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한 인물씩 올린 이야기를 전권으로 묶어 올렸습니다. 12제자 성경 강해집 12 제자 성경 강해 식도성결교회 수요예배 성경강해 기간: ‘13.9.29-‘14.1.15 강사: 박영빈 목사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식도교회 수요예배 예수님의 열두제자 (1) 안드레 식도성결교회 제목 : 사람들을 주께로 인도하는 제자/ 와 보라 본문 : 요1:35-42 먼저 안드레의 이름과 배경을 생각해 봅니다. 이전에 발행된 기독교연감에 의하면 세계 기독교 인구는 모두 254개 국가에 34억473만 9천명이랍니다. 60억 인구의 절반이 넘는 숫자입니다. 이중 로마가톨릭 인구 10억1천만을 제외해도 24억 인구가 개신교 신도입니다. 대단히 많은 나라 허다한 사람들이 기독교를 신봉하고 있습니다. 또한 기독교계통의 한 주간 신문에는 이런 보도가 난 적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의 기독교 인구 증가율이 점점 감소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최근에는 점점 감소율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입니다. 새로 설립되는 개척교회들 중 65%가 견디지 못하고 문을 닫는다고 합니다. 실제로 초등학교 학생의 수도 현격히 줄고 있습니다. 요즘 한참 인기가 있는 세미나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전도와 관계된 세미나입니다. 교인들의 수효가 줄어들게 되자 위기를 느낀 목회자들이 너도 나도 전도훈련이나 새신자에 관한 세미나를 즐겨 찾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교인 한 사람이 8천명을 교회로 인도하는가 하면 교회를 개척한 지 몇년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교세를 이루었다고 하는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실제로 개척한지 1년밖에 안된 어느 개척교회는 150명 교인에, 한해 결산이 2억을 넘었다고 하는 자랑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였길래 똑같이 개척을 시도한 교회들 중에 어떤 교회는 문을 닫아야 하고 어떤 교회는 부흥하고 있는 것일까요? 한 영혼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데는 무슨 비법이 있을 수 없습니다. 또 무슨 별다른 왕도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별로 뛰어나지 않더라도 안드레처럼 꾸준히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기만 하면 됩니다. 안드레라는 이름을 번역하면 ‘남자’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를 합치면 ‘남자다운 사람, 사람다운 남자’가 됩니다. 안드레의 배경과 회심의 장면을 보면 안드레는 나사렛 동북쪽으로 약 40Km 정도 떨어진 갈릴리 해안에 있는 벳세다 출신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요나이며 어머니는 요한나였습니다. 그는 베드로와 함께 가버나움에서 자랐습니다(막 1:29). 그는 벳세다 출신으로 가버나움에서 성장했으며 형 베드로와 함께 어부로서 일했습니다. 안드레는 본래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전에 세례 요한의 제자로서 활동하다가 요한의 증거로 예수님을 만났고 제자가 되었습니다.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예수의 다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 1:35-36)” 두 제자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는 말을 듣고 예수를 좇게 되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니며, 다만 그리스도를 증거하라고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자신을 소개하였습니다. 신랑되신 예수께서 신부가 되는 우리를 취하는 모습을 보고 자기는 곁에 들러리 서는 것으로 기쁨을 느꼈습니다. “예수께서 돌이켜 그 좇는 것을 보시고 물어 가라사대 무엇을 구하느냐 가로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요 1:38)” 예수님의 “무엇을 구하느냐”는 질문에 그들은 무엇을 원한다고 대답한 것이 아니라 “어디 계십니까”라고 묻고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에게서 무엇을 얻고자 한 것이 아니라 요한의 증거대로 저분이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면, 저분과 깊은 사귐을 갖고 싶다는 열망 때문에 “어디 계십니까?”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요한의 증거를 통해 예수님에 관한 말씀을 듣고 좇아 갔습니다.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을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좇으니라(막 1:16-18)” 어부가 그물을 버린다는 것은 전 생계를 포기하는 것을 말합니다. 지금까지 자기의 모든 것을 걸고 살아왔던 삶의 터전을 포기할 정도로 예수님은 소중한 분이었기에 이제 모든 것을 버리고 안드레는 결단하였습니다. 안드레는 열 두 제자 중에 가장 먼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초대 교회의 문서에 보면 안드레에게 “먼저 부름을 받은 사람”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습니다. 그의 인물과 성격을 살펴봅니다. 안드레는 사복음서에 세 번 등장합니다. “요한복음 1장에 보면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요 1:41-42) 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성경 속에서 버면 베드로는 언제나 중요한 사람으로 나타나고 그에 비해 안드레는 가려져 빛을 잃고 있습니다. 그러나 안드레가 없었으면 아마도 베드로는 없었을 것입니다. 안드레는 하루에 삼천 명을 회개시킨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삼천 명을 회개시킨 사람을 주님께로 인도하였습니다. 성도여러분 ! 여러분들을 가리켜 베드로가 되라하면 어려운 주문일지 모르나 우리 모두가 안드레가 될 수는 있지 않을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 감격을 억누를 길이 없어서 그는 사랑하는 형제에게 메시야에 관한 소식을 전했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에는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오천 군중에게 먹을 것을 주라 했을 때 빌립은 재빨리 계산하여 조금씩 나누어 준다하여도 이백데리나온이 더 들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요 6:8-9)” 이 말씀에서 안드레는 빌립처럼 절망만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찾았다는 것을 아주 대조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적은 음식으로 오천 명이 배불리 먹고도 열 두 광주리가 남는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결과적으로 안드레는 찾아내는 일을 잘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를 찾아내어 예수님께 소개하고, 어린 아이를 찾아서 예수님께 인도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2장에 예루살렘 입성에 관한 말씀이 나오고 있습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고 수많은 군중이 소리치며 환영하였습니다. 이 무리 중에 유대인 아닌 헬라인 몇이 있었습니다. “저희가 갈릴리 벳세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나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가서 여짜온데(요 12:21-22)” 이 말씀에서도 안드레는 같은 역할의 사람으로 나타납니다. 안드레는 항상 사람들을 예수님께 인도하고 소개하는 은사의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을 찾아내고 그들을 주님께 소개하는 역할을 한 사실들이 성경에 일관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안드레와 베드로는 형제지만 베드로는 감정의 파고가 높았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안드레는 감정의 기복없이 항상 자기의 일들을 조용하고 성실하게 수행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안드레는 큰 일은 못 벌입니다. 베드로와는 사뭇 대조적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왜 이렇게 각각 다른 성격의 제자들을 선택하셨을까요? 하나님 나라에는 베드로도 필요하고 안드레도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안드레는 베드로보다 먼저 믿고 예수를 알았지만 높아지는 베드로를 질투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위해 열심히 일할 때 안드레는 조용히 뒤에서 사람을 찾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안드레는 베드로보다 더 중요한 인물일 수도 있습니다. 안드레는 세례요한의 제자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요한의 질책을 받으면서 회개하고 또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를 받은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옛사람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안드레는 여전히 요한의 제자로 남아 있었습니다. 어느 날 요한이 한 사람을 가리키며 '보라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할 때 안드레는 그 즉시 예수를 따라 나선 것입니다. (요 1:35-40) 예수님께서 당신을 따라오는 안드레에게 '너희가 무엇을 찾고 있느냐 ?'물으셨습니다. 이 물음에 대하여 안드레는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고 되물었습니다. 어디에 묵고 계신가 하는 질문입니다. 예수님은 '와 보라' 하셨습니다. 안드레는 무엇인가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는 과연 무엇을 찾고 있었습니까 ? 예수를 따라 간 안드레는 그날 온 종일 예수님과 함께 지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지낸 그날은 안드레가 평생동안 잊을 수 없는 날이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 그것은 안드레가 하는 말로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자기 형제 베드로를 찾아가서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고 말하였습니다. 이 말은 온 이스라엘이 오래도록 기다려 온 그 분을 내가 만났다는 감격의 소리입니다. 우리는 모두 다 전도의 책임을 가진 자입니다. 그런데 왜 전도를 못합니까? 안드레 같은 '메시야 만남'이 없기 때문입니다. 메시야는 어디에 계십니까? 사람들이 이 교회 저 교회를 찾아 다니면서 큰 교회를 찾아가며 훌륭한 지도자를 찾아 다녀 보지만 진정으로 찾아 만나야 할 분은 건물이 크고 사회적인 지위가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구세주 곧 '메시야'를 만나야 합니다. 그의 사역 1. 안드레는 구도자였습니다. 안드레는 3년간 꾸준하게 예수님을 따라 다녔던 사람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이 임할 때 그 120문도 중에 안드레가 있었다는 기록 외에 또 다른 기록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사를 살펴보면 안드레는 자기가 들은 복음에 만족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해 세계를 향해 떠나는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유세비우스의 ‘교회사’를 보면 그는 소아시아의 에베소를 중심으로 사역을 시작합니다. A.D 260년에 기록된 책 가운데 안드레 개인의 삶에 대한 자서전과 같은 책이 있습니다. 그 책이름은 ‘안드레 행전’입니다. 그책의 기록에 보면 그가 소아시아를 중심으로 특별히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역 가운데 헌신하는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다음에 안드레는 러시아의 남부까지 찾아 갑니다. 스키티아라는 지역에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돌에 맞아 죽을 뻔한 위기도 당합니다. 그는 러시아에서 희랍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이스의 아가야로 와서 페투테라는 곳에 머물게 됩니다. 그는 거기서 에게테스라는 주지사를 만나 그의 동생과 부인에게 복을 전하여 믿게 합니다. 이것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은 주지사가 안드레를 죽이게 됩니다. 안드레는 처형 당하기 위해 X자형의 십자가 앞에 섰습니다. 이것을 안드레형 십자가라 합니다. 주지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대는 지금이라도 예수 믿는 신앙을 포기하고 그대의 목숨을 보존하라” 이때에 안드레는 “지사님이여, 그대는 그대의 영혼을 잃지 마시오” 그는 숨을 거두며 이런 기도문을 남겼다. “오, 그리스도 예수님이여, 나를 받아 주소서. 내가 본 그분, 내가 사랑한 그분, 그분 안에서 나는 내가 되었나이다. 주님이시여, 당신의 영원한 나라의 평안 가운데 이제 나의 영혼을 받아 주옵소서” 머릴로가 그린 ‘안드레의 순교’라는 그림에는 죽어가는 안드레 옆에 어린 소년이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그 소년은 다름 아닌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를 예수님께 바쳤던 소년이었다고 합니다. 수가성의 여인은 예수를 만난 후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리에 들어가 '이 분이 그리스도가 아니냐 ?'고 외쳤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은 배와 그물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세리도 자리를 박차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여러분의 생애에 가장 인상 깊은 경험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입니까 ? 좋은 물건을 구한 사람은 그것을 자랑하고 싶어합니다. 좋은 신랑을 만난 신부는 친구들에게 자기 신랑을 자랑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를 자랑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왜 못하는 걸까요? 예수님과의 확실한 만남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만난 기쁨이 아니라 그저 친구가 좋고 사람의 이야기를 듣기 위하여 이 자리에 나왔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다 그리스도 예수를 만나시기 바랍니다. 예수 안에는 모든 지혜와 모든 지식의 보화가 감추어져 있습니다. 2. 안드레는 전도자였습니다. 안드레는 메시야를 만난 직후 그의 형제 베드로를 찾아 갔습니다. 수가성의 여인처럼 그는 자기 집으로 달려간 것입니다. 그가 집으로 가서 한 말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메시야는 설명이 필요없는 존재입니다. 안드레는 베드로를 곧바로 예수님에게 인도하였습니다. 전도는 단지 길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게 해 주는 것입니다. 수가성의 여인이 마을로 들어가서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이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 하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만난 동리 여인들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이신 줄 앎이니라.' 수가성의 여인이 자기 마을로 들어가 동리 여인들에게 예수를 소개하였다면 안드레는 먼저 자기 가족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한 사람입니다. 안드레에게도 친구나 좋은 이웃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먼저 자기 형님을 인도하였습니다. 혹시 여러분들 중에 믿지 않는 집안 식구들이 있다면 이 말을 잘 새겨들으십시오. 사도 바울은 교회의 일군을 선택할 때에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자라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자기 집을 잘 다스리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아보겠는가 하였습니다. 자기 가족, 자기 친족을 돌아 보는 것은 전도의 원칙입니다. 만일 여러분 가족 가운데 아직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못한 식구들이 있다면 먼저 그 분에게 그리스도를 소개하십시오. 우리 교인들 가족이 먼저 메시야를 만나야 합니다. 만나게 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책임입니다. 다른 사람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기 전에 먼저 우리 집안 식구들에게 예수를 만나게 해야 할 책임이 우리들에게 있습니다. 3. 안드레는 언제나 가능성을 보는 사람이었습니다. 무엇에나 가능성을 본다는 것은 그에게 복입니다. 보리떡 5개와 물고기 두마리를 가지고 가능성을 본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이야기입니다. 수치에 밝은 빌립이 볼 때 안드레의 행위 곧 5병 2어를 가진 어린아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오는 안드레가 꼭 어린애 장난하는 것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안드레의 행위가 없었다면 벧세다의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안드레는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분에게 능치 못함이 없으심을 믿었습니다.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내어 쫓으신 그 분이 무엇인가 능히 하실 것을 기대하였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비록 어린 아이를 위한 작은 양식이라 하여도 안드레는 그것을 주님의 손에 맡겼습니다. 놀랍게도 그것은 떼어도 떼어도 부족함이 없는 풍족한 양식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의 가능성을 또 다른 곳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빌립이 헬라 사람 몇을 데리고 와서 예수를 뵙겠다는데 어떻게 하지요? 하는 것이었습니다. 빌립이 생각할 때 예수님에게 헬라사람들을 데리고 간다는 것은 꺼림직한 것으로 판단하였던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구원의 대상일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그러나 안드레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이방인이라도 구원을 필요로 한다는 믿음을 가진 것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구원의 내용이 유대인들에게만 국한되지 않음을 알고 그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간 것입니다. 여러분은 누구를 예수님께 인도할 것입니까? 사람들이 없다고 괴로워 탄식하고만 있을 것입니까? 아니면 그리스도를 만난 감격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나아갈 것입니까? 가족에게 나아가고, 굶주린 사람들에게 나아가고 병든 사람들에게 나아가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전할 때에 전하지 못할 조건들만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문제입니다. 병들어 안되고 가난해서 안되고 무식해서 안되고 사회적인 지위가 낮아서 안되고 처음 보는 사람이어서 안되고 천박해서 안되고 학위가 없어서 안되고 한 고향 사람이 아니라서 안되고 ... 만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분명히 만났다면 이 모든 조건들의 울타리들은 순식간에 다 걷혀 버릴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의 만남이 빈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만날 때는 언제나 가슴으로 만나야 합니다. 수요예배 예수님의 열두제자 (2) 베드로 식도성결교회 제목 : 약하나 강하게 된 자 본문 : 마16:13-20 먼저 그의 배경과 회심입니다. 베드로가 사역을 하다가 몸과 마음이 아주 힘들어져서 몸져 누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의사가 와서 진맥을 하더니 말하기를 삼계탕을 먹으면 낫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 말대로 했더니 베드로가 거뜬하게 나아버렸습니다. 사람들이 놀라서 그 용한 한의사에게 이유를 물었더니 그가 대답하기를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한 죄책감이 치유되지 않아서 닭이 울 때마다 몸과 마음에 엄청 스트레스를 받았더군요. 그래서 그 놈의 닭을 잡아먹으면 몸과 마음이 회복될 것 같았지요..”하더랍니다. 예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를 말할 때에 베드로를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에게는 예수님의 수제자란 별명이 붙었고 지금도 베드로를 따라 그의 이름이 붙어 있는 도시와 사람등이 많습니다. 러시아말로 베드로는 뾰트르라고 하는데 남자들 이름을 그렇게 부르는 사람들이 허다하고요 옛 황제도시 피터스부르그인 뻬제르부르그도 발음 표기만 다르지 베드로를 따서 지은 이름입니다. 이 베드로는 갈릴리 지방 벳세다에서 태어나 가버나움에서 살았습니다. 그는 안드레와 형제였고, 어부로 고기를 잡으며 살았습니다. 고기잡이로도 우리들의 대 선배가 되는 사람이죠. 일찍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베드로는 정상적인 많은 교육을 받은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많은 유대인들이 기본적으로 회당교육을 받았던 것처럼 기본적인 교육만 받았던 사람인 것으로 추측합니다. 하지만 짧은 교육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른 제자들보다 늘 앞서가는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바닷가에서 길러진 뱃사람으로서의 야성과 그가 가지고 있었던 적극적인 성격 등이 지도자로서의 기질로서 인격을 훈련시키는 배경이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 안드레를 통해 처음으로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요1:42)” 게바는 수리아 말로 헬라어의 베드로와 같은 ‘반석’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반석’은 무게가 있고 든든하며 보기만 해도 위압감을 느끼게 됩니다. 이것은 베드로의 성격과 기질에는 맞지 않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시몬에게 “너를 바위라 하리라”하셨을 때 옆에 있던 안드레는 속으로 부정했을런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베드로 본인에게 있어서는 대단한 희망의 약속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자기 생애에 대한 변화의 가능성을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에서 주목해야할 것은 지금 베드로라 말씀하지 않고 “장차”라는 말씀을 사용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서 가능성을 보셨던 것입니다. 자기 생애 가운데 처음으로 자기를 믿어주고 자기에게 기대를 걸고 새로운 삶을 향해서 도전할 수 있도록 말씀해주신 예수님과의 만남은 시몬 베드로에게 커다란 충격이었습니다. 베드로의 생애를 공부하면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의 옛 이름이 시몬이고 새 이름은 베드로라는 사실입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실망시킬 때마다 주님은 ‘시몬아!’하고 그를 부르셨습니다. 그 이유는 베드로 자신을 깨우쳐 주시기 위함입니다. 주님은 그와 동일하게 우리도 불러 주시고 새 이름을 주시고 새 삶을 살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1.베드로의 신앙고백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곧 그물을 버려 두고 따르니라(막 1:16-18)” 막 1:14을 보면 베드로와 안드레가 예수님을 따라 나선 것이 ‘요한이 잡힌 후’라고 기록하였습니다. 누가복음 5장 1절 이하에는 베드로를 부르시는 말씀이 더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밤새워 고기를 잡았으나 한 마리도 낚아 올리지 못했던 베드로는 말씀에 순종하여 많은 고기를 잡게 됩니다. 베드로는 이 사건 이전에 안드레를 통해 예수님을 소개받았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보시고 그의 장래를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에게 있어 예수님은 자신을 알고 바닷속 비밀을 알고 계신 분이었습니다. 역사의 주인이신 그분 앞에 “나는 죄인입니다” 무릎꿇고 고백하였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는 배를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 앞에 자기의 전 생애와 시간을 바치기로 결심하고 예수님을 따라 나섰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신앙고백을 한 장소는 가이사랴 빌립보였습니다. 그 당시에 가이사랴라는 장소는 두 곳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지중해 연안 욥바 항구 바로 윗편에 가이사랴라는 요새가 있었는데 그 요새는 헤롯이 가이사 아우구스트를 기념하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지역이라 볼 수 있습니다. 또 다른 한 곳은 본문에 나와 있는 가이사랴 빌립보입니다. 이 도시는 헤롯의 아들인 빌립왕이 그 당시에 디베료 가이사랴라는 로마의 황제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그를 기념하는 가이사랴라는 도시를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가이사랴라는 지역이 두 곳이기 때문에 지중해 연안에 있는 도시와 구별하기 위해서 빌립이 만들었기 때문에 가이사랴 빌립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는 바로 헬몬산 밑에 있는 도시로 거기에서부터 요단강이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두로와 시돈을 거쳐서 이 헬몬산 밑에 있는 가이사랴 빌립보에 오셨을 때에 조용한 시간이 생겼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질문했습니다.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마 16:13) 예수님은 그 당시 사람들의 예수님에 대한 의견을 질문하셨던 것입니다. 여러 가지 답변이 나왔습니다.“이르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마 16:14) 그러나 예수님의 주 관심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보느냐’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15절)라고 물으셨습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가장 큰 관심은 ‘사람들이 뭐라고 하느냐’가 아니라 ‘저와 여러분들이 무엇이라고 고백하고 있는가’에 더 관심이 있으시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예수님께서 질문을 했을 때에 시몬 베드로가 대답을 했습니다.“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참으로 위대한 신앙고백입니다. 그러면 이 신앙고백의 내용을 주의깊게 살펴 보겠습니다. 첫번째로 ‘주는 그리스도시요’라고 했는데 여기서 ‘주’라는 말은 세 가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존경의 뜻입니다. 선생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랍비라는 말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둘째는 우리의 생명이나 재산의 주인이 되신다는 뜻입니다. 셋째가 가장 중요한 뜻인데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주, 아도나이라는 말이 많이 나오는데 하나님에 대한 호칭입니다. 구약성경에는 거의 대부분 하나님을 ‘주’라 불렀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주님이라 부른 것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또 예수님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 왕과 예언자나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이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라는 말은 바로 예수님은 왕이시고 선지자이시고 제사장이시라는 뜻입니다. 메시야는 히브리어이고 그리스도는 헬라어입니다. 둘째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예수님이 하나님에게서부터 나왔다는 뜻도 있지만 통상적으로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이들은 지혜가 많은 사람을 지혜의 아들, 지식이 많은 사람을 지식의 아들, 부자들은 부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은 사람이라는 뜻이듯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면 예수님의 신성, 즉 그가 하나님 되심을 뜻하는 것입니다. 2.예수님의 대답과 그에 대한 해석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은 예수님은 “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17절)고 하시면서 세 가지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본래 시몬은 히브리어이고 베드로는 페트로스(헬라어)이며 게바라는 말은 아람어입니다. 반석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바요나 시몬아”라고 부르셨는데 여기서 중요한 말은 ‘바’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아람어로 ‘누구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바요나란 요나의 아들이란 뜻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베드로의 아버지 이름이 요나임을 알 수 있습니다. (1)“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17절) 예수님의 질문은 예수님을 아는 자들과 모르는 자들의 생각의 차이점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을 아는 자들의 예수님에 대한 시각과, 예수님을 모르는 자들의 시각이 어떤 차이가 있는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을 세례 요한이나 엘리야, 혹은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자기들의 시각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스스로 내린 평가입니다. 이들에게는 예수님이 단지 어떤 위대한 일을 행하고 있는 인물로만 보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위대한 일을 함으로써 자신들에게 이익이 주어진다는 그런 시각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잘 압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들을 남에게 가르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가지가 없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내 주로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내 주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께 나의 모든 인생을 맡긴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나의 인생을 주관하시고 나는 예수님이 이끄시는 대로 순종하겠다는 것이 예수님을 내 주로 영접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신 일을 평가하는 입장에 있으면 예수님을 내 주라고 말은 할지언정 예수님께 내 인생을 맡기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알고 있던 베드로의 고백은 다릅니다.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합니다. 즉 '당신은 나의 주인입니다'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평가하는 시각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은 철저하게 예수님께 종속된 자라는 입장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는 것, 즉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고 그에 대해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알게 하셨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18절에서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합니다. 여기 보면 17절에서는 베드로를 바요나 시몬아라고 부르시고 18절에서는 베드로라고 부르십니다. 베드로는 반석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우신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베드로 같은 신앙고백이 있는 자들이 모여서 교회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베드로의 고백은 하나님이 알게 하신 것입니다. 즉 하나님으로 인해서 새롭게 변화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새롭게 변화된 자들이 모여서 교회가 된 것입니다. 때문에 교회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교회가 예수님을 평가하는 입장에 서서 예수님의 모습은 이래야 한다, 교회는 이래야 한다고 하면서 인간편에서 교회가 할 일을 정해 버린다면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교회는 아니라고 봐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참된 교회는 그리스도에 대해서 내 주라는 고백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내 주이기 때문에 주님의 교회에 속한 모든 자는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은 자입니다. 세상이 힘이 아니요, 자기의 행위가 의가 아니라 하나님만이 힘이고, 주님의 십자가만이 나의 의로서 나는 오직 은혜로 그 의에 속한 자가 되었다는 것을 깊이 아는 자들의 모임이 교회입니다. 예수님은 주님을 알게 된 베드로에게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라고 하십니다. 결국 복은 주님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시몬은 베드로로 불립니다. 시몬은 육신으로 난 사람 그 자체이지만 베드로는 주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된 하늘로부터 새롭게 태어난 존재입니다. (2)“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18절) 18절과 19절은 지난 2000년 동안 기독교의 역사상 계속해서 논란이 되어온 구절로서 아직도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반석 위에다 교회를 세우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라는 말이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천주교에서는 주장하기를 ‘이것은 바로 베드로 위에다 교회를 세우겠다는 뜻이다. 베드로 뒤에는 교황들이 그 권리를 이어간다. 그러므로 천주교가 정통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틀립니다. 원어로 얘기하면 ‘너는 베드로라’하는 말은 ‘수에 페트로스’ 즉 ‘너는 페트로스라’가 됩니다. 이 페트로스라는 말이 베드로라는 말입니다. 원문에 보면 ‘너는 작은 바위라 내가 이 반석 위에’에서 반석이란 ‘페트라’입니다. ‘너는 베드로라’할 때는 여성명사를 썼습니다. 앞에서 말하는 베드로의 반석이라는 뜻과 뒤에서 말하는 반석이 다르다는 말입니다. ‘너는 페트로스라’는 말은 너는 작은 바위라는 뜻이고, ‘내가 이 페트라 위에’에서 페트라는 기초가 되는 암석을 말하는 것으로 시몬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베드로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베드로의 신앙고백 위에 기초한 것입니다. 진실로 교회의 가장 근본적인 기초는 딱 하나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위에 구약의 12지파와 신약의 12사도들이 돌을 쌓은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벽돌장처럼 그 위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주교에서 ‘기독교는 베드로 위에 세워진 것이고 그 위에 베드로의 뒤를 이은 교황들에 의해서 계속되어 간다’는 말은 이 원어를 바로 해석하지 못한 데서 온 신학적인 실언입니다. 그런데 이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18절에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본문의 음부라는 말은 ‘하데스’라는 말입니다. 하데스라는 말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스올’이라는 말과 같은 말인데 쉽게 말씀드리면 죽은 자들이 있는 곳, 죽음의 세력을 얘기합니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한다는 말은 사탄의 세력이 교회를 이기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사탄이 날뛰고 죽음이 날뛰어도 부활이요 진리인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세운 교회를 결단코 파멸시키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3)“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19절). 천국 열쇠를 누구에게 준다고 그랬습니까? 베드로에게 준다고 했습니다. 천주교에서는 이 말씀을 바로 인간의 삶을 다스릴 교회의 권한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천국에 가느냐 지옥에 가느냐 하는 것을 교회가 좌지우지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단코 베드로의 사면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대제사장직 권한을 손상시키는 얘기입니다. 예수님만이 사면할 수 있습니다. 요한 칼빈에 의하면 이 말은 그에게 사도직을 준다는 것을 재확인한다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16장 9절에 보면 이방인들에게 어떻게 할 것이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됐습니다. 그때 사도들이 모여서 ‘이방인들은 할례를 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결정했습니다. 바로 그런 권한을 얘기합니다.그러니까 시몬 베드로를 비롯한 그들은 사도로서의 권한을 가집니다. 그러면 사도로서의 권한은 지금 어디로 갔을까요? 그 사도 직의 권한은 일회적인 것입니다. 그들에게만 있습니다. 그것이 계속 내려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고 기도했던 그 역할은 계속 내려오지만 소위 기독교를 창립하는 사도로서의 권한은 단회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린다는 것은 교회의 논쟁에 대한 금지, 논쟁을 금지하거나 허락하는 능력을 바로 이들에게 주었던 것을 말합니다. 이들에게 기독교를 세울 수 있는 여러 가지의 것들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신앙을 종합한 것이 사도신경입니다. 사도신경은 12마디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사도들이 직접 만든 것은 아닙니다. 그후에 세례 문답을 하기 위해서 교회가 만들어낸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있는 내용은 사도들이 고백한 내용을 종합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사도신경’즉 사도들이 고백한 신앙고백이라고 부릅니다. 그의 사역과 죽음입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베드로의 모습은 복음서에서 보는 모습과는 사뭇 다른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아주 담대한 사람, 균형잡힌 사람이 되었습니다. 물론 그 변화는 성령이 가져오신 것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간의 삶의 경험이 그에게 성숙의 변화를 가져온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는 유대인 복음전도의 문을 열었습니다. 8장에서는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결정적 역할을 합니다. 13장에서는 이방인 고넬료의 가정에 찾아가 전도하는 사람으로 나타난다. 그는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후에 고린도까지 가서 복음을 전합니다. 고린도는 지금의 그리이스를 말합니다. “함께 택하심을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벧전 5:13)”이것은 문자 그대로 바벨론을 의미하지 않고 로마를 의합니다. 그 로마에서 베드로는 순교의 잔을 마셨습니다. 오리겐이 쓴 기록에 보면 “나는 감히 주님이 매달려 돌아가신 십자가의 모습 그대로 죽을 수 없습니다. 나를 거꾸로 매달아 죽여 주십시오”라고 요청하여 찬송하며 죽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그의 교훈과 문제 제기 베드로는 변화무쌍한 격정의 사람이었습니다. 겉으로는 굉장히 강한듯 싶으나 속으로는 아주 약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말은 먼저 하고 행동은 나중에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을 나무랄 필요는 없습니다. 사실 여러모로 재고 나서 그제야 시행하는 사람은 아무 것도 하지 못합니다. 교회 내에는 안드레와 같은 세심한 사람도 베드로와 같은 다혈질적인 사람도 필요합니다. 마태복음 14장 25절 이하에 예수님이 바다 위로 베드로를 걸어오게 하신 사건이 나옵니다. 두려워 하며 아무도 나서지 못하는 상황에서 베드로는 “만일 주시어든 나로 명하여 이 바다 위로 걸어오게 하소서!” 부탁합니다. 이일로 베드로는 ‘믿음이 적은 자’라는 책망을 받았으나 그는 자기 믿음을 표현한 일례가 되었습니다. “믿음없는 자여” 하지 않으시고 “믿음이 적은 자여”하셨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에게 서서히 위험이 닥치기 시작하자 하나 둘 군중들이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물으셨을 때 베드로는 “영생의 말씀이 여기 있으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말하며 자신의 뜨거운 신앙을 고백하였습니다. 변화산에서는 모세와 엘리야와 주님을 위하여 초막을 짓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솔직하고 직선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으실 때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하는 위대한 고백을 남겼습니다. 예수께서는 어느날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고난을 받고 죽이신 후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때 베드로는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말했다가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는 주님의 호된 질책의 말씀을 듣습니다. 감정적인 사람은 이와같이 때때로 하나님의 일을 그르치는 어리석음을 범하기도 합니다. 요한복음 13장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베드로는 “결코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 했다가 목욕까지 시켜달라고 조릅니다. 이상의 일들을 통하여 베드로가 얼마나 감정에 민감한 사람이었는가를 알게 됩니다. 위대한 결단과 신앙 고백의 사람, 다혈질의 실수많은 사람. 이 두가지 양면의 모습이 베드로의 참모습입니다. 시계추가 이 끝에서 저 끝으로 가는 것처럼 베드로의 생애는 이 끝에서 저 끝으로 움직이는 예측불허의 생애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베드로를 선택하시고 훈련시키시고, 실패할 때 다시 그를 붙들어 일으키셨습니다. 베드로는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나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께서 기도하실 때 그는 깊이 잠들어 버렸습니다. 대제사장의 무리가 예수님을 잡으려고 왔을 때 칼로 말고의 귀를 쳐 떨어뜨리기도 했습니다. 이런 용기의 일면이 있는가 하면 그는 금방 작은 비자 앞에서 예수님을 세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하는 나약함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그는 닭울음 소리를 듣고 소리내어 통곡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인간적으로 참으로 이해와 공감이 가는 인물입니다. 그는 자기 후회, 자기 연민, 자기 학대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울면서 돌아왔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려움과 박해 속에서 입술로 주님을 부인했을지라도 울면서 다시 돌아와 주님 앞에 서야 합니다. 요한복음 21장에서 요한은 베드로를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기록하였습니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세 번 주님은 물으셨습니다. 주님은 아가페의 사랑을 물으셨는데 베드로는 필레오의 사랑으로 대답합니다. 주님은 친구들을 사랑하는 그런 마음으로라도 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양을 치는 사역을 그에게 맡기셨습니다. 이 시간에는 시몬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함께 예수님께서 하신 아주 중요한 말씀을 살펴 보았습니다. 저나 여러분들도 시몬 베드로처럼 칭찬받을 만한 바른 신앙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그것은 우리 힘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십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천국의 열쇠를 사도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 보면 천국의 열쇠는 사도들 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주신 것입니다. 복음이 전파될 때에 천국에 가는 문이 열려집니다. 그러나 복음을 전파하지 아니할 때에는 천국의 문이 닫혀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넓은 의미에서 우리는 천국의 열쇠를 소유하고 있는 자들이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천국의 열쇠를 땅에 묻어두는 것이 아니라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함으로써 천국 가는 길이 계속 열려질 수 있도록 힘써야 합니다. 항상 말씀과 기도 생활에 충실하여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수요예배 예수님의 열두제자 (3) 가롯유다 식도성결교회 제목 : 마태복음 27:3-10 본문 : 구원 받지 못한 제자 가롯 유다 한 화가가 예수님의 생애를 묘사하여 시실리 성당의 벽화를 그려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어린 시절을 그리기 위한 모델로 아주 적격인 순진무구한 열 두살 짜리 아이를 발견하고는 예수님의 모델로 삼았습니다. 몇년 후 그 화가는 고난주간까지 유다를 제외하고는 모든 인물들을 완성했습니다. 어느 날 오후 화가가 앉아 있는 술집에 만취된 얼굴로 비틀거리며 한 사람이 들어왔습니다. 화가는 아직 그리지 않은 유다의 모델로 이 알콜 중독자를 선택하기로 작정했습니다. 화가는 그 사람을 성당으로 데리고 가서 비어 있는 벽을 가리키며 유다의 포즈를 취하여 달고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이 부랑자는 흐느껴 울면서 “당신은 나를 기억하지 못합니까?” 하며 버럭 화를 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어린 시절 그림을 가리키면서 “오래 전에 나는 당신에게 저 아이의 모델로 섰던 사람이었습니다”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가롯 유다에게 붙은 별명을 붙인다면 여러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강도. 배신자. 도적. 위선자’등이 될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구원받지 못한 제자”라고 정의하였습니다. 성경을 통해 가롯 유다가 처음부터 믿는 자가 아니었다는 증거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시니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군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요 6:63-64)” 예수님을 따라 다니는 군중들이 다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 다양한 환경 속에 동참했지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믿음의 고백이 없었던 자들에게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다”말씀하시면서 가롯 유다를 명백하게 지적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그가 처음부터 신자가 아니었음을 밝혀주는 성경적인 증언입니다. 그는 단지 종교적 환경에 동참했던 사람일 뿐이었습니다. 1)이름 가롯 유다라는 이름에서 가롯은 지방이름이고 유다는 그의 본명입니다. 그 의미는 ‘찬양’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 아름다운 이름이 가롯 유다 이후로 어느 누구도 그 이름을 후손에게 물려주지 않습니다. 유다지파의 시조는 유다입니다. 신구약 중간기에서 유대 민족을 민족적으로 구출하기 위하여 싸운 영웅 가운데 유다 마카비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유다라는 이름에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서도 야고보의 아들 “유다 다대오”가 있습니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보아 유다라는 이름이 얼마나 사랑받고 보편적인 이름이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2)배경 가롯이라는 지방은 헤브론 지역에서 수마일 내려간 곳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12제자들은 모두 갈릴리 출신입니다. 오직 유다만이 가롯 출신입니다. 우리 한 사람의 인생에 있어서 그 삶을 사는 모습이 우리 주변 인간관계에 얼마나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3)인물됨 요한복음 16장 6절에서 유다를 돈궤를 맡은 자, 즉 회계의 업무를 보는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가롯 유다가 위선자라는 사실을 모두가 알았다면 누가 돈궤를 맡겼겠습니까? 외관상 유다는 모두에게 신임받는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요 13:21에 “너희 중에 하나가 나를 팔리라”하셨을 때 제자들은 “나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아무도 유다를 지목하여 말하지 않았습니다. 기록된 성경을 읽을 때 그가 누군지 알고 보니까 나쁘다 말하지만 외관상에는 그의 간교함이 전혀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칭찬과 존경과 신뢰를 받고 있었습니다. 이런 외모와는 달리 그의 속마음은 어떠했습니까?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를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감이러라(요 12:6)” 그는 마리아가 자신의 옥합을 깨 예수님께 부을 때에 분내어 비싼 향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면 얼마나 많은 이웃을 구제할 수 있겠느냐고 책망합니다. 내적인 자신의 모순을 은폐하려는 저의가 숨어 있었습니다. 유다는 철저하게 가면을 쓴 이중 신분자였습니다. 저주하는 뜻에서인지 그는 사도들의 이름 중에 맨 끝 자리에 있습니다. (마10:4/막 3:19) 주님은 왜 이런 인물을 택하셨을까요? 처음부터 배신의 위험을 알고 계셨을까요? 운명적으로 배신자로 태어난 사람일까요, 배신행위를 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인물이었나요? Ⅰ.타락되기 이전의 유다 1.존경받는 사람 귀족적인 요소를 모두 갖추고 “찬양받는다”는 뜻을 지닌 자랑스런 이름을 가진 유다의 출발은 훌륭했습니다. 헤브론 남쪽 조그만 성읍 유다 이쉬 케리옷(Judas Ish Kerio -th) 출신으로 갈릴리 출신이 아니면서 유일하게 제자가 되었습니다. 유대사람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가까이 지내지 못하였기 때문에 불성실한 성격을 갖게 되었습니다. 2.잠재능력이 있었습니다. 주님이 택하셨을 때 그는 배신자가 아니었습니다. 암살할 의도를 가지고 기회만 노리는 흉악한 사람이 아니라 우리 옆에 앉아 있는 사람들처럼 평범한 인간이었습니다. 주님은 12제자를 택하시기 전날 밤, 철야기도를 하시고 신중히 사도들을 선택하셨습니다.(눈 6:12-12) 유다는 높은 이상을 가졌으며 약속을 지키는 사람으로서 적임자였던 것입니다. 3. 특권을 누렸습니다. 다른 사도들처럼 유다도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아들과 함께 다니면서 이야기도 하고 밤하늘 아래서 함께 앉아 떡을 떼고 그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의 사역중에 산상수훈을 들었으며, 소경이 다시 보게 되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폭풍을 잠재우며 귀신을 쫓고 성전에서 강도들을 몰아내고 어린 아이를 안고 축복해 주실 때 유다는 예수님의 목전에 있었습니다. 유다는 주님을 위하여 복음을 전도하러 다니기도 했으며 귀신을 내쫓기도 하였습니다.(눅 10:17-20) 4.그가 제자로 선택된 이유 마가복음 14:21을 보면 예수님은 이미 그가 자신을 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제자로 선택하셨을까요? 첫째는 “지상 교회는 영원히 가롯 유다와 같은 비극적 인물들이 존재할 것이다”라는 사실을 예시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왕이 되시지도 않고 자신들을 위하여 이적을 행하지도 않으시자 예수를 따르던 수많은 군중들이 떠나갔습니다.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인 교회는 밭과 같아서 알곡과 쭉정이가 함께 자랍니다. 마태복음 13장의 씨뿌리는 비유 속에는 네가지 종류의 밭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길가에 떨진 씨앗을 새가 와서 쪼아 먹는다. 가시밭에 떨어진 씨는 가시의 기운 때문에 결실치 못한다. 돌짝밭의 씨는 돌 때문에 더 자라지 못한다.’ 모든 장애요소 즉 열매맺지 못하게 하는 일체의 것들의 정체는 바로 마귀입니다. 배교의 현상이 나타날 때 놀라지 말라. 오히려 깨어 기도하라. 말씀하셨습니다. 둘째 이유는 모든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악을 선용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보여 주십니다. 악은 언제나 악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악의 술수를 끝내 이기시고 선을 이루십니다. 5.유다는 제자들 가운데서 회계를 보는 직책을 가졌습니다. 유다를 열 두 제자의 회계로 택한 것은 동료들이 그를 상당히 신임하였음을 말해 줍니다(요 12:6). 마태가 세리였기 때문에 돈을 다루는 데 상당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지만 유다의 재정적인 전문지식도 다른 사도들보다 돋보였습니다. 또 그는 믿을 수 있고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으로서 동료들에게 존경을 받았습니다. 동료들 전원의 동의를 받아서 그는 돈을 가방에 챙기고 지불하는 책임을 맡았습니다. 제자로 출발할 때에 그는 신중하고 정직했으며 유능하고 실질적인 사람이었습니다. Ⅱ.타락하는 유다 1.유다의 타락의 실례 유다가 산헤드린에 돌아온 것은 예수님의 육신을 가혹하게 처형하기 전에 예수님의 무죄함을 탄원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가 산헤드린에 돌아온 것은 예수님의 무죄함보다는 자신의 입지에 더욱 촛점을 맞추고 있는 것입니다. 유다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이 어떻게 한 가지 사건 속에 뒤섞일 수 있을까에 대한 표본입니다. 예수께서는 유다에게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느니라”(막 14:21)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다의 배신은 인간을 대속하기 위하여 세우신 하나님의 계획의 하나라고 예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또 유다가 행한 일은 너무도 극악하기 때문에 유다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은 것이 더 낫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배신이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유다에게는 배신자의 길을 스스로 택한 책임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든 종교 지도자들에게 예수님을 팔아 넘기지 않을 수 없었는데 바로 이 어떤 사람이 되기를 선택한 사람이 유다입니다. 유다는 스스로 운명을 결정했습니다. 2.타락의 단계 만일 유다가 자신이 저지른 무서운 죄에 대한 책임을 알았다면 그는 왜 그렇게 악하게 타락했을까요? 유다를 타락하게 만든 요인은 무엇이었을까요? 1)유다는 예수님에 대한 환상에서 점차 깨어났습니다. 유다의 사악한 행동은 갑자기 일어난 일이 아니라 몇 단계를 거쳤습니다. 예수를 따르겠다고 모든 것을 버렸을 때 유다는 자신이 배신자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서서히 악의 길로 미끄러지기 시작했습니다. 예수께서는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미리 여러 차례 경고하신 일이 있으셨습니다. 유다는 세속의 왕국을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메시야가 로마로부터 이스라엘을 구하고 통치할 것을 기대했습니다. 유다는 새로운 왕국에서 영광과 권세를 누릴 생각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명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너무도 거리가 먼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왼편 빰도 갖다대라는 교훈과 내일을 염려하지 말하는 충고, 이 땅에서 재물을 쌓아 두지 말라는 충고와 적을 사랑하라는 충고 등은 유다의 생리와는 상반되는 말씀이었습니다. 오천 명을 먹인 후 예수께서는 가까운 제자가 아니면 모두 자기로부터 떠나라는 내용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 (요 6:68)라고 예수님의 말씀에 대답하였습니다. 이때 예수께서는 유다에게 ”내가 너희 열 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가룟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고 직접 경고를 하셨습니다. 요한은 이에 덧붙여”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킴이라 저는 열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요 6:70-71)고 썼습니다. 2)유다는 탐욕스러웠습니다. 마리아가 비싼 향유를 예수께 바르는 것을 본 유다는 마리아의 행동에 대하여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어찌하여 주지 않느냐?고 비난했습니다. 요한은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오 저는 도적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감이러라”고 유다에 대하여 고발했습니다. 유다의 말에 예수께서는 마리아를 두둔하여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요12:7)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의 마음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은, 유다의 그 동기는 악이며 마리아의 동기는 숭고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탐욕은 죄로 인도하기 때문에 십계명의 “탐하지 말라”는 말씀은 아주 중요한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웃의 명예를 탐하면 거짓이나 중상을 하게 됩니다. 이웃의 재산을 탐하면 도둑질을 하게 됩니다. 유다의 탐욕은 주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말았습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악의 뿌리가 되나니”(딤전 6:10)라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에 대한 예수님의 경고를 유다는 여러 번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진실한 마음에 대한 유다의 환멸이 늘어나고 탐욕이 커지면서 배신의 무대는 설치되었습니다. 주님에 대하여 원한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의 절박한 재난으로부터 자신을 구할 방법을 유다는 찾았습니다. 배신 행위는 너무도 사악한 일이기 때문에 누가는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갔다.“(눅22:3)고 했습니다. 요한은 이 끔찍한 짓을 설명하기 위하여 배신 행위에 두 번 사단이 들어갔으며(요 13:2,27) 유다는 사단에게 문을 활짝 열었다고 말하였습니다. 3)주님을 배반한 까닭 성경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악의 뿌리가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돈을 사랑했고 그 약점을 마귀가 여지없이 공략한 것입니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롯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요 13:2)” “조각을 받은 후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요 13:27)” 마귀는 처음에는 생각을 넣습니다. 그후에는 자신이 직접 들어갑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 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요 6:70)” 이것은 가롯 유다가 마귀라는 것이 아니라 그가 마귀에 사로잡혀 마귀의 일을 할 것을 주께서는 먼저 보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3.유다에 대한 주님의 경고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면서 첫번째 경고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눈이 유다의 발에서부터 굳어진 얼굴로 더듬어 올라갈 때 유다가 조금은 회개하는 낌새를 느끼셨을 것입니다. 아무도 유다가 회개하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때 분명히 유다는 긴장하고 불안한 가운데 앉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더욱 강퍅해지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두번째 경고는 유월절 식사 때였습니다. 사복음서는 제자 중의 하나가 하나님을 팔 것이라고 선언하심으로 충격을 받아 깜짝 놀라 조용해진 제자들은 제각기 ”주여, 내니이까?“라고 여쭈었습니다. 그때 유다를 가리키면서 ”주여, 이 사람입니까?“하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러한 의심 속에서 유다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의 무서운 반사적인 행동 때문에 유다가 스스로 자신의 흉악한 죄를 깨닫기를 예수께서는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유다는 위선자답게 ”랍비여 내니이까?라고 물으니 예수께서는 “네가 말하였도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마 26:25). 예수님을 노리는 유다의 시한폭탄의 시계소리는 다른 제자들에게는 들리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세번째 경고는 베드로가 요한에게 누가 배신자냐고 손짓을 할 때였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옆 자리에 앉았으며 유다는 그 맞은 편의 옆에 앉아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내가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그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3:23-26). 제자들은 귀한 사람에게 첫번째로 찍어주는 것으로 생각했을 뿐 찍어주는 의미를 아무도 모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귀한 대우를 받으면서 유다의 얼어 붙었던 양심이 녹았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마지막 호소도 아무런 효과가 없었습니다. 두려움과 회개의 기미를 함께 나타내 보이면서 유다는 마귀의 충동을 받아 그 즉시로 자리를 떴습니다. 유다가 제사장들과의 약속이행을 결심한 것을 아시는 예수께서는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요 13:27)고 말씀하셨습니다. 밖은 칠흑 같은 밤이었으므로 유다의 마음도 깊은 절망의 늪을 헤메고 있었을 것입니다. 가롯 유다에게는 적어도 세번쯤은 회개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이 떡 조각을 받은 사람이 나를 팔 것이다”했을 때입니다. 둘째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네가 입맞춤으로 나를 파느냐”하셨을 때입니다. 셋째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기로 결정된 후 그것이 죄악인줄 알았을 때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뉘우치기는 했으나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4.유다의 입맞춤 유다는 제자들이 은밀하게 기도하는 곳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곳은 유다도 예수님과 함께 자주 갔던 곳입니다(요 18:2). 유다는 제사장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고 은전 30냥을 받으려고 갔습니다. 그 후, 겟세마네에서 고뇌의 기도를 하고 자고 있는 제자들을 깨우셨습니다.(마26:46) 제자들이 선생을 만나면 어깨에 손을 얹고 입을 맞추는 것이 그 당시의 관습이었습니다. 이것은 뚯이 통한다는 신호였습니다. 원래 입맞춤은 마음에서 우러난 친절한 행동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입맞춤으로 배신하는 것은 가까운 친구의 찻잔에 독약을 타는 것과 다를 게 없습니다. 5.유다의 비극적 종말 유다도 베드로처럼 용서받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찾아가 용서를 빌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회개했으나 유다는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유다는 양심의 가책은 느꼈으나 회개의 눈물은 흘리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 체포되실 때 유다는 그 밤을 캄캄한 곳에서 숨어 지냈습니다. 이튼날 아침 예수께 선고가 내려진 사실을 알고 유다의 마음은 슬펐습니다. 은전 30냥이 그의 손에서 화근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유다가 발걸음을 재촉하여 회당으로 돌아와 안으로 들어가서 비탄에 잠겨 가지고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라고 말하니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그게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고 조롱했습니다. 예수님과 교제하고 가르침을 받아 감동했던 죄인 유다는 죄책감음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온전한 회개가 아니었습니다. 유다는 큰 나무가 서 있는 근처의 벼랑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나뭇가지 너머로 밧줄을 던져 단단하게 잡아매고 밧줄의 한 쪽 끝은 목에 감아 매듭을 지은 후 낭떠러지로 껑충 뛰었습니다. 다락방에서 베드로가 말한 유다의 죽음은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 나왔다”(행 1:18)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유다의 비극에서 얻는 중요한 한 가지 교훈은 인간의 타락과 인간의 더러움은 우리의 마음 속에서 싹이 트고 자라나기 때문에 오랫동안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고 숨겨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죄는 공개되기 전에 오랫동안 보이지 않고 가리워질 수 있습니다. Ⅲ. 우리에게 주는 교훈 이 유다의 삶은 우리에게 얼마나 엄숙한 교훈을 남깁니까? 우리는 지금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고 신앙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를 각자가 우리 자신에게 질문해 보십시다. 1.“가면을 벗고 자신에게 솔직하라” 가롯 유다는 가면을 벗지 못하고 이중인격적인 두 얼굴을 가진 사나이 노릇을 하다가 그만 죄악을 범하게 된 것입니다. 속으로는 도적질하고 훔치는 일을 하면서도 겉으로는 가장 정의의 투사인양 행동하는 그런 사람이 되지말고 우리의 가면을 벗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에게 솔직해야 할 것입니다. 내가 어떤 사람인가를 하나님 앞에 보여 달라고 기도하십시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올바르게 발견하십시다. 내가 어떤 사람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2.“자기의 의를 버리라” 본문에서 우리는 가롯 유다가 퍽이나 잘난 척을 하던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면 얼마나 좋겠소”라고 고함을 치는 이 가룟 유다의 모습에서 얼마나 자기의 의를, 자기 자신을 드러내려고 애를 쓰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 당신은 참 신앙을 소유하기 제일 어려운 사람, 구원받기 가장 어려운 사람이 누구인 줄 아십니까? 자기의 의를 고집하는 사람, 굉장한 자기의 의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구원받기 가장 어려운 사람입니다. 자신에게 솔직하십시다. 내 의를 버리십시다. 내가 주장할 의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읍시다. 그리고 예수님만이 나의 구주요, 주님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깨닫고 발견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를 나의 의로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을 구원의 주님으로 영접할 때, 예수 그리스도만을 나의 주님으로 믿을 때, 우리는 그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중생의 체험입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일 때, 하나님의 자녀로 우리가 다시 태어날 때, 그것이 바로 거듭남입니다. 중생의 씻음, 이것이 바로 성령의 새롭게 하심입니다. 당신과 나는 어떠합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책임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를 변하게 해주십사고 그리스도께 간구할까요? 혹은 직접 그리스도를 찾아 “주여, 주여”하며 부르짖을까요? 그렇다고 그리스도의 길을 우리가 성공적으로 행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가룟 유다와 함께 기억되도록 할 것이냐 또는 우리만이 기억되도록 할 것이냐를 결정해야 합니다. 유다의 일생이 비극적으로 막을 내렸을 때 열 한명의 제자들이 남았습니다. 맛디아가 유다의 자리를 이어 받았지만 어느 의미에서 보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자신을 열 두번째의 사도로 생각할 수 있으며 따라서 예루살렘을 떠나 사마리아와 이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는 사명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11.11.06 수요 예수님의 12제자 (4) 디두모 도마 식도성결교회 제목 : 의심많은 제자 디두모 도마 본문 : 요 20: 24-29 1.별명 “의심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를 나쁜 성격의 소유자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는 “의심 많은 팔레스타인 사람”이라고 불려 왔습니다. 의심할 바 없이 도마의 별명은 진리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지만 잘못 이해하게 하는 요소도 있습니다. 그는 진리를 알려고 질문을 잘하는 성격이었습니다. 진리를 듣고 한 번 확신하기만 한다면 그는 전심으로 그 진리를 따랐습니다. 도마의 질문에 예수께서는 화나는 표정을 짓지 않으셨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도마가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부활의 신비를 믿고 감동한 것을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몇 가지 증거 가운데 절정 단계에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의 성실한 의심은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지혜로운 믿음에 이르게 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는 “의심하는 사람”이 아니라 ”질문 잘하는 사람“이란 별명으로 불려야 도마에게 더 적절한 표현일 것입니다. 2.제자 서열 도마는 열 두 사도의 명단을 제외하고는 3 복음서에서 별로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1)마태복음에서는 일곱번째로(마 10:3) 2)마가과 누가복음에서는 다 같이 여덟번째로 기록되었습니다.(막 3:18/ 눅 6:15) 3)부활 후 다락방에 있을 때에는 여섯번째로 기록되어 있습니다(행 1:13) 4)요한복음에는 3번 언급됩니다. 요한은 부활 후 고기를 잡으러 간 일곱 제자들 가운데 그를 포함시켜 디두모라는 다른 이름으로 불렀습니다.(요 11:16) 3.성격 도마는 우울증을 가졌고 건강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충실하고 용기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도마는 염세적이었지만 헌신적이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목숨을 바칠 각오도 되어 있었습니다. 아마 도마의 이중성격 때문에 또 다른 이름인 디두모로 불리우게 되었을 것이며 ”쌍동이“(디두모)란 별명이 어울리기도 합니다. 쌍동이들에게는 심리학적으로 서로 시기하고 다툴 수 있는 가능성이 일반적인 아이보다 많습니다. 쌍동이 형제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 같은 것들이 아마도 도마로 하여금, 의심을 많이 하게 하는 성격으로, 그의 성장과정에서 많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1.도마의 용감한 염세주의 (요한복음 11장 1-16절) 주님의 명성이 대단히 널리 퍼졌기 때문에 종교지도자들은 폭도들을 선동하여 예수님을 돌로 쳐 죽이려고 여러 번 시도했습니다. 예루살렘의 위험한 지역을 벗어나면서 제자들을 유대에서 요단으로 건너가는 곳인 비교적 안전한 뵈레아로 인도하셨습니다. 그곳에서 사랑하시는 나사로가 중병이 들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이틀을 기다린 후 예수께서는 나사로를 보러 베다니로 되돌아가자는 의견을 밝히셨습니다. 제자들은 깜짝 놀라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하나이까?”(요 11:8)고 여쭈었습니다. 제자들의 반대 의견에도 아랑곳하지 않으신 예수님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요11:11)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제자들은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요11:12).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죽음이 아닌 육체적인 휴식을 예수께서 말씀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때 주님은 제자들에게 나사로가 죽었다고 분명히 말씀하시면서 가자고 하는 것은, 나사로의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라(요 11:4), 너희들 믿게 하려는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요 11:14-15). 1.유대로 돌아가자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 제자들의 거리를 좀 두고 바라보기만 하거나 마지못해 머뭇거리고 있을 때 도마는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요 11:16)고 제의 했습니다. 도마는 비록 죽는 한이 있더라도 주를 따라 베다니로 갈 각오를 다짐했습니다. 우물쭈물하는 제자들의 충성심을 집결시키는 용기에 불을 붙인 사람은 지도자 베드로가 아니라 도마였습니다. 그 용기는 그의 회의심을 무모한 자살행위로 보일 수밖에 없는 위험한 땅으로 제자들의 발길을 재촉하였습니다. 2. 불완전한 도마의 용기 이 말만 본다면 그는 의리있고 뜨거운 열정이 있는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의 말에는 침울하고 어두운 그늘이 깔려 있었습니다. 도마는 사물의 어두운 면만을 보는 염세주의자였습니다. 그는 예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릴 의사와 능력을 가지신 것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비록 용감하였으나 도마의 마음에는 이판사판 이래저래 죽을 것이라면 두렵기는 하지만 지금 죽으러 가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도마를 너무 꾸짖지 마십시다. 깊은 실의에 빠졌던 선지자 엘리야는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왕상 19:4)라고 기도했으며 다윗은 우리가 항상 쓰는 말씨로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느냐?고 울부짖었습니다(시42:5) 2.몹시 당황하여 질문하는 도마(요한복음 14장 1-7)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14:1)” 어떤 배경으로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요한복음 13장부터 16장까지를 가리켜 “예수님의 마지막 다락방 강화”라고 말합니다. 지상에서의 최후의 설교가 기록되어 있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떠날 것을 말씀하시고 근심하지 말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처소를 예비할 것이며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말씀하십니다.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 도마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예수께서 11장에서 나사로를 깨우러 간다고 했을 때 제자들이 알아듣지 못한 것처럼 예수께서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고 하셨을 때 도마는 전과 같이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알아듣지를 못합니다. 지금 예수님이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고 했을 때 도마는 예루살렘 바깥에 대주택이라도 마련해 놓으신 줄로 알고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는데 가는 길이 어디인줄 알고 우리가 따라 갑니까?”반문하였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도마에 대해서 하나의 희망을 걸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어떤 말씀을 하시면 침묵으로 일관하지 않고 즉시 말대답을 합니다. 그는 그렇게 반문하면서 무엇인가를 계속 찾고 있는 것입니다. 아직도 석연치 않지만 자기의 신앙에 대한 문제나, 모든 삶에 대한 자기의 그 대답이 아직도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는 무엇인가를 끈질기게 붙들고 추구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한 신학자는 도마의 인물됨을 묘사하며 “그는 회의에 찬 사람이지만 절망적 회의론자는 아닙니다. 그는 차라리 구도적 회의론자에 가깝습니다.” 그는 진리를 찾고 있는 회의론자입니다. 아니, 어떤 의미에서 그는 이미 신앙을 갖고 있기 때문에 더 주님을 놓칠 수 없는 안타까움을 가지고 주님 앞에 질문을 묻고 있는 신앙적 회의론자다”라고 하였습니다. 비록 그의 말 속에는 불평이 섞여 있고, 자조적인 언사가 그 말의 바탕에 흐르고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적어도 질문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라는 점을 우리는 높이 살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은 유월절 경배를 마치고 작별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오랫동안 소중히 간직했던 제자들의 소망과 꿈이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진리가 오리라는 제자들의 확신에 위험한 공포가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라 진실로 새로운 시작임을 제자들에게 이해시키시려고 주님은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배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2-3)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축복이 내리는 것을 제자들이 보게 되리라는 것을 알려 주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 때 당황하는 도마에게 예수께서 “내가 가는 곳에 너희가 그 길을 알리라”(요14:4)라고 말씀하시자 더 참을 수 없는 도마는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요 14:5)라고 여쭈었습니다. 주님의 사역이 죽음 저편에까지 미친다는 사실을 도마는 이해할 능력을 갖지 못하였습니다. 예수께서 천국으로 돌아가시면 어떻게 지상에 왕국을 세울 수 있을까 하는 커다란 의문을 도마는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의 의문은 믿지 못하는 데서 나왔다기 보다는 착각이나 혼란 때문에 생긴것 같습니다. 도마의 질문에는 정직한 의문이 내포되어 있었습니다. 도마는 여러 가지로 추리해 보는 제자들의 의문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믿음으로 행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아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도마의 의문이 무엇이든 예수님의 대답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영원히 도마에게 은혜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나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대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려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예수는 표본이요, 선생이며 영생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스도는 구약 속에 있는 예언과 상징과 표적을 성취하였으며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였습니다. 믿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알파요 오메가이며 모든 것이 되십니다. 3.도마의 정직한 의심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처음으로 다락방에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시던 날 밤에 도마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이 때에 그는 바위산 골짜기를 배회하거나 한적한 산을 오르면서 고독과 슬픔속에 눈물짓고 있었을 것입니다. 도마는 왜 참석하지 않았을까요? 집회에 참석하지 못한 현대의 도마는 “하루 종일 힘들여 일했더니 너무나 고단해, 다락방까지 걸어가려면 내가 너무 지칠거야”라고 스스로 양해를 구할 것입니다. 다락방 모임에 도마가 참석하지 않았던 진정한 이유는 예수께서 그 곳에 계시리라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도마는 그리스도가 죽음에서 살아나신 사실을 믿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마음에 있으면 직접 찾아가서 조문을 하게, 그러나 그리스도는 안계실 걸세”라고 말했습니다. 1)도마는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텅빈 무덤에 대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할 때 제자들은 다락방에 모여 닫아 걸고 제자들은 그 날의 당황스러웠던 일을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문은 열리지 않고 닫혀 있는데 갑자기 예수께서 들어와 제자들 가운데 우뚝 서셨습니다. 그런데 이 자리에 도마는 없었습니다. 주 예수께서는 두세 사람이 자기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는 반드시 그 가운데 자신도 있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마 18:20) 2)도마는 하나님의 말씀을 배울 기회를 놓쳤습니다. 그날 밤 주님은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들이 자신의 고난과 부활을 어떻게 예언했는지를 보여 주심으로써 이 자리에 있던 제자들에게 말씀을 이해하는 문을 활짝 열어 놓으셨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의 마음은 불이 붙고 밝아졌습니다. 그러나 도마는 구약의 예언 가운데 있는 중요한 이 에언을 배우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3)도마는 믿는 자와 친할 기회를 잃었습니다. 다른 열 명의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도마 역시 아직도 하나님이 갈고 닦아야 할 필요가 있는 거칠은 면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믿는 사람들과의 교제로 자신을 갈고 닦을 수 있는 기회를 잃어 버렸습니다. 의심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성도의 교제에 머물러야 합니다. 분명히 교회는 완전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성도들은 하나님이 택하신 보석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완성을 위하여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 경배하고 예배하므로써 하나님의 자손들은 강건해지고 성장하는 것입니다. (예)경건한 신앙생활을 하는 분이 열심히 예배에 참석합니다. 왜 한번도 빠지지 않는냐는 질문에 “주님이 언제 우리에게 놀라운 역사를 행하실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 자리에 빠지기를 원치 않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비록 의심이 있어도 교회 예배에 빠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도의 모임 속에 있으면 성도들과만 교제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 거하시며 역사하시는 성령님과 만나고 교제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주님을 만나면 의심이 사라집니다. 이론적 증명이 아니라 체험적으로 경험하게 하십니다. 한 순간의 체험이 눈 녹듯이 다 사라지게 만듭니다. 주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고 고백하는 사람은 의심이 사라집니다. 4)도마는 기쁨과 평강의 기회를 잃었습니다. 예수께서 살아 있다는 소문이 떠돌고 있고 이미 예수께서 나타내 보이셨던 베드로를 제외하고 제자들이 죽은 그리스도를 추모하기 위하여 모였습니다. 어찌된 일입니까! 예수께서 그들 가운데서 서 계시지 않습니까! 살아계신 주님을 본 제자들은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이때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20: 19)라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자리에 없었던 도마는 평강과 기쁨의 기회를 얻지 못한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이 모여 있는 곳에 찾아오셔서 부활하신 주님의 정체를 나타내실 그때 도마는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역사하실 때 당신은 그 현장에 있었습니까?? 옛날에 경건한 청교도들은 그리스도들이 모이는 모임에 한번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답했습니다. “주님이 언제 우리에게 놀라운 역사를 행하실지 모르기 때문입니다.”도마는 무리들을 떠나 이탈된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26절에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함께 있을 때 주님이 오셨고 그는 의심을 불식할 수 있었습니다. 혹 의심이 많더라도 교회 예배에는 빠지지 마십시오. 어느날 내가 그냥 만나버린 주님, 내가 어느 한 순간의 사건을 통해서 우리 주님을 만나고,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구주요 주님이라는 사실을 깨달아 버리자 한 순간의 체험이 모든 의심을 사라지게 하였습니다. 5)도마는 그리스도의 사명을 위임받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주 예수는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 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 되라”하시고, 또 “아버지게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고 하셨습니다(눅 24:27-28/요 20:21)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해야 할 사명을 부여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도마는 그 자리에 없었기 때문에 사명을 부여받지 못했습니다. 6)도마는 그리스도의 상처를 직접 보지 못하였습니다. 유령인줄 알고 놀란 제자들을 안심시키기 위하여 주님은 손, 발과 옆구리를 보여 주셨습니다. 제자들에게 만져보고 확인해 보라고 하셨습니다. 못자국이 너무도 선명했기 때문에 제자들이 예수께서 나타나셨다는 사실을 도마에게 설명할 때 못자국의 상처를 말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깊은 회의에 빠져 있는 도마는 제자들의 설명에 대하여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고 말하였습니다(요 20: 21-25) 도마는 막달라 마리아와 엠마오와 열 제자들의 증거를 모두 거부하고 오로지 내가 직접 보고 확인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실증적인 방법을 고집했습니다. 정직한 의심은 강한 확신으로 변할 수도 있습니다. 7)절망적인 의심에 잠겨있었지만 도마는 확신을 가지려 하였다. 도마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문제점은 의심과 회의의 문제였습니다. 어떻게 이것을 극복할 수 있을까요? 회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계속 질문하여야 합니다. “주님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그 길을 우리가 어떻게 갈 수가 있습니까?” 도마의 질문에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답해주셨습니다. 도마의 질문이 없었더라면 이 위대한 대답도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질문하고 있다는것은 관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비판하는 것도 관심이 있다는것입니다. 회의한다는 것과 불신앙은 다릅니다. 예수님은 도마의 질문을 꾸짖지 않으셨습니다. 질문을 던지세요. 그 질문을 통해 당신은 주님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죽음에서 살아나신 그리스도를 보았다는 제자들의 한결같이 거듭되는 다짐은 다음 주일의 다락방 모임에 도마가 참석하도록 확신을 주려는 것이었습니다. 도마는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문이 닫혀 있는 방으로 들어와 제자들 가운데 서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눈은 도마를 찾으시더니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이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 20:26- 27)고 부탁하셨습니다. (예화)빌리그래함에게 하나님이 계심을 증명하라 할 때 나는 오늘 아침도 대화를 나누었기에 증명할 필요가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아내가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라고 하면 이는 웃기는 일입니다. 8)도마는 오래동안 추구하던 증거를 찾았습니다. 너무도 명백하기 때문에 아무도 아니라고 할 수도 없고 손으로 만져서 알 수 있는 확실한 증거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손이 열병있는 이마를 만지시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어린 아이를 축복해 주는 것을 도마는 여러 차레 직접 본 일이 있습니다. 이제는 못자국에 손가락을 넣어 볼 필요도 없습니다. 주님께서 말씀도 채 마치시기 전에 도마는 무릎을 꿇고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울며 고백하였습니다(요 20:28). 이 고백은 예수를 하나님으로 인정한 것이며 이전에 있었던 다른 제자들의 어떤 형태의 확인보다도 더욱 분명하고 훌륭한 것입니다. 도마의 음울한 의심은 빛나는 믿음으로 변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확실한 증거를 원하는 사람을 꾸짖지 않으셨습니다.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 믿음과 증거를 찾는 믿음은 어느 편이 더 훌륭할까요? 한 때 의심을 많이 하였던 도마는 의심을 풀면서 자기의 갈 길을 찾았습니다. 도마가 그 동료들 가운데서 믿음이 가장 확실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예수께서는 알고 계셨습니다. 정직하게 의심하는 사람은 강한 믿음의 소유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의심하는 것이 범죄는 아닙니다. 그러나 안 믿겠다는 것은 어둠에 그대로 있겠다는 것이기에 불신앙의 죄입니다. 정직한 의심과 불신앙은 다릅니다. 주님께서 도마를 제자로 삼으셨던 이유는 바로 의심나면 물어서 배우고 문제를 해결하려는 태도입니다. 오늘의 우리들도 모르면 물어봅시다. 질문을 많이 하는 학생일수록 총명하여 집니다. 질문한다는 것은 관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영광스러운 주님을 만나기 위하여 질문하고 성경에서 답을 찾기를 바랍니다. 9)도마는 그리스도의 상처를 결코 잊을 수 없었습니다. 상처는 구세주의 고난을 상기시며 줍니다. 상처는 금과 은처럼 없어질 것이 아니라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표지가 될 것입니다.(벧전 1:18-19) 회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교제 가운데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이해관계는 우리의 헌신봉사와 싸움을 걸고 있습니다. 나이가 젊거나 늙거나 가릴 것이 없이 돈, 교육, 명성 환락의 도전을 받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손을 들어 올림으로써 자기의 주장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신 분이 수십 세기를 왕래하신 길은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됩니다. 13.11.20 수요예배12제자강해 5 식도성결교회 제목 : 예수님의 열두제자 (5) 요한 본문 : 요일4: 7-16 요한복음은 사도 요한에 의하여 쓰여진 복음서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요한은 다른 제자들의 이름을 말하면서 자신의 이름은 한번도 밝히고 있지 않습니다. 그 대신 다른 방법으로 자신을 표현합니다.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가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요 13:23)” 그는 주님의 남다른 사랑을 받았기에 ‘나, 요한’이라는 자신을 나타내는 표현보다는 더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칭호인 “주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로 불리우고 싶었던 것입니다. 1.이름과 배경 레오나르드 다빈치(Leonardd da Vinci)는 그림 『최후의 만찬』에서 소녀처럼 미소지으며 부드럽게 흰 손을 겹치고 있는 요한의 얼굴을 그렸습니다. 십대의 말기에 주 예수를 만났을 때에는 비록 사도들 가운데서 나이가 가장 어리며 나약한 사람에 지나지 않았으나 요한은 용감하고 영적으로 강건한 사람이었습니다. 요한의 아버지는 세베대였습니다. 그의 아버지에 대해서는 이름만 밝힐 뿐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몇번 성경에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름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십자가까지 따라간 여인들 중의 하나가 요한의 어머니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은 아마도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실한 신앙의 감동에 있어서 아버지보다는 어머니의 영향을 받았을 것입니다. 요한은 야고보, 안드레, 베드로 등과 더불어 가버나움 출신으로 바다에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는 어부였습니다. 요한이라는 이름은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다”라는 뜻을 가졌습니다. 요한의 가정은 가난한 서민은 아니었습니다. 종을 거느리고 있었고, 넓직한 집이 있었으며 또 대제사장 가야바와 친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기 고장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던 집안의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어느날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그물을 버리고 복음을 전하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가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는 요 1:35 이하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예수의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거늘(요 1:35-37)” 안드레와 요한은 세례 요한의 제자로 지내다가 어느날 그가 증거하는 말씀을 듣고서 예수를 좇게 되었습니다. 그 좇아오는 두 제자에게 예수님은 “너희가 무엇을 구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이에 두 제자는 “무엇을 원합니다”라고 대답한 것이 아니라 “선생님은 어디에 사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단지 예수님에게서 무엇을 얻는 단순한 이익을 원하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증언된 바로 그분과 사귀고 싶어했던 것입니다. 어디에 사시는가를 확인해 두고 그분과 계속적인 교제를 나누고 싶어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보라 그러므로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열 시쯤 되었더라(요 1:39)” 2.인물과 성격 형제인 야고보와 함께 요한은 가버나움에서 베드로, 안드레와 고기를 잡았습니다. 요한의 아버지는 세베대였습니다(마 10:2). 고기잡이는 근육을 발달시키는 힘든 노동이었습니다. 거센 파도를 헤치면서 노를 젓기 때문에 손바닥에는 못이 박혔습니다. 뙤약볕 아래서 그물을 수선하는 일은 어부 청년들을 구리빛 살색으로 만들었습니다. 요한은 “예수의 가장 사랑받는 사람”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과 처음 만난 후 요한은 고기잡이하러 돌아왔으나 나중에는 예수님과 동행을 해야 하기 때문에 고기잡이를 더 이상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요한을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야고보, 베드로, 안드레와 함께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기 위하여 큰 마음을 먹고 아버지와 배와 고기와 직업을 다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요한과 그 형제 야고보를 “보아너게” 곧 “우뢰의 아들”이라 부르셨습니다(막 3:17). 또 이 형제는 앞으로 올 왕국에서 높은 자리 둘을 주십사고 예수께 간청하는 절제없는 야망을 갖기도 했습니다. 주 예수는 이들의 불같은 열망과 경건하지 못한 욕심을 꾸짖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들을 삼년간 훈련시켜 폭풍같은 성격을 잠재웠으며 우뢰를 조용하게 변화시키셨습니다. 요한은 처음에는 우뢰와 같이 성격이 급하고 거친 사람이었으나 예수님에게 의하여 ‘사랑스런 제자’로 바뀐 것입니다. 어느 마을로 복음을 전하러 가던 중에 요한은 많은 사람이 웅성거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람들이 왜 그렇게 동요하는가 보려고 요한은 앞으로 다가갔습니다. 귀신들린 한 소년이 땅 위를 뒹굴면서 소리를 지르고 머리를 좌우로 흔들고 있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권세로 귀신을 쫓아내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요한이 미처 손도 쓰기 전에 낮선 사람이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그 소년은 경련을 일으키며 몸을 뒤틀다가 조용해지더니 고쳐졌습니다. 요한이 귀신을 쫓으려 했을 때 깜짝 놀란 낯선 사람에게 큰 소리로 “감히 어떻게 당신이 주님의 이름을 쓸 수 있단 말이오? 도대체 당신은 무슨 권능이 있길래 그런 일을 하오? 당신은 주님으로부터 아무런 권세도 받지 못한 사람이요. 나는 주님의 가까운 사람 중에 한 사람이요. 이전에 나는 당신을 본 일이 없오. 결코 주님의 이름을 쓰지 마시오”라고 했던 것입니다. 예수의 제자가 아닌 사람이 예수님을 대신하여 말할 수도 없으며 예수의 이름으로는 일도 할 수 없다고 강경하게 요한은 몰아쳤습니다. 요한은 예수님께 “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막9:38)” 이 말씀을 보게 되면 요한은 자신의 편이 아니면 다 적으로 간주하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열정을 가진 사람은 항상 이런 외골수로 빠지기가 쉽습니다. 요한의 성격이 외골수적인 것은 가장 높은 자리에 대한 그의 야망이 연장된 결과였습니다. 그는 사도로서의 자부심을 보이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막 9:39). 요한은 주 예수의 이름을 의탁하여 주 예수의 일을 행하는 데 제자 아닌 사람을 제외시키려는 계획에 대하여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습니다. 요한의 이야기로 미루어 보면 병고치는 이 사람은 스게와의 일곱 아들처럼 전문적으로 귀신을 쫓는 사람임을 예수께서는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행 19:13-14). 이 사람은 어디에서인가 예수의 말씀에 감동을 받은 성실한 사람이었으며, 곤고한 사람들을 위하여 예수께서 역사하시는 것을 흉내내어 보려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마도 이 사람은 사도들과 동등한 영적 은사를 받은 사람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이 형제들의 활화산 같은 성품은 주님에게 겸손하지 못한 사마리아인에게 불을 내리기를 원했을 때 잘 나타났습니다. 사마리아 고을의 사람들이 예수를 믿지 않고 괄세를 하니까 화가 나서 “선생님 하늘에서 불벼락을 내려서 이 마을 사람들을 몽땅 불태워 버립시다”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뢰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가장 실감나게 연상시키는 장면입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사자들을 앞서 보내시매 그들이 가서 예수를 위하여 준비하려고 사마리아인의 한 마을에 들어갔더니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기 때문에 그들이 받아들이지 아니하는지라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이르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눅 9:51-54)” 그러나 그가 어떻게 변했습니까?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우리가 주목할 것은 “서로 사랑하라”는 이야기가 나중에 요한이 기록한 요한일서에서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어느 정원사가 정원의 흙을 보고 “너는 어떻게 그처럼 좋은 향기를 풍기느냐?”고 물었더니 진흙은 “사람들이 나를 장미꽃 옆에 두었기 때문이랍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항상 주님과 함께 있었기 때문에 성급한 청년 요한은 성인이 되어 온유한 성격으로 변하였습니다. 요한의 야망은 줄어들었습니다. 편협한 외골수적 성격도 사라졌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 격렬한 성격의 청년에서 마음 착한 성인이 된 것입니다. 요한은 주 예수에 의하여 우뢰의 아들에서 사랑의 사도로 변하였습니다. 요한이 이렇게 변하는 데는 여러 과정을 거쳐야 했습니다. 그의 인격 속에는 타고난 성격이 항상 깃들어 있기 때문에 폭발적인 잠재력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함께 해주시는 권능과 근엄한 용모는 여러 갈래로 찢어진 요한의 옳지 못한 정력을 온유한 길로 인도하였습니다. 우리들의 열정은 결코 옳기만 하지도 않고 나쁘기만 하지도 않은 그 중간 상태이기 때문에 그것이 나쁜 방향으로 쓰일 수도 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쓰일 수 있는 가능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요한의 강력한 정신이 거짓 교리나 사악한 행동에 대하여 단호히 규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한의 성품의 변화는 우리에게 많은 격려를 해 줍니다. 고집이 세고 이기적이며 불평하기 좋아하는 청년이라 해서 반드시 고집세고 이기적이며 잘 투덜대는 어른으로 성장하지는 않습니다. 영적인 성장법칙에 따라서 떫고 시퍼런 과일이 달콤하고 맛좋은 과일로 익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는 주님을 만나 생각이 바뀌고 삶이 바뀌어 사랑의 사도가 된 것입니다. 요한복음 20장 1절 이하를 보면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가 부활의 현장을 확인하였습니다. 요21:5 이하 갈릴리 바닷가에서 고기를 잡을 때 주님이 찾아 오셨습니다. “바로 주님이시다” 요한은 소리치며 뛰어 내렸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그 사랑하는 대상을 제일 빨리 찾아내게 되는 법입니다. 3.사랑에 관한 교훈 우뢰와 같은 요한의 성격이 온유하게 변한 것은 십자가와 초대교회에의 성심과 용감성도 설명해 줍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무서움을 이기지 못하고 도망쳤다가 어느 사도보다도 먼저 예수님에게로 다시 돌아온 사람이 요한이었습니다. 베드로가 멀리 떨어져서 뒤따르고 있을 때 요한은 용감하게 대제사장의 집 뜰로 들어갔습니다(요 18:15-16). 아마 대제사장은 요한의 아버지인 세베대의 사업과 관련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요한과는 서로 아는 사이였을 것입니다. 대제사장을 알고 있던 덕택으로 요한은 베드로도 뜰 안으로 데리고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대제사장의 종을 해쳤기 때문에 겁에 질려 베드로가 숯불 주위를 서성거리고 있을 때 요한은 예수님을 심문하는 재판장에게로 곧장 들어갔습니다. 베드로가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고 비통의 눈물을 흘리고 있을때 요한은 십자가 옆에 서서 예수님께 대답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적들이 악의에 찬 독설을 내뿜을 때에도 요한은 도망치지 않고 적들의 한가운데 당당하게 서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을 들은 제자도 유일하게 요한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을 바라보시면서 자기 어머니에게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다”고 하시고 요한에게 그 어머니를 가리키며 “보라, 네 어머니라”하셨습니다.(요 19:26-27) 예루살렘에 있는 자기의 집으로 마리아를 모셔온 후 요한은 다시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을 들으려고 서둘러 되돌아갔습니다. 복음서의 기록에 오직 요한만이 “내가 목이 마르다” 또 “다 이루었다”는 최후의 말씀을 증거하였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예수님께서 고개를 떨구시고 예수님의 영혼이 떠나가시는 것도 지켜 보았습니다. 군병이 예수님의 옆구리를 찌를 때 피와 물이 나온 것과 요셉과 니고데모가 장사한 사실을 말한 것도 요한 뿐이었습니다.(요 19:38-42). 요한은 용감하였으며 최후까지 예수님께 헌신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이 살인마에게 끌려가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그는 어린 양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하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는 (요3:16) 유명한 말씀을 우리에게 남겼습니다. 요한은 책임감으로서의 사랑 뿐만 아니라 사도직의 징표로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요 13:34-35)하는 예수님의 새 계명을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요한은 그의 저술에서 오십 번 이상이나 사랑에 대하여 이야기하였습니다. 사랑받는 요한은 예수의 부활을 가장 먼저 믿었으며 밤을 새워 고기를 잡은 후 바닷가에서 예수님을 제일 먼저 알아본 제자였습니다(요 20:8/ 21:7). 요한은 하나님 계시의 환상을 포함한 영적 진리를 알 수 있는 놀라운 지혜를 받았습니다. 사랑에 대하여 요한이 요약한 말은 사랑의 근간을 이루었습니다. 진실한 사랑이란 그 사랑의 대상을 해롭게 할 모든 것을 막을 수 있어야 하며 결코 꺾이지 않는 강한 것이어야 합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아버지가 사나운 개로부터 아장아장 걷는 자기의 아이를 보호하는 것과 똑같은 것이 진실한 사랑입니다. 요한은 일반적으로 그릇된 가르침이 어린 아이들에게 크게 해를 끼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거짓을 행하거나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에게 서슴치 않고 경고했습니다(요일 1:6/ 2:4). 그리스도에 대하여 그릇된 생각을 가진 사람은 집에 들어오지도 못하게 하고 인사도 하지 말라고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당부했습니다.(요이10). 또 디오드레베는 교만하여 사악한 말을 하는 대표적인 사람이라고 세상에 공개했습니다(요삼9:10). 요한의 우뢰같은 성격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으나 그의 강경한 어조도 사랑과 겸손으로 많이 부드러웠졌습니다. 요한은 온유하면서도 강했습니다. 박식하면 격한 마음이 가라앉지만 요한의 사랑은 예리한 통찰력과 지식에 의하여 퇴색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다섯 권의 책을 쓸 수 있었습니다. 요한복음의 서문은 로고스로서의 그리스도에 대한 심오한 철학적인 내용이기 때문에 요한에게는 “그리스도인 플라톤”(Christian Platon)이라는 칭호가 붙었습니다. 삼 세기의 교부들은 계시록의 필자에게 “신학자”란 칭호까지 붙였습니다. 요한이 기록한 복음서와 요한 1서, 2서, 3서, 계시록 가운데 요한이 우리에게 남겨준 가장 위대한 구절은 사랑에 관한 말씀들입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 3:16)” 요한일서 4장을 보면 사도 요한은 그의 체험을 사랑에 관한 교훈으로 네 가지로 정리합니다. 첫째,“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7,8)”/ 이 말씀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둘째,“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요일 4:9)”/ 하나님의 사랑을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십자가에서 나타내셨습니다. 셋째,“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요일 4:13)”/ 하나님의 사랑은 성령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 속에 거하게 되었습니다. 넷째,“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 4:20)”/ 성령을 통해서 내 마음 속에 거하게 된 사랑은 이제 형제에게 나타나야 합니다. 사랑은 용감해질 수 있습니다. 사랑할 때에 희생할 수 있습니다. 요한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는 그 자리에서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흩어지고 달아날 때에 요한만은 십자가 밑에까지 따라갔습니다. “요한아, 내 육신의 어머니를 네가 모셔다오” 예수님은 마리아를 요한에게 부탁하시고 숨을 거두셨습니다. 4)그의 말년과 죽음 소아시아 태생으로 요한의 제자이면서 폴리갑(Polycarp)과 잘 아는 이레니우스(Irenaeus)는 요한은 주후 98년까지 에베소에서 살았다고 말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요한을 독살시키려는 음모에서 하나님께서 목숨을 구해주셨다고 합니다. 이 전설은 뱀이 그려진 성찬배가 요한을 상징하는 이유를 설명해 줍니다. 또 다른 전설은 핍박받는 동안에 끓는 목욕탕에 던져졌으나 요한은 그 속에서 살아났다고 합니다. 에베소에서 멀지 않은 에게해 복판에 있는 아름다운 섬인 밧모에 요한이 유배된 일이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요한은 계시록의 인사말에서 “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계1:9)라고 썼습니다. 밧모섬에서 도미시안 황제에 의하여 추방된 요한은 성경의 마지막 책에 대한 멧세지를 받고 환상을 보았습니다. 순교자와 성도와 하늘의 승리를 본 요한의 마음은 기뻤습니다. 계시록의 마지막인 22장에서 요한은 “이것들을 보고 들은 자는 나 요한”이라고 썼습니다(계22:8) 트라얀(Trajan) 황제는 요한이 밧모를 떠나서 에베소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했습니다. 소아시아에서 그를 따르는 자들의 선교사업은 그의 목숨이 다할 때 성취되었음을 요한이서와 요한삼서에서 알 수 있습니다. 요한은 자기의 영적인 자식들이 진리 가운데 행한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했습니다. 요한은 충분한 보응을 받을 것을 잊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이들에게 충고했습니다. 요한은 가이오와 데메드리오의 선행과 디오드레베의 교만함에 특히 관심을 가졌습니다. 요한은 그의 영적인 자식들이 다른 사람들을 직접 찾아가 증거하기를 원했습니다. 요한은 대단히 오래 살았습니다. 예수를 처음 따를 때 가장 어린 소년이었던 요한은 열 두 사도 가운데서 제일 장수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형제인 야고보는 사도들 가운데 제일 먼저 죽었습니다. 은혜 속에 살고 성장하는 것에 관하여 요한의 생애는 많은 교훈을 줍니다. 요한은 불같은 성급한 성격을 서서히 가라앉히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권세에 순종했습니다. 초대 교회 선교시 개척자의 역할을 베드로와 요한이 담당합니다. 사도행전에 바울이 등장하기까지 처음 절반의 역사가 베드로와 요한 두 사람에 의해서 이루어져 가는 모습을 우리는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후에 그는 복음을 전하다가 잡히게 되고 요한계시록 1장을 보면 밧모섬으로 귀양을 갑니다. 그 밧모섬에서 기도하던 중 어느날 성령이 그를 감동하시며 하나님의 위대한 계시를 그에게 보여주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바로 요한 계시록입니다. 로마의 도미티아누스 황제 때 귀양에서 풀려나게 되는데 그때가 A.D.98년이었습니다. 그는 에베소에서 자기 최후의 사역을 합니다. 이미 다른 모든 제자들은 순교의 잔을 마셨습니다. 그는 순교하지 않은 유일한 제자로 불리워집니다. 그러나 그는 살아있는 순교자였습니다. 역사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그는 복음을 전하다가 에베소에서 또 한번 잡힙니다. 그래서 독사굴에 집어넣고 꿇는 물에 던져졌습니다. 그 상황 속에서 하나님은 놀랍게도 그를 살리십니다. 그렇지만 그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습니다. 최후에 그는 들 것에 실려서 종종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에 참석했는데 사람들이 그를 앉혀 놓으면 “소자들아, 서로 사랑하라” 간곡하게 설교하였습니다. A.D.100년 경에 그는 숨을 거두었습니다. 수요예배 예수님의 열두제자 (6) 야고보 식도성결교회 제목 : 충성스러운 제자 야고보 본문 : 약20: 20-28 1)인물 배경 갈릴리 지방에 세베대(zevedee)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배도 소유하고 가정에 종을 두고 살만한 부자였습니다.(막1:19-20) 그에게는 아버지의 일을 돕는 두아들,요한John과 야고보James가 있었습니다. 그는 두 아들이 다른 가정처럼 자신의 가업을 이어 가기를 원하였을 것입니다. 이들이 아버지의 일을 돕고 있던 어느날, 베드로Peter와 안드레Andrew가 함께 예수님의 부름을 받고 예수의 제자가 되어 따르게 됩니다. 야고보에 대해서는 안타까울 정도로 적게 기록 되어 있으나(막 5:37, 14:3) 그는 훌륭했기에 「3대 제자」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르실 때에 배와 그물과 부친을 버려두고 좇아 갔습니다. 그는 큰 배도 소유했으며, 일꾼들도 소유한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동생 요한과 더불어 당대의 대제사장 가야바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그의 아버지의 배경을 중심으로 그가 비록 고기를 잡는 사람이었지만, 자기가 살고 있는 그 위치에서 부유했고, 또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던 사람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배경으로 보면 ①아버지 세베대는 품꾼들을 고용할 정도로 보통 이상의 어부임을 알 수 있고, ②3년 동안 예수님과 제자들의 재정 후원을 해줄 정도로 넉넉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마 27:55-56). ③아들 요한이 ‘대제사장과 아는 사이’라고 합니다(요 18:15). 돈이면 제사장 직분도 사고파는 시대였기 때문에, 우리는 세베대라는 사람이 생각보다 엄청난 부자였고, 정치권에까지 손이 뻗쳤던 것을 충분히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야고보는 12명의 제자들 중에, 순서상으론, 두번째 차례로 거명이 되었습니다(막 3:16-17) 16이 열둘을 세우셨으니 시몬에게는 베드로란 이름을 더하셨고 17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예수님은 야고보와 요한에게 새로운 이름을 더하셨습니다. 바로 ‘보아너게’입니다. 그런데 이 보아너게라는 이름은 두 번 다시 사용되지 않습니다. 시몬이 ‘반석’을 뜻하는 베드로로 바뀌고 나서, 시종일관 ‘베드로’로 불렸던 것과는 달리, 야고보와 요한은 더 이상 ‘보아너게’라고 불리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베드로’는 제자의 삶에 긍정적인 면을 상징하지만, ‘보아너게’는 부정적인 면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보아너게는 ‘우레의 아들’이란 뜻입니다.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눅 9:51-56): 예수님이 3년 동안의 공생애 사역을 마치고,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의 어떤 마을이 길을 막았습니다. 그러자 야고보가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우리가 불을 명해서 하늘로부터 내리게 해서, 이 마을을 멸망시켜 버립시다!” 짧은 말이지만, 엄청난 확신이 있습니다. ‘우리가 말하면 불이 떨어진다!’ 어떤 사람이 감히 이런 생각을 해낼 수 있는 걸까요? 야고보는 자신을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요? 결국 야고보의 속내가 드러납니다. 예루살렘에 가까워질수록 12제자들은 더욱 민감해졌습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에 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들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하나같이 생각하기를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 메시야이다!” “예수님은, (로마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이다!”(눅 24: 21)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고 하지 않았나!”(요 6:15;) 그러므로 내가 예수님과 더 가까워져야만 한다! 제자들은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 내내 “서로 누가 크냐하고 논쟁하고” 있었습니다(막 9:34). 그런 제자들 속에서 베드로가 손을 들고 말합니다(막 10:28): “예수님, 아시지요.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말씀합니다(막 10:29): “그렇다. 나와 복음을 위해서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나 버린 자는...” “야고보야, 네가 나를 위해 박해를 받을 수 있겠느냐? 네가 1등되려고 하는데,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30b-31절). 이때 야고보는 주춤했지만, 주눅 들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히려 더 노골적으로 나갑니다(막 10:35-37): “예수님, 예루살렘에 가시거든, 제가 우편에 앉읍시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주님, 우의정 자리는 제겁니다. 야고보는 정말 믿었던 겁니다. 내가 예수님 덕분에 높은 사람 한 번 되보자! 대제사장의 말 한마디에 날아가는 새가 떨어지지 않은가! 정말 나도 높아져서 명령만 하면 하늘에서 불을 내려보리라! “예수님, 아시죠? 접니다. 야고보에요! 제가 아버지도 버리고, 예수님을 좇았어요. 그러니, 우의정 자리는 저에게 주셔야 합니다!” 이때 예수님의 대답은 무엇인가요(막 10:43-45):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미소를 머금었던 야고보의 얼굴이 일그러집니다. “네? 뭐라구요? 아니 예수님, 이러면 안되지요. 내가 왜 아버지를 버렸는데요! 내가 왜 고향을 버리고 이런 고생을 하는데요! 내가 왜 창창한 미래를 버렸는데! 내가 왜 집도 없고 먹을 것도 없는 이 거지같은 삶을 3년이나 살았는데! 이게 다 예수님 때문아닙니까? 메시야인 당신이 뭔가 나에게 주어야지죠!” “어찌 까닭없이 하나님을 경외하겠습니까?”(욥 1:9) 내가 왜 이 고생하면서 교회를 다니고, 이 신앙을 지키겠어요! 예수님이 내 사업을 지켜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내 직장을 지켜주어야지요. 예수님, 내 자녀들 좋은 대학가게 해주셔야지요. 내 건강, 내 학위, 내 명예! 예수님이 내 성공의 보증수표잖아요. “내가 어찌 까닭없이 주님을 따랐겠어요!” 여러분 공감가는 이야기아닙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제자의 삶이란 또 무엇일까요? 야고보는 과연 무엇을 버렸던 걸까요? 그리고 우리는 또 무엇을 버렸던 걸까요? 야고보는 분명 버렸습니다. 왜요? 더 큰 것을 붙잡기 위해서, 작은 것을 버렸습니다. 불행히도 ‘더 큰 것’은 예수님과 상관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 밤에, 야고보는 예수님을 버립니다(막 14:50). 자기 목숨이 예수님보다 더 크기 때문이지요. 얄굿게도 ‘버리다’라는 말은, 야고보가 아버지를 버릴 때 썼던 것과 똑같은 단어입니다(막 1:20).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도 똑같이 버리셨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버리셨습니다. 가장 쓸모없는 것을 잡기 위해서, 가장 위대한 것을 버리셨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아무런 까닭도 없이 사랑하신다. 하나님은 너를 아무 이유없이 사랑하신다. 그래서 독생자를 이 땅에 주셨다. 네가 죄인되었을 때, 네가 죄인 중에 괴수였을 때, 네가 아무짝에도 쓸모 없을 때, 내가 너를 위해 죽음으로, 하나님이 너를 아무 까닭도 없이 사랑하고 있음을 확증하실 것이다”(요 3:16; 롬 5:8).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유월절을 앞둔 한밤중에 로마 군인들이 예수님을 잡아갔고,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골고다 언덕에 예수님을 매달은 십자가가 세워졌습니다. 제자들 중에, 야고보의 동생, 요한만이 그 자리를 지켰을 뿐입니다. 요한은 야고보를 찾아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어. 그래서 예수님이 오셨던거야. 그런데 우리는 오해했었지. 그분이 다윗처럼 전쟁으로 로마를 물리칠 것이라고 말이야. 그런데 우리의 진짜 적은 로마가 아니라, 하나님과 우리를 가로 막았던 우리의 ‘죄’였고, 죄의 결과인 ‘사망’이었어. 그 누구도 해결할 수 없는 인간의 문제이지.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 죄를 담당하시고 대신 죽으신 거야. 단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말이야”(요 15:13).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19:30): “다 이루었다!” ‘야고보야, 너를 향한 나의 사랑을 다 이루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야고보는 주저앉고 맙니다. 내가 버렸다고 자랑했던 것들이, 실상은 더 많은 것을 얻으려고 했던 바벨탑이었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나는 더 큰 것을 바라고, 주를 좇았지만, 예수님은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단지 나를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버리셨던 겁니다. 그동안 야고보는 예수님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그분이 남겼던 빵과 물고기를 보았고, 그분을 따랐던 수많은 사람들의 행렬을 보았던 겁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들은 것이 아니라, 그분을 찬양했던 칭송의 소리를 들었던 겁니다. 십자가를 본 것이 아니라, 화려한 성전의 높은 자리를 보았던 것입니다. 신앙의 실체가 무엇인지요! 예수님이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 되어버린 가짜 신앙이 확연하게 드러났습니다. 바로 십자가 아래에서, 야고보의 거짓 신앙의 옷은 낱낱이 벗겨졌습니다. 부끄럽습니다. 숨을 곳을 찾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동시에 그를 위한 치유였습니다. 거짓의 옷이 벗겨지고, 예수님의 보혈의 옷이 야고보를 감싸주었습니다. 이기적이고 허물 많은 그의 더러운 죄를 눈보다 더 희게 만들어 주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보혈이 야고보를 새롭게 만들어줍니다. 하나님께 나아가게 해줍니다: “존귀한 주 보혈이 내 삶을 새롭게 하시네, 존귀한 주 보혈이 내 삶을 새롭게 하네.” 그리고 야고보는 고백합니다: 예수님, 이젠 주님만 볼래요. 내게로부터 눈을 들어, 이젠 주님만 볼래요. 예수님이 나의 유일한 목적입니다. 드디어 야고보의 얼굴엔 참된 미소가 꽃폈습니다. 야고보는 어느날 주님께서 다른 제자들을 부르셨던 것처럼 “나를 따라 오너라”라는 부르심이 들려 왔을 때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아 나섰습니다. 그로부터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그의 전 생애를 바침으로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2)인물과 성격 성경은 야고보와 요한을 항상 같이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꼭 형제였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다른 형제들도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베드로와 안드레가 형제였지만 성경은 이들을 언제나 같이 다루고 있지는 않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늘 같이 행동한 것으로 복음서에 소개되어 있는 것은 이들이 아주 잘 어울리는 형제들이면서도 기질이 비슷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막 3:17에 예수님은 이들 형제에게 ‘보아너게, 우뢰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습니다. 이들은 불같은 성격을 가졌던 형제였습니다. “예수님을 괄세하는 사마리아 사람들의 마을에 불벼락을 내려서 이 마을 사람들 모두를 다 해치워 버립시다”라고 제안한 것을 보더라도 두 형제는 천부적으로 불같은 성격을 다 같이 가지고 있었음을 보게 됩니다. 두 형제는 너무 폭발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주님께서 “우뢰의 아들”이라는 뜻을 가진 ’보아너게의 아들‘이라고 별명을 지어 주신 것입니다. 폭풍우 같은 기질을 가졌으며 태풍과 같은 정열이 있었고 불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잠잠하다가도 노여움을 화산처럼 폭발시키곤 하였습니다. 야고보는 열정적 기질의 소유자였습니다. 이 열정이 있기에 화를 내어도 무섭게 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말씀하시는데 이 제자들은 다가올 영광만을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과 관계를 가지면서부터 요한은 사랑의 사도로 변화되었고 야고보는 의를 위하여 기꺼이 순교한 첫 사도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예수님 앞에 나왔습니까? 우리는 영광을 탐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바라고 원하는 모든 것을 주님은 이루어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영광을 원하기 전에 주님께서 나에게 만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고난이라는 삶을 허락하신다면, 이 고난의 잔을 우리는 달게 받을 수 있을까요? 두 형제와 그 어미가 예수님께 청한 소식을 전해 들은 나머지 열 제자는 모두 분하게 생각했습니다. 똑같은 욕구가 다른 제자들에게도 다같이 싹트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을 따라 다니는 제자들의 마음 속에도 자신이 높아지고, 앞서려는 끈질긴 인간적 야망이 사라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높아짐의 의미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것은 권력을 많이 갖고, 내가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는 위치에 서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사모해야할 진정한 위치는 남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남을 섬기는 자리입니다. 성경이 제일 싫어하는 사람은 높아지려고 애쓰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바로 루시퍼의 죄악입니다. 예수님이 가장 싫어하는 계급의 사람도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들은 잔치의 상석에 앉기를 좋아하고, 시장에 가면 문안 받기를 좋아하고 자기의 가슴을 내어놓지 못하고, 이웃의 발을 닦기 위해 무릎을 꿇을 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공동체 속에서도 그런 모습은 흔히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의식 속에서도 그런 모습은 아직도 굳건히 자리하고 있지 아니합니까? 야고보는 그가 열정적인 기질을 가졌기에, 야망을 가진 사람이었기에, 자연히 이 사람은 앞으로 지도자가 될 수 있는 좋은 자질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잘못 되어지면 남을 짓밟는 선하지 못한 의미의 지도자가 될 수 있지만, 잘 사용하면 탁월한 지도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동시에 갖고 있었던 인물입니다. 그는 결과적으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서 예수님이 가장 많은 관심을 보이셨고 또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해서 훈련시킨 사람은 야고보를 포함한 베드로, 요한이었습니다. 이 세 사람이 제자의 핵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세 사람은 장차 초대 교회를 이끌고 갈 지도자로서 훈련을 받은 것이고, 또 실제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사도행전에 들어가면 그는 이제 예루살렘의 영광스러운 지도자로서 부상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영광스러운 지도자였기에 지도자로서의 댓가를 지불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3)생애와 죽음 야고보는 어떤 특별한 업적은 갖지 못한 제자였습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예수님을 따라 다니며 예수님이 계신 곳이면 언제 어디서나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있는 곳이면 언제나 그곳에 야고보도 함께 있었습니다. 야이로의 딸을 살리면서 부활의 위대한 교훈을 베푸실 때,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형용할 수 없는 모습으로 변모할 때,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이 기도하실 때 야고보는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야망이 잘못되었다고 비판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는 주님을 향해서 야망을 가졌기 때문에 주님을 끈질기게 붙들고 늘어졌던 것입니다. 주님이 있는 곳에 언제나 그는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도자가 되어갑니다. 우리가 남을 짓밟는 야망은 바람직하지 못하지만 올바른 진리에 대한 야망을 가지지 못하는 것은 더 큰 문제입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입니다. 선한 야망을 가져보십시오.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영혼을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며, 그리스도의 교회를 가장 신실하게 받들며, 그리고 주님을 위해서 가장 귀한 일을 하고 싶어 하는 선한 의미의 야망을 갖는다면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 됩니까? 그는 지중해 영역까지 가서 전도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심지어 스페인까지 가서 전도했다고 합니다. 그는 실로 많은 지역을 뛰어 다니며 부지런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그의 모든 힘을 다했습니다. 우리는 헤롯Herod이 왜 제일 먼저 야고보를 체포하였는지 궁금합니다. 그것은 열성과 야망이 있는 야고보는 격하기 쉽고 유능하며 뛰어난 지도자이기 때문에 힘찬 소리로 외치는 야고보의 입을 막고자 했을 것입니다. 헤롯은 예수님이 탄생시 죽이려다가 베들레헴 주변에서 태어난 어린 생명들을 죽인 흡혈귀 같은 폭군 「Herod」의 손자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것을 체험한 후, 그는 Spain에 가서 전도하였습니다.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행 1:8)’는 예수의 유언을 실천키 위해 당시에 지구의 끝이라고 생각했던 Spain까지 배를 타고 가서 오랫동안 머물면서 그곳에 많은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전했다고 합니다. 그는 Spain에 있는 유대인 거류민과 유대인 노예들에게 복음전도와 위문을 목적으로 갔었을 것입니다. 주로 바다의 순레를 하면서 전도를 하였기에 「조개」는 그의 상징이되었다고 합니다. 유대인 노예들은 독립 운동을 하다가 잡혀서 갔거나, Herod에 속아서 팔려간 불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야고보가 예루살렘에 들어오게 되자 폭로될까 두려워하여 ①유대인 노예들을 「선동했다는 터무니 없는 죄」를 씌웠습니다. ② 예루살렘에서 놀라운 성장을 보이는 기독교운동을 독립운동으로 두려 워 했고 ③유대교를 믿는 사람들의 환심을 사려고, 저지른 인기 장난으로 그를 체포했던 것이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야고보가 체포되었을 때, 그를 고소했던 자가 그의 오기와 자제력에 깊은 갑동을 받아 세레받기를 원하였고 교회의 일원이 되어 야고보와 함께 죽었다고 합니다. 야고보 사도는 헤롯 아카파1세라고 기록된 사람에 의해 칼로 목을 베이는 참수형에 처해집니다. 그의 유골은 지금의 Spain 「콤로스 텔라」라는 성전에 묻혀 있다고 전해집니다. 12제자 중 성경에 죽음이 기록된 사람은 예수님을 팔고 양심에 가책으로 자살한 가롯유다와 순교자 야고보 밖에 없습니다. 순교는 외형으로 보면 ‘남에 의해 죽음을 당하는」타살이지만 그러나 배교하면 안 죽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 부득부득 우겨서 죽는 것이기에, 순교는 원해서 죽는 타살입니다. 그러나 이 순교는 큰 용기 없이는 못하는 죽음이기에 확고한 신앙과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가장 먼저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고, 스스로 찾아간 죽음의 길, 순교의 길을 간 James는 분명히 용기 있는 사람이요, 솔선수범의 사람이었습니다. 야고보는 위대한 사도입니다. 주님이 승천하시기 전, (행1:8)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 까지” 증인이 되라 하셨을 때, 사마리아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행8:25) 실수한 일을 지적하여 주신 주님의 교훈을 곧 바로 실천하는 사도였습니다. 옛날 자기를 거절했던 사마리아 촌에까지 가서 순회 설교를 했습니다. 하늘로부터 멸망의 불이 내리는 대신 성령의 불꽃이 강림하여 이들의 가슴에 안주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는 제자들 중에 제일 먼저 순교를 당했습니다. 때는 A.D. 44년이었습니다. 성경에 야고보처럼 죽음이 명확하게 표현된 제자들이 없습니다. “그 때에 헤롯 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행 12:1,2)” 헤롯 왕은 교회 중 몇사람을 해쳐야만 기독교가 더 이상 세력을 펼치지 못한다고 판단하여 야고보를 죽인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대다수가 기독교의 전파를 원치 않았기 때문에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위한 야고보를 희생의 제물로 삼은 것입니다. 야고보는 교회의 지도자로서 교회를 대표하여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는 이제까지와는 반대로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 아닌, 요한의 형제 야고보라고 기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처음으로 순서를 바꾸어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였다고 기록한 것입니다. 그는 잔인하고 처참한 죽음을 통해서 자기의 생애를 마치게 됩니다. 요한은 어떻습니까? 제자들 중에 제일 오래 살았습니다. 우리는 왜 하나님이 야고보는 일찍 죽게 하시고 요한은 가장 오래 남겨 두셨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두 사람의 삶은 다같이 귀중합니다. 우리는 죽음의 형태를 놓고 누가 낫고 누가 덜하다는 식의 결론을 내려서는 안됩니다. 성도의 죽음을 하나님은 모두 귀하게 보십니다. 그의 죽음은 선교의 위대한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안드레가 형 Peter의 그늘에서 일한것 같이, 야고보도 형 요한의 그늘에 가리워 있었습니다. 유명한 형 밑에서 일하기도 어렵지만 예수님이 특별히 사랑하신 유명한 동생밑에서 일하기는 더 어렵습니다. ‘요한과 야고보’라고 호칭이 되는데, 야고보는 꼭 요한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끝내에는 요한의 형제라고 기록되어 있기까지 합니다(마10:2). 혼자 기록한 곳은 유일하게(Acts12-2)에만 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야고보는 12사도의 명단 중에 모두 요한보다 앞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중요한 세 사도 가운데 하나로 야고보를 택하신 것을 보면 그는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베드로// 선천적으로 지도자의 자질이 있었다면 −−요 한// 주님이 지극히 사랑하는 제자였다면 −−야고보// 유능하고 유망한 인물로 큰 잠재력을 가진 신앙깊은 사람 이상의 3사람은 다른 제자들에게 허용되지 않는 특권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그러나 자기의 소명을 잘 감당해 낸 인물로 유명합니다. 야고보는 巨富인 아버지로 부터 물려받을 많은 유산을 팽개친채 예수를 따랐습니다. 내일 아침걱정 안하는 사람이 없이 굶주리는 사람 많던 그 당시에 이 거대한 상속을 포기하고 따름에는 그들이 초기 신앙이 얼마나 컸는지 가히 짐작이 간다. 제자들은 남출신 유다를 제외하고 모두 가난했다. 그래서 내버릴 것이 별로 없어서 어려움없이 예수를 따를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James와 요한은, 특히 야고보는 모든 제산을 물려 받을수 있었던 형이던 그의 결단은 굉장한 신앙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결단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이것을 아신 예수님은 요한과 함께 “우뢰의 아들” 라는 별명도 지어 주셨습니다. 이 열성을 초지일관 활약하여 최초로 순교한 제자가 됩니다. 우리의 신앙도 포기 하는것이 있어야 합니다. 내 할것 다하고, 예수를 따를순 없습니다. 내가 하고 싶던것 다하고, 못된 이기심, 자존심, 그대로 가지곤 주일날 놀려 갈곳 다가고는 남는 시간에 예수 믿는다는 자세는 하나님이 좋아하시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시간이 없지만 쪼개어서 예배하고, 귀찮더라도 이것을 이기고 나오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쓰고 남은 시간 받기를 원치않으십니다. 가장 귀한 시간을 쪼개어 바치길 원하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할것 다하고 나서, 할일없고 심심하여 봉사하는것은 원치 않으십니다. 해야 할일 많고, 바쁜 속에서 시간을 쪼개어 바친것을 귀한것을 가장 좋아 하십니다. 예수님은 최상의 것을 원하시지, 적당히 하는것 마지 못해 하는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야고보처럼 자신의 최고의 것을 포기하고 예수님께 바치며, 예수님을 위해 사십시다. 처음에 가졌던 그 열심을 그대로 유지하십시요!! 하나님의 일은 요령에 있지 않고, 최선의 열성과 최상의 봉사에서 빛나면, 열매 맺게 됩니다. 이러한 사람이 예수님의 3대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야고보의 삶을 정리하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 육신의 욕망을 극복해야 합니다. * 그가 육신적 야망을 극복한 것과 같이 우리도 예수님을 믿는 가치관이 변 화되어야 합니다. *그는 주님을 바라 보았습니다. 우리도 끝까지 주님만 보아야 합니다. *그는 주님을 바라 보면서 계속 따라 갔다. 수요예배 예수님의 열두제자 (7) 작은야고보 식도성결교회 제목 : 꼭 필요한 사람 :작은 야고보 본문 : 마태복음 10:2-4 새 성전을 건축하면서 건축의 책임을 맡고 있던 천사가 성전완공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에게 상을 주기로 약속을 했답니다. 건물이 올라가면서 사람들은 “누가 상을 받을까?”추측을 했습니다. 설계자일까? 아니면 청부업자인가? 조각가? 목수? 구리를 다루는 기능공일까? 건축일을 맡은 사람들은 최선을 다해서 일했기 때문에 완성된 성전은 걸작품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결과 발표에서 의외로 남루한 옷을 입은 한 시골의 노파가 수상자로 발표되는 순간, 모두가 깜짝 놀랐습니다. 도대체 이 여인이 무슨 큰일을 했다는 말인가? 이 여인은 석공이 대리석을 실어 나르기 위해 데리고 다니는 황소에게 건초를 충실하게 먹였을 뿐이었습니다. 작은 일과 눈에 뜨이지 않는 일을 하는 사람이 중요함을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주님의 제자들 중에 작은 야고보는 말하고 행한 기록이 별로 없습니다. 다만 12제자의 일원으로 선택을 받았고 주님이 주신 사명을 훌륭히 성취하였다는 것만 남아있습니다. 학자들은 이 작은 야고보에 대하여 한일이 없어서 잊혀진 제자라는 혹평을 하는 사람도 있으나, 많은 일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자기의 길을 걸어간 사람으로 소개하기도 합니다. 1)이름과 배경 야고보라는 이름은 당시 이스라엘에 있어서는 아주 흔한 이름이었습니다. 성경 속에도 야고보란 이름이 많이 나타납니다. 성경 본문을 통해 이 야고보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지를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대표적으로 세 사람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입니다.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입니다. 사도행전 15장에 보면 성경에 나타난 율법을 어떻게 이해 할 것인가를 놓고 예루살렘 교회에 회의가 열립니다. 13절 이하에 야고보가 일어나 교리적이고도 명확한 발언을 합니다. 12장에서 이미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는 죽었고, 여기에 등장하는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입니다. 천주교에서는 마리아의 신성을 강조하기 위해 여기 야고보는 사촌동생이라고 강조합니다. 요한복음 7장에 예수님의 형제들에 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런 억지에 대해 우리는 일일히 구구한 논쟁을 벌일 필요가 없습니다. “이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운지라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의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요 7:1-4)” 예수님의 동생들은 예수님께서 정말 메시야라면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공개적으로 활동하실 것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5절을 보면 “이는 그 형제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육신의 형제들이 지상 사역을 하시는 동안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야고보가 어느 때 어떻게 변하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아마도 고린도 전서 15장 4절 이하에 나타난 사건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서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 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 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전 15:4-8)” 이 말씀에서 부활하신 주님이 자신을 계시하시고 보여 준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야고보 - 예수님의 동생이었습니다. 이때의 야고보는 결정적으로 자기의 형제였던 그 예수님이 단순한 육신적 형제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그분이 정말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세주이사란 것을 결정적으로 신뢰하고 믿고 그 삶에 변화를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나아가 예루살렘 교회의 중요한 지도자로 부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세베대의 아들도, 예수님의 동생도 아닌 제 삼의 야고보가 있습니다. “열 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니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형제 안드레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 빌립과 바돌로매, 도마와 세리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가나안인 시몬과 가룟 유다 곧 예수를 판 자라(마 10:2-4)” 위의 명단에서 야고보는 알패오 아들 야고보로 열 두 제자의 명단에서 아홉 번 째로 등장합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의 명단 가운데 야고보가 둘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입니다. 세베대의 아들보다 키가 작았으므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 작은 야고보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가족관계 아버지는 알패오였고 어머니는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함께 있었던 마리아입니다. 그러나 또 다르게 구별하는 방법이 있는데 이것은 “작은 야고보”라 부르는 방법입니다. 이것은 아마도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다는 키가 작았기 때문에 불려졌던 것으로 봅니다. 우리 사회의 어느 회사 같은 데서 일을 하다 보면 Miss김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흔히 “Miss김”이라고 부를 때, 여러 Miss김들이 한꺼번에 대답을 하게 되므로 “작은 Miss김, 또는 큰 Miss김”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구별할 필요에 의해서 “작은 야고보”라는 표현을 사용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제까지 우리가 발견한 사실은 이 야고보는 키가 작았던 사람이며, 이 사람의 어머니는 마리아이고, 아버지는 알패오였으며, 요세라는 사람과 형제였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이 야고보에게는 마가복음 2장 14절을 보게 되면 또 한 명의 형제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또 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저에게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여기에서 말하는 레위는 세관에서 부름을 받은 제자입니다. 레위를 다른 말로 말하면 마태로서 레위라는 이름을 마태의 다른 별명이었을 것입니다. 이 말씀은 레위를 가리켜서 알패오의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마태가 야고보의 형제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교훈 야고보를 공부함에 있어 가장 어려운 점은 그가 어떤 말을 했다거나 어떤 질문을 했다는 기록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의 문서들은 그가 열심당원이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이 사람들은 로마의 지배하에 있던 조국을 건지고자 나섰던 “민족 독립 운동의 투사”들입니다. “열 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니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형제 안드레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 빌립과 바돌로매, 도마와 세리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가나안인 시몬과 및 가룟유다....(마 10:2-4)” 제자들의 기록상황을 보면 둘씩 형제끼리, 혹은 친한 사람끼리 짝수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 바로 뒤에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가 나오는데 그만 형제라는 말이 안 나옵니다. 그들이 형제였을까 의심이 생기는데 성경의 정황을 살펴보면 형제였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합니다. 이제 야고보 다음에 나오는 사람들을 주목하여 보십시다. 다대오가 나오는데 그는 열심당원이었습니다. 이 다대오를 다른 곳에서는 유다로 기록한 곳도 있습니다. 그의 본명은 유다 다대오입니다. 그 다음에 가나안인 시몬과 가룟 유다가 나옵니다. 이들 모두는 열심당원 출신입니다. 이들은 독립운동을 하다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들입니다. 제자들 중 마지막에 나오는 사람들이 열심당원들입니다. 행 1:13을 보면 제자들의 이름이 계속 기록되다가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로 이 둘을 분리시키지 않고, 같이 묶어 기록한 점을 보아 이들이 형제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작은 야고보는 과거 자기 민족의 독립을 위해 일하다가 정치적인 열망을 신앙적인 열망으로 승화시켜서 주님을 위하여 일하였습니다. 민족을 위해서 일하는 것은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모름지기 그리스도인들은 다 민족에 대한 관심을 저버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종종 그리스도인들이 애국심을 가질 때 빠지기 쉬운 오류 가운데 하나는 애국심이 곧 신앙이라는 착각을 할 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기독교는 민족주의 보다 더 큽니다. 이렇게 나라찾기 운동에 열심이던 사람들이 어느 날 민족이라는 것보다 더 커다란 이상이 있다는 것을, 민족이라는 것보다 자기의 목숨을 바칠 수 있는 더 숭고하고 더 위대한 이상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민족을 위한 열심에서 그들이 복음을 위한 열심을 갖기 시작하게 되고 참으로 귀하게 하나님 앞에 쓰임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따금 애국심이 신앙심이라는 착각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은 애국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애국자는 다 그리스도인이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기독교는 민족주의보다 큰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가진 민족에 대한 이상은 이것이 더 넓어져서 세계를 향한 비젼이 되지 않고는 진정한 의미에서 세계 선교나 세계 평화를 위해 기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태와 야고보가 형제라면 이들의 관계는 참으로 흥미롭습니다. 마태는 세리로서 친 로마주의자였고 야고보는 열심당원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사회 가운데서 한 계급만 사랑하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보다 더 이상이 높으셨읍니다. 예수님은 모든 계급을 뛰어넘어 모든 사람을 자기 제자로 삼고 싶어하셨던 것입니다. 로마인들을 죽이라고 외치면서 거리를 뛰어다니며 로마인들을 죽이기 위한 음모와 저항 속에서 그들의 청춘을 불사르던 사람들도 주님은 사랑하셨으며, 그런가하면 로마에 아부하지 않고는 자기 목숨을 지킬 수가 없다는 생각 때문에 관리 생활을 하고 있던 사람도 주님은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가진 자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예수님은 가지지 못한 자도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사회 가운데서 한 계급만 사랑하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계급을 뛰어 넘어 모든 사람을 다 제자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몸바치는 사람도 사랑하고, 로마에 아부하지 않고는 자기 목숨을 지킬 수 없었던 관리도 사랑하셨습니다. 두 종류의 사람들을 다 포용하심으로 그의 크고 놀라운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야고보는 키가 작았을 뿐만 아니라 겸손하여 매사에 불평이 없었습니다. 야고보는 겸손하여 나서기를 싫어했고 열심으로 주의 사역에 협력하였습니다. 이 제자에 대한 별명을 “작은 야고보, 그러나 꼭 필요했던 제자”라고 붙였던 것입니다. 그는 항상 거기에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키가 작았을 뿐아니라 아주 겸손했던 사람이었을 것으로 봅니다. 아마도 겸손하지 않은 사람은 항상 불평하는 무엇인가 말이라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말하는 사람은 다 겸손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말씀드리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사람이 말하기 좋아했으면 한 마디 쯤은 말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나타난 야고보의 기사 가운데는 말이 안 되는 소리 한 마디조차 없었읍니다. 참견도 안 하고 떠들지도 않고서 그냥 그 자리에 있기만 했던 사람, 이 사람은 참으로 겸손했던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숨어서 자기의 할 일을 열심히 했던 사람인 것 같은 인상을 우리에게 줍니다. 성경에 보면, 그런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사도행전에 아리스다고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이 무명의 그리스도인은 바울이 로마 옥중에 갇혀 있을 때에도 바울과 함께 있기를 원하여 자진해서 수감되었습니다. 바울이 무인도 섬에 도착해서 어려움을 겪을 때에도 그는 바울 곁에 있었습니다. 바울이 괴로움과 고난을 당하는 수난의 현장에 아리스다고는 언제나 거기에 있었습니다. 실로 우리 중에 아리스다고와 같은 사람이 얼마나 필요할까요? 겉으로 거창하나 실속이 없는 이보다 말없이 끝까지 함께 하는 사랑이 얼마나 큰 것입니까? 그냥 설교 시간에 앞자리에 앉아만 있어주는 사람도 목회자에게는 얼마나 필요한 사람입니까? 작지만 꼭 필요했던 사람입니다. 3)죽음과 교훈 주님을 위해 일한다는 말을 너무 쉽게 합니다. 그것은 작은 것부터 성실성을 나타내어야 합니다. 별로 요란스럽지 않으나 열심히 뜨겁게 속으로 모든 말씀에 일언반구없이 헌신했던 사람. 야고보, 지극히 작은 일에 충성하여 큰 것에도 충성하는 자가 된 제자였습니다. “그는 한때 훌륭한 애국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후일 매우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금욕적인 자기 수양에 누구보다도 힘썼던 제자였습니다. 열 두 제자 중에서 가장 기도를 많이 한 제자가 이 작은 야고보였습니다.” 유세비우스는 이 사람에게 이런 별명을 붙여 주었습니다. “그는 약대의 무릎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다. 왜냐하면 그는 늘 기도하기 위해서 무릎을 끓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 이 작은 야고보는 다른 제자들이 떠들며 아우성치고 있었을 때에도 말없이 문자 그대로 작은 구석에 들어가서 무릎 끓어 기도했을 것입니다. 당신은 이 작은 야고보가 아닌 야고보를 기억하십니까? 그는 예수님의 우편에 앉혀 달라고 선거 운동을 하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말하기보다는 기도를 더 즐기고, 설치기보다는 자기가 있어야 할 조용한 자리에서 말없이 그 자리를 메꾸며 하나님 앞에 할 일을 다하고 있던 이 작은 야고보에 대해서 유세비우스는 말을 계속합니다.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서 제일 예수님을 닮았던 제자가 작은 야고보였다” 그리고 유세비우스는 그에 대해서 이런 재미나는 표현을 했습니다. “그는 제일 미남이었다” 화가들이 그림을 그릴 때에 이 작은 야고보를 제자들 중에서 제일 미남으로 그렸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최후의 만찬이라는 그림을 보실 때 제일 미남을 뽑아내시면 그 사람이 틀림없이 작은 야고보입니다. 그는 미남이었고 화려한 과거를 가지고 있었지만, 주님을 만난 후에 그 주님이 너무 좋아서, 떠들면 주님의 영광이 가리울까 봐 조용조용히 평생을 주님 앞에서 숨어서 주를 섬겼던 이 아름다운 제자 작은 야고보는 유세비우스의 기록에 의하면 나중에 시리아에 가서 전도를 합니다. 그리고 이 사람에 의해서 시리아 교회가 세워집니다. 그는 나중에 다시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전도를 하다가 유대인들에게 돌에 맞아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돌을 들어 쳤는데도 야고보의 목숨이 쉽게 끊어지지 않자 그들은 톱을 가지고 작은 야고보를 켰습니다. 역사가 지나간 후일의 그리스도인들은 작은 야고보를 묘사할 때 그의 인생을 상징하기 위해서 톱그림을 그려 톱에 켜서 죽임을 당했던 사람이라고 묘사를 합니다. 그는 처음에 예루살렘에 묻혔다가 나중에 그의 유해는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집니다. 그러다가 AD. 572년에 로마로 그의 유해가 옮겨집니다. 로마에 이 사람이 묻혀 있던 그 교회를 처음에는 성 빌립과 성 야고보의 교회라고 이름을 붙였다가 나중에 교회 이름을 “거룩한 사도의 교회”(The Church of the Holy Aplstle)라고 바꾸었습니다. 1880년에 어느 이름없는 의학도가 학비를 벌려고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여름에 너무 더워서 냉수 한 잔을 청하여 얻어 먹었습니다. 가난한 집에서 우유를 가져다준 소녀를 눈여겨 보아 둡니다. 20년이 지난 후 유명한 병원의 외과주임은 어는 여인이 병원에 실려와서 큰 수술을 받게되었고 수술비 걱정을 하고 있을 때 어느 분이 대신 지불하고 다음과 같은 편지를 남겨 두었다는 것- 눈물이 가득고여 감격어린채 편지를 보게 되는데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글 귀가 적혀 있었습니다. “ 우유한잔으로 모든 지불은 끝났습니다. Howad A. Kelly” 오늘 야고보는 작은 사람의 가치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작은 것의 가치를 얼마나 중요시하셨습니까? 생각나십니까?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된다는 말씀을! 영국의 휴마라는 유명한 사람이 “작은 것이 아름답다”(Small is beautiful)는 이야기를 해서 다시 작은 것에 관심을 돌리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작은 것에 대한 가치를 인식하고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된다”는 말처럼 작은 것에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작은 일을 하는 것을 보면 우리는 큰 것도 알 수가 있습니다.(큼직한 것에만 관심있고, 작은것에 소홀하지 말라) 오늘날, 우리는 작은 것에 대해서 주님 앞에 얼마나 신임을 받고 있는지요? 이 작은 야고보가 남긴 교훈은, 그는 별로 요란스럽지 않은 인생을 살았고, 별로 선전할 만한 것이 없을 지 모르지만 그는 “작지만 필요했던 제자”였으며, 오늘의 우리들에게는 이런 제자가 절실하게 필요했던 제자“였으며, 오늘의 우리들에게는 이런 제자가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하려면 내가 어떤 사람인가라는 자기 인식이 필요한 것입니다. 야고보는 자신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겸허하게 자기위치에 서서 종의 직분을 수행하며, 설치지도 않았고, 참견하지도 않았으며, 그러나 조용히 있어야 할 곳에 있으면서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했던 아름다운 제자였습니다. 수요예배 예수님의 열두제자 (8) 마태 식도성결교회 제목 : 희생적 결단을 내린 마태 본문 : 눅 5:27-3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율법적인 의를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당연히 법과 질서를 지키는 데 있어서 그 사회의 모범 시민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자기들의 기준에 이르지 못한 사람들을 경멸하는 태도를 취했습니다. 그들의 종교에 의하면 본문에서 문제가 된 레위와 같은 사람에게는 희망이 없습니다. 레위는 도로 길목에 위치한 세관에서 통행하는 사람들과 물품에 관해서 세금을 부과하여 거두어 들이는 세리였습니다. 그는 민족적인 자존심도 다 버리고 로마인에게 굽신거리며 많은 돈을 지불하고 세금 징수권을 따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의 세리들이 다 그랬던 것 같이 정해진 기준에 따라 부과하는 것이 아니라 제 멋대로 높은 세금을 부과하여 착복했던 것입니다. 일제시대에 일제의 앞잡이 노릇하던 사람들이 온갖 횡포를 부리며 사람들을 착취했기 때문에 두고두고 사람들의 원성을 샀던 것과 비교했을 때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모든 종교 모임에서 배제되어야 했고, 그의 돈은 더러운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그로부터 돈을 받는 사람도 부정케 된다고 믿었습니다. 그에게는 증인으로 나설 자격도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철저히 사회로부터 소외되었고 사람 대접을 받지 못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세리들을 증오한 것은 그들의 악랄한 세금 징수 방법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세금 그 자체가 굴욕의 표시이며, 메시야에 관한 소망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민족과 땅을 버리셨다는 것을 생각나게 하기 때문이기도 하였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이러한 이유로 세리와 상종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이 그렇게 하는 것을 강도 높게 비난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당시 가장 유명하고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지셨습니다. 그분은 대부분의 유대인들과 달리 경멸받는 세리 레위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리고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의 명성과 평판에 욕이 될 것을 아셨지만 그를 제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성경은 그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좇았다고 말해 줍니다. 낯선 사람의 말 한 마디에 자기의 일생을 걸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것입니다. 시몬과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도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가 아니라 나중에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눅5:11). 레위는 주님의 부르심이 있기 전 어느 시점에 이미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했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마가복음 2:13에서 언급된 갈릴리 바닷가에서 그런 시간을 가졌는지도 모릅니다. 레위가 예수님을 위해서 집에서 큰 잔치를 베풀었는데 그의 초대에 응할 사람은 그와 같은 사람들 뿐입니다. 성경은 그의 집에 모인 사람들이 세리와 죄인들 즉 사회로부터 소외받는 사람들이었다고 밝혀 줍니다.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앉으셨고 그들과 함께 식사하셨고 그들과 함께 대화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그렇게 하신다고 비난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자신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분명히 밝혀 주셨습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32절). 레위가 자기 한 사람 예수님께 부름 받은 것도 황송한데 그처럼 많은 죄인들을 잔치에 초대한 것도 따지고 보면 예수님의 지시에 의한 것인 듯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리와 죄인들이 영원히 소외받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들과 함께 하신 것은 그들에게 말씀을 전하셔서 회개시키고 새로운 생활을 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한 때 문민 정부가 개혁을 외치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과거 경력 때문에 공직에서 쫓겨나야 했었습니다. 부동산 투기한 경력, 뇌물 수수한 경력, 군사 정권에 참여한 경력 등등. 그런데 투기한 경력을 가진 사람은 죄인으로 낙인찍히고 영원히 사회에서 소외받아야 하는 것입니까? 과거 군사 정권에 참여한 사람은 무조건 그의 능력에도 불구하고 공직에서 배제되어야 하는 것입니까? 전과가 있는 사람은 아무리 그 죄를 회개해도 사회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까? 뇌성마비 장애인들은 언제까지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이곳 저곳으로 옮겨다녀야 합니까? 어디 그들뿐이겠습니까? 가진 것이 없는 자들, 미혼모들, 에이즈 환자들, 동성연애자들도 있습니다. 이들의 죄가 대수롭지 않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예수님께서 레위에게 보여주신 본을 좇아야 할 것입니다. 레위는 부끄러운 과거 경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동족이 한결같이 세리를 가장 큰 죄인으로 지목하고 있는데도 돈 때문에 그 직업을 선택했습니다. 그에게는 사회의 인정보다도, 이웃과의 교제보다도, 명예보다도 돈이 더 중요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알게 된 후 그는 죄악된 생활을 청산했습니다. 마태복음 9:9은 그에게 마태라는 다른 이름이 있음을 밝혀 줍니다. 그는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 한 사람으로 복음 전파에 힘썼으며 신약의 첫번째 책인 마태복음을 기록했습니다. 외롭고 소외받는 사람들로서 그 책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된 사람들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마태의 이름과 배경 마태복음을 읽어보면 마태는 자신의 이름을 그대로 기록한 반면 마가, 누가복음을 읽어보면 그를 레위라고 기록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저에게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막 2:14)” 레위는 구약의 제사장 지파를 말씀합니다. 마태는 레위 지파의 후손이었습니다. 마태의 부모는 새롭게 태어난 아들의 이름을 지을 때 과거 레위 족속의 영광을 회복하고 싶은 바램을 아들에게 가졌습니다. ‘너는 커서 훌륭한 제사장이 되어라’ 이런 바램 때문에 레위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마태의 본 이름은 레위였습니다. 마태라는 이름은 예수님께로부터 받은 새 이름이었습니다. 마태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마태는 가버나움 출신입니다. 예수님은 가장 많은 사역을 여기 가버나움에서 행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이곳에서 제자들을 얻지 못하셨습니다. 그많은 기적을 목격하고, 예수님의 교훈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에게 가장 냉담했던 마을이 가버나움이었습니다.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까지 낮아지리라 네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면 그 성이 오늘날까지 있었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마 11:23-24)” 예수님께 대하여 지극히 냉담하고 배타적이었던 가버나움에 아주 의외의 인물이 나타났습니다. 바로 마태였습니다. 마태의 아버지는 제사장이 되라는 의미로 레위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제사장이 되기는 커녕 세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두 가지로 연결시킬 가능성이 상당히 짙습니다. 그 이유는 세리는 아무나 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세리가 되기 위해서는 상당한 교육이 있어야 합니다. 최소한도 계산을 잘해야 하며, 장부를 만질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사실 그 당시 세리가 되기 위한 사람은 상당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또한 그 당시 로마 정부에 고용되어 관리로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세 가지 언어는 적어도 필수적이었습니다. 그 당시 제일 유행하던 말인 아람어와, 헬라어, 그리고 히브리어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라틴어까지 요구했습니다. 네 가지 언어를 자유자재로 활용할 줄 아는 사람이어야 했다면 상당한 교육을 받은 사람이어야만 가능했다는 증거입니다. 마태는 레위 지파의 배경을 타고, 아버지의 그런 바램 속에서 자랐다면, 틀림없이 제사장이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 교육을 받은 마태는 제사장이 된 것이 아니라 세리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리는 그 당시 사회 속에서 백성들에게 가장 많은 미움을 받고 사는 계급의 사람들이었습니다. 특별히 유대인들에게는 더욱 그러했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정치적인 이유입니다. 세리는 로마의 녹을 먹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였습니다. 그러므로 로마 정부의 관리 노릇을 하기 위해서는 자연히 이 사람들은 친로마적 경향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대다수의 이스라엘 민중들에 의해 매국노로 배척을 받았습니다. 둘째로 세리들은 대부분 부정직했습니다. 과중한 세금으로 민중의 삶을 도탄에 빠뜨렸습니다. 세리들은 과중한 세금을 부과하여 일부만 로마에 바치고 나머지로는 자신들의 주머니를 채웠습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열 두 제자 가운데서 최고의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악의 대접을 받고 있었던 것은 그의 직업이 가장 배척받는 세리였기 때문입니다. 복음서에서는 죄인과 창기와 세리를 하나로 묶어서 취급하였습니다. 이런 삶의 배경을 가진 마태가 어떻게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었을까요? “그후에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나를 좇으라 하시니 저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좇으니라(눅 5:27-28)” 이 말씀 속에서는 마태를 레위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라는 이름을 기록한 것은 마태 자신이 기록한 마태복음 밖에 없습니다. 마태는 자신의 이름을 예수님을 만난 후에 받은 새 이름을 사용하고 있으며, 다른 사람들은 그들이 오랫동안 불러오던 옛 이름에 익숙해져 있었던 까닭에 “레위”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레위를 부르실 때 예수님은 아무 말씀 안하시고 다만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들이 함께 앉았는지라 바리새인과 저희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가로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눅 5:29,30)” 마태는 예수님을 좇게 된 사실이 기뻐 자기의 집에서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 자리에는 마태의 동료인 다른 세리들도 함께 동석하였습니다. 이때 이 모습을 본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불렀습니다. 마태가 예수님의 명령을 받고 따라나서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특별한 목적으로 당신을 사용하시기 위해서 오십니다. 그리고 당신이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르도록 요청하십니다. 당신은 마태처럼 따라 나설 수 있습니까? 마태는 부분적인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아가기로 결단한 그날 마태는 친구들을 불러 모아 잔치를 벌였습니다. “나는 나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위해서 사는 일에 헌신하겠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아가면서도 오히려 감사하고 감격해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쁨을 잔치로 표현했습니다. C.S 루이스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잔치와 함께 시작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나를 사망에서 구원하신 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과 기쁨! 그속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가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까? 갈릴리 가나 혼인 잔치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오천 명을 먹이던 그 자리도 사실은 잔치자리였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에 제자들과 이별을 하면서도 최후의 만찬을 가졌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고 재림하실 때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을 만나게 될 때에도, 어린 양의 혼인 잔치가 열릴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한마디로 잔치와 같은 것입니다. 오늘날 현대 신학자들은 신약성경을 다시 읽고 공부하면서 “예배는 축제이며 잔치이다”라고 정의 하였습니다. 전통적인 의미없고, 내용없고, 생명없는, 일종의 형식만을 강조한 것이 아니라 정말 춤추고 노래하는 잔치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이 계신 곳에는 제자들이 함께 어울렸고,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말씀을 중심으로 그 말씀을 즐기며, 성도의 교제를 나누면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였습니다. 예배에 있어 형식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형식은 반드시 생명의 환희가 차고 넘치는 잔치여야만 합니다. 우리가 마태를 통해 배워야할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태는 세리였는데 이 세리를 제자의 하나로 받아들인 예수님의 심정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리에 대하여 두 가지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 당시에 민중을 착취하고, 자기의 배를 채우고 있는 세리들을 예수님은 무섭게 책망하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세리들을 책망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죄를 책망하신 것입니다. 세리라는 그 인간, 그들이 죄를 범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 인간을 주님은 결코 거절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세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들과 함께 앉으셨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자기의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그의 생애와 죽음 성경에는 마태가 부름을 받은 다음 무엇을 했다는 기록이 한마디도 없습니다. 그가 남긴 가장 위대한 업적은 마태복음을 기록했다는 것입니다. 마태는 유대 역사에 정통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구약성경이 이렇게 성취되었다”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 마태복음입니다. 마태는 어떻게 유대의 역사에 관해서 그렇게 잘 알 수 있었을까? 그는 제사장 집안에 태어나 제사장이 되기 위하여 열심히 공부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중간에 육신의 안일과 평안을 좇아 부모의 바램과는 반대로 로마의 앞잡이 세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바꾸어 위대한 복음서를 쓰게하셨습니다. 마태복음을 읽어 보면, 이것은 철저히 유대 역사를 분석하면서, 거기에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왕되신 역사를 가장 정교하게, 날카로운 필치로, 그리고 영광스럽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열심히 공부하고 일해야 합니다. 어떻게 주님이 우리를 사용하실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는 에디오피아에까지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애굽으로 가던 길에 핍박자들을 만나 창에 찔려 거기서 죽음을 당했습니다. 마태는 자신의 안락한 삶을 버리고 주님을 위하여 이와 같은 순교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교훈과 문제 제기 마태는 위대한 신앙적 결단을 내린 사람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주님을위하여 희생적 결단을 내리며 살아갈 수 있을까요? - 예수 그리스도가 내 인생의 문제에 대한 해답이라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 우리가 잃는 것보다 얻는 것에 대한 소중함을 확신하여야 합니다. 죠지 베브리 쉐아(G.b Shea)는 시카고 방송국의 프로그램 편성자였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예수를 믿었었는데 인기가 높아지자 예수님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얻고자했던 모든 것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쓸쓸해지고 공허하기만 했습니다. 그는 어느날 시카고의 한 운동장에서 젊은 전도자 빌리 그래함이 열고있는 전도집회에 참석하였습니다. 그 집회에서 은혜를 받고 회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는 주님 앞에 일평생을 바치기로 헌신하였습니다. 집에 돌아와 얼마전 예수 믿는 어머니 친구가 작곡해보라고 주었던 가사에 곡을 붙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방송국에서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다시 전속 계약을 하면 지금까지 받았던 금액의 배를 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정중히 거절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미안하지만 오늘밤 저는 제 목소리를 주님 앞에 드리기로 결정했습니다. 앞으로 제 목소리는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만 쓰여 질 것입니다.” 전화를 끊고 난 후 이 사람의 마음 속에는 아름다운 멜로다가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곡을 완성시켰습니다. 그 곡의 가사는 이러했습니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영 죽을 내 대신 돌아가신 그 놀라운 사랑 잊지 못해 세상 즐 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 밖에는 없네” 수요예배 예수님의 열두제자 (9) 유다 다대오 식도성결교회 본문 : 이름없이 빛없이 섬긴 제자 제목 : 유다 다대오 (눅 6:13-16) −−−−−−−−−−−−−−−−−−−−−−−−−−−−−−−−−−−−−−−−−−−−−−−−−−−−−−− 1)이름과 배경 초대 교부 가운데 제롬(Jerom)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제롬은 처음으로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한 학자였습니다. 이 제롬은 다대오를 “세 이름을 가진 제자”라고 불렀습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다대오’라고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나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유다’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래서 흔히 혼동을 일으키지 않으려 “유다 다대오”라고 부릅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고 자살한 이후 마태와 마가는 다대오를 보호하기 위해 유다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제자들 사이에서 통용된 이름이 유다였기에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그대로 ‘유다’라는 이름으로 기록하였습니다. 영어 성경에 보면 마태복음 10:3에 ‘레비어스’라고 쓰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롬이라는 초대 교부는 ‘세 이름을 가진 사나이’라고 불렀습니다. 2)인물됨과 생애 성경에는 열 두 제자의 명단을 언급할 때를 제외하고 유다 다대오를 말한 곳이 단 한번 나옵니다. 다대오의 말이나 행동은 공관복음서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고 요한복음에 딱 한번 기록되어 있는데(요14:22). 여기에 기록되어진 유다는 다대오였습니다. 요한은 유다가 다락방에서 질문한 것을 기록하면서 배신자 유다와 조심스럽게 구별하기 위해 가룟사람 아닌 다른 유다가 질문을 했다고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가룟인 아닌 유다가 가로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요 14:22)” 요한복음 13장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발을 씻기신 후에 예수님은 제자들과 만찬을 나눕니다. 이 만찬이 끝나갈 무렵 예수님은 말씀을 시작하시고 그 말씀은 16장까지 계속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설교를 하시는 중간 중간에 제자 몇명이 나와 예수님께 질문을 하게 되는데 그 말씀들이 14장에 나옵니다. 이중에는 유다 다대오가 나옵니다. 일반적으로 질문은 누가 하는가? 어떤 상황에 대한 관찰력이 있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다대오의 질문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예수님의 진정한 본성이 메시야라는 사실을 제자들인 우리에게는 말씀해 주시고, 증거도 보여 주시고, 확신시켜 주셨으면서도 세상을 향해서는 주님 자신을 왜 나타내지 않으십니까?” 이 질문은 단순하게 보면 지적인 호기심으로 치부할 수도 있으나 다른 각도에서 보면 선교적 관심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빨리 세상에 알리셔서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당신을 믿도록 해야하지 않습니까?” 다대오라는 유다는 다른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세속적인 왕국이 빨리 나타나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유다가 상상하는 방식으 로 자신을 나타내지 않으셨습니다. 이때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던 유다가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게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하고 질문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을 하셨습니다.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유다는 예수님께서 사랑을 주장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지배욕에 사로잡힌 유다는 남을 섬기려는 예수님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자신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은 순종과 사랑을 가진 자에게만 나타내 보이신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예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면 그 마음속에 예수께서 임재하십니다. 유다는 사랑을 통한 믿음의 방법으로 그 생활이 변화되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통해서 오는 놀라운 교훈과 진리를 자기만 독점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그 사실이 알려지기를 원하는 선교적 차원에서 보는 각도와도 통할 수 있습니다. 포용력이 넓은 제자의 이미지를 우리는 이 질문을 통해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상은 질문을 통한 유다 다대오 이해의 전부입니다. 이번에는 이름을 통해 인물됨을 생각해 봅시다. ‘다대오’라는 말의 뜻은 “사랑스러운”입니다. 다대오라는 말의 어근은 “도다”라는 말에서 나온 것인데, 이 말의 뿌리는 “찬양”입니다. 또 하나의 별명인 레비야스는 본래 히브리 명사인 「렛」에서 나온 것으로 「렛」은 ‘가슴’이라는 뜻입니다. 이 가슴은 육체적인 가슴 그 자체가 아니라 어떤 깊은 마음이나, 심정을 가리킬 때 쓰여지는 단어였습니다. 그러면 레비어스와 다대오 이 두 별명은 어떤 연관성을 지녔습니까? 이 사람의 성격은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또 사랑을 주며, 그리고 깊이 있고 조용한 자신의 가슴을 사람들에게 전달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상이 성경에서 다대오를 살펴볼 수 있는 자료들입니다. 행 1:13 들어가 저희 유하는 다락에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대개 사람의 별명을 보면 그 사람의 성격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사실 별명이란 습관이나 취미 그리고 사람됨이나 특성을 나타내는 중요한 단서 역할을 합니다. 그러면 유다와 그의 별명에 담긴 의미를 살펴볼까요? ①유다는 구약시대의 야곱의 4째 아들 유다에서 유래된 것으로 그 뜻은 기쁨으로 찬송하다. 란 의미를 지닙니다. ②다대오는 사랑스러운, 칭찬하다의 뜻으로서 그 어근이 도다에서 나왔는데 이 말의 뿌리는 찬양이라는 말입니다. ③레비어스는 히브리어의 명사 렛에서 나온 것으로 가슴이라는 뜻입니다. 육체적 가슴이 아닌 마음이나 심성을 의미하는 가슴 말입니다. 그러면 다대오와 레비어스 이 두 이름은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까? 적어도 그의 부모님이 이름을 지은 의미가, 너는 장차 어느 누구든지 만나는 사람에게 기쁨으로 찬양하면서 따뜻한 가슴을 열어 사랑을 전달하는 자가 되라는 암시적 뜻을 불어 넣은 것처럼 짐작됩니다. 이런 식으로 열 두 제자 중 하나인 유다를 표현할 때 “사랑받고 있었던 유다” 이렇게 나옵니다. 성경 어느 곳에 그렇게 표현되어 있느냐고요? 예, 성경에는 유다에 대하여 딱 한 번만 그의 행적이 나올 뿐(22절) 별다른 수식어가 따르지 않습니다. 그러면 사랑받고 있었던 유다라는 수식어가 어디에 나옵니까? 초대 교부 중의 하나인 제롬(Jerome, A. D. 366~420)이 기록한 열 두 제자의 인물에 관한 단편적인 책에 보면 비록 성경만큼 신빙성은 없지만 그래도 다소 참고할 만한 단서로 나옵니다. 한 신학자는 인물 연구를 하면서 예수님의 열 두 제자 가운데 요한이 적극적인 사랑의 사도라면 이 유다는 조용한 사랑의 사도라고 표현했습니다. 즉 유다는 자신을 들어내지 않고 감추면서 사랑을 실천한 사람이라는 뜻이지요. 저는 오늘 이 유다 다대오의 모습을 말씀드리면서 “자신을 감추며 산 유다 다대오” 라는 부제로 말씀을 드릴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더 자세한 내용을 알기 위해서는 주변의 자료들을 살펴보는 수 밖에 없습니다. 물론 이 자료들은 성경보다 우선할 수 없습니다. 다만 보조적인 자료로서 참고할 뿐입니다. 초대 교회 문서 중에 열 두 제자를 비교한 것이 있습니다. “또 하나의 유다는 가룟 유다와 여러 면에서 대조를 이루고 있었던 제자입니다. 또 가룟 유다가 불평을 하고 있었을 때에 이 사람은 찬양하고 있었습니다. 가룟 유다가 옥합을 깨뜨린 여인을 향하여 불만을 터뜨리고 있을 때에 이 다대오는 조용히 찬양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분쟁을 일으키고 아우성을 칠 때도 어느 편에도 가담하지 않고 중립을 지켰던 제자가 바로 다대오였습니다. 모든 제자들이 불평하고 원망하고 있을 때에 조용히 한 옆에서 주님을 찬양하고 있었던 제자! 유다라는 말의 뜻은 “찬양”입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좋은 이름을 가졌으면서도 이름 값에 먹칠을 하고 말았습니다. 반면에 유다 다대오는 이름 값을 훌륭히 감당했던 제자였습니다. 이 문서에서 보면 다대오는 모든 제자들 가운데 사랑과 인정을 많이 받았던 그러면서도 다른 제자들앞에 나서기를 꺼려하고 언제나 조용히 자기의 할일을 하던 제자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 시인은 노래하였습니다. “오늘 이 시대에 있어서 사람들은 벽을 쌓으려고는 하지만, 다리를 놓으려고 하는 사람은 없다” 오늘 이 시대는 참으로 유다 다대오와 같은 제자가 그리워지는 시대입니다. 22 가룟인 아닌 유다가 가로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게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거듭 살펴보는 말씀입니다만 이 말씀에서 가룟인 아닌 유다가 라는 부분의 아닌을 잘못 읽어 빠뜨리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가룟인 유다가 라고 읽게 되는데 그러면 큰 일 나죠. 발음을 조심해야 되겠고 시력이 약한 분은 돋보기를 쓰고 읽어야 될 것 같습니다. 유다가 예수님께 주님이 메시야라는 사실을 우리에게는 나타내시면서 왜 다른 사람에게는 안 나타내시려 합니까? 라는 질문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하리라. 24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의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이 말씀의 배경을 보면 조금은 유다 다대오에 관한 어떤 자료를 얻을 수 있는데 앞서 13장 첫 머리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장면이 나오죠?(01~17) 예수님은 발을 씻기신 후 계속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나누면서 그 만찬이 끝나갈 무렵에 비장한 심정으로 설교를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설교를 하시는 중간 중간에 제자 셋이 질문을 하는 장면이 있는데 그 대목을 제가 간단히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나는 이제 얼마 안 있으면 너희들 곁을 떠나간다(01~04절). 그러자 ①도마가 먼저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라고 묻고(05절) 예수님께서 답변을 하십니다(06절). 05 도마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0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이때 ➁빌립이 갑자기 튀어 나와 아버지가 도대체 어디에 계시는지 그 아버지를 우리에게 한 번 보여 주십시오 라고 말을 하고 예수님이 또 답변을 하십니다. 08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09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이어서 예수님은 이번에는 기도에 관한 문제로서 그 내용은 예수님 자신이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시는 분 즉 메시야이심을 말씀하십니다. 3)죽음 외경 중에 다대오의 일대기를 기술한 “다대오전” 이란 책이 있습니다. 이 기록에 의하면 유다 다대오는 시리아, 아라비아와 페르시아로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였고 특별히 아르메니아의 에뎃사에서 바돌로매와 더불어 주된 활동을 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A. D 301년에 벌써 그 나라가 기독교화 될 만큼 복음으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끼쳤는데 그 후 다시 시리아에서 복음을 전하다 칼에 맞아 순교하였다고 전해집니다. 유다 다대오 그는 남들보다 특별히 내세울 만한 특기가 있어 보이지는 않지만 그러나 성숙한 인격의 사람이었기에 주님께서 제자로 택한 것 아닙니까? 그는 열 두 제자 가운데서 가교 역할을 가장 잘 한 인물로 평가받는 사람인데 그 유다 다대오가 우리에게 남기고 있는 교훈이 무엇인지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①찬양과 감사로 밝은 면을 바라보는 제자이었습니다. 어두운 곳을 바라본다면 불평할 것은 항상 있기 마련이죠. 감사를 앞세워 밝은 면만 바라보는 긍정적인 성도가 됩시다. ②주님과의 단 한 번의 대화에서 메시야가 많은 사람에게 알려 지기를 원하는 선교적 마음을 품은 제자이었습니다. ③그는 이름처럼 찬양과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슴을 열어 많은 사람에게 위안을 준 사람으로서 그 이름처럼 살다간 제자입니다. 성도 여러분! 가룟 유다는 좋은 이름을 가졌으면서도 그 이름값을 하지 못하였으나 유다 다대오는 좋은 이름을 가진 사람답게 보람된 삶을 살다 갔습니다. 그는 그렇게 이름을 날린 유명한 제자는 아니었으나 꼭 필요했던 제자로서 자리 매김을 하고 있는 인물입니다. 유다 다대오는 훗날 시리아로, 아라비아로, 페르시아로 찾아 다니면서 복음을 전합니다. 그는 특별히 아르메니아에서 주된 활동을 벌였습니다. 바돌로매와 더불어 동역하면서 그 도시 에뎃사에서 놀라운 선교의 활동을 펼쳤다. A.D 301년에 벌써 그 나라가 기독교화될만큼 복음으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끼쳤다고 기록되고 있다. 그는 다시 해외에 선교하러 나갔다가 시리아에서 칼에 맞아 순교하였습니다. 14.1.1 열두제자연구10 신중한 사람 빌립 식도성결교회 제목 : 신중한 사람 빌립 본문 : 요1: 43-48 43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44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45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46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47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48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1.이름의 뜻 빌립 - “말을 좋아하는 사람”이란 뜻인 이 이름은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인 빌립(북쪽 갈릴리 바다에 그리이스의 영향력을 계속하여 행사한 인물)의 이름을 따른 것 같기도 합니다. (또 사도들의 고향인 벳세다를 도시의 지위로 승격시킨 공적이 있어서 지방의 통치자인 영주 빌립이란 이름으로 보상으로 받았으리라는 추측도 있습니다.) 빌립은 그리이스라는 세력을 배경으로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유대뿐 아니라 그리이스에도 멧세지를 전하는데 유용한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벳세다가 안드레와 베드로의 고향이었기 때문에 그들과 동향인 빌립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이들과 친하게 지냈습니다. (요4:4) 메시야를 찾으려는 안드레나 베드로처럼 빌립도 마찬가지로 메시야에 대하여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2 빌립의 기질 태어날 때부터 오랜 친구인 베드로와는 달랐습니다. 베드로가 오직 자신의 신념만으로 나아가려 하는 것과는 달리 빌립은 결단을 내리기 어려운 순간에는 또 하나의 오랜 친구인 안드레에게 많은 협조를 구했습니다. 흑백을 가려야 할 일이 생기면 분석적이면서 치밀한 빌립의 마음은 그 일을 심사숙고하고 흑백을 가리는 찬반의 결정에 신중을 기했습니다. 사실, 빌립은 어떤 한정된 범위 내에서 조심스럽게 계산하기 때문에 더러는 우유부단하기도 했으며 다른 사도의 조력에 의존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빌립은 결코 경솔한 판단을 하여 실수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1.메시야를 증거하는데 신중(요 1:43-46) 1.빌립을 부르심 요한복음은 안드레가 베드로를 예수께 데리고 간 사실을 기록한 후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은 만나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하셨다고 쓰고 있습니다(요 1:43). 여기서 이튿날이라 함은 이 날은 빌립과 나다나엘을 제자로 부르신 날입니다. 특히 이 날은 사도 요한과 안드레를 세례 요한을 통해 제자로 삼으신 것과는 달리 예수께서 직접 제자를 부르시는 장면이 인상적으로 나타나는 말입니다. 당시 갈릴리는 헬레니즘 문화의 침투(浸透)가 극심한 지역이었고, 예루살렘과는 달리 사회적으로 하층민들이 많이 거주했던 곳입니다. 따라서 갈릴리는 유다와 예루살렘인들에게 있어서 경멸과 조롱의 대상이었습니다(46절). 하지만 예수는 공생애 초기와 후기의 짧은 유대 사역을 제외하고는 주요 사역 무대를 갈릴리로 채택하셨습니다. 이렇듯 사회적으로 천대받고 경제적으로 착취당하는 갈릴리에서 메시야의 사역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구약 예언의 성취라 하겠으며, 하나님의 뜻을 떠난 유대교를 파기하고 새로운 교회 공동체를 만들고자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경륜(經綸)을 엿보게 합니다 안드레와 베드로는 이미 예수님에 대하여 빌립에게 이야기했을런지도 모릅니다. 베다니와 갈릴리 사이의 길을 가다가 어느 곳에서인가 예수님은 빌립에게 제자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을 권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빌립을 세례 요한을 따르는 한 사람일 거라고 아셨기에 빌립을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빌립은...벳새다 사람이라 -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벳새다라는 지명만 들어도 예수 그리스도의 갈릴리 사역을 연상했을 것입니다. 벳새다는 '사냥이나 고기잡이 하는 집'이라는 뜻의 지명입니다. 이는 벳새다가 갈릴리 호수 근처의 벳새다임을 암시합니다. 또한 안드레와 베드로가 출신지가 가버나움임에 비추어 볼 때(눅 4:31-39), 벳새다는 가버나움 근처에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빌립을 찾으신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찾는 것은 예수께서 우리를 먼저 찾는데 대한 반사적인 행동입니다. 세리 삭개오가 예수님을 찾고 있었던 것처럼 보이지만 다만 나무에 올라가서 힐끗 예수를 구경하려고 했을 뿐이지 예수님께서 발걸음을 멈추시고 나무 위를 보신 후 스스로 삭개오의 집을 찾아 들어가셨던 것입니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19:10)고 진실로 누가 누구를 찾는가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빌립은 예수님의 부름을 받고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마8:21)라고 말한 사람과 빌립이 동일한 인물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빌립의 우유부단한 성격과 상통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름에 빌립이 우물쭈물했다면 그것은 잠시 뿐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눈을 보고 목소리를 들은 빌립은 자신의 생애가 변함없이 항상 똑같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빌립은 천천히 심사숙고하여 선택한 길이지만 이것은 충심에서 우러나온 최종적인 결단이었습니다. 2.빌립의 전도 빌립은 친구인 나다나엘이 생각이 나자, 즉시 예수님을 만난 사실을 친구에게 말해 주려고 걸음을 재촉했습니다. 이것이 빌립의 첫번째 전도였습니다. 새로 만난 삶에 대한 감사한 마음과 진실한 전도정신으로 빌립은 친구인 나다나엘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 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요 1:45)고 말했습니다. 예수께서 율법과 예언을 성취하리라고 빌립은 확신한 것입니다. 빌립은 확신한 것입니다.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확신을 말하였으나 나다나엘은 예루살렘이 더욱 실증적인 곳이라고 생각하면서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날 수 있느나?”(요1:46)고 물었습니다. 당시 나사렛은 갈릴리의 한 마을이므로 율법주의자의 입장에서 볼때 멸시당해 마땅한 지역이었습니다. 친구가 자기의 증거하는 것을 부인하였으니 빌립은 분개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또 구약의 모든 예언들이 에수 안에서 성취된다고 말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빌립은 말다툼을 하지않고 간단하게 “와 보라”(요1:46)고 대꾸했습니다. 나다나엘의 빈정거리는 말투와 그 말투에 내포된 논리적 타당성은 빌립의 말문을 막았을 뿐만 아니라 심한 모멸감까지 주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립은 나다나엘을 강권합니다. 빌립이 말한 '와 보라'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와 보라'(39절)와는 다른 어감을 가집니다. 즉 빌립의 강권(强權)은 당시 랍비가 제자들을 초청하는 형식이 아니라 제자가 다른 한 제자를 랍비에게 소개하는 형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이 말은 율법적인 논리보다는 역사적으로 성육신하신 메시야라는 실체를 목도하여 보라는 말입니다. 나다나엘과 빌립의 대화는 논리적인 대화가 신앙에 훌륭한 기초가 된다 하여도 우리는 어떤 사람과도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논쟁을 하면 안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논쟁이 더이상 불필요함을 깨달은 빌립은 친구에게 예수께로 가보자고 했을 뿐입니다. 자신있게 설명할 수도 없고 신념이 확고하지 못했기 때문에 “와 보라”고만 한 것은 빌립의 성격을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주님께 의지하는 것을 증거해 주기를 원하거나 논쟁하려는 생각이 머리에 가득한 사람이 나쁘기만 하지는 않습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저는 당신의 질문에 대답을 할 수 없습니다. 돌아오는 주일 아침에 당신을 교회로 모시겠습니다. 아침 열 시까지 당신 집으로 제가 가지요”라고 말하는 것이 오히려 현명합니다. 드디어 빌립의 노력은 성과를 거두어 나다나엘은 예수님이 메시야임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이미 안드레, 요한, 베드로와 야고보가 예수를 메시야로 믿었으며 빌립이 다섯번째가 되며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10:3/막3:18/눅6:14). 그 후 사도들이 두 사람씩 짝을 지어 복음전도 여행을 할 때 빌립과 나다나엘은 아마 한 짝이었을 것입니다. 2.오천 명을 먹일 수 있는 계산(요한복음 6장 5-14절) 1.빌립은 수효를 계산했습니다. 어느날 자기를 따르는 수천의 무리를 보신 예수께서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고 빌립에게 물으셨습니다.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면서도 빌립에게 그 해결 방법을 물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빌립은 시험에 불합격하였습니다. 빌립은 마음 속의 컴퓨터 단추를 눌러 무리들에게 떡을 먹이는 데는 이백데나리온 이상이 필요하다는 상당히 정확하고 실제적인 계산을 해 냈습니다. 이 금액은 모든 사람들을 조금씩 먹이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액수였습니다.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하기 때문에 빌립은 “여기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충분하게 먹을 것을 사주려면 거의 일년 품삯이 필요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가진 돈이 없는데 어떻게 당장 음식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라는 식으로 예수님께 대답하였습니다. 빌립의 정확하고 논리적인 생각은 당시 정황에 필요한 돈을 잘 계산해 냈습니다. 2.현대의 빌립들 빌립과 비슷한 현대인은 맵시있게 옷을 입고 슈퍼마켓에 가서 물건을 사는 사람일 것입니다. 이 사람은 자기가 사려고 하는 품목을 기록한 종이를 들고 카트를 밀면서 선반에서 물건을 내릴 때마다 물건값을 적어 놓으며 카운터에 가서 자기의 계산과 맞추어 본 다음에 지불할 것입니다. 교회에서 봉사할 때에는 항상 신속하게 일합니다. 논리가 정연하고 계산에 밝으며, 거의 기계적인 만큼 정확한 이 사람은 항상 전통을 존중하며, 근본원리를 탐구하고 수치를 맞추어 봅니다. 이 사람은 “우리는 전에 그렇게 한 일이 없어”. 또는 “그것은 할 수 없었어”라는 말을 자주 씁니다. 그런데 현대의 빌립은 하나님의 일을 방해할 수도 있다는 반대되는 그 계획안에 결코 찬성하고 싶지 않습니다. 상식에 따라서 일을 처리합시다“라고 역설하였습니다. 2.빌립은 믿음이 없이 계산을 했습니다. 빌립은 비젼을 갖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오로지 확증과 계산과 최악의 경우만을 생각하기 때문에 위기에 처할 때를 대비하여 주님께서 예비하신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빌립은 수천 명을 먹일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으며 떡을 살 수 있는 돈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의 기질은 주님의 기적을 배척했습니다. 그는 너무도 타산적이기 때문에 담대하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빌립에게 믿음을 가르치는 데 도움이 되게 하시려고 무리들을 먹일 떡에 대하여 그에게 물으신 것입니다. 빌립이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대답을 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바구니에 음식을 가진 아이를 데리고 옆에 서 있는 안드레를 쳐다 보셨습니다. 빌립이 비젼을 갖지 않은 것과는 대조적으로 안드레는 속시원하게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요6:9)고 여쭈었습니다. 안드레의 믿음에 대한 응답으로 예수께서는 아이가 가진 것으로 무리들을 모두 배부르게 먹이고도 남은 조각이 열 두 바구니에 가득 채우는 기적을 성취하셨습니다. 이 사건이 있은 후 다행스럽게도 빌립은 타산적인 성격을 가지고도 하나님을 모시고 배웠습니다. 빌립은 자신의 믿음이 깊지 못함을 부끄러워했을 것입니다. ”나는 알아야 한다. 바람을 재우고 병을 고치며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이는 무리들을 먹일 수 있다. 나는 왜 「주여, 무리들을 먹이는 일은 당신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아닙니다.」라는 말씀드리지 못했을까? 나는 왜 믿음이 없을까? 라고 빌립은 혼자 말했을 것입니다. 그 날 빌립은 자신이 얼마나 속되고 융퉁성이 없는가에 대하여 얼마쯤 깨달았을 것입니다. 또 하나님이 그 안에 계시면 작은 것이 크다는 것도 배웠습니다. 교회는 주제넘고 경솔하게 예산의 집행을 좌절시키려는 기도로 부터 보호되기 위하여 신중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보다 큰 일을 성취하기 위하여 믿음이 강한 것을 필요로 합니다. 계산적이며 보수적인 머리가 반드시 냉정한 마음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 기계적으로 철저히 따지는 것이 불신앙을 가리키는 것도 아닙니다. 논리적인 생각을 가진 빌립은 무리를 충분히 먹이기를 원하는 따뜻한 마음을 가졌을 것이지만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지를 알지 못했을 뿐입니다. 빌립은 불가능하다는 자신의 생각을 하나님으로는 가능하다는 생각으로 바꾸어야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너무도 많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에 이르고 애굽의 군대가 양쪽으로 포위하여 뒤쫓을 때 모든 일은 불가능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다를 가르시고 이들이 무사히 빠져 나가도록 하셨습니다(출 14:8-31). 옥에 갇힌 베드로의 처형이 이튿날 아침으로 계획되어 있을 때 그에게는 모든 것이 끝장인 것같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사슬을 풀고 옥문을 열어 자유의 몸이 되게 하셨습니다(행 12:1-10).우리에게 모든 일이 불가능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 주십니다. 3.헬라인을 맞을 때의 우유부단함(요12:19--22) (요12:19-20) 유월절에 예배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온 헬라인들이 있었습니다. 이들 중에 몇 사람은 유명한 선생인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 직접 만나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빌립을 소개자로 선택하였습니다. 그의 이름이 헬라식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빌립은 그들이 유대인이 아니라 헬라인이기 떄문에 곧장 데려가지 않고 주님의 뜻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언젠가 (마10:6)“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신 적이 있음을 기억하였습니다. 이방인들은 사마리아인들 보다도 한 단계 아래로 낮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님이 원하실까? 생각하며 썩 내키지 않아서 착한 친구 안드레에게 상의했습니다. 빌립은 안드레의 조언에 힘을 얻어 주님꼐 고하였고 주님은 그들과 대화를 나누셨습니다.(요12:25) 분석적인 태도를 가진 빌립은 갈릴리와 예루살렘을 불을 붙이지는 못 하였으나 자신의 가슴에는 불을 당겼다. 주님와 함꼐 하면서 설령 안에 거하는 생활을 통하여 빌립은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는데 크게 성공하였습니다. 지나치리 만큼 신중한 성격은 보다 큰 단호한 결심을 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어떤 결심을 하는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게 보통입니다. 만일 빌립이 계속 망설이기만 했다면 헬라인들은 주님을 만나지 못하고 제 갈길을 갖을 것이고 그들의 영혼은 구원의 기회를 놓쳤을 것입니다. 어떤 성도는 중요한 기회가 마주칠 때 마지못해 하듯이 꾸물거린다. 기회는 중요합니다.안드레가 상드레와 상의 없이 구원에 관한 것은 신속히 행동에 옮겼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4.빌립은 믿음을 갖기가 어려운 사람이었습니다. 비록 이해하는데에는 우둔하였으나 부지런히 영적인 문제를 추구하고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합리적인 생각을 쓸어 버리고 주님께 대하여 품고 있었던 의문도 없애기 시작하였습니다. 자신이 찾고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예수 안에서 발견하였습니다. 과학적인 방법과 실용주의 속에서 살고 있는 현대인들과 같은 모습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무한 능력과 존재에 대하여 우리들의 한정된 지식에 대하여 깨어서 주목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의 생애 초대교회의 문서들은 소아시아에서 선교하였다고 전합니다. 라오디게아, 골로새 둥지에서사역했는데 자주 갈라디아 지역을 순회하였습니다고 합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이 불란서 고올지역으로 이주하여 살았는데 그 곳 가지 가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고 합니다. 특히 히애라폴리스라는 도시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기독교를 박해하는 무리들에게 잡혀서 몰매를 맞고 십자가를 지면서 순교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훗날 그의 유해는 로마로 옮겨져서 빌립을 기념하는 교회당에 안치 되었습니다. 2.교훈 1)말씀의 권위 앞에 내 생각을 맡기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2)내가 말씀을 받았을 때에는 나누는 것이 필요합니다. 3)우리의 생각이 하나님이 우너하시는 행동으로 이어지는 결다으로 옮겨지기 위하여서는 내 주변에 좋은 그리스도인 친구들이 있어야 합니다. 혼자의 생각은 오류에 빠질 우려가 있으므로 성도는 교제하라. 4)주님을 계속 바라보아야 합니다. 신앙의 성장괴정에는 위심과 회의가 있어서 의심하고 질문하는 것은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질문을 드리면서 계속 주님 앞에 있어야 합니다.이것이 그가 성장할 수 있었던 비결입니다. 14.1.8 수요 예수님의 열두제자 (11) 가나안인 시몬 식도성결교회 제목 : 민족에의 열망을 주께 바친 가나안인 시몬 본문 : 행1:1-8, 눅6:15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제자 시몬에 대한 수식어를 보면 셀롯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 뜻은 국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열심당이라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 국가가 독립되기를 바라는 열망을 품고 살았던 제자 시몬은 어떠한 사람인지 열 두 제자 열한 번째 시간을 강론하면서 살펴보려 합니다. 1)배경과 인물 열 두 제자 가운데 거의 성경에 자료가 없는 제자가 바로 가나안인 시몬입니다. 성경에서 그의 배경에 관한 자료를 얻자면, 우리가 알 수 있는 자료는 두 가지 밖에 없습니다. 그 하나는 그가 가나안 출신이라는 것입니다. 마 10:4, 막 3:18에 ‘가나안인 시몬’이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의 소재는 눅 6:15, 행 1:13에 ‘셀롯인’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와 도마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셀롯이라 하는 시몬과....(눅 6:15)” 이 말씀에서 ‘셀롯’이라고 표기한 성경 아랫 부분의 그 해석에는 ‘열심당원’이라고 씌고 있습니다. 이 정도가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그의 전부입니다. 열심당이란 예수님 당시에 아주 극렬한 민족주의자들의 집단입니다. 이스라엘에는 ‘마사다’라는 유명한 관광지가 있습니다. 이 ‘마사다’는 사해바다를 따라서 내려가면 서남쪽에 위치해 있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전에도 그러했지만, 특히 돌아가신 이후에 유대 나라는 로마의 강압적이고 직접적인 통치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은 예수님께서 예언하신 그대로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파괴되었으며, 많은 유태인들은 로마에 잡혀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민족적인 수난을 겪으면서 남은 유태인들은 로마에 대하여 끝까지 항전할 것을 선언하고 마사다라는 높은 산에 올라갑니다. 이스라엘의 지명을 소재로 한 유명한 영화가 있는데 제목이 마사다(사해 바다의 서남쪽 높은 언덕 위에 있음)입니다. 그 내용은 마사다를 배경으로 한 영화로서 예수님 이후 이스라엘은 로마의 강압적인 통치 아래서 예루살렘 성전은 완전히 파괴되고 많은 유대인들이 로마에 잡혀갑니다. 이스라엘은 이렇게 민족적인 수난 속에서 세력 없음을 한탄하며 최후까지 로마 군병들과 싸우겠다고 결심하고 남아 있는 셀롯인 즉 열심당원들은 마사다라는 높은 산까지 올라간 것입니다. 그곳은 헤롯의 헤롯 궁전의 잔해가 남아 있었기에 그 안에는 피나처도 있었고, 비가 오면 빗물을 담아서 연못처럼 모아 둘 수 있는 천연석으로 된 못도 있었습니다. 이곳은 유태인들에게 물을 공급하는 원천이 되었습니다. 메마른 사막 지대의 대단히 높은 산 위에 올라가서 로마에 항복하기를 거절하고 그곳에서 로마 병사들과 싸움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가 이미 패배라는 기정사실 아니겠습니까? 그럼에도 대항을 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민족 자존심의 발로라 할 수 있는데 결국은 마사다에 모인 열심당원들이 마지막까지 항쟁을 하나 더 이상 버틸 수가 없게 됩니다. 패배는 정해진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로마에 절대 항복할 수 없다는 민족적인 자존심을 가지고 끝까지 항전하였습니다. 마지막 싸움에서 승부가 결판날 때에 로마 병사들에게 죽을 수 없다는 생각에 이들은 그들이 올라오기 전에 천여명이 집단자살을 하였습니다. 지금도 유태인들은 징집되어 군대에 갈 때는 이곳 마사다에서 서약을 하게 됩니다. 마사다에 가보면 관광용품을 파는데 어느 물건을 사든지 물건마다에는 “마사다는 결코 두번 다시 함락되지 않을 것입니다”라는 글귀가 적혀 있습니다. 유태인들의 민족적인 자존심과 로마에게 끝내 질 수 없다는 절개를 끝까지 고백하고 죽어간, 그 장렬한 죽음의 자리가 마사다 언덕입니다. 바로 이 마사다 언덕에서 끝까지 투쟁을 했던 이 당파가 열심당입니다. 열심당의 역사적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B.C 167년경에 소위 신.구약 중간기라는 시대가 있었는데, 그 시기에 마카비 형제를 중심하여 역시 외세의 침입에 항쟁하여 민족을 지키려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이스라엘 민족사에 자기 민족을 외세의 침입으로부터 보호하고, 민족의 독립과 자주성을 지키려는 운동이 지속되었습니다. 이들은 아주 극단적인 생각도 가지고 있어 친로마적 성향이 있는 사람은 동족임에도 불구하고 과감하게 죽여버리는 잔인성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 작은 야고보 같은 사람도 열심당 출신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제자들은 열심당이라는 뜻인 ‘셀롯인’이라는 말은 안썼는데 이 시몬은 그 이름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아마 이사람은 예수님의 제자가 된 후에도 그들과 관련을 맺고 있었거나 그들의 일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만큼 시몬은 민족에 대한 긍지와 민족에 대한 열망이 가장 투철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 열심당에 가입하려면 불타는 애국심과 철저하게 헌신할 수 있는 결단이 있어야 가능했습니다. 이러한 결심이 없으면 아예 받아주지도 않았습니다. 이 정도가 성경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자료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관심을 끌게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열심당원 출신이었다면 그 성격에 제자들과 많이 다투었을 성도 싶은데 전혀 그런 기록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그것은 시몬인 열심 당원이었던 반면에 예수님의 모습과 말씀을 보고 들으면서 끊임없이 생각했고 번민했던 탓이었을 것입니다. 행 1:6에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라는 질문이 나오는데 이것을 가나안인 시몬이 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복음서를 통하여 예수님께서 자신을 언제나 메시야로 구세주로 증거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메시야관과 제자와 이스라엘 사람들의 메시야 개념은 큰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로마의 압제하에서 자신들을 구해줄 정치적 메시야를 기다렸고, 예수님은 인간을 영적으로 구원하시는 분으로서의 메시야셨습니다. 이러한 배경으로 우리는 가나안인 시몬이 왜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는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남다른 능력이 있어 그를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하에서 구원해줄 정치적 메시야로 따랐는데 십자가에서 죽으시자 그는 크게 실망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삼일만에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시자 다시 가슴 부푼 기대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주님이 승천하실 때가 가까와오자 시몬은 물었던 것입니다.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 이때 예수님의 답변은 어떠했는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7-8)” 주님은 협소한 민족주의자가 아니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민족을 사랑하는 것을 나무라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주님의 차원은 민족보다는 훨씬 높습니다. 그는 세계를 보십니다. 모든 인류를 억압하고 있는 죄로부터 해방하고 구원얻게 하는 것이 주님의 더 깊은 관심이었습니다. 2) 셀롯(열심당)의 하는 일과 그 유래. 누가는 셀롯(Zealot) 시몬이라고 하였는데 비해 마태와 마가는 가나안인 시몬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마 10:04; 막 03:18). 셀롯과 가나안인 이 두 용어는 어떠한 의미이며 그 상관관계가 또 무엇인지를 살펴보는 것이 우선 필요할 것 같습니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은 사두개파, 바리새파, 에세네파 등 기존 3대 파에다 또 하나의 강력 단체인 셀롯파가 등장하여 4파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셀롯의 역사적 기원에 대해서는 흔히 말하는 신구약 중간 시대에 해당하는 B. C 167년경 구국운동을 하는 마카비 형제를 중심으로 뭉쳐진 유대인들의 단체에서부터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단체가 조직적인 당으로서 등장한 시기는 가다라 출신 유다(행 05:37)가 A. D 6년 구레뇨 총독의 국세 조사에 저항하기 위해 조직한 과격한 집단에서부터 유래합니다. 헬라적 용어인 셀롯은 열광적, 열심적인 뜻의 아람어 가나안(카나나이오스, Kananaios)에서 유래한 형용사적 용법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까지 가나안을 거의 지명을 나타내는 단어 정도로 오해해 왔지 않습니까? 마태나 마가가 호칭한 가나안인 시몬이라고 할 때 일상적인 생각으로 쉽게 이해하여 가나안 지방 출신의 시몬이라고 가르쳤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셀롯이나 가나안은 정치적인 극단주의 명칭으로 시몬에게 셀롯인 혹 가나안인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것은 이 열심당 출신답게 계속 그들과 연줄이 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 열심당원들은 주로 이스라엘을 무력으로 침략하는 국가들에 대한 주요 요인들을 암살하며, 또 민족의 독립이나 자주성을 방해하는 사람들을 제거하는 일입니다. 이들은 특별히 극단적인 성격을 띠고 있어서 자기 민족이라도 로마에 친숙한 경향을 보이면 과감하게 제거하는 극렬 민족주의 집단인데 흔히 하는 말로 못 말리는 사람들이죠. 정파라가 보다 어떤 면에선 테러 단체라 할 수 있는 이들은 로마에 친근한 경향을 보이는 헤롯 당원들을 주로 표적으로 삼았습니다. 그들은 죽음을 우습게 여겼고, 친척이나 친구를 죽이는 일도 주저하지 않았으며, 목숨이 끊어져도 하나님 외에는 누구도 주님이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여호와 하나님을 유일신으로 섬기되 우상의 요소들은 전혀 용납지를 않았던 것이죠. 만일 이 열심당에 가입하려면 불타는 격정과 적극적 헌신의 결단이 있어야 하며 이러한 결단에 조금이라도 모자라면 가입이 거부됩니다. 왜냐하면 이 단체는 비밀 결사대로서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투쟁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만큼 특별한 성격과, 투철한 헌신과, 격정이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시몬이 이 당파의 일원이라는 사실은 그의 배경과 성격과 기질이 어느 정도인지 다소 짐작이 가지요? 이들 단체에서는 만일 배교자가 나오면 날카로운 검으로 잘라 이스라엘에 근절 시켰고 율법에도 열심이 대단하여 이방인뿐만 아니라 같은 동족끼리도 율법을 훼방하면 역시 율법 수호 차원에서 공격을 가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열심당원들은 십계명 중 제1계명인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는 말씀을 문자적으로 고집함으로서 하나님 한 분 외에는 그 어떤 신도 섬길 수 없고 그 어떤 외래인도 이스라엘을 통치할 수 없는 겁니다. 특히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납부하는 일은 로마의 통치를 승인하는 일이 되며 그것은 곧 하나님께 대한 배신과 우상숭배로 여겼습니다.그렇기 때문에 열심당원들은 이교도들과 유대 범법자들 그리고 세리들을 처단하는 일에는 폭력과 무력을 과감하게 사용하였던 겁니다. 3)생애 사도로 부름을 받은 제자들 다수가 한 삼년 동안에 제각기 주님과 나눈 유명한 대화들이 복음서에 소개되는데 셀롯인 시몬에 대해서만은 그러한 공적 기록이 전혀 없습니다. 출신 성분으로 보아 하다못해 제자들끼리 다투었다는 기록이라도 나올 법 한데 전혀 그러한 내용들이 보이지를 않고 오히려 야고보와 요한, 가룟, 유다 등이 제각기 시기하고 다투었다는 말은 몇 차례 나옵니다. 그래서 전혀 성경에 등장 않고 있음을 놓고 설교자들이나 성경학자들이 시몬에 대하여 연구하며 별명 붙이기를, 성경에 한 번도 안 나타나는 제자라고도 이야기 합니다. 열심당 출신이라 했으니 다른 제자들과의 관계에서 충분히 격한 감정으로 다투었을 법도 하잖습니까? 그런데도 침묵으로 일관하는 걸 보니 그는 입이 대단히 무거운 사람인 것 같기도 합니다. 정말 그러한 것일까요? 비록 성경은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지만 시몬이 어느 부분에서 한 번쯤은 행한 말이 혹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에서 그의 행한 일들이 있는지를 한 번 추적해 보겠습니다. 복음서 외에 제자들의 행적이라면 아무래도 사도행전 아닙니까? 사도행전에서 특히 1장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1장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기 전까지의 예수님의 행적에 대한 기록이기 때문입니다. 누가는 제자들의 행적에 대하여 이름을 소상히 밝히고 있는데 유독 행 1: 6절에서는 예수님께 이스라엘의 독립에 관한 질문을 한 제자 이름을 무명으로 처리하고 있습니다. 누구인지 무척 궁금하기만 하죠. 일단 여기에서 우선 제자들의 전직과 심리상태부터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제자들 가운데 비공식적이지만 열심당 출신이 무려 4명이나 됩니다. 작은 야고보, 유다 다대오, 시몬, 가룟 유다 등 이들은 자기들이 못 다 이룬 민족 해방의 꿈을 주님께서 이루어 주실 줄 믿고 제자단에 가입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인해 정치적인 메시야 왕국의 꿈을 접어야만 했으니 이때 자신들의 심정이 얼마나 허탈하였겠습니까? 이에 실망한 제자들은 무너진 허탈감으로 인해 옛 직업을 따라 흩어졌으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이후에는 다시 예루살렘으로 모였습니다. 신앙의 전열을 가다듬으면서 이제는 주님께서 정치적인 메시야로서 곧 이스라엘을 해방하는 극적인 선포식을 하시겠지 하며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는데 드디어 주님께서 말씀을 하십니다. 행 1:4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그러자 제자 중의 하나가 4절의 말씀을 듣고 이렇게 질문을 합니다. 행 1:6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 하니. 우리는 이쯤에서 사도행전에 기록된 제자들의 명단을 다시 한 번 확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행 1:13). 지금 마가의 다락방에 다른 제자들은 몰라도 열심당 출신인 시몬이 참여하고 있다는 것은 상당히 의외의 일로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이미 세상적인 모든 꿈이 깨어진 이상 다시 옛 열심당원의 생활로 돌아가서 조국의 독립을 위한 노력을 하고 있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시몬이 이 자리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남으로 옛 꿈을 다시 실현하기 위한 기회로 알고 참여한 것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행 1:4절의 주님의 말씀에 대한 6절의 무명의 질문자는 아무래도 출신 성분과 성격상 시몬 외에 다른 사람이 더 있겠습니까? 만일 시몬 외에 다른 사람이 이러한 질문을 하였더라면 사도행전의 누가가 굳이 무명으로 처리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즉 6절의 질문자가 시몬이기에 아무래도 생각이 깊은 누가는 열심당 출신 시몬의 활동과 혹 있을 지도 모르는 앞날의 신변 보호를 위해 일부러 무명 처리를 한 것 같습니다. 그 간접적인 근거로는 사도행전을 받는 수신자가 데오빌로라는 로마에서도 유력한 신분을 지닌 인사 아닙니까?(눅 1:3; 행 1:1). 그러니까 이 사도행전이 이방인 데오빌로에게 보내어졌는데 만일 신앙인이 아닌 로마인에게 읽혀진다면 셀롯인 시몬의 신변에 아무래도 위협이 따를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누가가 무명으로 처리한 것 같은 뉘앙스를 받게 됩니다. 4) 예수님을 만난 이후 시몬의 생애. 셀롯인 시몬, 가나안인 시몬 그가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해 성경은 일절 침묵하고 있기에 알 도리가 없습니다. 다만 주후 1세기 이후에 있었던 열 두 제자들의 행적이 전해지는 문서에 의하면 아주 재미있는 사실이 하나 있는데 시몬을 묘사할 때 물고기의 그림을 그려 놓은 것입니다. 제자들마다 특성을 따른 그림들이 있었는데 특별히 가나안인 시몬에 대해서는 성경 위에 물고기를 그려 놓고 그 옆에 시몬이 서 있는 그림으로 묘사를 합니다. 물고기란 초대교회의 시절 그리스도인의 신분을 가리킬 때 표현하는 방법 아닙니까? 즉 오순절 성령님 강림 사건 이후 어떤 제자보다도 이 시몬이 복음 전하는 일에 그의 생애를 열정적으로 바쳤다는 증거를 이 그림에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복음을 전하는 일을 묘사할 때에 이 물고기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경우를 볼 수 있으며 자동차에도 이 물고기(ἰχθύς. Ἰησοῦς Χριστὸς Θεοῦ Υἱὸς Σωτήρ)를 붙이고 다닙니다. 셀롯인 시몬, 그가 주님의 부름을 받기 전에는 자신의 열정으로 이스라엘이 독립되기를 원했던 사람이었지만 오순절날 성령강림 사건 이후부터 세상을 살아가는 관점이 완전히 달라지고 말았습니다. 은혜를 받으니 달라지더라 이 말이죠. 자신이 꿈꾸며 쟁취하려던 이스라엘의 독립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일 즉 영혼 구원을 위한 생각을 가슴에 품은 것입니다. 자신의 가슴에 품은 뜻보다는 주님께서 자신을 통하여 계획하시는 일을 이루어 나가는 것이야말로 주님의 가장 기뻐하시는 뜻임을 알고 삶의 축을 주님의 나라로 옮기게 된 것입니다. 세상을 복음의 눈으로 바라보니 이전에 알지 못했던 사랑의 마음도 싹이 트기 시작하였는데 그 예를 제자 중 마태와 관계에서 알 수 있습니다. 세리 마태와 셀롯 시몬, 이들 두 사람이 공존할 수 있는 관계입니까? 아니잖아요? 마태는 세리로서 로마제국에 팔린 사람이고 시몬은 로마를 증오한 사람이며, 시몬은 열렬한 애국자임에 비해 마태는 로마주의의 매국노 아닙니까? 이 둘은 서로 다른 여건에서 만났기 때문에 분명히 마태는 시몬이 속해 있는 셀롯인들의 암살대상자 명단 즉 블랙리스트 상위에 자리 잡은 사람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 건설을 위하여 이 두 사람은 자신들의 개인적인 문제를 다 내려놓고 주님의 사랑 안에서 뜻을 모았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깊은 불화를 치유할 능력을 가졌으며 시몬과 마태의 회복된 관계를 통해서 그 복음의 화해능력이 증명되었습니다. 셀롯 시몬 이 사람이 한 때는 민족에 대한 대단한 열정이 끓어오르는 삶을 살았지만 예수님을 영적인 메시아로서 체험하고 난 이후에는 그 끓어오르는 열정을 복음에 바치며 살았습니다. 초대 교회 문서들을 보면 열 두 제자 가운데 시몬은 가장 열심히 주님을 전했던 제자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처음에 시몬은 민족에 대한 열심을 지녔던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만나 변화받고 오순절 성령 사건 이후에 그는 복음 전하는 일에 자신의 생애를 바쳤습니다. 계속 전해오는 문서에 의하면 시몬은 소아시아에서 전도를 하였고, 그 후에 북아프리카의 이집트에서 전도를 많이 하였고, 그 다음에는 흑해 지역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였고, 나중에는 영국의 런던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였다고 합니다. 역사상 지난 세기에 세계로 복음이 전파되는 일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던 나라가 어느 나라입니까? 영국이죠. 바로 이 영국인의 가슴에 복음의 불을 붙였던 자가 시몬입니다. 영국은 세계로 복음이 전파되는 일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던 나라입니다. 시몬의 가슴에 붙었던 불이 영국인의 가슴에 붙음으로 복음이 세계로 증거되게 되었었습니다. 그는 다시 페르시아 수아닐로 옮겨 복음을 전하다가 폭도들에게 붙잡혀 톱으로 켜서 죽음을 당했다고 합니다. 셀롯인이나 혹 가나안인이라는 이 단어 속에서 조국의 독립을 열심히 부르짖었던 열광적인 시몬의 모습이 떠오릅니까? 이스라엘 민족의 전통과 종교를 강력히 지지하던 국수주의적(國粹主義的) 정치 단체인 셀롯 당 소속의 시몬, 그는 자기의 개인적 야망을 하나님의 뜻 앞에 복종시키는 훈련을 하면서 주님의 뜻을 자기의 뜻으로 바꾸어 살아간 인물입니다. 우리에게도 시몬과 같은 이러한 변화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주님은 열심당 시몬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라. 그리고 제자를 삼으라고, 그리고 생각이 다르고 이데올로기가 다르다 할지라도 사랑하라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삶을 따르는 자이기에 그렇게 복음의 삶을 살아야만 합니다. 시몬을 포함해서 열 두 제자 모두는 죽었지만 그들의 삶의 결과는 오늘의 우리에게 살아 숨을 쉬고 있습니다. 그들 때문에 내가 신앙을 받고 감사하면서 세상에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전한 복음 때문에 세상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이 제자들을 통해 주께서 내게 주신 교훈들을 정리하면서 하나님이 당신에게 오늘 요구하시는 헌신이 무엇인가를 주님 앞에서 대답하도록 합시다. “주님! 나도 내 몫을 다하고 삶을 끝마치는 내가 될 수 있도록 도와 주옵소서.” 14.01.15 열두제자강해 12 나다나엘(바돌로매) 식도성결교회 제목 : 주님을 만난 나다나엘 본문 : 요 1:43-51 갈릴리 지역은 예수님께서 많은 애정을 가지고 복음 사역을 하시던 주요 무대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나사렛이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시고 ‘나를 좇으라.’고 하시니 그 때부터 빌립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갈릴리 지역 출신 제자로는 베드로, 안드레, 요한, 야고보, 빌립 등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남북 왕조시대에 북 이스라엘은 앗수르에게 멸망을 당하고, 그곳 사람들은 모두 앗수르 땅으로 끌려가고, 앗수르의 다른 지방에 있는 사람들이 북 이스라엘에 와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이방인들이었으므로, 남 유다 사람들은 그들이 비록 가나안 땅에 살게 되었지만, 이방인으로 취급을 하고 상종도 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그들이 살고 있는 사마리아 땅에는 발도 디디지 않았습니다. 당시 갈릴리는 주로 사회적인 하층민이 거주하던 곳인데, 주로 어업이나 목축업을 하고 살았으며, 다행히 그곳에는 국제적인 교역로가 있어서 그곳을 관리하여 통행세를 거두어들이는 것으로 주요 수입원으로 삼았습니다. 헤롯 왕 때에는 주민들에게서 많은 세금을 거두어 목욕탕, 체육관, 경기장과 같은 것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갈릴리는 이방인의 영향을 많이 받은 곳이므로 순수한 유대인들에게 경멸과 조롱의 대상이 되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소외받는 대상이 많이 거주했던 이곳에서 주로 사역을 하셨습니다. 사마리아 위쪽에 있는 지방으로 가기 위해서는 요단강을 건너서 갈릴리 지역으로 돌아다니기까지 하였는데, 예수님 당시에도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주님께서는 고향으로 가시기 위하여 요단강 건너편 길을 택하신 것으로 보고 있고, 이때에 빌립을 만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빌립을 만나 제자로 삼았는데, 빌립은 자신을 찾아주시고 제자로 삼아주신 예수님을 좇기로 결정을 하고, 곧 바로 그 비밀을 다른 사람과 나누고자 하였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나다나엘입니다. 1.무화과 나무 아래 있던 제자 갈릴리 지방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무화과 나무가 일종의 개인적인 휴식처였습니다. 이스라엘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무화과 나무는 유대 민족의 번영을 상징하는 표현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왕상 4:25). 그리고 무화과 나무가 만드는 그늘은 유대인들에게 좋은 휴식처나 공부할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하기도 하였습니다. 무화과 나무는 약 4m의 높이로 자라고 가지는 사방으로 7m를 덮습니다. 대부분의 집들은 방을 하나만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조용하게 있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무화과 나무 그늘에서 개인적인 시간을 보냈던 것 같습니다. 나다나엘도 그 나무 아래에서 율법을 공부하며 메시아의 오심을 기대하면서 기도와 명상에 잠겨 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나다나엘이 무화과 나무에 있을 때 보았다는 말씀은 그를 어느 시점에 잠깐 보았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이러한 삶의 자세와 신앙의 모습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다나엘에게 “네가 무화과 나무 아래 있을 때 보았노라.”고 하신 것이 나다나엘이 어쩌다 한번 무화과 나무 밑에서 기도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셨을까요? 무화과나무 그늘은 경건한 유대인들이 고요히 묵상하며 기도하는 장소였습니다. 그는 고요한 가운데 늘 기도에 힘쓰며 메시아의 도래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이는 당시 회당과 큰 길 어귀에 서서 나 보란 듯 기도했던 바리새인들(마 6:5)과는 크게 대조되는 모습입니다. 바리새인과 나다나엘 어떤 모습이 진실하고 올바른 모습입니까? 하나님께서 어떤 모습을 진실한 행동으로 받으실까요? 이제 고요한 가운데 겸손하게 무릎 꿇고 은밀히 기도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뿐만 아니라 선을 행하든 봉사를 하든 은밀한 가운데 하는 여러분이 될 때에(마 6:4, 6, 18)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는 것이요, 스스로에게도 더 큰 기쁨이 될 줄로 믿습니다. 2.이름의 뜻(Batholomew // Nathanael) 1)바돌로매 - 그는 왕족의 이름을 따서 지었으나 실제로는 귀한 신분은 아니었습니다. 이는 ‘돌로매의 아들’이란 뜻입니다. 마10:2-4에 보면 ‘바돌로매’라는 이름이 나옵니다. 2)나다나엘 - “하나님의 선물”을 의미하는데 다른 제자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예수께서 지어 주셨을 것입니다. 공관복음(마태, 마가, 누가)에는 ‘나다나엘’에 대한 기사가 없고, 요한복음에는 ‘바돌로매’에 대한 내용이 없습니다. 히브리어에서 ‘바’가 앞에 붙으면 그 뒤에 이름의 아들이라는 뜻이 됩니다. 마 16:17에서 “바요나 시몬”이라고 할 때에 ‘요나의 아들 시몬’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바돌로매’는 돌로매의 아들‘이라는 뜻이 됩니다. 따라서 바돌로매는 정식 이름이 아니고 ’나다나엘‘이 정식 이름이라고 추정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3)바돌로매와 나다나엘을 동일 인물로 생각하는 이유: 마태, 누가, 마가와 사도행전은 모두 바돌로매를 열 두명의 사도 가운데 여섯번째, 또는 일곱번째로 들고 있으나 나다나엘이라고 부르지는 않았습니다(마10:3/막3:18/눅6:14/행1:13). 요한복음은 바돌로매라고 쓰지 않았지만 나다나엘을 사도 가운데 하나로 포함시키고 있으며(요1:45-51) 갈릴리의 가나 지방에서 온 어부의 한사람으로서 사도가 되었다고 하였습니다.(요21: 2). 바돌로매와 나다나엘이 모두 열 두 사도 가운데 들어 있다면 동일한 인물로 지칭되어야 합니다. 나다나엘(바돌로매)과 빌립의 관계가 매우 가까운데 문제의 초점이 있습니다. 앞에서 말한 사도들의 명단을 보면 세 군데에서 항상 바돌로매는 빌립과 짝을 짓고 있습니다. 요한은 나다나엘(바돌로매)과 빌립은 친구였으며 빌립이 나다나엘을 예수께 데리고 갔다고 합니다. 2.나다나엘은 성경을 상고했습니다. 1)나다나엘은 묵상을 즐겼습니다. 무화과 나무 밑에 있는 나다나엘을 보신 예수께서는 “너 혼자 조용한 곳에서 공부하고 기도하며 묵상하는 것을 보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친구들은 그가 배에 없으면 정원의 무화과 나무 아래서 그를 찾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이 신앙깊은 사람임을 알고 계셨습니다. 죄를 짓지 않는 정직한 마음은 무화과 나무 밑에서 늘 묵상하는 나다나엘의 습관에서 생긴 것입니다. 이처럼 조용하게 묵상함으로써 나다나엘의 영은 새로와지고 그 성품은 강건해졌습니다. (예)우리는 시끄러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십대의 아이들은 귀가 아프게 스마트폰과 MP3 음악을 들으며 어른들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텔리비젼을 켭니다. 우리는 또 매우 바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나다나엘 시대의 말로 표현한다면 우리에게는 무화과 나무가 절실히 필요한지도 모릅니다. 누구든지 때론 조용하게 생각하고 기도할 장소를 가져야 합니다. 이삭은 한밤중에 들로 나갔습니다. 엘리야는 동굴 속에서 하나님과 친했습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 『고백록』을 보면 「어거스틴은 오랜 시간동안 하나님을 피하여 살다가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바 된 후 은밀한 곳을 추구했습니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는 그 과정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나는 어느 무화과 나무 밑에 던져졌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른다. 홍수와 같이 눈물이 흘러 나왔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크게 회개했다.” 2)나다나엘은 기도하며 성경을 연구했습니다. 무화과 나무 그늘은 나다나엘이 기도하는 장소였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힘인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하도록 해주며 하나님의 능력은 절망적인 세상을 구원해 주신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줍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이용하는데 실패하고 있습니다. 철저하고 규모있는 기도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기도의 제목과 방해받지 않고 기도할 수 있는 은밀한 곳이 필요합니다. 어떤 사람은 빈방을 기도장소로 마련하기도 하고 어떤 가족은 기도실의 벽을 막아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도록 만들기도 합니다. 나다나엘은 묵상하고 기도하는 열성 이상으로 성경을 연구했습니다. 그는 메시야의 약속을 찾으려고 구약을 공부했습니다. 빌립이 예수님을 만난 뒤에 나다나엘을 찾아가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고 말했습니다.(요 1:45). 빌립의 말은 메시야를 찾기 위하여 많은 시간을 들여서 율법과 선지자를 연구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빌립이 나다나엘 집으로 찾아갔을 때 그는 무화과 나무 밑에서 구약성경을 펴들고 메시야의 강림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나다나엘은 성경을 보면서 그리스도를 찾았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 즉석에서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2.나다나엘은 회의론자였습니다. 메시야를 만난 사실을 열심으로 설명하는 빌립에게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요 1:46) 나다나엘은 편견을 가지고 있다가 그리스도를 믿었으며, 회의론을 품고 있다가 확신을 가진 성실한 사람의 표본이라 하겠습니다. 마10:2-4절을 보면 바돌로매는 빌립과 연관하여 기록되고 있으며, 마 10:3; 막 3:18, 눅 6:14을 보면 베드로, 야고보의 형제와 더불어 예수님의 처음 여섯 제자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빌립은 자신이 주님으로 섬기며 따르기로 한 분은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라고 나다나엘에게 소개를 하였습니다. 이때에 나다나엘의 처음 반응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는 반문이었습니다. 성경을 공부하면서 나다나엘은 나사렛으로부터 구세주가 나실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습니다. 왕의 옷을 입은 위대한 정복자가 수도인 예루살렘으로부터 올까? 혹은 미가가 메시야의 출생지로 예언했던 베들레헴으로부터 정복자가 올까? 나다나엘이나 다른 제자들이 예수에 대한 나사렛의 배경을 이해한 것은 부활과 다락방에 대한 구약의 예언을 알고난 후의 일일 것입니다(마 2:23/눅24:44-48) 나다나엘은 회의를 품으면서도 정직했습니다. 나다나엘은 성경을 공부하면서도 나사렛으로 부터 메시야가 오실 것이라는 티끌만한 암시도 받지 못하였습니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성경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갖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에 대하여 편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성경을 바르게 읽지도 못할 뿐 아니라 바르게 해석하지도 못하고 오로지 자신들의 정당화를 위해 성경을 끌어와서 해석을 하곤 했습니다. 정직한 회의론은 빛과 진리에 이르는 길을 활짝 열어 놓습니다. 나다나엘의 결심이 있은 지 2년이 지난 뒤에 예수님의 적들은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상고해 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요7:52)고 했습니다. 이들의 편견은 백성들에게 예수님의 인격과 위엄을 가리우고 예수님을 부인하도록 유도했습니다. 그러나 한편 나다나엘의 정직한 회의론은 더욱 상고하여 빛을 찾는 길을 열어 놓았습니다. 그의 개방성은 그의 성실한 정직한 마음은 가서 직접 보기를 원했던 것이었습니다. 3.나다나엘의 큰 발견 두 사람은 빌립이 예수와 헤어진 그 장소로 갔습니다. 빌립은 속에서 안달이 났고 나다나엘은 좀 흥분했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요한복음은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요 1:47)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다나엘의 모습은 이 말씀에서 적나라하게 들어나고 있습니다. 1)나다나엘은 참 이스라엘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에는 두 가지의 씨가 있으니 하나는 육신의 자녀이며 다른 하나는 언약의 자녀들인 하나님의 자녀라고 바울은 가르쳤습니다(롬 9:6-8). 육신의 씨들은 아브라함을 믿고 행하며 그리스도에 앞서 메시야의 임하심을 간절히 고대하던 조상들과 같은 영적 신앙을 갖지 못했습니다. 예수께서는 나다나엘은 영적인 씨에 속하도록 하셨습니다.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한 것은 육신을 가리킬 뿐아니라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진실하게 믿는 사람이 되어 하나님과 영적으로 함께 살기를 하나님이 원하신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2)나다나엘 속에는 간사함이 없었습니다. 다른 이스라엘 사람들과는 달리 나다나엘은 교활하거나 속이는 피를 이어받지 않았습니다. 위선도 없고 간사함도 없기 때문에 성격은 맑은 물처럼 투명했습니다. 그는 어떤 말에 대하여 심리적으로 분석하지도 않고 숨겨진 동기를 찾으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의 천진난만한 성격은 사람들이 자기를 이용하고 속이는 것까지도 용인했습니다. 그렇지만 하늘나라로 들어가는 그의 행운은 이루 말할수 없는 귀한 보석(예수)으로 인도해 주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교활함과 위선에 진노하고 꾸짖은 예수께서는 나다나엘의 성격을 속이지 않고 숨겨진 동기가 없다고 칭찬하셨습니다. 나다나엘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 질문을 하는 도중에 그의 의문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당황하면서도 나다나엘은 솔직하게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라고 질문했습니다(요1:48)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 나무 아래 있을 때 보았노라”(1:48)하시는 메시야의 시원한 대답이 의문을 풀어 주었을 것입니다. 확신을 가진 나다나엘은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왕이로소이다”(요1:49)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베드로나 도마의 경우만큼 의미심장하지 않을런지는 모르지만 이것은 훌륭한 신앙고백이었습니다(마 16:16/요20:28) 빌립은 나다나엘의 반응을 보고 할 말이 없었을 것입니다. 어떻게 설명할 수 없어서 단 한 마디를 했던 것이었습니다. “와 보라” 그런데 뜻밖에 나다나엘은 이 말에 끌려 예수님께로 갔던 것이고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을 보시고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단 한 마디도 나누어 보지 않은 상황에서 주님께서는 나다나엘의 성품에 대하여 꿰뚫어 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 중에는 그 이름에 걸맞는 진실된 사람이 없고 외식적인 모습만이 가득했다고 마태복음 23장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때에 나다나엘은 진실한 사람으로 간사함이 없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물론 간사함이 없다고 하여 절대로 흠이 없다거나 죄가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이 죄인임을 철저하게 인정하며 참회하는 마음으로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그였던 것입니다. 나다나엘은 주님께서 자신을 평가하는 말씀을 듣고는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라고 질문을 합니다.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습니다. 혹시나 자신에 대하여 누가 말하지나 않았는가 알고 싶어 하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네가 무화과 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다나엘은 자신의 마음을 샅샅이 꿰뚫어 보고 계신 예수님의 권위에 완전히 압도를 당하여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나다나엘에게 더 크고 놀라운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즉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야곱이 벧엘에서 꾸었던 꿈을 연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창 28:10-22). 주님께서는 나다나엘로 하여금 쫓기어 도망가는 야곱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신 사건을 연상시키면서 나다나엘과 제자들도 역시 하나님의 크신 역사를 목격하게 될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4. 나다나엘은 완전히 깨달았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예수께서 기적을 이루시며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주시고 은혜가 넘치는 말씀을 하시는 것을 직접 보고 들었습니다. 기적이 성취되면 뒤이어 또 기적이 성취되었습니다. 귀머거리는 소리를 듣고, 소경은 눈을 뜨며, 벙어리는 말을 하고, 문둥병자는 깨끗해지고 큰 무리가 먹으며, 폭풍은 잠자고, 죽은 자는 살아났다. 때로는 어리둥절했으나 자신이 걷고 있으며 하나님의 아들 앞에서 먹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었습니다. 배신의 밤이 오자 예수님은 체포되어 고난을 받으시다가 마침내는 십자가 처형을 당하셨습니다. 이 때부터 부활이 있기까지 다른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믿음은 완전히 죽어있는 듯했습니다. 죽음에서 살아나신 예수님의 부활의 기적은 이들의 마음에 깊은 감동을 주어 이 세상 끝까지 하나님의 멧세지를 전파할 결심을 하는 새로운 삶을 재촉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땅과 하늘을 연결하는 사닥다리며 이 사닥다리는 죄지은 사람이 거룩하신 하나님과 화목하게 지내도록 해준다는 것을 나다나엘은 깨닫게 되었습니다. 5. 생애 후에 나다나엘은 브리기아, 헤라홀리스, 알메니아와 인도 등지에서 복음을 전파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한 전설에 의하면 그는 우상숭배가 심한 아르메니아 지방에서 16년간 전도하다가 곤봉으로 맞고 살갗을 벗기우고 십자가에서 머리를 떨구고 죽은 후시체는 자루에 넣고 묶이어서 바다에 던져졌다고 합니다. 그후 그의 시신은 이탈리아 베네벤툼으로 옮겨졌고 후에 타이버 섬에서 그의 기념성전을 짓고 모셨다고 합니다. 나다나엘의 사도로서의 상징은 더러는 무화과 나무이기도 하지만 칼로 살갗을 벗기웠기 때문에 그의 상징은 항상 “세 자루의 칼”이었습니다. 이란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그가 히브리어로 마태복음을 기록하였다고 합니다. 또 바돌로매 복음을 기록하여 많은 감화를 주었다고 합니다. 나다나엘의 교훈 1. 마음을 열자. 예수님이 그를 귀하게 여기신 것은 그가 마음을 열었다는 사실입니다. 전도할 때에도 아예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 힘듭니다. 그러나 부정적으로 말하는 사람은 마음이 열렸다는 사실에서 귀한 대화의 시작이라고 보겠습니다. 자기의 약점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문제를 치료할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그리고 지도를 부탁하는 것은 자기의 약점을 개선하여 보다 나은 단계로 발 돋움하기 위한 준비입니다. 자기의 약점을 끝까지 숨기고 드러내지 않으려는 사람은 가증된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의 굳게 잠긴 성문을 열고 성도의 교제를 나누어야 합니다. 기도함으로 과거에 깨닫지 못하던 자기의 죄를 생각나게 하고, 제단 앞에 자기의 문제를 가져다 놓을 때에 비로소 하나님은 치료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 속에 더러운 것이 많습니다. 이제부터 우리의 마음을 여십시다. 그리고 성령의 도우심과 치료를 구하십시다. 그때부터 교정은 시작됩니다. 2.진리를 탐구하고 수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나다나엘은 열심히 성경을 읽고 있었습니다. 교회에 오래 다닌 분 가운데 어떤 말씀의 주제가 나오면 ‘나는 배울 것이 없습니다. 이미 다 아는 사실입니다.’라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진리는 무궁무진합니다. 반복되는 것은 있지만 더 깊이 나를 일깨워 줍니다. 열린 마음은 가진 사람에게 진리는 영광스럽게 다가오는 법입니다. 교회에는 안 다니지만 전에 기독교 학교에 다녔던 사람들에게 전도해 본적이 있었는데 ‘네 이미 잘 압니다. 제가 학교 다닐 때 성경에 대해서는 이미 끝냈습니다.’라고 말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진리를 탐구하고 수용하는 자세는 매우 중요합니다. 3.깨달은 후에는 그것을 고백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경은 고백에 대한 중요성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나다나엘도 예수님께 대하여 주님으로 고백하였습니다. 자신의 입술로 고백하게 되었을 때 달라집니다. 심리학자들은 사람이 무엇을 시인하는 힘이 얼마나 강한 것인지를 말합니다. 마음에 없는 말은 못 한다고 하지만 말을 하면 마음이 따라 올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바돌로매와 같은 또 하나의 제자를 원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성격이 다른 여러 제자를 쓰셨습니다. 우리는 다 똑 같을 수는 없습니다. 당신이 가진 약점과 인간적인 부족함이나 모순과 불합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당신에게 관심이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약점과 장점을 모두 사용하시어 일하시려 하십니다. 예수님을 만난 빌립은 나다나엘을 예수님께로 인도하였습니다. 이는 곧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복음을 받아들인 제자들의 이웃에게 복음을 증거한 전도자의 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따를 대상이요 구주로 믿어야 할 분일 뿐 아니라 이웃에게 증거해야 할 대상입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라고 여기면서도 막상 주위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증거하지 않으면 결코 올바른 태도는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의 최대 명령인 복음 전파의 사명(마 28:19,20)를 저버리는 것이며, 혼자서만 구원을 얻는 것으로 만족하는 이기적인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나다나엘을 통하여 우리가 배울 것은 무엇입니까? 빌립의 전도를 받고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라고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예수님을 직접 만난 후에는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는 고백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나다나엘에게는 예수님께서 단순한 스승으로서의 권위가 아니라 신적인 권위와 위엄을 보이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 대한 성도들의 신앙은 입술의 고백을 통하여 나타나야 할 뿐만 아니라 실천적인 삶을 통해서도 입증되어야 합니다. |
출처: hi-샬롬 원문보기 글쓴이: 비니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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