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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사순절 주일설교. 인자가 온 것은 섬기려 하고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가복음 10장 35~45절)

에반젤(복음) 2022. 3. 13. 03:08


사순절 주일설교. 인자가 온 것은 섬기려 하고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가복음 10장 35~4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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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수요일(3월 2일, 재의 수요일)부터 사순절이 시작 되었습니다. 사순절은 부활주일이 되기 전 40일 동안을 말하는데, 한 순은 열흘의 기간을 말하고 주일을 제외하고 지키기 때문에 6주가 조금 넘는 기간입니다.


사순절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 하신 우리 주님을 깊이 묵상하며 인내하고 절제하며 참회의 시간을 보내는 절기입니다. 오늘부터 부활 주일까지 예수님이 성경의 기록을 통해 남겨주신 보배로운 말씀을 함께 나눌 때에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으로 감동과 감격의 시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은 결혼하지 않은 처녀 마리아의 몸을 통해 성령으로 잉태 되시고 많은 사람들의 예언과 축복을 받으며 태어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표면상으로는 요셉이라는 아버지가 있었고, 예수님은 30세가 될 때까지 목수의 아들로 자랐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동네 방네 다니며 이 아이는 결혼하기도 전에 성령으로 태어났다고 말을 할 수 없는 처지였기 때문에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이 그저 목수의 아들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예수님이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까지는 부모조차도 예수님이 정말 천사가 예언한 대로 세상을 구원할 자인지, 언제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될지, 어떤 인생을 살다가 어떤 결말을 맞이할 것인지 확실하게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사역을 하시면서도 자신이 이 땅에 오신 하나님 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셨습니다. 사람보다도 귀신들이 가장 먼저 예수님의 정체가 하나님의 아들 이라는 것을 알아봤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자신의 사역이 어떻게 마무리 될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드러내신 적이 있습니다. 무려 세 번에 걸쳐서 예고를 하셨는데, 그것은 바로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 그리고 부활에 대해서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비밀을 제자들에게만 미리 알려 주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죽음과 부활에 대해 세 번째 예고하신 직후에 벌어진 일을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에 나오는 33, 34절을 읽어 드립니다. “33.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겠고 34.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 아멘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가리켜 인자, 사람의 아들이라고 말씀 하십니다. 인자라는 호칭을 사용 하신 것은, 우리와 성정(인간으로서의 성품과 감정)이 완전히 같은 한 인간으로서 갖은 능욕과 희롱과 고통을 받으셨음이 강조되는 호칭입니다. 예수님은 신이셨기 때문에 신적 능력을 힘입어 십자가를 참아내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몸으로 그 모진 고통을 다 받아내신 겁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수난당하실 것을 세 번째 예고 하시면서 매우 비통해 하셨을 겁니다. 이 고난 예고를 모든 제자들이 분명하게 다 들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이 이어집니다. 35절을 읽어 드립니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아멘


기가 막히고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능욕과 고난을 말씀 하셨는데, 제자들은 이에 대해 반응을 보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야고보와 요한은 무엇이든지 요구하는 것을 들어 달라고 은밀하게 청탁까지 하고 있습니다. 이해가 가는 측면이 분명히 있습니다. 당시 제자들은 고난 예고를 세 번이나 들었다고는 하여도, 설마 예수님이 죽기까지야 하겠는가 라고 판단했을 개연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제자들의 반응과 태도를 보면서, 우리들의 모습, 내 자신의 모습, 그리고 한국교회들의 모습들을 살펴 보며 사순절 기간에 성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당시 제자들이야 몰라서, 무지해서 그런 반응을 보였다고 하더라도, 지금 시대의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이 이미 침 뱉음 당하시고, 희롱 당하시고, 구타 당하시고, 조롱 당하시고, 수모와 수치를 당하시고, 채찍질과 못 박음 당하시고, 극한의 고통속에서 6시간 동안 십자가에서 매달리신채 피가 말라가면서 죽어가셨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명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모르면 몰라서 그렇다고 변명이라도 할 수 있지, 다 알고 있는 우리들이 야고보와 요한처럼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에는 무관심 하면서, “이것도 주시고 저것도 주시기를 원합니다. 왜 이 요구는 안 들어 주시나요, 구하면 다 주신다더니 지금 약올리시는 건가요, 주시지도 않을 거면 저한테 이래러 저래라 하지 마세요...” 이런 반응과 태도로 일관 한다면 우리 주님이 얼마나 마음이 아프시겠습니까?


“당신은 예수님 믿고 교회 다시면서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요?” 라고 물으면 “복 많이 받는 것이죠, 천국에 가는 거죠” 라고는 서슴 없이 말하면서, “내 인생에 어떤 고난과 고통이 온다 할지라도 십자가에서 죽음까지 감당하신 예수님처럼, 나도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에 기꺼이 동참하며 살아가고 싶습니다” 라는 고백은 눈을 씻고 찾아보기 힘든 지경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진짜 복은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믿음의 주인 되시는 예수님께 집중하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고, 예수님을 더욱더 알아가고, 예수님의 언행을 배워가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본분이 아닐까요? 우리가 아무것도 안하고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감각이 무뎌지고 게으름에 빠져서 예수님을 점점 잊어버린채 일상적인 신앙 행위만으로 만족한 채 믿음의 진보를 이루어 가지 못하고 있음을 각성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야고보와 요한의 이러한 요구는 언제든지 신앙생활 하면서 요청할 수 있는 기도의 제목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제대로 믿는 강하고 담대한 믿음을 요구하는 것보다 당장의 필요를 구하는 것이 앞세우고 있다면, 이것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무엇을 요구하여 받으려 하기 이전에, 예수님이 나를 향해 하셨던 일과, 앞으로 나를 통해 이루어 가실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오직 예수님만 구하고, 예수님만 잘 믿고, 예수님과 동행하며, 예수님이 하셨던 언행을 배워가면 됩니다. 여기에 집중하면 우리가 그토록 원하는 복중의 복이 넘치도록 풍성해 지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뭐가 우선인지를 확실히 해둬야 야고보와 요한처럼 예수님의 마음을 전혀 읽지 못하는 어러석음에 빠지지 않게 됩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요구를 들으신 예수님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예수님도 인간이시기 때문에 속상하시고 한편으로는 화도 많이 나셨을 겁니다. 아마도 사람 사이에서 이런 상황이 일어났으면 대판 싸우고 다시는 상대하지 말자고 절교하는 상황이 벌어졌을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이시기도 하지만 하나님 이셨기 때문에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시고 사랑의 성품으로 야고보와 요한을 상대해 주십니다. 36절을 읽어 드립니다.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아멘.


예수님은 속상하신 마음을 감추시고 제자들의 요구를 일단 들어 보고자 하십니다.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상황 판단도 못하면서 엉뚱한 요구를 하는데도 언제든지 부드럽게 대해 주시는 예수님의 따뜻한 사랑이 진하게 느껴집니다.


오해하지 마실 것은, 예수님이 들어 보신다고 했지, 들어 주신다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드리는 기도를 하나님은 다 들으시지만 모두 다 들어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무모함, 무지함, 맹목적인 떼쓰기, 허황된 것과 욕심들, 이러한 요구들을 일단은 다 들어 보시되, 잘못된 요구는 바로잡아 주시고, 포기하게 하시고, 다시 복음에만 집중하도록 교정해 주십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들의 요구 사항을 말합니다. 37절입니다. “여짜오되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아멘.


“영광중에서” 라는 말은 왕의 자리에 앉아 권력을 누리게 되시면 이라는 의미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이 대단한 인기와 군중들의 열화와 같은 지지에 힘입어 곧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를 것이라고 여겼나 봅니다. 곧 왕이 되실 예수님의 최측근에서 자신들이 권세를 누려보겠다는 야심(야욕)을 거침없이 드러낸 것입니다. 역사적으로도 어느 새로운 국가가 세워지면 논공행상을 통해서 개국공신들을 우대 하는 정책을 펼쳤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김치국을 한 사발이 아니라 한 통은 들이킨 것이 같이 헛된 욕심을 내고 있습니다. 이렇게 요구(요청)에만 집중하게 되면 예수님도 안 보이고 말씀도 안 보이고 그저 막무가내식이 되어 버립니다.


지금인 이런 말을 나눌 분위기가 아닙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조금이라도 눈치와 염치가 있었다면 나는 곧 침 뱉음의 치욕을 당한다, 곧 고통 받다가 죽는다, 이런 말씀을 하신 상황에서 청탁의 말을 감히 꺼내지 못했을 겁니다. 예수님이 이 요청을 들어주지 않으신 것은 너무나도 당연 합니다.


38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아멘.


예수님이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도다” 라고 하신 말씀이 무슨뜻인지 여러분은 잘 아실 겁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에 대해서 라이브(실시간)로 들었음에도 그 말씀에 대해 알아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을 두고 죽었다 깨어나도 모른다고 표현합니다.


고난 없이는 영광도 없다, 십자가 없이는 승리도 없다, 고통 없이는 면류관도 없다, 노력 없이는 성취도 없다, 이런 등등의 말씀이 신앙생활에 자주 적용 됩니다. 뭐가 항상 먼저 나옵니까? 고난, 십자가, 고통, 노력 이런 것들을 통과해야 비로서 영광이라는 단어에 마주하게 됩니다. 예수님 조차도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에 영광을 받으셨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십자가를 통과 하지 않고서는 그 어떤 영광, 그 어떤 복, 그 어떤 역사도 결코 일어나지 않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모든 것 다 제쳐두고 영광만을 요구했습니다. 표도 사지 않았는데 이미 마음은 ktx타고 부산에 내려가 횟집에 앉아 있었던 겁니다. 예수님은 두 사람에게 오히려 역으로 질문을 합니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여기에서 “내가 받는 잔”은 피 흘리고 죽어야만 하는 고난의 잔입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 하실 때, “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29) 라고 하셨습니다. 잔은 피할 수 없는 죽음의 잔입니다. 이 잔을 마셔야 영광을 받을 수 있습니다.


“내가 받는 세례”도 잔과 같은 의미입니다. 세례의식은 죄 사함을 받고 깨끗함, 거룩함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듭나기 전에 반드시 죽어여만 합니다. 세례식에서 물에 완전히 잠기는 것을 ‘침례(浸禮)’라고 하는데, 몸이 물 속에 완전히 잠겼다(죽었다)가 물 밖으로 나오게(거듭남) 합니다 물에 잠겼다가 솟아오르는 행위는 옛 사람의 더럽고 죄악된 모습을 반드시 죽여야만 거룩함으로 다시 살아날 수 있음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야고보와 요한에게, 너희도 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을 수 있겠느냐고 물어보신 겁니다.


39, 40절을 읽어 드립니다. “39.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내가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40.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준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아멘


“네 예수님, 저희들이 얼마든지 잔을 마실 수 있습니다. 준비 되어 있습니다. 물론 세례도 당연히 받을 수 있습니다” 자신감이 넘치는 대답입니다. 이 대화에서 예수님도 현재형으로 물으시고, 제자들도 현재형으로 대답합니다. “지금 당장 잔을 주시면 예수님 눈 앞에서 곧바로 마실 준비 되었습니다.” 라고 자신만만하게 대답을 했다는 의미입니다. 속된 표현이지만 무식(무지)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생각이 납니다.


예수님은 승인과 거부를 동시에 말씀 합니다.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내가 받는 세례를 받을 것이다”라는 승인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처럼 야고보는 12사도들 중 최초로 순교를 당합니다.(행 12) 자신들의 입으로 말하고 예수님이 승인 하신 것처럼 다 이루어졌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하겠다고 한 말들은 반드시 지켜야 하고,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거부하신 말씀으로 “내 좌우 편에 앉을 자가 누구를 위하여 준비 되었든, 준비된 자들이 앉게 될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너희들이 좌, 우에 앉을 자인지 아닌지는 하나님 아버지가 판단하실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또한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죽음 이후에 부활과 심판 이후에 있을 일이라는 것도 암시 한 것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도대체 자리를 주시겠다는 건지, 안 주시겠다는 건지 머리가 복잡해졌습니다. 대답은 했는데 잘한 건지 못한 건지도 판단이 서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우리 각자에게 이렇게 물으십니다. “① 너는 내가 십자가의 고난과 희생으로 인해 죽임 당했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하며, / 너에게 은혜로 주어진 구원의 선물에 항상 감사하며, / 내가 너에게 부탁하고 명령한 복음의 사명을 위해 죽도록 충성할 수 있느냐, ② 너는 어떤 인생의 고난과 시련이 온다고 하여도 내가 참아낸 십자가를 앞세워서, / 그 모든 일을 참아내고 견뎌내며 믿음의 잔을 마실 수 있느냐, / ③ 너는 어떤 시험과 유혹앞에서도 내가 행하였던 언행을 본 받아서, / 거룩과 경건을 지켜내는 성령의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대답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할 수 있나이다” 덜컥 대답했던 야고보는 제일 먼저 순교를 당했습니다. 모르고 대답했지만 그대로 실행이 되었습니다. 무서우시죠. 대답하시기가 두렵우시죠. 여러분, 주님을 깊이 생각하십시오. 예수님은 피 흘리며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훤히 다 알고서도 아버지의 뜻대로 순종하시기 위해서 고난의 잔을 기꺼이 마시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물으심에 어떻게 대답하고 반응해야 합니까?


대답하기를 결코 두려워 하지 마십시오. 엉겁결에 말해버린 나의 대답이 그대로 실행이 된다고 하여도 결코 물러서지 마십시오. 죽어야만, 고난을 당해야만, 잔을 마셔야만 영광의 자리에 앉을수 있다면 “아버지의 뜻대로 하겠나이다, 내가 할 수 있나이다. 내가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저와 함께하여 주옵소서” 십자가 앞에 엎드리며 강하고 담대하게 대답 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죽음으로 몰아가시는 분이 아니라 순종함을 보시려고 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사순절은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는 절기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는 다 연약하지만 예수님 안에서는 죽음도 이겨내는 강한 믿음으로 새롭게 될 수 있습니다. 나의 몸과 영혼을 오직 나의 구원자, 나의 주인, 나의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맡기오니 제 몸과 마음이 예수님처럼 순종의 사람이 되도록 은혜를 내려 주옵소서. 겸손의 사람이 되도록 은혜를 내려 주옵소서. 간절히 기도하시면서 십자가의 예수님과 동행하시는 사순절 보내시기를 축복합니다.


41절 말씀입니다.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화를 내거늘” 아멘. 야고보와 요한의 이 돌발 행동을 보고 나머지 제자들이 화가 많이 났습니다. 얌체 같이 자기들만 높은 자리 차지하려고 선수를 치는 야고보와 요한에게 모두가 화를 낸 것을 보면, 나머지 열 명의 제자들도 다 한 자리 차지하려는 마음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화가 날 것은 예수님인데 오히려 제자들이 들고 일어나 화를 내고 있으니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장면입니다.


저는 생각해 보기를, 예수님으로부터 가장 사랑을 받았다고 하는 사도 요한이 제일 먼저 나서서 형과 함께 이런 요구를 했다는 것을 보면서, 은혜와 사랑을 받으면 받을수록 얼마나 자신을 잘 점검해 나가야 하는지를 묵상해 봤습니다. 또한 사도중의 리더라고 할 수 있는 베드로 조차도, “너희들 예수님이 죽으신다는데, 능욕 받으신다는데 그런 헛소리들 하고 있느냐”라고 빼액 소리 한번 지르지 않았다는 것도 묵상해 봤습니다.


12제자 중에 단 한 사람도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지 않고, 오직 자기 몫만 챙기기에 급급함을 보고, 그래 이게 사람들의 진짜 모습이지, 그래 이 모습이 딱 내 모습이지, 라는 자조적인 웅얼거림를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왜 예수님이 오셨는지, 왜 예수님이 죽으셨는지, 왜 고난 중에 영광 받는 다는 것인지에 대해서 고민하고 적용하고 실천하려는 의지들이 점점 상실되고 있다는 심각성을 깨달아야 합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오늘 본문의 12제자들의 모습이 지금 현재 우리의 모습, 나의 모습임을 절감해야 합니다. 이러한 인식이 재생되지 않으면, 믿음의 진보를 이루어 갈 수도 없고, 내가 무엇을 하며 신앙생활 해야 하는지도 모르게 됩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해답을 제시해 주십니다. 42~44절 말씀입니다. “42.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43.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44.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아멘.


크고자 하지 말고 섬기는 자가 되라, 으뜸이 되려 하지 말고 모든 사람의 종이 되라고 말씀 하십니다. 죽어도 지고도 못사는 사람들이 우리들 아닙니까? 져주고 참으면 바보 천치라고 생각합니다. 조금만 손해 보는 것 같으면 악을 쓰면서도 반드시 얻어내고야 말죠. 이겨먹어야 속히 시원해지죠. 나도 별로 잘 난 것이 없는데 나보다 조금만 못해 보이는 사람을 무시하고 낫게 보며 깔보는 태도가 나옵니다.


잘난체 하고, 자랑질 하고, 힘으로 누르려 하고, 극히 이기적이고, 뒷담화 많이 하고,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다 뜻대로 안 되면 짜증내고, 자기 잘못 덮으려고 폭언하고, 힘쎈 사람 앞에서 굴욕적으로 아부하고.... 이런 모습이 다 인간군상들, 바로 내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태도들이 믿는 자들의 모습이 아니라, 예수님을 팔아 넘긴 집권자들의 모습이고,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의 모습이라고 말씀 합니다.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자들이라고 불리지 않습니까? 에수님 믿고 거룩한 무리들이 모였다고 해서 ‘성도’라고 불리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들의 언행과 태도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단 한 개라도 보여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이, “나는 이런 사람이야, 내가 이렇게 살았으니 너희도 이렇게 살아야 돼” 라고 가르쳐 주신 말씀이 45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아멘.


십자가 죽음의 희생으로 우리를 섬겨 주신 분이 예수님 이시고, 그 목적대로 오신 예수님은 완벽하게 우리를 섬겨 주시고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목숨을 대속물로 내어주시면서까지 섬겨주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십시오. 우리가 무엇을 하며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섬김을 받으려 하지 않으셨으며, 오직 섬김으로 우리에 대한 사랑을 증명해 주신 예수님만 깊이 생각한다면, 내가 무엇을, 어떻게, 왜 해야 하는지 충분히 아실 겁니다.


“섬김‘이라는 단어를 깊이 깨닫는 은혜가 있게 되면, “이것 주세요, 저것 주세요” 어린 아이와 같은 요청을 하기 이전에, 나에게 목숨까지 내어 주시려고 고통 받으신 예수님 앞에 머리를 숙이고, 대속물로 나의 죄 값을 보상해 주신 그 은혜 앞에 무릎 꿇게 될 것입니다. 더 이상 고개 들고 높아지려고 하지 않고, 낮은 자리에서 예수님의 섬김과 겸손과 사랑을 묵묵히 실천하며 살아가야겠다는 마음가짐이 생길 겁니다.


00교회 모든 성도는 참으로 고귀한 섬김을 받으신 예수님의 사랑 받는 자녀들입니다. 이제는 내가, 우리가 세상에 나아가 섬김을 베풀어야 합니다. 죽기까지 섬기지는 못할지언정, 남을 비난하고, 판단하고, 정죄하는 입술 만은 닫아야 합니다.


오직 이웃에게 복음만을 전하며, 우리 예수님의 고귀한 섬김의 모습이 나를 통해 세상에 선한 영향력으로 발휘 되도록,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며 예수님의 마음을 느껴보시는 사순절 기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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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을 깊이 묵상하라는 말씀에 순종하겠습니다. 섬김의 모습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우리 모두가 섬김의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도록 은혜에 은혜로 함께하여 주옵소서. 대속물로 섬기시려고 인자의 모습으로 이땅에 내려 오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하옵 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