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성경강해***/- 오바댜 강해

옵1장 1-4 오바댜서 서론 -피영민

에반젤(복음) 2019. 9. 30. 11:19




옵1장 1-4

오바댜서 서론

피영민 목사 2011.08.28.

강남중앙침례교회  http://www.kjbc.co.kr/







본문 : 오바댜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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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바댜의 묵시라 주 여호와께서 에돔에 대하여 이같이 말씀하시니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말미암아 소식을 들었나니 곧 사자가 열국 중에 보내심을 받고 이르기를 너희는 일어날지어다 우리가 일어나서 그로 더불어 싸우자 하는 것이니라 2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를 열국 중에 미약하게 하였으므로 네가 크게 멸시를 받느니라 3 바위 틈에 거하며 높은 곳에 사는 자여 네가 중심에 이르기를 누가 능히 나를 땅에 끌어내리겠느냐 하니 너의 중심의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 4 네가 독수리처럼 높이 오르며 별 사이에 깃들일지라도 내가 거기서 너를 끌어내리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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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오바댜서는 구약성경 가운데 가장 짧은 것이 특징인데 한 장으로 되어 있고 절은 21절까지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성경 중 한 권을 빨리 읽으라고 하면 오바댜서를 읽으면 됩니다. 오바댜서는 신약성경에는 단 한 구절도 인용되지 않지만 놀랍게도 구약성경에서 인용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29장 7-19절을 보면 오바댜서의 내용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그리고 오바댜서는 소선지서 가운데 하나입니다. 대선지서와 소선지서는 내용의 중요성이 아니라 분량의 크기에 따라 구별한 것입니다. 소선지서는 분량이 작은 책들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오바댜서는 소선지서 중에서도 소선지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바댜서가 증거하고 있는 내용은 한마디로 “에돔의 멸망”입니다. 에돔 사람들은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오바댜 1장 1절을 보면 “오바댜의 묵시라”고 나와 있습니다. 오바댜는 사람의 이름인데 “여호와의 종”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종이 묵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바댜가 연구해서 발표하거나 공부해서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주신 계시를 그대로 증거한다는 것입니다. 이 오바댜라는 사람은 이름의 의미만 알 수 있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누구고 어느 집안 출신이고 어디 살았는지는 전혀 알 수 없습니다. 저만 모르는 것이 아니라 아무도 모릅니다. 오바댜에 관한 정보는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늘은 오바댜서의 서론으로 오바댜서가 기록된 배경 그리고 그 중심이 되는 교훈을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Ⅰ. 에돔은 어떤 나라이며 이스라엘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오바댜서에서 에돔은 멸망하고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고 했는데 도대체 에돔은 어떤 나라이고 이스라엘과는 무슨 관계가 있는지를 우리가 알아야겠습니다. 창세기 25장 21절을 보면 이삭이 나이 사십에 장가들었는데 육십이 될 때까지 아이가 없었습니다. 결혼하고 이십 년이 지났는데도 아이가 없으니까 하나님께 자녀를 달라고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자녀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삭의 부인 리브가가 잉태를 하였는데 배가 불러오면서 자꾸 배가 아픈 것입니다. 알고 보니 뱃속에 아이가 하나가 아니라 둘이 있어서 뱃속에서부터 싸우는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하나님께 질문하자 창세기 25장 23절에 하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창 25:23) 이것을 듣고 리브가는 쌍둥이 중에서 나중에 나오는 이이가 더 큰 자가 되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리브가가 해산을 하는데 먼저 나오는 아이의 색깔이 빨간 것입니다. 그래서 이름을 빨갛다는 의미의 히브리어로 에서라고 지었습니다. 그런데 뒤에 나오는 아이를 보니까 먼저 나가는 형의 발뒤꿈치를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삭이 보고 남의 것을 빼앗는 기질이 있다고 해서 남의 것을 약탈하는 자라는 의미의 히브리어로 야곱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래서 먼저 나온 에서가 에돔의 조상이 되었고 나중에 나온 야곱이 이스라엘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은 택하시고 에서는 택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사랑하시고 에서는 미워하신다는 표현을 성경이 쓰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9장 11절에서 이 사건은 하나님의 택하신 목적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롬 9:11) 하나님께서 야곱은 택하시고 에서는 택하지 아니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시는 일이라는 하나님의 주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우리 인간이 하나님께 묻고 따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에서는 성장하면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없는 “불신자”라는 것이 드러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믿지도 않았고 관심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장자권을 주셨는데도 팥죽 한 그릇에 팔아먹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이삭과 어머니 리브가가 가나안 여인을 절대 아내로 취하지 말라고 했는데도 가나안 여인을 둘씩이나 아내로 취하고 그것도 모자라서 이스마엘의 딸을 아내로 취했습니다. 에서는 어느 한 가지도 하나님과 부모의 뜻에 순종한 것이 없었습니다.

 에서는 사해 남부의 “세일산”에 정착하였습니다. 이곳은 아주 높은 산악지대입니다. 이곳을 에서는 하나님께서 가라고 해서 간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찾아갔습니다. 거기 살고 있던 원주민들을 몰아내고 그곳에 거주하게 되었는데 왜 에서는 높은 세일산을 찾아갔느냐? 세일산은 두 가지 장점이 있었습니다. 첫째, 경제적인 유익이 있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가나안 땅을 지나 터키와 유럽까지 가는 길이 있었습니다. 그 길의 이름이 “왕의 대로”인데 왕의 대로의 톨게이트가 바로 세일산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일산만 차지하고 있으면 오가며 장사하는 사람들에게 통행세만 받아도 에서의 후손들은 먹고 사는데 아무 문제가 없었던 것입니다. 에서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언약의 땅 가나안에 머물지 않고 왜 세일산으로 갔느냐? 돈벌이가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돈이 아무리 좋아도 신앙을 버리고 돈 따라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둘째, 군사적인 장점이 있었습니다. 세일산에 있는 에돔의 수도는 세라입니다. 세라는 나중에 이스라엘 백성이 환난을 당하면 도피할 수 있는 페트라로 알려졌습니다. 이곳은 바위 틈에 존재하는 난공불락의 요새였습니다. 그 당시 속담에 세라는 열두 명만 지켜도 어떤 군대의 침략을 막아낼 수 있다고 할 정도로 난공불락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에돔이 교만해진 원인이 되었습니다. “바위 틈에 거하며 높은 곳에 사는 자여 네가 중심에 이르기를 누가 능히 나를 땅에 끌어내리겠느냐 하니 너의 중심의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 (옵 1:3) 에돔은 경제적인 유익과 군사적인 장점 때문에 세일산에 정착한 것입니다.

 에서의 후손인 에돔 왕국은 대대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적대감을 보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원수 노릇을 했습니다. 형님이 아우의 원수 노릇을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을 해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때 에돔을 지나가는 것이 지름길이었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에돔왕에게 아무 피해도 끼치지 않고 돈도 다 지불하겠으니 조용히 통과만 하게 해달라고 했으나 에돔왕은 군사와 칼로 너희를 막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먼 길로 돌아가게 된 것입니다. 에돔의 적대감은 구약성경에 계속 나와 있습니다. 하지만 다윗과 솔로몬은 너무 강했기 때문에 에돔이 대적하지 못했습니다. “다윗이 염곡에서 에돔 사람 일만 팔천을 쳐 죽이고 돌아와서 명예를 얻으니라” (삼하 8:13) 다윗 때는 에돔을 누르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신앙이 좋고 성령충만하면 마귀와 악령 같은 것들을 누르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기도도 안 하고 성경도 안 보면 마귀와 악령들이 다시 우리를 공격하는 것입니다. 에돔은 다윗 시대에는 눌려 살았지만 여호사밧 시대를 지나 여호람 때부터 또 이스라엘을 괴롭히기 시작했는데 결국 로마제국 시대에 완전히 멸망당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에돔이라는 나라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Ⅱ. 오바댜 선지자는 왜 에돔이 멸망할 것을 예언하고 있는가?


 왜 에돔의 멸망을 예언했는지에 대한 이유가 오바댜 1장 10-14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네가 네 형제 야곱에게 행한 포학을 인하여 수욕을 입고 영원히 멸절되리라 네가 멀리 섰던 날 곧 이방인이 그의 재물을 늑탈하며 외국인이 그의 성문에 들어가서 예루살렘을 얻기 위하여 제비뽑던 날에 너도 그들 중 한 사람 같았었느니라 네가 형제의 날 곧 그 재앙의 날에 방관할 것이 아니며 유다 자손의 패망하는 날에 기뻐할 것이 아니며 그 고난의 날에 네가 입을 크게 벌릴 것이 아니라 내 백성이 환난을 당하는 날에 네가 그 성문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며 환난을 당하는 날에 네가 그 고난을 방관하지 않을 것이며 환난을 당하는 날에 네가 그 재물에 손을 대지 않을 것이며 사거리에 서서 그 도망하는 자를 막지 않을 것이며 고난의 날에 그 남은 자를 대적에게 붙이지 않을 것이니라” (옵 1:10-14) 에돔이 야곱에게 포악을 행했기 때문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외적들이 예루살렘을 침략하고 늑탈할 때 에돔은 그것을 기뻐하고 방관하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침략자들이 늑탈할 때 예루살렘에 들어가 같이 늑탈하고 도망가는 예루살렘 사람들을 잡아서 원수들에게 넘겨주는 못된 짓을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바댜서가 말하는 예루살렘 침략사건은 어떤 사건을 말하는 것일까요? 역사상 예루살렘은 네 번 침략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오바댜가 말하는 사건일 가능성이 있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 사건은 B.C. 587년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침공하여 예루살렘을 약탈했을 때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오바댜에 나오는 사건을 이 사건으로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바벨론이라는 이름이 나와 있지 않고 또 바벨론이 침공했을 때는 성전이 파괴되었는데 성전이 파괴되었다는 기록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가장 합당한 사건은 B.C. 845년 역대하 21장 8-17절에 나오는 사건입니다. 이것은 여호람 때의 사건인데 여호람은 아합의 딸과 결혼을 했습니다. 아합은 북 왕국에서 최고 악한 왕인데 아내 이세벨과 함께 바알숭배를 조장한 왕입니다. 그런데 그 딸 아달랴를 여호람이 아내로 맞이한 것입니다. 아달랴는 여호람에게 형제들이 왕위를 빼앗으려고 할지도 모르니 형제들을 다 죽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듣고 여호람은 자기 형제들을 모두 죽입니다. 그리고 바알숭배를 조장한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두 가지 심판을 내리셨습니다. 첫째, 에돔이 배반을 한 것입니다. “여호람 때에 에돔이 배반하여 유다의 수하에서 벗어나 자기 위에 왕을 세운고로” (대하 21:8) 둘째, 블레셋 사람과 아라비아 사람이 연합하여 예루살렘을 늑탈한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블레셋 사람과 구스에서 가까운 아라비아 사람의 마음을 격동시키사 여호람을 치게 하셨으므로 그 무리가 올라와서 유다를 침노하여 왕궁의 모든 재물과 그 아들들과 아내들을 탈취하였으므로 말째 아들 여호아하스 외에는 한 아들도 남지 아니하였더라” (대하 21:16-17) 그러므로 여호람 때의 사건을 오바댜가 말하는 예루살렘 침략사건으로 보는 것이 합당합니다. 결국, 여호람은 창자의 고칠 수 없는 병이 들어서 죽고 말았습니다. 아내를 잘못 만나서 여호와 섬기는 것을 핍박하고 누르다가 대장암에 걸려 죽은 것입니다. 그때 블레셋과 아라비아가 쳐들어와서 예루살렘을 늑탈하였고 에돔은 이들의 편이 되어 예루살렘을 늑탈하는데 동참한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오래전 일이지만 하나님께서는 다 기억하시고 심판하셨습니다. 결국, 에돔은 로마 시대에 완전히 망하게 되었습니다. 에돔이 저지를 짓에 대해서 팔백 년 후에 하나님께서 심판하신 것입니다. 역사상 어떤 민족이 다른 민족에게 악을 행했다면 이것을 하나님께서는 800년이 지나도 기억하시고 심판하신다는 것을 우리는 오바댜서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Ⅲ. 오바댜서의 중심 주제


 오바댜서의 중심주제는 두 가문의 대립과 두 산의 대립입니다. 에서가 사는 세일산, 야곱이 사는 시온산의 대립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에서의 가문, 세일산을 심판하시고 야곱의 가문, 시온산에는 구원자를 보내어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사실 에서와 야곱을 비교하면 야곱이 더 나쁩니다. 순 사기꾼에다 거짓말쟁이였는데 왜 하나님께서는 에서의 편을 안 들어주시고 야곱의 편을 들어주셨느냐? 야곱은 나쁜 사람이었어도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에서는 동일하게 나쁜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보십시오. 인간은 모두 죄인인데 그중에서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사람의 편을 들어주겠습니까? 아니면 매일 하나님 욕이나 하고 교회 욕하는 사람의 편을 들어주시겠습니까? 사람은 모두 죄인입니다. 우리도 죄인이고 불신자도 죄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죄인임을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구세주라는 것을 믿고 하나님께 어떻게든 영광 돌리려는 죄인들이고 불신자들은 죄인이면서 하나님을 욕하고 대적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불신자인 에서의 가문과 세일산을 심판하시고 야곱의 가문과 시온산은 구원자를 보내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야곱과 에서, 시온산과 세일산은 무엇이냐? 이것은 영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 예표적인 표현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아 하나님을 믿고 사는 경건한 백성 즉, 신자를 예표하는 것입니다. 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불경건한 백성 즉, 불신자를 예표하는 것입니다. 역사상 불경한 백성이 끊임없이 경건한 백성에게 포악을 행하고 괴롭히고 핍박하였지만 결국 경건한 백성이 승리하고 하나님께서는 불신자들을 심판하신다는 메시지인 것입니다.

 오바댜서의 메시지는 창세기 3장 15절의 말씀과 동일합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창 3:15) 이것은 한 구절로 인류 역사를 요약한 것입니다. 인류역사는 영적인 전쟁이 끊임없이 있습니다. 사람의 세력과 사단의 세력이 끊임없이 전쟁하고 하나님을 믿는 자들과 사단을 추종하는 자들이 끊임없이 전쟁합니다. 하지만 사단의 후손들이 믿는 백성을 상하게 하여도 최후에는 믿음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가 이긴다는 것입니다.


Ⅳ. 오바댜서의 실질적 교훈


 오바댜서의 실질적인 교훈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과 은혜주심에 대하여 “쓴뿌리”를 품지 말라는 것입니다. 에서는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은혜를 주신 것에 대하여 쓴뿌리를 품었습니다. 그래서 대대로 원수 노릇을 하다가 결국 후손들이 싹 망해버렸습니다. 쓴뿌리는 결국 멸망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가인이 자기 아우 아벨과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는데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고 자신의 제사는 안 받으시니까 아벨을 향해서 쓴뿌리를 품고 아우 아벨을 죽여 성경에 나오는 첫 번째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요셉의 형제들도 하나님께서 요셉에게만 해와 달과 열한 별이 절하는 꿈과 곡식단이 일어나서 절하는 꿈을 주시니까 쓴뿌리를 품고 요셉을 노예로 팔아먹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나중에는 요셉 앞에 머리 숙여 먹을 것을 달라고 하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을 잘되게 해줘도 배 아파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에게 그 사람의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또 나에게는 나만큼의 은혜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그것으로 만족하고 남이 받은 은혜에 대해서 쓴뿌리를 품고 시기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택한 백성은 믿지 않는 사람과는 뭐가 달라도 달라야 된다는 것입니다. 에돔이 이스라엘 백성을 지나가지도 못하게 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에돔을 미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에돔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그는 너의 형제니라 애굽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네가 그의 땅에서 객이 되었음이니라” (신 23:7) 하나님께서는 요셉에게도 이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요셉이 나이 삼십에 애굽의 총리가 되고 형들이 와서 고개를 숙일 때 저 같았으면 형들이 자신을 죽이려하고 노예로 팔아먹은 것에 대하여 한을 품고 있다가 그들의 뺨이라도 때렸을텐데 그러지 않고 오히려 형들을 위로합니다. 이처럼 믿는 신자는 불신자와는 달라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억울한 포악을 당해도 달리 살 수 있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편이 되어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악인을 심판하실 것이니까 괜히 내가 심판한다고 나설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편이시고 내게 궁극적인 승리를 주실 것이니까 여유를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믿기 때문에 불신자와는 달리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


 하나님께서는 우리 성도들의 인생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다 합력해서 선으로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우리 삶 가운데 좋은 일도 일어나고 나쁜 일도 일어나고 행복한 일도 일어나고 슬픈 일도 일어납니다. 하지만 이것이 나중에 보면 다 합력해서 하나님께서 좋게 해주시더라는 확신을 가져야 될 것입니다.

 왜 오바댜서를 공부하느냐? 오바댜서를 공부하면 우리 성도들은 위안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롬 8:31) 그리고 우리는 넉넉히 이깁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롬 8:37) 우리는 승리자입니다. 지금은 조금 질 수도 있지만 궁극적으로 우리는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는 영원한 승리자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 (신 33:29) 우리는 행복자이고 승리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패배자처럼 살지 말고 불행한 사람처럼 말하지 말고 행복자, 승리자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믿음을 가지고 사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오바댜서를 공부하면서 결국 믿음을 가진 성도들이 이긴다고 하는 확신을 가지고 위안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작성자 상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