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절 종합/성탄절 설교

스크랩 성탄절 설교 - 경배하는 자를 인도하시는 하나님

에반젤(복음) 2020. 12. 20. 00:13

경배하는 자를 인도하시는 하나님 (마 2:1-12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마 2:1-12)

오늘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태어나신 기사를 전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헤롯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고 하는 기록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한 아기의 태어남을 이처럼 성경에 기록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한 아기의 태어남을 이처럼 자세하게 설명하면서 신약을 시작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은 바로 오늘 언급하고 있는 이 아기 예수의 탄생이 다른 아기들의 탄생과는 다르다고 하는 사실 때문인 것입니다. 아기의 외모도, 태어나는 모습도 세상의 다른 이들과 전혀 다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이 아기는 이 세상에 태어났던 수많은 아이들의 출생과는 구별된 출생이었습니다. 그 누구도 수천 년 전부터 예언되어져 이 땅에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 아기의 출생은 그저 우연한 출생이 아니었고 구약으로부터 예언된 탄생이었던 것입니다. 미가 선지자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칠백여 년 전의 사람입니다. 그는 이렇게 예언하였습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미 5:2).

이 아기가 태어날 때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목자가 없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와서 그 나라를 다스렸고 수많은 인물들이 태어나서 참된 도를 알려 주었지만, 이 아기가 태어나기 전까지 이스라엘 백성은 목자 없는 유리하고 방황하는 양떼와 똑같았습니다. 말구유에서 초라하게 태어날 이 아이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은 비로소 한 목자의 다스림을 받으며 행복하게 푸른 초장으로 인도 받으며 살 수 있는 구원의 길이 열렸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I. 본문 배경

본문 말씀은 아기 예수께 경배하기 위해 먼 여행길을 마다하지 않은 동방박사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들도 이 사람들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지만, 이들과 관련된 수많은 전설들이 있고, 이 사람들 이야기를 하지 않고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해서 이야기 할 수 없을 정도로 친밀해진 사람들입니다. 사실 이 세 사람들이 누구라고 단정 지을 만한 정설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인도에서 온 사람들이라고 하며, 또 어떤 사람들은 파르티아(Parthia) 혹은 그리스 혹은 애굽에서 온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들의 신분에 관한 의견도 천차만별입니다. 이들을 왕들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고, 귀족들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교회의 전승에 의하면 이 세 사람은 멜키오르(Melchior), 발타사르(Balthasar), 가스파르(Gaspar)라는 이름을 가진 자들이라고 전해집니다. 본문 말씀 속에서는 이들을 ‘박사’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희랍어 성경에서는 ‘마고스(magos)’라고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영어 ‘magic(마술)’의 어원이 되는 용어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마술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이 됩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들이 생각하는 마술하는 자들이 아니라 천체 현상을 연구하면서 인간의 생사화복과 길흉을 예측하는 점성술사들이라고 여겨집니다. 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도 이를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별에 대한 의견도 분분합니다. 세 사람의 착각이었을 것이라고 보기도 하며, 혜성의 출현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천제에서 일어나는 정기적인 현상 중 하나였을 것이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것을 선택하든 간에 이 별의 나타남은 이적(異蹟)적인 현상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이야기들은 의문에 싸여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어떻게 그 별을 보고 유대인의 왕을 찾게 되었는지, 또 유대인의 왕으로 나실 그분이 이 사람들에게 왜 그렇게 중요한 분으로 비춰졌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한 가지 사실은 자신들은 비록 유대 족속은 아니었지만 이 기적적인 사건을 통해 유대인의 왕으로 오시는 이가 자신들과도 관계가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었으며, 그 믿음과 신앙이 그들로 하여금 먼 길을 여행하여 예수 그리스도께 경배하러 오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이 세상의 모든 죄인들을 위한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II. 별빛을 따라 온 사람들

성경을 보면 이 사람들은 별을 보고 출발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출발하는 그 자체는 별을 발견하게 된 것이 계기였지만, 이후의 여행길은 자신들도 알지 못하는 미지의 세계를 향한 여정이었습니다. 그들을 인도하는 것은 오직 별빛 하나뿐이었습니다. 때문에 낮에는 행로를 멈추고 밤이 되길 기다려야했습니다. 누구에게 자신들의 갈 길을 물어 볼 수 있었겠습니까? 오직 별빛을 보내시는 하나님만이 저들의 안내자였고, 그들의 소망은 오직 하나님의 인도하심뿐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 것도 손에 잡히는 것이 없는 가운데 하나님의 인도하심 하나만을 바라보며 어디서 끝이 날지도 모를 그 길을 가는 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입니다. 신앙은 보지 못하는 세계에 첫 발을 내딛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신앙 속에는 보이는 것보다 더 분명한 증거가 있으니, 곧 하나님은 살아계시며 내 삶을 선하게 인도하고 계신다는 믿음입니다.

오늘 성경의 문맥을 잘 살펴보면 그 별이 나타났다가 예루살렘에서 사라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별빛 하나만을 의지하고 온 그들이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신지를 물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은 또한 헤롯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의 왕이었던 자신 말고도 또 다른 왕이 탄생하였다는 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왕의 명령으로 모인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미가 선지자의 예언을 들어 유대 땅 베들레헴에 메시아가 날 것임을 이야기 하게 됩니다. 그제서야 별은 다시 그들을 비췄고, 그 별의 인도함을 받은 동방박사 세 사람은 아기 예수님께 경배하였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는 모든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몇 가지 진리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A. 동방 박사들에게 먼저 알려짐

첫째,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인의 왕으로 나실 분이라 예언된 분인데 그 예수 그리스도의 태어나심이 유대인들에게는 철저히 감추어지고 오히려 이방사람들인 동방의 박사들에게 먼저 계시되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는 우리에게 아주 심오한 진리 하나를 생각나게 만듭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이루어진 복음은 모든 혈통과 나라를 뛰어넘어서 구원을 갈망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계시될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신 곳, 그분이 가르치고 섬기며 사신 곳, 마지막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인간의 구속을 이루신 그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시며 그분이 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는지가 철저히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왜 이 세상에 오셨으며, 그분이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이 무엇이며, 왜 인류의 유일한 구원의 희망이 되시는지에 대한 답변, 곧 복음의 진리가 유대인들에게는 감추어졌지만 이스라엘의 혈통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우리들에게는 열려 있습니다. 그들보다도 우리에게 물어보면 예수님에 대한 진실을 더 들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경륜(經綸)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과 함께 이루어질 복음의 축복이 혈통과 지역에 메이지 아니하고 주님이 택하신 모든 사람들에게 전파될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 기쁘고 놀라운 소식은 예루살렘이 먼저 듣고 온 유다 백성들이 먼저 즐거워해야 하는 사건이 아닙니까? 또한 이방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그리스도는 온 인류를 구원하실 메시야로 오신 것이라고 가슴 벅찬 함성으로 전해 주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방인 세 사람에 의해서 오히려 그러한 이야기들을 들어야 하는 처지가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복음은 결코 가문대대로 주님을 믿는다고 해서 저절로 그 자손들의 마음속에 환히 비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적인 환경이나 기독교적인 분위기속에서 자랐다고 해서 그들이 반드시 복음의 빛을 지니고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조상 대대로 그리스도와는 상관이 없고 복음과는 거리가 먼, 철저한 이방인으로서 살았던 사람들에게도 복음의 찬란한 빛은 비추어지고, 이로써 믿음의 한 세대를 시작하게 하십니다. 습관적으로 주님을 섬기고 예배하고 있지만, 복음을 알지 못하는 수많은 교인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방인들에게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이가 어디 계시뇨’라고 질문을 받았던 그 유대 백성들과 종교지도자들 만큼이나 부끄러운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오늘 여러분들에게 간절히 권하는 것은 교회에 나오고 주님의 약속의 백성이 된 것으로만 만족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복음의 빛이 여러분의 마음과 온 삶에 찬란하게 비치기를 사모하십시오. 그래서 그 복음의 빛으로 매일 매일을 살아가는 그런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B. 길을 잃은 경배자들

둘째, 아기 예수를 경배하기 위해서 그 먼 길을 여행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별빛이 사라지는 때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러해 전, 이 본문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 사람들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틀림없이 가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많은 주석가들은 이들이 준비해 온 예물들을 미루어 볼 때, 아마도 상당한 지위에 있었던 사람들이라고 추정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상상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늘 취미삼아서 별을 관측하던 남편이 황급히 뛰어내려 오면서 가까이 있는 친구들에게 연락을 했습니다. “자네도 그 별을 봤지? 이것은 아마도 인류역사를 위해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 한 인물이 탄생할 것을 우리에게 예고하고 있는 것일 게야. 우리 그분을 경배하러 가세.” 그리고는 집안에 깊이 간직해 두었던 가보와 같은 금과 유황과 몰약을 가지고 황급히 행장을 꾸렸겠지요. 그때에 아마도 부인들은 이렇게 물었을 것입니다. “여보, 어딜 그렇게 황급히 가오? 유대인의 왕으로 오실 그분이 태어나는 곳이 어디인지, 그리고 언제쯤이면 그 여행이 끝이 나는지는 알고 떠나는 것입니까?” 이렇듯 그 어느 것도 예측 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그들은 떠났을 것이고, 별빛 하나만을 믿고 예루살렘까지 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별빛이 사라진 것입니다. 이들에게 무슨 잘못된 동기가 있었습니까? 비뚤어진 탐심이 있었습니까? 아기 예수를 만나 무엇을 얻어가고 싶었을까요? 저들이 바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들의 간절한 소원은 인류역사를 위해서 중대한 의미를 가지고 이 세상에 오신 유대인의 왕인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껏 경배하는 것, 그것뿐이었습니다. 이것이 저들이 가진 최고의 소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별빛이 사라진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에서도 이렇게 별빛이 사라지는 밤을 지날 때가 있습니다. 이제껏 믿고 따라오던 삶의 목표가 사라지는 것 같은 때, 목표는 남아있다 하더라도 뭔가 의지하며 붙들고 살아가던 것들을 잃어버리고 우리 자신이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된 것 같은 때가 있습니다. 이런 일들은 대부분 우리의 죄와 허물 때문에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탐욕에 가득 찬 우리의 눈과 죄와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범죄한 우리들의 마음은 하나님의 선명한 인도하심을 잃어버리게 만듭니다. 우리의 마음의 눈으로 볼 수 있었던 하나님의 모습, 우리의 영혼의 귀로 늘 청취할 수 있었던 아버지의 음성이 전혀 들리지 않는 영혼의 캄캄한 밤을 지날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에 어두운 밤이 찾아오면, 우리의 삶에도 어두움이 드리웁니다. 그래서 가야할 곳이 분명하고 목표가 분명하던 사람들이 갈팡질팡하기 시작합니다. 예전에 가지고 있었던 신앙적인 확신들이 사라지고 수많은 회의와 불안들이 고개를 들기 시작합니다. 삶의 목표가 예전에는 분명했으나 이제는 희미해져 버립니다. 늘 나와 함께 하시는 것 같았던 하나님의 인도가 사라져버린 것 같은 절망적인 상황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매일 매일 새로워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영혼에 대한 예민한 감각을 늘 유지하면서 사는 일은 짐승처럼 자기의 욕심을 따라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영원히 맛볼 수 없는 행복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최고의 행복이 무엇일까요? 우리의 육신의 눈으로는 하나님을 볼 수 없고, 육신의 귀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없으나 우리의 영혼의 눈과 귀는 이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확실하게 인식하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최고의 행복은 바로 이것입니다. 위기 속에서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시련 속에서 주님의 목소리를 청취할 수 있고, 고난 속에서 나를 위로하고 붙드시는 주님을 뵈올 수 있는 이 축복을 능가하는 행복이 우리에게 있을 수 있습니까?

우리의 죄와 불순종, 악한 번뇌들은 이러한 영혼의 감각을 송두리째 앗아갑니다. 어렸을 때 참으로 짓궂은 장난들을 많이 했습니다. 그중 가장 빈번하게 했던 장난이 가을철 뛰어다니던 귀뚜라미를 잡아서 더듬이를 잘라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귀뚜라미는 더듬이를 가지고 방향감각을 잡는데 이것을 잘라 버렸으니 어디로 뛰어야 할지를 몰라 우왕좌왕하게 됩니다. 어린 시절 그러한 벌레를 보고 신기해했던 기억이 납니다. 욕망과 죄로 인해 무감각해진 우리의 영혼이 이와 똑같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은 날마다 부어주시는 새롭고도 새로운 주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 누구도 신앙생활에 있어서 교만해 질 수 없습니다. 성령으로 시작하여 육으로 마치는 사람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아침마다 새로운 주님의 은혜와 자비로 하루하루를 살아야 합니다. 매일 매일 자신의 영혼의 때를 벗겨내고, 자신의 모습을 하나님의 거울 앞에 진솔하게 비추어보아서 진실하게 반응하는 아주 정직한 신앙의 노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인생에서 별빛을 잃어버리고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는 상황은 반드시 태만하고 나태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 전심으로 경배하고 그 분을 높이기 위한 순수한 마음 하나로 이 먼 길을 걸어왔던 동방 박사들과 같은 사람들에게도 별빛을 잃어버릴 때가 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만을 섬기며 살기로 결심한 사람들에게도 때로는 이렇게 철저한 어두움 속에 팽개쳐지는 그런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결심을 가지고 살아가면 하나님의 인도와 기쁨과 사랑과 은혜만이 충만한 날들이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지 쉽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초보적이며 교과서적인 이야기입니다. 사도바울의 생애를 보십시오. 그리스도 예수를 만난 이후로 사명 하나를 따라 살기로 작정했지만, 그는 수없는 영혼의 어두운 밤들을 지나야 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만 섬기며 살려고 하나 때로는 별빛조차 사라진 어두운 밤하늘 아래서 갈 길을 물어야하는 처지에 놓일 때가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진심으로 경배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때때로 이러한 영혼의 어두운 밤을 경험하게 하시는 것은 그들이 종종 잃어버리기 쉬운 것들을 깊이 깨닫게 해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주님을 열렬히 섬기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오류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의 은혜보다는 자기 자신을 대견하게 생각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에 대한 강력한 자부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기관차처럼 씩씩하게 주님 한 분만을 위해서 막 달려가던 우리에게 어느 한 시점에서 별을 잃은 밤하늘 아래서처럼 갈 길을 몰라 불안에 떠는 날들을 주시기도 하십니다. 이는 주님을 위해서 아주 씩씩하게 살아올 수 있었던 그 모든 날들은 사실은 내 자신의 힘과 능력에 달렸던 것이 아니라, 날마다 새롭게 나를 인도해주시고 내 갈 길을 지시해 주시던 그 하나님의 인도와 도우심을 따라 온 길이었음을 깊이 생각나게 해주시기 위함입니다. 참 감사한 일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영적인 깊이는 얼마나 자기 자신이 비참한 사람인지를 깨닫고 주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가에 의해서 가늠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이 세 사람에게 무슨 잘못된 동기가 있었습니까? 오직 아기 예수를 만나고, 그 예수께 진심으로 경배하고자 하는 소원 말고는 다른 잘못된 바람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어떤 보상을 바랬던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어떤 대가를 요구했던 것도 아닙니다. 그들의 간절한 소원은 인류 역사에 이처럼 중대한 임무를 가지고 오신 메시야 되신 그분께 진심어린 경배를 드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별빛조차 사라진 밤하늘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 만났고, 주님의 깊은 사랑을 경험했으며, 자신과 같은 죄인을 향해서 베푸신 하나님의 자비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난 다음, 우리 각자의 성화의 정도는 차이가 있고, 실제적 삶에서 이를 구현하며 사는 모습에도 차이가 있을 수는 있으나 ‘하나님께로부터 입은 그 은혜가 너무나 크기 때문에 주님을 섬기고 경배하며 사는 것 외에는 아무 소망이 없습니다’라고 하는 이 고백은 우리 모두가 동일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의 마음을 압니다. 여러분들의 마음 저 깊은 곳에는 착한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그 마음을 저는 압니다. 그리고 그 마음을 가진 모든 사람들의 심정 속에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소원 - ‘비록 남처럼 뛰어난 지식이나 많은 물질, 뛰어난 재능이 없다 할지라도 내가 사는 날 동안 온 힘을 다해서 어찌하든지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며 살았으면 좋겠다’ -이 있음도 말입니다. 우리의 죄를 구속하시기 위해 이렇게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셨던 그분을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에 우리 영혼이 경험하였던 그 변화들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 하나님의 사랑 앞에 품었던 우리의 진실한 소원이 어떠했는지를 한번 돌이켜 보십시오. 주님의 그 큰 사랑 맛본 이후로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주도적인 소원은 오직 이것 하나뿐이지 않았습니까?

III. 경배하는 자를 인도하심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주시는 소망이 있으니, 곧 잠시 길을 잃은 경배자들을 베들레헴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사실 베들레헴이 아무리 작은 동네라고 하지만, 그 때는 가이사의 명령에 따라 인구 조사를 받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이동하던 때라 예수님이 태어난 장소를 찾기란 무척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라졌던 그 별이 다시 나타나 찬란하게 빛을 비추며 그들을 인도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주님을 진심으로 경배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잠시 잠간 어두운 밤하늘 아래 두시기는 하지만 영원히 그렇게 하지는 않습니다. 진실로 우리 주님은 그러한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속에 진심으로 주님을 섬기며 살고 싶어 하는 정직한 소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훈련시키시기 위해서 때때로 잠시 별빛을 잃은 것 같은 상황 속에 두시기는 하지만 영원히 그렇게 하지는 않으십니다. 가슴을 졸이면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메시야에게 경배하고픈 저들에게 드디어 찬란한 그 빛이 다시 나타났습니다. 저들은 기뻐하였습니다. 왜 그렇게 기뻐한 걸까요? 아, 이제 주님을 경배할 수 있게 되었구나! 바로 그것입니다. 금년 한 해 동안 가장 감사드릴 제목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십시오. 수많은 감사 제목들이 있겠지만 이렇게 형편없는 인간을 사용하셔서 주님이 섬김을 받으셨다는 것, 우리같이 더럽고 부족한 사람들의 섬김을 통해서 그분의 일들을 이루어 가셨다는 사실이 우리의 가슴을 저리게 만드는 가장 큰 감사제목이 아닙니까? 우리같이 쓸모없는 죄인들을 용서해주신 것만 해도 감사한 일인데, 그런 우리들에게 사명을 주셔서 어느 한 곳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살도록 만들어 주신 것은 그 얼마나 큰 은혜 입니까?

결국 그들은 아기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습니다. 이는 아기 예수께 경배하고자 하는 진실한 소원이 헌신으로 이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만을 사랑하며 섬기기를 소원하는 사람들의 그 마음은 그가 일생 동안 무엇을 위해 헌신하며 살았느냐와 직결됩니다. 단순히 말로서만 고백할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있는 이 사랑의 작용에 있어서도 그것과 일치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누구를 사랑하며 살아야 됩니까? 당연히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님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며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우리 입술로 고백해야 할 바이며, 동시에 우리의 마음이 실제로 그렇게 느끼며 살아야 할 바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헌신하면서 자신의 삶을 드리는 것은 자기를 죄에서 구원하신 예수님을 진실로 사랑하고 그 분을 경배하면서 살아가고픈 그 사람의 마음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충성된 삶이며, 주님을 위해서 자신을 다 드리는 삶입니다. 일생을 살아도 아무것도 사랑하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하는 그 사람의 마지막은 너무 쓸쓸합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사랑하고, 자신들에게 맡겨진 영혼들을 깊이 사랑하고, 주님 안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사랑하며, 그렇게 받은바 충성을 다하는 자들의 삶은 그분 앞에서 참으로 보람된 삶입니다. 이처럼 기뻐하고 기뻐하던 사람들에게 결국은 예수님과의 만남이 허락되었습니다. 그 얼마나 놀랍습니까? 유대인들에게는 철저히 가려졌던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의 위대한 비밀과 축복이 이방인들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주님 앞에 드렸습니다.

IV. 결론: 경배자로 삽시다

여러분의 성탄절은 어떤 날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이 세상에 사람의 몸을 입게 하셔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주실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었습니다. 주님에게도 아들보다 더 귀한 것을 우리에게 주실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게 내민 구원의 손을 붙들고 그 구원의 은혜를 받게 된 우리들의 마땅한 반응은 그러한 그분을 경배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번 성탄절이 우리의 인생에 한 전환점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그 큰 사랑을 알고, 이제 우리도 주님을 위해 우리의 가장 소중한 것을 주님께 드리는 그런 성도의 삶을 살게 되는 전환점 말입니다. (김남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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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꿈돌이 동산 원문보기 글쓴이: 어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