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갈라디아서 1장11-12절)
이것은 1장의 중심 주제이며 2장 끝까지이어진다. 하나의 반박의 말과 하나의 방어의 말이다. 여기서 바울은 일종의 불후의 역사 이야기를 낭송하고 있다. 제롬은 이것을 조화시키려고 애쓰는 중에 걱정으로 자신을 고문하여 힘든 노력을 기울인다. 그러나 실제 문제는 건드리지도 못한다. 바울의 목적과 의도를 깊이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에 기록된 역사이야기들은 종종 간결하고 혼돈되어 있다. 따라서 쉽게 조화될 수 없다. 예를 들면 베드로의 부인과 그리스도의 수난 이야기 등이 그렇다. 바울은 여기서 전체적인 역사 이야기를 낭송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나는 이것들을 조화시키려는 노력과 관심에 힘을 소모하지 않는다. 바울의 목적과 의도에만 주의를 기울인다.
이 구절의 중심주제는 이것이다. “나의 복음은 사람에 의한 것이 아니다.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다. 나는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받았다.” 이 주제를 그는 결코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서약으로 그것을 확증한다. 바울은 그가 복음을 사람에게서 배우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받았음을 갈라디아 사람들이 믿도록 만드는 엄숙한 증거를 지니고 있다. 그들은 바울이 거짓말 하는 자들이라고 비난한 거짓 사도들은 말하기를 바울이 그의 복음을 사도들에게서 배웠다 하였기 때문이다.
바울이 자신의 복음은 “사람의 것이 아니다”라고 말할 때, 그것은 그의 복음이 인간적인 것이 아니라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자명한 것이라고 자랑하였기 때문이다. 바울이 뜻하는 것은 그의 복음을 인간의 사역에 의해 배운 것이 아니며 인간적인 수단 통해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인간의 사역에 의해 배우거나 듣고 읽고 쓰고 그리는 등의 어떤 인간적인 수단에 의해 복음을 받는다. 그러나 그는 복음을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에 의해 받았다. 만일 다른 사람이 이와 다른 구별을 원한다면 내게는 상관이 없는 일이다. 바울이 그의 복음을 사람에게서 받지 않았다고 할 때, 그것으로 그는 그리스도는 단순한 인간이 아니라 참 하나님이신 동시에 참 인간이시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지적한다.
바울은 그의 복음을 다메섹 도상에서 받았다. 거기서 그리스도가 그에게 나타나 말씀하셨다. 후에 그리스도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다시 바울에게 말씀하신다(사도행전 22:17-21). 그러나 누가가 사도행전 9장에서 말해 주듯이 바울이 그의 복음을 받은 것은 노상에서였다. 그리스도는 말씀하시기를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사도행전 9:6) 하셨다. 복음을 아나니아에게 배우기 위하여 도시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아나니아는 가서 바울에게 세례를 주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를 손을 얹고, 그를 말씀의 종으로 위임하고, 그를 교회의 위탁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리스도는 아나니아에게, 바울이 여기서 자랑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계시로 노상에서 이미 받은 복음을 바울에게 가르쳐주라고 명령하시지 않는다. 아나니아 자신이 그것을 인지하고 있다.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그러므로 바울은 아나니아로부터 그의 교리를 받지 않았다. 오히려 길에서 이미 그리스도에 의해 부름을 받고, 깨우침을 받고, 가르침을 받고, 아나니아에게 보냄을 받았다. 이로써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설교하도록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는, 사람의 증거도 가지게 될 것이었다.
바로 그것을 바울은, 갈라디아 사람들이 바울을 싫어하도록 만들려고 애쓴 거짓 사도들의 비방을 반박하기 위하여 낭송하라는 압력을 받고 있다. 그들의 말인즉, 바울은 사도들의 생도들 보다 매우 열등하다는 것이다. 그들은 사도들이 가르쳐 준 것을 받았고 보존하였다는 것이며, 사도들의 행동을 오래 동안 보아왔고, 바울 자신 그들에게서 같은 것들 받았으나 지금은 그것을 부인하고 있다는 것이다. 갈라디아 교회 뿐 아니라 온 세상 교회의 조상이며 교사들이었던 저 사도들 보다 열등하고 그들의 권위를 무시하는 자의 말을 왜 듣겠는가?
사도들의 권위에 기초한 거짓 사도들의 이러한 주장은, 특별히 이 문제에 있어서 갈라디아 사람들을 압도 하는 일에 충분히 강하고 강압적인 것이었다. 만일 내가 갈라디아, 고린도, 그리고 그 밖의 예들에서 배우지 않았더라면, 많은 뛰어난 사람들을 포함하여 처음에 그토록 기쁘게 말씀을 받은 사람들이 이토록 빨리 압도당할 수 있었다는 것을 도무지 믿지 못하였을 것이다. 아, 큰일이다. 단 하나의 주장이 얼마나 무시무시하고 끝없는 손상의 원인이 될 수 있는가, 하나님이 그의 은혜를 거두었을 때 그 주장이 인간의 양심을 매우 깊이 관통함으로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고 마는구나!
이 교활한 거짓 사도들은, 믿음의 바탕이 확립되어 있지 못하고 아직 연약한 갈라디아 사람들을 쉽게 속였다. 뿐만 아니라 의(義)의 문제는 붙잡기 어려운 것이다. 의(義) 자체는 확고하고 확실한 것이기 때문에, 그 자체가 아니라 우리가 잡기 어렸다는 말이다. 나 자신 이에 대한 상당한 경험이 있다. 때때로 암흑 속에서 투쟁하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얼마나 자주 갑자기 복음과 은혜의 광선을 눈에서 놓쳐버리는지 알고 있다. 이 빛은, 두텁고 어두운 구름에 의해 희미해졌다. 다시 말하면 믿는 일에 성숙하게 확고히 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까지 발 디딤이 얼마나 미끄러운지 나는 안다. 우리는 그것에 대한 이해가 있다. 왜냐하면 그것을 가르칠 수 있기 ?문인데 이는 또한 우리가 그것을 가지고 있다는 확실한 표시이다. 아무도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을 남에게 가르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말이 있다. "가르치는 능력은 그가 알고 있다는 표시이다."
그러나 우리가 고난을 받을 때는 은혜의 말씀, 위로, 그리고 생명의 복음을 사용해야 하는데 율법, 분노의 말씀, 슬픔, 그리고 사망이 복음에 앞서서 소란을 일으키키 시작한다. 그것들이 양심에 일으키는 공포는, 시내산에서 있었던 두렵고 소름끼치는 광경보다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다(출애굽기 19:16). 율법의 위협을 어느 정도 제시하는 성경의 단 한 단락이 다른 어떤 위로도 압도하고 수렁에 빠지게 한다. 의, 은혜, 그리스도, 그리고 복음을 잊어버리도록 우리의 내면을 요동케 한다.
그러므로 우리로서는 매우 놓치기 쉬운 문제이다. 우리는 매우 불안정하기 ?문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우리 자신의 절반, 즉 이성과 그의 모든 힘에 의해 반대를 받는다. 더욱이 육(育)은 하나님의 약속이 참되다는 것을 확실히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육(育)은 영을 저항한다. 그러므로 육은 영(靈)을 대항해 싸운다. 그리고 바울이 말한 것처럼, 원하는 대로 굳건히 믿지 못하도록(갈라디아서 5:!7) 영을 포로로 잡아둔다 (로마서 7:23). 이 때문에 우리는 계속해서 그리스도적 지식과 신앙의 지식은 인간의 공적이 아니라 전적으로 신적인 선물임을 가르친다. 신앙을 창조하듯, 하나님은 우리를 신앙 안에 보존하신다. 처음에 말씀을 통하여 믿음을 우리에게 주듯이, 그 말씀으로 우리 안에서 믿음을 실천시키시고, 증가시키시고, 강화하시고, 완성하신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나님에게 드릴 수 있는 최고의 하나님 예배인 안식 중의 안식은 참된 경건을 실천하는 일이며, 말씀을 듣고 읽는 일이다. 한편 말씀에 지치게 되는 것 보다 더 위험한 일은 없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매우 냉담하여 충분히 안다고 생각하고 말씀이 몹시 싫어지기 시작하는 사람은 이미 그리스도와 복음을 잃어버렸다. 그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다만 사색으로 도달한다는 말이다. 야고보가 말한 바와 같다.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야고보서 1:23-24). 이것이 경솔한 열광주의자들의 마지막에 생기는 일이다.
그러므로 모든 신실한 사람들은 모든 힘으로 노력하고 애써 이 교리를 배우고 그것을 보존하게 하라. 그리고 이 목적을 위해 말씀을 계속 연구하고 명상하는 중에 하나님께 겸손히 기도하게 하라. 우리가 전에 없이 많이 행하였을 때에도 여전히 쉴 사이가 없다. 우리는 작은 적이 아니라 강하고 힘센 적을 수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계속해서 우리를 향해 공격한다. 즉 우리의 육, 세상의 모든 위험, 율법, 죄, 사망, 하나님의 분노와 심판, 그리고 마귀가 직접 공격한다. 마귀는 그의 불붙는 창으로 우리의 내면을 쉬지 않고 유혹한다. 그리고 외적으로는 그의 거짓 사도들이 우리를, 전부가 아니면 일부라도 이기려고 유혹한다.
그러므로 거짓사도들의 이 주장은 좋은 인상을 준다. 그리고 그럴듯하게 수긍시킨다. 오늘날에도 사도들, 경건한 교부들, 그리고 그들의 후계자들이 이런식으로 가르쳤다고 말하도록 많은 사람들을 납득시킨다. 교회는 이런식으로 생각하고 믿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게서 그의 교회를 이렇게 여러 세기동안 잘못에 머물도록 허락하실 수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말한다. “ 너희는 홀로 수 많은 성자들보다 지혜로운가? 전체 교회보다 지혜로운가? 이렇게 마귀는 빛의 천사로 둔갑해 가지고 교활하게 악한 위선행위를 통하여 오늘 우리를 공격하며 말한다. ”우리는 엄청난 말씀의 경멸자들과 박해자들인 교황이나 감독을 잠시도 두둔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수도사들의 위선을 증오한다. 그러나 교회는 수많은 세기에 걸쳐 이런식으로 믿었고 가르쳐 왔다.
복음의 교리는 모든 영광, 지혜, 의 등을 인간에게 가져다가 ,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오직 한 분 창조자에게 드리는 것이 마땅하다. 나아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라야 안전하다.여기서 나는 담대하게 선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복음의 교리는 모든 인간의 의와 지혜를 정죄한다.
여기서 나는 잘못될 수가 없다. 하나님과 인간에게 각각 속한 것을 합당하게 알아서 돌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는 거룩하다는 것, 교부들은 거룩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교회는 거룩하나 그럼에도 불과하고 여전히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마태복음 6:12) 마찬가지로 교부들은 거룩하지만 여전히 죄사함을 믿어야 믿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반대되는 것을 가르치면 나도 교회도 교부들도 사도들도 하늘에서 온 천사들도 믿어서는 안된다.
주님의 말씀만 영원히 있게 하라(베드로전서 1:25) 그렇게 하지 않으면 거짓 사도들의 논리가 바울의 교리에 반대하여 온통 우세하였을 것이기 때문에 전 교회와 사도들의 모두를 갈라디아 사람들 앞에서 한쪽에 줄지어 세우고 권위도 별로 없는 신출내기 바울만을 다른 쪽에 세우는 일은 엄청난 일이었다. 이렇든 이것은 유력하고 거의 결론적인 논의였다. 왜냐하면 아무도 교회가 잘못한다고 말하기 싫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만일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에 더하거나 반대되는 것을 가르치면, 그것은 잘못이라고 말해야 한다.
사도들의 수위자였던 베드로가 하나님의 말씀에 반대하여 살고 가르쳤다. 그러므로 그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그렇게 그가 과실을 저지르고 있었기 때문에 바을은 " 저를 면책하였다"(갈라디아서 2:11) 복음의 진리와 일치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바울은 그를 공격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거룩한 사도가 잘못하고 있는 것을 본다. 그러므로 나도 교회나 교부들이나 사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져오거나 가르치지 않는한 그들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에도 이 논의는 우리에게 말해주는 바가 크다. 왜냐하면 만일 교황도 교부들도 루터도 그밖의 누구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있는 단체에 관한 확실한 정보를 누가 우리의 양심에 가져다 줄 것인가? 우리인가, 우리의 대적자들인가? 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으며 가르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으니 말이다. 다른 한편, 교황주의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지도 않으며 가르칠 수도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믿지 않는다. 그들은 도리어 우리를 가장 야비한 이단으로 그리고 백성을 유혹하는 자로 심히 증오하고 박해한다.
여기서 무슨 일을 해야 할 것인가? 세상이 우리의 가르침을 듣지 않고 용납하지도 않는다하여 무엇이나 그들이 원하는 대로 가르치는 권리를 가져야 하는가? 우리는 바울과 함께 순수한 복음을 가르친다고 자부한다. 교황이나 어거스틴이나 사도나 하늘에서 온 천사들이나 다른 어느 누구라도 다른 것을 가르치면 그와 그의 말을 저주받게 하라.
-마르틴 루터-"갈라디아서강해"중에서(루터대학교출판부)
출처: 생명나무 쉼터 원문보기 글쓴이: 생명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