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복 신앙의 위험성
꼭 복을 구하려고 예수님을 믿는 것은 아니라고 말들 하지만, 속으로는 그래도 복을 주셨으면 하고 바랍니다. 어떤 목회자들은 노골적으로 하나님을 믿으면 현세의 복과 위로가 따라온다고 설교합니다. 특히 물질적인 축복을 강조합니다. 이에 현혹된 사람들이 솔깃한 마음에 모여듭니다.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미명 하에 탐심이 기독교에 파고 들었습니다. 물론 물질은 우리 삶에 대단히 중요합니다. 기독교는 물질을 악한 것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누리라고 내려 보내주신 선한 선물로 봅니다. 절대로 물질을 하찮은 것, 심지어 악한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물질 자체는 선하며 삶을 행복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물질은 선하지만 한계가 있습니다. 물질을 과도하게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탐심의 죄를 범하게 됩니다. 물질은 행복한 삶의 필수요소이지만, 절대로 유일한 요소는 아니고 더욱이 가장 중요한 요소는 결코 아닙니다. 그러므로 물질의 복 때문에 하나님을 구하다 보면 철저한 헌신이 불가능한 거짓 제자가 될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우리가 보통 거짓 제자라고 하면 먼저 예수님을 배반한 유다가 머리에 떠오릅니다. 유다의 동기를 살펴보면 요즘 유행하고 있는 기복신앙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 수 있습니다. 유다는 주님 안에서의 영원한 축복보다는 현세적인 이익을 사랑했습니다. 세상적인 영화와 성공을 원했고 지상에서 누릴 수 있는 보화를 원했습니다. 예수님이 지상에서 세우실 나라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싶은 꿈도 있었습니다. 아, 그런데 예수님이 지상 나라를 세우시기는커녕 죽으러 가신다니…… 절망,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3년 동안 따라다닌 것이 모두 헛걸음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자신이 기대하던 대로 흘러가지 않는 것을 알고는 말할 수 없는 실망감에 빠졌을 것입니다.
유다는 자신의 이익을 원했습니다. 마찬가지로 기복신앙도 이익만을 원합니다. 재물이든, 건강이든, 명예나 권력이든, 어려움이나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이든 모든 것을 자신의 이익의 관점에서 생각합니다. 믿음은 그런 것을 얻기 위한 방편에 불과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의 구주도 아니요, 나의 주인이신 주님도 아닙니다. 단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용할 수 있는 도구와 대상에 불과합니다. 또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이기도 하지만, 다만 그것이 세상을 등지지 않는 범위에서 받아들입니다. 예배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보다는 마음의 평화나 개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드립니다. 이런 예배는 하나님을 이용하는 행위로서 신앙을 가장한 우상 숭배에 불과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예수님께 접근했다가 예수님이 무엇을 주는 대신 오히려 어떤 다른 것을 요구해 오실 때는 돌아섭니다.
또 기복신앙에 물든 신자들이 보이는 현상 중에 하나가 세상적인 것을 계속 구하면서도 자신이 누리고 있는 상태에 안주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성공과 번영이 하나님의 축복의 증거라고 떠들면서 더 부어달라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잘못된 신앙과 양심, 거짓 마음의 평화, 풍요, 교회 풍악소리에 고취된 기쁨과 열정과 행복감, 잘못 이해하는 영적 만족, 친교와 좋은 감정 이런 것에 안주하며 기뻐합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받은 복이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사랑하시고 구원하신 증거라고 하면서 자신들의 신앙을 자랑합니다. 그러다가 시험이나 고난이 오면 잠시 하나님께 간구하다가 그 기대도 사라져버리면 돌아서 버립니다. 이런 사람들은 처음부터 결코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주님을 버리고 세상으로 돌아가게 마련입니다. 개중에는 복에 대한 미련과 함께 친교와 행복한 감정에서 벗어나기 싫어 계속 교회의 일원으로 남아 있기도 하지만, 신앙의 껍데기만 갖고 왔다 갔다 할 뿐입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복을 받기 위해 헌금도 열심히 하고 봉사도 남 못지 않게 열심히 합니다. 겉으로 경건의 모양을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능력은 아무 것도 없는 사이비 교인으로 다닙니다. 마치 열매는 없이 잎사귀만 무성한 무화과나무 같고, 꽹과리처럼 소리만 요란할 뿐 속은 텅 빈 상태로 다닙니다.
기복신앙에 물든 교인들은 자신들의 진실한 상태를 모릅니다. 기복신앙을 전하는 교회가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복을 받으라고 전하려면 먼저 그들이 신앙 상태가 하나님께 이미 받아들여 졌다는 것을 주입해야 하기 때문에 그들의 진정한 상태를 잘못 호도합니다. 아직 구원도 받지 않은 사람들에게 이미 구원을 받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얼마든지 필요한 것이 있으면 후히 베푸시는 아버지 하나님께 구하라고 말합니다. 공의와 거룩의 하나님은 실종되고 좋은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만 선전합니다. 자연히 아직 진정한 신도가 되지 않은 상태의 교인들의 마음만 한껏 부풀게 합니다. 그래서 그 교회나 교인들은 주님이 그토록 꾸짖으신 라오디게아 교회와 성도들의 상태가 되어 버립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고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합니다”(요한계시록 3:17). 그들이 “알지 못하도다”라고 주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그들은 자신들의 상태가 절망적이요 은혜로부터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얼마나 가난한지를 모릅니다. 사람들의 상태가 위험한데도 아주 좋다고 가르치는 것이야말로 아, 얼마나 절망적인 기만이요 잘못된 의에 빠지게 하는 악입니까?
또한 기복신앙이 위험한 것은 그 길이 주님께서 말씀하신 생명으로 이끄는 좁은 문과 길이 아니라, 멸망으로 이끄는 넓고 넓은 문과 길이라는 것입니다. 기복신앙에 빠져든 사람들도 원래는 바른 문과 길을 찾아 온 사람들입니다. 비록 일부 동기가 순수하지는 못했더라도 구원을 원합니다. 그러나 기복신앙에 물들다 보면 실제로 바른 문, 좁은 문을 발견하고 다가왔다가도 이 문이 얼마나 좁은지, 이 길이 얼마나 협착한지를 알게 되면 돌아서서 자신이 여태까지 의지해온 신앙으로 돌아가 버립니다. 자신들이 생각하기에 비교적 좁은 문으로 돌아갑니다. 제가 존경하는 영국의 목회자 마틴 로이드 존스는 좁은 문을 한 번에 한 사람밖에 들어갈 수 없는 회전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 문은 너무 좁아 어떤 다른 것을 가지고는 통과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It is just like a turnstile that admits one person at a time and no more. And it is so narrow that there are certain things which you simply cannot take through with you. – D. Martyn Lloyd-Jones, The Sermon on the Mount, Vol. 2, p. 221)
그렇습니다. 무리와 함께 휩쓸려 들어갈 수도 없고, 휴대품을 갖고 통과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기복신앙에서 말하는 문은 아무리 생각해도 주님이 말씀하신 것보다는 훨씬 더 넓어 보입니다. 복을 빌어 받은 재산, 명예, 권력을 비롯해서 자기 의, 교만, 심지어 죄까지 움켜쥐고 들어가려면 아무래도 문도 넓어야 할 것이고, 길도 편안하게 걷을 수 있을 만큼 넓어야 할 것입디다. 틀림없이 그 문에도 “천국”이라는 푯말이 붙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문을 준비하신 적도 없고, 그런 길을 가면 천국에 갈 것이라고 말씀하신 적도 없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기복신앙에 대해 걱정합니다. 그러나 걱정은 하면서도 기복적인 신앙의 교회가 커가는 모습을 보면서 무언가 있다고 부러워하기도 합니다. 마치 하나님을 잘 믿으면 현세적인 복도 받을 수 있는 것 아니냐는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복신앙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을 알게 모르게 좀먹은 결과입니다. 사실 정통적 교리의 교회 안에도 이런 기복적인 믿음을 가진 유다와 같은 사람들이 많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유다처럼 예수님께 우호적이며 제자처럼 행동하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사랑하는 척하며 배신의 입맞춤을 했던 유다처럼 배신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선조들의 신앙을 보십시오. 그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며 자신들이 본향 찾는 자는 자들임을 나타냈습니다” (히 11:13, 14). 그들은 믿음과 소망을 증거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최고의 관심사가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이나 세상에 속한 것들이 아님을 명백하게 나타냈습니다. 세상의 것들에 집착할 때 우리는 믿음과 소망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사탄이 제공하는 미끼에 붙들려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된 제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넘어질 때가 있지만, 복을 구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주님께 다시 돌아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성한 눈, 순전한 눈, 한눈 팔지 않는 눈, 한 목표만을 향한 눈” (eye be single, 마 6:22)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주님 만을 바라봅니다. “땅에 것을 생각하지 않고 위에 것을 생각합니다” (골 3:2). 그러기에 그들의 믿음은 결코 무너지지 않습니다. 자신들이 순례자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오히려 많은 어려움과 넘어짐 속에서 더욱 강해지고 끊임없이 자라갑니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란의 경(輕)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重)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합니다” (고후 4:17). 여러분들이여, 세상적인 복, 안개처럼 사라져 버릴 복, 과하면 오히려 화가 될 복을 구하시겠습니까? 아니면 하늘나라의 영원한 복, 하나님께서 직접 주실 영광의 면류관을 구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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