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설교 /<<이 동원 목사>>

예수님 용서(15)*이동원목사

에반젤(복음) 2024. 8. 2. 02:54

예수님 거룩한 용서(15)

누가복음 11장1-4절 / 이동원 목사

 

 우리 시대의 명화 글래디에이터 중에서 검투사 막시무스와 더불어 또 한명의 주인공이었던 황제의 아들 코모두스가 절규한 대사가 생각납니다. 황제 아버지의 사랑과 인정을 갈구했지만 그것을 얻지 못한 황제의 아들, 아버지를 용서하지 못한 아들 코모두스의 절규 말입니다. “아버지는 저에게 언제나 네 가지 덕목을 가르치셨습니다. 지혜, 정의, 용기, 절제를 가르치셨습니다. 저는 아버지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라면 이 모든 것을 지키고 싶었고 신이라도 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제가 정말로 필요로 했던 사랑을 그리고 인정을 주시지는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저를 안고 따뜻한 말 한마디만 주셨더라도 그 말은 저에게 태양과 같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아버지는--”이렇게 절규하며 그는 조용히 아버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목을 조르기 시작합니다. 용서하지 못한 아버지와 용서하지 못한 아들의 상처가 만들어내는 비극적 드라마의 한 장면입니다. 물론 이 장면은 역사의 사실과 달랐다는 비평이 많지만, 그러나 용서하지 못하는 가정에서 연출되는 비극은 오늘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우리들 가정의 보편적 경험임을 누가 무엇으로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우리 시대의 자녀들이 그들의 사랑과 인정의 욕구를 충족시켜주지 못한 채 돈과 잔소리로만 그들을 키워온 부모를 용서할 수 만 있다면, 아니 거꾸로 우리 시대의 자식들에게 가슴 아픈 소외를 경험한 부모들이 그들의 불효자식들을 용서할 수만 있다면 오늘 우리 가정의 풍경은 얼마나 달라질 수 있을까요? 만일 우리 시대의 아내들이 자신들을 배신한 속물 남편들을 용서할 수만 있다면?

 

 아니 거꾸로 우리 시대의 남편들이 자신들에 대한 용납을 거절한 새 시대의 아내들을 용서할 수만 있다면 오늘 우리 가정의 풍경은 얼마나 달라질 수 있을까요? 문제는, 그 용서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를 실천하지 못하는 한 가정의 회복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용서를 실천하지 못하는 한 예수의 제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용서는 그분의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었고, 그 분의 거룩한 모범적 습관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우리가 용서를 어떻게 실천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을까요?

 

1. 인간의 무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인생의 결론은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다름 아닌 그분의 용서의 실천의 마당이셨습니다. 그는 인류의 용서 곧 죄 사함을 위해 십자가를 지셨으며, 그가 남긴 마지막 말씀도 바로 용서의 말씀이셨습니다. 말씀 누가복음 23장34-35절을 읽어 보십시오. ➤“34. ¶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분의 옷을 나누어 제비를 뽑고 35. 백성은 서서 지켜보는데 치리자들도 그들과 함께 그분을 비웃으며 이르되, 그가 남들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그가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 곧 그리스도이면 자기도 구원할 것이라, 하더라.”

 

  우리는 이 예수님의 용서의 말씀에서 우리의 이웃들을 용서하기 위한 중요한 마음의 열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죄인 된 인간의 무지를 이해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만일 타임 머쉰을 타고 2천 년 전 골고다의 언덕에 올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있던 로마의 병정들에게 “당신들은 당신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도대체 알고나 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그들은 틀림없이 ‘안다’고 대답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은 그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고 말씀하십니다.

 

  무엇을 몰랐단 말입니까? 그들이 과연 그들이 지금 십자가에 못 박고 있는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인류의 구세주이심을 알았단 말입니까? 그것이 얼마나 큰 죄임을 알았단 말입니까?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2장8절에서 “8. 이 지혜는 이 세상 통치자들 중에서 아무도 알지 못하였으니 만일 그들이 그것을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 말합니다. 사도 베드로도 사도행전 3장17절에서 “17. 이제 형제들아, 너희의 치리자들과 마찬가지로 너희도 알지 못하여 그리한 줄 내가 아노라.”고 말합니다. 그들이 몰랐다는 무지가 그들의 죄를 정당화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지금 그들의 무지를 용납하고 계신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의 무지를 이해하고 계신 것입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별수 없는 이기적 인간이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을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웃들의 잘못을 정당화해줄 필요는 없습니다. 이웃의 잘못된 행위 그 자체를 인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무지 때문에 별수 없이 행하는 그 연약함을 이해할 수는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한때 사랑했던 사람들에 의해 도무지 용서하기 어려운 상처를 입었을 때 우리는 흔히 “그들이 내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고 흥분합니다. 그러나 그때 우리 주님은 어떤 반응을 보이실까요? “그럴 수도 있지. 죄인이기 때문이지”-하실 것입니다. 그런 마음이 우리 주님으로 하여금 십자가상에서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저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나이다.” 죄인 된 인간 무지의 이해-그것이 바로 용서의 출발점임을 잊지 마십시오.

 

2. 용서의 기도를 시작해야 합니다.

 

  아무리 용서하기 어려운 상대라 할지라도 용서하기를 원하신다면 그를 위해 기도하기를 시작하십시오. 그것이 바로 용서의 시작입니다. 우리는 보편적으로 용서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서는 기도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위해 기도한다는 것은 이미 성령께서 우리 마음속에 용서의 사역을 시작하신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하는 기도를 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면 그런 마음이 들 때까지 무한정 기다려야만 한단 말입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용서하고 싶지 않은 상대라 할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당연한 숙제입니다. 왜냐하면 용서가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명령에 대하여 유일하게 타당한 우리의 반응은 순종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하고 싶은 느낌이 들거든 용서하라고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누군가를 용서하고 싶다 혹은 용서하고 싶지 않다는 정서적 느낌을 넘어서서 용서가 주님의 명이라면 용서하려고 해야 합니다. 이런 의지적 반응이 곧 순종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이런 순종의 가장 보편적인 출발점이 그를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본문 누가복음 11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소위 ‘주기도’를 가르치면서 그 무엇보다 용서의 기도를 실천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 주께서 가르치신 기도는 2절에서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는 말씀으로 시작하여 4절 주기도의 절정에서 어떤 기도를 실천하라는 말씀으로 끝나고 있습니까?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무엇보다 필요한 것-그것이 바로 용서라면 지금 우리도 우리의 이웃을 용서해야 한다는 말씀이 아닙니까?

 

 그리고 주님은 이것을 교훈으로만 설교로만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십자가에서 자기의 목숨을 걸어놓고 기도로 실천하신 것이 아닙니까? 다시 누가23:34에 십자가에서 들려오는 주님의 기도 소리를 들어보십시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 함이나이다” 모든 용서에 성공한 사람들은 용서의 기도에 먼저 성공한 사람들입니다. 용서가 안 되시면 “주님, 용서가 안 됩니다”라고 기도하십시오.

 

  저 유명한 네덜란드의 믿음의 여인 코리 텐붐이 자기 언니의 목숨을 빼앗고 자신을 수용소에서 학대한 수용소 간수를 전쟁 후 만났을 때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하나님, 저 사람만은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솔직하게 주님께 아뢰는 일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녀의 내면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은 ‘용서하라’였습니다. 코리는 다시 “전 용서할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주님은 다시 그녀에게 "난 네게 용서할 마음이 있느냐고 묻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라는 나의 명령에 순종하겠느냐?“고 물으셨다고 합니다.

 

  마침내 자신의 감정과 상관없이 그녀가 의지적으로 순종을 결단하고 두 팔을 내밀어 그를 안는 순간 하나님은 그를 진정 용서하는 마음을 부어 주셨다고 그녀는 간증합니다. 그러나 그녀는 후에 그것이 기도의 응답이라고 고백합니다. ”주님, 난 용서할 수 없어요.“라고 기도하는 순간 이미 용서의 능력이 주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용서를 결단하고 용서의 기도를 시작하십시오. 기도하는 사람에게 용서하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3. 용서의 마음을 표현해야 합니다.

 

 세상에 어떤 덕목들은 표현되지 않아도 전달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표현되지 않고는 결코 전달되지 않는 것-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 하나가 용서이고 다른 하나가 사랑입니다. 용서와 사랑은 표현되지 않는 한 상대방이 용서 받은 것을 그리고 사랑받고 있음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그런데 용서와 사랑은 결국 하나입니다. 용서의 열매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옛 시인은 “종은 울릴 때까지 종이 아니다. 노래는 불리어질 때 까지는 노래가 아니다. 사랑은 표현될 때 까지는 사랑이 아니다”고 했습니다.

 

 우리 한국인은 많은 문화적 유산을 지닌 민족입니다. 그러나 한국인의 유일한 약점이 있다면 표현력의 빈곤입니다. 한국인들의 가정생활의 치명적 빈곤은 사랑의 표현의 결핍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잘못 했습니다’ 혹은 ‘사랑 합니다’라는 표현을 어색해 하는지요? 그러나 성경을 잘 관찰해 보십시오. 성경은 얼마나 용서와 사랑의 언어로 가득 차 있습니까? ‘사랑하는 자여,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너를 용서/사랑하노라’

 

  오늘 두개의 말씀에서도 주님은 공개적으로 용서를 가르치고 공개적으로 용서를 선언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분은 용서와 사랑을 마음으로만 간직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로 당신의 용서하시는 사랑을 공개적으로 표현하시고 증명하셨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5장 7-8절에서 ➤“7. 의로운 사람을 위해 죽으려는 자가 거의 없고 선한 사람을 위해 감히 죽고자 하는 자가 혹 있거니와 8.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당당히 제시하시느니라.”고 말합니다.

 

  저는 이 땅의 그리스도인 가정만이라도 좀 더 대담한 사랑의 전달과 표현이 있다면 이 땅의 가정들의 회복은 그 만큼 빨라질 것이라고 믿습니다. 두란노 아버지학교 가정회복 사역 팀장인 정회성씨가 쓴 “아버지 이제는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어요”라는 책에 보면 이런 고백이 실려 있습니다. 정 회성님은 아버지에게 온통 얻어맞은 폭력의 기억만을 가지고 자랐다고 고백합니다. 아버지의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분노는 가정을 공포의 장으로 만들곤 했다고 합니다.

 

 그가 어느 날 친구 집을 방문했다가 자기 친구가 아버지와 씨름을 하며 아버지의 배를 만지고 뒹굴고 있는 모습을 보며 충격을 받습니다. 세상에 그런 아버지도 있었구나! 라는 발견이 그를 놀라게 한 것입니다. 그가 예수 전도단 DTS 훈련을 받으며 아버지와의 관계를 해결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기도가 시작되었습니다. 사랑의 언어를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고 자란 그는 사랑의 표현을 위해 기도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자기 나이 23살 되던 해 그는 아버지께 전화를 드려 아버지 저를 낳아주시고 기도해 주신 것 감사하다고 말하니까 아버지는 “그래 열심히 해라”고 대답하더랍니다. 그때 그는 다시 “아버지 오늘 꼭 드릴 말씀이 있는대요” 하니까 “뭔데?”하시더랍니다. 기도하고 연습했지만 말이 나오지를 않았다고 합니다. 간신히 용기를 내어 23년 만에 처음으로 “아버지, 사랑 합니다”라고 고백을 했다고 합니다.

 

 전화를 끊고 처음으로 한 자신의 사랑의 고백을 인해 스스로 울고 감격하던 그날 그 고백과 동시에 마음으로부터 아버지를 용서할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변화만은 감지할 수는 없는 채 7년의 세월이 흘러갑니다. 어느 날 그는 기도하다가 아버지를 한번 안아드리고 싶다는 강한 갈망이 생겨났다고 합니다. 그 다음 이야기는 직접 그분의 책에서 제가 읽어 보겠습니다.

 

  [구정 날 부모님 댁에 세배를 하러 가기 위해 집을 나서면서 오늘은 아버지를 안아 드리리라 결심했다. 부모님 댁에 도착해 세배를 드렸다. 아버지는 나에게 “이제 사역자가 되었으니 주안에서 사역을 잘하라고 격려해 주셨다. 그때 내가 아버지에게 ‘아버지, 아버지하고 꼭 한번 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요.”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아버지에게 다가 가려고 했다. 앉아 계시는 아버지와 내가 서 있는 거리가 불과 1.5M도 안되는데 그 거리가 마치 요단강 같이, 아니 홍해같이 멀게만 느껴졌다. 앞으로 뻗어져야 할 다리가 떨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오늘 못하게 되면 나는 진정 후회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 마음속으로 강하게 다짐을 하고 용기를 내서 앉아 계시는 아버지에게 다가가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아버지를 꼭 껴안았다. 그리고 난 울면서 “아버지 사랑하고 감사해요”라고 말하고 아버지 품에 안겼다. 그때 하염없이 울고 계시는 아버지를 보았다. 나는 그때 아버지 역시 당신의 아버지에게 한 번도 사랑의 안김을 경험해 보지 못했기에 나를 안아주고 싶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는 몰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의 품이 너무 좋았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너무나도 좋았다.

 

  옆에 계신 어머니도 울고 뒤에 있던 아내도 울고--그 곳은 울음바다가 되었다. 나는 거기서 천국을 경험했다. 그곳에는 아버지와 자녀사이에 어떤 불필요한 긴장감이나 어색함이 더 이상 없었다. 진정한 평안과 기쁨만이 충만했다. 최근에 강의를 마치고 돌아오는 중에 아버지 전화를 받았다. “아버지 어디세요?” “여기 월마트다. 그런데 너에게 할 말이 있다.” “뭔데요?” (한 동안의 침묵 후에 들려온 말은) “회성아, 나 너 사랑한다.” 그리고 아버지는 황급히 전화를 끊으신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주님을 주님으로 만난 사람들의 그 어느 날의 용서의 결단 그리고 사랑의 표현이 이루어지는 순간 천국이 임한 것입니다. 오늘 당신의 가정에는 이 용서가 이 사랑이 오늘 필요하지 않으신가요? 우리를 십자가에서 용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