을 입히는 자들을 일컬었다.  바울은 저희들의 영향을 두려워한 나머지 조심할 것을 말한다.

행악하는 자 - 전자의 개들을 말한다.  저들이 가르치는 모든 말씀들이 악을 끼친다.  물어뜯는 자들로 저들은 재앙을 가지고 교회의 생명을 위협한다.  저들이 가르치는 것이 무엇인자 잘 모르나 율례와 의식 준수들이다.  저들은 구주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는 칭의를 배격하는 자들이다.

손 할례당 : 몸에 상해를 가하여 할례를 행할 것을 자랑하는 무리들이다.  저들은 자신의 몸만을 훼손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도 손상시킨다.  바울은 하나님에 의해서 제정된 할례를 무시하는 처사를 갖지 아니하였다.  행 16:13에서는 디모데에게는 할례를 베푼 처사가 있다.  그렇게 함은 바울이 저들에게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서 행하였다.  그러나 이곳에서 언급된 자들은 할례를 구원의 수단으로 삼은 자들이다.  할례는 그 어떠한 하나님과의 언약의 수단으로 표징을 삼을 것도 아니다.  참된 할례의 의미를 모르고 그저 살을 베는 행위로는 영혼의 큰 손상을 끼치게 하여 끝내 전멸을 당하고 만다.  이것은 오늘날 모든 것이 형식 위주에 해당되고, 모든 봉사와 예식은 진정한 마음에서 사랑의 표시가 되어야 함을 교훈한다.


3절 - 참 할례당에 대하여 정의한다.

① 성령으로 봉사한다.  요 4:24 - 진리의 영으로 예배를 가진다.  순전히 성령으로 감동하여 인도함을 받는다.  할례란 하나님을 위한 봉사의 표이다.

② 그리스도로 자랑한다.  자신이 지닌 특권이나 행실로 자랑하지 않는다.  교만함이 아니라 참된 자랑은 영원한 확신으로 주님께서 살아 계심을 인식함이며 그의 권능과 영원한 은총에 대한 환희의 기쁨이다.

③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다.  사회적 직위, 도덕성, 문벌, 율법의 달성이다.  그리스도의 할례는 손으로 하지 않는다.  성경에는 할례에 대한 건전한 교리를 갖고 있다.  그것은 어떠한 단순한 외적인 것 이상으로, 썩어질 것을 떠나서 순수한 예배로 되어진 참된 근원이다.  이것은 육체적 요소를 배제하고 헌신으로 하나님을 경배함에서 생겨난다.


4절 - 육체를 사랑하는 자들에 대하여 그런 것들이 하등의 소용없음을 자신의 처지를 견주어 비교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저희들의 주장하는 바를 업신여기고자 함이 아니라 자신의 입장을 밝힌다.  그 이유는 빌립보 교인들을 해됨에서부터 방어하고자 함이다.  바울은 자신이 어떠한 입장에 있었음을 말할 때에 세 가지를 나열한다.

① 팔일만에 할례를 받음.  이는 율법의 요구이다(창 17: 2, 레 12: 3, 눅 1:59).  병으로 인하여 늦어질 수가 있으며 개종을 통해서도 늦어진다.

② 이스라엘의 족속임.  이스라엘은 야곱이 승리한 이름으로 하나님의 택하심으로 저들의 자랑스러운 이름이다(롬 9: 4).  업신여김을 받은 족속은 상대적으로 에돔인, 사마리아인, 외국인과 개종자들이었다.

③ 베냐민 지파 - 약속의 땅으로 나온 유일한 라헬의 아들이다.  유다와 함께 하나님께 끝까지 충성한 지파이다(역상 12:21).  다른 지파들이 반역할 때에 반역하지 않았다.  사울도 이 지파의 왕이었다(삼상 9: 1, 2).  이는 자랑할 수 있는 최고의 지파이다.  성전 봉사에 있어서 유다 지파와 나란히 있었으므로 구원의 예식을 더욱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식으로 따진다면 더욱 내세울 만한 것이라고 추켜세운다.

④ 히브리인.  다른 누구보다 존경받을 만한 순수한 혈통을 자랑했다.  양친 부모 모두가 배울 것을 다 배운 가계였다.

⑤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다.  바리새인들은 제일 철저한 신분이다.  예수께서는 엄격한 율법을 지키는 저들을 나무라지 않았다.  마 5:20에 주께서는 저희들의 의를 인정해 주시기도 하였다.  저희들의 의보다 낫지 않으면 하늘에 못 간다고 하였다.

  바울은 열심으로 교회를 핍박하던 자였다.  그의 핍박은 자신이 지닌 종교적 열성으로 인한 것이었다.  열성이란 종교에 참으로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이다.  여호나답에게 말씀한 것 가운데 보여진다(왕하 10:16).  주의 집을 위한 열심이 나를 삼켰다고 예수님께서 증언하신다(요 2:17).  바울이 핍박한 이유는 그 일이 참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바울의 입장에서 보면 기독교인들은 이단자였다.  그는 참으로 보기 드문 열심으로 사람을 죽이고자 하였다.  저희들의 조상이 섬기던 하나님께 대한 괘씸한 생각으로 바울은 저들의 신앙을 유린하고 저버린 것에 대한 앙갚음을 가진 것이다.  이것은 종교적 신조가 너무나 지나친 현상이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에야 이러한 개념을 버리면서 자신이 가진 열심이 잘못된 것임을 말한다.  롬 10: 2에는 저들이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의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다고 한다.  사실 이럴 필요가 없는 것이었으나 그는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는 전혀 이러한 생각을 버릴 수가 없었다.  오늘날도 이와 비슷한 형태의 열심들은 많은 곳에서 나타난다.  천주교의 비밀 결사대가 대표적인 예이다.  저들은 마지막 짐승의 표를 받게 하는 일에 앞장을 설 자들이다.  그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하였다.  이것들은 단순한 예식에만 적용이 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도덕적인 의도 포함된 것으로 구원과 연결된 행위의 면들이다.  그는 엄격하게 의로운 생활로서 하나님의 법을 익힌 자였으며 남으로부터 어떠한 비난을 받음이 없이 살은 자였다.  그는 예의바른 사람이요, 의로운 생활을 하였으며, 청렴하고 죄의 방종에서 떠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후에 자신을 가리키어 죄인 중의 죄수라고 한다.  이렇게 표현함은 그가 자신의 행동으로 구원받으려고 노력하던 행위의 면들이 모두가 파렴치한 죄인된 모습이었음을 마음속에 깨달았던 연고였다.  우리가 성도라면 자신의 의를 도무지 주장할 수가 없다.  우리가운데 자신의 의로운 행실로 구원을 받으려면 어서 하루바삐 잘못된 관념에서부터 탈피하여야 한다.


7-16절. 자신이 살아온 인생의 목표와 지침을 말하며 저들에게도 따라야 할 방도를 제시한다.

① 내게 유익하던 모든 것을 그리스도를 위해서는 다 해로 여겼다.  출신 성분, 교육, 율법의 지식, 구원을 얻기 위하여 필요하리라고 여겼던 도덕적 품성, 세상의 명예 추구, 야망 이 모두가 소용이 없게 되었다.  이상의 모든 것들은 구원을 얻는 데에 방해 요소가 된다.  이런 것들의 추구는 그리스도 종교의 본질이 아니다.  모든 것을 해로 생각한다는 말의 의미는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고 모든 것을 포기한 마음이다.  뱃사람은 선적된 염(소금)을 소중한 재산처럼 생각하겠지만 풍랑이 일 때에는 저희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는 다 내어버린다.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 이치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고상함을 위해서이다.  그토록 중한 것이라도 버려야 할 것이다.  7절에서 ‘여길 뿐더러’는 ‘헤게마이’(?γημαι)로 완료 중간태로 해로 여길 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여전히 해로 여기고 있음을 뜻한다.  예수를 알고자 하는 지식이 매우 귀하다.  그는 이 서신에서 그리스도를 알려고 하는 피눈물나는 투지를 보인다.  이 부분은 그의 서한 가운데 가장 중대한 대목이다.

  바울이 그리스도를 알기 위하여 노력하는 장면으로는 엡 3:18, 19에서도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길이가 어떠함을 알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함으로 너희로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고 하였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는 말이 무엇인가?  바울은 친구와 친척 또는 고국을 버렸다.  산헤드린의 고귀한 신분으로 그는 아내까지도 버린 듯하다.  성경에는 바울이 자신의 부인에 대해서는 언급이 안 되고 있다.  배설물은 찌꺼기나 식탁 위에서 떨어지는 물건들이며 또는 인체 내에서 나오는 배설물을 말한다.  이방인들은 식탁 위에서 떨어지는 부수러기나 먹을 수 있는 자로 천대 취급을 받았는데 자신이 그러한 처지로 되어 버린 것이다.  그 전에 아끼던 모든 것들이 이제는 쓸모가 없게 된 것이다.  그렇게 된 한 가지 이유는 그리스도를 얻기 위함이다.  한 손으로 둘을 붙잡을 수는 없는 것이다.  새로운 것을 잡으려면 움켜쥐고 있던 것을 버려야 한다.  그 안에서 발견하려 함이란 살아 있는 믿음으로 그와 함께 연합된 상태이다.  이로 인해서 가지게 되는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얻음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이며 하나님에게서 난 의인 것을 말한다.

  바울이 처음에는 율법의 의가 고상한 것인 줄로 알았고 또한 그것이 자신에게서 이루어진 것인 줄로 착각했었으나 그가 자신의 참된 본성을 거룩한 율법에 비추어 보았을 때에 너무도 부족함을 알게 되었다.  자신의 행위에 대한 의존이 무가치하고 헛된 줄을 알게 되었다. 성경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에 대하여 말하기를 롬 3:21~26절에서는 차별이 없이 모든 자에게 미치며, 예수 안에서 구속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됨이며, 하나님의 아들 예수로 인하여 그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며, 예수를 믿는 자를 의로 삼는다고 하였다.


10절 - 바울이 알려고 하는 것을 밝힌다.  그 두 가지란 부활의 권능과 고난에 참여함이다. 부활은 영혼 불명의 소망이다.  믿는 자들의 가장 강렬한 소망 가운데의 최상의 것이다(고전 15장).  이런 것 때문에 고난을 감내할 수가 있는 것이다.  바울은 부활이 미래의 소망이지만 그것을 알기 위하여 겪어야 할 과정을 말하고 있다.  그는 죽으심을 본받아 부활에 이르려 한다고 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함께 거하고자 하는 기대는 크지만 그와 더불어 갖는 경험을 원하는 자는 그다지 없다.  부활이란 죽음을 통해서 오는 것이다.  죽지 않고 부활이 올 리가 없다.  기독교인이 되는 과정에서 먼저는 침례를 통하여 장사의 경험을 가지며 궁극적으로는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된다.  롬 6: 4~11에는 죄에 종노릇하지 말라고 하며,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죽으시고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으심이다.  이와 같이 우리들 자신도 죄에 대해서는 죽고 하나님에 대해서는 산 자처럼 생애를 살라고 한다.  이와 같은 것이 주님의 부활의 권능을 알게 되는 것들이다.


11절 - 바울은 자신의 자아와 더불어 싸우는 고난의 과정 이외에도 많은 고난을 언급한다.

행 24:15 - 벨릭스 앞에서

행 26: 6~8 - 아그리바 왕 앞에서 부활의 소망에 관련해서 증거하고 있다.  고난의 생애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매우 친숙한 단어이다.

고후 1: 5 - 그리스도의 고난이 넘친다.

벧전 4:12 -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함을 기뻐하라.

골 1:24- 형제를 대신하여 받을 고통이 있음을 말한다.

마 10:20~23 - 예수께서 하신 말씀 중에 아비가 자식을 자식이 아비를 대적하여 죽게 하는 일이 있겠다고 하심.

딤후 3:12 -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겠다.

요 15:18~24 - 우리는 세상과 합하여질 수가 없다.  세상이 우리를 싫어하도록 되어 있다.


11절 - 바울은 고난의 생애를 살면서 부활의 권능을 알려고 한다면서 자신이 바라는 소망에 대하여 자신의 견해를 밝힌다.  ‘어찌하든지 ....에 이르려 한다고 함은 부활에 대한 의심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바울의 깊은 겸손과 조심스러운 관심의 표시로 자신의 신념을 배제한 표현으로 본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다라고 한다.      이는 무엇을 연상하면서 말함인가?  그리스도인은 달리기 경주를 하는 자에 비유된다.  바울 당시에는 선두 주자만이 끝까지 달려서 목적지까지 도달하게 되면 상급을 받고 최고의 영예인 영웅 취급을 받았다.  이것에는 갑옷을 입기도 하고 꽤나 먼 거리를 달려야 하는 지구력이 필요하였다.  이 운동 경기를 끝마치고 부축을 받다가 죽는 사람도 속출하였었다.  최후의 필사적인 노력을 위해서는 많은 준비와 노력이 필요하였다.  중도에 기권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바울은 자신이 믿음으로 추구하는 삶을 이런 과정에 견준다.  내가 영원한 상급을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다.  그가 예수를 믿어서 바라는 모든 것을 받았지마는 자신의 최후의 안식은 아직도 먼 미래였다.  그는 그것을 얻을 수 있는 그 날을 바라면서 추구하여 나갈 뿐이었다.  좇아간다는 ’디오코‘(δι?κω)는 ’추적한다‘는 말로 사냥이나 달리기에서 사용하는 용어이다.  아마 바울 당시에는 거짓된 부활의 가르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바울은 그 부활이 지금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고 한다.  여기에서는 자신의 완전한 도덕적인 품성을 말한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인의 경주의 달음박질의 최후의 목표지점을 말하고 있다.  아직도 그는 기다리고 있는 바 영원한 상급은 받지 못하고 있다.  그는 또한 말하기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고 하였다.  이미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그때로부터 경주를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목표지점을 향해서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골인 지점까지는 아직도 요원했다.  바울은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갔다.  그는 잡힌 바 된 것을 놓칠 수가 없었다.  계속 붙잡힌 상태에서 그것을 놓지 않고 끌려가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이미 예수께서 우리들 자신을 포로로 삼고 있음을 보이는 사상이다.  그리스도인 각자는 그리스도께 붙잡힌 자들이다.  회개할 때에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를 사로잡는다.  또한 그리스도인은 분명한 생애의 목표를 가진 사람들로 목적이 없는 생애의 헛달음질을 아니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계속 불굴의 노력이 필요 된다.  바울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란 표현은 의인과 죄인 모두의 부활로 본다.  바울이 말하는 부활은 영광스러운 부활이다.

  바울은 13절에서 다시 한번 그의 형제들을 상대로 말씀을 한다.  내가 잡힌 바 된 상태에서 집은 줄로 생각하지 않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의 위하여 좇아간다고 한다.  바울 자신은 주님께 봉사하도록 부름을 받은 자였으나 아직 상급을 받지 못하고 있다.  앞에 있는 것을 달려가서 잡기 위하여 혼신의 힘을 경주하며 뒤에 있는 것들을 잊어버리고 있다.  그의 최고의 목표는 부르심의 상을 받는 것뿐이다.  그가 달려온 길이 그 아무리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워 보인다 하더라도 현재와 미래에 대한 안정을 보장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자신이 달려온 길이 얼마나 멀었는지 뒤돌아보지 않는다.  경쟁자가 얼마나 되는지 뒤돌아 볼 겨를이 없다.  한 순간이라도 방심하지 않았다.  방심하면 모든 것을 다 잃게 된다.  이 말씀에 대한 음미는 우리의 과거를 아주 완전히 무시하라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과거에서부터 인도하여 가신다.  그래서 우리의 미래에 대한 희망을 계속 일깨우시는 것이며 우리의 부족과 결함들을 깨닫게 하신다.  뒤를 돌아다보게 되면 우쭐하게 된다. 베드로는 뒤를 돌아보다가 물 속에 빠졌다.  그곳에는 진보가 없이 자랑이 있는 곳이다.  경주자는 앞만을 바라보고 뛰어야 한다.  히 10:38, 39에는 뒤로 물러가면 침륜에 빠진다고 경고하고 있으며, 히 12: 1, 2에서도 믿음의 경주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예수를 바라보는 일이 경주에 경주를 더하는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것들을 다 제거하여야만 한다.  본절에서 사용된 ‘잊어버리고’는 ‘에필란다노메노스’(?πιλανθαν?μενο?)로 과거의 기억이 자신의 관심을 빼앗아 진보를 방해하지 않도록 의식적으로 노력함을 말한다.


14절 - 그리스도인의 경주에서의 푯대는 정하여진 것이며 위에 있는 상은 면류관이며 목적지는 하늘이다.  하나님께서의 위에서의 부르심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생애를 말한다.  그것은 품성의 형성과 존엄한 생애를 사는 것이다.  푯대를 향하여 란 말은 푯대를 똑바로 쳐다보고 라는 말이다.

15절 - 온전히 이룬 자란 성숙한, 완전한 사랑으로 그리스도인 사고의 성숙에 관련된 말이다.  이곳의 온전이란 말은 비교의 의미로 사용된 말이다.  ‘온전히’는 ‘텔레이오니’(τ?λειοι)로 더 이상의 노력이 필요치 않은 절대적 완전을 의미함이 아니라 이전의 연약과 무지에 비하여 꽤 성장한 상대적 완전이다.  따라서 아직도 노력하여야 부분이 있는 상태이다.  바울이 이루지 못한 것을 저희들이 이룩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렇게 생각하라는 말은 상을 얻기 위한 부단한 노력하는 생애로 아직 얻은 줄로 생각하지 아니하고 부름의 상을 얻기 위하여 달려가는 생애이다.  만일 무슨 일에 달리 생각한다면 이란 바울의 견해와 다소 틀린 것을 엄두에 둔 말이다.  바울은 독선적이며 독단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자신의 사고와 틀리더라도 강제로 일치시키지 아니하였다.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용납해 주는 너그러운 성품의 사람이었다.  주께서는 진실하게 믿는 자들에게는 가르쳐 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직도 참 종교의 본성을 깨우치지 못하는 자, 율법을 고수하는 자, 목표를 정하지 못한 자들에 대하여 저희들의 잘못을 옳게 생각할 수 있도록 계시로 가르쳐 주신다.  하나님께서 나타내시는 것에는 어느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라 하더라도 과거를 무시하라는 견해가 아니며 또한 완전에 나아가고자 함을 무시하라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리의 잘못과 행위의 잘못을 제시하여 주신다(엡1 1:17).


16절 - 빌립보 교인들은 서로 다툼과 분요 없이 사랑하고 또한 아무 부족함이 없이 균형진 생애를 살면서 형제들의 부족을 살펴보면서 어려움 없이 교회가 복음의 완전한 의미를 깨닫고 잘 되어져 가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대로 행할 것이라’의 용어는 ‘토 아우토 스토이케인’(τ? α?τ? ντοιχε?ν)으로 동사인 ‘스토이케인’은 ‘보조를  맞추라’, ‘일치하여 행하라’의 의미를 지닌다.  너희들이 이러한 상태까지 이르렀다면 그대로 지속하라고 한다.  전진하지 않고 머물러 있는 상태의 잘못을 미리 배격하고 저들이 잘 할 것을 독려한다.  그리스도인 생애는 변함이 없어야 한다.  불행하게도 처음에는 좋다가 나중에는 실패로 끝나는 자들이 우리 중에는 많이 있다.  과거에 그리스도인 발전에 공헌하였던 것들을 발견하여 미래에까지 그 계획을 완성시켜 나가야 한다.  과거에 의지하고 새로운 진전을 시도하지 않는 자는 자만이며 부주의한 상태로 된다.  어제의 정복이 오늘을 위한 풍성한 보증을 되지 못한다.  그대로 행하라는 그 길대로 앞을 내다보는 생애이다.  이것이 빌립보 교회를 부패시키는 잘못의 출입을 막고 있다.


17절 - 나를 본받으라고 하며 또한 우리처럼 행하는 자들을 보이라고 명한다.  이곳에서 말하는 본이란 회개를 말한다.  바울은 과거를 버리고 자기 앞에 놓여 있는 것을 바라보고 쫓아가는 자였다.  바울은 자신을 믿으라고 하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자신이 그리스도께 헌신하여 살은 정신을 제시하여 그리스도와 같은 생애를 살라 함이다.  이러한 태도는 자신을 자랑하는 태도는 아니다.  이는 저들을 상대로 경건한 주의 종으로 살아가는 태도를 견지하기 위하여 영감을 주기 위함에서 발한 말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생애를 살아간 디도와 디모데도 아울러 연계시킨다.


18절 - 바울은 저들에게 여러 번 말하였다고 진술한다.  그는 말할 때에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바울은 그곳을 한 차례 이상 방문하였고 또 지금 이처럼 서신을 통하여 간절한 호소를 드리고 있다.  그가 눈물을 흘림은 깊은 고뇌의 감정에서였다.  이는 그리스도를 반역하는 데에 주동하는 자들에 대하여 상심을 가지는 묘사이다.  바울의 눈물은 저들의 영혼이 멸망당하는 것과 종교에 손상을 입히는 것들에 대하여 가진 감상이었다.  여러 원수들이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였다고 했다.  이들의 대상자로는 유대주의자들로 믿는다고 공언은 하나 타락한 그리스도인들이다.  저들은 교훈을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로,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자기의 배만 섬기는 자들이다.  저들은 공교하고 아첨하는 말로 눈먼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게 하며,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복음의 정신과 권능에 전혀 생소한 사람들이다.  저들은 땅의 사물에만 마음이 쏠려 있는 자들이다.  세상과 친함이 하나님과는 반대가 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신 십자가가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일의 부도덕함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십자가는 주님께서 저들의 구속을 위해서 베푸신 죄악과 사망의 치료이다.  십자가와 원수가 되는 생애는 십자가의 효력을 무효화시키는 행동이다.  이는 어떠한 것들을 일컬음인가?

1 거듭나지 못한 자 

2 알려진 죄를 그대로 방종하는 자 

3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무엇인가 특별한 것이 없는 자  

4 구주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는 자 

5 세상을 포기하지 않는 자 

6 종교적 의무를 소홀히 행하는 자 

7 그리스도 교리를 반대하는 자 등이다.  이러한 유형의 자들로 이들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보다 교회내의 불신자들이 세상을 더욱 암담하게 만든다.


19절 -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다.  이는 진실한 종교를 가지지 못한, 생활에서 체험적인 요소가 없는 자들은 악인과 마찬가지로 멸절한다.  저들의 신(神)은 배이다.  이는 식욕만을 채우는 자들이다.  저들은 자유만을 자랑하며, 그것을 권리로 사용하여 왜곡시키는 자들이다.  저들이 추구하는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다고 한다.  ‘부끄러움’은 ‘아이스퀴네’(α?σχ?ν?)로 ‘벌거벗음’과 ‘사람의 은밀한 부분’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저들은 땅의 일만을 생각하는 자들이며, 하나님은 애초에 마음에 없다.  죄를 회개하지도 않으며, 부끄러워할 것인 죄를 영광으로 섬기는 자들이다.  땅의 일이란 즐거움, 명예, 쾌락, 이익만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영적인 성장의 저해 요소들이 십자가의 원수가 되는 것이다.  교회 내에 이러한 부류의 사람들이 많으면 암담하고 희망이 없게 된다.


20절 -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고 한다.  우리는 땅에서 열심히 살아야 한다.  엡 2:19에는 하나님의 권속으로, 요1서 3: 2에는 하나님의 자녀로, 골 2: 3에서는 우리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감취어 있다고 하였다.  시민권이란 타이틀만을 가리킨 말이 아니라 행동과 행위를 가리킨 말이다.  여기에는 대화, 생활 방식과 온갖 것들의 준수 사항이 포함되어 있다.  이것들은 땅에서 살면서 반드시 이루어야 할 사항들이다.  이러할 때에만이 다른 사람들에게 또 다른 하늘 세계에 대하여 동경을 가지게 된다.  하늘에도 법이 필요한 곳이다.  땅에서 사는 자로서 법을 지키는 자가 하늘에서도 살게 된다.  바울은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예수 그리스도를 열렬하게 기다린다고 하였다.  그리스도의 오심에는 의와 소망이 관련되었다(갈 5: 5).  땅의 것은 금시 끝날 것이다.  비록 땅에 살면서도 하늘을 응시하면서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며 준비하면서 살아야 한다.  주님의 오심이 초기의 제자들에게는 강렬한 소망으로 집중되었었다.


21절 - 그가 우리의 낮은 몸을 그의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고 한다.  고전 15:35~50절에는 구속받은 자들이 몸의 급진적인 변화를 일으키나 저들의 원래의 형태는 보존된다.  우리의 낮은 몸이란 장차 내세에 들어가서 소유하게 될 영광의 몸과 비교하여 말한 것이다.  여기에 사용된 ‘낮은’ 말은 ‘타테이노세오스’(τατειν?δεω?)로 생리적 연약성과 및 죄악으로 인하여 비애에 부속된 불행한 상태를 말한다.  그리스도인의 생애는 그리스도와 같아져야 한다.  구속받을 자의 변화된 모습이란 그리스도의 성품과 죽지 아니할 몸을 지니고 부활한 주님의 모습과 같게 된다.  주님의 역사를 가리켜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한다고 한다.  이는 창조주의 권세를 말한다.  주님의 일은 모든 만물을 하나님의 주권 하에 두는 일이다.  우리 몸과 품성의 변화는 그리스도의 주권적 능력의 계시이다.  사도 바울은 이 서한에서 자신이 살아서 주님을 만나지 못할 것을 나타내고 죽음에서나 만날 수 있는 희망으로 부활과 하늘의 상급을 연모하고 있다.  우리로 하여금 바울이 바라던 그와 같은 소망을 가지고 살게 하는 강력한 권면의 말을 남긴다.



4장


결론 부분으로 지금까지는 빌립보 교회에 일반적인 교훈과 권면을 보냈으나 지금부터는 개인적이고 직접적인 면을 다룬다.


1-3절. 권면으로

1 주 안에서 서라. 

2 서로 화해를 조용함 

3 복음에 수고한 부녀들을 도우라.


4-9절.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에 대한 엄숙한 명령들

4절 - 기뻐하라.

5절 - 관용을 알림

6, 7절 - 세상 물질에 염려를 하지 말고 모든 필요사항을 주님께 맡기라.

8, 9절 - 가장 적절하게 의롭고, 순수하고, 사랑스럽고, 칭찬할 만한 것만을 하라.


10-19절. 바울리 마케도니야 빌립보 교인들로부터 받은 도움에 대한 충만한 감사의 인식.


20-23절. 문안 인사.


주석 - 1절에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과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에 대하여 주안에서 서라는 말을 발한다.  면류관은 ‘스테파노스’(στ?φανοσ)로 당시 운동 경기장에서 승리자에게 주어진 월계관이나 연회에서 얻은 화관을 의미한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믿음으로 성장하여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되어 가는 모습을 보고 소중히 아끼고 있는 모습을 보인다.  주 안에서 선다는 말은 ‘스테게테’(στ?κετε)로 ‘진실되게 서다’, ‘굳게 서다’의 의미로, 병사가 적의 공격을 받는 중에도 계속 초소에서 버티며 서 있는 자세를 말한다.  저들은 어려운 시험을 만나는 중에도 진실된 삶을 고수하고 있다.


2절 - 두 여인 유오디아와 순두개의 소개. 둘 사이에 불화가 있었다.  유오디아는 순조로운 여행, 아름다운 향기라는 이름의 뜻이며, 순두개는 행복스러운, 좋은 행운의 이름을 가졌다. 이들은 초대 교회에서 매우 영향력을 끼쳤던 여인들로 생각된다.  바울은 이 여인들 사이에서 문제가 발생된 일에 대하여 중재하고 이 일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한다.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연합만이 교회의 병을 치료할 수 있다.  바울은 어느 누구를 두둔하여 옳다고 하지 않는다.  주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면, 다시 말하면 주님만을 생각하면 모든 차이나 증오심과 악이 사라진다.


3절 - 참으로 멍에를 같이한 자가 누구인지는 모른다.  빌립보 교회가 잘 아는 집사 가운데 한 분으로 보고 바울과 친숙한 자이다.  저들은 진실하고 충실하고 믿을 만한 자였다.  도우라고 한 부녀들은 위에서 언급한 여인들이 아닐 수도 있다.  이들은 복음을 위해서 헌신해 오던 믿음의 열성가들이다.  저들의 일은 돕는 봉사의 일로 본다.  멍에를 같이한 자란 말은 ‘쉬쥐게’(σ?ζυγε)로 ‘동역자’란 뜻을 갖는다.  본교회 성경 주석은 화해하도록 청하여진 자들로 본다.  언쟁은 그리스도의 일에 많은 해를 끼친다.  글레멘드가 누구인지는 잘 모른다. 두드러진 인물 가운데 하나로 간주된다.  빌립보 교회에는 잊어질 수 없는 여인들로는 귀신들린 여인, 루디아가 있다.  저들의 이름이 생명책이 있다고 하였다.  성경에는 여러 번 생명책에 대한 언급이 있다(계 3: 5, 13: 8, 20: 12,15).

생명책에 대한 이해를 돕는 구절들 - 겔 13:9의 이스라엘의 호적, 사 4: 3에 시온에 남아 있는 자가 있다.  하늘의 생명을 유업으로 이어 받을 자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4절 -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는 생애를 살 것이다.  이유로는 하나님과 구주가 가장 가까이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의 성품을 닮게 되고, 역경이나 번영 가운데에서도 항상 행복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주님은 변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자신도 위하며 남을 위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들을 선대하고 좋게 한다(히 13:8, 약 1:17).  기뻐하라 라는 말은 ‘카이레테’(χα?ρετε)로 현재 능동태 명령으로 어떠한 상황 가운에서도 기뻐함을 의미한다.  주안에서 기뻐하라는 말의 의미는 바울에게서는 기쁨의 원천이 예수 그리스도임을 보이는 것이다.


5절 - 관용을 나타내라고 한다.  자제하는 점잖음과 적당함과 온유함을 말한다.  옷치장의 단장, 먹는 것, 감정의 면들을 조절할 줄 안다.  다툼이나 자기 주장을 멀리하지 않는다.  전체의 유익을 위해서는 자기 주장이나 자신의 원칙을 철저히 배제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마음의 여유를 갖게 되는 것은 주께서 가까이 오시기 때문이다.  주께서 가까이 오심은 초대 교회의 강력한 열망 중에 하나였다.  이러한 일의 기대로 저들의 생활이 거룩해질 수가 있었다.  이는 덕행에 대한 자극이 되었다.  주님의 오심은 사망의 정복이 되며, 세상의 심판과 지상에서의 통치가 끝이 난다.  그 날이 언제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우리들은 중용을 취해서 세상에 너무 몰입해서는 안 된다.  오늘날 이 사상이 너무나 해이해져 있다.  우리들은 주님이 함께 하시는 임재를 느끼면서 살아야 한다.


6절 -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 한다.  이는 ‘메덴 메림나테’(μηδ?ν)로 금지를 나타내는 현재 명령법으로 염려를 중단하라는 말이다.  현재의 사는 것, 생계 유지, 산다고 하는 것 자체가 번거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께로 신뢰하여 모든 염려를 배제할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는 일상생활의 모든 것인 시험, 곤욕, 물질적 욕구들이 따르며, 영적인 문제 이 모두가 염려가 될 수밖에 없는 것들이다.  염려의 제거 방법으로는 기도와 간구이다.  기도는 ‘프로슈게’(προσευχ?)로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의 자세가 하나님을 향하여 있음이다.  간구는 기도보다 더 강한 말이다.  간구는 ‘데에세이’(δε?δει)로 필요한 것을 조목을 대어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다.  기도는 필요와 바람에서 일어나는 일반적인 것이나 간구는 특별한 종목을 선정한다.  또한 감사를 기도와 연결시킨다.  이미 다 주실 것으로 기대하고 또한 그것을 감사함으로 받는 것이다.  우리들이 가져야 할 감사는 건강에서의 회복, 시험에서의 승리, 우리의 생명, 집안 식구들을 상대로 한 각종 사망과 질병에서의 보호, 개인의 사생활 등 모든 것들에 대하여 감사를 가질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주시는 분이시므로 하나님께 아뢰는 삶을 살아야 한다(겔 36:37).


7절 - 신앙이 있는 기도의 결과에 대하여 언급할 때에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킨다고 한다.  하나님의 지각은 인간의 지각과 상상과는 틀리다.  지각은 이해하는 능력, 이성, 식별력 등으로 염려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경험으로 갖게 된다.  하나님의 평강은 인간에게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손에 맡길 때 우리의 모든 염려와 궁색이 사라질 때에 생겨난다.  지키시리라는 말의 뜻은 ‘프루레세이’(φρουρ?σει)로 ‘군대 용어인 ’호위하리라‘는 의미를 지닌다.

평강이 오는 길목 :

사 26: 3, 4 - 기도의 충만한 생애를 가지는 자에게 온다.  믿음을 가진 자에게와 또한 하나님의 능력과 관심을 아는 개인적 지식에서 온다.  우리들은 주님의 임재를 느끼며, 어린 아이와 같은 신념과 진실한 신앙을 가져야 한다.

요 14:27 -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고 하신다.

갈 3:15 - 그리스도의 평강이 우리 마음을 주장하라고 하며, 너희가 평강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나니 감사하는 자가 되라고 한다.

살후 3:16 - 평강의 주께서 친히 주시는 것으로 되어 있다.

로 5: 1 - 평강은 하나님과 더불어 갖는 것이다.

마음과 생각을 지킴은 군사 용어로 진중에서나 성에서 지켜 주는 것이다.  여기에는 불안과 공포가 스며들지 못하게 한다(사 26:3, 4).  마음은 생각의 중심, 바람, 느낌이다.  생각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으로 사상을 가리킨다.  주님을 통하여 얻어진다 함은 단순한 하나님께 대한 신뢰에서만이 아니라 주님을 통해서 나타난다.  이는 우리의 소망의 근거가 되는 말이다.


8절 - 마지막 권면으로 지켜야 될 것들을 열거한다.  사람은 무엇을 희구하느냐에 따라서 사람의 됨됨이 달라진다.

?무엇에든지 참되며 - 세상에는 그 무슨 참된 것이 없다.  이는 영적인 것과 도덕적인 면에 언급된 말로 그리스도인은 바로 이것만을 취하여야 한다.  참된 것은 진실이나 충성된 것만이 아닌 거룩한 도덕적인 이상에 도달할 온갖 모든 것인 하나님의 성품의 표현이다.  즉 선한 양심의 진실성과 그 열매를 이른다.  하나님과 인간에 대하여 드리어질 참된 것은 부분적으로 드리는 것이 아니다.  종교적 의식에만 국한된 것이 아닌 계약에도 충실하여야 한다.  이것은 우정 관계에 있어서 진실성을,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본성의 이해를 통해서 만이 온다.

?경건하며 - 신의 성품에 사용되는 말이다.  근엄이란 말과도 상통한다.  저들의 속한 사물에 대하여 존엄과 명예로움을 나타낸다.  그리스도의 최고의 속성중 하나이다.  저들이 사회 생활의 관습에서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예의 범절의 수행과 사업 관계에서의 마음을 나타낸다.  그래서 타인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남의 마음에 들고 신뢰를 얻는 상태를 가리킨다.

?옳으며 - 사람과 사람 사이의 권리와 의무 관계에 바른 것이다.  하나님의 율법에 일치하는 행위이어야 한다.  부정직함이나 불공평으로 타인에게 해를 끼치면 안 된다.

? 정결하며 - 생각과 사상, 성관계의 정결, 도덕적으로 순결하고 더럽혀지지 않음이다.  그리스도인은 야망과 소망과 동기에서도 순수함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을 섬김에는 무흠하고 거룩하여야 한다.

? 사랑할 만하며 - 누구에나 기쁨을 주는 상냥한, 애정이 있는, 매력 있는 자가 되어야 한다.  신경질적이거나 험상궂음, 청결치 못함, 성미가 까다로움을 지닌 그리스도인에게는 아무런 유익함도 끼칠 수 없다.

? 칭찬할 만하며 - 평판이 있음을 말한다.  고상하고, 하나님 앞에는 엄숙하고 조용한 분위기를 가져야 한다.  겸손, 친절, 부모에 대한 공경, 순수성, 품위 있음, 정중함 등을 지닐 것이다.  이것들은 그리스도인이 모든 일에 있어서 보탬이 되는 덕성의 계발을 뜻한다.

? 무슨 덕이 있든지 - 칭찬 받을 것 중의 하나이다.  선을 실행하는 힘을 말한다.

? 무슨 기림이 있든지 - 이도 칭찬의 요소이다.  도덕적으로 인정이 되어 칭찬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이상의 것들은 신자의 생활 목표가 사람들에게 칭찬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사랑이나 칭찬을 받아야 함을 의미한다.  사람들에게 격려와 모본을 끼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면 이렇게 될 수 있다.  억지로 해서 될 일이 아니다.  사랑, 칭찬, 기림의 표현은 예찬으로 덕행에 대한 호칭들이다.


9절 - 너희는 내게서 배우고 본 바를 행하라고 한다.  바울은 따라 오라고 할 정도로 위인된 생활을 살은 자였다.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께서 너희와 함께 하겠다고 한다.  이 말씀은 영적 힘의 근원으로 높은 생각과 고상한 노력을 가지라는 권면으로 하나님의 축복이 저들에게 거룩한 생애로 인도되게 함 충실함으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모든 의무를 수행케 한다.  ‘배우고’의 ‘에마데테’(?μ?θετε)와 ‘듣고’의 ‘파렐라베테’(παρελ?βετε)는 빌립보 교인들이 바울에게서 배운 교훈을 가리킨다.  ‘듣고’의 ‘에쿠사테’(?κο?σατε)와 ‘본’의 ‘에이데테’(ε?δετε)는 빌립보 교인들이 바울의 말과 행동에서 관찰한 것들을 가리킨다.


10절 - 주 안에서 갖는 기쁨의 이유를 말한다.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라고 한다.  이 서신은 친절 때문에 생겨난 편지이므로 저들에 대하여 감사의 말을 빼놓지 않고 있다.  이 말의 배경은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서 받은 사랑의 선물과 호의와 감사를 평소부터 지녀 왔다.  이 말은 저들의 무관심과 냉대를 비평하는 말이 아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자신에게 베풀었던 전날의 일이 다시 생각이 나서 바울을 도와주려 함에 대하여 감격하고 있는 모습이다.  생각난다 함은 식물이 발아하여 꽃이 피어나고 잎이 나고 열매를 맺는 원리를 말한다.  그간 거리도 너무 멀고 기회가 없어 연락할 방도가 전혀 없었던 터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때가 주어짐에 아무 거칠 것이 없이 되었다.


11절 - 바울이 말하는 사연의 진상을 말한다.  도움을 받은 그가 그 호의에 대하여 말함이 당연하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것에 대하여 오해가 없어야 된다고 한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어떠한 형편에 처하든지 자족하기를 배웠다.  그래서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안다.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한다.  바울은 참으로 고난의 학교에서 훈련을 통하여 극기를 정복한 사람으로 모든 것은 경험을 통하여 배웠던 것이다.  그는 본성적으로 참기 어려운 일에 불만을 털어놓았던 적이 있었다.  자신의 생애 중에 험난한 과정을 길게 열거한다(고후 1:26-28).  이 모든 것 이외에도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던 바울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아무런 불평을 하지 않았다.  자족하는 마음은 축복에 이르는 통로이다.  이는 영혼의 열매 중의 하나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에 의로우심을 믿는 것이다.  잠 15:15에는 마음이 즐거운 자는 항시 잔치를 갖는다고 하였다.  이는 행복의 비결이다.  롬 8:28에 하나님께서는 선을 위하여 일하시는 분임을 보여준다.  감독 교회 신자들의 기도문에는 “give us minds always contented with our present condltion"이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시는 것에는 빈곤이나 저주란 개념은 없다.  우리들은 무감각한 숙명론자들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여 하나님의 도움을 확신하고 사는 자이다.


12절 -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한다.  비천에 처하였다 함은 영적인 결함이 아니라 육체적 필요를 말하고 있다.  그는 환경의 여건에 전혀 구애를 받지 않고 있다.  배웠다 함은 ‘무에오’(μυ?ο)로 신비의 영역에 들어감을 의미한다.  배우는 과정이 하루 이틀에 되는 것이 아니다.  모든 환경을 견디며 그것에 임하는 숙지 태도를 익혀야 하는 바 많은 열 가운데에서 마치 금이 빛을 내는 것과 같은 품성의 단련과도 같은 말이다.


13절 - 내가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생활하는 가운데 있어서 역경이나 번영 가운데에서 못할 것이 없다고 하는 태도이다.  자신의 능력만을 믿는 것이 아니라 또한 온전히 경험만을 의지하는 것만도 아닌 그리스도를 통해서 되어지는 것이다.  바울은 여러 번 이 말을 사용하였다.  이는 그가 가지고 있는 어떤 본성적인 능력도 아니고 그의 마음과 정신의 강인함도 아니다.

우리가 바울의 권면 중에서 배울 것들은 어떤 것들인가?

1 어떠한 시련 가운데에서라도 움추려 둘 필요가 없다.

2 시험에 굴할 필요가 없는 바 피할 길을 준다.

3 당황하거나 고통으로 또는 거룩하지 못한 사상과 욕망으로 자신을 더럽히면 안 된다.  우리는 마음과 정신을 회복시켜서 영혼의 애정을 가지게 하여 균형을 취하여야 한다.

4 다가올 시련, 핍박에 대하여 낙담할 필요가 없다. 우리를 항시 승리로 이끄신다.

Col 333 - "하나님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되어질 때에는 주께서 그리스도인에 의해서 행해지는 사업의 성공에 비교해서 책임을 진다.“


14절 - 너희가 나의 괴로움에 함께 참여했다고 한다.  저들이 이전에  바울에게 동정의 선물을 보낸 것을 말한다.  저들은 자신의 필요를 채워 주었을 뿐 아니라 자기를 잊지 않고 있는 확신성 때문에 바울은 저들과 연락하고 싶은 모습을 보여준다.


15-16절. 바울은 저들이 자신을 도운 일에 대하여 극구 칭찬한다.  복음이 저희들 마음에 역사할 무렵에 자신이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받은 일에 동참한 자들은 저들밖에 없다고 한다.  바울은 데살노니가에서도 필요한 것을 도운 빌립보 교인들임을 기억하고 칭찬하고 있다.  남들은 다들 나 몰라 라고 하고 있을 때 자신을 도운 저들의 동정과 희생을 바울로서는 잊을 길이 없는 것이다. ‘주고받는’ 이라는 표현은 ‘로곤  도세오스 카이 렘프세오스’(λ?γον δ?σεω? κα? λ?μψεω?)로 부기의 대차 대조표 즉 거래 계좌를 가리키는 용어이다.  이는 교회가 복음 사역자들의 선교 비용을 충당하는 일이 마땅함을 보인다.  바울은 데살노니가에서 만 3년 반을 체류하면서 교회를 세우는 수고를 하며 이 일로 인하여 각가지 박해와 반대를 받았던 것이다.


17절 - 바울이 이 글을 실림이 저들에게 또 다른 선물을 기대하고자 함이 아니다 라고 한다.  이곳에서의 선물은 ‘도마’(δ?μα)로 일반적인 선물과는 달리 생계에 필요한 것들을 지원해 주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은 지난번의 일로 인하여 매우 고맙다는 치하의 말을 잊지 않는다.  따라서 이 일에 대한 선한 일에 풍성한 보상이 있기를 구하고 있다.  선한 일은 그리스도인 열매 가운데 하나이다.  우리가 바라는 일은 다른 사람들이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과일(열매)은 심는 것에 따라서 결과로 생겨난다.  죄의 열매는 형벌이며 게으름의 열매는 가난이다.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이란 말의 의미는 상업적인 용어로서 저들이 행한 일에 대하여 도로 보상으로 받을 수 있는 신용장부에 부어 있는 이익이 되는 요소를 말한다.  이 일이 현재에도 저들의 생애에 풍성함을 가져다주며 다시금 심판 때에도 저희가 보상들을 쌓아올린 것을 보게 하는 것이다.  필요로 할 때에 돕는 선은 그 의미가 실로 큰 것이다.


18절 - 내게는 가지지 못한 것이 없을 정도로 모든 것이 풍족히 있으므로 에바브로디도 편으로부터 받은 것으로 더욱 더 풍성하다고 한다.  바울은 저들로부터 받은 선물을 가리켜 하나님께 받을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게 한 것이라고 한다.  ‘풍부하다’라고 한 말은 ‘페릿슈오’(περισσε?ω)로, 빌립보 교회로부터 필요한 물건들을 채우고도 남았다는 의미이다.

  구약의 제사는 희생을 드렸다.  소나 염소와 양의 생축을 희생 제물로 삼으며 그 중에서 내장, 정갱이를 물로 씻은 다음에 단 위에 불사른다.  번제를 드림은 그것이 화제로 향기로운 제물이 된다.  새인 산비둘기를 제물로 드릴 때에는 머리를 비틀어 끊고 단 위에서 불사르고 피는 단 곁에 흘리며 먹통과 더러운 것은 제하여 버린다.  날개 자리에서 몸을 찢고 단 위의 불에 살라 번제를 드린다.  위에서와 같은 방법으로 드린 제물이 여호와께 향기로운 제물이 되었던 것이다.  빌립보 교인들의 사랑과 우애의 선물이 이와 같은 것에 해당이 된다.  이는 비단 개인적인 우정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봉사자로서 저들에 대한 사랑의 정신에서 나오는 것들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 예물이 하나님께서 기쁘시게 드릴 만한 것으로 되어야 한다.

우리들이 배울 교훈들의 열거

① 복음의 사역자들에게 드리는 선물은 감사의 답례이다.

② 하나님의 종들에게 대한 선물들은 저들의 걱정과 궁핍을 함께 참여함이다.  이것들은 예     배의 한 부분이 된다.

③ 저들의 종교를 신봉하는 순수한 경건의 산 증거이다.


19절 - 나의 하나님께서 하실 일에 대한 소개로, 하나님께서는 너희의 모든 쓸 것을 채우신다.  하나님의 부요에 대해서는 엡 3:16에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모든 것이 주님을 통해서 온다.  이곳에서의 ‘채우시리라’의 ‘플레로세이’(πλζρ?σει)는 미래 능동태로 하나님께서 채워주시는 것을 조금도 의심치 않고 믿는다는 의미를 갖는다.  우리들 각자는 나의 하나님을 소개하여 저희들의 소원을 들어줄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시 84:11, 신 29:5).  채우신다는 왕상 17: 6의 엘리야의 까마귀 보호의 사건이 있다(단 3:27, 히 1:14, 사 33:16).  이는 마지막 주님이 오시기 전에 물과 먹을 식량이 없게 될 때에 동요할 필요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것은 무궁무진하다(마 6:33, 시 24:1, 52:10-12, 학 2: 8).


20절 - 축복의 인사말로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 무궁토록 영광을 돌린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을 상대로 부성애적인 사랑을 가지시는 분이시다.

21-22절.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에게 문안하라고 하며, 나와 함께 있는 형제들과 모든 성도들이 문안한다고 기술한다.  문안은 빌립보 교회의 교인들에 대한 깊은 관심이다.  성도의 문안은 참으로 고상하고 아름다운 일이다.  바울은 이 구절에서 특별히 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가이사 집 몇 사람들을 열거한다.  저들이 누구일까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가이사에 대해서는 빌레몬 13,14에서도 나온다.  한 두어 사람이 아닌 상당수의 사람이 포함된 것으로 본다.  AA. 463에는 자유인, 종의 신분으로 그리스도인 된 자들이 있었다고 하였으며, 이 당시에는 네로의 핍박에서도 자유인 또는 노예의 신분으로 바울을 돕던 자들이 있었으며 또한 그리스도인 된 자도 있었다.  특별히 라는 표현은 매우 중요한 면이 담겨 있다. 바울 당시에는 폭력이 난무하고, 복음을 소외시 하여 육욕적 방종으로 치달린 극히 타락한 시대였다.  암흑과 깊음의 어두움 속에서 복음의 빛이 발산되는 모습을 엿보게 하는 구절이다.  바울은 그런 중에서도 하나님을 믿고 저를 따를 자들을 보고 있다.  바울의 마음속에는 장차 세계로 뻗어 나갈 하나님의 빛을 마음속에 그리고 있다.


23절 -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의 심령에 있을지어다 라고 마지막 기원을 드린다.  심령은 인간의 가장 중심 부분으로,  인격 전체와 환경에 두루 영향을 미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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