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성경강해***/- 누가복음 강해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

에반젤(복음) 2019. 10. 6. 18:09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 - 누가복음 16장 19-31절

김지철 (장신대 교수, 신약학)

 

오늘 본문은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이다. 이 비유는 누가복음 15- 16장에 언급된 5개의 비유 중(잃은 양 찾는 목자:15:3-7; 잃은 동전을 찾는 여인:15:8-10; 잃은 아들을 찾는 아버지:15:11-32; 지혜로운 청지기: 16:1-9; 부자와 나사로:16:19-32)에서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비유이다. 이 비유들은 두 종류의 대상을 향해 주어지고 있다. 하나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과 그들과 함께 어울리는 세리와 죄인들이고, 다른 하나는 이들을 향해 꼬투리를 찾아 적대하고 있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었다(참조 눅 7:29-30; 11:53-54; 15:1-2; 16:1-14). 특히 후자에 대해서 누가복음의 저자는 몇 가지의 가치 판단적인 설명을 부연한다. 여기에는 그들에 대한 경고가 들어 있다.
누가복음 15-16장에서 먼저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눅 15:1-2)라는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비난이 제시되면서 이어 예수님의 잃은 양, 드라크마, 아들 비유가 나타난다. 계속해서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눅 16:14)이라는 비판적인 언급 나타나고, 그 앞 문맥에는 재물과 부를 지혜롭게 쓰는 청지기의 비유가, 뒤의 문맥에서는 자기 자신의 쾌락만을 위해 재물을 사용하고 있는 부자의 비유가 등장한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눅 16:19-31)의 짜임새를 보면, 문학적인 특징에 의해 그 단락이 크게 두 가지로 나누인다. 첫 단락에서는 비유의 내용을 풀이하는 설명적인 이야기(19-23절)가, 둘째 단락에서는 등장 인물들 간의 대화적인 이야기(24-31절)가 비유의 이야기 흐름을 구성하고 있다. 첫 단락에 등장하는 두 인물인 부자와 거지가 처한 지상 세계에서의 상황이 언급되며(19-21절), 이어 죽음 이후의 세계가 나타나고 두 사람의 운명이 지상 세계에서의 삶의 모습과 극명하게 대비된다(22-23절). 계속해서 둘째 단락에서는 부자와 거지의 운명에 대한 이유와(24-26절), 마지막으로 아브라함과 부자와의 대화를 통해 부자들이 음부의 고통을 피할 수 있는 길이 제시된다(27-31절).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부자와 나사로의 대비는 흥미롭게 전개된다. 첫째는 이름에 의해서, 둘째는 삶의 자리에 의해서, 셋째는 죽음 이후의 세계에서 그러하다. 지상에서 대비되는 두 사람(부자와 나사로)의 모습이 사후 세계에 들어가면서 보다 철저하게 역전되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첫째로, 이름 없는 부자와 대비하여 나사로라는 이름을 지닌 거지가 등장한다. 그러나 이름 있는 나사로는 한 마디의 말도 없으나, 이름 없는 부자는 죽음 이후의 역전에 대해 호소하며 도전한다.
부  자

거  지
­지상에서의 두 사람­
이름이 없다

이름이 있다
1) “나사로”(“하나님이 도우신다”):의도적인 이름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한 부자”[[Anqrwpo" ti" plouJsio"]:눅 6:24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2) ”거지“(ptwcoV"):
가난한 사람(눅 6:20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가난하고 경건한 사람을 뜻한다(참조 마 5:3). 천국 잔치에 초대된 자들이다(참조 눅 14:12-21)

 

둘째로, 두 사람은 지상 세계에서 너무나 다른 삶의 자리에서 살고 있다. 마치 전혀 관계없는 사람처럼 서로 떨어져 살았다. 거리로는 바로 문 앞,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하나 관계에 있어서는 가장 먼 이웃으로 살아갔다. 그러다가 죽음 이후의 세계에서는 그 처지가 역전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서로의 만남은 완전히 차단되었다.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했다.”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다."

“심지어 개들이 와서 헌데를 핥다.”
나사로는 먹어도 먹어도 굶주린 배가 채워지지 않았다. 더구나 인간의 존엄성이 파괴된 채 개와 동류가 되어 개처럼 취급받고 있다. 그러나 부자는 고대 사회에서 가장 사치스러운 옷인 “자색 옷”과 왕에 버금가는 지위를 나타내는 “고운 베옷”을 입고 있었다(여기 “입고 있다”는 동사는 미완료형으로 부자의 반복되는 습관임을 나타낸다). 그리고 “날마다” 호화로운 연회를 베풀었다. 아마도 이 연회에 그의 친척이나 친구들은 초대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친척에게만 초대장이 발부되고,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부자 집에 들어가는 문이 굳게 닫혀져 있었다. 바로 집문 앞에 있는 헐벗고 굶주린 나사로는 결코 부자의 대문을 건너갈 수가 없었다. 그 문턱이 너무 높았기 때문이다. 부자는 배고파 우는 이웃을 도와야 할 사랑의 의무를 저버렸다(참조 레 19:18; 신 24:6이하).

셋째로, 죽음 이후의 두 인간은 그 상황의 역전을 경험한다.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부자의 장사지낸 것에 비해, 거지 나사로에게는 이 동사가 생략되어 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전혀 상이하다. 부자는 거창하게 장사를 지냈으나 곧 저 지옥(Hades)에 내려가 고통을 당하고 있다. 이제 전혀 예측하지 못한 새로운 세상이 다시 부자의 눈에 전개되고 있다.
“부자는 지옥(Hades)에서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고통 중에 있다.”

(평안히) 들어갔다.”
이제 비유의 내용은 부자의 이야기로만 초점이 맞추어진다. 부자와 아브라함과의 대화가 교차하면서 반복한다. 이 대화를 통해 부각되는 것은 부자가 경험하는 고통의 부르짖음과 호소이다.
여기에 언급된 부자의 가장 큰 괴로움은 무엇인가? 지상 세계에서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그래서 더더욱 외면하고 싶은 절망의 자리에 자기 자신이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1. 부자는 지옥의 고통 중에서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있다. “멀리”라는 말로 천국을 쳐다볼 수는 있으나 결코 그 곳에 참여 할 수 없는 지옥의 고통을 암시한다. 그래서 부자는 탄식하며 부르짖을 수밖에 없다:“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내게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24절)
여기서 우리는 이 부자의 문제가 무엇이었는가를 보게 된다. 그는 아브라함을 향해 “아버지”라고 부른다. 그는 결코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사람도, 모세와 예언자의 말씀을 모르는 이방인도 아니었다. 그는 넘치는 재물을 모세와 예언자의 말씀대로 사용하지 않고, 마치 하나님 없는 자처럼 사용했다. 그것을 이웃을 위한 구제로 선용하지 않고 오직 자기 자신의 쾌락만을 위해서 사용했다. 그 결과로 그는 지옥에서 지상 세계에서와는 전혀 다른 상황을 경험할 수 밖에 없다. 살아 있을 때는 그렇게도 철철 넘치게 사용했던 물이 이제는 뜨거운 불 속에서 한 방울의 물이 없어 괴로움을 당하고 있다. 나사로를 통해서 물방울을 떨어뜨려 타는 목마름을 적셔달라는 부자의 말을 통해 그 목타는 고통이 얼마나 큰가를 보여준다. 지상 세계에서 그렇게도 처절하게 굶주렸던 나사로의 배고픔이 이제 부자의 애타는 목마름으로 바뀌고 있다.

2. 더욱이 부자의 고통은 이제 다시 그 상황이 회복되거나 역전될 수 없다는 사실에 의해 증폭된다. 아브라함의 말에서 이 사실이 명백하게 확인 된다:“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 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26절).
지상의 세계란 그래도 변화와 회복의 가능성이 열려져 있는 곳이나, 죽음 이후의 세계란 이제 모든 가능성이 닫혀진 세계라는 것이다. 더 이상 소망을 가질 수 없는 궁극적인 단절의 세계이다. 부자가 자기 침대에 누워 편히 잘 때 나사로는 밖의 추운데서 떨었다. 부자가 호화호식 할 때에 나사로는 배고픈 창자를 움켜잡고 몸부림쳐야 했다. 그건 잠시의 단절이었다. 그러나 죽음 이후의 단절은 종국적이다. 더 이상의 가능성이나 소망이 없다. 한 인간이 지닌 고난에서도 견딜 수 있는 것은 어딘가 소망의 실타래가 보이기 때문이나, 이제 부자에게는 더 이상의 소망을 기대할 수가 없다는 사실이 선고된다.

그렇다면 그 부자의 문제점은 무엇이었는가? 그가 돈 많은 부자라는 이유만으로 지옥 불에 떨어진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실은 부자가 만난 아브라함도 지상 세계에서는 돈 많은 부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나그네와 이웃을 선대하는 사람이었다(참조 창 18:1-5).
1. 부자는 분명히 나사로를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그는 지옥에서 나사로라는 이름을 아브라함 앞에서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상에서 그는 가장 가까운 가난한 사람 나사로의 궁핍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다 알 수는 없으나, 우리가 유추해 보건대, 섣부른 학자가 배우지 못한 사람을 경멸하듯이 오만한 부자가 거지를 혐오하며, 거지의 고독, 고통, 좌절, 자기 상실 속에 함께 빠져들기를 싫어했을 것이다. 어쩌면 부자는 가난한 자들이 빈곤에서 풍기는 악취를 메스꺼워하고 있었을런지 모른다. 그러면서 이 부자는 “야 나는 어느 누구도 해치지 않은 사람이다. 나는 내가 번 것과 내가 가진 것을 단지 마음껏 즐기고 있을 뿐이다”라고 강변했을 것이다. 실제로 이 부자는 자기가 행한 악행 때문에 징계를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무 것도 행하지 않은 그 사실 때문에 지옥 불에 떨어졌다. 부자의 재물은 자기 자신만을 위하여 사용되었고, 고통 받고 고난당하는 자의 연약함을 위해 쓰임 받지 못했다. 실제로 부자는 거지 나사로와의 인격적인 접촉과 만남을 거절했다. 그러나 부자는 죽은 다음에야 비로소 나사로와의 인격적인 접촉을 원하고 있다. 부자일 때 그는 하나님도 필요 없고, 이웃도 필요 없었다. 다만 그가 지닌 재물, 명예, 자기 소유물만으로도 만족했다. 부자는 이웃의 고통이 곧 후에 나의 고통이 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2. 부자는 지극히 현실주의자였다. 그에게 있어서 미래란 의미가 없었다. 아니 그냥 즐기고 있으면 미래에도 그 현실이 계속될 줄로 착각했을 것이다. 따라서 오늘의 즐거움이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했다. 마지막을 알고 현실을 대하는 사람과 지금이 삶의 전부라고 생각하면서 현실적인 쾌락에만 집착하는 자와는 삶의 방식이 다를 수밖에 없다. 부자는 자기 현실에만 만족하여 내일이 그냥 오늘처럼 계속될 것으로 오해했다. 삶의 허무를 이야기하는 전도서 기자가 혼인식보다 장례식을 더 찾아가는 것이 지혜자의 태도라고 한 것은(전 7:1-4), 바로 인간이 죽음을 기억할 때에 겸손해지고 자기의 존재의 한계를 깨달으며 이웃을 돌보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자는 이 마지막 사실을 인식하기를 아예 거부하며 살았던 것이다.

3. 부자는 그래서 기도를 상실했던 사람이었다. 부자는 지상의 삶에서 기도를 배운 것이 아니라, 죽음 이후에야 기도를 배운다. 물 한방울도 하나님의 은혜로 주시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자기의 부와 재물은 자기의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잠깐 맡긴 것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의 풍요가 하나님께서 참여하실 어떤 자리도 거부했던 것이다.

4. 가장 결정적인 문제점이 드러난다. 부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의 장식품이었을 뿐이다. 그는 말씀에 의해 산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과 판단에 의해서 살았다. 부자는 살아 있을 때에 말씀을 통해 깨달으며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아주 값싼 것으로 생각하고 내 팽개쳤다는 사실이다.
바로 누가복음 16장 30절에 나타난 아브라함에게 드린 말씀에서 이러한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30절).
이제 그는 지상에서의 자기 삶의 문제가 바로 말씀을 통해 회개하지 않았던 인생임을 알고 있다. 그래서 부자는 자기 형제들이 회개하고 믿음을 갖게 될 미래를 염려하며 간청하고 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찌니라”(29절)고 말씀한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부자가 지옥에 떨어진 것은 그가 단순히 부자이기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씀에 따라 그의 부와 재산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려운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기 전 존재를  내어놓고 엎드리려 하지 않기 때문에 회개하기가 어렵다. 돈과 재물이 자기 성찰의 기회를 거절하기 때문이다. 인생이 언젠가는 끝난다는 사실을 망각하도록 유혹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모든 시간이 지나갔다. 더 이상의 유예가 없다. 이제는 뒤로 되돌아 갈 수 없다. 이제는 차디찬 고통과 죽음의 현실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아브라함의 말씀은 이를 명백히 한다:“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 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26절)
이 부자에 대한 경고가 바로 우리를 향하고 있다. 아직도 하나님 없이 살려는 마음, 그래서 이웃의 궁핍과 어려움을 외면하는 우리의 완악함에 대한 엄중한 경고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아직 소망이 있다. 부자는 저 지옥 불에 고통당하지만 그의 다섯 형제는 아직 변화의 가능성이 있는 지상 세계에 살고 있는 것처럼 우리에게도 아직 유예 기간이 주어져 있다. 그러기에 지금 우리가 변해야 한다. 이 변화를 가능케 하는 것은 다름 아닌 바로 모세와 선지자들의 말씀이며 더 나아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그 말씀 앞에서 회개하는 순종이 요구된다.

­이 글은 2001년 3월 28일 동일한 본문을 가지고 장신대에서 행한 설교(“말씀을 상실한 이름 없는 부자”)를 성경공부 형식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에 나타난 부자의 모습 속에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물질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신적이고 영적으로 나태해지고 교만하고 이기적인 나의 모습이 점점 크게 부각되었다. 이 비유를 통해서 나 자신 반성하며 회개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