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절 종합/성탄절 설교

성탄주일 설교 - 예수를 잃어 버린 사람들 / 눅 2 : 41 - 52

에반젤(복음) 2020. 12. 18. 07:02

성탄주일 설교 - 예수를 잃어 버린 사람들 / 눅 2 : 41 - 52

 

 

아주 오래 전 잡지에서 읽은 기억이 있는 이야기 하나를 소개해 드리고 싶습니다. 비틀즈 단원 중 한 사람이 솔로로 데뷔하는 자리에 지금 이름은 잘 기억할 수 없지만 아주 유명한 가수 한 사람이 권총을 들고 무대로 올라가 쏴 죽이겠다고 난동을 부린 적이 있었답니다.

사람들이 나서서 겨우 말린 후 왜 그렇게 화가 났느냐고 물었답니다. 그때 그 가수의 대답은 '저 놈의 노래엔 혼이 없어. 혼이 없는 노래를 부르는 것을 용서 할 수 없어'였다고 합니다.

저는 그 때 그 글을 읽으며 참 많은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냥 대중적인 가벼운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인 줄 알았는데 자기 나름대로 자기 노래에 혼을 담으려고 노력을 하고 있었구나 그래서 세상적으로도 인기를 얻고 성공을 하는 가수가 되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당신의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창조물 하나 하나에 당신의 혼을 불어 넣으셨습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 하셨다'는 말씀이 나오는데 하나님의 신은 영어로 'sprit of God'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정신을 의미하고, 그것은 하나님이 혼과 얼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실 때 그것 하나 하나에 당신의 혼과 얼을 심어 창조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 만물은 다 하나님의 창조물입니다. 그 속에는 하나님의 혼이 있고 하나님의 얼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이 있고 하나님의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아름답고 완벽한 것입니다.

음악을 듣다가 죽고 싶은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음악이 살아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음악 속에 그 음악을 작곡한 사람의 혼과 그 음악을 연주하고 지휘하는 사람의 얼이 담겨져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을 깨닫고 느끼고 그리고 그것에 감동하였을 때 정말 황홀하였었습니다.

어느 호텔 커피 숍에서 음악을 연주하는 사람들이 정성 없이 연주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음악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들어주는 청중이 없는 곳에서 혼을 불어넣는 연주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자연 저들의 연주에는 혼이 없었습니다. 짜증이 났습니다. 권총을 들고 무대로 뛰어 올라갔었다는 어느 가수가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었습니다.

혼을 불어넣은 음악과 혼을 불어넣는 연주를 들을 때, 혼이 들어있는 미술 작품을 감상할 때, 혼이 들어있는 책을 읽을 때 우리는 감동합니다. 그러나 그 혼과 얼이 빠진 음악과 그림 그리고 책을 만날 때 우리는 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분노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무가치한 것이고 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자기 철학과 신념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혼이 살아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신이 살아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만나면 기쁩니다. 그런 사람과 이야기를 하면 정말 시간 가는 줄을 모르게 됩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그냥 말이 통하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말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처럼 근사한 것은 없습니다. 저는 결혼을 앞두고 하나님께 말이 통하는 사람과 살게 해 달라고 기도했었습니다. 말이 통하는 아내, 말이 통하는 친구, 말이 통하는 자식. 사람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축복 중에 하나라고 저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좀 험한 표현이지만 세상에는 혼이 빠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가리켜 얼 빠진 사람이라고 합니다. 혼과 얼이 빠진 사람은 추합니다. 아무리 돈이 많은 부자라고 하여도, 아무리 출세하여 세상 권력을 다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하여도 그의 삶에는 아름다움이 없습니다. 감동이 없습니다.

그것은 예수를 믿는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 중에도 얼이 빠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많습니다. 그렇게 되기가 쉽습니다. 우리도 얼마든지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들에게 얼과 혼은 예수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마음과 정신이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의 혼이고 얼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예수가 없는 것을 종종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모인 교회에 정작 예수가 없는 경우를 우리는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아버지 요셉은 성전에 올라갔다 돌아오는 길에 예수님을 잃어버렸었습니다. 하룻길이나 잃어 버렸었습니다. 저들은 예수님이 저들과 함께 동행하고 있는 줄 알았습니다. 뒤늦게 그와 같은 사실을 깨닫고 사흘 길을 돌아가 예수님을 성전에서 다시 찾을 수 있었습니다. 잃어버리는데는 하루가 걸리지만 잃어버린 예수를 다시 찾는데는 사흘이 걸렸습니다.

우리들에게 그와 같은 착각이 있습니다. 예수를 오래 믿었기 때문에 당연히 자기 속에 예수가 있을 것이라는 착각이 있습니다. 자기가 목사요 장로요 집사이기 때문에 당연히 자기 속에 예수가 있을 것이라는 착각이 있습니다. 전에 자기 속에 예수가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지금도 예수가 자기 속에 있을 것이라고 착각하는 착각이 있습니다.

세상적으로 목회에 성공하여 큰 교회를 이루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모이고 교회 재정도 넉넉하기 때문에 당연히 그 교회에는 예수님이 계실 것으로 착각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 우리 한국교회는 특히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와 우리는 그와 같은 착각을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예수님을 잃어버린 사람이 아닌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정작 중요한 예수님을 잃어버린 교회가 아닌가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예수 믿는 사람에게 얼입니다. 혼입니다. 그 예수 한 분 우리에게서 떠나시면 우리는 그냥 얼빠진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얼빠진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요란하게 떠들어도, 구제를 합네, 선교를 합네 떠들어도 얼빠진 노래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 저희 교회 게시판에 저에 대한 쓰여진 글 몇 편을 읽었습니다. 저에 대하여 염려하며 혹은 안타까워하며 쓰신 글이었습니다. 그 중 한 두 가지가 마음에 깊이 걸려 많은 생각을 하게 하였습니다. 그것은 '김동호 목사가 개인적인 야망을 이루기 위하여 높은 뜻 숭의교회를 개척하여 이용하는 것이 아닌가?' '그 개인적인 야망을 이루기 위하여 수 천명의 추종자들을 모으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것이었습니다.

상당한 충격을 제게 주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왜 그렇게 삐딱하게 사람을 볼까?'하는 마음과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제 의식과 의도 속에 그와 같은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은 글과 지적은 매우 예리하고 중요한 것이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아직까지 제 의식과 의도 속에 그와 같은 생각과 마음이 없다고 하여도 언제 그와 같은 의식과 의도를 가지게 될 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앞으로가 아니라 이미 제 무의식과 의도되지 않은 일들 속에 그와 같은 위험이 내재하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저는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펄펄 뛰면 변명하기 보다 나와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도 얼마든지 그렇게 될 수 있다고 인정하고 조심하는 것이 옳고 유익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비젼과 야망처럼 색깔이 애매하고 모호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 나름대로 제가 평생 주님 안에서 꿈꾸어 오던 비젼을 이루기 위해 교회를 개척하고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언제 개인적인 야망으로 바뀌게 될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언제 내게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과 혼이 빠져나가게 될는지 아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것을 조심하지 않으면 자기는 비젼이라고 붙들고 있는데 그것이 비젼이 아니고 개인적인 야망이 되어 얼빠진 사람이 될는지 아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인 추종자를 불러모으려고 교회를 개척한 것이 아닙니다. 추종자가 아니라 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정말 함께) 교회를 세워 가보기 위하여 교회를 개척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초심(初心) 언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변하여 동역자들을 추종자로 취급하고 생각하게 될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저를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늘 조심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 그와 같은 글을 읽었을 때 조금 섭섭했지만 많이 감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 안에 맹목적인 추종자만 붙여 놓지 않으시고 좋은 의미에서 파숫군과 감시자들을 붙여 놓으셨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예수를 잘 잃어버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언제 어디서 잃어버리게 될는지 알 수 없음으로 늘 조심하고 경계하여야만 합니다.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가 비젼을 개인적으로 야망으로 바꾸지 아니하고 동역자들을 추종자로 만들지 않기를 위하여 다시 말해서 한 마디로 예수님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함께 조심해 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교회의 중심에 계시지 아니하고 사람이 그 자리에 대신 하지 않도록 사람이 주인이 되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언제나 주인이 되시는 교회가 되기 위하여 늘 조심해 주시고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주 오래 전 이중섭의 작품전을 구경한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날 이중섭의 어느 그림 앞에서 아주 아픈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눈물을 흘리며 저는 그 그림이 살아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때 제가 흘리는 그 눈물이 바로 이 그림을 그릴 때 이중섭이 흘렸던 바로 그 눈물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 그림에는 작가인 이중섭의 혼과 얼이 살아 있었습니다.

이중섭이라는 사람은 비록 가난하여 은박지 껍질에 철필로 그림을 그렸지만 그의 그림에는 얼과 혼이 있어 가치가 있습니다. 저는 이중섭 보다 많이 부자여서 좋은 물감과 붓을 가지고 그림을 그릴 수 있을겁니다. 그러나 제게는 제 혼과 얼을 그림 속에 불어넣을 수 있는 달란트가 없습니다. 때문에 저의 그림은 아무리 좋은 물감과 붓으로 그렸다고 하여도, 아무리 좋고 비싼 캔버스에 그렸다고 하여도 가치가 없는 죽은 그림이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작은 교회라고 하여도 예수님과 예수님의 혼과 얼이 살아있는 교회라면 좋은 교회입니다. (그러나 무조건 작은 교회라고 해서 예수님과 예수님의 혼과 얼이 살아있는 교회는 아닙니다. 사람들은 뜻밖에 그와 같은 착각을 잘합니다)

아무리 큰 교회라고 하여도 예수님과 예수님의 혼과 얼이 빠져 있는 교회라면, 그리하여 그 교회의 중심과 주인이 하나님이 아니고 어떤 한 인기 있는 사람이 되어 있다면, 다시 말해 비젼을 가장한 개인적인 야망이 교회를 움직이고 있다면 그 교회는 죽은 교회입니다. 무가치한 교회입니다.(그러나 무조건 큰 교회라고 해서 예수님과 예수님의 혼과 얼이 빠져 있는 교회는 아닙니다. 대형교회 목사라고 해서 모두가 다 타락한 목회자는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뜻밖에 그런 착각을 잘 합니다)

아마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는 이중섭과 같이 은박지에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되지는 못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좋은 물감과 붓을 가지고 크고 화려한 캔버스에 그림을 그려도 그 속에 예수님이 계신다면 좋은 물감과 붓 그리고 크고 좋은 캔버스 때문에 비난을 받아서는 안 되리라 생각합니다.

은박지이던 크고 화려한 캔버스든 그것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과 얼이 담겨져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를 개척하고 처음으로 맞는 성탄절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예수님'입니다. 예수님 한 분 잊어 버리거나 잃어버리면 순식간에 우리는 얼빠진 사람, 정신나간 교회가 되어 세상 사람들에게 지탄을 받는 사람들이 될겁니다. 아무리 요란하게 신앙생활과 교회생활을 하다가 하나님 앞에 가도 하나님은 '내가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라시며 우리를 뿌리치실 것입니다.

저는 진심으로 오늘 이 복된 성탄절에 저와 여러분 그리고 사랑하는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에 예수님이 성탄 하시기를 소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 속에 그리고 우리의 의도와 무의도 속에 언제나 예수님이 계시기를 소원합니다.

제가 좋아하여 전에 우리 교회 게시판에 올렸던 이해인 수녀의 '겨울 길을 간다'라는 시를 읽는 것으로 오늘 설교를 마치려고 합니다.


겨울 길을 간다.

봄 여름 데리고 호화롭던 숲
가을과 함게 서서히 옷을 벗으면

텅 빈 해질녘에 겨울이 오는 소리
문득 창을 열면 흰 눈 덮인 오솔길

어둠은 더욱 깊고 아는 이 하나 없다
별 없는 겨울 숲을 혼자서 가니
먼 길에 목 마른 가난의 행복

고운 별 하나 가슴에 묻고
겨울 숲길을 간다.

고운 별 같은 예수님 한 분 내 삶에 계시면 겨울 숲길을 가도 행복하겠지만 고운 별 같은 그 분 한 분 잃어버리면 비록 내 삶이 풍성한 여름과 가을 같다고 할지라도 아무 것도 아님을 저는 믿습니다.

언제나 고운 별 같은 예수님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듯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그리고 사랑하는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가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복된 성탄절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