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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요한 계시록에서의 종말론적 교회론

에반젤(복음) 2019. 11. 9. 13:48




  

요한 계시록에서의 종말론적 교회론

이필찬 교수

본 글의 목적은 요한 계시록에서 교회에 대해 무엇이라 말하는지 귀를 기울여 보고 그것을 오늘날 한국 교회에 적용해 보자는 데 있다. 요한 계시록에서 교회관을 고찰하는 것은 매우 의미있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요한 계시록을 읽을 때 주로 미래에 종말이나 그리스도의 재림이 어떻게 일어날 것인가에 대한 관심만을 기울여 왔지 교회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바는 무관심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무관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결국 요한 계시록이 본래 가지고 있었던 풍성한 내용들 중 상당 부분을 잃어 버리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조금만 주의 깊게 계시록을 관찰해 보면 요한 계시록은 특히 교회에 대한 여러 다양한 언급들로 가득차 있으며 그것은 그것을 처음 받았던 1세기 말의 그리스도인들 뿐만 아니라 역사상의 모든 교회와 그리고 오늘날의 모든 교회에게 많은 유익을 줄 수 있도록 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요한 계시록에서 교회에 대한 묘사는 신약의 다른 성경과 비교해 볼 때 그 표현 기법에 있어서 매우 독특하다. 이는 유대 묵시문학적 전통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이 매우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다. 묵시문학의 특징중 가장 중요한 것은 공간적 그리고 시간적 초월성이다. 여기에서 공간적 초월과 시간적 초월은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요한 계시록은 이러한 두 측면의 초월성, 다시말해서 공간적 초월로서의 하늘과 시간적 초월로서의 종말을 근간으로 하여 교회를 설명한다. 그것은 교회는 현재에 전투하는 교회로서 이 땅에 존재하지만 동시에 승리한 교회로서 하늘에 존재하며 그 하늘에서 교회는 종말을 경험한다 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것이 요한 계시록에 나타난 교회의 모습이다.


이러한 교회의 모습을 추론하기 위해서 먼저 최종적인 미래에 교회는 어떠한 모습으로 나타날 것인가에 대해 살펴보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이를 잘 보여 주고 있는 것이 바로 21:9-22:5이다. 많은 경우에 이 부분을 하늘의 천국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천국을 보고 왔다는 간증을 들어 보면 이 본문에 근거하여 '내가 본 천국'은 열두 진주문과 열두 보석을 가진 열두 기둥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과연 이 본문이 그러한 하늘에 존재하는 천국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한마디로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이 본문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먼저 이 본문은 새 예루살렘에 대한 묘사라는 것과 그리고 그 새 예루살렘은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묘사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하는 것은 너무나도 중요하다.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21:2)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21:9)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신부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교회 외에 다른 것을 의미할 수 있는 가능성은 전혀 없다. 그렇다면 21:9-22:5 까지는 '내가 본 천국' 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부 곧 교회가 종말에 어떠한 축복을 경험할 것인가에 대한 묘사인 것이다. 새 예루살렘이 교회를 상징하고 있다면 새 예루살렘을 묘사하는 대부분의 요소들도 또한 상징적으로 이해해야 하는 당위성이 주어진다. 여기에서 새 예루살렘은 대한 묘사들은 새 예루살렘이라는 도시의 건축적 요소와 종말에 회복하게 될 새 예루살렘 안에서 일어날 일에 대한 구약의 예언을 배경으로 하여 그려지고 있다.


새 예루살렘의 요소로서 첫번째로 언급되는 것은 성벽이다. '성벽은 그 치수가 크고 높다' 라고 묘사된다 (12절). 그 높이가 144 큐빗 (사람의 치수 = 천사의 치수: 17절) 이다. 이는 약 70 미터정도 되는 높이다. 이 치수는 실제로 크고 높은 것이지만 그러나 도시의 장과 고와 곽이 12,000 스타디온 (1,500 마일) 이라는 사실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형편없이 작은 치수이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치수로 성벽이 높고 크다고 했는가? 먼저 저자가 성벽의 치수로서 144 큐빗이라는 숫자에 집착하고 있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144는 12 x 12 로서 약속으로서의 구약의 교회와 성취로서의 신약의 교회가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백성을 이루고 있음을 보여 준다. 저자는 이 성벽을 통해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온전한 백성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리고 싶은 것이다. 이러한 의도는 성벽에 함께 붙어 있는 12 기둥에 새겨진 열두 사도의 이름과 열두 진주문에 쓰여진 열두 지파의 이름을 통해서 더욱 확증이 되고 있다. 이러한 목적과 더불어 저자는 그 성벽이 크고 높다는 표현을 통해 도시가 완전 (complete) 하고 완성 (finished) 된 것이며 완전한 안전 (security) 과 장엄함 (magnitude) 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 주려고 하고 있다. 더 나아가서 성벽은 Jasper 로 장식되어 있다 (18절). 이는 종말에 교회가 하나님의 영광스러움과 하나님의 임재로 충만할 것임을 상징한다 (참조 4:3).


두번째로 새 예루살렘의 성벽은 12 문들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서 12 문은 성벽의 존재처럼 외부로부터 계속적인 출입을 위한 입구로 간주할 수 없다. 새 예루살렘에서 열두문과 그 열두 문에 새겨진 열두 지파의 이름들은 겔 48:30-35 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에스겔의 비젼은 각 지파가 땅의 분배에 있어서 그것에게 할당된 충분한 몫을 가지게 되며 예루살렘으로 출입을 위한 각 지파자신의 입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 전체가 하나님의 임재의 자리에 들어갈 동등한 권리와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 동등한 권리에 대해 확신을 갖는다. 이러한 패턴이 요한 계시록에도 적용된다. 그렇다면 요한 계시록에서 12 문은 미래의 새하늘과 새 땅에 서있는 요한의 시점에서 이러한 영광스럽고 놀라운 하나님과의 완전한 교제로 들어갈 풍성한 기회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12문이 항상 열려 있다 (25절) 는 묘사는 이러한 사실을 더욱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셋째, 열두 문에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대표하는 열두 지파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12절) 그리고 성벽의 열두 기초석에는 신약 교회의 기초인 열두 사도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14절). 이는 새 예루살렘이 약속으로서의 구약 백성과 그 성취로서의 신약백성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여기에서 왜 열두 지파는 열두 문에 새겨져 있는 것으로 열두 사도는 열두 기초석에 새겨져 있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는가? 라는 질문이 가능하다. 앞에서 언급했던 것 처럼 열두개의 문에 새겨진 열두 지파의 이름은 에스겔 48:30-35의 것을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신약에서 12 사도는 교회의 기초로서 묘사된다 (엡 2:20). 그러므로 열두 문에 열두 지파의 이름이 그리고 열두 기초석에 열두 사도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것이 자연스럽다.


넷째, 새 예루살렘에서는 하나님과 그리스도 자신이 성전이 되신다 (21:22). 여기에서 먼저 성전 건물이 없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성전 건물이 없는 대신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성전되신다 (참조 21:3). 이는 요한 계시록이 기록될 당시의 상황에서 엄청나게 충격적인 메시지가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요한 계시록의 대부분의 독자들이 성전의 멸망 (AD 70) 을 경험하였으며 그들은 성전 재건을 열망하는 분위기 가운데 휩싸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한이 기대하는 새 예루살렘에는 성전이 없다. 대신에 하나님과 그리스도 자신이 성전이 되신다. 그렇다면 건물로서의 성전이 없는 것이지 성전 자체이신 하나님 자신이 성전되시므로 성전은 엄연히 존재한다. 이는 새 예루살렘이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교회를 상징하며 (21:2, 9)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가운데 장막을 치고 함께 거하실 것이라는 말씀 (21:3) 에서 이러한 사실이 이미 분명하다. 그러나 여기에서 성전 없음을 분명하게 명시하고 대신 하나님과 그리스도 자신이 성전이 된다는 것을 선포하고 있는 것은 요한이 그당시 유대 사회에 현저하게 보편화 되어 있는 성전의 재건에 대한 열망을 의식하여 그것에 기독론적으로 대응하고 그리고 구속사적인 절정으로서 새 예루살렘을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섯째, 새 예루살렘의 중요한 부분이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21:11, 18, 19, 21). 여기에서 주의할 것은 보석 하나 하나 마다 의미를 부여하여 풍유화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환상 전체의 내용과 상충된다. 보석에 대한 의미는 전체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보석은 전체적으로 "거룩한 도시, 새 예루살렘의 영광, 순결성, 아름다움 그리고 소중성" 을 나타내 주고 있다. 21:2 과 관련해서 이러한 보석의 기능은 남편을 위해 단장한 신부의 아름다움을 더욱 강화시켜 준다.
이사야 54장은 이런 개념을 구약적 맥락에서 보여주고 있다. 이사야 54:4-6 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남편으로서 묘사된다. 이사야 54:9-10 에서 하나님의 아내되는 이스라엘의 회복이 새 예루살렘의 재건에 의해 표현되고 있다. 그리고 이사야 54:11-12 에서는 이러한 예루살렘의 재건은 예루살렘이 여러가지 종류의 보석들로 장식되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남편으로서 아내된 이스라엘의 단장을 통한 이스라엘의 회복을 약속하신다. 이러한 말씀을 배경으로 하여 볼 때 계시록에서 새 예루살렘이 여러 종류의 보석으로 장식된 것은 어린양 예수의 신부로서의 새 예루살렘을 순결과 아름다움으로 단장시키려는 목적을 갖는 다는 사실이 더욱 지지를 받고 있다.


보석이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교회의 단장에 대한 상징외에 또 다른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계 21:11절 에서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지고 있으며 벽옥과 같이 맑다고 하였다. 이는 4:3 에서 보좌에 있는 신적 현현의 묘사를 연상시킨다. 그렇다면 교회는 모든 부분에서 하나님의 속성을 반영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히 빛나는 것으로 보여진다. 또한 열두 사도의 이름이 쓰여 있는 열두기둥이 열두가지 종류의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20).
더 나아가서 구약에서 보석에 대한 언급들을 배경으로 할 때 보석의 구속사적 의미를 파악 할 수 있다. 성전 모티브를 포함하는 출 28:17-20은 대제사장의 가슴에 있는 보석들의 이름들을 나열한다. 이 보석들의 종류는 계 21:19-20과 거의 비슷하다. 그리고 에덴 모티브를 내포하는 에스겔 28:13 은 출 28:17-20 과 비슷한 보석의 종류를 나열하고 있다. 사 54:11-12 또한 출 28:17-20 과 겔 28:13 과 비슷한 종류의 보석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새 예루살렘 모티브를 담고 있다. 여기에서 보석 모티브는 새 예루살렘과 성전과 에덴을 서로 밀접하게 관련시키고 있다. 다시 말해서 모든 구속사에 있어서 핵심적으로 기대되어 왔던 성전과 에덴의 궁극적 실체가 새 예루살렘, 즉 새창조에서의 하나님의 백성의 삶에서 완전하게 드러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여섯째, 나라와 왕들이 그 영광을 가지고 새 예루살렘으로 들어 올 것이라고 한다 (21:24-26; cf. 22:2). 이는 만국이 예루살렘으로 순례의 길을 걸을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새 예루살렘에로의 만국의 순례는 구약 (사 2:2-4; 14:1-2; 60:1-4; 슥 2:11; 14:16) 에서 언급되고 있는 종말론적 축복중 하나이다. 구약에서의 순례는 두가지 중요한 성격을 갖는다. 첫째로 구속적 성격으로서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목적의 완성을 의미하고 두번째로 중심성 (centrality) 으로서 새 예루살렘이 우주의 중심임을 의미한다. 이 두가지 목적이 새 예루살렘에서 성취된다. 중심성에 관한한 나라들이 도시의 빛으로 걷고 그리고 땅의 왕들이 그들의 영광을 그것 안으로 가지고 온다 (21:24-26). 이것은 물론 왕들이 문자적으로 새 예루살렘으로 들어온다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러한 중심성에 대한 언급은 새 예루살렘에서 구약의 종말론적 약속의 성취가 궁극적으로 완성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목적을 갖는다. 구속성 에 있어서 새 예루살렘에 있는 나무들의 잎파리들이 만국을 회복시키기 위해 존재한다 (22:2) .


끝으로, 새 예루살렘인 종말적 교회 공동체의 삶에서 에덴의 완전한 회복을 통해 첫 창조의 목적이 완전히 회복된다 (22:1-5; 참조 21:1-5). 구약적-유대적 전통에 의하면 새 에덴은 항상 종말론적 축복으로서 새 예루살렘과 공존한다. 왜냐하면 종말론적 완성은 첫 창조의 회복이라고 여겨져 왔기 때문이다.
먼저 생명수 강물의 출발점을 비교하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창세기의 에덴동산에서는 에덴동산 꼭대기에서 강물이 흐른다. 에스겔 47에서는 성전에서 강물이 흘러 나온다. 계시록 22:1에서는 그 강물이 하나님의 보좌에서 흘러 나온다. 이러한 강물의 원천의 변화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에덴동산과 에스겔의 성전을 통해 기대했던 바가 새 예루살렘에서 온전히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새 예루살렘에서는 에덴 동산도 아니고 성전도 아닌 하나님 자신이 당신의 백성과 함께 있어 생명수 샘물의 원천이 되셨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생명수 강물의 흐름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해진 하나님의 나라의 생명이 계속적으로 유입되고 있다는 것을 상징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완전해진 왕국의 삶의 축복이 하나님의 백성을 가득 채운다.
새 예루살렘에서 에덴의 회복은 생명수 강의 양 옆에 있는 달마다 열두 실과를 맺는 생명나무에 의해 더욱 강조된다 (22:2). 첫 창조시에 아담과 하와를 위해 예비되었던 생명나무가 이제 종말에 교회를 위해 예비된다. 생명수 강이 그런 것 처럼 생명나무도 하나님나라의 영원한 생명력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요한이 생명나무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은 종말적 교회 공동체의 삶속에서 주어지는 에덴의 회복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22:4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된다고 한다. 창 3:9-11 에서 아담은 죄의 결과로서 하나님의 얼굴을 피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창 4:14 에서 가인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로서 가인은 하나님의 얼굴을 뵙지 못한다. 출 33:20, 23 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없으며 보는 자는 살아 남을 수 없었다. 그러나 새하늘과 새 땅, 새 에덴에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된다. 이러한 배경으로 볼 때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은 타락으로부터 회복에로의 극적인 반전이 아닐 수 없다.
다음으로 22:5 은 교회가 세세토록 왕노릇 할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교회가 불신자를 향한 왕노릇도 아니요 성도가 성도를 향한 왕노릇은 더욱 아니다. 그것은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주어진 만물을 통치하도록 위탁 받았던 궁극적 가치 (ultimate value, 1:26) 의 회복으로서 새창조, 곧 새롭게 된 만물에 대한 통치사역을 의미한다. 따라서 22:1-5은 새 창조의 주인공인 교회가 에덴동산에서 첫창조의 목적에 대한 완전한 회복의 경험을 보여주고 있다.
이상에서 새 예루살렘에 의해서 상징되는 교회 공동체가 종말에 어떠한 축복을 누릴 것인가를 간단히 살펴 보았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위와 같은 교회의 종말적 모습은 단순히 미래적인 것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교회는 그러한 종말적 특징들을 이미 지금 하늘에서 경험하고 있다는 것이 요한 계시록이 보여주고 있는 메시지이다. 교회가 하늘에 존재하는 것을 상징들을 통해 보여주므로서 이러한 사실을 확증해 주고 있다.


먼저 4-5장에서 24 장로들은 하늘에 존재하는 교회를 상징한다. 24장로는 흰 옷을 입고 면류관을 쓰고 하나님의 보좌 주위에 놓여 있는 24 보좌들에 각각 앉아 있다 (4:4). 그리고 그들은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창조주되심을 찬양하며 면류관들을 보좌에 앉아 계신 하나님을 향하여 되돌려 드린다 (4:10). 교회외에 이러한 특권이 주어질 수 있는 무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특히 24 라는 숫자는 새 예루살렘에서의 144 나 12 진주문이나 12 기둥과 같이 12와 관련된 숫자이다. 이것은 12+12로서 144와 같이 구약과 신약을 망라하는 하나님의 백성 전체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24장로들을 통해 하나님의 교회가 하늘에 하나님의 보좌 앞에 존재한다는 것을 요한은 말하고 있다.
14:1-5의 144,000 명도 역시 하나님의 교회가 하늘에 존재해 있음을 보여준다. 14:1-5의 144,000은 7:1-8 의 144,000 과 그 동일한 숫자에 의해서 동일한 집단이라는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7:1-8의 144,000은 또한 7:9-17의 '셀수 없는 무리' 와 동일한 집단이다. 그렇다면 7:9-17의 '셀 수 없는 무리' 와 14장의 144,000은 또한 동일하게 하늘에 존재하는 교회를 가리키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14 장에서 하늘에 존재하는 144,000은 7:1-8에서 144,000이라는 숫자와 그리고 7:9-17에서 '셀 수 없는 무리'가 존재하는 '하늘'을 함께 조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조합은 이 세개의 구절들에서 언급된 세개의 집단이 동일하다고 여겨지는데서 가능한 것이다.


7:1-8의 144,000은 민수기 1장에 이스라엘 백성중 전쟁에 나갈 만한 자들의 숫자를 계수한 사건을 배경으로 하여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배경이 요한 계시록의 본문에 반영되어서 7:1-8의 144,000은 이땅에 존재하여 전투하는 모습을 갖추고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민수기에서 계수된 전쟁에 나갈 만한 자들의 수는 6,003,550 이었다. 그러나 요한은 그 계수된 자들의 총수를 의도적으로 144,000으로 변경하였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에서 왜 하필 144,000 인가라는 질문을 해야할 것이다. 144,000 라는 숫자는 12x12x1000 으로 분해할 수 있으며 이 숫자 역시 21장의 새 예루살렘에서 144 큐빗이나 12 진주문과 12 기둥과 4장의 24 장로와 같이 12와 관련된 숫자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숫자는 특이하게도 144에 1000 이 곱해진 숫자이다. 1000 은 구약에서 셀 수 없이 큰 수 혹은 완전의 수를 상징한다 (출 20:6; 신 1:11; 7:9; 삼상 18:7; 21:11; 시 3:6; 68:17; 단 7:10). 그렇다면 144,000은 하나님의 백성 곧 교회가 그 수에 있어서 셀 수 없이 크고 완전하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7:1-8의 144,000 은 7:9-17의 '셀 수 없는 무리'와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 이 두 숫자는 두개의 별개의 무리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무리를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이 두개의 수는 흥미로운 대조를 보이며 그 대조를 통해 교회의 성격을 입체적으로 계시해 주고 있다. 먼저 전자는 셀수 있는 숫자로서 이스라엘 백성의 12 지파로부터 구성되어 있다 (7:5-8). 그러나 후자는 셀 수 없는 숫자로서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으로부터 구성된 숫자이다 (7:9). 이는 교회가 특수성 (particularity) 과 보편성 (universality) 을 동시에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전자는 땅에 존재하여 전투하는 모습이고 후자는 하늘에 존재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며 승리의 노래 (7:9-12) 를 부르고 있는 모습이다. 이는 교회가 전투하는 모습과 승리한 모습의 양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으며 그리고 또한 땅과 하늘에 동시에 존재하고 있음을 말해 주고 있다. 이러한 서로 긴장 관계에 있는 교회의 두가지 면 (전투/승리 땅/하늘) 은 요한 계시록이 일관성 있게 보여주고 있는 교회의 핵심적인 특징이다. 특히 144,000이 7:1-8에서는 땅에서 전투하는 교회로서 묘사되더니 14:1-5에서는 하늘에 존재하여 승리한 교회로서 묘사되고 있는 것은 이러한 교회의 양면성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이 외에도 다른 여러 부분에서 이러한 교회의 양면성을 보여주고 있다. 먼저 땅에서 전투하는 교회의 모습으로서 2-3 장에서 일곱 교회, 11:2-13에서 두 증인, 12 장에서 용에게 쫓기는 여인을 들 수 있다. 그리고 하늘에서 승리한 교회의 모습으로서 4-5장에서 24 장로, 그리고 19:6-10 에서 혼인 잔치에 참예한 신부를 들 수 있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우리는 교회가 하늘에서 어떠한 모습으로 있는가를 고찰해 보아야 할 것이다. 하늘에서 교회는 정적으로가 아니라 역동적으로 존재한다. 그것은 교회는 하늘에서 미래를 미리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7:15-17 와 21-22을 비교한 다음 도표에서 잘 나타나 있다.

7:15-17 (A)
21-22 (B)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15a)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15c) 저희가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니할지니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 (16-17)
하나님과 그 어린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22:3)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21:3)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21:4)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21:6)


위의 도표에서 A는 교회가 하늘에서 현재 누리는 축복이요 B는 교회가 미래에 누리게 될 종말론적 축복들이다. 이 두개의 축복들이 서로 병행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병행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교회가 하늘에서 종말적 축복을 미리 경험하고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요한 계시록에 나타난 종말론적 교회의 모습을 관찰해 보았다. 이러한 내용의 메시지는 오늘날 점점 그 힘을 일어가는 한국교회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 질문에 대해 다음의 몇가지로 답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 위에서 관찰한 요한 계시록에서의 교회관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우리 한국교회가 교회관에 있어서 좀더 희망적이며 낙관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영국의 한 저명한 복음주의 신학자는 스러져 가는 영국 교회를 논하면서 희망을 잃지 않는다고 하였다. 힘 없어 보이는 영국 교회 배후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고 있었으리라. 이러한 낙관적 태도는 결국 하나님의 계획은 결코 실패하지 않으리라는 확신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이러한 낙관론은 어설픈 신념이나 과신 혹은 자만과는 다르며 또 달라야 할 것이다. 요한 계시록에서 교회 공동체는 언제나 그 숫자가 완전히 채워진 것으로 인식된다 (7:1-8의 144,000 명과 7:9-17의 '셀수 없는 무리'). 이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모으시는데 있어서 결코 실패하지 않으신다는 절대적 명제에 근거한다. 우리 한국 교회는 최근 회복불능의 패배의식에 빠져들고 있는 것 같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합리적인 요인들을 찾아 볼 수 있다. 그것은 지속적으로 줄고 있는 교인 숫자 때문일 수 있을 것이고 한국 교회의 낮은 도덕 수준으로 인하여 사회의 냉소적인 시선이 더욱 거세지고 있기 때문일 수 있다. 기독교가 사회문제에 대한 기독교적 답변을 제시하는데 있어서 실패하고 있는 것도 그 이유일 수 있도 있고 사람들의 영혼을 사로잡는 물질주의를 극복할 설득력 있는 대안을 찾지 못한 이유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이유가 어찌 되었든 우리 한국교회가 패배의식에 깊히 빠져들고 있는 것은 결코 성경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를 무시하는 인간의 불신앙적 감정으로부터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현재 한국 교회가 당하고 있는 내적, 외적 문제에 무관심하자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철저하게 반성하고 치료해야 할 것이다. 다만 좀 더 본질적인 문제에 집중하자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요한이 보았던 하나님의 백성 전체를 우리도 바라보므로서 하나님의 주도적이며 면밀하신 계획의 실천성을 겸허히 받아들이자는 것이다. 이러한 자세는 현실적 도전에 의한 패배주의를 절대로 용인할 수 없으며 그 도전을 초극할 수 있는 낙관적이고 희망적인 관점을 갖도록 할 것이다.
두번째로, 우리는 교회의 공동체성에 눈을 떠야 할 것이다. 앞 부분에서 공동체성에 대한 논의는 주제가 산만해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가급적 피하려고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 계시록에서 교회의 공동체성의 중요성은 자연스럽게 드러나고 있다. 요한 계시록은 한번도 한 개인의 문제를 다루고 있지 않다. 반대로 2-3장의 7교회, 4-5장의 24 장로 7:1-8과 14:1-5의 144,000, 7:9-17의 셀수 없는 무리, 21-22장의 새 예루살렘, 그리고 그 새 예루살렘의 12 문과 12 기둥등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교회를 전체로서 이해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만일 한 개인의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교회전체의 문제이다. 요한 계시록에서의 관심은 개인이 아니라 교회 전체이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는 사회적 풍조인 개인화에 의해서 점점 해체되어가고 있는 듯 하다. 그것은 거대한 교회에로의 평행이동에 의해서 그 개인화는 더욱 심화되고 있어 보인다. 큰 교회일수록 개인적인 신앙생활에 간섭을 받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큰 교회로 몰리고 있다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나 큰 교회가 과연 공동체성을 유지할 수 있는 성경적 교회관을 실천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대답하는 것이 쉽지 않은 것 같다.
세번째로, 교회 공동체가 누릴 수 있는 종말론적 축복을 극대화해야 한다. 교회 공동체는 지금 종말에 누릴 수 있는 축복을 현재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힌 바 되어 충분히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주어져 있다. 이러한 특권이 제대로 발휘만 될 수 있다면 교회 공동체에게 엄청난 능력을 가져다 줄 수 있다는 것을 누구나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특권을 소홀히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역을 헛되이 하는 것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에 우리가 연합되어 일어난 일이기 때문이다 (엡 2:5-6; 골 3:1-4). 이러한 특권이 발휘될 수 있는 영역중에 한가지 예가 교회 공동체의 예배이다. 교회 공동체의 예배나 교제가 천상의 감동과 감격을 줄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늘 그렇게 기도하듯이 교회 공동체의 예배는 하나님 보좌 앞에서 드리는 천상의 예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현실은 그렇지 않다. 예배를 통해 하늘의 생명력이 넘쳐나야 하는데 성경과는 동떨어진 이슈로 귀중한 예배시간을 낭비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교회 공동체가 어떠한 위치에 놓여있는가를 진지하게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교회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힌바 되어 천상의 은혜를 누리고 있지만 동시에 교회는 이땅에서 전투하는 교회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 양면적 특징은 요한 계시록이 일관성 있게 말하고 있는 교회관이다. 어떻게 이 양면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는가? 이는 아직 하나님의 구속 역사가 이미 (already) 성취 (fulfillment) 는 되었지만 아직 완료 (consummation) 되지 않았기 (not yet) 때문이다.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가 완료되는 날 교회의 최대의 적인 옛뱀, 사단은 불과 유황불로 던져질 것이며 그래서 더 이상 교회가 전투하지 않게 될 것이며 그리고 하늘과 땅이 합치될 것이며 (참조 엡 1:10) 그리고 하늘에 존재하던 새 예루살렘이 하늘로부터 내려오게 될 것이다 (21:2). 그래서 천상에서 승리한 교회가 이땅에서 전투하는 교회로서가 아니라 마냥 승리한 교회로서 영원히 존재하게 될 것이다. 그 때까지 교회는 이땅에서 아직 그 제한된 권세를 허용받은 사탄을 대적하는 전투하는 교회로 남는다. 전투하는 교회로서 그 전투의 현장에서 조차도 철저한 하나님의 보호를 받을 것이지만 (7:1-8; 11:3-6; 12:6; 12:14-16) 때로는 실패의 순간을 맛보기도 할 것이다. 바로 이러한 실패의 순간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언제나 교회는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