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창/- 믿음의 사람

[전도자료] 복음전도자로서의 스펄전/

에반젤(복음) 2024. 1. 17. 10:30





복음전도자로서의 스펄전


서창원 목사


‘설교자의 왕자’로 불리는 찰스 해든 스펄전이 세상에 빛을 본지 올해가 159주년이 되며 영광의 세계로 올라 간지는 101년이 되었음에도, 그는 모든 설교자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설교사의 큰 별이다. 그는 19세기 하반기에만 목회한 자가 아니요 지금도 여전히 그리스도의 사신으로서 죄인들의 가슴에 복음을 전하고 있는 설교자이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외쳤던 메트로 폴리탄 테버네클 예배당은 낮 예배와 저녁예배를 합쳐 만 여명이 운집하였지만 실제 그의 메시지를 들은 사람들은 1855년부터 출판된 그의 설교집을 통하여 읽혀진 것을 합하면 족히 백만이 넘었다고 한다. 1899년에는 그의 설교집이 23개 국어로 번역되어 출판되었고, 생애 말기의 시편 강해집은 <다윗의 보고>(The Treasury of David)은 12만권이나 팔렸다고 한다.

설교자로서 스펄전의 하나님의 전경륜을 충실히 증거 하였으며 모든 죄인들의 눈앞에서 그의 영광을 드러내는 궁극적인 동기를 가지고서 모든 사역을 감당했다. 그러한 설교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늘 그래왔던 것처럼 그를 비난하는 소리 역시 적지 않았다. 물론 대부분이 신학적인 논쟁에서 드러난 것이기는 했어도 그와 동일한 신학적 전통을 함께하는 동역자들에게는 매우 커다란 힘이 되었다.

스펄전이 사역을 시작할 때의 영국 상황은 지금처럼 개신교 국가였다. 성경을 인도와도 바꾸지 않겠다고 주장한 빅토리아 여왕의 통치 하에 영국은 신약성경이 말하는 '악으로 덮여있는 세상'과는 거리가 먼 것처럼 보였다. 주일성수는 철저하게 지켜졌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교회에 출석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외형적인 현상과는 달리 당시의 영적상황은 생명력이 결여된 타성에 젖은 모습이었다. 강단에서의 외침은 세련된 문장과 엄숙함, 그리고 평이한 대화체의 강연으로 흘러갔고, 설교자들은 존경을 받으며 그들의 가르침은 외쳐지는 대로 순응되어졌다. 그러나 문제는 사람의 심령을 찔러 쪼개는 살아있는 메시지가 들려지지 않았다. 더욱더 가슴 아픈 것은 그러한 영적상태를 인식하고 안타까워하는 자가 거의 없었다는 사실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 대하여 스펄전은 신랄하게 공격하면서 갱신되어야 할 것에 대하여는 과감히 질타했다.

“당신들은 이것이 옛날 것이기 때문에 존중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당신들은 고풍을 사랑하는 자들이며 수선된 도로를 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당신들의 선조들이 그 질퍽질퍽한 길에 푹푹 빠지면서 다녔기 때문에 우리들도 그 길을 간다고 생각한다.⋯당신들은 부흥을 결코 보지 못했으며 또 보려고 기대하지도 않는 자들이다.”1

물론 당시에도 열정적인 설교자들이 더러 있었다. 그러나 소수에 불과하였고 그들 중의 한사람인 버밍햄의 존 앙겔 제임스 목사는 1851년에 기록하기를 "우리나라의 종교상태는 아주 저조하다. 내가 목사가 되어 사역한 이래 구원의 결과를 얻은 설교 듣기가 참으로 드물었다"라고 하였다.2 이러 한 상황 가운데서 1853년 12월18일 주일아침 뉴파크 스트릿 예배당에서 19살이란 젊은 나이로 강단에 서서 설교하기 시작했다.

철저한 소명의식에 따른 설교

스펄전 설교의 강점은 뭐니뭐니 해도 설교자로서의 철저한 사명의식에 있다. 설교자의 가장 주된 사명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스펄전은 이것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 그러나 복음전파를 오직 목사들만의 직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특별히 설교사역을 주로 맡은 목사의 직분에 대해서 스펄전은 철저한 소명의식을 강조했다. 그는 이것을 예레미야나 에스겔 선지자 또는 베드로나 바울처럼 복음 선포의 사명을 굳게 받은 자 만이 감당하는 고귀한 사역임을 이야기 했다. 스펄전은 하나님의 말씀선포와 가르침의 사역의 절대적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붙들린 하나님의 사람만이 바울이 디모데에게 권면한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4:2)는 말씀을 성취할 수 있다고 믿었다.3

이 같은 그의 사상은 그가 죽기 삼년 전에 그의 목회자대학(Pastors' College)학생들에게 한 이야기 가운데서도 발견된다. "나는 멀지 않아서 여러분 곁을 떠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서로 만나서 ‘우리 학장님이 떠나셨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하지?’라고 말할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명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의 은혜의 교리에 충실하십시오.”4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 전하는 사명은 우리를 보내신 주인에게서 나오는 것이지 우리 스스로에게서 나오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내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명이 있는지 없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스펄전은 그의 '"<목회자 후보생들에게> 제1권에서 네 가지 기준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것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하늘로부터 부름을 받은 첫 징조는 말씀선포 사역에 대해 완전히 빨려 들어가는 욕망이 있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행하신 기이한 일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욕망이다. 이 욕망은 신중한 것이라야 하며 또 털끝만큼도 사심이 없어야한다. 그리고 이 열망하는 마음은 일시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 되며 지속적인 것이라야 한다.

둘째, 목사로서 가르칠 만한 자질과 선포하는 은사가 어느 정도 있어야 한다. 스펄전의 표현을 빌리자면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코끼리를 날아다니게 지으시지 않으셨다. 고래가 종달새처럼 하늘을 날고 싶은 강한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면 그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 적어도 복음 전하는 사역에로 부르심을 받으려면 어느 정도 말주변이 갖추어져 있어야 하며 이 은사를 개발시켜 나갈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의 양심과 판단에 맡기자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자신의 노력의 결과로 사람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열매를 어느 정도 보아야 한다. 스펄전은 사람들의 호평을 기대한 것이 아니라 회개하는 자의 심령이 깨어지고 그의 눈에서 눈물이 강물처럼 쏟아졌다는 소식이 들려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렸다고 한다. 그러한 모습을 보고 그는 크게 기뻐하였다. 따라서 그는 열매 없는 설교자들 모두에게 경종을 울리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말(렘 23:21-22)을 기록하고 있다.

넷째, 후보생의 설교가 하나님의 백성의 마음에 드는 것이 있어야 한다. 일어서서 설교하는 동안 지탄을 받거나 전반적으로 교회가 덕을 입지 못할 경우는 우리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지 못했다는 결론을 내려야 할 것이다. 물론 교회가 현명한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육신대로 판단하는 경우가 있으나, 설교자 개인의 자질이나 은사문제는 설교자 자신의 주관적인 판단에 맡겨야 할 것이 아니고 교회의 판단에 맡기는 것이 나음을 스필전은 지적하였다.

설교자로서 스펄전은 "양을 먹이라. 그렇지 않으면 염소를 기쁘게 하는 것이다(Feeding Sheep or Amusing Goats)"라는 설교에서 교회의 주된 기능이 양을 먹이고 치는 일이기에 사람들을 기쁘게 해주는 익살스러운 사람이 되지 말 것을 경고하였다.

칼빈주의에 근거한 설교

청교도들의 영향을 받은 설교

이것은 스펄전의 설교가 설교되게 한 뿌리였다. 물론 스펄전은 그의 설교에서 언제나 신학에 초점을 맞추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설교 대부분은 신학적으로 구성되었고 전달되었다. 사실 스펄전이 성경중심적인 설교자가 된 것은 칼빈주의적 신학입장 때문이었다.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말씀은 결코 헛되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확신은 성경에 대한 그의 철저한 헌신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스펄전은 단지 지식으로만 칼빈주의적 교리를 간직한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의 가슴에서 교리들은 활활 타오르게 했고, 구속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뜨거운 사람으로 빛났으며,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교통과 더불어 그는 언제나 신선했다.

당시는 칼빈주의자라고 자청하는 사람들조차도 대부분이 정통노선에서 이탈하여 타협적이었으며, 진정한 칼빈주의는 낙후된 것으로 간주될 정도였다. 스펄전은 주변에 알미니안주의자들, 탐욕스러운 도덕률 폐기론자들, 은혜의 교리에 충실치 못한 자들로 둘러싸여 있었으나, 칼빈이 설교했고 어거스틴이 설교했으며 바울이 선포했던 말씀을 선포하는 일에 주저 하지 않았다. 선택교리나 전적 타락설, 은혜의 언약 및 십자가 구속의 교리들이 조롱과 비웃음을 당하였고 기회주의적인 종교인들이 교회 안에 점점 늘어가고 있을 때 스펄전은 칼빈주의 교리를 굳게 붙든자였다‥5 그럴지라도 스펄전은 "기독교계에서 복음의 옛 전통적인 교리들에게 보다 더 월등한 무게를 부여해 온 것은 나의 크나큰 특권이었다"라고 밝혔다 6그는 진리를 만들려고 하지도 않았고 기발한 아이디어를 제공하려고도 않았다. 다만 복음에 충실했던 종교개혁자들과 청교도들 그리고 조지 윗필드의 복음을 전하려고 하였다. 교회가 생동감이 없는 것은 바른 복음을 전하지 않기 때문임을 인식한 스펄전은 "존 낙스의 복음이 나의 복음이다. 스코틀랜드 전역을 울리게 했던 복음은 오늘 영국에서도 뇌성을 발해야만 한다"고 하였다.7 '

그는 계속해서 말한다. "성경에는 본질적이지 않는 많은 내용들이 교회 안에서 가르쳐지고 있다는 생각이 팽배해져 간다. 우리가 그것들을 약간 변형하여 우리의 상황에 맞게 사용하자. 근본주의자들 가운데서도 우리가 옳음을 입증하고 있지 않는가‥‥ 그러나 하나님의 법을 약간 위반한 것이 교회에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드리는 것임을 기억하라‥‥ 심지어 그런 행동은 우리에게 복 주시는 하나님의 손을 거두게 하는 것이다‥‥ 성경만이 그리스도의 복된 교회의 유일한 종교인 것이다.‥‥ 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옛날 청교도들의 원리가 오늘날 너무 딱딱한 것이라고 말하는지 모른다. 그러므로 더 이상 그 원리들을 고집하지 말고 변형하자고 한다. 그렇게 말하는 당신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인가?"

그러면서 스펄전은 요한계시록 22장 18, 19절을 인용하면서 일점일획이라도 변경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며,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에 관하여 정밀하게 연구하고 검토하며 다른 사람들이 배교의 길을 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8

그의 이와 같은 태도를 못 마땅히 여기는 자들이 곳곳에서 그를 대적했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에 대한 열정이 식어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의 교회를 놀랍게 성장시켰다.

존 사이포드는 1892년 4월 14일자 The Review for the Churches에서 스펄전의 설교사역을 통하여 믿는자의 수가 해마다 늘어났음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그가 처음 뉴파크 스트릿 교회에 왔을 때 교인은 232명 이었다. 그 이듬해(1854)에 121명이 등록하였고, 그 다음해는 279명, 그 다음에도 200여 명씩 늘어났으며 ‥.1873년부터 그의 임종시까지 그는 매년 평균 300-500명의 새 식구를 맞이하였다. "9 이렇게 숫자가 늘어나는 것에 대해 스펄전은 자신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그가 전하는 복음의 능력 때문이오 “내게 무슨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명백하고 뚜렷하며 정확한 칼빈주의자로서,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단순히 증거 하기를 추구하기 때문이다.”라고 서슴없이 고백하였다.

사실 스펄전이 설교에서 칼빈주의적 신학의 입장을 대변하고 지키려고 애썼던 것은 당시 영국교회를 휩쓸고 있는 고등비평의 등장으로 인한 신학적 논쟁을 겪으면서이다. 교회강단에서, 심지어 복음주의 교회들조차도 복음을 선포하지 아니하고 현대과학이론, 철학 및 문학적인 내용들을 소개하는 상황에서 스펄전이 복음의 능력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회복할
유일한 길로 본 것이 칼빈주의 신학사상이었다.

그래서 그는 설교자가 전해야 할 일곱 가지 기본적인 진리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11

첫째, 복음의 필요성, 혹은 인간의 타락에 의한 황폐함.

인간의 전적 타락성을 내세우는 것으로서 죄인이 들어야 할 것이 복음이라는 것이다.

둘째, 복음의 예비 혹은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한 구속사역. 이 부분에 있어서 스펄전은 특별히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온전히 밝혀야 한다고 했다. 즉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그의 무한하신 은혜 그리고 고난과 대속의 죽음, 영광스러운 부활과 승천 및 다시오심이 온전히 선포되어 죄인들로 하여금 이 진리들을 듣게 해야 한다고 했다. 이 모든 교리들은 죄인의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절대적인 것들이다.

셋째, 복음의 명령 즉 하나님께 회개. 회개는 그리스도께서 촉구하신 것이오, 성부 하나님도 명령하신 것이며. 바울이 설교한 것이었다(눅 13:3, 행17:30, 20:21).회개란 태도의 변화를 자아내고 행동의 변화를 수반하는 마음의 변화를 말한다.

넷째, 복음의 조건, 혹은 구세주요 생명의 주로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고백함. 이것은 복음 선포의 목적이기도 하다.

다섯째, 복음의 결과, 즉 성령에 의한 중생.

여섯째, 복음의 엄중함, 또는 듣는 자의 책임을 강조해야 한다.

일곱째, 복음을 거절하는 자, 그리스도를 영접지 않는 자에게 임할 하나님의 영원한 형벌을 전한다.

설교자가 신학적이어야함은 청교도적 전통이기도 하다. 사실 스펄전은 잉글랜드 신학의 황금기라고 할 수 있는 청교도 시대에 푹 빠진 사람이었다. 스펄전의 설교연구에 있어서 종종 접하게 되는 것이 청교도들이다. 그는 그들에게 심취하여 읽었다. 그가 가진 12,000권의 도서 중 상당수가 청교도 작품들이었다고 한다. 스펄전의 설교 연구는 청교도들이 했던 것과 비슷하였다. 어두운 방에서도 무슨 책이 어디에 꽂혀있는 지를 알았다고 한다. 성경을 사랑했던 청교도들처럼 그도 6살부터 성경을 읽기 시작하였다. 그의 존 번연에 대하여 기록한 글이 마치 스펄전 자신을 기록한 것과 같다고 이안 머레이는 부연하였다.

'번연의 글을 읽으라. 그것이 거의 성경과 같은 것임을 보게될 것이다. 번연은 흠정역을 연구했다. 내가 판단하기로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올 때까지 그처럼 성경을 잘 연구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성경이 푹 젖어들 때까지 읽었다...어디서든지 그를 찔러 보아라 그의 피가 성경적이며 성경의 진수가 그로부터 흘러나옴을 볼 것이다. 그는 성경을 인용함이 없이는 말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의 영혼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득 찼기 때문이다.”12

청교도에 대한 스펄전의 입장은 그가 1872년에 한 설교에 잘 나타나 있다. "우리가 청교도 신학을 취하여 읽을 때, 현대 신학자들의 사상이 담긴 전도서에서 발견되는 것보다 더 많은 사고와 더 많은 학문, 더 많은 성경, 더 많은 가르침을 그들의 한 장의 글 속에서 찾는다. 현대인들은 만일 그들이 청교도들의 밥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소유하게 된다면 훨씬 더 풍요로운 자들이 될 것이다. 13

그렇기 때문에 그를 비난하는 모든 조롱 가운데서도 오히려 그는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하여 청교도들의 책을 읽으라. 그들은 현대의 모든 재료들을 모조리 모아두는 것보다 더 값어치 있는 것이다.“라고 담대히 외칠 수 있었다.14 그는 청교도들과 칼빈주의 자들이 낡아빠진 이론이라고 거절하고 있는 교리가 여전히 인간의 사상을 정복할 것이며 최고로 다스릴 것이다라고 확신하였다.15

성령을 인정한 설교

그의 설교는 성령 하나님의 인력과 권능 안에서 그 진수가 발견된다. 즉 그는 성령의 역사하심이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없음을 굳게 믿었다. 따라서 그가 설교할 때, 그의 회중들이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절대적으로 의존하며 전적으로 그의 임재를 느끼지 못한다면 물 위에 뜬 통나무에 불과하다고 했다.

스펄전은 성령 하나님의 임재를 위하여 늘 기도하였다. 주께서 그의 얼굴을 우리에게 드실 때 까지 여호와께 부르짖으라고 하였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성령이다. 집에 가서 이 일을 위하여 기도하라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해 주실 때까지 쉬지말라...내 영혼아 깨어라. 깨어 기도하라”16

스펄전은 설교사역을 우리의 지식이나 재능 또는 열정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로 하나님의 일을 완수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성령 하나님을 의존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심령의 변화를 일으키는 효과적인 사역은 하나님의 임재가 온 회중을 덮어야 하는 것이다.

스펄전은 뉴파크 스트릿 예배당에서 얼마 안 되어 회중들의 깨이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는 언제나 기도하기를 “불 붙는 마음과 성령의 충만한 사람들을 주님의 교회에 보내주소서 그런 자를 어느 교파에 보내시든지 그 교단이나 교회는 놀랍게 성장할 것이며 그렇지 않고 오히려 학자와 같은 신사나 박식하고 외모로 세련된 자를 보낸다든지, 작은 불씨나 은총을 가지고 있고 잘 짖지 못하는 벙어리 개를 보낸다면 그를 맞는 교회는 금방 시들게 되고 말 것입니다"라고 했다 17

스펄전에게서 성령의 임재가 크게 나타난 부분은 두 가지 차원에서인데, 하나는 그의 설교정신에서이며 또 하나는 그의 설교 내용 가운데서 찾아진다. 사도 바울처럼 스펄전도 '약하고 두려워하며 심히 떠는' 상태에서 설교하였다(고전2:3). 그는 말하기를 “우리가 떠는 것은 우리가 잘못 믿지 않기 위함이요, 더 많이 떠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취하여 잘못 해석하지 않기 위함이다. 마틴 루터도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하지 못한 사람이 되지 않으려고 두려워하며 떨었다...하나님의 진리 전체를 전한다는 것은 매우 무서운 임무이다. 여러분이나 나나 하나님의 전권사신으로서 말씀 선포를 하찮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말씀 앞에 두려워 떨므로 서야 한다"고 했다 18

그렇기 때문에 스펄전에게 강단은 이 세상에서 가장 엄숙한 현장이었다. 그는 청중들이 복음을 거절하는 모습을 생각하며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느끼곤 하였다. 그는 “만일 여러분의 영혼이 지옥으로부터 구속함을 받는 일이라면 오늘 아침에 자면서 내가 죽는다고 해도 그 죽음은 고귀한 특권이 될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강단에서 웃기는 식의 설교, 유머스럽고 가벼운 설교를 배격하고 늘 경건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말씀선포 사역에 임하였다.

물론 그도 참된 유머는 정신건강에 또 신선미를 던져주는 좋은 은사임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공중 예배때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씀을 선포하는 자리에서는 적절하지 못하다고 여겼다.

그리고 그의 모든 설교내용은 그리스도 중심적이었는데, 이는 성령의 주된 사역이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그의 설교의 영광스럽고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주제였다. 그 영광스러운 주니의 이름이 스펄전의 강단 사역을 낙원에서 모욕하는 처소로 바꾸었던 것이다.19

경건과 사랑이 우선되는 설교

교회는 참되고 신실한 사람들에 피를 통해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굳게 붙든 자들을 통해서 온전히 세워진다. 스펄전을 보면서 그가 붙든 하나님, 그가 의지한 성령의 능력, 그가 열렬히 사랑한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확연히 눈앞에 나타났음을 느꼈다.

그는 자기를 비난하는 수많은 대적들 앞에서 굴하지 않고 믿는바 도리를 온전히 전하였다. 신학적 논쟁에 휘말리면서도 그의 주된 관심은 양들의 영적 건강과 교회의 정결함이었다. 목회자로서 하나님을 굳게 신뢰하고 결과가 어떠하든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린다는 일관된 생각이 그를 지배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눈 한번 힐끗하지 않았다. 그는 말한다. “나는 내가 어떻게 설교하는지에 대해 특별한 관심은 없습니다. 나는 사람들에게 나를 사랑해 달라고 구혼하지 않습니다. 나는 내 설교를 들으러 나오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전하며, 내가 좋아하는 시간에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것을 설교합니다.”

스펄전은 논쟁을 하는 자리에서도 경건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우선될 것을 지적한다. 사실 논쟁에 몰입되다보면 감정이 앞서게 되고 뛰어난 영적 능력은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과 그의 이름을 공경하는 열정은 다툼 가운데서도 우리의 마음에 평화와 기쁨을 심게 된다.

말씀과 기도에 전념했던 사도들처럼 말씀연구와 기도 그리고 그리스도의 이름을 존귀케 하려는 그의 모든 사역은 질그릇에 보배를 담고 있는 그리스도의 사신들인 우리 후배 목회자들에게 큰 귀감이 아닐 수 없다. 그가 한 모든 사역은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 그 근본 목적이었듯이 우리의 모든 사역 역시 그리스도와 그 나라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스펄전의 다음과 같은 말로 이 글을 맺고자 한다.

“우리는 예수님을 위하여 형제들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예수는 수 만명 가운데 가장 중요한 분이며, 전 인류 가운데 가장 사랑스러운 분입니다. 그 분이 없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분의 동행하심을 즐기는 것은 우리에게 큰 복입니다. 그의 얼굴을 우리에게서 돌리시면 우리는 슬픔의 한밤중에 있게 됩니다....오, 그분에게 하듯, 그리고 그분에게만 하듯, 살고 죽으며 수고하고 고난 당하는 것은 영광스러운 것입니다....그리스도를 위하여 어떤 일을 행할 때 그것으로 우리는 경멸당하게 될 것이며 유용한 것으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위험을 받을지도 모릅니다. 그럴지라도 그 일을 하십시오. 나는 내 자신의 성품, 대중성 및 유용성을 주 예수께 향한 충성과 견주어 아주 작은 먼지와 같은 것으로 간주합니다....하늘이 떨어지라고 하십시오. 그러나 선한 사람은 주인에게 순종하게 하시고 그의 진리에 충실케 하십시오. 오, 하나님의 사람아, 공의로우시오. 그리고 두려워 마시오. 결과는 하나님께 달려있지 당신에게 달려있지 않습니다. 당신이 그리스도에게 선한 일을 하였다면, 비록 그것이 마치 그 일로부터 악이 나오는 것처럼 당신의 침침한 눈에 비치는 것 같을 지라도 그것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행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그 일을 받으셨고 기록해 두실 것이며 그리고 당신의 양심 속에서 그의 인준을 뜻하는 미소를 던질 것입니다.20

주(註)


1. New Park Street Pulpit, vol.4,pp.167~8.
2. Iain Murray, The Forgotten Spurgeon, Banner of Truth, 1966, p.23.
3. Delivery of The Sermon, Reprinted By The Banner of Truth, Issue 296,May,1988
4. Iain Murray, Ibid., p.13.
5. Silas Henn, Spurgeon's Calvinism Examined Andrefuted(1858), Iain Murray, Ibid., p.54에서 재인용
6. C.H.Spurgeon The Early Years, Reprinted By The Banner of Truth,1962,p.3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