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성경강해***/- 호세아 강해

호세아서의 사회 - 문학적 분석

에반젤(복음) 2019. 9. 25. 17:21




호세아서의 사회 - 문학적 분석


 



 


1. 서론

    본 논문은 호세아서를 사회-문학적으로 분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다시 말해서, 호세아서를 이해하기 위해, 본문 뒤에 있는 사회적 배경을 조사하고, 본문 안에 있는 문학적 특징을 분석하는 것으로 진행하겠다. 그리고 결국에는 본문 앞에 있는 해석자/실천가들에게 현재의 실존적인 문제들에 대한 “신적 해결책”으로서의 호세아서의 메시지를 제시할 것이다.[1] 그러나 사실 이 작업은 분에 넘치는 분량[2]과 심오한 실력[3]을 요구한다. 따라서 연구자는 학계의 공통된 견해로 정리될 수 있는 것은 비교적 간단하게 기술하고, 대신 (이 후에 자세하게 제시될) 특별한 접근 방법을 가지고 중심적인 연구를 진행할 것이다. 즉, 연구자가 선택한 방법론적 모델은 이형원 교수의 “나훔서의 비유적 언어의 기능”이라는 작품으로,[4] 호세아서에 들어있는 비유적 언어의 가치를 재조명하는 것을 중심 과제로 삼으려 한다. 다시 말해서, 호세아서에 나타나 있는 문학적 표현들이 단순히 겉모양으로만 치부되는 것이 아니라, 핵심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효과적인 ‘옷’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는 점을 밝혀내려는 것이다. 더 나아가 그 옷 자체가 호세아서의 ‘날개’가 될 수도 있음을 제시하려는데 있다.

    사실 호세아서는 일종의 오해로 시작해서 오해로 끝을 맺는 이상한 책이기도 하다.[5] 왜냐하면 동시대의 아모스 예언자보다 약간 늦게 활동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예언서에서는 가장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오해의 시작을 본다. 즉, 호 1:2의 “여호와께서 처음 호세아에게 말씀하실 때에(테틸라트 디베르-야웨 베호세아, [;veAhB. hw"hy>-rB,DI tL;xiT.)”를 보고, 랍비들이 소예언서의 첫 자리를 넘겨주었다고 한다.[6] 또한 북이스라엘 왕국에 활동했던 예언자의 선포 안에 시대착오적인 내용들이 삽입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부분이 있다. 즉, 호세아의 아내가 세 자녀를 낳고 이름을 짓는 본문에(1:2-9) 유다에 대한 구원이라는 내용이 갑자기 등장한 것이나(7절),[7] 다시 결혼한 사건을 보여주는 호 3장에서 “그들의 왕 다윗”이 갑자기 등장한 것을 예로 들 수 있다(5절).[8] 가장 주목할 부분은 아무래도 호세아서의 제일 마지막 절이라고 하겠다. 즉, 호 14:9는 독립적 단락으로, 시편 1편과 유사한 지혜전승을 보이는데 유의해야 한다.[9] 이를 두고 역사비평적 입장에 서있는 학자들은 최종 편집인으로서의 서기관의 역할을 주목하고 있는 바이다.[10] 이상과 같은 측면에서 볼 때, 호세아서는 오해로 끝을 맺는 책임에 분명하다고 하겠다.

    어찌되었건, 북이스라엘 왕국에 대한 신탁 선언에서 유다가 들어가는 것이나, 특별하게 다른 신학적 성향의 본문이 자리하고 있는 상황에서, 소위 ‘편집’에 대한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본 연구에서 호세아서의 편집가설을 제시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11] 단지, 기원전 8세기의 북이스라엘 왕국이라는 시공간상의 한계가 편집을 통해서 극복되었다는 것이 본문 자체 안에 나타나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으며, 그러므로, 더 나아가 다양한 삶의 현장에서 읽혀지고 전수되어져왔다는 측면에서 ‘편집’의 기능은 높이 살만하다고 하겠다.[12] 아무튼 최종본문으로서의 호세아서를 기원전 8세기의 북이스라엘 왕국이라는 제한된 자리에서만 읽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그렇다고 지나친 역사비평적 자세로 본문을 각 시대별로 재단하는 것 역시 근거가 불충분한 사상누각에 다르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어떠한 방법론이든지 본문을 더 잘 이해하려는 노력이 반영되어야 한다는 것이며, 이를 통해서 그동안 이해되었던 본문에 더 많은 빛을 비출 수 있는 것이라야 하겠다. 그렇기에 연구자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사회-문화적인 접근을 시도하겠지만, 비유적 언어 발견과 그 것의 신학적 메시지에 대한 기여에 더욱 집중할 것이다.

    한편, “불행하게도” 호세아서의 히브리어 본문 상태가 최고로 안 좋다는 평가를 받는다.[13] 그러나 연구자는 필요 이상의 본문비평작업을 시도하지는 않겠다. 물론 MT가 완벽한 본문이 될 수는 없다.[14] 오히려 본문비평장치(textual critical apparatus)를 통해서 얻어낸 ‘다른 읽기(異讀)’가 더욱 훌륭한 문학적 기능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앞서 언급한 호 3:5의 갑작스런 “그 왕 다윗”에 대해서, BHS는 물론 많은 주석가들은 후대의 첨가로 보고 있다.[15] 왜냐하면, 기원전 8세기의 호세아에게 다윗 왕가의 메시야 사상을 찾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인 것 같으며(호세아서에서 다윗은 여기에만 등장한다), 무엇보다도 5절 자체에서 ‘그 왕 다윗’이 없는 것이 운율에 있어서도 훨씬 자연스럽기 때문이다.[16] 아무튼 서기관에 의해 기록되어 전수된 본문이라는 태생적 약점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17] 최종본문의 권위를 인정하는 태도는 필요하다고 보겠다. 연구자 역시 이러한 관점에서 호세아서를 분석하고 그 안에 담아 있는 풍성한 메시지를 꺼내보도록 하겠다.

    이를 위해 연구자는 다음과 같이 연구를 진행하려고 한다. 본론에서는 1) 전반적인 사회적 밑그림을 그린다. 즉, 기원전 8세기 중반이라는 시간적 배경과 신-아시리아 제국의 발흥과 북이스라엘 왕국의 혼란이라는 대내외적 차원의 정치적 배경, 그리고 (본문에서 엿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왕국내의 혼합적인 종교적 배경을 다루게 될 것이다. 이어서 2) 호세아서의 비유적 언어를 찾는다. 즉, 호세아서를 전체적으로 훑어보면서 (1)사상적 비유법(figures of thought)과 (2)수사학적 비유법(rhetorical figures)을 조사하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3) 호세아서의 핵심본문인 호 6:1-6; 11:8-9을 중심으로,[18] 비유적 언어가 신학적 메시지와 어떠한 관련성을 맺을 수 있는가를 탐구하도록 하겠다.



2. 본론

 1) 호세아서의 사회적 상황

    시간적인 상황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호세아는 호 1:1에서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이, 남왕국의 웃시야 왕으로부터 요담과 아하스를 지나 히스기야 왕에 이르는 시간 동안 야웨의 말씀을 받고 예언자로서 활동했다. 이는 기원전 783년부터 기원전 687년에 이르는 시기로, 한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기간임에 분명하다. 무엇보다도 호세아서에는 북이스라엘 왕국의 멸망(기원전 722년)에 대한 명확한 언급이 없다.[19] 그러므로 우리는 눈을 돌려 “여로보암”의 기간이라고 제한되어 있는 언급(1:1b)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이 시기는 기원전 786-746년으로, 여로보암 2세가 북이스라엘의 왕위를 굳건히 지키고 있던 때이다. 한편, ‘문자 그대로’ 호세아가 여로보암 시기에만 예언활동을 했다는 기록에 대해서, 남유다로 추방을 당했기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지만,[20] 이는 검증할 수 없는 주장이다. 오히려 호 5:13은 므나헴(왕하 15:19-20)이나 호세아(왕하 17:3)를 연상시킬 정도로,[21] 여로보암 이후의 시기를 충분히 살펴볼 수 있다. 그러므로 여로보암으로 국한 시킨 것은 기록자의 수사적 의도라고 하겠다. 즉, 북이스라엘 사람으로 고국을 향해서 심판의 예언 활동을 한 유일한 예언자였다는 점에서,[22] 그리고 그 대상이 가장 강력한 군주였다는 점에서, 호세아의 예언자적 활동은 후대에 그리고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큰 귀감이 되었던 것이다(롬 9:25). 결국, 우리는 호세아가 여로보암 시기부터 북이스라엘의 마지막 왕인 호세아까지 활동했던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이는 남유다의 왕들에 대한 기록과 심하게 충돌되지 않는 부분이라고 하겠다. 다시 말해서 기원전 8세기 중후반이 호세아서의 시대적 배경이다.

    이제 정치-경제적 상황을 알아보도록 하자. 기원전 8세기는 팔레스타인에 대한 강대국 아시리아의 손길이 잠시 거두어진 기간으로, 북이스라엘은 예후가 세운 왕조의 국권회복에 매진할 수 있었다.[23] 그 방향은 정치와 경제의 영역에서 이루어졌다. 먼저 경제를 보자. 아시리아의 대규모 경제체제의 일부에 속해서 경제 협력을 이룰 수 있었던 북이스라엘은,[24] 무리한 조공과 낭비적인 전쟁이 없었기 때문에 급격한 경제성장을 이루게 된다. 그러나 경제적 성장은 기형적인 사회조직을 만들고 말았다. 이를 보다 자세히 서술해 보자. 외형적으로는 황금기를 보내는 것 같았지만, 전통적인 경제구조에서 벗어난 사회적 변화로 말미암아 순기능보다는 역기능이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즉, 초기 이스라엘이 출현하면서 그 근간을 이루었던 ‘평등적 위기분산 방식’[25]의 사회구조 패턴이 왕조시대에 이르러 급격하게 ‘계획적 집약농업역학’ 사회구조로 바뀌어져 갔고,[26] 급기야 기원전 8세기에 이르러 북이스라엘은 겉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악화되고 말았다.[27] 손에 “거짓 저울”을 들고도, “나의 수고한 중에서 죄라 할 만한 불의”가 없다고 말하는 호 12:7-8의 구절은 북이스라엘의 단면을 잘 보여준다 하겠다. 한편, 이러한 상황에 대해서 프램낫(D. N. Premnath)은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1. 기원전 8세기는 왕국 시대를 통틀어서 정치-경제적으로 가장 강성했던 기간이다.

2. 경제적 발전의 최대 수혜자는 엘리트 지배자 계층으로, 이들은 바로 국가 관료였기 때문에 상당수의 경제적 잉여분을 독차지할 수 있었다.

3. 이러한 엄청난 잉여분을 소유할 수 있었기에, 지배층은 여가활동과 사치스러운 생활을 영유하고, 더 나아가 정치적 지배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4. 이러한 상황은 인구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들의 삶을 더욱 곤궁하게 만들었고, 결국 삶의 기반인 토지까지 몰수당하는 대토지화(latifundialization) 현상으로 변질되기에 이르렀다.[28]


생존에 필수적인 영양분을 얻지 못한 나무가 썩어 고목이 되듯이, 삶의 기반을 상실하게 된 북이스라엘은 ‘풍요로운 땅’이라는 옛 영광을 뒤로한 채(창 41:52), 아무도 살아갈 수 없는  ‘사지(死地)’가 되었다(호 2:3). 부익부빈익빈이라는 역삼각형의 사회는 결국 넘어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점은 실제로 정치적인 면에서 찾아볼 수 있겠다. 사회적 근간이 흔들렸기 때문에, 북이스라엘은 국가의 힘을 응집시킬 수 없었다. 엘리트 집단들은 힘이 필요할 때마다 근본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특유의 기회주의적인 기질을 살려서 아시리아와 이집트에 도움을 구하는 임시방편을 선호했다(5:13; 7:11). 이러한 대외적인 정치관계는 결국 국가 신 야웨 하나님에 대한 변절로 진행될 수밖에 없었고, 껍데기만 이스라엘일 뿐 알맹이는 이방인의 차지였다(7:9). 그러므로 부실 건축된 빌딩이 무너져 내리듯이, 북이스라엘 사회는 여로보암 사후 13년 동안 다섯 명의 왕이 교체되면서 (그 중에 세 명은 쿠데타롤 통해 집권했다) 결국 아시리아의 살만에셀에게 멸망당하고 만다(기원전 722년). 이러한 내용은 호 8:4의 냉소적인 언급으로 잘 요약되어 있다. 한편, 이와 관련하여 호 6:8은 베가의 잔혹한 왕권 찬탈을 보여주는데(왕하 15:25), 목적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수단도 가리지 않는다는 의식을 찾아볼 수 있는 대목이라 하겠다(호 6:4). 이러한 대내외적 정치 상황에 대해서, 호세아는 단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의 뿌리가 되는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4:6). 호세아가 옳았다. 야웨를 배신한 것이 문제였던 것이다.

    그럼, 마지막으로 종교적 상황을 호세아서 본문을 중심으로 알아보도록 하자.[29] 무엇보다도 호세아서는 ‘우상(בצע)’과 함께 ‘바알(לעבּ)’이 여러 번 등장한다.[30] 그리고 ‘음란(ןונז)’과 ‘음행(ףופאנ)’ 역시 상당히 많이 등장한다.[31] 그런데 호 4:11-14은 음란이라는 것이 다름 아닌 종교적 행태를 지적하는 용어임을 보여준다.[32] 특별히 13절의 “산 꼭대기와 작은 산 위”라는 표현은 ‘산당(תמב)’과 같은 뜻으로, 호세아적 예언전승을 따르는 자료들에서(예레미야서, 신명기적 역사) 볼 수 있는 것처럼, 가나안의 토종 종교 양식을 보여준다고 하겠다.[33] 사실 최근에 철기시대 팔레스타인의 종교적 유물들이 계속적으로 발굴되고 있는데, 이는 그동안 성서 내러티브가 제공하는 제한된 정보에 머물러 있던 학계에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오고 있다.[34] 중요한 점은 고대인들에게 우상은 상당히 자연스러운 것이었다는 점인데, 심지어 ‘바알’이라는 신명이 이름에 포함될 정도로 필수적인 것으로까지 여겨질 정도였다.[35] 이에 대하여,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종교가 가지는 기복적 성격을 고려한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고대인들에게 분명한 종교적 이념이라는 것이 있어서, 그 이념을 위한답시고 자신의 특별한 종교만을 강력하게 고집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자신들의 의식주를 해결하는데 가장 쉬우면서도 갖출 것은 갖춘 그러한 형태로의 종교를 전통적으로 고수했을 것이다. 종교에 대한 실용주의적인 자세에 대하여, 호 2:5은 잘 보여주고 있다:


그들의 어머니는 음행하였고 그들을 임신했던 자는 부끄러운 일을 행하였나니, 이는 그가 이르기를 “나는 나를 사랑하는 자들을 따르리니, 그들이 내 떡과 내 물과 내 양털과 내 삼과 내 기름과 내 술들을 내게 준다” 하였음이라.


    정리하면, 호세아의 예언 이해를 위한 사회적 배경의 핵심에는 사회적 불평등과 종교적 혼합성이 있다고 하겠다. 엘리트들이 자신들만의 부와 권력을 채우기 위해서 채울 수 없는 배를 채우려고 했다면(4:10),[36] 핍절한 백성들은 어떻게도 채울 수 없는 배를 움켜쥐고 말라가야만 했다(9:16). 결국, 북이스라엘 모두에게 있어서 그들의 신은 바로 배였다(빌 3:19). 예언자는 엘리트들을 중심으로 심판하고 있지만, 어느 누구도 심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왜냐하면 부와 가난이 기준이 아니라, 야웨와의 관계가 기준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실, 이 모든 것이 호세아의 눈에는 종교적 타락으로 정리될 수 있었다. 야웨를 버린 모든 삶의 양태들이 바로 사회적 타락이기 때문이다.


 2) 호세아서의 비유적 언어

    지금까지 우리는 호세아서의 사회적 배경을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이제는 호세아서 본문 자체의 목소리를 들을 차례이다. 비교적 짧지 않은 예언문학이므로, 우선 호세아서의 구조를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겠다. 호세아서의 구조를 분석할 때, 일반적으로 주제적인 접근의 측면에서는 호세아의 결혼과 관련된 1-3장과 심판과 회복의 신탁을 말하는 4-14장(혹은 12-14장을 추가적인 신탁으로 나누기도 한다)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37] 그러나 문학적인 측면에서는 1-14장은 하나의 통일된 이야기로 볼 수 있다.[38] 즉, 호세아라는 설교자가 1-3장을 도입부의 ‘드라마’를 보여주면서 문제제기를 했다면(드라마는 음란한 여인의 행동에 어떠한 결정도 하지 않고 열어놓은 채 끝을 맺는다), 4-14장은 청중들을 상대로 드라마를 풀어주면서 그들의 문제점을 지적하고(드라마가 바로 당신들의 이야기이다!), 최종적으로 이루어질 야웨의 역사를 약속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당신은 어떠한 여인이 될 것인가?). 그러므로 호세아서를 비유적 언어에 탁월한 설교자가 청중을 상대로 선포하고 있는 생생한 문학적 작품으로 보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하겠다.[39]

    이제 본격적으로 호세아서의 비유적 언어를 살펴보기에 앞서, 비유적 언어에 대해서 개념을 정립해 보자. 인간의 두뇌가 우뇌와 좌뇌로 구성되었고, 각각의 독특한 기능이 함께 하면서 전인격적인 활동을 가능케 한다는 것은 비교적 최근에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과학적인 발견이 없다 하더라도, 인류는 오래전부터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바로 인간의 언어가 좋은 증거가 된다. 동서고금에 걸쳐 어느 문학 자료이건, 모든 글에는 문자적 언어와 비유적 언어가 골고루 포함되어 있다.[40] 성서 역시 그러하다. 성서의 모든 구절들을 문자적 언어로만 본다면 율법주의가 될 것이고, 반대로 비유적 언어로만 본다면 신비주의가 될 것이다. 문학으로 다가온 성서를 균형 있게 읽을 수 있는 자세가 요구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런데 그동안 성서 이해에 있어서 비유적 언어로 접근한다는 것에 대해서, 상당히 꺼려왔던 점은 부인할 수 없겠다. 특별히 구약의 예언서와 신약의 묵시록과 같은 독특한 문학 장르에 대해서, 문자적 언어로 접근하는 것은 젓가락으로 전복죽을 먹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상대적으로 주목을 받지 못했던 예언서와, 이 예언서 이해에 큰 도움이 되는 비유적 언어를 발견하는 일은 상당한 의미를 자체적으로 가지고 있다고 하겠다.[41] 한편, 호세아서의 비유적 표현이 다른 예언서들과 비교해볼 때 탁월할 정도로 풍부한 직유(simile)와 은유(metaphor)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42] 호세아서의 비유적 언어 연구는 충분히 그 가치가 있다.


  (1) 사상적 비유법(figures of thought)

    사상적 비유법을 통해서 해석자는 의미의 ‘변형’(transfiguration)을 얻을 수 있다.[43] 다시 말해서, 문자가 전달하는 사전적 의미를 뛰어넘어 더욱 풍성한 의미를 제공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적 비유법으로는 직유법(simile), 은유법(metaphor), 환유법(metonymy), 대유법(synecdoche), 반어법(irony), 과장법(hypebole), 그리고 이미지(imagery) 등이 있다. 다음은 호세아서에서 발견되는 사상적 비유법을 대표적인 구절을 예로 들면서 제시하겠다.


   ① 직유법(simile): 직유법은 하나의 사물, 성격, 개념을 소개하기 위하여 그것을 다른 사물, 성격, 개념과 직접적으로 비교하는 방법으로, ‘~처럼,’ ‘~같이,’ ‘마치’ 등의 낱말과 함께 사용된다.[44] 호세아서에 나타난 직유법은 약 70회 이상이나 될 정도로 다른 어떤 사상적 비유법들보다 탁월한 기능을 담당한다.[45] 대표적인 직유법의 예들은 아래와 같다:

        

    이외에도 1:10; 2:3,15; 4:4,16; 5:10; 6:4,5,7,9; 7:4,6,7,11,12,16; 8:1,8,9; 9:1,4,8,9,10,11,13; 10:4,7,11,12,14; 11:4,8,10,11; 12:9,11; 13:3,7,8; 14:5,6,8의 본문에서 직유법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직유의 대상은 몇 가지 이미지로 묶어볼 수 있는데, 이는 아래의 표1에서 알 수 있다.


표 3. 직유의 대상이 되는 이미지들

이미지

해당본문

횟수

심판

구원

Ⓐ 자연 (토양)

2:3; 5:12; 10:4

1:10

3 / 1

Ⓑ 자연 (기후)

13:3

6:3; 6:4; 10:12; 14:5

1 / 4

Ⓒ 자연 (동물)

4:16; 5:14; 7:11; 7:12; 8:1; 8:9;

9:11; 10:11; 13:7; 13:8

11:10; 11:11

10 / 2

Ⓓ 자연 (식물)

10:1

14:5; 14:6; 14:7; 14:8

1 / 4

Ⓔ 사람 (행동)

4:4; 5:10; 6:7; 6:9; 9:1; 9:10

 

6 / 0

Ⓖ 사람 (사건)

8:12; 9:9; 9:13; 10:14

2:15; 11:8; 12:9

3 / 3

Ⓗ 사물 (움직임)

7:16; 9:8; 10:7; 11:4

 

4 / 0

Ⓕ 사물 (고정됨)

7:4; 7:6; 7:7; 8:8; 9:4; 12:11

 

6 / 0

 

표1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호세아서의 직유의 대상은 상당히 다양하다. 무엇보다도 동물의 이미지가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동물의 이미지는 북이스라엘을 가리킬 때는 약하고 고집이 센 동물을 보여주고(4:16; 7:11; 8:9; 9:11; 10:11; 11:11), 야웨의 심판을 가리킬 때는 짐승의 왕인 사자를 보여준다(5:14; 11:10; 13:7; 13:8). 이는 고대 비문에서 볼 수 있듯이, 강대국으로 형상화된 맹수가 힘없는 동물들을 잡아먹는 것과 같은 맥락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즉, 독수리나 사자로 나타나는 아시리아의 무력 앞에 북이스라엘이 당할 파멸을 예견하는 대목인 것이다.[46]

    또 주목할 것으로는 자연에 대해서 황폐한 토양이 심판을 가리킨다면, 촉촉한 기후는 구원을 가리키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땅과 하늘의 대립적인 이미지를 나타낸다고 하겠다. 이것은 일종의 아이러니를 만들어내는데, 땅의 정적인 이미지가 부정적으로 그려지고, 하늘의 역동적인 이미지가 긍정적으로 그려지기 때문이다.[47] 다시 말해서, 북이스라엘이 자리를 잡고 있는 땅이 본래 변함없는 성질을 지키지 못하고 썩어가고 있는 것에 반하여, 야웨 하나님이 자리를 잡고 있는 하늘은 본래 변화무쌍한 성질을 극복하고 언제나 그대로 변함이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한편, 사람과 사물에 있어서, 대체적으로 심판조로 편중된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사람과 관련된 모든 분야에서 선한 것이 없는 사회적 현실을 대변하는 장면이라고 하겠다. 즉, 이 상황은 전도된(upside down) 사회를 종합적 이미지로 보여준다고 하겠다. 예를 들면, 호 4:4에서 백성들이 “제사장과 다투는 자처럼(키메리베 코헨, !heko ybeyrIm.Ki)” 되었다고 말하는데,[48] 백성을 상대로 재판을 해야 할 제사장들이(대하 19:8; 참조 신 17:9) 반대로 역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진실과 인애의 공동체가 “저주와 속임과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뿐이니,”[49] 결국 포악하여 “피가 피를 뒤이었다”는 호 4:1-2의 본문은 시각적 이미지를 잘 보여준다. 한편 이와 관련해서, 야웨는 호세아에게 음란한 아내를 취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고 명령하는 부분은(호 1:2) 또 다른 해석의 여지를 남긴다. 즉, 호세아의 결혼은 전도된 사회라는 종합적 이미지의 결정타인 셈이기 때문이다. 이는 반대로 전도된 사회에 직접 참여하는 야웨의 변함없는 사랑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구원을 나타내는 사건의 이미지에 대한 본문(2:15; 12:9)은 출애굽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전도된 사회 속에서, 최종적인 전도는 야웨의 전도이다.


   ② 은유법(metaphor): 은유법은 두 개의 가깝지 않은 사물, 성질, 혹은 개념을 간접적으로 비교하는 방법으로,[50] 언어적으로 명백하게 나타나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은유법을 찾기는 쉽지 않다(7:8b의 하야, hy"h'). 호세아서에 나타난 은유법의 사례는 다음과 같다:

        

     이 외에도 5:1; 6:8; 10:11이 있다. 한편 9:8은, 비록 본문상의 어려움으로 다양한 번역이 제시되고 있지만,[52] 은유법으로 볼 수 있는 본문이다. 한글 개정판만으로는 명확하게 발견할 수 없는 부분이기 때문에 확실하게 분석할 수는 없겠지만, 호세아서의 은유법은 북이스라엘의 순결하지 못한 상태를 보여주는데 사용되고 있는 것 같다. 특별히 위의 본문은 모두가 우상숭배의 맥락에서 사용되고 있는데, (엘리트와 백성들 모두를 포함해서) 자신들의 배를 채우기 위한 모든 노력들이 헛됨을 강력하게 드러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이스라엘은 뒤집지 않는 전병이기에 한쪽이 타버려서 결국 먹을 수 없게 되었고, 포도열매를 무성하게 맺었지만 그것을 가지고 엉뚱한 우상을 섬기는 데만 사용했기 때문에 그들의 배는 채워지지 못했던 것이다. 이렇게 은유법은 북이스라엘의 상태를 잘 보여주고 있다.


   ③환유법(metonymy): 환유법은 하나의 사물이나 추상적 사상을 그것과 관계된 다른 사물이나 구체적 개념으로 대치시킨 방법으로, 전자가 후자에 종속되지 않는 특징이 있다.[53] 호세아서에 찾을 수 있는 환유법의 예로는 다음을 들 수 있다:

        

 여기에서 벧아웬은 ‘재앙의 집,’ ‘사악함의 집’이라는 뜻으로, 북이스라엘 건국부터 세워졌던 벧엘의 송아지를 모욕적으로 부르는 말이다(4:15).[54] 이는 사마리아인들에게 가장 중요하게 여겨졌던 대상(벧엘의 송아지)을 다른 개념(벧아웬의 송아지)으로 대치함으로써, 야웨의 심판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④대유법(synecdoche): 대유법은 어떤 사물의 일부분으로 전체를 묘사하거나 또는 전체로 일부분을 묘사하는 방법으로,[55] 호세아서에 나타난 대유법의 예로는 다음의 것들이 있다:

        

 호 2:15에서, 아골(아코르, rAk[') 골짜기가 아간(아칸, !k'[')의 불순종으로 인한 형벌의 장소로 ‘괴로움(아카르, rk;[')’의 언어유희가 들어있다면(수 7:25-26),[56] 소망의 문(페타트 티크바, hw"q.Ti xt;p,)은 (오늘날 예루살렘을 일컫는 말이라고 하는데[57]) 새로운 이스라엘을 뜻하는 상징어로 볼 수 있겠다. 한편, 호 6:6에서 보듯이, 인애와 하나님을 아는 것은 복잡한 제사나 돈 나가는 번제보다 ‘상대적으로’ 간단한 개념으로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인애와 하나님을 아는 것은 설명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신적 차원의 언어임에 분명하다(2:19).


   ⑤의인법(personification): 의인법은 인간이 아닌 사물이나 딴 생물들에게 인간적인 성품을 부여하여 표현하는 방법으로,[58] 호세아서에 나타난 의인법의 예로는 다음의 것들이 있다:

        

     이 외에도 4:11, 12, 19; 5:5; 7:10을 들 수 있겠다. 의인법의 기능은 우상숭배의 맥락에서(4:11,12,19) 두드러지는데, 생명이 없는 것들에게서 만족을 얻으려는 북이스라엘의 어리석음을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한편 13:14은 고전 15:55에서 바울 사도가 인용했다.


   ⑥과장법(hypebole): 과장법은 하나의 사상이나 사건을 강조할 목적으로 지나치게 표현하는 방법으로,[60] 호세아서에 나타난 과장법의 예로는 다음의 것들이 있다:


     여기에서 보는 바와 같이 과장법은 북이스라엘과 야웨를 대조시키고 있다. 율법이 없이는 하루도 살아갈 수 없는 재판장들과 왕들이었지만(신 17:18-19), 실상 그 어떠한 율법도 그들의 삶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4:6의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라는 구절도 과장법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4:2에는 10계명이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61] 예언자가 추궁하는 것은 머리의 지식이 아니었다. 바로 그들의 삶이었다(4:1).


   ⑦이미지(imagery): 이미지는 독자들의 두뇌에 본문의 세계를 구성하고, 이로 인해서 독자들이 전인적인 감흥을 느끼게 해주는 기법으로,[62] 독자의 오감을 자극하는 표현이라고 하겠다. 호세아서에서 나타난 이미지들에는 다음의 것들이 있다:

        

   (시각) 1:4;    조금 후에 내가 이스르엘의 피를 예후의 집에 갚으며

        6:8;    길르앗은 행악자의 고을이라 피 발자취가 편만하도다

        7:9;    저는 ... 백발이 얼룩얼룩할지라도 깨닫지 못하는도다

   (청각) 4:1;    들으라

        5:8;    기브아에서 나팔을 불며, 라마에서 호각을 불며

        8:1;    나팔을 네 입에 댈지어다

        11:10;  저희가 사자처럼 소리를 발하시는 여호와를 좇을 것이라

   (미각) 7:5;    우리 왕의 날에 방백들이 술의 뜨거움을 인하여 병이 나며

   (후각) 14:6;   그 향기는 레바논 백향목 같으리니

        14:7;    그 향기는 레바논의 포도주같이 되리라

   (촉각) 9:6;    저희의 은보물은 찔레가 덮을 것이요 저희의 장막 안에는 가시 덩굴이 퍼지리라

        13:15;  광야에서 일어나는 여호와의 바람이라

   (운동) 7:12;   저희가 갈 때에 내가 나의 그물을 그 위에 쳐서 공중의 새처럼 떨어뜨리고

        11:4;   내가 ... 저희를 이끌었고, 저희에게 대하여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같이 ...

        13:8;   내가 새끼 잃은 곰같이 저희를 만나 그 염통 꺼풀을 찢고,

                거기서 암사자같이 저희를 삼키리라

        14:1;   돌아오라

 

    한편, 다른 이미지들도 찾아볼 수 있겠다. 즉, 법정적 이미지(4:1-4,15; 5:1,5,7; 8:1,12-13)와 농경사회에서 볼 수 있는 자연세계의 일상적 이미지(해[6:3], 눈[9:8], 겨울비와 봄비[6:3-4], 광야[2:12,14,18; 4:3; 5:14; 7:11-12; 8:9; 11:10,11; 13:7-8], 가축들[2:11; 4:16; 5:6; 10:11], 경작된 들[12:11], 추수[6:11], 타작[2:6,8-9,11; 9:1-2], 농작물[2:9], 포도나무와 나무들[9:16], 거친 식물들[2:6,12; 9:6; 10:4,8])를 찾을 수 있다.[63] 이는 일종의 종합적 차원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법정과 일상이라는 대조적인 삶의 자리가 하나님과의 만남의 장소로 결집되기 때문이다. 한편, 부모(1:1,8,9)와 배우자(2:14-15)의 가족적인 이미지도 놓칠 수 없겠다.[64] 그런데 절대적 약자라고 할 수 있는 여인과 어린이를 향해서 자극적이며 폭력적인 묘사가 나타나고 있는데(2:3-10; 9:14; 13:16), 이는 북이스라엘의 사회상을 그대로 반영할 뿐만 아니라,[65] 야웨 하나님과의 깨어진 가족 관계의 결과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하겠다.


    지금까지 우리는 사상적 비유법의 예들을 살펴보았다. 완벽한 수준까지 본문을 조사하지는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정리할 수 있는 부분들이 있다. 첫째, 호세아서는 풍부하게 많은 사상적 비유법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호세아서의 신학적 사상을 전달하기 위해서, 어려운 문자적 진술을 뒤로하고 쉽게 이해될 수 있는 표현을 선택하고 있다는 말이다. 특별히 직유법이 압도적으로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는 아마도 인간의 의사소통구조에서 ‘~처럼(, K.)’이라는 표현이 가장 보편적인 것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직유법의 대상이 되는 단어들도 북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일상적인 것들이었기 때문에, 청자들이 이해하는 데는 어떤 어려움도 없었을 것이다.

    둘째, 호세아서에서 사용된 사상적 비유법들은 상당 부분이 북이스라엘의 범죄와 그에 따른 야웨의 심판을 묘사하는데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별히 북이스라엘의 범죄에 대해서 성적인 이미지를 사용하면서 우상숭배라는 종교적 죄악상을 고발하고(4:14), 은유법과 같은 비유법을 사용하면서 외교적 실용주의(현실정치Realpolitik)를 지적하기도 한다(7:8).[66] 이러한 범죄에 대한 야웨의 심판은 다양하게 표현되는데, 법정이라는 직접적인 이미지를 보이기도 하며(2:2) 무자비한 맹수나 잔혹한 전쟁이라는 간접적인 이미지도 보여준다(5:14; 13:8; 1:4; 13:16). 그러나 야웨의 구원 신탁에 있어서도 탁월한 사상적 비유법을 보여준다. 즉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죄악에도 불구하고 야웨는 그들까지도 품을 수 있었는데, 이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호세아는 과장법을 사용하고 있다(1:10; 11:8). 그리고 더욱 놀라운 점은, 북이스라엘이 실용적인 차원에서 야웨를 버리고 바알을 섬김으로, 그들 스스로가 “쉬 없어지는 아침 구름과 이슬”같아서(6:4) 결국 “광야와 마른 땅”이 되었다면(2:3), 반대로 야웨는 손익을 초월한 신실함으로 그 백성을 사랑했는데 바로 “새벽 비와 늦은 비”처럼 한결같아서(6:3) 결국 광야와 마른 땅을 “백합화와 백향목”이 자라는 숲으로 만들 것이라는(14:5) 구원의 메시지를 직유법을 통해서 감동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사상적 비유법은 심판과 구원이라는 개념을 보다 효과적이고 전달하고 있다.


  (2) 수사학적 비유법(rhetorical figures)

    이제 연구의 방향을 수사학적 비유법으로 돌려보자. 수사학적 비유법이란 언어의 음악적 효과를 증진시킴으로써 독자가 정서적으로 감흥을 느끼도록 하는 기법을 말한다.[67] 달리 말하자면, 보편적 언어의 이성적인 이해의 차원과는 달리 각 언어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표현 기술을 발견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따라서 이 연구를 위해서는 히브리어에 대한 상당한 지식이 요구되는 바이다. 이러한 수사학적 비유법들은 단어나 구의 변화의 형태로 나눠볼 수 있는데, 배열과 반복 생략과 삽입 그리고 대용 등의 형태를 띤다.[68] 다음은 호세아서에서 발견되는 수사학적 비유법들을 대표적인 구절을 예로 들면서 제시하겠다.


   ①단어나 구의 ‘배열’과 관련된 수사적 비유법으로, 여기에는 알파벳 순서로 표현하는 답관체(acrostic), 같은 자음을 반복하는 두운법(alliteration), 같은 모음을 반복하는 유음법(assonance), 단어 순서를 바꾼 도치법(anastrophe), 대구를 이루며 바뀌는 교차대귀법(chiasmus), 균형 있게 배열하는 평행법(parallelism)이 있다.[69]


 

 


   ②단어나 구의 ‘반복’과 관련된 수사적 비유법으로, 여기에는 구절 반복법인 아나포라(anaphora), 문두어 문미 반복법인 에파나?시스(epanalepsis), 구절 연속 반복법인 에피죽시스(epizeuxis), 동일 어순 반복법인 아이소콜론(isocolon), 동일 단어 반복법인 폴립토톤(polyptoton)이 있다.[70]


 

 

    ③단어나 구의 ‘생략’과 관련된 수사적 비유법으로, 여기에는 접속사의 생략인 아신드톤(asyndeton), 기본 동사를 제외한 다른 동사의 생략인 주그마(zeugma), 동사들의 완전 생략인 세시스 오나마톤(scesis onamaton), 논리적으로 암시되는 절/문장을 생략하는 엔티밈(enthymeme), 모든 것의 생략인 프레시시오(precisio)가 있다.[71]


   ④단어나 구의 ‘삽입’과 관련된 수사적 비유법으로, 여기에는 접속사를 삽입하는 폴리신드톤(polysyndeton), 동의어를 대치하여 삽입하는 아큐무라티오(accumulatio), 접속사를 특별하게 삽입하는 헨디아디스(hendiadys), 구절을 문두에 삽입하는 아스트리스모스(astrismos)가 있다.[72]

 

 


 

   ⑤단어나 구의 ‘대용’과 관련된 수사적 비유법으로, 여기에는 유사한 접미어를 사용하는 호모에오텔류톤(homoeoteleuton)이 있다.


   ⑥그밖에 의성법(onomatopoeia)과 수사적 의문법과 같은 기법이 있다.


   (수사적 의문법)

        13:14;  사망아 네 재앙이 어디 있느냐? 스올아 네 멸망이 어디 있느냐?


    지금까지 우리는 수사학적 비유법의 예들을 살펴보았다. 히브리어 본문을 완벽하게 소화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더욱 멋진 표현들을 찾아낼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세아서에 들어있는 표현기법의 문학적 수준은 놀라운 만한 것이라고 하겠다. 추측컨대 호세아서는 풍부한 수사적 비유법으로 가득하기 때문에, 그 안에서 운율과 템포, 그리고 강약 등이 조절되면서 예언자가 선포하려는 심판과 구원의 메시지 전달에 매우 효과적인 기능을 담당했을 것이다.

    한편 호세아서에서만 유독 ‘에브라임’이 등장하고, 그 수도 무려 35번이나 된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그런데 이것 역시 아주 치밀한 의도 안에서 기능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즉 호 1-3장에는 ‘이스라엘’의 언어유희가 있고, 호 4-14장에서는 ‘에브라임’의 언어유희가 있다는 것이다.[73] 익숙한 단어들이 약간의 변형을 거쳐서 완전히 새롭고 충격적인 의미로 다가올 수 있다는 점은, 호세아의 탁월한 예언사역이라고 밖에 달리 할 수 없겠다. 이렇게 볼 때, 호 1장에서 선언되는 세 이름들이 청중들에게 던져졌을 충격은 가히 말할 수 없을 것이며, 이러한 측면에서 설교자도 효과적인 측면에서 자신의 메시지를 철저하게 다듬을 필요가 있다고 본다.


 3) 호세아서의 핵심본문으로 살펴본 신학적 메시지와 비유적 언어의 상호작용

    앞에서 연구자는 대다수의 구약학자들이 호세아서의 핵심 메시지를 호 6:1-6; 11:8-9에서 찾았다고 언급했었다. 그러한 주장이 맞고 틀리는가를 결정하는 것은 논외로 치고, 이제 연구자는 그러한 핵심본문의 신학적 메시지가 지금까지 다루었던 호세아서만의 독특한 비유적 언어와 어떠한 상호작용을 할 수 있는지를 탐구해보기로 하겠다. 다시 말해서 호세아서의 메시지가 단순히 문자적 이해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감동적이고 더 나아가 영감 있는 말씀으로 기능할 수 있도록 작용하는, 비유적 언어의 기능을 지적하려는 시도이다. 우선 호세아서의 핵심본문은 다음과 같다(BHS를 따른다):

 

 


    호 6:1-6는 예언자의 권고로 시작해서(1-2절), 야웨 하나님과 백성들의 본질적인 차이들을 나열한 후(3-4절), 야웨의 심판과(5절) 궁극적인 삶의 목표를 제시한다(6절). 비교적 짧은 이 말씀은 호세아서를 전체로 요약하는 구절로 삼기에 부족함이 없겠다. 1-2절에서 예언자는 북이스라엘의 현재 상태를 죽기 일보 직전의 위기로 그리고 있다. 아니, 문자 그대로 죽음의 상태에 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 이유는 정치 경제적인 분야나 대내외적 분야에서 있지 않았다. 북이스라엘의 죽음의 이유는 바로 야웨에게 있는 것이다. 그가 찢었고 그가 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결국 모든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예언자가 할 수 있는 것은 청중으로 하여금 야웨에게 집중하는 것이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빛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그림자는 더욱 또렷해지듯이, 야웨에게 가까이 가면 갈수록 백성들의 잘못은 쉽게 나타난다(3-4절). 그것은 바로 신실함이다. 변함없는 사랑이다. 야웨는 일정한 사랑을 보여주었지만, 백성들은 쉬 없어지는 사랑을 보일 뿐이다. 그러므로 예언자는 백성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야웨를 아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것도 힘써서 아는 것이다. 야웨를 안다는 것은 결국 백성들의 삶을 돌이키는 전향적인 자세를 요구하는데 까지 이른다(5-6절). 백성들의 삶은 더 이상 종교적 형식을 통해서 안전을 보장받는 것이 아니다. 이젠 종교의 대상 그 자체를 인격적으로 닮아감에 있는 것이다. 총체적인 변절의 사회적 분위기 안에서, 야웨를 인격적으로 닮아가게 된다면, 그들은 변치 않는 사랑을 실현해나갈 것이다.

    이상과 같이 호 6:1-6은 호세아의 심판과 구원의 메시지를 충분히 담아내고 있다. 그런데 이 메시지 안에는 더욱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예언자의 비유적 언어가 들어있다. 백성의 현재 상태를 효과적으로 나타내기 위해서 평행법을 사용하고 있다(1b절, “우리를 찢으셨으나 ... 우리를 치셨으나 ...”). 그리고 야웨와 백성들을 대조시키면서, 청중들에게 보다 익숙한 개념인 비와 이슬을 사용하면서 직유법의 효과를 보여준다(3-4절, “[여호와는] 새벽 빛 같이, 비와 같이, 늦은 비와 같이 [변함이 없는데] ... [너희는] 아침 구름 같이 이슬 같도다”). 또한 4절에서 아나포라(anaphora)와 수사적 의문법을 사용함으로써(“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야웨와 백성의 대조가 극에 이르고(아나포라), 야웨가 어떻게 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결단해야 됨을 강조하고 있다(수사적 의문법). 마지막으로 예언자는 부분으로 전체를 묘사하는 대유법을 통해서 야웨와의 인격적인 관계가 불가능한 것이 아님을 도전한다(6절, “나는 인애를 원하고 ...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한다”). 여기에는 유음법칙도 함께 하면서 예언자 자신의 설교자로서의 권위도 내세우고 있다(5a절, “비네비임 하라그팀, ~yTig>r;h] ~yaiybiN>B”). 이렇게 예언자의 메시지가 가지고 있는 내적 논리는, 풍부한 비유적 언어의 도움으로 보다 적극적인 설교로 청중에게 다가갈 수 있었을 것이다.

    이제 청중은 두 번째 핵심 메시지로 다가간다. 그것은 바로 첫 번째에서 도전으로 다가왔던 “야웨를 아는 것”이다. 과연 야웨는 어떤 분이라는 것인가? 어떠한 논리와 이성으로 설교자는 야웨를 설명할까? 이러한 청중의 기대를 설교자는 무참히 깨뜨린다. 설교자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야웨를 소개하는 것이다. 바로 논리적인 분위기가 사라지고 불타오르는 감정의 폭발로 분위기는 급변한다(11:8-9). 여기에서 설교자는 야웨와 감정의 일치를 경험한다. 두 번째 메시지는 비유적 언어의 파워를 절대적으로 보여준다고 하겠다. 야웨는 자신을 백성들에게 알리는 방법으로 자신의 변함없는 사랑을 제시한다. 그 시작은 수사적 의문문으로, 두음법칙과 유음법칙 그리고 직유법과 아이소콜론을 보여준다(8a절). 이렇게 처음부터 넘치는 비유적 언어의 힘은 야웨의 주체할 수 없고 꺼지지 않는 사랑을 표현하는데 일조하고 있다. 8b절 역시 8a절과 계속적인 유음법칙을 유지하면서(네헤파크 에이카 이카, %ya %yae %P;h.n<), 더 짧고 굵게 사랑을 선언한다. 여기에는 의인법(“마음이 돌이키다”)과 과장법(“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다”)이 사용되고 있는데,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줌에도 불구하고 9절로 이어가면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일종의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9절은 아이소콜론으로 시작하기 때문에 상반절까지 호흡은 길어진다. 그러나 하반절에 오면서 템포는 급변한다. 야웨는 도치법(이는 “나는”이라는 주어의 강조와 함께 도치를 증폭시킨다)과 어미생략(엘로힘 대신 엘)을 통해서 효과적으로 전달하는데, 바로 일종의 대구형식을 취하고 있다(엘 아노키 벨로-이쉬, vyai-al{w> ykinOa' lae). 이제 마지막으로 9c절은 전치사 בּ의 수미쌍관(inclusio)을 이루는데, 이제 야웨는 거룩함으로 백성들 “안에서” 거하시고 더 이상 진노 “안에” 있지 않게 될 것이다. 



3. 결론

    페터젠은 “호세아서의 직유를 읽는 것은 복잡한 상상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했다.[74] 정말로 호세아서를 문자적 메시지로만 읽는 것에서 그 심오한 표현방식의 차원으로까지 들어가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임에 분명한 것 같다. 지금까지 연구자는 호세아서를 중심으로, 그 메시지를 보다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다양한 시도들을 했다. 우선적으로 사회적 배경을 설명했다. 기원전 8세기 중후반의 번영이라는 단순한 개념에서 탈피해서 복잡다단한 현상들 속에서 엘리트와 백성들 모두에게 벌어지는 야웨에 대한 배신행위를 설명했다. 그리고 그러한 현실에 대해서 호세아가 어떻게 효과적으로 야웨의 말씀을 선포했는지를 조사했다. 연구에 따르면, 호세아는 정말로 탁월한 설교자로 비유적 언어에 능통한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이는 한편으로는 성령에 충만하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현상일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본문은 기원전 8세기에 북이스라엘에서 일어나고 있는 총체적인 사회적 배신 현상에 대해서 지적한다. 그 핵심은 백성들이 야웨를 버리는데 있었다. 그들의 사랑이라는 것은 변질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야웨는 변함없는 사랑(6:6)으로 백성들에게 다가선다(11:8-9). 이제 백성들은 눈에 보이는 현실종교에서 벗어나서 실존적인 신앙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므로 야웨는 백성들을 “거친 들(하미드마르, rB'd>Mih;)”로 “유인해서(메파테이하, h'yT,p;m.)” 새로운 신혼을 시작한다(2:14). 광야는 형벌의 장소이지만, 반대로 신혼부부에게는 마을 밖의 대초원지대(steppe)인 것이다.[75] 오늘날 부활하신 예수는 형식적인 그리스도인에게 다가오면서 십자가를 제시한다. 십자가 역시 형벌의 도구이지만, 예수와 함께 신혼부부가 된 성도에게는 십자가가 대초원지대고 영광이며 승리이고 부활이다.






<미주>


1) 이형원, 「구약성서 해석의 원리와 실제: 사회-문학적 연구를 중심으로」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9), 26.

2) 앤더슨과 프리드만이 공저한 호세아서 주석은 600페이지에 이를 정도이다(Francis I. Andersen and David Noel Freedman, Hosea: A New Translation with Introduction and Commentary [AB 24; New York: Doubleday, 1980]).

3) Martin J. Buss, The Prophetic Word of Hosea: A Morphological Study (Berlin: Verlag Alfred Töpelmann, 1969)를 보라. 이 책은 어형론적인 접근으로 호세아서의 문학적 표현들을 아주 꼼꼼하게 분석하고 있다.

4) Hyung Woon, Lee., “The Function of Figurative Language in the Book of Nahum,” Ph.D. dissertation, The South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 1988. 간단하게 정리된 것으로, 이형원, 「구약성서 비평학 입문」 (대전: 침례신학대학출판부, 1991), 296-339를 참조하라.

5) Cyrus H. Gordon and Gray A. Rendsburg, The Bible and the Ancient Near East (4th ed.; New York: W. W. Norton & Company, 1997), 252-3.

6) John J. Collins, Introduction to the Hebrew Bible (Minneapolis: Fortress Press, 2004), 296.

7) 1:2-9에서 여호와로 등장하는 신명은 7절에서는 ‘하나님 여호와’로 등장한다.

8) 여기에서도 신명은 ‘하나님 여호와’로 바뀌고 있음을 알 수 있다.

9) David L. Petersen, The Prophetic Literature: An Introduction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2), 35. 한편, 소예언서의 첫 번째 책인 호세아서의 마지막 구절이 지혜와 연결되고(호 14:9), 마지막책인 말라기서의 구절이 토라와 연결되고 있는 점에서(말 4:4), 최종 편집인의 TNK 구현정신을 엿볼 수 있게 된다.

10) 콜린스(Collins, Hebrew Bible, 304)는 유다의 서기관의 편집물로, 서기관의 의도는 개인적인 도덕적 삶을 함양하는 것이라고 제시한다. 한편, 토마스 톰슨(Thomas L. Thompson, The Mythic Past: Biblical Archaeology and the Myth of Israel [NewYork: Basic House, 1999], 366)은 “정직하니םירשׁי”가 ‘이스라엘’의 언어유희라고 보면서, 호세아서의 독자가 시편의 신학(시 1:3-6)을 이해하는 포로기 이후 사람이라고 주장한다.

11) 호세아서의 편집과정에 대한 간단한 요약에 대해서 다음을 보라: Gale A. Yee, “The Book of Hosea,” The New Interpreter's Bible: Old Testament Survey (Nashville: Abingdon Press, 2005), 385-90.

12) 일반적으로 포로 이후에 최종 편집된 것으로 학계는 이해하고 있다(A. A. Macintosh, Hosea [ICC; Edinburgh: T & T Clark, 1997], lxxvi). 한편, 호세아서의 페르시아 시대의 읽기에 대해서 다음을 보라: James M. Trotter, Reading Hosea in Achaemenid Yehud (Sheffield: Sheffield Academic Press, 2001)

13) Elizabeth Achtemeier, Minor Prophets I. (NIBC; Peabody: Hendrickson Publishers, 1996), 9; David Noel Freedman, Divine Commitment and Human Obligation: Selected Writings of David Noel Freedman. Vol 1 (Grand Rapids: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97), 314-29.

14) Thomas Edward McComiskey, The Minor Prophets: An Exegetical and Expository Commentary. Vol 1 (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1992), 4; 단지 고대의 다른 증거들보다도 MT가 정통성을 더 강력하게 주장하는 본문 전승(textual tradition)을 보여주고 있다는 측면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Al Wolters, “The Text of the Old Testament,” David W. Baker and Bill T. Arnold eds., The Face of Old Testament Studies: A Survey of Contemporary Approaches [Grand Rapids: Baker Academic, 1999], 31).

15) James Luther Mays, Hosea: A Commentary (OTL; Phi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 1969), 60; Hans Walter Wolff, Hosea: A Commentary (Hermeneia;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74), 63; Macintosh, Hosea, 110; Achtemeier, Minor Prophets I, 33. 이러한 주장에 대한 반대 의견으로 다음을 보라: Andersen and Freedman, Hosea, 307; McComiskey, The Minor Prophets, 54; Ehud Ben Zvi, Hosea (FOTL; Grand Rapids: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2005), 89.

16)     5aA                        laer'f.yI ynEB. Wbvuy" rx;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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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Paul D. Wegner, A Student's Guide to Textual Criticism of the Bible: Its History, Methods & Results (London: IVP Press, 2006), 44-55.

18) Lawrence Boadt, Reading the Old Testament: An Introduction (New York: Paulist Press, 1984), 323; C. Hassell Bullock, An Introduction to the Old Testament Prophetic Books (Chicago: Moody Press, 1986), 100;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 「예언자들(상)」, 이현주 역 (서울: 종로서적, 1987), 66, 80; 버나드 W. 앤더슨, 「구약성서이해」, 강성열․노항규 역 (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4), 378; 윌리엄 S. 라솔 외, 「구약개관」, 박철현 역 (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4), 515-6; 클라우스 코흐, 「예언자들: 앗수르 시대」, 강성열 역 (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9), 149; 이형원, 「구약성서 해석의 원리와 실제」, 258; Petersen, The Prophetic Literature, 180; Gordon McConville, Exploring the Old Testament: Vol 4. The Prophets (London: SPCK, 2002), 146; Walter Brueggemann, An Introduction to the Old Testament: the Canon and Christian Imagination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3), 218; 도널드 E. 고웬, 「구약 예언서 신학」, 차준희 역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4), 125; 우택주, 「새로운 예언서 개론」 (대전: 침례신학대학교출판부, 2005), 188; Steven L. McKenzie and John Kaltner, The Old Testament: Its Background, Growth, & Content (Nashville: Abingdon Press, 2007), 227.

19) Joseph Blenkinsopp, A History of Prophecy in Israel (Revised and Enlarged;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Press, 1996), 83.

20) Marvin A. Sweeney, The Prophetic Literature (Nashville: Abingdon Press, 2005), 173.

21) Blenkinsopp, History of Prophecy in Israel, 84.

22) Petersen, The Prophetic Literature, 176.

23) James Maxwell Miller and John Haralson Hayes, A History of Ancient Israel and Judah (2nd Ed.;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6), 352-9.

24) Israel Finkelstein and Neil Asher Silberman, 「성경: 고고학인가 전설인가」, 오성환 역 (서울: 까치글방, 2002), 289.

25) Paula M. McNutt, Reconstructing the Society of Ancient Israel,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Press, 1999), 154; 우택주, “철기 I 시대(1200-1000BC) 초기 이스라엘 사회,” 「구약논단」 13집 (2002), 73-105를 보라. 이에 따르면, 초기 이스라엘 사회는 농경사회로, 인구 20,000명 정도의 소규모 지파조직에 위기분산방식의 혼합영농을 통해서 노동을 최적화하는 평등주의적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내었다.

26) 우택주, “8세기 문서예언을 형성시킨 결정적 요인들,” 「구약논단」 9집 (2000), 153을 보라.

27) 이것은 8세기 예언자의 심판신탁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한편 남왕국의 아모스 예언자의 예언활동의 배경에 대해서는 다음을 보라: 우택주, “아모스서 난해구절(2:6b, 7c, 4:3b, 8:5)의 새로운 번역을 위한 주석적 고찰,” 「8세기 예언서 이해의 새지평」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5), 141-69; idem, “자랑을 조롱으로 바꾸시는 하나님(1): 8세기 유다의 집약농업 정책과 미가의 심판신탁(미 2:1-5),” 「8세기 예언서 이해의 새지평」, 323-42; idem, “자랑을 조롱으로 바꾸시는 하나님(2): 8세기 유다의 집약농업 정책과 미가의 심판신탁(미 2:6-11),” 「8세기 예언서 이해의 새지평」, 343-67.

28) D. N. Premnath, Eighth Century Prophets: A Social Analysis (Missouri: Chalice Press, 2003), 43-98.

29) 본문 바깥에서, 호세아서와 관련하여 “정치와 밀착된 종교”라는 새로운 접근을 제안하고 있는 연구에 대해서 다음을 보라: 우택주, 「새로운 예언서 개론」, 180-1.

30) 우상: 4:17; 8:4; 11:2; 13:2; 14:8. 바알: 2:8,13,17; 9:10; 11:2; 13:1. 한편, 9:10의 우리말 개정판은 바알에 대한 언어유희로 “부끄러운(תשׁבּ)”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그 뒤에 ‘우상’을 첨가했다.

31) 음란: 1:2-3; 2:2,4; 4:12; 5:4. 음행: 2:2,5; 3:3; 4:10,11,12,13,14,15,18; 5:3; 6:10; 9:1.

32) 코흐, 「예언자들」, 137-42; 강성열, 「고대 근동 세계와 이스라엘 종교」 (서울: 한들출판사, 2003), 146-7; 한편 반대의견으로,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 성창 제도가 존재하지 않았으며, 단지 “서구의 남성 학자들이 만들어낸 상상의 허구적 산물”이라는 주장에 대해서 다음을 보라: 우택주, “고대 이스라엘에 성전 창기가 존재하였는가?,” 「8세기 예언서 이해의 새지평」, 225-46.

33) Mays, Hosea, 74.

34) 쿤틸렛-아주르드(Kuntillet 'Ajrud)에서 발굴된 히브리어 축복문에서 언급되고 있는 ‘야웨와 그의 아세라’라는 표현은 아직까지도 논란의 대상이며(Bill T. Arnold, “Religion in Ancient Israel,” David W. Baker and Bill T. Arnold eds., The Face of Old Testament Studies [Grand Rapids: Baker Academic, 1999], 412-3; John J. Collins, The Bible after Babel: Historical Criticism in a Postmodern Age [Grand Rapids: Wm. B. Eerdmans Publshing Company, 2005], 114-5; William G. Dever, Did God have a Wife? Archaeology and Folk Religion in Ancient Israel [Grand Rapids: Wm. B. Eerdmans Publshing Company, 2005], 164), 이는 앞으로 고고학적인 발굴이 성서 내러티브 이해의 폭을 더욱 넓혀주는 좋은 기회라고 하겠다.

35) 호 2:8과 관련해서, 발굴된 사마리아 오스트라카에는 바알이름이 들어있는 인명이 나타나기도 했다(Collins, Introduction to the Hebrew Bible, 298). 한편, 데버(Dever, Did God have a Wife?, 235)는 호 7:13-16를 바알제의(mourning ritual)라고 주장한다.

36) 정치적으로 아시리아를 의존함(5:13; 8:4), 경제적으로 사치와 낭비를 자랑함(2:13; 8:14; 10:1; 13:2), 종교적으로 혼합주의를 추구함(2:8; 3:8; 7:4; 8:11; 10:2).

37) Andersen and Freedman, Hosea, 57-66; Wolff, Hosea, xxix-xxxi; Bullock, Prophetic Books, 101-2; Achtemeier, Minor Prophets I, 8; Petersen, Prophetic Literature, 178-91; 우택주, 「새로운 예언서 개론」, 181; 하지만, 반대로 도널드 E. 고웬(「구약 예언서 신학」, 차준희 역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4], 98)은 사상의 일관성이 없다고 평가하면서 구조적 분석을 자제한다.

38) Sweeney, Prophetic Literature, 175-80.

39) Gary V. Smith, The Prophets as Preachers: An Introduction to the Hebrew Prophets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4), 67-85.

40) 이형원, 「구약성서 비평학 입문」, 303.

41) Idem, 「구약성서 해석의 원리와 실제」, 38.

42) Petersen, The Prophetic Literature, 27;

43) Hyung Woon, Lee., The Function of Figurative Language, 48.

44) 이형원, 「구약성서 비평학 입문」, 308.

45) 볼프(Wolff, Hosea, xxiv)는 구약 전체를 통틀어서 호세아서가 가장 많은 직유법을 보여주고 있다고 평가한다.

46) 아시리아에 대해서 헤셸은 “독수리의 소굴”로 비유한다(「예언자들(상)」, 56). 또한 여로보암의 시종인 셰마(Shema)의 인장에 그려진 사자 문양은 북이스라엘의 자부심이었겠지만(Michael D. Coogan, The Old Testament: A Historical and Literary Introduction to the Hebrew Scriptures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06], 309), 아시리아에 공납을 바치고 있는 상황을 보여주고 있는 오벨리스크에는 아시리아로 형상된 사자를 발견할 수 있다(Boadt, Reading the Old Testament, 312).

47) 물에 대한 히브리어의 표현은 일곱 개로 나타날 수 있는데, 호 14:5의 ‘이슬(לט)’은 가장 미약한 물의 이미지이다(Mark D. Futato, “Sense Relations in the “Rain” Domain of the Old Testament,” Lawrence Boadt and Mark S. Smith eds., Imagery and Imagination in Biblical Literature: Essays in Honor of Aloysius Fitzgerald, F.S.C. [CBQMS; Washington: Catholic Biblical Association of America, 2001], 94).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이슬’의 힘으로 “백합화같이 피고 레바논 백향목같이 뿌리가 박힐 것”이라는 표현은, 하늘의 역동적인 이미지를 대표한다고 하겠다.

48) 한편 이 부분은 수사적 표현(두음법칙)이 있다.

49) 한편 이 부분(@aon"w> bnOg"w> x;cor'w> vxek;w> hl{a')은 수사적 표현(폴리신드톤polysyndeton)이 있다.

50) 이형원, 「구약성서 비평학 입문」, 309.

51) 한편 이 부분은 두음법을 잘 살리고 있으나, 개정판은 그렇지 못하다.

52) Achtemeier, Minor Prophets I, 79. 한편, 본문(aybin" yh'l{a/-~[i ~yIr;p.a, hp,co)은 개정판에서는 “에브라임은 나의 하나님과 함께 한 파수꾼이며, 선지자는 ...”으로 구절 자체를 나누고 있으며, 새번역에서는 “하나님은 나를 예언자로 임명하셔서 에브라임을 지키는 파수꾼이 되게 하셨다.”라고 번역한다. 공동번역은 “에브라임은 예언자의 천막을 노리며..”라고 번역한다. 맥코미스키(McComiskey, The Minor Prophets, 143)는 새번역과 비슷한 번역을 제시한다.

53) 이형원, 「구약성서 비평학 입문」, 309.

54) Achtemeier, Minor Prophets I, 86; Machintosh, Hosea, 401.

55) 이형원, 「구약성서 비평학 입문」, 309.

56) Wolff, Hosea, 43.

57) Collins, Introduction to the Hebrew Bible, 299.

58) 이형원, 「구약성서 비평학 입문」, 309.

59) 이 구절은 수사적 의문법으로도 불 수 있다.

60) 이형원, 「구약성서 비평학 입문」, 309.

61) Macintosh, Hosea, 130. 한편, 볼프는 엄격한 의미에서 십계명과 같지 않다고 말한다(Wolff, Hosea, 67).

62) 이형원, 「구약성서 비평학 입문」, 309.

63) Leland Ryken eds., 「성경 이미지 사전」, 홍성희 외 3인 공역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2001), 1525.

64) Coogan, The Old Testament, 322.

65) 우택주, 「새로운 예언서 개론」, 177.

66) Wolff, Hosea, 126; McComiskey, Minor Prophets, 108; Macintosh, Hosea, 269.

67) 이형원, 「구약성서 비평학 입문」, 308.

68) Arthur Quinn, Figures of Speech: 60 ways to turn a phrase (Utah: Gibbs M. Smith, Inc., 1982)

69) 이형원, 「구약성서 비평학 입문」, 310.

70) Ibid., 310.

71) Ibid., 311.

72) Quinn, Figures of Speech, 11; 이형원, 「구약성서 비평학 입문」, 312.

73) 우택주, 「새로운 예언서 개론」, 181-2을 보라: 이스라엘(Israel > śr/śrr/śry)은 호 1-3장에서 ‘이스르엘’ 평야를 만들게 되는데, 이 장소는 예후의 쿠테타가 완결되는 장소요 호세아가 낳은 아들의 이름이기도 하다. 또한 이스라엘의 자음(śr/śrr/śry)은 반역의 뜻을 가진다. 한편, 에브라임(Ephraim > pr’)은 열매(הרפ)를 만들고, 들나귀(8:9, ארפ), 황소(8:6, רפ), 송아지(10:5, הרפ), 치료하다의 동사형(אפר)을 이용한 신탁들(5:13; 6:1; 7:1; 11:3; 14:4)로 변형된다.

74) Petersen, The Prophetic Literature, 27;

75) Collins, Hebrew Bible, 2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