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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 (요 20:24-29)

에반젤(복음) 2021. 12. 8. 21:54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 (요 20:24-29)

 

24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26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8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이 시간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의 은혜를 드리고자 합니다. 세상에는 하나님에 대해서 약 세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먼저, 봐도 믿지 않는 사람, 정신이 이상한 사람입니다. 혹은 봐야만 믿겠다는 사람, 이 사람은 불신에 속한 보통사람입니다. 혹은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 가장 좋은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입니까?

 

이 중에 봐야만 믿겠다는 사람은 오늘 본문의 도마와 같은 사람입니다. 한 사람도 아니고 제자들과 성도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이 오셨다고 그토록 말했지만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랑 많으신 주님은 여드레 만에 도마에게 나타나셔서 못자국과 창자국을 보여주시며 손가락을 내밀어 만져보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축복하셨습니다. 그리고 중대한 말씀을 남겨 주셨습니다.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왜 보지 않고 믿는 것이 더 복될까요?

 

1. 보고 믿는 것은 사실상 불신앙이기 때문입니다.

 

25절에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했는데 이 도마의 말이 보통 심각한 말이 아닙니다. 만져봐야 믿겠다는 말은 보고도 믿지 못하겠다는 말입니다.

 

눈으로 보는 것은 물론이고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도마의 이 말에는 콩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말 가지고는 믿지 못하겠다는 일종의 악의적이거나 조소섞인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그토록 말씀하시고 기적을 경험했으면서도 아무리 그렇다고 제자로서 이럴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왜 그렇게 악의 적으로 변했을까요? 본문에 도마를 소개하는 성경적인 근거는 24절 한 절입니다.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팔 일 전 그러니까 안식 후 첫 날 저녁 다시 말하면 주일입니다. 그 날 도마는 제자들과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나타나신 그 예배에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먼저 예배에 빠지면 그렇게 됩니다. 예수님을 만날 수 없고 그 시간에 세상의 소리만 듣기 때문입니다.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는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부활의 예수님을 만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더 온전한 예배를 드릴 수 있다면 이 자리는 우리가 임재를 느낄 수 있을 정도의 천국이 될 것입니다.

 

도마는 그 중요한 시간에 무엇을 했을까요? 거기에 대한 성경의 자료가 24절에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라는 말씀입니다. 이 소개는 도마에 대한 뭔가 배경을 말씀합니다. 디두모의 뜻은 “쌍둥이”입니다. 그러니까 똑 같은 사람이 한 사람은 제자지만 한 사람은 세상에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단짝이라면 쌍둥이보다 더 단짝은 없을 겁니다. 도마는 누구보다 세상의 소리를 가장 가깝게 들을 수 있었습니다.

 

마치 밖에 있는 쌍둥이의 한 사람처럼 도마는 그 시간에 세상을 돌아보고 있었습니다. 도마의 눈에 비친 세상은 그를 실망시키고도 남았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데 세상은 변하지 않고 온통 악인이 득세합니다. 세상은 여전히 로마의 압제 하에 비참하고 거짓이 난무하고 만왕의 왕 메시아의 제자라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악인들을 피해 숨어 숨조차 쉬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과연 메시아이시고 살아나셨다면 이런 일이 난무할 수 있겠는가? 예수님에 대해 야속하기도 하고 속은 것도 같고 그의 마음은 실망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러지 않고서야 예수님의 부활소식을 듣고도 그런 어처구니없는 악의적인 말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못자국과 창자국에 손을 넣어봐야 믿겠다는 조소 섞인 태도로 변했습니다. 나름대로 상처 입은 모습입니다.

 

그것은 정치적 메시야로 강림하신다는 당시 잘못된 유대인의 메시야관 때문이었습니다. 이 메시야관이 얼마나 제자들을 혼란케 하고 유대인들을 혼란케 했습니까? 이 사상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만큼 문제였음을 다 설명할 수 없습니다. 장차는 그렇게 되겠지만 하나님의 나라가 먼저 성령으로 임하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즉 도마는 육신의 눈만 밝았지 영의 눈은 없었습니다. 믿음이란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다란 전제가 깔려 있는 낱말입니다. 그래서 믿는다란 말을 하면 못 믿어서 믿는다 하냐고 반문합니다. 그만큼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그래서 히11:1에 “믿음은 -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 라 했습니다. 그래서 히11:1에 “믿음은 -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 라 했습니다. 여기 증거는 ‘엘렉코스’확신을 의미합니다. 보지 못하지만 확신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충분히 이해하시고 하나님과 그 말씀을 믿는 습관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2. 그리고 보고 믿는 것은 심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27절에 예수님은 도마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의심 많은 도마에게 주님은 못자국과 창자국을 다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도마가 만진 것은 극히 일부분입니다.

 

예수님은 촉각과 시각으로 다 알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체험해서 알았으니 그것도 복이지만 예수님과 연합된 삶의 은혜와 성경에 기록된 수만 가지의 약속을 그대로 믿어 누리는 그 복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안다고 다 아는 것이 아니며, 체험했다고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천국을 보고 왔어도 그 체험은 억만 분의 일도 안 됩니다.

 

더구나 체험이라고 다 완전한 건 아닙니다. 지금 사탄이 얼마나 거짓으로 미혹하는지 거짓말을 들려주고, 거짓 꿈을 꾸게 하고, 거짓 천국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다른 종교인들이 성도의 천국 간증에서 하나님 이름만 쏙 빼고 임사체험이라 해서 자기들 종교선전에 도용하기도 합니다.

 

보이는 대로 믿다가는 큰일납니다. 우리가 믿는 대부분은 보이지 않는 것이고, 혹은 믿어야 체험되는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봐야 믿겠다는 것처럼 어리석은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표적만 구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불신앙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전1:22에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는다 했고, 히3:7-9에는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에 거역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 년 동안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했습니다. 오직 말씀에 서서 온전히 믿고 소망하시기 바랍니다.

 

3. 보고 믿는 것이 어리석은 것은 그 과정이 혹독하기 때문입니다.

 

29절에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보고 믿는 것도 복되지만 보지 않고 믿는 것보다는 덜 복되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주님이 아주 부드럽게 표현하셨지 실재는 덜 복될 정도가 아니라 가혹하고 혹독합니다.

 

천국과 지옥을 봐야 믿겠다고 하다가 병으로 사고로 천국과 지옥을 보여주신다면 얼마나 가혹한 일입니까? 제가 아는 목사님이 날마다 천국을 보여 달라고 기도하다 알콜중독된 기사가 몬 버스에 부딪혀서 지옥과 천국을 보게 되었고 만신창이로 응급실에서 살아났습니다. 그 사람이 영의 세계에서 천사에게 ‘왜 저에게 이런 일을 당하게 해서 부르셨나요?’ 그랬더니 네가 날마다 그렇게 기도했지 않느냐 하더랍니다. 우리의 믿음대로 됩니다.

 

십일조의 진리를 믿지 못해 그 진리를 체험하고 믿겠다 하다가 하지 않다가 부도라도 나면 얼마나 고통스럽습니까? 그러기 전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현대종교의 탁명환 목사님께서 귀신의 존재를 알게 해달라고 기도했더니 얼마나 하나님께서 귀신 들린 사람을 많이 만나게 해주시는지 한 동안은 날마다 귀신 쫓아내려 다니다가 할 일을 못했다고 합니다. 체험으로라도 안다는 것은 복된 일입니다. 그러나 말씀으로 믿는 것이 훨씬 복됩니다.

 

간증했듯이 예배당을 건축하면서 하도 힘들어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증거를 보여 주세요’ 기도했다가 몇 층 꼭대기에서 한 청년이 가지고 올라간 그 큰 쇠뭉치가 이덕0 집사님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데 기적적으로 머리를 조금 숙이는 사이에 허리를 스치고 엉덩이에 맞았는데 아무 일 없었던 걸 체험하면서 함부로 그런 기도하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봐야 믿겠다는 것은 항상 보여주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믿음 없는 삶이 연속될 것이기에 더욱 가혹합니다. 초신자일 때는 자주 보여도 주시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말씀에 세우시기 위해서 점점 표적은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도마와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삶은 고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은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한다고 말씀합니다. 도마와 같이 보고 만져보고 넣어보고 믿으려는 것은 어리석은 불신앙이요, 너무 제한적이요, 속기 쉬울 뿐 아니라 너무 가혹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불신앙의 사람이 되지 말고 성경의 말씀을 모두 믿고 순종하는 가장 복된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