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년부의 방/성탄절 설교

[스크랩] 성탄절 주일설교.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누가복음 4장 16-30절)

에반젤(복음) 2021. 12. 25. 05:12





성탄절 주일설교.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누가복음 4장 16-3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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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성탄절입니다. 2천년 전에 왕의 권세를 지니시고, 복음의 기쁜 소식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신 아기 예수님의 탄생의 영광이, 세상의 모든 인류에게 희망과 회복의 은혜로 임하기를 소망합니다. 특별히, 아기 예수님이 우리 00교회 모든 성도의 마음에 구원의 빛으로 찾아오셔서, 오직 영생의 소망 가운데 평안의 일생을 살아가실 수 있기를 구원자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성령 충만함을 입으시고 고향인 나사렛 회당에 찾아오신 예수님 이야기입니다. 말씀 들으실 때에 우리 모두에게 복음의 기쁜소식이 충만하게 역사하는 하늘의 은총이 임하시길 축복합니다.


본문의 말씀을 하기 전에 회당이라는 장소에 대해 먼저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회당’(synagogue, 시나고게 혹은 시나고그)이라는 말은 함께(syn)와 인도하다(ago)의 합성어입니다. 말 그대로 함께 모여서 예배와 가르침이 인도 되는 장소를 뜻합니다. 회당은, 가장(家長) 10명 이상이 모이면 오느 곳에서나 세워 질 수 있었습니다.


다만 회당 출입은 13세 이상 남성만 가능했습니다. 여성분들이 화나고 어이 없으실텐데, 우리 주님 곁에서 항상 머물러 도왔던 분들이 여성들이었고, 남자들은 다 도망갔지만 십자가 죽음을 끝까지 지킨 것도 여성들이었고, 부활의 영광을 처음 본 사람도 여성이었습니다. 여성 분들이 자부심을 가지셔도 됩니다.


이러한 “회당”은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 지역에만 회당이 480여 곳이 있었다고 합니다. 회당은 특히 어린아이들의 성경과 신앙의 교육 장소 였는데, 6살에는 모세오경을 쓰고 읽기를 하였고, 10살에는 미쉬나(Mischna, 반복/가르침 – 구전 되어진 토라)라는 책을, 15살에는 게마라 (Gemara, 완성 – 미쉬나 본문으로 토론한 내용)라는 책을 배웠습니다. 이 미쉬나와 게마라가 합쳐진 책이 우리가 많이 들어본 탈무드(Talmud)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이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회당 예배에 익숙해 있었습니다. 안식일이 되면 당연히 예배당에 출입을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도 예수님이 안식일에 예배를 드리러 회당에 들어 가신 것으로 시작 되는데, 회당에 들어오시기 전에 예수님은 두 가지 큰 일을 겪으셨습니다. 하나는 세례를 받으신 일이고, 하나는 광야에서 40일을 지내시면서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신 일입니다. 예수님은 더 이상 목수의 아들이 아니라, 구원자(메시아, 그리스도) 로서의 공적인 사역(공생애)을 시작하신 이후였습니다. 평소 때와는 아주 다른 입장에서 회당에 출입을 하신 겁니다.


14절을 보면 광야 시험 후 예수님은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로 돌아가셨더니 소문이 사방에 퍼졌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는 오직 성령과 동행하는 사역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로 가서 시험을 받으셨고, 성령의 능력으로 마귀를 물리치셨고, 성령의 능력으로 치유의 기적을 보이셨고, 성령의 능력으로 권세있게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15절에서 “성령 충만하심으로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셨더니 때 뭇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셨다”고 했습니다. 성령의 권위와 능력이 예수님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신선한 깨달음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갈릴리 지역을 지나서 고향인 나사렛에 오셨습니다. 과연 예수님은 나사렛 고향 사람들로부터도 동일한 칭송을 받으셨을까요?


16절에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라고 하였습니다.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신 것은 어려서 부터의 습관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회당장이 아닌데도 성경을 읽으시려고 사람들 앞에 서셨다고 했습니다.


성경 낭독은 회당장만 독점하지 않았습니다. 회당장이 지목한 사람이나, ‘랍비’(선생님)로 불릴 만한 회중 인원 중에 누군가가 할 수 있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이전에도 회당에서 성경을 낭독할 자격이 주어지고, 읽어보셨던 경험자 였던 것 같습니다.


유대인 회당 예배 순서는, 말씀을 암송하고, 인도자가 공동 기도문을 낭독하면 아멘으로 화답하고, 낭독자가 성경을 읽는 순서로 예배가 진행 되었습니다. 낭독자가 성경을 한 구절씩 읽으면, 옆에서 한 사람이 당시의 공통어인 아람어로 통역하여 주었습니다. 영화 패션오브 크라이스트에서 예수님의 대화와 모든 유대인들의 했던 말들이 전부 아람어 였습니다.
회당에서 성경읽기가 끝나면 읽은 구절을 낭독자가 해석(해설)해 주거나 혹은 자신의 신앙을 간증하게 되고, 회중은 그 소리를 경청하는 것이 관례 였습니다. 마지막으로 회당장이 신명기에 나오는 제사장의 축도로 예배를 마쳤습니다. 현대 예배와 비슷한 순서로 진행이 되었습니다.


17~19절을 읽어 드립니다. “17.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아멘.


예수님이 기록된 데를 찾으셔서 읽었다라고 기록되었는데, 회당 예배에서는 자기가 읽고 싶은 본문을 뒤적이며 찾아서 마음대로 읽는 곳이 아닙니다. 모세오경과 예언서 중에서 하루 예배에 필요한 분량이 나누어져 있었고, 낭독자는 순서에 따라 읽으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관례에 따라 정해진 본문을 읽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읽으신 구절은 이사야 61장 1절과 2절 이었는데,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라는 말씀은, 성령 충만함으로 사역을 시작하신 예수님 자신을 정확하게 지칭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본문을 읽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었습니다. 예수님 자신에 대해 800년 전에 예언된 말씀을, 예수님 자신이 현재 시점에서 읽고 있는 이 느낌, 이 기분은 어떠하셨을지 궁금합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성령과 동행하셨다, 성령의 능력으로 사역을 시작하셨다는 의미를 훨씬 뛰어넘어서, 성령 하나님, 곧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셨다는 의미입니다.


당시 성경 낭독을 위해 회중들 앞에 서 계셨던 예수님의 외형은 목수의 아들인 인간의 모습이셨지만, 그 근본은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이신 하나님이 서 직접 현현 하셔서 사람들 앞에 서 계셨던 겁니다. 만약 사람들이 이 사실을 깨닫는 자가 단 한 사람이라도 있었다면, 그들은 얼굴을 대고 두려움과 경외감에 벌벌 떨었을 겁니다. 감히 예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드는 자가 없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 영안이 열리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18절, 19절을 원어에 충실하게 번역해 보면,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신 이유는, 혹은 목적이 무엇이냐면,
   ① 내게 기름을 부으시기 위함이며,(기름부음은 곧 왕으로서의 대관식)
   ②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함이며,
   ③ 포로된 자에게는 자유를 주시기 위함이며,
   ④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기 위함이며,
   ⑤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기 위함이며,
   ⑥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시기 위함이다, 이렇게 번역이 됩니다.


이 내용은 전부 예수님의 공생에 사역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드러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목적들을 전부 이루어 내셨습니다. 이 모든 일들의 발단이 누구였습니까?. 하나님의 계획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인하여 강력한 복음의 불이 붙기 시작했습니다.


곧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이 모든 목적을 이루시는 근본이 되십니다. 하나님이 직접 앞장서시지 않으셨다면 이 모든 일들은 단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았을 겁니다. 하나님이 직접 전면에 나서서 진두지휘 하신 역사가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사야가 예언한 모든 말씀 그대로를 다 이루시기 위해서 밤낮으로 수고하시고 수 많은 사람들을 찾아다니셨습니다. 아픈 자를 고쳐주셨습니다. 상처 받은 자를 위로하셨습니다. 절망에 빠진 자들에게 희망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누구라도 차별하지 않고 믿음을 받아 들이는 자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시고 부활 영생의 소망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낮고 낮은 모습으로, 겸손의 왕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셨습니다.


2천년 전 아기 예수님이 오늘 이시간 우리 모두를 다시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믿음으로 구원 받는 길을 알려 주셨습니다. 예수님과 동행하몀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모든 것이 은혜, 모든 것이 감사할 뿐입니다.성탄절에는 이 모든 은혜가 내게 임하였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무한한 감사와 영광의 고백을 올려 드려야 합니다.


광명교회 모든 성도는 아기 예수님의 탄생으으로 전해 주신 복음의 기쁜소식을 일평생 뜨거운 감동으로 간직하시고, 우리 주님과 항상 동행하고, 주님의 말씀에 항상 순종하며, 하나님 나라를 향해서만 힘차게 나아가시는 복음의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이 회당에서 말씀을 다 읽으신 후의 상황이 나옵니다. 20-22절을 읽어 드립니다. “20.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21.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22. 그들이 다 그를 증언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아멘.


예수님이 말씀을 다 읽고 나자 회당에 있는 사람들이 다 주목하여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과연 성경 내용을 무엇이라고 해석 하는지, 이 말씀으로 어떤 신앙간증을 하실지 듣기 위해서 집중하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성령의 능력으로 가르치신다는 소문이 널리 퍼져있었기 때문에 고향 사람들은 한층 더 기대감을 가지고 경청할 자세를 취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글(말씀예언)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표준새번역으로는 “이 성경 말씀은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오늘 이루어졌다.” 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담대한 선포입니다.


요약하자면, 예언의 말씀이 오늘 나(예수님)를 통하여 읽혀지고, 내 입술로 설명하는 것으로 완전하게 성취가 되었다, 이사야의 예언이 이루어졌다, 자신이 그 성취의 주인공임을 공개 석상에서 드러내신 겁니다. 실로 담대한 선포이지만, 한편으로는 당황스럽고 내심 무모하기까지 한 선포였습니다.


사람들의 반응은 예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이 은혜롭고 놀라웠다고 했습니다. 공동번역에서는 “사람들은 모두 예수를 칭찬하였고 그가 하시는 은총의 말씀에 탄복했다”고 했고, 우리말성경에서는 “모든 사람이 감탄하고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혜로운 말씀에 놀랐다”고 했고, 바른성경에서는 “모든 이들이 그분을 인정했다”고 했습니다.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이 한마디만 딱 듣고, 칭찬하고 감탄하고 인정하고 놀라운 은혜를 받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충분한 분량의 내용으로 설명을 하셨고, 그 은혜의 말씀들 중에서 함축적으로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라는 말씀이 대표적인 말씀 이었다는 겁니다. 여러분이 당시 현장의 청중이라고 생각하시며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해 보시면 남다른 감동의 은혜를 주실 겁니다.


그런데, 이런 감동적인 반응을 보이던 사람들이 갑자기 이런 말을 합니다.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찬물을 끼얹는 말입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일하시는 큰 은혜와 감동의 역사가 바로 조금 전에 있었음에도, 그들은 예수님이 목수의 아들일 뿐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그 은혜들을 격하시켜 버립니다. 자신들의 생각의 한계 안에 신적 권위와 능력을 일순간에 지워버렸습니다.


아는 만큼 보이고, 경험 한 만큼 행동한다는 말이 딱 이 상황에 적용되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의 반응이 어리석다고 할수 있겠지만, 성령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못하면 누구라도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일반적입니다. 제 자신도 이런 반응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함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면서 말씀의 은혜와 감동이 시시 때때로 주어지는데도,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라고 말하는 유대인들처럼, 조건과 상황과 현실에 따라 말씀을 재단하면서 은혜를 밀쳐 내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물컵에 물을 가득 따라 마시면서 입으로 들어가는 물보다 바닥에 흘려 버려지는 물이 더 많은 경우와 같습니다. 자존심, 체면, 부끄러움, 무감각, 무지, 성령의 소멸, 이런 나쁜 마음들은 은혜와 감탄을 순식간에 소멸 시켜 버리는 큰 장애물들이 됩니다.


아무리 말씀에 큰 감동을 받았다 한들, 그 말씀이 사람들의 생각과 말들 속에 섞여버리면 안개같이 사라지는 것은 일순간입니다.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예배당에서 이러한 말씀을 듣고 “아멘, 할렐루야, 은혜 받았습니다”라고 하셨다면,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라고 불쑥 솟아오르는 불신과 의심의 마음을 떨쳐버려야 합니다.


우리들의 마음 한 구석에 은밀하게 자리 잡고 있는 비 진리와 인본주의적 생각들을 깔끔하게 물리쳐야 합니다. 불의와 거짓에은 일체 타협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렇게 할 수 있어야 받은 은혜가 능력이 되어서 삶 속에서 거룩과 경건의 모양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성탄절에 예수님은 우리 모두를 찾아오셔서 담대하게 선포 하십니다.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00교회 모든 성도는 이 말씀에 아멘으로 화답하시고, 오직 믿음으로만 반응하시기 바랍니다. 깊이 새기시고, 빼앗기지 마시고, 잃어버리지 마시고, 꼭 지켜 내시기를 바랍니다.


혹시라도 내 마음 속에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라는 반목과 의심의 마음들이 솟아오르신다면 담대하게 물리치시면서, 오직 내 눈 앞에 서서 진리를 선포하시며 의의길로 인도하시는 우리의 구원자 예수님의 음성만을 따라가는 믿음의 소유자들 되시를 축복합니다.


예수님은 회중들의 반응이 무지함을 뛰어넘어 의심하는 마음과 목수의 아들이라고 무시하는 나쁜 마음이라는 것을 다 아셨습니다. 더욱이 칭찬과 감동과 인정을 했던 바로 직전의 은혜들을 깡그리 삭제 해버리는 매우 불순한 마음인 것도 다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기분이 많이 상하셔서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속담에 이르기를 “네가 의사라면 네 병 먼저 고쳐 봐라”라고 하면서 의사의 치료능력을 비웃는 속담이 있었는데, 너희들의 지금 속 마음은 소문에서 들은 것처럼 가버나움에서 행하던 가르침과 기적을 여기 고향에서도 한 번 해보라는 것 아니냐, 그런 담대한 선포를 할 정도면 뭔가 기적 하나라도 좀 보여줘야지 않겠어, 해 봐, 해 보라니까, 목수의 아들이 뭐 대단한 랍비나 된다고 저러나, 소문이 사실이라면 여기서 얼른 증명해 보이시오~ 라고 떠보고 있다는 것을 나는 다 안다.


예수님은 계속 말씀 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24절) 라고 하시면서, 엘리야도 고향 이스라엘의 많은 과부들이 있었지만 시돈 땅 사렙다(사르밧)에 사는 과부 한 사람으로부터만 도움을 받았고, 엘리사 선지자 때에는 고향(이스라엘)에 사는 수 많은 나병환자들은 고침 받지 못했는데 타국에 사는 나아만 장군 한사람만 고침을 받았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과거 역사에서도 선지자들은 고향에서 배척을 받았듯이 지금 현재 나도 너희들에게 배척을 당하고 있다. 하지만 너희들은 똑똑히 알아라. 너희들은 사르밧 과부처럼 가뭄 가운데서 풍성함의 은혜를 누리지 못할 것이며, 나병환자처럼 고통을 겪을 지라도 고침 받지 못할 어리석은 자들이구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라는 말을 금방 잊어 버렸느냐, 이 무지한 자들아, 라고 하신 겁니다. 예수님도 회중들의 오만한 태도에 불쾌하셨는지 매우 공격적으로 나오셨습니다.


듣고 있던 사람들은 이 말씀이 자신들을 비난하고 공격하는 말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28, 29절입니다. “28.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크게 화가 나서 29.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하되” 아멘.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의 분노의 모습을 보십시오. 이 사람들이 방금 전까지 예수님을 칭찬하고, 감동 받고, 놀라고, 인정했던 그 사람들 맞습니까? 예수님을 동네 밖으로 쫒아내어 산 낭떠러지까지 데리고 갔다는 것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예수님이 끌려가는 장면 같지 않습니까? 산 낭떠러지에서 예수님을 밀쳐 떨어뜨리려 했다는 것은 십자가에 예수님을 못 박는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30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 살았던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이렇게나 배척을 했다니 씁쓸함과 허탈함을 느낍니다. 사람은 아무리 친하고, 관계가 아무리 좋다고 하여도 언제라도 돌변하여 배반하거나 원수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존재이지만 사람은 믿음으로 상대할 존재가 결코 못 됩니다.


우리의 삶도 매 일반 아닌가요? 좋은 관계를 유지 하다가도 조금만 친하다 싶으면 선을 마구 넘으려고 합니다. 그것이 싫어서 조금 경계를 하면 성격이 까탈스럽네, 혼자만 잘났네 하면서 말들이 거칠어 집니다. 그러다가 어떤 일로 세게 부딪치는 일이 생기면 이제는 선이고 뭐고 없습니다. 나이도 어린게, 쥐뿔도 없는게, 찌그러진 호박 같이 생긴게, 시골 촌 구석에서 올라온게, 이런 말들을 마구 쏟아냅니다. 심하면 가족과 집안 까지 건드리면서 최악의 상황을 만들기도 합니다. 사람들의 내면에는 이런 악한 모습이 잠재 되어 있습니다.


30절, 본문 마지막 절입니다. “예수께서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 아멘. 표준새번역에는 “그러나 예수께서는 사람들의 한가운데를 지나 떠나가셨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죽이려고까지 했던 분노한 사람들 가운데를 당당하게 지나가셨지만 예수님의 권위에 압도 되어 감히 어느 누구도 예수님을 건드릴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라는 감동과 은혜의 말씀을 선포하시려고 고향 사람들을 찾아 오셨습니다. 하지만, 회중들 전체는 이 말씀을 귀로만 들었을 뿐이지 마음에 새기지는 못햇습니다. “귀 있는 자는 들을 지어다”라는 말씀이 생각 납니다.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라는 속담도 생각 납니다.


예수님이 마태복음에서 말씀 하시기를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마 7:6)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들을 귀가 있어 마음을 열고 듣는 자들에게는 성취의 말씀으로 찾아 오시지만, 마음에 의심을 품고 들은 말씀을 땅에 버리는 자들을 여지 없이 떠나 버리십니다. 기쁨으로 찾아오시기도 하지만, 냉정하게 떠나 시기도 하신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참 소망을 품고 대림절을 보냈습니다. 드디어 찾아오시는 성탄절을 맞이하여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성취의 말씀, 감동과 은혜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의 이면에는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의심과 부정의 마음, 무지와 무감각의 마음들이 도사리고 있음을 경계해야 합니다.


설레이는 대림절의 기다림의 시간을 지나고, 드디어 성탄의 기쁨과 감격을 맞이했습니다. 그런데 좋은 만남의 시간도 잠시 뿐, 어색하고 불편한 가운데 금방 헤어지게 되어서는, 그 만남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지 못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만나는 이유는 만남의 감격을 누리려는 것이 1차 목표라면, 더 크고 중요한 목적은 주님과 계속 동행하면서 평안과 소망 가운데 살아가기 위함입니다. 우리를 찾아오신 예수님이 냉정하게 우리 곁을 떠나게 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성탄절이 하루 만의 예배로 지나쳐서는 안 됩니다. 계속 주님이 내 곁에 머물러 계시도록 마음에 모셔 드리는 것이, 성탄절을 온전히 이루어가는 우리의 자세여야 합니다.


00모든 성도는, 이번 성탄절에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내 마음에 직접 찾아오셔서 선포하시는 우리 주님의 사랑의 음성을 기쁨으로 취하시고, 이 성취의 말씀이 영생 소망으로 나아가는 구원의 말씀으로 일평생 우리 삶에서 역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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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아기 예수님을 보내주셔서, 구원 영생의 참 소망을 주시니 감사와 영광을 올려 드립니다. 복음의 기쁜 소식되시는 우리 주님과 항상 동행하면서, 거짓과 불의를 물리치고, 구원과 승리의 길로만 나아가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영원한 나의 구원자, 나의 왕, 나의 주인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