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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란죄에서 자유로워지려면?

에반젤(복음) 2021. 6. 15. 04:23

음란죄에서 자유로워지려면?

 

음란죄에서 자유로워지려면?




인터넷 사역의 가장 두드러진 장점은 익명성이 보장된다는 것입니다. 출석하는 교회에서 쉽게 털어놓지 못하는 신앙적인 의심이나 남모르는 개인적인 고충 등을 마음 놓고 상담 혹은 토의할 수 있습니다. 음란죄를 어떻게 하면 잘 다스릴 수 있느냐는 것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최근에 기독청년들로부터 부쩍 유사한 질의와 상담을 많이 받고 있기에 체계적으로 정리해둘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성(性, sexuality)은 아름다운 것이다.


성은 성경적으로 아름답고 신성하기까지 한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추하거나 부끄러운 것이 아니므로 신자가 결코 멀리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경이 ‘아가’라는 책 한권으로 설명할 만큼 인간에게 특별히 신자에게 너무나 중요한 일입니다. (아가서는 전통적으로 신랑인 예수님과 신부 되는 교회(성도) 사이의 사랑이 그 주제라고 해석해왔으나 최근에는 남녀 간의 애정과 성에 관한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입니다.)


인간이 이 땅에서 생육하고 번성하는 축복을 누리는 통로가 바로 성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성은 다른 동물들처럼 단순히 종의 번식만을 위한 목적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이 땅을 당신을 대신해서 다스리라는 소명을 주셨고 아담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아서 돕는 배필로 이브를 붙여주셨습니다. 하나님께 받은 소명을 서로 힘을 합쳐서 함께 이뤄나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소명이 가장 먼저 가정을 통해서 성취되길 바란 것입니다. 타락 후에 그 임무가 교회로 옮겨진 것처럼 자칫 오해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신자에게 주신 하나님의 두 절대적 계명이 첫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며 둘째는 그와 똑같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첫째 계명을 배워서 훈련받는 곳이라면 가정은 첫째와 둘째 계명 둘 다를 최우선적으로 실현해야할 장소입니다.


가족끼리도 예수님의 사랑으로 섬기지 못하면 이웃은 더더욱 그러지 못합니다. 가족은 뒷전이고 불신자 전도에만 나서는 신자들이 있는데 큰 잘못입니다. 전도를 해도 가족부터 먼저 해야 합니다. 신자의 가정이 가장 먼저 예수님을 머리로 모시는 그분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 가정 안에 살아계신 하나님이 은혜롭게 역사하는 모습을 주변 사람들로 보고 알게 해야 합니다.


현세대의 타락상의 출발은 가정이 파괴되고 가족 간의 사랑도 돈에 의한 이해타산관계로 대체되었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그래서 더더욱 하나님과 가족 간에 진정한 사랑이 넘치는 가정을 통해서 예수 믿은 신자다움과 거룩하신 하나님을 불신 세상 앞에 증명해야 합니다. 음란죄는 이 소명 실현을 가장 크게 훼방하는 죄가 됩니다.


음란죄의 정의


그리고 극히 일부의 포유류를 제외하고는 인간만이 번식기가 아닌 평소에도 성의 축복을 누릴 수 있으며 오르가즘이라는 좋은 선물까지 받았습니다. 날이 갈수록 부부 간의 사랑이 더욱 깊어지게 하려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부부 간에는 성은 더 많이 즐길수록 좋은 것입니다 그러면 금실이 좋다는 칭찬을 받지 음란하다고 비난받을 일이 결코 아닙니다. 음란이란 그래서 정상적이지 않는 사이에서 성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더러 음란죄를 짓지 않게 하려고 문란한 성관계에 질병이 따르게 했습니다. 모든 죄가 그러하듯이 음란죄를 범하면 반드시 스스로 수치스럽고 두려워지며 습관적으로 지속되면 현실적 정신적 영적인 피폐함까지 생깁니다. 심지어 신체적으로도 심각한 부작용과 폐해가 따라오게 됩니다.(롬1:26,27) 그래서 모세율법은 성적 범죄에 대해서 아주 엄격하게 취급하고 있습니다.(레20장)


예수님은 음란죄의 의미와 범위를 더 확대해서 가르쳤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5:28) 실제적인 간음행위를 하지 않고 마음에 음욕만 품었어도 간음이라고 말합니다.


혈기 왕성한 청년이 여자를 볼 때에 자연적으로 스쳐지나가는 성적인 생각을 정죄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음욕(음란한 욕심, lust after her)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어떤 여인을 두고 성관계를 맺으려는 음란한 생각을 지속적으로 품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은 간음은 음욕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그 둘은 동일한 범주라는 것입니다. 비정상적인 관계의 여인에게 외적으로 넘어선 안 될 선을 넘는 것이 간음이고, 내적으로 넘어선 안 될 선을 넘는 것이 음욕입니다. 십계명에서 간음하지 말라는 제 칠 계명은 이웃의 배우자에게 직접 행동으로 범한 위반이며, 이웃의 아내에게 음욕을 품는 것은 열 번째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는 계명을 위반한 것입니다.


음란죄를 막는 최고 간단한 방안


음란죄를 막는 방안은 아주 간단합니다. 결혼하여서 정상적인 배우자 사이에서 성을 아름답게 유지하면 됩니다. 바울은 결혼한 부부에게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가 절제 못함으로 말미암아 사탄이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고전7:5)고 권했습니다. 만약 함께 동거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면 자칫 성욕을 절제하지 못하고 사탄의 꾐에 넘어가 음란죄를 저지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를 빼고는 분방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비록 과부에게 권하는 개인적 충고이긴 하지만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결혼하라 정욕이 불 같이 타는 것보다 결혼하는 것이 나으니라.”(고전7:9)고 했습니다. 결혼하여서 정상적인 성관계를 가지면 가장 손쉽게 음란죄를 막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현재의 사회여건이 여러모로 아주 힘든 것이 사실이지만 기독청년들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결혼하여 가정을 갖고서 자녀를 낳아야 합니다. 그럴 수 없는 특별한 신체적 혹은 영적인 이유가 없는 한에는 말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결혼해서 자녀를 갖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경륜 안에서 신자에게 주신 첫째 소명입니다. 비록 자녀를 양육하는 일이 아주 어렵지만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기에 당신께서 책임져주신다는 믿음을 갖고 신실하게 가정을 가꿔나가야 합니다.


물론 결혼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데 문제는 크게 둘입니다. 첫째는 최근 아무래도 결혼이 아주 늦어지므로 그 긴 기간 동안 청년들이 넘치는 성욕을 어떻게 잘 절제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둘째는 결혼하고도 이웃의 아내를 탐하는 것입니다. 이 두 문제에 대해서 성경에 본받아야 할 아주 좋은 사례가 있습니다. 첫째는 청년이 절제에 성공한 케이스이고, 둘째는 기혼자가 절제에 실패한 케이스입니다.


절제에 성공한 요셉과 실패한 다윗


“여인이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으나 요셉이 듣지 아니하여 동침하지 아니할 뿐더러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 그러할 때에 요셉이 그의 일을 하러 그 집에 들어갔더니 그 집 사람들은 하나도 거기에 없었더라 그 여인이 그의 옷을 잡고 이르되 나와 동침하자 그러나 요셉이 자기의 옷을 그 여인의 손에 버려두고 밖으로 나가매.”(창39:10-12)


용모가 준수한 청년 요셉에게 반한 주인 보디발의 아내가 날마다 노골적으로 유혹했으나 요셉은 아예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만 있게 되는 기회를 완전히 차단한 것입니다. 그런 어느 날 요셉이 볼일이 있어서 집으로 들어갔는데 그 여인이 집에 아무도 없는 것을 틈타 요셉의 옷을 붙들고 늘어졌으나 요셉은 아예 옷을 벗어던지고 도망갔습니다.


틀림없이 요셉이 집으로 오는 시간에 맞추어서 다른 모든 종들을 멀리 내보내었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둘만 합의하면 아무도 모르고 비밀로 지나갈 수 있었습니다. 자기 욕망을 채우지 못한 여주인이 화가 나서 요셉을 강간 미수의 누명을 덮어씌웠습니다. 요셉이 자칫 목숨을 잃을 뻔 했으나 평소에 워낙 성실하고 정직하게 주인을 섬겼기에 옥살이 하는 것으로 그쳤습니다.


“저녁 때에 다윗이 그의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옥상에서 거닐다가 그 곳에서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히 아름다워 보이는지라 다윗이 사람을 보내 그 여인을 알아보게 하였더니 그가 아뢰되 그는 엘리암의 딸이요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아니니이까 하니 다윗이 전령을 보내어 그 여자를 자기에게로 데려오게 하고 그 여자가 그 부정함을 깨끗하게 하였으므로 더불어 동침하매 그 여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삼하11:2-4)


다윗왕은 밤중에 옥상을 거닐다가 아름다운 여인이 목욕하는 장면을 훔쳐보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도 예수님이 경고한 대로 계속 음욕을 품다가 참지 못해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보게 했습니다. 지금 전쟁에 나가 왕과 나라를 위해 싸우고 있는 충신 우리야의 아내인 줄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결국 절제하지 못하고 왕의 지위를 이용해서 왕궁으로 데려와 간음죄를 범했습니다. 다윗이 얼마나 절제를 못했는지 부정함(아마도 월경 기간 중이었을 것임)을 깨끗케 하도록 기다려주었습니다.


이 두 기사를 보면 음란죄를 범하지 않는 비결과 절제하지 못한 원인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은 그런 죄를 범하게 될 기회를 아예 처음부터 차단해버렸습니다. 아무도 모를 수 있는 기회였는데도 기어이 도망쳤습니다. 워낙 믿음이 신실해서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렸던 것입니다.(살전5:22)


반면에 다윗은 아름다운 여인을 오래 동안 바라봤습니다. 우연히 그런 장면이 눈에 띄었다 하더라도 요셉과 달리 그 자리를 피하지 않은 것이 치명적인 실수였습니다. 계속 쳐다보니까 자꾸만 마음속에 음욕이 불같이 일었고 그런 생각에 완전히 사로잡혀서 이성적인 분별과 판단을 전혀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은 충직한 부하를 살인까지 하는 더 큰 죄에 빠졌고 그 형벌로 불륜으로 낳은 아들도 곧바로 죽었습니다.


음란죄를 막는 현실적 방안


흔히들 음란죄에 대해서 잘못 알고 있는 사항이 하나 있습니다. 마음에 음욕이 생겼으니까 비정상적 성관계를 갖거나 요즘으로 치면 포르노를 보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말했습니까?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으면 간음이라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요셉처럼 여자를 보지 않으면 또 포르노를 보지 않으면 음욕이 생기지 않습니다.


바울이 부부가 별거하면 자칫 사탄의 꾐에 넘어가 절제하지 못하게 된다고 경고했습니다. 사탄이 사람들에게 거짓말로 유혹한다는 것입니다. “포르노를 보는 것은, 다윗처럼 여인이 목욕하는 장면을 보는 것까지는 죄가 아니다. 내가 음란한 행동만 하지 않으면 된다. 그리고 나는 얼마든지 절제할 수 있다.”라고 속삭이는 것입니다. 이만한 거짓말도 없습니다. 정확히 말해서 그렇게 의지나 믿음이 강한 사람은 너무 드뭅니다.


요셉은 그 때 십대 후반으로 정말로 정욕이 불일 듯 하는 시기였습니다. 주인의 아내와 계속 함께 있다가는 자기도 절제하지 못할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그 자리를 무조건 벗어난 것입니다.


사탄이 이브를 원죄로 타락시킬 때도 거짓말로 속였습니다. 사탄의 유혹이 있기 전까지는 이브는 선악과가 동산중앙에 있어도 주시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금지하신 탓도 있지만 틀림없이 그 열매가 아주 평범해서 아무 매력도 느끼지 못했을 것입니다. 만약 다른 과일에 비해서 색깔과 모양이 아주 예뻤다면 하나님이 인간을 타락으로 유혹했다는 일말의 책임을 면할 수 없습니다.


선악과에 별로 관심이 없던 아담과 이브에게 사탄이 너희가 그것을 먹으면 하나님처럼 될 것을 하나님이 싫어해서 먹지 못하게 했고 먹어도 절대 죽지 않는다고 속삭였습니다. 그러자 비로소 이브는 그 열매를 자세히 쳐다보게 됩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창3:6) 가만히 보고 있으니까 이젠 다른 어떤 과일보도 더 먹음직해져버린 것입니다.


다윗왕의 실패도 동일한 경로를 거쳤습니다. 그에겐 이미 아내가 여럿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여인을 자꾸 쳐다보니까 모든 여인들 중에 가장 매력적으로 여겨진 것입니다. 단순히 정욕을 처리하려면 아내와 후궁들과 동침하면 됩니다. 그러나 계속 쳐다봄으로써 그 여인의 아리따운 자태가 자기 머리에 각인되었습니다. 다른 여자와 비교해보니 다른 여자는 여자도 아니게 여겨졌으니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행동으로 옮긴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음욕이 생겨서 여인을 보고 간음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여인을 오래 보면 음욕이 생겨서 간음하게 됩니다.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이라는 우리말 속담이 요셉이나 다윗의 경우에 비추어보면 진리입니다. 이성에 눈의 뜨일 때는 함께 두면 절제하지 못할 수 있다는 뜻이지 않습니까?


음란죄는 근본적으로 나만 (때로는 두 당사자만) 알고 있는 일이고 언제든지 다시 정상적인 관계로 돌아갈 자신이 있다는 착각에서 비롯됩니다. 사탄은 그냥 자꾸 보기만 하라고 유혹하지 터치하라고는 말하지 않습니다. 보기만 해도 거의 모든 인간이 절제 못하고 음란죄에 빠질 것을 너무 잘 알기 때문입니다.


말씀과 기도에 전념하라.


청년이든 기혼자이든 음란죄에 빠지지 않는 최선의 길은 그럴 수 있는 기회를 아예 제거하는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자극적인 인터넷 사이트는 아예 접속하지 못하도록 조치해야 합니다. 스팸 메일로 무차별로 공격 유혹해도 눈 찔끔 감고 차단 클릭을 눌러야 합니다.


기혼자는 특별히 자기 아내와 다른 여인을 비교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다른 여인과 단 둘이 있는 기회는 절대로 갖지 말아야 합니다. “영화보고 식사 정도 같이 하는데 무슨 문제야 서로가 성인으로 지켜야할 선을 안 넘을 자신이 있다”는 것만큼 자기를 기만하는 거짓말은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탄에게 넘어간 증거입니다.


물론 청년들이 자기 의지만으로 그러기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른 일에 시간과 수고를 완전히 집중해서 그런 생각이 들지 않게끔 노력하는 것이 현실적인 방안입니다. 직장이나 자신이 성취하려는 일이나 취미활동 혹은 운동 등에 완전히 몰두하여서 잡생각이 들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집에 들어오면 혼자 있게 마련입니다. 만약 가족이나 동거인이 있으면 자기 방문을 활짝 열어 놓거나 최소한 잠금 장치를 없애는 것도 현실적 방안입니다. 혼자 자취한다면 녹초가 되도록 일이나 운동을 하고 바로 잠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가능한 친구와 함께 숙소를 공유하고 낮에도 다른 사람과 다른 일들에 시간을 많이 소진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근본적으로는 말씀과 기도에 집중하여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항상 거룩하게 유지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요셉은 하나님과 관계를 언제 어디서나 잘 유지했기에 여인을 뿌리칠 수 있었습니다. 반면에 다윗왕은 사방 대적을 거의 다 파하고 나라가 굳건한 반석 위에 서자 잠시 영적인 나태에 빠졌던 것입니다. 여인이 목욕하는 장면을 보았을 때에 그가 그전까지 항상 해왔던 습관대로 하나님께 잠시 기도만 했어도 그런 엄청난 죄에 빠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신자도 여전히 죄의 본성이 남아 있는 연약한 존재인지라 이 문제는 특별히 청년들에게는 그리 쉽게 극복될 성격은 아닙니다. 인간의 삼대 본능 중의 하나이자 가장 절제하기 힘든 본능입니다. 혹시라도 잘못을 범하면 그 때마다 주님께 토설하며 진정으로 회개해야 합니다. 이 습관적인 죄를 이기게 해달라고 간절히 또 꾸준히 기도해야 합니다. 자기 심령에 주님의 마음으로 채워달라고 성령님의 인도를 구하십시오. 그럼 점차 음란죄가 너무나 추하다는 생각이 생기게 해주십니다.


무슨 일이든지 하지 않으려면 그것이 아주 마음에서 싫어지거나 현실적으로 손해라는 철저한 인식이 생겨야만 가능합니다. 음란죄가 추할 뿐 아니라 자꾸 자신이 크게 부끄러워져야 합니다. 무엇보다 육체적 쾌락을 일시적으로 충족시키는 것으로 끝날 뿐이라는 착각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로지 신체적 정신적 영적인 손해만 생길 뿐 백해무익(百害無益)이라는 각성이 생겨야 합니다. 자칫 다윗처럼 더 큰 죄로 발전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 그만큼 인생에서 시간낭비가 없다고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 단계에 이르기 전까지는 누차 강조하지만 요셉처럼 그런 기회를 아예 차단하거나 도무지 그럴 수 없을 때는 밖으로 뛰쳐나가는 것이 최선입니다.


박진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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