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자료/종려주일 설교

[스크랩] [종려주일] 그 자취를 따라가자 (벧전 2:19-21)

에반젤(복음) 2021. 2. 21. 00:23

그 자취를 따라가자 (벧전 2:19-21)


19.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오늘 이 시간 “그 자취를 따라가자”라는 제목입니다. 우리 성도들 건강한 모습으로 보게 되어 반갑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코로나바이러스19를 속히 극복하게 해주시기를 이 시간 축복합니다. 종려주일은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화목제물이 되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군중들이 종려가지를 들고 환영했던 사건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시고 입성하실 때 제자들과 무리들이 메시아를 환영하기 위해 자기들의 겉옷과 함께 종려나무 가지를 길에 펴면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외치며 환호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모시되 기쁨으로 모시기 바랍니다. 우주의 모든 보물보다 더 귀하신 예수님을 모셨으니 세리장 삭개오처럼 항상 기쁘고 즐겁게 사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주님을 모신 자의 올바른 반응입니다. 그렇게 산다면 예수님이 여러분의 진짜 보물이 되시고 영원한 행복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또 한 가지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나타납니다. 앞서 가신 주님의 자취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눅 23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그 뒤에는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왔습니다. 제자들은 두려워 모두 뿔뿔히 흩어졌지만 여인들은 그 주님의 뒤를 따랐습니다. 성경이 이 모습을 보여주신 것은 우리들도 이렇게 따르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따를까요? 21절에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하셨습니다.


주님 가신 길에는 어떤 자취가 있을까요?


1. 겸손의 자취가 있습니다.


마21:5에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했습니다. 당시 왕은 군대의 호위를 받고 즐비한 신하를 거느리고 백마를 탔습니다. 만왕의 왕이신 메시아가 그런 모습으로 나타난다면 그보다 100배 1000배도 더 영광과 존귀를 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어린 나귀를 타신 것은 만왕의 왕이신 메시아이심을 상징적으로 나타내시고자 하셨을 뿐 어떤 세상적인 권세와 영광을 취하고자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겸손이라고 말씀합니다. 마21:5에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자기를 나타내지 않으셨습니다. 어린 나귀를 타시다니,,, 어쩌면 우스꽝스러울 만큼 겸손하셨습니다. 마11:29에도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하셨습니다. 겸손이 주님을 따르는 길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시기 바랍니다. 자기를 크게 여기지 마십시오. 내가 누군데 하는 순간 시험에 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이 겸손이고, 그 말씀대로 따르는 것이 겸손입니다.


2. 복종의 자취입니다.


빌2:6-8에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하셨습니다.


주님은 아버지 말씀에 죽도록 복종하셨습니다. 순종하셨지만 여기서는 복종하셨다 했습니다. 순종과 복종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복종은 이유가 없습니다.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22:42) 하셨던 것처럼 아버지의 뜻이라면 따르는 것이 복종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신 기도는 단지 고통이 싫어서만은 아니셨습니다. 아버지의 영광 때문에 하신 기도였습니다. 그러나 희생의 제물이 되는 것이 아버지 뜻이라고 확신하셨을 때 주님은 아버지의 뜻에 절대 복종하셨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억울한 죽음이 속죄양입니다. 권력자들이 자신들의 잘못의 책임을 힘없는 사람에게 다 뒤집어 씌워 죽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것이 사실인 줄 알고 너도나도 욕하고 비난합니다. 이 얼마나 억울한 일입니까? 주님은 그 길을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가신 길을 ‘비아 돌로싸’(via dolorossa)라 부릅니다. 비아 돌로싸에는 14정류소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가시다 멈추신 지점들입니다. 그중에 구레네 시몬이 십자가를 받아 대신 진 지점은 제 5정류소입니다. 구레네 시몬은 예루살렘에 구경 왔다가 사형수의 십자가를 지게 되었습니다. 포악한 로마군인 앞에 군소리조차도 낼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종입니다.


억지로 십자가를 졌지만 롬16:13에 나오듯 구레네 시몬의 가족들은 복을 받았습니다. 루포와 알렉산더 등 그의 자녀들은 로마의 저명한 교회 지도자가 되었고, 그의 아내는 바울의 오른팔보다 더한 어머니 같은 일군이었습니다. 주님을 불평하고 교회를 불평하고 주의 일군들을 불평하면 절대 가정에서 그런 일군 안 나옵니다. 질고가 치료됐거나 평안과 기쁨을 얻었거나 예수 만난 놀라운 기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3. 사랑의 자취입니다.


눅23:28에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자기를 따라오며 우는 여인들에게 향하여 하신 주님의 말씀입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고 가시면서도 예루살렘을 생각하셨습니다.


눅13:34에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탄식하신 것과 같습니다.


주님은 자기를 못 박는 자들을 위해서도 용서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주님 가신 길은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우리 인류의 죄를 지고 가신 사랑의 길입니다. 이 자취를 따라가십시다. 그래서 주님은 “나를 따르라.”하셨고, 따르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13:35)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신 사람 중 하나는 스데반집사입니다. 스데반 집사는 하나부터 마지막까지 예수님을 본받았습니다. 행7:59-60에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주님을 닮아도 이렇게 닮을 수가 있나요?

 

세상을 살아가는 가장 큰 무기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사랑의 천사가 된다면 아무도 우리를 해하지 못할 것이고, 세상은 천국으로 변하고 모두 모두 주님 앞으로 나오게 될 것입니다. 사랑 속에 지역 나라 민족 복음화 세계복음화의 놀라운 비전이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 소망 사랑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했습니다.

 

4. 사명의 자취입니다.


마26:53-54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셨습니다. 주님은 잡히지 않기 위해서 열두 령 즉 12사단도 더 되는 천군을 부를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시면 대속의 십자가를 지실 없습니다.


우리들도 그 자취를 따라가야 합니다. 그래서 골1:24에 바울은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했습니다. 남이 지지 않으려는 것을 지고 예수님을 따르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그 길이 주님 사랑하는 길이며 영생과 함께 핍박과 기업을 겸하여 백배로 받는 길입니다(막10:30). 주를 위해 사명의 십자가 지는 사람들을 주님은 그저 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웃과 교회와 나라와 인류를 위해 기도할 사명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지 않으면 누가 하겠습니까? 역사상 가장 위대한 물리학자로 꼽히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히틀러가 독일 국민들을 선동하여 전쟁을 일으키려고 했을 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나는 독일전란 때 자유를 애호하는 자였다. 나는 이것을 보수하기 위하여 대학교들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 독재자의 탄압 아래서 모든 대학교들도 침묵을 하였다. 나는 다시 신문 편집자들을 보았다. 그러나 그들도 침묵을 하였다. 나는 독일의 자유를 위하여 글을 쓰던 유명한 저술가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들도 벙어리가 되었다. 그러나 교회만은 히틀러의 탄압 아래서도 진리를 위하여 굳게 서는 것을 보았다. 나는 전에 교회에 대하여 흥미가 없었던 사람이었으나 이제 나는 교회에 대하여 애정과 탄복을 느끼는 바이다." 이처럼 세상을 위한 사명도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호산나 부르던 많은 사람들은 다 어디가고, 주님과 함께 라면 죽는 데도 가겠다고 맹세하던 제자들은 모두 흩어지고, 사랑하는 어린 제자 요한과 여인들만 주님을 따랐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편에 서시겠습니까? 주님을 따라가십시다. 주님의 자취를 따라가십시다. 우리 모두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따르는 길이 구원의 길이요, 생명의 길이요, 영원히 복된 길임을 깊이 명심하고 십자가 지고 겸손과 복종과 사랑과 사명의 주님의 자취를 따라가는 가장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agas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