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자료실/- 신앙의 글

어떻게 주님의 은혜에 보답할까?

에반젤(복음) 2021. 9. 30. 19:29

데살로니가전서 3장 7절~13절/ 어떻게 주님의 은헤에 보답할까?

 

한 사업가가 어려운 중에 열심히 일하여 얼마간의 돈을 벌었습니다. 여유가 좀 생기게 되자 그는 전에 없던 불평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들이 낡아 보이고 보잘 것 없는 것이라고 생각되어 바꿔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우선 살고 있던 집을 팔기로 작정을 하였습니다. 집 건물이 우중충하고 정원도 짜임새가 없어 보여 도저히 더는 살고 싶지 않게 된 것입니다. 그는 전문가에게 의뢰해 광고 문안을 작성하여 신문에 광고를 냈습니다. 광고가 나가자마자 많은 사람들이 그 집을 사겠다고 모여들었습니다. 그 사업가는 다시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새삼 자기 집을 잘 살펴보니 자신의 손때가 묻어 있지 않은 곳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자신에게 꼭 필요하고 편리하게 꾸며져 있었습니다.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생활공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광고를 취소하고 집을 팔지 않기로 했습니다.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것이 얼마나 귀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스스로 평가하지 못한다면 불행한 일입니다. 현대인의 정신적 질환의 공통적이고 근본적인 증상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불만과 원망입니다. 불만과 원망의 깊은 뿌리에는 불신앙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불만을 품고 원망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갖고 있는 불만과 원망을 제거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면 첫째, 불만은 어디서부터 오는 것입니까? 그것은 상대적 가치 인식과 만족할 줄 모르는 병리적 욕망 내지는 허무주의로 기울어지는 세속적 욕구에서 비롯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내가 소유한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남보다 더 갖지 못해서 생기는 불만이고 불평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목회를 시작하면서 지금까지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가지지 못한 것을 갖기 위해 욕심을 부리지 않으려고 노력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사택이나 자동차 혹은 좋은 전자 기기에 대한 것들이나 교회에 필요치 않은 어떤 것들을 억지로 구입하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우리 형편에 따라 주어지는 삶에 감사하며 살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저보다 훨씬 좋은 조건을 가진 사람들이 더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불평하는 소리, 어렵다하는 소리를 들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많이 가졌다고 생각하고 만족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들은 지금의 것보다 더 좋은 것들을 갖고 싶어 하며 누리고 싶어 합니다. 모두가 상대적이기에 불만을 가지고 있으며 이를 채울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사람은 만족할 줄 모르는 마음이 문제입니다. 큰 것이든 작은 것이든 감사하게 여길 줄 모르는 이 병리적인 욕망은 밑 빠진 독과 같아서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끝이 없는 욕망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한 언론인이 프랑크 총독에게 행복해지는 비결을 물었습니다. 총독은 빙그레 웃으면서 "나는 행복해지는 비결은 모릅니다. 그러나 불행해지는 비결은 알고 있습니다." 하고 두 가지를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첫째는 이웃사람처럼 행복했으면 하고 남을 부러워하는 마음이 있으면 불행하다는 것입니다. 행복해 보이는 이웃도 그 나름대로 어려움이 있으니 이웃의 처지를 너무 부러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나이를 먹은 뒤에, 지나간 청년 시절을 그리워하며 그때처럼 행복했으면 하고 원하는 자는 불행하다는 것입니다. 나이 많은 사람이 젊은 사람 부러워하고 질투하는 것처럼 볼 상 사나운 것은 없습니다. 자신의 나이에 따른 행복을 찾아 항상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행복의 비결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4장 11-12절에서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나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환경에도 행복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알고 자족할 줄 아는 바울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목마른 자에게는 물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목마른 자에게 빵을 준다든지 기름진 음식이 만들어 준다고 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보이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먼저 생수를 주어 갈증을 해소하는 일입니다. 생수만이 그의 갈증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인간의 목마른 영혼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세상의 권세나 부귀영화, 지식이나 명예입니까? 이 모든 것은 헛된 악세 사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을 찾고 추구하며, 이것을 얻지 못하여 불만이니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이것들은 결코 채워질 수 없는 헛된 것입니다. 목마른 영혼에는 말씀의 생수만이 갈증을 해소할 수 있습니다.

둘째, 원망입니다. 원망이란 책임전가적(責任轉嫁的)인 심리 작용입니다. 무슨 일이든 잘못되면 스스로 책임을 감당하지 못하고 꼭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가 못사는 것도 다른 사람이 잘살기 때문이요, 내가 실패한 것도 다른 사람이 성공했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타인에게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원망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겠습니까? 모든 문제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비록 사람과의 관계가 잘못되었다 할지라도 먼저 하나님과 나와의 바른 관계를 형성하고 나면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어떻게 회복해야 하는지 방법을 찾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서면 우선 겸손해져서 내가 지은 죄, 행동, 하나님께 불순종한 것 등을 생각하게 되고, 그러고 나면 어느 누구도 원망할 자격이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족한 내가 누구를 원망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이 겸손은 하나님 앞에서만 생기는 것으로, 이 겸손만이 원망의 해결이 될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미래 지향적인 소망입니다. 오늘 잠깐 어두움이 있다 하더라도 저 앞에 하나님의 복된 약속이 있고 축복이 있음을 믿으면 원망하지 않고 참고 견디며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잠깐 당하는 이 어려움이 앞날의 영원한 축복의 과정이라고 믿는다면 이 고난을 마다할 이유가 없습니다. 로마서8장 18절에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하신 것과 같이 이 고난과 시련들이 합하여 선을 이룰 것임을 믿기에 원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불만과 원망을 해결함이 없이는 어떤 여건에도 행복할 수 없고 평화를 누릴 수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불평과 원망은 인간성을 파괴하고 사회를 파괴하여 걷잡을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출하시며, 그들에게서 소원하셨던 소원이 무엇입니까? 애굽에서 열 가지 재앙을 내리신 하나님, 홍해를 건너게 하신 하나님, 자유하게 하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두신 뜻이 무엇이었느냐? 하는 말입니다. 그것은 바로 최고의 감사와 찬양을 하나님께 돌리는 일입니다. 큰 능력으로 구원하셨으니 광야를 지나갈 때에 저 앞에 있는 가나안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낙원이 있음을 믿고 오늘의 고난을 기쁨으로 견디며 감사하고 찬양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떠했습니까?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불평하고 원망하여 결국은 광야에 엎드려 죽임을 당하였음을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원망 죄가 얼마나 불 신앙적이고 무서운 소행인지 모릅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0~11절에서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하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감사해야 할 자가 감사하지 않으면 자연히 불평과 원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원망하지 않도록 본을 보여 주신 사건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원망하다가 죽음을 당한 일입니다.

감사란 깨달음과 겸손에서 오는 것이고 믿음에서 오는 것입니다. 감사의 차원을 셋으로 나누면, 첫째는 물리적인 감사를 들 수가 있습니다. 이 감사는 먹을 것을 주셔서 감사하고 건강을 주셔서 감사하며 풍년을 주셔서 감사하다는 일반적인 감사입니다.

둘째 감사는 철학적 감사입니다. 이것은 가난하다가 부해진 것에 대한 감사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에서 깨달음이 깊어진 것입니다. 전에는 은혜인 줄 몰랐는데 깨닫고 보니 은혜요 전에는 축복인 줄 몰랐는데 깨닫고 보니 축복이란 말입니다. 전에는 내가 제일 불행한 줄 알았는데 깨닫고 보니 제일 행복한 자인 것입니다. 행복과 불행은 이렇게 종이 한 장 차이입니다. 셋째는 신학적 감사가 있습니다. 이 감사는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내 죄를 속량하심으로 구속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심에 대한 감사로, 모두가 은혜요 기쁨이요 축복인 것입니다. 이 감사는 절대적 감사입니다. 그러나 미래가 보장되지 않는다면 현재로서 감사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의 지위가 아무리 높아도 내일이 염려된다면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재산이 많다 해도 내일이 불확실하다면 감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미래를 향한 하나님의 확실한 약속을 믿는 그 믿음과 소망이 있어야 감사할 수 있습니다. 엄격한 의미에서 미래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감사란 전혀 불가능합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하여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감사하는 내용은, 첫째 믿음의 역사요, 둘째는 사랑의 수고이며, 셋째는 소망의 인내입니다.(살전1;3) 지금 바울의 형편은 환난과 궁핍과 핍박 가운데 있습니다만 데살로니가 교회를 생각하면 그들의 믿음, 그들의 소망, 그들의 사랑이 생각나서 감사하며, 특히 환난 중에 복음을 받아들인 것에 대해 감사하고 있습니다.(7절) 데살로니가전서 2장 13절에 보면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이게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서 역사하느니라.” 사도 바울은 자신의 현재의 삶이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에게 혹여나 실족하게 될까 염려하고 걱정하였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말로 받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임으로 믿음이 역사하는 것을 보면서 감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여 주신 모든 은혜와 은사에 대해 구체적으로 감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보다 신령한 것에 대해 보다 영원한 가치에 대해 깊이 깨닫고 감사할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지금 코로나19라는 상황에 처하여 자유롭게 성전에서 예배드리고 교제하며 하나님의 뜻을 증거 하는 일들에 대해 제한받고 있습니다. 마음껏 찬양하던 때에 찬양하지 못한 것을, 소리 높여 기도할 수 있던 때에 기도하지 못한 것을 생각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할 수 있음에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가난하고 부하고 하는 것이 무슨 문제입니까? 오래 살고 짧게 산다는 것이 무슨 큰 문제입니까? 우리는 불평할 자격이 없으며 원망할 권리가 없습니다. 오직 감사와 찬양으로만 일관된 생을 살아도 모자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7절에서 “우리가 궁핍과 환난 가운에서 너희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위로를 받았다.”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가운데 어려움을 당하고 환난을 당하지만, 자신들이 전한 복음이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위로를 받고 감사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위해 일하면서 죽임을 당한다 할지라도 믿음의 사람들이 믿음을 지키며 살 때 위로가 되고 기쁨이 되고 감사할 것이라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도 하나남의 말씀을 듣고 깨달았으면 하나님께 보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보답이 될 수 있겠습니까?

첫째,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았으니 하나님의 주권에 맡겨야 합니다. 우리 가정의 문제나 사업의 문제나 자녀들의 문제나 내 자신의 장래의 문제들도 하나님께 맡겨야 하는 것입니다. 8절에서 바울은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 라고 말합니다. 이는 지금까지 자신들이 복음을 전하면서 받는 환난이나 궁핍함으로 인하여 절망하고 실족할까 염려하였지만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주 안에 굳게 선 것을 보면서 자신들이 살 것 같다는 것입니다. 목회를 하면서 항상 생각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제 자신이나 교회의 여러 가지 어려움으로 인하여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서지 못할까? 염려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믿음에 굳게 서 있으면 오히려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양문의 권속들도 믿음에 굳게 서는 축복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둘째, 하나님 안에서 너희로 말미암은 기쁨이 충만할 것을 말합니다. 우리 인간사에서도 보면 부모님들은 자녀들을 위해 참으로 수고를 많이 합니다. 그 이유는 자녀들을 기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자신들이 잘 되기를 바라며 그들의 앞길에 조금이라도 평안하고 안전한 길로 인도함을 받게 하기 위하여 부모님들은 끊임없이 수고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녀들이 부모를 원망하고 불평한다면 부모의 마음은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자녀들은 항상 기뻐하는 것이 부모님들께 보답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성도들은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하나님께 늘 감사하며 기뻐할 때에 하나님도 기뻐하십니다.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이 주 안에서 굳게 섰다는 소리를 듣고 너무나 기뻐합니다. 그 이유를 10절에서 고백합니다. “주야로 심히 간구함은 너희 얼굴을 보고 너희 믿음이 부족한 것을 보충하려 함이라” 하고 말합니다. 첫째는 너희를 보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나라의 고유의 명절을 맞이하고 있는데 부모님들은 항상 자녀들을 그리워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세상의 여러 가지 환경적 요소들로 인하여 고향에 오지 말라고 하는 광고를 내보내고 있지만, 실상은 사랑하는 자녀들을 보고 싶은 강한 욕망이 있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도 믿음에 선 사랑하는 성도들을 보고 싶다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너희 믿음이 부족한 것을 보충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다른 사람이 환난을 당하거나 핍박을 당할 때 자신과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니까 잘 견딜 수 있지만 자신에게 어려움을 당할 때, 견고한 믿음에 서 있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사실을 통해서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이 어려움을 당한다 할지라도 믿음에 서 있을 수 있도록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를 믿음으로 고백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바울은 할 수만 있으면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의 얼굴을 보고 그들이 믿음에 서 있는 것을 감사하며 어떠한 어려움이 닥친다 할지라도 믿음에 굳세 서도록 사랑하고 축복하기를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의 사랑에 감사하고 또한 서로를 축복하는 일에 감사하는 일들이 많은 양문의 권속들이 되길 소망합니다.

셋째는 은혜를 받았으면 이제 은혜를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았으면 이 은혜에 대한 응답의 합당한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해서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를 사랑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를 기뻐하고 하나님이 용서하시는 자를 용서하는 그 봉사와 섬김이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12~13절에 “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자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량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 너희 마음을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과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은혜를 아는 자가 은혜를 베풀며, 용서에 대한 감격을 경험한 사람이 용서를 할 줄 압니다. 저는 요즘 사람들의 사고방식 가운데 다소 불만스러운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애완동물을 지나치게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개를 사람과 똑같이 목욕과 이발을 시키고 먹이도 별도로 만들어 먹이는가 하면, 심한 사람은 보험도 들고 죽으면 회장까지 하여 묘를 만들어 주고 심지어는 유산까지 남겨 주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어느 분에게 애완견에 대한 그들의 지나친 애정을 물었더니 어느 나이 많은 할머니가 대답하시길 "개는 주인을 배신하는 법이 없습니다," 라고 뼈아픈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람은 주인을 물어뜯는 경우가 있지만 개는 주인을 무는 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때로는 사람이 개만도 못하다는 소릴 듣는 것 아닙니까?

은혜를 모르고 인간관계에서 배신을 하는 사람은 실재적으로 개보다 못한 인간 취급을 받는 것입니다. 자식이나 친구에게 배반당하고 오죽 답답하면 개를 사랑하며 살고 있겠습니까? 이렇게까지 타락된 인간을 어떻게 변명해야 합니까? 감사할 줄 모르는 인간은 어디서나 무슨 일이든지 불만과 원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다가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나아가서 자기를 원망하여 자살까지 하게 되는 것입니다.

불행은 불만과 원망에서 비롯됩니다. 불만과 원망의 뿌리는 불신앙입니다. 우리는 다시 한 번 믿음을 새롭게 하여 겸손해져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현실에서 당하는 어려움이나 환난이 있겠지만, 믿음으로 승리하는 것을 볼 때 큰 위로를 받았다고 고백하는 바울은 이제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8절) 하고 말합니다. 우리가 과거의 은혜를 깨닫고 현재에 주신 은혜를 깊이 감사하며 앞으로 주실 축복의 약속을 멀리 바라보며 감사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이 넘치게 하시길 소망합니다. (12절) 우리가 주안에서 사랑할 때 또 다른 사람이 주님의 사랑을 증거 할 수 있습니다. 심고 거두는 법칙은 어디서나 변함이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사랑은 일방적인 사랑이 아니라 상호간의 사랑이 실천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나로 인하여 또 다른 사람들에게 흘러가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인 것입니다.

또한 너희 마음을 굳건하게 하시길 소망하고 있습니다.(13절) 사람들의 마음이 흔들림이 없이 바로 서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의 참사랑을 깨달은 성도들은 마음에 흔들림이 없이 주님의 참 사랑을 실천하는 일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나 어디서나 담대함을 잊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능력이 우리와 함께 하실 때입니다.

마지막으로 주님 오실 때까지 하나님 앞에서 흠이 없이 보존되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13절) 우리는 주님이 오시는 날까지 믿음 지켜 승리하여야 하지만 하나님의 원하시는 모습으로 보존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흠이 없이 보존되기 위해서는 매 순간을 깨어있는 믿음의 고백으로 서 있어야 합니다. 항상 하나님이 나를 지켜주심을 믿고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실천하는 성도가 되길 소망합니다.

프랑스의 격언 중에 "피해는 모래 위에 써넣되, 은혜는 대리석에 써 넣으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 피해를 입었습니까, 혹은 섭섭한 일이 있었습니까? 이것은 곧 잊어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은혜를 입은 적이 있습니까? 이것은 대리석에 새겨 놓은 글처럼 영원히 기억하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