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옛신앙’이란, 옛부터 하나님의 선지자들과 주의 사도들이 가졌던 신앙, 오직 정확 무오(正確無誤)한 하나님 말씀인 신구약 성경에만 근거한 신앙, 오늘날 배교와 타협의 풍조에 물들지 않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행치 않겠노라’ 하였으며”(렘 6:16).
머리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바울 사도의 증거대로(마 5:18; 요 10:35; 갈 3:16; 딤후 3:16),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정확무오한 말씀이며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있어서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다. 또 모든 성경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여’ 구원받은 성도들을 교리적으로 그리고 윤리적으로 온전케 한다(딤후 3:16).
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진술대로(1:8), 성경 원본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고 그 본문은 ‘그의 독특한 배려와 섭리로 모든 시대에 순수하게 보존되었다.’ 이것이 교회의 전통적 견해이었다. 그러나 19세기에 나타난 불확실한 가설적 견해에 의하여 오늘날 다수의 교회들은 신약성경의 전통적 다수 사본들의 본문을 버리고 소수의 불완전하고 오류투성이의 사본들(א와 B 등)의 본문을 취하는 잘못을 범하였다. 그러나 구약성경의 전통적 마소라 본문(제2 봄버그판의 벤 카임 본문)과 신약성경의 비잔틴 다수 사본들의 본문은 순수하게 보존된 성경 원본의 본문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채택되어야 할 것이다.
성경을 해석하고 성경을 가지고 설교를 할지라도,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지 않고 바르게 설교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올 것이다(암 8:11). 중세 시대 말, 종교개혁 직전과 같이, 오늘날 벌써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오고 있는 것 같다.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설교와 성경 강해가 있지만, 옛날부터 전달되어 내려오는 순수한 기독교 신앙 지식과 입장은 점점 더 흐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 요구되는 성경 해석과 강해는 복잡하고 화려한 말잔치보다 성경 본문의 바른 뜻을 간단 명료하게 해석하고 적절히 적용하는 것일 것이다. 사실, 우리는 성경책 한 권으로 충족하다. 성경 강해는 성경 본문의 내용을 바르게 이해하는 데 지극히 작은 참고서에 불과하다. 성도들은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성경을 읽어야 하며, 주석과 강해서는 오직 작은 참고서로만 사용해야 할 것이다.
요한일서
내용 목차
♣ ♣ ♣ ♣ ♣ ♣
1장
2장
3장
4장
5장
신자의 삶은 빛의 삶 ․․․․․․․․․․․
형제 사랑은 빛 안에 사는 증거 ․․․․․․
형제 사랑은 생명에 들어간 증거 ․․․․․
형제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 ․․
형제 사랑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표시 ․․․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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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의 저자는 사도 요한이다. 이 점에 대하여 초대 교회의 전통은 일치한다. 저자는 자신을 그리스도의 목격자로 소개한다(1:1). 특히, 본서신에는 말씀, 빛, 영생, 사랑, 새 계명 등 요한복음과 매우 비슷한 단어들이 많다. 요한일서의 저작 시기는 아마 주후 85년 내지 90년경 혹은 그 이후일 것이다. 초대 교회의 전통에 의하면, 사도 요한은 그의 생애의 후년에 에베소에 거주하며 사역하였다.
요한일서의 특징적 주제는 형제 사랑이다. 이와 더불어, 사도 요한은 우리가 미혹의 영을 분별할 것과 중생(重生)한 자가 의를 행하고 형제 사랑을 실천해야 할 것을 교훈하였다. 바울 서신들에서는 칭의(稱義)의 교리가 많이 나오고, 요한의 글들에서는 중생(重生)의 교리가 많이 나온다.
1장: 신자의 삶은 빛의 삶
1-4절, 사도 요한의 전하는 내용과 목적
[1, 2]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자니라.
사도 요한의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이었다. 그가 전파한 예수 그리스도는 어떠한 분이신가? 요한은 그를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이라고 표현한다. ‘있는’이라는 원어(엔, 미완료과거)는 ‘있었던’이라는 뜻이다. ‘태초’는 우주의 시작을 가리킨다. ‘태초부터 있었던 자’라는 말씀은 우주가 시작될 때 이미 존재하고 계셨던 자라는 뜻으로 신적 존재를 가리킨다. ‘태초부터 있었던 생명의 말씀’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에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1:1-4)고 증거하였다. 원문에서, 여기에서도 ‘계시니라’는 말이 요한일서 본문의 ‘있는’이라는 말과 동일하다(엔, 미완료과거). 태초부터 계셨던 그 분, ‘말씀’(로고스)이라고 불리우는 그는 하나님과 구별되시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으로 증거되는 분이시다. 우주의 시작 때에 이미 존재하고 계셨던 그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그때 존재하고 계셨을 수 없다. 태초부터 계셨던 말씀은 하나님과 구별되시면서도 그 본질과 본체에 있어서 한 하나님이시다. 여기에 삼위일체의 신비가 드러나 있다.
사도 요한은 2절에서 그를 ‘영원한 생명’이라고 표현하였고 또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되었다,’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자니라’라고 표현하였다. 태초부터 계셨던 그 분, 모든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 특히 죄로 인하여 죽은 모든 인생들에게 참 생명이 되시는 분,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계시다가 육신으로 나타나신 그는 바로 ‘말씀이 육신이 되신’(요 1:1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 되신다. 그러므로 그는 친히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고(요 14:6), 또 창세 전에 아버지와 함께 영화를 누렸다고 말씀하셨다(요 17:5). 또 요한은 본서신 끝부분에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고 증거하였다(요일 5:20).
사도 요한이 전파한 내용은 확실하고 믿을 만하였는가? 이 점에 관해 요한은 자신이 이 신적인 인물에 대한 목격자이며 증인임을 고백한다. 그는 1절에서 말하기를,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고 하였고, 2절에서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라고 하였고, 3절에서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 전함은”이라고 말하였다. 다시 말해, 요한은 자신이 전파하는 분에 대하여 자기 눈으로 보았고 들었다고 반복하여 증거한 것이다. 이런 증인의 증거를 우리가 무시할 것인가? 이러한 목격자적 증인의 증거를 우리가 무시해도 되는가? 여기에 기독교 복음의 확실함이 있다. 기독교 복음은 증인들의 진실한 증언들 위에 근거하고 있다. 그 증언들은 2천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복음 진리의 확실성을 확증한다.
[3, 4]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함이라.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
사도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한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전하는 자들과 받는 자들이 서로 교제하기 위함이었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성도들의 사귐, 성도의 교제가 전도의 목적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교회는 성도들의 교제의 회이다. 우리는 이러한 교제가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모든 사람들에게 확장되기를 원한다. 우리의 교제는 과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확장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성도들의 진정한 교제는 이 세상에 가장 복된 일이다. 그것은 천국에서도 나눌 교제이다.
그런데 본문은 성도의 교제가 단순히 인간들의 교제가 아님을 증거한다. 성도의 교제는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이다.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함이라.” 이것이 구원이다. 인생이 하나님을 멀리 떠났다가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와 그를 알고 그와 교제하는 것이 구원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는 것이 전도의 일차적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라고 표현하였다(고전 1:9).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의 참 교제를 나누어야 하겠다. 거기에는 항상 찬송과 감사와 기도와 권면의 말씀이 넘칠 것이다.
사도 요한은 덧붙여 그가 이 편지를 쓰는 목적은 피차간에 기쁨이 충만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우리의 기쁨’이라는 구절은 전통사본에는 ‘너희의 기쁨’이라고 되어 있다. 우리는 진리의 말씀으로 교훈을 주고 받음으로써 피차간에 기쁨이 충만케 된다. 성도의 기쁨의 이유는 그가 받은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하나님의 자녀 됨과 천국 백성 됨의 구원 때문이다. 이것이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교훈하신 뜻이다. 우리의 기쁨은 구원의 기쁨이며, 우리가 구원의 진리로 서로 권면하고 권면을 받을 때 우리는 기쁨이 충만하게 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1절부터 4절까지에서 우리는 몇 가지의 교훈을 받는다. 첫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의 영광을 보아야 한다. 그는 ‘태초부터 계셨던 생명의 말씀’이며 ‘영원한 생명’으로서 이 세상에 오셨다. 우리는 한 훌륭한 인간 예수를 추앙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우리의 영원한 생명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섬기며 따르는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증거의 확실함을 깨닫자. 우리는 비록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의 영광을 우리의 눈으로 보지 못했지만 그것을 본 증인들의 증언들을 가지고 있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친히 눈으로 보고 그의 목소리를 듣고 그를 주목하고 손으로 만져본 자들의 진실하고 확실한 증언들 위에 기초하고 있다. 우리가 믿는 바는 사람의 상상력으로 지어낸 이야기들이 아니고 진실한 증인들이 증거한 역사적 사실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실들을 성경에서 확인하고 확신하자.
셋째로, 우리는 성도의 교제의 본질을 알자. 교회는 성도들의 교제의 회이다. 성도의 교제는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교제이다. 우리의 사랑의 교제는 먹고 마시고 노는 세상적, 육신적, 물질적 교제가 아니고 믿음과 소망 안에서의 교제이다. 거기에는 찬송이 있고 말씀의 권면이 있고 기도가 있다. 그리고 이 교제 속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의 기쁨과 즐거움의 충만함이 있다.
5-10절, 빛 가운데 행하라
[5]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사도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듣고 사람들에게 전하는 소식(message, 앙겔리아)은 하나님께서 빛이시라는 사실이다. 하나님께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다. 빛은 하나님의 모든 속성과 덕의 완전한 영광을 나타낼 것이지만, 특히 지식과 도덕성을 가리킨다고 할 것이다. 무지는 어두움이다. 또 죄악과 거짓은 어두움이다. 그러나 지식이 빛이요 의와 선과 진실이 빛이다. 하나님께는 지식과 의와 선과 진실이 충만하시다.
[6]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하나님께서 빛이시라는 사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된 우리도 빛 가운데 있어야 한다는 사실과 직접 연관되어 있다. 빛 되신 하나님을 알고 그 하나님과 교제하며 교통하는 자들은 어두움 가운데 머물러서는 안되고 빛 가운데 교제해야 한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빛의 교제이다. 빛과 어두움은 함께 있을 수 없다. 빛이 오면 어두움이 물러가고 빛이 없는 곳에만 어두움이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한다고 하면서 어두운 가운데 머물러 살고 있으면, 우리는 거짓말을 하는 자요 진리를 믿고 행하는 자가 아닐 것이다. 시편 5:4에는 “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 악이 주와 함께 유하지 못하며”라고 말씀했다. ‘어두움 가운데 행하면’이라는 원어(엔 토 스코테이 페리파토멘)는 ‘어두움 가운데 계속, 상습적으로, 머물러 행하면’이라는 뜻이다.
[7]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그러나 반대로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서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빛 가운데 행하면, 즉 우리가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살고자 애쓰고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함과 교통함을 누릴 것이다. 시편 15편에는 이렇게 말씀하였다.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유할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거할 자 누구오니이까?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일삼으며 그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시 15:1, 2).
뿐만 아니라, 이렇게 우리에게 진실함이 있을 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신다.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는 원어(카다리제이)는 ‘깨끗하게 하시느니라’는 현재형이다. 주께서는 이미 믿는 이들의 죄를 깨끗하게 하셨고 또 빛의 교제에 거리낌이 되는 그들의 연약과 부족을 날마다 깨끗하게 하셔서 하나님과의 풍성한 교제를 누리게 하실 것이다. 예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고 하셨다(요 15:2).
[8]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모든 인간은 다 죄인이며 구원받은 성도 속에도 죄악성이 있기 때문에, 만일 누가 자신이 죄가 없다고 말한다면, 그는 자신을 속이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의 세계에 들어온 것은 우리의 죄를 인정하고 뉘우치고 버리기를 결심함으로써이었다. 우리는 자신의 죄성에 민감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를 지켜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언제든지 죄에 떨어질 수 있는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겸손히 인정해야 한다.
[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신자는 우리의 죄를 인정하고 고백함으로써 빛의 삶을 계속해야 한다. 죄의 인정과 고백은 진실함에서만 가능하며 우리는 죄의 고백과 죄 씻음을 통해 의롭고 거룩한 삶을 유지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죄를 인정하고 그 앞에 고백하는 것을 원하신다. 만일 이렇게 우리가 우리의 죄를 고백한다면, 그는 그의 약속에 대해 신실하시고 의로우시기 때문에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구약 성경에 죄사함에 대해 이렇게 약속하셨다. 이사야 1:1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10]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그러나 만일 우리가 범죄한 적이 없다고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들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성경에서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고 이미 선언하셨기 때문이다. 또 이렇게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들었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이 그 속에 있겠는가? 그는 하나님의 진리와 상관 없는 자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죄인이었다는 사실과 또 현재에도 우리 속에 부족하고 연약한 죄악성이 있다는 사실을 하나님 앞에서 항상 겸손히 인정하고 고백하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5절부터 10절까지의 내용은 우리에게 몇 가지의 진리와 교훈을 준다. 첫째로, 하나님께서 빛이시라는 사실이다.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다. 빛은 특히 지식과 도덕성 즉 의로우심과 선하심과 진실하심을 가리킨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빛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들 된 우리는 빛 가운데 행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빛의 교제이다. 특히 그것은 의와 선과 진실이 있는 교제, 의와 선과 진실을 행하는 가운데서의 교제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일진대, 우리는 항상 진리의 지식을 사모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한 삶을 힘써야 한다. 만일 우리가 이런 삶을 힘쓰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자들이 아닐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우리의 죄를 하나님 앞에서 항상 인정하고 고백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때 우리의 모든 죄는 다 씻음을 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과의 교제 곧 빛의 교제는 모든 죄를 씻음 받는 일이 필요한 교제이며, 빛의 사람은 자신의 부족과 연약을 솔직히 인정하는 자이다. 그러나 자신이 범죄한 적이 없다든지 자신이 죄가 없다고 하는 자는 하나님을 속이고 자신을 속이는 자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그 속에 없는 자이다. 우리는 빛 가운데 행하며 하나님과 교제하는 하나님이 자녀들이 되자.
2장: 형제 사랑은 빛 안에 사는 증거
1-6절,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
[1]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사도 요한은 본서신에서 그가 편지를 쓰는 교인들을 ‘자녀들아’(2:12, 28; 3:7; 4:4; 5:21)라고 자주 불렀고 본절에서도 ‘나의 자녀들아’라고 친근히 불렀다. 그의 말투를 보면 그는 나이가 많이 든 듯하며 교인들에 대한 사랑이 많았던 것 같다. 그는 본서신에서 교인들을 ‘사랑하는 자들아’라고도 여러 번 불렀다(2:7; 3:2; 4:1, 7, 11).
본절에서 사도 요한은 본서신을 쓰는 목적을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고 말했다. 그는 1:4에서는 “우리가 이것[서신]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다”라고 말하였었다. 하나님께서 성경책을 우리에게 주신 주요한 목적은 우리가 죄를 짓지 않게 하시려 함이다. 죄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주된 관심이다. 죄 짓지 않는 삶, 죄 없는 삶,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이다.
그러나 우리는 죄인이었고 또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이후에도 때때로 넘어지고 범죄하는 자이므로, 사도 요한은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우리는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변호자가 있다’고 말한다. ‘아버지 앞에서’라는 원어(프로스 톤 파테라)는 ‘아버지와의 관계에서’라는 뜻이며, ‘대언자’라는 원어(파라클레토스)는 ‘변호자’라는 뜻이다. 범죄하는 문제는 성도의 현실적 문제요 그 대책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과 그 현재적 효험이다. 구주 예수께서는 죄 문제에 있어서 우리의 현재적 변호자가 되신다.
[2]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을 위해 계속 변호하시는 것은 그의 십자가 대속 사역에 근거한 것이다. 그는 우리의 죄를 위한 ‘유화 제물’이셨다. ‘화목 제물’이라는 원어(힐라스모스)는 ‘유화(宥和) 제물’(propitiation), 즉 우리의 죄들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리고 제거시키는 제물이라는 뜻이다. ‘유화’라는 것이 성경적 속죄 개념이다. 예수께서는 우리만 위할 뿐 아니고 온 세상의 죄를 위하여 유화 제물이 되셨다. 요한복음 1:29,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3, 4]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 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사도 요한은 본서신의 앞부분에서 구원받은 성도들이 하나님과 교제하는 자들로서 빛 가운데 행하여야 할 것과 그 첫번째 증거로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고백해야 할 것을 강조하였었다(1:5-10). 이제 그는 주의 계명들을 행하는 일에 대해 강조한다. 그것도 빛 가운데 행하는 일이다. 본절은 우리가 주의 계명들을 지키면 주를 아는 자임이 증거된다고 말한다. 주의 계명들은 곧 하나님의 계명들이다. 그것들은 구약 성경이며 그 요약은 십계명이고 그 핵심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주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가 주를 아는 자요, 주를 안다고 말하면서 주의 계명들을 지키지 않는 자는 거짓말 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않은 자이다. 하나님을 아는 자이냐, 모르는 자이냐 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느냐 아니냐 하는 문제와 같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는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자이다. 그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다. 주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 곧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사는 자가 하나님을 아는 자요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이다.
[5, 6]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사도 요한은 또한 우리가 주의 말씀을 지키면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우리 속에 온전케 되었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계명들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신명기 6:4, 5,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과거에 세상을 사랑하고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육신적 쾌락을 사랑했던 우리들은 변화를 받아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 되었다. 이것이 구원이다. 그런데 정말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가 그의 말씀을 지킬 때 성취된다. 주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하리라”고 하셨다(요 14:21, 23).
사도 요한은 또한 우리가 주의 말씀을 지킬 때 우리가 주 안에 있음이 증거된다고 말한다. 주 안에 있다는 것은 주님과의 영적 연합을 의미한다. 그것은 주의 생각과 능력을 공급받는 것이며 주의 특권을 함께 누리는 것이기도 하다. 주께서는 포도나무 비유에서 우리가 주 안에 있으면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는 우리가 주 안에 있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하고 버림을 받고 불태워질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 15장). 우리가 정말 주 안에 있다면 우리는 주의 행하시는 대로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행해야 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주 안에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결론적으로, 1절부터 6절까지는 우리에게 몇 가지 교훈을 준다. 첫째로, 무엇보다 우리는 죄 짓지 않는 생활을 힘써야 한다. 그것이 사도가 서신을 쓴 목적이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목적이다.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는 무엇보다 우리가 죄 안짓는 생활을 하는 것이다.
둘째로, 그러나 우리가 죄를 지을 때는 우리의 구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해야 한다. 그는 우리의 유화 제물이시며 그것에 근거하여 그는 현재 우리의 변호자가 되신다.
셋째로, 우리가 죄를 짓지 않는 생활을 한다는 것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우리가 주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가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주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가 될 때 우리는 주를 아는 자요 주를 사랑하는 자요 주 안에 거하는 자임이 증거된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주의 계명들을 지키지 않는다면, 우리가 주를 안다는 것은 거짓말이요 우리가 주를 사랑한다는 것도 거짓일 것이며 우리는 주 안에 거하는 자가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받은 성도일진대, 우리는 죄를 멀리 하고 오직 주의 계명들을 힘써 지키는 자들이 되자.
7-11절, 형제 사랑과 빛
[7]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의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사랑하는 자들아’라는 말은 전통 사본에는 ‘형제들아’라고 되어 있다. 3절에서 사도 요한은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라고 말하였었다. 그는 이제 본절에서 그가 말한 계명은 어떤 새 계명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성도들이 처음부터 가졌던 옛 계명, 그들이 처음부터 들었던 말씀을 가리킨다고 설명한다. 그것은 십계명을 의미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자라면 하나님께서 주신 십계명을 지키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혹은 본절의 옛 계명이라는 말이 서로 사랑하라는 주의 계명을 가리켰을지도 모른다(요일 3:22, 23; 요이 5, 6).
[8]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저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췸이니라.
사도 요한은 그들에게 새 계명에 대해서도 말한다. 그것은 분명히 주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유언적으로 남겨두신 계명, 즉 서로 사랑하라는 것을 가리킨다. 이 계명은 주님 자신에게와 우리에게 참된 계명이다. 요한복음 13:1에 보면, 주께서는 자신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 주께서는 친히 사랑의 모범을 보여주셨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에베소서에서 쓰기를,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고 하였다(엡 5:2, 25).
또 이 새 계명은 초대 교회 성도들이 실천하고 있었던 터이었다. 사도행전 4:32,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물질적 유무상통으로 드러난 서로 사랑함은 구원을 체험한 성도들의 표시이었다. 우리는 과거에 어두움에 속한 자들이었다. 그때에 무지와 죄악이 우리를 지배하였었다. 그러나 참 빛이 우리에게 비추어 왔다. 하나님의 진리의 지식과 의가 우리에게 찾아 왔다. 그것이 우리가 받은 구원이다. 에베소서 5:8,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골로새서 1: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이렇게 구원받은 증거가 바로 서로 사랑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새 계명은 진실한 성도들에게 참된 것이다.
[9]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
‘그 형제를 미워한다’는 말은 형제를 계속 미워하는 상태에 있다는 뜻이다. 성도는 거짓된 구원과 헛된 확신을 조심해야 한다. 비록 사람이 자신이 빛 가운데 있다, 하나님을 안다, 구원을 받았다,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말할지라도, 만일 그가 자기 형제를 미워하고 있다면 그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이다. 그가 받았다는 구원은 거짓된 구원이요 그의 확신은 헛된 확신이다. 그는 구원받은 표를 가지고 있지 않은 자이다. 그러므로 성도의 신앙 고백과 구원의 확신은 그의 실제적인 삶, 특히 형제를 사랑하는 삶을 통해 확증되어야 한다.
[10]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형제 사랑은 빛의 증거요 구원의 증거이다. 자기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들어왔고 구원을 받았다는 증거를 가진 자이다. 그는 자기 속에 걸림돌 혹은 걸려 넘어질 원인이 없다. ‘거리낌’이라는 원어(스칸달론)는 ‘걸림돌, 걸려 넘어질 원인 혹은 이유’라는 뜻이다. 빛은 우리의 길을 밝게 비춘다. 빛 가운데 사는 자는 자신의 행위의 잘잘못을 밝히 본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에 합하지 않은 잘못된 것을 시인하고 버리고 하나님의 뜻에 합한 바른 삶만을 추구한다.
[11]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
반면에, 형제 미움은 어두움의 증거요 구원받지 못한 증거이다.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아직도 어두운 가운데 있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는 자이다. 사람이 어두운 길을 갈 때 그 길에 위험한 물건이 놓여 있는지 어떤지 잘 모르는 것과 같이, 어두운 가운데 행하는 자는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 ‘갈 곳’이라는 원어(푸 휘파게이)는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라는 뜻이다. 그가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하는 까닭은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기 때문이다. 어두움 가운데, 즉 무지와 죄악들 가운데 사는 자들이 갈 곳은 오직 한곳, 곧 지옥뿐이다. 만일 그가 그의 갈 곳이 지옥인 것을 알았더라면, 그는 그의 길을 돌이켰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눈이 멀었기 때문에 그는 그가 지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그 곳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7절부터 11절까지는 하나님의 계명이 형제를 사랑하는 것임을 증거한 후에, 형제 사랑이 빛과 어두움을 구별하는 잣대가 됨을 증거하였다. 형제 사랑은 다른 말로 참 구원과 거짓 구원, 참된 구원의 확신과 헛된 구원의 확신을 구별하는 표준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참으로 구원받은 자들일진대, 우리가 참으로 빛의 자녀들일진대, 우리는 형제를 사랑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형제를 미워하는 모든 죄에서 떠나야 한다.
12-17절,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
[12-14]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니라.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사도 요한은 이 편지를 받을 교인들을 자녀들, 아비들, 청년들로 구별하여 언급한다. 그것은 그들의 연령을 따라 구별한 것이 아니고 그들의 신앙적 상태를 따라 구별한 것 같다. 교인들에 대한 이러한 묘사는 믿음의 기본적 사실을 나타낸다. 이것들은 다 성도들의 과거의 체험들이며 그 증거들이다.
첫째로, 자녀들 혹은 아이들은 믿은 지 얼마 안되는 교인들을 가리킨 것 같다. 요한은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얻었고 하나님 아버지를 알게 된 자들이라고 묘사한다. 그것이 구원받은 성도들의 기본적 상태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의 보혈(寶血)로 죄씻음을 받았다. 사람은 세례 의식을 통해서나 천주교회의 신부(神父)에게 하는 고해성사(告解聖事)를 통해서나 마리아를 통해서 죄씻음을 받는 것이 아니고 오직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말미암아 죄씻음을 받는다. 성도는 이렇게 예수님을 믿고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이다.
둘째로, 아비들은 믿은 지 오래된 자들을 가리킨 것 같다. 아마 연령적으로도 나이가 든 자들이었을지 모른다. 요한은 그들을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안 자들이라고 묘사한다. 참된 신앙은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신앙 생활은 그 하나님과 교제하는 생활이다. 참되시고 유일하신 그 하나님을 아는 것이 곧 영생이다(요 17:3). 신앙 생활은 그 하나님과 사귀는 것이며 그와 동행하며 그를 섬기며 그의 뜻을 순종하는 것이다. 세상에서의 성도의 신앙 여정은 바로 그 하나님을 점점 더 아는 과정과도 같다.
셋째로, 청년들은 믿음이 강하여 주를 위해 일할 만한 자들을 가리킨 것 같다. 그들은 악한 자를 이기었다. 악한 자는 사탄과 악령들과 그의 종들이다. 청년들이 그들을 이긴 방법은 그들이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 속에 거하셨기 때문이었다. 성경은 예수님 믿고 구원받은 자들에게 강해지라고 교훈한다. 고린도전서 16:13,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 에베소서 6:10, 11,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또 하나님의 말씀은 악한 자를 이길 수 있는 무기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검이다(엡 6:17).
[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사도 요한은 앞에서 언급한 믿음의 기본에 근거하여 성도들에게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교훈하였다. 우리는 왜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을 사랑하지 말아야 하는가? 그것은 세상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없는 자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사랑’이라는 말은 ‘아버지께 대한 사랑’이라는 뜻인 줄 안다. 하나님께서는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고 말씀하셨다(출 20:3).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모든 계명들 가운데 가장 첫째 되는 계명은 우리의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 22:37, 38; 신 6:4, 5). 또 그는 우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마 6:24). 우리가 하나님만을 섬기며 하나님을 전심 전력으로 사랑하려면 우리는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할 수 없다. 하나님이 주신 집이나 돈이나 직장은 우리가 감사하게 사용하기는 하지만, 거기에 애착을 두어서는 안된다. 심지어 하나님이 주신 남편이나 아내나 자녀들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교훈 안에서 그들을 사랑할 뿐이지 그 이상은 아니어야 할 것이다.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사도 요한은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께 대한 사랑이 우리 속에 없는 그 이유를 설명한다. 그것은,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실상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속하는 것들이며, 다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고 세상으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육신의 정욕 즉 쾌락과 음란으로 더러워져 있고, 안목의 정욕 즉 눈으로 보는 육신적 아름다움의 추구로 더러워져 있다. 그러나 실상 육신적 아름다움은 그렇게 가치 있는 것이 못된다. 그래서 잠언에는 말씀하기를,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고 하였다(잠 31:30). 또 세상의 모든 것들은 이생의 자랑 즉 명예나 권세 등 이 세상의 자랑거리들을 추구하는 것으로 더러워져 있다. 이것들은 한결같이 헛된 것들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것들을 사랑하고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고 천국 소망을 가진 성도들은 헛되고 죄악된 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고 추구하며 살 수 없다.
[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참으로 이 세상의 것들은 지나가고 만다. 또 세상과 함께 우리의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도 다 지나가고 만다. 그래서 전도서는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헛됨을 반복적으로 증거하기를,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고 하였다(전 1:2). 전도서에는 헛되다는 말(헤벨)이 38번이나 사용되었다. 또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영감 가운데 외치기를,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고 하였다(사 40:6-8). 본절에서 요한도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고 증거하였다. 하나님의 뜻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모든 성경 말씀을 믿고 성경대로 사는 것이다. 특히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대로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들만 새 하늘과 새 땅, 곧 영원한 영광의 천국에서 영원히 거하게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12절부터 17절까지에서 우리는 몇 가지 진리와 교훈을 정리한다. 첫째로, 우리는 신앙의 기본을 갖추었는지 스스로 묻고 대답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죄씻음을 받았는가? 우리는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알았는가? 둘째로, 오늘 우리들의 교회에도 영적인 청년들이 요구된다. 주 안에서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된 자들, 그래서 악한 자들과 싸워 이길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들이 요구되는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이 헛되고 죄악됨을 깨닫고 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만을 행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경의 모든 말씀을 다 믿고 성경대로 사는 것이며 특히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18-23절, 많은 적그리스도가 나타남
[18]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줄 아노라.
사도 요한은 이 편지를 쓰던 당시를 마지막 때 곧 말세(末世)라고 보았다. 그 까닭은 예언된 대로 많은 적그리스도들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적그리스도’는 그리스도를 부정하고 대적하는 이단들을 가리킨다. 예수께서는 세상의 종말의 징조들로서 적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의 출현, 전쟁들, 지진들, 기근들, 악한 질병들, 바른 신앙의 핍박 등을 예언하셨다. 그 중의 하나가 적그리스도들의 출현에 대한 예언이었다. 마태복음 24:5,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 요한은 주의 말씀이 이미 그 당시에 실현되고 있음을 보고 마지막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종말의 징조들은 이미 사도 시대 말기에 나타났다. 그래서 성도들은 종말에 대한 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이런 종말의 징조들은 지난 2천년 역사 중에 17세기 종교개혁시대에도 어느 정도 있었다. 그 가장 큰 징조는 로마 천주교회의 교황이 바른 진리를 대적하고 참된 신자들을 핍박한 일이었다. 종교개혁자들은 로마 교황을 성경이 예언한 적그리스도라고 생각하였다. 20세기를 지나서 21세기를 사는 우리는 종말의 징조들이 더욱 많이 이루어짐을 보고 느낀다. 우리는 특히 종교개혁의 후예들인 많은 개신교회들의 배교(背敎)와 타락을, 그리고 다수의 사이비 기독교 종파들의 나타남을 보았고, 또 1, 2차 세계대전을 지나 이제 제3차 세계대전의 가능성을 보고 있다. 마지막 때가 되었다는 의식은 지난 2천년 동안 교회 속에 항상 있어 왔지만, 오늘 이 시대는 참으로 마지막 시대의 마지막 때인 것 같다. 우리는 종말의 징조들을 확인하면서 종말 의식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두려워하고 당황하는 마음을 가질 것이 아니고 주께서 예언하신 바들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하며 주의 재림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19]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이단자들은 처음에 교회에 속해 있었으나 어느날 교회를 떠나갔다. 교회 역사상 이단의 초기 형태는 분파적이었다. 그러나 교회가 전체적으로 부패하여 배교적이게 된 때가 있었다. 17세기 종교개혁 때가 그러하였다. 성경적 진리를 깨닫고 믿었던 참된 성도들은 소수파가 되어 교회에서 정죄되고 쫓겨날 수밖에 없었다. 20세기에도 그런 현상이 일어났었다. 21세기의 상황은 더욱 그렇게 되고 있다. 세계 교회는 전체적으로 부패하여져 있다. 경건한 선조들이 가졌던 성경적인 신앙, 바른 신앙, 보수 신앙, 옛신앙은 오늘날 소수파가 되어 있다. 오늘날 교회들은 다양성을 좋아하며 넓은 길을 가고 있다. 교회들의 배교와 타협과 혼란을 책망하는 목소리는 극단적 입장이라고 무시와 배척을 당한다. 포용주의의 시대의 유일한 악은 비타협적 보수 신앙의 입장뿐이게 되었다. 그러나 참된 기독교 신앙은 항상 비타협적이다. 하나님의 진리는 절대적이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의 상황과 달리, 초기의 이단들은 분파적이었다. 그들은 교회에서 나간 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실상 처음부터 참된 교회에 속한 자들이 아니었다. 만일 그들이 참으로 교회에 속한 자들이었다면 그들은 교회를 떠나지 않고 참된 성도들과 함께 거하였을 것이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한 몸이지만(고전 12:13, 27), 외형적 교회 속에는 참된 신자들 뿐만 아니라 아직 구원받지 못한 자들도 섞여 있다. 곡식과 가라지가 섞여 있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 중에 가룟 유다가 섞여 있었던 것과 같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고 따랐으며 주의 말씀으로 죄씻음을 받은 자들이었지만, 가룟 유다는 요한복음이 증거하는 대로 예수님을 믿지 않은 자요(요 6:64), 돈궤에서 돈을 훔치는 도적이요(요 12:6), 예수님의 말씀으로 죄씻음을 받지 못한 자이었다(요 13:10). 구원받은 성도들은 다 한 몸이지만, 이단은 그렇지 않다. 실상 그들은 처음부터 소속이 달랐다. 그들은 믿지 않은 자들이요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요 천국에 속한 자들이 아니다.
[20, 21]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진리를 알지 못함을 인함이 아니라 너희가 앎을 인함이요 또 모든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 않음을 인함이니라.
구원받은 성도는 거룩하신 자 곧 하나님께로부터 기름 부음 곧 성령을 받았다. 성령은 전지하신 하나님의 영이시므로 그는 우리에게 모든 진리를 가르쳐 주시고 깨닫게 해주신다. 요한은 성도들이 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편지하는 것이 아니고 진리를 알기 때문에 한다고 말한다. 그가 또 이단에 대해 말하는 것은 모든 거짓이 진리에서 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며 그가 우리에게 모든 진리를 깨닫고 믿게 하셨으므로 우리는 이단에 대해 논하며 이단을 배격해야 할 것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이다.
[22, 23] 거짓말 하는 자가 누구뇨?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뇨?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
우리가 적그리스도들 혹은 이단들을 분별할 수 있는 기준이 무엇인가? 성경은 그것을 두 가지 면에서 말한다. 첫째는 교리적인 면이고, 둘째는 윤리적인 면이다. 베드로후서 2:1-3, “그러나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여럿이 저희 호색하는 것을 좇으리니 이로 인하여 진리의 도가 훼방을 받을 것이요 저희가 탐심을 인하여 지은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를 삼으니 저희 심판은 옛적부터 지체하지 아니하며 저희 멸망은 자지 아니하느니라.” 교리적으로, 이단은 기독교의 기본적 교리들을 부정한다. 윤리적으로, 이단은 음란하고 탐욕적이다.
특히 그들은 교리적으로 기독교의 기본 교리들을 부정하는 자들이다. 본문은 그들을 거짓말 하는 자라고 표현한다. 과연 이단의 정체는 거짓말이다. 그들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들이다. 그것은 거짓말 중에서도 큰 거짓말이다. 그들은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아들을 부인하는 자들이다. 요한은 말하기를, 아들을 부인하는 자는 아버지를 모시고 있지 못하다고 하였다.
기독교 2천년 역사에서 가장 크고 가장 오래된 적그리스도적 이단은 로마 천주교회이다. 천주교회는 삼위일체 하나님만 섬기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만 믿고 따르지 않고, 교황의 무오(無誤)한 권위를 믿고 마리아를 거의 신적 존재로 추앙하고 찬미하고 그에게 기도한다. 이 점에 있어서 천주교회는 하나님의 참 뜻을 부인하는 것이다. 또 천주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의 완전함을 믿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복음 진리를 믿지 않고 공적으로 그것을 부정하고 정죄한다. 또 그들은 신부들이 집행하는 미사가 그리스도께서 계속 죽으시는 의식이라고 말하고 또 예수를 믿는 자들도 ‘작은 죄’가 있으면 연옥(煉獄)에 들어가 불의 시련을 통과한 후에 천국으로 들어간다고 말한다. 이 점에 있어서 천주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이루신 속죄 사역의 완전성을 부인하고 있다.
오늘날에는 천주교회보다도 더 심각한 적그리스도적 이단이 자유주의 신학이다. 자유주의 신학은 역사적 기독교의 근본 교리들을 부인하는 사상이다. 자유주의 신학은 하나님의 초자연적, 기적적 행위들과 특히 그의 진노와 심판을 부정한다. 그것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되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과 그의 기적들과 대속(代贖)과 부활과 승천과 재림을 부정한다. 그것은 실로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적그리스도적 사상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18절부터 23까지에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받는다. 첫째로, 우리는 세상 종말의 징조들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세상의 마지막이 가까왔다는 의식을 가져야 할 것이다. 많은 적그리스도들과 이단들이 나타났다. 우리는 20세기에 인류가 경험했던 그 참혹했던 1, 2차 세계 대전에 대해서 알고 있고, 현재 3차 세계 대전의 가능성 앞에 서 있다. 우리가 사는 현 시대는 참으로 마지막 때의 마지막이라고 생각된다. 우리는 종말 의식을 가지자.
둘째로, 우리는 말세의 한 징조로서 나타나는 이단들의 소속을 바로 알자. 많은 이단들이 한 때 교회 안에 있었다가 분리되어 나간 자들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세계 교회가 전체적으로 배교적이게 되었으므로 이단들이 건전한 교회인 것처럼 행세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천주교회가 기독교의 한 중요한 파인 것처럼 잘못 인식하고 있다. 또 많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역사적 대 교단들의 목사 양성원인 신학교들에서 가르치는 교수들이 되어 있다. 그러나 이단들이 교회 밖에 나가 있든지 교회 안에 있든지 간에 그들은 참 교회에 속한 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참으로 구원받은 자들이 아니고 하나님과 그의 나라에 속한 자들이 아니다. 우리는 이단의 소속을 바로 알자.
셋째로, 우리는 이단들의 정체를 알고 그들을 분별해야 한다. 이단들은 교리적으로 거짓말 하는 자들이며 윤리적으로 부도덕한 자들이다. 우리는 그 두 면을 생각하며 분별해야 한다. 우리는 교리적 지식을 가지고 이단들을 분별해야 한다.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자들이 누구인지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천주교회의 사상이 적그리스도적이며 이단적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하고 또 특히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이 기독교 2천년 역사상 가장 불신앙적이고 파괴적인 적그리스도적 이단 사상인 것을 알아야 한다. 또 우리는 윤리적으로도 이단을 분별해야 한다. 우리는 거룩과 의와 선과 진실을 항상 구해야 한다. 우리의 심령이 부패해진다면 우리는 이단들을 분별할 수 없고 배격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단들의 정체를 알고 그들을 분별하고 배격해야 한다.
24-29절, 주 안에 거하라
[24]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들의 안과 아버지의 안에 거하리라.
‘처음부터 들은 것’은 교회가 사도들을 통해 들은 복음 진리를 가리킨다. 그것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시라는 내용이요 그의 죽음이 우리의 죄를 대속(代贖)하는 일이 되고 저를 믿음으로 우리가 영생을 얻고(요 3:16)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요 1:12)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다(엡 2:8). 이것은 교회가 처음부터 들은 바이었다.
사도 요한은 이 내용이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고 말했다.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는 것은 그것을 믿고 보수(保守)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사도들을 통해 전달된 전통적 신앙, 즉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바르게 깨닫고 굳게 믿고 붙들어야 한다. 그 신앙이 옛 신앙이며 보수 신앙이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할 때, 우리가 ‘아들의 안과 아버지의 안에 거할’ 것이라고 말했다. 즉 하나님과의 영적 신비적 연합을 누리게 된다는 말씀이다. 성도는 하나님의 아들과의 연합으로 대속의 은택들을 누리게 되며, 하나님 아버지와의 연합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안에 거하게 된다. 이러한 연합은 성도의 정상적 생활이다. 그런데 성도가 이러한 정상적 생활을 하려면, 사도적 복음 진리의 내용 즉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보수해야 한다.
[25]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복음 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약속은 영원한 생명 곧 영생에 관한 것이다. 죄는 죽음을 가져왔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과 그로 인한 죄씻음은 영생을 가져올 것이다. 이 영생은 현재 충만히 누리고 있지 못하지만, 이미 받았고 장차 충만히 경험하며 누리게 될 것이다. 요한복음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한복음 11:25, 2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26] 너희를 미혹케 하는 자들에 관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
사도는 성도를 미혹케 하는 적그리스도들의 나타남으로 인해 그들에 관해 말함으로써 성도를 조심시키려 하고 있다. 적그리스도들, 즉 이단자들은 속이는 자들이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으로 말미암은 죄씻음과 영생의 복음을 부정하고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부정한다. 그것을 부정하는 불신앙은 결국 사람을 죄 가운데서 멸망을 당하게 하기 때문에 극히 조심해야 하는 것이다.
[27]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기름 부음’은 성령을 가리킨다. 사도행전 10:38,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하셨음이라.” 고린도후서 1:21, 22,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성령께서 완전하시고 참되신 교사이시기 때문에, 교회에서 인간 교사가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교회 안에 인간 교사들을 주셨다. 고린도전서 12:28,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세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 에베소서 4:11, 12,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그러나 우리는 어떤 사람과도 비교할 수 없는 완전한 교사이신 성령님을 마음에 모시고 있기 때문에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모든 진리들을 배우고 깨닫고 확신할 수 있다. 또 그의 진리는 참되고 거짓이 없으시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고 말한다. 성령께서 가르쳐 주신 진리는 교회가 처음부터 배운 내용과 일치한다. 성령님의 교훈은 예수님의 교훈과 동일하다. 그러므로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라는 말씀은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바’와 동일하다. 성도들은 처음부터 사도들을 통해 듣고 배운 복음 진리, 곧 성령께서 가르쳐 주신 그 동일한 진리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지켜야 하며, 그것이 주 안에 거하는 표시이다.
[28] 자녀들아 이제 그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의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
사도는 우리가 주 안에 거해야 함을 강조한다. 그것은 주께서 요한복음 15장에서 하신 말씀과 동일하다. 요한복음 15:1-7,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거기에서나 여기에서나, ‘주 안에 거한다’는 말은 믿음과 경건과 순종의 삶을 가리킨다고 본다.
사도 요한은 우리가 이렇게 주 안에 거하게 되면, 주님이 재림하실 때 담대함을 얻고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재림 소망은 우리의 최대의 소망이다. 그때 우리는 영광의 부활과 천국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의 소망은 오직 거기에 있다. 성도들의 성실한 신앙 생활의 목표는 바로 그날 주 앞에 담대히 서는 것이다. 베드로후서 3:14,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그러나 그날에 부끄러움을 당할 자들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바른 믿음과 순종을 가지지 못했던 자들이다. 다니엘 12:2,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
[29] 너희가 그의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
사도 요한은 첨가하여 우리가 주의 의로우심을 안다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도 알 것이라고 말했다. 여기에 중생(重生)의 증거가 있다. 여기에 신앙과 행위의 일치된 증거가 있다. 중생한 자는 바른 신앙, 역사적 신앙, 옛신앙을 가질 뿐만 아니라, 죄를 버리고 의를 행하는 삶을 산다. 다시 말해, 중생의 증거는 바른 믿음과 의로운 삶이다.
결론적으로, 24절부터 29절까지에서 우리는 두어 가지 교훈을 정리한다. 첫째로, 우리는 교회가 사도들에게서 처음부터 들은 바, 즉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바르게 파악하고 보수해야 한다. 거기에 하나님의 영생의 약속이 있다. 거짓 교사들과 이단들이 왜곡시키려는 것이 바로 그 신앙이다. 그러나 성령께서 가르쳐 주시고 깨닫게 해주시는 것이 바로 그 신앙이다. 우리는 그 내용을 믿고 지켜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주 안에 거해야 한다. 이것은 실상 우리가 중생했을 때 이미 이루어진 일이다. 중생의 증거는 바른 믿음과 의로운 삶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의 바른 말씀을 붙들고 믿고 그것을 순종함으로써 주 안에 거함을 확실히 증거해야 한다. 우리가 주 안에 거할 때만 우리는 주의 재림의 날에 담대함을 얻을 수 있다. 참된 믿음과 순종이 없는 자는 그날에 수치와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진실한 성도들은 다 주의 재림을 영광 가운데 맞이하게 될 것이다.
3장: 형제 사랑은 생명에 들어간 증거
1-6절, 죄를 짓지 말라
[1]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
우리는 전에 죄인이요 사망 아래 있던 사람이었고 마귀에게 속한 자들이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께서 지극한 사랑으로 사랑하심으로써 구원을 받아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영원한 생명을 얻었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다. 이것은 큰 복이며 큰 특권이다.
그러나 세상은 우리의 이 복과 이 특권을 알지 못한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얻은 의도, 영생도, 하나님의 자녀 됨도 알지 못한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에 대해 바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이 하나님을 바로 알았더라면 하나님이 주신 구원의 복, 곧 성도들이 받아 누리고 있는 구원의 복에 대해서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2]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하나님의 자녀들의 장래의 영광의 모습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그것은 주 예수께서 나타내심이 될 때 즉 그가 다시 오실 때 나타날 것이다. 우리는 그때 그와 같이 영광스런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다. 우리가 그의 영광의 모습을 보듯이, 우리도 그와 같을 것이다. 빌립보서 3:20, 21,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3]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구원받은 성도들은 주의 재림과 그때 이루어질 영광스런 몸의 구속(救贖)과 변화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다. 로마서 8:23-25,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사도 요한은 성도가 이런 소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주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신을 깨끗하게 한다고 말한다. 직설법이 더 무게가 있다. 그것은 자신을 깨끗게 하지 않는 자는 이런 소망이 없는 자라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스런 자녀들이라면 죄를 짓지 말고 깨끗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 천국을 소망하는 자는 천국 백성답게 산다.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산다. 의의 나라를 소망하는 자는 의인답게 산다. 영생의 나라를 소망하는 자는 영생할 자답게 죄와 상관 없이 산다.
[4, 5]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 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더욱이, 죄라고 하는 것은 곧 불법이다. 불법(不法)은 하나님의 법, 하나님의 계명,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반대하고 거부하고 어기는 것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사람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바로 우리의 죄를 없이 하시기 위해서이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성육신(成肉身)하신 목적은 우리의 죄를 대속(代贖)하시기 위함이었다. 그에게는 죄가 없으셨다. 그는 자기 죄 때문에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아니고, 오직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다. 그러므로 그가 우리의 죄를 없이 하기 위해 오셨고 그 일을 이루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면, 우리는 더 이상 범죄치 말아야 한다.
[6]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주 안에 거한다면 우리는 범죄치 않아야 한다. 본절에 ‘범죄하지 아니하나니’라는 원어(우크 하마르타네이)는 현재 시제로서 ‘범죄하고 있지 않다’는 뜻이다. ‘범죄하는 자마다’라는 원어(파스 호 하마르타논)도 현재 시제로서 ‘범죄하고 있는 자마다’라는 뜻이다. 구원받은 자는 죄 가운데 머물러 있을 수 없다. 만일 누가 죄 가운데 머물러 있다면 그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요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자일 것이다. 우리가 받은 구원은 법적이고 이론적일 뿐만 아니라, 또한 실제적이고 체험적이다. 구원받은 자는 실제로 심령과 삶에 변화가 일어난다.
결론적으로, 1절부터 6절까지에서 우리는 범죄치 말아야 한다는 교훈을 받는다. 본문은 우리가 범죄치 말아야 할 두 가지 이유를 제시한다. 첫째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장차 영광스런 주의 형상을 본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주께서 재림하실 때 그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의 재림과 그때 일어날 영광스런 몸의 변화를 소망할진대 우리는 지금 모든 불결로부터 우리 자신을 깨끗하게 해야 하는 것이다.
둘째는 주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이루신 일이 바로 우리의 죄를 없애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주께는 우리의 더러운 죄 때문에 십자가의 참혹한 고난의 죽음을 죽으셨다. 그의 죽음은 우리의 죄를 깨끗게 하는 대속(代贖)의 죽음이 되셨다. 그렇게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면, 우리가 주를 믿고 주 안에 거하는 자가 되었다고 하면서 어떻게 죄 가운데 살 수가 있겠는가? 구원받은 성도는 결코 죄 가운데 머물러 있을 수 없다. 우리는 마땅히 모든 죄를 버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오직 의와 거룩을 행해야 한다.
7-12절,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
[7, 8]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성도는 누구에게든지 미혹을 받지 말아야 한다. 교회 안팎에는 성도를 속이고 잘못 인도하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잘못된 교훈을 하고 잘못된 행동의 본을 보인다. 사도 요한의 논조를 보면, 그들은 죄를 짓는 자들이며 죄 짓는 일을 대수롭지 않은 일로 허용하는 자들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요한은 의를 행하는 자는 의롭지만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한다고 말한다.
죄를 짓는 자가 마귀에게 속한다는 원어의 뜻은 죄를 짓는 자들의 근원과 소속을 나타낸다.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한 자요 인간을 범죄케 한 자이다. 요한복음 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인간을 속여 범죄케 함으로써 죽게 만들었으니 그것이 살인이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었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성육신(成肉身)을 가리킨다. 태초부터 계셨던 그가 육신으로 오셨다. 그가 오신 목적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다. 창세기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9]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하나님께로서 났다는 말씀은 중생(重生) 곧 거듭남을 가리킨다. 그것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이며(요 3:3, 5) 그 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 곧 그를 믿는 것이다(요 1:12, 13). 사도 요한은 하나님께로서 난 자 곧 중생한 자는 죄를 짓지 않는다고 말한다. ‘죄를 짓지 않는다’는 원어(하마르티안 우 포이에이)는 현재진행형의 의미를 가진다. 즉 ‘계속적으로 죄를 행하고 있지 않는다’는 뜻이다. 중생한 자도 간혹 아니 자주 실수하고 범죄한다. 그러나 그는 계속적으로 죄를 행하고 있지는 않다. 그는 죄 가운데 거하지는 않는다.
사도 요한이 본서신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성도가 죄 안 짓는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중생한 자라도 간혹 혹은 자주 넘어지고 실패하는 것은 경험적으로 사실이다. 사도 바울은 탄식어린 고백을 하기를,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라고 하였다(롬 7:21-25). 그러나 중생한 자는 계속 죄를 행하는 자가 될 수는 없다.
사도 요한은 중생한 자가 죄를 짓지 아니하는 이유를 말하기를,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라고 했다. ‘하나님의 씨’는 새 생명의 원리를 가리킨다. 중생할 때 심기우는 이 생명의 원리는 범죄할 수 없는 원리요, 의만을 지향하는 원리이다. 중생한 영혼 속에는 이 생명의 원리가 심기웠다. 그럼으로써 중생한 영혼은 그 지배적 성향에 거룩한 변화를 얻었다. 전에는 무지(無知)와 부도덕이 그것을 지배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지식과 도덕성이 그것을 지배한다. 그러므로 중생한 자도 간혹 혹은 자주 넘어지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는 법적으로 완전히 거룩하게 되었고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며 또한 실제적으로도 즉시 즉시 일어나 죄를 회개하고 의를 행하기 위해 힘쓰는 것이다.
[10]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이러므로’라는 원어는 ‘이 점에서’라는 뜻이다. ‘이 점’이란 성도가 죄를 짓느냐, 안짓느냐 하는 점을 가리킨다. 계속적으로 죄 가운데 사느냐 아니면 즉시 회개하고 죄를 버리고 의를 행하려고 결심하고 노력하느냐 하는 이 점에서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의 차이가 드러난다. 사도 요한은 다시 말하기를, 누구든지 의를 행치 않거나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께로서 난 자가 아니고 하나님께 속한 자가 아니라고 한다. 사람의 행위는 그의 근원과 소속을 증거한다. 이치가 그러하기 때문에, 성도는 모름지기 죄 안짓는 생활을 힘써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계속 죄를 짓고 산다면 우리가 어찌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리울 수 있겠는가?
[11, 12] 우리가 서로 사랑할지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 가인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
요한은 옛날 가인의 예를 들면서 우리가 가인같이 형제를 미워하고 죽이는 악을 행치 말고 서로 사랑해야 할 것을 강조한다. 서로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요 하나님께 속한 자라는 것을 잘 증거하는 표가 된다.
결론적으로, 7절부터 12절까지는 앞부분에 이어서 우리가 범죄치 말아야 할 이유를 증거한다. 앞절에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스런 자녀이며 장차 영광스런 모습을 입을 자들이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 죄의 대속 혹은 죄의 없이함을 받았기 때문에 범죄치 말아야 한다는 말씀을 들었다. 본문에서는 또 하나의 이유가 더해진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로서 났고 하나님의 씨가 우리 속에 있기 때문에 범죄치 말아야 한다는 말씀이다. 범죄치 말아야 한다는 말씀은 다른 말로 의를 행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것을 가리킨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계속 범죄치 않는다. 그는 혹 넘어질 수 있으나 곧 일어나 회개하고 죄를 버린다. 그는 의를 행하고 형제를 사랑한다. 여기에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의 차이가 있다. 그것은 마음과 입술의 신앙고백과 더불어 행위로 증거되는 차이점이다. 본문이 강조하는 바는 한마디로 우리가 범죄치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구원받은 자일진대 우리는 범죄치 말아야 하고 의를 행하고 서로 사랑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13-18절, 사랑은 생명에 들어온 표임
[13-15]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사도 요한은 세상이 신자들을 미워할 때 이상히 여기지 말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미움은 사망의 표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죄와 사망 가운데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미워하고 하나님의 백성된 신자들을 미워하고 또 서로 미워한다. 그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고 당연한 현상이다. 미움은 사망의 표요 세상의 표이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서로 미워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니고 세상에 속한 자들일 것이다. 우리는 영생의 구원을 얻은 자들이 아니고 사망에 거하는 자들일 것이다.
그러나 구원받은 우리는 서로 사랑한다. 사랑은 생명의 표이다. 그러므로 요한은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기 때문에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안다고 증거한다. 형제 사랑은 영생의 구원을 얻은 표이다. 그러나 형제 사랑이 없는 자는 아직도 사망에 거하는 자일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 이유는 자명하다. 그것은,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살인하는 자요 살인하는 자는 영생이 그 속에 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도는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 곧 살인이라고 말한다. 물론 실제로 사람을 죽이는 것이 살인이다. 예를 들어, 비행기 자살 폭탄 테러는 극악한 살인 행위이다. 혁명이나 폭력 시위가 정당화 될 수 없듯이, 테러도 정당화 될 수 없다. 사회의 개량과 개선은 합법적인 방법을 통해서만 이루어져야 한다. 비폭력적 시위는 정당한 의사 표현 방식이며 사회 개선을 위해 유익하지만, 무질서한 폭력적 방법은 사회의 개량보다는 악화를 가져오기 쉽다. 또 침략 전쟁도 역시 극악한 살인 행위이며 결코 정당화 될 수 없다. 물론 테러와 침략에 대한 응징과 보복은 정당화 될 수 있을 것이다. 전쟁보다 더 큰 현대적 죄악은 태아 살해의 행위 즉 낙태 혹은 인공유산이다. 사람의 생명은 임신과 더불어 시작되는 것이 분명하다. 시작된 생명을 살해할 권한은 그 누구에게도 없다. 임신된 생명은 반드시 출산되어야 옳다. 오늘날 한국이나 세계에서 낙태로 죽어가는 어린 생명의 숫자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가장 악한 현대적 죄악일 것이다. 이런 행위들은 다 살인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런 것들뿐 아니라 형제를 미워하는 것도 똑같이 살인에 해당한다. 살인한 자는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인의 죄를 다 회개하고 서로 사랑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형제 사랑의 방법은 무엇인가? 사도 요한은 우선 주님의 모범을 따라 형제를 위하여 우리의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한다. 즉 참된 사랑은 자기 목숨까지 버리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요한복음 15:13에서 예수께서는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고 말씀하셨다. 주 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해 자기 목숨을 십자가에 내어주셨다. 그가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것은 우리를 사랑하신 확증이었다. 그것은 참으로 가장 큰 사랑이었다. 우리가 이렇게 큰 사랑을 받았으니 우리도 형제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
[17, 18]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사도 요한은 또한 세상 재물을 가지고 궁핍한 형제를 돕는 것이 참된 사랑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우리가 받은 자들이라면 우리는 참 사랑을 실천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목숨까지 형제를 위해 버리기를 원한다면 우리의 재물로 궁핍한 형제를 구제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목숨은 물질보다 더 귀중하다. 그러므로 희생적으로 사랑하기로 결심한 우리라면 우리는 우리의 물질로 구제하기를 힘써야 할 것이다. 야고보서 2:15-17,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결론적으로, 13절부터 18절까지는 우리에게 형제들을 미워하지 말고 사랑하라고 교훈한다.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살인하는 것이요 살인하는 자에게는 영생이 거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면 우리는 이로써 우리 자신이 사망에서 옳겨 생명에 들어간 줄을 알 수 있다. 사랑의 구체적 방법은, 첫째로 목숨까지 버리는 것이요, 둘째로 세상 재물을 가지고 궁핍한 형제를 돕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사랑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랑으로 형제를 사랑해야 한다.
19-24절, 순종과 담대함
본문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라는 주의 계명을 순종할 때 첫째 우리 자신이 진리에 속한 자임을 알고, 둘째 확신과 평안과 담대함을 얻고, 셋째 기도의 응답을 받으며, 넷째 우리가 주님과 영적으로 연합되었음을 확인하게 된다고 증거한다.
[19]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로다.
‘이로써’라는 말은 앞에서 말한 대로 진실한 사랑을 실천함으로써라는 뜻이다. 사도 요한은 우리가 진실하게 형제를 사랑할 때 우리가 진리에 속한 자임을 알게 된다고 증거한다. 사도 요한은 앞에서도 진리에 대하여 자주 말했다. 1:6에서는 진리를 행함에 대하여, 1:8과 2:4에서는 진리가 우리 속에 있음에 대하여, 2:21에서는 진리를 앎에 대하여 말했다. 그가 말한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그 내용인 하나님의 복음 진리를 가리키는 줄 안다. 그것이 신약성경이 말하는 진리이다. 요한복음 8: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에베소서 1: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우리는 서로 사랑할 때 진리에 속한 자임을 스스로 알게 된다. 진실한 형제 사랑은 진리에 속한 증거이다. 미움은 세상에 속한 자, 사망 아래 있는 자, 비진리에 속한 자, 사탄에게 속한 자의 표이지만, 사랑은 교회에 속한 자, 생명 안에 있는 자, 진리에 속한 자, 하나님에게 속한 자의 표이다.
사도 요한은 또한 우리가 진실하게 형제를 사랑할 때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할 것이라고 증거한다. ‘굳세게 한다’는 원어(페이도)는 ‘확신케 한다, 평안케 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에 대하여 그리고 우리 자신의 구원에 관하여 확신케 하고 그 진리와 그 구원 안에서 평안함을 누리는 것을 가리키는 줄 안다. 사람은 죄를 지을 때 두려움을 가진다. 창세기 3:10에 보면, 첫 사람 아담은 범죄한 후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동산 나무에 숨었었다. 악인에게는 평안이 없다. 이사야 48:22,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 이사야 57: 21, “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 그러나 우리는 진리를 행할 때 두려움 대신 확신과 평안과 담대함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20, 21]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거든 하물며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일까 보냐?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원문에는 20절 초두에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확신과 평안과 담대함을 얻는 이유를 보인다. 즉 그 이유는,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으면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 앞에서 확신과 평안과 담대함을 얻을 수 없지만,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나아갈 담력을 얻었다. 히브리서 10: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러나 우리는 범죄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담력을 가질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순종할 때 실제적으로, 더욱 담력을 얻는 것이다. 잠언 28:1, “악인은 쫓아 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하니라.”
[22]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사도 요한은 순종의 또 하나의 결과로서 기도의 응답에 대해 증거한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의 응답에 대해 가르쳐 주셨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마 7:7, 8). 예수께서는 기도의 응답에 대해 가르쳐 주시면서 결론적으로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고 하셨다(마 7:12). 이것은, 우리가 기도와 간구에 대해 하나님의 응답하심을 원하고 기대한다면 먼저 하나님 중심으로 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을 가르치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을 더욱 확신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려 범죄하면서 그가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라고 기대할 수 없다.
[23]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사도 요한은 우리가 따라야 할 하나님의 계명을 두 마디로 요약한다. 첫째는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것이요, 둘째는 그의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인생에게 선언하신 가장 긴급하고 가장 중요한 내용은 무엇보다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것이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복음 6:2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요한복음 6: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또한 예수님을 믿고 영생의 구원을 받은 자들에게 모든 계명을 요약한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셨다. 요한복음 13:34, 35,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24]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사도 요한은 마지막으로 우리가 계명을 순종할 때, 즉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그의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때 우리가 주 안에 거하고 주께서도 우리 안에 거하심을 안다고 증거한다. 우리가 주 안에 거하고 주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것은 주님과의 영적 연합을 가리키는 말이다. 아가서 2:16에서는 신랑과 신부의 연합과 일체를 신랑이 신부에게 속하고 신부가 신랑에게 속한다는 말로써 표현하였다: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구나.” 이것은 하나님과 자기 백성 그리고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와의 영적 연합을 나타낸다. 요한복음 15장에 보면, 예수께서는 이 영적 연합을 포도나무의 비유로 강조하셨다.
요한복음 15:1-8,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주님과의 영적 일체는 곧 구원의 사실 혹은 중생(重生)의 사실을 가리킨다. 죄는 하나님과 사람을 분리시켰다. 그러나 죄인이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의 구원을 받을 때 혹은 그의 죽었던 영이 다시 살리심을 받을 때 즉 중생할 때, 그는 주님과 영적으로, 신비적으로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받게 된다.
그리고 주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표는 우리 속에 오신 성령님이시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신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시며(롬 8:9; 갈 4:6) 그가 우리 안에 계신 것은 곧 주께서 우리 속에 계신 것과 같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고린도후서 13:5에서 말하기를,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라고 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과 하나 되었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는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할 때 더욱 확인되고 확증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은 구원은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함으로써 확인되고 확증된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지만, 우리의 순종의 행위는 우리가 받은 구원을 증거하고 확증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19절부터 24절까지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의 핵심을 다시 한번 더 깨닫는다. 그것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사도 요한은 중생한 자가 죄를 짓지 않고 의를 행하며 형제를 사랑함을 강조하였다. 우리가 정말 중생한 자라면, 우리가 정말 구원받은 자라면, 우리는 죄를 짓지 말고 의를 행하고 서로 사랑해야 한다. 우리가 이렇게 순종할 때 우리는 자신이 진리에 속한 자임을 알고 하나님 앞에서 확신과 평안과 담대함을 얻고 기도의 응답을 얻고 또 우리가 주 안에 거하고 주께서 우리 안에 거하심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단지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 구원받은 우리가 범죄치 않고 의를 행하며 형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순종의 삶을 통해 확신과 평안과 담대함을 얻고 풍성한 기도의 응답을 체험해야 한다.
4장: 형제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
1-6절, 영들을 시험하라
[1]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우리는 영들을 다 믿지 말아야 한다. 영은 정신이다. 그것은 사상이다. 그것은 신앙 사상, 교리 사상이다. 그것은 그의 말과 교훈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사람들의 사상과 가르침들을 다 믿지 말고 그것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해야 한다. ‘하나님께 속하였나’라는 원어는 ‘하나님께로서 나왔는가’라는 뜻이다. 즉 어떤 사상, 어떤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나온 하나님의 사상, 하나님의 교훈인지 아닌지를 시험하고 분별해야 한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많은 거짓 선지자들, 거짓 목사들이 세상에 나왔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무 사상과 아무 교훈이나 따라간다면 우리는 사탄에게 속아넘어가는 자들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들, 정신들, 사상들, 말과 교훈들을 시험하고 분별해야 한다.
[2, 3]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이제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사도 요한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을 분별하는 기준을 말해 주었다. 그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셨다는 사실을 시인하며 고백하느냐, 하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이란 요한복음 1:14에 증거된 그의 성육신(成肉身)을 말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여기의 ‘말씀’은 요한복음 1:1에 증거된 ‘태초부터 계신 말씀’을 가리킨다. 그가 곧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는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이시고 때가 되어 사람의 본질을 취하여 사람이 되어 오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신 동시에 사람이신 독특한 인격자이시다. 요한은 본서신 5:20에서도 그의 신성(神性)을 증거하기를,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고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고백하는 영은 하나님께 속한 영, 혹은 원어의 뜻대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영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고백하지 않는 영은 하나님께 속하지 않는 영, 혹은 원어의 뜻대로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지 않은 영이며, 그것이 적그리스도의 영 곧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영이다.
성육신의 교리는 기독교의 핵심 교리 중 하나이며 단지 그 교리뿐 아니라 성경의 근본 교리를 부정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적그리스도의 영이며 거짓된 영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성경의 근본 교리들을 주셨기 때문이다.
주 예수께서 적그리스도의 영 곧 거짓 목사들이 세상에 올 것이라고 예언하신 대로(마 24:5, 11, 24) 그들이 사도 요한의 당시에 벌써 세상에 있었다. 따라서 사도 요한은 그 당시를 이미 말세가 시작된 것으로 이해하고 말세 의식을 가졌다. 요한일서 2:18,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줄 아노라.”
[4]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
성도들은 하나님께 속하였고 원어의 뜻대로 하나님께로서 나왔다. 즉 그들은 중생(重生)하였다. 또 그들은 저 거짓 선지자들에게 미혹되지 않았고 그들을 배격하고 이겼다. 왜냐하면 성도들 안에 계신 이, 즉 하나님께서 세상에 있는 이, 즉 사탄보다 크시기 때문이다. 성도들은 하나님께로서 난 하나님의 자녀들이지만(요 1:13), 거짓 선지자들과 거짓 목사들은 사탄의 사자들이다.
고린도후서 11:4, 13-15,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단의 일군들도 자기를 의(義)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갈라디아서 1:6-8,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오늘날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은 적그리스도의 영 즉 이단과 거짓된 사상들은 여호와의 증인, 몰몬교, 안식교, 통일교 등 수많은 사이비 종파들과 천주교회와 자유주의 등이며, 교회연합운동(에큐메니칼운동)과 신복음주의와 은사주의 등도 하나님의 참된 교회를 부패시키고 혼란시키는 거짓된 사상들이다.
[5, 6] 저희는 세상에 속한 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저희 말을 듣느니라.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저 거짓 교사들은 세상에 속했고 세상에서 나온 고로 세상에 속한 말 혹은 세상에서 나온 말을 하며 세상이 저희 말을 듣는다. 세상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을 가리킨다. 그들 중 어떤 이들은 교회에 다니기도 하며 종교 의식을 행할 수도 있으며 또 심지어 세례를 받을 수도 있고 교회의 직분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예수님 당시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그러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 속하지 않고 하나님께로부터 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의 말 곧 바른 교훈, 정통 교리, 역사적 기독교를 듣지 않고 좋아하지 않는다.
예수께서도 하나님께서 심으시지 않은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걸려 넘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15:12-14, “이에 제자들이 나아와 가로되, 바리새인들이 이 말씀을 듣고 걸림이 된 줄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심은 것마다 내 천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 그냥 두어라. 저희는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신대.”
그러나 ‘우리’ 곧 주의 사도들, 하나님의 참된 종들은 하나님께 속하고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 즉 중생한 자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자들은 우리의 말 곧 바른 말, 정통 교리, 역사적 기독교 교리을 듣는다. 이로써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은 구별된다. 진리의 영은 주께서 사도들을 통해 주신 바른 복음 진리의 말, 곧 전통적 정통 교리를 듣고 믿고 인정하고 고백하지만, 미혹의 영은 우리의 바른 말과 정통 교리를 듣지 않고 인정치 않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1절부터 6절까지에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받는다.
첫째로, 우리는 영들을 다 믿지 말고 영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는지 시험하고 분별해야 한다. 우리는 사람들의 정신들, 사상들, 말과 교훈들을 다 믿지 말고 그것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왔고 하나님께 속한 바른 것인지 아닌지를 시험하고 분별해야 한다. 아무 정신, 아무 사상, 아무 교훈이나 따라가는 것은 사탄의 시험에 빠지는 어리석은 일이 될 것이다.
둘째로, 우리가 영들을 분별하는 기준은 하나님이 주신 바른 복음 진리이다. 그 핵심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진리가 있다. 우리는 어떤 지엽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이해와 지식의 부족으로 잘못 알 수도 있을 것이지만, 적어도 성경의 근본적 진리들과 교리들에 있어서는 바른 이해와 지식을 가져야 한다. 진리의 영은 중생한 자들, 곧 참 교회의 회원들, 양들, 알곡들의 영이며 그들은 바른 말, 곧 정통 교리와 역사적 기독교를 받아들인다. 그러나 미혹의 영은 중생치 못한 자들, 즉 적그리스도들, 거짓 선지자들, 거짓된 목사와 교사들, 형식적 교인들, 가라지들, 쭉정이들, 위선자들, 염소들의 영이며 그들은 바른 말, 곧 정통 교리와 역사적 기독교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셋째로, 우리는 진실히 예수 믿고 중생한 자들이 되어 하나님의 바른 말씀, 정통 교리, 성경의 근본 교리들과 역사적 기독교를 다 믿고 하나님의 교훈대로 겸손하게, 성실하게 순종하며 나아가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7-11절, 서로 사랑함이 마땅함
[7, 8]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사도 요한은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함을 계속 강조한다. 그가 말하는 사랑은 세속적, 육신적 사랑이 아니고 천적인 거룩한 사랑을 가리킨다. 이러한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 즉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다. 거룩한 사랑은 하나님의 속성이며, 까닭 없는 미움과 부정당한 싸움은 마귀에게 속한 성질이며 행위이다. 그러므로 요한은 이러한 거룩한 사랑으로 형제를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지만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니 이는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표, 즉 중생(重生)한 표요 하나님을 아는 표이다.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일에서 밝히 나타났다. 본절은 하나님께 독생자가 계시다는 사실과, 하나님께서 그를 세상에 보내셨다는 사실과, 그가 그를 세상에 보내신 목적에 대해 증거한다. 첫째로, 하나님께 독생자가 계시다(요 1:18; 3:16). ‘독생자’는 외아들을 가리킨다. 유일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께서는 오직 한 아들을 스스로 낳으셨다. 그 외아들은 참된 신성(神性)을 가진 하나님이시다(요 1:1; 골 2:9).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의 아들의 관계는 시간 세계에 속하지 않는다. 그것은 영원적이다. 그는 사람으로 탄생하시기 전에도 하나님의 독생자이셨다. 그는 요한복음에 증거된 대로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셨다(요 17:5). 하나님께는 영원하신 외아들이 계시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셨다. 세상에 보내셨다는 말씀은 두 가지 뜻이 있어 보인다. 첫째는 사람의 본질을 취하여 사람으로 보내셨다는 의미 즉 성육신(成肉身)의 의미이며, 둘째는 십자가에 죽게 내어주셨다는 의미이다. 성육신은 신비 중의 신비요, 기적 중의 기적이다. 어떻게 영원하신 독생자께서 유한한 사람의 본질을 취하실 수 있으셨는지? 신적 본질을 가지신 그가 어떻게 인간의 본질을 취하셔서 그 둘이 한 인격 안에 신비롭게 결합되셨는지? 교회의 정통적 신조들이 표현하는 대로, 그의 신성과 그의 인성은 혼합됨이나 분리됨이 없이 한 인격 안에서 신비롭게 결합되셨다. 그는 이제 참 하나님이신 동시에 참 사람이시며 영원히 그러하시다. 뿐만 아니라,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신 그는 십자가에 죽으셨다. 그는 죽기 위해 오셨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주기 위해 세상에 보내셨다.
셋째로,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목적은 우리를 살리시기 위함이었다. 우리가 언제 죽었었는가? 우리의 영혼은 우리의 허물과 죄로 죽었었다(엡 2:1). 그러므로 우리의 영혼이 죽음에서부터 살아나기 위해 메시아의 대속(代贖)의 죽음이 필요하였다. 그는 이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기 위해 사람이 되어 십자가에 죽으셨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을 사람으로 세상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죽게 하신 것은 전적으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의 죽은 영혼을 살려주시기 위함이었다.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본절은 앞절의 뜻을 더욱 분명하게 한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그 사실에서 우리는 참 사랑을 발견한다. 죄인을 이처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 같은 사랑이 이 세상에 또 어디 있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셔서 우리 죄를 위해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주셨다. ‘화목제’라는 원어(힐라스모스)는 ‘유화제물’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우리의 죄들로 인한 하나님의 불붙은 진노를 누그러지게 하는 제물이라는 뜻이다. ‘유화제물’이는 말(힐라스모스, 힐라스테리온)은 성경적 용어이며 성경적 개념이다. 로마서 4:25,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고린도후서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갈라디아서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또한 9, 10절에서 ‘우리 . . . 우리 . . . 우리 . . . ’라는 표현은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의 제한성을 암시한다.
[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하나님께서 우리 같은 죄인을 이같이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 우리는 다 죄인이었고 우리의 많은 죄들과 우리의 뿌리 깊은 죄성과 연약성은 지옥 형벌을 받기에 합당하였으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고 1만 달란트 빚진 것 같은 우리의 큰 죄를 용서하셨고 우리를 구원하셨다(마 18:23-35).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이 주신 큰 구원을 받았으므로, 우리도 형제의 부족과 실수와 연약을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며 사랑해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7절부터 11절까지에서 우리는 몇 가지 진리와 교훈을 발견한다. 첫째로, 우리는 거룩한 사랑은 하나님의 속성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까닭 없는 미움과 부정당한 싸움은 마귀에게 속한 성질이며 행위이지만, 우리가 거룩한 사랑으로 형제를 사랑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요 하나님을 아는 자임을 나타낸다. 참 사랑은 중생했다는 표시이며 하나님을 안다는 표시이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체험한 자들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하나밖에 없으신 독생자를 우리를 위해 세상에 보내셨다. 죄로 죽었던 우리의 영혼을 다시 살리시려고,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씻어주시려고, 독생자 예수께서는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에 속죄 제물이 되셨다. 우리의 죽었던 영혼은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을 믿음으로 다시 살았고 구원을 받았다.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체험한 자들이다.
셋째로,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큰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큰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하나님을 아는 자가 되었을진대,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한다.
12-16절,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심
본문은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한다고 증거한다.
[12, 13]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요 4:24)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 디모데전서 6:16,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 하나님은 물질적 형체를 갖지 않으신 영이시므로 사람의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으시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증거하기를,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며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은 특권 중의 특권이다. 그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특권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떠나시는 것은 가장 큰 불행이며,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은 가장 큰 행복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가 그 안에 거하는 영적 일체는 하나님의 인격의 아름다운 덕을 가져오고 능력과 평강을 누리게 하며 기도의 응답을 얻게 한다. 그런데 우리는 서로 사랑할 때 이렇게 복된 하나님과의 영적 일체를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또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진다는 말씀은 그 사랑이 이론적으로나 법적으로만 우리에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실제적으로도 우리 속에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즉 하나님의 사랑이 단지 칭의(稱義)로 이루어지는 것뿐이 아니고 또한 성화(聖化)로도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죄에서 구원받게 하기 위해 독생자를 보내어주신 사랑이기 때문에, 우리가 실제로 죄에서 떠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의 구원이 우리에게 실제로 이루어지는 것이 된다. 칭의가 구원이지만, 그것이 성화의 과정에서 더욱 구원답게 된다. 왜냐하면 구원은 죄로부터의 구원이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사도 요한은 3:24에서도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고 말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육신의 눈으로는 볼 수 없지만 성령의 감동과 감화, 성령의 역사하심, 성령의 일깨우심, 성령의 위로와 격려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계심을 느끼며 체험하게 된다.
[14]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거하노니.
기독교 복음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세상에 구주로 보내셨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기독교 복음의 확실성은 사도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직접 보았고 증거하였다는 사실에 있다. 누가복음 24:46-48,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요한복음 21:24, “이 일을 증거하고 이 일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거가 참인줄 아노라.” 사도행전 5:32,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15]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누구든지 복음에 증거된 대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구주로 시인하고 고백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한다. 이것이 구원이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이 성경의 기본적 진리이다.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로마서 10:9, 10,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신자의 참된 신앙고백은 구원받은 증거이다. 그는 하나님과 영적으로 일체가 되었다. 즉 하나님께서 그 안에 거하시고 그가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이다.
[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우리가 복음에 증거된 대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구주로 믿은 것은 우리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안 것이요 믿은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이시다(요 3:16; 롬 5:8). 사도는 위의 사실에 근거하여 다시 반복하기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신다’고 말한다. ‘사랑 안에 거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서로 사랑하는 것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사랑을 소유하고 실천하는 자가 그 사랑 안에 거하는 자이다. 진정한 신앙고백은 하나님의 사랑을 소유하고 실천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사랑의 실천은 참 신앙고백의 증거일 뿐 아니라, 구원의 증거 즉 하나님과의 영적 일체의 증거가 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12절부터 16절까지는 하나님께서 성도 안에 거하시고 성도가 하나님 안에 거하는 영적 일체의 두 가지 증거에 대해 말한다. 그 첫째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것이요, 그 둘째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바른 신앙고백이 있고 서로 사랑함이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함을 알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과 영적으로 하나됨은 그의 성령을 통해, 즉 성령의 감동과 감화, 역사하심, 일깨우심, 위로와 격려를 통해 느끼며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은 우리에게 실제적인 두 가지 질문을 던진다. 첫째로, 여러분은 예수님을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고백하는가? 참된 신앙고백은 구원받은 표시이다. 둘째로, 여러분은 진심으로 서로 사랑하는가? 또 서로 사랑하고자 하는가? 우리 모두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나의 구주, 나의 주님으로 진실히 믿고 그의 명령대로 거룩한 사랑으로 서로 사랑해야 한다. 미움은 구원받지 못한 표시이며 사랑은 구원받은 표시이다. 그러므로 서로 사랑하기를 힘쓰자.
17-21절,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본문은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심판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된다는 것을 증거한다. 본문은 또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유가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라는 것과, 서로 사랑하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가 된다는 것을 증거한다.
[17]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이로써’라는 말은 앞절에서 말한 대로 우리가 사랑 안에 거함으로, 즉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믿고 그 사랑을 가지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서로 사랑함으로 하나님과 영적 일체성을 누림으로써라는 뜻이다. 서로 사랑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표가 된다. 요한복음 15: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지게 된다. ‘사랑’은 원문에 ‘그 사랑’인데,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킨다. 16절,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그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졌다는 말은 법적인 구원인 칭의(稱義)뿐 아니라 새 생활로 나타나는 구원인 성화(聖化)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 의지가 세상에서 온전히 이루어졌다는 뜻이다. 이 세상에서는 성화까지가 하나님의 뜻이다. 영화(榮化)는 미래에 이루어질 일이다.
이렇게 형제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히 이루어질 때 우리는 담대함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3:21,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며(롬 13:8) 사랑 안에서는 담대함이 있다. 이것은 또한 심판날에 가질 담대함이다. 우리는 서로 사랑할 때 심판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된다.
왜 이런 담대함을 가지게 되는가? 그 이유는,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기 때문이다.’ 즉 주께서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셨듯이 우리도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며, 주께서 십자가에 죽으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듯이 우리도 죽기까지 형제를 사랑하면, 주께서 죽으신 지 삼일 만에 부활하셨듯이 우리도 영광 가운데 부활할 것이기 때문이다. 주를 믿고 그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는 자는 이 소망의 담대함을 가질 것이다. 디모데후서 2:11,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다. 어린아기는 엄마의 사랑을 느끼기 때문에 그 품 안에서 편안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이에게 가면 울 것이다.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쫓는다. 왜냐하면 두려움에는 고통이 있기 때문이다. ‘형벌’이라는 원어(콜라시스)는 ‘고통’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는데 그 뜻이 본문에 더 적절하다. 두려워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했다.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받은 자는 그 사랑 안에 거하고 그 사랑을 소유하고 그 사랑을 실천하는 자이며, 거기에는 두려움과 고통이 없고 평안과 기쁨이 넘친다.
[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전통본문에는 “우리가 그를 사랑함은 . . . ”이라고 되어 있다. 경건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것은 성경에 계시된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의무이다. 신명기 6:5,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마태복음 22:37, 38,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먼저를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10절,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유화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서 자기 독생자를 희생하시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을 참으로 안다면, 우리는 다 하나님을 사랑할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자마다 하나님을 가장 사랑할 것이다.
[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그 사랑으로 구원받은 자에게 기본적인 일이며 또 우리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우리의 형제들을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는 일이 자주 있다. 그러나 요한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는 자는 거짓말 하는 자라고 말한다. ‘그 형제’란 예수 믿고 구원받은 자를 가리킨다. 왜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거짓말 하는 자인가? 요한은 말하기를, 그가 본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한 자가 그가 보지 못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21]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본절의 ‘이 계명’은 후반부의 말씀, 즉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는 말씀을 가리킨다. 이 계명은 요한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에 나타나 있다. 요한복음 14:21,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요한복음 14: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하리라.” 거기에서 ’나의 계명과 ‘내 말’이란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가리킨다. 주 안에서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가 된다.
결론적으로, 17절부터 21절까지를 요약하면, 우리는 서로 사랑할 때 심판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된다는 것과, 또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유는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며,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가 된다는 것이다.
본문은 성경 전체와 더불어 우리에게 두 가지의 가장 기본적인 생활 교훈을 강조한다.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같이 비천한 죄인들을 사랑하셔서 자기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주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그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한다. 우리는 서로 사랑할 때 심판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되며 또 서로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가 되며 그의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이 된다.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은 우리가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고 또 진실히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5장: 형제 사랑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표시
1-5절, 하나님을 사랑하는 표시
본문은 하나님께로서 난 자, 즉 중생한 자마다 하나님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또한 다른 중생한 자들 즉 주 안에서 형제된 자들을 사랑한다는 것과, 이것은 결코 무거운 짐이 아니라는 것을 증거한다.
[1]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또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이것은 요한복음 1:12, 13에 증거된 바이기도 하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또 요한복음 3장에 기록된 대로 주께서 중생(重生)의 도리를 증거하실 때 증거하신 바이기도 하다. 요한복음 3: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내신 이’라는 말은 ‘낳으신 이’라는 뜻으로 하나님 우리 아버지를 가리킨다. 우리를 낳으신 이, 즉 우리를 중생시키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누구나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한다. ‘그에게서 난 자’는 우리와 똑같이 중생한 자를 가리킨다. 우리는 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다. 그러면 우리는 한 식구이며 한 형제들이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사람은 세상에서 육신의 형제를 다 사랑한다. 육신의 형제의 아픔은 나의 아픔이요 그의 기쁨은 나의 기쁨이다. 육신의 형제도 그러하거든, 하물며 영적 형제는 더욱 그러해야 한다. 생각해보면, 하나님의 자녀와 천국의 자녀가 된 형제들은 세상에서의 육신의 가족보다 더 귀하다. 육신의 부모가 나으신 형제들도 귀하거든 하물며 하나님께서 나으신 형제들은 얼마나 더 귀한 것인가!
[2]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원문에는, 본문이 “이로써 우리가 아노니”라고 시작된다. ‘이로써’는 앞절의 내용을 가리킨다. 즉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요 또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는 것이 이치이기 때문에라는 뜻이다. 이치가 그러하기 때문에 우리가 무엇을 안다는 것인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킬 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안다고 사도는 말한다.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안다’는 말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해야 할 줄을 안다’ 혹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게 된다는 것을 안다’는 뜻이다. 즉 하나님의 자녀 사랑함은 하나님 사랑과 그 계명 지킬 때 가능하다는 말씀이다.
[3]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원문에는 본절 초두에 ‘왜냐하면’이라는 말(가르)이 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킬 때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게 되는 이유를 나타낸다. 그 이유는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의 계명을 지킬 것이다.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이다. 또 사도 요한은 그의 계명들이 무겁지 않다고 말한다. 우리가 중생치 않았을 때 곧 죄의 종 되었을 때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기가 심히 무거웠다. 그러나 우리가 중생한 후에는 하나님의 씨가 우리 속에 심겨졌고 하나님의 영께서 우리 속에서 역사하므로 우리는 비록 연약함이 있어 넘어질지라도 하나님의 법을 즐거이 지킨다.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영의 인도함을 받는 자이다(롬 8:4, 14). 예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고 하셨다(마 11:29, 30).
[4, 5]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원문에는 본절 초두에도 ‘왜냐하면’이라는 말(호티)이 있다. 이것은 그의 계명이 무거운 것이 아닌 이유를 증거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기 때문이다. 세상을 이긴다는 말은 죄와 사망과 마귀의 세력을 이긴다는 뜻이다. 사도 요한은 앞에서도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고 말했고(요일 3:9) 또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하나님께로서 나왔고] 또 저희를[적그리스도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고 말했다(요일 4:4). 우리 속에는 하나님께서 계시고 또한 그의 생명 원리가 거하기 때문에 우리는 죄와 세상을 이길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은 우리를 죄와 사망과 사탄의 권세로부터 건져내어주셨다.
로마서 6:14, 18, 22,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고린도전서 15:54-57,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히브리서 2:14, 15,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사도 요한은 덧붙여서 말하기를, 성도가 세상을 이기는 방법은 다른 것이 아니고 바로 믿음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믿음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씻음 받고 의롭다 하심을 받았고 영생을 얻었고 부활을 소망하고 확신하게 되었다. 이로써 마귀와 그 세력은 성도 앞에 완전히, 영원히 패배하고 말았다. 이 귀한 사실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복음 진리 안에 다 내포되어 있다. 죄는 죽음과 불행을 가져왔으나 의는 생명과 영원한 행복과 영광을 가져왔다. 로마서 3: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로마서 5:1, 2,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결론적으로, 1절부터 5절까지에서 우리는 우선 두 가지 질문을 할 수 있다. 첫째로, 여러분은 중생했는가? 중생의 표는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믿음이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진실히 믿고 있는가? 둘째로, 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하나님과 그의 구원 사역을 아는 자마다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 여러분은 참으로 온 세상을 만드시고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건져내어주신 하나님을 알며 그를 사랑하는가?
무엇보다, 본문이 가르치는 주된 교훈은, 만일 우리가 거듭나는 은혜를 얻었고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우리가 또한 중생한 다른 형제들을 사랑할 수 있고 또 그렇게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형제 사랑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의 당연한 일이다. 우리가 육신의 형제들도 사랑하거든, 하물며 하나님께서 낳으신 영적 형제들을 더욱 사랑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것은 결코 무거운 짐이 아니다. 이것은 믿음으로 능히 감당할 수 있는 일이다. 우리는 죄와 사망과 마귀의 권세 아래 지는 자들이 아니고 믿음으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자들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100퍼센트의 완전한 의를 얻으며 우리는 그 의 안에서 영원한 생명과 영광을 은혜로 얻는다. 여러분은 주께서 구원하신 자들, 곧 하나님의 가족들인 영적 형제들을 참으로 사랑하는가?
6-10절, 물과 피와 성령의 증거
[6]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물과 피로 임하셨다는 뜻이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님의 인성(人性)을 가리킨 것 같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못박히셔서 물과 피를 흘리셨다. 요한복음 19:34,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초대 교회에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정하는 이단이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참된 인간이셨다. 태초부터 계셨던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때가 되어 인간의 본질을 취하여 사람이 되셨다(요 1:14).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의 말대로, 그 이후 예수 그리스도는 계속 그리고 영원히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시다.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다’는 말씀은 물과 피라는 말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가리킬 뿐 아니라, 또한 상징적 의미도 가짐을 나타내는 것 같다. 그렇다면 물은 죄씻음을, 피는 속죄의 죽음을 가리킬 것이다. 이 둘은 기독교 복음의 근본적 내용이다. 이 둘은 세례와 성찬의 의식으로 표현되는 것들이다. 예수께서 사람이 되신 까닭은 속죄의 제물이 되시기 위함이었다. 그는 우리의 죄씻음을 위해 속죄 제물로 죽기 위해 사람으로 오셨다. 그의 죽으심은 우리의 죄씻음의 근거가 되었다. 요한복음 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마태복음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7]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신다. 즉 성령께서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며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구주이심을 증거하시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참되시며 그 분께서 증거하시는 내용 또한 참되다. 요한복음 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요한복음 16:13, 14,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오늘날도 진리의 성령께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밝히 증거하시며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게 하신다.
[8]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
증거하는 이가 셋이다. 곧 성령과 물과 피이다. 성령과 물과 피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다. 또한 그 셋의 증거는 하나이다. 그 셋은 공통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주 되심을 증거한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하셨다는 것이 성경에 기록된 증거의 요지이다. 디모데전서 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9]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거를 받을진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것이니라.
우리는 사람들의 증거를 받아들이며 살고 있다. 매일 신문의 뉴스들이 그러하며 법정의 판결도 많은 부분 사람의 진실한 증거에 의존한다.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거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의 세상 생활은 지극히 불안정될 것이고 의심으로 가득 찰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와 같이 사람들의 증거를 신뢰한다면,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다고 할 것이다.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확실하고 믿을 만하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친 음성으로 자기 아들에 관해 증거하셨다. 마태복음 3:17,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17:5,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성경의 모든 말씀은 실상 하나님의 증거의 말씀이다. 성령의 증거는 하나님의 증거이다. 고린도전서 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저주받은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성경의 모든 말씀들 속에서 자기 아들의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에 대해 그리고 그의 속죄 사역에 대해 증거하셨다. 성령과 물과 피도 다 하나님의 아들에 관해 증거한다.
[10]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그 증거가 있다. ‘증거가 있다’는 원어는 ‘그 증거가 있다’는 말이다. ‘그 증거’는 하나님의 증거를 가리킨다. 우리는 하나님의 증거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을 믿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 즉 하나님의 증거대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관해 증거하신 증거를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6절부터 10절까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물과 피로 오셨고 성령께서 그것을 증거하심을 말했다. 성령과 물과 피는 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人性)과 속죄 사역에 대한 증거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증거를 받아들이자. 하나님의 증거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으로 오셨다는 것, 곧 그의 신성과 인성에 관한 것이며, 또한 그의 속죄 사역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려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하나님의 증거, 성경의 증거를 받아들이고 확신하자.
11-13절, 영생을 주심
본문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다는 것과 그 영원한 생명이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영생이 있다는 것을 증거한다.
[11]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증거에 대해 좀더 설명한다. ‘증거’라는 원어는 ‘그 증거’이며 그것은 하나님의 증거를 가리킨다. 하나님의 증거의 내용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다는 사실이며, 또 하나는 그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다는 사실이다.
첫번째 내용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본래 영생할 가능성이 있는 존재로 창조되었었다. 첫 사람 아담은 하나님의 시험하시는 첫 명령을 어느 기간 동안 잘 지켰었더라면 영생을 얻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명령을 어겼고 하나님의 경고하신대로 죽게 되었다.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된 것이다. 시편 49:12,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치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그러나 인간 속에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살고싶어하는 강렬한 소원이 있다. 특히 죽음의 문턱에 선 자들에게는 좀더 살고싶은 강한 소원이 있다. 병약하여 죽지 않고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고자 하는 마음이 누구에게나 있다. 전도서 3:11,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인간의 영원한 생명은 어디로부터 가능한가? 생명의 원천이신 창조주 외에는 아무도 인간에게 영생을 줄 수 없다.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께서만 우리에게 부활과 영생을 주실 수 있다. 그런데 그가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기를 약속하셨다. “또 그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요한일서 2:25,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사도 바울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음을 증거하였다. 디모데후서 1: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대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디도서 1:1, 2,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 곧 나의 사도 된 것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영생의 소망을 인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영생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모든 진리의 중심이다.
이 영생이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 영생은 어떤 영생인가? 이 영생은 말 그대로 영원히 사는 삶이다. 죽지 않는 삶이다. 그러나 그 삶은 병약하거나 불행스런 삶이 아니다. 그런 삶이 영원하다는 것은 복이 아니고 저주일 것이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은 강하고 영광스러운 생명이다. 고린도전서 15:42-44,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이 영생의 가치는 얼마나 큰지! 이 영생은 이 세상의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고 바꿀 수 없다! 그러나 인생은 어리석고 무지하여 이 영생을 세상의 썩어질 것과 바꾸기를 잘한다. 마치 옛날의 아프리카 어린 아이들이 다이아몬드를 사탕과 바꾸어 먹었듯이 말이다. 그래서 주께서는 ‘썩어질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하셨다(요 6:27).
하나님의 증거의 두번째 내용은 하나님의 약속하신 그 영원한 생명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이다. 사도 요한은 본서신 서두에서도 그 사실을 증거하였다. 1:1, 2,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자니라.” 요한이 말한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 즉 이 세상에 나타났고 사도들에 의해 증거된 그 영원한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를가리켰다. 요한은 본서신 끝부분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영생’이라고 증거하였다(요일 5:20).
영원한 생명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요한이 쓴 요한복음에서도 밝히 드러나 있다. 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6:3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6:47, 48,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10:10,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11:25, 2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14: 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본래부터 영원한 생명이 있으셨지만, 그가 사람이 되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대속(代贖)의 죽음을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정당하게 영생을 주실 수 있게 되었다. 죄의 값은 죽음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결과는 영생이다. 하나님께서는 의롭고 정당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다. 사도 바울은 특히 이 사실을 그의 로마서에서 잘 증거하였다. 5: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5: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 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12, 13]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본절은, 하나님의 약속하신 영생, 그의 아들 안에 있는 영생이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주어진다는 사실을 증거한다. 하나님의 아들을 영접하고 믿는 자들에게는 영생이 있다. 그러나 그를 믿지 않고 영접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영생이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매우 중요하다. 믿는 자는 영생을 얻지만, 믿지 않는 자는 영생을 얻지 못한다. 참 믿음은 영생을 얻는 길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구원이 되고 영생이 된다는 것은 신약성경 전체가 증거하는 바이지만, 특히 요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영생이 있다는 사실을 풍성히 증거한다.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3:36,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6: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6:53, 5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17: 2, 3,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결론적으로, 11절부터 13절까지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진리와 교훈은 명료하고 확실하다. 하나님께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같은 세상에 사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 곧 영생을 약속하셨다. 이 약속된 생명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다. 우리는 이 영생의 가치를 깨닫자. 우리는 어리석게 세상의 것들과 영생을 바꾸지 말자!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을진대, 우리는 우리에게 영생이 있음을 확신하고 감사하자. 또 이 영생의 기쁜 소식을 만인에게 증거하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영생의 길일진대, 우리는 예수님을 참되고 바르게 믿고 확신하며 그만을 따르고 그의 모든 말씀에 절대복종하자.
14-17절, 기도의 응답
14절부터 17절까지는 성도의 특권으로서 기도의 응답에 대해 말씀하고 범죄하는 형제에 대해 기도할 것을 가르친다.
[14]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사도 요한은 성도의 담대함 즉 확신에 대해 말씀한다. 그것은 기도의 응답에 관한 것이다. 성도는 하나님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들으실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하나님의 뜻은 성경에 나타나 있다. 우리는 그것을 성경의 한 부분에서만 찾을 것이 아니고 성경 전체에서 찾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뜻 가운데 우리의 필요를 위해 모든 성경을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 전체를 읽고 연구하고 배움으로써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알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성경에 귀를 막는 자가 있다면 그의 기도는 헛될 것이지만, 성경에 귀를 기울이는 자의 기도는 반드시 응답될 것이다. 잠언 28:9, “사람이 귀를 돌이키고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은 무엇보다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고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살라는 것이다. 우리가 죄를 범하면 우리는 기도의 응답을 받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죄를 회개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응답을 받을 것이다. 이사야 1:15, 16,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라.” 이사야 59:1, 2,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그러므로 우리는 회개하며 순종하며 기도해야 하며, 그때 기도의 응답을 얻게 되는 것이다.
[15]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서 그의 뜻에 맞게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가 그의 뜻대로 구한 기도를 들으실 것이라는 믿음 또한 중요하다. 우리가 기도의 약속을 믿는다면, 우리는 또한 간구한 기도의 응답을 믿고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기도의 효력을 믿는다면,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구한 것을 그가 들으실 것이라는 사실을 또한 믿자. 마가복음 11: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받는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16, 17]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저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
사도 요한은 기도의 응답에 대해 말한 후 범죄하는 형제를 위해 기도할 것에 대해 또한 가르쳤다. 이 때 그는 죄를 두 가지로 나누었는데 하나는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이며, 다른 하나는 ‘사망에 이르는 죄’이다. 그는 말하기를,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라고 하였다. 죄의 값은 죽음인데(롬 6:23)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가 있다는 말씀은 무엇인가? 그것은 구원받은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공로로 영생을 얻은 후에 실수로나 연약성 때문에 범하는 죄를 가리킬 것이다. 사도는 앞에서 중생한 자가 범죄치 않는다고 말씀했으면서 여기에서는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를 범한다고 말하는 것은 무슨 뜻인가? 중생한 자가 범죄치 않는다는 말씀은 중생한 자가 계속 죄 가운데서 생활할 수 없다는 뜻이며, 중생한 자가 전혀 죄를 짓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중생한 자도 죄를 지을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진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라면 그는 그 죄에 머물러 있을 수 없고 즉시 돌이켜 하나님께로 나아올 것이다. 그는 그 실수와 연약 때문에 구원과 영생을 상실하고 영원한 멸망에 떨어질 수 없다. 그러므로 성도는 형제가 그런 죄를 범하는 것을 보면 그를 위해 기도해야 하며 그러면 그는 회개하고 영생을 잃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다. 그것은 구원받은 성도로서 가질 수 없는 죄이다. 그것은 예수께서 언급하신 ‘성령을 훼방하는 죄’와 같은 죄이다. 그런 죄는 사함을 받을 수 없다고 주께서 말씀하셨다. 그것은 성령의 일을 고의적으로 방해하고 대적하며 양심의 감동을 극도로 억압하는 죄로 생각된다. 교회 안에서 이런 죄가 있어서 안되겠지만, 종종 이단자들 속에서 이런 류의 죄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단의 죄는 실수나 무지나 연약의 죄가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 이론적으로는 다 아는 자들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부정하는 것은 무지해서가 아니고 순전히 고의적이다. 그들은 고의적으로 그리고 자기 나름대로의 확신을 가지고 진리를 대항하고 부정하고 왜곡하는 것이다. 그들은 에덴 동산에서의 뱀과 같이 확신차게 하나님의 말씀을 부정하고 대적하는 것이다. 이런 이단과 배교의 죄는 너무 크고 두려운 것이어서 실상 그런 자들을 형제로 여길 수도 없을 것이다. 사도 요한은 이제 그런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결론적으로, 14절부터 17절까지에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찾을 수 있다.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하되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성경을 부지런히 읽고 연구하고 배움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아야 하고 그 뜻대로 살기를 힘써야 할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할 뿐만 아니라, 또한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반드시 기도의 응답을 주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도의 응답을 믿는 것도 중요하다. 셋째로, 우리는 교우 중에 누가 범죄하는 일을 보거든 그가 회개하고 돌이킬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진리를 고의적으로 대항하고 부정하고 왜곡시키는 이단자와 배교자에 대해 우리가 기도할 자신이 없지만, 주를 진실히 믿고 따르고자 하는 형제에 대해서는, 비록 그가 실수와 연약으로 범죄하였을 때라도, 그를 포기하거나 버리지 말고 그를 끝까지 사랑하고 그를 위해 기도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셔서 그에게 회개함을 주시고 그가 영생을 잃지 않게 될 것이다.
18-21절, 바른 지식과 삶
본문은 중생(重生)에 대한 바른 지식과 거기에 합당한 삶에 대해 증거한다. 본문에는 ‘우리가 알고 있다’는 말(오이다멘)이 세 번 나온다(‘우리가 아노라. . . . 또 아는 것은 . . . 또 아는 것은’). 그것은 우리가 얻은 중생(重生)의 성격과 근원과 방편을 나타낸다. 중생의 성격은 범죄치 않는 것이요, 중생의 근원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요, 중생의 방편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이다. 또 본문은 우리가 중생에 합당하게 자신을 죄와 우상으로부터 지켜야 할 것을 가르친다.
[18]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첫번째로 우리가 아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중생의 성격을 보인다. 이 진리는 본서신 3:6, 9. 10에서 언급된 바이다: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이것은 중생한 성도의 실제적인 생활을 가리키는 말씀으로서 중생한 자는 계속 범죄하지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중생한 자는 그 영혼 속에 새 생명의 원리가 심기워졌기 때문에 죄 가운데 머물러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중생한 자 속에 심기운 새 생명은 하나님만을 향하고 의(義)만을 향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범죄할 수 없는 새 생명의 원리이며 죽거나 없어질 수도 없는 원리이다. 이것은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공로에 근거하여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생명이다. 신학자들은 중생의 이러한 성격을 ‘영혼의 지배적 성향의 변화’라고 말한다.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라는 말은 전통사본에는 옛날 영어성경의 본문과 같이 “그러나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자신을 지키며”라고 되어 있다. 그것은 중생한 자의 합당한 삶을 증거한다. 중생한 자는 범죄하지 않지만, 중생한 자는 자신을 지켜야 한다는 뜻이다. 중생한 자는 범죄치 않는다고 자신을 방임해서는 안된다. 그는 항상 자신을 지키며 범죄치 않기 위해 힘써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한다는 점도 있다.
사람의 마음 속에는 악한 것들이 많다. 이것은 중생한 자에게도 똑같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5:19-21에서 이런 죄악들을 경계해야 할 것을 교훈하였다: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또 그는 고린도후서 7:1에서 말하기를,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고 했다. 우리는 이러한 죄악들로부터 자신을 지켜야 한다.
[19]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두번째로 우리가 아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하나님께 속하여 있다는 사실이다. ‘속한다’는 원어(에크 . . . 에이미)는 일차적으로 ‘께로부터 나온다 혹은 난다’는 뜻이다. 이것은 중생의 근원을 나타낸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하나님께 속하여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온 세상이 악한 자 안에 혹은 ‘사악함 속에’(옛날 영어성경) 처해 있다는 사실도 알아야 할 것이다. 중생은 우리가 죄와 허물로 죽었던 어두움의 세계에서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어 살려 건져내는 구원 사건이다. 온 세상은 이 두 세계로 나누어진다. 하나님의 세계와 죄악된 세계가 그 두 세계이다.
[20]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
세번째로 우리가 아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로 말미암아 참된 자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 안에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중생의 방편을 나타낸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중생을 얻는다. 하나님의 아들을 알고 믿는 것이 곧 중생의 증거요 그를 믿고 그 안에 거하는 것이 곧 구원이다.
사도 요한은 또 예수 그리스도를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고 증거한다. 여기에 예수님의 신성(神性)에 대한 명확한 한 증거가 있다. 그는 신적인 존재로 높임을 받는 정도가 아니시고, 참되신 하나님이시다. 또 그는 우리에게 영생이 되시고 친히 영생을 주시는 구주이시다.
[21]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서 멀리하라.
사도 요한은 끝으로 중생에 합당한 생활의 한 면으로서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서 멀리하라’는 교훈을 남긴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 생활의 근본적 요소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며 순종해야 한다. 그러나 우상은 하나님이 아니면서 하나님처럼 높임을 받는 것이다. 우상숭배는 가장 근본적이고 가장 큰 죄악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모든 우상숭배를 제거해야 한다. 현대인은 인간이나 인간의 지식과 과학이나, 돈이나, 육신의 쾌락 등을 하나님처럼 혹은 하나님 대신에 높이고 가치 있게 여긴다. 이것들은 다 일종의 우상이다. 중생한 성도들은 이런 우상들을 멀리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 만일 우리가 그런 것들을 멀리하지 않고 사랑한다면 우리는 망할 수밖에 없고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본문을 통해 중생에 대해 다시 한번 더 알게 되었다. 중생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부터 나는 일이며 이렇게 중생한 자는 범죄하지 않는다. 즉 죄 가운데 머물러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본문은 우리가 중생한 자로서 또한 자신을 죄로부터 지켜야 하고 우상으로부터 지켜야 함을 교훈한다. 우리는 성령을 따라 행함으로 육신의 죄악된 일들을 다 버려야 한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면서 하나님처럼 혹은 하나님 대신에 높임을 받는 모든 것을 다 배척하고 오직 하나님을 믿고 따르며 그의 뜻만을 순종해야 한다. 그것이 의의 길이요 영생의 길이다.
요한이서
내용 목차
♣ ♣ ♣ ♣ ♣ ♣
1장
진리 안에서 행함 ․․․․․․․․․․․․
73
요한이서의 저자는 사도 요한이다. 이 점에 대하여 초대 교회의 전통은 분명하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150-215년경), 알렉산드리아의 디오니시우스(264년경 사망), 및 키프리안(258년 사망)은 본서신을 사도 요한의 서신으로 인용하였다. 본서신은 아마 주후 85-90년경에 기록되었을 것이다. 본서신의 특징적 주제는 ‘진리 안에서 행함’이다. 아울러 본서신은 우리가 그리스도에 관한 바른 교리를 저버린 이단에 대해 경계해야 할 것을 밝히 교훈하였다(7-11절).
1장: 진리 안에서 행함
1-3절, 문안 인사
본문은 문안 인사인데, 그 가운데 진리 안에서의 성도의 사랑과 교제에 대한 귀한 사실이 증거되어 있다.
[1, 2] 장로는 택하심을 입은 부녀와 그의 자녀에게 편지하노니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요 나뿐 아니라 진리를 아는 모든 자도 그리하는 것은 우리 안에 거하여 영원히 우리와 함께할 진리를 인함이로다.
사도 요한은 자신을 ‘장로’라고 표현한다. ‘장로’라는 말은 나이 든 노인을 암시하는 말로서 사도라는 말보다 더 친근감이 있는 표현일 것이다. 본서신은 사도 요한의 노년에 쓴 것 같다. 사도 베드로도 그의 서신에서 자신을 장로라고 불렀다(벧전 5:1).
본서신의 수신자는 ‘택하심을 입은 부녀와 그의 자녀들’이다. 구원은 곧 하나님의 택하심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자들이다. 어떤 이들은 ‘택하심을 입은 부녀’라는 표현을 교회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부녀’라는 말은 문자 그대로 ‘한 여자’를 가리키는 말로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4절에 ‘너의’라는 단수 인칭대명사와 5절의 ‘부녀여’라는 단수 호격 명사와 13절의 ‘네’와 ‘네게’라는 단수 인칭대명사들은 한 교회를 가리키는 말로서는 부자연스럽다. 그러나 그 여성도와 그의 자녀들은 하나의 작은 교회를 형성한다고도 볼 수 있다.
본문에는 ‘진리’라는 말이 여러 번 나온다. 1절의 ‘내가 참으로’라는 말도 영어성경들처럼 ‘내가 진리 안에서’라고 번역할 수 있다. 사도는 자신을 ‘진리 안에’ 있는 자로 표현하며 다른 성도들을 ‘진리를 아는 자들’로 표현한다. 또 그는 이 진리가 우리 안에 거하며 영원히 그러하다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을 가리킨다. 예수께서는 요한복음 14:6에서 자신을 진리라고 말씀하셨고 요한복음 17:17에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또 바울은 에베소서 1:13에서 구원받은 성도들을 ‘진리의 말씀 곧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것을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은 자들’로 표현하였다. 진리의 내용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시요 그를 믿으면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하나님의 자녀 되는 권세를 얻는다는 약속이다.
성도는 진리를 아는 자들이며 이 진리가 그들 속에 있는 자들이다. 이 진리는 그들 속에 영원히 있을 것이다. 이 진리는 곧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우리와 영원히 함께하실 것이다. 그의 진리도 우리와 영원히 함께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아는 것이 곧 구원이며 영생이다. 예수께서는 요한복음 17:3에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성도는 이 진리 안에서, 이 진리 때문에 서로 사랑하게 되었다. 사도는 ‘택하심을 입은 부녀와 그의 자녀들’을 ‘내가 진리 안에서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표현한다. 또 그는 ‘나뿐 아니라 진리를 아는 모든 자도 그리한다’고 말하며, 그 까닭은 ‘우리 안에 거하며 영원히 우리와 함께할 진리 때문’이라고 말한다. 진리가 우리를 사랑의 줄로 묶었다. 진리가 우리를 한가족과 같은 사랑의 공동체가 되게 하였다. 교회는 세상의 이익 집단과 다르다. 교회는 하나님의 가정이다. 비록 우리가 서로 다른 집에 살고 있을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대가족이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누구든지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그의 형제요 자매이다(마 12:50). 성도의 사랑의 교제에 교회의 교회다운 점이 있다.
[3]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
사도 요한은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나오는 은혜와 긍휼과 평강을 그들에게 기원할 때에도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있기를 기원한다. 우리는 진리로 구원을 얻었고 사랑으로 그 진리를 실천한다. 우리가 진리를 우리 속에 굳게 붙잡고 믿고 확신할 때 그리고 그 진리 때문에 구원받은 다른 이들을 힘써 사랑할 때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더욱 우리와 함께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본문에서 몇 가지 교훈을 찾는다. 첫째로, 우리는 우리가 받은 진리, 우리가 믿은 진리를 가장 귀히 여기며 확신하고 사랑하고 널리 전파하자. 그 진리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시요 성경 말씀이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다.
둘째로, 우리는 우리와 동일하게 진리를 받고 진리로 구원받은 다른 이들을 사랑하자. 우리의 사랑의 이유는 오직 진리 때문이다. 우리는 진리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고 하나님의 한 가족이 되었다. 우리는 그 나라에서 영원히 함께 살 자들이 된 것이다. 천국은 성도들이 참된 사랑으로 사랑하며 영원히 살 곳이다. 천국에 들어갈 자들은 세상에서도 서로 사랑해야 하고, 서로 미워하지 말아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진리와 사랑 안에 거할 때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을 더욱 받아 누리게 될 것이다. 그것은 인생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 받아 누릴 가장 귀한 복이다. 우리가 바로 그런 자들이 되자.
4-6절, 진리 안에서 행함
본문은 신자가 진리 안에서 행함을 보고 기뻐하는 사도 요한의 기쁨을 증거하면서 우리 모두가 진리 안에서 행하는 자가 될 것을 교훈한다. 또 진리 안에서 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대로 사는 것을 뜻하며 그것은 또 다른 말로 서로 사랑하는 것을 뜻한다. 진리와 사랑은 모든 성도에게 필수적인 두 요소이다.
[4] 너의 자녀 중에 우리가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에 행하는 자를 내가 보니 심히 기쁘도다.
본서신은 앞에서 말한 대로 사도 요한이 믿는 여성도에게 보낸 개인적 서신이다. 그러나 그 여성도와 그의 자녀들은 작은 가정 교회를 이룬다고 볼 수도 있다. 여하튼 본서신의 교훈은 한 개인적 가정에 국한되지 않고 모든 시대, 모든 교회, 모든 성도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교훈이다.
그 여성도의 자녀들 중에는 진리대로 행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의 모든 자녀들이 다 잘 믿은 것 같지는 않다. ‘너의 자녀 중에’라는 말은 그 자녀들 중 일부가 잘 믿었음을 암시하는 것 같다. 부모가 잘 믿는다고 자녀들이 자동적으로 잘 믿는 것은 아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다.
진리에 행한다는 말은 진리 안에서 행한다, 진리대로 살아간다는 뜻이다.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킨다. 그래서 사도는 ‘우리가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에 행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아버지께 받은 계명이란 10계명과 성경의 모든 말씀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진리 안에서 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주신 십계명대로, 성경 말씀대로 사는 것을 뜻한다.
사도는 그 여성도의 자녀들 중 어떤 이들이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을 보았다고 말한다. 신앙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우리의 마음의 태도이지만 그것은 우리의 마음 속에만 머물지 않고 다른 이들에게 보여지도록 행동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진리 안에서 행하는지 안 행하는지를 다른 사람들이 알 수 있는 것이다.
사도는 그들이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을 보고 심히 기뻐하였다고 말한다. 그렇다. 죄인들의 심령 속에 이루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일을 보는 것은 하나님의 지극히 큰 기쁨이실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의 심히 큰 기쁨이다. 우리 자신과 다른 이들이 주 예수님을 믿는 은혜를 받았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의 큰 기쁨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성도들을 자신의 기쁨과 자랑이라고 자주 표현하였다(빌 4:1; 살전 2:19, 20). 더욱이, 하나님께 받은 말씀 진리대로 순종하며 사는 것을 보는 것은 목사와 성도들의 큰 기쁨이 아닐 수 없다. 전파된 말씀을 거역하는 것을 보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큰 슬픔이 되지만(빌 3:18), 그것을 받아 그대로 사는 것을 보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큰 기쁨이다.
[5] 부녀여, 내가 이제 네게 구하노니 서로 사랑하자. 이는 새 계명같이 네게 쓰는 것이 아니요 오직 처음부터 우리가 가진 것이라.
사도는 서로 사랑하라는 주의 계명을 강조한다. 서로 사랑하라는 강조는 언제나 필요하고 유익하다. 본서신에 나타난 대로, 그 여성도가 처한 형편은 이단자들의 미혹이 있는 형편이었다. 이단과 오류가 교회 안팎과 성도들 주위에 많이 들어와 있을 때 성도들은 사랑이 식어지기 쉬울 것이다. 주께서도 당신의 재림 직전의 징조들을 말씀하시면서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고 하셨다(마 24:12). 그러나 그런 때일수록 진리를 굳게 붙들고 보수하며 이단과 오류를 배격하는 일 뿐만 아니라, 또한 주님을 믿고 순종하는 자들 간에는 서로 사랑하는 일이 더욱 필요하다.
서로 사랑하는 일은 성도에게 새삼스런 계명이 아니다. 그것은 성도들이 믿기 시작할 때부터 배운 기본적인 내용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을 새 계명으로 남겨 주셨고 또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모든 사람이 우리가 그의 제자인줄 알리라고 말씀하셨다(요 13:34, 35). 참 교회는 예수 믿어 구원받은 후 서로 사랑하는 자들의 모임이다.
[6] 또 사랑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 계명을 좇아 행하는 것이요 계명은 이것이니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바와 같이 그 가운데서 행하라 하심이라.
사도 요한은 진리 안에서 행하는 삶의 필수적인 두 요소를 강조한다. 그것은 서로 사랑하는 것과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사랑을 하나님의 계명들을 따라 행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사랑은 하나님의 계명을 거스려 행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십계명을 범하거나 성경 말씀을 무시하고 부정하고 거역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계명은 우리가 처음부터 들은 바와 같이, 우리가 믿기 시작할 때부터 들은 바와 같이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그 가운데서 행하라’는 말은 ‘사랑으로 행하라, 서로 사랑하라’는 뜻이다. 계명을 순종함과 서로 사랑함, 진리 안에서 행함과 서로 사랑함은 별개의 일이 아니고 둘 다 필요하다. 그것은 둘 다 필수적이다. 여기에 사도 요한의 강조점이 있다.
결론적으로, 4절부터 6절까지는 우리에게 몇 가지 기본적 사실을 교훈한다. 첫째로, 우리는 진리 안에서 행하는 자, 즉 진리대로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진리를 마음으로 믿을 뿐 아니라 그것을 행동으로 나타내어야 한다.
둘째로, 진리대로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행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 말씀을 힘써 읽고 배우며 그대로 실천하기를 힘써야 한다. 그것이 진리대로 행하는 것이다.
셋째로, 진리대로 행하는 것은 또한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중요한 내용이 사랑이다. 주께서는 인간 관계에 관한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서로 사랑하라는 한 마디로 요약하셨다. 우리는 계명을 순종함과 서로 사랑함을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하지 말고 둘 다 지켜야 한다.
요컨대 우리는 진리와 사랑을 둘 다 지켜야 한다. 이단 사설이 난무하는 말세에 우리는 성경적 신앙의 옛길을 보수해야 할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의 심령의 사랑이 식어지지 않도록 힘써야 한다. 오류와 악에 대해서는 단호해야 하지만, 믿고 순종하는 이들 간에는 진실한 성도의 교제와 사랑을 힘써 실천해야 하는 것이다.
7-13절, 미혹하는 자를 물리치라
본문은 미혹하는 자 곧 이단의 정체를 말하고 우리가 바른 교훈 안에 거하고 이단자를 받아들이지 말 것을 말한다.
[7] 미혹하는 자가 많이 세상에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것이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미혹하는 자는 속이는 자라는 뜻으로 이단자를 가리킨다. 이단은 마귀의 활동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무엇을 더하거나 그 말씀을 빼거나 혹은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시키는 것이다(갈 1:8, 9; 딤후 2:17, 18). 벌써 사도 시대에 많은 이단자들이 교회 안팎에 나타났다. 사도는 이제 그들의 정체에 대해 언급한다.
본절에 언급된 이단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셨음을 부인하는 자들이었다. ‘임하심을’이라는 원어는 현재분사이지만 요한일서 4:2, 3에서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된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시다.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말씀이라고 불리우신 그는 태초부터 계셨던 하나님이시다(요 1:1). 그가 때가 되어 사람이 되신 것이었다.
본래 신적 인격 즉 하나님이셨던 그가 사람이 되신 것이다. 그렇다고 성육신 하신 예수님은 두 인격이 아니시다. 그는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본래 신적 인격이셨던 그가 인간의 본질을 취하셨다. 그럼으로써 그는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 되셨다. 신성과 인성, 신적 본질과 인적 본질이 결합되셨으나 두 분이 아니고 한 분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21문답은 진술하기를,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유일한 구속자(救贖者)는 주 예수 그리스도이신데, 그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이시지만 사람이 되셨고 그래서 두 구별된 본질들에 있어서 하나님과 사람이시며 한 분이셨고 영원히 계속 그러하시다”라고 하였다. 이 지식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지식이요 성경적 지식이다. 이 지식을 버린 목사들은 다 미혹하는 이단들이다.
[8] 너희는 너희를 삼가 우리의 일한 것을 잃지 말고 오직 온전한 상을 얻으라.
‘우리의 일한 것’이란 사도들이 행한 전도의 일과 그로 인해 받은 구원을 가리킬 것이다. 전통사본에는, “너희는 너희를 삼가 우리가 우리의 일한 것을 잃지 않고 온전한 상을 얻도록 하라”라고 되어 있다. 그러면 여기에 ‘온전한 상’은 전도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상을 뜻한다. 고린도전서 3:5-8,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 저희는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 심는 이와 물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사도 요한은 편지를 받는 그 여성도와 그의 자녀들이 이단에 미혹되지 않고 믿음을 지킴으로 자신의 전도 사역이 헛되지 않고 마지막 날에 주께 상을 얻는 일이 되게 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9] 지내쳐 그리스도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마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이 사람이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
‘지내쳐’라는 말이 전통사본에는 ‘이탈하여’ 혹은 ‘범죄하여’라는 말(파라바이노)로 되어 있다. 성도들을 미혹하는 이단은 그리스도의 바른 교훈 즉 성육신의 교리 안에 거하지 않는 자이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 아버지를 모신 자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바른 교훈 혹은 교리 안에 거하는 사람만이 아버지와 아들을 모신 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내신 구주이시기 때문에 그를 영접하는 자는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요 그를 거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절하는 것이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바른 신앙고백을 가질 때, 우리는 그가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아들을 둘 다 영접하고 섬기는 자임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이단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교리를 부정하는 자이다. 요한일서에서도 사도는 이 점을 강조하였다. 요한일서 2:22, 23, “거짓말 하는 자가 누구뇨?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뇨?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 4:1-3,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이제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우리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정하는 이단을 분별하고 그리스도의 바른 교리 안에 거해야 한다.
[10, 11]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예하는 자임이니라.
‘이 교훈[즉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교리]을 가지지 않은 자’는 이단자를 가리킨다. 사도는 ‘이런 자는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고 말한다. 이단들은 사탄에게 속하기 때문에 참 교회가 그들을 용납해서는 안된다. 로마서 16:17, 18,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교훈[너희가 배운 교리=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 이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의 배만 섬기나니 공교하고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 디도서 3:10,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
오늘날 교회의 현실에 적용해보자. 기독교 역사상 가장 오래되고 거대한 이단은 교황을 머리로 한 로마 천주교회의 사상과 조직체이다. 또한 현 시대에 가장 심각한 이단은 기독교계 전체를 부패시킨 자유주의 신학이다. 그러므로 자유주의 신학자들을 용납하는 자유주의 혹은 포용주의 교회들은 잘못이다. 또 자유주의 신학과 천주교회를 배격하지 않는 교회연합운동은 잘못이다. 그러므로 참된 교회들과 성도들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을 배격해야 하고 그들을 용납하는 교회들을 책망해야 한다.
[12, 13] 내가 너희에게 쓸 것이 많으나 종이와 먹으로 쓰기를 원치 아니하고 오히려 너희에게 가서 면대하여 말하려 하니 이는 너희 기쁨을 충만케 하려 함이라. 택하심을 입은 네 자매의 자녀가 네게 문안하느니라.
결론적으로, 본문은 우리에게 몇 가지 분명한 교훈을 준다. 첫째로, 우리는 미혹하는 자들인 이단을 분별해야 한다. 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정하는 자들이다. 둘째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바른 교리 안에 거해야 한다. 우리는 성경이 증거하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사실들을 다 믿어야 한다. 우리는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파악하고 그 안에 거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그 신앙을 이탈한 한 것이 사탄의 미혹이다. 셋째로, 우리는 미혹하는 이단자들을 용납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그들을 집에 들이거나 그들에게 인사도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그의 악한 일에 동참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요한삼서
내용 목차
♣ ♣ ♣ ♣ ♣ ♣
1장
진리 안에서 행함 ․․․․․․․․․․․․
85
요한삼서는 사도 요한이 성령의 감동 가운데 사랑하는 가이오에게 쓴 개인적 성격의 편지로서 원문 신약성경 중 가장 짧은 책이다. 본서신은 주후 85-90년경에 기록되었을 것이다. 본서신의 특징적 주제도 요한이서와 같이 ‘진리 안에서 행함’이다. 또 본서신은 사도 요한에게 반항적인 말을 하고 복음전도자들을 영접하지 않고 영접하는 자들을 핍박하기까지 했던 디오드레베라는 사람을 언급하면서 그런 행위를 본받지 말아야 할 것을 교훈하였다.
1장: 진리 안에서 행함
1-4절, 사도의 간구와 기쁨
본문은 가이오에 대한 사도 요한의 간구와 기쁨에 대해 말하고 있다.
[1] 장로는 사랑하는 가이오 곧 나의 참으로 사랑하는 자에게 편지하노라.
사도 요한은 자신을 장로라고 표현한다. 이 표현은 그의 나이가 많음을 보이는 것 같다. 또 요한은 가이오를 ‘사랑하는 가이오’ 또는 ‘진리 안에서 사랑하는 자’라고 표현한다. ‘참으로’라는 말은 ‘진리 안에서’라고 번역할 수 있다. 2절과 5절에서도 그는 가이오를 ‘사랑하는 자’라고 표현한다. 교회는 성도들의 모임이며 성도들은 진리 안에서 서로 사랑해야 하는 자들이다. 모범적 교회는 성도들이 진리 안에서 서로 사랑하는 교회이다. 참 사랑의 성격은 사도 바울의 고린도전서 13장에 잘 증거되어 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4-7).
[2]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사도 요한은 가이오의 영혼이 잘되는 것에 근거하여 그를 위해 간구한다. 영혼이 잘되는 것은 성도에게 가장 귀한 부분이다. 영혼이 잘된다는 말은 믿음으로 바로 사는 것을 말한다. 성도에게는 믿음이 견고하게 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죄와 불결함을 버리고 천국을 소망하며 기쁨과 평안 가운데 사는 것보다 더 복된 삶이 없다.
그것이 에녹같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며(창 5:22) 노아같이 의롭고 완전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다(창 6:9). 노아는 하나님의 명하시는 대로 다 준행하였다(창 6:22). 그것이 요셉이 하나님과 동행한 삶이요 특히 범죄치 않으려고 애쓴 삶이다(창 39:9-12). 그것이 신명기 28장에 말씀한 대로 순종의 삶이요, 시편 1편에 말씀한 대로 악을 버리고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의 삶이다. 그것이 잠언 3장에 말씀한 대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떠나는 삶이다. 그것이 주께서 말씀하신 대로 썩는 양식을 위해 일하지 않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 일하는 것이며(요 6:27), 바울이 말한 대로 육체를 위해 심지 않고 성령을 위해 심는 자의 삶이다(갈 6: 8).
사도 요한은 가이오가 그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기를 간구한다. ‘범사’는 그의 생활의 모든 부분들을 가리킨다. 그것은 가정과 자녀들의 문제, 직장과 사업의 문제, 젊은이들의 학업, 취업, 결혼 등의 문제 등을 다 포함한다. 성도가 영적 생활을 잘하면 우리는 그의 범사가 복되고 형통하게 될 것을 기대할 수 있다. 요셉이 하나님과 동행하며 범죄치 않으려고 애썼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범사에 형통한 삶을 주셨다(창 39:23). 신명기 28장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자가 얻을 자녀의 복, 물질의 복, 건강의 복 등에 대해 말하였다. 또 시편 1편도 우리가 악을 버리고 말씀을 주야로 묵상할 때 우리의 모든 일들에 형통함을 누리게 될 것을 말하였다. 범사에 잘됨은 확실히 영혼의 잘됨에서 시작된다. 그러므로 성도가 믿음의 생활을 바르게 잘하는 것이 복된 삶의 길이다.
사도 요한은 또한 가이오가 강건하기를 간구한다. 건강도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다. 신명기 28장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할 때 여러 가지의 질병들을 얻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며 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건강을 주실 것이다. 잠언 3:7, 8,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 이것이 네 몸에 양약이 되어 네 골수로 윤택하게 하리라.” 물론 모든 질병이 다 죄의 징벌은 아닌 것 같다. 하나님께서 단지 우리의 인격 훈련을 위해 주시는 질병도 있는 것 같다(고후 12:7).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세상 사는 동안 얼만큼 건강이 필요한지 잘 알고 계신다. 그는 그의 기쁘신 뜻 가운데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실 것이다.
[3, 4]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거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
사도 요한에게 온 형제들은 가이오에게 있는 진리에 대해 증거하였다. 즉 그가 진리를 받아들였고 진리 안에서 행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준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믿는 우리 모두에게 공통적인 진리를 주셨다. 그것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의 진리인 복음이다. 이제 우리는 이 진리 안에서 살므로 다른 이들이 우리의 삶을 증거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진리 안에서의 삶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삶이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삶이다. 만일 우리가 믿는다고 하면서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행위가 수반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믿음은 죽은 믿음일 것이다. 우리가 참으로 믿는 자라면, 우리는 교만을 다 버리고 음란과 불결함을 다 버리고 미움과 다툼을 다 버리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서로 사랑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사도 요한은 가이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는 것을 형제들로부터 듣고 심히 기뻐하였다. 그는 성도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는 말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다고 말한다. 성도들이 성경 진리 안에서 행한다는 사실은 확실히 목사에게 큰 기쁨이요 성도들 상호간에도 큰 기쁨이 될 것이다. 우리의 가장 큰 기쁨은 하나님의 진리를 읽고 듣고 배우며 그 진리를 믿고 그 안에서 사는 것이다. 이것이 곧 우리의 영혼이 잘되는 일이기도 하다. 이것보다 더 귀하고 기쁜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결론적으로, 1절부터 4절까지에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찾는다.
첫째로, 우리는 참된 교회의 모습대로 진리 안에서 서로 사랑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다. 우리의 냉랭한 마음에 참된 사랑이 불붙어 오르기를 기도하자.
둘째로, 우리는 우리의 영혼이 잘되는 일에 힘쓰자. 즉 영적 생활에 힘쓰자. 그것은 경건의 생활, 믿음의 생활, 순종 생활, 성결 생활이다. 사람은 밥만 먹고 돈만 벌고 사는 존재가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야 하는 존재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쁘신 뜻 가운데 우리에게 범사에 잘되고 강건한 복을 주실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진리 안에서 행하는 자들이 되자. 우리는 성경의 진리를 알고 믿는 것 같지만, 그 진리대로 살지 못하는 모순된 삶을 살지 말고 진리대로 순종하고 실천하며 사는 참된 신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5-8절, 가이오의 선행
본문은 사도 요한이 성도들과 주의 종들에 대한 가이오의 신실하고 선한 행위에 대해 칭찬하고 격려하는 내용이다.
[5] 사랑하는 자여 네가 무엇이든지 형제 곧 나그네 된 자들에게 행하는 것이 신실한 일이니.
가이오는 형제들과 나그네들에게 신실하게 행하였다. ‘형제 곧 나그네 된 자들’이라는 원어는 ‘형제들에게와 나그네들에게’라고 되어 있다. ‘형제들’은 주의 종들을 포함하여 성도들을 가리키는 일반적 명칭이며, ‘나그네들’은 아마 순회전도자들을 가리킬 것이다. 가이오는 다른 성도들에게나 주의 종들에게나 순회전도자들에게나 모든 일에 있어서 신실하게, 참되게, 믿을 만하게 행동하였다. 우리는 가이오의 선행을 본받아야 한다. 우리는 모든 일에 있어서, 모든 믿는 자들에게, 그리고 심지어 믿지 않는 자들에게까지도 참되고 신실한 일, 믿을 만한 일을 행하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6] 저희가 교회 앞에서 너의 사랑을 증거하였느니라. 네가 하나님께 합당하게 저희를 전송하면 가하리로다.
가이오의 영접을 받고 사랑을 입은 성도들과 종들은 교회 앞에서 그의 사랑을 증거하였다. 가이오의 행위는 참으로 믿음 안에서의 행위이었고 사랑의 행위이었다. 그것은 교회 앞에서 엄숙히 증거된 행위이었다. 그것은 가식이나 위선이 아니었다. 저들은 다 하나님 앞에서 사는 자들이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들이었다. 거기에는 진실만이 있고 거짓이 있을 수 없는 곳이다.
이제 사도는 가이오가 현재 잘하고 있지만 저희를 전송할 때도 ‘하나님께 합당하게’ 전송하는 것이 옳다고 말한다. ‘하나님께 합당하게’라는 말은 우리가 다른 성도를 대할 때나 주의 종들을 대할 때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을 보여준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자녀들이며 하나님의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외모를 따라 인간에게 대하듯 하지 말고 하나님께 대하듯 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도 종들에게 교훈하기를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하고 사람에게 하듯하지 말라”고 하였다(골 3:23).
[7] 이는 저희가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가서 이방인에게 아무것도 받지 아니함이라.
가이오가 저 순회전도자들을 하나님께 합당한 태도로 영접하고 전송하는 것이 옳은 까닭은 저들이 주의 이름을 위하여 댓가 없이 일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주의 이름을 위하여’라는 말은 ‘주의 이름을 증거하기 위하여’ 혹은 ‘주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뜻이다. 참된 전도자들은 물질적 댓가를 기대하지 않고 일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삯군이 아니다. 전도 사역, 말씀 사역은 장사가 아니다. 주께서는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고 말씀하셨다(마 10:8). 물론 그는 또한 ‘일꾼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부언하기도 하셨다(마 10:10).
[8] 이러므로 우리가 이같은 자들을 영접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우리로 진리를 위하여 함께 수고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함이니라.
성도들이 참된 전도자들과 주의 종들을 영접하는 것은 마땅하다. 주께서는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라고 말씀하셨다(마 10:40). 성도들이 전도자들을 영접하는 것이 마땅한 것은 저들로 하여금 진리를 위해 함께 수고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함이다. 우리는 직접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되지 못할지라도 기도와 헌금으로써 그리고 기회 있을 때 전도자들을 영접하고 사랑하고 또 하나님께 합당한 태도와 예절로써 그들을 전송함으로써 진리를 위한 수고에 동참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5절부터 8절까지에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찾는다.
첫째로, 우리는 주의 종들이나 다른 성도들에게 신실하게, 즉 참되고 진실하고 믿음직하게, 그리고 사랑으로 행하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생명 있는 믿음은 진실하고 선한 행위로 나타난다.
둘째로, 우리는 주의 종들이나 다른 성도들에게 하나님께 대하듯이 대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서로 존중함과 예절과 서로 복종함을 의미한다. 에베소서 5:21,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셋째로, 우리는 진리를 위해 함께 수고하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진리가 온 세상에 전파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복음 진리로 죄인들을 구원하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전파하는 일에 자신을 헌신하는 것보다 더 귀한 일은 없다. 그러나 성도들은 비록 자신들이 전임 사역자가 되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렇게 헌신한 참된 전도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합당한 존경과 예절과 복종으로 대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이 진리를 위해 함께 수고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또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과 기쁘심을 돌리는 일이 될 것이다.
9-12절, 디오드레베와 데메드리오
본문은 디오드레베의 교만과 악함에 대해 지적하고 데메드리오의 진실한 믿음과 선함에 대해 증거하면서 우리가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아야 할 것을 교훈한다.
[9, 10] 내가 두어자를 교회에게 썼으나 저희 중에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가 우리를 접대하지 아니하니 이러므로 내가 가면 그 행한 일을 잊지 아니하리라. 저가 악한 말로 우리를 망령되이 폄론하고도 유위부족하여 형제들을 접대치도 아니하고 접대하고자 하는 자를 금하여 교회에서 내어 쫓는도다.
사도 요한은 디오드레베의 악함에 대해 몇 가지로 지적하고 증거한다. 첫째로, 그는 그를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표현한다. 사람 속에는 교만과 명예심이 있다. 이것은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알아주기를 바라고 다른 사람들보다 높아지기를 원하는 마음이다. 이것은 인간의 죄악성의 본질적 요소이다. 마귀는 교만함으로 타락하였다. 그러나 주께서는 교만과 명예심을 여지 없이 정죄하신다. 교만한 자는 멸망의 문 앞에 서 있는 자이다. 회개치 않으면 그는 멸망에 떨어질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미워하시고 물리치신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히 자기를 낮추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높이신다(마 23:11, 12).
둘째로, 사도 요한은 디오드레베가 악한 말로 자기와 동료 사역자들을 부당하게 비난하였다고 증거한다. ‘망령되이 폄론하다’는 말은 ‘부당하게 비난하다’는 뜻이다. 우리는 다른 성도에 대해 정당한 비난도 조심하고 삼가야 한다. 주께서는 우리에게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마 7:1). 하물며 부당한 비난이야 더더욱 합당치 않다. 그것도, 진실한 복음 사역자들에 대한 부당한 비난은 매우 악한 일이다. 주께서는 선한 자는 그 쌓은 선에서 선한 말을 하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한 말을 한다고 말씀하셨다(마 12:35). 또 잠언 12:18은 말하기를, “혹은 칼로 찌름같이 함부로 말하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 같으니라”고 하였다. 야고보서에는 말에 실수가 없는 자가 온전한 자라고 말씀했다(약 3:2).
셋째로, 사도 요한은 그가 자신과 자신의 형제들 즉 주의 종들을 영접하지 않았고 심지어 영접하려 하는 자들을 금하고 교회에서 내어쫓기까지 하였다고 말한다. 이것은 주님을 배척한 참으로 악한 행동이었다. 주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고 하셨다(마 10:40). 또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 교회 안에 다른 양들을 밀뜨리는 염소들에 대해 “너희가 옆구리와 어깨로 밀뜨리고 모든 병든 자를 뿔로 받아 무리로 밖으로 흩어지게 하는도다”라고 책망하셨다(겔 34:21). ‘유위부족하여’라는 말은 ‘오히려 부족하여’라는 뜻이다.
[11]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
사람에게는 모방하는 심리가 있다. 선한 일을 보고 그것을 모방하기도 하지만, 악한 일을 보고 그것을 모방하기도 한다. 성도는 죄에서 구원을 받은 자로서 악을 버리고 선을 택해야 한다. 우리는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에게 악한 본과 영향을 주는 악한 것들은 무엇이든지 끊어버려야 한다. 내가 세상 친구에게 복음을 전하고 선한 행실을 보인다면 세상 친구를 끊어버릴 것이 없지만, 반대로 세상 친구가 나에게 악한 본과 영향을 준다면 그 친구를 끊어버려야 한다. 고린도전서 15:33,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내가 텔레비전이나 비디오나 컴퓨터 인터넷을 유익한 문화적 도구로서 절제 있게 사용한다면 그것을 끊어버릴 필요가 없지만,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죄악된 것들로 나의 생각과 감정과 마음을 더럽히고 자극한다면 성도는 그것을 끊어버려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악한 것은 보지도 말고 듣지도 말고 관계하지도 말아야 한다.
악과 선의 근원과 소속이 다르듯이, 악을 행하는 자와 선을 행하는 자의 근원과 소속이 다르다.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이며 하나님께 속한다. 성도의 선행은 그가 중생한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거가 된다. 그러나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자이다. 사람이 계속 죄 가운데 거하며 그 죄를 회개하고 돌이키지 않는다면 그는 구원받지 못한 자일 것이다. 요한일서 3:9, 10,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12] 데메드리오는 뭇사람에게도, 진리에게도 증거를 받았으매 우리도 증거하노니 너는 우리의 증거가 참된 줄을 아느니라.
사도 요한은, 다른 한편, 데메드리오의 진실한 믿음과 선함에 대해 말한다. 그는 데메드리오가 모든 사람에게 증거를 받았다고 말한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데메드리오의 믿음과 선함에 대해 증거하였다는 뜻이다. 그는 또 데메드리오가 진리에게도 증거를 받았다고 말한다. 진리에게 증거를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진리에 비추어 볼 때 진실한 믿음과 행위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덧붙여 그는 우리도 그에 대해 진심으로 증거한다고 말한다. 이와 같이, 데메드리오는 진실한 믿음과 선행을 가진 성도임이 여러 모로 증거되었다. 이것은 참으로 기쁘고 복된 증거이다. 오, 우리 모두가 다 이런 복된 증거를 가지게 되기를!
13-15절, 마치는 인사
[13-15] 내가 네게 쓸 것이 많으나 먹과 붓으로 쓰기를 원치 아니하고 속히 보기를 바라노니 또한 우리가 면대하여 말하리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여러 친구가 네게 문안하느니라. 너는 각 친구 명하에 문안하라.
사도 요한은 성도들과 속히 만나 얼굴을 맞대고 말하기를 원하였다. 참된 성도의 교제는 얼마나 사모할 만한 것인지! 그는 또 평강을 기원한다. 근심과 불안정의 요소들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평강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시는 큰 복이다. 그는 또 여러 친구들의 문안을 언급하며 가이오도 그곳의 친구들에게 일일이 문안해 줄 것을 요청한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열고 생각을 낮추고 참된 사랑을 가지고 서로 교제하고 서로에게 평강을 기원하고 문안하자.
결론적으로, 9절부터 15절까지에서 우리는 전혀 대조되는 두 인물에 대해 들었다. 으뜸 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는 악한 말로 복음 사역자들을 부당하게 비난하고 그들을 영접하지 않고 영접하려는 자를 금하고 교회에서 내어쫓기까지 한 자이었다. 그러나 데메드리오는 모든 사람에게도, 진리에게도, 또 사도 요한 일행에게도 증거를 받은 진실한 믿음과 선함을 구비한 자이었다. 우리도 그 둘 중의 어느 하나에 가까울 것이다. 우리는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아야 한다. 악한 것은 끊어버려야 한다.
마태복음 5:28-30,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그러므로 악한 친구는 멀리하고 악한 물건은 버려야 한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 중심으로 경건하고 거룩하게 살기를 힘써야 한다. 우리 속에는 악한 성질과 성향이 있다. 그것들이 우리를 실수와 연약과 범죄의 자리로 이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들을 자극하고 충동하는 모든 것들을 끊어버리고 멀리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범죄한 일들과 본성의 죄악성을 진실히 회개하고 그것들을 다 버리고 성령을 따라 삶으로써 의와 선의 열매를 맺기를 결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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