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성경강해***/- 요한계시록 강해

[스크랩] 요한계시록 요약

에반젤(복음) 2019. 11. 9. 13:44


 

요한계시록 요약

(김세윤 교수의 계시록 강의 )


목 차


들어가는 말 ------------------------------------------------ 1

서 론 ----------------------------------------------- ----- 2

1. 저 자 --------------------------------------------------- 2

2. 저작시기 ------------------------------------------------ 3

3. 요한계시록의 형태 -----------------------------------------3

4. 요한계시록을 해석함에 있어서 중요한 해석 원리 ----------------5

요한계시록의 신론 -------------------------------------------8

A. 삼위일체론적 언어로 표현 -----------------------------------8

1. 이름에 대한 대단한 강조 ------------------------------------9

2. 이름에서 보는 독특성 ------------------------------------- 10

3. 보좌에 앉으신 이와 그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 -------------------10

B. 창조주이신 하나님 --------------------------------------- 15

1. 새 창조를 이루실 하나님 ---------------------------------- 16

2.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 ------------------------------- 16

요한계시록의 기독론 ---------------------------------------- 18

A. 그리스도의 인격 ------------------------------------------18

1. 그리스도의 이름 ----------------------------------------- 18

2.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하나 됨 ------------------------------ -19

B. 그리스도의 사역 ------------------------------------------20

1. 그리스도의 나라는 실현될 것임 ------------------------------20

2. 증인이신 그리스도 이후의 새로운 증인들/ 교회 ------------ ----23

3. 증인인 교회의 모습 --------------------------------------- 24

4. 인을 떼시는 그리스도 ------------------------------------- 25

5. 하나님의 새로운 계획 ------------------------------------- 26

6. 천년왕국 ----------------------------------------------- 30

결론 / 요한계시록의 메시지 ---------------------------------- 34

부록 1/ 요한계시록의 숫자 이해 -------------------------------36

부록 2/ 재앙 시리즈의 세 가지 해석 ---------------------------- 41


* 들어가는 말 *


한국 교회에서 요한계시록을 공부하기가 매우 힘들어 보이는 것 같다.

바람직하지 않은 많은 이단적 요소와 수많은 이단이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다 나타났고, 사실인즉 요한계시록은 성경의 다른 부분처럼 쉽게 접근되었다가는 이해하지 못할 큰 구렁에 빠질 위험이 늘 도사리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 귀한 성경의 뚜껑을 열지 않은 채로 서재에 늘 두고 다닐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미래의 하나님 나라의 계시를 이 성경에 기록해 놓으셨고, 공관복음을 통해서 실현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발견하였다면 우리는 반드시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앞으로 이루어질(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잘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도 우리는 요한계시록의 144,000을 운운하면서 그들만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데, 그 수는 바로 자기들이 속해 있는 단체의 수라고 근거 없는 외침을 마치 진리 인양 떠들어 대는 숱한 우리의 이웃들의 모습을 접하면서, '짐승의 표'가 과연 컴퓨터의 바코드이며, 따라서 "오늘날 사탄은 이미 경제를 손아귀에 넣었다"고 말하는 이단과 그 가르침에 "정말인가?"하고 의아해 하는(흔들리는) 성실한 성도들에게 과연 성경의 원래의 의미는 무엇인지,

그리고 계시록에 나와 있는 무서운 심판의 모습들이 성도들로 하여금 신앙의 긴장을 갖게는 하지만, 반면에 그 심판의 모습이 성도들의 몸을 움츠리게 하는 부정적인 면을 가지고 있는가에 대한 성경의 바른 가르침도 매우 필요하다는 생각을 가져 본다.


"일곱 나팔 시에 차례로 임하는 재앙 때, 물론 불신자들이 그 고통을 당하겠고, 그 옆에 있는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겠지만 1/4, 1/3, 1/2, 온 땅으로 더 확장되는 심판의 때에 성도들도 그 고난의 현장에서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요?"


이런 질문은 요한계시록의 심판의 모습을 정리하지 않으면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온전하신 보호하심'과 '완전하신 구원'에 대한 확신이 흐려질 가능성도 있다는 것을 느껴 보았다.

이제 이런 요청에 의해서 우리는 요한계시록의 뚜껑을 조심스레 열어 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 강의안은 이미 밝혔지만 미국 Fuller Theological Seminary에서 신약학을 강의하시는 김세윤 박사의 D.Min Program의 "목회자를 위한 성경 신학"에서 강의하신 것을 중심으로 재구성해 본 것임을 밝힌다.


* 서 론 *


1. 저 자

순교자 저스틴과 이레니우스를 비롯한 많은 고대 전통은 세베대의 아들인 사랑의 사도 요한(1:1, 4, 9, 22:8) 이라고 보는데 동의를 한다.

그러나 한 가지 설득력이 있는 이의가 제기되는데, 그것은 파피아스(Papias)가 주장하는 것으로 그는 "요한의 가르침을 받고 소아시아 교회에서 사역한 유대교 선지자 중에 한 사람"이었을 것 이라고 주장한다.

그 근거로 저자는 요한이라고 밝히고는 있지만 자기가 예수의 12사도라고 주장하는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욱이 21:14절에서 자기가 12사도 중에 한 사람이었노라고 주장할 법도 한데, 자기의 사도성을 인정하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사도 요한의 이름을 도용한 사기 행각일까?

당시 특히, 중간사 시대 때 계시록과 같은 묵시문학이 한창이었을 때 이른바 Pseudonimity(권위를 위해 유명한 사람의 이름을 사용하기. 혹은 가짜 이름 대기)는 하나의 관행이었다. 즉 권위가 없는 사람이 자기의 책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서 구약의 인물들의 이름을 사용한 것이다.

예를 들면 에녹의 이름을 인용한 에녹서, 바룩의 이름을 이용한 바룩서 등등


그러나 이 서신이 에베소를 중심으로 한 소아시아에서 활동했던 사람이 저자임에는 틀림없다.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을 비교해 볼 때, 전자가 실현된 종말론을 강조했다면 후자는 미래의 종말론을 제시하고 있는 차이점이 있다.

그러나 많은 공통점이 등장하는데 예수를 '어린양', '로고스(말씀)'로 불렀다거나 삼위일체의 모습이 같은 분위기로 등장한다는 점에서 요한계시록은 요한의 문서에 포함된다.

따라서 만약 저자가 사도 요한이 아니라면, 요한의 가르침을 받은 소아시아 교회에서 사역한 유대 기독교 선지자였을 것 이라는 것은 가능하다.


2. 저작 시기

대부분의 견해가 1세기말(95-6년경) 도미티안 황제의 기독교에 대한 국제적 탄압시기 때라고 본다.

그러나 계시록을 자세히 보면, 특히 7교회에 보낸 편지글을 읽어보면 계시록에 기록된 박해가 조직적이고 국가적인 탄압이라고 보기에 어렵다.

왜냐하면 서머나와 빌라델비아 교회만이 탄압을 받았고, 다른 교회 전체가 다 탄압을 받았다고 말씀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95년 이전의 산발적인 박해가 있었을 때가 저작 시기가 아닌가 하는 의견도 있다.

그렇다면 68년 네로의 시기도 가능하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3. 요한계시록의 형태

요한계시록은 1:1-8절에서 볼 때 세 가지 성격을 띠고 있다.


1> 묵시문학의 형태이다. (1절)

묵시문학이란?

하늘의 계시를 땅에 펼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이 결정하신 '오는 세대'(천국)의 계획(비밀)을 '지금의 세대' (사탄이 거하는 성도들이 살고 있는 지금)에 선지자들을 통해서 은유 및, 비유 신화적인 모습으로, 상징적인 모습으로 보여 주는 것.

따라서 종말론적 안식, 심판과 구원을 제시하여서 오늘의 성도들에게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신실한 믿음을 유지하며 증거 하는 삶을 살 것인가를 가르쳐 준 책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계시록4장을 보자.

하나님의 보좌와 그 주위의 일을 보고 그 일에 비춰서 땅에서 일어날 일을 조명해 준다.

땅의 것은 궁극적인 실재가 아니다.

하나님의 시선(Perspective)에서 봐야 진정한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성도들이여 로마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살 것이 아니다! 즉 이 세상의 풍조에 의해

살 것이 아니다! 하늘의 관점에서 땅의 것을 비판하며 분석하며 신실하게 살아야 한다!!"


2> 예언의 말씀이다. (3절)

계시록은 기계적으로 받아 쓰여진 것은 아니지만, 매우 정교한 문체와 상상하기 어려운 구약의 은유로 구성된 쓰여진(기록된) 것이다.

저자는 계시를 받고 그 말씀을 깊이 묵상(구약의 계시에, 예수의 전승에, 예수그리스도의 사건에 비추어서 깊이 묵상)하고 난 후에 기록한 것이다.

따라서 계시록을 공부할 때 주의할 점은 공식적으로 구약을 인용한 것은 없다 할지라도 구약의 메시지가 계시록 전반에 깔려있기 때문에 계시록을 읽을 때마다 구약의 어느 부분인가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3> 회람 서신이다.

계시록2장 이후를 보면 7교회가 등장한다.

그래서 혹자는 계시록이 7교회에 따로따로 보낸 편지를 편집해서 한 권의 책이 되었다고 보는 이도 있다.

그러나 계시록은 7개의 메시지의 편집이 아니다.

7교회의 메시지는 요한계시록 전체의 서론이다.

7개의 다양한 문제를 제시하는 것인데, 사실 7교회의 문제는 단 하나의 문제 즉 하나님과 사단의 긴장(Tension)의 다양한 형태이다.

일테면 에베소교회는 그들 특유의 문제로 사단과의 투쟁을 가져오고(처음 사랑을 잊어버리게 한 사단과 다시 회복해야만 하는 성도들과의 투쟁), 빌라델비아 교회 역시 그들 특유의 문제를 가지고 사단과의 싸움을 선포하는 것이다.

결국 2장-3장의 7교회의 내용은 하나님(의 성도들과)과 사단과의 투쟁에 대한 서론이다.


7교회의 의미를 살펴보자.

그것은 일차적인 의미로 소아시아에 있던 7개의 교회를 의미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전체를 의미한다.

즉 전 세계의 모든 교회를 말하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에서 '7'이라는 숫자는 '완전한 수'를 의미한다.

따라서 7교회는 전 세계의 교회를 대표하는 것이다.

어떤 교회는 세상과 타협하여 태평성대를 누리는 교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교회는 세상과의 타협을 거부하여 시련과 고통의 때를 겪고 있는 교회도 있다.

자 그렇다면 우리교회는 어떠한가?

타협하는 교회에 대해서는 멸망이 올 수 있다는 경고의 메시지이고, 거부하는 교회에 대해서는 하늘의 상과 위로가 있다는 축복의 메시지이다.


4. 요한계시록을 해석함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해석 원리.

"Imagery(비유)에 대한 바른 이해가 계시록 해석의 열쇠이다."

당시의 배경을 잘 이해해야 한다.

세계를 다스리고자 하는 로마제국의 힘은 로마의 신들을 경배하게 하기 위해 황제를 신격화한다.

로마제국의 횡포와 이에 대항하여 새로운 세계(하나님나라)를 추구해 나가는 그 비유를 잘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상황에서 예를 들어보면 한 마리의 호랑이가 이가 다 빠진 상태에서 철창에 갇혀있다.

그 호랑이는 안경을 끼고 있었고, 머리에는 털이 다 빠져 있었다.

이 정도의 그림만 그리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 그림을 전 전 대통령으로 상상할 것이다.

바로 이런 식으로 요한계시록이 기록되었다는 것이다.

한 컷의 그림만으로 표현되어 있어도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말로 표현해 놓으니까 상당히 이해하기가 어렵게 된 것이다.

위에서 소개한, 우리는 쉽게 이해하는 그림(전대통령)을 다른 나라 사람에게 말로 소개한다면 그것을 쉽게 이해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성경에서의 예를 찾아보자.

1>문화적 Symbolism

계17장에 한 여자가 등장한다.

이는 로마를 상징하는 로마의 여신을 의미한다.

그 로마의 여신은 또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여신이 여왕(자주 빛과 붉은 빛 옷을 입고: 여왕으로 비유)이 되어 정치적인 능력과 경제적인 권력을 휘둘렀다.

그러나 그녀의 실체를 보니 음녀였던 것이다.(17:1)

요한이 하늘의 Perspectiye로 보니까 그녀는 정치와 경제를 다스리는 존재가 아니라 성도들의 믿음을 흔들리게 하는 음녀였던 것이다.

그녀가 제공하는 것은 향락과 타락한 문화와 죄악의 즐거움이다.

그녀가 내뱉는 말은 다 달콤한 것이었다.

그것으로 성도들을 망하게 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2>정치적 Symbolism

계17:8-9 죽은 줄만 알았던 짐승이 다시 나오리라...

네로가 자살해서 없는데 그가 다시 살아오다니...

네로가 다시 와서 야만인들과 결탁해서 로마를 뒤흔들리게 할 것이라는 말이다.

이 말은 당시의 독자들이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상황에서 이해해야 할 내용인 것이다.

이것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서 "진짜 동방에서 기병대들이 와서 사회를 혼란시킬 것이"니, "소련의 기병대가 점령해 와서 3차 대전이 일어난다."느니 등으로 해석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3>시리이즈로 구성된 것을 바로 이해하라.

7나팔, 7대접 등등

이때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심판의 모습은 하나님의 통치와 그 통치를 대항하는 무리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하는 것이다.

여기서의 재앙은 출애굽시의 10가지 재앙과 요엘서의 여러 재앙을 연상시키는데, 아주 중요한 관점은 이 시리즈가 시간적인 순서로 그려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의 필연성과 무서움을 당시의 사람들이 무서워하는 재난의 모습을 들어 예를 들면, 화산폭발, 지진, 야만인의 침공 등 구약의 심판의 모습을 동원해서 그려낸 것이다.

따라서 "마지막 심판 때에 지진으로 끝날 것이다"라는 가르침이 있다면 그것은 계시록의 상징을 무시한 문자적 해석에 해당되는 것이다.


이것을 자세히 살펴보자.

16:17절 이하 바벨론. 로마 / 지진으로 멸망.

17:16절 이하 로마= 여신. 음녀 / 불로 태워 죽임.

18:2절 이하 로마가 무너짐(여리고성처럼) 폐허가 됨.

19:3절 이하 꺼지지 않는 불로 망함.

이 상황을 문자적으로 해석할 경우 서로 상충된다.

로마가 16장에서 이미 지진으로 멸망했는데, 17장에서는 불로 태워 죽이는 모습으로 나타나니, 그렇다면 로마는 죽어도 죽지 않는 불사조란 말인가?

따라서 이것은 로마(음녀)의 멸망에 대한 시간적인 순서가 아니라 하나의 진리, 즉 "하나님의 심판으로 로마는 멸망당할 것임"임을 보여주는 여러 가지 표현이다.


다시 말하자면 구약의 네 가지 그림으로 심판의 무서움을 표시한 것이다.

지진/ 시내산 사건의 땅의 흔들림을 암시함으로 하나님의 심판임을 강조.

화형/ 악이 악을 발휘해서 스스로 멸망하게 된다는 그림.

폐허/ 하나님의 백성을 멸시하다가 망한 에돔과 바벨론처럼 폐허가 될 것을 그림.

불/ 소돔과 고모라가 하나님의 심판 당함을 암시하는 그림.

구약의 그림을 인용해서 하나님의 심판의 확실성을 강조한 것이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을 해석할 때는 다음을 주의하라.

당시의 상황(Context)+구약의 그림+ 당시에 그들이 알고 있는 신화적, 정치적 사건들


* 요한계시록의 신론 *

이제 요한계시록 전체에 흐르고 있는 신론을 살펴보자.


A. 삼위일체론 적 언어로 표현되고 있다.

바울서신의 2위 일체론(아버지와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표현에서 한 단계 더 발전한 (매우 발달된 성경)모습이라 할 수 있다.


1:4-7절을 살펴보자

요한은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와 그 보좌 앞에 일곱 영과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의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1. 이름에 대한 대단한 강조가 나타난다.

1>알파와 오메가

the first and last, the beginning and ending과 같은 의미로서 이름이 7번(참고/ 7은 완전한 숫자를 의미) 기록되어 있다.(1:3, 2:8, 14:13, 16:15, 19:9, 21:6, 22:13) /처음과 나중'이란 말의 용도는 사44:6, 48:12, 41:4를 참조해 볼 때, 창조자로서의 절대 주권자이심을 강조할 때 사용되었음을 보게 된다.


우상숭배에 대항해서, 거짓 신들에 대항해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강조할 때 사용한 것이다.

천지창조의 처음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 졌다.

이제 마지막 때의 재창조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지게 된다(계21:6절/"이루었도다.")


2>계시고, 계셨고, 오실 이( one who is, who was and who is coming)

이 이름은 출3:14절("나는 스스로 있는 자")에서 나온 이름을 발전시킨 것으로 자존하신 하나님, 역사의 주인, 세상의 심판자 그리고 동시에 구원자이심을 설명하는 이름이다.


3> 전능자(the Lord God Almight)

이 이름 역시 계시록에 7번(1:8, 4:8, 11:17, 15:3, 16:14, 19:15, 21:22) 등장한다.

이는 "만군의 야훼"란 말의 번역으로 하나님께서 만유위에 군림하시는 막강한 힘을 소유하셨고, 그것으로 적대세력을 쳐 부시는 분이심을 강조하는 이름이다.


4> 보좌에 앉으신 이

이 이름 역시 7회 등장한다.(4:9, 5:1, 5:7, 5:13, 6:16, 7:15, 21:5)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상징하는 말로서 보좌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대용해서 사용한 것이다.


4장에서는 주로 보좌에 앉아 계신 하나님을 일컫고 있고, 5장에서는 그 보좌에 같이 앉아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명명하고 있다.

이미 4-5장에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의 보좌에 앉아 계시고, 이미 그의 주권이 가득했음을 강조하고 계신다.

이것은 하늘의 실재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땅에서는 로마 황제가 주인으로 주장하고 있다.

이제 하늘의 실재가 곧 땅의 모든 것을 다스리시며, 결국에는 땅의 거짓 실재들은 멸망당하고 하나님의 역사가 온 땅을 지배하는 시기가 도래할 것을 요한이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2. 이상의 이름에서 보는 독특한 특징

1> 1:4절 이하의 이름이 요한계시록의 결론 부분이라 할 수 있는 21:6절에서 다시한번 등장하는데 재미있는 특징은 결론 부분에서는 "계시고, 계셨고, 오실 이"라는 이름은 다시 쓰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계시록의 결론 부분에서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기 때문이다.


2>하나님의 이름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짝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1:8절(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과 1:17절(죽었다가 산 자가 "나

는 처음이요 나중이니...)이 짝을 이루고 있다.

21:6절(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과 22:13절(나는 알파와 오

메가요...)와 짝을 이루고 있다.

이런 점에 대해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이름을 가진 분"으로 설명했

다.

이런 차원에서는 바울의 신학과 매우 유사함을 볼 수 있다.


3. 보좌에 앉으신 이와 그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4장과 5장을 중심으로)

1>계시록 4-5장이 다른 묵시문학 일테면 겔1장이나 사6장에 비해 특이한 점

에스겔이나, 이사야는 보좌에 하나님께서 앉아계심을 주로 기사와 했으나, 계시록에서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보좌에 같이 앉아 계시는 것으로 기록했다.

이는 점진적인 계시에 의한 하나님에 대한 더 풍부한 이해및 해석이다.


2>4:3절에 나타난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모습

보좌에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 보석 같더라.

이 모습은 겔1:이나 단7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모습에 비교해서 볼 때 매우 간단하다.

구약에서의 표현은 하나님을 인간의 모습으로 표현하다 보니까 여러 가지 수식어로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인간처럼 인간의 수준으로만 표현하면 하나님과 인간의 구분이 안갈테니까...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인간의 의인화 용법을 가능한 줄였다.

그리고 하나님의 모습을 보석과 보좌로 표현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그림을 자제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의 찬란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어떤 귀한 존재에 대해서는 표현하면 할수록 그 귀중한 존재 자체는 제한 당하는 것이다.


3> 그 귀하신 하나님에 대한 성도들의 자세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한 예배드림과 그를 영원히 의존하는 것이다.

이 모습이 이미 천국에서는 이루어지고 있다.

4장과 5장의 주된 내용이 바로 영광과 찬양과 경배를 하나님께 돌려 드리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네 생물의 경배/ 이사야6장, 에스겔1:5-14를 참조하면 네 생물의 실재는 스랍, 그룹들인

천사들임을 알게 된다.

네 생물은 언약궤에 새겨진 천사들의 원형이다.

24장로의 경배/ 성도들의 대표를 의미.

이렇듯이 천상에서는 이미 하나님을 향한 예배가 이미 시작되었다.

이제 그 천상의 예배가 이 땅에서 실현되어야 하는 숙제가 남아 있다.

물론 이 땅에서까지 드려지는 완성된 예배는 곧 실현될 것이다.

다음의 구절이 이를 뒷받침한다.

네 생물과 24장로들의 경배 --> 천군천사들의 참여(5:11) --> 온 세상의 참여(5:13)

천상의 예배는 지상까지 확대될 것이다.


그러나 아직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주권보다는 로마의 황제가 자기 권력의 절대화를 만들고 있다.

이 절대 권력에 대항해서 죽기까지 신앙을 지킨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면류관이 씌워진다.

24장로들이 천상의 예배에서 그들이 쓰고 있던 면류관(4:10)을 하나님께 던져 드리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나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신앙을 지키기 보다는 로마의 황제로 변장한 사단의 권세 앞에 무릎을 꿇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에서는 사탄이 예배를 드리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접근해서는 많은 방해를 가할 것이기 때문이다.


4> 하나님께 경배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방해하는 사탄의 세력들.

요한계시록의 기록 당시에 사탄은 하나님을 믿고자 하는 사람들을 방해하기 위해서 당시의 절대 군주제를 내세우고 있던 로마와 결탁했다.

계13장에 무시한 짐승이 등장한다.

로마의 포악한 정치를 의미한다.

강압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포기하게 하고 로마의 황제를 섬기게 하고자 하는 전략이다.

반면에 계17장에는 음녀가 등장한다.

경제적인 풍요와 세속적인 쾌락을 추구하도록 하여 사람들로 그것에 빠지게 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포악한 짐승'과 '달콤한 음녀'가 사실은 서로 상호 보완적이라는 것이다.


계17:3절을 보시라.

곧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광야로 가니라. 내가 보니 여자가 붉은 빛 짐승을 탔는데. 그 짐승의 몸에 참람 된 이름들이 가득하고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있으며, 여기서 붉은 빛은 왕을 상징하는 것이요, 따라서 짐승이라 함은 정치적 폭군으로서 로마의 황제를 의미한다.


그런데 "음녀가 짐승을 탔다"는 말은 세속적인 쾌락을 이용하거나, 경제적인 풍요로움을 제공함으로서 하나님을 멀리하는 방식과 그리고 포악한 정치력으로 신앙인들을 방해하는 이 모든 것은 단 하나의 공작, 즉 사탄의 공작이라는 말씀이다.

그렇게 함으로서 다음과 같은 반응을 불러일으키고자 한다.

"로마의 능력에 불가항력적이다"라는 생각을 불러 일으켜서 짙은 패배감을 안겨다 주며, "로마와 타협하여 살길을 마련하자"고 하는 사람들에게 경제적으로 풍요로움을 보장하며 짐승의 표를 받게 하는 것이다.

이런 결과를 얻어내기 위하여 갖는 그들의 술수가 아주 다양하고 치밀하다.


13장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로마의 황제가 용으로 부터 권세를 받는다.

3절/ 네로의 죽음으로 로마가 붕괴된 줄 알았는데(그의 세력이 약화 된 줄 알았는데)

네로(폭군)가 다시 살아나 막강하게 재기한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말하는 네로는 바로 네로 이후의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던 Flavius Vespasianus를 가리킨다.

4절/ 하나님께서 받으셔야 하는 경배와 찬양을 짐승이 받고 있다.

11절/ 짐승의 주위에 몰려들어 황제 숭배를 환영하는 무리들이 많았다.

"짐승에게 예배하라" "짐승의 표를 받으라."


더 나아가 16:13절을 보면,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등장한다.

이들은 거짓 선지자들로서 종교적인 기능을 지녔고, 로마의 황제숭배를 조장하는 신전의 사제들을 말한다.

더군다나 17-18장에서는 음녀가 등장하여 달콤한 사탕발림과 쾌락을 빌미로 해서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5. 짐승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이제 이런 상황을 하나님께서는 과연 어떻게 처리해 나가실까?

절대 초월자로서 세상의 피조물이 절대 주권을 빼앗을 수없는 하나님!

그 하나님께서 오히려 짐승들을 심판하실 심판자로 등장하실 것이다.

그 분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시다.


이미 4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절대 주권을 지니신 분이심이 선포되었다.

그것은 하늘의 상황이었다.

지금 잠시 동안은 그 하나님의 주권이 짐승들의 횡포로 땅에서는 실현되지 못하고 있지만, 그러나 이제 그 하늘의 상황이 이 땅에서 실현되어질 때가 오는데, 그때에 하나님을 섬긴 사람들은 구원을 받게 되지만, 짐승의 경배자들은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구원받을 하나님의 자녀들은 구원의 승리를 얻기까지 짐승의 경배자들과 싸워야 하는 고난의 세월을 보낼 수밖에 없다.

그 고난이 때로는 순교로 이어지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결국은 하늘의 실재가 땅에 이루어질 때, 하늘의 보좌에 앉는 영광을 얻게 될 것이다.


반면에 짐승의 경배자들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드디어 하나님의 심판이 나타난다.

그 심판의 강도가 매우 무시무시하다.

심판의 확실성을 들어내기 위하여 성경은 세 차례에 거쳐 확대 설명 해 나간다.

그것이 바로 세 개의 series로 구성된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이야기다.

일곱째 인을 떼실 때마다, 일곱째 나팔이 울릴 때마다, 일곱째 대접이 쏟아질 때마다 재앙은 심하게 나타났다.

그런데 그때마다의 특징을 보면 그 재앙의 출처가 바로 "하늘의 보좌"라는 것이다.

(일곱인/ 8:1-2 일곱째 인을 떼실 때에 하늘이 반시 동안쯤 고요하더니 내가 보매 하

나님 앞에 시위한 일곱 천사가 있어... 일곱 나팔/ 11:15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하나님 앞에 자기 보좌에 앉은.. 일곱 대접/ 16:17 일곱째가 그 대접을 공기 가운데 쏟으매 큰 음성이 성전에서 보좌로부터 나서 가로되...)


이것은 계시록 4-5장의 하늘의 비밀이(뮈스테리온) 이제 땅에서도 실현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또 다른 특징은 인에서 나팔로, 나팔에서 대접으로 옮겨 갈수록 그 진노의 재앙의 더 커진다는 것이다.


인의 재앙 시( 6:8절) 사람의 1/4이 멸망하게 될 것임.

나팔의 재앙 시(9:18절) 사람의 1/3이 멸망을 당하게 될 것임.

대접의 재앙 시(16:19이하) 만국의 성들이 다 무너짐.

그러나 이런 재앙 시에도 어린양의 피를 믿는 자들은 반드시 제외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경고에는 지금까지 짐승에게 경배한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돌아오면 기회가 있다는 것을 강조하시므로 회개를 유도하고 있다.

이것은 계시록의 구조를 봐서도 알 수 있다.


인의 경고를 보자.

첫째 인부터 여섯째 인까지의 봉인을 떼었다.(6장)

그리고 일곱째 봉인을 떼실 때 재앙이 일어나는데, 그 일곱째 인을 떼시기 전에(8장) 회개의 요청을 위한 간격을 두신다.

(7장/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경배와 찬양... 짐승을 따르던 사람도 돌아오면 이런 자리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나팔의 경고에서도 같은 양상이 나타난다.

8-10장에 이르기까지 여섯째 나팔이 등장한다.

이제 일곱째 나팔이 울리면 재앙이 쏟아지는데, 11장에서 바로 일곱째 나팔이 울리는 것이 아니라, 두 증인의 순교어린 회개를 위한 증거가 등장한다.

회개의 기회를 다시 한번 허락하시는 오래 참으신 하나님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러나 결국에 회개치 않을 경우 재앙은 불가피한 것이다.


B. 창조주이신 하나님

요한계시록의 신론은 첫째로 삼위일체 적 표현으로 이루어 졌음을 지금까지 살펴보았다.

이제 14:6-7절을 중심으로 볼 때, 하나님에 대한 또 다른 관점이 등장한다.

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하는 자들, 곧 여러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

그가 큰 음성으로 가로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


창조주 하나님이다.

그런데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달될 복음이 있었다.

4가지 표현은 온 세상을 의미한다.

(숫자 4/ 4방은 세상을 상징. 숫자에 대해서는 추후에 논할 것임)


그 영원한 복음이 무엇인가?

창조주이신 참 하나님을 알고 그에게 예배 하는 것!

그때 사람들에게 진전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 바로 이것이다.


1. 처음 창조를 하신 그 하나님께서 새 창조를 이루실 것이다.

21:1절/ 새 하늘과 새 땅.

이는 구원의 완성을 의미한다.

그런데 처음 창조와 다른 점이 있다.

그것은 "바다가 다시 있지 않다"는 것이다.

바다는 용이 나온 곳이다.

첫 창조 때는 바다를 얽어매었었다.

지구를 점령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다.

따라서 Chaos는 바다가 지구를 덮치고자 하는 기회를 엿보게 하고 있다.

그러나 새 창조 때는 Chaos가 나온 바다가 다시없다.

Chaos의 완전한 전멸을 의미하는 것이다.


2.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

여기에 아주 중요한 신학이 있다.

만물을 새롭게 한다는 말은 New Creation이 아니라, Renewal(갱신)시킨다는 말이다.

물론 두 가지 개념이 다 들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둘을 굳이 구분하자면 이렇다.

새 창조/ 세상의 죄악에 대해서는 완전히 사라진 전혀 새로운 세계이다.(discontinuty)

갱신/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성을 강조.(continuty)


하나님은 이 세상이 죄악으로 가득 차 있었어도 그의 창조물을 붙들고 계셨다.

아무리 포악한 사람이 세계를 지배했어도 여전히 그의 나라를 잡고 계신다.

Chaos속에서도 Cosmos가 보존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때에는 이 모든 악의 세력이 사라지고 전혀 새롭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갈 곳은 하늘인가? 땅인가?

가능성이 있는 것은 첫 창조사역이 허무하게 다 깨어지는 것은 아닐 것 이라는 것이다. Chaos의 세력이 다 사라지니까 지금의 땅의 개념은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첫 창조, 새 창조

갱신일 가능성에 대해서 조금 더 살펴보자.

창9:11-17

홍수가 끝나고 하나님은 노아에게 무지개를 보여 주시며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다.

계시록11:18절을 음미해 보라.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상주시며 또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실 때로소이다" 땅을 멸망시키는 자들(사탄의 세력들)을 멸망시킨다는 말은 땅을 멸망시키지 않고 보호하신다는 의미가 아닌가?

더 중요한 것은 땅의 실재가 일어나기 전에 하늘의 실재를 보여 주신 4-5장에서 하나님의 보좌에 무엇이 있었는가?

"하나님의 보좌에 무지개가 둘러 있었다."(4:3절)

요한은 노아의 무지개 약속, 그리고 에스겔1:28절의 무지개를 천상회의에서 보았다.

이것은 노아와의 약속의 성취를 강조한 것이다.

그렇다면, 피조세계에 대해서 신실하신 하나님임을 다시 느낄 수 있다.

이사야6:3절의 천상의 모습(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이 계시록21:3절(...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과 21:23절(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 쓸데없으니...)에서 성취되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의 기독론*


A. 그리스도의 인격 (Personal of Christ)

요한은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아주 밀접하게 더 나아가 동일인물로 보고 있다.

이름의 사용을 통해서라든가, 계시록의 Foundational이라 할 수 있는 4장과 5장에서의 보좌에 앉으신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나란히 취급하고 있는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리스도는 확실히 하나님의 Agent이시다.

하나님의 심판의 집행자이시고, 하나님의 현현이시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오심은 하나님의 오심이다.


1. 그리스도의 이름.

1:12-16은 그리스도의 현현(Christophany)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온 세상의 교회의 대표인 일곱 교회에게 메시지를 주셨다.

4장이 하나님의 현현(Theophany)을 기록하고 있다면, 5장은 이어서 그리스도의 현현(Christophany)을 소개하고 있다.


* 그리스도의 이름에서의 '처음과 나중'

계1:17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이 이름은 1:8절에서 사용된 하나님의 이름과 동일시 한 것이다.

"하나님=그리스도"

이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받은 것으로 하나님의 본질과 영광에 참여함을 말한다.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하나(Unity)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계3:14절에서 그리스도는 본인을 가리켜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아르케')라고 표현했는데, 계21:6절에서는 그 '아르케'를 하나님에게 연결시키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사역 시에 그리스도께서 제일 먼저 창조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창조사역의 Agent였다는 말씀이다.

'나중'이라는 이름도 마찬가지로 종말의 재창조의 집행자라는 의미이다.

'처음이요 나중'이라는 이름이 제일 처음으로 나온 곳은 이사야 44:6절이다.


이것은 당시에 만연된 우상숭배자들에 대항해서 유일한 역사의 주재자이신 하나님. 그 분의 절대 주권을 주장하는 배경에서 그 이름이 등장한다.

계시록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경배를 받고 있는 짐승에 대해서 오직 경배의 대상은 하나이신(Oneness)이신 하나님(그리스도)만이 경배의 대상임을 강조하기 위한 이름인 것이다.


2.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하나(Oneness)됨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하나임을 증명하는 몇 가지를 살펴보자.


1> 이름이 같은 의미로 표현됨.

예)이미 살펴 본바와 같이 '처음이요 나중'

2> 예배의 대상자로 두 이름이 같이 등장.

4-5장.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4장)과 그리스도(5장)

3> 문법적 표현으로도 이 사실이 입증.

"하나님과 어린양"은 분명히 복수인데, 취급할 때는 꼭 단수로 취급하고 있다.


참조> 계1:17절에서 보좌에 앉으신 그리스도를 죽임 당한 어린양으로 표현하고 있다.

"보좌에 앉아 계신 죽임 당한 어린양"

1>그의 도살됨이 예수의 '그리스도'의 행위였기 때문에 대속적 죽음이 우리를 위한 구원의 사건의 완성임을 강조하는 표현. "구원의 종말을 이루신 분"

2>"죽임 당한 어린양"이 하나님의 본질을 나타내는 것이다.

폭군 같은 로마의 황제처럼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지 않고, 자기를 내어 죽으심으로 사랑을 표현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본질, 존재 양식, 활동 양식(사랑)이 어린양의 죽으심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를 하나님이라고 표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하나님의 사랑(죽임당한 어린양)이 보좌에 앉아계시기에 우리에게 희망이 있는 것이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무섭다.

그러나 그 보좌에 사랑의 주님이 앉아계신다.

회개하기만 하면 용납되어지는 하나님의 사랑의 적극적인 표현이다.


B. 그리스도의 사역( The Works of Christ / 구원론)

그리스도의 사역을 살피기 전에 그의 이름이 계시록에 얼마나 표현되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그의 사역을 이해하는데 재미를 더해 준다.

'예수'의 이름이 계시록에는 14(7*2숫자의 의미는 후에 첨가할 것임)회 나온다.

그 중에 '진리의 증거자'로 표시되는 횟수가 1:2절을 중심으로 해서 7회 나타난다.

이는 완전한 증거자이신 예수(7은 완전수를 의미)를 강조하는 것이리라.


아울러 그리스도라는 칭호가 예수의 이름과 함께 7회 등장하는데, 이는 다윗의 메시아인 소망의 성취자이신 예수를 강조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으로 중요한 이름이 "어린양"이다.

이 이름은 28회(4*7 4/세상의 상징수, 7/완전수) 등장하는 것으로 세상 모든 사람에게 완전한 속죄의 제사를 드리시는 세상의 구원자이심을 강조하는 것이리라.


1. 그리스도의 나라는 실현될 것임.

계11:15절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우리 주님의 궁극적인 사역은 현재는 짐승이 다스리는 이 세상의 왕국을 우리 주와 메시아의 왕국을 만드는 일이다.

이 사역을 위해, 즉 하나님 나라를 이 땅위에 실현하실 예수에 대해 요한은 세 개의 전승사적 자료를 가지고 설명하고 있다.


1>다윗 적 군사 메시아의 성전(Holy War)의 그림을 사용.

계22:16절/ ... 나는 다윗의 뿌리요...

이것은 이사야11:10(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호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을 인용한 것으로 이는 민수기 24:17(...한 홀이 이스라엘에서 일어나서...)절의 예언을 염두 해 두고 그린 그림인 것이다.


군사적 메시아는 19:15(그의 입에서 이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저희를 철장으로 다스리며...)절에서 더 분명하게 나타나는데, 이것 역시 이사야49:2(내 입을 날카로운 칼같이 만드시고....)을 반영한 것이다.

군사적 메시아로 표현된 예수는 시편2편(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은 그림처럼 세상의 모든 왕들을 물리치시며 메시아의 군대로 승리를 쟁취하시고 세상을 정복해 나가신다.


2>출애굽의 그림을 사용.

출애굽 사건은 최초의 낙원의 회복을 의미한다.

5:6-7(... 어린 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은 출애굽기 12:5(...너희 어린양은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의 언어로 표현된 것이다.

물론 출애굽기의 어린양은 제사의 성격이 없는 양이다.

즉 죄를 대속하는 제사의 성격이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신약에서의 어린양은 대속의 죽음을 당한 제사의 상격이 있지 않은가?

결국 이것은 유월절의 어린양과 이사야 53장의 의 어린양광의 합동작품이다.

출애굽을 통한 구원사역이 그리스도와 연결됨을 여기서 보여 준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정치적 메시아로서의 정치적 구원이 아니라, 죄와 죽음에 대한 구원과 해방을 가져다주며, 하나님의 심판에서의 구원을 강조하는 것이다.

* Holy War + 어린양의 죽음 = 정치권에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악령에 대한 것이다.


3> 증인, 증거자로서 그리스도

1: 2절/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2:13절/ 내 충성된 증인.

3:14절/ 참된 증인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의 증거자이신 그리스도(3:14)는 이 증거로 인하여 환난과 죽음(1:9절/ 예수그리스도의 환난)을 당하시게 되었지만 그 증거를 이제 다른 증거자에게(2:13절) 즉 교회에게 위임시키시고 계속 주의 말씀이 증거 되도록 하셨다.

이제 교회는 이 일을 고난과 순교의 자리에 들어가면서 까지 라도 감당해야 하는 숙제가 남아 있다.


잠시 지금까지 살펴본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해서 요약해 보자.

그리스도는 다윗 적 군사 메시아로 오셔서 사탄의 권세를 물리치셨다.

그런데 그 승리의 방법이 정치적이거나 군사적이지 않으셨다.

오히려 표면적으로 볼 때는 마치 패잔병 같은 죽음이 그를 장식했다.

그는 죽어 버린 한 마리의 어린양이었다.

그러나 여기에 성경의 역설이 있다.


계시록 5장을 보면 그 죽임 당한 어린양이 하늘의 보좌(승리한 존재만이 앉아 누릴 수 있는 영광의 자리)에 앉아 계시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한 마리의 어린양으로 죽임을 당하신 것은 패배가 아니라, 오히려 사탄의 권세와 악의 잔당들을 물리치시는 결정적인 순간이었던 것이다.

이것을 5절과 6절에서 잘 기록하고 있다.

5절/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6절/어린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5절만 보면 해방신학자들의 말대로 예수는 정치적인 메시아로 보인다.

그러나 6절에서 강조한 대로 그 메시아는 죽음으로서 승리하셨다.

따라서 그는 정치적 메시아가 아니다.

군사를 세워서 그 군사들로 하여금 전쟁을 일으키시는 분이 아니라, 속죄의 제사로서 죽음을 통해서 만민들의 죄 사함을 얻어내고 그들을 사탄의 종노릇하는 데서 해방시키시고 구원시키시는 은혜의 주이시다.

이것이 메시아의 진정한 사역이다.

이런 차원에서 볼 때에 계시록의 기독론은 신약 전체의 기독론과 동일하다고 볼 수 있다.

신약성경 전체가 예수를 다윗 적 메시아로 표시하나 속죄하는 어린양으로 연결시키기 때문이다.

막1:11절의 예수의 세례 받을 시에 하늘에서 들려진 음성과 세례요한의 증언(요1:29)을 살펴보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시2:7절의 응함)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 (사42:1, 53:10-12의 응함)


그러므로 계시록에 전쟁의 용어가 많다고 해서 천사군대나 하나님이 백성들의 군대를 이끌고 와서 전쟁을 일으키는 것으로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이미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계시록의 기독론의 주제도 "고난의 메시아의 승리"이다.

물론 다른 성경과 강조점의 차이는 있다.


예를 들어,

바울서신의 강조점은 "어떻게 믿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라는 주제와 "구원을 얻은 성도들은 어떻게 봉사해야 하는가(윤리적 차원)?"에 대한 강조가 그 특징이라면,

계시록은 바울의 사상을 전제로 하고나서, 그리스도의 오심인 D-day와 재림 사이에 사는 성도가 교회를 중심으로 하여 군사로, 혹은 중인으로 등장하여 세상에서 득세하고 있는 사탄의 앞잡이인 짐승과 그 세력들과 싸워 이김으로 이 세상에 어떻게 그리스도의 구원이 이루어지는가를 보여 주는 것이 그 강조점이다.

"하나님의 구원사역의 Agent로서의 교회와 성도"와 "하나님께서 교회를 어떻게 활용하여서 이 세상을 구원해 나가시는 가에 대한 인봉된 것을 풀어주신 것" 이것이 계시록의 강조점이다.


2. 증인이신 그리스도 이후의 새로운 증인들/ 교회.

이미 위에서 언급했듯이 새로운 공동체인 교회가 그리스도 이후의 새로운 증인들이다.

교회는 짐승을 경배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하고, 하나님께서는 재앙을 통해서 그들에게 회개를 유도해 내시고, 이런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통치가 이 세상에 점점 확대되어 나간다.

그러나 교회 공동체의 증인의 사역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 길은 그리스도의 뒤를 잇는 고난의 길이었다.

계12:11을 보라/ 여러 형제가 어린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 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 하였도다

증거자는 고난과 순교의 자리에 들어간 사람들 이었다.


그런데 그들에게 주어진 칭호가 승리자였다.

이것은 군사적인 용어이다.

2장과 3장의 지배적인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 "이기는 자마다"이다.

그리고 이기는 자마다 그리스도의 보좌에 앉게 될 것이다.

(3: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앉게 해 주기를...)

한마디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사역의 확대이다.

그들은 Holy War를 벌이는 군사로서, 교회가 이 싸움에 전격적으로 참여한 모습이 계시록 7장부터 이다.

7:4-8을 보면 인 맞은 자의 수가 14만 4천이었다. (12지파에서 1만2천명씩)

여기서 인이란 말은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다는 말이다.

여기에서 많은 이단들이 출몰한다.

자기들만이 14만 4천에 해당하는 택함을 받은 성도라는 것이다.

이것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서 딱 14만 4천으로 해석하면 안 된다.

유대 종말론에 의하면 다윗 적 메시아가 등장할 때 12지파의 백성을 다시 모아서 이방세력에 대항해서 싸워 이스라엘을 회복한다고 하는데, 이 그림을 7장에서 요한이 그려낸 것이다.

(14만 4천을 이렇게 해석하기도 한다//

12지파(구약의 대표) * 12사도(신약의 대표) * 10의 3승(세상에 충만한 수 ))

이것이 14만 4천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이어서 나오는 7:9절인 '각 나라' '족속' '백성' '방언'(4가지 표현/ 세상에 충만한 수)등 "아무라도 능히 셀 수없는 큰 무리가 하나님의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선다."는 말씀으로 확증된다.

이 말씀은 이미 천상회의에서 요한이 보았던 것(계5:9절/ 따라서 4-5장은 계시록의 foundation)을 다시 7장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3. 증인인 교회의 모습.

1> 그들의 정체성

a.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않고 정절이 있는 자(14:4절)

이는 결혼을 금하신 말씀이 아니라, 거룩한 전쟁의 군사들이니 만큼 깨끗한 상태를 유지하라는 말씀이다. 의식적, 도덕적 순결을 강조하는 것임.

b.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14:5절)

2> 그들의 결과/ 순교.

a. 그들이 세상과 더불어 하나님의 심판에 의한 재앙을 맛보지 않고 하늘의 보좌에 이르게 하기 위함이다.

결국 순교 자체가 구원이다. 세상의 멸망을 보지 않고 보좌에 나아가는 길이다.

b. 죽음을 보고 짐승을 경배하는 자들로 하여금 회개와 믿음을 유발시켜 하나님 나라에 동참하게 하기 위함이다.

이로 인해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돌아온다.

그러나 끝까지 불순종의 세력인 7천명이 있는데 그들은 결국 7대접의 재앙으로 심판을 받는다.


4. 인을 떼시는 그리스도

6장 1절 이하

어린 양만이 봉인된 인을 떼신다.

그 떼신 인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서 사탄의 통치를 깨뜨리고 그의 통치를 실현해 나가시는가?/ 순교까지의 자기희생을 각오한 신실한 증인들을 통해서 결국은 거룩한 전쟁에서의 승리"이다.


특이한 점은 여섯째 인을 떼시고 난후(6장)에 일곱째 인을 바로 떼시지 않고 간격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8장에서 일곱째 인을 떼시기 전에 7장이 삽입되어 있다. 7장은 이미 우리가 살펴 본대로 순교자들이 등장하여 죽음을 각오하면서까지 증인의 사명을 감당하는 장면이 나타난다. 그 자세한 이유는 잠시 후 11:1-13을 다룰 때 살펴보자)


세 가지 series의 구조를 보면 '인'이나, '나팔'이나 '대접'이 따로 따로 떼어져 있는 세 개의 재앙의 모습이 아니라, 일곱째 인의 내용이 바로 7나팔이며(8:1절 이하), 일곱 번째 나팔이 최후의 심판인데 그 내용이 일곱 대접으로 구성되어(15:1) 있는 하나의 심판이다.

9장 20절을 보면 지금까지의 재앙과 위협과 심판의 모습으로도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이들에 대해서 단도직입적으로 심판하시기 보다는 일곱 번째 나팔로 인한 일곱 대접의 재앙을 쏟으시기 전에 또다시 간격을 두시면서 까지 (마치 7장에서와 같이) 새로운 방법으로 그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의도를 볼 수 있다.


5. 하나님의 새로운 계획.

1> 계시록11:1-13.

이 내용은 천사들에 의해 전달된 하나님의 계획이었다.

천사는 요한으로 하여금 이 계시를 먹게 했다(10:9-10).

요한은 먹고 흡수하고는 모든 사람에게 이 계시를 알게 해야 했다(10:11).

하나님께서 주신 계시의 내용이 11:1-13절이며 그 내용을 확대한 것이 바로 12장부터 15장까지이다.


그 내용의 핵심은 무엇인가?

4절/ 교회의 역할 을 강조

교회를 두 증인(3절), 두 감람나무, 두 촛대(촛대는 이미 2장에서 교회임을 살펴보았음)로 비유함으로서 교회의 역할을 설명한 것이다.

(왜 둘일까? 이는 증언의 신실성을 위해 2인 이상의 증거자가 합당함을 신명기에서 밝히고 있음)

교회는 증인으로서 PAX Romana에서 살고 있는 자들에게 "그것은 거짓이며, 사탕발림"이라는 것을 증언하게 되자 세상은 그들을 몹시도 괴롭게 한다.

그런 상황에서도 교회는 증인의 사명을 감당하고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결국 증인들은 순교를 당한다.

반면에 세상에는 지진을 비롯한 재앙의 모습들이(그러나 다 멸망당하는 것은 아니다. 성의 1/10 그리고 7천만 죽고 나머지는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나타난다.

교회는 순교를 당한다.

그러나 3과 1/2(3일 반 / 유대 묵시문학의 전승에 의하면 3과 1/2은 '잠시'를 의미한다.)후에 바로 부활하게 된다.

일방적인 심판만을 가지고는 구원의 사역이 어려움을 아시고 두 증인(교회의 신실한 증인들)을 통해서 구원의 계획을 이루신 것이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간추려 보자.


성육신과 십자가에서 죽으심 지상에서의 사탄의 방해 + 짐승의 포악 파루시아 (이로서 그리스도는 그러나 활동적인 대리인인 교회를 세워 하나님 공중에서 사탄의 뜻을 실현하게 하심.

이기심) 예수그리스도의 거룩한 전쟁을 교회가 계승하여 그러나 땅에서는 순교를 동반한 신실한 증거를 통하여 "세상에서 짐승으로 인해 죄악이 하나님나라를 실현시키심"

관영함 (이 내용이 계시록11:1-13이고 그 확대 해석이 12장 이하이며,13장에서는 필연적인 사탄과의 사투가 일어난다)


2> 계12장-15장/ 계11:1-13절의 확대해석

12장/ 그리스도와 용(사탄)과의 대결을 그림. 그리스도의 성육신 시기 동안의 대결.

13장-14장/ 그리스도인과 사탄(용, 짐승, 거짓선지자(짐승의 사제))과의 대결.


12장의 기록은 창세기3:15절의 여인의 후손과 뱀의 대결을 연상시킨다.

여인(12:1절)은 하와 즉 시온(이스라엘)을 상징. 여기서 메시아가 나온다.

처음에는 사탄의 세력이 여인의 후손이 하나님나라를 확장해 나가는 일을 방해하며, 마치 용이 승리한 것처럼 여인의 후손은 도망 다닌다.

(마치 용이 헤롯을 이용해서 아기 예수를 피난시키게 어려움을 제시했던 것처럼).

그러나 용은 매번 아기에 의해 패배 당한다.


13장은 주로 짐승의 포악 정치를 잘 표현했다.

짐승을 그들의 주로 인정하며 신으로 섬길 경우 섬기는 자들에게 바벨론의 영광(달콤하고 쾌락을 향유할 수 있는)을 줄 것임을 강조(PAX Romana).

경제적 정치적 안정, 평화의 모습으로 올라와서 사람들로 하여금 구원의 체계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함.

이 행위에 대해 증인들이 "그것은 진짜가 아님"을 폭로하게 되자 증인들을 박해하기 시작하며 "로마 제국에 충성하지 않으면, 짐승의 표를 받지 않으면 매매 할 수 없게 하리라"고 포악성을 드러냄.

그러나 14장에서는 이제 메시아인 어린양이 시온산에 서셨고, 그의 무리들 14만4천명이 어린양 주위에 있다. 그들은 군사로서 이 세상과 전쟁을 벌인다.

전쟁의 근시안적인 결과는 13:13절 이하를 보면 짐승이 승리한다.

오히려 어린양의 군사들은 짐승의 횡포에 의해 순교를 당한다.


그러나 잠시 후인 14장8절을 보라!!

어린양으로 인해 바벨론, 로마, 즉 사탄의 세력이 무너진다.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도 고난을 받는다(14:10).

결국엔 교회의 승리가 보장된다.


잠시 초점을 바꾸어 군사들의 순교를 생각해 보자.

순교란?

멸망의 세상으로 부터 건짐을 받아 하늘의 홍해를 건너 하늘의 영광에 이르는 축복의 길이다.

그렇다면 모든 그리스도인은 다 순교를 당하는가?

15장만 보면 그런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3:21(파루시아때 다 잔치에 참여하는 모습) 이나 16:15절(도적의 비유/ 예수님의 재림의 때에 그리스도인이 있음을 시사)을 볼 때 다 순교 당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15장의 모습은 적그리스도와의 싸움의 절실함을 강조하기 위해서 순교의 장면을 강조한 것이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다 순교를 당한다는 의미는 아닌 것이다.

그리스도의 오심(16:15)과 이 세상에서의 잔치(3:20-21)를 연관해서 생각할 때 휴거라 해서 꼭 하늘로 올라가서 그리스도를 맞이한다는 것만을 생각할 필요는 없게 만든다.

하나님의 나라가 변화된 이 세상에서 영원히 계속될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 두어야 한다(이미 '갱신'에 대해서 살펴볼 때 고찰했다)


3> 대결의 결과

14장을 보면 교회가 신실한 증언을 통해서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에게 선택을 강요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함으로 참 하나님을 섬기든지(그러면 구원) 계속해서 짐승을 따르든지(그러면 심판)...

이 성전(Holy War)의 결과를 요한은 14장에서 두 가지 그림으로 그려 내었다.


a. 곡식을 거두어들이는 그림(14-16절) : 구원의 그림으로서 11장 1-13절에 의하면 그들의 수치는 9/10이다.

b. 포도즙틀 그림(18-20절) : 피 흘림의 그림으로서 심판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 수치 는 1/10으로 7000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여기서 7000은 꼭 문자적이라기보다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숫자를 말한다.

그러나 구원받을 사람들의 9/10에 비하면 1/10밖에는 되지 않는다.)


이런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회개치 않고 돌아오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는 마지막으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이것이 일곱 번째 나팔이다.

이로서, 교회는 승리의 노래(계15장)를 부르며 끝까지 짐승의 손아귀에 있는 자들은 멸망을 받으리라.


*승리의 노래*

출애굽기 15장에 나오는 모세의 노래를 다시 재창함으로 성도들의 궁극적인 승리를 확증하는 것이다.

a.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원수를 심판하심 - 그의 백성에게는 구원!

b. 하나님은 우상과 비교될 수 없는 참 하나님이심 (15:11)

c. 모든 열방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떪 (15:14-16)

d. 그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예루살렘으로 모으심 (15:13-17)

e. 야훼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영원히 통치하신다. (15:18)

이 노래를 다시 성도들이 재창하는 것이다.

(그러나 출애굽기의 노래와 계시록의 노래의 차이점은 만국의 떨림이 부정적(모세의 노래)이 아니라 주님께 경배하는 것으로(계시록) 긍정적인 떨림(경배의 개념)으로 나타난다.


이제 그리스도의 사역을 다시한번 총정리 해 보자.

그리스도는 그의 성육신과 죽으심, 그리고 부활로 인하여 사탄을 결정적으로 이기셨다. 그런데 그 과정이 3단계로 나타난다.


a. 1 단계

그리스도의 선포로 교회가 탄생했다.

이는 제 2의 출애굽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구원함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 졌다.

b. 2 단계

계11:1-13의 과정. 예수의 증인들이 순교하면서 까지 신실하게 증거 함으로 Holy War에서 승리함( 헤아릴 수없는 무리 9/10이 구원을 얻음. 반면에 1/10는 일곱째 나팔에 의한 심판을 받음. 계11:15-19 일곱 나팔의 재앙 및 그 해석인 12장-15장 그리고 19:11-21 참조 )

c. 3 단계

그리스도의 파루시아(재림). 사탄의 3위 일체가 패망. 모든 악이 제거 당함.(19:11-21)

반면에 교회와 구원받은 사람의 구원이 완성됨 (다시는 악과 고난이 일어나지 않는

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천년왕국의 그림을 사용함)


6. 천년왕국

유대 전승에 의하면 영원하신 하나님의 나라 이전에 그리스도의 왕국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특히 다니엘서 7장을 참고해 보면 이 사상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인자 같으신 이(메시아)가 그의 보좌에서 심판을 행하신다.

그때 불로 용의 삼위일체를 깨뜨리신다(11절)

그리고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그에게 세세 무궁토록 있게 된다.(14절)

요한은 이 사상을 인용하면서 이 사상에다가 1000년왕국(1000년/ 헤아릴 수없는 오랜 세월을 의미)의 사상을 첨가하여 설명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여기에 이상한 장면이 나타난다.

분명히 11:15-19절과 그 해석인 12장-15장, 그리고 19장 11-21절에 의하면 용의 삼위일체가 멸망을 당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2장7절을 보면 천년왕국이 끝난 후에 용의 세력이 또 등장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11:15-19및 19:11-21에서 용에게 가한 심판은 임시적이고 불완전한 심판이었을까?

이것은 다니엘서에서 용을 파멸시킨 메시아 그림과 상반되는 것일까?

아니다.

천년왕국 이후에 나타난 7-10절 말씀을 보면 사탄의 세력이 성도들을 유혹하지만 그들이 결코 성공하지 못하며 하늘에서 내려오는 불에 의해 소멸된다.

결국 이것은 하나의 사상을 강조하는 것이다.

종말의 구원의 완벽함을 알리기 위해서 심판 당한 사탄의 세력을 무저갱이란 그림을 이용해서 설명한 것이다.

강조점은 이것이다.

설사 멸망당한 사탄의 세력이 다시 나와서 성도들을 유혹한다 할 찌라도 성공하지 못하고 오히려 완전히 멸망당할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 사탄의 3위1체가 접근하지 못하는 완벽하고 완전한 세계가 됨을 강조하기 위해서 다니엘서의 전승과 천년왕국의 그림을 통해서 설명한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의 왕국은 천년이 아니라 영원하며 완벽한 것이다.

왜냐하면 사탄이 더 이상 꼼짝을 하지 못하니까 말이다.

새 하늘과 새 땅에는 다시 바다(Chaos가 나올 가능성이 있는)가 있지 아니하다.

따라서 천년왕국을 문자적으로 천년동안의 왕국으로 해석하면 혼란에 빠진다.

그 나라는 사탄이 넘보지 못할 완전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이다.


만약 문자적으로 해석할 때 생기는 의문점을 참조로 생각해 보자.

이미 19:11-21에 의하면 일곱 번째 나팔에 의한 일곱 대접의 재앙으로 사탄의 3위1체가 다 멸망당했다.

그런데 천년이 흐르고 난 뒤에 그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고 또 악의 세력 역시 다 심판 당하고 그 외의 사람들은 다 구원을 받았는데 사탄이 다시 살아난다면 그때 어떤 민족을 유혹하여 그들의 세력을 만들어서 또다시 구원받은 사람들을 유혹한단 말인가?

만약 유혹 받을 사람들이 있다면 하나님의 구원 사역으로 구원받은 사람들이 또 다시 죄에 빠져 인하는 것이 되지 않는가?


따라서 문자적으로 천년왕국을 이해하려고 하면 안 된다.

이는 하나님나라의 완전함을 다시 한번 강조하기 위해 그려낸 그림인 것이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재앙 시리즈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재앙 시리즈(인, 나팔, 대접)는 시간적인 배열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의 심판을 여러 가지 신학적으로 배열한 것이다.


8:1-5까지의 인의 모습이 바로 종말을 선언하는 장면이다.

그 인의 일곱 번째 모습이 일곱 나팔의 재앙인데 그 방법이 일곱 대접으로 나타난다는 것으로 11:15-19절에서 일곱째 나팔이 울릴 때 이미 악의 삼위일체는 멸망을 당하게 된다.

그런데 16:17-21에서 로마의 멸망이 나오는 것을 보니까 11:15-19의 심판이 불완전한 것으로 여겨지는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도 언급을 했지만 11:15-19의 내용을 설명한 것이 12:-15:이며 16장에서는 일곱 번째 나팔의 내용인 일곱 대접을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에 반복되어 기록된 것이다.


따라서 재앙의 세 시리즈는 시간적 시리즈가 아니라 종말의 하나님의 대 심판과 하나님나라의 완성을 그리는데 신학적 성격을 다양한 측면에서 설명한 것이다.

19:11-16절을 보면 이미 이루어진 하나님나라의 모습을 다른 모습으로 부연해서 설명하고 있다.

파루시아의 모습을 심판적인 차원(Holy War)에서 부연 설명하는 것이다.

19:1절에서 이미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 졌으며, 이로 잔치(어린양의 혼인잔치)가 진행 중이다.

이는 구원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19:20을 보면 또 사탄의 세력들은 심판하시는 모습이 또 나온다.

이것은 그들이 불사조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심판의 확실성을 강조한 것이다.

20:1절을 보면 "내가 또 보매"라고 표현한다.

4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21장1절에서도 또 나온다.

이 모든 표현들은 바로 하나님나라의 영광스러움과 완전함에 대한 또 다른 그림으로 계속해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계시록의 이해를 가지고 계시록의 난해점인 666을 해석해야 한다.

666은 짐승의 표이다.

그러면 그것의 실재는 무엇일까?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고 있는 컴퓨터의 바코드인가?

666의 행위는 하나님을 대적하며 하나님의 백성들을 유혹하는 존재이다.

그렇다면 일차적으로 그는 네로이다.

'네로 가이사'라는 이름을 헬라어로 쓰고 히브리어로 음역해서 히브리숫자로 대치하면 666이 된다.

이것은 암호이다.

이는 하나님의 왕권을 반대하는 로마의 포악정치를 의미하는 것이다.

당시에는 네로가 사탄의 앞잡이였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누가 네로(666)인가?

주님 오실 때까지 하나님의 통치를 방해하는 적그리스도라면 그가 666인 것이다.

따라서 그는 스탈린일 수도 있고, 히틀러 일수 도 있고, 우리나라의 많은 이단일 수도 있는 것이다.


결 론 / 계시록의 메시지


1. 그리스도의 승리(하나님의 승리)

2. 우리의 구원의 완성, 구원의 확실함(완전함) 악의 세력을 무시무시하게 그려서(용, 짐승, 짐승의 선전부장) 상대적으로 그리스도의 승리의 위대함을 더 들어냄

3. 세상과의 대결 속에서 사탄의 유혹을 받을 때 우리는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결정해야한다.

4. 하나님의 신실한 증거는 순교의 고난까지 각오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의 승리는 완전히 보장된다.

극복하는 자는 보좌에 앉으리라

5. 신실한 증거의 사명을 가져야 한다.

(따라서 계시록은 '선교의 책'이다)

참고/ 성경의 강조점 비교


. 4복음서/ 복음의 기원. 예수는 구원의 주이심을 강조.

. 바울서신/

a. 어떻게 구원을 덕 입는가? (율법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b. 복음의 성격/ 오직 하나님의 은혜(Sola Gratia)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의

c. 성도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나?/ 윤리적인 삶.


계시록/ a. tention 사이의 오늘의 교회가 그리스도의 승리의 확신을 가지고 이 세상의 우상숭배 및 쾌락의 유혹에 현혹되지 말아야 한다.

b. 예수의 증거를 신실하게 증언해야 한다.

(순교의 각오를 하면서까지 이를 위해서 성령이 힘을 주신다.)


*계시록의 성령

1>일곱 영/ 7(충만수)번 기록됨.. 성령의 충만함.

영/하나님의 영(4:5절), 그리스도의 영(5:6절) :삼위일체의; 모습을 뒷

받침.

2>영/ 14번 기록됨(7*2)

특히 교회 내에서의 예언활동, 증거활동을 하게 하는 힘으로 나타남.

예언의 영을 강조.

"하나님의 계시와 구원을 우리에게 이루시기 위해 예수그리스도가 오셨다.

그 그리스도로 이루어진 계시와 구원을 우리에게 적용시키신 분이 성령이시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가 아니라면 아버지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다 보여 주실 수 없다.

또한 아들의 계시와 구원이 우리에게 온전히 적용되기 위해 성령과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이어야 한다."

부록1. 요한계시록의 숫자이해


( 이 부분은 장신대 신약학 교수인 박수암의 연구로서 '목회와 신학' 1992년 1월호 "성경적 종말론 대 연구(1)"(p87-90)에 실린 글을 인용한 것임)


요한계시록에는 약 200개 정도의 숫자가 나오는 바, 대개 상징적인 의미를 위해 사용되었다.


# 1

수량을 표시하면서도 (5:5, 7:13, 8:13, 9:1, 13:3,8,15, 15:17, 17:10, 19:17,21, 21:21등) 절대를 상징하고 있다.(17:13,17)

그것은 분열되지 아니한 온전한 수이며, 그리하여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나중이 되신다.


# 1/2

1의 파열된 수로서 불안정과 일시성을 나타낸다.

8:1절의 "반시"는 문자적은 30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긴장된 한 순간을 가리키는 것이다.


# 1/3

1의 파열된 수로서 전체의 일부분을 가리킨다.

요한계시록에서는 특히 나팔재앙의 피해면적이 부분임을 나타내는데 사용되어 있다.(8:7-12, 9:11)


# 1/4

1의 파열된 수로 보다 적은 일부분을 가리킨다.

넷째 인의 피해면적이 나팔재앙의 피해면적보다 더 부분적임을 나타내는데 사용되었다(6:8)


# 2

실제 수이면서(9:12, 11:3,10, 12:14, 13:11, 19:20) 상징적인 수이다.(11:3,4)

증인의 완전함을 나타낸다.

2는 구약에서 증인의 숫자이다(신17:6,19:15)

예수께서 제자 파송 때 둘씩 짝을 지어 보내심, 변모 때에 모세와 엘리야의 나타남, 빈 무덤에서의 두 천사, 승천할 때의 두 천사 등은 이를 암시한다.


# 3

수량을 나타내면서(6:6,8:13) 하늘의 수 신적인 수를 암시한다.

(9:18, 16:13,19, 21:13) 삼위 하나님.


# 3과 1/2

요한계시록에서 '삼일 반'(11:9,11) "한 때, 두 때, 반 때,"(12:14)로 나타나며 한이레의 절반 즉 완전의 파열, 불안정한 때, 짧은 기간을 말한다.

이는 다니엘서의 "두 이레의 절반"에서 유래한 것으로 거기서는 "삼년 반"을 상징했으나 여기서는 하나님의 백성의 제한된 환난기간을 상징하는 데 사용되었다.


이 숫자가 요한계시록에서 문자적일 수 없음은 저자가 이를 42개월(11:2,13:5), 1260알(11:3, 12:6)과 동일 시 하고 있으며, 42개월 혹은 1260일이 문자적일 수 없음은 저자가 이를 열흘과 동일 시 하고 있기 때문이다(2:10)


# 4

수량을 나타내면서도(4:6, 5:6, 6:1), 땅의 수, 가시적인 피조물을 상징하는데 쓰였다.

네 생물(4:6) 땅의 네 모퉁이, 땅의 사방의 바람(7:1), 네 천사(7:2), 네 뿔(9:13), 사방(20:8)등


# 5

문자적이면서(9:5, 17:10), 10의 절반으로 상징성이 있다.

세상 만수10의 파열은 제한된 재앙의 기간을 나타낸다.


# 6

신적인 완전수 일곱에 하나 부족한 수로서 불완전을 상징한다.

네 생물은 각각 여섯 날개가 있다고 했는데(4:8) 이는 실재 모습을 가리키면서(사6:2)동시에 피조물임을 가리킨다.


# 7

문자적이면서(1:4, 5:1), 완전을 상징한다.

일곱 영(1:4), 일곱 등불(4:5), 일곱 뿔,일곱 눈(4:6), 일곱 무리(10:4), 일곱 머리(12:3), 일곱 면류관(12:3),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 등 7은 3+4, 즉 천지 합수로 로서 신적인 세계의 한 세트 혹은 한 싸이클이다.


# 8

일곱을 한 '싸이클'로 볼 때, 여덟은 다음 사이클의 첫 수이므로, 이는 새로운 국면의 시작을 의미한다.

17:1절의 "여덟째 왕"은 문자적인 "여덟째 왕"이 아니라 새로운 국면의 박해를 시작하는 왕임을 나타낸다.


# 10

세상의 만수로서, 세상에서는 10을 한 주기의 끝으로 본다.

제한된 완벽함을 상징한다.

열흘 동안의 환난(2:10), 열 뿔(12:3, 13:1, 17:7), 열 면류관(17:3), 열 왕(17:12)등


# 12

천지 승수로서(3*4=12) 완전수, 하나님의 백성의 숫자이다.

전체 혹은 완전함을 상징한다.

구약에서 12는 이스라엘의 12지파이고 신약에서 12는 그리스도의 사도들의 숫자이다.

그리하여 본서에서는 모두 하나님의 백성과 관계된 사실들과 관련되어 나온다.

"열두 별"(12:1), 열두 문, 열두 천사(12:12), 열두 기초석, 열두 사도, 열두 사도 , 열두 이름(21:14), 열두 문, 열두 진주(21:21), 열두 실과(22:2).


# 24

12+12로서, 구약과 신약을 통한 하나님의 백성 전체를 나타내는 완전수이다.

이십사 보좌(4:4), 이십사 장로(4:10, 5:8, 11:16등)


# 42

'삼일 반'혹은 '한 때, 두 때, 반 때'를 개월 수로 나타낸 수이다.

묵시문학의 시간법은 1일을 1년으로 계산하고 (민14:34, 겔4:6), 1월을 30일로 계산한다(창7:11-8:4)

그리하여 삼일 반은 3년 6개월, 즉 42개월이 된다.

하나님의 백성의 고난당하는 시간을 가리킨다.


# 144

12*12로서 하나님의 백성을 포용할 만한 크기를 나타내는 숫자이다.

21:17절에서는 성도들의 성, 즉 새 예루살렘 성곽의 높이가 144규빗이라 했다.

완전을 상징하는 표시이다.


# 666

13:18절에 한번만 나온다.

이것이 상징인지, 어떤 한 인간의 암호인지 논의가 되어왔다.

상징일 경우 이는 6이 100배, 10배, 1배 있는 것으로 완전한 불완전을 나타내는 것으로 인간의 수, 세상적인 수, 마귀적인 수라 생각한다.

암호일 경우 이를 한 인간의 암호로 보고, 그 인간의 이름을 지칭하기를 피하기 위한방법으로 본다.

상징보다 암호가 본문의 맥락에 합당한 견해이다.

저자는 자신이 666을 "한 인가의 수"라고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666은 누구일까?

여러 가지 설이 있다.

a)네로라는 설, b) 테이탄(헬라의 신화에 나타나는 하나님을 적대하는 거대한 신)이라는 설, c)로마설('라틴'이라는 말을 수치로 계산했을 경우), d)도미시안 설 등, 이들의 이름을 히브리음역으로나, 헬라어음역으로 표기한 후 수치로 대입하면 다 666이 된다.


이들 중에 테이탄설은 요한이 갑자기 헬라신화를 인용했다(?)는 의아심을 불러일으킴으로 부적절하다고 보며, 로마설도 사람이 아니라 그는 국가이고 또 신약어디에도 로마를 라틴이라고 표기한 곳이 없기 때문에 부적절하다.

그렇다면 네로설이거나 도미티안설이다.

계시록이 도미티안 황제의 박해시기에 기록되었다면 이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서론에서 보았던 것처럼 당시의 박해는 거국적이었다기 보다는 아직까지는 지엽적인 것이었기에 네로의 박해시가 아닌가?하는 잠정적인 결론을 내렸었다.

그렇다면 네로설이 옳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우리는 지금까지 네로를 생각하면서 이 공부를 해 왔다.)


# 1,000

10의 3자승한 수로서 오랜 기간을 상징한다(20:2, 4, 7)


# 1,260

3년 반 혹은 42개월을 날수로 계산한 것이다.

교회의 증거기간이 제한되어 있음을 상징한다.


# 1,600

4*4*100으로서, 세상적 넓은 면적을 나타내는 숫자이다(14:20)


# 12,000

12*1000으로서 성도들을 용납할 만한 넓이임을 상징한다(21:11)


# 144,000

12*12*1,000으로서 구원받은 자의 수가 많음을 나타낸다.(7:4,14:1)

저자는 이를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능히 아무라도 셀 수없는 큰 무리"라고 해석한다.


# 200,000,000

2*10,000*10,000으로서 군사력의 수의 많음을 상징한다(9:16)


# 만만 천천

다수를 상징한다(5: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