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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의 사명

에반젤(복음) 2019. 7. 15. 14:44




교사의 사명

73. 성직과 헌신 (19:27~29) 

성직과 헌신이란 제목으로 묵상해 보았습니다.

1. 사회적으로 말하는 성직은 뚜렷한 종교의 지도자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의 생각이고, 저희들은 기독교적 성직을 이해하셔야 할 줄 압니다. 여러분들에게 묻기를 성직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했다면, “목사, 또는 목회자라고 할 것입니다. “왜 목사를 성직자라고 합니까?” 하였다면, “하나님의 일, 또는 교회의 일을 하기 때문이라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보내신 자 예수님을 믿는 것이라하셨고(6:28~29), 교회의 사명은 진리의 기둥과 터라(딤전 3:15)”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성직의 뜻이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 믿는 일이고, 진리와 관련된 일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일은 구원받고 영광 돌리는 일인데, 구원의 10대 은혜(선택, 중생, 하나님 계시와 믿음, 속죄, 양자, 동재, 교회, 거룩, 천국영생, 심판)를 말씀드린 일이 있는데, 그 은혜 중에 불신자가 덕 보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거룩할 성()자가 구별 되었다는 뜻이지요. 무엇과 구별됩니까? 비택자, 불신자와 구별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신자가 맛볼 수 없는 신령한 일, 예수 믿는 일, 구원에 관한 일, 진리에 관한 일을 하는 것이 성직인 것입니다. 어떤 이는 성직에 전적으로 매달린 사람도 있고, 어떤 이는 성직에는 10%쯤 하고 다른 일(신령한 일 아닌 것, 구제, 교육, 자선, 정치 같은 것)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문제는 성직의 뜻을 모르거나 자선사업도 성직의 일종인 줄 오해할까 하여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혹시 이 글을 성직자가 보신다면 성직과 성직 아닌 일을 섞어서 감당하는 일에 대하여 분별이 있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구제, 의료, 교육, 정치는 성직이 아니며 불신자도 다 하는 것입니다. 성직자가 거룩한 일에 힘쓰지 않고 세속으로 끌릴 위험이 있은즉 주의하셔야 할 것입니다. 딤전 4:13~15을 보시면 착념하고전심전력하라하셨는데, 그 직임이 곧 예수님을 나타내어 가르치는 일입니다. 바울은 주님을 본받는 자 되라하셨고, 베드로는 예수님처럼 거룩하라고 하셨습니다(고전 11:1, 벧전 1:16). 성직이 신령한 직이고 세속과 거리가 먼 것이면 세속적 연장도 가급적 쓰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건물이나 돈이나 세상지식은 적당히 쓰되(그것이 없어도 성직의 구애를 받아서는 안 되고), 특히 주의할 것은 인간적인 방법들, 명예, 자랑, 수단, 상술, 가식 등 세속의 힘을 앞세워 사람을 감동시키려고 하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백성들은 그런 일에 잘 넘어갑니다. 그리고 그것이 믿음과 관련된 은혜인 줄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한때는 이단교파에서 성직자들을 외국여행을 시키면서 유혹한 일도 있었습니다. 성직에 대한 바른 이해가 있기를 바랍니다.

2. 헌신에 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100% 헌신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에 보내신 목적을 위하여 오셨고, 그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사셨으며, 때가 되매 목적을 이루시고 가신 것입니다. 에수님이 자기와 현실을 위해서 무엇을 가지셨거나 누리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명예와 장수도 없었고, 재물과 가족도 없으셨습니다. 성직자가 헌신을 많이 하는 사람으로 착각을 하기 때문에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저는 헌신을 네 가지로 분류해 보았습니다.

1) 완전한 헌신입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홀로 주님의 사역을 한 후 하나님 앞에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헌신자를 부르실 때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른 자들을 받으셨고(5:11), 또 전도하러 나섰을 때도 전대나 돈을 갖지 말라(10:8~9)” 하셨으며, “일군이 저 먹은 것은 마땅하다(10:10)” 하시고, 거처할 곳을 인도하셨습니다. 바울사도가 사명의 길을 갈 때도 세상적으로 유익하던 것을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기고 배설물처럼 여겼다하셨고(3:7~8),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다(14:7)” 하시면서 그렇게 사시다가 순교를 하셨으니, 그런 모범을 완전한 헌신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성직자도 처음부터 단신자가 되어서 사치를 금하고 검소하게 지내면서 사역을 하다가 하나님 앞에 간다면 완전한 헌신이 될 것입니다. 19:27~29을 보시면 베드로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는데 무엇을 얻을 것입니까?” 하즉, 예수님이 천국에서 여러 배를 받고 영생을 상속한다고 하셨습니다. 100% 헌신입니다.

2) 준헌신입니다. 헌신에 가까운 충성입니다. 세상적 출세를 포기하고 목사가 되었는데 가족을 동반하였으니까 준헌신이 되고, 교회 일에만 얽매였으니까 교회로부터 정당한 급여를 받는 것입니다. 이 헌신은 정당한 보수를 받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니까 전폭적 헌신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구약의 레위지파 직무가 그런 것이었고, 신약에서도 일하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고 일군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딤전 5:18)”고 하셨습니다. 독신이 아닌 상태에서 생활비를 받고 일을 하였으면 그것이 준헌신입니다.

3) 사업적 헌신이 있습니다. 이것은 시작부터 보수와 성직을 어우른 것입니다. 이 사람은 다른 성도나 단체의 보조가 있을 때만 일할 수 있고 대가가 없으면 하나님의 일에 임할 수 없는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4) 2단계 헌신이 있는데 이것은 제가 70세 때에 만든 용어입니다. 70쯤 되니까 가정 사업이 거의 끝났고, 생활비는 자녀들에게 의존하면 되니까 늙은 몸이나마 조건없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2단계 헌신이고 차선책의 헌신이라고 이름을 지어본 것입니다. 성직과 헌신에 대하여 상고해 보았습니다.

74과 사명자의 10대 장애 (딤후 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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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간은 사명자의 10대 장애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 제목은 저의 경험에 비추어 반성하면서 후배들을 위하여 글을 남기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시면 귀히 쓰는 그릇,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하시므로 사명자가 주님의 쓰심에 합당하도록 예비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이 글을 쓰는 중에 두 개의 문건을 보았는데 하나는 초교파 신문 87호에서 인간주도 목회는 성공 못 한다”, “기도 없는 목회는 말씀 능력이 없어서 발휘 못 한다”, “나 자신부터 개혁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글을 본 일이 있고, 총신대 김인환 총장의 글에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미래의 지도자는 올바른 세계관을 갖고 지성과 영성과 인성을 연마한 후에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하면서 충성되게 준비하고 열정적으로 살아가는 자이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쯤 되면 하나님이 써 주시겠지요. 하나님의 교회에는 여러 종류의 그릇이 있으니까 크고 작은 일을 가릴 것 없이 쓰임 받는 사역자 되도록 준비하시라고 이 말씀을 드립니다. 저는 40년 목회의 길을 반성하면서 부정적 요소, 사명자의 10대 장애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무엇이 사명자의 장애입니까?

1. 비젼 없이 사명에 들어서는 일입니다. 저는 신학교에 들어갈 때 은혜의 감동과 전도의 사명은 있었지만 목회자의 사정에 대하여는 전혀 아는 바 없이, 다른 일로 오라는 데가 없으니까 하나님의 인도 섭리에 따라 공부하게 되었는데, 지금 생각 해 보면 그때 목회자의 비젼이 있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혹이라도 목사직과 목회가 무엇인지 모르고 호기심에 취하여 뛰어드는 일이 없기를 바라서 말씀드립니다.

2. 실력이 사역을 지배하지 못 하고, 사역이 앞서며, 실력이 뒤따라가는 경향입니다. 연습을 많이 한 후에 익숙한 노련미가 있어서 상대방을 복종시킬 수 있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마치 약수터에 가서 조금씩 나오는 물을 받아 주는 사람처럼 되는 것입니다. 펑펑 쏟아 부을 수 있도록 더 많이 준비 못한 것이 장애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3. 건강 문제인데 소화 잘 되고, 건강에 장애가 없으면 더 많이 연구하고 활동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그 활동에 따라 능률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건강상 이유로 활동이 침체되거나 게을러지면 목회의 큰 장애가 되는 것입니다.

4. 비교의식에 흔들리는 것입니다. 이웃교회나 친구들의 생활을 자기와 비교하고 자신도 그들과 같은 대열에 따라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 특성에 따라 맡은 사명을 옳게 이행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한 우물을 파야 물이 나오고 나무는 자주 옮기면 크지 못하는 것처럼 비교의식에서 흔들리는 것은 장애요인이 되는 것입니다.

5. 하나님의 인도섭리에 맡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빌립이 사마리아 도성에서 전도할 때 주의 사자로부터 광야로 나가라는 지시를 받고 순종하여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전도한 사실이 있고(8:5,26), 또 행 16:6~10을 보시면 바울이 소아세아 북쪽인 비두니아로 가기를 원했는데, 환상 중에 마게도냐 사람이 나타나서 우리를 도우라는 지시를 받고 서쪽 드로아 항구로 돌이킨 일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자기의 목표이상과 하나님의 뜻이 다른 것인데, 그것을 잘 못하는 것이 장애가 된다는 것입니다.

6. 인위적 방법에 지나칠 정도로 의존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호감을 사는 일과 친교주의도 필요하지만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친절한 사람이나 돕는 사람이 자기를 떠나거나 섭섭하게 할 경우에 힘을 상실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3:1을 보시면 유다의 의지하는 것을 제하신다는 말씀이 있는데 대부분 기대를 걸었던 대상이 무너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를 생각해서 사람을 의지하거나 인위적 수단을 부리는 것은 사명의 정도에 장애가 되는 것이요,

7. 말씀과 기도에 통달하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성경을 전체적으로 파악하고 시대흐름을 관찰하면서 설교가 솔솔 나올 수 있어야 하겠지요. 기도도 기도의 노하우를 배워야 합니다. 말씀과 기도는 사명의 무기인 동시에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길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이 조기에 해결되어야 합니다. 저는 목회를 다 하고 강론을 다 쓰고야 그런 경지에 들어간 줄 압니다. TV 설교를 들어보면 통달한 느낌을 주는 분들을 알 수 있습니다.

8. 혈기를 들 수 있습니다. 아니꼬운 것을 못 참거나 부끄러운 일을 참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혈기 한 번 부리면 끝나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폭력적 성품으로 목회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은 온유, 인내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고전 15:31과 딤전 6:13과 히 12:2에 있습니다.

9. 비도덕성입니다. 이 비도덕성은 주로 진실문제, 현세욕문제, 이성문제, 물질문제에서 나타날 수 있고, 국법을 안 지키는 일도 해당될 것입니다.

10. 가족과의 융합이 안 되는 문제입니다. 어느 가정에 사명자가 있으면 가족이 호흡을 같이 할 정도로 협력하면 좋은데, 오히려 지장을 주거나 덕을 훼손하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사명자의 10대 장애를 다시 정리해 보면, “비전없는 시작, 실력의 모자람, 연약한 신체, 비교의식, 자기 뜻 앞세우는 일, 인위적 방법, 말씀기도의 노하우 부족, 혈기, 비도덕성, 가정의 불합치를 꼽아 10대 장애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75과 목사와 교사로 주심 (4: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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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년을 앞둔 마지막 정기노회에서 중요한 말씀을 증거하게 되어 감사를 드립니다.

1. 중요한 말씀은 하나님이 신약시대의 교회에 목사와 교사를 주신 사실입니다. 본문에 보시면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와 교사까지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이란 용어는 다 주신 것이 아니고 특별한 자에게 주신 것을 뜻하는데, 그러면 왜 사도와 선지자는 이 시대에 없느냐? 하시겠지요. 이것은 사도와 선지자의 직무 성격이 계시적 은사와 기독교의 기초사역을 위한 것인데, 그 시대에 그 사역이 끝났기 때문에 계속 주시지 않은 것이요, 기독교의 기초사역을 끝낸 다음에는 다시 터를 닦을 필요가 없고(고전 3:10~11, 2:20), 닦아 놓으신 터(성경과 신앙고백) 위에 집만 세우면 되기 때문에 거기에 필요한 직임만 허락을 하신 것입니다. 장로는 행정직이고, 집사는 봉사직이기 때문에 신앙의 집을 짓는 은사의 직분은 목사와 교사 뿐인 것입니다. 목사에게는 교회 대표직, 성례직, 행정직, 교사직이 있으나 강도사는 교사직만 있으니, 이 직분이 영적 사역에 해당하는 직임인 것입니다. 믿음은 말씀으로 성립되고, 말씀으로 성장하며, 말씀으로 거룩해지되(17:17, 딤전 4:5) 행정이나 돈으로는 성립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말씀사역이 가장 귀합니다. 고전 12:28에서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시되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이며, 셋째는 교사라하셨고, 그 다음은 순위를 말씀하시지 않은 것도 말씀사역의 중요성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혹 교회에서 장로와 교사직을 놓고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한다면 대부분 장로되겠다고 할 것입니다. 그것이 한국교회의 현주소가 아니겠습니까? 장로는 정치하는 직임이지만 교사는 성경에 능통하고 또 하나님과의 관계에 긴밀하여 신앙생활하는 방법을 지도하는 자이기 때문에 교회에서 우월한 직분으로 존경해야 하는 것입니다.

2. 교사를 주신 목적을 12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교사 주신 목적을 세 가지로 뚜렷하게 말씀하셨습니다.

1) 성도를 온전케 하는 것이고,

2) 봉사의 일을 하게 하심이며,

3)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신다는 것입니다. 목사와 교사는 이 세 가지 목적을 늘 염두에 두셔야 할 것입니다. 성도를 온전케 함은 성도 개인이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닮게 하여야 하는 뜻이고, 봉사의 일을 하게 함은 사랑의 실천자를 만드는 뜻이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뜻은 그리스도의 몸이 교회이니까(고전 12:27, 1:18, 24) 교회를 유지, 확장 시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목사와 교사의 역할이 있는 곳에서 성도가 예수님의 인격을 닮고 사랑과 봉사를 실천하며, 그 단체가 점차 확장되었다면 그것은 교사의 직임을 잘한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3. 그러면 목사와 교사가 어떻게 직분을 감당하여야 합니까? 목사도 교사입니다. 목사와 교사를 구별한다면 교사직에는 가르치는 사역으로서의 공통성이 있고, 목사이기 때문에 특별히 시행하는 직임은 교회를 대표하는 입장에서 다스리는 일과 예수님을 대리하여 성례를 집례하는 것입니다. 즉 행정과 성례를 더 하는 직임이고, 신앙교육에 관계되는 모든 일은 목사와 교사가 다 같이 하는 것입니다. 28:20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라하신 것처럼 가르치는 직임이 중요한데, 무엇을 가르쳐야 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28:20, 내가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치는 직임이고, 예수님을 밝히 깨닫게 하는 직임이며, 또 성경의 말씀을 지켜서 예수님을 닮아 살도록 지도하는 직임입니다. 지금 말씀드린 것은 목사와 교사의 사명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성경을 잘 가르쳐서 성도로 하여금 예수님을 닮게 하라는 것인데, 이것은 마치 너 농사를 잘 지어서 많은 소출을 내라는 뜻과 같은 것입니다. 저는 취미로 작은 밭에 채소를 가꾸어보고 싶으나, 상추나 오이 한 포기를 심어도 진딧물이 끼고 잘 가꾸어지지 않습니다. 농사 기술이 어느 정도 있는데도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충실하게 가꾸지 못하는 것인데, 말씀을 가르쳐서 예수님을 닮게 하는 사역도 그럴 수 있는 것입니다. 설교를 잘 한 것 같아도 예수님 닮는 교인은 적다는 사실입니다. 왜 이럴까요? 하나님의 말씀은 그 내용과 권위에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가르치는 자와 받는 자에게 문제가 있어서 말씀의 효력을 발취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증거자가 믿음이나 겸손과 기도와 성실함이 없이 가르치는 수도 있고, 또는 받는 자가 회개도 하지 않고 믿음으로 성실하게 받지 않는다면 역시 효력은 나타나지 않을 것입니다.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가르쳤는데도 배나 더 악한 지옥자식이 되게 했다(23:14~15)”는 말씀을 생각하면 두렵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4. 그래서 교사 사역에 노하우 은사가 꼭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충성된 교사가 되는 것입니다. 12:42을 보시면 지혜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뇨?” 하신 것처럼 지혜있고 건실한 청지기가 되어 교사의 직분을 행하고, 또 말씀을 받는 자도 믿음으로 받되 간절한 마음을 받으면 하나님이 변화의 역사를 일으켜 주실 줄로 믿는 것입니다. 교사의 자격은 쉽게 구비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쉽게 되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3:1). 우선 진실해야 하고, 겸손해야 하며, 실체의 본을 보여야 하고, 성경지식이 풍부해야 하며, 기도를 힘씀은 물론이고 가르치는 방법도 탁월해야 목사와 교사의 직임을 능률있게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76과 목사 (4: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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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목사란 용어는 예수님이 양의 목자, 선한 목자(10:2,14)” 라고 하실 때, 목자로 번역한 포이멘과 같은 말입니다. 목자와 양의 관계를 생각하시면 그 관계가 목회자와 성도와의 관계와 흡사하기 때문에 그런 용어를 쓰신 줄 압니다.

2. 목사는 교회시대에 주신 교회의 최고직입니다. 사도와 선지자가 있던 시대까지는 그들에게 표준계시(성경)를 주셔서 기독교의 기초를 닦게 하셨고, 그 기초사역이 끝난 후에는 그 직무와 관련된 사도, 선지자가 필요없게 되었으므로(고전 3:10~11, 2:20) 교회를 섬기고, 지도하는 직분으로 목사와 교사를 세우라고 하신 것입니다.

3. 에베소서는 교회 섬기는 일과 관련된 말씀을 중점적으로 기록하셨습니다. 교회의 요소는 예수님과 성도이고, 이들이 예수님을 모시고 살면서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추구하고 흠없이 거룩하여져서 하나님의 아들로 손색없기를 바라는 목적으로 주신 신령한 기관입니다(1:1~6). 복음 전하는 일이나 가르치는 일은 교회 밖에서도 할 수 있지만 목회는 그 주인으로부터 그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주는 청지기 같은 직임(12:42)”이므로 교회 안에 있는 직분입니다.

4. 따라서 목사가 목회를 잘 할 수 있기 위하여 받은 직임은 대표자로서 다스리는 직임(장로는 보조자), 모든 것을 가르치는 직임(강도사, 교사도 같은 뜻), 성례를 집행하는 직임인 것입니다. 목사가 이 직임을 효율적으로 이행하려면 하나님이 능력으로 쓰시는 섭리도 있지만 자격을 갖추는 면에서 많이 구비할수록 좋습니다.

5. 성령님이 특별하게 역사하시면 지도자가 마른 막대기 같아도 능력있게 쓰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모세의 지팡이 사역이나 오순절 때 방언의 역사가 그런 예일 것입니다. 제가 40년 전과 지금을 대조해 보면 성숙한 면에 있어서 40년 전에는 어린아이 같았고, 지금은 성숙인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40년 전에는 70된 노인이 지나칠 정도로 젊은 저를 섬기고 은혜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별로 알아주지 않지요.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성령님이 사역자를 감추시고 쓰신다면 부족해도 능력자로 쓰실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그렇게 안 쓰시고 그릇 분량대로 준비와 노력 여부에 따라 은혜를 주시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6. 그래서 목사로서의 구비조건들이 필요한 것인데 주로 무엇이 필요하냐? 하면,

1) 하나님이 자신을 목사로 세우신 목적을 아셔야 합니다. 그 목적이 성도를 온전케 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자격만 온전케 되면 봉사하는 일이나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은 따라갑니다. 그리고 성도를 온전케 양육하는 뜻은 예수님을 닮아 살게 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우리의 목회영역 안에서 온전한 성도가 얼마나 있는지를 점검해 보셔야 할 것입니다.

2) 목적을 알았으면 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전심전력하셔야 하겠지요(딤전 4:15). 그리고 또 경우에 따라서는 해산하는 수고도 하여야 할 것입니다(4:19).

3) 목사직의 목적이 온전한 성도, 예수님 닮은 성도를 만드는 일이라면 거기에 알맞은 기술과 도구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기술이 무엇입니까? 자신이 예수님 닮은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지요. 누가 저 목사님은 예수님 비슷하게 닮은 분이야라고 했다면, 그것이 첫째 노하우가 되는 것이요, 둘째로 꼭 사용해야 할 도구는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지나니라(딤전 4:5)” 하셨으니까, 말씀과 기도의 노하우가 꼭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풍부한 지식, 본문을 읽었으면 핵심을 파악하는 지혜, 성경의 요구사항에 따라 가르치는 능력이 있어야 하고, 반드시 말씀과 기도에 끌려서 주야로 묵상하는 목사님이 되셔야 할 줄로 압니다.

7. 요즈음 교회를 보면서 개혁을 말하지 않는 목사님들이 거의 없는 줄 압니다. 무엇을 개혁해야 하는가? 너무 세속적이란 것입니다. 세속은 거룩의 반대요, 예수님 인격에도 반대됩니다. “속옷을 갖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 주라(5:40)” 하신 것은 최대한의 양보를 뜻하고, “예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18:36)” 하시므로 예수님은 내세지향적으로 사셨는데, 우리는 대부분 그 반대로 사는 것이 아닌지요. 성도가 다 예수님을 닮아야 하겠지만 지도자만이라도 달아야 할 것입니다. 현세적 특권 앞에 절대로 줄서면 안됩니다. 기차표를 사거나 좌석에 앉아도 양보의 미덕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무슨 일에나 인간 또는 자신을 의식하기 전에 하나님의 공의를 살펴서 과감한 시행을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8. 목사는 그리스도의 모범자와 가르치는 자로서의 권위가 있을 뿐, 중보자나 능력자로서 권위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에서는 아버지 같고 형님같은 입장에 서야 하고, 성직자를 천사처럼 여기는 풍조도 없어져야 할 것입니다.

9. 목사가 개혁의 위치에 서려면 자기 신분이 깨끗하고 자유로우며 단순해야 합니다. 가족에 대한 책임 때문에 목사가 개혁에 앞장서지 못 하는 사례가 보편화 되어 온 줄 압니다. 목사는 은혜를 받았는데 가족은 세속에 끌려 있으니 이것이 목사의 개혁적 생활에 발목을 잡으니까 유의하지 않을 수 없고(딤전 5:8),

10. 마지막으로는 예수님을 가르칠 때 성경만 가르치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모든 말씀으로 살아야 하고 다 증거하여야 하는데(4:4, 5:20) 어느 시간에 사람이야기, 문화이야기, 이단이야기 등을 할 수 있겠습니까? 좋은 목사님되시라는 뜻으로 이 말씀을 드렸습니다.




77과 충실한 성경 교사 (1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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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먼저 목사되고 강도사 인허 받는 것을 축하합니다. 강도사는 교회 또는 교단에서 성경 교사의 자격을 부여 받은 최고직입니다. 강도사가 된 후에 목사가 되는 것은 목사에게도 성경 교사의 직책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목사와 강도사는 성경 교사로서의 공통직이 있고, 목사가 강도사보다 더 갖는 직임은 성례와 행정을 포함하여 목회에 임하는 것입니다. 목사가 목회를 잘 할 수 있는 가장 큰 덕목은 가르치기를 잘 하는 것입니다. 총회와 노회가 가르치는 일을 잘 하라고 자격을 부여하는데, 이 자격은 기초 교육 받은 것만을 근거로 하여 인허하는 줄 압니다. 따라서 성경과 신앙의 충실한 교사가 되려면 기초 교육만으로는 넉넉하지 않습니다. 학교에서 배운 기초 교육 외에도 필수적 요건이 더 있는데, 그것을 하루 속히 보완하여 존경받고 능력있는 교사가 될 때에 사역의 능률을 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처음에 강도사 되고 목사될 때 시험을 통과했으니까 상당한 자격이 있어서 받는 줄로 착각을 했습니다. 교인들은 그런 과정을 안 거쳤으니까요. 그런데 직책을 수행하는 시작부터 부족과 연약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우선 설교꺼리가 나오지 않고 성경이 마음에 확 들어오지 않으면서 멀리 도망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주석을 읽고 대지, 소지를 잡아 준비할 때 힘들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성경 전체의 내용이 풍성하지 못했습니다. 설교를 힘껏 외치고 나면 은혜를 받았다는 사람도 있지만 전혀 느낌없이 돌아가는 사람도 있고, 그보다 더 설교자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지식있는 장로의 지적을 받을 뿐 아니라 말씀의 효력과 생활의 변화도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르침의 사명을 받았을 때 속히 이런 취약점들을 보완하시라는 과제를 알려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성실하게 알려야 합니다. 하나님 아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자연계시와 성경으로만 알게 됩니다. 따라서 성경을 아는 것이 믿음이고,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는 것인데, 가르치는 자가 없으면 어찌 깨닫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말씀 사역과 성경 교사의 책임은 중요한 것입니다.

2. 저는 이 시간을 이용하여 이 직임을 받는 분들에게 경계심을 드리려고 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다 구덩이에 빠진다는 말씀(15:14),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23:13)” 하신 말씀(모세의 자리에 앉아 입만 갖고 권위를 나타낸 것), 또 눅 12:42을 보시면 지혜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그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줄 자가 누구냐?” 하신 말씀,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28:20)” 하신 말씀 등입니다. 이런 말씀들을 곰곰이 생각한 야고보는 선생이라도 실수가 많은즉 많이 선생되려 하지 말라(3:1)”고 하셨습니다. 증거자는 말하는 직임이고 말의 실수를 많이 할 위험이 있으며, 말의 실수를 줄이려면 기록된 하나님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아야 하고(고전 4:6), 말을 적게 할수록 좋으며, 또 준비하고 검토한 내용만 전하는 것이 유익한 것입니다. 한 번 말이 곁길로 나가면 그 말의 논리에 따라가야 하기 때문에 결국은 심사숙고하지 않은 내용으로 빠져들게 되고, 안 해야 좋을 말을 한 것 때문에 고민하게 되는 것입니다. 안 한 말은 할 기회가 있지만 잘못한 말은 주워담기 어렵다는 것을 생각하여 항상 나의 증언이 글로 남고 세상에 보도된다는 심정을 갖고 가르침에 임하셔야 할 것입니다.

3. 결론적으로 충실한 성경 교사가 되시려면,

1) 우선 성경의 지식이 풍성해야 합니다. 성경 지식이 풍성하려면 늘 성경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1:2주야로 묵상하는 자가 복 있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을 은혜의 방편이라고 하는 교리적 표현을 성경이 은혜를 전달하는 도구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은혜 자체이고, 은혜의 본질이지요. 도구 정도가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을 은혜의 본질로 아는 사역자는 성경을 잘 증거하고 잘 사용해서 만족한 것이 아니라, 성경 연구 자체가 하나님을 가까이 모신 친교이기 때문에 기뻐하고 만족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설교자들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깨닫고 만족하며 감사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설교를 잘 활용했을 때 만족하는 사람은 말씀을 이용하는 사람이고, 말씀의 본질을 격하시키는 것입니다.

2) 말씀과 기도에 끌리면서 살아야 합니다. 말씀기도에 끌리면 세속이 싫어집니다. “밥 먹어라. 구경 가자하는 것들이 다 싫어지고 선물을 들고 사람이 찾아오는 것도 자기 시간 뺏기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주의 말씀이 내 입에 꿀보다 달다는 말씀(119:103)이 체험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골이 깊어야 물이 많듯이 넉넉한 성경 지식 속에서 설교의 소재가 넘쳐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가르치는 일을 쉽게 하고 잘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세상이 너무 위험하기 때문에 시험에 들지 않기를 깨어 기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설교자는 말씀의 은사가 세력을 얻기 위해서도 기도하셔야 할 것입니다(19:20,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3) 그리고 가르치는 것은 말로 할 수 있지만 지키게 하는 것은 모범을 보여야 하기 때문에 증거와 모범이 함께 가야 할 것입니다. 고려파 초기에 고려 고등 성경학교 교장을 하신 오종덕 목사님은 성경 사전입니다. “여러분은 설교준비를 몇 분이나 하십니까? 나는 2~3, 빠르면 똑딱하는 시간에 끝냅니다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뜻은 성경 강론의 소재가 그만큼 총족되었다는 뜻인 줄 압니다. 말씀 속에 깊이 빠져가는 사역자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78과 목사 권면 (딤전 3: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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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목회서신은 바울사도가 디모데 목사에게 권면한 말씀입니다. 마지막 사도는 바울과 요한이고, 성경에 나타난 교회 지도자로서의 후계자는 디모데입니다(저의 집필목록을 보시고 목사, 목회자로 된 제목을 찾아서 참고하십시오). 목회서신을 읽으면 읽을수록 마음을 뜨겁게 합니다. 한마디도 적당히 보고 넘길 것이 없지만 몇 가지만 발췌하여 권면을 드린다면 은혜와 긍휼로 목사(직분)된 것을 감사할 것(딤전 1:12), 본이 되게 하신 것(1:16), 선한 싸움을 싸우고 이단을 주의할 것(1:18~20), 광범위로 기도할 것(2:1~2), 여자를 앞세우지 말 것(2:11~15), 감독자로서의 자격에 유의할 것(3:1~5), 교회를 하나님의 집(가정의식)으로 생각할 것(3:15), 말씀과 기도로 성화됨을 알 것(4:5), 경건을 연습할 것(4:7), 읽는 것과 가르침에 착념, 전심전력 할 것(4:13~16), 가족을 돌아볼 것(5:8), 송사에 신중할 것(5:19~20), 편벽되지 말 것(5:21), 일하고 삯을 받는 것은 떳떳함(5:18), 다른 교훈을 삼갈 것(6:3), 먹을 것, 입을 것으로 족하고 현실적 정욕을 피할 것(6:8~10), 의와 경건과 믿음, 사랑, 인내, 온유를 좇을 것(6:11~12), 빌라도에게 선한 증거를 하신 예수님을 본받을 것(6:13), 부자들에게 선행을 권장하신 것(6:17~19), 안수받을 때의 감동과 결심을 보존할 것(딤후 1:6), 고난을 부끄러워 말고 하나님을 의뢰할 것(1:12), 핍박자가 있으면 위로자도 있음을 알 것(1:15~16), 사역자는 군사요, 경주가 같음(1:4~5), 법대로 경기할 것(2:5), 몸은 매이나 말씀은 매이지 않을 것(2:9), 다툼은 없어야 하고 진리분변을 잘 해야 할 것(2:14~15), 그릇(은사)대로 일하고(2:20), 경건의 모양보다 능력을 중요시 할 것(3:5), 경건하여 핍박을 받을 것(3:12), 배우고 확신할 것(3:14), 누구에게 배운 것을 알 것(정통계승, 3:14), 모든 성경을 가르칠 것(3:16), 때를 얻든 못 얻든 전파 할 것(4:2), 잘못된 유혹을 피할 것(4:3~5), 내세의 상급을 지향할 것(4:7~8), 외로울 때 주님과 함께 할 것(4:9~19)” 등을 권면하셨고, 디도에게는 직분자를 잘 세울 것과(1:5~9), 바른 교훈에 합한 것을 말할 것(2:1~8), 업신여김 받지 말 것(3:1, 우뚝 서야 한다는 뜻), 다투지 말고 온유할 것(3:2), 성령충만(말씀풍성, 3:6, 3:16) 할 것, 어리석은 변론을 피하고(3:9), 이단을 경계하며(3:10), 예비하는 일을 잘 할 것(3:14)”을 말씀하셨습니다.

2. 저의 부족했던 것과 깨달은 것과 경험에 비추어 몇 가지를 말씀드린다면,

1) 일반적 실력이 있어야 합니다. 일반적 실력이 없어도 하나님이 쓰신 때가 있었지만(오순절 때 전도 초기) 문명이 발달한 오늘에는 그런 은사가 희귀하니까 업신여김 받지 않기 위하여 성경실력은 물론 사회지식에도 실력이 상당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을 상대할 때 자신감이 생깁니다.

2) 도덕성에 흠이 없어야 합니다. 가정이 파탄되었다든지 문제의 자녀가 있다든지, 또는 자신의 성품이 온유하지 못하고 진실성과 예절성이 없다면 그것도 목회에 큰 결격 사유가 되는 것입니다.

3) 사명이 투철하고 헌신성이 있어야 합니다. 사명이 투철하다는 것은 무슨 목적으로 무엇을 왜 하느냐? 하는 것이고, 헌신성은 보수대가와 관계없이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목사된 목적은 성도를 온전케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하여 본을 보이고 가르침에 힘쓰는 것입니다(4:11~12). 그리고 그 일을 사명으로 해야 할 이유는 자신을 구속하신 예수님의 뜻을 따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칭찬과 보수가 없어도 해야 하는 것이 사명이고 헌신인 것입니다.

4) 신령한 은사를 받아야 합니다. 말씀과 기도에 끌리는 은사입니다. 말씀에 끌리는 은사를 받을 때 거기에 몰두하게 되고, 말씀에 몰두한 즉 세속과 세상 욕심이 멀어지는 것입니다. 5:14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하셨는데, 사역자나 성도가 말씀에 몰두하여 정신을 한쪽으로 쏟아 붓지 않고는 세상정욕을 멀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안 되면 성령님의 역사도 나타내 주시지 않습니다. 세상정욕을 멀리 할 때 죄와 유혹도 멀리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를 온전케 해야 할 목사가 자신이 세속에 끌린다면 목적을 이룰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에 끌리고 몰두하는 신령한 은사를 꼭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5) 하나님이 나를 인정하시고 가까이 해 주신다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여기에 증표나 경험을 가지면 더 좋습니다. 1:3을 보시면 말씀을 주야 묵상할 때무릇 그 행사를 형통케 하신다하셨고, 또 시 73:23에서는 항상 주와 함께 할 때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신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자기의 일(자기 사명)에 형통하고 붙들어 주시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주시는 것(6:8, 4:16)을 체험한다면 더 큰 용기를 갖게 될 것입니다. 세속을 멀리한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이 싫어지는 것입니다. 담배 피는 사람의 담배에 대한 애착이 대단했지만 은혜를 받으니까 담배가 써서 입에 댈 수 없더라는 말을 들은 일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목사도 말씀에 끌리는 은혜를 받은 후에 모든 현세욕을 누리는 것이 다 싫어지고, 그것이 대단치 않은 것으로 느껴져야 하는 것입니다. 목사를 이해하는 것은 장로교 헌법 4장에 잘 나와 있습니다. 참고하시고 제가 권면한 내용은 목회서신에서 뜨거움을 느낄 것과 저의 경험에 의한 권면은 실력, 도덕성, 사명과 헌신, 말씀은사와 확신에 대한 것입니다. 돈이나 인간관계로 인한 문제 등 거리낌이 없는 자유로운 입지를 확보해야 하는 것도 중요함을 잊지 마셔야 할 것입니다.




79과 주님의 분부와 회고 (2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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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분부와 회고란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주님의 분부는 주님이 말씀한 모든 것(성경)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것이고, 회고는 그 직임을 맡은 사람의 경험을 생각하면서 교훈을 받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나는 강도사 될 때에 총회가 설교할 자격을 주는구나. 그래서 나는 설교할 수 있다는 자신감만 느끼고, 부족이나 두려움은 느끼지 못했습니다. 신학을 할 때도 설교를 하고 싶은 의욕만 있을 뿐 두려움이나 부족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토요일날 기숙사에 있으면 시내교회에서 주일 낮 설교자를 구하는 요청이 오는데 교장 선생님이 고학년자에게 우선권을 주었습니다. 그러면 퍽 아쉬움을 느꼈습니다. 이것은 자격을 얻었다는 성취감과 대중 앞에서 설교하고 싶은 의욕이 자기의 부족을 덮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설교자는 부족을 언제 깨닫는가? 할 때에, 목회하면서 설교를 자주 하다 보면 설교의 기회는 주어지고 시간은 다가오는데 실교 내용은 떠오르지 않고, 성경은 읽어도 멀리 도망하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오래 목상할 시간도 없습니다. 그래서 다른 이의 설교문이나 주석을 참고하여 어렵게 준비를 하지요. 설교를 준비한 다음에 읽어보면 조직이나 설명에 대하여 다시 정리하게 됩니다. 본래 설교문은 세 번 이상 고쳐도 완전한 문장으로 만족하기는 어렵습니다. 기도하고 열심있게 증거하면 만족감도 있고, “은혜 받았다는 사람도 있지만 늘 만족보다는 아쉬움이 많은 것입니다. 조는 교인도 있고, 딴 생각을 하는 교인도 있으며, 심지어는 나이 많은 장로님에게 지적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청년들의 윤리문제를 교훈하기 위하여 총각 때 처녀를 멀리했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그 예화가 통제보다 흥분시키는 말이 되었다는 지적을 받은 일이 있었고, 그 외에도 행동, 교리 사상의 불일치 등으로 지적 받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청중의 다소를 떠나서 까다로운 성도가 듣거나 심지어는 교역자를 배척하는 교인이 들을 때는 더욱 설교하기가 어려운 것은 더 말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청중을 의식하지 않고, 성경만 증거하는 설교가 가장 쉽고, 유효하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설교를 많이 하면 잘 할 수 있겠는가? 할 때, 내 경험으로는 40년을 설교했어도 설교에 자신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설교자는 준비와 발표를 잘 하셔야 할 것입니다.

1. 우선 성경 묵상과 기도에 끌리는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끌리지 않고는 종일 주야 묵상을 못합니다(1:2, 119:97). 주의 말씀이 꿀보다 더 달게 느껴져야만 끌리는 것입니다. 항상 기도하는 것도 그렇지요. 기도의 필요를 절감하여 늘 깨어있는 것입니다. 나는 이 체험을 50대 후반에 느꼈습니다. 말씀에 끌리기 전에는 설교하기 위하여 성경을 상고하였는데, 말씀에 끌린 후 부터는 성경 묵상 자체가 가장 큰 은혜요 하나님과의 동행으로 믿게 된 것입니다. 성경에 끌리니까 먹는 것과 사람 만나는 것도 중요하지 않았고, 말씀 가까이 하는 것 이 외의 것은 대부분 헛시간 보내는 것 같았습니다. 불을 끄고 잠을 청하다가도 몇 번씩 일어나서 묵상한 내용을 기록하곤 했습니다. 우선 말씀에 끌리면 성경을 많이 알게 될 것입니다. 골이 깊어야 물이 많은 것처럼 풍성한 말씀지식에서 설교가 샘 솟듯 할 것입니다.

2. 다 증거하는 과제입니다. 성경을 이기적으로 이용한다면 축복설교만 잘 하면 되겠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4:4)” 하셨고, 모세와 사도들은 다 증거하였다(40:16, 5:20)”고 하셨습니다. 저는 처음에 성경의 부피 많은 것을 안 좋게 생각했으나 나중에는 만일 성경이 몇 페이지 뿐이었다면 큰 일 날뻔 했다는 생각으로 고쳤습니다. 성경 분량이 많기 때문에 새로운 설교를 하기가 쉬워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말씀(성경)을 신앙생활의 양식과 지침으로 주신만큼 증거자는 빠짐없이 증거하고, 또 성경을 전체적으로 배우는 성도를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요절연구를 만든 이유입니다.

3. 전체를 증거하되 증거한 내용을 기록으로 남기면 몇 배의 효력을 볼 것입니다. 모세는 다 기록하였다하셨고(31:24), 욥도 자기의 깨달은 바가 기록되기를 사모하였으며(19:23~24, 철필과 연으로 영영히 새겨졌으면), 바울은 더욱 더 기록으로 끝을 본 분 아닙니까?(3:3~4) 하나님이 저에게도 기록하는 은사를 주셔서 저도 100권 이상의 글을 홈페이지에 올리게 된 것입니다. 성경을 이용하는 자가 되지 않으려면 다 증거하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4. 가르치는 노하우가 있어야 합니다. 이 노하우는 성령님이 주시는 지혜입니다. 대구의 어떤 목사님이 늘 40분쯤 설교를 하다가 미국교회를 보시고 온 후에 15분으로 줄였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성경 본문의 의미만 짧은 시간에 확실하게 가르치는 것이 잘 하는 설교인 줄 압니다. 성경 전체를 가르치려면 교육 자료를 순서대로 편집하고 학년 별로 적응하도록 합리적 교육 방안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전체 교인을 한 자리에 모으고 하는 설교는 사랑실천을 강조할 것 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성경을 읽고 설교를 했는데 결론은 사랑 실천하라는 부탁을 길게 설명한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적 핵심 설교를 짧게 하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5. 마지막으로 주님의 분부는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것입니다. 성경적 명령이면 벌벌 떨면서 지켜야 하는데 요즈음 설교를 듣고도 지키지 않는 것이 누구의 책임입니까? “가르쳐 지키게 하라하셨은즉 가르치는 자의 책임이 중한 것입니다. 그래서 가르치는 자는 반드시 지키는 모범을 보이면서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나는 지금도 지키는 모범(사랑 실천)이 부족한 것을 늘 안타깝게 생각하고 죄인 노릇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80과 꿀보다 더 단 말씀 (119: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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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기자는 주의 말씀의 맛이 어찌 그리 단지요 꿀보다 더하다하였고, 그러므로 주야로 묵상하는 자가 복이 있다(1:2)”고 하였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모셨을 때 접대하는 일을 중요시 하였지만, 마리아는 주님의 발 아래 앉아 말씀 듣는 일에 열중하였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마리아가 좋은 편을 택하였고 먹는 것은 몇 가지 또는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다(10:38~42)”고 하셨습니다. 구약시대에도 율법을 손목에 매고, 미간에 붙이며, 표를 삼고, 앉았을 때, 누웠을 때, 다닐 때 등 언제든지 강론하라(6:5~9)” 하셨지요. 문제는 말씀이 좋고 달고 땡겨야 그렇게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성령님은 말씀(진리)의 영이시기 때문에(14:16) 성령님의 역사가 크게 나타날 때 말씀이 풍성해 지는 것입니다(3:16). 6.25 이후에는 가난하고 설탕이 귀했으며 고아들이 배고픈 고생을 했습니다. 한 번은 저희 집 찬장에 있는 설탕 봉지가 없어졌는데 그 다음날 고아원의 어떤 아이가 어두운 골목을 혼자 너무 자주 드나드는 것을 보고 이상하여 들어가 본즉 거기에 저의 집에서 없어진 설탕 봉지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달고 땡겼으면 그렇게 하였겠습니까? 제가 말씀을 묵상할 때 잠이 오면 자야 하는데 잠들만 하면 떠오르는 말씀이 있어서 일어나 그 말씀을 메모하고, 또 누워서 잠들만 하면 또 생각이 나서 또 일어나 메모하는 일을 3~4회 반복하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말씀에 붙잡히고(18:5), 말씀이 샘 솟듯 하면 잠을 편히 자기 어렵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꿀같지 않고서야 그렇게 되기 어렵겠지요. 이런 현상이 하나님의 은혜로 된다는 것을 말씀 드리고, 제가 이런 은혜 받은 사실을 간증하려고 합니다. 목적은 여러분들도 말씀에 끌리는 은혜를 받으시라는 데 있습니다. 제가 21세 때 기도를 힘쓰면서 성경읽기를 사모하고(그 성경이 보존되어 있고 회고록에 기록한 듯함) 통회하는 체험을 하였는데, 그 무렵 군에 입대하여 하나님의 특별한 인도를 받고 신학교까지 가게 되었지요. 제가 신학을 할 때는 말씀에 뜨겁지 못하였고, 목사 초기에는 설교를 하려니까 성경을 살피지 않을 수 없었는데, 50대 초반에 기독교 신앙백과를 집필, 출판한 때부터 말씀이 좋아지고 기록 남기는 것이 좋아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성경강론을 쓰면서 66권 강론을 다 쓰지 못 할 것을 예상하여 요절 연구집을 쓰게 되었는데, 그때부터 심방하고 전도하며 사람 만나기가 싫어진 것입니다. 성경 연구에 쓰는 시간은 금같고, 밖에 나가서 사람 만나는 시간은 흙같이 느껴져서 점차 목회에 지장을 주게 되자 목회 쪽을 택할 것인가? 말씀 쪽을 택할 것인가? 를 결정할 입장이 되었지요. 그때에 눅 10:42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했다는 말씀이 내 마음을 찔러서 기성교회 목회를 58세 때 사임하고, 9명의 가족과 함께 나왔으니, 주위 사람들이 다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본 줄 압니다. 혹 오해하는 사람은 못 견뎌서 나왔을 것이라고도 하겠지만 그것이 아니고 말씀 쪽을 포기할 수 없어서 목회를 포기한 것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말씀이 꿀같은 은혜를 체험하시면 좋다는 뜻입니다. 새벽기도 설교를 끝내면 보통 30분 이상 그 자리에서 기도를 하고 나오지만 저는 그 시간에 말씀이 떠올라서 그것을 메모해야 하기 때문에 기도를 계속 못하고 일어나곤 하였습니다. 건강을 위하여 산책도 필요하지요. 그러나 말씀묵상과 기록이 밀려있고, 또 저를 그쪽으로(취미상) 끄는 힘이 있기 때문에 앉아서 글을 쓰면 편안하지만 산책은 할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이 시간에도 산책을 하면 좋을 시간에 이 글을 쓰고 있으니까요. 또 한 가지는 제가 예배당 서재에서 잠자고 혼자 자취를 합니다. 몇 년 되었습니다. 주택은 150m 옆에 있지만 거기서 차려주는 식사를 하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다.

1) 말씀을 쓰다보면 식사 시간 맞추기가 어렵습니다. 음식 식기 전에 맞추어 먹기가 어렵고,

2) 된밥, 진밥(나는 진밥을 먹음)의 차이와 식사하면서 TV 보는 프로그램의 차이가 있어서 불편하고,

3) 반찬도 제 식성에 따라 단조롭게 시행되지 않으니까 불편한 것입니다. 그래서 식사독립을 하니까 너무 편리합니다. 슈퍼마켓이 곁에 있고 시설이 편리하기 때문에 자취하는 것이 저에게 아무런 부담이 없습니다. 반찬 한 두 가지와 국만 있으면 되니까요. 그리고 그것을 준비하면서 뉴스도 듣고 말씀 묵상도 하니까 시간을 일거삼득(식사준비, 뉴스, 성경)으로 쓰는 것입니다. 자동적으로 세월을 아끼라(5:15)”는 말씀이 시행되는 것이지요. 사람이 할 일이 없고, 바쁘지 않으면 심심하여 스트레스를 받는 줄 압니다. 그런 친구도 있습니다. 바쁠 바에는 가장 보람있는 일에 바빠야 할 것입니다. 요즈음 교회가 없어서 목회 못하는 목사가 얼마나 많습니까? 따라서 제가 일찍 목회를 중단한 일에 대하여 교회나 하나님은 손해 보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글을 남기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모든 목사님들이 다 원고를 써서 설교를 합니다. 그래서 아는 친구에게 원고를 조금만 다듬으면 남기는 문서가 되니까 그렇게 하십시오한즉, 그것이 잘 안된다고 하시더군요. 저는 꿀보다 더 단 말씀을 체험하고 메모를 잘 하는 덕분에 100권 이상의 기독교 신앙자료를 남길 수 있게 된 것이 좋은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81과 주의 말씀이 흥왕함 (19: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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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목은 주의 말씀이 흥왕함입니다. 20절에서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하셨는데, 본문을 살피면 8~10절은 “(에베소에서의)말씀 사역이고, 11~16절은 희한한 능력을 나타내심이며, 17~20절은 말씀 흥왕의 결과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현실 교회의 지도자나 성도들이 말씀을 흥왕되게 하시라는 것입니다. 기독교 초기에 잘 흥왕한 교회가 요즈음 침체된다고 하는 것은 말씀 사역이나 배우는 일에 등한히 하기 때문이라고 진단을 하는 것입니다. 혹 사역자나 성도 중에 말씀 흥왕에 집중하는 분도 계시겠지만 대부분의 성도가 바쁘고 피곤하여 말씀 연구, 또는 하나님을 가까이 따르는 일에 소극적이고, 교회나 사역자나 단체 활동 중에서 저절로 얻어지는 은혜가 있기를 바라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으로는 하나님의 역사를 이끌어 체험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보시면 베드로의 설교에 이어 회개와 믿음의 역사가 일어났고(2:14~47, 10:25~48), 스데반의 설교로서도 큰 기사와 표적이 나타났으며(6:8~7:60), 본문 말씀은 사울사도와 그 제자들이 에베소에서 말씀 사역을 흥왕시키므로 부흥의 역사를 힘입은 것을 기록한 것입니다.

2. 8절을 보시면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것(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강론하고 권면하였는데, 그 정도에서 하나님의 역사는 나타나지 않았고, 오히려 마음이 굳은 자, 순종치 않는 자, 도를 비방하는 자들이 생긴 것입니다. 이때는 아주 포기할 것이 아니라 감자가 덜 익었으니 불을 더 때고 계속하라는 뜻으로 이해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석 달 동안 안 듣는 자들을 떠나서 제자들을 따로 세워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며 2년을 힘쓰니까 그때부터 주의 말씀을 듣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안 듣고 비방하는 자는 떠나고 듣는 자가 생길 때까지 2년을 꾸준히 가르친 것입니다. 그러더니 말씀 사역 2년 후부터 하나님이 역사해 주시기를 시작한 것입니다. 희한한 능력을 베푸셔서 병이나 악귀가 바울의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얹을 때 떠나는 역사가 일어났고, 그것을 흉내 내는 자까지 생겼으며, 심지어는 제사장의 아들까지 악귀 쫓는 흉내를 내다가 봉변을 당하는 일까지 일어난 것입니다. 이것은 말씀이 적어도 2년 동안 흥왕했을 때 일어난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말씀 흥왕에 몰두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희한한 섭리를 체험하실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말씀의 흥왕은 많은 부흥을 가져왔습니다. 17~19절을 보시면 유다인, 헬라인이 다 두려워하였고, 예수님의 이름을 높였으며, 믿는 자가 많이 와서 자복하고, 마술사들이 책을 불사르는 변화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한즉 이런 세력이 나타난 것입니다.

3. 지도자나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의 개인생활과 교회에 말씀이 어느 정도 흥왕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말씀의 역사가 미약한데 머물지 않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도 바나바와 바울의 말씀 사역으로 부흥이 일어났고(11:19~26), 베뢰아 교회도 역시 말씀 사역으로 부흥이 일어난 것입니다(17:11~12).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하기 위해서는 교역자(가르치는 자)도 말씀에 빠져야 하고, 성도들도 말씀을 배우려고 교역자와 경쟁을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교인 몇 사람이 목사님에게 성경질문을 자주 해 보십시오. 목사님이나 교사는 그 답변 연구 때문에 눈코 뜰 시간이 없을 것입니다. 잠잘 시간도 없고, 나갈 시간도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대답을 받을 때 반드시 문서로 주고 받아야 신중하고 근거가 남을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말씀 흥왕에 빠지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12세부터 문답을 하셨고, 자세히 설명하신 분이었으며(2:46, 24:27), 18:5에서 바울이 말씀에 붙잡혀 그리스도를 밝히 증거하신 것처럼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가 말씀의 맛을 알아(119:103) 빠져들 때 비로소 주의 말씀이 흥왕하게 되는 것입니다. 3:16에서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야 한다하셨고, 살후 3:1에서는 주의 말씀이 너희 속에서 달음질해야 영광스럽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4. 저는 말씀에 달음질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떤 설교자가 성경을 읽었으면 저 말씀에서는 어떤 내용을 말해야 하고, 내가 알고 싶은 것은 무엇인데 그것을 설명해 주었으면 좋겠으며, 저 본문을 풀어 설명할 때 10분이면 족할 것이라는 예측을 하고 듣습니다. 그런데 설명해야 할 핵심도 말 안하고, 본문과 상관없는 말로 시간만 끄는 경우가 있으니, 이런 것은 달음질이 아니라 시간낭비요, 뒷걸음질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증거자는 반드시 그 말씀이 기록으로 나타난 이유를 분명하고 짧은 시간에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5. 그리고 또 중요한 것은 시 1:2에서 주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가 복이 있다하시고, 3절에서는 말씀 묵상하는 자의 받을 복이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아서 마르지 않고 무릇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묵상하고 형통도 경험하셔야 합니다. 형통 중에 가장 큰 형통은 주님이 곁에 계시면서 필요에 따라 공급해 주시는 은혜인 것입니다. 이런 은혜를 체험하시면서 말씀 흥왕에 힘쓰고 빠져 들어가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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