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성경강해***/- 요한1,2,3서 강해

요한서신을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에반젤(복음) 2019. 11. 27. 20:49



    

문학과 사회과학적 관점에서-

                       (Ethics in First John: A Literary and Socioscientific Perspective)

 

 

                                                                                                             J. G. van der Watt

 

 바트 교수는 본인의 주임 교수로서 현재 남아공 프레토리아대학교 신약학 교수이시며 세계신약학회 요한복음 분과 위원장을 역임하고 계시다. (번역은 조석민 목사)

 

 

 요한일서의 윤리적 언어는 매우 단순하고 솔직하다.1 저자는 자세한 내용이나 함축없이 형제 사랑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요한일서에는 요한 공동체 외부 사람들과 상황에 대한 윤리적 지침이 매우 적다. 이것은 해석자들을 실망시켰고, '요한의 윤리’를 말할 수 있는지 의심스럽게 했다. 그러나 요한 공동체의 문제가 결과적으로 윤리적 성격을 드러내는 요인으로 작용했음이 잘 알려져 있다. 이것은 요한일서에 나타난 사랑, 죄의 문제, 예수와 같이 의롭거나 순결하게 될 책임, 진리 또는 빛 가운데 행함 속에 잘 나타난다. 이런 윤리적 언급들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다시 자극된다.

 

I. 논문의 주제

 

 이 논문의 주제는 요한이 1세기 가정생활과 관련된 은유의 분명한 구조를 사용하여 자신의 윤리적 사고를 발전시켰다는 것이다.2 요한은 일상생활에 널리 수용되고 있는 관습을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로부터 거듭날 때’ 영적으로 발생한 사건과 연결시켜 구원과 영적 수준에 대한 윤리적 사건들을 이해하고 설명하기 위해서 일반적으로 수용되고 있는 가정생활에 관한 사상을 사용한다. 이것은 '연상(聯想) 의사전달’(associative communication)을 암시한다. 요한은 자신이 의도한 의사소통의 모든 것을 말로 분명히 언급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요한이 '자녀’는 아버지를 사랑해야 한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자기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할 때, 아버지와 자녀 사이의 상호관계의 사회적 역동성은 1세기 독자들의 생각 속에 자동적으로 작용된다. 의사전달 과정 속에서 독자는 비록 요한이 그런 말을 하지 않을지라도 이런 해석적 상황이 되는 사회적 지식을 보충한다. 만일 요한이 가정생활과 관련된 은유의 구조를 사용한 것과 윤리 문제의 취급이 이런 분명한 사회구조 속에서 발생한 것을 인식한다면, 그 당시 적절한 사회 관습들뿐만 아니라 요한이 그것을 사용한 방법을 조사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이런 면에서 요한일서의 윤리는 요한의 신학 구조에서 필수 부분으로 이해될 수 있다.

 

 II. 예비관찰

 

고대 가정생활에 대한 확실한 묘사는 어려운 모험이다. 우리는 지나치게 무비판적으로 몇몇 고대문헌의 저자들이 가정생활에 대하여 말한 것을 고대 지중해 사회에서 일반적인 사실이었다고 간주해서는 안 된다. 사람들이 여러 가지 사회구조(예를 들면, 유목민과 도시 가정)를 형성했고 가정을 다르게 구성한 사실, 또는 삶의 방식의 변화가 가정 생활이 그렇게 구성되도록 영향을 준 사실을 무시할 수 없다.3 고대 지중해 세계의 문화적 다양성 때문에 우리는 단지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용어들을 가지고 연구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요한문서에서 고대문서를 다루는 문제들은 다음 두 가지 이유에서 지나치게 강조되어서는 안 된다.

 

첫째, 사복음서와 같이, 요한은 복잡한 은유에서 자세하고 전문적인 정보를 사용하지 않는다. 요한은 핵심과 널리 수용된 국면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므로 고대 가정생활의 일반적인 묘사는 이 연구를 위하여 충분할 것이다.4 어디에서 실제적인 차이가 발견될지 알기 위해 자세한 정보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필요는 없다.

 

둘째, 요한은 복잡한 은유를 많이 사용한다.5 이것은 다른 여러 가지 것들 중에서(inter alia) 요한이 은유를 설명하고 실지로 논의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요한은 가정생활에 관해서, 특히 자신의 목적을 위한 중요한 점에 관해서, 자신의 생각을 반영시킨다. 왜냐하면 요한이 이런 면을 강조하기 때문에 그것은 우리가 기술하고자 하는 것의 기초가 될 수 있다. 만일 요한일서에서 제공한 단서들을 좇아간다면, 고대 가정 구조의 연구에서 적절하고 함축적인 사회 정보를 쉽게 획득할 수 있다. 클로크(Klauck)가 상기시키듯이,어떤 것을 비교할 때 유사한 것들과 종속된 것들 사이는 조심스럽게 구별해야 한다. 요한 서신에서 발견되는 것은 고대 지중해 사회에서 발견된 것과 유사한 것이다. 규칙에서 예외적인 것들, 또는 사회적 묘사의 차이들은, 그 결과를 무효화하지 않는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모든 곳에서 아주 똑같은 식으로 살았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다만 분명한 사회 형태들이 고대 세계에서 발견된 것과 그것이 요한일서에서 발견된 것은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점이 시대와 장소가 서로 다른 저자들을 함께 고려해야만 하는 이유이다. 요한 문서에서 흥미로운 것은 사회 양상들을 의미하는 많은 비유들이 본문 자체 속에서 발전된 것이다. 요한은 자신이 강조하거나 사용하기를 원하는 특정한 사회 구조의 어떤 면들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므로 해석자는 요한이 말하려고 한 것을 이해하기 위하여 외부의 사회 정보에 완전히 의존하지는 않는다.6 그렇지만 당시의 사회 정보는 해석자에게 참고자료를 제공하는데, 그것은 그 해석자가 요한의 본문에서 추론한 것이 고대 지중해 사회 속에서 실제로 가능했는지, 또는 일반적이었는지를 확인시켜 줄 수 있다. 이런 참고자료는 중요한데, 그것은 현대 해석자들이 고대 사회로부터 격리되어 있는 것을 경험하게 하고, 그런 정보는 그 해석자의 결과를 이끌어내고 확인시켜 주는 데 필요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출발점은 요한일서에서 발견된 것으로, 이 주제에 관한 정보가 될 것이다. 또한 '사회 자료’의 영역을 확장시키기 위해 고대 지중해 사회의 행동에 관한 정보를 고려할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몇몇 고대 사회의 관습들을 기술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III. 윤리적 상황을 이해하기 위한 필수요소

 

A. 아버지의 가정에 태어남 윤리적으로 강력한 진술은 비록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요한일서 3장 9절의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라는 말씀이다7(유사한 진술들, 2:29; 3:10; 4:7; 5:1~2, 18). 이런 구절들로부터 특별한 윤리적 신분으로 태어나는 것, 다시 말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과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윤리에 관한 요한의 사상에 있어서 필수적인 것이 확실하다(3:1~2). 이것은 요한이 출생과 행함의 관계를 - 이것은 그 자체가 논쟁거리들인데 - 신축성 있게 사용하는 것에서 강조된다. 예를 들면, 요한은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난 사람은 죄를 지을 수 없고, 지어서도 안된다고 기술한다(3:9; 5:18). 그러나 다른 식으로도 말하고 있는데, 즉 어떤 사람의 의로운 행동은 그가 정말로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난 사람임을 증명해 준다는 것이다(2:29; 3:10; 4:7; 5:1~2).

 

여기서 사용된 용어들은 하나님과 신자 사이의 관계가 고대 사회에서 가장 친밀한 사회 현상인 가정의 관점에서 비유적으로 정의된 것임을 시사해준다.8 새로운 가정은 믿음으로 구성된다. 하나님은 '아버지’이시고9 믿는 자들은 그의 '자녀’가 된다. 하나님은 믿는 자들에게 '영생’을 주시고 그들이 이 새로운 가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신다(2:25; 3:14~15; 5:11~13).

 

가정은 일반적으로 고대 지중해 생활에서 사회의 기본 구조로 간주되었다.10 한 가정 안에 출생하는 것은 특별히 사회적 차원의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과 함께 '그 가정의 구성원이 됨‘을 의미했다. 이것은 한 사람의 신분과 명예, 현실 사회의 위치를 결정하는 중요한 수단이었다.11 한 마디로, 출생은 사회적 신분을 가리킨다.12 아버지가 가정의 권위 있는 수장이었다는 것도 기억해야만 한다. 한 가정 속에 태어나고 영접되는 것은 자동적으로 그 자녀가 가정에서 아버지와 특별하고 확실한 관계 속에 있음을 의미했다. 이런 사실들은 요한일서의 구원론적이며 윤리적인 논쟁의 출발점을 형성하며, 우리가 이 서신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13 다음과 같은 용어들, 즉 '출생, 생명, 아버지, 자녀, 아들 그리고 순종, 아버지께 두려움 없이 나아감, 원하는 것을 말함’ 등을 사용하여 요한은 가정생활의 사회적 현실에 기초한 소위 '비유적 구조’(metaphorical network)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만들었다. 이런 용어들은 어의론적이고 구문론적인 상호작용14 속에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각각의 관련 속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B. 가정비유와 윤리

 

 ‘가정비유’는 요한일서의 윤리를 이해하기 위한 열쇠다.

 

1. 하나님의 자녀는 죄지을 수 없다. 앞에서 인용한 요한일서 3장 9절에서 요한의 명제를 좀더 자세히 살펴보자. 하나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행하도록 자녀들에게 주어진 절대적 의무는 분명하고 급진적인 용어들로 표현되었다.15 이 의무는 요한일서의 출생과 행동 사이의 핵심적인 연결 때문에 전체 서신을 통해 반향된다.16 하나님으로부터 출생했다는 것은 왜 하나님의 자녀가 죄지을 수 없는지에 대한 이유이다. 선택의 자유나 특별한 상황과 달리 신분은 기본적으로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그 자녀의 행위들로 결정된다(3:10, 11∼15). 순종, 존경 그리고 아버지의 뜻을 좇고 적극적으로 나타내는 성실함은 '어떤 존재’가 되는가, 즉 어떤 가정에서 그 가정의 신분과 삶을 나누는 존재로 태어나는가의 문제이다.17

 

고대 지중해 사회의 한 가정 속에 태어나는 것은 확실한 사회적 기대치들을 창출했다. 누군가로부터 무엇인가를 받는다는 것은 그 받은 사람이 무엇인가를 준 사람에게 적절히 반응하는 것이 의무였고, 생명을 선물로 주는 것은 부모가 자녀를 양육하며 돌보는 것만큼이나 일반적으로 진지하게 이루어졌다. 왜냐하면 부모는 그의 자녀들을 돌보았고,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주었기 때문이며, 특히 부모가 그들을 낳았기 때문에, 자녀들은 순종과 보답을 해야 할 의무가 있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의 부모를 존경하는 것이다.18 자녀의 보답은 자원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적이고, 많은 경우에 있어서 종교적인 의무로서 그 자녀들이 부모로부터 받은 혜택에 대하여 부모에게 보답하는 것이다.19 이런 의무를 부정하고 무시하는 가운데 자녀는 그 자신의 '사회적 본성’을 거스르는 것이었고, 일반적으로 부정적인 모습으로 판단되었다.

 

진실되고 사랑스러운 자녀는 그의 신분에 따라 행동하는 것에 완전히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런 자녀는 그의 신분에 어긋나는 행동으로 그의 가정을 해치거나 불명예스럽게 할 생각이 없다.20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는 "죄지을 수 없다”고 한 명제를 이해하는 것이다. '죄지을 수 없다(cannot)'는 '죄짓지 않을 것이다(will not)', 또는 '죄짓기를 원하지 않는다(does not want to)', 또는 '죄지으려고 생각하지 않는다(does not think of)'로 해석되어야 한다. 이런 사회적 관습은 왜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난 존재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행동을 당연히 수반하는지를 설명해 준다. 이것은 또한 왜 이런 명제가 둘 중의 하나로 사용되는지를 설명해 준다. 즉 요한은 신분은 행위를 결정한다는 것(3:9; 5:18)과 그 반대의 경우인, 사람의 신분은 그의 행위에 의해 결정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2:29; 3:10, 14; 4:7; 5:1∼2). 성실함과 의무가 있는 곳에 그 사람의 행동이 나타난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3:17).

 

 

2. 하나님의 자녀는 죄가 있다. 하나님의 자녀는 죄지을 수 없다는 명제는 요한일서 1장 8∼9절의 하나님의 자녀는 사실 죄가 있다는 언급에 비추어볼 때 잘 알려진 난제이다.

 

강력한 사회적 관습들은 실지로 불순종을 제거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고대 문서에서 어떻게 불순종의 자녀를 다루어야 하는지에 대한 많은 논의가 발견된다. 그런 자녀는 '교육’이 필요했는데, 그것은 토론으로부터 심지어는 가정으로부터 격리시키는 혹독한 처벌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형태를 취할 수 있었다.

 

고대 가정제도에 의하면 양 부모는, 또는 그 부모로부터 지명된 사람들은 자녀교육을 위한 책임이 있었다.21 "부모의 역할은 자녀의 성격 개발에 절대 필요한 것이다."22 필로(Philo, Spec. 2.236)는 참된 아버지는 그의 아들에게 쓸데없는 덕행을 교훈으로 주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플르타크(Plutarch, Mor. 1, De lib. Educ. 8F-9A)는 자녀가 훈계와 설득으로 교육되어야 할 것과 물리적 체벌은 제한되어야 할 것을 강조하였다.23 칭찬과 비난 사이에서 균형이 유지되어야 한다. 필로(Philo, Spec. 2.240~41)는 부모가 그의 불순종하는 자녀를 '치료’(cure)하기 위해서는 적극적이고 엄격한 훈계를 사용해야 하고, 그러므로 다스리는 자와 주인으로서의 역할을 취해야 한다고 말한다.

 

비록 종교적이지만 강력한 사회적 압력이 각 개인을 그들의 부모에게 순종하도록 하고, 가정의 전통에 따라 살게 하지만, 불순종의 자녀들은 실제로 존재했었다.24 불순종은 아주 부정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는데, 특히 그것은 가정 안에서의 관계를 깨뜨리기 때문이다. 그것이 어떤 경우에 엄격한 처벌이 서술된 이유이다. 불순종하는 사람의 가족과의 유대관계는 비록 부모가 그 자녀를 완전히 격리시키는 것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지만 매우 심각해질 수 있었다.25 그러나 가정에서 실수를 고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어떤 사람이 처벌되거나, 또는 어떤 문제가 간단히 의논하는 가운데 해결될 수도 있었고, 이런 식으로 가정의 명예는 회복될 수 있었다.26

 

요한일서에서 우리는 비슷한 것을 발견한다. 예를 들어, 요한이 "해야만 한다”(요일 2:6; 3:16; 4:11)는 말을 사용할 때, 윤리적 완전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사랑과 희생의 의무를 강조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도 역시 때때로 잘못을 하고, 하나님의 가정에서 관계가 깨진다. 이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cf. 1:8, 10), 그렇다고 하나님의 가정에서 단순히 받아들여질 수도 없다. 요한은 이것을 어떻게 취급해야 하는지 설명한다. 죄의 자백에 의해, 즉 죄를 범한 사실을 유감스럽게 인정하는 것과 다시 아버지와 가정의 계명들과 그 뜻에 대한 충성을 선언하는 것에 의하여, 믿는 자는 아버지와 자녀 사이의 관계 회복과 더불어 아버지의 용서를 경험한다.27 아버지는 가정의 수장이기에 그의 뜻을 어긴 것에 대해서 그가 용서해야만 한다. 한편으로는 고백과 다른 한편으로는 용서에 의해서 가정의 정상적인 질서는 회복된다.

 

 이런 조명 아래 요한일서 1장 9절에 있는 죄의 고백의 근본적인 이유는 이해될 수 있다.28 죄의 고백은 어떤 관계의 기본 원리를 전제하는데, 그 기본 원리에서 고백이 이루어진다. 물론 어떤 기본 원리는 종교적으로 구체화 되어진다. 고백의 목적은 손상된 관계를 회복시키는 데 있다. 요한일서 1장 7절과 2장 2절에서 예수님의 구원사역은 이런 관계를 구성하는 것으로 강조되었다(1:7의 죄로부터 정결해짐에 근거한 사귐과 2:1의 대언자의 관계를 비교). 신실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1:9)은 그 자신의 구원 계획에 의해 역사하실 것이다. 즉 하나님과 죄를 고백한 신자들 사이의 관계를 회복하시고, 용서하시는데, 불의한 신자는 의롭게 된다(1:9). 이것은 교제의 구조 속에서 대언자로 말미암아 가능하다. 이것은 그런 사람이 계속 죄짓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cf. 2:1~6), 죄는 그런 사람의 삶의 방식이 아니어야 한다.

 

동일한 문맥 속에서(2:3, 5∼6) 하나님과 완전한 관계 속에 있으며, 하나님을 '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걸어가셨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걸어가야만 한다는 것을 명확히 기술하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알고 있으며, 하나님의 자녀라는 그의 주장은 거짓이다. 이 구절들 속에서 요한은 아직 삶의 방식이 아닌 불순종과 위반의 고립된 실례들을 생각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런 위반들은 현존하는 관계를 무효화하지 않지만, 하나님과 그의 자녀 사이를 부자연스럽게 한다. 이것이 왜 예수님의 속죄사역의 상황 속에서 고백이 부자연스러운 관계를 회복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이유이다. 아버지께 화목제물인 대언자, 곧 예수님의 실재는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요한일서 3장 1∼10절에서 '죄’는 삶의 방식을 의미하지 않는다. 죄짓는 사람은 가정에 대하여 아무 충성이 없고, 그 가정의 요구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다. 이 본문에서 우리는 어떤 관계에서 단순히 고립된 위반을 볼 수 없고, 그 가정의 '특성’에 반대하는 행동을 통하여 그런 관계가 완전히 거절된 것을 볼 수 있다(3:10). '가정법정’(family court)으로서 가족회의(family's concilium)의 역할이 여기서 언급되어지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징계의 기관으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그것의 구성요소는 다양하지만, 그 사람들은 항상 가정의 핵심 부분을 구성한다. 기본적으로 가정의 남성 수장은 가족 가운데 범죄한 사람에 대하여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를 결정하기 전에 가족의 다른 구성원들과 의논하였다.29

 

가족회의 또는 가정법정의 기능과 요한일서 1장 9절∼2장 2절에서 대언자로서의 예수의 역할 사이에 유사한 점들이 있는가? 최소한 대언자라는 용어는 어떤 법적 상황을 보여주는 것 같다. 예수님의 도움은 특별히 하나님의 가정의 구성원이 범죄했을 때 필요하다. 그때 그 사람은 아버지께 나아가야만 한다(2:1). 화목제물로서의 예수님에 대한 사상은 보상이나 잘못된 행위를 고치기 위한 경제적 처벌(그런 보상은 범죄자를 대신하여 대언자에 의해서 제공되어 졌다)이 요구되는 데서 비롯된 것 같다. 만일 그렇다면, 요한일서 1장 9절과 2장 1절은 함께 읽혀져야 한다. 죄인은 그 죄를 반드시 고백해야 하지만, 대언자의 도움 속에서 고백할 수 있다. 요한일서 1장 7절에서 예수님의 속죄사역은 이런 점에서 언급되었고, 2장 2절은 그런 상황적인 논의를 강력히 뒷받침해 준다.

 

 

3.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 고대 가정들 가운데 가정의 '특성’을 나타내고 대표하는 제도들의 전달은 공공제도의 초석이었다.

 

 고대인들의 개성은 대체적으로 집단역학에 의해 결정되었다.30 몇 가지 점들이 언급되어 져야만 한다. 고대 지중해 사람들은 언제나 가정이나 공동체의 원리들에 따라서 역할을 했다. 이런 원리들은 사람의 신분을 결정했다. 언제나 신분은 현대 서구문화에서 보는 것처럼 개인적으로 결정되지 않았다.31 성실함, 존경 그리고 공동체를 위한 의무와 그 전통들은 자연적으로 개인에게 있어서 자기정체성의 본질적인 부분이었다.

 

시세로(Cicero)는 아피우스(Appius)에 대하여 말을 잘하였는데, 아피우스는 가족들에게 절대명령을 유지했고, '그의 선조들의 규율과 제도들을’ 보호했던 사람이었다.32 그룹의 다른 구성원들의 신분과 행동의 틀 속에서, 특히 사회적으로 더욱 중요한 구성원들(아버지와 가장 손위의 형제)의 신분과 행동의 구조 속에서 개인 구성원은 늘 자기 정체성을 발견했다. 개인들이 그룹의 대표들이었기에,33 그들은 그 그룹에 무엇이 중요한가를 따라서 그들의 결정을 내렸다.34 그룹의 구성원들은 또한 서로 돕고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공동체의 각 구성원은 공동체의 '특성’에 따라 그 공동체의 명예를 보호하기 위하여 행동해야만 했다.35 가정의 관습들과 전통들 속에 표현된 이런 '특성’은 귀중하고 바람직한 것이었다.36 이것은 아버지나 가정의 수장에 의해서 전수되었는데, 그들은 이것을 그의 조상으로부터 받은 것이었고, 이것은 그렇게 계속되어졌다.37

 

그러므로 가정의 구성원은 아버지께 복종하는 것 또는 가정의 '특성’을 향상시키고 보호하기 위하여 사회적으로 더 중요한 가족 구성원들의 모범을 따르는 것 때문에 항상 종교적, 사회적 압박 속에 있었다. '훌륭한 사람’은 그의 가정을 보존하는 능력과 그 능력의 효용성에 따라 정의되어졌다.38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행동에 의하여 자녀는 가정의 '특성’이나 전통을 드러냈다.39 아버지의 긍정적인 모범은 극도로 중요했는데, 가족의 다른 구성원들이 그 모범을 따라가야만 했기 때문이다. 40 이런 사상들은 요한이 믿는 자들의 윤리적 의무에 대하여 말하는 것과 부합한다. 요한은 하나님의 가정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설명하기 위하여 전통적인 제도를 사용한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 행위는 그의 자녀들의 생활방식과 '특성’을 결정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신다. 그러므로 만일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원한다면 예수의 모범을 본받아야만 한다. 요한은 하나님, 예수 그리고 성령에 대하여 많이 언급한다.

 

(1) 하나님은 빛이시며(요일 1:5), 사랑이시고(4:8, 16), 볼 수 없는 분이시다(4:12, 20). 그분은 모든 것을 아신다(3:20). 그분은 시간의 제한을 초월하셔서 예수님을 통하여 영생을 보내주신다(1:2; 4:9).

 

(2) 예수는 영생으로 상징되지만(1:1∼2), 특별히 기능적인 용어들로 묘사되어진다. 그분은 죄가 없으신 분이시고(3:5), 의로우시며(2:2, 29; 3:7), 순결하신 분이시다(3:3). 예수는 진리로서(5:20), 자신을 계시하셔서(1:1) 우리에게 알게 하신다. 그분은 또한 대언자로서(2:1)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 놓으셨다(3:16).

 

(3) 성령은 진리로 묘사된다. 그분은 믿는 자들을 인도하시고 가르치신다(2:27). 그러므로, 하나님의 가정에서 기본적이며 결정적인 성격들은 하나님, 예수 그리고 성령에 관한 말씀에 잘 나타나 있다. 이미 말한 것처럼, 고대 가정들 속에서 이런 성격들은 특별한 가족 구성원들의 행동과 생활 속에 그대로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믿는 자들은 이와 비슷하게 행동하고 살아야 한다. 이것은 요한일서에서 최소한 두 가지 면으로 묘사된다. 즉 하나님을 알고 그 속에 거하는 것과 그에 따라서 행동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고 그 안에 거하기 위해서, 믿는 자들의 합당한 삶의 방식은 믿는 자의 삶을 질적으로 결정하는 상호연합방식들(Immanenzformeln, 슈낙켄버그[Schnacken-burg]의 용어)의 관점에서 묘사된다.

 

진리는 믿는 자들 속에 있다(1:8; 2:4). 사랑은 그들 속에 있고(2:15; 3:17; 4:9), 그들은 사랑 가운데 거하여야 한다(4:16). 생명은 그들 속에 있고(3:15), 그들은 그 생명 속에 거하여야 한다(2:9~10). 말씀 또는 메시지는 그들 속에 있다(1:10; 2:24). 이런 언급들이 강조하는 것은 믿는 자들은 하나님(2:24; 3:24; 4:13, 15~16) 과 예수(2:6, 24, 28; 5:20) 안에 거해야 하고, 하나님과 예수는 믿는 자들 속에 거하셔야 한다(2:5; 3:24; 4:12~16)는 사상이다. 이 마지막 언급은 존재론적으로 또한 신비하게 해석되지 말아야 한다. 가정 비유의 조명 속에서 이런 상호연합방식들은 기본적으로 동일한 가정의 구성원으로서 신분, 신념 그리고 제도를 공유하는 기반 위에서 질적이고 기능적인 연합을 의미한다.

 

각 개인은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행동하고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그들이 동일한 가정의 구성원으로서 공유하고 있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사랑 안에 거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가르치셨고 예수님을 통해서 보여주셨던 사랑의 원리들을 따라서 행동하고 생각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말로 하면, 아버지는 아들 가운데 거하시는데(다른 여러 가지 것들 중에서), 왜냐하면 영예로운 그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아들은 사상과 행동으로 그 가정의 공동의 뜻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버지께서 아들 '안에’(in) 계신다는 언급과 아들이 아버지 '안에’ 있다고 하는 요한의 언급이 아주 똑같은 것을 암시하는 것이 아님을 주목해야만 한다. 아버지는 권위 가운데 계시고, 그 권위는 그들의 관계를 결정한다. 아들 속에 거하시는 아버지의 존재는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뜻과 명령들을 통한 아버지의 결정을 암시해 준다. 아버지 속에 있는 아들의 존재는 아버지께 대한 순종의 태도를 암시한다.

 

서로에게 존엄하게 관심을 갖고 상호관계 속에서 서로의 관계적 위치를 인식하는 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속한’(in each other) 양자 사이의 관계 속에서 공통 분모인 것처럼 보인다. 이것이, 다른 여러 가지 것들 중에서, 왜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나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이 첫 번째로 언급될 수 있는지에 대한 이유이다(3:1; 4:7). 고대 가정 속에서 부모는 그가 받아들일 만하다고 믿는 것을 따라서 그의 자녀를 교육시켜야만 했었다. 왜냐하면 이것이 관습이었기 때문이다.41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난 것은 아버지 하나님을 아는 것을 암시한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올바른 행동(그 분의 뜻과 성품을 따라서 행동하는 즉, 서로 사랑하는 것)으로 인도할 것이다. 요한일서 4장 7∼8절에서 하나님을 아는 것은, 사랑의 생명이 이런 출생에 따라와야 하는 것만큼이나, 하나님의 가정 속에 태어나는 것과 직접적으로 연관된다. 예수님을 아는 것은 믿는 자가 예수님 안에 거하고 있는 것을 증명해 준다(상호연합방식 2:3∼5을 비교).

 

아버지와 아들에 대한 지식은 개인 가족 구성원이 그 가정의 특성을 따라서 살아가는 기반을 형성한다. 그러므로 요한은 5장 20절에서 믿는 자는 진리이신 예수님을 알고 실제로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고 말한다. 예수님을 아는 것, 진리를 아는 것은 하나님의 가정에서 기대하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믿는 자들은 예수님이 의로우신 분이기 때문에, 그들도 의롭게 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안다(2:29). 이것이 요한의 사상 속에서 예수님의 계시의 역할이 너무도 중요한 한 가지 이유이다(1:1). 믿는 자들의 새로운 신분은 또한 아버지를 아는 것으로 표현되었는데, 그것은 그의 말씀이 그들 가운데 거하는 것을 의미한다(2:12∼14). 아버지를 아는 것은 또한 가정의 구성원들이 서로 알고, 서로 경청하는 것을 암시한다(4:5∼6). 그들의 삶은 모두 아버지와 그의 뜻에 따라 결정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아버지를 아는 지식은 오직 믿는 자들에게만 제한되었기에(3:1; 4:5∼8), 이것은 하나님의 가정의 특성이다. 죄를 범한 불신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믿는 자들에게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3:6; 4:6∼8). 그 사람은 하나님의 가정의 구성원이 아니고 그 가정에서 교육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는 그 가정을 모른다. 이런 종교적인 가정의 관계는 지상의 관계 또는 자연적 관계를 압도하고 초월한다는 사실을 아벨에 대한 가인의 행동에서 볼 수 있다(3:13∼18). 두 형제는 서로 다른 종교적 가정에 속했었고, 그들은 그에 따라 행동했다. 형제로서 서로 서로를 위한 그들의 본성적인 사랑은 그들의 실제 '아버지들’(fathers)에 대한 그들의 신뢰로 무력하게 되었다. 이것이 가인이 살인을 하게 된 이유이고, 동일한 지상의 가정 안에서 사람들이 서로에게 등을 질 수 있는 이유이다. 보다 넓은 종교적인 관점이 압도한다. 믿는 자들은 하나님을 알고 그 안에 거해야 하는 것과 하나님과 연관된 특성들 가운데 거하는 것뿐만 아니라, 또한 그에 따라서 행동해야만 한다. 이것은 요한일서 3장 18절에서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라고 적절히 묘사되었다. 행함은 자녀의 가정에 대한 충실함을 드러내야 한다. 이것은 상호연합방식들의 반대면이다.

 

요한일서는 다양한 방법 속에서 어떻게 믿는 자들의 행동이 하나님의 가정의 특성들과 일치하는지를 보여준다. 요한일서 1장 6∼7절과 2장 11절에 의하면, 하나님이 빛 가운데 계신 것처럼 빛 가운데 살아가는 믿는 자는 다른 믿는 자들과 교제가 있다. 반면에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불신자들은 어두움 가운데 살아간다. 빛과 어두움의 삶의 연합은 믿는 자가 빛이신 하나님과 지속적으로 가깝게 교제하는 것을 보여주는 모습이다. 빛 가운데 살아가기 위하여 요한은 하나님의 행위들에 상응하는 행동들을 제안한다.42 그러나 하나님은 빛의 근원이시고, 어떻게 빛 가운데 이런 삶을 살아야만 하는지를 결정하신다. 요한일서 2장 6절에서 요한은 명백하게 삶의 방식이 같아야 함을 말한다.

 

즉 믿는 자는 예수처럼 살아야 한다. 이것은 믿는 자가 계명에 따라 행동하면 나타나는 것이다. 믿는 자는 계명(2:3, 4), 하나님의 말씀(2:5; 3:22, 24; 5:3)을 지켜야 하고, 더욱이 하나님 자신을 따라야 한다. '지킨다’는 용어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향한 순종의 태도를 말한다(5:1∼5). 이 뜻을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가정에서 영원함을 공유하게 될 것인데(2:17), 그것은 영생을 얻은 결과이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이 가정을 위한 그의 뜻이 관련되는 한 그의 자녀들을 '무지한’ 상태로 내버려두시지 않는다는 것을 주목해야만 한다. 요한일서 5장 20절에서 요한은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에게 지각을 주어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그분 안에 있는 것을 알게 하려고 오신 것을 말한다. 이것은 요한일서 1장 1∼3절에서 이 서신이 생명의 말씀에 관한 것이라는 진술을 반영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진리의 길을 보이시는 분이신데, 그 속에서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나 영생을 소유한 하나님의 가정의 구성원은 그 가정의 상황 속에 주어진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43

 

예수님 안에 윤리적 지침들이 주어졌다. 이런 '지침’(guidelines)들은 믿는 자들의 행동을 위한 모범으로 요한일서 2장 6절에서 "예수님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그리고 4장 17절에서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고 강하게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믿는 자들의 행동을 위한 청사진이다. 이것이 요한의 윤리 사상 속에 있는 주요 개념이다. 믿는 자들의 행동을 위한 모범으로서 예수와 그의 행동을 계속 사용하여 요한은 눈부시게 자신의 윤리사상을 넓힌다. 윤리 지침은 어떤 규칙들의 집합이 아니다. 이것은 예수의 행동과 태도에 의해서 세워진 것이고, 성령을 통해서 믿는 자들 속에 구체화되어지는 것이다.44

 

예수의 실제적인 인도하심과 성령의 영적 인도하심을 통해서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신의 길을 발견한다. 예수의 행동들 가운데 어떤 특성들이 믿는 자들을 위한 지침으로서 도움이 되는가? 이 짧은 서신의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요한일서 3장 16절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믿는 자에게 사랑이 정말로 무엇인가를 모범으로 보여준 것이며, 믿는 자 역시 자신의 생명을 형제들을 위해 내어놓아야만 한다. 이런 면에서 믿는 자의 사랑은 본질적으로 예수님의 사랑과 비슷할 것이다. 이것은 세상을 사랑하는 것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사이의 대조를 통해서 강조되어진다(2:15).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행동과 반대되는 것이다(2:17). 하나님은 사랑이시다(4:8, 16). 예수는 사랑 가운데 행동하신다(3:16). 믿는 자는 사랑해야만 한다(3:16; 4:12). 하나님의 가정은 사랑의 가정이다.

 

(2) 요한일서 2장 29절에 의하면, "너희가 그의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2:1; 3:7, 12를 비교). 한 마디로,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난 사람이다. 예수 자신은 의로움이 하나님의 특성임을 보여준다(2:1). 사람의 행위는 그가 누구인지를 보여준다. 예수를 아는 것과 출생을 통해 하나님의 가정의 구성원이 되어져야만 사람은 예수의 모범을 따라서 행동한다. 이런 행위의 동기는 가정적 연합이나 관계 속에 놓여진다.

 

(3) 정결함에 있어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믿는 자는 예수가 정결하신 것과 같이 자신을 정결하게 해야만 한다(3:3). 왜냐하면 믿는 자는 하나님의 가정의 한 부분이고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이다(3:2).

 

(4) 예수는 죄가 없으시다. 죄의 문제는 똑같이 하나님의 자녀에게 있어서도 사실임이 틀림없다(3:5~6, 9~10). 절대적이고 이상적인 용어들이 사용되는 경향은 그것이 종교적인 문제들이 되었을 때 이런 완전한 기대들 속에서 볼 수 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셨듯이 믿는 자도 그렇게 하도록 격려하는 가운데 요한은 고대 지중해 모든 사회가 일반적으로 실행한 가정 제도의 전수(傳受) 사상을 사용한다. 믿는 자의 윤리는 가정에서 아버지가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따라서 결정된다. 실제로 가정의 모든 구성원의 행동은 가정의 머리로 상징된 가정의 특성을 반영해야 한다.

 

 

4. 아버지와 신뢰의 관계 요한은 어떻게 믿는 자와 아무도 보지 못한 하나님(4:12, 20)과의 관계를 묘사하고 있는가?

 

다른 모든 것들 가운데 요한은 아버지의 비유와 관련된 용어들을 사용하거나 아버지의 비유와 관계된 용어들의 관계 속에서 묘사하고 있다. 고대 지중해 사회에서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의사소통의 방식이나 사회적 상호작용은 가정의 사회적 성격 때문에 언제나 매우 편리했다.45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Pol. 1.2.1~21253B)는 아버지와 자녀 사이의 관계를 세 가지 기본 관계들 중 하나로 묘사한다. 그리고 그는 그 관계를 왕의 규례의 조명 아래 보호와 사랑에 강하게 초점을 맞추어서 이해했다(ibid., 1.5.5~121260A-B). 아버지는 모임과 사람들과의 약속에 항상 아들을 동반했고, 그 아들은 그 아버지와 함께 일하면서 교육되었다. 아버지와 그 아들들 사이의 접촉은 때때로 제한이 있었던 증거가 있는 듯하지만, 그런 접촉을 위한 기회들은 풍부했었다. 보통 어린 소년은 그의 아버지께 오히려 자유롭게 나아갈 수 있었다.

 

요한일서에서 그런 사회적 관습의 유사성에 주목하는 것은 중요하다. 하나님과 믿는 자 사이의 관계는 대단히 개방된 것으로 묘사된다. 일부의 고대 지중해 공동체들 가운데 가족들 안에서의 접촉은 보다 제한적이었다는 가능성이 있는 증거에도 불구하고, 요한은 접촉이 자유롭게 이루어질 수 있었던 가정의 상황을 생각하는 중인데,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견해들 속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1) 요한일서 3장 21절에서 믿는 자는 하나님 앞에서 확신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다(3:20). 여기서 주제는 믿는 자들이 '그들의 마음으로’(by their hearts) 책망을 경험한 것이다. 그런 책망의 경험(experience of conde-mnation)은 아마도 대부분 가까운 문맥과 관련하여 이해되어져야 한다. 믿는 자는 예수님이 그랬듯이 그 생명을 내어놓아야 한다(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에 관해서 3:16~17과 3:22~24를 비교). 믿는 자가 윤리적으로 잠시 잘못을 하거나 요동하거나 그의 마음에 의하여 비난받는 것을 발견할 때마다, 무엇이든지 구하는 것을 주실 하나님 앞에서 확신을 가져야만 한다(3:22). 이렇게 아버지를 향하여 열려져 있음은 문제의 해결을 보여준다.

 

(2) 요한일서 2장 28∼29절에서 요한은 믿는 자들은 확신을 가질 수 있고,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부끄러움 가운데 위축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믿는 자들은 예수님 안에 거하고, 그들의 행위 속에 예수님의 의로움이 반영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가정 안에서 태어났음을 증명해 준다. 가정 상황은 분명히 믿는 자들의 확신의 배경이 된다. 그러므로 이런 확신은 또한 하나님의 가정 속의 종말론적인 태도에서 이해될 수 있다.

 

(3) 믿는 자가 구하는 것은 받게 될 것이다(3:22; 5:13∼15). 본문 속에서 몇 가지는 가정 상황이 이런 역할을 하는 것을 암시해 준다. 요한일서 5장 13∼15절에서 구하는 것은 문맥상으로 영생을 소유한 것과 관계된다. 이것은 가정에 대한 연상(聯想)문맥 속에 놓여져 있는데, 그곳에서 아버지의 뜻은 중요하다(5:14). 아버지께 자유롭게 나아가는 것을 위하여 요한일서 2장 28∼29절에 사용된 동일한 단어가 여기서도 나타난다. 요한일서 3장 22절에서 믿는 자가 하나님께 무엇을 구하려고 나아가는 것에 대한 근거는 윤리적인 용어들로 표현되었다. 즉 그 사람은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분이 기뻐하시는 것을 행한다. 가정의 계명들에 따라서 행동하는 의무와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는 것은 믿는 자가 그 자신의 행위로 하나님의 도움을 얻기 위하여 나아갈 때 갖게 될 확신과 함께 병행한다. 여기서 암시해 주는 것은 믿는 자의 뜻은 아버지의 뜻과 동시에 잘 일치되는데(5:14), 그 아버지의 뜻은 무엇이든지 믿는 자가 구하는 것들은 들으실 것이고, 그 이유는 이것이 아버지의 뜻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4) 하나님과 믿는 자 사이의 신뢰 관계의 사상은 요한 일서 4장 17∼18절에도 표현되었다. 사랑 안에 거하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사람 안에 거하신다. 우리가 이미 언급한 것처럼, 이런 표현들은 가정의 특성을 고수하고 영예롭게 하는 책임의 조명아래 이해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믿는 자 사이의 관계는 사랑가운데 새겨지고, 두려움이나 그 관계 속에 비정상적인 것들이 존재하지 않는다.46 믿는 자는 두려움 없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고, 확신을 가지고 나아갈 수 있으며, 비록 심판의 날에도 그러하다. 다시 말해, 윤리적인 면은 현재이다. 믿는 자는 사랑 가운데 하나님이 그러하듯이, 믿는 자도 이 세상 안에서 그러하다(4:17). 만약 당신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당신의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다면(4:20∼21), 당신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처럼 사는 것이 아니다. 가정이라는 관점에서 말하면, 이것은 당신이 자신의 행동들 가운데 가정의 특성을 나타내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모든 경우에 있어서 분명한 관계들은 하나님의 가정의 구성원이 되는 것과 그에 대한 지식 그리고 가정 안에서의 관계로부터 주어지는데 신뢰 사이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고, 그 속에서 믿는 자는 바르게 행동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에 따른 행위는 어떤 명령에 도덕적으로 순종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가정 관계 속에 새겨진 삶의 양식으로 그 속에는 신뢰와 사랑이 지배한다.

 

C. 사랑은 무엇인가

 

윤리적 범주 안에서 미덕과 부도덕의 종합적인 목록은 요한일서에 적다. '진리, 의로움, 순전함, 죄없음’과 같은 단어들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비록 그것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모범들과 지속적인 관계는 있지만, 명확한 항목을 채워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두 본문들은 요한일서에서 무엇이 올바른 행위를 의미하는지 결정하는 데 도움이 된다. 두 본문은 모두 사랑과 관계가 있다. 첫 번째 본문은 요한일서 3장 16~17절로 무엇이 사랑인지를 묘사한다. 즉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 보냐." 이 서신의 다른 구절들의 조명 아래 이 본문을 자세히 살펴봄으로47, 몇몇 중요한 면들을 주목해야 한다.

 

(1) 사랑의 기본적이며 질적인 결정요소는 하나님 자신이시다(4:10~11, 16~17).48 그의 사랑은 모든 사람의 유익을 위해 (그들의 죄를 사하기 위하여) 주신 그의 아들의 선물 속에서 이해될 수 있다(4:10). 그리스도안에서 믿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다. 믿는 자들의 삶 속에 표현된 사랑은 그의 가정과 하나님의 선하심을 구하는 사랑이다. 한(Hahn)은 그것을간결하게 표현하기를 "인간의 도덕 행위는, 말하자면,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해서 하나님을 향해 가는 어떤 운동에 깊이 관여하는 것”이라고 한다.49

 

 (2) 우리를 위하여 그의 생명을 내어놓으신(3:16) 예수의 자기희생의 행동은 믿는 자들에게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그 자신의 불이익을 택하는, 비록 그것이 그의 생명을 내어놓는 일일지라도, 행동의 모범으로 역할을 한다. 이 사랑의 본질은 대가를 계산하지 않고 자기를 희생하여 형제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다.50 요한일서 3장 11~18절의 조명 아래, 사랑은 한 사람의 생명을 다른 사람을 위하여 그리고 그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비록 그 자신의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사용한다는 면에서 말할 수 있다.51 이것은 바로 정확하게 가인이 행한 것과 정반대이다(3:11~15). 이런 점에서 개인의 행동은 단체의 유익에 의하여 결정된다.

 

(3) 사랑은 적극적인 것이지 소극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다.52 만일 믿는 자가 형제의 필요함을 보면 도와주어야 한다(3:17). 믿는 자는 그 사람이 도움을 요청할 때까지 기다려서는 안 된다. 이런 점은 재산에 대한 고대 공동체와 가정제도의 사상의 조명 속에서 이해될 수 있다. 자원의 공동 소유권은 자연적인 우주 질서의 한 부분으로서 이해되고, 우정으로 묘사되는데, 이것은 인간이 개인 소유물들을 구하면서 파괴되어졌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는 "친구들이 소유하고 있는 것은 공동재산이다”라는 속담은 사실을 표현하고 있는데, 왜냐하면 우정은 공동체에 의존되어 있기 때문이다.53 하나님의 가정에서 재산을 공유하기를 기뻐하지 않는 것은 부도덕한 것인데, 이것은 그 가정의 구성원이 공유하는 것에 실패하여 다른 구성원과 불화가 생긴다는 점에서가 아니라, 새로운 영생의 필수 조건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에 따라서 실제적으로 살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그렇다.

 

 (4) 하나님의 자녀는 아버지를 사랑할 뿐만 아니라(2:15; 4:19~21; 5:1~3) 가정의 다른 구성원들도 사랑해야만 한다(2:10; 3:10, 11, 14, 23; 4:7, 11, 12, 21; 5:1~3). 개인 관계의 차원에서 사랑은 가정의 다른 구성원들의 유익을 위해 작용한다. 이것은 윤리를 규칙들의 단순한 나열과는 다른 수준에 머물게 한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믿는 자는 그의 가정의 유익을 위하여 행동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사랑을 기술하여 요한은 모든 가능한 상황들을 포함하는데, 왜냐하면 어떤 상황에서 사랑의 행위가 있어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간단한 질문은 "어떻게 나의 형제를 도울 수 있는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끊임없이 가정의 구성원들을 돌보고, 보호하고, 도와주는 데 초점을 맞추는 것이며, 윤리적 행위는 출발점이 아니라 그런 모든 암시들과 함께 하나님의 가정 안에 태어난 존재의 결과이다.

 

두 번째 본문은 요한일서 2장 15~17절로, 이 본문에서는 세상을 향한 믿는 자의 적절한 태도가 취급된다.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분명하게 대조된다.54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육신의 욕망, 안목의 정욕, 그리고 이생의 자랑을 포함한다. 기본적인 초점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에서가 아니라 찰나적이고 물질적인 세상에서 그 자신의 욕망과 유익을 구하는 사람에게 맞추어져 있다.55 그 자신의 욕망을 따르는 사람은 그 자신을 자기 형편에 맞춘다. 이 모든 것들이 지나갔을 때, 그 사람은 아무것도 없이 홀로 남겨질 것이다. 반면에 믿는 자는 영원히 거할 것인데,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마지막 가정 속에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선권들에 대한 갈등의 경우이다. 요한일서 2장 14절에서 믿는 자는 악한 자를 이겼다고 말하고, 그 사람은 아버지를 알고 하나님의 말씀이 그 속에 있다고 말한다. 그의 우선권들은 아버지께 있다. 믿는 자는 욕망, 정욕, 또는 자랑에 유혹되지 말아야 하는데, 그것들은 그의 관심을 아버지의 뜻에서 멀어지게 한다. 이것은 믿는 자가 이 세상에 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믿는 자가 그의 우선권들과 그의 가정을 향한 태도에 있어서 세상에 의해 영향 받지 않는 그런 방식으로 살아야 함을 의미한다. 동시에 두 가정의 일원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합당한 가정과 아버지를 향한 성실함은 절대적이고 다른 것에 대한 성실함은 제외된다.

 

D. 윤리와 불신자들

 

하나님의 가정과 마귀의 가정으로서 불신자들(3:10 3:1∼2를 비교) 사이의 양극화는 이 서신에서 윤리적 긴장을 초래한다. 절대적인 성실함과 사랑은 상호 공동체적 현상들(intercommunal phenomena)인 것처럼 보인다.56 하나님의 가정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가? 믿는 자는 그들을 향해 어떤 책임을 갖고 있는가? 이런 질문들은 이 서신에서 언급되지 않았다. 이런 질문은 신학적인 관점과 관계없이 발생한다. 요한일서 1장 1~4절에서 생명의 메시지는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된다. 이 서신의 나머지 부분에서 예수님의 사역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들을 죽음으로부터 건져내어 영원토록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하는 것이 확연해진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으로 그들은 가정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57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난 모든 사람은 본래 죽었던 자로 세상의 한 부분이었다. 하나님의 사랑의 주된 표현은 그들에게 영생을 주신 것이었다. 비슷하게 믿는 자는 생명과 사랑의 메시지를 전달함으로써 세상을 사랑해야 한다. 불신자를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공동체 안으로 불러들이는 것이다. 불신자는 믿는 자가 되는 즉시 자신이 형제사랑의 공동체 안에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IV. 결론

 

가정은 명백히 고대 지중해 사회 속에서 모든 사람의 매일의 생활에서 핵심적인 부분이었다. 가정생활의 일반적인 관습들은 잘 알려졌다. 하나님, 예수님 그리고 믿는 자의 구원의 관계를 묘사하는 가운데 그런 것들의 사용은 '영적 실체’(spiritual reality)를 묘사하기 위한 많은 잠재적 연상(聯想)을 가능하게 했다. 이런 연상은 처음 독자들에게 고정적이었기 때문에 요한이 모든 연상을 자세히 공식화할 필요는 없었다. 요한이 한 사람을 단순히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렀을 때, 그는 가정생활과 관련된 사회 문화적 연상의 전체 구조를 작동시켰다. 왜 사람이 그의 부모를 경청해야 하는지, 왜 사람이 그의 가정에 성실해야 하는지 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고대 연상의 일반적인 구조를 공유하지 못한 현대 독자에게 이 모든 것은 문제가 된다. 요한이 특별한 비유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으로 현대 독자는 이런 연상들을 채울 수 있고, 요한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더욱 잘 이해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비록 요한이 그들에게 계명들을 순종하는 것과 만일 그들이 잘못을 저질렀다면 그들의 죄를 고백하는 것을 말하고 있지만, 왜 요한이 믿는 자들은 죄지을 수 없다고 했는지를 잘 이해할 수 있다. 요한은 그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회문화적 관습을 배경으로 하여 그의 언급들은 적절한 의미가 주어진다. 이런 특별한 비유의 사용으로 요한은 믿는 자들이 그 자신들을 사회문화적으로 평가하도록 도움을 주었다. 가정의 연합과 가정의 책임들은 분명히 정의되었다. 하나님의 가정 속에 믿는 자들을 포함시키는 것으로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배척하는 것으로 요한은 사회문화적 영역들을 분명하게 그려냈다. 이것은 공동체의 구성원들에게 자기정체성에 대한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왔고, 결국 그런 면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윤리적 책임들을 숙고하였다. 그들은 양극화된 사회 속에서 다른 그룹과 구별되는 특별한 그룹의 구성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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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자주 - 각주의 참고문헌은 더 깊은 연구를 위하여 원문을 그대로 두었고, 저자 자신의 설명적인 각주만 한글로 옮겼다. Cf. R. Schnackenburg, The Moral Teaching of the New Testament (New York: Herder &Herder, 1965) 316. Cf. H.-J Klauck, Der erste Johannesbrief (EKKNT 23/1; Neukirchen-Vluyn: Neukirchener Verlag, 1991) 277∼80.

 

2. 요한은 단순히 편리하게 저자(The author)를 나타내는 방법이다.

 

3. Cf. R. de Vaux, Ancient Israel: Its Life and Institutions (London: Darton, Longman &Todd, 1961) 20∼23. 더욱이 사회 속에서 여성의 위치에 대한 견해는 제국의 동방과 서방 지역에서 서로 달랐다. M. Gielen (Tradition und Theologie neutestamentlicher Haustafelethik: Ein Beitrag zur Frage einer christlichen Auseinandersetzung mit geselschaftlichen Normen [Frankfurt am Main: Hain, 1990] 146); 기런(Gielen)은 본국의 권위(the patria potestas)라는 관점에서 로만 라틴(the Roman-Latin)과 헬라적인 그리스(Hellenstic-Greek)사이를 구별했다. J.G. van der Watt, Interpreting Imagery in John s Gospel: John 10 and 15 as Case Studies , in Hupomnema: Feesbundel Opgedra aan J.P. Louw (ed. J.H. Barkhuizen et al.; Pretoria: Univeristy of Pretoria Press, 1992) 272∼79; idem, Metaphorik in Joh 15, 1∼8, BZ 38 (1994) 79∼80.

 

4. 고대 지중해 문서들이 이런 문화를 반영한다는 개념에 문제가 있을 수 있는데, 그것은 모든 문서들이 플라톤의 사상으로 제한된 문서들이기 때문이다. 비록 이것이 성경 본문에 대한 사회학적 연구 방법론에 관한 이론적 연구는 아니지만, 사회언어학적 관점에서 본문이 사회적 관습들과 연결된다는 것을 숙지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관습들은 언어 속에 나타나며, 이것은 다른 여러 가지 것들 중에서(inter alia) 특히 비유와 은유를 통해 나타나는데, 그 중에 가정의 비유는 그 한 예이다.

 

5. See van der Watt, Interpreting Imagery in John s Gospel , 272∼79; idem., Metaphorik in Joh 15, 1∼8, 77∼79. H.-J.Klauck, Die religi se Umwelt des Urchristentums 1: Stadt- und Hausreligion, Mysterienkulte, Volksglaube (Kohlhammer Studienb cher, Theologie 9/1: Stuttgart: Kohlhammer, 1995) 22.

 

 6. 예를 들어, 견유학파의 사람들(The Cynics) 또는 금욕주의자들(The Stoics)은 그들의 삶의 양식이 그 당시의 일반적인 삶보다 더 개인주의적이었다. 이것은 요한이 생각했던 것이 아니다.

 

7. W. Marxsen(Christliche und christliche Ethik im Neuen Testament [G tersloh: Mohn, 1989] 261∼62)은 이 진술의 절대성은 저자의 언어사용의 안일함(sorglosen Umgang mit der Sprache)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으로 나중에 확실해 질 것이다.

 

8. See Klauck, Der erste Johannesbrief, 285. 가정의 비유적 사용은 고대사회 속에서 흔했다(ibid., 277∼78, on the term, brother). 고대자료를 사용할 때 어떤 고정된 규칙들이 아니라 경향들 속에서 다루어 질 수밖에 없음은 곧 자명해진다. 실질적으로 모든 규칙에는 예외들이 있다. 이런 현상으로 자료 비교를 하는 우리가 실망하지 않아야 하고, 오히려 결론들을 도출하는 데 있어서 보다 더 신중을 기할 수 있어야 한다.

 

9. 요한일서 3:1의 아버지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비교해 보라(요한 이서 3절의 "하나님 아버지로부터"는 하나님과 아버지 사이의 신분을 확인해 준다). 주로 요한일서 1장과 2장에 아버지라는 단어가 사용된 것은 흥미롭다. 그 밖의 다른 곳에서는, 3:1과 4:14에 한번 씩 나타난다. 하나님이 3:1과 4:14∼15에 아버지로서 분명히 확인된 이래로, 3장과 4장 속에서 하나님에 관한 언급들은 가정의 관점에서 연상적으로 주어지는데, 특히 출생 (예를 들면, 3:9; 5:1, 4)과 자녀들(예를 들면, 3:2, 10; 5:2, 5)에 대한 언급들 속에 나타난다.

 

 10. See J. Stambaugh and D. Balch, The Social World of the First Christians (London: SPCK, 1986) 123, on the Graeco-Roman situation, and E.M. Lassen, "Family as Metaphor: Family Images atthe Time of the Old Testament and Early Judaism", SJOT 6 (1992) 247∼254, on the situation in ancient Israel and in early Judaism. B. Rawson ("The Roman Family", in The Family in Ancient Rome: New Perspectives [ed. B. Rawson; Ithaca, NY: Cornell University Press, 1986] 7∼8)은 가정이 혈연관계만 아니라 부계(父系)가정 아래 통제되는 모든 사람을 포함한다고 지적한다. G. Schrot (Familia, in KIP, 2. 511)은 가정은 그 자체가 단순히 사람들을 의미하는 용어일 뿐만 아니라, 또한 경제품목 또는 재산개념 (Verm gensbegriff) 이었다고 지적한다. 가정의 구성원이 된다는 것은 가정이 소유한 것을 함께 나누는 것을 의미했다.

 

11. Josephus (A.J. 4.8.39 289)는 어린이는 타락한 부모 때문에 처벌하기보다는 불쌍히 여겨져야 한다고 기술한다.

 

12. Compare B.J. Malina and J.H. Neyrey, Honor and Shame in Luke-Acts: Pivotal Values of the Mediterranean World, in The Social World of Luke-Acts: Models for Interpretation (ed. J.H. Neyrey; Peabody, MA: Hendrickson, 1991) 28. See Lassen, "Family as Metaphor", 248, 254∼55, 258∼59, on both the Roman and the early Jewish situation, and de Vaux, Ancient Israel, 20, on the situation in ancient Israel. See also G. Schrenk, "Pathvr", TDNT, 5, 949; K. Christ, The Romans: An Introduction to their History and Civilisation (London: Chatto &Windus/Hogarth, 1984) 10; S. Dixon, The Roman Family (Baltimore: John Hopkins University Press, 1992) 131, 138; Rawson, "Roman Family", 7.

 

 13. 요한복음을 보라. 요한복음 1:12∼13과 3:1∼10은 저자의 구원론적 논쟁의 전개에 있어 핵심구절들이다. 그리고 요한복음 8:12∼59 속에서 유대인의 행위는 그들의 조상들과 관련되어 있다. on metaphorical dynamics, see van der Watt, Metaphorik in Joh 15,1∼8, 71∼80.

 

14. 모든 믿는 자들이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난다는 사실은 직접적으로 그들이 영생을 소유하고 있는 것을 암시한다. 다른 말로 하면,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풍성한 삶을 나눈다. 그들이 이런 생명을 소유한 바로 그 사실은 그들로 하여금 선한 신분 가운데 행하고 서로 영향을 줄 수 있게 한다.

 

15. J.M. Lieu (Authority to Become Children of God , NovT 23 [1981] 224)는 요한의 이원론적 사고의 신학적 결과로서 죄없음을 설명해 보려고 한다. 요한은 신학적 전개를 통해 죄없음을 거부할 수 없기 때문에, 단순히 죄의 실체를 인정한다. 리유(Lieu)는 부분적으로 옳지만, 전체적인 면에서 신빙성이 없다.

 

16. 요한일서 1:6; 2:3∼4, 5, 29; 3:6, 11, 22, 24; 4:20∼21; 5:3, 18을 보라.

 

17. M. Golden, Children and Childhood in Classical Athens (Ancient Society and History; Baltimore: John Hopkins University Press, 1990) 102. Cf. Jesus as eternal life personified (1 John 1:1∼3) and the believer sharing this life (5:11∼13). Epictetus Diss. 2.10.7 is a penetrating description of the duties of a son. Cf. Philo Spec. 2.236. 부모로부터 생명을 받는다는 사실은 부모에 대한 자녀들의 특권을 위해 중요한 이유가 되는 것 같다. 이것은 진지하게 다루어져야 할 일들이고, 평생동안 자녀의 행위에 영향을 주는 일들이다(Josephus A.J. 4.8.39 289). 필로(Philo Spec. 2.243)에 의하면 만일 자녀가 생명을 준 부모를 학대한다면, 비록 그 자녀가 죽더라도 엄하게 징계되어야 한다.

 

18. 요세프스(Josephus, A.J. 4.8.24 260∼64)는 부모를 존경해야 하는 의무와 부모가 자녀들에게 보여준 사랑의 보살핌을 분명히 연결시키고 있다. 필로(Philo, Deus 17∼18)는 존경과 영광은 부모를 존경하거나 확실한 좋은 제도에서 기인한다고 말한다. 요한일서 3:1∼3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결과인 것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예수께서 오실 때 끊임없이 그의 사랑을 보이실 것이며,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으로서의 예수를 볼 것이다. 그 보답으로 믿는 자는 그 자신을 예수께서 정결하신 것처럼 정결하게 해야 할 것이다. 받고 보답하는 두 행위는 분명하다.

 

19. 부모는 자주 자녀를 돌보아야만 하는 하나님의 대리자로 간주되었다. 결국, 아버지를 순종하고 존경하는 것은 단지 명령된 것뿐만 아니라 종교적으로 설명될 수 있었다(Philo Decal. 120). 부모를 존경하는 것은 하나님을 존경하는 것이었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 가지였다. 부모를 향한 종교적으로 인정된 의무의 책임은 신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서 의무에 상응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두 경우 모두 같은 단어인 의무(pietas)에 의해서 표현되었다(Christ, Romans, 10). 부모는 실제로 하나님의 대리자로 이해되었다(see Josephus A.J. 4.8.24 262). Dio Chrysostom (Orationes 1 and 36)은 제우스(Zeus)를 왕과 인류의 아버지로 묘사한다. Dio Chrysostom (Orat. 12.42)은 자손들이 그 부모를 향하여 봉사하려는 선한 의지와 욕망은… 가르쳐지지 않고, 본성의 선물로서, 그리고 친절을 받은 행위의 결과로서 그 자녀들 속에 존재한다고 말한다(trans. J.W. Cohoon, Dio Chrysostom [5 vols. (vol. 3 from Discoures 32 and vols. 4∼5, ed. And trans. H.L. Crosby);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London: Heinemann, 1932∼51] 2.45). Schrenk (Pathrv, 950)는 그리스인들에게 부모를 사랑하라는 명령은 불필요한 것이라고 지적했는데, 왜냐하면 그런 사랑은 자연적인 것이기 때문이었다. Cicero(Off. 1.17)는 부모가 자녀에게 명령하는 의무를 강조했는데, 왜냐하면 자녀들을 위해 부모는 너무 많은 것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20. 이런 점에서 가인(Cain)의 행위는풍자적이지만 의미가 있다. 가인은 그의 형제를 죽임으로 그의 가정을 배신했다(3:11∼12). 이런 행위로 가인은 하나님의 가정이 아니라 악인 의 가정에 속했다고 묘사된다. 지상의 가정과 영적 가정의 특권들이 충돌할 때, 영적 가정은 승리한다.

 

21. Tacitus(Dial. 28∼29)는 부모가 그 자녀들에게 베풀어야 할 철두철미한 교육을 강조하였다.

 

22. Dixon, Roman Family, 118.

 

 23. See also Dionysius of Halicarnassus Ant. Rom. 20.13.3. 로마인들은 아버지가 그의 자녀 교육에 있어서 지나치게 거칠거나 관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믿었다. (trans. E. Cary, on the basis of the version by E. Spelman, The Roman Antiquities of Dionysius of Halicarnassus [7 vols.; LCL;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London: Heinemann, 1937-50] 7.425). Josephus (A.J. 4.8.24 260∼64) 역시 처음에는 부드러운 면(말로 권면할 때)을 좋아한다 그러나 자녀가 반응이 없을 때 그리고 계속해서 그의 부모와 계율에 도전할 때, 그 자녀는 돌에 맞아야 한다고 믿었다. Quintilian(Inst. 1.3.13∼14)은 매질을 수치스러운 것으로, 오직 노예들에게나 합당한 것으로 반대한다. Aristole(Pol. 1.5.2 1259B)은 아버지의 계율과 왕의 계율을 비교한다. 아버지는 왕처럼 돌보고 보호해야 한다. 애정을 쏟고 돌보는 것에 대한 언급은 훈계와 더불어 일반적이다.

 

24. 고대 공동체들은 부모의 잘못을 눈감아 주지 않았다 see Josephus A.J. 4.8.39 289; Plutarch Mor. 1, De lib educ. 12A-D.

 

25. See J.W. Roberts, City of Sokrates: An Introduction to Classical Athens (London: Routledge &Kegan Paul, 1984) 62; Dionysius of Halicarnassus Ant. Rom. 2.26.2∼4.

 

26. Cf. B.J. Malina and J.H. Neyrey, First-Century Personality: Dyadic, not Individual, in Social World of Luke-Acts (ed. Neyrey), 79. Josephus (A.J. 4.8.24 264)에 의하면, 만일 어떤 자녀가 그의 잘못된 면들이 고쳐진다면, 그는 계속되는 비난에서 구제되고, 만일 뉘우침이 있다면 부모는 분노가운데 행동하지 말아야 한다. 로마인의 관점에서, 이론적으로 본국 안에서 부모가 그의 자녀에 대해서 갖고있는 권리는 (아버지의 가족으로서) 절대적이었지만, 우리는 그런 것들이 제도와 점진적으로 법률에 의해 조절되었다는 것을 보았다고 말할 수 있다 (Dixon, Roman Family, 138). 이것은율법주의와 전혀 다른 것이다. Cf. Schnackenburg, Moral Teaching, 317.

 

27. 죄의 고백은, 권고와 그보다 더욱 심각한 처벌과 함께 가정의 구조와 병행하는데, 그것은 범죄를 다루기 위해 의도된 것이다.

 

28. Marxsen(Christliche und christliche Ethik, 263)은 요한일서 1:8∼10을 5:16과 대조하는데, 죄 있는 곳에 죽음이 있음을 언급한다. 전자의 경우, 용서는 가능하다. 후자의 경우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은데, 왜냐하면 5:16의 죄는 죽음이라고 한 것은 요한의 공동체로부터 완전히 격리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어떤 상황 속에서 죄의 고백은 아무 역할도 하지 않고 어떤 의미도 없다.

 

29. Dixon, Roman Family, 139; W.K. Lacey, Patria Potestas, in Family in Ancient Rome (ed. Rawson), 124, 127∼28, 137∼40.

 

30. Compare Malina and Neyrey, First-Century Personality, 67∼96. H.W. Robinson (Corporate Personality in Ancient Israel [Edinburgh: T. &T. Clark, 1981] 44)은 히브리인과 마땅히 기독교인의 도덕성은 그가 집단인격의 원리(principle of corporate personality)라고 부르는 데 있음을 강조한다. 로빈슨(Robinson)은 고대 이스라엘에서, 그룹은 어떤 의식(意識)을 갖고 있는데 그것은 그룹의 개인 구성원들에 의하여 방해를 받는다고 말한다(p.30).

 

31. Compare Malina and Neyrey, First-Century Personality, 72-72. Epictetus (Diss. 2.22.16)은 모든 살아 있는 존재의 본성은 자신의 관심을 따라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 형제와 친족, 그리고 나라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기술한다(trans. W.A. Oldfather, Epictetus: The Discourses as Reported by Arrian, the Manual, and Fragments [2 vols.; LCL; London: Heinemann; New York: Putnam s Sons, 1925∼28] 1. 397). Philo (Spec. 2.239∼40)는 효도 그 자체가 피할 수 없는 본능인데, 그것을 강요하려고 법률을 제정하는 것은 불필요하다고 주장한다. Cicero(Fin. 3.29)는 본성이 부모에게 자녀를 위한 애정과 사랑을 만들어낸다는 스토아학파의 견해가 사회공동체는 어떻게 존재해야만 하는지에 대한 기원(germ)이라고 설명한다. See also Philo Deus 17. Cf. Roberts, City of Sokrates, 62; Malina and Neyrey, "First-Century Personality", 73; Dixon, Roman Family, 149.

 

32. Cicero Sen. 11.37 (trans. W.A. Falconer, Cicero: De senectute, De amicitia, De divinatione [LCL; London: Heinemann; New York: Putnam"s Sons, 1923] 47).

 

33. Malina and Neyrey, "First-Century Personality", 73∼74.

 

34. Dionysius of Halicarnassus (Ant. Rom. 20.13.3) says that "the Romans believed that brothers should [not] strive for more than their equal share" (trans. Cary-Spelman, Roman Antiquities, 7.424∼25). 이런 사상은 폭넓게 받아들여졌다. See de Vaux, Ancient Israel, 21, for ancient Israel and Roberts, City of Sokrates, 63, for the Homeric epoch; see also Der. Er. Zuta 5. Epictetus (Diss. 2.10.8∼9) and Cicero (Off. 1.17) describe the close bond and responsibilities among brothers.

 

35. Josephus(Ap. 2.209∼10)는 가정의 특성에 따른 행동의 중요성을 평가하면서, 낮선 사람이 어떤 가정에 왔을 때, 그 가정은 그 자신의 관습을 보호해야 하지만, 또한 그 사람에게 열려져 있어야 한다고 했다. Dixon (Roman Family, 110)에 의하면, 가정의 명예와 사회적 수준을 유지하는 것은 자녀들의 몫이었다. 로마인들의 자녀들은 문자 그대로 가족의 이름(성)을 갖고 있었는데, 그들의 행위에 의해 그 가정의 영광 또는 수치를 가져올 수 있었다.

 

36. See Josephus A.J. 1.3.1 72. In 1 Macc 1:54∼58; 2:15∼28; 4:36∼43 Mattathias confirm‎‎‍s his and his sons loyalty toward the ways of their fathers. Dixon(Roman Family, 111)은 로마인의 자녀들은 가족의 이름(성)과 명예와 의무들을 유산으로 물려받는데, 이것에는 가정예식의 지속… 가정 전통들의 유지 가 따른다.

 

37. 요한복음 5:19과 비교해 보라. 이런 행위의 두드러진 묘사는 요세프스(Josephus)가 제공한다(A.J. 1.2.3 68∼69), 성장하여 분별연령에 도달하여 덕을 쌓고 그 자신이 탁월하고, 그의 삶의 방식을 닮은 자손들을 둔 후 이런 모든 덕스러운 성격의 사람들은 같은 나라에 거주했다. (trans. H.St.J. Thackeray, Josephus 4: Jewish Antiquities, Books I-IV [LCL; London: Heinemann; New York: Putnam s Sons, 1930] 33). Roberts (City of Sokrates, 157)는 아주 분명하게, 가정과 아버지의 위치는 사회의 기초였다. 부모에 대한 어떤 모양의 불경스러움도 금지되어졌다고 기록한다. 가정에서 아버지의 권위의 결과는 자녀의 갈등없는 순종의 의무였는데, 이것은 오래 참음, 가정의 아버지의 뜻에 무조건적인 복종, 그리고 아버지의 징계의 수단을 포함했다. (Gielen, Tradition und Theologie, 147 n. 182). See also Lassen, Family as Metaphor , 249.)

 

38. Roberts (City of Sokrates, 63)는 이것을 호머의 사회(Homeric society) 속에서 기본규칙으로 강조한다.

 

39. 마태복음 13:55∼56을 비교해 보라. 그 곳에는 아버지 같이, 아들 같이라는 격언이 암시되고 있다. See also Lassen, Family as Metaphor, 249. 사람은 가정에서 길들여 질 수 있음을 언급해야 한다(Schrot, Familia, 511). Epictetus (Diss. 2.10.7)는 아들이 되는 것은 그의 모든 소유를 아버지의 재산으로 간주하는 것이고, 모든 것을 아버지께 복종하는 것과 결코 아버지나 다른 사람을 원망하지 않는 것 그의 모든 힘을 다해 아버지를 돕는 것이라고 말한다. Josephus (A.J. 1.8.1 222)는 이삭의 순종의 효도를 칭찬한다.

 

40. See Gielen, Tradition und Theologie, 147; Plutarch Mor. 1, De lib. Educ. 14A. Roberts (City of Sokrates, 157)는 아버지가 자신이 물려받은 전통들을 전수해야 할 책임이 있음을 강조한다. Cf. Josephus A.J. 1.2.3. 68∼69. 창세기 49:1∼12에 유다는 그 가정의 수장으로 선택되었는데, 그 이유는 시므온과 레위와 마찬가지로 르우벤은 올바로 행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의 모범은 본받지 말아야 했다. 요한이 누구든지 예수님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을 안다고 말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예수님은 실제로 그의 행동 속에서 아버지를 똑같이 보여주시고(duplicates) 아버지께서 주시는 생명을 주신다.

 

 41. 요한일서 2:3, 4, 5을 비교해 보라. 그곳에서 하나님의 지식과 그의 명령들에 순종하는 것은 직접적으로 연관된다. 요한일서 3:6에서 범죄한 사람은 하나님을 본 것이나 아는 것 이 부인된다. 이것은 그런 사람이 하나님과 접촉이 없는 것을 암시하는데, 분명히 교육적인 접촉에서 제외된 것이다.

 

42. Compare Schnackenburg, Moral Teaching, 312.

 

43. 막센(Marxsen, Christiche und christliche Ethik, 265∼56)의 결론에 반대하는데, 그 결론은 기독론과 윤리는 다시 붕괴되었다는 것과 공동체 안에서 사람들은 그들이 할 수 있는 만큼 선한 삶을 살려고 노력했었다는 것이다. 윤리적 행위는 기독론적 이해와 분리될 수 없다. 그 행위는 오히려 거한다는 표현이고, 그런 식의 표현 속에서 기독론적 실체는 믿는 자의 본질적인 부분이다. 슈낙켄버그(Schnackenburg, Moral Teaching, 313)가 말한 것처럼, 아버지와 온전히 하나됨 가운데 사는 그리스도는 아버지께 사랑과 복종을 전제로, 오직 그 아버지의 영예만을 찾으며 그의 명령을 성취하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것과 동일한 것을 요구하신다.

 

44. 첫째로, 비록 요한이 서신서의 몇 가지 모범을 의미하는 것이 암시되고 있지만, 요한복음에서 볼 수 있는 예수님의 모습을 생각해야만 한다. 이런 가운데 성령의 역할에 대해서는 다음을 비교해 보라. 요한복음 14:15∼19; 15:26∼27; 16:5∼16; 요한일서 2:20, 27; 3:24. S. Schultz, Neutestamentiliche Ethik (Z rcher Grundrisse zur Bibel; Zurich: Theologischer Verlag, 1987) 523.

 

45. 무엇이 정당하고 공평한지에 대해서 함께 의논하고, 잘 다스려진 가정의 형제들처럼 또는 자녀와 부모처럼, 그들은 그들의 논쟁들을 설득과 이성으로 해결하였다. (Dionysius of Halicarnassus Ant. Rom. 7.66.5; trans. Cary-Spelman, Roman Antiquities, 4.347). 이런 모습은 가정안에 자리잡고 있는 의사소통의 상호작용을 설명해 준다. 신약성경에서의 예는 마태복음 7:9∼11과 누가복음 15:11∼12에 나온다. 딕슨(Dixon, Roman Family, 131)은 부모와 자녀들 사이에 강한 감정의 유대(紐帶)가 존재하였고, 그들의 관계는 언제나 열정적이었다고 결론을 내린다. 시세로(Cicero, Fin. 3.19)는 사람들이 자기가 낳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일이라고 말한다. 요세푸스(Josephus, A.J. 1.8.1 222)는 이삭과 그 아버지 사이에 존재했던 부드러움과 사랑을 매우 긍정적으로 기술한다. J. H. Elliott (Temple versus Household in Luke-Acts: A Contrast in Social Institutions, in Social World of Luke-Acts [ed. Neyrey], 231) calls the household the sphere of acceptance .

 

46. Schnackenburg, Moral Teaching, 327.

 

47. 요한일서 2:10, 15; 3:10, 11, 14, 23: 4:7, 10, 11, 12, 19, 20, 21; 5:1, 2의 동사로 사용된 사랑과2:5, 15; 3:17; 4:7, 8, 9, 12, 16, 17; 5:3의 명사로 사용된 사랑을 비교해 보라.

 

 48. Schnackenburg, Moral Teaching, 326-27. J.G. van der Watt, "Broederliefde in 1 Johannes", in Church and Context: Early Christianity in Social Context (ed. J.C. Breytenbach; Pretoria: NGKB, 1988) 68.

 

49. F. Hahn, "Neutestamentliche Grundlagen einer christlichen Ethik", TTZ 86 (1977) 36.

 

50. Schnackenburg, Moral Teaching, 326-27.

 

51. See van der Watt, "Broederliefde in 1 Johannes", 71∼74.

 

52. Ibid., 74.

 

53. Aristotle Eth. Nic. 8.9.1.

 

 54. Schnackenburg, Moral Teaching, 322; van der Watt, "Broederliefde in Johannes", 75.

 

55. See Klauck, Der erste Johannesbrief, 137∼45; Schulz, Neutestamentliche Ethik, 524∼25; K. Wengst, Der erste, zweite und dritte Brief des Johannes ( kumenischer Taschenbuch Kommentar zum Neuen Testament 16; W rzburg: Echter, 1978) 99; R. Schnackenburg, Die Johannesbrief (HTKNT 13/3; Freiburg: Herder, 1953) 134.

 

56. See Marxsen, "Christliche" und christliche Ethik, 263; van der Watt, "Broederliefde in 1 Johannes", 75; Klauck, Der erste Johannesbrief, 277∼80. 57. See Schnackenburg, Moral Teaching, 328.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미워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사랑의 경계선들은 너무 엄격하게 그려지지 않아야 한다. Klauck (Der erste Johannesbrief, 277∼80) emphasizes the Johannine community's formation of a group and concludes, in essence, that the attitude ofJohn toward love for one s neighbor does not differ from that of the authors of the Synoptic Gospel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