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VIP(13)세월의 절망을 딛고 일어선 사람(요 5:1-9) 다음 주일부터 이웃 사랑 축제가 시작됩니다. 이 축제는 우리 교회의 추수 마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년 동안 뿌려온 씨앗들의 열매를 거두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전도하기를 원했던 모든 사람, 우리들의 가족과 친족, 친구와 이웃들, 우리가 구원을 위해 기도해 온 모든 사람, 사랑의 씨를 뿌렸던 모든 VIP들을 교회로 초청하여 이제 그들로 직접적으로 복음을 듣게 하고, 신앙 결심(결신)의 기회를 제공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중요한 시점에서 오늘의 본문을 통하여 전도란 도대체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소위 요한 복음서에 기록된 대표적인 기적중의 하나입니다. 7가지 기적중 3번째 기적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요한 복음서에서는 이것을 기적이라고 표기하지 않고 표적이라고 말합니다. 요2:11을 보시면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요2:23에서도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 요4:54에 보면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에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니라” 그렇습니다. 요한복음서는 매우 일관성 있게 표적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표적은 영어로는 ‘SIGN’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고속도로에 진입하면 서울 혹은 부산이라는 ‘사인’ 간판을 보게 됩니다. 그 사인 간판은 그 표지판 자체가 서울이나 부산이 아니라 서울이나 부산으로 가는 방향을 보여줄 따름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요한복음서의 표적들은 표적 그 자체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 기적들을 통해 주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일까요? 요20:30-31의 말씀은 바로 이런 요한 복음서에 나타난 표적들의 의미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그렇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로 예수 믿고 영생을 얻게 할 목적으로 예수께서는 이런 기적들을 행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기적 특히 요한복음의 기적들을 연구할 때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믿지 않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통해 영생을 얻는 것 곧 전도가 어떤 것인가를 이해하고자 하는 관점에서 이런 기적들의 의미를 성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본문의 표적에서 우리가 배우는 전도의 레슨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전도한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1. 예수님의 눈으로 이웃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사건이 일어난 때는 명절 기간이었습니다. 1절을 보십시오. “그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이 사건이 일어난 시기가 아마도 3-4월이라면 이 명절은 부림절이거나 아니면 유월절이었을 것이라고 학자들은 추정합니다. 여하튼 이런 큰 명절이 되면 유대인들은 흩어져 살던 모든 곳에서 할 수 있으면 예루살렘으로 모여 옵니다. 그리고 문자 그대로 예루살렘 도성은 한 주간 동안 거대한 축제의 불야성이 됩니다. 풍성한 음식과 음악 그리고 춤의 향연이 있고 그리웠던 사람들과의 만남의 한 마당이 펼쳐집니다. 그런데 이런 즐거운 잔치 마당의 그늘에서 예수님의 눈은 외롭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찾고 계셨습니다. 그들은 누구였습니까? 2-3절을 보십시오.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더니” 그들은 많은 병자들이었습니다. 어떤 병자들이었습니까? 그들은 맹인 곧 보지 못하는 사람들, 다리 저는 사람 그러니까 걷는 것이 부자유한 사람들, 그리고 혈기 마른 자들 곧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일차적인 전도의 대상들은 언제나 이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을 육체의 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에게만 국한하지 마십시오. 영적으로 보지 못하고 영적으로 걷지 못하고 영적으로 움직이지 못하는 상처입은 마음의 이웃들이야 말로 예수님의 터치를 기다리는 가장 중요한 관심의 대상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 중의 특히 한 사람을 주목하셨습니다. 5-6절입니다.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오래된 줄 아시고--” 누구를 보셨다구요. 서른여덟 해된 병자를 보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38이라는 숫자는 방황과 절망의 숫자였습니다. 그들이 광야를 방황한 기간을 보통 40년 하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38년이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루 이틀, 1년 2년이 아닌 38년 동안 병을 앓면서 차도가 없었다면 절망이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께서는 이런 사람을 주목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 누우신 것을 보시고---”. 전도는 이렇게 예수 만나지 못해서 방황하고 예수님을 몰라 절망의 자리에 있는 이들을 바라보는 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가 있었던 곳은 베데스다 못이라고 했습니다. 공교롭게 베데스다의 의미는 ‘자비(은혜)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삶의 마당 저 건너편에서 주의 자비와 은혜를 기다리는 이런 이웃들이 보이지 않으시나요? 오늘 본문에 선행하는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을 전도하신 후 제자들에게 요4:35에서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고 말씀하십니다. 제발 눈을 떠서 보십시오. 눈을 들어 보십시오. 복음을 기다리는 예수님이 기다리는 예수님을 만나야 할 베데스다 연못가의 VIP들이 보이지 않으십니까? 그들을 예수님의 눈으로 우리가 바라보는 순간 전도는 시작되는 것입니다. 전도가 무엇입니까? 2. 예수님의 질문을 전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전도는 예수님의 질문을 전달하는 사건입니다. 그것이 무슨 뜻입니까? 본문 6절 하반부에서 예수께서 이 38년된 병자에게 무슨 질문을 하십니까? “네가 낫고자 하느냐?”였습니다. 병자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7절입니다.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무슨 말입니까? 이미 기술된 4절에 의하면 아마도 이 못가에 전래하는 민속 신앙의 하나는 연못의 물이 움직일 때 제일 먼저 못에 들어가는 자는 치유를 받는 다는 것인데 자기는 몸을 움직일 수 없어 그럴 희망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 예수께서 질문하신 것입니다. “네가 정녕 낫고자 하느냐?”고. “네가 아직 낫고자 하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느냐?”고. 이 질문의 효과가 무엇이었을까요? 희망의 점화였을 것입니다. 그는 절망에 익숙해지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제는 모든 것을 숙명처럼 체념하고 집으로 가기 직전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질문을 던지신 것입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이번 한 주간 우리가 만나는 이웃들에게 그리고 우리의 VIP들에게 이런 예수님의 질문을 대신 전달해 보지 않으시겠습니까? “당신은 그렇게 계속 사시겠느냐”고--“이젠 좀 변화되고 싶지 않으시냐?”고 물어 보시지요. 질문을 바꾸어 볼까요? “구원받고 싶지 않으시냐?”고 물어 보십시오. “새 인생을 살고 싶지 않으신가?”고 물어 보십시오. “천국의 소망을 갖고 싶지 않으신가?”고 물어 보십시오. “이제 자신이 아닌 예수를 한번 믿어 보지 않겠느냐?”고 물어 보십시오. 그것이 바로 전도입니다. 이 모든 질문을 본문의 방식으로 바꾸면 이렇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는 것입니다. 본문은 바로 이 순간 이 질문을 직면한 이 사람의 마음속에 일어난 모든 변화를 상세히 증거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아마도 이 사람의 깊은 내면에서 “그래 나도 낫고 싶어” “나도 구원받고 싶어” “나도 변화 받고 싶어”하는 생각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의 공정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웃들에게 던지는 거룩한 질문이 바로 그들의 거듭남의 씨가 되는 것입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1:23) 지금 돌이켜 보면 제 인생의 미래가 보이지 않던 시절, 인생의 마지막 잎새 같은 희망을 영어 공부에 걸고 참석하고 있던 영어 성경 공부 클럽에서 어떤 선배가 저에게 던진 질문 하나가 제 인생을 바꾸게 된 것입니다. “이 형제, 구원받고 싶지 않아요?” 전 당시 이 질문을 불쾌하게 생각했지만 그리고 이 질문을 끌어안고 고민을 시작한지 일년 만에 결국 주님을 만날 수 있었고 그분은 제 인생을 치유해 주시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 한 주간 우리 모두 다시 한번 거룩한 질문을 가지고 우리의 이웃들을 만나시지 않으시겠습니까? 3. 예수님의 생명의 말씀을 듣게 하는 것입니다. 전도는 예수님의 생명의 말씀을 듣게 하는 사건입니다. 자, 이제 걷지도 움직이지도 못하던 이 사람이 어떻게 일어납니까? 8-9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 가니라” 대답은 단순합니다. 주의 말씀이 그를 살린 것입니다. 주의 말씀이 그를 고친 것입니다. 주의 말씀이 그를 일어서게 한 것입니다. 도대체 주의 말씀이 무엇이냐고 묻고 싶지 않으십니까? 요한6:63의 말씀을 보십시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영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이 선포되는 순간 죽은 자를 살리고 병든 자를 고치는 성령의 역사가 함께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또한 생명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받는 순간 죽어 있던 자들에게 생명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오늘 이 38년을 앓아온 병자에게 도덕을 설파한다고 해서 그가 일어나겠습니까? 그에게 인생철학을 강론한다고 해서 그가 일어나겠습니까? 그러나 천지를 말씀으로 지으시던 주님,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던 주님, 들것에 실려 친구들에 의해 운반된 중풍병자를 일으키시던 동일하신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일어나-걸으라”고. 우리는 소위 진화론을 주창한 챨스 다윈이 아마도 무신론자라고 쉽게 가정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본래 사제가 되기 위해 영국 성공회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한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자신은 결코 무신론자가 아니라고 여러 번 반복하여 말했습니다. 그의 진화론 연구의 기반이 된 열악한 환경의 남미의 토인 부족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거의 동물과 다를 바 없는 절망적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지능도 짐승보다 나을 것이 없어 보였습니다, 다윈은 그들이 사람 노릇을 하기 위해서는 오랜 세월이 지난 먼 미래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여러 해가 지난 후 다윈이 그 곳을 방문한 후 다윈은 큰 충격을 받습니다. 그들은 문명인의 수준과 다를 것이 없는 변화된 삶을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선교사들이 그 곳이 당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것입니다. 이것은 다윈의 적자 생존이론이나 자연 도태 이론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다윈의 신앙은 큰 변화를 일으키게 됩니다. 그가 마지막 병상에서 붙든 것은 성경 책이고,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거룩하신 하나님, 위대하신 하나님, 나의 구주시여”이었습니다. 오늘 우리 주변에 너무 늦기 전에 새로운 인생을 찾도록 도와야 할 이웃들이 계시지 않나요? 절망의 세월을 딛고 일어나 새 인생의 길을 걸어야 할 이웃들이 생각나지 않으시나요? 그렇다면 그들로 말씀의 자리에 있게 하십시오. 그들에게 생명의 말씀, 구원의 말씀을 들을 기회를 제공하시지 않으시겠습니까? 다음 주일입니다. |
출처: 보좌로부터흐르는생명수 원문보기 글쓴이: 하늘 산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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