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킨의 요한 계시록
계시록은 A.D 96년에 쓰여졌다. 기록자는 사도 요한이다. 그는 그가 “본 것”과 “들은 것”을 기록하였다고 말했다. 따라서 이 책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며, 요한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계1:1)이다.
성경의 예언서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치가 있다. “마지막 날들”에 관한 예언들은 구약 성경 전체를 통해 곳곳에 산재해 있다. 계시록은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관한 하나님의 계획과 순서를 계시하여 준다. 계시록은 산재해 있던 모든 예언들의 최종판이며 결론에 해당하므로 성경의 마지막에 있는 것은 가장 정확한 위치인 것이다.
이 책은 “사건”들이 가득하다. 땅과 하늘이 거의 동시에 출현하며 구름은 말려 버리고 보좌들 장로들과 천사들의 모습을 볼수 있으며, 하프, 나팔, 몸이 없는 혼들과 합창을 들을 수 있다. 땅이 하늘에 접하듯이, 또한 슬프게도 지옥도 접한다. 여기에는 강하게 반대하는 선과 악이 있다. 선과 악이 만나며, 여기에는 오직 날카로운 대립 뿐 타협이 없으며, 이 길게 이어지는 전쟁의 최후는 선의 승리로 끝날 것이다.
이 성경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게 편지하는 것이다. 이 아시아는 아시아 대륙이나, 소아시아 전체를 의미하지 않으며 단지 서쪽 끝 부분을 의미한다. 이 일곱 교회의 이름들은 지상의 모든 교회들의 이름이 아닌데, 적어도 다른 세 교회가 더 있기 때문이다. 골로새(골1:2) 히에라폴리(골4:13)은 트로아(행20:6,7) 그렇다면 이 일곱 교회들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교회를 위해 다시 오실때까지 교회 역사안에서 분명하게 밝혀진 일곱 교회 기간의 교회들 의 “특징”을 잘 나타내는1세기 말렵에 있던 교회들들을 선택하여 표현하거나 “상징”이었다.
요한은 메시지를 받았을 때는 팟모섬에 있는 감옥에 있었다. 그는 그의 뒤에서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었다. 보려고 돌아섰을 때에는 일곱 금촛대를 보았으며 이곱 촛대 사이에는 오른손에는 일곱 별을 가진 인자 같은 이가 서 있었다. 그는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천사이며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를 나타낸다고 말했다. 이 촛대는 등잔이다. 촛대는 자신 스스로 불을 밝히는 반면에 “등잔”의 빛은 기름통에서 성령을 상징하는 기름을 “등잔대”에 공급해 주어야 한다. 이것으로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들을 빛이 아닌 단지 “등잔대”로 여기신다. 오직 밤에만 사용하는 “등잔”과 “별들”이란 묘사를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밤”임을 가리키고 있다(계1:19).
계시록을 해석하는데 핵심적인 열쇠는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세 갈래의 구분”이다.
I. 과거의 것
“네가 본 것들과”
등잔 사이에서 본 그리스도의 환상 제1장
II. 현재의 것
“현재 있는 일들과”
분명한 일곱 교회 제2장과 제3장 요한은 백살은 훨씬 넘지 않았으며, 살아남은 오직 한 사도였다. 예루살렘 도성과 성전은 이미 멸망당하였으며 유대인들은 26년전에 이미 흩어졌으며, 요한이 주목하고 있는 것은 일곱 상태를 나타내는 아시아 교회였다.
III. 미래의 것
“이후에 일어날 일들”
4장의 처음부터 계시록 마지막까지이다(계4:1).
“일곱 교회들의 메시지”가 두 환상, 1장의 “일곱 촛대” 사이의 “그리스도의 환상”과 4장의 “네생물과 보좌 주위의 스물네 장로의 환상” 사이에 삽입되어 있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4장은 하늘로 올라간 후에(살전4:13-17) “영광스럽게된 교회”의 환상이다. 즉 이 책은 두 부분으로 나눌수 있다.
2장과 3장은 “현재 있는 일들” 과 이후에 일어날 일과 “일곱교회의 멧세지”의 해석은 초대 교회들에게는 감추어져 있었는데, 이는 일곱 교회가 시간의 추이에 따라 일어나 교회사의 성격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일곱 교회가 나타내는 시기”가 이들에게 완벽하게 계시되었다면, 초대 교회사람들은 주님의 재림이 아직 멀었다는 생각 때문에 신앙을 유지하기 어렸웠을 것이다. 반면에 이 일곱 교회의 성격은 교회사의 일곱 기간의 역사를 묘사한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계시록에 기록된 이러한 일곱교회의 상태는 요한이 있던 그 당시에 있었던 교회들의 정확한 상태였다는 점이다. 우리는 교회사를 통해 1세기가 끝나갈 무렵에 초대 교회들 안에 “거짓 교리”의 누룩이 만연해 있었음을 볼 수 있다. 각 교회의 특징에 따라 적합한 이름이 주어졌는데, 이는 이름에 맞는 교회들의 특징에 따라 역사에 적용하기 위해서이다. 우리가 교회사를 통해 볼 때 잊지 말아야할 또 다른 중요한 사항이 있다면, 시간이 경과할수록 교회는 강성해지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타락하고 종말은 배교로 끝난다는 점이다. 물론 눈에 보이는 “교회 건물의 증가와 교인수의 증가”는 다음에 나오는 도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모두 배도로 끝나고 말 것이다.
우리는 각각의 교회의 특징과 그 시기를 자세히 살펴봄으로써 주어진 말씀을 신중히 생각해야 할 것이다.
1. 에베소서 교회의 멧세지(계2:1-7)
그리스도께서 이 교회에 대해 책망하시는 부분은 “첫 사랑을 저버린 것”이다. 이 교회의 성격은 이 교회의 이름에서 알 수 있는데, 에베소는 “가게하다(let go”, “느슨해지다(to lex)”라는 뜻이다. 실족하는 교회가 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을 알았던 바울은 일부 내용에서 앞으로 일어날 것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다.
내가 아는 것은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들이 너희 가운데로 들어와서 양떼를 아끼지 아니할 것이며 또한 너희 가운데서도 사람들이 일어나서 왜곡된 것을 말하여 제자들을 끌어내어 자기들을 좇게 할 것이라.(행20:29,30)
이 경고의 의미는 6절에서 다시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네게 이것이 있으니, 즉 네가 니콜라파의 행위를 미워하는 것이라. 나 역시 그것을 미워하노라.” 여기서 바울이 말한 “이리들”이란 “니콜라파”를 말한다. 그들은 분파가 아니라, “제사장 직분”을 정착시키려는 교회 안의 한 무리들이다. 아마도 구약의 레위지파와 유사한 제사장 직분을 따르는 교회를 이루려고 시도하였을 것이다. “니콜라파”란 그 단어가 의미하는대로 “지배한다”라는 “니코(Niko)”와 “평민” 혹은 “평신도”라는 “라오스(Laos)”로 이루어진 단어의 의미에서 알 수 있다. 이 목적은 “성직자 제도”를 정착시키려는 것이다. 그들을 평신도 위에 놓는데, 이것은 신약의 계획과는 전혀 관계 없는 것이다. 그들을 목자들(Pastors)이라고 부르지 않고, 성직자들(clergy), 주교(Bishops), 대주교(Archbishops), 추기경(Cardinals) 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우리는 “사도직 계승”의 교리의 기원을 알게 되며, 평신도로부터 성직자를 분리시키는 것이며, 이것은 하나님께서 미워하신다. 에베소 교회는 속지 않았으며, 그들이 거짓말쟁이이며, 거짓 사도라는 것을 찾아내었다. 에베소 교회의 특징은 교회사 A.D 70년에서 A.D 140년이에 있었던 초대교회의 일반적인 특징을 잘 담고 있다.
2. 스머나 교회의 멧세지 계2:8-11
“에베소 교회”기간에서 주님께서 책망하신 것은 “첫 사랑”을 저버린 것이었으며, 이것이 그분을 돌아서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스머나의 어원은 “쓴맛”이며, “몰약”을 의미한며, 이 약은 죽음과 관계 되어있다. 이것으로 우리는 교회 성도들에게 닥칠 박해와 죽음을 예언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들은 “두려워하지 않았던 점이 고난을 겪도록 만들었다. 그들은 죽을 때까지(until death)가 아니라 죽기까지(unto death) 신실하였다.” 그들은 자연적으로 죽을 때까지가 아니라 박해의 가중함으로 죽음의 고통이 필요했을 때 기꺼이 순교자들의 대열에 참여했던 것이다. 그들은 “생명의 면류관”을 상으로 받을 것이다. 이것이 순교자의 면류관이다.
그들은 그들 박해의 주동자가 마귀이며, “10일”동안 고난이 지속된다는 점을 알았다. 10일은 의심할 여지 없이 로마제국 통치 기간인 네로A.D 64년에서 시작하여 이오클레디안 A.D 310년 까지 진행된 “10번의 큰 박해”을 예언한 설명일 것이다. 교회사에서 일곱번의 “큰 박해”가 이 “스머나 기간” 중에 일어났다. 혹 아마도 가장 극악하게 박해했던 도미티안 통치시대 마지막 10년을 의미할 것이다. 이 기간은 A.D 170년에서 A.D. 312까지이다.
III. 퍼가머 교회의 멧세지
퍼가며 교회의 메세지에서 “사탄의 회당”이 언급되고 있다. 칼데아의 대제사장이며 왕이었던 아탈루스3세는 페르시아를 정복하기 전에 퍼가모로 가서 거기에 정착했다. 따라서 사탄은 그의 수도를 바빌론에서 퍼가며로 옳겼다. 처음으로 그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을 박해했는데, 안티파스도 그 순교자들 중에 한명이었다. 하지만 그는 곧 전술을 바꾸어 교회를 높이기 시작했으며 세상 사람들을 교회로 이끌기 위한 모든 방법을 동원했다. 콘스탄틴의 의도는 종교적이기 보다는 정치적이었다. 그는 한백성으로써 통치하기 위해 그리스도인들과 이교도를 융합시키를 원했으며, 그의 의도대로 그의 제국은 융합되었다. 이 연합의 결과 두가지 거짓되고 잔악한 교리가 교회 안으로 들어왔다.
첫 번째는 “발라암의 교리”이며 두 번째는 “니콜라파의 교리”이다. 이 두 번째 것은 이미 에베소 교회의 멧세지에서 살펴보았다. 그리고 A.D 325년에 니케아에서 열렸던 첫번째 가장 큰 교회 회의(공회)는 교회 안에 이러한 교리가 확고히 되는 발판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회의는 약 1500명의 종교 지도자들이 참석했다. 여기에서 주된 의결과제는 성직자 계급이 평신도를 지배하며, 정치적 통합과 종교체제를 이루는 교리를 정립하는 것이었다. 결국 여기에서 이들은 “니콜라파의 교리”를 교회의 정통교리로 확고하게 정착시켜 버렸다.“
“발람의 교리”는 민수기 22장 25장에서 발람의 이야기에서 유래한다. 이스라엘 자녀들이 카나안으로 가던 길에 있던 모압 땅에 이르렀다. 모압의 왕이었던 발락은 프올의 아들 발라암을 불러서 그들을 저주하게 했다. 발라암은 유프라테 강의 프돌에 살고 있었다. 하지만 주님은 발라암에게 이스라엘을 저주하도록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는 발락에게 “바알 프올”의 음탕한 제사에 그들을 초청하도록 제안했으며, 이로써 이스라엘을 주님께서 분노하실 올무에 빠뜨렸다. 그분 스스로 이들을 멸망시키도록 하는 것이다. 발락은 그대로 하였으며, 그 결과 이스라엘 남자들은 그들의 음탕한 축제에 갔으며, “모압의 딸들”을 보고 그들과 함께 음행을 저질렀다. 이것으로 하나님의 진노가 불붙어 그들에게 역병을 보내었고, 그들 중 42000명이 멸망당하였다.
여기서 “퍼가모”라는 단어의 의미는 “숱한 결혼”이며, 교회가 국가와 함께 연합하는 “영적인 음행” 즉,“발람주의”의 죄를 말하는 것이다. 콘스탄틴대제는 이교도들을 교회로 개종하도록 하기 위해 이교도들의 제사장들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할 때 “바실리카스”(Basilicas)라는 웅장한 건물들을 지어주었으며, 교회를 장식할 수 있도록 많은 돈을 지원해 주었다. 그는 또한 이들에게 최상의 제의를 입도록 해 주었다. 주교들은 값비싼 제의를 입고 바실리카의 높은 강단 위의 대리석 제단 옆에 만들어 놓은 높은 보좌에 앉게 했다. 그의 앞에는 낮은 계급이 앉았으며, 금과 보석과 장식으로 광채를 더했으며, 경배에서 감각적인 형태가 도입되었으며, 설교의 성격도 바뀌어졌다. 교회에 들어온 이교도들의 구미를 맞추기 위해 “이교도 의식”이 교회에 그대로 채택된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한가지 예로 크리스마스를 들수 있다. 태양을 숭배하던 이교도들은 12월 21일이 동지로 12월25일이 되면 낮이 서서히 길어지기 시작한다. 그래서, 그들은 이 날이 태양신의 아들이 탄생한 날로 생각했다. 이들은 이 날을 거대한 축일로 삼았으며, 로마에서도 각종 써커스를 하며 대대적인 행사를 벌였다. 주님은 의의 태양이시다. 그래서, 교회는 이 둘을 융합하여 12월 25일을 주님이 탄생하신 날로 정하고 이교도의 태양신(Sun-God)과 일치시켜 버렸던 것이다.
이때부터 전천년주의는 모두 “후천년주의” 로 바뀌기 시작했다. 교회는 점점 강성해지고 부유해졌다. 교회와 국가의 정교일치는 주님의 재림없이 이 땅에 인간의 힘으로 천년왕국을 건설하겠다는 주장으로 발전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지지해 줄 성경 구절을 얻기 위해서 유대인은 영원히 버림받았으며, 유대인에게 약속된 모든 예언은 교회에게로 넘어왔다는 주장을 내 놓았다. 이 기간은 콘스탄틴 대제의 즉위가 시작된 A.D.312년에서 A.D. 606년 보니파스 3세가 우주적인 감독(Universial Bishop)의 자리에 오를 때까지이다.
IV. 두아티라 교회에 보낸 메시지 계2:18-29
두아티라 교회에 주어진 칭찬은 그들의 행위이다. 그들은 상을 받을 만큼 충분한 수고를 했다. 하지만 이 교회에게도 책망할 것이 몇가지 있었다. 그들이 잘못한 것은 “자칭 여선지자라고 하는 이세벨”이란 여자를 교회에서 용납했을 뿐만 아니라 그녀가 음행을 “가르치도록” 그냥 두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사람들을 유혹하여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게 했다.
이 여자는 도대체 누구인가 하는 의문이 들 것이다. 이 여자는 선지자가 아니면서 자신을 선지자로 가장하는 사람이다. 그녀는 고상한 혈통을 타고 태어났는지 모른다. 그녀는 아마도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그녀의 실명이 이세벨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구약에 나오는 아합의 부인인 이세벨이란 여자와 유사한 인물일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 여자의 이름을 이세벨이라고 불렀다면 달리 설명이 필요치 않는 것이다. 그녀는 아브라함의 딸이 아니었다. 그녀는 투로의 딸이었으며 왕가의 자녀였다. 그녀는 잔인한 성품과 바알과 아스타롯에 대한 열렬한 신앙으로 유명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이드바알(Eth-baal)로써 당시 통치자였던 팔레스왕을 살해하고 왕이 되었다. 아합은 이스라엘 왕이었는데, 자신의 왕권을 안정시키기 위해서 정략적으로 이세벨과 결혼했다. 이세벨은 이스라엘에 바알을 숭배할 수있도록 했으며,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주의 선지자들을 살해했다. 그녀의 영향력은 남편 아합이 살아있는 동안뿐만 아니라 그녀의 두아들인 아하시아와 여호람의 통치기간 중에도 지속되었다. 더욱이 그녀는 자신의 딸 아탈리야를 유다의 왕이었던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과 결혼시켜서 우상숭배를 유다땅으로 까지 전파시켰다. 이로인해 예루살렘에도 바알의 산당이 지어졌고 온 이스라엘로 하여금 우상숭배의 죄를 짓도록 만들었던 것이다(왕상 16:29-33).
계시록에 나오는 이세벨이란 여자가 진짜 사람인지 그렇지 않는지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녀는 “종교제도”를 예표하고 있으며, 그 종교제도는 두말할 필요도 없는 “로마 캐토릭 제도”인 것이다. “성모 교회”(교황 교회)가 등장했을 때 거기에 가는 모든 사람들은 저절로 우상숭배자가 되어 버렸다. 거기에는 “교회의 가르침”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우월한 권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사람이 하나님의 대리자를 자임하고 선지자인양 속이고 있기 때문이다. A.D. 606년부터 종교개혁이 일어나 1520년까지의 캐톨릭을 자세히 공부해보면, “피의 미사”, “우상 숭배”, “이교도 의식”이 난무한 “이세벨주의”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기간은 또한 “십자군 전쟁”과 같은 이세벨식 박해도 있었음은 당연한 일이다. 우리는 누룩의 비유를 통해서도 이 진리를 잘 배울 수 있는데 두아티라 교회의 한 여자 “이세벨”과 복음의 빵덩이 속에 침투한 “누룩”은 똑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기간은 A.D. 606년에서부터 종교개혁이 일어난 1520년까지이다.
V. 사데교회에 보낸 메시지. 계3:1-6.
사데 교회는 살았으나 죽은 교회라고 부른다. 이 교회는 형식과 의식만이 존재할 뿐 생명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능력과 생명이 없는 교회는 의식과 형식적인 예배만이 존재할 뿐이다. 사데란 뜻은 “모면하는 사람”, 또는 “나오는 사람”이다. 이것은 종교 개혁 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캐톨릭에서 나온 것을 잘 나타내 주는 말이다.
종교개혁을 통해 마틴 루터와 수많은 개혁자들이 캐톨릭의 잘못된 교리와 거짓 가르침, 교권정치의 학정에 항거했다. 이 시기는 1517년부터 시작되었다. 마틴 루터는 독일의 위텐베르그의 수도원에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써 붙임으로써 교황의 독점적 고유 권한을 침범한 항거1자가 되었다. 1517년 10월 31일이 종교개혁의 시발점이다. 하지만 이것은 순수한 기독교의 종교개혁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정치 개혁에 가까웠다. 성령께서 도우셔서 이 반박문이 널리 유포되었고, 또 인쇄술로 인해 성경이 많이 발행되었다. 이 때까지 캐톨릭에 의해 갇혀져 있던 “이신득의”(믿음으로 의롭게 됨)의 교리가 빛을 보게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훨씬 많은 빛을 주었다. 이때까지 로마 캐톨릭 교회는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영적으로 완전히 죽어 있었다.
반면에 종교 개혁자들은 그동안 자행되어 왔던 수많은 종교적 의식과 쓰레기 같은 교리들을 말끔히 제거했지만 주님의 재림에 관한 약속을 회복시키지 못했다. 그들은 우상으로부터 하나님께로 사람들의 마음을 돌이켰지만, “하늘들로부터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지 않았다. 사데 교회는 A.D.1520년부터 1750년까지 지속되었다.
VI. 필라델피아 교회에 보낸 메시지. 계3:7-13.
필라델피아란 단어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문자 그대로 “형제사랑”이란 뜻이다. 이 교회는 사데 기간에 있었던 것과 같은 날카로운 교리 논쟁이나 상호간의 적대감 대신 형제들간의 친교와 사랑을 강조하는 교회이다. 그래서, 지난 150년간 복음 전도와 선교 사역을 감당했다.
이 교회에 관해서는 3가지가 언급되어 있다.
첫째, “적은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살아 있으나 영적으로 “죽은” 사데 교회가 영적으로 부활하듯이 부흥을 이루었다. 영적부흥은 필라델피아교회 시대의 특징이다. 이러한 부흥은A.D. 1739년에 죠지 휫필드에 의해 시작되어졌으녀, 요한 웨슬레와 찰스 피니, 디엘 무디가 뒤를 따랐다.
둘째, 그들 앞에는 “열린문”을 두었으며 아무도 그것을 닫을 수 없었다.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분, 열면 아무도 닫을 수 없고 또 닫으면 아무도 열 수 없는 분에 의해 맺어진 언약을 주목하라. 1793년 윌리암 케리는 배를 타고 인도롤 갔고 거기에 문을 열었다. 곧이어 주님은 중국, 일본, 한국, 아프리카와 여러 작은 섬들로까지 계속해서 문을 열어 나가셨다. 이제는 지구상에 선교사가 갈 수 없는 나라가 거의 없다.
셋째, “시험의 때”로부터 지켜 질 것이다. 이 시험은 온 세계에 닥칠 환란을 말한다. 필라델피아 교회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일곱 교회중 유일하게 살아남는 교회이다. 스머나 기간에 닥쳤던 10번의 시험에 비하면 시험이라고 할만한 어떤 시험도 받지 않았던 교회이다. “시험의 때”란 미래에 있을 “대환란”(Great Tribulation)을 의미한다는 점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며, 이것은 주님이 그분의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 오시기 전에 있을 것이다. 필라델피아 교회는 이 환란을 통과하지 않을 것이란 약속이 분명히 주어져 있다. 이 말씀은 교회가 환란을 통과하기 전에 들림받을 것이란 또 하나의 분명한 증거가 되지 않는가?
필라델피아 교회 기간은 1750년에서 1900년까지이다. 우리는 모든 교회들이 결국은 쇠퇴해지고 타락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부흥운동과 선교운동이 필라델피아 교회기간 동안 융성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영적인 능력대신에 일종의 선교사업으로, 기계적인 방법으로 전락하였다. 주님이 오시는 그날까지 이 현상은 지속될 것이다.
VII. 라오디케아 교회에 보낸 메시지 계3:14-22
이 교회는 그리스도께로부터 아무런 칭찬도 받지 못하고 책망만 들은 교회이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덥지도 아니하도다. 나는 네가 차든지 덥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그처럼 미지근하여 차지도 아니하고 덥지도 아니하기 때문에 내가 너를 내 입에서 토해 내겠노라.”
“미지근한 물”은 혐오감을 일으키거나 구역질을 일으키는 것과 다를 바없다. 그래서 “미지근한” 교회 만큼 그리스도께서 더 싫어하시는 것이 없다. 그분은 차라리 차거나 덥기를 원하신다. *이것은 쟌 웨슬리가 야외 설교를 하러 온 영국을 순회하러 다니기 전까지 영국 교회의 냉담한 영적인 상태를 잘 묘사한 말이다. 오늘날 우리의 교회들이 “미적지근한 상태”에 있다. 아주 극소수만이 영적으로 덥고 뜨겁다. 교회에는 많은 사람들이 다니지만 대부분은 사업상이거나 사교적인 장소로 다니기 때문에며 위원회, 사교 모임, 클럽처럼 양적 증가는 있으나, “영적인 뜨거움”은 전혀 없다. 부흥 집회가 열리지만, 주님꼐로부터 오는 능력을 기다리는 대신, 돈을 주고 불러온 부흥사들과 복음 가수들을 고용해서 분위기만을 띄운다. 이제 구령도 하나의 사업이 되어 버린 것이다. “미지근”하게 된 원인은 라오디케아 교회의 특징을 잘 드러내 주는 것이다. 라오디케아 교회는 “자기 기만”에 빠져 있다.
“말하기를 “나는 부자이며, 부요하고,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지만 네가 비참하고, 가련하며, 가난하고, 눈멀고, 헐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그들은 외적으로 매우 부유했지만 주님은 그들의 마음을 보신다. 오늘날도 이러한 교회들이 도처에 너무나 많이 있다. 교회사에서 라오디케아만큼 부요한 교회는 일찍이 없었다. 많은 교회들은 성곽같은 웅장한 교회건물을 지었고, 오색찬란한 유리창, 웅장한 강단, 아름다운 성가대, 엄청나게 많은 교인들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가난하고 벌거벗은 상태이다. 교회들은 부동산을 사들이기도 하고 은행에 넣어서 이자놀이도 한다. 물론 모든 교인들이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대부분은 술을 먹고, 도박을 하며, 춤을 추러 다니고 극장을 들락거리는 아주 세상적인 사람들이다. 가난하고 영적인 사람들은 그런 교회에 가고 싶어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이 출석하는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눈총거리이기 때문이다. 이런 교회들이야말로 비참하고, 가련하며, 가난하고, 눈멀고, 헐벗은 것이다.
만약 우리가 그런 교회에 초청을 받는다면, 그들은 우리들에게 자기들이 지어놓은 교회의 웅장한 외관을 보여주며 자랑스러워 할 것이다. 또한 웅장한 강대상과 수많은 성가대를 자랑하며, 교인수를 자랑할 것이다. 만약 우리가 “영적인 생활에 관한 질문”이나 “잃어버린 영혼에 관한 구령”에 대한 질문을 하게 되면 그들은 “오!. 그런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런 모임을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부족한 것이 없어요.”라고 말한다. 라오디케아 교회는 잃어버린 자에 대한 빚진 자의 심정으로 눌려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거두어 들인 부에 눌려 있다.
오늘날 교회가 갖는 가장 큰 문제는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없다”는 사고방식이다. 만약 우리가 돈만 갖고 있다면 세상 사람들을 돌이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돈은 사람을 회심시키지 못한다. 사람을 회심시키는 것은 돈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이다.
오늘날 라오디케아 교회가 안고 있는 또다른 문제는 “정의롭지 못한 돈”이다. 그래서 주님은 “불로써 단련된 금”을 사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금은 어떤 종류의 금인가? 불로써 단련된 금은 깨끗한 돈이다. “녹이 슬지 않는 금”은 사기로 얻은 금이나 추수한 일꾼들에게 품삯을 주지 않는 그런 금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라오디케아 교회의 모습이 얼마나 잘 묘사되어 있는가?(약5:1-4).
라오디케아 교회는 가난하면서도, 눈이 멀었다. 좀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근시안”이다. 그들은 현세의 재물만 탐할 줄 알지 하늘의 영적인 보화를 탐할 줄모른다. 그래서, 주님은 안약을 사서 바르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그들은 기름과 박하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안약은 사서 바르지 않는다.
이 교회는 또한 벌거벗은 교회이다. 그들의 외양은 가장 화려하고 최고급 소재들로 장식되어 있지만, 그런 것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흰 옷”을 사 입으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하지만 라오디케아 교회 성직자들은 까마귀 같은 검은 제의를 입고 있다.
라오디케아 교회에 주어진 가장 놀라운 계시는 “보라 내가 문앞에 서서 두드리노니”이다.
이 말씀은 일반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죄인들에게 인용하는 구절이지만 본래는 그런 뜻이 아니다. 주님은 지금 문밖에 서계신다. 이 문은 라오디케아 교회의 문이다. 지금 주님이 라오디케아 교회 문밖에 서 있다는 것은 교회에서 배척을 받고 있다는 의미이며, 다시 들어갈 수있도록 허락해 달라는 뜻이다.
이것은 신약 성경에 기록된 얼마나 놀라운 말씀인가? 외적으로 그렇게 부요해 보이는 교회가 그 안에는 그리스도가 없으면서도 그 사실을 의식하지도 못한다는 말인가?
오 주님은 지금 배척받고 있다.
그분의 백성으로부터 배척을 받았다. 왜냐하면 그들이 배척했기 때문이다. 세상으로부터 배척받았다. 세상은 그를 십자가에 못박아 버렸다. 교회로부터 배척받았다. 왜냐하면 그는 지금 들어가기 위해서 밖에서 문을 두드리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교회밖에 있을 수 있는가? 주님께서 일단 교회안으로 들어 가시면 영원히 거기에 거하시던가 아니면 아예 들어가시지 않던가 둘중의 하나일텐데 말이다. 어떻게 주님이 교회를 떠날 수 있단 말인가? 교회가 주님을 밖으로 나가도록 밀어 내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그들은 자기들 안에 주님이 계신지 알지도 못했고, 주님이 떠나신 것을 깨닫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계속해서 그분께 예배를 드렸고, 그 분을 찬양했고 온갖 종류의 의식을 거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주님은 물러나셨다. 이유가 무엇인가? 이유는 한마디로 요약할 수있다. “세속화”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그의 교회로 돌아올 수있는가? 회원들의 투표나 초청으로 되는 일인가? 그렇지 않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그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으며 그도 나와 함께 먹으리라.” 미지근한 물이 되어 버린 라오디케아 교회를 부흥시키는 길은 바로 각 개인이 자신의 마음 문을 열고 주님을 다시 들어오도록 하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는 바로 라오디케아 교회의 특징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라오디케아 교회는 주님이 다시 오셔서 “거듭난 교회”들을 데리고 가실 그 날까지 계속 될 것이다. 우리는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어떠한 큰 변화도 일어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없다.
대 환 란
성경은 이 땅위에 “대환란”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인 화요일에 올리브산 위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그 때에 대환란이 있으리니, 그와 같은 것은 세상이 시작된 이후로 지금까지 없었으며, 또 결코 없을 것이기 때문이라. 만일 그 날들이 단축되지 아니하면 어떤 육체도 구원받지 못하리라. 그러나 택함 받은 사람들(이스라엘)을 위하여 그 날들이 단축될 것이라”(마24:21,22).
이 환란은 A.D 70년에 예루살렘이 멸망 할 때의 유대 민족에게 닥쳤던 끔찍한 고난이 아님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의 멸망이 대환란이라면, 대환란 이전과 이후에 일어나야 할 많은 일들이 전혀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I. 환란의 “사실성”
대환란은 주님께서만 예언한 것은 아니다. 구약과 신약의 다른 성경 기자들도 이 부분에 관해 많이 예언해 놓았다. 구약의 예레미야30:4-7에서는 “야곱의 고난의 때”라고 하여 여자가 “산고”로 고통당하는 것으로 비유했다. 에스겔20:34-38절에서는“막대기 아래로 지나가게 할 것이요”라고 하였으며, 하나님께서는 에스겔22:19-22절에서 이스라엘을 그분의 “용광로” 안으로 던지실 것이며, 그들은 “금을 정련 시키는 것”같이 정련될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다(말3:1-3, ?13:9). 다니엘도 그의 백성 유대인들의 “고난의 때”라고 말하고 있다(단12:1). 관련 구절들을 통하여 “대환란”은 유대 민족과 관계 있는 어떤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그들은 다시 하나님의 선민이 되기 위하여 그들에게 알맞은 “정련 과정”을 통과하는 심판이다.
이것은 간접적으로 이방인에게 영향을 줄 것이지만. 교회는 “주의 날인 대환란”이 시작되기 전에 “들림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아무 관련이 없다. 신약에서 이것에 관하여 두 번 언급하였다.
첫 번째는 예수님께서 올리브산 설교에서(마24:9-22) 말씀하셨고, 두 번째는 요한이 계시록6:1-19:21절까지 환란기간 동안에 일어나게 될 “봉인”이 떼어지고 “나팔”이 울리며 “호리병”이 쏟아지는 환상에서 상세하게 묘사해 놓았다.
II. 환란의 “때”
구약의 선지자들은 이 때를 “이 날”, “마지막 날들”로, 요엘은 “주의 날”(엘1:15;2:1;3:14)이라고 불렀다. 성경은 “네 가지 날”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1. “인간의 날” 이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 시대의 경륜이다.
2. “그리스도의 날” 이 날은 주 예수님께서 오셔서 세상으로부터 그의 교회를 데려가신, “휴거”와 “환란” 사이의 기간을 말한다. 지상 위에서는 “적그리스도의 날”이다.
3. “주의 날” 이 날은 우리 주님의 “복수의 날”이며, “대환란”과 이후의 천년 왕국기간까지를 말한다.
4. “하나님의 날” 이 기간은 “이 땅이 불로 녹아짐”으로 시작하여, 영원까지 확장된다. “성경의 날들”이라는 장을 참조하라.
환란의 때는 교회가 “들림”을 받은 “이후”이며, 적그리스도가 이 땅을 통치하는 기간이다.
선지자 다니엘의 “70주”에 관한 환상(단9:20-27)에서 “예루살렘을 복원하고 건축하라는 명령이 나오는 때부터 메시야 통치자”까지 69주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예언적 연대기에서 한 주는 7년을 가리킨다. 이것들은 역사에서 모두 문자적으로 이미 성취되었다. 69주는 360일 체계로 483년이다. 이것은 B.C. 445년에 있었던 4번째 칙령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승리의 입성을 하신 A.D. 30년까지이다. 그리고, 약속된 다윗의 아들로써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예언적 연대기”란 도표를 참조하시오.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았을 때, 하나님의 시계는 멈추었다. 여기까지가 69주이고 이제 남은 것은 한 주밖에 없다. 이 한 주는 아직 성취되지 않는 미래의 사건이요, 예언이다. 69주와 70주 사이에는 커다란 시간적 간격이 있다. 이 기간 동안 성령께서는 교회를 세우셨다. 때가 되어 이 교회가 들림 받으면 하나님의 시계는 다시 작동하여 70주가 시작될 것이다. 왜냐하면 70주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인 유대인을 다루셔야 하기 때문이다.
다니엘이 예언한 70주에서 70주는 마지막 주인 동시에 “대환란”이 일어날 시기이다. 이미 일어난 69주는 역사적으로 매 주가 7년이었으므로, 남은 한 주도 7년이란 사실에는 틀림없다. 그렇다면 “환란의 기간” 또한 7년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4:22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택함 받은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이 단축될 것이다.” 여기서 택함 받은 자란 교회가 아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이미 들림 받아 올라갔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택함 받은 자”란 계시록 7:1-8에 나오는 144,000명의 “인장으로 표시를 받은 자”들을 말한다.
III. 환란의 성격
환란기간이 7년간 지속된다면, 이 시기는 3년 반씩 두 때로 나누어진다. 아마 뒤에 있을 3년 반은 앞에 있을 3년 반의 시기보다 훨씬 더 심한 환란이 있을 것이다. 이 시기를 “ 대 환 란 ” 이라고 부른다. 다니엘의 70주에 관한 내용은 정작 다니엘 자신에게는 계시되지 않았다. 다니엘은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실을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받았을 뿐이다. 그래서 다니엘은 “마지막 때가 올 때까지 그 책을 봉인하라”는 명을 받게 된다(단12:4.8.9). 다니엘이 알고 있었던 내용은 단지 마지막 날에 살 사람들이 큰 환란을 당한다는 정도였을 것이다. 마지막 날이란 “마지막 때(time of End)”이지 “시간의 끝(end of Time)”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니엘에 의해 봉인된 책은 이제는 더 이상 봉인된 책이 아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요한에게 봉인하지 말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계시록에 나오는 봉인된 일곱 권의 책은 다니엘에게 봉인하라고 했던 바로 그 책이다.
우리가 환란 기간동안 일어날 일이 무엇인지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우리는 부지런히 성경을 읽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계시록6:1-19:21절까지 공부해 보라.
계시록 12장에서 용이 하늘에서 쫓겨나 땅으로 내려온다. 이 때가 3년 반이 지난 환란의 중간 시점이다. 계시록 6-11장은 전 3년 반이고 12장에서 19장까지는 후3년 반을 다루고 있다. “계시록”과 “다니엘의 70주”란 도표를 참조하시오.
다니엘이 예언한70번째 주
우리는 지금부터 3년 반씩을 각 나누어서 공부하기로 하자(단9:27).
1. 전 3년 반
봉인이 열리면서 환란은 시작된다.
첫 번? 봉인 (계6:1,2).
“흰말 한 마리”가 나타나고, 그위에 탄자는 활을 가지고 있다. 그는 본래 면류관이 없었는데 곧 면류관을 받는다. 그리고 나가서 정복하고 정복하기를 계속한다. 말탄자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그리스도는 지금 양으로써 그 책의 봉인을 떼고 계시기 때문이다. 주님은 계시록 19장에서 흰말 탄 자로 등장하실 때까지 등장하지 않는다.
말탄자는 적그리스도이다. 말탄 자는 부활한 로마 제국의 열왕국 연합체를 지배하는 통치자가 될 것이다. 그는 다가올 세계 단일 정부의 우두머리가 되어서 유대인과 한 주간의 언약을 체결할 것이다(단9:26,27). 이 말씀은 어떤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적그리스도가 70주의 중간부터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등장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두 번? 봉인 (계6:3,4)
“붉은 말”을 탄자가 땅으로부터 평화를 제거할 권세를 얻는다. 이것이 상징하는 의미는 분명하다. 말의 색깔이 붉은 것은 “피”를 상징하는 것이며, 큰 칼은 전쟁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시기에 대해서 주님은 더욱 분명하게 예언해 놓으셨다. (마24:6,7을 읽으시오). 이 전쟁의 결과로 적그리스도는 유럽연합체의 확고한 통치자로 자리잡게 될 것이다.
세 번? 봉인 (계6:5,6)
“검은 말”이 나오고, 그 위에 탄자가 손에 저울을 가지고 있는데 한 음성이 말하기를 “밀한되가 한 데나리온이요, 보리 석되가 한 데나리온이라” “너는 기름과 포도주는 손상시키지 말라.”는 명령을 받는다. 이 말씀의 뜻을 아는 것도 어렵지 않다.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은 전쟁에 동원되기 때문에 들판은 아무도 경작하지 못할 것이다. 필연적으로 기근이 따라올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예언하셨던 그대로이다. 마태복음24:7을 보라. 올리브와 포도나무는 경작하지 않아도 열매를 맺는다. 무자비하게 파괴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
네 번째 봉인 (계6:7,8)
“창백한 말”이 나오고, 그위에 탄자는 “사망”이라 불린다. 앞에서 나온 말탄자들은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들이 나타날 때 사람들은 다 알 것이다. 지옥이 지금까지 전쟁과 기근과 사망으로 죽어버린 모든 사람들을 삼켜버리기 위해 그 뒤를 따르고 있다.
다섯 번째 봉인 (계6:9-11)
다섯 번째 봉인이 열릴 때 요한은 제단 아래에서 “순교자들의 혼”을 보았다. 요한이 여기서 본 순교자들의 혼은 이미 지나간 옛날에 교회시대에 죽었던 순교자들의 혼이 아니다. 이들은 환란 기간동안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 때문에 죽은 자들이다. 교회가 들림받고 나면 “왕국 복음”은 다시 증거될 것이다(마24:14). 그리스도께서 이 지상에 “왕국”을 건설하겠다는 선포는 마귀와 그의 추종자들에게 너무나 싫은 말이기 때문에, “왕국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들을 심하게 박해한다(마24:9-13). 요한이 제단 아래서 본 “순교자들의 혼”은 이 기간 동안 박해로 죽은 혼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죽음에 대한 피의 보복을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그의 동료 종과 형제도 그들처럼 죽임을 당하여 수가 찰 때까지” 잠시 쉬라는 명을 받는다. 이 예언은 계시록 20:4에서 성취될 것이다.
여섯 번째 봉인 (계6:12-17)
여섯 번째 봉인이 열릴 때는 이 지구상에 엄청난 물리적인 변화가 발생한다. 요엘2:30,31, 마태복음24:29, 이사야13:9-11을 보라. 이때 일어나는 천재지변은 너무나 끔찍해서 사람들은 어린양의 진노로부터 피하기 위해 산들과 바위에게 자신들 위로 숨겨 달라고 외칠 것이다. 마태복음 24장과 계시록 6:1-7을 잘 비교해 보라.
여섯 번째 봉인과 일곱 번째 봉인이 열리는 사이에 약간의 시간적 간격이 있다. 이 사이에 이스라엘의 12지파로부터 각 지파별로 12,000명씩, 총 144,000명이 인침을 받을 것이다. 이것은 아합때 바알에게 절하지 않은 7000명을 남겨 두었듯이 적그리스도에게 절하지 않은 144,000명이 남아 있음을 말해 준다. 그들은 천사로부터 이마에 하나님의 이름이 기록된 인장을 받는다(계14:1; 22:4). 이 때 요한은 한 “피로 씻긴 큰 무리”(계7:9-17)을 본다. 이것은 우리에게 “마지막때” 구원받는 다른 무리들이 있음을 알려준다. 그들은 대환란에서 나왔기 때문에 교회가 아니며 그들은 교회가 올라간 후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이방인일 것이다. 그들은 구원받고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에서 섬길 것이며 다시는 굶주리거나 목마르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교회의 성도가 아니기 때문에 땅이 축복받는 천년동안은 참여하지 못할 것이다.
일곱번째 봉인 (계8:1)
일곱번째 봉인이 열리자 잠시동안 “하늘에는 정적”이 있다. 이것은 더욱 큰 재앙이 오는 동안을 예비하는 시기이다. 정적 후에 일곱 천사가 일곱 나팔을 불려고 준비한다.
첫째 나팔 (계8:7)
“첫째 나팔”의 소리는 “피가 ?인 불과 우박”을 땅에다 쏟아 “나무의 삼분의 일”이 타버리고 “모든 푸른 풀”도 타버린다. 이것으로 요엘2:30,31이 성취될 것이다. 이것은 “이집트에서 행해진 7번째 재앙”의 반복이다(출9:22-26).
이것은 결코 비유나 상징이 아닌 “문자적인 재앙”이다. 문자적이지 않을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둘째 나팔”(계8:8,9)을 불자 산이 불에 타는데 아마도 유성이 바다에 떨어져 바다에 생명을 가진 피조물의 삼분의 일과 “배들의 삼분의 일”이 파괴되는 것일 것이다. 추측컨데 상당수의 해군 함대가 모일 것이며, 죽은 자들의 “피”는 바다를 변색시킬 것이다.
세째 나팔 (계8:10,11)
“세째 나팔”의 소리가 나자, 쑥이라 불리는 “커다란 타는 별”이 하늘에서 강들의 삼분의 일과 물들의 원천에 떨어져 독이 된다. 이것은 아마도 다른 폭발한 독까스 성분을 함유한 유성이 물의 원천과 강들에 떨어져 오염되어 물을 먹는 모든 사람들은 죽음의 저주를 받게 되는 것일 것이다. 쑥은 “독한 술”을 만드는 원료로, 프랑스에서는 마취제로서, 독약으로서 많이 사용되었다. 선지자 예레미야도 이 때를 예언했다(렘9:13-15).
네째 나팔 (계8:12)
“네째 나팔”의 소리가 난 후, 해와 달과 별의 삼분의 일이 강타 당하여 그것들의 빛이 삼분의 일로 어두워진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예언하신 것 중에 하나이다(눅21:25,26). 한 천사가 하늘 한 가운데로 날며 외치기며 “남은 세가지 화”를 알리고 이어서 세 나팔을 불것이다(계8:13).
다섯째 나팔 (계9:1-12)
“첫째화”
“메뚜기의 고통”
“다섯째 나팔”이 불리자 한 별이 하늘에서 땅에 떨어져 “끝없는 구렁”의 “열쇠”를 받는다.
이것은 실제 별이 아니라 별 같이 보이는 천사이다. 왜냐하면 “그에게” 열쇠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끝없이 깊은 구렁의 열쇠를 주실리가 없기 때문에 타락한 천사나 사탄이 아니라, 1000년 동안 사탄을 묶어 끝없는 구렁에 던질 계시록20:1-3의 천사일 것이다. 끝없이 깊은 구렁이 열려 연기와 메뚜기들이 온 땅을 덮을 것이다. 그들은 말과 사람과 여자와 사자와 전갈의 합성으로 그들의 날개 소리는 전쟁에 나가는 많은 말들이 끄는 병거 소리 같다.
그들의 크기는 정확하게 주어지지 않았지만 보통 메뚜기보다는 클 것이라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보통의 메뚜기는 풀을 먹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메뚜기들은 풀이나 어떤 푸른 것이나 어떤 나무도 해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인장”으로 그들의 이마에 표시를 받지 않은 “사람들”에게 “죽이지” 말고 오직 “고통”만 주도록 허락되었기 때문이다.
“전갈메뚜기”
재앙의 의미는 많은 마귀 군사들이 끝없는 구렁에서부터 해방되어 인간의 몸을 소유하거나 들어가서 고통만 주어 사람들은 죽기를 원하여도 마귀들이 그들을 죽을 수 없도록 방해 할 것이다.
이들 “전갈 메뚜기”는 왕이 있지만 보통 메뚜기는 왕이 없다(잠30:27). 이 왕의 이름은 히브리어로는 “아바돈”이며 헬라어로는 “아폴루온”이며, 이 단어의 뜻은 “파괴자”이다. 이 왕은 사탄이 아니다. 사탄은 자유롭지만 “끝없는 구렁의 왕”은 가두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여섯째 나팔 (계9:13-21)
“두 번째 화”
“말탄자의 재앙”
“세 번째 나팔”을 불 때 금제단 아래에서 유프라테스 강에 결박해 놓은 네 천사를 풀어 주라는 음성을 듣는다. 그들은 묶여져 있었다 사실로써 타락한 천사임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지옥의 2억의 “기마병” 군대의 지휘자들이다.
이 기마병은 보통사람들이나 보통 말들이 아니다. 이 말은 말의 몸을 가지고 있지만 머리는 사자이고 꼬리는 뱀과 같고 머리가 달렸으며 그들의 입에서는 불과 연기와 유황이 나오고 사람들의 삼분의 일을 죽이고 그들의 꼬리에 달린 머리로 사람들에게 큰 고통을 준다. 말탄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된 흉배를 입고 있다.
이 초자연적인 군대들은 성경에 자세히 나와 있지는 않다(왕하6:13-17). 예수님께서 오실 때 하늘의 천사들이 뒤따를 것이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이들은 사람들을 회개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공격하려는 것이다.
15절에 보면 이 천사들은 연, 월, 일, 시를 위해 예비해 놓은 자들이며 이것으로 네 천사는 지금 유프라테스에 묶여 있으며 언젠가는 정확한 연,월,일,시에 풀려서 사람들을 미혹할 것이다. 이 두 군대, 즉 “전갈 메뚜기”와 “지옥의 기마병”들의 침략은 우리에게 교회가 들림 받고 난 후의 날들이 얼마나 무서운 가에 대한 엄중한 경고를 주고 있다. 사탄과 그의 마귀의 군대들은 더욱 기승을 부리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인류를 파괴시키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라는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간 격
여섯째와 일곱째 나팔이 불리는 사이에 여섯째, 일곱째 봉인이 열어지는 사이에 간격이 있었던 것처럼 “간격”이 생긴다. 이 간격동안 힘센 천사가 그의 손에 작은 책을 가지고 내려온다. 이 힘센 천사는 그리스도 자신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모습은 계시록1:12-15절과 일치하며 그리고 그의 “음성”은 사자와 같다고 한다. 계시록5:5절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유다 지파의 사자”이다.
그리고 계시록11:3절에 보면 그분은 “나의 증인”으로서 “두 증인”에게 말한다. 그의 오른손에는 작은 책이 있고 오른쪽 발은 바다를, 왼쪽 발은 땅을 밟고 더 이상 지체하지 않을 것임을 맹세한다. 환란의 끝무렵에 주님께서 올리브산 위에 다시 서시면, 이 땅은 합법적으로 주님의 실제적인 소유가 되어 아무도 자기 땅이라고 주장할 수 없게 된다.
두 증인
계시록11:1-14절에서 우리는 “두 증인”이라고 기록된 두 사람이 후 삼년 반 동안 예언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들은 누구인지는 쉽게 알 수 있다. 한 사람은 “하늘을 닫고 예언하는 동안 비를 오지 못하게 하는 권세”를 지니고 있다. 이것은 “주의 크고 무서운 날”에 오기로 된 엘리야 외에 없다(말4:5-6). 그리고 그는 42개월, 즉 3년 반 동안 하늘을 닫는 권세를 가질 것이다. 이것은 아합 때 그가 했던 사역과 정확히 일치한다. 또 한 증인은 “물을 피로 변하게 하는 권세가 있어 원하는 때면 언제든지 온갖 재앙으로 땅을 칠 권세를 지니고 있다. 이것으로 그는 모세임을 알 수 있는데, 왜냐하면 성경에서 이러한 권세를 가진 사람은 모세 한 사람 뿐이기 때문이다. 또한 모세가 죽음에서 일어난 이유가 설명되기 때문이다(유9).
모세와 엘리야는 변화산에서 천사처럼 흰옷을 입고 그리스도와 함께 나타났다.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실 때 곁에 있었던 두 사람도 모세와 엘리야였을 것이다(행1:10,11).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이 땅에 먼저 와서 그분의 오심을 전파하는 증인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들이 자신들이 “증거하는” 기간 동안에 그들의 적들을 입에서 나오는 “불”로 멸망시킬 수 있다. 하지만 1,260일이 끝나는 날 그들은 죽임을 당하여 삼일 반동안 예루살렘의 도시의 거리에 그들의 시체가 나뒹굴게 될 것이다. 3일반이 지난 후에 다시 살아나서 하늘로 올라간다. 그들을 바라보던 자들은 모두 크게 놀랄 것이다. 그들이 올라간 후 땅에는 큰 지진이 일어나면서 둘째 화가 끝난다.
일곱 번째 나팔 (계11:15-19)
“셋째 화”
이 “일곱번째 나팔”은 다음 19장의 끝에 이루어질 내용에 포함된다. 우리는 계시록을 공부하면서 잊지 말 것이 있는데 “일곱 봉인”은 “일곱 나팔”과 “일곱 호리병”을 포함하고, “일곱 나팔”은 “일곱 호리병”을 포함하는데, 그 이유는 모두 끝에 “음성”과 “천둥”과 “지진”이 있기 때문이다(계8:5;11:19;16:18).
2. 주(week)의 중간(계12:17)
“주의 중간”에서 하늘에서는 두 가지 놀랄만한 이적이 나타난다. 이적은 어떤 것의 상징이란 의미이다.
“해로 옷입은 여인”
이 “여인”은 동정녀 마리아나 교회가 아니라, 이스라엘이다. 우리는 요셉의 꿈에서 11개의 별과 달과 해를 볼 수 있다(창37:9). “해로 옷입은 여인”은 달은 발밑에 있으며 그녀의 머리에는 “12개의 별”로 된 면류관을 쓰고 있는데 이것은 유대인을 상징한다. 요셉은 12번째 별이였다. 이스라엘은 여러 번 구약에서 결혼한 여인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교회는 오직 “한 순결한 처녀”이다(고후11:2). 이 “여인”은 아이를 배고 있으며 산고로 울부짖는다. 교회가 이런한 상태에 있었던 적이 있는가? 바울은 이스라엘이 말하기를 “육신으로는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나셨으며”(롬9:4,5), “우리에게 한 아이가 태어났고 우리에게 한 아들이 주어졌으니”(사9:6,7) 라는 예언이 있다. 그러나 이런 일은 이스라엘에게 심한 고통과 심판을 거친 뒤에 일어날 것이다. 이것들이 그녀의 “산고의 때”이다. 그녀의 산고의 결과로써 “사내 아이”를 낳는데 그는 철장으로 나라들을 다스릴 것이다. 시편 2편에 있는 대로 그는 그리스도이다. 그는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들려 올라갈 것이다. 그녀의 아이를 낳은 후에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장소인 “광야로 도망”하여 부양 받는다. 그곳에서 1,260일 동안 피한다. 여기서 많은 주석가들이 실수를 하는데 그들은 다섯때와 여섯때 사이에 교회 시대가 있다고 잘못보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간격은 다니엘의 69주와 70주 사이로 요한은 지금 그리스도가 들려 올라간 이후 사탄이 던져지기까지의 간격을 보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환란에서 이스라엘을 다룰 뿐이지 결코 교회를 다루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 여인이 마리아가 아니라는 증거는 더욱 많다. 왜냐하면 이 여인이 도망간 곳은 이집트가 아니라 광야이며, 그녀의 아이와 함께 도망간 것이 아니라 혼자 도망갔다. 아이는 이미 하나님과 그의 보좌 앞으로 들려 올라갔기 때문이다. 이 여인은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도망한 것이다.
“용”
두 번째 나타날 이적은 하늘에 “커다란 붉은 용” 한 마리가 나타나는 것이다. 9절에 따르면 이 용은 “옛뱀”, “마귀”, “사탄”이라고 불리는 존재이다. 그의 색깔은 붉은 색인데 이는 피의 색깔과 같다. 왜냐하면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였기 때문이다(요8:44). 그는 자신의 꼬리로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진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그가 천사들을 이끌던 위치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구약성경에서 “별”은 주로 “천사”를 나타냈다(욥38:7). 천사들은 그와 함께 땅으로 쫓겨난다. 용이 쫓겨나는 경위는 12:7-12에 잘 나와 있다. 그는 하늘에서 미카엘과 전쟁을 하지만 패하고 땅으로 쫓겨나는 것이다.
지금은 그 용이 하늘에서 쫓겨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하다.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시기 2,000년 전 욥의 때에 그는 하나님께 가까이 갔었다(욥1:1-2:8).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났을 때 헤롯의 손으로 그를 죽이려고 애썼다(마2:16-18). 그는 광야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시험했으며, 베드로를 밀까불 듯이 까불었다. 그는 오늘날 “공중 권세 잡은 자”이며(엡2:2), “이 세상의 신”(고후4:4)이다. “용”이 하늘에서 쫓겨날 때 하늘에는 큰 기쁨이 있을 것이다. 왜냐햐면 밤낮 없이 그리스도의 형제(유대인)들을 고소하던 자가 쫓겨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땅에는 큰 재앙이 있을 것이다. 용은 자기 때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고 분노하고 있기 때문이다. 용은 사슬에 묶여서 끝없이 깊은 구렁으로 던져지기 전에 땅에 사는 거민들에게 모든 분노를 쏟아 부을 것이다.
용이 땅으로 쫓겨왔다는 것은 땅의 사람들이 그 만큼 더 힘을 얻는다는 뜻이다. 그들은 모두 힘을 합하여 사내 아이를 낳은 여인(이스라엘)을 향해 모든 악의와 저주를 퍼부으며 공격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여인에게 “큰 독수리 날개”를 주셔서 광야로 피하게 하신다. 여인은 거기에서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삼년 반)”를 피해 있다가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온다. “너희는 내가 이집트인들에게 어떻게 하였으며,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를 실어 내게로 데려왔는지를 보았느니라.”(출19:4). “여자”와 “용”이 상징인 것처럼 “독수리 날개”, 또한 상징이다. 이스라엘은 광야로 급히 도망가서 거기에서 삼년 반 동안 안전하게 거하다가 용이 묶여 갇히게 되면 다시 돌아올 것이다.
“ 피 난 처 ”
구약시대의 도피처는 환란 때 이스라엘 자손들이 피할 “광야의 처소”를 예표한다. 살인자가 피의 보복을 피해 안전하게 거할 수 있도록 요단강 양 옆에 각 각 3개씩 도피 성읍이 만들어져 있었다. 재판 후에 이 사람이 고의적으로 살인을 한 것으로 증명되면 그는 다시 피의 보복자의 손에 넘겨지고, 과실로 인한 살인이었다면 대제사장이 죽을 때까지 그곳에 머물러야 했다. 만약 “살인자”가 없다면 “피의 보복자”도 없을 것이고, 그렇다면 도피성읍 또한 필요치 않을 것이다.
우리는 신약 성경에서 그들의 생명을 보호받기 위해서 도망가는 어떤 특수한 사람들을 보게 된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피의 보복자가 그들을 뒤따르기 때문일 것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다. 그들은 “살인”한 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도망하는 것이다.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은 유대민족일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죽게 하였는데, 비록 그들이 직접 못박아 죽이지는 않았더라도 그리스도께 유죄를 선고케하여 로마인의 손에 넘겨 주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그의 피를 우리와 우리의 자손에게 돌리라”(마27:25)하고 외쳤다. 사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고의적으로 죽인 것처럼 보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를 자세히 살펴볼 때 과실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아버지시여, 저들을 용서해 주옵소서. 그들은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나이다.”는 이 말씀을 통해 볼 때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고의적으로 죽이려고 하였던 것이 아니라 종교적인 격분으로 인한 무지로 죽였음을 알 수 있다. 바울도 말하기를 “만일 그들이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처형하지는 아니하였으리라.”(고전2:8)고 말하였다.
살인죄를 지닌 유일한 민족은 유대 민족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죽인 죄로 인해 그때부터 지금까지 1800년간 도피처를 찾아 다녔지만 여전히 그곳에 도달하지 못했다. 피의 보복자가 지금도 그들의 뒤를 맹렬하게 따라 다니고 있는 것이다. 지금도 여전히 유대민족은 적들에게 민족의 생존권이 달린 위협 속에서 살고 있다. 수세기 동안 유대인들을 일컫는 말은 “유랑하는 유대인”이었다. 이는 모세의 “네 발바닥이 쉼을 얻지 못할 것이요”(신28:64-67)라는 예언이 정확하게 성취되었던 것이다.
유대인들이 살인자라면 피의 보복자는 누구일까? 우리는 피의 보복자는 살해당한 사람의 가장 가까운 친족이어야 함을 알고 있다. 이 말은 곧 살해당한 사람과 보복자는 같은 종족임은 물론이요, 같은 식구이거나 친족일 수밖에 없다는 증거이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동정녀 마리아의 아들이었을 뿐 아니라 육신의 형제들과 자매들이 많이 있었다. 마리아와 요셉은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이란 네 형제를 두었다. 그리고 딸들도 있었다. 이들 중 둘은 초대교회의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야고보는 예루살렘 교회의 대표였고 유다는 유다서를 쓴 사람이다. 예수님의 친족들은 최소한 서기 324년까지는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오늘날 이 세상 어딘가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친척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들이 누구인지는 예수 그리스도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추적한다해도 정확하게 알아내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 누구인지 아실 것이다. 피의 보복자는 유대인이며, 예수님의 육신적 혈통의 후손일 것이다. 적그리스도가 나타날 때면 이 사실을 감히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용이 육화된 적그리스도는 “피의 보복자”로써 이스라엘을 추적할 것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마련해 놓으신 도피처로 숨어야 한다. 우리는 이사야 26:20에서 이 말씀을 볼 수 있다.
“백성아, 오라, 네 방들에 들어가서 네 문을 닫고 그 “분노가 지나갈 때”까지 “잠깐 동안” 숨으라”
이 말씀은 피의 보복자인 적그리스도가 유대 민족을 멸망시키려고 부단히 애쓰고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태복음 24:15-22에서 말씀하신 바로 그 때에 일어날 것이다.
“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집트로부터 데려 오실 때 그들은 홍해를 건넜으며,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았고 성막을 지었다. 그들이 이집트를 떠난 후 1년이 채 못되어 카데스바네아에 도착했다. 거기서 그들은 카나안 땅을 정탐하였는데, 먼저 겁을 먹고 그 땅에 올라가서 땅을 소유하는 것을 포기했다. 그래서, 그들은 광야에서 40년간을 방황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이들은 40년간 돌보시고 먹이셨다. 앞으로 다가올 환란 시대에서도 적그리스도의 보복을 피해 유대인들이 이 광야로 도망하게 될 때, 하나님은 이들을 동일한 방법으로 보호하시고 먹이실 것이다.”
선지자 다니엘은 적그리스도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또한 영광스러운 땅에 들어갈 것이요 많은 나라들이 전복될 것이라. 그러나 이들 곧 에돔과 모압, 그리고 암몬 자손의 우두머리는 그의 손에서 피하리라”(단11:41).
지금 에돔은 이스라엘이 40년간 방황하던 그 광야에 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마련해 놓으신 도피처가 있는 곳이요, 오늘날 반석(Petra)이라고 알려져 있는 곳으로써 에돔 땅이다. 에돔은 솔로몬 왕때에 무역의 중심지였다. 서기 105년경 로마는 이곳을 정복해서 아라비아 페트라(Arabia Petra)라고 불렀다. 로마의 힘이 약해지자 페트라는 아랍의 손으로 넘어가서 1812년 버크하드(Burckhardt)에 의해 재발견될 때까지 문명세계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린채로 남아 있었다.
페트라는 화산의 분화구처럼 산지들 가운데 자리잡고 있다. 12내지 14피트 너비의 좁은 협곡으로 길이 나있기 때문에 한 번 들어가면 다시 빠져 나오는 것이 불가능할 만큼 완전히 막혀있는 천혜의 요새이다. 좁은 길 양옆으로는 낮게는 200피트 높게는 1000피트가 넘는 기암 절벽이 2마일이나 뻗어 있다. 이 세상 어떤 도시도 이런 입구를 가진 곳은 없을 것이다. 협곡의 양 벽면에는 신전과 많은 대리석 무늬가 즐비하게 조각되어 있다. 일단 바위로 둘러싸인 그 도시에 들어가 보기만 한다면 우리는 웅장한 건물들과 비석, 신전들의 유물이 파편 조각처럼 많이 남아 있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절벽들과 수많은 기암괴석들은 매우 아름다우며, 특히 고도 300피트 정도에 있는 벌집 모양의 바위 조각에는 갖가지 색깔로 새겨진 조각들을 본다면 너무나 아름다워서 아무도 그 모습을 묘사할 수 없을 것이다.
일단 “피의 보복자”(적그리스도)가 나타나면 살인자(이스라엘)는 페트라로 알려져 있는 바위로 둘러싸인 이곳이 그들의 도피처가 될 것이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여인(이스라엘)을 쫓던 용이 그의 입으로부터 홍수를 보내어 여인을 삼키려 하지만, 땅이 그 물을 마신다는 기사를 읽을 수 있다. 적그리스도는 유대인들을 쫓기 위해 그의 군사들을 보내겠지만 그들은 사막의 모래 바람에 모두 삼켜지고 말 것이다. 이스라엘은 “대제사장이 죽을 때까지”가 아니라 “대제사장이 하늘로부터 돌아오실 때까지” 도피처에서 안전하게 거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왕과 제사장으로써” 하늘의 군대를 보내어 그녀(이스라엘)를 도피성읍으로 부터 데려올 것이다.
3. 마지막 3년 반
“해로 옷입은 여인”이 광야로 도망가고 나면, 분노로 가득찬 용은 적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의 계획을 수행할 것이다. 용은 “그녀의 남은 자”들을 죽일 것이다. 용은 짐승(적그리스도)에게 자기의 능력과 자리와 큰 권세를 준다(계13:2). 적그리스도는 처음부터 악한자로 존재한다. 그는 처음에 “화평의 언약”을 맺은 후 환란 중간에 그 언약을 파기할 것이다. 사탄이 육화되어 그 짐승 안에 거하기 때문에 그의 통치방법은 매우 잔악해지고 끔찍할 것이다. 계시록 13장에 적그리스도가 다스릴 통치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다.
요한은 두 짐승을 보았다고 말한다. 첫 번째 짐승은 바다에서 나왔다. 이 짐승은 용이 육화된 적그리스도를 예표한다. 두 번째 짐승은 땅에서 나오는데 “거짓 선지자”로 불린다.
이 부분에 대해서 더 자세히 알고자 하시는 분은 “적그리스도와 사탄의 삼위일체”란 장을 읽어 보라. 환란의 중반기를 넘어서면 “지옥의 표”나 “짐승의 표”를 오른 손이나 이마에 받지 않고는 물건을 사거나 팔 수도 없다.
이 때 “세 천사”가 보내질 것이다. 첫 번째 천사는 “복음”을 전파하는 천사이다. 천사가 복음을 전하도록 위임받는 것은 여기에서 처음 나온다. 그러나 이 복음은 “하나님의 복음”(행20:24)이 아니며, “왕국 복음”(마24:14)도 아니다. 천사가 전하는 복음은 “영원한 복음”이라고 부르는 “새로운 복음”이다. 이 복음은 구원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심판을 전하는 것이다. 하지만, 불같은 환란의 시험을 겪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임에 틀림없다. 악을 행한 모든 사람들에게 임할 “심판의 때”를 선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천사는 “바빌론의 멸망”을 전파한다. 이것은 곧 성취될 일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바빌론은 하나님의 분노가 완전히 쏟아 부어진 후에야 멸망당할 것이다.
세 번째 천사는 짐승과 그의 형상에게 경배한 자들이 받게될 무서운 형벌에 대해 선포한다. 그들이 짐승에게 경배했다면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게 될 것이며, 불과 유황으로 영원무궁토록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다.
이 때 하늘에서는 추수할 준비를 할 것이다. 그들은 땅에서 포도송이를 거둘 것이다. 이것은 교회를 수확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는 이미 70주가 시작되기 전에 들림 받았다. 여기서 수확은 이방 민족들을 거둬들이는 것이다. 수확은 진노를 쏟아 붓는 것으로 시작해서 아마겟돈의 전쟁으로 끝날 것이다.
첫 번째 호리병(계16:1,2)
첫째 호리병은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과 그의 형상에 경배한 자들 위에 “악취가 나는 심한 헌데”가 생기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은 모세가 이집트 땅에서 여섯 번? 행한 “역병”의 재앙과 비슷하다(출9:8-12). 그때 역사적으로 발생한 문자 그대로의 사건이었다면 미래에도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호리병의 문자적인 해석 방법은 모든 계시록을 문자적으로 푸는 열쇠이다.
두 번째 호리병(16:3)
둘째 호리병을 바다(지중해)에 쏟으니 바닷가 죽은 자의 피같이 되어 모든 살아 있는 혼들이 바다에서 죽더라. 이와 유사한 사건은 계시록 8:8,9절에 있지만 이 사건이 훨씬 더 광범위하다.
세 번째 호리병(계16:4-7)
셋째 호리병이 강들과 물의 원천들에 쏟아 졌을때 물은 “피”로 변했다. 이 사건은 출애굽기에 나오는 첫 번째 이적의 재현이다(출7:19-24). “피”를 제외하고는 어떤 다른 것도 순교자들의 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 없는 것이다.
네 번째 호리병(16:10,11)
넷째 호리병은 해에게 떨어지는데, 해가 강한 열기로 사람들을 태운다. 이 재앙만이 유일하게 이집트에서 행해지지 않았던 재앙이다. 이 재앙도 다른 재앙들과 마찬가지로 문자적인 것이다. 선지자 말라키는 이미 여기에 대해서 언급했다(말4:1). 이 재앙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한다.
다섯 번째 호리병(계16:10,11)
다섯번째 호리병은 짐승의 자리에 쏟는다. 이로 인해 짐승의 왕국은 흑암에 싸이며 그들이 고통으로 인하여 자기 혀를 깨물고 자신들의 고통과 헌데로 인하여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모독하기 시작한다. 이 재앙도 이집트에서 행해진 아홉번? 재앙의 재현이다(출10:21-23). 이 역병은 해의 열기로 그들이 감당할 수없을 만큼 고통을 받고 난 뒤에 일어난 재앙이라는 점에 유의하라. 하나님은 태양을 숨겨 버리신 것이다. 이 역병 또한 다른 역병들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회개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재앙들은 이제 약간씩 중첩되기 시작한다.
여섯 번째 호리병(계16:12)
여섯 번째 호리병이 큰 강 유프라테스에 떨어지니 강물이 말라버려서 동방의 왕들(인도, 중국, 일본)의 길이 예비되었다. 이들은 군대를 이끌고 이 강을 건너서 아마겟돈으로 모여들 것이다. 이것 역시 홍해와 요단 강이 열린 이적의 재현이다. 선지자 이사야는 이렇게 예언했다.
“이집트 바다(홍해)의 방언을 완전히 멸하실 것이요, 그의 손을 (유프라테스)강 위에 흔드시어 그의 막강한 바람을 일으키시고 그것을 쳐 일곱 갈래로 나뉘게 하시리니, 사람들이 신을 적시지 않고 건너가리라. 남게 될 그의 백성의 남은 자들을 위해 시리아로부터 대로가 있게 하시리니, 이스라엘이 이집트 땅에서 나왔던 그 날에 이스라엘에 있었던 것과 같게 하시리라”(이사야 11:15,16).
물론 이 나라들은 개구리 같은 불결한 세 영의 영향을 받아서이다. 이 영들은 용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의 입으로부터 나온다(계16:3-6). 그들은 “마귀들의 영”이요, “미혹하는 영들”이다(딤전4:1). 아합 왕을 속여서 그를 죽게 만들었던 바로 그런 “거짓 영”이다(왕상22:20-38).
일곱 번째 호리병(계16:17-21)
일곱 번째 호리병이 쏟아졌을 때, 하늘의 성전에서 큰 음성이 보좌로부터 나와 말하기를 “다 이루었다”고 했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하고 말씀하신 그분이 이제 다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 때 땅에는 큰 지진이 일어나서 큰 도성이 세부분으로 갈라졌다. 큰 도성을 이루는 여러 도시들도 다 갈라진다. “큰 바빌론”이 무너질 것이라는 예언은 계시록 18장에 있다. 땅에 큰 지진이 있을 것이라는 예언은 스카랴에 의해 예언되어 있다(?14:4,5).
“하늘에서 무게가 무려 100파운드(45kg)나 되는 거대한 우박이 떨어진다.” 이 우박 재앙도 이집트에서 행해진 일곱번째 재앙의 재현이다(출9:13-35). 우박은 하나님의 전쟁에서 쓰이는 도구중의 하나이다. 주님은 여호수아 때에 벧호른에서 이스라엘의 원수들을 무찌를 때 우박을 사용하셨다(수10:11). 율법에 따르면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는 돌로 쳐서 죽이도록 되어 있다. 마지막 때에 하나님을 모독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하늘로부터의 돌을 보내셔서 그들을 죽이신다.
계시록에서 호리병의 재앙과 환란이 끝나는 아마겟돈 전쟁 사이에“신비라 큰 바빌론이라” 불리는 바빌론 도성의 파멸이 나온다.
성경에서 큰 바빌론이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것은 바빌론이 지금까지 없었다가 나타났기 때문이 아니라 옛부터 존재해 왔던 바빌론이 여기서 완전히 파멸하기 때문이다.
아마겟돈 전쟁(계19:11-21)
“환란 기간”은 아마겟돈 전쟁으로 막을 내리게 될 것이다. 사탄의 삼위일체에서 나온 “마귀의 영들”에 의해 온 땅의 왕들이 거룩한 땅을 치기 위해 모이는 것을 볼 수 있다(계17:13). 전쟁터는 팔레스타인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는 “므깃도의 꼴짜기”이며, 구약에서도 큰 전쟁을 많이 치룬 곳이다. 이 전쟁은 적그리스도의 “연합군”과 그리스도의 “하늘의 군대”의 대결이다. 이 “시기” 는 “땅의 곡식이 무르익을 때”로써(계14:15), 적그리스도의 “연합군”이 예루살렘 도성을 빼앗을 수 있는 “가장 좋은 순간”이다.
스카랴는 말하기를
“주의 날”이 오나니(주의 날은 천년의 날이다). . . “내가 모든 민족들을 모아 예루살렘을 대적하여 싸우게 하리라. . . 그 때에 주께서 나가 그 민족들을 대적하여 싸우시리니, 전쟁의 날에 싸우셨을 때처럼 하시리라”(?14:1-3)
이 전쟁에 출전하는 광경은 계시록19:11-21절에서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그 분께서 처음 왕으로써 예루살렘에 오셨을 때 그분은 어린 수 나귀 새끼를 타고 오셨다(마21:1-11). 하지만 이 때는 ”흰 말“을 타고 오신다. 그분의 눈은 ”불꽃” 같고 그의 머리 위에는 “많은 왕관들”이 있으며 “피에 젖은” 옷을 입을 입고 오실 것이다. 이 피는 예수님 자신의 피가 아니라 자신을 대적하는 자들의 피이다,
이사야는 이 날에 관하여 예언하기를
“물들인 옷을 입고 에돔에서 오는 이가 누구인가? 그의 의복이 화려하고 그의 능력의 위엄으로 거니는 이가 누구인가? 의로 말하는 나니, 구원하기에 능력이 있도다. 어찌하여 네 의복이 붉으며 네 옷이 포도즙틀을 밟는 자 같은가?. 나는 홀로 포도즙틀을 밟았고 백성 중에 나와 함께한 자가 아무도 없었도다. 나의 분함으로 그들을 밟고 나의 진노함 속에서 그들을 짓밟으리니, 그러면 그들의 피가 내 옷에 튀어서 내가 내 의복을 모두 얼룩지게 할 것이라. 이는 복수의 날이 내 마음 속에 있고, 내 구속의 해가 오기 때문이라. 내가 보았으나 도와주는 자가 아무도 없었으니, 붙들어 주는 자가 없음을 이상히 여겼도다. 그리하여 나 자신의 팔이 내게 구원을 가져왔고 내 분노가 나를 붙들었도다. 내가 나의 분함으로 백성들을 밟을 것이요, 나의 분노로 그들에게 마시게 하리라. 또 내가 그들의 기력을 땅으로 끌어내리겠노라”(사63:1-6).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의 죄를 대속하신 십자가를 언급한 것이 아님을 다음 구절을 통해 더욱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복수의 날”이 내 마음 속에 있고, 내 구속의 해가 오기 때문이라사63:4)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의 마음은 “복수”로 가득차 있지 않았다. 오히려 “아버지시여, 저들을 용서해 주옵소서, 그들은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나이다.” 라고 중보하셨다. 이사야 선지자가 “복수의 날”이라고 예언한 것은 “주님께서 자신의 택하신 백성 유대인”을 적그리스도로부터 구원하러 오실 때를 말하고 있다. 이 때가 바로 주님께서
“분노와 진노함으로 포도즙틀을 밟으실 때이다.”
사도 요한은 “포도즙 틀”에 관한 환상을 이미 계시록14:14-20에서 보았다. 호리병의 재앙이 내리기 전에 이미 예언적인 견지로 19장에서 있을 사건들을 보았던 것이다. 사도 요한은 14장과 20장에서 이 “포도즙틀”을 보았다. 계시록14:18절-20절에서 “예리한 낫”을 가진 천사가 말하기를
“예리한 낫을 대어 “땅의 포도송이”를 거두라. 이는 그 포도들이 ‘다 익었음’이라.”고 하더라. 그러므로 그 천사가 낫을 땅에 대어 땅의 포도송이를 거두어서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즙틀에 던져 넣으니라. 그 포도즙틀이 도성 밖에서 짓밟히니 그 틀에서 피(포도즙이 아님)가 흘러나와 말고삐까지 닿고 일천육백 스타디온까지 퍼지더라.(계:18-20)
여기서부터 우리는 적그리스도의 “연합군”들이 팔레스타인 전역을 덮고 있음을 볼 수 있으며, 그때에 팔레스타인 전역의 골짜기와 분지안에 대살육이 있을 것이다. 이 전쟁으로 인하여 팔레스타인 남쪽의 보스라는 1,600펄롱(3200km)이 기병대들의 피로 가득 찰 것이다.
이 때를 가리켜 이사야는 “산들은 그들의 피로 녹아질 것이라”고 예언했다(사34:1-8). 살육이 너무나 엄청나서 주님께서는 미리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보니, 한 천사가 해에 서 있는데 그가 큰 음성으로 외쳐 하늘 한가운데로 날아가는 모든 새들(말동가리, 수리, 독수리등등)에게 말하기를 “와서 위대하신 하나님의 잔치에 모여 왕들의 살과 장군들의 살과 용사들의 살과 말들과 그 위에 탄 자들(일반 군인들)의 살과 자유인이나 종이나 작은 자나 큰 자나 할 것 없이 모든 자의 살을 먹으라.”고 하니라(계19:17,18).
이 “잔치”는 구약에도 에언되어 있다.
“인자야, 주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너는 모든 깃달린 새와 들의 모든 짐승들에게 이르라. 모여 오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베푸는 나의 제물, 즉 이스라엘의 산들 위에서 베푸는 큰 제물 사면에 모여서 너희는 살을 먹고 피를 마실지어다. 너희가 용사의 고기를 먹고 땅의 왕들과 숫양과 어린 양의 피와 바산의 모든 살진 짐승인 숫양과 수송아지의 피를 마실지니라. 너희는 내가 너희를 위하여 베푼 내 제물에서 배가 부를 때까지 기름을 먹고, 취할 때까지 피를 마실지니라. 그리하여 너희는 “나의 식탁”에서 말들과 병거들과 함께 용사들과 모든 병사들로 배부를지니라. 주 하나님이 말하노라”(겔39:1-22).
우리는 에스겔 39장에서 이스라엘이 “그 날에” 팔레스타인 땅을 점령한다는 주님의 말씀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죽은 자들의 뼈들을 묻는데 몇 달이 걸릴 것이며, 하늘의 새들과 들의 짐승들이 죽은 자들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며, 숲에서 나무를 하지 않아도 몇 년간 뗄 수 있는 나무들과 병기들이 충분히 있다는 말씀을 읽을 수 있다.
계시록 19:21에는 “모든 새들이 그들의 살로 배를 채우더라” 라고 말씀한다. “초대받은 새들”은 죽은 시체들로 포식할 것이다.
이 때 비로소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디든지 시체가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함께 모이리라.”(마24:28)하신 말씀이 성취될 것이다. 독수리는 육식을 하는 대표적인 새이다. 히브리인들은 독수리를 약탈자와 같은 무자비한 새로 인식하고 있다.
최후의 전쟁에 모인 엄청나게 많은 군사들은 하늘의 군대를 이끌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입에서 나오는 예리한 칼에 의해 일거에 멸망당하고 말 것이다. “흰말을 타신 분”의 입에서 나오는 칼은 “구원”을 낳는 “성령의 칼”이 아니라 “파멸”을 낳는 칼이다. 여기서 “칼”이란 주님께서 적들을 파멸시키는데 사용하실 “초자연적인 전쟁 도구”를 나타낸다. 아마 그것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큰 우박”일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구약에서 “벧호른의 전투”에서 이스라엘의 적들을 무찌를 때 우박을 사용하셨기 때문이다(수10:1-11).
“아마겟돈의 전쟁”의 결과는 너무나 자명하다. 이미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새들과 독수리들이 배부르게 먹는다는 사실이 결과가 어떠한지 증명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적그리스도의 군대가 완전히 파멸되기 전에 “거짓 선지자”는 산채로 불못에 던져 질 것이다. 이 말씀을 통해 볼 때, 거짓 선지자는 어떤 제도가 아니라 한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에녹과 엘리야가 죽지 않고 하늘에 올라 갔듯이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는 죽지 않고 “불못”에 던져진다. 이들은 사탄이 1000년 후에 그곳에 다시 던져질 때까지 거기서 살게 된다.
사탄은 적그리스도가 사로잡혀 불못에 던져지기 직전에 육화된 사람의 모습을 그만둘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나면 사탄은 결박되어 “끝없이 깊은 구렁”에 1000년동안 갇힌다. 이것들이 환란 기간 동안에 있을 사건들의 개요이다.
NOTE - “다니엘의 70주와 환란”에 대해서 더 자세한 내용은 저자가 쓴 “요한 계시록”을 읽어 볼 것을 권한다.
1. 바빌론 종교
“신비의” 큰 바빌론 계17:1-18
고대의 도시 바빌론이 회복되어 이 세대의 마지막 날들에 일어날 놀라운 사건들의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은 자명하다. 계시록17장, 18장에 나오는 “신비의 바빌론”에 대한 말씀을 통해 볼 때 더욱 그러하다. 얼핏 보기에 두장은(17장,18장) 같은 내용을 담고 있어서 조화를 꾀하기 어려워 보인다. 하지만 말씀을 푸는 “열쇠”를 찾기만 하면 매우 쉽게 풀 수있다.
17장에서는 한 “여자”를 말하고 있고, 이 “여자”는
“신비라,”
큰 바빌론이라
땅의 창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고 불리운다.
18장에서는 도성(도시: city)을 말하고 있는데, 이 “도시”은 “문자적인 도시”으로써 “큰 바빌론”이라고 불린다. “여자”와 “도시”가 상징하는 것은 같지않다. 그 이유는 “여자”라고 불리는 곳에 도시란 말을 넣으면 말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도시”이란 말 대신 “여자”란 말을 대입해보면 뜻이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자”는 “열왕”에 의해 멸망되는 반면에, “도시”는 그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큰 지진과 불에 의해서 멸망당한다. 그리고, 열왕은 18장에서 도시의 멸망을 보고 크게 슬퍼하며 운다. 또 다른 한가지 이유는 “여자”는 도시가 파멸당하는 시기보다 3년반이나 앞서고 있기 때문이다. 18장 1절은 “이 일들 후에”라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도시에 일어났던 일은 여자의 파멸 뒤에 있을 일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로써 “여자”와 “도시”는 각각 다른 것을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자의 이름은 “신비라 큰 바빌론이라.” “신비라!”
우리는 이미 앞에서 “신비”란 단어가 갖는 의미를 살펴 보았다. 바울은 교회를 일컬어 “신비”라고 했는데, 이는 구약의 선지자들이나 족장들에게 이 사실이 계시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바울에게 처음으로 “신부”에 대한 계시를 주신 것이다(엡5:23-32). 적그리스가 신부를 가질 것이란 사실은 사도요한에게 처음으로 계시되었기 때문에 신비이다. 적그리스도는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신부를 가지는데. 이 신부가 바로 “큰 바빌론”이다. 어떤 사람은 “왜 신부의 이름에 도시”란 말이 들어가는가? 하고 의아해한다. 성경을 읽어보면 이에 대한 해답은 쉽게 얻을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요한에게 “이리오라, 내가 너에게 신부인 ‘어린양의 아내’를 보여 주리라.” 하고 “도시”를 보여 주었던 것이다. 어린 양의 신부는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가는 “큰 도시 거룩한 예루살렘”이었던 것이다(계21:9-11). 도시를 신부라고 부르는 이유는 도시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도시 안에 사는 사람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신비라 큰 바빌론이라” 할 때 큰 바빌론은 글자 그대로의 어떤 도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빌론과 같은 제도”를 가진 배교한 종교집단을 말한다. 교회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거듭난 사람들의 모임이라면 마찬가지로 “적그리스도의 신부”인 “큰 바빌론”에는 모든 거짓 종교를 추종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모임인 것이다.
바빌론 도시가 세워진 유프라테스강은 에덴 동산으로부터 갈라진 네 개의 강의 지류들 중 하나였고 사탄은 의심할 여지없이 바빌론 지역을 아담과 이브를 유혹하기 시작할 본거지로 선택했을 것이다.
바로 여기가 노아 홍수 이전에 배교의 근원지로써 홍수를 촉발했던 무리들의 근원지였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홍수 후에 “마귀의 세력들”이 이곳 중심지로 집중했고 그 결과로 바벨탑을 건축했던 것이다. 이것이 민족들의 기원이었지만 사탄은 현재 세상이 알고 있는 모든 거짓 종교의 교리의 근원이 되왔던 거짓교리의 “바이러스”를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방에 흩으시기 이전에 이미 모두 감염시켜 놓았던 것이다.
“바벨”, 혹은 바빌론은 님롯에 의하여 건설되었다(창10:8-10). 이곳은 모든 배교의 제일원인을 제공해주는 곳이었다. 여기서 “바빌론 이단”이 조직되었고 고차원적인 지혜를 다루고 가장 신성한 비밀을 밝힌다고 주장하는 하나의 체제가 만들어졌다. 살인이 시작되기 전부터 사제에게 “고백”을 해야 했다. 그때의 사제는 사람들에게 막강한 세력을 과시했다. 바로 이것이 오늘날 로마 캐톨릭 교회 사제들의 세력의 비밀인 것이다.
일단 이 조직안으로 들어가면 그 사람은 더 이상 바빌론인도, 앗시리아인도, 혹은 이집트인도 아니면 오직 신비적인 성직자단 의 일원이 되어 교황, 또는 “대사제”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고, 그들의 말이 법이되어 버린다. 바빌론 도시는 요한이 살았던 소아시의 퍼가모로 사탄의 본거지가 옮겨질때, 즉 바빌론과 메디아와 페르시아왕이 멸망 당할때까지 계속 사탄의 처소가 되어왔다(계2:12-13).
B.C 133년 퍼가머의 왕이자 대사제인 아틀라우스가 죽을때 그는 “바빌론 사제회”의 지배권을 로마에 위임했다. 에투루리아인들이 리디아(퍼가머지역)로부터 로마로 왔을때, 그들은 바빌론의 종교와 의식들을 함께 가지고 왔다. 그들은 사제회의 우두머리인 교황을 세웠다. 그후 로마인들은 이 대사제를 그들 도시의 지도자로 받아들였다. B.C 74년에 줄리어스 시저는 에투루리라 종교의식의 대사제가 되었다. 이렇듯이 “바빌론 사제회”의 우두머리가 첫 로마황제가 되었고, 로마는 바빌론의 전승자가 되었다. A.D 366년 대주교가 된 이후 12년간 계속 대주교로 남아 있었다. 그래서 A.D 378년에 바빌론 조직의 우두머리는 “로마 교회”의 통치자가 되었다. 이렇게 사탄은 로마와 바빌론을 하나의 종교체제 안으로 연합시켜던 것이다.
곧 다마수스(Damasus)는 “최고 대사제”가 되었고 바빌론의 “종교 의식”을 드러나게 하였다. 처녀 마리아에 대한 숭배는 A.D 381년에 마련되었다. 모든 로마 교회의 특별한 축제들은 바빌론이 그 기원이다. “이스터(Easter)”는 그리스도교의 이름이 아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자손들에 의해 숭배되어진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했던 바빌론의 하늘의 여왕의 이름 중에 하나인 “이스타르”(Ishtar)를 뜻한다. 이스터와 사순절의 준수에 대한 법령은 A.D 519년에 주어졌다. “묵주”(Rosary)의 기원은 이교도적이다. “십자가 상징”을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 말씀 어디서도 근거를 찾아 볼수 없다. 십자가 상징에 대한 기원은 칼데아인들과 이집트인들의 신비의 “타우(Tau)”에서 찾을 수 있다. 그것은 “탐무스”(Tammuz)의 첫 머릿글자인 “T”로부터 왔고 “바빌론의 신비 의식”에 사용되었고 똑같은 목적을 가지고 현재 로마 교회도 그것을 사용하고 있다. 독신주의, 삭발, 그리고 사제와 수녀제도, 이 모두는 성경 어디에서도 근거를 찾을 수 없다. 수녀 제도는 이교 로마의 “베스타 처녀”의 모방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신비”라는 단어에서 보듯이 로마 교황의 교회는 자신을 신비속에 감취 왔던 것이다. “침례(세례)의 의한 중생”의 신비, 주의 만찬을 단순히 기념하는 대신에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몸과 피가 된다는 “화체”라는 신비스러운 단어에서 볼 수 있는 “기적과 마법”의 신비, “성수”의 신비, “제단위의 촛불”의 신비, 신비한 행사들, 그리고 다른 미신적인 장소나 행사에서 그 의미가 바빌론에서 유래된 신비스럽고 혼란스런 단어들의 중얼거림 등이 있다.
이 모든 것이 요한이 본 “신비”이다. “불법의 신비”가 이미 활동하고 있었으나(살후2:7), “로마 교황의 교회”는 아직 생겨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더 이상 “신비”가 아니다 왜냐하면 요한은 “로마 교황 교회”로 묘사했던 -“신비라, 큰 바빌이라.”고 했던 그 “여자”가 누구인지 지금은 쉽게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계시록17:4절에 다음과 같이 쓰여있다.
“또 그 ‘여자’는 자주색과 주홍색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장식하고 손에는 ‘금잔’을 가졌는데 그 잔은 가증스런 것들과 그녀가 행한 음행의 더러운 것들로 가득 찼더라.”
지금은 자주색과 주홍색이 교황의 색이라는 것을 어느 누가 모른단 말인가? 교황이 직무에 들어갈때 입는 세세하게 규칙이 정해진 다른 목록의 다섯가지 의복은 모두 자주색이다. 진주들로 덮혀있는 의복과 금과 값진 보석들로 장식된 관을 착용한다. 자주색의 짐승 위에 앉은 여자의 옷에 대한 묘사가 얼마나 완벽한지 보라.
우리는 또한 그 여자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순교자들의 피로 취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이 언급은 적그리스도 시대의 순교자들에 대한 특별한 것이기는 하지만, 지난 19세기 동안 실제적인 로마 교회가 이러한 일을 자행해 왔다는 것을 교회사를 공부한 학생이라면 누가 모르겠는가?
로마 교황의 교회가 성도들의 피에 “취해 왔다”는 사실을 살펴보려면 초기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를 살펴보는 것만으로 충분하지만, 로마 교회의 땅에서 자행된 종교재판이라는 특별한 역사적 사실을 살펴보면 더욱 잘 알게 될 것이다.
여자가 주홍빛 짐승위에 앉았다는 사실은 그 시대에 그 짐승(적그리스도)이 그의 교회 범위 내에서 그녀를 지원한다는 사실을 계시한다. 또 한편으로는 “교회 국가”(State Church)로서 그녀가 국가를 통치하고 다스리는 그녀의 오랜 꿈이였던 범세계적인 교회 지배를 실현하게 된다. 그 이유는 요한이 “네가 본 그 ‘창녀’가 앉아 있는 물은 백성들과 무리들과 민족들과 언어들”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참된 교회”(그리스도의 신부)가 세상으로부터 사라지고 난 후, 거짓 교회, 즉 로마 교황의 교회(적그리스도의 신부)가 남게 될 것이고, 뒤에 남은 말로만 그리스도인인(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한 사람들)은 로마 교황의 교회에 대규모로 참여하게 될 것이며 이것은 전세계적인 교회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 교회는 짧은 기간동안만 유지될 것이다. 그 이유는 “로마 교황 조직”으로부터 빼았겼던 권력을 되찾은 “연합된 왕국”의 “열왕”이 “그 창녀를 증오하며” 그녀를 패망시키고 벌거벗기며 그녀의 부를 몰수하고(살을 먹고), 그 교회와 그의 권좌를 태울 것이기 때문이다(계17:16).
이러한 일들이 짐승에 대한 경배가 완성되는 시기에 일어날 것이다. 왜냐하면 질투와 증오 안에 있는 적그리스도가 자기 자신이 중심이 되지 않는 어떠한 경배도 허락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자가 위에 탄 그 짐승은 참교회가 “밝혀진” 후에 권력과 지지를 얻게 된 그 여자(로마 교황 교회)로부터 소개된다. 또한 그 짐승(적그리스도)과 그 여자(로마 교황의 교회)는 하나가 아니라 분리되어 있다. 그러므로 교황권은 적그리스도가 아니다. “주홍빛의 짐승”에 대한 설명은 적그리스도에 관한 장을 살펴보기 바란다.
이러한 교황권에 대한 미래의 고찰로부터 우리는 로마 교황의 교회는 죽어가는 “조직”이 아님을 볼수 있다. 그녀는 되살아나고 “전세계적인 교회”가 된다. 그리고 그렇게 되기 위해서 그녀는 지구상의 왕들과 음행하게 될 것이고 또 다시 환란 시대의 순교자들의 “피에 취하게” 될 것이다. 계시록17장의 의미는 더 이상 신비가 아니다. 그 여자에 대한 묘사는 로마 교황의 교회의 역사와 너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어 간단히 말해 같다고 할 수 있겠다.
2. 상업의 도시 바빌론 계18:1-24
이장은 “이 일들 후에”라는 단어로 시작된다. 무슨 일인가? 그 일은 앞장에 기록된 “신비의 바빌론”의 패망이다.
“신비의 바빌론”이 앞 장에서 파괴되었다면 그녀는 이 장에서 나타날 수 없다. 그리고 여기서 묘사된 “도시”는 바빌론이라고 불리는 문자적인 도시임이 틀림없고, 오늘날 지구상에 이러한 이름을 가진 도시가 없으며, 고대 도시인 바빌론은 이렇게 파괴된 적이 없었기 때문에 미래의 바빌론 도시임이 분명하다. 이 두장이 다른 것을 설명하고 있음을 각기 다른 천사들이 언급하고 있는 사실로 더욱 분명해진다. 17장은 “호리병” 천사에 의해 언급된다. 그에 반하여 18장은 “다른” 천사에 의해 언급된다. 아마도 “두번째 메시지를 전하는 천사”는 14장8절에서 “큰 도시” 바빌론의 멸망을 예언했던 천사였을 것이다.
님롯의 시대로부터(창10:10) 고대의 바빌론 도시는 B.C604-562년 느브캇네살의 통치의 위대한 영광에 이르기 까지 규모와 중요성에 있어서 계속 성장했다. 헤로투스가 묘사한 것처럼 그 도시는 한 변의 길이가 15마일인 사각형 형태였거나 원의 둘레가 60마일이었으며 두께가 87피트이고 높이가 350피트인 담으로 둘러싸여 있었다고 한다. 아마도 이것은 잘못 측정한 것이겠지만 높이가 100피트에 육박했던 것이다. 벽 위에는 250개의 탑이 있었고 탑 위에는 6대의 전차가 나란히 달릴 만큼 넓었다. 이 담 바깥 쪽으로는 유프라테스강으로부터 유입된 물로 이루어진 수로가 벽을 두르고 있었다. 그리고 이담 안쪽으로는 바깥 담보다 그렇게 허술하지 않은 좁은 담이 도시까지 뻗어있었다. 폭이 150피트인 25개의 거대한 가로수 길이 북쪽으로부터 남쪽까지 도시를 가로질러 뻗어있었고 다리가 이 도시의 안쪽으로 흐르는 유프라테스강에 걸쳐 있었으며 이 다리의 각 끝에는 궁전이 있었다. 가장 큰 통로의 각 끝에는 도시의 사방으로 이어지는 문들이 있다. 이 문들은 태양이 뜨면 열리고, 태양이 지면 닫히었다.
성안으로 흐르는 유프라테스 강물위로는 다리들을 놓았고, 물밑으로 통로를 만들어 그곳을 통과하면 황동으로 만들어진 연회장이 나온다. 이 궁전 큰처에 “벨의 탑” 또는 바벨이라고 불리는 건축물이 있었다. “벨의 탑”은 8개의 성루로 되었있으며 각각의 높이가 75피트이다. 그중에 가장 높은 탑과 나머지 탑과는 서로 왕래할 수 있는 통로를 만들어 놓았고, 외부에는 나선형 계단을 만들어서 올라갈 수있게 했다. 가장 꼭대기에 있는 방은 바닥에서 높이가 660피트였다. 이 방안에는 세상에서 사용되는 가장 값비싼 가구들이 즐비했다. 45피트 크기의 금 신상하나만해도 그 가격은 무려 17,500,000 $ 이며 다른 장식물들까지 합한다면 200,000,000 $는 족히 넘을 것이다. 바빌론은 또한 “세계 7대 불가사의”들 중에 하나인, “공중 정원”이 있는 곳이다.
이 정원은 4만 평방미터이며, 가장 높은 테라스는 350피트의 공중에 너비 10피트의 길이 나 있다. 테라스마다 대리석으로 덮여서 마치 침대석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으며 물이 새지 않을 만큼 정교하게 연결시켜 놓았다. 하지만 전체의 모습은 그렇지 않다. 돌위에 흙을 덮어 놓고 나무와 관목을 가꾸어 놓았다. 그래서, 언뜻 보면 유프라테스 강과 외관이 잘 어울린 숲이 우거진 산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 모습은 유프라테스의 낮은 평원에서 보면 정말 볼만한 광경이었다. 이 정원은 느브캇네살이 메디아의 산이 많은 지역에서 온 그의 아내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서 만들었으며 이 정원에 그녀는 매우 흡족해 했다고 한다. 이 도시의 나머지 부분들도 매우 정교하여 아름답게 지어지지 않은 것이 없다. 이곳의 거주민들과 관료들의 생활의 특징은 “벨사살의 잔치”의 묘사에서 잘 나타나 있다(단5:1-31). 바빌론은 아마도 여지껏 보아왔던 세상의 도시 중에서 가장 웅장하였으며, 위엄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을 버렸을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직접 나타나 심판의 메시지를 벽에 기록했던 것이다. 또한 바벨론은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의 역사와 너무나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기 때문에 성경은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이곳에 관해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다니엘과 예레미야의 예언과 많은 부분이 이곳과 관련되어 있으며, 구약에서는 11번, 신약에서는 4번 언급하고 있다. 다니엘의 예언을 완벽하게 설명하고 있는 계시록에서 다시 한번 “바벨론”이란 도시가 나오는 것을 통해 우리는 이 도시의 중요성을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계시록에서는 바벨론이 “마지막 때”에 이 세상에서 일어날 사건과 연관된 도시임을 말해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바베론은 결국 파멸을 맞을 것이라는 사실을 예언해 준다.
고대 바빌론 도시는 이미 파괴되었음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우리가 “바벨론”이 다시 재건되었다가 파괴된다고 주장할 때 다음과 같은 두가지 반론에 부딪힌다.
1. 이곳의 파멸을 언급한 구약의 모든 예언들은 이미 문자적으로 성취되었으며 이곳은 다시 재건 될 수 없다.
2. 지금 존재하는 계시록에 언급하는 바빌론 도시는 없으므로 바벨론이 파멸되기 위해서는 바벨론이 문자적인 도시가 아닌 상징적인 도시이어야 한다.
우선 첫 번째 반론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바빌론의 모습과 그곳의 파괴에 관해서는 이사야서 13,14장과 예레미야서 50,51장에 나와있다. 이 두 예언에서 우리는 바빌론 도시에 관해서 아직 많은 부분이 성취되지 않았음을 발견 할 수 있다.
바빌론은 B.C.541년 코레스에 의해 함락당했다 하지만 코레스가 태어나기 125전에 이미 “코레스”란 이름이 예언되어 있다(사44:28-45). B.C.712년 너무나 조용하고도 감쪽같이 군사들이 그 도시를 침입했다. 바빌론 경비병은 그날 문을 잠그는 것을 잊고 있었던지, 강물을 따라 벨사살왕이 연회하는 그곳으로 군사들이 들어와 그를 죽였던 것이다. 하지만 3일이 지나도록 바벨론에 사는 거주민들은 왕이 살해된 것이나, 자신들의 도시가 빼앗긴 사실조차 알지 못했던 것이다. 이 때, 왕은 죽었지만 바벨론이란 도시는 조금도 파괴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몇 년이 지난 후에 다리우스 히스테스피스(Darius Hystaspis)에게 반란을 일으킨 사람들이 있었지만 20개월이나 투쟁한 끝에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하고 모두 사로잡히고 말았다. 이때가 B.C.516년이었다. B.C. 478년경 크세르크세스(Xerxes)가 그리스를 침공하고 돌아오던 길에 “벨의 탑”을 완전히 파괴하지 않았다 해도 약탈하고 훼손시켰을 것이다.
B.C. 331년경 알렉산더 대왕이 거기에 도착했을 때, 알렉산더는 바벨론의 장엄함에 놀라 군사들에게 즉각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그는 반격을 예상했으나 바벨론 거민들은 성문을 활짝 열고 대왕을 맞이하였다. 알렉산더는 “벨”(고대 바빌론과 앗시리아의 땅의 신)에게 제물을 바친 후에 이 신의 거대한 신전을 재건하기 위하여 몰두 했으며, 매주 약 10,000명의 남자들을 동원해서 기초석에 남아 있는 파편들을 제거하였다. 그의 계획은 의심할 여지 없이 그곳을 그의 수도로 정하여 바빌론의 영광을 부활시키려는 시도였다. 하지만 그의 계획은 그의 나이 33세에 습지의 열병과 과로로 갑작스런 죽음으로 좌절되었다. 그의 장군들에 의해 이어지는 많은 전쟁으로 바빌론은 많은 고초를 겪었으며 마침내는 세렉쿠스의 권세하에 들어갔다. 자신을 위하여 수도를 세울 야심에 고무되었던 그는 약 B.C. 293년에 바빌론에 근접한 세레우시아(Seleucia)를 발견했다. 이 부활한 도시는 바빌론 거주민들을 이곳으로 이주시켰다. A.D 25년에 죽은 스트라보(Strabo)는 이 도시를 전의 바벨론과 비교했을 때 “불모의 땅”이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포로에서 풀려난 후에도 엄청나게 많은 수가 그곳에 남아서 살고 있었다. A.D.60년에 베드로가 보낸 서신에서(벧전5:13) “바빌론의 교회에서” 마르코가 사역하고 있었음을 발견할 수있다.
데오도르(Theodort)는 5세기 중엽에는 바빌론에 유대인만이 살고 있었다고 말한다. 거기에 유대인들이 대학을 세워서 “바벨론 탈무드”를 만들었는데 아직도 내려 오고 있다. 이 사실은 전세계의 유대인들에 의해 권위 있는 경전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서기 917년에 헨켈(Ibu Hankel)은 바빌론은 매우 중요한 도시로 언급하며 아직도 여전히 존재하는 도시라고 했다. 1100년경 바빌론은 “두개의 모슬렘 사원” 때문에 약간 중요한 도시로 다시 성장하기 시작했다. 얼마후 이 도시는 “힐라”라는 이름으로 개명되어서 요새화되기 시작했다. 서기 1898년에 “힐라”는 약 10,000명의 시민이 살게 되었고, 비옥한 토양과 유프라테스 강둑을 따라 심은 유실수로 인해 점점 부유해지기 시작했다. 이런 사실은 이사야13:20에 나오는 예언과는 확실히 어긋난다.
“그곳에 사람이 살지 못할 것이며 대대로 거하지도 못하리니, 이는 아라비아인도 거기에 장막을 치지 않을 것이며 목자들도 거기에 양우리를 만들지 아니하리라.”(사13:20).
“그녀의 성읍들은 폐허이고 마른 땅과 광야이며, 땅에는 사람이 살지 않고 거기로 지나는 사람의 아들은 아무도 없도다.”(렘51:43).
“그리하면 사람들이 네게서 모퉁이 돌이나 기초를 놓을 돌을 취하지 아니할 것이며 너는 영원히 황페하게 되리라 주가 말하노라.”(렘51:26)
이 예언들도 맞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사야는 그의 예언이 성취되어질 “때”에 관하여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그는 이때를 “주의 날”이라고 불렀다(사13:9). 이 날은 천년기간이다. 그리고 그는 이 날의 위치를 천년의 시작에, 천년으로 들어가는 사건의 위치에 둔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별들과 그 별무리들이 그들의 빛을 내지 않을 것이요, 해가 솟아나와도 어두워지겠고, 달은 그 빛을 비추지 아니하리라(사13:10.) (눅21:25-27).
분명히 사이러스(Cyrus)에 의해 바빌론이 점령 당했을 때 이와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계시록 18장의 바발론 도시의 멸망에 대한 묘사에서 우리는 그녀의 심판이 한 순간에 일어날 일임을 알 수 있으며(10절), 순식간에 그녀는 황폐하게 될 것이다(19절). 그녀의 갑작스러운 완전한 멸망에 관한 비유로 한 힘센 천사가 큰 맷돌 같은 돌을 바다에 던지면 “큰 도시 바빌론이 이처럼 세차게 던져져서 결코 다시는 보이지 아니하리라.”(계18:21)라고 말한다.
우리는 또한 같은 장에서 그녀는 불에 의해 멸망당한다는 것을 들을 수 있다(계18:8,9,18). 이것은 이사야서13:19의 말씀과 정확히 일치한다.
“여호와가 말하노라. 하나님이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성읍들을 멸망시킨 것같이 그곳에는 아무도 거하지 아니할 것이요 어떤 사람의 아들도 그곳에 거하지 아니하리라.”
선지자 예레미야도 같은 동일한 언급을 했다(렘.50:4).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은 오랜 기간이 걸리지 않았으며, 그들의 멸망은 몇 시간 만에 사라져 버렸다(창19:24-28).
계시록16:17-19에서 바벨론은 지진과 천둥과 끔직한 번개로 멸망된다고 기록하고 있다. 소돔과 고모라는 처음에 불에 의해 멸망되었으며, 그 후에 지진에의해 땅으로 삼켜졌다. 마찬가지로, 미래의 바빌론은 고대 바빌론이 서서히 멸망했던 것 같지 않을 것이다. 미래의 바빌론이 소돔과 고모라처럼 멸망되기 전까지는 이사야와 예레미야의 예언은 여전히 성취되지 않을 것이다. 소돔과 고모라가 처음에는 불이 떨어졌고, 지진에 의해 삼켜진 것처럼 재건된 바빌론도 불이 떨어지며, 고대 바빌론 아래에 역청(아스팔트)가 있는데, 지진은 땅의 지각을 갈라 불타는 도시를 “불못”으로 떨어지도록 촉진시킬것이다. 이 도시는 “맷돌”이(계.18:21) 바다에 던져지는 것처럼 지각 밑으로 가라 앉을 것이며, 이로써 그곳의 돌들을 사용하여 다시 재건하는 일은 영원히 없을 것이다. 이 지역은 사람들이 거주할 수 없는 광야가 될 것이란 예언은 이 때 정확하게 성취되는 것이다.
우리는 고대 바빌론 도시를 재건될 가능성으로 보이는 일이 역사 가운에 여러번 있었음을 볼 수있다. 프랑스 전쟁 중 파리에서 나폴레옹 1세의 명령에 의해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아주 귀중한 조사서들과 지도들이 발견되었다. 이것들은 모두 바빌론과 바빌론의 새도시에 관한 것으로써, 나폴레옹의 웅대했던 야심을 보여 준다. 나폴레옹은 고대 바빌론을 재건하여 수도를 이곳으로 정하여 전 유럽과 아시아를 정복하고 마지막에는 행정과 상업의 중심지로써 고대 바빌론을 전략상 가장 중요한 위치로 설정한 것이었다.
사실 메소포타미아 전 지역과 바빌론과 앗시리아가 다시 세상에서 가장 비옥한 땅이 되기 위해서는 관개 수로 시설을 필요로했다. 그래서, 계단식 수로 시설을 만들었던 것이다..
1950년 영국 정부는 15,000달러의 비용을 들여 군인들을 유프라테스강을 조사하고 탐험하도록 명령했으며, 유럽 전쟁이 일어나자 이집트의 아소암 땜을 건설했던 뛰어난 영국 기술자들을 관개 수로 시설을 만들기 위해 유프라테스 골짜기를 조사하도록 고용했는데, 이것은 한 때 엄청난 곡물 생산 지였던 이 지역을 다시 복구 시키기 위해서였다. 이 결과로 마을과 도시들이 세워졌고 철길이 건설되었다. 세계의 일부에서 요구하는 것은 유럽과 아시아, 인도를 연결하는 항공노선인데 이것은 유럽과 인도와 중국을 연결해 줄 것이다. 이러한 항공노선은 독일의 제상 윌리엄(William)의 꿈이 었었다. 이러한 꿈 때문에 그는 터키의 압둘 하미드(Abdul Hamid)와 친구가 될 수 있었다. 그는 압둘 하미드로 하여금 아시아의 보스포러스에서 알렙포를 경유하여 티그리스 강에 도달하는 철로를 놓도록 했으며, 거기에서 다시 바그다드까지, 바그다드에서 바빌론을 경유하여 페르시아의 쿠웨이트까지 철로를 세우도록 정치적 이권을 주었다.
바빌론을 중심으로 이런 도시만 재건된다면, 역사에서 가장 큰 제국을 다시 건설할 수있다는 마음 때문이었다. 하지만 몇몇 사람은 이런 질문을 할 것이다. “당신의 말이 사실이라면 어떻게 주님이 “어느 때”라도 올 수 있겠습니까?” 주님이 오시기 전에 반드시 바벨론이 재건되어야 한다면 바벨론이 재건될 때까지 주님은 오시지 못할 것 아닙니까? 성경에는 바빌론이 재건되기까지 에수님이 오셔서 그분의 교회를 데리고 가시기 위해 오실 수 없다는 말씀이 없다. 아마도 이런 일이 있기 전 25년, 심지어 50년 전에 그의 교회를 취하여 데려 가실 것이다.
큰 바빌론은 세상에서 일찍이 볼수 없었던 모든 면에서 가장 위대한 거대 도시가 될 것이다. 이 날에는 런던, 파리, 베를린, 뉴욕, 시카고 등의 대표적인 도시가 될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큰 상업의 도시가 될 것이며, 이곳의 상품은 금, 은, 값진 보석과 진주, 세마포, 자주색 옷감, 비단, 주홍색의 값진 옷감이 될 것이다. 이 유행의 사회는 가장 비싼 의류와 가장 값진 진주들로 장식할 것이며, 그들의 집에는 값비싼 직물과 양탄자와 융단과 함께 고급 목재와 동, 철, 대리석의 비싼 가구들로 가득할 것이다. 이들은 가장 값비싼 향료와 계피, 향기로운 향수, 연고, 유향을 사용할 것이며 그들의 연회는 가장 달콤한 포도주와 고급 케익과 아주 맛있는 음식으로 채워 질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노예를 소유하고 있는데, 그들의 “사람의 혼들”을 매매 할 것이다. 즉, 여자들은 그들의 몸들, 남자들은 자신들의 정욕을 만족시키기 위해 그들의 혼을 팔 것이다.
시장에는 소와 양과 말들이 떼를 지어 있을 것이며, 부두에는 모든 나라에서 온 상품들이 쌓여 있을 것이다. 공장에서는 값비싼 직물을 생산해내고 천재들은 인간의 편리함과 안락함을 위해 발명한 여러 가지 상품들을 시장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도시는 즐거움과 사업에 몰두 할 것이다, 사업가들과 그 설립자들은 돈을 약삭빠르게 빨리 버는 방법을 찾기 위해 밤과 낮을 보낼 것이다.
그곳에는 떠들썩한 기쁨과 끊임없는 연회가 있을 것이다. 노아와 롯의 날처럼 그들은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며, 집짓고, 심을 것이다. 피가 그들의 혈관으로 뜨겁게 돌 것이다. 돈은 그들의 신이 될 것이며, 괘락은 그들의 제사장, 절제하지 못하는 욕정은 그들의 예배의식이 될 것이다. (아버지!)
그곳은 음악의 도시가 될 것이며, 흥겨운 음악소리가 어느 거리에서나 울려 퍼질 것이며, 극장은 늘 사람들로 붐빌 것이다. 그곳에는 “하프 타는 자와 음악하는 자와 피리 부는 자와 나팔 부는 자들의 소리가 들릴 것이다(계18:22).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가수들과 연주자들이 그곳에 있을 것이며, 사실 그곳에는 도시의 전기 조명으로 밤을 낮과 같은 밝기로 그림자를 없게 만들어 밤이 없을 것이다. 그곳의 점포와 상업지역은 밤이건 낮이건 일요일이건 결코 닫지 않을 것인데 괘락에 열광적으로 사로잡히고 부에 대한 욕망에 사로잡혀 장사의 수레바퀴가 쉼없이 움직일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손쉽게 일어날 것인데, “이 세상의 신”인 사탄 때문이다.
그는 마음과 인간의 몸을 사로잡을 것인데, 왜냐면 2절에서 우리는 바빌론은 이 때에 “마귀들의 거처가 되었고 온갖 더러운 영의 소굴이요, 모든 더럽고 가증한 새의 소굴”이 될 것이다. 이 도시에서 가장 이목을 끄는 것은 “신비주의”(Occultism),와 영매(Mediums), 그리고 그 사람들은 세상과 교제하기를 갈망할 것이다. 이들은 현재 남녀들이 패션과 감각적인 즐거움을 위해 파리로 가듯이 이들은 바빌론으로 갈 것이다. 이때, 마귀들, 몸이 없는 혼들, 더러운 영들은 바빌론에서 인간의 몸에 들어가 그들의 거처로 삼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마귀에 들려서 사탄에 의해 통제받게 될 것이다. 대기권 밖에 있는 하늘에서, 심연의 밑으로부터 셀수 없는 군대들이 바빌론이 완전히 멸망하기 전에 그들의 영광을 자랑하며 사탄이 육화된 적그리스도의 통치를 받으며 살 것이다.
그러나 그곳이 멸망하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그분 자신의 백성을 자비로우심으로 구출하실 것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이 하늘에서 음성이 외쳐질 것이기 때문이다.
“백성들아, 그녀에게서 나오라. 그리하여 그녀의 죄들에 동참자가 되지 말고 그녀의 재앙들도 받지 말라(계18:4절).
소돔과 고모라는 의로운 롯이 피하기 전까지는 멸망되지 않았던 것처럼 바빌론도 그와 같이 의로운 사람들이 도망하기 전까지는 멸망되지 않을 것이다.
이 도시의 멸망은 경고 없이 갑자기 일어날 것이다. 무서운 폭풍이 이 도시를 휩쓸어 버릴 것이며, 번개와 천둥은 끊임없이 일어날 것이다. 이 도시 위에 불과 엄청난 지진이 중심부에서 그 주변까지 요동칠 것이다. 높은 사무실 건물, “공중 정원”, 그리고 엄청난 탑들은 비틀거리며 넘어질 것이며, 땅의 겉 표면은 갈라지고 열려 전체 도시가 그곳의 거주민들과 함께 “맷돌”(21절)처럼 역청으로 불타는 못으로 가라앉을 것이며, 그 연기는 불타오르는 용광로처럼 올라갈 것이며, 이 공포의 장면은 유프라테스 강의 물이 역청 불못에 부어져 발생한 엄청난 증기 구름에 의해 한층 더하여 질 것이며, 이러한 증기 구름이 밤에 올라왔을 때는 도시의 타는 빛이 반사되어 낮은 지역에 있는 모든 방향에서 상당히 먼 거리에서도 이러한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세상의 왕들과 상인들과 선장과 선원들은 그녀와 장사해서 수익을 올렸던 모든 사람들은 그녀의 파멸로 인하여 멀리서서 울며 통곡할 것이다. 하지만 하늘에서는 하나님께서 그녀의 행위에 대하여 배로 그녀에게 갚아주신 것에 대해 기뻐할 것이며, 바빌론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적그리스도 (Antichrist)
예언을 공부하는데 있어 이제까지 우리는 “그리스도의 재림”에 역점을 두어 왔지만 그리스도의 재림과 같이 중대한 두 다른 “인물”이 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않된다. 첫 번째는 적그리스도에 관한 것이고, 두 번째는 사탄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신․구약 성경 모두에서 “마지막 때”에 나타나게 될 “신비스럽고 무서운 인물” 에 대하여 듣게 된다. 그는 여러 많은 이름들과 가명(또는 별칭)으로 묘사되고 있기 때문에 이 이름들과 그 이름들이 묘사하고 있는 그 인물에 관한 주의 깊은 연구와 비교를 통해서만이 그것이 한 사람, 곧 동일한 인물을 언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구약에서 >
이사야
14: 4 - “바빌론 왕”
14:12 - “루시퍼”
다니엘
7:8, 8:9 - “작은 뿔”
8:23 - “사나운 용모의 왕”
9:26 - “장차 올 왕”
11:36 - “사악한 왕” |
< 신약에서 >
바 울
살후2:3-8 - “죄의 사람”,
- “멸망의 아들”,
- “불법자”
요 한
요일2:18 - “적그리스도”
계시록13:1 - “짐승” |
예수님께서도 적그리스도에 대하여 예언적인 언급을 하셨다.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나 너희가 나를 영접하지 아니하는도다.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너희는 그를 영접하리라(요5:43).
유대인들은 예수를 그들의 메시아로서 거절하였으나, 적그리스도가 올 때에는 그를 자신들의 메시아로 영접할 것이다.
l. 그의 인격
초대교회는 적그리스도가 하나의 “인격”, 곧 인간의 모독스러움과 사악함의 화신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12세기 말경으로 가면서 많은 사람들이 교황을 적그리스도로 간주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런 관점은 주로 개신교 주석가들의 지지를 받았다. 이 관점에 대한 견해들은 독창적이며 그럴듯 하지만, 그런 주장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조화되기는 어렵다. 이러한 관점은 적그리스도를 한 인격으로 보다는 “체제”로 여기고, 적그리스도를 “교황 체제“ 안에서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이를 반증한다.
1. 사도 요한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 외에 누가 거짓말쟁이뇨?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자가 곧 적그리스도니라(요일2:22),
“예수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을 시인하지 아니하는 모든 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요일4:3).
유대주의는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해 왔고, 유니테리온주의(Unitarianism)는 그 분이 “육체로 오심”을 부인한다. 그러나 교황제는 결코 그렇지 않다. 로마 교회는 항상 “나는 하늘과 땅의 창조자이신,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와 그 분의 유일한 아들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한다.
2. 모든 개신교 주석가들은 “교황체제”가 요한계시록 17:4,5에서 “자주색과 진홍색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장식한 여자의 모형”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창녀들의 어미”인 이 “여자”는 일반적으로 적그리스도라고 인정되어지는 “한 짐승” 위에 타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만일 그 “짐승”이 적그리스도라면 그 “여자”는 적그리스도가 될 수 없고, 그 둘은 별개이며, 똑같은 것으로 의미되지 않는다.
3. 다시 적그리스도는 “죄의 사람”으로서 다음과 같이 할 것이다.
“신보다 자기를 높이고(단11:36,37).
“그는 대적하는 자이며 또 하나님이라고 불리우는 모든 것과 숭배받는 대상 위에 자신을 높여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하나님처럼 보여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하느니라.
(살후2:4).
그렇지만 거짓되고 불경건한 교황체제는 항상 하나님께 대한그들의 복종을 서약하고, 교황의 주된 주장은 “그리스도의 대사”라고 하는 것이다.
4. 온 세상이 기이히 여겨 그 짐승(적그리스도)을 따르더라. 사람들이 그 짐승에게 권세를 준 용(마귀)에게 경배하고...(계13:3,4).
“교황체제”는 “동정녀”(마리아)와 “성인”들을 숭배하지만, 마귀를 숭배한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5. 누구든지 그 짐승과 그의 형상에게 경배하고 그의 표를 자기 이마나 손에 받는다면 그 역시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게 되리니. . . 또 그 사람은 거룩한 천사들과 어린 양의 임재 가운데 불과 유황으로 고통을 받으리니 그 고통의 연기가 영원 무궁토록 올라가리라. 그 짐승과 그 형상에게 경배하고 그의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계14:9-11).
만일 위의 구절에 따라 “교황체제”가 적그리스도라면, 요한계시록14:9-11에 근거할 때 교황체제를 경배하는 모든 사람들은 구원받는 대신에 영원한 고통에 이르는 운명에 처하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적그리스도를 멸하시는 그리스도께서는 예루살렘에 오시지, “교황체제”의 자리가 있는 로마에 오시지 않는다. 적그리스도를 “예시해 주는” 로마교회의 역사와 로마교회의 교황들은 그 행위 속에 이런 많은 것들이 있지만, “교황체제”는 적그리스도가 결코 아니며, 이러한 성경구절들은 오로지 어떤 개인으로서 나타나게 될 인격 속에서만 성취되어 지리라는 것은 앞선 성경 구절들에서 분명히 알 수 있다.
적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의 경쟁자나 모조된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자이다. 우리는 이것을 다음과 같은 대조를 통해 그리스도와 그를 비교함으로써 알 수 있다.
< 대 조 >
1. 그리스도는 위로부터 오셨다(요6:38).
적그리스도는 구렁으로부터 올라온다(계11:7).
2.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오셨다(요5:43).
적그리스도는 자기의 이름으로 온다(요5:43).
3. 그리스도는 자신을 낮추셨다(빌2:8).
적그리스도는 자신을 높인다(고후2:4).
4. 그리스도는 멸시를 받으셨다(사53:3; 눅23:18).
적그리스도는 칭송 받는다(계13:3,4).
5. 그리스도는 높임을 받으셨다(빌2:9).
적그리스도는 불못에 던져진다(사14:14,15; 계19:20).
6.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 위해 오셨다(요6:38).
적그리스도는 자기 자신의 뜻을 행하러 온다(단11:36).
7. 그리스도는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눅19:10).
적그리스도는 멸망시키기 위해 온다(단8:24).
8. 그리스도는 선한 목자이시다(요10:4-15).
적그리스도는 어리석은 목자이다(?11:16,17).
9. 그리스도는 참포도나무이시다(요15:11).
적그리스도는 땅에서 나온 포도나무이다(계14:18).
10. 그리스도는 진리이시다(요14:6).
적그리스도는 거짓이다(살후2:11).
11. 그리스도는 거룩한 분이시다(막1:24).
적그리스도는 불법자다(살후2:8).
12. 그리스도는 슬픔의 사람이시다(사53:3).
적그리스도는 죄의 사람이다(살후2:3).
13.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눅1:35).
적그리스도는 멸망의 아들이다(살후2:3).
14. 그리스도는 “경건의 신비”로서 육체로 나타나신 하나님이시다
(딤전3:16).
적그리스도는 “불법의 신비”로서 육체로 나타난 사탄이 될 것이다
(살후2:7).
Ⅱ. 적그리스도의 기원
1. 이사야의 예언
메시아에 관한 이사야서 11장에서 우리는 메시아가 할 다음과 같은 일들을 읽을 수 있다.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고 자기 입술의 호흡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라(이사야11:4).
“악인”으로 번역된 단어는 단수이며, 일반적인 악인들에 대한 언급이 아니라 분명히 불법자 한 사람에 대한 언급이다. 이것은 놀랍게도 데살로니가후서 2:8에 나타난 바울의 표현과 같다.
“그리고 나서 그 “불법자”가 나타나리니 주께서 그를 “자기 입에서 나오는 영”으로 소멸하시고 “그의 찬란한 오심”으로 제거하시리라(살후2:8).
이사야와 바울은 위 구절에서 동일한 인물, 다름 아닌 적그리스도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사야14:4-17에서는 진노로 그 백성들을 치고, 분노로 나라들을 다스리게 될 한 “바빌론 왕”에 대한 묘사가 있는데, 그는 자만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늘에 올라가서 내 보좌를 “하나님의 별들”(하늘의 권세들)보다 높일 것이요, 내가 또한 북편에 있는 회중의 산 위에 앉으리라. 내가 구름들의 높은 곳들 위로 올라가서 지극히 높으신 분같이 되리라”
이 왕을 루시퍼라 부른다. “아침의 아들”과 그의 “타락”이 설명 되어 있다. 그는 지옥(스올, 지하세계)에까지 내던져지는데, 그곳은 그가 옴으로 인하여 그에 앞서 있던 지상의 왕들 가운데 큰 동요를 일으킬 것이며, 그들이 그를 볼 때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우리같이 연약하게 되었느냐? 너도 우리같이 되었느냐?... 이 자가 땅을 떨게 하고, 왕국들을 진동시켰으며, 또 세상을 광야같이 만들었고, 그 성읍들을 멸망시켰으며, 그의 갇힌 자들의 집을 열어주지 않았던 그 사람이냐?” (이사야14:4-17)
아직 여기에 묘사된 것과 같은 바빌론 왕은 결코 없었다. 그러므로 바빌론이 예전처럼 새로이 재건될때 바빌론의 어떤 ‘미래의 통치자’에 대해 언급한 것임에 틀림없다.
12절과 14절은 분명히 사탄에 대한 언급이며, 타락 이전의 그에 관한 묘사이지만, 그가 자신을 적그리스도로 육화할 때 그는 미래의 바빌론 왕이 될 것이며, 이것은 사탄의 멸망처럼 적그리스도의 멸망을 낳게 될 그의 자만과 전제의 근원을 설명해 준다.
2. 다니엘의 예견
다니엘 7:7-8에서 다니엘은 “작은 뿔”이 앞으로 일어날 왕이며 주목할만한 지성과 웅변적인 능력, “큰 일들을 말하는 입”을 가진 “한 인물”이라 하였다. 그는 뻔뻔스럽고 오만하며, 거만하고 사람들을 박해하며, “시간과 법”을 바꿀 것이다. 그리고 “가장 높으신 이의 성도들”(다니엘의 사람들, 즉 유대인)은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 곧 “3년 반” 동안 그의 손에 주어질 것이다(단7:23-26).
후에 다니엘은 주권 다툼을 하는 수양과 숫염소의 환상을 보았다(단8:1-27). 그 숫염소는 눈 사이에 “현저한 뿔”을 가지고 있었다. 이 “거대한 뿔”은 부러뜨려졌고, 그 자리에 “네 개의 현저한 뿔”이 솟아 올랐으며, 그 중 한 뿔에서 “작은 뿔”이 나왔다.
“그 중 한 뿔에서 작은 뿔 하나가 나와서 남쪽과 동쪽과 “아름다운 땅”(팔레스타인)을 향하여 심히 커지더니 “하늘의 군대”에 이를 만큼 커져서 “군대”와 “별들”(천사들) 중에 얼마를 땅에 던지고 그것들을 짓밟더라. 정녕, 그(작은 뿔)는 자신을 “군대의 대장”(주 하나님,수5:13-15, 삼상17:45)에게까지 높였으며, 그(‘작은 뿔’- 적그리스도)로 인하여 매일 드리는 희생제도 없어지고 그의 성소의 처소(성전)도 헐어졌도다.(단8:9-11).
다니엘이 그 환상에 대한 의미를 물었을 때 숫양은 메디아 페르시아 왕국을 나타내고 숫염소는 그리스(헬라) 제국을 나타내며 “거대한 뿔”의 자리에 솟아오른 “네 개의 뿔”은 “네 명의 왕”을 나타내고 “네 개의 뿔”의 하나에서 나온 “작은 뿔”은 그들 왕국의 더 나중 때에 나타날 사나운 용모의 한 왕을 나타낸다는 것을 알았다(이것은 그리스(헬라) 제국이 나뉘어진 네 왕국이 아니라 세계적인 네 왕국인데 그 “때”는 죄인들의 완전한 수가 차는 때일 것이다).
이 왕은 “난해한 문장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왕국의 나중 때에 범죄자들이 가득 차게 되면 무서운 용모를 하고 난해한 문장들을 깨닫는 한 왕이 일어나리라. 그의 권세가 막강할 것이나 자기 자신의 권세에 의한 것은 아니니(사탄이 그를 통하여 자신을 육화시킬 것이다), 그가 놀랍도록 파괴시킬 것이며 번성할 것이고 마음대로 행하며, 강한 자들과 거룩한 백성(유대인들)을 멸하리라. 그의 지혜를 통하여 그가 자기 손에 기교를 이루어서(“짐승 표”를 지닌 사람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사거나 팔 수 없게함. 계13:17) 자기 마음 속에 자신을 높이고(살후2:3,4) 평화로 많은 것을 멸하리라. 그는 또한 “통치자들 중의 통치자”를 대적하여 설 것이나 그가 사람의 손에 의하지 않고 부서지게 되리라.(단.8:23-25)
이것은 분명한 적그리스도로 숫염소의 머리 위에 있는 “현저한 뿔”의 자리에서 나온 “네 개의 뿔” 중 하나로부터 나온 “작은 뿔”, 또는 “사나운 용모의 왕”임을 확실하게 증명해 준다. 왜냐하면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Antiochus Epipha- nes, B.C.175-165)나 어떤 다른 과거의 통치자도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 대항하여 일어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는 “사람의 손으로 아니한 뜨인 돌에 부서진” 적이 없으며, 그는 B.C.165년 테배(Tabae)에서 늙어 죽었다. 그러나 적그리스도는 “사람의 손으로 아니한 뜨인 돌에 부서질” 것이다. 그의 왕국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돌 왕국”, 즉 “ 손으로 다듬지 않은 산의 뜬 돌”에 의해 멸망되어질 것이다(단2:34,35,44,45). 그리고 그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나타나심”(살후2:8)으로 말미암아 무능력하게 될 것이고, 불못에 “산 채”로 내던져질 것이다(계19:20).
두 명의 “선한” 사람들, 즉 에녹과 엘리야는 “죽음 없이” 하늘로 옮기워졌고, 두 명의 “악한” 자들, 즉 공식적으로 불리워지는 짐승과 거짓 선지자는 “죽지 않고 산 채로” 불못에 내던져질 것이다.
다니엘 7장의 “작은 뿔”과 8장의 “작은 뿔”은 같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다니엘 7장의 “작은 뿔”은 네번째 짐승의 “열 뿔” 가운데 일어나는 것으로 로마제국을 지칭하고, 다니엘 8장의 “작은 뿔”은 숫염소의 머리에 있는 “거대한 뿔”의 자리에 나타난 “네 개의 뿔” 중 하나에서 일어나며 그것은 세번째 짐승, 즉 그리스(헬라) 제국을 나타내므로 같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사도 요한의 다시 재건된 로마 제국에 대한 환상(계13:1-2) : 마지막 무대에서의 로마 제국), 즉 로마 제국의 마지막 무대는 바빌론, 메디아-페르시아, 그리스(헬라) 그리고 옛 로마 네 왕국의 “모든 특성”을 포함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것이다. 이것은 요한이 바다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던 “짐승”의 성격에서 볼 수 있다. 그것은 표범 같고(로마 제국) 곰의 “발”(그리스)과 사자의 “입”(메디아와 페르시아)을 가지고 있었다. 짐승의 “몸”이 표범(그리스)과 같다는 것은 재건된 로마 제국의 주요 특징이 옛 로마 제국과 같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그러한 까닭에 숫염소(그리스)의 “네 개의 뿔” 중 하나에서 일어난 “작은 뿔”은 네번째 짐승(부활한 로마 카톨릭)의 “작은 뿔”로 나타낼 수 있다.
숫염소의 “네 개의 뿔” 중의 하나에서 올라온 “작은 뿔”이 시리아의 왕이었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에 의해 성취되어졌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가 팔레스타인을 황폐시켰고 “우상 제단”을 성전의 제단 위에 세우게 했으며, 돼지 고기를 제물로 바쳤고 유대인들에게 가증스러운 일들을 행했던 것은 보지만 그가 숫염소의 “작은 뿔”의 묘사를 성취하지 못한 것은 보지 못한다(단8:9-13).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는 사탄적인 면에서 적그리스도와는 비교가 안된다.
다니엘이 언급한 “멸망의 가증스러운 것”(단9:27)은 “다니엘의 70째 주”의 “후 3년 반”에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지상에 계실 때 성취되지 못한 그 사건을 언급하셨으므로(마24:15)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다니엘 8:9-13에 있는 “작은 뿔”의 성취가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작은 뿔” 또는 적그리스도가 숫염소의 머리 위에 있는 “거대한 뿔”의 자리에 올라온 “네 개의 뿔” 중 하나에서 나온다는 것을 다니엘이 알았을 때, 그는 그것이 어떤 것인지 더 향상된 계시가 필요했다.
우리는 역사로부터 “거대한 뿔”은 알렉산더 대왕을 상징하고 “거대한 뿔”의 자리에서 올라온 “네 개의 현저한 뿔”은 알렉산더 대왕의 사후 그의 왕국이 나뉘어진 눈에 보이는 네 왕국인 이집트, 마케도니아, 트라키아 그리고 시리아를 상징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네 왕국 중 하나에서 적그리스도가 일어날 것을 “숫양과 숫염소”의 환상으로부터 안 후 15년이 지나서 주께서는 그에게 두 왕들의 환상, 즉 “북왕”과 “남왕”의 환상을 보여 주셨다(단11:1-45).
“북왕”은 시리아의 왕이었고, 그의 특성과 행위는 “네 개의 뿔” 중 하나에서 나온 “작은 뿔”과 유사하기 때문에(단.11:36-38), 적그리스도는 시리아로부터 나올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다니엘11:21-31에서 언급되어지는 “북왕”이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가 “마지막 때”에 시리아로부터 나올 “작은 뿔”이지만 적그리스도는 아니었다는 사실은 미래에 적그리스도의 행위를 묘사한 35절 이후 나머지 절에서 알 수 있다.32-35절까지를 포함한 그 중간 구절들은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때와 적그리스도의 출현 사이의 기간을 설명한다.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적그리스도의 한 “형태”로서 간주되어질 수 있다는 어떠한 암시도 없다. 그들은 각각 그들 자신의 장소에서 다루어진 독특한 역사적 성격을 지니고 있고 그들이 서로 어떤 면에서 비슷할지라도 혼동되어져서는 안되는 것이다.
“북”과 “남”의 관계는 팔레스타인(기쁨의 영화로운 땅, 단8:9, 11:16,41)과의 지리학적인 연관 때문에 시리아와 이집트에 적용되어진다. 주님께서 보시기에 예루살렘은 지상의 지리학적, 도덕적 중심지였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앗시리아를 포함한 시리아의 왕을 “북왕”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것은 적그리스도가 나올 곳의 소재를 분명히 해 주고 있으며 이사야10:12에서 우리는 이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주가 그의 모든 일을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행할 때에(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때), 내가 시리아 왕(적그리스도)의 완악한 마음의 열매와 그의 높은 눈의 영광을 벌하리라.”
그리고 이사야 14:25에서도 알 수 있다.
“내가 내 땅(팔레스타인)에서 앗시리아인(적그리스도)을 파하며 내 산들 위에서 그를 “발 밑에다 밟으리니”, 그때 그의 멍에가 그들(이스라엘)에게서 벗겨지고 그의 짐이 그들의 어깨에서 벗겨질 것이라.” 하였도다.”
위의 구절들은 이 예언이 그들의 땅, 이스라엘의 회복과 적그리스도의 멸망의 시기가 연관되는 것을 보여준다.
요약하면, 다니엘의 세 가지 환상들로부터 다음의 내용을 알 수 있다.
(1) 네번째 맹렬한 짐승의 “작은 뿔”로부터 하나의 신비롭고 사나운 사람이 “나중 때”에 일어날 것이다.
(2) 숫염소의 “거대한 뿔”의 자리에서 생긴 “네 개의 현저한 뿔” 중 하나에서 올라온 “작은 뿔”을 통해 그 “사나운 사람”이 알렉산더 대왕의 사후 그리스(헬라) 제국이 나뉘어진 왕국들 중 하나에서 나올 것이다.
(3) “북 왕”의 환상에서 볼 때 “사나운 사람”이 알렉산더 왕국에서 나뉘어진 시리아에서 나올 것이다.
3. 바울의 예언
바울은 데살로니가 인들에게 말하기를....
“어떤 모양으로든지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이는 먼저 “배교”하는 일이 이르지 않고서는 “그날”(주의 날)이 오지 아니함이라. 그리고 나서 “죄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리라. 그는 대적하는 자이며 또 하나님이라고 불리우는 모든 것과 숭배받는 대상 위에 자신을 높여 하나님의 성전(예루살렘에 다시 재건된 성전)에 앉아 하나님처럼 보여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하느니라... “불법의 신비”가 이미 활동하고 있나니 현재(바울이 살던 당시)는 막는 자가 있어 막을 것이나 그(성령)가 그 길에서 옮겨질 때까지만 그리하리라. 그리고 나서 그 “불법자”가 나타나리니 주께서 그를 자기 입에서 나오는 영(beath)으로 소멸하시고 그의 찬란한 오심으로 제거하시리라. 그 불법자가 오는 것은 “사탄의 역사”에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이적”과 멸망하는 자들 안에 있는 모든 “불의의 속임수”로 오는 것이니,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아니하여 구원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이라(살후2:3-10).
적그리스도를 “불법의 신비” 혹은 “불법자”라고 부른다. 즉 그는 “불법”의 원원인이 아니라, 그것의 열매이며 결과이다. 이는 그가 이미 세상에 선포되어졌으며 나타나고 있는 끓어오르는 “불법”의 가마솥으로부터 올라올 것이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이 적그리스도를 “멸망의 아들”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이 이름은 성경에서 단지 두 번 사용되었다. 첫 번째는 요한복음17:12에서 그리스도께서 유다를 가리킬 때 사용되었으며, 두 번째는 본문의 적그리스도에게 사용되었다. 사도 바울은 또한 적그리스도를 본문에서 “불법의 신비”라고 부른다. 이 뜻은 무었인가? 디모데전서3:16에서 그리스도는 “경건의 신비”라고 하였는데, 즉 “하나님께서 육신으로 나타나신 것”이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육신으로 나타나셨는가? 성령에 의해 처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신 것이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셨던 것이다(눅1:35). 경건의 반대는 불법이다. 따라서 “불법의 신비”는 “경건의 신비”를 대적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스도가 “경건의 신비”라면 적그리스도는 “불법의 신비”이며,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인 것처럼 적그리스도는 사탄의 “멸망의 아들” ,이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성령에 의해 처녀에게서 태어나셨기 때문에 적그리스도는 사탄에 의해 잉태한 여자(반드시 처녀일 필요는 없음)로부터 태어날 것이다. 이것은 사도 요한 이후 수 많은 영적인 하나님의 자녀들에 의해 알려졌으므로 새로운 견해는 아니다. 성경은 이것에 대해 몇가지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창세기3:15에서 하나님께서는 뱀(사탄)에게 말씀하시기를 “너와 여자 사이에, 또 “네 씨”와 “그녀의 씨” 사이에 적의를 두리니, 그녀의 씨는 너의 머리를 부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부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여자의 씨는 그리스도이며, 뱀의 씨는 적그리스도인 것이다.
또한 요한복음8:44에서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나서 너희 아비의 정욕을 행하고자 하는도다... 그가 거짓말을 할 때는 자신에게서 우러나와 한 것이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또 거짓말의 아비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
헬라어에서 “거짓말하다”라는 단어 앞에는 정관사가 붙어 어떤 한 사람을 지시한다. 그래서 마귀를 거짓말 이라고 일컬어질 때는 그 자신의 아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거짓말”이고 그의 아버지는 “거짓말쟁이”이기 때문이다. 즉 “거짓말”은 멸망의 아들인 적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왜 유다를 “멸망의 아들”이라고 불렀을까? 그는 어떤 여인에 의해 태어난 사탄의 자식이었는가? 아니면 사탄이 육신화된 것이었는가? 여기서 우리는 성경이 스스로 말씀하시는 것에 유의해야만 한다. 요한복음6:70,71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시기를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하나는 마귀니라.”고 하시니라. 주께서는 시몬의 아들 유다 이스카리옷에 대해 말씀하셨으니, 이는 그가 열둘 중의 하나로 주를 배반할 자였음이라.고 말씀하신 구절을 볼 수 있다. 성경 어떤 구절에서도 “마귀(the devil;R.V.)”라는 말이 사탄을 제외한 어떤 사람에게 적용한 적이 없었다. 여기서 마귀는 디아볼루스(diabolus)라는 단어인데 정관사가 사용된다. 따라서 “그러나 너희 중에 하나는 그 마귀니라”고 읽어야 한다. 이것은 유다를 통한 사탄의 육화, 즉 “불법의 신비”를 이르는 말이다. 그리고 이것은 요한복음17:12에서 왜 예수님께서 그를 “멸망의 아들”이라고 부르셨는가를 설명해 준다.
이것은 성경에서 “마귀(diabolus)”라는 단어를 사람에게 사용한 오직 한 구절이며, 이것은 “육화(incarnation)”를 의미한다.
“멸망”은 한 장소이며(계17:8,11), 또한 인간들이 떨어지게 될 하나의 “상태”이다(딤전6:9,히10:39). 그리고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범했던 인간들은 “멸망의 아들들”인데, 이들은 변명할 수 없는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특히 유다와 적그리스도는 멸망의 창시자인 마귀의 자식들이며 “멸망의 아들들”이다. 이것은 단순히 그들이 마귀에 의해 “사로잡혔거나” 조종당하는 상태가 아니라, 그들은 마귀가 육화된 마귀 자신인 것이다.
그렇다면 “만약 유다와 적그리스도가 둘 다 ‘멸망의 아들’이라고 불리웠다면 그들은 동일한 인물인가?, 아니면 다른 두명의 ‘멸망의 아들들’인가?”라는 의문이 생길 것이다. 이 문제를 같이 살펴보자. 요한계시록11:7에서 보면 “두 증인”을 죽인 “끝없이 깊은 구렁”에서 올라온 “짐승”이 적그리스도라는 사실은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구렁”에 가게 되었는가? 만약 유다와 적그리스도가 하나의 동일한 인물이고 유일한 한 명의 “멸망의 아들”이라면 그는 사도행전1:25에서 처럼 유다는 “자기 거처”로 갔다고 했을 때, 그 거처는 “구렁”을 말한 것일 것이다. 유다가 자기가 가야할 곳으로 갔다라는 구절처럼 어떤 다른 사람에게 쓰여진 적이 없다. 다시 계시록17:8에서 “내가 본 그 “짐승”은 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고, 앞으로 “끝없이 깊은 구렁”으로부터 나와서 멸망으로 들어갈 자라” 말씀하신다. 이 “짐승”은 “두 증인”을 죽인 인물로서 그는 적그리스도이다. 지금 여기에서 그에 관한 네가지 언급이 있다. 첫째 그는 전에는 “있었고”, 둘째 그는 지금은 “없으며”, 셋째 앞으로 그는 “끝없이 깊은 구렁으로부터 나올” 것이며, 넷째로 “멸망으로 들어갈”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요한이 살았던 당시에는 “짐승”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전에는 지상에 있었으며 앞으로 “끝없이 깊은 구렁”에서 다시 올라온 뒤에 다시 내려갈 것이다. 이것은 적그리스도가 전에는 지상에 있었으며, 미래에 다시 “구렁”에서 올라올 것에 대한 분명한 증거가 된다.
그렇다면 “적그리스도가 과거의 어느 시기에 있었느냐?”는 질문이 생길 것이다. 만일 유다와 적그리스도가 동일 인물이라면 이 질문은 쉽게 해결된다. 유다가 땅에 있었을 때 그는 있었으며, 유다가 “그 자신의 거처(his own place)”(행1:25)로 갔을 때 지상에 그도 없었다. 유다, 즉 적그리스도가 다시 앞으로 “깊은 구렁”으로부터 나타날 것이다.
필자는 유다와 적그리스도에 관한 이 견해를 반드시 옳다고 고집하지는 않지만 열린 마음으로써 이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왜냐면 유다와 적그리스도 둘 다 “멸망의 아들”이라고 불리는 이유를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견해이기 때문이다.
4. 요한의 예언
팟모섬에서 요한은 적그리스도에 대한 환상을 보았다.
“내가 바닷가 모래 위에 서서 보니, 한 짐승이 바다(지중해)에서 올라오는데 “일곱 머리”와 “열 뿔”을 가졌더라. 그 뿔들에는 열 개의 왕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름”이 있더라. 또 내가 본 그 짐승은 표범과 같고, “발”은 곰의 발 같고, “입”은 사자의 입 같은데, 용이 자기의 능력과 자리와 큰 권세를 그 짐승에게 주더라. 또 내가 보니, 그의 머리들 가운데 하나가 상처를 입어 “죽게 된 것” 같았으나, 그의 치명적인 “상처가 나으니” 온 세상이 기이히 여겨 그 짐승을 따르더라. 사람들이 그 짐승에게 권세를 준 용에게 경배하고 또 그 짐승에게도 경배하며 말하기를 “누가 그 짐승과 같으며 누가 감히 그와 더불어 싸울 수 있으리요?”라고 하더라. 그 짐승이 큰 일들과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입을 받았으며 또 마흔 두 달 동안 활동할 권세를 받았더라. 그 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모독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성막과 하늘에 거하는 자들을 모독하더라. 그가 성도들(교회의 성도들이 아닌데, 그들은 영광 가운데 올라갔다.)과 싸워 그들을 이기는 권세를 받았으며 모든 족속과 언어와 민족을 다스리는 권세를 받았더라. 세상의 기초가 놓인 이래로 죽임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그들의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땅에 사는 모든 자는 그에게 경배할 것이라.(계13:1-8).
이제까지 살펴보았던 여러 선지자들의 “관점”을 비교해 보면 우리는 다니엘의 “작은 뿔”과 바울의 “죄의 사람” 그리고 요한의 “짐승”의 유사점들을 정리할 수 있다. 다니엘의 “작은 뿔”과 요한의 “짐승”은 같은 기간(42개월 또는 3년 반) 동안 계속 존재한다. 그리고 다니엘의 “작은 뿔”, 바울의 “죄의 사람”, 요한의 “짐승”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 같은 방법으로 멸망당한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모두 “사탄의 활동” 이후에 일어날 “악의 권세”를 미리 내다 보았고, 요한은 이것을 가리켜 요한일서 2:18에서 적그리스도라고 불렀다. 그들은 동일한 기간 동안 존재하고 동일한 인격을 가지며, 동일한 일을 하고 동일한 영역을 점유하며, 동일한 운명을 지닌 “세 명의 상징적인 인물”임을 우리는 예언을 통해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같은 사람을 상징한 것이어야 한다.
요한의 “짐승”과 다니엘의 “무시무시한 넷째 짐승”을 비교해 보면 우리는 그 두 짐승이 바다(민족들)에서 올라오고 우리가 이제까지 들어왔던 어떤 짐승과도 닮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두 “짐승들”을 비교해 보면 우리는 다니엘의 짐승은 무섭고 포악하며, 매우 강하고 거대한 철로 된 이빨과 동으로 된 손톱을 가진 반면에, 요한의 짐승은 표범과 같고 곰의 발과 사자의 입을 가지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다니엘의 “짐승”은 로마 카톨릭, 즉 지상에 세워진 “네번째 왕국”을 상징하기 때문에 그 짐승은 로마 카톨릭의 특징을 묘사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요한의 짐승의 특징 역시 로마 카톨릭을 상징한다. 우리는 고대 로마제국이 매우 강하고 “거대한 철 이빨”과 “동으로 된 손톱”을 가진 짐승과도 같은 큰 힘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요한의 “짐승”의 묘사로부터 몸은 표범 같고 곰의 발과 사자의 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짐승은 세계적인 네 제국의 특성을 모두 포함하는 다시 세워질 로마제국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열 뿔을 가지고 있는 두 짐승은 신상의 열 발가락으로 상징되는 시대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서로 유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천년왕국(돌 왕국) 이전에 일어날 것이다. 우리는 다니엘의 “짐승”이 가진 “열 뿔”과 요한의 “짐승”이 가진 “열 뿔”이 동일한 것을 상징함을 알고 있다(계17:12). 로마 카톨릭이 결국은 “열 개의 열방 국가로 흩어질 것”을 다니엘과 요한은 미리 내다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열 뿔을 가진 두 “짐승”은 다음과 같은 차이가 있다. 다니엘의 짐승은 머리가 하나인 반면에 요한의 짐승은 “일곱 개의 머리”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다니엘의 짐승은 “열 뿔” 사이에서 하나의 “작은 뿔”이 솟아 오르지만, 요한의 짐승은 “열 뿔” 사이에서 아무것도 찾아볼 수 없다.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이 짐승들의 특징은 이들이 마지막 활동무대에 있다는 것인데, 이것은 다니엘과 요한의 “짐승”을 주의 깊게 비교해 보지 않고서는 이해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다니엘의 짐승은 “작은 뿔”이 “열 뿔” 중 세 개를 뽑아 멸망시켜서 그들의 왕국을 제거하는데, 요한은 이것을 생략했기 때문이다. 다니엘의 짐승이 가진 사탄적인 성격은 그 짐승의 “작은 뿔”에서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작은 뿔”의 행동은 요한의 “짐승”과 부분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일치한다. 즉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는 “42개월”인 것이다.
여기서 요한의 “짐승”의 마지막 활동 무대의 윤곽을 잡아보고자 한다. 요한의 짐승에 대한 묘사에서 “짐승”이란 말이 “이중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짐승”은 로마 카톨릭과 그 머리인 적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이 “짐승”은 요한이 살던 시대의 로마제국에 대한 언급일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짐승”은 과거에는 있었으나 현재는 없고 로마제국은 요한의 시대에 권력의 정점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짐승”은 단지 끝없이 깊은 구렁에서 올라와 영원한 멸망으로 떨어질 한 사람에 대한 언급일 수 만은 없다. 다시 우리는 “짐승”의 몸과 머리와 뿔을 비교해 보아야만 한다. 곰의 발과 사자의 입을 가진 표범과 같은 몸은 다니엘의 “세 마리 맹렬한 짐승”, 즉 사자와 곰과 표범의 특징을 포함하는 마지막 때에 재건될 로마 제국을 보여준다. 몸은 표범에 의해 표현되어지는데 이것은 그리스풍으로 재건될 로마의 일반적인 특성인 것이다.
“짐승”은 바다에서 올라오는데(계13장) 일곱 머리와 열 뿔을 가지고 있고 “열 뿔”에는 왕관이 씌워져 있다. 이 “짐승”은 나뉘어진 열 왕국의 “머리”인 열 왕들이 왕관을 받았을 때 받게 될 권세를 의미한다. 또 일곱 머리에 열 뿔을 가진 짐승이 끝없이 깊은 구렁에서 올라오는데 그 뿔에는 왕관이 씌워져 있지 않다. 왜냐하면 열 왕은 열 뿔에 의해 상징되어지는데 그들은 아직 그들의 나라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계17:12). 요한계시록 17장의 “짐승”은 “한 주”의 시작에 적그리스도가 일어날 것을 상징하고 있다.
이 관점의 증거인 “여자”는 이때 “짐승” 위에 앉아 있다. “진홍색 옷을 입은 여자”는 요한계시록 17장에서야 나타나는데, 여기서 그녀는 “한 주”의 시작에서부터 “짐승”을 타고 있고, 창녀는 참된 교회를 박해해 왔던 “교황 교회”를 상징한다. 적그리스도가 일어나기 전의 전쟁 중에 로마 카톨릭을 중심으로 하는 그 주변의 국가들은 공동의 방어를 위한 “동맹”의 형태를 이룰 것이다. 짐승의 “열 뿔”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동맹에 참여하는 나라는 모두 열 개국이다. 의심할 여지없이 “교황 교회”는 이러한 과정들 속에서 큰 일익을 담당할 것이다. 그녀는 정치적인 권력을 부강시킴으로써 그에 따른 보상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그 창녀는 “교회와 국가의 연합”을 주도할 것이며, 여자가 짐승을 타고 있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이것을 조종하게 될 것이다. “열 왕”들은 나라를 받을 때 왕관을 쓰게 될 것이다. 그들은 “그 창녀를 증오하며, 그녀를 패망시키고 벌거벗기며, 그녀의 살을 먹고 그녀를 불로 태울 것”이다(계17:16).
우리는 요한계시록 17:9에서 “짐승”의 “일곱 머리들”은 “일곱 산”(로마 제국으로 확인된다)과 그 다음 절(10절)의 “일곱 왕들”을 상징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곱 왕” 가운데 “다섯은 패망하였으나 하나는 남아 있고, 또 하나는 아직 오지 아니하였으나 오면 잠시 동안만 머무르게 되리라.” 즉 요한이 살아 있던 당시에 그들 중의 다섯 왕은 이미 패망하였고, 하나는 그 당시 지배하고 있는 황제였으며, “일곱번째” 왕은 아직 오지 않았었다.
패망한 “다섯 왕”들이 누구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요한이 살아 있던 때에 보좌에 앉아 통치하던 왕은 요한을 팟모섬으로 유배시킨 도미티안(Domitian)이었다. 그러므로 아직 오지 않은 마지막 “일곱째 왕”은 의심할 여지없는 적그리스도인 것이다. 요한계시록 13:3에서 “일곱 머리” 또는 “왕들” 중의 하나가 상처를 입고 죽는다. 그러나 이 왕이 누구인지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머리들 중의 하나가 상처를 입고 죽기 전의 짐승은 “머리들”을 모두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상처를 입고 죽은 것은 마지막 머리임을 추측할 수 있다.
요한계시록 17:11에서 그는 전에는 있었으나 지금은 없고 “여덟 번째”지만 “일곱” 중에 속해 있으며 멸망으로 들어갈 자라고 불리워지고 있다. 이 구절에서 알 수 있는 분명한 사실은 “일곱번째 머리”, 즉 적그리스도는 아마도 암살자의 손에 의해 “치명적인 상처”를 입게 되어 그의 몸이 땅에 묻으려 할 것이며, 그는 죽음에서 일어날 것이다.
“또 내가 보니, 그의 머리들 가운데 하나가 상처를 입어 죽게 된 것 같았으나, 그의 치명적인 상처가 나으니 온 세상이 기이히 여겨 그 짐승을 따르더라.(계13:3).
그래서 그는 “여덟 번째”지만 “일곱” 중에 속한 자가 되는 것이다. 이 적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사탄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흉내 내고 온 세상이 “기이히 여겨 그 짐승을 따르도록” 만드는 것이다(계13:3). 이것은 그의 명성과 힘을 증가시킬 것이다. 만약에 이 일이 “한 주의 중간에” 일어난다면 동시에 용은 하늘에서 쫏겨 내려올 것이고 그로 인해 적그리스도가 땅을 지배하게 되는 커다란 이변이 일어날 것이다. 왜냐하면 “상처를 입고 죽기” 전 그는 부드럽고 호감이 가는 인물이었지만 부활한 후 용이 육화된 결과로 극악무도한 사람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때에 그는 유대인과의 언약을 깨뜨리고 그 자신의 “우상”인 “멸망의 가증한 것”을 성소에 세우고 더럽히며 황폐하게 할 것이다.
다니엘의 “무시한 넷째 짐승”의 “작은 뿔”로 그는 “열명”의 왕에서 셋을 멸망시켜 자신의 권세의 자리를 확고히 할 것이다. 따라서 “작은 뿔”인 그는 “열 뿔”, 즉 “열 왕국”들이 연합되기 전에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며, 이것은 적그리스도는 연합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여기서 출현할 뿐이다.
III. 적그리스도의 특성
그는 느부갓네살과 아닥사스다와 알렉산더 대왕과 시이저의 힘과 역량을 모두 소유한 “복합적인” 인물일 것이다. 그는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키는 불가사이한 재능과 사람들을 매혹시키는 인품과 다재다능함과 특출한 지혜와 위대한 통치력과 일을 실행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을 것이고 이 모든 재능으로 인하여 슈퍼맨(Superman)으로 만들어진 그는 사탄의 도구가 될 것이다.
그는 위대한 박애주의자요, 인류의 친구요, 선지자들의 예언처럼 유대인들을 “황금시대”로 인도하는 자처럼 믿게 하여 유대인들의 특별한 친구로 행세할 것이다. 그리하여 유대인들은 그를 그들의 메시아로 받아들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사람들을 미혹시킬 것이며, 살해되었다가 다시 살아날 때 그는 그의 위력 중 어느것도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고 오히려 잔인함과 가증스러움이 더해질 것이다.
“그가 지극히 높으신 분을 대항하여 큰 말을 하며, 또 지극히 높으신 분의 성도들을 지치게 할 것이고, 또 때와 법을 변경시키려 생각할 것이라. 그들은 그의 손에 주어져서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지내리라(단7;25).
“그의 지혜를 통하여 그가 자기 손에 계략을 늘려서 자기 마음 속에 자신을 높이고 평화로 많은 것을 멸하리라. 그는 또한 통치자들 중의 통치자를 대적하여 설 것이나 그가 사람의 손에 의하지 않고 부서지게 되리라(단8:25).
IV. 적그리스도의 통치
적그리스도는 다니엘의 “칠십째 주”, 즉 7년 동안 통치하게 될 것이다.
“그가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한 주(다니엘의 70째 주) 동안 언약을 확정하고 그 주의 중간에 그가 희생제와 예물을 금지시킬 것이요, 그는 가증함을 확산시킴으로 황폐케 하리니 진멸할 때까지 할 것이며, 정해진 것이 황폐케 한 자에게 쏟아지리라”(단9:27).
교회가 휴거된 후 유대인들은 그들의 고토로 되돌아오게 될 것이다. 그리고 옛 로마제국의 영토를 차지하고 있던 열 왕국들이 이때 쯤 연합하게 되며 이 열 왕국의 왕들 중에서 적그리스도가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는 곧 자신이 위대한 통치자임을 증명하고 대통령이 될 것이다. 이 정부는 민주적인 군주 정부가 될 것이다.
그 통치자(적그리스도)는 유대인들이 그들의 땅으로 되돌아 올 무렵 유대인들과 “언약”을 맺을 것이다. 그 언약의 성격이 무엇이든 간에 이사야 선지자는 그것을 “사망과 지옥의 언약”이라고 말했다(사28:15).
왜냐면 그는 3½년동안 그 약속을 지키지만 그 이후 그것을 파기할 것이다. 그리고 남은 3½년의 기간 동안 그는 “대환란”이라고 불리우는 끔찍한 박해를 유대인들에게 가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 박해는 유대인들에게만 한정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 13:7-8에서 그에게 다음과 같은 권세가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가 성도들과 싸워 그들을 이기는 권세를 받았으며 모든 족속과 언어와 민족을 다스리는 권세를 받았더라. 세상의 기초가 놓인 이래로 죽임당한 어린 양의 생명의 책에 그들의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땅에 사는 모든 자는 그에게 경배할 것이라.”
이 기간의 자세한 내용은 “대환란”장을 참조하라.
V. 적그리스도의 운명
7년 기간의 후반부에 열 개의 동맹국은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기 위해 예루살렘 북쪽에 위치한 므깃도 계곡으로 모일 것이다(?14:2). 그리고 주께서는 “다윗의 집”, 즉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의 백성들 위에 “은혜와 간구의 영”을 부으실 것이다(?12;10). 주께서는 “하늘에 있는 군대들의 대장”으로서 유대인들을 치유하시러 오실 것이고(계19:11-16), 유대인들은 그리스도께서 올리브산 위에 서시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14:4). 그리고 짐승(적그리스도)과 이 땅의 임금들과 군대들은 그리스도를 대항하여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함께 모일 것이다.
결국 짐승과 거짓 선지자는 산 채로 “불못”에 던져질 것이며 나머지는 흰 말을 탄 예수 그리스도의 칼에 죽임을 당할 것이다. 하늘의 새들은 “위대하신 하나님의 잔치”에 모여 왕들과 장군들과 군인들의 살을 먹게 될 것이다(계19:17-21).
땅의 회복(Renovation of earth)
요한은 사탄과 그의 군대의 멸망이 있은 후, 즉시 땅이 불타버릴 것이라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또 내가 “큰 백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분을 보니, 그의 면전에서 땅과 하늘(지구의 대기)이 사라졌고 그들의 설 자리도 보이지 않더라(계20:11).
요한은 “백보좌”심판을 설명하고 거기에 다음과 같은 설명을 덧붙인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은 사라지고 바다도 더이상 있지 아니하더라(계21:1).
우리는 이처럼 땅이 사라지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요한은 우리에게 땅이 어떻게 사라져 버리는지 알려주지 않았다. 이것은 사도 베드로를 통해 알수 있다.
“그러나 현재 있는 하늘들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보존되어 있으되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백보좌 심판석)에 불사르려고 간수되어진 것이니라...그러나 “주의 날”’이 밤에 도둑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들이 굉장한 소리를 내며 사라지고 우주의 구성 요소들이 맹렬한 불로 녹아내리며 땅과 그 안에 있는 일들이 타버릴 것이라... 우리는그의 약속대로(이사야65:17; 66:22) 의가 거하는 새 하늘들과 새 땅을 기다리도다(벧후3:7-13).
베드로와 요한은 분명히 같은 사건을 언급하고 있다. 그 이유는 “경건치 아니한 자의 심판과 멸망의 날”은 바로 죽은 악한자가 심판 받는 “백보좌 심판석”에 앞에 서는 날이기 때문이다.
성경을 읽다 보면 별들이 있는 하늘들과 행성 지구가 불에 멸망당하고 완전히 없어져 버리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고 생각할런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성경을 유심히 공부해보면 그렇지 않음을 볼수 있다. 불로써 “불타버리는 것(Renovation)”은 눈에 보이는 땅이며, 이곳을 둘러싸고 있는 대기이다. 불로써 땅 외부의 표면이 완전히 바뀌어지며, 죄로 인해 발생한 모든 것들, 즉 엉거퀴, 병균, 벌레, 독충등 이 완전히 사라져 버릴것이다. 그리고 악한 영들과 해를 끼치는 모든 영향으로부터 영원히 자유롭게 되며, 환경은 정결케 될 것이다.
이것은 베드로후서3:5-6로부터 분명히 증명된다.
“이는 그들이 이것을 고의로 잊으려 함이라. 즉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하늘들이 옛적부터 있었다는 것과, 땅도 물에서 나왔고 물 안에 있었다는 것이니 이로써 이전에 있던 세상은 물이 범람해서 멸망하였느니라”
베드로가 여기서 언급한 세상은 “홍수”에 의해 바뀐 “노아 홍수 이전의 세상”이 아니다. 즉 여기서의 “이전에 있던 세상”은 창세기1:1절의 세상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며, 홍수에 의해 완전히 잠겨 혼돈하고 공허하게 되었던 세상이다(창1:2). “올바로 말씀을 나누어”장을 참조.
사도 베드로는 땅의 역사를 크게 3시대로 나누고 있다. “형체가 없고 공허해지기 이전의 땅”, 즉 “이전에 있던 세상”이라고 하는 “태초의 땅”, 그리고 땅이 불타버린 이후 창세기1:3-2:1절에서 회복된 이후 지금까지 큰 변화없이 보존된 “현재 있는” “하늘들과 땅”, 그리고 아직은 미래의 “새 하늘들과 새 땅”이 있다(벧후3:5-7,13).
“태초의 땅”의 기본 구성은 “물에 잠김으로써” 소멸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현재의 땅”의 기본 구성도 “불침례”에 의해서 소멸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것은 베드로가 쓴 그리스 단어인 “우주”(Cosmos)라는 단어는 “땅의 표면”, 즉 “땅의 거주하는 곳”이지, 지구 행성 전체가 아니다. 땅의 겉 표면이 “맹렬한 불로 녹아 내리며”, “일들이 타버릴 것이다”. 맹렬한 불의 원인은 대기 가스의 폭발일 것이며, 사도는 이것을 “하늘들(대기)이 굉장한 소리를 내며 사라지고”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결과 모든 동물들과 식물들은 멸망될 것이며 지구의 표면은 바뀌어질 것이다.
그리스 단어인 “Parerchomai”를 “사라지고”(Pass away)라고 번역되었지만, 이 단어는 “존재물의 종료”나 “사라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으며, 단지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바꾸어 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말한 디도서3:5절의 “중생”(Regeneration)이란 단어와 예수님께서 마태복음19:28에서 말씀하신 단어인 “새세대”(Rgeneration)란 단어와 동일한데, 예수님께서는 “새세대”에 그의 제자들에게 “새세대”, 즉 “새 땅”에서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지파를 심판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또 현재 사람의 “중생”의 목적은 그의 존재의 전멸(全滅)이 아니다. 간단히 말해서, 다시 새롭게 되는 과정이란 인간의 영적인 상태를 타락하기 전처럼 되돌리는 것을 말한다. 이 단어는 사도행전3:21의 “회복”(Restitution)과 의미가 같다. 베드로가 말한 “녹아 내리며”(벧후3:11)라는 단어는 예수님께서 무리들에게 말씀하신 “그를 풀어 주어(Loose) 다니게 하라”(요11:44)와 같은 단어이며, 성경은 “창조물”이 죄로부터 기인한 “속박된 상태”로 부터 “해방되어 풀려날 것”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고 가르친다(롬8:19-21).
요한이 말한 “하늘은 “두루마리 같이 말려서” 쓸려가고 모든 산과 섬도 “제자리에서 옮겨졌으니”(계6:14)는 모든 물질적인 모든 세상이 사라져 버렸다는 생각은 틀린 생각이다. 왜냐면 요한은 즉시 그가 본 다음의 내용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 요한은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는데 마치 신부가 자기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같이 예비되었더라. 그리하여 구원받은 자들의 민족들이 그 빛 가운데서 걷겠으며 땅의 왕들도 그들의 영광과 존귀를 그 곳으로 가져오리라(계21:2,24).
또한 성령께서도 솔로몬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한 세대가 지나가고 또 다른 세대가 오나 땅은 영원히 남아 있으며(전1:4)
온유한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유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5:5)에서 이것은 특별한 약속이인데, 이스라엘의 자녀들은 이 땅에서 영원히 거할 것이다(사60:21; 66:22),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영원히 땅에서 거주하기 위해서는 땅은 반드시 영원히 존재해야 한다. 이것으로 지구 행성이 완전히 없어지지 않음이 분명하다. 이 지구는 불에 의해 깨끗케 되고 정결하게 될 것이며 백성들과 민족들이 거주하기 적합하게 다시 만들어져 이들이 차지할 것이다.
이 땅은 하나님의 아들의 임재로부터 정화될 것이며, 갈보리에서 인류를 구속하기 위하여 전 우주에서 가장 값진 희생이 치루어진 곳이다. 하나님께서 원대한 미래를 두신 곳으로써 그분의 모든 위대한 창조 중에서도 하나님의 마음속에 가장 소중히 여기시는 것이므로 폭발하거나, 멸절하기에는 너무도 신성한 곳이다.
새 하늘과 새 땅
“땅이 불타버림”으로 시간이 끝나지 않고 영원이 시작된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완전한 왕국” 을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 드림으로써 하나님께서는 “만물안에 모든 것(All in All)”이 되시기 때문이다(고전15:24-28).
이 왕국은 다음과 같다.
“이로 인하여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있는 한 이름을 그에게 주사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 위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있는 것이나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혀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2:9-11).
이 왕국에서는 하늘과 지상과 지옥에 있는 모든 것들이 인자에게 복종할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이 “완전한 왕국”은 “천년 왕국”이 아닌데, 그 이유는 천년왕국의 마지막에는 배도와 반란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완전한 왕국은 천년왕국과는 다른 어떤 왕국을 의미하며 “천년 왕국” 이후 “불로써 회복”된 후에는 다른 왕국이 없기 때문에 “불로서 회복” 이후에 뒤따르는 왕국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이 왕국은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이루어진 왕국인데, 이것은 우리가 “올바로 말씀을 나누어”란 장에서 살펴보았던 “완전한 왕국”이다.
어떤 이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만일 “창조 주간”의 “일곱째 날”이 천년왕국과 일치한다면 “안식일 다음날”은 “땅이 불타버린” 이후에 따르는 시대를 예언한 것임을 알 수 있다(레23:36).
창세기의 일곱째 날은 완전하지 못했던 “옛 창조”와 관련이 있으나, “여덟째 날”은 완전한 “새 창조”와 관련이 있다. 왜냐하면 “여덟째 날”, 혹은 “주의 첫날”은 우리의 주님께서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하셨으며, 50일 후, “여덟째 날”인 오순절날에는 성령을 주셨기 때문이다. 천년 왕국은 일곱째 날을 지시하고 있으므로 “여덟째 날”은 천년왕국을 가리킬 수 없으며, 또한 이 날은 시간의 일정한 기간인 반면에 영원은 시간을 초월하기 때문에 일곱째 날은 영원을 가리킬 수 없다. 즉 “여덟째 날”은 “회복된 땅”과 “영원” 사이의 “일정한 기간”을 가리키거나 “완전한 시대”라 불리우는 기간을 만족시켜야만 한다.
이 시대의 경륜을 에베소서1:10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때가 찬 경륜”
즉, “때가 찬 경륜”은 죄 때문에 그들을 심판하셔야만 했던 모든 이전의 경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때가 찬” 경륜은 지속되는 것으로써, 우리는 암흑 안에 있지는 않다. 이스라엘이 이 경륜에 커다란 위치를 차지할 것이다.
“주가 말하노라. 내가 만들 새 하늘들과 새 땅이 내 앞에 항상 있는 것같이 너희 씨와 너희 이름도 남아 있으리라(사66:22).
그리고 이스라엘과 맺었던 하나님의 약속의 기간으로써 신명기7:9에서 “천대”, 약 33000년 동안 베풀어질 것이다. 즉 우리는 “때가 찬 경륜”이 상당히 긴 시간 동안 계속될 것이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시대의 세대적 특징을 몇가지 살펴보자
이 곳에는 죄가 없을 것이다.
모든 악한 권세자들은 땅에서 쫏겨나 “불못”에 영원히 갇혀 있기 때문이다.
새 땅의 환경은 병균이 숨어 있을 만한 장소 조차 없을 것이며, 그 곳에는 병이나 죽음이 더 이상 없는데 건강은 “생명의 나무”의 잎들로 사용하여 유지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늘에는 더이상 성난 폭퐁우나, 폭설과 음산한 암흑이나, 하나님의 진노의 천둥과 벼락이 없을 것이며, 또한 땅에서는 해일이나 천재에 의한 엄청난 홍수와 같은 파괴적인 재앙은 없을 것이다. 그 날에는 에덴에서 처럼 “안개가 땅에서 나오고 물이 온 땅의 표면을 덥을 것”인데, 우리가 알듯이 거기에는 “더 이상 바다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큰 물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고 큰 대양이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왜냐면 새 도성의 거리를 흐르는 강물이 배출되어야 할 곳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지구는 에덴의 아름다움과 영광 가운데로 놓이게 될 것이다. 그곳에는 더 이상 가시나무와 엉겅퀴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해충이나 독충도 없고, 일은 즐거움이 될 것이다. 꽃들 사이에서 숨어서 기다리는 뱀들과 수풀 속에서 덮쳐 잡아 먹으려는 사나운 짐승들이 없을 것이다. 새 무덤을 파고 잔디를 심는 일 따위는 없을 것이다. 흙은 슬픔과 부끄러움의 눈물로, 형제들을 죽인 사람의 피로 젖지 않을 것이다. 온유한 사람들이 이 땅을 유업으로 받으며 북쪽에서부터 남쪽까지 동쪽에서 서쪽까지 장미가 피듯이 활짝 필 것이며 회복된 낙원은 초록으로 뒤덥일 것이다.
또한 그곳에는 새 하늘과 새땅 뿐만 아니라, 새 도성이 있다. 이 도성은 예수님께서 그분이 하늘로 돌아가서 그분의 신부인 교회를 위하여 준비하시겠다고 말씀하신 처소이다. 하나님의 건축술로 설계되고 건축되어진 우리가 소망하던 처소이다. 그곳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곳이다. 하늘을 기원으로 하며, “하늘에서” 내려오기 때문에 하늘 그 자체는 아니다. 이 건축물을 축조할 수 있는 인간의 손은 없다.
이것은 새 땅위에 놓일 것인데, 이것으로 우리는 왜 더 이상 바다가 존재하지 않으며, 이 현재의 땅이 불에 의해 회복되어야 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새 도성의 크기는 12000펄롱이며 (한변의 길이가 약 2414km) 이 길이는 마이에나에서 플로리다까지 이르는 길이이며, 미국 국토 절반을 넘는 길이이다.
우리는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모두 같다는 음성을 듣게 된다. 정육면체는 이 조건이 맞지 않다. 이 조건을 만족하는 다른 기하학적인 모양은 피라밋 형태 뿐이다. 이곳은 각 벽이 144규빗(약74m)(계21:19)으로는 2414km 높이를 지탱할 수 없으므로, 위에 있는 벽은 도시의 피라밋 형태를 지니게 될 것이다. 이 성벽에는 각면에 3개씩, 12개의 대문이 있고, 각각의 문은 진주로 이루어져있다. 그리고 이 문들은 결코 닫히지 않는다. 이 벽은 벽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기초석은 각양의 값진 보석으로 장식되어져 있다. 기초석 가운데에는 어린양의 열두 사도의 이름들이 있으며 정문에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이름이 있다. 그런 도성이 멀리서 바라본다면 그 피라밋의 끝이 “하나님의 영광” 의 빛으로 빛나고 있다면 얼마나 장엄한 광경이겠는가?
“그 도성은 해나 달이 그 안에서 비칠 필요가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그 곳을 비추고 어린 양이 그 곳의 빛이 됨이라(계21:23).
“또 그 곳의 성문들을 낮에는 전혀 닫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 곳에 밤이 없음이라(계21:25).
윗글은 단지 도성만을 언급했을 뿐이지 새 땅 전체를 언급한 것이 아니다. 왜냐면 도성의 빛이 닿지 않는 어떤 지역은 밤과 낮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피라밋 모양은 분명히 도성의 중앙에 위치할 것이며, 아마도 면적의 절반 이상은 넘지 않을 것이다. 거주민들이 사는 지역은 대로로 나누어지며 가장 자리에는 가로수길이 있고 그곳 옆에는 살기에 알맞게 구획된 주택들이 있으며, 많은 공원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도성 자체가 “순금으로 맑은 유리 같고”라는 말을 듣게 된다(계21:18,21). 만일 이 언급이 거주자들의 집들과 방에 대한 언급이라면 구속받은 사람들은 맑게 비치는 금으로 이루어진 처소에서 살게 될 것이며, 도저히 이러한 주거지의 거리가 더러워지거나 추해지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이 거리들을 따라 아름다운 강뚝과 나무들이 있다. 이 나무들은 단지 그늘이나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라, 매달 12가지의 다른 종류의 과실을 내는 “생명 나무”라 부르는 아름다운 과실수이다. 이 나무들의 열매들은 이기는 자들 만을 위한 것이다.
“이기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 가운데 있는 “생명 나무”를 주어서 먹게 하리라.(계2:7).
이 나무들의 잎은 새 땅을 차지하는 민족들을 치료하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어떤 병을 고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만일 아담이 에덴 동산에 있던 생명 나무를 먹었을 경우, 이처럼 건강을 유지하가 위한 것이다(창3:22-24).
또 이 아름다운 강은 “생명수의 강”이라고 부르는데, “생명을 주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이곳의 지상의 강들은 산의 어떤 솟는 샘물의 원천을 지니고 있다(계22:1).
추측해보면 도성의 중앙의 “피라밋 모양의 산” 위의 꼭대기 어딘가에 “하나님의 보좌” 가 놓일 것이다. 이 보좌 밑으로 수정과 같은 냇물이 계단 아래로 폭포처럼 흘러내려 아름다운 “생명의 강”을 이룰 것이다.
또한 새 예루살렘의 놀라운 점은 그곳에는 성전이 없다는 것이다. 이교도건 기독교건 경배할 장소가 없는 도시는 들어본 적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새 예루살렘은 놀랍게도 성전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면 “전능하신 주 하나님과 그 어린양이 그 곳의 성전”이기 때문이다. 사실 도성 전체가 성전이 될 것이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큰 음성이 나서 말하기를 “보라, 하나님의 성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어 그 분께서 그들과 함께 거하시리니, 그들은 그 분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께서는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리라.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내시며 다시는 사망이나 슬픔이나 울부짖음이 없고 고통 또한 없으리니 이는 이전 것들은 다 사라져 버렸음이라.”고 하더라(계21:3,4).
이것으로 하늘에 있던 성막이 땅으로 내려와 이 땅은 하나님의 처소가 되는 것이다.
이 아름다운 도성 성벽 바깥에는 여러 민족들이 살고 있는 “새 땅”이 펼쳐져 있으며, 그들의 왕들은 자신들의 영광과 존귀를 그곳으로 가져 올 것이다. 새 땅에는 죄가 없기 때문에, 더럽게 하는 것이나 가증한 일은 “진주”문으로 들어 올 수 없다(계21:24-27).
누가 새 땅의 복된 거주자가 될 것인가?
그 해답의 예표로 “홍수로부터 살아남은 사람들은 어디에 살고 있었는가?”를 알면 쉽게 풀릴 것이다. 이 사람들은 노아의 후손들었으며, 그들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방주로써 구원을 받아 살아남았다(창6:13-16). 즉 하나님께서는 “땅이 불타는” 동안에 잘은 모르겠지만 이와 유사한 방법으로 천년왕국의 백성들 중 의로운 자들은 구원하실 것이며, 땅이 다시 사람이 거하기에 적합하게 되면 새 땅에 그들을 살게 하실 것이며, 그들은 증가하고 번성하여 아담(창1:27,28)과, 노아(창9:1)에게 명령하셨던 땅에 번성하고 다시 채우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그들은 이곳을 다시 채울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데려가신 목적이 그를 주님의 재림을 알릴 사자(使者)로써 다시 보내시기 위한 것이었다면, 하나님께서는 민족들로부터 상속받을 사람들을 취하여, 다시 거주시키기 위하여 새 땅에 다시 그들을 살게 하실 것이다. 만일 이것이 하나님의 목적이 아니라면, 성경의 한 예표에 대한 실상이 없게 되는데, 예표로서의 노아의 방주에 대한 실상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새 땅을 위하여 새로운 종족을 창조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목적이 아님을 성경으로부터 분명히 알 수 있다. 이스라엘에 관한 그분의 약속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천대”, 약 33,000년 동안 이 땅을 상속할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지금의 땅이 새 땅으로 바꾸어지기 전까지는 불가능하다.
“주가 말하노라. 내가 만들 새 하늘들과 새 땅이 내 앞에 항상 있는 것같이 너희 “씨”와 너희 “이름”도 남아 있으리라(사66:22).
이것으로 실제로 에덴 동산에 생명 나무가 존재했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동산에 생명 나무가 있었다는 점을 볼 때 하나님은 인간이 영원히 살면서 땅을 정복하고 생육하고 번성하기를 바라셨음을 우리는 분명히 알 수 있다. 인류가 빠른 속도로 번성해서 지구가 비좁게 되면, 우주를 개척했을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태양계는 아직 유년기에 지나지 않는다. 현재까지는 지구만이 인간이 살기에 가장 적합한 행성이긴 하지만 다른 행성을 개척해서 살 수도 있을 것이다. 태양이 단지 지구만을 위해서 빛나고 있을까?
하나님께서는 근시적으로 우주를 창조하시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지으실 때 자신의 형상을 따라 지으셨다. 천사보다는 우월한 존재이다. 인간은 창의적인 지혜를 지니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거주지를 무한대로 확장시키셨을 것이다. 이것은 또한 구속의 계획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갈보리에서 죽은 것이 겨우 몇 백만 혹은 몇 천만의 인간들 만을 구속하기 위함이겠는가? 사탄은 하나님의 계획을 비웃으며 인간을 타락시켰다. 하나님의 계획은 다시 한 번 무너지는 뜻 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땅위의 죄가 없는 인류를 거하게 하시려는 계획을 사탄이 깨뜨리도록 묵과하지 않으셨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단순히 몇 백만의 사람들을 구속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땅과 죄의 저주를 받았던 인류와, 그리고 사탄의 지배에서 구속하시려는 것이다.
사도 야고보는 우리에게 우리는 단지 그의 피조물 가운데 “첫 열매들” 이라고 말했다(약1:18). 그렇다면 수확되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우주는 아직 ?다. 우리는 이제 단지 시작에 서 있을 뿐이다.
“그의 정부와 화평의 증가함이 다윗의 보좌와 그의 왕국 위에 바르게 세워지고, 지금부터 영원까지 공의와 정의로 그것을 굳게 세우는데 영원하리라(사9:7).
이 지구는 “불침례”를 통과하며 이곳을 차지하기에 적합한 인류가 나타나야 한다. “구원받은 민족들”(계21:24)이라고 불리우는 죄로 더럽혀지지 않은 남자와 여자가 남아 있어야 한다. 이들은 아담과 이브가 죄를 짓지 않고 낳은 자손들을 낳았다면 이들과 같을 것이다. 이것은 구속의 온전한 목적을 보여주며 인류 창조에 있어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드높인다.
위대한 퇴위식
“천년 시대”의 마지막 땅이 불로써 회복된 이후부터 “완전한 시대”, 즉 “인자의 왕국”이라 불리우는 ”시대들의 시대“라는 기간이 생긴다. 이 “시대들의 시대”가 끝나갈때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폐하신다. 그분께서는 “모든 원수를 자기 발 아래 두실 때까지 통치”하실 것이며, 인자이신 그리스도깨서는 하나님께 순종하신다. 이것으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 안에 모든 것이 되신다(고전15:24-28). 이것이 위대한 퇴위식이다.
세계사에서 보좌에서 퇴위하는 일은 많이 있었지만, 이것은 성격이 전혀 다르다. 여지껏 다양한 이유로 보좌에서 퇴위하였다. 어떤 이들은 강제적으로, 혹은 자발적으로 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육체적인 질병으로, 혹은 자신의 특별한 계승자에게 물려주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분은 인자로서 그분에게 주어진 일들을 다 이루셨기 때문에 퇴위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그분의 인성을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인자”라는 칭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로 돌아갈 것이며, 이것으로써 하나님의 신격(Divine Godhead)이 이후로는 다시 하나가 되셔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안에 모든 것”(ALL IN ALL)이 되실 것이다. 그 이후부터는 영원이 시작되는 것인데, 이것은 “시대들의 시대들”로 구분된다. 이후의 끝에 관하여는 어떠한 암시도 없다.
2007.06.28 편집
주님의 영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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