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64년 7월 18일부터 19일에 걸친 밤, 로마 시내에 큰불이 일어났다. 대경기장 관중석 밑에 있는 가게에서 조그맣게 일어난 불은 남서풍을 타고 서민층 주거지역을 지나, 온 로마 전역으로 번지고 있었다. 맹렬한 불길은 상류층과 하류층을 구별하지 않았다.
엿새째 저녁에야 겨우 불길을 잡는 데 성공했다고 생각한 것도 잠시 뿐, 이번에는 동쪽에서 불어온 강풍에 불씨가 되살아났다. 결국 '세계의 수도' 로마는 아흐레 동안 불길에 휩싸인 것이었다. 불이 났을 당시, 황제 네로는 무더위를 피해 로마에서 남쪽으로 50킬로미터 떨어진 해변 도시 안치오의 별장에 머물고 있었다.
대화재로 전소한 지역에 네로는 '도무스 아우레아' 즉 황금 궁전을 짓기 시작 하였다. 시민들은 의심을 하기 시작했다. 방화범의 주범이 네로황제라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사유재산을 철저히 보호하는 로마에서는 아무리 황제라 해도 땅이 필요하면 소유자한테 사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 넓은 땅을 사려면 소유자들과 일일이 교섭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상당한 시간과 비용이 든다. 하지만 불타버리면 주인도 체념하니까 사들이기가 쉬워진다. 그래서 네로가 방화의 주범이라는 소문이 퍼져나갔던 것이다.
스스로 연주하는 리라 소리에 맞춰, 호메로스가 지은 '일리아드'의 트로이 함락 장면을 읊었다는 소문이 불행을 탄식하고 있던 사람들 사이에 일파만파로 퍼진 것이다. 27세의 네로는 방화의 주범에서 벗어나려면, 시민이 공감하는 방화범을 잡아야 했다. 결국 네로는 방화범의 주범으로 기독교도를 지목하였다. 네로가 기독교도를 고발한 이유에는 방화죄만이 아니라, '인류 전체를 증오한 죄'도 같이 포함되어 있었다.
체포는 일망타진이 아니라, 고구마 덩굴을 잡아당기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스스로 기독교도임을 밝힌 자들을 잡아서 고문하여 다른 사람들까지 고발하게 하고, 자백을 끌어낸 뒤 재판에 회부하였다. 이 경우, 판결은 재판을 하기 전부터 뻔했다. 물론 사형이었다. 체포한 뒤 재판도 하지 않고 처형장으로 보내는 것은 로마법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로마의 사법기관은 고발을 받아야만 비로소 행동을 개시할 수 있다. 그리고 자백이나 증거가 있어야만 비로소 판결을 내릴 수 있었다.
이들의 처형은 기독교와 무관했던 일반 시민의 이목을 끌기에는 충분했다. 네로는 단순한 처형이 아니라, 잔혹한 구경거리로 삼아 여론을 환기시킬 작정이었기 때문이다. 바티칸에 있었던 경기장이 처형장으로 사용되었다. 일부는 야수의 모피를 뒤집어쓰고 들개 떼에 물려죽었다. 다른 이들은 로마 시대의 일반적인 처형법이었던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다. 나머지는 밤의 구경거리로 남겨졌다. 땅에 박은 말뚝에 한 사람씩 묶은 다음, 산 채로 불을 붙이는 것이다. 활활 타오르는 인간 기둥들이 관중석에서 마른침을 삼키는 시민들의 얼굴을 비추었다.
베드로는 누구인가?
“사도님은 꼭 살아계셔야 합니다. 꼭 살아계셔서 더 많은 어린 양들을 먹이고 보호하셔야 합니다. 주님께서도 당부하지 않으셨습니까. 사도님께서 돌아가시면, 양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이 세상은 짐승 같은 놈들에 의해 다스려 지고 말 것입니다. 사도님께서 살아계셔야 그 진리가 영원할 것이 아닙니까?” 많은 사람들이 진정으로 존경하는 마음과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도 베드로의 피난을 적극 권유하였다. 시시각각으로 언제, 어디서 로마의 병사가 들어 닥칠지 모를 상황이었다. 신자들은 자신들의 목숨보단 사도의 생명을 구하고자 위험한 상황에서도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베드로는 누구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수제자요, 사도 중의 사도가 아닌가. 베드로는 부활 후 주님께서 아침을 드시고 자기에게 물으셨던 그날이 떠올랐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사랑하느냐?” “그러하나이다. 주님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하고 답하니 내 어린양을 먹이라 말씀하시며 재차 물어보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사랑하느냐?” “그러하나이다. 주님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그러자 주님께선 내 양을 치라 답하시며 다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사랑하느냐?” 한 번도 두 번도 아닌 세 번씩이나 거듭되는 주님의 말씀에 베드로가 심히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하고 답할 때에도 밀려오는 회한과 자책이 들었을 것이다.
한 번도 아닌 그 물음이 무엇을 말하는지 베드로가 모를 리가 없었다. 생각하기도 끔찍했던 그 전날 주님께서 자신이 가시는 길에 너희가 올 수 없다는 말에 묻지 아니하였던가.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그때 주님께서 말씀하지 아니하였던가.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가 없느니라고 그러나 이 혈기왕성했던 베드로는 말하였다.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당신을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그토록 호언장담했건만 그때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 말씀하신 그 의미를 알지 못하였던 것이다.
천 번을 후회하고 만 번을 괴로워한들 그날의 회한을 어찌 이루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주께서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까지 해놓고도 무슨 두려움에 벌레 같은 생명을 연장하고자 주를 모른다고 부정하는 것도 모자라 맹세하고 저주까지 하였으니 얼마나 통한의 피눈물을 흘렸던가. 그러니 주님이 한 번도 아닌 세 번 씩이나 당부 하신 것이 아닌가. 내 양을 먹이고 돌보라고 그 후 지팡이 하나를 의지하여 이곳 로마에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역경을 견뎌내며 주님의 말씀을 전하고자 앞만 보고 달려왔던가.
그런데 지금 그때처럼 끔찍한 상황이 연출되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 때문에 잡혀가 모진 고문과 혹형을 당하는 것도 모자라 사자의 먹이나 화형에 처해지고 있으니 이 얼마나 심히 두렵고 답답한 일이 아닌가. 갈릴리 그 호숫가에서 주님을 만나 마가의 다락방에서 불같은 성령을 받은 이후 얼마나 열심히 씨를 부리고 풍성한 수확을 거두었던가. 그런데 사탄은 지금 무자비하게 그것을 짓밟아버리고 있는 것이다. 두 손을 모아 얼마나 주님께 간구하였던가. 주께선 당신에게 어린양을 먹이고 돌보라 하였는데, 지금 이 모든 것이 풍비박산이 나고 있으니 얼마나 많은 고민과 시름으로 이 난관을 헤쳐 나가야 할지, 기도하여도 응답이 없으셨다.
개 중엔 혹시 지금이 그때가 아니냐고 묻곤 하였지만, 그러나 사도는 지금은 심판의 날 주님께서 큰 영광 중에 지상에 강림하실 그때가 아님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스도의 진리가 멸망하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도였겠지만 지금은 그때가 아님을 알고 있기에 한없는 고민에 쌓여있는 것이었다. 여기저기서 진정으로 자신의 피신을 돕기 위하여 애쓰는 그 모습들이 참으로 안쓰럽고 절망스러웠다. 이제 내가 어디를 떠난단 말이냐고 강변을 하여도 신자들은 한 결 같이 사도가 피신하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주님께서 사도 베드로를 통하여 교회를 세우시리라는 것을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사도 베드로가 목숨을 건져 살아 계셔야할 이유인 것이다. 비록 오늘 같은 가혹한 날이 있다하여도 사도께서 살아계셔야 하는 것이다. 사도 베드로야말로 구세주교회의 반석이 되실 분이 아닌가.
그런 분이 짐승 같은 자들에게 붙잡힌다면, 더 많은 어린양들이 짐승의 권세에 눌리어 뿔뿔이 흩어지리라는 것을 그리하여 그들은 자신의 목숨이 당장 끊어진다 하여도 이 고집 센 사도를 피신시켜야 하는 것이 자신들의 본분임을 자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오오 주님 어느 것이 당신의 뜻이옵니까? 이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위하여 이 땅에 목숨을 바쳐 가는데, 또다시 혼자만이 이 무서운 운명의 술잔을 쏟아 버리려 한다. 이 많은 사람들은 자신을 위하여 눈을 감은 채 쓰라린 술잔을 말없이 들이 마시는데, 자신은 혼자 그것을 피해 달아나려 한다. 고민과 불안 속에서 쉽게 결단을 내릴 수가 없었을 것이다.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사람, 그리고 불길 속에서도 담담하게 찬송을 부르며 죽어가는 사람들, 그들은 이제 주님의 품안에서 평화스럽게 잠들고 있었지만, 사도 베드로는 조금도 편안하게 잠들 수가 없었을 것이다. 지팡이 하나를 의지하여 주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전 세계를 발이 닳도록 돌아다녔다. 쉴 새 없이 계속되는 여행과 많은 고생을 겪으면서도 주님의 복음을 증거하기 위하여 살아왔건만, 그리하여 이제 이 도시에 말씀의 꽃을 막 피우려는데 난데없이 일진광풍이 불어와 모든 것을 파괴해버리려고 하는 것이다. 결단을 하여야 했다. 눈물을 머금으면서도 비통한 심정이야 이루 말할 수 없지만, 한발 물러서야 한다는 것을 결정해야 했다.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보다 더 많은 양들을 위해서 이 로마를 떠나기로 결심을 하였을 것이다. 이별이란 것이 얼마나 아픈 것인 줄 늙은 사도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순교란 것이 얼마나 두려운 것인 줄 얼마나 많은 용기를 지녀야 되는 줄도 잘 알고 있었다. 한 사람 한 사람 자신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사람들을 어루만지며 누구보다도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주님의 이름에 영광을 주고자 주님의 이름으로 모여 있는 그들이 그 어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그 모습을 뒤로하며 베드로는 로마를 떠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다음날 새벽 조용하게 나자리우스는 베드로를 모시고 압피아 국도를 따라 걸어가고 있었다. 이른 새벽인지라 아직 동터 오르지 않는 하늘은 희미하게 푸른빛으로 변해져 가고 있었다. 그러다 차츰 동쪽 하늘이 붉어지며 은빛으로 빛나는 숲과 나무들의 모습이 선명해져 갔다. 하늘은 점점 밝아지고 황금빛으로 되었다가 이윽고 아름답게 그 빛을 비추기 시작했다. 아침의 그 밝은 빛을 받은 나뭇잎은 빛나고 풀밭에 이슬이 영롱하게 맺혀 반짝거렸다. 이른 아침이라 아직 사람의 기척이 없는 길가를 사도는 무거운 걸음을 걷기 시작했다. 언제 어떻게 목숨을 버릴지 모를 사람들을 남겨둔 채 떠나는 그 마음이 얼마나 아픈지 지켜보는 나자리우스의 마음이 더 아파왔다.
사도는 말없는 눈물이 흘리며 간혹 뒤를 돌아보곤 하였다. 그러다 낮게 드리워진 햇살을 바라보시며 물으셨다. “얘야 너도 이쪽으로 다가오는 햇살이 보이느냐” “아니요 저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요? 사도는 무엇을 보았는지 손을 들어 햇살을 응시하였다. “저쪽에서 이쪽으로 걸어오는 사람이 보이질 않느냐” 사방은 한없이 고요한지라 나자리우스는 이 나이 많은 사도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태양의 황금빛 테두리가 하늘로 향하여 올라가지 않고 이상하게 땅을 향하여 비춰지는 모습이라니 나자리우스는 사도가 떠오르는 햇살이 눈물이 어리어 잘못 보았을 거라 생각하였다. 바람은 고요하게 나뭇가지를 흔들 뿐 햇빛은 차차 들판 위로 번져가는데 누가 걸어온다는 건지 이해를 할 수 없는 나자리우스는 사도가 심히 걱정스러울 뿐이었다. “사도님 어디가 편찮으세요?” 그러나 베드로는 그의 말을 듣지 못한 건지 쥐고 있던 지팡이를 떨어뜨렸다.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채 앞을 바라보며 입을 벌린 채 놀람과 희열과 황홀한 눈으로 바라보다 갑자기 땅에 끓어 앉아 손을 쳐들고 외쳤다. “오오, 그리스도시여, 그리스도시여” 마치 누군가의 발에 입을 맞추기라도 하듯이 엎드려서 땅에 얼굴을 대고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나자리우스는 멍하니 지켜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이윽고 한참을 죽은 듯이 땅에 엎드려 있던 사도가 누군가를 응시하듯이 눈물을 흘리며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쿠오바디스 도미네?)” 사도의 물음에 나자리우스는 한마디도 듣지 못하였지만, 그러나 후일 들은바 베드로의 귀에는 온화하고 슬픈 목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네가 나의 어린양을 버리면 내가 로마에 가서 다시 한 번 십자가에 못 박히리라” 사도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아무 말도 없이 얼굴을 숙이고 땅에 엎드려 있어 그 모습이 마치 기절한 사람이나 죽은 모습으로 보였다.
나자리우스는 사도의 이상한 행동에 겁에 질려 조심스레 부축하려는 순간, 사도는 몸을 일으켜 떨리는 손으로 지팡이를 잡은 채 묵묵히 일곱 언덕이 보이는 로마를 향하여 몸을 돌렸다. 이 모습을 보고 나자리우스는 하도 궁금하여 아까 사도 베드로가 한말처럼 조용히 되물었다 “쿠오바디스 도미네?” “로마로 가자.” “나는 주님을 보았습니다.” 늙은 사도는 다시 돌아온 자신을 보며 어찌할 줄 몰라 하는 신자들을 향하여 기쁨에 넘치는 목소리로 말하였다. 사도의 얼굴에선 어제의 근심을 띤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의 말소리는 힘이 넘쳐흘렀고 감격에 찬 표정에 희열에 넘쳐흘렀다.
사람들은 늙은 어부의 말을 듣고자 구름처럼 몰려들기 시작했다. 사도는 그 어느 때보다도 그리스도가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인간들의 사랑을 들어내시기 위하여 스스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는 이 새로운 신의 말씀을 기쁨에 넘친 목소리로 말씀하였다. 그는 이제야 주님의 말씀을 알 수 있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어야 하는 이유를 이윽고 베드로는 로마 병사에 의하여 체포되었다. 기독교의 수괴가 잡혔다는 소리에 누구보다도 안도의 한숨을 내쉰 것은 집정관의 부관이었다. 숱한 고문과 사자의 먹이, 화형에도 이들 기독교도는 두려움이나 공포에 휩싸이기보단 어떤 강력한 사교에 빠져 영혼이 미혹된 듯이 두려움을 느끼지 않고 평온한 모습들이었다. 오히려 이들보단 자신이 더 심한 불안과 공포심으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기독교 미사에서는 빵과 포도주가 제공된다는 것을 로마인들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빵은 예수 그리스도의 살을 의미하고, 포도주는 예수의 피를 의미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로마인들이 생각하기에 이것은 신에게 제물로 바친 소나 양을 신 앞에서 나누어 먹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예수의 죽음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희생이라고 기독교도 자신도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기들은 제물로 바친 소나 양의 고기를 먹는다. 그런데 기독교도는 제물로 바친 인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것이다. 로마인들이 보기에 기독교도는 에트루리아인과 카르타고인보다, 그리고 분명한 야만족인 켈트족보다 더 야만스러운 인간으로 보였다.
기독교도에 대한 로마인들의 혐오는 야만족을 피하고 꺼리는 감정에 더 가까웠다. 네로가 기독교도를 방화죄만이 아니라 인류 전체를 증오한 죄로 고발하였을 때 부정하지 않고 수긍하였던 이유는 바로 이처럼 잘못 알려진 기독교도의 교리를 곡해한데서 시작된 로마인들의 편향된 생각 때문이었다. 사실 그들의 처형에 누구보다도 앞장섰던 그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무엇인가 잘못되었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이들이 방화와 살인을 저질렀다니 도대체 누가 이런 유언비어를 날조 했단 말인가? 죽어가는 그들의 성스럽기까지 한 모습을 지켜보면서, 그들이 실천하는 이웃과의 사랑과, 그것을 지키고자 참혹한 혹형에도 굴하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누가 이 끔찍한 살인과 방화를 그들이 저질렀다고 고발하였는지 분노가 치밀었다.
그런 와중에 그들의 우두머리가 잡혔다니 무엇보다도 안심이 든 것이다. 그 자만 처형된다면 이젠 이 지옥 같은 형벌도 종결될 것 같아 다행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그들의 눈망울을 보지 않는다면, 자신은 살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한편으론 심히 마음이 불안했다. 벌써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감옥에 갇혀 혹독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자기를 지키는 두병사의 영혼을 미혹 시켰다고 한다. 어찌되었든 내일이면 끝날 것이다. 이 자는 법에 따라 고문을 받고 다음날 바티칸 언덕에 있는 십자가에 매달려질 운명이었다. 내일이 지나면 이젠 그 모든 것이 조용해질 것이다. 끔찍스러웠던 악몽도 이제는 벗어날 수가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자 이제 다시 로마는 조용해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 예상은 아침부터 빗나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감옥 앞으로 구름처럼 몰려들고 있었다. 로마인도 아닌 일개 타국의 평민이 그것도 끔찍한 방화의 선동자요, 사특한 이교의 괴수가 사형을 당하는데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드는지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만약을 대비하여 병사를 갑절로 증강시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윽고 근위병의 감시를 받으며 늙은 사도의 모습이 보였다. 사도는 너무 늙었기 때문에 십자가를 메고 갈 수가 없다는 부하의 말에 그냥 천천히 걸어 데리고 가라고 하였는데, 그 자의 모습은 도무지 사형을 당하는 사람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평온하고 기쁨이 넘쳐흐르는 모습이었다. 오히려 승리 한 뒤에 귀국하는 개선장군처럼 근위병의 호위를 받고 가는 모습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베드로가 나타나자 신자들은 통곡을 하였으나 이내 울음을 멈추었다. 길 가던 로마의 많은 사람들은 이 기묘한 행렬에 호기심이 가득 찬 눈으로 바라보았다. “보십시오. 저것이 바로 죽으러 가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저분이 바로 직접 주님의 가르침을 받아온 세상에 그 가르침인 ‘사랑’을 전파한 사람입니다.” 모여드는 사람들은 도무지 이 사람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 알 수가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정말 죄인 같지가 않구먼.” 그들은 침묵을 지키며 걸어가는 이 늙은 사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수군거렸다. 무슨 조짐이 일어날 것만 같은 불안함에 사도의 옆에 붙어 있지 않을 수가 없었다.
처음 체포되었을 때만해도 겸손하고 초라해보이던 모습이었는데, 이날은 그 옆에 있는 병사들보다 키가 더 커보였다. 아니 인간으로서는 꺾을 수 없는 어떤 힘이 넘쳐보였다. 마치 군중과 근위대의 호위라도 받고 가는 양 마치 황제처럼 당당해보여 오히려 자신이 이자를 모시고 수행하는 그런 기분마저 들어 기분이 몹시 찝찝해졌다. 사방에서 소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베드로 사도님은 주님의 곁으로 가시고 계신다!” 사람들은 마치 사도에게 고문과 죽음이 기다리고 잇다는 것을 잊은 듯이 보였다. 이 늙은 사도 또한 자기의 고통으로 이룩한 승리를 가슴 깊이 느끼듯이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였다.
“오오 주님 당신은 전 세계를 지배하는 이도시를 정복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당신의 말씀대로 하였습니다. 당신은 여기에다 당신의 나라를 세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당신의 말씀대로 이곳에 나라를 세웠습니다. 이제 저는 제가 한일을 다하였습니다.” 사원 앞을 지나면서 부관은 베드로가 하는 말을 듣고 몸이 움찔해졌다. “머지않아 이곳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앞에 모여 잇는 군중에게도 말하였다. “여러분의 어린 자손들은 모두 주님의 종이 될 것입니다” 그는 침착하게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그는 자기의 승리와 힘과 위대함, 그리고 위안과 평화를 의식하면서 자기의 일이 헛되지 않았음을 깨닫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사도의 모습을 지켜보느라 자신의 행렬이 어떻게 바티칸 언덕에 도달하였는지 몰랐다. 백인대장의 멈추라는 명령소리에 돌아보니 바티칸 언덕 중간쯤에 도착한 것이었다. 병사들은 무덤을 파기 시작했고 다른 병사들은 십자가와 망치와 못을 준비해놓고 기다렸다. 군중들은 그 주위에 무릎을 꿇은 채 엄숙한 표정으로 조용히 앉아있었다. 사도는 얼굴에 햇빛을 받으며 조용히 로마가 잇는 방향을 뒤돌아보았다. 저 멀리에는 티베트 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었고 그 너머에는 마르티우스 광장이 보였다. 그 위쪽에는 아우구스투스의 묘가, 그 아래쪽에는 네로가 세운 폼페이 극장과 많은 건물들이 보였다. 모든 길을 로마로 통하게 하고 세계의 법률을 만들고 온 세상을 마음대로 통치하는 근원지, 영원히 정복되어지지 않을 것 같은 도시를 바라보며 흡사 병사들에게 들러 쌓여 자신의 영토를 구경하듯 서 있는 사도 베드로를 바라보면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전율에 온몸이 사시나무 떨듯이 떨려왔다.
이 자가 진정한 로마, 아니 이 온 세상을 다스리는 지배자로 착각이 들 지경이었다. 이내 사도의 속삭이듯 조용하게 말하는 소리가 천둥치듯 귀가에 들려왔다. “이제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죄를 속죄하리라” 사도는 위로 뻗친 오른손으로 십자가를 긋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죽음을 축복이라도 하듯 말하였다. “우르비에트 오르비(이 도시와 이세상이여!)” 그는 차마 사도의 죽음을 볼 수가 없었다 한다. 아니 어떻게 바티칸 언덕을 내려왔는지도 몰랐다. 얼마나 많은 시간을 비몽사몽간에 지내왔는지 몰랐다. 그러나 그가 정신을 차린 후 처음으로 들은 이야기는 사도 베드로가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순교하였다는 이야기였다.
<베드로의 무덤 위에 세워진 로마 베드로 대성당>
[출처] 예수님을 부인했었지만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순교한 베드로|작성자 Glor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