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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인물소개] 모니카 (성 어거스틴의 모친)

에반젤(복음) 2021. 1. 26. 10:47

모니카 (성 어거스틴의 모친)

 

   

 331년에 북아프리카의 한 부유한 가정에서 한 여자 아기가 태어났다. 이 아기는 그녀의 아버지가 어릴 적부터 이미 그 집안 일을 돌보고 있던 한 늙은 하녀로부터 기독교 신앙을 접하였다.  이 아이의 이름은 모니카(Monica)였다. 모니카는 로마의 관원이며 부유한 지주였던 파트리키우스(Patricius)라는 비 기독교인과 결혼하여 누미비아에서 거주하였다. 결혼후 모니카는 줄곧 남편이 주님께로 돌아오기를 간구하였다.

베드로전서 3장의 말씀에 따라 모니카는 말보다는 자신의 절제되고 단정한 품행을 남편의 회심을 위한 도구를 삼았다. 그녀의 온유와 겸손은 그리스도의 양어머니라고 불려질 정도였다.

 남편 파트리키우스는 거의 인생의 종착점에서 기독교인이 되었다.  모니카는 종종 다투는 사람들 사이에서 피스메이커로 통하였고, 교회의 선생과 목회자를 정성을 다하여 섬기는 교회의 여인이기도 하였다.

  

 

 

모니카는 그녀의 가족이 실제로 모두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올 것이라는 것을 굳게 믿고 기도했다. 그녀는 남편의 구원을 위하여 16년을 기도했다. 또한 그녀는 자녀를 주님의 말씀으로 양육하고 교훈하고 훈계하였다. 그녀는 사랑하는 아들 아우구스티누스(st. Aurelius Augustinus, 354-430)를 위해 최고의 학문을 가르쳤다. 그러나 이런 훌륭한 교육의 목적은 아들이 이런 교육을 통하여 좀더 하나님께 가까워지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젊음의 욕정과 자만을 경계하는 어머니의 교훈을무시하고 한 여인과 동거에 들어갔고 아데오다투스라는 아들을 낳았다. 모니카는 아들을 비난하기보다는 아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쉬지 않고 기도하였다. 사랑하는 아들 아우구스티누스를 위한 모니카의 간절한 기도는 장장 30년동안 계속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교수로 로마에 갔을 때 모니카도 함께 동행하였다. 모니카는 밀란에서 암브로시우스가 목회하는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계속하였다. 그녀는 아들이 암브로시우스와 교류하기를 원했는데, 실제로 아우구스티누스는 그 자신 수사학자로서 당시 밀란의 유명한 수사학의 대가라고 할 수 있던 설교자 암브로시우스 감독을 찾아가곤 했다. 물론 이것은 순전히 수사학적 만남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는 아우구스티누스로 하여금 기독교인이 되는 한 계기로 작용했다. 이러한 만남이 지속되던 어느 날 암브로시우스의 설교를 듣고 돌아와 정원에서 묵상을 하던 중 회심의 사건이 일어났던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회심은 단순히 개인적인 결단의 결과가 아니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그의 모친 모니카는 아들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가지고 기도의 끈을 놓지 않았던 위대한 어머니였다. 기나긴 기다림의 시기동안 그녀의 단 한가지 관심은 아들의 영화로운 삶이 아니라 그 영혼의 사람다운 회복이었다. 후일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고백록]에 "나의 어머니는 젖과 함께 구주 그리스도의 이름을 마시고 살게 하셨다"고 고백한 바 있다.

  젊은 시절 진리를 찾아 마니교에 심취하였다가 33세에 밀라노의 주교 암브로시우스의 설교와 정원에서의 체험을 통해 회심하고 후일 힙포의 주교가 되어 활동했던 위대한 서방교부 아우구스티누스는 어머니의 기도가 맺은 서방 기독교의 역사상 가장 값진 열매였던 것이다.

  모니카는 387년 그녀의 나이 56세, 아우구스티누스의 나이 33세에, 회심한 아들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오기 위해 도착한 오스티아 항구 근처에서 병을 얻어 사망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고백록에서 그 때의 심정을 회상하며 "그동안 눈물로 나를 지켜내신 어머니는 지금 내 시야에서 떠나가셨지만, 나는 하나님의 시야 안에서 살게될 것이다"라고 기록하였다.

  모니카의 헌신과 기도는 이교도 남편을 신앙으로 인도한 것은 물론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교부, 성 어거스틴을 길러내었던 것이다.

출처: 「카페」로뎀나무 원문보기 글쓴이: 카페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