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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인물로 본 한국교회사

에반젤(복음) 2021. 8. 21. 06:32

인물로 본 한국교회사

1.한국의 바울 김창식 목사

김승태(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연구위원)

"나는 우리 주 예수의 종이 된 은혜를 생각하면 하나님께 감사할 것 밖에 없다. ... 여러 곳으로 파송 받아 다니는 중에 이사한 수가 열번이나 되고 교회 없는 곳에 들어가 새로 설립한 교회가 48처요, 여러 교회로 돌아다니며 설교한 수가 125차요, 다른 교파에 속한 교회에 손님으로 가서 설교한 수가 45차인데 설교한 수를 총합하면 170차에 달한다. 그러므로 나는 우리 조선 안에 감리교회가 있는 곳은 아니 가본 곳이 별로 없게 되었다. 내가 30년 동안 교회에 몸바쳐 일하는 가운데 하루라도 병나본 적이 없고 한 주일도 빠지지 않고 참례하게 된 것은 참으로 하나님께 감사드릴 일이다."

 

한국 최초로 목사 안수를 받은 사람 중의 한 분인 김창식 목사가 말년에 그의 교역 생활을 회고하면서 한 고백이다. 그는 1901년 5월 14일 김기범과 함께 서울의 상동교회에서 모인 선교사 연환회(제17회 미감리회 조선연회)에서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들은 일찍이 복음을 받아들인 후 선교사들을 도와 조사로, 전도인으로 여러 해 수고하였으며, 그러던 중에 선교사들의 인정을 받아 4년간 선교사들로부터 신학교육을 받고, 이 연회에서 집사 목사 안수를 받았던 것이다. 1901년 5월호 {신학월보}는 이 사실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감목(D. H. Moore감독)께서는 몇 사람에게 거룩한 집사(deacon) 품(品)을 주실 새 먼저 권면하는 말씀과 경계하는 말을 하시고 시라돈(W. B. Scranton)씨와 조원시(G. H. Jeon)씨와 노블(W. A. Noble)씨가 감목과 같이 성단 위에 서서 강례를 차례로 보시고 기도하고 성품(聖品)받을 사람에게 물어보고 감목께서 김창식 김기범 양씨와 팔월(E. D. Follwell)씨 의원(醫員)에게 거룩한 품(品)을 주시고 기도하였으며, 맥길(W. B. McGill)씨 의원에게 장로 품을 주실새 또한 예문을 읽고 기도한 후에 여러 목사와 감목이 그 머리 위에 손을 안찰하시고 예를 행한 후에 또 기도하였으며, 또 묵시록 7장을 보시고 감목이 연설하여 가로되 직분을 받은 자는 반드시 윗사람의 말을 순종할지니라."

 

여기서 집사 목사와 장로 목사는 당시 감리교 장정에 의한 목사 직분의 구분이다. 즉 "장정 규칙을 본즉 목사의 성품(聖品)이두 가지 있나니 정품과 종품이니 정품은 장로(長老)라 하며 종품은 집사(執事)라 하니 집사 품 가진 사람이 교례(敎禮)를 다 행할 것이로되 성만찬만 행치 못하며 오직 장로가 성만찬 예행할 때에 도와줄 따름이나라."라고 하였던 것이다. 아무튼 이들은 비록 성만찬은 집례할 수 없다는 제한이 있기는 하였지만, 그밖에 설교는 물론 세례와 혼례 등 모든 교회의 예식을 집행할 수 있는 집사 목사직에 임명되었던 것이다.

 

김창식 목사는 1857년 황해도 수안군 성동면 생금리 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그는 여느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11살때부터 16살 때까지 서당에서 한문을 공부하였고, 21살 때까지는 고향에서 농사를 지었다. 그러나 21살이 되던 해에 집을 나와 서울로 올라왔고, 그 후 8년간 돈을 벌어 가며 전국을 방랑하다가 29살 때에야 박노덕양과 결혼하였다. 결혼한 후 얼마 안되어 서양 선교사를 처음으로 만나 보았다. 그는 처음에는 외모와 풍문만 듣고 선교사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1888년 '영아소동'이 일어나 선교사가 아이들을 유괴하게 하여 잡아먹는다는 허황된 소문이 퍼져 서울의 공기가 험악해 지자 그는 이것이 사실인지 확인해 보고 싶었다. 그는 친지 이무영의 소개로 미국 감리교 선교사 올링거(F. Ohlinger) 집에 사환으로 들어가 5년동안 일했다.

 

그는 선교사 집에서 일하는 동안 주인 내외의 생활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으나 아무런 불의한 행동을 발견할 수 없었다. 오히려 그들이 본받을 만한 사람임을 깨닫고 감화를 받아 그들이 믿고 전하는 예수를 믿기로 작정하였다. 그러자 올링거 목사는 그에게 마태복음을 주며 5장부터 읽으라고 권하였다. 산상설교부터 읽기를 권하였던 것이다. 그것을 열심히 공부하고나자 올링거 목사 내외는 또 성경초등문답이라는 책을 주고 저녁마다 기독교에 대하여 이야기해 주었다. 김창식은 사복음서를 거의 외우다시피 숙독하고, 아펜젤러 등 다른 선교사들로부터도 가르침을 받았다. 그가 35세가 되던 해에 올링거 목사가 귀국하자 그는 평양의 개척 선교사로 임명된 감리교 의료선교사 홀(W. J. Hall)을 도와 일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893년 가족을 모두 데리고 평양으로 이주하여 홀의사를 도우면서 전도에 힘썼다.

 

그는 그의 "책임이 중대함을 깨닫고 모든 일을 복음이 가르친대로 행하기를 결심하고 또 평양의 여러 가지 악풍을 개선하여 그리스도의 교훈을 널리 전파하기로 뜻을 굳게 세웠다." 그러던 중 평양기독교인 박해 사건을 만나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하였다. 1984년 5월 그가 받은 박해에 대해서 홀 선교사는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그러한 극심한 고문으로 시달리고 있는,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우리의 형제들을 목격했을 때, 나의 마음은 고통스러웠다. 외아문으로 부터 두 장의 전문이 목요일밤 이후 보내졌으나, 금요일 오후5시인데 아직 풀려나지 않았다.

 

여러 차례 죽음으로 위협받으며, 감옥에서의 36시간을 보낸 후, 6시에 모두 관찰사에 의해 끌려나와 맞고 풀려났으나, 집으로 오는 도중 내내 돌 팔매질을 당했다. 창식이는 너무 심하게 부상당하여 집으로 오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나는 그의 발 앞에 앉고 싶었다. : 그렇게 예수를 위해서 실신한 순교자를 나는 결코 전에 본 적이 없다."(Rosetta S. Hall, The Life of Rev. William J. Hall, 1897, 276쪽)

 

그는 그 해에 일어난 청일전쟁 중에도 다른 사람들은 다 피난을 갔지만 평양에 남아 뭇사람의 영혼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기에 힘썼다. 앞에서 인용한 그의 말년의 고백은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가를 잘 이야기해 준다. 그는 1924년에 교역의 일선에서 물러나 의사가 된 외아들 김영진의 보살핌을 받다가 72세를 일기로 1929년 1월 9일 소천하였다.

 

 

 

 

 

2.독립운동가에서 친일파로 별절한 정인과 목사

 

정인과 목사의 본적지는 서울로 되어 있지만 평남 순천에서 1888년에 태어나서 평양 숭실중학교를 거쳐 숭실전문학교를 1911년에 졸업하였다. 그후 잠시 숭실중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1913년 8월 사임하고 미국에 건너가 유학하였다. 그는 미국에서 신학을 공부하여 1919년 산․엔셀모신학교를 졸업하였다.

 

1919년 그가 미국에 있을 때에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나고 그해 4월 상해에 임시정부가 조직되었다. 3․1운동의 소식이 전해지자 미주의 교포 단체인 국민회는 "원동에 대표를 파송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에 봉사"하게 한다는 결의를 하고 이에 따라 국민회 북미 지방총회에서 안창호를 특파원으로 파송하고 정인과․황진남이 그를 수행하게 되었다. 이들은 1919년 4월 5일 미국을 출발하여 마닐라를 거쳐 5월 25일 목적지인 중국 상해에 도착하였다. 안창호는 이미 상해 임시정부의 내무 총장에 선임되어 있었기 때문에 6월 28일에 내무총장에 취임하여 임시정부의 살림을 맡게 되고, 안창호를 수행 했던 정인과와 황진남은 7월 7일에 열린 제5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미령(美領) 교민 대표로 의원이 되어 임시정부 활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정인과는 8월 18일에 열린 제6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당시 부의장이었던 신익희가 법무차장으로서 업무 때문에 부의장을 사임함에 따라 부의장 보선 투표에서 임시의정원 부의장에 당선되었다. 당시 임시의정원 의장이던 손정도 목사는 건강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부의장인 정인과가 회의를 진행하기도 하였다. 그후 그는 외무차장을 맡아 1920년 8월 미국의원단 동양 유람단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여운형 등과 함께 이들에 대한 활발한 외교활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임시정부의 내분이 격화되고 독립에 대한 전망이 흐려지자 1920년 10월경 외무차장직과 임시의정원 의원직을 사임(그의 사임은 1921년 3월 18일 제18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수리되었다.)하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김구는 그의 {백범일지}에 이러한 현상을 "원년(元年:대한민국 원년 = 1919)에서 3․4년을 지내고 보니, 당시에는 열렬하던 독립운동자들 중 하나씩 둘씩 왜놈들에게 투항하고 귀국하는 자들이 생겨났다. 임시정부 군무차장 김희선과 독립신문사 주필인 이광수, 의정원 부의장 정인과 등을 위시하여, 점점 그 수가 증가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정인과는 임시정부에서 떠나기는 하였지만 바로 국내로 들어왔던 것은 아니다. 미국에 다시 건너가 1921년 프린스턴신학연구과에서 신학사 학위를 받고 1923년에는 같은 대학 정치사회학과에 들어가 문학사 학위를 받았다. 이어서 그는 콜럼비아대학대학원에서 교육학을 공부하다가 영국․중국을 거쳐 1924년 11월말경 입국하여 1925년부터 조선주일학교연합회 협동총무를 맡았다. 그때부터 그는 각종 강연과 교회 활동에 참여하는 등 본격적인 국내 활동을 하게 되었다. 1924년 11월 18일자 동아일보는 중국 남경발로 정인과에 대한 소식을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정인과씨 환영...십이년전 미국으로 건너가 많은 풍상을 겪으며 학업을 힘쓰던 정인과(鄭仁果)씨는 재작년 미국 가주(加州)에서 신학(神學)을 졸업하고 다시 프린스턴대학에서 더욱 연구를 가하야 신학사(神學士)와 문학사(文學士)의 존귀한 학위를 얻고 다시 교육학을 연구하다가 금년 여름 영국 런던에서 열린 만국주일학교 대회에 참석하고 동아의 그리운 땅을 밟고자 나오던 길에 상해에 들렸는데 동지의 간곡한 권고를 못 이겨 할 수 없이 길을 멈추고 중국에 얼마동안 있게 되었는 바...씨는 년전 상해에 와서 임시정부의 중요한 직임을 띠고 많이 노력한 일도 있었다더라."

 

이러한 전력을 가졌기 때문에 정인과는 일제 경찰에 의해 평소에도 요시찰 인물로 감시를 받고 있었다. 그러다 마침내 성진에서 개최된 유년주일학교 대회 겸 부흥회에서 한 강연 내용이 문제가 되어 1930년 1월 25일에 보안법위반 혐의로 3일간 성진경찰서 구류되어 조사를 받고 불구속으로 풀려 났다가 그해 5월에야 경성지법에서 무혐의로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이 때 그의 고향인 평남 순천경찰서에서 작성한 '피의자 소행 조서'에 의하면 정인과는 "성품이 담백하고 온순하지만 강한 배일사상을 가지고 있는 자다."라고 기록하고, 비고사항으로 "전과는 없으나, 배일사상을 가지고 있어 비밀결사 조직의 우려가 있기 때문에 요시찰인(要視察人)에 편입되어 있는 자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때까지만 하여도 그는 소극적이지만 민족주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일제의 감시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그가 교계에서 주목을 받게 된 것은 1932년 장로회총회 종교교육부 총무를 맡게 되면서부터이다. 이때부터 그의 파당적․독선적 색채를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그 첫번째가 찬송가의 판권문제다. 찬송가는 원래 1908년 이후 장로교와 감리교가 공동으로 사용하였는데,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와 조선예수교서회가 편집․발행 및 판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후 연합공의회는 1924년부터 찬송가개편위원회를 구성하고 개편작업을 하여 1931년 4월 서회에서 {신정찬송가}라는 이름으로 개정판을 발간하였다. 그러자 감리교는 이를 공식으로 채택하였으나 장로교는 채택을 보류하고 서회에 재개정을 요구하였다. 그러다 정인과가 총무로 있는 종교교육부의 헌의로 장로교 단독으로 찬송가를 편집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장로교 내부에서도 교회연합운동 분위기를 해칠 우려가 있다는 것과 편찬과정에서 정인과의 독선적인 행위에 대한 강한 반발이 있었으나, 이를 무시하고 1935년 6월 {신편찬송가}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찬송가를 종교교육부에서 발행하여 장로교에서 사용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20여년간 같은 찬송가를 사용하던 장․감 두 교파의 연합운동 분위기는 큰 손상을 입었다. 이 무렵 정인과는 1935년 총회에는 경기노회장으로 참가하여 총회장에 당선되었다. 그리고 이 총회에서 자신이 편집한 {신편찬송가}를 장로교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하도록 결의하게 하였다. 그만큼 1930년대 중반에 장로회 안에서 그의 지위가 확고해 졌음을 알 수 있다.

 

해방 후 기독교서회 총무가 된 김춘배 목사가 정인과 목사를 찾아가 그가 가지고 있는 {신편찬송가}의 판권을 서회로 돌려달라고 요구하였으나 거부당했다. 그후 그는 이 판권을 고려신학교 교단측에 팔아넘겼다고 한다.({대한기독교서회 백년사}, 58쪽) 사실 정인과가 교계의 비난을 받으면서까지 찬송가를 별도로 편집하고 자신의 명의로 발간하였던 것은 그가 내세운 명분이야 어떠튼 바로 이 판권에 따른 막대한 이권에 있었던 것을 시사해 주는 대목이다.

 

또 하나의 교회 연합운동에 걸림돌이 되고 심지어는 장로교 내부에서도 남북분열의 위기로까지 몰고 갔던 것은 지역적 인맥적 당파성이었다. 특히 이 시기 국내 교계에서 이승만의 동지회 계열과 안창호의 흥사단 계열간의 대립은 심각했다. 그런데 바로 이 동지회 계열의 지도적 인물이 중앙기독교청년회의 신흥우 총무였고, 흥사단 계열의 교계 실력자는 종교교육부의 정인과 총무였다. 김인서는 그가 발행하던 {신앙생활}지 1935년 1월호에 이러한 대립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청주회의 석상에 드러난 소위 남북분열의 원인은 1왈 '경성목사의 분쟁이요' 2왈 '정인과 목사와 신흥우 박사의 불화라고'. 청주회의에 나타난 바와 같이 남북 분열의 원인이 과연 이상 2조에 있다 하더라도 제1원인에 대하여는 분쟁하는 경성 목사를 총회가 이미 권징하였지만 경성노회는 여전히 불복이고, 제2원에 재하여는 중앙기독청년회의 신 총무와 종교교육부 정 총무와의 불화에는 총회도 어찌할 방법이 없을 것이다. 그러면 조선 교회의 병인을 알고도 수술 못하는 난치병에 걸린 것이다."

 

결국 장로교는 정인과 계열 동우회만 합법화 하고 신흥우 계열의 적극신앙단은 이단으로 정죄하여 이에 가담했던 인물들을 교계에 사과성명을 내고 탈퇴하게 하였다. 이는 정인과 계열이 장로교의 교권을 지배하게 되었음을 말해준다.

 

정인과 목사가 일제에 적극적으로 협력하게 된 것은 1937년 6월 이른바 [동우회 사건]으로 구속되어 취조를 받은 후부터로 알려져 있다. 동우회 사건이란 일제가 본격적인 대륙침략을 앞두고 조선 지식인 내지 지도자들을 적극적인 정책 협력자로 만들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일으킨 사건으로 그간 묵인하거나 방조하였던 민족개량주의 노선에 대한 본격적인 탄압사건이었다. 정인과는 미주와 상해 등지에서부터 안창호의 권유로 흥사단에 가입하여 활동하였으며 국내에 들어와서도 같은 계열인 동우회에 가담하여 활동하던 지도적 인물이었다. 그는 이 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이미 친일파로 전향하여 일제에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있던 오문환의 도움으로 풀려나 일제 경찰의 비호를 받으면서 그도 적극적 친일활동에 가담하였다. 이에 대하여 해방 후 어떤 목사는 익명의 기고문에서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다.

 

"기타무라(北村)가 경기도 경찰부 고등과장으로 영전되자 H의 활동 무대는 서울로 옮겨졌고 대담한 활동을 벌리게 되었다. 전쟁중 선교사가 쫓겨나자 대영성서공회와 기독교서회를 작난했고,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검거된 종교교육부의 C를 무사히 석방시켜준 구실로 그를 황국신민으로 전향케 하여, 군기헌납운동에 열광케 했다."

 

여기서 H는 오문환이요 C는 정인과 목사를 지칭하는 것임은 물론이다.

 

장로교는 신사참배를 가결한 이듬해인 1939년 9월 총회에서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연맹]을 결성하고, 일제의 이른바 "국책 수행에 협력"할 것을 다짐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협력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이듬해 일제의 지시에 따라 '총회 중앙상치위원회'를 조직하고 총간사로 정인과 목사가 취임하였다. 이 상치위원회는 1940년 11월 성명과 함께 '장로회지도요강'이라는 것을 발표하였는데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국체의 본의에 기하야 당국의 지도를 준수하고 국책에 순응하야 과거 구미(歐美)의존의 사념(邪念)을 금절(禁切)하고 일본적 기독교의 순화갱정에 노력하는 동시에 교도로 하야금 그 직에서 멸사봉공의 성을 봉하야 충량한 제국신민으로서 협심육력(協心戮力) 동아질서의 건설에 용왕(勇往) 매진키를 기함."(매일신보 1940.11.10일자)

 

여기에 이어서 실천방책으로 신사참배, 궁성요배, 황국신민서사 제창 등을 규정하고 교회의 헌법․교리․교법․의식 등을 전반적으로 재검토하여 민족주의적 색채를 배제하고 순정 일본적 기독교로 할 것과 찬미가 등 전기독교 서적 출판물을 검토하여 일본 국체에 배치되는 자구를 개정할 것 등을 규정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내용을 이미 일제측이 마련한 것을 발표한 것에 불과하였지만 일제측의 요구대로 정인과를 중심으로 한 상치위원회는 이를 충실히 수행하여 교회의 본질까지도 내팽개치고 교회를 일제의 침략정책에 따르는 일종의 어용 교회기구로 전락시켰던 것이다. 1942년 5월 11일 국민총력조선야소교장로회총회연맹 총간사 덕천인과(정인과)의 명의로 각노회연맹 이사장에게 보낸 다음과 같은 [헌종(獻鐘)보고서 독촉의 건]이라는 공문은 위협적 언사까지 사용하면서 일제에 협력을 강요하고 있다.

 

"수제(首題)의 건에 관하여 4월 24일부로써 공문을 발하였던 바, 5월 5일까지 다수 보고서가 도착하지 않기 때문에 전(全)노회의 보고 통계서를 작성함에 곤란할 뿐더러 당국 관계 방면에도 크게 영향이 되는 동시 귀노회 연맹의 사무처리상에도 여하한 영향이 미치게 될 점까지 착념하여, 우 보고 연기기간되는 5월 15일까지 동봉 엽서에 귀노회 연맹의 헌종 보고서를 꼭 제출하도록 주의하여 주시기를 절망(切望)하여 마지 않는 바입니다."([기독교신문] 1942년 5월 20일자)

 

정인과는 이러한 친일협력 성향 때문에 장로교 내에서뿐만 아니라 1941년 1월에는 국민총력연맹 문화부 문화위원에 임명되어 활동하기도 하였다.

 

정인과가 일제의 기관지 [매일신보]에 1941년 9월 3일부터 5일까지 3회에 걸쳐서 기고한 "일본적 기독교로서-익찬일로의 신출발"이라는 글에서 장로교의 친일협력 상황을 상세하게 소개 하면서 결론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과거 50년 동안이나 구미사상에 교착되었던 조선기독교가 불과 3-4년간에 그 거단(巨團)을 움직여 시국의 기치 아래 일체 동원이 되도록 기구가 혁신되어 감은 멸사봉공의 정신을 함양해 온 교단으로서 현명한 당국의 선도와 지도적 원리를 일단 해득하게 될 때에 당국 신뢰의 추세는 실로 창류(漲流)의 감을 금치 못한다...그렇다고 해서 자화자찬으로 우리는 결코 이에 만족치 아니한다. 앞으로 일보 일보 내선일체의 철저화에 최후적 단계에 이르도록 계속 노력하려 하는 바인즉 사회 각 방면의 편달과 당국의 끊임없는 선도를 기대하여 마지 아니한다."

 

부일협력을 자랑으로 여기고 일제의 적극적인 간섭을 자청할 정도로 그는 변해있었던 것이다. 그는 그후에도 {동양지광} 1942년 2월호 특집 "영미타도좌담회"에 참석하여 "미․영인의 종교정책"을 발표하고,{조광} 1942년 2월호에도 "필승의 신념"이라는 글을 게재하여 친일논설을 폈다.

 

당시 이러한 정인과에 대한 일제 경찰의 신뢰와 비호는 대단하였던 것 같다. 한때 신사참배문제로 60일동안 경기도 경찰부 유치장에 구금되었던 전필순은 그 때 일을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신문할 때 사유를 알게 되었는데 이러했다. 만주에 있는 선교사 헌트(韓富善)씨와 결탁해서 신사참배(神社參拜)를 거부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조직체를 만들어 전국적으로 운동을 전개하고 있으니 그 장본인을 지명수배해서 잡아 가두어 그 일을 좌절시키라는 상부의 명령이 내려져 구속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배후의 인물은 정인과(鄭仁果)씨인데 장본인은 나를 위시한 모모 인사들이라고 경기도 경찰부 고등계 주임 재하(齋賀)라는 작자의 설명이었다. 그는 또 정인과씨와 사이가 좋아지면 문제는 간단하게 해결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의 말을 전적으로 신용한다는 것도 고려할 일이지마는, 여하간 분노가 들끓어 치솟던 것만은 사실이었다."({목회여운},97쪽)

 

성서공회도 영국인 홉스 총무가 떠난 후 정태응 총무가 맡고 있었으나 일제 당국은 그를 간첩혐의로 검속하고 1941년 4월 1일부터 정인과에게 맡기도록 지시하였다가, 이듬해 5월 23일자로 적산으로 압류하고 말았다.

 

일제가 모든 기독교계 신문 잡지를 폐간 시킨 후 1942년 4월 유일한 교계언론으로 [기독교신문]을 창간할 때도, 창립총회를 경기도 경찰부에서 관계관들의 참석하에 하게 하고, 경기도경찰부 고등경찰과장 사노(佐野吾作)가 정인과 목사를 이 신문의 발간 주체인 기독교신문협회 회장으로 지명하였다. 이것도 그가 얼마나 일제 경찰의 신임을 얻고 있었나를 단적으로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만큼 그는 일제 경찰에 철저히 "순응"하여 비호를 받았던 것이다. 이 신문은 1942년 4월 29일 소위 천장절에 창간호를 내게 되는데, 정인과는 이 신문의 창간사에서 "본보(本報)는 반도 기독교의 일본적 진전에 기여하려고 출생하는 것"이라고 발행 목적과 강령을 밝히고 있다. 이 신문은 그 첫호부터 이러한 목적과 취지에 충실하여, 해방이 되기까지 그야말로 기독교계 부일협력의 유일한 기관지 역할을 하였다. 정인과는 이 신문을 통하여 해방이 되기까지 기독교계의 부일협력을 독려하였던 것이다.

 

정인과 목사는 이러한 적극적인 친일 행각 때문에 해방 후 기독교 목사로서는 제일 먼저 1949년 2월 22일에 반민특위에 체포되었다. 이에 대하여 {반민자죄상기}(1949)는 "[유다]의 직계 정인과"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2월 22일 특위는 8․15전 일제에 충성하는 데 민족과 신앙을 판 새로운 [유다] 정인과를 체포하였다. 기독교 신자로서 교회 목사로서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주께 영광이 있으라'고 찬송가를 부르고 성경을 읽으며 기도하던 목사 정인과는 배신자로서 [유다]도 놀라게끔 전쟁 말기에 온갖 매족 매교 행위를 하였으니 기독교 대신 신도(神道)니 황도(皇道)를 모시고 기독교총진회장이 되어 신도배(神道輩)들과 손을 잡고 신궁참배를 한다고 숨이 턱에 닿도록 남산 돌층계를 오르내렸으며, 십자가 앞에 수난의 미사를 올리는 양같은 교인들을 강제로 끌고 나가 신궁참배를 시켰다. 여기서 한 수를 더 떠 헌금헌납운동을 일으키고 신궁참배를 반대하는 교인들을 '비국민'이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니 '참회를 하라'고 도리어 꾸짖고 대들었으며, 신궁참배 않는 교회는 그 교회당까지 일제와 손을 잡고 폐쇄 혹은 팔아먹기까지 하였다. '신궁을 참배하자' '성전(聖戰)에 헌금 헌납을 하자' '신도와 황도를 모시고 이 앞에 고개 숙여 기도를 하자'고 설교하기에 목이 쉴 지경이었으며 여기서 더욱 광신에 들떠 '미소기를 한번 해 보지'하고 나서기까지 하였다. 이토록 기독교를 팔고 민족을 파는 데 애쓴 대한판(大韓版) [유다] 정인과는 지금 죄의 심판을 앞두고 신궁 대신 철창 안에서 무슨 기도를 또 하느라고 눈을 지긋이 감고 있다고 한다."

 

그는 이러한 지나친 친일 행각 때문에 거기서 석방된 후에도 교계에 복귀하지 못하고 경기도 파주, 송탄 등지에서 외롭게 은거하다가 1972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변절은 일제의 위협과 회유에도 그 원인이 있었겠지만, 그가 교계에서의 지위에 지나치게 집착하였기 때문이었던 것같다. 이러한 그릇된 집착은 개인을 파멸시킬뿐만 아니라 교회와 사회에도 누를 끼치게 되는 것이다.

 

3.독립을 심으러 가노라/ 신석구(申錫九, 1875-1950) 목사

 

"의기는 얼음같아서 추우면 더욱 굳어지고(義氣若氷 寒益固)

 

도심은 쇠같아서 연단하면 더욱 정련되네(道心如鐵 鍊尤精)"

 

신석구 목사님이 옥중에서 지은 한시(漢詩)의 한 구절이다. 이 시구는 온 몸과 마음을 민족과 신앙의 제단에 바쳐 고난을 무릅쓰고 절개를 지키신 목사님의 생애의 체험에서 우러나온 고백이다.

 

신석구 목사는 1875년 5월 3일 충청북도 청주군 미원면에서 유학자 신재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친필 자서전에 의하면 7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15살 때 아버지마저 여의게 되어 '학업도 이루지 못하고 가산에 대하여는 아무것도 받은 것이 없었다.' 그러나 유학자이신 아버지로부터 엄한 유교 교육을 받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10여년 동안 방랑생활을 하면서도 도박이나 잡기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23세에 결혼을 하였으나 마음을 잡지 못하고 방황하다가 27세 때 김진우(金鎭宇)라는 친구와 함께 전당포를 하였으나 32세 때 사업에 실패하여 친구 대신 감옥살이를 하고, 3개월만에 병보석으로 풀려나 도피하였다. 서울에 올라와 한 때 윤도사 집에서 그의 자제를 가르치기도 하였으나, 김진우를 그곳에서 다시 만나게 되어 그 일을 그만두고 친구와 함께 경기도 고랑포에 내려가 약국을 차려 운영하였다. 이 무렵 그 친구는 서울에 있을 때 예수를 믿게 되어 신석구에게도 믿기를 권하고 이웃 교회의 전도인들도 자주 찾아와 권면해도 그는 3년동안 교회에 구경조차 가지 않고 거절하였다. 그가 어려서 배운 유교의 관습에 젖어 유교 이외의 것은 모두 이단시하였기 때문이었다.

 

당시는 일제의 침략으로 국운이 기울어 가던 때인지라 그도 마음에 의분을 느끼고 한 때는 의병을 일으켜 볼까도 생각하였으나 의병으로써는 무고한 생명만 희생할 뿐 구국의 도리가 아니라 생각하였으며, 올바른 종교로 국민을 교화하여 국민의 의무를 다하게 하는 것이 유일한 구국책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때만 하여도 그가 생각한 올바른 종교는 기독교가 아니었다.

 

그 때 마침 전도인이 전도를 하면서 성경 한 권을 사라고 권하였다. 그는 전도인과 변론하다가 성경을 사서보고 철저히 반대하리라 생각하고 성경을 사서 읽기 시작하였다. 그는 성경을 읽는 가운데 기독교가 유교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전케 해주는 종교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참으로 나라를 구하려면 예수를 믿어야 겠다. 나라를 구원하려면 잃어버린 국민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하고 1907년 7월 14일 주일부터 교회에 나가기 시작하였다. 그의 나이 33세 때의 일이었다. 그는 그후 순회 전도인 정춘수의 권유로 개성에 가서 미국인 의료 선교사 리드(W. T. Reid, 李慰萬)의 어학 선생을 하면서 1908년 3월 29일 개성남부예배당에서 왓슨(A. W. Wasson, 王永德)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는 의술을 배워 의사가 되라는 주위의 권유가 있었으나 기도하는 가운데 전도인이 되기로 결심하고 그해 4월에 협성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이듬해인 1909년 2월부터 개성북부교회 크램(W. G. Cram, 奇義男) 선교사 밑에서 전도인으로 활약하다가 같은 해 5월에는 권사직도 받게 되었다. 1910년 10월에는 홍천구역으로 전임되었으며, 그후 가평, 춘천지역의 순회전도사를 거쳐 1917년 9월 24일 원산연회에서 집사목사의 안수를 받았다. 이듬해 11월에는 서울 수표교교회로 전임하였는데 바로 이 교회에 있으면서 3․1운동에 민족대표로 참여하였다.

 

그는 그 때의 일을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오화영 목사가 1919년 2월 12,3일경에 만나 나보고 말하기를 모모처에서 독립운동을 하려고 천도교측과 연합코저 하니 거기 참가하겠느냐 하는데 내 생각에 두 가지 어려운 것은 첫째 교역자로서 정치운동에 참가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가. 둘째 천도교는 교리상으로 보아 서로 용납키 어려운데 그들과 합작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가 하여 즉시 대답지 아니하고 좀 생각하여 보겠다고 하였다. 그후 새벽마다 하나님 앞에 이 일을 위하여 기도하는데 2월 27일 새벽에 이런 음성이 들렸다. '4천년 저하여 내려오던 강토를 네 대에 와서 잃어버린 것이 죄인데 찾을 기회에 찾아보려고 힘쓰지 아니하면 더욱 죄가 아니냐.' 이 즉각에 곧 뜻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곧 독립이 되리라고는 믿지 아니하였다. 예수 말씀하기시를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그냥 한 알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가 많이 맺힐 터이라 하셨으니 만일 내가 국가 독립을 위하여 죽으면 나의 친국들 수 천, 혹 수백의 마음속에 민족 정신을 심을 것이다. 설혹 친구들 마음에는 못 심는다 할지라도 내 자식 3남매 마음속에는 내 아버지가 독립을 위하여 죽었다는 기억을 끼쳐 주리니 이만 하여도 족하다고 생각하였다. 그 때 어느 형제가 나에게 말하기를 어떤 선생님께 말한 즉 그 선생님 말씀이 시기상조라 합니다 하기에 내가 대답하기를 나도 이른 줄 안다. 그러므로 나는 지금 독립을 거두려함이 아니오 독립을 심으려 들어가노라 하였다. 그 날 모두가 곧 독립선언서에 서명할 사람을 결정하는 날인데 마침 오화영 목사를 만나 나의 뜻을 표명하고 곧 참가하였다."

 

그는 기도하는 가운데 신앙적 결단으로 죽을 각오를 하고 '독립'의 씨를 심으려 운동에 참여하였던 것이다. 그는 일제 검사의 "장래 또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당당하게 "그렇다. 나는 한일합방에도 반대하였으니 독립이 될 때까지는 할 생각이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는 이 일로 5개월간의 독방생활을 포함하여 2년 반의 옥고를 치렀다. 1921년 11월 4일에 출옥한 원산남중앙교회를 담임하였다가 이듬해 신학교를 졸업하고, 1923년 9월 2일 장로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후 고성구역장, 가평구역장, 철원구역장, 한포구역장 등을 거쳐 이안지방 감리사를 지내고 1935년 5월에 천안지방 감리사로 파송받아 천안교회를 담임하였다. 이 천안교회에서 목회중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검속되었다가 병보석으로 풀려나 1939년 평남 용강군 신유리교회로 전임하였다. 그는 감리교단이 일제의 압력에 순응하여 '혁신조항'을 발표하자 이에 항변하기도 하였으며, 이러한 저항적 태도 때문에 1944년 4월에는 친일적인 교단 본부로부터 면직처분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성도들이 붙들어 교회를 떠날 수가 없었다. 해방 직전인 1945년 5월 일제는 신석구 목사를 '전승기원예배 및 일장기 게양'을 거부했다고하여 용강경찰서에 구금하였다가 해방이 되서야 풀려났다.

 

해방 후에도 공산정권 하에서 시련은 계속되었다. 해방직후 잠시 유사리교회를 담임하다가 진남포 광량만교회로 전임하였다. 1946년 3․1절에 기념방송을 북한 당국이 요구하는대로 하지 않아 정치보위부에 피검되었다가 풀려났고, 북조선인민위원회의 설립에 대한 감상문을 쓰라고 요구받자 솔직하고 비판적인 감상문을 써서 북한정권의 미움을 샀다. 주위에서 월남하자는 권고도 있었으나 양들을 버리고 갈 수 없다하여 그곳에 남아 교회의 재건과 종교의 자유를 확보하기 위해 투쟁하였다. 1946년 6월에는 감리교 서부연회 연회장을 지내고 1947년 4월부터 진남포지방 문애리교회를 담임하던 중 기독교민주당사건으로 피검되었으며, 다시 1949년 4월 19일 북한 당국인 조작한 이른바 '진남포 4.19사건'으로 구속되어 10년형을 언도받고 평양감옥에 복역 중 1950년 6․25전란이 일어나 그해 10월 10일 후퇴하는 공산군에게 총살당하였다. 민족 분단과 동족상잔의 와중에서 교회와 민족을 위해 몸소 희생의 제물이 되었던 것이다.

 

 

(200자 18매분, 1996. 7. 2)

 

4.암흑시대의 선지자 박관준 장로

 

"사람은 한 번 죽을 때가 있나니, 어찌 죽을 때 죽지 않으리.

그대 홀로 죽을 때 죽으면, 길이 죽어도 죽지 않으리.

때가 와 죽을 때 죽지 않으면, 살아서 즐김이 죽음만 같지 못하리라.

예수 나 위해 죽으셨으니, 나도 예수 위해 죽으리라."

 

人生有一死 何不死於死

 

君獨死於死 千秋死不死

 

時來死不死 生樂不如死

 

耶蘇爲我死 我爲耶蘇死

 

 

이 한시(漢詩)는 1938년 장로회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한 직후 예비검속에서 풀려난 박관준 장로가 신사참배 거부항쟁의 신앙동지인 이인재 전도사에게 써 주었다고 하는 유시(遺詩)다. 박관준 장로는 이때 이미 순교를 결심하고 신사참배 거부항쟁에 투신하고 있었다.

 

박관준 장로는 1875년 4월 13일 평북 영변에서 부농인 박치환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위에 형들이 있었으나 모두 어려서 죽어, 그는 집안의 대를 이을 독자로서 집안 사람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한학을 공부 공부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다가 16세가 되던 해에 자신보다 2살 위인 이관선이라는 처녀와 결혼하여 다복한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 양친부모가 세상을 떠나자 인생의 허무감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하여 가산을 탕진하였다. 그러던 중 그는 병까지 얻어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하였으나 부인의 헌신적인 간호로 회복되었다. 그래도 그는 생의 방향을 잡지 못하고 유불선의 경서와 동학서적 등을 탐독하며 방황을 계속하였다. 한말에 한 때 친지의 추천으로 강계 산림별장의 관직을 맡고 서양 선교사로부터 전도를 받기도 하였으나 그때까지만 하여도 외도에 빠져있던 그는 기독교에 대해서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러던 그가 30세가 되던 1905년 가을 어느 날, 그날도 유불선 동학 서적들을 뒤적이며 명상에 잠겨 있다가, "절벽이 위험하면 혈벽에 서라(絶壁唯危면, 血壁立하라)"는 이상한 영음(靈音)을 듣게 되었다. 처음에는 이상하기도 하고 그 뜻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으나, 그는 이것이 자신의 방탕한 생활을 청산하고 기독교로 개종하라는 영계의 계시로 해석하여 그 때부터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였다. 그후 그는 곧 바로 정봉익, 강응식 같은 친구들에게 전도도 하고 성경을 공부하여 1907년 봄 영변감리교회에서 학습을 받고, 그해 가을 세례 받았다.

 

그는 신앙을 갖게 되면서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교회에 열심히 봉사하고, 육신의 병과 영혼을 병을 함께 고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1912년부터 3년간 서울에 올라와 서양의학을 공부하였다. 그리하여 1915년경 개업의 면허증 얻어내고, 고향인 평북 영변에 돌아와 제중의원 개설하였다. 당시에는 의원이 귀하던 때라 의료사업은 날로 번창하여 이를 통한 전도 활동도 활발히 하였다. 그러다 1922년 무렵 약을 잘못 써 한 청년을 죽일 뻔 한 일이 있고나서, 하나님의 은혜를 보답할 마음으로 3년간 무의촌 무료진료를 결심하고 실행하기도 하였다. 그후 그는 다시 평북 구성읍에 병원을 개설하고 환자를 치료하며 복음을 전했다. 그가 자주 병원을 옮긴 것은 그 지역의 연약한 교회를 돕고 새로운 지역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1934년 봄에 다시 개천읍으로 이사하고 이곳에 십자의원 개설하였다. 그가 경영하는 병원입구에는 항상 요한복음 3장 16절 성경구절을 쓴 큰 족자를 걸어두고, 진찰실 벽에도 자신이 쓴 "나는 육신의 병자보다 영혼의 병자 취급을 더 갈망한다."라는 족자를 걸어두었다. 그만큼 그는 환자의 육체적 질병뿐만이 아니라 영혼의 구원에 관심을 갖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전도하며 진료에 임했던 것이다. 그는 여기서 군우리 개천읍교회 영수로 봉직하다가 장로로 장립을 받았다.

 

그런데 그 무렵 일제가 기독교계 학교에도 신사참배를 강요하여 교계에 큰 문제가 되고 있었다. 박관준 장로는 60세가 되던 해인 1935년 봄 이 문제를 놓고 기도하던 중 환상 가운데 "이제부터 십자가의 정병을 뽑는다. 나를 위해서 피를 흘릴 자가 누구냐?"는 음성을 들었다. 그는 곧 "내가 피를 흘리겠습니다."하고 대답하였다. 이런 일이 있은 후 그는 신사참배 거부의 사명이 자신에게 있다고 믿고 이를 저지하기 위한 투쟁의 일선에 나섰다. 그는 우선 신사문제의 중심지인 평안남도 도청을 찾아가 학무국장에게 신사참배 문제를 재고해 주도록 요청하고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그리고 우가키 총독에게도 1935년 10월 "만약에 총독각하의 시정이 신사참배를 강요하고 나선다면 외람되오나 각하의 나라 대일본제국은 필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길이 없을 것"이라는 경고문을 보냈다. 그후 새로 미나미 총독이 부임하고 신사참배 강요정책이 교회에까지 미치자 그는 1938년 2월 직접 미나미 총독을 찾아가 신사참배 강요정책을 항의하면서 이를 철회하고 기독교를 국교로 하라고 권고하기도 하였다. 그는 이러한 행동 때문에 1938년 3월 평양경찰서에 20일간 유치당해 취조받고, 광신자로 낙인이 찍혀 석방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미나미 총독에게 전후 10여 차례에 걸쳐 항의서와 경고문을 보냈다. 이와 함께 그는 1938년 9월 장로회총회의 신사참배 결의를 저지하기 위한 시위 계획도 세웠다. 그래서 그가 외칠 다음과 같은 신사참배 반대구호까지 만들어 두고 총회날을 기다렸다.

 

"신사참배는 하나님께 대한 죄악이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우상 앞에 절하지 말라. 정부는 교회에 신앙의 자유를 주고, 양심에 없는 신사참배를 강요하지 말라. 우리 총회는 하나님의 성회다. 바알신에게 절하면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 하나님은 살아 계셔서 이 총회가 하는 일을 지켜보고 계신다."

 

그러나 이 계획은 일제 경찰이 장로회 총회를 앞두고 신사참배 거부운동자들을 대거 예비 검속함으로써 그도 평양 선교리경찰서에 20일간 유치 취조를 받게 되어 수포로 돌아갔다. 그러자 그는 예비검속에서 풀려난 1938년 10월부터 생업인 의업 완전히 포기하고 전적으로 신사참배 거부운동에 투신하여 보다 효과적인 투쟁 방도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는 총독부에 아무리 경고하여도 먹혀들어가지 않자 일본 본토에 건너가 경고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하여 기도 중에 같은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하던 안이숙 선생을 대동하고 1939년 2월 일본에 건너갔다. 그들은 그 곳에서 신학을 공부하던 박장로의 아들 박영창과 함께 일본 정계 요인들을 찾아가 한국의 사정을 알리고 신사참배 강요정책을 철회할 것을 요구하며 일본의 멸망을 경고하였다. 이들의 내방을 받았던 전 조선총독 우가키는 1939년 2월 28일자 그의 일기에 이러한 사실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어제 평양에 사는 예수교 신자 박관준 일족 3명이 내방하여 관헌의 압박 상황을 호소하였다. 사실이라면 이들 신자에게는 불행한 일이요, 또한 성대(聖代)의 불상사이다. 미나미(南次郞)씨가 공을 세우기에 급급하다는 평을 여러 차례 들었다. 그 일단이 드러난 것인가 ? 간과할 수 없는 일이다!"

 

박관준 장로 일행은 40여 일간의 이러한 유세도 별 효과가 없는 것을 알게 되자 보다 자극적인 방법으로 일본을 경고하고 시위할 계획을 세웠다. 마침 그 때 종교단체의 국가 통제를 목적으로 한 종교단체법이 상정된 제74회 일본제국회의가 개회 중이라 여기에 들어가 경고문을 투하할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그들은 경고문을 준비하고 방청권을 얻어 3월 23일 사전 답사를 한 다음 24일 일본제국회의 중의원 회의장에 들어가 계획대로 박장로가 "여호와 하나님의 대 사명이다."하고 외치며 두루말이로 된 경고문과 건의서를 단상을 향하여 투척하였다. 이들 경고 요지는 다음과 같다.

 

"1. 일본 제국의 이 전란시에 가장 급선무의 국정은 국교를 개정 창정하는 것이다. 신도(神道)를 기독교로 개종할 것.

 

2. 명치천황, 대정천황은 하나님께 불경치는 않았으나 소화천황은 여호와 하나님께 불경이다. 신사참배 강요 등 악법실시의 강요와 양심적인 교역자의 투옥 등을 철폐할 것.

 

3. 일본제국은 참신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율법을 준행하면 복을 받을 것이요, 도리어 참신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 알지도 못하는 우상을 숭배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을 준행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으리니, 이 두 가지 중에서 한 가지를 자취할 것."

 

그리고 이어 어느 종교가 참 종교인지 알기 위해 장작더미 위에 신도 불교 등 각 종교 대표자와 기독교 대표로서 박장로 자신을 올려 놓고 불을 질러 시험하자는 제안도 하였다.

 

이들은 즉시 '제국 의사당 소요'죄로 체포되어 40여 일간 일본 경시청의 취조를 받고 본국으로 강제 송환되었다. 박장로는 경시청에서 취조를 받을 때도 조금도 굴하지 않고 "만약 나의 생존 중에 이루어지지 않으면 우리 자존의 대에 이르기까지라도 목적 관철을 이루기 위하여 이 같은 행동을 계속 감행하겠다"고 호언하였다.

 

박장로는 본국으로 송환되고 나서도 요시찰인물이 되어 감시를 받았으나 신사참배 거부항쟁을 하다가 구속된 동지들을 석방시키기 위하여 신의주 경찰서와 평북지사를 찾아가 항의하고 총독에게도 경고문을 보내, 그해 가을 도당국의 지시에 의해 영변경찰서에 다시 검속되었다. 그는 얼마 후 신의주경찰서로 이감되고 다시 평양형무소로 이감되어 독방생활을 하였다. 이러한 극한 투쟁을 하는 가운데서 자주 기도 중에 영음을 듣고 환상을 보았다. 그는 이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알고 예심 법정에서도 조금도 굴하지 않고 일제에게 멸망을 담대히 경고하고 증거하였다. 그는 해방이 되기 이미 1년 전에 1945년 8월에 일제가 패망하고 우리 나라가 해방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예언하기도 하였다. 그는 자주 옥중에서 오랫동안 금식기도를 하였는데 최후의 승리를 내다본 그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1945년 초부터 다시 금식기도를 시작하였다. 예정된 금식기도를 마치던 날 그는 빈사상태로 피를 토하고 쓰러져 평양기독교병원으로 옮겨졌다. 박장로는 그곳에서 가료를 받으며 찾아오는 친지들에게 옥중 체험과 성경 말씀을 증거하였다. 그러다가 입원한지 5일만인 1945년 3월 13일 오전 "우리 나라는 앞으로 이사야 11장 10절로 16절의 말씀과 같이 됩니다. 여러분 끝까지 신앙을 잘 사수하시다가 앞날 영광스러운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납시다."하는 유언을 남기고 70세를 일기로 평화롭게 소천하였다. 장례는 이튿날 오정모 집사의 집례로 조촐하게 치러져 평양 장로교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신사참배 문제로 같이 옥고를 치른 서정환 전도사는 박장로에 대하여 해방 후에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박장로님이 생각납니다. 그는 에스겔 3장 18절 말씀을 마음에 새겨두고 있었어요.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케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그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요.' 그는 자기를 일본의 파수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일본의 우상숭배를 경책하고 다니며 여러 번 일본 경관에게 잡혀서 매도 맞다가 드디어 내가 있던 신의주 형무소로 들어왔습니다. 그는 열심있는 신앙가였습니다. 나는 그로부터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어느 날 그는 일본 사람들에게 몹시 매를 맞았는데 좀더 때려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죽을 때까지 때려달라고요.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기를 원했습니다. 경관들은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그들은 그 같은 일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지요. 결국 그들은 그의 소원을 듣지 않기로 작정했습니다. 그후부터 그들은 다시 그를 때리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는 섭섭해 했습니다."

 

이러한 그의 순교적 신앙과 용기는 하나님의 심판과 일제의 패망을 예언하여 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와 함께 신사참배 거부항쟁을 하던 동지들에게도 무한한 희망을 주고 격려가 되었으며 불굴의 신앙투쟁의 본보기가 되었던 것이다.

 

200자 30 매분(1993.10.1)

 

5.徐載弼의 改革思想

 

金 承 台

전남 해남 출생 / 홍익대, 서울대 대학원 국사학과 졸 / 숙명여대 강사

저서:[한국기독교의 역사적 반성]

편저:[한국기독교와 신사참배문제], [신사참배 거부항쟁자들의 증언]

역서: [일제의 종교침략사]

 

 

역사적인 인물을 평가할 때 정확한 사실 자료에 근거해야 함은 물론, 평가 대상자 자신의 주관적인 측면과 그가 살았던 상황의 객관적인 측면이 모두 고려되어야 한다. 아무리 그가 선한 의도를 가졌더라도 어떤 상황에서는 그 의도에 역행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떤 인물에 대하여 지엽적인 자료나 자신의 주관적인 판단에 따라 감정적인 평가를 하기가 쉽다. 최근에 서재필의 유해 봉환을 둘러싸고 일어났던 그에 대한 엇갈린 평가도 그런 데에 그 원인이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 필자는 1986년 독립기념관 연구원으로 재직할 때 기념관 관장님을 모시고 미국에 가서 서재필의 유품을 인수해 온 적이 있다. 그러한 인연으로 해서 서재필에 관심을 갖게 된 후 그의 생애를 알아가면 알아 갈수록 다른 독립운동가들에게서 받는 것과는 다른 감동을 받게 되었다. 그 이유는 첫째로 그는 끊임없는 변혁을 추구한 실천적 개혁사상가였다는 점이다. 갑신정변의 참여, 독립협회의 참여, 3.1운동 직후 독립외교활동의 참여, 그리고 해방후 말년의 미군정 고문으로서의 활동 등은 이러한 실천적 개혁사상가로서의 그의 일생을 잘 입증해 준다. 둘째로 그의 뜨거운 조국과 민족에 대한 사랑이다. 그가 비록 미국인으로 귀화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에게서 조국과 민족이 한시라도 잊혀진 적은 없었다. 물론 협소한 민족주의적 시각에서 꼬투리를 잡는다면 미국인으로 귀화한 것이라든지, 조국에서 미국인 행세를 한 것이라든지, 모국어를 잊어버려 유창하게 하지 못했다던가 하는 것 등등을 들어 비판하는 견해도 일면 타당성을 갖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는 피상적인 관찰일 뿐이다. 그가 그렇게 처신하고 그렇게 된 정황을 조금만 조심스럽게 살펴본다면 모두가 쉽게 이해하고 설명될 수 있는 것들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그의 조국에 대한 열정과 사랑이 없었거나 변질되었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필자가 알기로는 그의 조국에 대한 열정과 사랑은 그의 한평생 변함이 없었다. 조국이, 더 정확히 말해서 올바른 개혁을 꺼리고 자신들의 권익만을 추구하던 세력들이 그를 배신했지, 서재필이 조국을 배신한 적은 한번도 없었던 것이다.

 

그는 1951년 1월 5일 제2의 모국이 된 미국의 필라델피아 근교에서 88세를 일기로 일생을 마쳤다. 그의 장례식날 그 지역 신문에 실린 그에 대한 사설은 운명적으로 갖게 된 두개의 조국에 대한 그의 충실한 일생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메디아 시의 의사이며, 세계적으로 유명한 한국독립운동가 서재필 씨가 오늘 안장되다. 한국 태생인 서씨는 소년시절부터 자신과 한국 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되찾기 위한 불타는 정열을 가져왔고, 그 갈망을 행동에 옮긴 분이다. 불행히도 그의 작은 고국은 열강의 세력이 교차하던 곳이라 침략국들에 대한 그의 투쟁은 거의 끝이 없었고 더욱이 승리가 불가능한 것이었다. ... 그러나 그는 미국 시민이 되고 난 후에도 한국독립운동을 포기하지 않았다. ... 서재필 씨의 생애는 그의 고국과 귀화한 나라의 자유와 정의 구현을 위한 정열로 점철되어 왔다. 그와 같은 의미에서 그는, 여러나라의 역사상 요란했으나 이기적 권력욕을 위해 행동했던 인물들과 달랐고, 국민들을 억압하는 정부 제도에 반대했다. 서재필 씨는 역사상 진정한 위인들과 같이, 생존시보다 서거시에 귀화한 이 지방 주민들에게 더욱 존경을 받게 될 것이다."

 

 

짧은 지면이기 때문에 그의 생애를 모두 살피거나 그에 대한 부정적 견해들을 일일이 자료와 정황을 들어가며 반박할 수는 없다. 그리고 서재필에 대해서는 상당량의 전기물들과 논문들이 이미 나와있어 독자들이 쉽게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여기서는 그의 약력과 함께 그의 개혁사상에 대하여 간략히 정리해 보기로 한다.

 

 

국왕을 이용한 위로부터의 개혁시도 - 갑신정변 참여기

 

 

서재필은 1864년 1월 7일 대구 徐씨 徐光孝의 둘째 아들로 외가가 있는 전남 보성에서 태어나 고향인 충남 논산에서 자랐다. 어려서 재당숙인 徐光夏에게 입양되었고, 그의 양모는 한 때 세도가 당당했던 안동김씨 집안이었으며 판서직을 지낸 金聲根의 누이였다. 그래서 그는 일곱살 무렵 서울에 사는 외숙인 김성근 집에 보내져 그 곳에서 한학을 공부하였다. 1882년 別試 文科에 합격하여 校書館 副正字에 임명되었다. 이 때 그는 金玉均을 비롯한 開化派 인사들과 交遊하여 국제 정세에 대한 감각을 갖고, 김옥균의 권고를 받아 이듬해 5월 일본에 軍事留學을 떠나게 되었다. 그가 문관으로서의 입신 출세를 포기하고 김옥균의 권유를 받아들여 일본 도야마(戶山) 陸軍學校에 유학한 것은 신식 군사지식과 기술을 도입하여 국권을 강화하려는 포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의 유학 기간은 그리 길지 못했다. 국내 정치사정과 정부의 재정상의 이유로 소환당하여 1884년 7월 귀국하였다. 국왕은 그를 士官長으로 임명하여 사관학교에 해당하는 操鍊局을 설치하려 하였으나 임오군란 이후 조선에 대한 실질적인 宗主權을 주장하며 내정을 간섭하던 淸의 袁世凱와 청의 세력을 업은 守舊派들의 반대로 무산되고 말았다. 청의 세력과 수구파의 제거 없이는 개혁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개화파들은 그해 12월 갑신정변을 일으켜 수구파들을 제거하고 국왕을 이용하여 위로부터의 개혁을 시도하였다. 이 때 서재필은 물론 개화파에 가담하여 병사 지휘와 국왕의 호위를 맡았다. 이러한 연유로 그는 신정부 내각의 병조참판 겸 정령관에 임명되었으나 청군의 간섭으로 정변은 3일만에 실패로 돌아가고 김옥균 박영효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변의 실패로 그는 역적으로 낙인이 찍혔고, 그의 부모와 처, 형은 음독자살하였으며, 두살된 그의 아들은 餓死하고, 그의 동생은 체포되어 처형되는 滅族의 화를 입었다. 일본에서도 한국과의 외교문제로 그들을 냉대하자 그는 1885년 4월 박영효, 서광범과 함께 미국으로 망명했다. 그는 미국에서 고학으로 고등학교와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1893년 의사 면허를 취득하였다. 그는 그 동안 역적으로 낙인이 찍힌 고국에 영구히 돌아갈 수 없을 것으로 알고 철저히 자신을 개혁하여 미국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하여 1890년 6월 미국 시민권을 얻어 귀화하고, 1894년에는 미국인 여성과 재혼까지 하였다.

 

 

계몽시킨 민중을 이용한 아래로부터의 개혁시도 - 독립협회 지도기

 

 

서재필이 다시 조국의 개혁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망명 후 10년이 지난 1894년 국내에 갑오개혁이 단행되고 갑신정변 주동자들의 역적죄에 대한 국왕의 사면령이 내린 뒤부터였다. 이듬해 5월 朴定陽 내각은 그를 외무 협판으로 임명하고 귀국을 종용하였으며, 미국에 들렀던 옛 혁명 동지 朴泳孝도 그를 귀국하도록 설득하자 1895년 12월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귀국하였다. 그는 귀국 직후 중추원 고문직을 맡았으나, 그의 관심은 관직이 아니라 대중 계몽이었다. 그는 이번에는 민중들을 계몽 자각시켜 이들을 통한 아래로부터의 개혁을 이루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정부의 지원을 받아 1896년 4월 7일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같은 해 7월 2일에는 官民이 동참하는 독립협회를 창설하였다. 그리고 독립협회의 상징적 사업으로 중국 사신을 맞이하던 迎恩門과 慕華館 자리에 獨立門과 獨立館을 모금으로 세웠던 것이다. 그리고 배재학당 강의와 토론회를 통하여 자유 평등한 民權의 자각과 자주 독립정신을 고취하면서, <독립신문> 기사와 만민공동회 등을 통하여 정부의 각종 폐정을 비판하고 시정토록 하였다. 물론 이러한 모든 일을 서재필 혼자서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지도력과 영향력이 없이는 이 모든 것이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이와 같이 그의 지도력 밑에 민중들의 자의식과 정치의식이 계발되고 정부의 비정에 대한 비판과 개혁요구가 점증하자, 정부 내의 보수적인 관료들은 점차 이탈하여 적대적인 입장에 서게 되어, 이러한 활동을 탄압 모함하게 되었다. 더욱이 자신들의 이권침탈에 방해가 된다고 느낀 열강의 공사들도 그의 개혁활동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미국으로의 귀환을 종용하였다. 그는 조선정부가 중추원 고문직에서 해임하더라도 미국인 광업회사의 공의로 남아 활동을 계속하려 하였으나 이것마저 조선정부에서 꺼려하여 결국 잔여 계약 기간에 대한 봉급을 조선정부로부터 받아내고 1898년 5월 마지못해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후 그의 개혁운동은 결실을 보지 못하고 독립협회의 해산과 함께 실패로 끝나고 말았지만 그가 뿌려놓은 개혁의 씨앗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그 후에 전개된 국권회복운동이나 애국계몽운동과 그 지도자들은 모두 그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私財를 바친 독립외교활동 참여 - 한국통신부 운영과 한국친우회 결성기

 

 

서재필은 미국에서 3.1운동에 대한 소식을 듣고, 즉시 호응하여 독립외교활동을 펴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고 국내 독립운동을 지원하며, 국제사회의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였다. 그가 이렇게 다시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된 심정을 훗날 이렇게 회고하였다.

 

"그 때 나의 심정은 표현키 어려웠다. 조선백성이 죽음을 불구하고 일제에 반항한 것은 기쁨을 억제할 수 없게 한 것이었다. 동포에 대한 자부심이 불일듯 하는 동시, 내가 1896-1898년 사이 귀국하여 독립신문을 통해서 국민앞에 뿌린 자유애의 씨가 싹튼 것이 아닌가 생각할 때 그렇다면 나는 최선을 다하여 열매가 맺도록 해야 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자신이 한말에 뿌린 自由愛 내지 독립정신과 동포들이 죽음을 불사하고 일으킨 독립운동의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 다시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던 것이다.

 

그는 즉시 재미 조선인 지도자들과 미국인 유력인사들을 동원하여 1919년 4월 14-16일 한인연합대회를 필라델피아에서 열어 일제의 한국 강점을 규탄하고 독립시위를 벌였다. 그리고 이 대회의 결정에 따라 한국홍보국을 설치하고 시사외교선전지로서 <한국평론 (Korea Review)>지를 창간하였다. 그리고 미국 각지에 한국에 동정적인 인사들로 한국친우회를 조직하여 임시정부의 외교활동을 비롯한 한국독립운동을 조직적으로 후원하게 하였다. 그리고 기회 있을 때마다 언론과 강연회를 통하여 한국독립 지지를 호소하고, 1922년에 워싱턴에서 열린 태평양군축회의와 1925년 호노룰루에서 열린 범태평양회의 등을 상대로도 한국문제를 제기하도록 외교활동을 벌였다. 이러한 활동들이 모두 만족할 만한 성과를 가져온 것은 아니었으나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하였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시간과 재산을 모두 이 일에 바쳐 파산 지경에 이르렀다고 이 시절을 회고하였다. 그는 어떤 이들처럼 직업적인 독립운동가는 아니었다. 그러나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리고 자신이 그 운동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됐을 때마다 뛰어들어 적극적으로 행동하였다.

 

 

조국의 인민을 위해서라면 - 미군정 고문활동기

 

 

해방된 조국이 분단되고 게다가 미군정이 성립된 자체가 모순이요 불행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서재필의 미군정 고문활동도 그에 대한 비판의 주요 부분이 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그의 주관적인 태도와 활동의 실상을 주의 깊게 살펴보고 고려해야 한다. 그는 사실 진정한 의미에서 한국과 미국의 국익은 배치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의 생각에는 미국은 한국의 자주독립을 도와주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인을 위하여 한국의 사정을 잘 조언할 수 있는 자신과 같은 고문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하지의 미군정 고문직 요청을 수락하고 1947년 7월 다시 귀국하였다. 고문직을 수락한 것은 자신의 명리(名利)를 위해서나 미군의 효과적인 한국 통치를 돕기 위해서가 아니라, 한국인을 위해 진정으로 올바른 자문을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아직도 한국인에게는 계몽 개혁해야 할 점이 많이 있다고 보고 방송과 면담 강연을 통하여 끊임없이 이러한 점을 강조하였다. 그에게는 권력욕이나 명예욕이 애초부터 없었기 때문에 連名까지 하여 그를 대통령으로 출마시키려는 주위의 권유도 한결 같이 물리쳤다. 그래도 이러한 권유가 끊이지 않자 1948년 7월 4일 기자들을 불러 다음과 같이 자신은 미국시민권을 포기할 의사가 없다고 공언함으로써 이러한 논의를 잠재우고자 하였다.

 

"나는 한국 각지로부터 나에게 한국 대통령 입후보를 요청하는 동시에 내가 출마하는 경우 나를 지지하겠다는 많은 서한을 받았다. 나는 그들의 호의에 깊은 감사의 뜻을 표하는 바이다. 나는 과거에 관직에 입후보한 일이 없으며, 지금도 그리고 장래에도 그러하지 아니하리라는 뜻을 그들에게 전달해야 할 것이니, 설혹 나에게 그 지위가 제공됐다 하더라도 나는 그것을 수락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미국시민이며 또한 미국시민으로 머무를 생각이다."

 

그러나 그후 이러한 발언이 그에 대한 비판의 빌미가 되기도 하였다. 이것은 그가 미국인으로 행세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자신에 대한 헛된 기대와 정국의 혼선을 막기 위한 발언이었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오히려 그의 미국인으로서의 행세는 사실상 한국을 위한 것이었다고도 해석할 수 있다. 그러한 발언에도 불구하고 그가 최후까지 한국을 얼마나 사랑하였나는 그가 최후로 조국을 떠나기 직전 기자와 가진 인터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문: 歸美 만류를 청하면 중지할 의사는 없는가?

 

답: 나를 낳고 내가 가장 사랑하는 조국과 민족을 내 어찌 떠나고 싶겠는가. 그러나 나는 군정 최고의정관으로서 나의 직책이 완료되었으니 귀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국민이 나의 귀미 중지를 원한다면 나는 국민의 의사를 배신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문: 끝으로 조선 인민에게 부탁하고 싶은 말은?

 

답: 우리 역사상 처음 얻은 인민의 권리를 남에게 약탈당하지 말라. 정부에게 맹종만 하지 말고 정부는 인민이 주인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이 권리를 외국인이나 타인이 빼앗으려 하거든 생명을 바쳐 싸워라. 이것만이 나의 평생 소원이다."

 

이것은 남과 북 어디에나 해당하는 말로 실로 그의 파란만장한 일생은 바로 이 조선 인민의 권리를 위한 투쟁이었던 것이다.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민족의 자주와 단결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그가 주장한 단결은 이승만과 같이 자기를 중심으로 뭉치라는 말이 아니었다. 남과 북이 한 민족으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사상과 이념을 초월하여 자주적으로 단결하라는 말이었다.

 

 

물론 그에게도 그 시대인으로서 갖는 한계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가 이상적으로 추구했던 개혁사상이 전적으로 미국을 모델로 한 서구 자본주의적인 것이었다든지, 그가 제2의 모국으로 삼은 미국의 한말이나 해방후의 제국주의적 본성을 철저하게 꿰뚫어 보지 못했다든지, 한국 민중에 대한 희망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지만 그들을 개혁의 동반자로서라기 보다는 단지 계몽해야 할 대상으로만 파악했다든지 하는 것 등이 그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점이 그의 조국에 대한 사랑과 열정을 의심해야 하는 근거는 되지 못한다. 그의 뜨거운 조국애와 희생은 그러한 모든 한계를 덮고도 남음이 있었다고 해야할 것이다.

 

6.박 희 도 (朴熙道, 1889-1951)

 

                                                      김 승 태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최연소의 3․1 민족대표

 

 

박희도는 황해도 해주 출신으로 해주의 의창학교와 평양의 숭실중학교를 졸업하였다. 그후 감리교계 협성신학교에서 잠시 수학하다가 1914년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들어갔으나 중퇴하였다. 이듬해부터 그는 감리교회의 전도사로 시무하면서 지금의 중앙대학교의 모태가 된 중앙유치원을 설립 운영하였고, 베커(A.L.Bechker) 선교사의 신임을 얻어 협성보통학교 부교장을 맡기도 하였다. 그가 1918년 9월부터 조선기독교청년회(YMCA) 회원부 간사를 맡게 되어 남녀 청년 학생들과 교유하면서 그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미치게 되었다. 그가 학생층과 감리교계의 3․1운동 참여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것도 바로 그러한 그의 위치와 활동력 때문이었다. 당시 그의 나이 31세로 자신이 포섭한 동료 전도사 김창준과 함께 가장 어린 나이로 3․1독립선언서의 민족대표로 서명하고 독립선언식에 참석하였다가 피체되었다. 그는 경찰 신문에서 민족대표의 한 사람으로서 선언서를 배포하게 된 동기를 묻는 질문에, "조선은 예전에는 독립국이었는데, 강제로 일본에 병합을 당하여 우리는 자유를 속박당하고 권리를 박탈당하였으며, 병합당시 일본인과 같이 자유와 교육과 생활을 동등이 한다고 하였으나 오늘날 보면 여러 가지로 불합리한 것이 많으므로 어쨌든지 독립국이 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하여 선언서를 인쇄 배포하였다."고 답변하였다. 그리고 예심판사의 신문에서도 "피고는 조선독립의 목적을 달할 줄로 생각하였는가 ?"라는 질문에 "나는 독립이 될 중로 생각할 뿐 아니라 언제든지 독립이 될 것이라고 믿고 있다."고 하고, "피고는 금후에도 조선독립운동을 할 것인가 ?"라는 질문에도 "그렇다."고 확실히 답변하였다. 그는 이 일로 다른 이들보다 형량이 무거운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사회주의적 계몽지 {신생활}지의 사장으로

 

 

그는 출옥 후에도 교육과 문서를 통한 민족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자신이 창립한 중앙유치원의 원감을 맡고, 좌파 청년 김명식․신일용․유진희 등을 편집진으로 1922년 {신생활} 잡지를 창간하여 사장에 취임하였다. 그리고 이 잡지를 통하여 비타협적․급진적 언론항쟁을 벌였다. 이 신생활사의 취지서는 서두에서 "인간사회는 사장(沙場)인가 화원(花園)인가. 정치․법률․도덕․종교가 유(有)하나, 그러하나 대중에게는 자유와 평등이 무(無)하도다."라고 전제하고, 이를 타개하기 위하여 "오직 개조와 혁신이라 하는 인류의 공통한 표어의 세계 대세에 순응코자 함이로다. 조선인이여 인습의 길길(拮拮)에서 위력의 압박에서 경제의 노예에서 이탈하고 신생활의 신운동을 개척할 지어다."로 끝맺고 있다.(<동아일보> 1922.1.19일자) 그리고 창간호에서 "1. 신생활을 제창함. 1. 평민문화의 건설을 제창함. 1.자유사상을 고취함."이라는 "신생활 주지(主旨)"를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활동을 일제 경찰이 좋게 보았을 리 없다. 그 내용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수차 검열과 삭제를 반복하다가 마침내 1922년 11월에 발간한 제13호의 기사를 트집잡아 박희도를 비롯한 편집진들을 검거하기에 이른다. 총독부 경무국의 1923년도 보고서에서는 이 사건을 다음과 기술하고 있다.

 

"소요 전과자 박희도를 사장으로 하는 잡지 {신생활}(경성)은 대정 11년(1922) 11월호의 동지상에 '러시아 혁명 5주년 기념호'라는 제하에 가장 열악하고 천박한 언론으로 치열한 공산주의를 구가하고 현재 사회의 조직을 저주하고 계급투쟁을 고취하고 사회혁명을 종용 선동하며 유치한 사상계를 교란하고자 하므로 바로 행정처분에 의하여 차압하고 다시 언론계의 확청(廓淸)을 기하기 위하여 다음 12년(1923) 1월 8일 그 발행을 금지하고 한편 책임자를 사법처분에 부치게 되었다."({현대사자료} 29,조선 5, 9쪽)

 

박희도는 다시 이 사건으로 함흥감옥에서 2년여의 옥고를 치르고 1924년 말경에 출옥하였다.

 

이와 같이 두 차례의 옥고를 치르고 나온 박희도는 1926년 10월 자치운동단체인 연정회의 부활계획에 참여함으로써 그 때까지의 절대독립론을 포기하고 자치론으로 기울기 시작하였다. 이듬해 2월에 창립된 신간회에서 총회 간사를 맡고, 1929년 8월에는 안재홍․주요한 등과 함께 신간회 중앙상무집행위원회 회보편집위원을 맡아 활약하기도 하였으나, 신간회가 해체된 후에는 신우회를 거점으로 최린 등의 자치론자와 접촉을 계속하였다. 그는 독립에 대한 희망을 점차 상실하고, 그에 비례하여 현실 내지는 일제와 타협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전향자의 친일지 {동양지광}의 사장으로

 

 

박희도가 어떠한 계기를 통하여 친일파로 전향하였는지, 그리고 그것이 일제측의 회유 공작에 의한 것인지 자발적인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그의 부일활동은 1937년 중일전쟁 직후부터 시작되지만, 본격적인 친일행각은 1939년 1월 일문으로 된 친일 월간지 {동양지광}을 창간하면서부터였다. 다른 잡지와 언론들이 일제의 압력으로 폐간되어 가고 있을 때, 이 잡지가 창간될 수 있었던 것은 이 잡지가 "진정한 내선일체와 황도선양"을 표방함으로써 총독부의 양해와 협조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박희도는 이 잡지의 창간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때에 반도 2천만 동포의 가슴 속에 일본정신을 철저히 하고, 황도정신을 앙양하고, 폐하의 적자(赤子)로서, 황국 일본의 공민으로서 예외없이 국체의 존엄을 체득하고, 황국 일본의 대사명을 준봉하고, 황도의 선포, 국위의 선양에 정진하고, 그리하여 동양의 평화는 물론 팔굉일우(八紘一宇)의 일대 이상을 펴서, 세계 인류의 문화 발달과 그 강영복지 증진에 공헌할 것을 기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믿습니다. 생각컨대 이 대의를 이해하고 이 이념을 체득할 때 일본국민으로서의 영광과 긍지를 감득치 않을 자 누가 있겠습니까."({동양지광} 1939.1 창간호)

 

그리고 여기에 이어서 미나미(南次郞) 총독의 "피로써 역사를 철한다."라는 글과 그 밖에 많은 친일 논설들을 게재하였다. 또한 이 잡지의 창간을 기념하기 위하여 그 해 2월 8-9일에는 부민관 대강당을 빌어 이미 친일의 길을 걷고 있던 윤치호․최린․장덕수 등을 연사로 초청하여 시국문제 대강연회와 영화의 밤을 개최하고 있다. 1939년 말경 {녹기(綠旗)}지의 편집자였던 모리타(森田芳夫)는 "조선 사상 제진영의 전망"이라는 기고문에서 동양지광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동양지광사가 태어난 것은 금년 1월이다. 지금까지 조선인측의 언론은 거의 조선어였다....그런 의미에서 {동양지광}이 조선인들에 의하여 [내선일체]의 주장 하에 태어난 것은 실로 기쁜 일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사장 박희도씨는 신념과 배포있는 사람이요, 정치적 수완도 좋다. 많은 경제적 희생을 하면서도 매호 계속하여 내고 있다. 대체로 내선일체에 관하여 내선인 쌍방의 주장을 게재하고 있다."

 

그 해 8월부터는 협동예술좌라는 신극 극단을 동양지광사에 전속시켜 친일적 내용의 연극을 서울은 물론 함북, 간도, 상해 등지까지 순회 공연하게 하였다. 이러한 박희도의 열성적인 친일 활동에도 불구하고, 총독부에서는 한때 이 잡지가 종이 소비에 비하여 효과가 적다는 이유로 발간을 중단할 것을 종용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정치적 수완'이 좋은 박희도의 간청으로 총독부에서 "인쇄용지 배급권"을 다시 주어 1941년 12월부터 다시 속간하게 하였다. 박희도는 이 속간호에 "총후 국민의 급선무"라는 친일 논설을 게재하고, 같은 달 20일에는 반도호텔에 신흥우․정춘수․전필순․정인과․양주삼 등 기독교계 지도자들을 모아 장장 7시간에 걸쳐 이른바 "미․영타도좌담회"를 개최하고 그 사회를 자신이 직접 보았으며, 그 내용을 이듬해 2월호에 특집으로 게재하였다. 이 속간 무렵부터 이 잡지의 친일 논조가 더욱 노골화으로 되고 있음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심지어 박희도는 징병제 실시 발표에 대하여 1942년 5월 13일자로 미나미(南) 총독과 이다가키(板垣) 조선군 사령관에게 공개적으로 감사장을 보내고 이를 이 잡지에 게재하기까지 하였다. 1943년 6월호에서 그는 "진심을 헌납하라"는 글을 통해서 "그러므로 현시의 반도 총후에서 국민의 헌납운동이 날로 치열화되고 있음은 기쁜 경향이지만 그럼에도 더욱이 중요한 것은 충군애국의 진심이 진정으로 그 헌납품에 들어있는가 하는 문제다....하물며 세계에 으뜸인 황군병사로서 제1선에 참가할 때 죽음 등을 고려할 필요가 어디 있을까 ? 조국과 동포를 위하여 한 목숨을 헌납할 때 그 죽음은 자기 동포를 영원히 살리기 위한 죽음으로 실로 인간 최고의 영예인 것이다."라고 하여 일제의 침략전쟁을 위하여 젊은이들의 '목숨을 헌납'하도록 촉구하고 있다. 또한 해방 직전 해인 1944년 3월호에서도 "결전 비상의 때(秋) - 궐기하라 반도 청년"이라는 글을 실어 청년들의 전쟁참여를 독려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문필활동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강연행각에도 참여하였다. 1937년 9월 6일 학무국 주최 시국강연반에 참여하였고, 1943년 11월 6일부터는 강원도 지역에서 학병독려의 강연행각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 자신만 그렇게 할 뿐 아니라 동료들의 이름까지 빌려 자신의 잡지를 통해 친일 논설을 펴 일제의 신임을 얻기에 열을 올렸다.

 

윤치영은 그의 회고록에서 {동양지광}에 실린 자신 명의의 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변명하고 있다.

 

"하루는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기미독립만세 사건에 가담하였던 박희도(朴熙道)가 나를 만나자고 하였다. 그는 어떤 연유에서였던지 그 당시 총독부에서 지원하는 것으로 알려진 경무부 잡지 <東洋之光(동양지광)>의 사장이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동양지광> 이번 호에 대동아전쟁 승전특집을 냈는데 다른 지명 인사들의 것과 함께 나의 글이 실려있다고 말하였다. 지금 일본은 1억 인구가 총동원이 되어 전쟁수행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데 조선의 유지들이 살아남는 길은 억지로라도 그들에게 협력하는 체 하는 길뿐이어서 자기가 다 알아서 처리했노라고 하였다. 박희도는 내 이름 뿐만 아니라 백모, 현모, 이모, 신모씨 등 다수의 이름을 본인들의 승락없이 게재한 모양이었다. 나는 그들과 같이 박씨에게 심한 항의를 하였으나 일제 전시하의 때가 때이니만치 명예훼손 소송 등은 엄두도 낼 수가 없었다."({윤치영의 20세기},189쪽)

 

박희도는 이외에도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 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 조선언론보국회 참여 등 수많은 친일단체의 간부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도 해방 직전에는 일제의 패망을 감지하였던 것 같다. 이 사실에 대해서 윤치영은 그의 회고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일제 말엽 대화숙에서 서슬이 시퍼런 감시를 받아 가며 일본패망의 날을 기다리던 우리들을 가끔 찾아 준 박희도 <동양지광(東洋之光)> 사장은 총독부 경무부에서 들은 태평양전쟁의 전황과 일본군의 동향을 귀띔해 주면서 자기는 기왕에 총독부 앞잡이 노릇을 하는 몸이 되었지만 후일 세상이 바뀌는 날 자기의 속 마음만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증언해 주기 바란다고 말한 일이 다시 기억난다."({윤치영의 20세기},457쪽)

 

여기서도 그의 기회주의적인 속성이 드러나고 있다. 박희도의 일생은 그 시대 가장 주류를 이룬 사조에 쉽게 빠져들어가 열성을 다해 일하다가 그 사조가 일단 잦아들면 쉽게 포기하고 또 다른 사조를 찾아 뛰어들었던 것 같다. 그리하여 민족주의 운동의 최고봉이었던 3․1운동에 민족 대표로 참여하였고, 그후 사회주의 사조가 발흥하자 {신생활}을 창간하여 여기에 동조하였으며, 1920년대 말경에는 신간회에 참여하여서도 자치운동에 기울었다가, 마침내 1930년대에 들어 일제의 대륙침략과 세력의 확장으로 독립에 대한 희망이 사라지자, 자발적으로 관제운동인 황민화운동에 뛰어들어 {동양지광}을 창간하여 친일논설을 펴고 내선일체와 전쟁협력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러다 그후 일제의 패배가 확실해 가자 총독부의 앞잡이 노릇을 하지만 자기의 '속 마음만은 그렇지 않다'고 변명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속 마음'을 누가 알겠는가 ? 그의 '속 마음'이 아무리 순수한들 겉으로 나타난 그의 친일행각 때문에 우리 민족이 입은 상처는 무엇으로 보상하겠는가 ?

 

 

 

'용서치 못할 민족반역자로 낙인'

 

 

해방 후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반민특위에 피체되었다가 풀려난 것 외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아마 과거 지나친 친일 행각 때문에 나서서 행동하기는 어려웠던 것 같다. 1949년 2월 반민특위가 활동을 개시할 무렵 나온 {민족정기의 심판}이라는 책에서는 "민족운동에서 황민화운동으로 전향한 동양지광 사장 박희도의 죄상"이라는 제하에 그의 친일 변절을 다음과 같이 신랄하게 매도(罵倒)하고 있다.

 

"박희도는 과거 민족운동자의 한 사람으로 3․1운동 당시 33인 중에 1인으로서 열심히 운동하던 자로서 한 동안은 그의 명성이 자자하더니, 일본 세력이 점점 강해짐을 본 그는 돌연히 방면을 돌려 일본에 아부하여 자기 개성을 발전시키려고 과거의 투지와 절개를 초개같이 버리고, 또 동지를 배반하고 부귀공명을 누리려고 일제의 충신이 된 그는 황국신민화 운동을 철저히 함으로써 왜인(倭人)들에게 다대한 신임을 받았으며, 또 {동양지광}이라는 잡지를 발간하여 친일과 전쟁협력에 유일한 일본의 기관지가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황민화운동에 열중한 박희도는 지방순회강연대 평안남도 책임반으로 피선되어 김영필 등과 함께 순회강연을 하였다 하며, 그 외에도 강연․좌담회 등에 열심히 참가하여 우리 조선 민족의 혼을 말살하기에 부심하며, 황민화운동․지원병․학병․국방헌납 독려 등에 적극적으로 활동하였을 뿐 아니라, 일제에 가장 충견이 된 1인자로 그야말로 의식적인 일본의 적자(赤子)요, 황민(皇民)이었던 것이다....해방이 되고 건국이 된 오늘날은 그 모습이 가장 음흉하고 추잡한 민족반역자를 낙인한 듯 해괴한 흉악상으로 보인 것이다. 머리털로 발굽까지 변절하여 왜놈의 적자가 된 박희도는...민족적 견지로 보아서 용서치 못할 반역자라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186-187쪽)

 

그리고 이보다 앞서 1948년 9월에 나온 {친일파의 군상}에서도 박희도를 "자진적으로 나서서 성심으로 활동한 자"로 분류하고, 그 중에서도 "친일을 하여 내선일체를 기하고 전쟁에 협력하여 일본인 승리할 시는 조선민족의 복리를 도모할 수 있다고 생각한 자"의 대표적인 예로 거명하고 있다. 그는 1949년 반민특위에 피체되었다가 풀려난 후, 6․25전란 중인 1951년 9월 21일에 세상을 떠났다. ***

 

 

<참고문헌>

 

․이병헌,{3․1운동 비사}(1959)

․{新生活}(1922) 

․{중앙대학교사}(1970) 

․{東洋之光}(1939-1944) 

․{민족정기의 심판}(1949)

․{친일파군상}(1948) 

․윤치영,{尹致暎의 20世紀}(1991)

 

7.전 필 순 (全弼淳, 창씨명:平康米洲, 1897-1977)

 

'반민족적인 행위는 한 일이 없다.'

 

1949년 7월 25일, 이승만 정부의 비협조와 친일파들의 방해공작으로 활동이 거의 중단되다시피 한 반민특위 특별검찰부에 전필순 목사가 찾아와 다음과 같은 진술을 하였다.

 

"저는 반민행위 피의자로서 반민특위 조사부에 피검되었다가 금년 4월 8일 불구속으로 취조를 받게 되어 석방된 사실이 있습니다. 저는 과거 일제 시 교회 목사로서 득죄(得罪)한 일은 있으나 반민족적인 행위는 한 일이 없습니다."

 

그러자 특별검찰관은 이 사실을 명확히 하기 위하여 청취 형식으로 전필순에 대한 신문을 하였다. 다음은 이 청취서 문답의 일부이다.

 

"문: 공술인은 일제 시에 일본 침략정책에 정신적으로 협력을 하였다는데 여하(如何).

 

답: 그것은 당시 교회인들이 일본정책으로서 교회를 주목하고 갖은 탄압이 있었던 관계로 대부분 은거생활을 하고 있었고 다만 제1선에서 교회를 보존하면서 유지하겠다고 생각한 사람들만이 나서서 일본강압정책을 형식적으로 순응하면서 합법적으로 유지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무슨 일이든지 개인의사로는 할 수도 없고 또 하지도 못하는 관계로 전국 총회의 결의 하에 방법을 취하였던 것입니다. 그런즉 여(余)는 합법적인 방법으로 교회의 보존을 하였던 것이고 일본정책에 정신적 협력을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저는 조선예수교장로회 부회장이었던 관계로 제가 책임지고 그런 방법을 정하였는데 당시 회장이었던 최지화, 김응순 양명(兩名)은 현재 평양과 해주에 있습니다.

 

문: 공술인은 중일전쟁시에 국내를 순회하면서 각지 교회당에서 일본의 전쟁은 정의의 전쟁이며 정의는 반드시 승리하는 법인즉 거족적으로 전쟁협력을 권유하였다는데 사실 여하.

 

답: 강연을 하였던 것은 사실이나 당시 연제가 총독부로부터 나오기를 '정의필승(正義必勝)'이라고 하여 주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余)는 총회의 결의로서 강연을 하였는데 전술 제목을 가지고 하는 것인만큼 보편적인 의미에서 정의는 반드시 승리하는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일본의 전쟁이 정의의 전쟁이라고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중략)... 

 

문: 공술인은 그러면 과거 모든 행위에 대하여 양심상 가책을 느끼는 점이 있는가.

 

답: 민족적인 입장에서는 하등 양심상 가책이 없고 다만 종교적 정신에는 배치되었던 관계로 하나님께 대하여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종교적으로 하나님께는 죄를 지었지만, 민족적으로는 죄를 짖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후 그는 {목회여운}(1965)이라는 그의 회고록에서 이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즉 "당시 만 5년간을 경기노회장으로 또는 총회 부회장으로 일본인과 상의․충돌․협상 등을 행해서 국면 타개에 노력하는 동안에 진흙 투성이며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지만, "나는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러한 거리낌이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대상과 상황에 따라 말을 바꾸는 사람, 어느 것이 진실일까 ? 이것은 종교적으로 하나님 앞에서나, 민족적으로 사람 앞에서 함께 죄를 지은 자의 자기 변명이거나, 반민족족인 행위가 무엇인지조차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사람의 착각이 아닐까 ? 그러면 과연 그는 어떤 인물인가 ?

 

 

3․1운동 참여로 옥고

 

 

전필순은 경기도 용인 출신으로 1912년 그 지역 사립 봉양학교를 졸업하고 상급학교에 진학하고자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한 동안 독학을 하면서 그 지역 장평리교회를 중심으로 농촌활동에 참여하였다가, 1917년에는 YMCA 소년부 간사를 맡게 되고, 1919년 1월에는 연동교회 조사(助事)로 발탁되었다. 그는 1909년부터 교회에 나가고 1914년에 세례를 받았는데, 그가 기독교인이 된 동기도 바로 "공부할 의욕"과 기독교계 학교의 "장학금을 타려는 심산"이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어떠튼 그가 농촌활동을 할 때 서울 연동교회에서 이 지역에 내려와 농촌전도를 하던 원세성․박용희 등의 지도와 영향을 많이 받았고, 연동교회의 조사가 된 것도 바로 원세성 장로의 추천에 의한 것이었다.

 

그가 조사로 부임할 무렵이 바로 3․1운동이 태동하던 때라 그도 같은 교회의 교인이자 자신을 지도해 준 선배인 박용희와 함께 3․1운동에 참여하여 주로 동지들 사이의 연락을 담당하였다. 그 후에도 그는 이 운동의 지속을 위해 상해 임시정부의 연락원과 접촉하면서, 전협(全協) 등 수십 명의 동지들과 함께 이강 공(李剛公)을 비롯한 제2의 민족대표를 내세워 독립선언을 하려다 일제에 발각된 대동단사건에 연루되어 1919년 11월에 종로경찰서에 구속 되었다. 그는 이 사건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옥살이를 하다가, 1921년 5월에 만기 출옥하였다. 당시 동아일보는 1921년 5월 27일자에 "만기 출옥한 대동단 전필순, 옥중생활의 감상을 말하여"라는 제하에 이 사실을 보도하고 있다. 그는 여기서 옥중 감상을 "이 중에서 나에게 가장 깊이 느끼게 하는 것은 실력양성이었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회고록에서도 "우리는 선동도 필요하지만 장기전(長期戰)으로써 계몽이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교육을 통해서 독립운동을 계속하려는 심산이었다...교회로서는 정치운동에 가담한다는 것보다 구령운동(救靈運動)이 모든 운동의 근본"이라고 생각하여, 출옥 후 계몽과 전도를 위한 강연회나 기독교문화사업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이 일제 경찰의 방해와 여러 가지 사정으로 여의치 않자 박용희와 김영구 목사의 권유와 후원으로 1922년 3월 일본 고베(神戶)신학교에 유학하였다. 1926년 3월 이 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같은 해 4월부터 다시 연동교회 전도사로 시무하였다. 그는 그해 가을 평양신학교에서 한 달간 공부하고 돌아와 이듬해 경기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묘동교회를 담임하게 되었다. 그리고 1929년에는 장로회 총회와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 종교단체법안 반대 진정위원으로 일본에 건너가 활약하기도 하였다. 그는 그때까지만 하여도 일제에 저항적인 활동에 참여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교권에 현혹되어 혁신교단의 통리로

 

 

전필순은 1931년 묘동교회를 사임하고 기독교문화사업에 뜻을 두어 당시 유일한 장․감 연합의 초교파 신문인 기독교보사의 기자로 들어갔다. 그런데 마침 선교사가 발행인 겸 사장으로 있던 기독신보사의 경영을 한국인에게 양도하려 하였으므로 전필순이 개인명의로 이를 인수하여 1933년 7월 사장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이에 불만을 가진 윤치호, 양주삼, 정인과 등 교계 인사들과 마찰이 생겨 기독신보는 기독교연합지로서의 성격을 상실하고 전필순 개인의 신문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는 교계의 보조가 중단된 상황에서 경영난을 타개하기 위하여 기독신보사를 주식회사로 전환하였으나 일제의 간섭과 재정난으로 6개월동안 휴간 끝에 결국 1937년 폐간하고 말았다. 그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교권에 대한 야망을 갖게 되었으며, 일제의 비호 없이는 이것이 불가능함을 몸소 체험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는 승동교회에서 분립한 수송교회를 얼마간 담임하였다가, 1941년 4월 다시 연동교회의 위임목사로 전임하였다. 그리고 그해 경기노회 총대로서 장로회 총회에서 부회장에 당선되었다. 사실 그 당시의 총회 임원은 친일적 성향을 갖지 않은 인물이 아니면 맡을 수 없는 지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은 그의 회고록의 기록은 그가 얼마나 이러한 교권에 애착이 많았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 후 계속해서 총회의 총대로 출석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자 1941년에 생각지도 않았던 회장으로 물망에 올라 4표의 차이로 평양의 최지화 목사가 회장이 되고 나는 부회장이 되었다. 그러나 일본 경찰의 강요로 일본어를 국어라 하고 국어로 회의 진행을 강요당하게 되어 내가 일본에서 신학을 졸업했다는 이유로 최목사는 명목상 회장이고 실지로는 내가 회의를 진행하게 되었다. 대명(代名)의 고역을 겪은 셈이다.

 

이것이 제1차의 총회 부회장직을 담당한 동기이고 그 다음 해인 1942년에 부회장이 의례히 회장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도 역시 지방색의 횡행으로 인해서 이승길 목사가 '전 목사는 아직 연소하니 연장자로 회장을 하도록 양보함이 어떠하냐.'고 하였다. 그 때 나는 연소하니 좋도록 하라고 하였다. 그래서 이 목사는 김응순씨를 회장으로 하자는 운동을 맹렬하게 벌인 끝에 2표의 차이로 김은순씨가 회장으로 당성되고 나는 부회장으로 재선되었다. 이것이 제2차의 부회장으로 당선된 과정이었다. 이것은 총회가 발족한 이래 전에 없는 불상사라고 할 수 있다. 이것도 자연한 것이 아니고 노골적으로 양해를 구해가지고 당선운동을 한 것이니 이보다 더한 역사적 오점은 없을 것이다."

 

이 때쯤 그는 교권의 노예로 전락하여 부일활동에 동원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에 대한 반민특위의 의견서에 의하면 그의 '범죄 사실'은 다음과 같다.

 

"피의자 전필순은 예수교 목사로서 중일전쟁 시에 일본 황민화 운동을 적극적으로 하여 조선 민족혼을 말살시켰으며, 일본의 침략전(侵略戰)에도 적극적으로 협력하였으며, 일본국책을 추진할 목적으로 단체를 조직하여 그 단체의 수뇌 간부가 되어 악질적 행동을 한 일본의 충견(忠犬)이라는 보고 임. 위 자를 엄밀히 문초한 결과 다음 각항의 사실이 명확함.

 

가. 피의자 전필순은 중일전쟁 시에 예수교 목사로서 국내 각지에 순회하여 신성한 교당에서 일본 침략전쟁을 정의(正義)라고 하였으며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강연을 하면서 우리 민족에게 전쟁협력을 권유한 사실이 명확함.

 

나. 피의자 전필순은 기독교인을 망라하여 혁신교단이라는 단체를 조직하여 그 단체 수뇌간부로서 일본국책을 추진시킨 사실이 명확함.

 

다. 피의자 전필순은 신성한 교당(敎堂)에 일본 가미다나(神棚)를 설치할 것과 또는 황도(皇道)연구회를 설립하자는 것을 결의한 사실이 명확함.

 

위와 같은 범죄이므로 반민법 제4조 제10항,제11항에 해당한 자이라고 사료됨. 위 결의함."

 

여기서는 지면 관계 상 그의 친일행각으로 입증된 순회강연과 가미다나 설치 문제 등은 그만두고, 기독교 변질의 극단을 보여주었던 혁신교단 조직에 관하여 그의 반민특위 피의자 신문조서를 통해 살펴보기로 하자.

 

"문: 4276년(1943) 4월 경에 피의자는 장로회 총회 부회장 재직 중 소위 혁신교단을 조직한 사실이 있는가 ?

 

답: 네 있습니다.

 

문: 혁신교단에 관한 사실을 시초부터 구체적으로 말하라.

 

답: 조선 내에 산재하는 각 기독교 각파가 공의(共議)하고 교파합동을 진행시키던 중 돌연 당시 감리교회 감독 변홍규씨로부터 감리교회를 대표하여 혁신교단 조직 초안을 제출하매 교파합동 준비위원회에서 특별위원을 선출하여 당해(當該) 초안을 검토 보고케 하였던 바 당해 특별위원회로써 보고에 의하면 당해 초안은 우리 합동위원회로서는 접수키 불능하다는 특별위원의 보고를 접수케 되매 감리교회에서는 합동위원회에서 탈퇴를 선언하고 퇴장하였습니다. 그래서 합동준비위원회에서는 수습 대책을 강구하던 중 감리교를 제한 기존 각 교파만으로는 교파합동을 완성할 수는 없다고 결론하고 각자 해산하였습니다.

 

그후에 감리교회로서 제안하기를 장로회와 감리회만이 연합하여 혁신교단을 조직하자 하였습니다.

 

문: 그리하여 어찌 되었던가 ?

 

답: 이런 교섭을 받은 후 장로회장 김응순씨와 상의한 바 상기 총회장은 각 노회장을 인솔하고 일본의 신사참배 여행을 계획한 바 있으므로 부회장이 적당히 조처하라 함으로 대책을 강구하였습니다.

 

문: 그래 피의자는 어떠한 대책을 하였는가 ?

 

답: 총회장이 부재 중이므로 임시총회를 소집할 수 없어 감리교회에 대하여 해 교단조직 진행에 대하여 연기를 제안하였던 바, 소위 당국 조치가 교회 존폐 운명에 박절함으로 연기할 수 없다함으로 본인은 경기노회 노회장인 입장에서 경기노회 임시노회를 시국대책연구라는 안건으로 의법(依法) 소집하고 감리교회에서 제출한 혁신교단 조직 초안을 토의 결정한 후 동 회에서 대의원 10인을 선출하여 당시 개회 중인 감리교회 총회에서 선출한 대의원과 합석하여 회의를 진행하였습니다.

 

문: 전기 대의원 회의에서 결정사항은 어떤가 ?

 

답: 규칙을 통과시키고 해(該) 규칙에 의하여 통리추대위원을 선출하여 통리를 추대하니 본 피의자가 통리로 추대를 받았습니다.

 

문: 피의자가 혁신교단의 통리로 추대되게 된 동기는 어떤가 ?

 

답: 규칙에 의해서 추대를 받았습니다.

 

문: 혁신교단의 규칙은 어떤가 ?

 

답: 각 교회 구내에 가미다나(神棚)를 설치할 것

 

황도연구위원회를 설치할 것

 

구약교본 작성 위원 설치의 건 등이올시다.

 

문: 혁신교단의 목적은 어떤가 ?

 

답: 내적으로 기독교의 현상유지를 하며 외부로는 국면타개를 위함에 있었습니다.

 

문: 혁신교단의 구성분양 및 요소는 어떤가 ?

 

답: 감리교회 전부와 당시 장로회 경기노회의 합작입니다.

 

문: 피의자가 통리로 추대된 감상과 그 당시의 포부는 어떤가 ?

 

답: 본 피의자가 통리로 추대된 것을 의외로 생각하였사오며 이미 추대를 받은 바이매 그 임무를 수행하여야 할 것이므로 위선 간부회를 조직하고 당시 포교규칙에 의한 법적 허가를 받아 법적 존재로 출발하기로 하였습니다.

 

문: 몇년 몇월 출발하였나 ?

 

답: 4276년(1943) 4월입니다.

 

문: 혁신교단의 본질은 어떤가 ?

 

답: 본질은 기독교회의 본질을 떠난 것이 없사오며 각 교회당 구내에 일본 가미다나 설치와 황도연구위원회와 구약교본 제작위원회 등을 부설함은 천추만대에 기독교 순수성을 모독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문: 혁신교단의 간부는 누구 누구인가 ?

 

답: 사무관장 김영섭(金永燮)

 

총무국장 이동욱(李東旭)

 

전도국장 박연서(朴淵瑞)

 

교육국장 윤인구(尹仁駒)

 

재무국장 최석주(崔錫柱)

 

연성국장 김수철(金洙喆) (미상)

 

외 각도 교구장 등이 있었으나 기억나지 않습니다.

 

문: 혁신교단 규칙 중 각교회 구내에 가미다나를 설치할 것이라 하였는데 실행 사실이 있는가 ?

 

답: 실행사항은 없습니다.

 

문: 황도연구는 어떤가 ?

 

답: 연구한 사실이 없습니다.

 

문: 구약교본 작성은 어떤가 ?

 

답: 작성한 사실 없습니다.

 

문: 그러면 세상에 물의가 많은 혁신교단은 어떠한 의도로 조직하였는가 ?

 

답: 혁신교단이 내부적으로는 조직되었으나 장로회 경기 노회는 본 장로회로 귀환되고 감리교회 내부에서도 규칙해석에 이견이 생하였사오며 당시 포교규칙에도 불합하여 5월 중에 해산되고 말았습니다."

 

이상의 신문 내용은, 교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일제의 방침에 따른 혁신교단을 조직하고 통리가 되었으나 교계 내부의 반발로 한달만에 무산되고 말았던 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이 일로 전필순은 경기노회의 불신임을 받아 약 1년간 장로회와의 관계가 단절되는 개인적 위기를 맞기도 하였으나, 1944년 10월 총회에서 부회장으로 다시 복권되어 교계의 부일활동에 참여하였다.

 

 

자숙(自肅)의 철회와 재기

 

 

전필순에게도 해방은 감격이었다고 한다. 그는 그의 회고록인 {목회여운}(1965)의 "8․15 해방"과 "자숙(自肅) 결의"라는 항에서 해방 직후 자신의 처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천황이 무조건하고 연합국측에 항복한다는 선언을 했다 한다. 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조화인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감사함과 기쁨을 어찌할 바 몰랐다....

 

1945년 8월 17일, 승동교회에서 각파 대표들이 회집해서 교회의 앞 일을 토의하던 때, 내 기억에 용이치 않은 장래를 예견(豫見)하였다....

 

이것을 본 나는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러한 거리낌이 없었다. 그러나 당시 만 5년간의 경기노회장으로 또는 총회 부회장으로 일본인과 상의․충돌․협상 등을 행해서 국면 타개에 노력하는 동안에 진흙 투성이며 만신창이가 되어 시대의 국면(局面)도 교체되었으니 후퇴해서 응수(應酬)나 되는대로 해 보겠다고 결심하고 물러섰다....

 

교회에 돌아온 나는 먼저 당회와 시국수습을 토의하고 물러날 결심을 피력하였다. 그리고 계속해서 재직회를 열고 똑 같은 심경(心境)을 토로하였다."(116-117쪽)

 

그가 해방을 기뻐한 것은, 그 때쯤이면 일제 당국에 의해 끊임없이 요구되던 부일협력 활동에 지쳐, 자신도 일제에 의한 피해자의 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해방 직후 승동교회 모임에서 자신을 비롯한 친일지도자의 처신이 용이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예견하고, 일단 목사직에서 물러나 자숙하면서 대처하는 것이 현명하리라고 판단하여, 그가 담임하던 연동교회의 당회와 제직회에 그 의사를 표시하였다. 그러자 당회와 제직회원들은 그를 위로하면서 같이 사의를 표명하였다. 그리하여 교인 전체의 재신임을 묻기로 하고, 당시 그 지역 시찰장이던 김춘배 목사를 사회자로 청하여 1945년 10월 28일 주일예배 후 공동의회를 소집하였다. 이 때의 회의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주님의 광명이 이 강산에 빛이 오니 종래 흑암속에서 봉직하던 교회 제직원은 총사직함에 대하야 장시간 토의하다가 결국은 투표로 신임을 판정하기로 하니 목사 전필순,장로 윤봉선․정재영․진석오․신태선, 집사 김한성...이상 다 유임되다."

 

당시 교회로서는 자숙을 표명한 목사와 제직들에 대한 동정과 이들이 총사퇴하면 교회가 해산될 지도 모른다는 위기감 때문에 재신임을 결의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전필순 목사가 자숙을 철회하고 교계에 재기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가 이와 같이 자기가 담임한 교회에서는 일단 신임을 얻었다 하더라도 그의 친일 경력을 지울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1949년 3월 10일 반민법 위반 혐의로 마포형무소에 수감되고, 4월 8일에 불구속 처분을 받아 풀려났다. 이 때 조사한 그의 소행 조서에 의하면 그는 "허영심과 자존심이 강하야 신앙사도로서 적당치 못하나 양심적인 점도 있음. 한 때는 교인들에게 신임을 받아 지도적 역할을 하였으나 왜의 정책에 동조하야 변절한 것을 유감이라고 비난"받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는 그 해 8월 10일 특별검찰부의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그에 대한 불기소 사건기록에는 기소유예 이유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피의자: 전필순

 

결정 주문 : 기소 유예

 

사실 및 이유 : 피의자는 일찍이 일본 고베(神戶)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로서 서울시 연동교회 등에서 종사 중 일제 시 그의 사명인 기독신도에 대한 신앙심 앙양과 양심적 지도를 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민족관을 망각하고 가증하게도 일제 침략정책에 순응하여 소위 황민화운동 등에 적극 협력하였고 그 방법으로 기독교 신도를 총망라하여 일본기독교와 합류한다는 소위 혁신교단을 조직하고 지방순회 강연 등을 감행하여 일본정쟁 필수(必需)에 협력할 것을 강조함으로써 반민족행위를 감행하였다는 사실에 관하여 수사한 바, 피의자는 위 행위사실을 솔직히 자인(自認)하고 그 이유로서 당시 일제의 마수가 기독교단에까지 침범함으로 동 교단을 합법적으로 유지하기 위하여 부득이 반민족행위까지도 감행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호소하는 바, 피의자의 진술과 당시의 국내 정세 및 피의자의 반민족행위로 인하여 민족에게 끼친 영향 등을 종합 고찰한즉 그 죄상이 경미(輕微)하고 개전(改悛)의 정이 현저하며, 동기 및 정황에 대하여 민량(憫諒)할 점이 있으므로 주문과 같이 결정함."

 

그가 반민특위에서는 그 소행을 대체로 인정하고 개전의 태도를 보인듯 하나, 그의 회고록에는 전혀 이에 대한 기록이 없다. 아마 그의 기억에서 지우고, 알리고 싶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는 그후 6․25전란 초기에 피난하지 않고 교회를 지켜 다시 신임을 쌓고, 1955-1956년에는 장로회 총회 부회장에 선임되었으며, 1957년에는 총회장에 피선되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1959년 장로교가 합동측과 통합측으로 분열될 때도, 전임 총회장으로서 통합측 중심 인물로 깊이 간여하였다. 그는 1961년 6월 연동교회의 원로목사로 추대되고, 이듬해 정식으로 은퇴하였으며, 1977년 2월에 세상을 떠났다.***

 

 

<참고문헌>

 

․<반민특위 피의자 신문조서 및 청취서>(1949)

․전필순,{목회여운}(1965) 

․동아일보(1921) 

․연동교회90년사편찬위원회,{연동교회90년사}(1984) 

․기독신보(1933-1937) 

 

 

8.정 춘 수 (鄭春洙, 창씨명:禾谷春洙,1875-1951)

 

'변절자의 가슴 속'

 

 

그대 일생을 내집에서 길렀노라

어찌타 벗을 잘못 만나 외도에 눈이 떠서

원수의 신주(神酒)에 그대 넋을 녹이길래

'아스소 그 술은 못 마실 술이라오'

이렇게 눈물로 몇번이나 충고했던고 ?

 

외도에 팔린 정신 신주(神酒)에 넋을 잃어

미칠듯 날뛰던 그대 꼴을 보았노라

몽치 들어 죄 없는 가족을 내어 쫓고

아까울손 선조 유산 눅거리로 팔아다가

요부(妖夫)의 무릎 앞에 바치지 않았는가

 

...(중략)... 

 

신주(神酒)에 취튼 마음 구주(舊酒)에 팔렸는가

어찌타 술을 배워 신세를 망치는고 ?

사람이란 절개 갖어 값이 나나니

젊어서 잘못 배운 술 늙어서 끊은들 어떠리

 

이 산문시는 정춘수가 일제말기에 부일협력을 하다가 해방 후 천주교로 '개종'하여 신의와 정절을 지키지 못한 것을 풍자하여 비판한 것이다(<대한감리회보> 1949.12.25일자). 그러면 과연 그는 어떤 인물이었기에 이러한 비판을 받고 있는가.

 

 

3․1독립선언식의 지각자

 

 

정춘수도 처음부터 친일파나 부일협력자는 아니었다. 널리 알려져 있는대로 적어도 그는 일제하 민족운동의 최고봉으로 꼽히고 있는 3․1운동의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그 당시 감리교 목사로서 원산 남촌동교회에 시무하고 있었는데, 3․1운동에 참여하게 된 것은 1919년 2월 16일경 서울에 갔다가 박희도(朴熙道)․오화영(吳華英) 등의 권유에 의해서였다. 그리하여 그는 도장을 맡기고 자신이 목회하고 있는 원산으로 돌아와 그 곳에서 이가순․곽명리 등을 포섭하여 서울과 연락하며 운동의 준비를 하였다. 그는 독립선언일자가 3월 1일로 잡힌 것을 알고 그날 열차편으로 서울에 올라왔으나, 이미 선언식은 끝나고 시위가 시작된 후였다. 그는 선언서 서명자들이 모두 체포된 것을 알고 서울에 머물면서 상황을 살피다가 서명자들과 행동을 같이하기 위하여 3월 7일 종로경찰서에 자수하였다. 그는 이 일로 1년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는 석방된 후 1922년부터 개성북부교회, 개성중앙교회 등을 전임하다가, 1927년 2월에 창립된 신간회(新幹會)의 본부 간사로 선임되기도 하였고, 1934년부터는 서울 수표교교회를 담임하고 감리교 총리원 이사에 피선되어 교회 행정에 깊이 참여하게 되었다. 그는 이 무렵 신흥우가 조직한 흥업구락부와 적극신앙단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1938년 5월경 일제가 민족주의자들을 박멸․전향시킬 목적으로 검거에 착수한 흥업구락부 사건에 연루되어 서대문 경찰서에 구금되어 수난을 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흥업구락부는 이미 1935년 이후 내분으로 사실상 활동이 중단된 상태에 있었고, 검거 후 일제의 회유와 위협에 의하여 1938년 9월 3일 관계자 전원의 이름으로 이른바 '전향 성명서'를 발표하여 기소유예 처분을 받고 모두 풀려나 부일협력 활동에 이용당하게 되었다. 이 성명서는 "아등(我等)은 일즉이 민족자결주의의 단체인 동지회의 연장으로서 흥업구락부를 조직 활동하여 오던 바, 지나사변 이래의 급격한 변환에 감하야 종래 포회한 바 주의 주장의 오류를 인정하고, 참다운 황국 일본의 국민인 신념 하에 흥업구락부를 해산함에 당하야 아등의 거취와 동향과를 밝히함과 동시에 아등의 포지한 이상과 주장과를 자에 피력하려 하는 바이다."로 시작하여, 일제에 철저히 전향․협력할 것을 밝히고, "아등은 그 활동 자금으로서 금일까지 저축한 금 2천 4백원을 서대문경찰서에 의뢰하야 국방비의 일조로서 근(謹)히 헌납하고자 한다."로 끝맺고 있다(<동아일보> 1938.9.4일자).

 

 

감리교 '황민화'의 선봉장

 

 

정춘수가 부일협력을 하게 된 것은 반드시 흥업구락부 사건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이미 이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에 기독교계 친일협력 조직의 간부로 참여하고 있었다. 즉 그는 1938년 5월 8일 일제의 사주에 의해 전도보국․황도실천을 위해 창립된 '경성기독교연합회'에 일본인 목사 아키츠키(秋月致)와 함께 부위원장에 선임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이듬해 10월에는 한국감리교회를 일본 메소디스트 교회에 종속시키기 위한 일선감리교특별위원회의 위원으로 참여하였다.

 

그의 친일행각이 본격화 된 것은 1939년 9월 일제의 비호를 받아 조선감리교 제4대 감독으로 피선되면서부터였다. 그는 교권 장악을 위하여 일제의 지도에 충실히 '순응'하여 1940년 10월 그가 주재하는 총리원 이사회에서 다음과 같은 결의안과 함께 감리교 '혁신안'을 마련하여 발표하였다.

 

"아(我) 국체의 진정신과 내선일체의 원리를 실현하야 총후 국민의 의무를 이행하고 신체제에 순응함은 아 기독교인의 당연한 급선무이다. 고로 기독교 조선감리회 총리원 이사회는 좌기 신안(新案)을 솔선 결의 실행을 기함."(<매일신보> 1940.10.4일자)

 

이 혁신안은 민주주의․자유주의의 배격,일본정신의 함양,일본메소디스트교회와의 합동,일본적 복음의 천명 등을 규정하고, 심지어는 개교회의 애국반 활동 강화와 "교도로 하야금 지원병에 다수 참가하게 할 것"까지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1941년 3월에는 국민총력 조선기독교감리회연맹의 주최로 시국대응 신도대회를 열어 혁신요강의 실천과 고도국방국가 완성에 매진할 것을 선언하였다. 이어서 감리교 3부연회를 해산하고 일본의 교단규칙에 따른 새교단규칙을 마련하여 교단을 재조직하였다. 같은 해 10월 10일에는 교역자와 신도 대표 50여명을 이끌고 부여신궁조영 근로봉사를 하고 돌아와 21일에는 국민총력 기독교조선감리교단 연맹 이사회를 열어 교회의 철문 철책 등을 헌납하도록 하는 이른바 '종교보국 5개항'을 결의 실천케 하였다. 이듬해 2월 13일에는 정춘수 통리자의 명의로 각 교구장에게 "황군위문 및 철물 헌납 건"이라는 공문을 보내 철문․철책은 물론 "교회종도 헌납하야 성전(聖戰) 완수에 협력"할 것을 요구하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정 통리자의 전횡은 감리교 내부에서도 반발을 일으켜 1942년 10월에 열린 총회에서 그에 대한 불신임안을 결의하자, 그는 일본경찰의 지원을 받아 총회해산을 공고하였다. 이러한 와중에 잠시 변홍규가 통리자가 되었으나 일제의 압력으로 물러나고, 1943년 10월에 열린 교단 총회에서 정춘수가 통리에 다시 취임하였다. 이와 같이 일제의 비호 아래 교권을 다시 장악하게 된 정춘수 통리는 1944년 3월 교단상임위원회를 열어 교회를 통폐합시키고 나머지를 팔아 전투기를 헌납하려는 "애국기 헌납 및 교회병합실시에 관한 건"이라는 결의를 통과시켜 실천하였다.(<기독교신문> 1944. 4. 1일자) 그리고 이것도 부족하여 일제의 방침에 따라 그해 5월부터는 예배 설교시 구약성서와 묵시록을 사용치 말고 4복음서만 사용하도록 하며 예배 집회 시간도 단축하여 주 1회만 집회하도록 하고 근로시간을 늘리도록 각 교회에 통고하였다. 정 통리가 이끄는 감리교단 본부는 1944년 9월 서울의 상동교회 예배당에 이른바 '황도문화관(皇道文化館)'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교역자들을 모아 일본정신과 문화를 주입하였다. 그리고 이들을 한강에 끌고 가 신도(神道)의 재계의식인 미소기하라이( )를 행하게 하고 남산의 조선신궁까지 머리에 일장기 두건을 두르고 뛰어가 신사에 참배하게 하였다.

 

당시 총독부 보안과장을 지낸 야기(八木信雄)의 회고록인 {한국과 일본}에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신도(神道)의 의식인 '미소기'를 행하게 되었는 지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어느 날 야기(八木)와 친근한 박준영(朴駿榮; 일본명 喜多毅-그는 한국인으로 드물게 일본의 신궁황학관 출신이었다.)이 야기(八木)를 찾아와 "나와 친근한 기독교 간부들 사이에 최근 기독교 탄압의 소문이 화제가 되어 매우 걱정하고 있는데 나와 함께 상의한 결과 목사들에게 신도(神道)의 계행사( 契行事;미소기행사, 즉 목욕제계하고 악을 제거한다는 의식)를 시켜서 기독교도 또한 참다운 일본인이 되게끔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증거로 하여 탄압을 면하는 것이 어떤가 하고 합의를 보았다. 이것은 '신도는 천리교․금광교 등의 소위 교파신도와는 달리 본래 선조숭배, 보본반시의 대도고 종교는 아니므로 일본 국민이면 불교도든 기독교도든 어떤 사람이든 불문하고 전부 대도를 걸을 것이다.'라고 하는 공적 견해에도 따름으로 별로 문제화될 염려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직접 그 기독교 간부들을 상면하여 그 의중을 타진한 후 가능한 한 비호하여 주기 바란다."고 하였다. 그래서 박준영의 소개로 "기독교 감리파의 정춘수(3․1운동 독립선언서 성명의 1인)와 이동욱씨를 상면한 결과" 그의 말과 틀림없었고 그 후 기독교계 목사들이 계행사를 할 때 야기(八木)가 초청을 받아 참석하여 인사말을 한 기억이 있다고 회고하고 있다. 그의 말대로라면 정춘수 등이 자진하여 기독교계에서 신도의식인 '미소기'를 하겠다고 나왔다는 것이다. 정춘수의 이와 같은 일제 당국과의 관계는 해방 후 감리교 재건파측에서 나온 '감리교회 배신(背信)․배족(背族) 교역자 행장기'에도 상세히 언급되고 있다.

 

"일본 군경의 책모에 호응하여 일어난 것이 당시까지 적극신앙단이라는 결사를 영도해가며 교계를 어지럽히던 신흥우와 그 일파들이었다. 그들은 당시의 감독 정춘수와 결탁하여 1940년 10월 2일 일본 군경의 무력과 경찰력을 배경삼아 감리교회총리원 이사회를 긴급 소집하고 경찰 당국의 위임장을 제시하면서 이사들을 공갈 위협하여 소위 조선감리교회 혁신조항을 승인시켜 죄악사의 제1보를 내어디딘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악기(惡企)는 이에 그치지 않고 조선 전 기독교를 신도화(神道化)시켜 일제의 주구를 만들기 위해 1943년에 이르러 당시의 보안과장 야기(八木信雄) 정학회(正學會)의 기다(喜田毅;朴駿榮) 보호관찰소장 나가사키(長崎祐三) 등의 절대한 원호와 사주를 받아 [일본기독교조선혁신교단]을 조직하였었다. 그러나 전선유지신도와 교역자들의 결사적인 반대투쟁으로 혁신교단이 탄생 후 1개월에 유산되어 버리고 말자 그들은 다시 경찰당국의 힘을 빌어 감리교회의 영도권을 잡고 배신 배족의 죄행(罪行)을 대담무쌍히 감행하여 온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그들이 죄상을 구체적으로 열거하는 가운데 "정춘수 이하 간부들은 동포의 황민화를 위한 기독교의 변질을 전 보호관찰소장 나가사키(長崎祐三)에게 서약하였고 기독교 요인 모해에 관한 최고 비밀 상담역이 되어있었다.(1946년 5월 6일 남조선형무소 목사 회의 시 서대문형무소 구금 중이던 나가사키(長崎祐三)의 고백)"고 증인까지 밝히고 있다.

 

마경일 목사도 그의 회고록(1984)에서 일제 말기 정춘수를 비롯한 교단 지도자들의 횡포를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혁신 교단의 지도자들은 일제의 침략전쟁 수행을 위하여 충실한 협력자의 역할을 다 하였다. 교회의 여선교회를 동원시켜 일본 군대를 위문하게 하였고, 신도들의 가가호호에서 일체의 쇠붙이를 거두어 전쟁 무기를 만드는 일에 협조하였으며, 교회의 종들을 떼어 바침으로써 이른바 '비행기 헌납'을 하도록 한 것이다. 그들은 철저한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를 지향하여 일체의 목표를 거기에 두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중략)...실상 그 무렵 경찰은 '총진회(總進會)'라는 것을 만들어 정춘수 감독을 회장으로, 장로교의 정인과 목사를 부회장으로 앉혔다. 그것은 결국 경찰의 앞잡이 역할이었다.

 

'총진회'란 결국 당시 크리스천들의 성분이며 사상 등을 조사하여 그들을 선량한(?) 황국신민으로 전향하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고 하나, 실은 교회와 신도들을 위협하는 공포의 존재였다고 함이 타당하다. 이를테면 그 기관은 일본 경찰과 밀착된 일종의 '비밀 경찰'의 일을 하였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58-59쪽)

 

정춘수는 이와 같은 교계 안에서의 부일협력 뿐만이 아니라, 1941년 초에는 국민총력연맹의 문화위원의 1인으로 참여하였고, 그해 10월에는 조선임전보국단이라는 친일 단체의 평의원을 맡았으며,1944년 말경에는 조선전시종교보국회 이사를 맡아 활동하기도 하였다.

 

 

천주교로 '개종'의 변

 

 

해방 후 감리교계는 교회의 재건 방향을 둘러싸고 복흥파와 재건파로 나뉘어 분열을 가져왔다. 재건파는 주로 정춘수가 통리자로 있을 때 교계에서 소외되거나 징계를 당했던 사람들로 교계내의 부일세력의 숙청을 요구하고 나섰다. 그러나 이들의 요구가 받아들여 지지 않자 1947년 2월 3일 다음과 같은 내용의 성명서와 함께 정춘수를 비롯한 감리교 지도자들의 친일행각을 구체적으로 폭로하는 '감리교회 배신(背信)․배족(背族) 교역자 행장기'라는 것을 발표하였다.

 

"1940년부터 왜적의 경찰과 군부를 업고 우리 교회를 마음대로 농락질하던 이른바 혁명파 배신교역자들은 감리교회의 재건을 거절하고 방해하였다. 그 뿐 아니라 그들은 작당하여 가지고 이른바 남부대회를 빙자하다가 나중에는 복흥파니 무엇이니 하면서 교파 하나를 따로 만들어 놓기까지 하였다. 그들은 자기의 손으로 죄상가죄(罪上加罪)하였다....

 

우리 교회가 천직을 감당하여 인류에게 행복을 끼치며 건국 도상에 우리 조선 민족에게 큰 공헌이 있으려면 교회 안에 그와 같이 불순하고 부정한 자들을 그냥 두고는 절대로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런고로 교회 재건을 주장할 때에 친일적이요 배신적인 그들의 숙청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앞에서 인용한 '배신 배족 교역자 행장기'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정춘수는 해방 후 감리교 내부에서도 친일파의 거두로 지목되어 비판의 표적이 되었으며, 더욱이 1949년 초에는 이러한 친일 전력 때문에 국회의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60일간 구속당하기까지 하였다. 그는 강력한 내외의 비판을 받게 되자, 더 이상 감리교에 머물기 어렵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교직을 사임하고 또 한 번의 변신을 하였다. 1949년 10월 어느 날 서울 명동 성당 노기남 주교를 찾아가 천주교로 '개종'한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1949년 11월 22일자 경향신문에 보도되어 세상에 알려졌다. 이 사실의 진부를 확인하려고 김유순 감독이 보낸 사람들과의 면담에서 "50년이나 정드렸던 교회를 일조 일석에 떠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받고, 그는 다음과 같이 자신을 위한 변명을 하고 있다.

 

"물론 어려운 문제다. 그러나 이 문제를 말하려면 자연 과거지사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3․1운동 때 33인의 하나로 나라를 위하여 싸우겠다는 나의 정신은 오늘까지 변치 않았다. 그러나 세태의 변함을 따라 전쟁이 점점 심해짐으로 일본 정부와 협력하는 척했고, 아홉 교회를 살리기 위하여 한 교회를 희생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이 세인들이 나를 친일파라고 부르는 까닭이다. 나의 밑에서 나의 지도를 받고 지내던 사람들이 나를 친일파라고 교회적으로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갖은 방법과 수단을 다해서 나를 중상하며 전부터 말해오던 숙청을 하려하니 나는 숙청을 당하기 전에 먼저 내가 자가숙청을 한 것이다....

 

하여튼 내가 50년이나 인도한 교회가 나에게 불만하다. 가령 예배 보는 것도 엄숙을 많이 주장했으나 그대로 되지 않고 개신교를 무식한 구교인들이 열교라고 하는데 참말 교파의 갈래가 너무 많아 열교이다. 그러니 감리교회에서 떠난다고 장로교회나 성결교회로 갈 수 없고 결국 천주교회에 들어가 평신도의 자격으로 남은 여생을 조용히 지내려 한다....정춘수는 감리교회와 아주 관계가 없다는 것을 알리려 한다."(<대한감리회보> 1949.12.25일자)

 

그의 말대로라면 그가 변한 것이 아니라 세상이 변하였기 때문에 '일본 정부에 협력하는 척'하였고 '개종'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에게서 진정하고 공개적인 참회의 고백은 기대할 수 없었다.

 

그는 이듬해 일어난 6․25전란을 피하여 피난길에 올라 충북 청원군 강외면 궁평리 족손(族孫) 정인환의 집에 머물다가 1951년 10월 27일 피난지에서 79세로 생을 마쳤다.(<천주교회보> 1952. 12. 23일자) ***

 

 

<참고문헌>

 

․대한감리회보(1949) 

 

․동아일보(1938) 

 

․매일신보(1940) 

 

․八木信雄,{日本과 韓國}(1981)

 

․<감리교회 배신 배족 교역자 행장기>(1947)

 

․마경일,{마경일 목사 회고록-길은 멀어도 은총 속에}(전망사,1984)

 

․천주교회보(1952) 

 

 

 

9.김 길 창 (金吉昌,1892-1977)

 

고희(古稀) 넘어 새장가

 

 

1962년 6월, 71세의 목사가 자신의 아들이나 자부보다 나이가 어린 34세의 젊은 여성, 그것도 자신이 목회하는 교회의 전도사를 지낸 인물과 재혼하여 세간에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이 화제의 주인공이 바로 김길창 목사다. 그는 목사로서 뿐만 아니라 세상에 교육가로서도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가 가진 직위로 보아서 영적인 지도자요, 지적인 지도자 행세를 하였음이 분명하다. 그가 교계에서나 교육계에서 일반 목사로서는 갖기 어려운 화려한 경력과 '업적'을 가지고 있음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인간의 가치를 무엇을 이룩하였는가로만 평가한다면 그는 분명히 대단한 '업적'을 가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그것을 이룩하였는가가 영적 지도자나 교육자에게는 보다 중요하며 평가에 반드시 이 점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그는 과연 어떤 인물인가.

 

 

빗나간 공명심

 

 

그의 자서전(<<말씀 따라 한평생>>,부산 아성출판사,1971)에 의하면 그는 1892년 11월 11일 경남 고성읍에서 한약방을 경영하던 아버지 김영수와 어머니 박순이의 8남 2녀 중 아들로는 제일 막내로 태어났다고 한다. 그리고 교육은 경남 창원의 청계서당에서 한문을 배웠고, 16세 때 대구 계성학교에 입학하였으나 학비가 중단되어 일년을 넘기지 못하고 중퇴하였다. 그후 창원 칠원 등지에서 선교사 밑에 조사로 있으면서 1917년 경남성경학교를 졸업하고, 1923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여 이듬해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가 선교사 밑에 조사로 있다가 그 일을 그만두고 농업경영과 상업에 뛰어들었던 일이 있었는데 이일을 이렇게 설명한다. "조사일에 대한 회의도 일어났다. 조사생활만 하다가는 평생에 육적 호강을 바라볼 수도 없고, 영적인 주의 사업을 한다지만, 영적 사업도 역시 목사가 되지 않고는 중구난방이 되고 말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리하여 고민 끝에 육적 사업의 길로 나갈 것을 결정하고 진영에서 30마지기 땅을 빌어 농사를 하였으나 폭우로 실패하고, 다시 콩장사에 손을 대었으나 콩값의 폭락으로 빚만 지게 되었다. 즉 그가 바라던 '육적 호강'의 길이 막히자 목사가 되는 길을 택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후 마산에 있는 호주선교부의 서기로 2년간 일하다가 다시 조사로 나가 그가 27세 되던 해인 1918년부터 평양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그가 선교부에 서기로 있을 때의 심경을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다. "내가 2년 동안 [미꽅]의 서기로 있으면서 배운 점도 많았고 일한 것도 적지 않았으나, 민족적인 울분에 어쩌면 2년을 더 못넘겼는지도 모른다. 내가 선교사의 흉을 보는 것 같지만 당시 내가 선교사와 여행차 기차를 탈 때도 선교사는 1등 차간으로 가고 나는 3등열차에 앉았다간 하차시에 만나서 지방교회의 예배를 맡았어야만 했었다. 그런데 이 때만 해도 사회와 축도는 선교사가 하고 나는 설교만을 했으니 말하자면 어렵고 수고로운 것은 내가 하는 데도 3등 민족의 대우를 받아야만 하는 데에 섭섭함을 금치 못했다." 그는 자긍심과 공명심이 대단한 인물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 점이 그가 1930년대 일제의 황민화정책에 적극협력하게 된 요인이 되었던 것 같다. 해방 후인 1949년 김길창이 반민특위에 피체 되었을 때 증인으로 불려갔던 윤인구의 다음과 같은 증언도 이를 뒷받침한다.

 

"문(조사관 심륜): 김길창의 성격을 잘 아는가?

 

답(증인 윤인구): 말하자면 심히 날뛰고 출중하려고 애쓰고 독선적으로 활략하는 성질이고, 이런 인물은 탄압하고 회유하는 일경의 술책에는 응당 이용되었을 것이고, 공명심에 끌려 과한 언행이 있었겠습니다."

 

 

3․1운동과 민족대표 모독

 

 

그가 신학생으로 있을 때 일어난 3․1운동에 대해서도 그는 소극적이었던 것 같다. 다만 당시 같은 신학생이던 김의창이 우편으로 보내온 독립신문을 친한 연분을 찾아 몇장 나누어 주다가 마산서에 10일간 구류를 당했고, 그후 1926년에도 '무기 은닉 및 반일 선동' 혐의로 7일간 유치장에 갇혔으나 무혐의로 풀려났다. 그는 이 일을 그의 자서전에 자랑스럽게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나라 안팎으로 뒤숭숭한 정황을 잘 알고 있는 나였기에 이토록 억울한 철창의 생활을 통하여 내 나름대로의 애국을 배우고 인내를 기르며 망명 투사들의 불타는 민족혼을 몸소 체험할 기회가 된 것이다." 과연 이 것이 그 때 그의 심정이었을까 ? 해방 후 그에 대한 반민특위 기소 의견서에 의하면 "① 교인의 황민화운동 추진 단체의 수뇌 인물 ② 황민화운동, 신사참배운동, 민족정신말살운동이 현저 ③ 신사참배에 반대하는 목사 교인을 일경과 결탁하여 탄압케 함."이라는 범죄 사실에 부연하여, "뿐만 아니라 기미년 3․1운동에 언급하여 3․1운동을 쓸데없는 딴 장난하다가 실패했다고 하며, 33인 중의 기독교 대표자에 대하여 교회를 사욕에 이용할려다가 실패하고 말았다고 했으니 이는 위대한 선열에 대한 큰 모독일 것이다. 조국 광복에 종교계의 공헌이 크다고 하면 할수록 그에 따라 본 피고자의 죄적(罪跡)은 현저할 것이다."라고 기소 이유를 밝히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하여 김길창은 피의자 신문에서 다음과 같이 답변하고 있다.

 

"문(조사관 심륜): 기미년 독립운동에 대하여 33인을 모욕한 사실이 있는가 ?

 

답(피의자 김길창): 기독교를 이용하여 33인중 신앙을 떠나서 조선독립운동을 한 것은 종교적 입장으로 보아서 오로지 기독교 자체를 모독한 것이라고 생각하였지 33인을 모독한 것은 아니올시다.

 

문: 종교적 입장이든 무슨 입장이든 조국이 있어야 민족이 있고 민족이 있어야 종교가 있는데 종교적 입장만 주창하는 것이 민족의 본의로 생각하는가 ?

 

답: 물론 종교적으로도 민족적으로도 조국이 광복함으로써 모든 종교가 윤택해 짐은 사실이오나 독립운동을 방해나 또는 비방한 언사가 아니라 종교적 진리를 말한 것이요, 33인 중 신앙을 떠난 사람 몇몇이 공산주의자들이 종교의 본의를 망각하고 기독교를 이용하여 기독교 자체를 모독하였단 말이올시다.

 

문: 우리 독립 운동 열사들은 교회가 가장 안전한 장소라고 교회를 이용하여 독립운동 또는 행동을 시작하였고 기타 열사들은 공산주의든 민족주의든 살인방화든 모든 역량을 다해서 오직 우리 조국 광복만 위하여 투쟁한 것이지 공산주의자라고 말하는 것이 모독이 아닌가 ?

 

답: 대단히 죄송합니다. 본인도 똑 같이 생각합니다."

 

여기서는 3․1운동을 비방한 사실에 대해서 자신을 변호하려다가 조사관의 질책을 듣고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후 반민특위 특별검찰부에서 실시된 신문에서는 아예 그러한 사실조차 다음과 같이 부인하고, 오히려 증인들을 거짓 증인으로 몰고 있다.

 

"문(특별검찰관 곽상훈): 피의자는 기미 3․1운동은 쓸데없는 딴 장난하다가 실패했다고 설교한 사실이 있다는데 그런가 ?

 

답(진술자 김길창): 그런 사실은 없습니다.

 

문: 피의자는 3․1운동 당시의 33인중 기독교 대표자는 교회를 사욕에 이용하려다가 실패한 것이라고 설교한 사실이 있는가 ?

 

답: 그러한 사실도 없습니다.

 

문: 피의자는 학교를 가지고 있으면서 학생만이라도 적극 황민화운동을 추진하였다는데 그런가 ?

 

답: 그런 사실이 없습니다.

 

문: 증인 김금순, 동(同) 한익동, 동 김만일, 동 윤인구, 동 박인순, 동 김상순, 동 권세권 등은 피의자가 신사참배는 국민된 도리요, 국가의식인 고로 적극 찬양한 사실과 신사참배 반대교인을 경찰에 밀고한 사실 및 조선 민족성을 망각하고 황국화하기 위하여 일본 기독교와 합류공작한 사실, 친일적 언사 황민화운동 강연, 기미년 3․1운동은 쓸데없는 딴 장난이었다는 말의 행위를 입증하고 있는데 여하 ?

 

답: 그런 증언은 모두가 거짓이올시다."

 

 

 

 

위세 당당한 친일 거물 목사

 

그는 1924년 목사안수를 받은 후 거창읍교회, 부산 영도교회 등에 전임하였다. 그러면서 교계 연합사업에도 참여하였다. 이 연합사업의 참여도 그의 공명심을 채우기 위한 것이었음은 다음과 같은 자서전의 자술에서도 입증된다. "나의 영도교회 생활에 이렇다할 큰 보람의 업적은 없어도 격리된 섬의식의 열등감을 없애기 위하여 거의 날마다 청년사업 내지는 연합사업을 위해 뭍을 찾아 활동을 전개하였다."는 것이다. 어떠튼 그의 이러한 열심이 인정을 받았던지 장감 연합공의회의 파송을 받아 1929년부터 1932년까지 동경 유학생교회를 맡게 되었다. 4년간의 임기를 마치고 돌아 와서는 잠깐 밀양읍교회를 맡았지만, "아무래도 이곳 군소재지가 나의 큰 꿈을 성취하기에는 너무나도 협소하므로 큰 도시로 진출할 기회만을 기다리며 기도"하였다고 그는 자술하고 있다. 그러다가 1933년 12월부터 부산 항서교회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는 그후 이 교회를 기반으로 활동하다가 1968년 이 교회에서 원로목사로 추대되었다.

 

그는 1933-1934년에 조선기독교연합회 회장을 맡기도 하였으며, 장로교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한 1938년 제27회 총회에서는 부회장으로서 각 노회 대표들을 이끌고 평양신사에 참배하기도 하였다. 그는 이때부터 본격적인 일제에 '순응'의 길을 걷게 되었다. 앞에서 인용한 반민특위의 기소의견서에 의하면 "피의자 김길창은 목사로서 적치(敵治) 소화 16년(1941) 이래 해방까지 내로는 항서교회에서 신사참배 추진, 황민화운동, 민족정신 말살을 추진하고 외로는 조선기독교와 일본전시 기독교와의 지도이념 합치에 중심적 역할을 했으며 일본 목사 가가와(賀川豊彦)와 도미다(富田滿) 등의 안내역이 되어 한국기독교인에 황민화운동의 추진단체의 수뇌 간부로서 활약하고, 소위 신사참배 문제가 대두된 이후는 경남교구장으로서 적극적으로 신사참배를 주창하고 이에 반대하는 목사 교인을 혹은 일본경찰과 결탁하여 탄압케 하였으니......본 법 제4조 11항에 해당되므로 기소함이 가하다고 사료함."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한익동 목사가 반민특위에서 "본인은 30여년 전부터 기독교 노회 내에서 동 총대 급 동역자요 교역의 친우 중 1인으로서 김길창의 행위를 자이 진술합니다. 김길창은 교회 목사일 뿐만 아니라 총회원 노회 다년 회장 학교 책임자 기타 일체 생활의 광범하야 활동이 전조선 또는 중국 일본 방면으로 활약한 사람이오니 본인과 같은 미미한 존재의 목사로서는 행위가 여하한 지는 자세히 알 수 없습니다. 기독교 신도들에게 신사참배하라는 총독부 지시가 있을 적에도 솔선적으로 신도들에게 추진 공작을 하뒶고 보통인보다 배 이상의 활동을 하는 자이오니 일본시 관공리 주로 고등계 형사 주임들과 교제가 빈번하였으니 이면에서 공작은 여하하였는지 미지이오나 신사참배 반대한 목사와 남녀 신도들이 구금당하였으니 김길창의 밀고 소치의 행위인가도 능히 추찰(推察)됩니다. 본인은 어느 날 조용한 좌석에서 김길창에게 대하야 일제에 너무 아부치 말고 경찰과 과도히 친근하지 말라는 충고를 하였더니 답 왈(答曰) 경찰을 배척하면 사업도 못하고 앞으로 살아나갈 수가 없어서 여차한 행위를 하노라고 한 사실이 있습니다. 김길창은 우리나라 민족의식은 배치한 자요 일제시국인식을 솔선하야 일체 왜정의 국가의식을 솔선 지도한 자로서 황민화의 다대한 역할을 하였고 경찰과 친밀한 연락을 하였으니 민족의 반역행위가 막대하오니 반민법으로 의하야 당연히 벌이 있어야 옳다고 생각합니다."라고 진술한 것도 김길창의 일제 말기의 행각을 잘 말해주고 있다. 김만일 목사도 "아무러튼 김길창은 대한국 민족의식은 망각한 자이요 왜정에 적극 추종하야 황민화에 다대한 공로자이요 일본국 충신이라 대한민국의 반동자라 천벌이 있어야 옳다고 생각합니다."라고 진술하였고, 심지어는 당시 고등계 형사를 지낸 장세권도 증인 신문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 하였다.

 

"문(조사관 심륜): 기 당시 증인의 직업은 여하.

 

답(증인 장세권): 부산 경찰서 고등계 형사로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문: 증인의 형사 근무 시 교회 예배 시에 입회한 사실이 있는가.

 

답: 본인과 동직자 왜인 2명이 교대로 상황 조사하기 위하여 입회 청견(聽見)한 사실이 있습니다. 예배 시에는 의례히 일본 국민의례에 준하야 황국신민 서사낭독 묵도 궁성요배 기타 행사를 김길창 지시 혹은 선창으로서 진행하던 것을 청견하였습니다.

 

문: 김길창의 설교 시 입회한 사실이 있으며 기 내용은 여하.

 

답: 설교 시 신사참배는 일본국민 된 도리로서 국가의식으로 아(我) 교회 신도들도 신사참배를 시행하자고 주창하였습니다.

 

문: 그러면 당시 김길창은 증인에게 친교하자는 동기가 없던가.

 

답: 당시 김길창은 목사 중에도 제 1인자인 거물목사라 경찰계에도 소위 간부들과 연락이 빈번하였으며 교제가 심하였으니 위세가 당당하야 본인같은 말직형사들에게는 조석간에 인사정도이고 접대도 소홀하였습니다.

 

문: 그러면 친밀하던 경찰 간부는 누구였던가.

 

답: 본인이 아는 자로서는 당시 도 고등계 주임 하라다(原田,왜인)와 부산서 고등계 주임 아라이(荒井,왜인)였는데 하판락,강락중이와도 친하다는 말은 들었습니다.

 

문: 교제가 심하였다는 증거가 있는가.

 

답: 본인이 형사 근무 시 어느 날 공무로서 김길창 본가를 찾아가니 김길창은 작야(昨夜)에도 하라다 도 고등계 주임이 왔었다 하는 말을 직접들은 사실도 있고 더구나 김길창이 경찰에 출두할 시에도 형사들에게는 인사말도 없이 위세가 당당하게도 직접 아라이 주임을 찾으며 아라이 주임역시 김길창에 대한 태도는 마치 귀빈들이나 상관에게 대하는 환영을 하였고 별석을 이용하야 장시 요담한 사실도 빈번하였으며 대단히 친밀하였습니다.

 

문: 김길창은 애국자 또는 신사참배 반대한 신자들을 밀고 투옥케 하였다는데.

 

답: 김길창은 경찰간부들과 연락이 빈번하였으니 말직형사인 본인으로서는 연락하고 밀담하던 내용을 직접 듣지 못하야 미지이오나 기 당시 국내에서 신사참배 반대자로서 목사 남녀 신도들 다수가 투옥당한 사실은 들었습니다.

 

문: 기 당시 김길창 행위에 대한 사회의 여론과 기독교회의 동향은 여하

 

답: 당시 왜인 교회 수반인물로서 가라기(唐木)라는 목사와 김길창 관계는 완전히 의견이 합치되어 왜인들에 대한 인기도 절정하였으며 결과는 내선일체에 완전 표현이었으며 일본국가를 위한 충실한 목사라는 사회여론이 있었습니다."

 

결국 김길창 목사 본인도 이런 사실을 부인하고 증인들도 후에 진술을 번복하여 신사참배 반대자를 밀고하였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입증하지 못하고, 반민특위에 피체된지 3개월 만인 1949년 6월 기소유예로 풀려났지만, 일제 하에서 그런 소문이 세간에 돌 정도로 일인들과 밀접한 접촉을 가지고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의 자서전에는 일체 이런 부분에 대한 해명이나 언급이 없다. 다만 이 시기에 해당하는 서술에서 일제의 학정과 종교탄압상만 몇 가지 열거하면서 "시대가 왜정하의 착취적인 피해를 입던 때이니 성도들의 생활이 넉넉할 리가 없다. 비단 경제적인 생활의 가난뿐은 아니었다. 종교적이며 사상적인 탄압이 더 큰 생활의 위축을 가져왔다......이러한 상황 속에서 종교인들은 이들의 건국신(建國神)인 [아마데라스 오미가미](天照大神)를 모시는 신사참배와 가정마다 [가미다나]라는 천조대신의 위패를 모시라는 것이다. 따라서 성수주일(聖守主日)을 방해하기 위하여 주일이면 보국대에 동원 지시하고 찬송가도 압수하여 황국신민의 사상고취에 영향을 끼칠만한 가사는 모조리 검은 잉크로 지워서 되돌려 주는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탄압이 계속되었다. 이러한 판국에서도 나는 용기를 잃지 않고 계속 교회 발전을 위해 목숨을 내걸고 노력해 왔다."고 기술하고 있다.

 

 

적산(敵産) 인수로 교육사업 확장

 

 

그가 교육사업에 손을 대기 시작한 것도 일제 말기의 일이다. 그가 일본인 지주 하사마(迫間)를 7차례나 찾아가 설득하여 확보한 대지에 1937년 하와이의 최순이 여사의 기부를 받아 영생유치원을 경영하였다. 그리고 1941년에는 계성여중 자리 400평을 구입하여 80평자리 건물을 지어 [경남성경학교]라는 이름으로 개교하여 경남노회에 인계하였다가 다시 인수하여 1943년 [흥아실무여학원]을 개원하여 해방되기까지 계속 운영하였다. 있던 학교들도 문을 닫던 시기에 학교를 새로 설립․운영한다는 것은 일제의 비호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해방이 되자 마자 그는 적산을 인수하여 교육사업을 확장하는 데 탁월한 재능을 발휘하였다. 그가 자서전에 기록한 표현을 빌면 "남들은 들뜬 해방의 기쁨에 도취하고 있을 때 나는 조용히 적산 부지로 된 교회대지 150평을 평당 2000원으로 불하받기에 바빴다. 그리고 당시 일인이 경영하던 [미시마(三島)고등여학교]를 인수할 꿈을 갖고서 3차례나 미시마 교장을 비밀리에 접촉하여 상당한 금액을 드려 인수하는 데 성공하였다."고 한다. 그는 자서전의 "광복을 교육에로"라는 항목에서 이 과정을 부연하면서 "평소 교육이념에 투철했던 나에겐 광복과 더불어 더 큰 욕망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해방 후 일인들이 한국에서 경영하던 학교들이 문을 닫게 되고 모두 귀국하게 된다면, 그 학교 설비를 그대로 살려서 우리의 교육의 터전을 삼고자 하는 교육열이 타올랐기 때문이다......당시 일인 미시마 교장이 자기 이름을 따서 [미시마고등여학교(三島高等女學校)]를 복병산(伏兵山) 기슭에다 세워서 황국신민의 교육을 하던 그 건물을 인수하는 데 착수하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패전의 고배를 마시고 귀국을 서두르는 [미시마] 교장을 3차례나 찾아가서 여러 가지로 권유 설득 작전을 편 끝에 상당한 돈을 지급하고 1945년 10월 2일 계약서를 받고, 법적인 절차까지도 성공적으로 끝내었다. 이 학교가 현재 남성여중고인 것이다."고 서술하고 있다. 미 군정이 들어선 후 이 건물은 적산이기 때문에 국가에 반환해야 한다는 통지를 받았으나 인맥을 통하여 군정당국에 교섭하여 무마하였다. 사실 적산이란 일제가 우리 강토에 들어와 불법으로 점유했던 재산으로 일제에서 해방된 당시로서는 우리 국민 모두의 공익사업을 위하여 쓰여져야 할 국유재산이지 어떤 개인이 사유화할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확보한 재산을 기반으로 재단을 구성하여 1947년 문교부의 인가를 얻게 되었고 그해에 문교부로부터 교육공로상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는 가운데 그는 1945년 동아대학교 설립에도 참여하여 이사장을 지내고 학교법인 남성, 대동, 훈성, 한성 등 4개의 재단을 설립하여 교육사업을 확장하였으며, 1962년에는 부산신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을 맡기도 하였다. 이러한 재산과 사회적 영향력을 배경으로 교계에서도 수차의 경남노회장, 부산기독교연합회 회장, 한국기독연합회 회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그의 자서전에서는 1968년 영국 요크셔대학으로부터 명예 신학박사 학위와, 이듬해 중국 문화학원으로부터 명예 교육학 박사학위를 받은 것이나 자신의 원로목사 추대에 대해서는 자랑스럽게 상세히 기술하면서도 자신의 과거 친일 행적에 대한 참회의 글귀는 한 구절도 발견되지 않는다. 그가 반민특위에 피체되어 신문을 받을 때 진술한 다음 내용은 그의 종교적 민족적 양심이라는 것이 어떤 것이었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게 해 준다.

 

"문(조사관 심륜): 사이판도 황군전승기원제에 종교만으로서 승리할 수 있다고 열렬한 제문(祭文)을 낭독한 사실이 있었지 ?

 

답(피의자 김길창): 황군전승기원제는 교회는 물론 전국적으로 불교나 각계 교회를 할 것 없이 전부가 기원제를 거행하였사오니 보통으로 행사한 사실이 있습니다.

 

문: 소위 목사로서 민족을 팔고 종교를 팔고 양심을 팔아서 기도한 것이 종교의 지도자라는 것이 정당하다고 인정하는가 ?

 

답: 대단히 미안한 사실입니다. 종교인으로서 하지 못할 행사를 했음은 어찌 양심이 부끄럽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만, 민족을 팔고 한 사실은 없습니다."***

 

 

<참고문헌>

 

․김길창,{말씀따라 한 평생}(부산 아성출판사,1971)

․영남교회사평찬위원회,{한국영남교회사}(양서각,1987) 

․<반민특위 피의자 신문조서 및 증인신문 조서>(1949)

 

10.대한적십자사 초대 총재 양주삼(梁柱三; 1879 - 1950 납북) 목사

 

 

적십자사 총재로서 이승만 정권 지지

 

1949년 12월 13일 대한적십자사 초대 총재 양주삼은 중앙방송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국민들에게 적십자사 입회와 협조를 호소하는 연설을 하였다.

 

"친애하는 동포 여러분! ...어제 즉 12월 12일은 국제연합 제3회 총회에서 48대 6이라는 절대다수로 대한민국은 유일한 합법적 정부라고 승인한지 1주년이 된 날이었습니다. 대한민국으로서는 누구든지 영구히 기념할 날이거니와 우리 대한적십자사에서는 그와 같이 기쁜 날에 본사(本社)의 가장 큰 일인 회원 모집하는 일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 우리 동포들은 물질상으로는 빈궁하나 정신상으로는 애국성(愛國誠)과 인류애와 동정심이 풍부하므로 불행에 빠진 사람들을 구호하는 적십자사의 사업을 위해 약간의 희생을 아끼지 않을 것이며 담배 한 갑에 최하 백원하는 오늘에 있어서 백원짜리 보통회원은 누구든지 될 수 있을 줄 믿습니다. ... 친애하는 동포 여러분! 이 기회에 대통령 각하와 국무 총리 각하의 간절하신 뜻을 받들어 대한적십자사에 입회하여 그 정한 바 목표에 도달하므로 적십자사의 사명과 사업을 완수하는 데 협조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마지 않습니다."(대한적십자사, {대한적십자사 70년사}, 1977, 143-144쪽)

 

지금도 그렇듯이 대한적십자사가 반관반민(半官半民)적인 성격의 단체여서인지 모르지만, 이 연설문에서 그는 이승만 정부와의 유착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사실 그가 대한적십자사 초대 총재로 임명된 것은 그가 그 동안 적십자운동에 헌신한 공로를 사회적으로 인정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이승만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권고를 받아들인 때문이었다. 이승만 대통령과 그는 미주 유학시절부터 아는 사이였고, 같은 감리교인이었으며, 더욱이 그해 봄 반민특위에 연루되었을 때 그의 배려로 기소유예 처분을 받아 풀려난 그로서는 이러한 제안을 거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는 그 직책을 받아들여 이승만 정부의 전폭적인 협조를 받으며 적십자 회원모집과 회비수납 운동을 벌여 1950년 6월 이 회의 중앙위원회에 보고된 바에 의하면 115만여명의 회원과 1억 5,400만여원의 회비를 거두어들임으로써 목표를 15%나 초과 달성하였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그 달에 6 25전란이 일어나 그는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하고 서울에 머물러 있다가 서울 수복 직전에 다른 사회 지도자들과 함께 납북되고 말았다. 그의 부인 양매륜(원래 성은 김씨임) 여사는 그의 납북 경위를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동란(動亂) 당시 그 분의 나이는 71세였습니다. 중국, 미국 등지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고국에 돌아와 목사일만 봐왔는데 이(李) 대통령의 요청으로 적십자 총재직을 맡게 되지요. 이 박사와는 미국에서부터 아는 사이였지요. 처음에는 목사가 관직을 맡으면 안된다고 사양하다가 적십자의 일과 교회에서 하는 일이 같은 점이 많아 총재직을 맡았어요. 동란이 터지자 그 분은 곧 적십자의 젊은 직원들을 남하(南下)하게 하고는 자신은 몸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공산군이 서울에 들어오자 나 같은 늙은이를 저들이 어떻게 하겠느냐면서 집에 계셨지요. 그 때부터 벌써 인민위원회에서는 감시하는 사람을 우리 집(서울 종로구 필운동 285) 주위에 두었지요. 두 명이 대문 앞에서 늘 감시했습니다. 그러다가 수복이 가까웠던 9월 중순경에 공산당원 같은 사람들이 와서 목사나 박사들 한 40여 명이 모여서 무슨 회의를 해야 한다면서 나가자고 했어요. 몸이 불편해서 못 간다고 하자 적십자 총재는 꼭 참석해야 된다면서 차에 태우고 어디론지 사라졌지요."(대한적십자사, {대한적십자사 70년사}, 1977, 152쪽)

 

결국 그는 감리교회의 원로로서 비록 직접적인 정치 일선에 나섰던 것은 아니지만 적십자사 활동을 통하여 이승만 정부를 전적으로 지지하고 협력하다가 그의 생애를 마감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태도는 그의 납북 후에도 기독교계 특히 그가 몸담고 있었던 감리교계의 제1공화국 하에서의 정교유착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1960년 4 19혁명이 일어나 이승만이 권좌에서 물러났을 때, 감리교 총리원 이사회 일동의 명의로 다음과 같은 뼈아픈 사과 성명을 발표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승만, 이기붕 양씨가 감리교인이었다는 사실에서 우리 감리교회는 유달리 일반 사회의 비난과 공격의 대상이 된 것이다. ... 집권당의 부정 세력이 그 정횡을 극할 때, 정치적인 소양의 부족과 우매에서 그 집권층에 아부하고 간접적으로나마 그들의 도구 노릇을 한 몇몇 사람들이 우리 교회 안에 있었다는 것은 민중을 향하여 실로 부끄럽고 면목이 없는 일이다."(김광우, {한국감리교회 백년}, 전망사, 1990, 386쪽)

 

 

민족보다 교회 유지를 위해 일제에 대한 '순응'의 길을 걷다

 

양주삼은 1876년 평남 용강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한학자인 조부와 외삼촌으로부터 한학을 배웠으며, 종교에 관심이 많아 불경도 연구하고 동학에도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그는 20세 때인 1898년 {덕혜입문(德慧入門)} 등 기독교 서적을 읽고 감화를 받아 1899년부터 교회에 출석하였다. 1901년에는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중국 상해의 중서학원(中西學院)에 유학하고, 1905년에 도미하여 샌프란시스코 한인교회 전도사로 시무하였다. 그는 이 교회에 전도사로 시무하고 있던 당시, 1908년 2월 26일자 [공립신보] 71호에 "경고 아한국 예수교회 형제 자매"라는 글을 기고를 하여 고국의 기독교 인사들을 정부가 의병 선유사로 임명하는 문제에 대하여 선유의 효과도 없고 "우리 교회와 우리 나라에 큰 화단"이 될 것이므로 선유위원이 되지 말 것을 경고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글의 전반적인 흐름은 일제의 국권침탈에 대한 성토나 의병활동에 대한 지지보다는 교회의 안전과 발전의 장애를 더 염려하여 그러한 권고를 하고 있다.

 

1909년 그는 목회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1910년 밴더빌트대학 신학부에 입학하였으며, 1912년 이 학교 윤리학 교수이며 미 남감리회 감독인 데니 목사에게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듬해 예일대학 신학부에서 1년간 더 수학한 후 1915년 귀국하여 협성신학교 교수가 되었다. 이듬해에는 윤치호의 부탁으로 개성의 한영서원 부원장이 되고, 1918년에는 남감리회 선교백년 기념사업회 총무로 남감리회 전도사업을 주관하였다. 그는 이렇게 교회의 일에는 충실하였지만 민족독립운동이나 3 1운동에는 이렇다할 참여를 하지 않았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선교사들의 정교분리 원칙의 강조와 해리스, 웰치 등 역대 감리교 감독들의 친일적인 성향에 상당한 영향을 받았을 듯하다.

 

1923년에는 시베리아선교 관리자가 되고, 이듬해에는 철원지방 장로사(감리사)가 되었다. 1927년부터는 한국의 남북감리교회의 합동을 추진하여 1930년 감리교합동을 이룩하고 기독교조선감리회 초대 총리사가 되었다. 그는 이 무렵 감리교의 대표로서 총독부와의 교섭이 잦았던 것 같다. 1934년 제2대 총리사에 재선되고 1936년 기독교 교육계에 신사참배 문제가 일어났을 때도 총독부의 지시를 충실히 따라 그 해 4월 10일자 [감리회보]에 총독부 학무국에서 보내온 "신사문제에 대한 통첩"을 번역하여 전재함으로써 일제의 기만적인 신사비종교론(神社非宗敎論)을 받아들여 '순응(順應)'하였다. 그리고 이것이 감리교 내부에서도 문제가 되자 그는 1938년 9월 다시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하여 이러한 방침을 재확인하였다.

 

"연전(年前) 총독부 학무국에서 신사참배에 대하여 조회한 바를 인쇄 배부한 일이 있거니와, 신사참배는 국민이 반드시 봉행할 국민의식이오, 종교가 아니라고 한 것을 잘 인식하셨을 줄 압니다. 그런고로 어떤 종교를 신봉하든지 신사참배가 교리에 위반이나 구애됨이 추호도 없는 것은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김양선, {한국기독교사연구}, 기독교문사, 189-190쪽)

 

그리고 그해 10월에 열린 제3회 조선감리회 총회에 미나미(南次郞) 총독을 초청하여 다음과 같은 위협적인 '훈시'를 듣기도 하였다.

 

"현재 우리 나라(일본)는 동양 평화 옹호의 대 사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국민총동원하에 시국에 대처하고 있는 때인데, 대일본 국민인 자는 그 신앙하는 종교의 여하를 불문하고 일제히 천황 폐하를 존숭하여 받들고 선조의 신기(神祇)를 숭경하고 국가에 충성을 다해야 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바로써 신교(信敎)의 자유는 대일본 국민인 범위에서만 용인되는 것이며, 그러므로 황국신민이라는 근본정신에 배치되는 종교는 일본 국내에서는 절대로 그 존립을 허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는 비상시와 평시를 불문하고 국민으로서 힘써야 할 당연한 의무입니다. 여러분은 이점을 아시고 소위 종교보국(宗敎報國)의 길에 매진하도록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조선총독부 관방문서과 편, {유고 훈시 연술 총람}, 1941, 707쪽)

 

그는 일제에 '순응'에 한계를 느꼈던지 주위의 중임 건의를 물리치고 이 총회에서 총리사를 후임인 김종우 감독에게 물려주고 만주선교 관리자가 되어 만주지역 동포 선교에 힘썼다. 그러나 전임 총리사요 감리교의 원로라는 그의 교계 위치 때문에 일제의 이용의 표적이 되어 여러 가지 부일 활동에 동원되었다. 1938년 5월에 조직된 경성기독교연합회에는 그가 미국에 외유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평의원 명단에 올랐으며, 국민총력연맹 평의원, 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에도 임명되었다. 뿐만 아니라 각종 시국강연회에도 동원되고 자신의 이름을 양원주삼(梁原柱三)으로 개명하였으며 그의 명의로 친일적인 글들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활동은 마음에서 우러나온 적극적인 친일이라기 보다는 교회를 유지하며 방해받지 않고 선교활동을 하기 위한 표면적인 '순응'이었다고 보기도 한다. 1940년 10월 정춘수 감독이 일제의 사주를 받아 기독교의 본질에서 벗어난 감리교회의 혁신을 하고자 그의 협조를 구했을 때 이에 협조하지 않은 것은 바로 그런 그의 태도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행위를 단순한 일제의 강요에 의한 '순응'으로 보기에는 그의 교계에서의 지위 때문에 그 악영향이 너무나 큰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일제는 이를 잘 이용하였고, 표면적으로라도 순응하는 그의 태도에 일제는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일제가 선교사를 추방하는 과정에서 그가 선교부의 재산을 관리한다든지 예수교서회와 성서공회의 주요 직책을 그에게 맡기도록 허용한 것은 일제의 이러한 그에 대한 신임을 입증하는 것이기도 했다. 어떻든 이러한 일들 때문에 그는 해방후 반민특위에 연루되어 구속되었다가 풀려나기도 하였다.

 

 

반민특위에 연루되어

 

해방이 되자 그는 자신이 관리인으로 있다가 '적산(敵産)'으로 압류된 선교부의 재산과 교회의 재산을 미군정과 교섭하여 복구하는 일에 힘썼다. 그는 조선기독교서회와 감리교신학교의 재산을 되돌려 받아 후임들에게 인계하고 교계의 일선에서는 물러났다. 교회의 재건 운동도 일선에는 나서지 않고 배후에서 후원하였다. 이는 사실 일제 말기의 그의 친일 행각 때문에 일선에 나설 입장도 못되었으며, 나이도 고희에 가까웠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교계에서의 영향력은 그 때까지도 막강하였다. 각종 선교부 재단법인의 이사를 겸임하고 사회적으로도 1948년 1월에는 국제연합 조선협회 대표이사를 맡아 활약하였다. 그러다 그는 1949년 3월 28일 반민특위에 구속되었다. 먼저 구속된 장로교의 정인과 목사를 신문하는 과정에서 그의 친일 행각이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반민특위 관련 기록에 의하면 양주삼 목사의 구속과 석방의 이유는 다음과 같다.

 

"불기소 사건기록

 

특별검찰부 

 

기록호: 단기 4882년(1949) 형제 45호, 단기 4282년 4월 11일 결정

 

사건표목: 반민법 위반, 피의자: 양주삼(梁柱三)

 

결정주문:기소유예, 집행: 4282년 4월 11일

 

사실 급(及) 이유

 

피의자 양주삼은 미국 예일대학 신학과를 졸업하고 단기 4248년(서기 1915년) 1월에 감리교신학교 교수로 있는 한편 자교감리교회 목사를 위시로 그후 약 30여년간 목사로 있다가 단기 4279년(1946년) 2월 감리교신학교를 설립한 자인 바,

 

1. 목사로서 일본전쟁에 협력하려는 의도 하에 내선일체의 주창, 신사참배 개시, 기독교 일본적 혁신 협조, 비행기 헌납 자발적 주창을 하여서 민족정신과 신념을 배반하여 신자로 하여금 일본 전쟁에 적극 협력케 하고, 총독 정책에 순응케 지도한 자이라는 사실인 바,

 

수사를 한 결과

 

내선일체의 주창의 점에 관하여는 미국에서 신학교를 졸업한 피의자로서는 기독교인으로서 신(神)에 대한 신앙심 이외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 뿐더러 일본어조차 해득치 못하는 바인 바, 내선일체 운운을 논할 리 만무하였고,

 

신사참배 개시의 점에 대하여는 기(其) 당시 소위 대동아전쟁 중이라 총독 시정방침의 수행이라는 미명으로 기독교도에 대한 강제적 신사참배 강요와 탄압으로 말미암아 부득이 본의 아닌 신사참배를 한 것이며, 교도로 하여금 적극 신사참배를 요구하였다는 것은 그 당시의 현황으로 보아 인정키 곤란할 뿐더러 있을 수 없는 이(理)이였으며,

 

기독교 일본적 혁신 협조에 대하여는 그 때 피의자는 기독교 조선감리회 감독으로 없었을 뿐더러 이 교(敎) 일본적 혁신 운운에 대하여는 그 때의 감리교 감독이었던 정춘수가 기독교의 일본화를 주창한 것이었고,

 

비행기 헌납 자발적 주창에 대하여는 그 역시 소위 대동아전쟁 수행으로 각 단체에서는 강제로 헌납한 사실이 있었을 망정 기독교에서는 정춘수 주창으로 한 것이어서 양주삼은 가담치 아니하였으므로 인하여 이 자의 죄증(罪證)을 인정키 곤란함으로써 주문과 같이 결정하다."(김승태, {한국기독교의 역사적 반성}, 다산글방, 1994, 502-503쪽)

 

그가 반민특위에 구속되자 그가 관계하는 각종 기관들과 선교사, 친지들로부터 진정서가 반민특위에 몰려들었다.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의 압력도 들어왔다. 반민특위는 이러한 압력에 몰려 충분한 조사도 하지 못하고 죄의 증거를 인정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4월 11일 기소유예 결정을 내리고 석방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신사참배를 인정한 것이라든지 친일기관에 이름을 내건 것이라든지 국방헌금을 한 것이라든지 등등 다른 것은 다 그만두고, 1941년 3월 4일 국민총력 조선감리회 연맹 시국대응 신도대회에서 한 "신동안 건설과 반도 기독교인의 책임"이라는 제목의 연설만 하더라도 자의든 타의든 간에 교계의 지도자로서 민족적 양심을 저버리고 일제의 편에서 전쟁협력을 독려하고 있음을 충분히 입증하고도 남는 것이다. 이 연설은 연설로 끝난 것이 아니라 정인과가 발행하던 [장로회보]에 다시 글로 실렸는데 그 마지막 부분은 다음과 같다.

 

"5. 반도인(半島人) 기독교도의 책임

 

황국신민인 반도인들은 신 동아 건설 성업(聖業)에 대하여 물심양면으로 총력을 다하는 중에 있는 줄 믿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도들은 보통 인민의 행하는 것 외에 특별히 더 하는 바가 있어야 되겠습니다.

 

반도인 기독교도로서 특별히 할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무슨 일이든지 기독교도로서 특별히 할 수 있다고 하면 그것은 순전히 기독교도의 책임이라고 하겠습니다.

 

첫째는 일본적 기독교를 확립할 것. 반도 종교로 말하면 기독교 외에 유교와 불교가 있습니다. 유교는 지나에서 수입되었고 불교는 인도에서 수입되었습니다. 그러나 유교는 지나와 아무 관계가 없는 자주적 유교가 되었고 불교도 또한 하등의 관계가 없는 자주적 불교가 되었습니다. 기독교의 발원지는 동양입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반도에 수입될 시는 구미 각국인을 통하여 되었고 과거 50여년 간에는 그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던 것이 사실입니다. 과거에 유교와 불교가 자주적 유교와 불교가 됨으로 존재를 가지게 된 것과 같이 기독교도 금일을 당하여 자주적 또는 일본적 기독교가 되지 않으면 아니될 시기를 당면하였습니다. 그런 고로 반도 기독교회는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조직적으로나 구미 교회와의 관계를 일절 단절하고 자주적으로 순정(純正)한 일본적 기독교회를 확립하여야 되겠습니다. 이것은 현하(現下) 반도인 기독교도들의 중대한 책임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에 구미의존사상을 교정배격(校正排擊)할 것. 반도에 구미의존사상이 들어오기는 대부분 기독교를 통하여 되었다고 하겠습니다. 구미인 기독교 선교사들은 반도가 아직 흑암(黑暗) 중에 있을 때에 내도(來到)하여 수백년 간에 학정하에서 압박과 유린을 당하던 민중을 위하여 학교를 설립하고 환자를 치료케 하며 교회당을 설립하고 복음을 전파케 하매 반도인들은 그 기관들을 통하여 구미인들을 숭배하며 따라서 의존사상을 가지게까지 된 것이 사실입니다. 선교사들의 봉사적 사업에 대하여서는 감사하는 바이나 구미 각국에서 동양에 대한 전횡적 정책과 음흉한 계획이 탄로된 이상 우리 기독교도들은 구미의존사상을 가지는 것은 착오인 것을 인정하고 누구든지 아직도 그 사상을 가진 것이 발견되면 극력 교정하고 배격하는 일은 특별히 기독교도의 책임입니다. 개인주의, 민주주의, 자유주의, 공산주의 등이 구미사상입니다. 구미사상은 일본정신에 반대면이 있고 신동아 건설에 방해물이 된다고 하겠습니다. 일본정신은 국가 중심이요 일본국가는 황실(皇室) 중심입니다. 무엇이든지 일본정신에 반대되고 신 동아 건설에 방해된다고 하면 반도인 기독교도들은 극력 대항하고 또 민중의 사상을 선도할 책임이 있습니다.

 

셋째로는 희생적 정신을 선전 실행할 것. 국난(國難) 시에는 종교의 역할이 필요하였습니다. 각국의 역사를 볼 것 같으면 어느 시대를 물론하고 국난이 있을 시에는 그 나라의 종교가 국가를 위하여 대역할을 한 것이 사실이며 또 황국 역사에는 더욱 그러하였습니다. 황국은 조국(肇國)의 이상과 성업을 완수하기에 막대한 희생을 아끼지 않고 매진하는 중에 있으므로 시국의 중대성은 국민으로 하여금 [멸사봉공(滅私奉公)]을 요구하게 되었습니다. [멸사봉공]은 물질적이라는 것보다도 정신적입니다. 그런고로 기독교는 국민의 정신을 총동원시키는 데 대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이기주의와 향락주의와 정욕생활을 배격하고 신애와 협력과 희생과 봉사적 정신을 주장합니다. 우리가 설혹 물질의 불편을 당분간 당한다고 할지라도 정신으로 그것을 극복할 것입니다. 1억만 민중은 그러한 정신으로 단결하여야 되겠으며 기독교도는 그 정신을 실천함으로 선전하는 것이 [종교보국(宗敎報國)]을 실행하는 것이 되겠습니다. 또 기독교는 천우신조(天佑神助)와 기도의 능력을 믿습니다. 우리들(我等)은 신동아 건설과 동양의 영구 평화와 황군의 무운장구(武運長久)를 위하여 열심 기도할 책임이 있습니다.

 

넷째에 민중에게 지도자격(指導者格)을 발휘할 것. 금일 반도에 촌락이나 도시에서 매주간 2, 3회씩 정기로 회집하는 데는 기독교회당 뿐입니다. 반도의 기독교회당 수는 개신교파의 소속만도 4천여소입니다. 그 교회당에서 매주간 2, 3회씩 선전사업을 실행한다고 하면 민중을 지도하는 데 가장 유효한 기회가 될 것입니다. 기독의 희생적 정신을 전파하는 동시에 민중에게 [충군애국]의 원리와 동아에 신천지가 창조되어 가는 성업과 시국의 중대성을 인식시키고 애국성(愛國誠)을 환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고로 기독교도는 시국이 중대한 이 때에 민중을 지도할 책임이 있습니다.

 

다섯째에 반도 민중에게 활로(活路)를 지시할 것. 반도인 기독교도들은 다수가 민중의 지도 자격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여도 과언이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이미 지도자의 자격을 가졌고 또 매주간 2-3회씩 지도할 기회가 있는 기독교도들은 반도 민중에게 활로를 지시하여야 되겠습니다. 우리들(我等)은 조선의 음덕을 감사하는 동시에 자손의 행복을 또한 개척할 의무가 있습니다. 진정한 활로를 자손들에게 지시하는 것은 그들로 하여금 행복의 생활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반도인이 어떻게 하면 활로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반도인이 지나인이 된다고 하면 활로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노서아인이 된다고 하면 활로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영국인이나 미국인이나 불국인이 된다고 하면 활로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 절대로 없습니다. 반도인의 활로는 오직 [내선일체]를 실현하는 데 있습니다. 그것을 다시 말하면 천황폐하의 적자(赤子)가 된 반도인의 활로는 순정한 일본인이 된다는 데만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반도 민중으로 하여금 이 진리를 하루 바삐 속히 인식케 하면 반도 민중은 현세대뿐만 아니라 자자손손이 행복의 생활을 얻게 될 것입니다.

 

기독교의 설립자라고 칭할 만한 사도 바울은 자기가 로마제국의 공민(公民)이 된 것을 영광스럽게 여기고 자랑하였습니다. 그와 같이 반도인들은 대 일본제국의 신민이 된 것을 영광스럽게 여기고 자랑할 것입니다. 그것이 반도인의 유일한 활로입니다. 반도인들은 이 기회에 죽은 과거를 청산하고 산 장래를 위하여 활동하여야 되겠습니다. 선각자가 된 기독교도들은 민중에게 이 활로를 지시할 책임이 있습니다.

 

끝으로 우리들(我等) 기독교도들은 만세일계(萬世一系)인 황실의 존엄을 봉대하여 황국의 최후 승리를 확신하여 광채있는 일장기하에서 [종교보국]에 노력하고 일상생활에 [공익우선(公益優先)]과 [멸사봉공(滅私奉公)]하는 성의를 발휘하며 세계에 무적한 황국의 육 해 공군의 무운장구(武運長久)를 위하여 열심히 기도하며 신동아 건설 성업을 위하여 물심양면으로 총력을 발휘하며 기독교도로써 특별히 실천할 이상 모든 책임을 철저히 완수하여 비상시국을 당면한 우리 황국을 위한 참된 공헌이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중략)...

 

일본정신은 그렇지 않습니다. 국민이 살아가는 것은 천황폐하의 은덕으로 인하여 되는 것을 감격히 생각하고 그 은덕의 만분지 일이라도 보답코자 하다가 일조유사지시(一朝有事之時)에는 생명을 아끼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일본국민은 국가를 위하여 또는 천황폐하를 위하여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하는 것입니다. 황국의 신민이 되었고 천황폐하의 적자가 된 반도인 기독교도들도 국가를 위하여 또는 천황폐하를 위하여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전일에는 먹고 입고 살기 위해서만 노력하였으나 금일부터는 우리의 사는 목적을 각성하고 사농공상간(士農工商間)에 무슨 직업에 봉사하든지 국가를 위하여 할 것이며 또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교회에 다니는 것도 국가를 위하는 일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도들은 교회에 대하여 반드시 충성을 다하여야 되겠습니다. 그러나 국가가 없으면 교회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 그런고로 우리 교회에 대하여 충성을 발휘하려면 먼저 국가에 대하여 충성을 발휘하여야 될 것은 물론이고 우리가 예수를 진실히 믿는 목적도 자기의 행복을 위하는 것보다도 충군애국의 원리를 위하는 것이 될 것이매 또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도 충군애국의 원리를 위하는 것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교회도 국가를 위하여 존재하고 우리의 신앙도 국가를 중심하여 가지고 [종교보국]을 실행합시다. 그와 같은 일은 하나님께서도 칭찬하실 줄 믿습니다." ([장로회보] 1941년 5월 21일, 28일자)

 

이상과 같이 그의 생애에서 그 어려운 시기에 남 북 감리교를 합동시키고 초대 총리사를 맡아 교세를 발전시켰으며 선교부와 교회의 재산을 지키려고 노력하였고, 해방 후에도 자중하여 일선 정치에는 뛰어들지 않았다는 점은 어느 정도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하더라도, 자의든 타의든 간에 그가 일제 하에서 교계 지도자로서 일제에 '순응적' 태도를 가졌고 친일협력을 하였으며, 그리고 해방 공간에서 여운형의 건준노선에 반대하고(양주삼은 여운형을 찾아가 건준 노선을 비판하다가 젊은이들에게 구타당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이승만의 남한 단독정부를 지지한 것 등은 그 개인 한 사람의 성향을 넘어 그가 가진 교계에서의 지위 때문에 교계와 사회에 크게 부정적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 참고 문헌 >

 

1. 이호운, {그의 나라와 그의 생애 - 총리사 양주삼 박사 전기}, 감리교 대전신학대학 출판부, 1965.

 

2. 한국감리교사학회 편, {양주삼 총리사 저작 전집}(전5권), 한국감리회 사학회, 1991.

 

3. 최은범 김학규 편, {대한적십자사 70년사}, 대한적십자사, 19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