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할 각오가 없으면 전도하지 말라
<마태복음강해 (#175)>
“저희가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명하여 가라사대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제자들이 묻자와 가로되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 하시니 그제야 제자들이 예수의 말씀하신 것이 세례 요한인 줄을 깨달으니라.”(마 17:9-13)
조건부 함구령
율법(신 19:15)에 따르면 증인 한 명으로는 증거로 성립될 수 없으니 최하 두세 명의 증언을 듣도록 요구하고 있다. 예수님이 변화산에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명의 제자를 대동하여 오른 것은 분명히 그 규정을 의식했다는 뜻이다. 증거로서 효력을 갖게 하려는 것이다. 말하자면 변화산에서 본 광경을 증거 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복음서의 유사한 경우와는 달리, 방금 일어난 사건을 끝까지 비밀로 부치라고 하지 않았다. 당신께서 부활할 때까지만 일시적으로 유보하라는 조건을 붙였다. 그럼 당신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는 맘껏 증거 하라는 뜻이다.
제자들이 증거 해야 할 변화산 사건의 내용과 의미는 무엇인가? 예수님은 인간이나 이 세상에 있는 사물들을 대상으로 기적을 일으키지 않으셨다. 천국에 있어야 하는 모세와 엘리야를 지상에 출현시켰다. 누가 들어도 비현실적이고 초자연적이며 판타지 같은 일인지라 직접 육안으로 목격한 자가 아니면 도무지 믿지 못할 것이다. 예수님이 부활 후에나 증거 하라는 것은 그 사건의 주인공인 당신께서 이 땅에 계시지 않을 때일 것이므로 더더욱 세 명의 증인이 필요했다.
반면에 예수님의 그 당부를 들은 세 제자들의 입장은 어떠했겠는가? 입이 근질근질해 미칠 지경이지 않았겠는가? 예수님의 얼굴과 옷과 주위 사방이 찬란한 빛으로 감싸였고, 자기들과 비교도 할 수 없는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자기들마저 빛난 구름으로 덥히면서 장엄하고 신비한 영광에 동참했었다. 또 하늘에서 엄숙한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다. 하나님과 맞대면 한 셈인데 그러면 당연히 죽을 줄 알고 두려웠는데 죽지 않고 살았다. 그들이 신비감과 경이로움만 느낀 것이 아니라 틀림없이 가슴 가득히 기쁨과 감사로 충만했을 것이다. 당장에 산 밑에 남아 있는 아홉 제자들에게 뽐내며 자랑하고 싶었지 않겠는가? 이야기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오히려 이상한 것이다.
제자들의 타당한 반발
그래서 예수님이 당분간 비밀로 하라고 하자 제자들은 당장 “그러면 어찌하여”(10절)라는 말로 대답을 시작했던 것이다. 예수님의 말을 수긍할 수 없고 반대한다는 뜻이다. 당분간 침묵하기보다는 지금 당장 증거하고 싶다는 것이다. 거기다 그럴 만한 타당한 이유가 있다고 덧붙였다. 방금 목격한 광경을 침소봉대하지 않을 것이며, 다른 제자들 앞에서 우월감에 들떠 허세도 부리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 합당한 이유는 바로 서기관들이 말하는 대로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는 것 때문이었다.
서기관들은 성경을 필사, 보존, 유지하는 직분을 맡았기에 성경을 풀어 가르치는 일을 했다. 요즘으로 치면 목사에 해당된다. 구약성경의 마지막 책인 말라기는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말 4:5)라고 예언했다. 크고 두려운 날이란 메시야가 와서 심판과 구원을 베푸는 날이다. 하나님은 그 날 이전에 먼저 엘리야를 보내겠다는 것이다.
제자들은 방금 엘리야가 온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다. 그러니 자신들이 놀랐던 신비한 광경도 광경이지만 엘리야가 왔다고 증언하겠다는 것이다. 나사렛에서 오신 우리 스승이 바로 메시야라고 선포할 참이었다. 모세가 함께 왔기에 더더욱 그러고 싶었던 것이다.
모세는 알다시피 하나님으로부터 거룩한 율법을 전수 받았다. 예수님은 그 율법의 일점일획도 땅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 선포하며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목적을 당신께서 완전히 실현하셨다. 나아가 율법과 대비되는 은혜의 구원을 베풀 것이다. 그래서 율법과 대조하여 십자가 은혜를 강조하려고 모세를 불러 내린 것인가? 물론 그런 뜻도 당연히 포함된다.
그러나 모세오경의 마지막 책인 신명기의 끝부분에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하시던 자요?”(신34:10)라고 말한다. “그 후”란 모세가 죽은 후다. 그 앞 신명기 18장에는 하나님이 장차 모세와 같은 선지자를 일으키겠다고 예언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오실 메시아는 모세와 같은 선지자일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예수님이 구약시대의 허다한 믿음의 선진들 중에서 유독 엘리야와 모세만 불려 내린 것은 당신 스스로 당신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제자들에게 완전히 각인시키려는 뜻이었다.
예수님 가르침의 핵심
마태복음에는 예수님이 함구령을 내린 것이 총 다섯 번 기록되어 있다. 첫 세 번은 중풍병자, 소경, 손 마른 자를 고쳐준 후에 그 환자들더러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당부했다. 네 번째는 바로 이 사건 전에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마 16:16) 후에 있었다.
예수님은 믿음의 고백인 반석 위에 나의 교회, 예수님이 머리가 되는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약속하신 후에 제자들더러 당신이 그리스도임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했다. 또 그 후에 비로소 당신께서 유대관원들에게 핍박을 받아 죽은 후에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을 가르치셨다.
변화산에서 내려온 후에 당부한 본문의 함구령은 마지막 다섯 번째다. 부활하시겠다는 약속을 그 엿새 후에 부활 후의 당신의 모습을 제자들에게 미리 보이심으로 그 실현을 보증하셨던 것이다. 천국의 영광을 이 땅에서부터 일부 맛보게 하신 것이다. 천국에 있어야 할 영혼들을 불러 내림으로써 당신만이 물질계는 물론 영계의 주인이자 통치자임을 알게 하셨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삼 년간 동고동락하면서 가장 중점을 두고 가르친 내용이 교훈과 도덕이 아니었다. 바로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라는 진리에 모든 초점이 모였다. 그 절대적이고 영원한 진리를 제자들로 눈으로 보고 몸으로 직접 체험하게 한 것이다. 변화산에서도 3명의 증인을 세운 것은 그 진리의 유효한 증거로서 요건을 갖추려는 것이다. 거기에다 하늘에서 하나님의 증언까지 곁들여졌다.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은 메시아가 오길 목을 빼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유대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성경인 모세오경의 결론은 모세 같은 선지자가 온다는 것이었다. 구약시대를 결론 짖는 구약의 마지막 책 말라기의 결론은 그 선지자가 오기 전에 엘리야가 먼저 와 그 사실을 알게 할 것이라고 했다.
말라기의 그 예언이 있은 후 약 4백 년간이나 하나님의 계시는 끊겼다. 헬라나 로마 같이 할례를 받지 않고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족속들에게 계속 시달림을 받으며 지배당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 세 제자들도 유대인인데 모세와 엘리야가 온 것을 직접 목격하고 어찌 잠잠히 있을 수 있겠는가? 성경에서 말씀하신 바로 그분이 진짜로 왔다고 목청껏 외치고 싶었을 것이다. 요컨대 변화산 사건으로 인해 제자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을 더 이상 의심하지 않았다. 부인하려야 할 수 없는 절대적 진리가 되었다.
예수님이 진짜로 염려한 것은?
예수님도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11절)고 제자들의 생각이 옳음을 인정해주었다. 너희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더러 증언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잠시만 유보하라는 것으로 그 이유를 12, 13절에 설명해주었다.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못 알아보고 임의로 대우했다는 것이다. 변화산에 나타난 엘리야는 말라기가 말하는 엘리야가 아니라는 것이다. 천국에서 불려 내려왔다가 곧바로 천국으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메시야 오심을 직접 선포하지 않았으니 더더욱 그 엘리야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보다 제자들도 나중에 인정했듯이 침례 요한이 바로 그 엘리야라는 것이다. 만약 제자들이 지금 우리가 모세와 엘리야를 보았으며 메시야가 왔다고 소리치면 그들 또한 엘리야, 정확하게는 침례 요한의 입장과 같아진다는 것이다. 그러면 침례 요한처럼 그들도 사람들에게 임의로 대우 받아 동일한 핍박과 고난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잘 새겨들으셔야 한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제자들이 고난 받을 것 자체를 염려한 것은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이미 온 엘리야를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라고 말씀하신 후에 “너희도” 이와 같이 고난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어야 한다. 그러지 않고 “인자도” 즉, 당신께서 고난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다.
표현이 조금 이상하지만 예수님은 어차피, 반드시, 곧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이다. 오직 그 일을 위해 성육신 하셨다. 스스로 골고다로 올라가 그 비참한 죽음을 기꺼이 맞을 것이다. 반면에 지금 제자들이 메시야가 왔다가 선포하면 침례 요한처럼 당신께서 십자가에 죽기도 전에, 말하자면 복음이 복음으로 완성되기도 전에 다 감옥에 갇히거나 죽음을 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정작 복음을 전해야 할 사람들이 없어지지 않느냐는 것이다.
예수님이 당신의 부활 후에 가서 증거 하라는 것은 오순절 성령을 받은 후에 증거하라는 뜻이었다. 진리의 영을 받아 십자가 복음의 의미를 충분히 깨달은 후에 올바르게 전하라는 것이다. 본문의 맥락으로 따지면 성령을 받아서 사람들에게 임의로 대우 받아 핍박과 고난을 당하더라도 얼마든지 견뎌낼 수 있는 담대한 권능을 덧입고서 전하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십자가에서 순교할 태세를 갖춘 후에 증거 하라는 것이다. 변화산에 오르기 전에 제자들에게 당신을 따르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했다. 당신을 위해 목숨을 잃으면 영원한 참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했다. 천국에서 면류관이 기다리고 있음을 보장하는 뜻으로 변화산에 모세와 엘리야를 불려 내리고 제자들더러 그 찬란한 영광을 맛보게 했다.
다시 말하지만 예수님이 제자들이 고난 받을 것을 염려하지 않았다. 아니 반드시 그럴 것이니 각오하라고 미리 못 박았다.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하기에 당신을 미워하는데 제자들도 세상이 아니라 당신께 속했으므로 환난을 당하게 마련이지만 성령을 보낼 테니 담대하라고 다짐하셨지 않는가?(요 15:19 & 16:33)
예수님은 제자들이 순교할 것까지도 염려하지 않았다. 아니 그들의 순교를 당신께서 계획하시고 이끄셨다. 예수님이 정작 걱정한 것은 오직 복음이 복음답게 바르게 증거되는 것뿐이었다. 또 그 일은 당신께서 직접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시는 모습으로, 또 그런 모습으로만 온 세상이 알도록 하시겠다는 것이다.
십자가 복음이 복음인 이유는?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이 말 그대로 복음(福音, good news)인 까닭이 무엇인가? 아주 간단하다. 하나님 본체이신 당신께서 당신과 당신의 죄인의 구속 사역을 직접 증명했기 때문이다. 당신의 몸으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보여주었다. 당신의 전부를 죄인인 우리를 위해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이다.
죄 가운데 빠져 있는 우리를 구원하러 하나님 그분이 진짜로 이 땅에 오셨다. 인간이 고안한 철학, 사상, 도덕, 종교가 아니기에 복음이다. 상처와 고난과 질병 뿐 아니라 사탄과 사망의 권세 아래에서 신음하는 인간의 모든 시련과 고통을 하나님 그분이 직접 체휼하시고 시험을 받으셨다. 우리들과 함께 울고 함께 웃으셨다.
하나님은 인간을 그냥 지구라는 별에 내버려둔 것이 아니었다. 당신께서 인간의 모든 수치, 두려움, 상처, 고난, 죄의 값을 다 짊어지고서 십자가에서 대신 감당하셨다. 하나님을 알되 오해하고 불순종한 유대인은 물론, 하나님과 원수 되어 완악하게 거역한 이방인들까지 그 모든 죄를 다 용서하셨다. 용서하신 것으로 그치지 않고 절대적이고 영원하며 거룩한 새 생명, 참 생명을 넘치도록 풍성히 부어주셨다. 한마디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인간의 모든 나쁜 것은 당신이 짊어지셨고, 대신에 당신의 모든 좋은 것을 인간에게 주셨기에 복음이다.
거기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에게 복음을 위해서 기꺼이 순교할 수 있는 권능을 실제로 덧입혀주셨기에 복음인 것이다. 당신께 충성하는 종으로 바꾸었다는 단순한 뜻이 아니다. 제자들이 진정으로 예수님의 복음 안에 있다면 바로 그 복음으로 인해서 그렇게 될 수밖에 없기에 복음인 것이다. 예수님처럼 자기 몸 전부로 하나님이 자기를 얼마나 사랑하고 계시는 지를 주위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기에 복음인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온전히 깨닫고 그 안에 거하는 자는 그분의 십자가가 자신의 마음과 생각과 육신 모두에게 정말로 절대적이고 궁극적 진리가 된다. 그분의 진리가 자기 안에 온전히 심겨지는 것이다. 정말로 예수님과 생생하고도 친밀하게 교제 동행하게 된다.
예수님이 세상 끝 날까지, 땅 끝까지 모든 족속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했다고 해서 전도하는 것이 아니다. 바울처럼 복음의 생명력이 실제로 자기 몸속에서 펄펄 끓고 있기에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기에 전도하는 것이다. 정말로 이제부턴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를 대신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자기를 구원해주신 바로 그분 예수를 위해서만 살게 된다.
예수님이 부활 후로 변화산 증거를 미루라고 한 것은 지금 단계에선 베드로와 제자들이 아직 그런 태세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제자들은 복음의 진리를 깨닫지 못했을 뿐 아니라 스승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마저 믿지 않았다.
그 무엇보다 자기 몸 전체를 세상에 내어주면서 복음을 복음답게 증거할 태세가 안 되어 있었다. 성령으로 거듭나기 전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님 말씀과 달리, 자신을 완전히 깨트리지 못했고 또 예수님의 십자가가 자신이 지고 가야만 하는 자기 십자가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예수님이 복음 전파보다 더 염려한 내용은?
이는 오늘날의 신자들도 진지하고도 심각하게 따져보아야 할 참으로 중요한 주제다. 베드로와 두 제자는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객관적인 진리로 인정했다. 그것도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절대적 계시에 비춰서 확신했다. 그럼에도 아직은 유대 민족 전체가 대망했던 메시야로만 인식한 것이다. 내가 그를 위해 살고 그를 위해 죽어야만 하는 나의 구주는 아니었다. 예수님만이 자신의 전부이자 알파와 오메가가 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하나다. 성령의 권능을 입기 전이었기 때문이다. 또 그 이전에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목격하지 못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이루신 일과 그 결과로 전 인류는 물론, 특별히 자기 자신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날지 전혀 몰랐다. 단지 엘리야와 모세를 직접 봤으니 자기 스승이 그리스도라고 다른 이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뿐이다.
주님의 뜻은 자기 안에 온전하고도 새로운 변화가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단순한 메시지만 전하다 죽으면 헛된 죽음이 된다는 것이고 제자들로선 그런 사실조차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복음을 시급하게 전파하는 일보다도 제자들 각자가 새 생명을 얻어 거룩하고도 풍성하게 바뀌는 일을 더 간절히 원하셨던 것이다.
오늘날의 신자들 중에도 이와 비슷한 경우가 많다. 심지어 이단들도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인정하고 그분의 십자가 은혜로만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진짜로 예수님이 자신의 진정한 주인이 된 사람들은 아주 드물다. 자신의 온전한 변화가 있기도 전에 단지 종교적 교리를 수긍하고 전하기에만 바쁘다. 신자나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교인 내지 종교인일 뿐이다.
사람은 누구나 가장 먼저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로 지금껏 원수 되었던 하나님과 진정으로 화목하게 되어야 한다. 성령으로 거듭나 하나님의 친 백성이자 자녀가 되어 그분의 영으로 호흡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이 인간이 이 땅에 실존하는 목적이다.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사람으로 바뀌기 전에는 온전한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이 창조했던 그 모습으로 회복되지 않았기에 참 인간답지 않은 것이다. 그 상태로 죽으면 헛된 죽음일 수밖에 없다. 전도서 기자가 한탄한 대로 해 아래서 하는 모든 수고는 헛것이다. 전도서 기자가 한 가지 전제를 붙였지 않는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명령을 지킬찌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전12:13)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인생으로서의 수고가 헛된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수 안에서 죽는 자의 인생은 그와 완전히 다르다. 꼭 순교해야만 되는 것은 아니다. 온 천하 만물을 지으신 창조자, 통치자이신 예수님과 이 땅에서부터 실제로 교제 동행할 수 있다. 변화산의 영광을 죽어서만 누리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서 자신의 모습이 어떠하든지 간에, 사람들에게 임의로 대우받아 조롱과 멸시를 당할지라도 기도와 말씀을 통해 예수님과 교제하고 그분이 가신 길을 따라가면 세상이 주는 차원과 전혀 다른 기쁨과 자유와 평강을 자기 몸 전체로 느끼고 체험할 수 있다.
나아가 예수님 따라가는 길의 종착지, 도착지가 어디인지 확실히 알고 있다. 지금 당장 죽더라도 눈을 뜨면 예수님의 품 안일 것을 확신한다. 변화산의 제자들처럼 자신을 기다리는 죽음 후의 영광이 어떨지 알고 그 일부를 이 땅에서부터 체험할 수 있다. 말하자면 자기가 어떻게 죽어야 할지 죽을 준비가 된 것이다. 자기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완전히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만 정말로 참 인간답게 제대로 잘 사는지 알게 된 것이며 그렇게 살고 있는 것이 신자다.
함구령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
예수님은 지금 베드로에게 너 자신 안에 복음이 완전한 복음으로 자리 매김을 하라는 것이다. 당신의 참 생명력으로 자기 존재가 완전히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삶과 인생에도 복음이 복음 되게 하여 네 생각, 심령, 말, 행동, 아니 삶 전체가 오직 복음에 의해 주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전부를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며 복음을 증거 할 수 있는 그날까지는 그 증거를 미루라는 것이다.
다른 말로 당신의 메시아 됨은 예수님께서 이미 직접 증거 하셨다는 뜻이다. 하나님 본체이신 당신께서도 도수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아무 말씀하지 않으시고 순순히 십자가에 달리셨다. 모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으로써 오직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는 모습으로 당신의 그리스도 되심을 당신이 증거 하셨다.
당신의 그리스도 되심은 골고다 언덕과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서 만 천하에 넘치도록 충분히 입증되었다. 더 이상 다른 증거가 필요 없다. 십자가의 예수님만이 모든 인간에게 구원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은 궁극적이고 절대적 진리다. 사람들이 믿든 안 믿든 그 진리 됨에 아무런 영향이 없다. 믿는 사람이 단 한 명도 남지 않더라도 그 사실에 아무 영향을 미치지 않으며 그분의 영광은 영원토록 어떤 변함도 없다.
따라서 제자들이 정작 중점적으로 증거 할 내용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진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제자들은 그 대신에 자신이 완전히 새 사람이 된 것을, 그것도 말이 아니라 몸으로 증거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분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시는 것을 자기 삶에서 드러내는 것이 신자가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다. 자기 삶에서 복음이 복음 되는 모습을 보여 알게 하라는 것이다. 바울처럼 복음의 생명력이 자신의 속에서 활활 타오르게 해서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그 일을 중지케 못하게 하고, 아예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하라는 것이다.
물론 예수 믿어 거듭났다고 금방 다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죄와 사탄의 시험에 쓰러지고 넘어진다. 그러나 진정으로 겸비하게 그분의 은혜 가운데 거하면 그분의 생명과 빛이 신자를 뚫고 조금씩, 조금씩 밖으로 비춰져 나오는 것이다. 그러다 언젠가는 베드로나 바울처럼 십자가를 지고 순교하는 자리에까지 이르게, 정확하게는 그분이 이끌어 주신다.
변화산 이야기를 당분간 미루라고 한 마지막이지만 사실은 가장 중요한 뜻이 하나 더 있다. 일반적으로 함구령을 내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말해 봤자 말하지 않은 것보다 더 못한 결과를 낳을 것이 빤하기 때문이다. 전하는 자나 듣는 자가 오해하거나 심지어 이해하지도 못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주님의 뜻은 정말로 복음을 복음답게 전하라는 것이다. 오직 참 복음만 전하라는 것이다. 당신께서 세상 죄를 지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살아나신 그 은혜와 권능만이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임을 절대적 진리로 전하라는 것이다. 혹시라도 이와 다른 복음을 전하면 천사라도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다는 것이다.
참 복음, 온전하고 순수한 십자가 은혜를 전하는 신자들은 본문에서 예수님이 염려한 대로 세상 사람들로부터 임의대로 대우 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 전해진 진리만은 절대 그들이 임의대로 대하지 못한다. 그들이 구체적으로 분별하지는 못해도 신자 속에 있는 예수의 생명력으로 인해 자신에게 뭔가 모를 영적 찔림과 울림은 있게 된다는 것이다.
삶 전체로 복음을 전하라고 해서 말로 전도하지 말라는 뜻은 결코 아니다. 말로 전해지는 복음과 삶으로 증거 되는 복음에 전혀 차이가 없도록 하라는 것이다. 신자의 삶을 통해서 주위 불신자에게 찔림이 생기지 않는다면 신자의 속에 있는 예수의 생명력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쇠퇴하고 있다는 증거다. 다시 한 번 기도와 말씀 가운데 그분과 그분의 십자가 은혜를 깊이 묵상한다면 그분의 생명력이 다시 힘차게 살아나며 자신은 물론 그 주변까지 거룩하고 아름답게 변화시킬 수 있게 된다. 그것이 바로 세상 사람이 알지 못하며 신자만이 가진 신분, 특권, 소망, 능력, 은혜, 소명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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