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2장 5절~11절/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사는 인생은 실패가 없습니다.
5절에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오늘 본문으로 읽은 빌립보서는 사도 바울이 그가 세운 빌립보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빌립보서는 두 가지의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옥중 서신'입니다.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서 옥살이를 하고 있을 때, 내일 일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위험과 고생 가운데서 써 보낸 편지이기 때문에 그런 별명이 있습니다.
또 하나의 별명은 그와 대조적으로 '희락의 복음'이라고 하는 이름입니다. 옥중(獄中)에서 써 보낸 서신인데도, 그 내용이 처음부터 끝까지 기쁨과 감사로 충만하여 있기 때문에 이러한 별명이 붙어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에 대한 바울의 따뜻한 애정과 성도로서의 기쁨이 내재되어 있는 서신입니다. 그래서 희락(喜樂)의 복음이라고 합니다. 빌립보서4장 4절에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하는 이러한 말씀이 옥중에서 고생하고 있는 사람이 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큰 기쁨과 감사로 차 있습니다.
저는 빌립보서를 바울서신 가운데 특별히 사랑합니다. 빌립보 교회의 특징이 두 가지 있습니다. 첫째, 빌립보 교회는 사랑이 많은 동시에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였습니다. 이를테면 사도 바울의 선교 비를 조달하였고, 그가 로마 감옥에 있을 때에는 위문금을 모아 보내면서 잘 돌보아 드리도록 배려하기도 했습니다. 두 번째 특징은 퍽 유감스러운 일입니다만, 내부적으로 어딘지 모르게 서로 시기하고 질투해서 교회가 하나 되지 못하는 바가 있었다는 점입니다.
빌립보서2장 2절에서도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라는 간곡한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저도 얼마 전에도 이 본문 말씀을 가지고 '하나 됨의 비결'이라는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만, 사도 바울은 이 본문에서 하나 되지 못하는 까닭을 일목요연(一目瞭然)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첫째, 자기 교만이 있으면 하나 되지 못합니다. 교만한 마음이 있는 곳에는 절대로 하나 됨이 없습니다. 둘째는 자기 우월감 때문에 하나 되지 못합니다. 사람마다 자신이 잘났다고 하는데 하나 될 리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의 말씀대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겨야 하나 됨이 있습니다.(3절) 남편인 나보다 아내가 더 낫고, 아내인 나보다 남편이 더 낫고…… 이렇게 상대방을 나보다 더 훌륭하다고 여길 때에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느 가정이든 어느 사회이든 너도나도 자기가 잘났다는 우월감을 가지고 있다면 그 가정이나 사회는 결코 하나로서 지탱하지 못합니다. 셋째는, 자기중심적이고 자기 집약적(自己 集約的)이기 때문에 하나 되지 못합니다. 내가 하는 일이나 말이 항상 올바르고 제일 잘한다고 생각하고 자신에게 집중하기를 바라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상대방의 처지나 형편은 아랑곳하지 않고 나의 이익만 챙기고 나의 의견만 내세운다면 절대로 하나 되어 살수가 없는 것입니다. 빌립보서2장 3~4절에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교만, 우월감, 자기중심적인 생각을 다 버리라고 한 이 말씀에 이어, 오늘의 본문은 한걸음 나아가 적극적으로 할 바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5절에 "이 마음을 품으라." 즉 하나 되지 못하게 하는 그런 악덕을 모두 버려 자기를 비운 다음에 '이 마음을 품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마음'은 헬라말로 '프로네이터'인데, 이것은 단순한 '마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가짐' 곧 '마음의 자세(attitude)'를 의미한다고 하겠습니다. '이 마음을 품으라.'고 하는 말씀을 어떤 성경에서는 'Have this mind……'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마는, 좀 더 깊은 뜻으로 해석하여 'Your attitude should be……'라 번역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다시 말하면 마음가짐을 그리스도의 그것과 같게 하라는 의미가 됩니다. 결국은 마음의 문제입니다. 행동이나 조직이나 구조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나라는 해방 이후 지금까지 우리는 하나 되어야 한다는 말을 많이 하고, 들어 왔습니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고 말했습니다. 말끝마다 단결을 부르짖어 왔습니다. 그러나 코로나19로 인하여 이제는 하나 되면 안 된다는 말을 더 많이 합니다. 어떻게든 만나면 안 된다고 말하며 모임 금지를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배를 함께 모여서 드리지 말고 개인적으로 하든지 아니면 영상으로 하든지 하라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는 또 힘을 하나로 모아야 된다는 말을 합니다. 정치인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하나 되기 위해 대화를 한다느니 회동(會同)을 한다느니 합니다. 의견을 하나로, 즉 합의(合議)를 보기 위해 만나는 것을 굳이 문자를 써서 '회동'이라고 표현합니다. 무엇이라고 표현을 하든, 뜻을 하나 되게 하자는 것이 목적인데, 그것이 안 됩니다. 별의별 소리를 다 주고받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이익을 위해 이익을 나누고 합의를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절대로 마음이 하나가 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익을 나누는 것에 마음이 하나가 된 것입니다. 왜 이러한 결과를 만들어 냅니까? 마음이 하나 되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한 자리에 모였다고 하나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가깝고도 먼 사이'라든가 '동상이몽(同床異夢)'이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30~ 40년, 아니 평생을 같이 사는 부부 사이도 마음이 하나 되지 못하면 서로가 남남입니다. 문제는 마음인데 그 마음이 나의 마음이거나 너의 마음이어서는 안 됩니다. 나의 뜻과 너의 뜻, 나의 의견과 너의 의견을 아무리 좁혀 봐야 아까운 시간만 낭비할 뿐이지 소용이 없습니다. 오직 '이 마음' 그리스도의 마음이라야 하나 될 수가 있습니다.
아주 오래전의 일입니다만 제가 수원에서 전도사로 봉사할 때에 한 청년이 예수를 닮아보겠다고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고 길게 길렀습니다. 사람들이 다 수군거리며 교회에서까지 머리카락을 좀 깎기를 권면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청년은 자신이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고 기르는 이유는 ‘예수님을 닮고 싶어서’ 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닮겠다는 데야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머리카락을 기른다고 해서, 또는 얼굴이 예수님과 비슷하게 닮는다고 해서 예수님과 같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을 닮아야지요. 마음가짐을 예수님의 것과 같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본받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어떤 마음입니까? 오늘의 본문이 세 가지로 요약해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 "자기를 비어(빌 2:7)"라고 말씀하십니다. 비우는 마음이 곧 예수님의 마음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헬라말로 '케노우'라고 말하고, 영어로는 'emptied him-self'라는 뜻인데, 기독론(論)에 있어서 아주 소중한 용어입니다. 비운 것은 하나님의 본체이신 분이. 하나님과 같은 분인데 스스로 비워버렸다고 하시는 것입니까? 빼앗긴 것이 아니라 스스로 버렸다. 포기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기권리, 자기지식, 자기경험, 자기능력, 자기의견을 다 포기해 버린 것입니다. 고아의 아버지 조지 뮬러의 생애를 연구하여 전기를 쓴 피어슨 박사가 한번은 조지 뮬러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해서 그토록 위대한 삶을 살 수 있었습니까? 어떻게 하여 그토록 아름답고 거룩하게 살 수 있었습니까?" 그러자 조지 뮬러는 박사님, 뮬러가 죽었던 날이 있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언젠가 무슨 계기로 뮬러라고 하는 존재는 땅에 떨어져 완전히 깨어지고 죽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닮아 살아가느라고 오늘에 이른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경험이 있습니까? "나 아무개는 완전히 깨어져 죽어 버렸다"고 말할 수 있는 순간을 경험해 보셨습니까? 내일 죽는다고 하는 것은 철학입니다. 어제 죽었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나는 이미 죽어 버렸습니다. 나는 없습니다. 여기서부터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나'라는 존재는 십자가에 장사지내 버리고,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갈2;20) 있으나 없는 자처럼, 알아도 모르는 자처럼, 의인이되 죄인인 것처럼, 유능하되 무능한 자처럼, 유명하지만 비천한 자처럼, 그렇게 자기를 비우고 살아갑니다. 결코 자기 것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너무나도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랑이 마침내 자기를 이렇게 비우도록 만들었다는 말입니다.
두 번째는 "자기를 낮추시고(빌 2:8)"라 말씀하십니다. 자기를 낮추는 것이 예수님의 마음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뜻이지만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자기를 비우고 낮추셨습니다. 이 말씀의 헬라 말인 '타페이노우' 인데 자기를 철저히 비하시켰다는 의미로, 겸손을 의미합니다. 이 겸손은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다. 다른 말로 말하면 하나님이 사람의 형체를 스스로 취하시고 이 땅에 오셨다는 말입니다. 이 행위는 능동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면서 종의 형체를 가진 상대방의 신분으로, 내가 사랑하는 자의 형체로, 내가 위하는 자의 처지로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다른 형체를 가지고 사는 그 모습, 이런 비하된 모습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약해지고 죄인 되고 종 되고 비천해지고 어리석어 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의 마음입니다.
이렇게 낮추지 않으면 주님의 뜻을 알 길이 없습니다. 어떤 랍비가 제자와 함께 길을 가는데 제자가 질문을 합니다. "선생님, 진리란 길가에 있는 돌멩이처럼 널려 있다하시면서 어디에나 진리는 있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왜 그 진리를 터득하지 못할까요?" 랍비가 대답합니다. "진리를 돌멩이처럼 많지만 사람들의 허리를 굽히지 않기 때문에 그 돌을 주울 수가 없지." 허리를 굽혀야 돌을 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자신을 낮추어야 주님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빌 2:8)"복종하는 마음이 그리스도의 마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후페코오스'라고 하는 이 '복종' 역시 행동적인 용어입니다. 죽기까지 복종한다는 것은 무조건 복종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 이야기는 전설입니다만,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높은 산에 올라가시는데, 너희들 각자 돌 하나씩을 가지고 올라가자 하고 산 어귀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충성스럽게도 아주 큰 돌 하나를 들고 끙끙대면서 올라갔습니다. 요한은 아주 예쁘게 생긴 돌을 골라 가지고 올라갔습니다. 야고보는 성미가 급해서 아무 돌이나 마구잡이로 집어 들고 올라갔습니다. 의심이 많은 도마는 돌은 왜 가져가자고 하시나? 산 위에도 돌은 많은데…… 하면서 마지못해 하나 들고 가다가, 무거워지면 도중에서 가벼운 것으로 바꾸고, 또 가다가 좀 더 가벼운 것으로 바꾸고, 그것도 또 다른 것으로 바꾸고 해서 어쨌든 산 위에까지 하나 가지고 올라갔습니다. 가룟 유다는 역시 말썽입니다. "그것 참, 돌은 가져가서 무엇을 하겠다는 겁니까?" 하고 투덜거리더니, 아주 거역할 수는 없고 해서 주워 간 것이 밤톨만한 것이었습니다.
산 위에 오르자 예수님께서 손을 들어 축사하시는데, 제자들이 들고 있는 돌이 모두 떡으로 변했습니다. 베드로는 큰 떡을 가지게 되어 모두에게 나누어주는데, 요한의 돌은 아주 맛있는 떡이 되어서 예수님께 드렸습니다. 야고보는 마구잡이 덕이요, 도마의 떡은 설었으며, 유다의 떡은 말할 것도 없이 밤톨만한 것이었습니다. 우스꽝스럽기는 해도 이 이야기는 참으로 중요한 것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곧 복종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명령하시면 어떤 일이든 군말 없이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는 모습을 보십시오. "아버지,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 주십시오" 당신의 뜻이 따로 이렇게 있습니다. 그러나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하고 복종하십니다. 썩 좋지 못한 표현이지마는 '애비 없는 자식'이라고 하는 욕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아버지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복종의 덕을 못 배웠다고 나물하는 소리입니다. 어릴 때부터 복종을 배운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은 세상 살아가는 모양이 다른 법입니다. 복종의 덕을 익히지 못한 사람은 직장생활에서나 사회생활에서나 늘 불평이나 원망이 많습니다. 그래서 무엇 하나 제대로 안 되며, 세상 살아가기 힘들어합니다. 개성도 좋고 고집도 좋고 의지도 좋습니다. 그러나 어느 때에 가서는 딱 꺾어 버리고 복종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Jesus Christ, Superstar'라고 하는 영화를 보면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는 모습을 추리해서 좀 더 길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 대사를 가끔 외어 봅니다. "정말 내가 죽어야 합니까? 내일 아침에 이렇게 십자가에 달려 죽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이렇게 죽고 나면 내게 주시는 보상이 무엇입니까? 이렇게 억울하게 이렇게 모순되게 이렇게 죽어가고 말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이렇게 물으십니다. 그러나 마침내는 "좋습니다. 내가 죽겠습니다!" 하고 복종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십자가라는 것은 고통이요 수치요 모순이요 부조리입니다. 인류 역사상 예수님의 십자가처럼 모순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간혹 보면, 어려운 시어머니가 말을 하는데 며느리가 말대꾸를 하면 "어느 앞이라고 또박또박 말대꾸냐!" 하고 시어머니가 야단을 칩니다. 그러면 며느리는 "말대꾸하는 게 아니라, 이치가 그렇지 않습니까?" 하고 똑바로 쳐다봅니다. 여러분, 이치 따지고 순종할 것입니까? 어리석은 일입니다. 아는 척, 잘난 척하지 말아야 합니다. 시원치 않은 실패 투성이의 과거 경험 따위는 더 이상 내놓지 맙시다. 뚝뚝 잘라 버리고 복종하십시오. 그리스도께로부터 복종을 배워야 합니다.
복종할 줄 모르는 사람은 영광을 얻을 수 없습니다. 왜 화합이 없는가? 왜 하나 되지 못하는가? 그리스도의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왜 비굴하게 살아야 되는가? 그리스도의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마음으로 돌아갈 때에, 주님의 마음과 같은 마음으로 갈 때에, 하나님께서 영화롭게 높여 주실 것입니다. 왕권을 주실 것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곧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9~11절에서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오늘의 본문은, 주님께서 죽기까지 복종했더니 하나님께서 그를 만왕의 왕으로 높이시고, 모든 무릎을 그 앞에 꿇게 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는 주되심(Lordship)이라고 말합니다. 누가 주되심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누가 왕권을 부여받을 수 있을까요? 자기를 비울 줄 아는 사람, 자기를 비하(卑下)시킬 줄 아는 사람, 복종할 줄 아는 사람이어야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양보할 줄 모르는 사람은 왕이 되지 못합니다. 낮아질 줄 모르는 사람은 높아지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예수의 이름의 권세를 높여서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주님이 스스로 자신을 비워 낮추시고 겸손하게 맡겨진 사명을 감당함으로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축복을 허락하여 주신 것입니다. 오늘날 자신의 이름을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하고 자신의 이름을 높여보려고 하지만 실상은 주님의 이름만 높임을 받아야 함을 알아야 합니다. 내 이름을 주님이 아시고 주님의 이름을 높여서 내 삶도 존귀하게 됨을 얻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명령에 죽기까지 복종하신 예수님의 이름을 세상의 어떤 이름보다 높여서 하늘이나 땅이나 땅 아래의 모든 만물들도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하시고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 땅에 사람들은 어디에 무릎을 꿇고 있는지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자신의 이익을 위한 일에, 혹은 세상의 권세자들에게 무릎을 꿇고 그 앞에 복종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지만 주님은 이 세상의 권세자들이나 물질적 유혹 앞에 무릎을 꿇지 않으시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기 위해 자신의 전 생애를 헌신하고 복종한 결과 하나님이 그를 지극이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으로 축복해 주신 것입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세워짐의 기쁨을 얻는 성도가 되십시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예수를 “주”라고 시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내 삶의 주인이 누구냐 하는 질문은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이 세상에 살아갈 동안 사람들은 주인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물질이 주인이고, 어떤 사람들은 세상의 권세가 주인이며, 어떤 사람들은 지위나 명예가 주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주인이 한시적인 주인이 아니라 이생과 내생의 주인이 누구냐 하는 질문을 통해 바로 우리 주님이 우리의 영원한 주인이심을 알게 하셨고 이 사실을 아는 사람들만이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의 주인이 누구인지 정확히 알고 고백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주인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들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주님의 선하신 뜻대로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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