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성경강해***/- 역대상,하 강해

[스크랩] 찬양의 기적을 체험하려면 (대하 20:21-23)

에반젤(복음) 2019. 9. 17. 00:37



찬양의 기적을 체험하려면 (대하 20:21-23)


다윗을 모르신분 아마 없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 중 한 사람인 다윗, 다윗의 성공비결은 무엇이었을까요? 다윗은 찬송으로 성공한 사람입니다.

 

양을 치는 들판에서도, 군인으로서 전쟁터에서도, 왕으로서 왕궁에서도, 난리가 나서 쫓기는 가운데서도 그는 늘 찬송했습니다. 시편의 거의 대부분을 다윗이 썼을 만큼 다윗은 찬송의 사람입니다. 이처럼 찬송은 놀라운 기적을 일으킵니다.


방금 읽은 본문도 그걸 말씀합니다. 유다 왕 여호사밧이 찬송하다가 승리를 체험했습니다. 암몬과 모압과 세일 자손들이 거대한 연합군을 형성해서 유다를 침략했을 때 여호사밧은 레위지파로 성가대를 조직해서 찬양하게 했더니 여호와 하나님께서 친히 역사하심으로 적을 온전히 무찌를 수 있었습니다.


찬송의 기적을 체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찬송의 능력을 믿어야 합니다.


21절 “백성과 더불어 의논하고” 놀라운 일입니다. 왕이 백성들과 의논하니 백성들이 찬송을 부르자는데 동의했습니다. 집에서 성전에서 찬송 부르는 것이라면 누가 못하겠습니까? 그러자는 것이 아닙니다. 적군 앞에 나가서 찬송하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때가 어느 때입니까? 적이 침략하여 예루살렘이 위기에 처해 있을 때입니다. 이 때 적들 앞에 찬송하며 나아가자고 결의했다는 것은 놀라운 믿음입니다. “애굽으로 돌아가자.”던 홍해 앞의 이스라엘 백성들과는 아주 다른 모습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선지자 야하시엘이 외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또 찬송의 능력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성을 나팔을 불며 돌 때 여호와께서 무너뜨려주심과 같이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찬송의 능력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천만부가 넘게 판매됐다는 베스트 셀라의 작가 멀린R. 캐로더스 목사가 쓴 ‘찬송생활의 권능’, ‘감옥생활에서 찬송생활로’라는 책이 있습니다. 멀린 목사는 이 책에서 "우리가 어떤 환경에 처하든지 끊임없이 감사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사소한 일까지 참으로 완전하게 역사해주신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문제 앞에서 주님을 찬양하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역사해 주실 것이다.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현실 그대로를 감사히 받아들이고 찬송하라.”고 말합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너무나 비현실적인 대응입니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이 이 말대로 찬양하다가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멀린 자신도 잇몸이 상해 치아 전체를 빼야 하는 상황에서 “하나님 감사합니다. 당신께서 내 치아를 나쁘게 만드셨으니 감사합니다. 주님께서 내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나보다 잘 알고 계신 줄 믿사오니 주님 당신께 찬양합니다.”계속 찬양했습니다. 그런데 사흘 후 치과에 갔더니 의사가 엑스레이 사진을 보고 “도대체 당신의 치아를 어떻게 치료하셨습니까? 당신의 뼈는 완전하며 잇몸 상태도 좋고 부기도 없습니다.” 완치 판정이었습니다.


주 안에서 어떤 사람 이야기입니다. 잇몸 전체가 문제가 생겨서 모두 빼야 하는 상황으로 밥도 씹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병원치료 불가, 그런데 믿는 데가 있었습니다. 우리 하나님, 그래서 좋으신 우리 하나님께서 나를 버려두지 않을 것이라고 찬양했는데,,, 소주를 머금어라. 소주를 머금었더니 신기하게 잇몸이 치료되고, 또 살아있는 효소를 먹어라. 그래서 채소와 과일을 갈아서 마셨더니 그 날 저녁부터 잇몸이 튼튼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자연에서 식품을 얻은 수렵시대 사람들의 이는 무척 튼튼했답니다. 체내에 효소가 많아야 합니다. 효소가 부족하면 치아도 모발도 신체 전반에 치명적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생체효소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익힌 것도 먹지만 과일이나 채소도 꼭 챙겨 먹고 있습니다. 이런 간증하려면 끝이 없습니다. 이처럼 찬송은 능력이 있습니다. 지금도 변함없이 찬송하는 자에게 기적이 일어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찬송의 용사가 되어야 합니다.


노래하는 자들을 택하여” 여기 노래하는 자들은 레위지파의 제사장들입니다. 레위인의 임무 중 중요한 한 가지가 찬송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전문적으로 찬송만합니다. 일도 하지 않습니다. 십일조로 살면서 날마다 찬양만 합니다. 이들은 찬양을 위해 태어나 찬양으로 살다가 찬양을 위해 죽을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찬양대는 보통 찬양대가 아닙니다. 그들은 적진에 목숨을 걸고 찬송하며 나간 찬양의 용사들이었습니다.


이처럼 찬양의 용사가 되어야 합니다. 왜 찬양의 용사가 되어야 합니까? 찬양을 알아도 찬양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난제 앞에서도 찬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보통 때는 찬송하다가 문제를 만나면 찬송 못하는 그 찬양은 가짜 아니겠습니까? 찬양할 수 없을 때도 찬양할 수 있는 사람에게 기적이 나타납니다.


욥도 찬양의 용사입니다. 그 큰 시험 당했어도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1:21) 찬양했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도 찬송의 용사입니다. 활활 타는 풀무불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불이 사르지 못했습니다. 불같은 시험이 와도 찬송하면 이길 수 있다는 교훈입니다.


바울도 찬송의 용사였습니다. 그토록 매 맞고 착고에 채여 감옥에 갇혔지만 한 밤중에 기도하고 찬송했습니다. 그럴 때 큰 지진이 나서 옥 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졌습니다. 초대 교인들도 찬송의 용사였습니다. 온갖 박해 가운데서도 기쁨으로 찬송했습니다. 신약 성도들이 신령한 제사장입니다. 누구나 하나님을 경외하고 찬양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레위 지파로 알고 언제든지 찬송하는 찬송의 용사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3. 찬송하되 구별되게 찬송해야 합니다.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거룩한 예복은 제사장복입니다. 제사장복을 입히는 것은 제사장은 하나님의 사람이지 개인자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 이름이 아닙니다. 내 공로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름이요, 예수 이름입니다. 내 개인 자격으로 선 것이 아닙니다. 조금이라도 개인자격으로 섰다고 생각한다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이처럼 찬송도 세상 노래와 구별해야 합니다. 찬송은 자기 한풀이나 흥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하나님을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42:8에 “나는 여호와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했습니다. 사43:21에는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했습니다. 총신의 김의작 교수님이 늘 강조하시던 성경 구절입니다. 그 분은 한국교회의 찬송의 타락을 늘 염려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자기도취에 빠진 찬송은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십니다. 찬송한다고 다 같은 찬송이 아닙니다. 언젠가 성도들이 모여서 찬송하는데 얼마나 성령께서 역사하시는지 큰 은혜가 임했습니다. 그런데 찬송 소리는 더 드높은데 갑자기 분위기가 삭막해지면서 은혜가 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웬일인가 봤더니 찬송이 바뀐 것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양이 아니라 사람의 흥을 돋우는 찬송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고장의 찬양축제다 뭐다 아쉬울 때가 많아요. 인간 위주로 진행하고 방송녹화를 위주로 진행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높이는 마음으로 찬양할 때 하나님께서 받으시고 은혜를 주십니다. 심지어 은혜 받기 위해 찬송해도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아요.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 돌릴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지 내가 끼치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을 알았습니다. 바벨론에 포로 된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은 바벨론 사람들이 하나님의 노래를 부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게 뭐가 잘못입니까? 그것은 자기들의 흥을 위해 부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137:1-6에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하게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의 재주를 잊을 지로다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하지 아니 하거나 내가 가장 즐거워하는 것 보다 더 즐거워하지 아니할진대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을 지로다” 탄식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높이는 구별된 마음으로 찬양을 드리시기 바랍니다.


4. 찬송이 신앙고백과 선포가 되어야 합니다.


여호사밧 찬양대는 또 어떻게 찬양했나요? “군대 앞에서 행진하며” 찬양했습니다. 군대의 보호가 아니라 군대의 선두에서 찬송했습니다. 이것은 담대히 승리를 선포하는 의미가 있어요. 마치 여리고성에서 제사장들이 군대 앞에 양각나팔을 불었던 것처럼 복음의 승리를 선포하는 의미가 있어요. 그러므로 문제 앞에 담대해야 합니다.


그리고 복음을 찬양해야 합니다. 여호사밧 찬양대는 어떤 내용으로 찬양했나요?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 좋으신 하나님과 그 분의 불변하신 속성을 찬양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복음입니다. 하나님의 속성도 복음입니다. 예수님의 하신 일도 복음입니다. 성경의 약속도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만 선포해도 굉장한 승리가 옵니다. 사랑 받고 싶습니까? 사랑의 하나님을 찬양해 보세요. 하나님의 사랑이 임합니다. 방황할 때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세요. 인도의 기적이 나타납니다. 빈곤할 때 후히 주시고 풍성하신 하나님을 찬양하세요. 풍성한 기적이 나타납니다. 아버지라 불러보세요. 하나님은 아버지로서의 임무를 다하려 하세요.


이처럼 죄에서 쓰러질 때 이미 예수 안에서 승리하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하세요. 우리는 예수 안에서 이미 이긴 자입니다. 그 은혜를 감사하고 찬양하세요. 어느 날 마음에 상처 받았던 일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이기지 못하겠어요. 그 때 “아차 나는 이미 예수 안에서 이긴 자이지, 이기지 못한 자처럼 왜 이러는가”, 그 말씀이 깨달아져서 그 복음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랬더니 그 상처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나는 이미 예수 안에서 새 사람이다. 나는 승리했다. 나는 복인이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그 은혜를 찬양하세요. 죄를 이기고 사탄을 이깁니다. 우리는 환경이 어떠하든지 여호사밧의 군대처럼 복음의 진리에 담대하게 서서 그 찬송이 우리의 신앙고백이 되고 선포가 되게 해야 합니다. 그 때 우리는 온전한 승리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이시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주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영원한 복을 주셨습니다. 그 은혜를 생각할 때 우리는 영원토록 그 이름을 찬송해도 부족합니다. 찬송의 능력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찬송의 용사가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은혜를 믿는 절대불변의 진리에 서서 찬송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유다 왕 여호사밧이 찬송하다가 큰 기적을 체험한 것처럼 찬송하다가 온전한 은혜를 체험하는 귀한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