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성경강해***/- 사도행전 강해

[스크랩] [스크랩] 에베소 장로들과의 작별(행 20장)

에반젤(복음) 2019. 10. 3. 21:17




[그말씀] 156(20026월호), 53-65에 게재된 원고(각주가 있는 원래 원고를 보시려면 아래에 첨부한 첨부파일을 보시기 바랍니다).

 

   에베소 교회 장로들과의 작별

                사도행전 20장의 주해와 적용

 

 

                                                             변 종 길(고려신학대학원, 신약학)

 

    

 

   사도행전 20장은 바울의 3차 전도여행 중 중요한 한 부분을 기록해 주고 있다. 누가는 여기서 바울의 여행 경로에 대해 간단히 기록해 나가다가 두 가지 사건에 대해서는 비교적 자세히 기록해 주고 있다. 하나는 드로아에서 유두고라는 청년이 졸다가 떨어져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건이며(7-12), 다른 하나는 바울이 밀레도에서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불러 작별한 사건이다(17-38). 이 마지막 사건에 대해 누가는 큰 비중을 두고서 그 때 한 바울의 설교 내용을 비교적 자세히 기록해 주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 고별 설교를 통해 바울이 어떤 자세로 목회에 임했으며, 어떤 각오로 복음을 전했는가를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교회의 장로들은 어떠한 자세와 각오로 교회를 섬겨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좋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사도행전 20장을 통해 목회자와 장로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I. 마게도냐와 헬라로 간 바울(1-6)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서 3년 가까이 복음을 전하였다. 에베소는 큰 도시요 아시아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되었다(고전 16:9). 그러나 아데미 여신의 우상을 만들어 파는 직공들이 일으킨 소요로 인해 바울은 부득불 에베소를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종종 핍박과 환난을 통해 전도자들을 다른 지역으로 보내어 전도하게 하신다.

   에베소에서의 광적인 소요가 그친 후에 바울은 제자들을 불러서 권면한 후에 작별하고 마게도냐로 떠났다(1). 이처럼 바울이 여유를 가지고 작별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에베소의 서기장이 무리를 설득하여 질서를 회복하였기 때문이다(19:35-41). 그러나 바울은 이제 더 이상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제자들을 불러 작별한 후에 마게도냐로 향했던 것이다.

   ‘마게도냐는 소아시아 반도 맞은편 지역으로 오늘날 유럽에 속하며 빌립보와 데살로니가, 베뢰아 등의 도시가 있는 곳이다. 바울은 전에 자기가 복음을 전했던 이 지역들을 찾아다니면서 제자들에게 많은 말로 권면하였다(2). 2차 전도여행 때 바울은 핍박으로 인하여 급히 떠나게 되어 아쉬움이 많은 터였다(16:19-17:15). 특히 데살로니가에서는 핍박으로 인하여 밤중에 도망치듯 떠나게 되어서 아쉬움이 많았으며,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향한 애틋한 사랑이 있었다. 이것이 데살로니가전서를 기록하게 된 계기가 되었는데, 바울은 3차 전도여행 중에 마게도냐를 들러 적지 않은 위로를 받았을 것이다.

   그 후에 바울은 헬라로 가서 석 달을 머물렀다(2). ‘헬라는 고린도와 아테네 등이 있는 아가야 지역을 뜻한다. 바울은 거기서 배를 타고 수리아로 가려고 하였으나 유대인들의 공모(共謀)로 인하여 다시 마게도냐로 돌아가게 되었다(3). 이로 말미암아 바울은 다시금 마게도냐의 여러 성도들과 교제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그 때 여러 사람이 바울과 동행하였는데(4), 그들은 먼저 무시아에 있는 항구 도시 드로아에 가서 바울과 그 일행을 기다렸다(5). 바울과 그 일행은 유대인의 중요한 절기인 무교절이 지난 후에 빌립보에서 배를 타고 떠나 닷새만에 드로아에 도착하여 먼저 온 형제들과 합류하였다(6).

 

II. 드로아에서 말씀을 전함(7-12)

 

   드로아에서 이레 동안 머무는 동안에 있었던 한 사건을 누가는 비교적 자세히 기록해 주고 있다. 때는 안식 후 첫날곧 주일(主日)이었다. 그 날에 바울과 그 일행과 성도들이 떡을 떼려 하여모였다(7). 떡을 떼는 것은 초대교회 성도들이 가진 애찬(愛餐)’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을 보면 주일 날 성도들이 예배 후에 교회당에서 함께 식사하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성도들간의 교제가 없는 예배는 형식적이요 의식적인 예배이며, 교회의 본질을 외면한 기형적인 모습이다. 성경적인 주일 모임에는 말씀을 배우고 기도하는 것과 아울러 떡을 떼며 교제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2:42, 46).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이 날 저녁에 밤늦게까지 성경 강론을 계속하였다. 이 저녁이 오늘날 시간으로 토요일 저녁이냐 아니면 주일 저녁이냐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유대인들의 날 계산 방식을 따르면 저녁 해질 때부터 새 날이 시작되니까 여기서의 저녁(주일 저녁)은 오늘날 시간으로 토요일 저녁이 된다. 그렇다면 바울은 그 밤이 지나고 나서 곧 주일에 여행을 떠났다는 것이 된다. 물론 주님을 위한 것이라면 주일에 여행을 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사도들의 관행에 비춰볼 때 그럴 듯하게 생각되지 않는다(1:12 참조). 뿐만 아니라 그렇다면 성도들은 오늘날 시간으로 토요일 저녁에 모여서 예배 드리고 성경 강론을 듣고 교제를 나누었다는 것이 되는데, 이렇게 보기에는 너무 시간이 빠듯해 보이고 더구나 이방 지역에서 여자들의 저녁 외출은 쉽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누가 자신이 여기서 바울이 이튿날떠나고자 하였다고 함으로써, 밤을 지나고 나서 오는 날이 다른 날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곧 유대식 날 계산 방식을 따르면 저녁부터 날이 시작되므로 자고 나도 역시 해가 지기까지는 같은 날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누가는 여기서 이 밤이 지나고 나서 오는 날을 이튿날이라고 말하고 있다. 사실 드로아는 이방 지역인데 굳이 유대식 날 계산 방식을 따를 필요도 없었을 것이며, 그 당시의 일반적인 방식 곧 로마식 계산 방식을 따랐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그렇다면 바울과 그 일행, 그리고 거기에 모인 성도들은 주일 날 오전 또는 오후에 모여서 예배 드리고, 이어서 바울의 성경 강론을 계속 들었다고 할 수 있다. 성경의 대가요 기독교 복음의 전도사인 바울 선생을 모시고 일종의 사경회(査經會)를 열었다고 볼 수 있다.

   그 때 바울은 강론을 오래 동안 계속하게 되었다. 바울의 타고난 열심과 아직도 풀어서 설명해 주어야 할 구절들이 많이 남아 있다는 사실과 또 이튿날 떠나고 나면 언제 다시 올지 모른다는 생각이 겹쳐서 밤늦도록 성경 풀이를 계속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자 3층 창문에 걸터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던 유두고라는 청년이 그만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유두고가 3층 창문에 걸터앉았다는 것은 그 때 청중이 많았다는 것을 암시하며, 졸았다는 것은 주일 하루 종일 예배 참석과 사경회 참석 등을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하여튼 떨어진 그 청년을 일으켜 보니 이미 죽어 있었다(9). 여기 사용된 죽은(네크로스)’이라는 단어와 12절의 살아난(존타)’이란 단어를 불 때 이 청년이 잠시 기절한 것으로 볼 수는 없다. 이 청년은 실제로 죽은 것이다. 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서 떠들지 말라. 생명이 저에게 있다고 하였다(10).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그 죽은 아이의 몸 위에 엎드리기 전에 또는 엎드릴 때 기도했다고 볼 수 있다(왕하 4:32-35). 어쨌든 다시 살아난 청년을 인하여 사람들이 큰 위로를 받았다(12). 이러한 이적은 바울의 강론을 들은 청중들로 하여금 그 말씀이 진리이며 하나님은 정말로 살아 계신다 하는 것을 강하게 믿게 만들도록 역사하였을 것이다(16:20 참조).

   바울과 성도들은 떡을 떼어서 먹고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11). 말씀의 은혜와 죽은 아이가 다시 살아난 이적을 인하여 이들이 함께 나눈 애찬은 참으로 의미 있는 식사가 되었을 것이다. 이처럼 한밤중에 식사를 하고 밤새도록 이야기하는 것은 과거의 한국 교회의 모습을 생각나게 한다. 서양 교회에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이러한 모습이 우리 한국 교회에도 있었다. 이것은 단지 문화적인 현상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할 때의 특별한 현상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평소에 규칙적인 생활과 절도 있는 생활을 해야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강력하게 역사할 때에는 가끔 이러한 규칙도 초월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III. 드로아에서 밀레도로 감(13-16)

 

   드로아를 떠난 바울과 그 일행은 두 편으로 나뉘어 바울은 육로로 앗소로 가고, 나머지 일행은 배를 타고 먼저 앗소에 가서 기다리게 되었다(13). 바울이 왜 이렇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지만 아마도 그가 육로로 가면서 둘러보아야 할 지역과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그들은 다시 앗소에서 만나 배를 타고 미둘레네로 가고, 거기서 떠나 이튿날 기오 앞에 이르고 그 다음날 사모에 이르고 그 다음날 밀레도에 도착하였다(14,15).

   밀레도는 에베소 남쪽에 있는 항구이다. 바울은 에베소에 들르지 않기로 작정하였는데, 그 이유는 에베소는 큰 도시이며 많은 성도들이 있으므로 거기에 들르면 오래 지체하여야 했기 때문이다. 바울은 어찌하든지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도착하려고 그의 행로를 서두르고 있었다(16).

 

IV. 에베소 장로들에 대한 고별 설교(17-35)

 

   바울은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오라고 불렀다(17). 에베소 교회에 장로들이 있었다는 기록은 여기에 처음 나온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선출하여 세웠으므로(14:23) 에베소 교회에 장로들이 있었다는 것은 새삼스런 일은 아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장로들(presbuteroi)’에 대해 28절에서는 감독자들(episkopoi)’로 불렀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이 두 단어는 신약 성경에서 서로 다른 직분이 아니라 동일한 직분에 대한 다른 명칭임을 알 수 있다. 참고로 말하자면, ‘장로라는 단어는 유대적 배경을 가지고 있으며 감독이란 단어는 헬라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1. 에베소 교회에서의 목회 회고(18-21)

 

   장로들이 오자 바울은 그들에게 고별 설교를 하였다. 고별 설교라고 해서 꼭 무슨 예배를 드리고 강단에서 설교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모인 자리에서 자연스럽게 말을 한 것이다. 이처럼 무슨 형식이나 의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용이 중요하다. 하여튼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이 오자 바울은 그가 그들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18). 여기서 행하다는 말에는 기노마이동사가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바울이 말하고 행한 모든 것을 가리킨다. 곧 그가 그들 가운데서 어떠한 사람이 되었는가하는 것 전체를 가리킨다. 이처럼 교역자는 단지 말뿐만 아니라 그의 모든 삶으로 교회를 섬기고 성도들을 지도해야 한다. 목회란 단지 설교 기술이나 부흥 전략에 달린 것이 아니라 목회자의 삶 전체를 통해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다.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서 행한 것은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이다(19).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주님을 섬길 때의 모습 세 가지를 알 수 있다. 모든 겸손눈물시험이다. ‘겸손(tapeinophrosunè)’은 원어를 직역하자면 겸비한 생각이다. 이것은 높은 데 생각(마음)을 두지 않고 낮은 데 두며(12:16), 복음을 위해 자신의 권리와 영광을 포기하는 것을 말한다(2:5-8). 따라서 이것은 우리 나라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겸손과는 거리가 멀다. 곧 우리 나라에서는 대개 윗사람에게 인사를 잘하고 몸을 굽신거리며 늘상 나는 부족한 사람입니다를 되뇌이는 사람을 가리켜 겸손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경향이 있지만, 성경이 말하는 겸손은 그런 것이 아니다. 겸손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는 예수님은(11:29) 이 세상에 오셔서 늘 나는 부족한 사람입니다. 나는 아무 것도 할 줄 모릅니다며 몸을 굽신거리지 않았다. 사도 바울도 에베소 교회에서 목회할 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따라서 성경이 말하는 겸손이란 그런 비굴한 태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지 아니하고 자기의 영광을 추구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곧 비천한 자들에게 찾아가서 복음을 전하며 그들과 함께 어울리고 생활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눈물로 주를 섬겼다고 했는데, 여기서 눈물은 원어에 의하면 복수로 되어 있다. ,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서 목회할 때 많은 눈물을 흘렸음을 알 수 있다. 이 눈물은 자신의 죄와 부족 때문에 흘린 눈물이 아니라 성도들을 위하여 흘린 눈물이며, 그를 비방하고 음해하려는 자들 때문에 흘린 눈물이다. 이처럼 많은 눈물이 있어야 교회가 바로 되고 참된 목회가 된다. 그리고 유대인들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들가운데 주를 섬겼다고 한다. 이것은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유대인들이 온갖 간교한 말과 행동으로 바울을 비방하고 괴롭혔음을 보여 준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바른 복음을 전할 때에는 온갖 시험과 비방이 찾아온다.

   20절과 21절에서는 바울의 목회에 대해 좀더 설명해 준다. 먼저 20절에서는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꺼림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쳤다고 한다.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에 직업적으로 예배 시간이나 정규적인 모임 시간에만 가르친 것이 아니라 공중 앞에서각 집에서’, 즉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가르쳤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회당에서뿐만 아니라 산과 들과 바닷가에서 무리들을 가르치시고 길 가시면서도 가르치시고 또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도 가르치신 것과 상통한다. 이처럼 참된 교육은 공적으로 이루어지는 교실 교육만이 아니라 길에서나 집에서나 어디에서든지 이루어지는 전천후 교육전방위 교육이 되어야 한다. 직업적인 목자는 근무 시간과 장소를 엄격하게 구별하지만 참된 목자는 자기에게 닥치는 모든 시간과 모든 장소를 복음을 전하는 기회로 활용한다.

   그리고 21절에서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증거하였다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데에는 회개가 필요하다. ‘회개(metanoia)’는 자기의 모든 죄를 뉘우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을 말한다. , 자기의 구체적인 죄들을 깊이 뉘우치고 버리는 것과 또한 이제부터는 세상으로 향하던 삶의 방향을 하나님께로 돌리는 것 둘 다를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참된 회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며, 또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회개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회개 없는 믿음이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없는 회개는 옳지 않다. 오늘날 한국 교회에는 회개 없는 믿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죄를 지적하지도 않고 죄에 대한 회개도 없는, 피상적이고 기만적인 믿음을 전하는 교회들이 많다. 그러나 성경은 한결같이 참된 믿음에는 회개가 따름을 말하고 있다(3:2, 1:15, 2:38, 5:31, 17:30, 2:12, 6:1 ).

 

2. 바울의 결심과 각오(22-27)

 

   그리고 나서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자 하는 자기의 계획과 각오에 대해 말한다.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22) 여기서 심령에 매임을 받아(dedemenos tòi pneumati)”라는 표현이 우리의 주의를 끈다. 여기서 여격 토 프뉴마티는 두 가지로 이해될 수 있다. 하나는 관점의 여격(dative of respect)’으로서 영에 있어서’, 바울의 영혼에 있어서로 이해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여기의 프뉴마를 성령으로 이해하는 것이다(Grosheide). 성령에 의해강력한 충동과 속박을 받았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이 경우의 여격은 수단의 여격이 된다). 문법적으로는 둘 다 가능하다. 내용상으로도 둘 다 가능하다. 하지만 필자는 전자의 해석을 더 선호한다. 무엇보다도 마태복음 53절의 토 프뉴마티가 관점의 여격으로서 사용된 것이 여기 이 구절에서의 용법과 유사하기 때문에 여기의 토 프뉴마티를 다르게 보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매임을 받았다고 하면 대개 사슬에 매여서감옥에 갇힌 것을 생각하게 된다(3:1, 6:20, 1:14 , 딤후 1:8 ). 육신에 있어서매임을 당한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바울은 지금 그런 것이 아니라 그의 마음에매임을 당해서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있다. 따라서 이 경우에 사도 바울이 그냥 매임을 받아라고 하면 뭔가 부족하고 오해하게 되므로 어디에매임을 당했는가를 보충설명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매임을 받아다음에 관점의 여격심령에 있어서가 추가된 것이다(이것은 마 5:3가난한 자의 경우도 똑같다). 물론 바울이 이처럼 심령에 매임을 받은 것은 성령에 의해그렇게 되고 충동된 것이지만, 그가 지금 여기서 말하는 것은 그런 측면이 아니라 그가 육체에쇠사슬로 매인 것이 아니라 그의 영혼(심령)매임을 받았다는 것이다.

   바울은 이와 관련하여 좀더 말하고 있다.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23). 성령께서는 바울에게 미리 그에게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고 있음을 증거해 주셨다. 나중에 바울이 가이사랴에 도착했을 때에는 선지자 아가보가 와서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고 구체적으로 예언하였다(21:11).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였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24) 바울은 자기가 받은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자기의 목숨도 아까워하지 않았다. 여기에 바울의 위대함이 있다. 바울과 함께 있는 사람들은 바울의 신변을 염려하여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고 울면서 권하였으나 바울은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고 대답하였다(21:12-13). 이처럼 사도 바울은 자기의 목숨을 돌아보지 않고 복음을 전하였으며, 그 때에 하나님의 큰 역사가 있었던 것이다(15:25-26). 바울의 선교 사역의 성공의 가장 큰 비결은 그가 이적과 기사를 행했다는 데 있는 것도 아니며 학식이 뛰어났다는 데 있는 것도 아니며 또는 기도 생활에 열심했다는 데 있는 것도 아니다. 물론 이런 것들도 귀하고 그의 사역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임에는 틀림없지만, 그의 선교 사역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것은 그가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복음을 전했다는 것이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순교 신앙을 가지고 복음을 전했다는 것이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고 한 바울의 고백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영적인 의미에서의 자기 부인이나 겸손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 문자적인 의미에서의 실제적인 죽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곧 그는 부활의 신앙을 가지고 날마다 죽음을 각오하고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던 것이다(고전 15:30 참조).

   여기서 우리가 또 주목해야 할 것은 바울은 그가 전한 복음에 대해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인들을 값없이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이것이 바울이 전한 복음의 핵심이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전하는 복음에 은혜(charis)’가 없다면 그것은 복음이 아니다. 교회가 아무리 조직이 잘 되어 있고 프로그램이 좋고 말씀이 좋아도 거기에 은혜가 없다면 그것은 올바른 교회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무슨 프로그램을 하든지 거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고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하도록 해야 한다.

   이어서 바울은 말한다. “보라 내가 너희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지금은 너희가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 여기서 핵심은 이제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다시 바울의 얼굴을 보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바울은 이미 자기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를 예감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비장한 마음으로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마지막 말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오늘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너희에게 전하였음이라.”(26-27) 여기서 주된 문장은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울의 선지자 의식을 나타내 준다. 선지자 또는 목자는 사람들이 듣든지 안 듣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남김없이 다 전하여야 한다. 만일 전하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회개치 못하여 죄 중에 죽는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피 값을 그 선지자에게서 찾겠다고 말씀하셨다(3:18-21). 따라서 중요한 것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남김없이 다 전하는 것이다. 바울은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고전 9:16)는 강한 의무감을 가지고 복음을 전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교역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다 전하기보다는 어찌하든지 사람들을 교회로 데려와 자기 교회의 교인으로 만들려고 애쓴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 중에서 안 전하는 부분도 많고 약하게 전하는 부분도 많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이 이 복음을 받아들일 것인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인가 하는 결과에 신경을 쓴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말씀을 다 전하는 데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3. 장로들에 대한 당부(28-35)

 

   그리고 나서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권면의 말을 하였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28) 여기서 핵심 되는 단어는 삼가라(prosechete)’는 것이다. 이 단어는 주의하라, 유의하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자기와 온 양 떼를 위하여 주의하라는 것이다(개역판의 또는이란 연결은 잘못이다). 이에 대해 바울은 좀더 설명한다. 성령이 그들 가운데서 너희를 감독자로 세우셔서 하나님의 교회를 치게 하셨다는 것이다. 여기서 감독자(episkopos)’돌아보는 자라는 뜻의 단어로서 앞에 나온 장로(presbuteros)’와 동일한 사람을 가리킨다는 것은 이미 말하였다. 장로는 권세를 부리는 자가 아니라 교회를 돌아보는 자, 보살피는 자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교회를 치는자이다. 여기서 친다는 단어의 원어는 포이마이네인(poimainein)’으로서 목양하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이것은 일종의 목자로서 양을 돌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초대교회에서 장로의 직무는 오늘날의 목사의 직무와 엄밀하게 구별되는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장로들은 소위 다스리는직무만 행하고 돌보는직무는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당회에서 결정만 하고 봉사는 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들이 일을 잘하고 있는지 여부를 감독하는 것이 장로의 직무인 줄로 오해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사실 성경적인 장로의 직무는 교회를 돌보고 목양하는것이다. , 각 정해진 구역 식구들을 돌아보고 가르치고 권면하고 지도하는 역할을 하여야 한다(한국 교회에서 대개 구역장과 장로를 구별하고 있는데 이것도 문제이다. 개혁교회에서는 장로가 구역장을 맡고 있으며, 구역이 늘어나면 이에 따라 장로를 더 세운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교회에 대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라고 말한다. 교회는 주님께서 자기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것이다. 값없이 가져온 것이 아니라 값을 치루고 사신(획득하신) 것이다. 이것은 구원이 합법적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뜻하며,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 피를 흘리실 만큼 고귀한것임을 뜻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교회의 감독자로 세움 받은 장로들은 자기와 양떼들을 위하여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이어서 자기가 떠난 후에 닥칠 일들에 대해 미리 말하고 주의하라고 권면한다(29-31). 먼저 자기 떠난 후에 그들을 미혹하는 거짓 선지자들이 올 것이라고 말한다(29; cf. 딤전 4:1). 이들에 대해 바울은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는 흉악한 이리라고 표현하고 있다(cf. 7:15). 뿐만 아니라 에베소 교회 교인들 중에서도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한다(30). 이들은 자기들을 좇게 하려고 제자들을 미혹할 것이다. 이처럼 이단들은 누가 설립했는가, 누가 가르쳤는가를 가리지 않고 언제 어디서나 들어올 수 있다. 그래서 바울은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3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에게 교훈하던 것을 기억하라고 말한다(31). 여기서 중요한 것은 깨어 있으라는 것이다. ‘깨어 있다(grègoreite)’는 것은 영적으로 각성해 있는 것을 말한다. 방종하거나 방심하지 말고 파수꾼처럼 늘 준비하고 경계해야 한다는 말이다. 특히 사도 바울이 3년 동안 각 사람에게 훈계하던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바울이 가르치고 훈계하던 것을 늘 마음에 새기고 있어서 이 가르침과 다른 것이 들어올 때에는 즉각 분별하여 물리쳐야 한다는 것이다(2:2 참조).

   그리고 나서 바울은 그들을 하나님과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한다고 말한다(32).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떠나면서 그들을 어떤 사람에게 맡기지 않았다. 사람을 믿고 맡겼더라면 불안하여 아마 떠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 모든 것을 살아 계신 하나님과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였다. 여기에 바울의 믿음과 담대함이 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염려를 주께 맡기고 믿음으로 나아가야 한다(벧전 5:7). 물론 이러한 믿음 뒤에는 끊임없는 기도가 뒤따라야 한다. 사도 바울은 그가 전도하고 개척한 교회 성도들을 위해 밤낮으로 쉬지 않고 기도하였다(1:16, 1:4, 1:3, 살전 1:2, 3:10 ). 그리고 여기서 바울이 다시금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은혜의 말씀이라고 한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바울이 3년 동안 에베소에서 전한 말씀은 은혜의 말씀이었다. ‘은혜가 중심이 되고 은혜가 핵심이 되는 말씀이었다. 은혜를 인하여 바울과 그 은혜를 깨우친 많은 사람들이 감격하고 감사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교회에서 전파되는 말씀도 은혜의 말씀이 되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그 중심이 되어야 한다(그 체계적인 내용은 로마서에 잘 나타나 있다). 좀 엉성하고 빈틈이 있어 보이더라도 은혜가 있는 교회라야 좋은 교회이다.

   그런데 바울은 이 은혜의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고 말한다(32).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든든히 세우며 우리에게 기업(基業)을 줄 수 있는 말씀이다. 여기서 기업(klèronomia)’이란 성도들이 천국에 가서 상속받을 유업(遺業)을 뜻한다. 그리고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성도들을 말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그의 피로 거룩케 함을 입었다. 따라서 우리는 거룩케 함을 입은 자들이다(완료 시상). 이것은 우리의 실제 모습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법적 선언이다. ,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봐주시고 우리를 거룩한 자들이라고 불러 주신다는 의미이다. 물론 이렇게 거룩케 함을 입은 자들은(칭의) 또한 성령으로 날마다 거룩하게 되어가도록 힘써야 한다(성화).

   그리고 나서 바울은 물질 문제에 대하여 말한다(33-35). 그는 어느 누구의 돈을 탐내지 않았으며 일절 깨끗하게 행동하였음을 말한다(33). 이것은 자기 자신을 자랑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함을 가르쳐 주기 위해 한 말이었다. 바울은 자기 자신의 손으로 일하여 자기와 및 그와 함께 한 자들의 필요를 채웠다(34). 그는 틈틈이 장막 만드는 일을 하여 필요한 것을 감당하였다(18:3). 물론 이러한 자비량 선교는 오늘날의 모든 선교사들과 목회자들에게 적용되어서는 안 된다. 바울 자신이 이미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고 하였으며(고전 9:9), 그 자신도 일하지 아니할 권리가 있다고 하였다(고전 9:6). 따라서 정상적인 경우에는 교회가 교역자 또는 선교사의 생활을 전부 책임지는 것이 옳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의 군병으로서 복음 전하는 일에 전적으로 헌신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의 경우는 상황이 조금 달랐다. 그는 아직 복음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기 때문에 여러 가지로 오해를 받을 수 있는 상황에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앞에서 마땅히 권리가 있었지만 복음 전파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자기의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고 유보하였던 것이다(고전 9:12). 따라서 우리는 바울의 이러한 생활을 오늘날의 모범으로 삼아서는 안 되지만, 특별한 경우에 이러한 것을 활용할 수는 있다고 본다. 곧 이방 지역에 복음을 전하는 선교 사역의 경우에 소위 평신도 사역자들은 자기 직업에 종사하면서 틈틈이 복음을 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착된 교회 상황에서 이러한 경우를 적용하는 것은 ()’보다 ()’이 훨씬 더 많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바울이 여기서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주는 교훈은 그들이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는 것과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었다(35). 여기서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하신 말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이 문구 자체는 복음서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어떤 학자들은 소위 알려지지 않은 예수의 말씀중의 하나로 보기도 한다. 그리고 사도 바울 또는 누가가 이 예수님의 말씀을 어떻게 알았을까에 대해 의문을 가지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이 말씀에 대해 단수로 주 예수의 말씀(logos)’이라고 하지 않고 복수로 말씀들(logoi)’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바울은 여기서 (복음서에 기록되지 않은) 예수님의 한 특정한 말씀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이런 취지로 하신 예수님의 여러 말씀들을 생각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하신 말씀은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여러 말씀들을 요약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즉 우리는 여기서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빌려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6:35)라는 말씀과,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6:38)는 말씀과, “무릇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지 말라”(6:30)는 말씀 등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산상보훈의 가르침 전체가 이웃 사랑을 주제로 하고 있다고 볼 때, 그 가르침의 정신은 곧 이기적인 자기 사랑(받는 것)을 버리고 이타적인 이웃 사랑(주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여기서 무슨 알려지지 않은 예수님의 말씀을 말하고 있다기보다 오히려 복음서에 잘 나타나 있는 예수님의 말씀들의 내용을 요약해서 말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V. 밀레도 항구에서의 작별(36-38)

 

   이러한 것들을 말한 후에 바울은 무릎을 꿇고 저희 모든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였다. ‘무릎을 꿇는 것은 하나님 앞에 자기를 낮추고 하나님께 은혜를 간구하는 태도이다. 바울이 무릎을 꿇었을 때 함께 있는 사람들도 다 같이 무릎을 꿇었을 것이다. 물론 우리는 앉아서 기도할 수도 있고 서서 기도할 수도 있으며 또 손을 들고 기도할 수도 있지만, 때때로 특별한 경우에 무릎을 꿇고 기도할 수도 있다. 우리 한국 교회가 전에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경우가 많이 있었지만 요즈음은 왠지 드물어지는 것 같다. 물론 자세가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자세 속에 마음의 태도가 어느 정도 포함되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어쨌든 하나님 앞에 진지하게,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자 함께 한 모든 사람이 실컷 울었다. 이 울음은 보통의 울음이 아니었다. 밀레도 항구에서의 이 울음은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자기의 모든 것을 바쳐 충성한, 너무나 고귀한 사도를 위해 성령의 감동으로 운 거룩한 울음이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다 주고서 또 다시 자기의 목숨까지 바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떠나는 바울을 마지막으로 보내면서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사랑에 감동되어 소리 높여 운 울음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다. ‘입을 맞추는 것은 초대교회의 인사 중 하나로서 거룩한 입맞춤’(고전 16:20, 고후 13:11, 살전 5:26) 또는 사랑의 입맞춤’(벧전 5:14)이라고 불리었다. 특히 바울의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하리라 한 말로 인하여 크게 슬퍼하면서 그를 배에까지 전송하였다.

 

맺는 말

 

   이상에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서 어떻게 복음을 전하고 목회를 하였는지를 살펴보았다. 그는 무엇보다도 복음 증거하는 일을 위하여 자기 목숨도 아끼지 아니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의 투철한 사명감을 보게 된다. 그는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자기 앞에 어떤 위험과 고난이 닥쳐도 개의치 않았다. 성령께서 그에게 계속해서 그 앞에 닥칠 위험을 알려 주었지만 그것이 그의 발걸음을 막지 못했다. 자신의 신변의 안전보다도 성령의 계시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받은 사명을 이루는 일이었다. 이 일을 위해 그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임했던 것이다. 이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귀하게 보시고 그를 통해 큰 역사를 이루셨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이런 신앙은 귀한 모범이 되고 교훈이 된다. 오늘날 우리는 너무 자기가 살려고 하고 자기가 나서려고 한다. 자기의 명예와 권리를 너무 앞세우고 자기의 유익을 위해 너무 나선다. 그러니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지 못하고 곳곳에서 탄식 소리만 들려 온다. 복음은 가리워지고 교회는 무너진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게 될 터인데, 그 한 알이 죽지 않고 살아서 발버둥치니 문제이다. 결국 열매도 맺지 못하고 자기도 죽고 말 것이다.

   우리는 각자 하나님께 받은 사명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고 원점으로 돌아가서 그 사명을 이루기 위해 전심전력하여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순수한 마음으로 주님을 먼저 생각하고 복음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래서 나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나타나도록 힘쓰는 일꾼들이 되도록 하여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