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한 자 속에 오신 예수
누가복음 1:26-38
구원의 역사가 시작된 성탄에 여러분의 가정에 하나님의 축복과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오늘 우리가 맞는 이 성탄은 예수의 단순한 생일 축하만은 아닙니다. 원래 우리가 갖는 생일 축하란 한 생명이 이 땅에 탄생하여 한해 한해 무사히 건강하게 성장하였음을 기뻐하면서 축하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성탄을 축하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 위대한 성인들의 생일을 기리고 그날을 기념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한 생명이 태어나서 위대한 업적을 남겨 놓았기에 그의 생애가 시작된 날을 의미 있게 기억할 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탄을 축하하는 것도 아닙니다. 물론 그런 요소들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단순한 한 생명의 탄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은혜목회정보- 97.11 ☞설교/박성규목사
그것은 탄생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들어오심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은 성육신이라고 말합니다.
요즈음 석가의 탄생일인 사월 초파일을 휴일로 정하고 옛날 교회가 성탄 축하했던 것보다 더 요란스럽게 축하하고 있습니다만 석가의 탄생은 한 생명의 탄생에 불과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의 탄생은 기독교가 말하는 것과 같은 신이 인간이 되는 사건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특별한 사건이요, 역사적인 사건이며 또 한번밖에 없는 사건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탄 축하는 단순한 축하에 그쳐서는 안되고 항상 그 의미를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복음서를 기록한 기자들이 예수의 탄생 기사를 쓸 때 어떤 유명한 인물의 자서전을 쓰듯 쓴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의 뜻을 밝히려고 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시간 예수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살펴보고 같이 은혜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특히 탄생하신 아기 예수를 만난 사람들을 중심으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는 갈릴리 나사렛의 한 평범한 처녀인 마리아의 몸을 빌어 탄생하셨습니다. 마리아는 자기를 가르켜 "계집종의 비천함"(눅 1:48)이라고 하였습니다. 겸손의 말이지만 별로 특출한 것이 없는 한 시골 처녀에 불과했습니다.
예수는 어떤 왕족이나 귀족 여인의 몸을 빌어 오시지 않고, 나사렛 시골 처녀의 몸을 통하여 오신 것입니다. 흔히 어떤 인물의 전기를 쓸 때는 그 생애를 실제보다 더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 보통인데, 예수님의 경우는 오히려 그 반대로 일부러 낮고 천한 탄생을 강조하고 있는 인상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한 평범한 시골 처녀였지만 그에게는 겸손한 마음과 순종할 줄 아는 마음이 있었고, 또 놀라운 인내력이 있었습니다. 약혼한 마리아에게 천사가 나타나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는 충격적인 소식을 전해 주었던 것입니다. 마리아는 놀라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하며 이를 거부하려 하였으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는 천사의 말을 듣고 이내 태도를 바꾸어 "주의 계집 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사실상 이 사실을 받아 드린다는 것은 마리아에게 있어서는 무거운 십자가였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유대의 관습과 율법에 따르면 처녀가 잉태한다는 것은 돌에 맞아 죽을 죄에 해당됩니다. 뿐만 아니라 사랑하던 약혼자와의 파혼을 각오해야 합니다. 그 사회에서는 발붙일 수 없는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리아는 이 모든 십자가를 감수할 각오로 하나님의 아들의 수태를 수락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순종은 마리아의 영혼에 큰 기쁨을 안겨 주었고, 그의 조상 아브라함적부터 약속된 구원의 역사가 실현될 단계에 이르렀음을 깨닫는 놀라운 역사의식을 갖게 된 것입니다. 눅 1:46 이하에 있는 마리아 찬가에서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 계집 종의 비천함을 돌아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고 노래부르고 있습니다. 당시 사회관습으로는 가장 저주받은 여자일 수밖에 없는 마리아가 오히려 그것을 축복으로 받아 드렸고, 자기야말로 가장 복이 있는 자라고 노래한 것입니다.
이와 같은 신앙은 진정 놀라운 순종을 통해 얻은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무거운 십자가일지라도 그것을 순종함으로 지는 자에게는 오히려 축복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이 마리아, 평범한 처녀이지만 놀라운 인내와 순종심을 가진 여자를 통해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마리아의 십자가는 그 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난지 팔일만에 할례를 행하려고 예수를 데리고 부모들이 성전에 올라갔을 때 시므온이란 경건한 분이 마리아에게 말했습니다.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눅 2:35). 이 예언은 그대로 적중되어 마리아의 가슴은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인해 칼로 찌르는 것보다 더 아픈 고통을 맛본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아픔의 상처는 곧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치료되었고, 성령을 통해 위로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으로 이루어진 죄악을 없애시려고 오신 예수는 순종할 줄 아는 여인 마리아를 통해 오셨고, 또 죽기까지 순종하셨던 것입니 다.
다음으로 아기 예수를 만난 사람들은 베들레헴 들녘에서 양을 지키던 목동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놀라운 경험을 하였습니다. 갑자기 밝은 빛이 그 들을 두루 비추이고 천사가 나타나 소식을 전하여 준 것입니다.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그리고는 홀연히 허다한 천군 천사들의 합창이 울려 퍼진 것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
그러자 목자들은 베들레헴까지 찾아가서 구유에 누운 아기를 만난 것입니다. 목자들은 이 놀라운 경험을 기쁘게 받아 드렸고 이 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던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누구나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난하고 천대받는 민중이 더욱 간절하게 메시야를 기다렸음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600년을 한결같이 기다려 온 메시야의 탄생소식은 이스라엘 백성이면 누구나 듣고 싶어하는 소식이었습니다. 이 소식을 제일 먼저 들어야 할 사람은 율법과 예언을 밤낮으로 연구하며 지키는 종교 지도자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율법과는 거리가 먼 가난한 목동들이 제일 먼저 그것도 천사를 통하여 직접 메시야의 탄생 소식을 들었다는 것은 확실히 보통 일은 아닌 것입니다.
당시 목동들의 생활 형편이 어떤 지는 알길 없지만 추측컨대 하루하루 생활을 근근히 살아가는 가난한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이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에 쓰이는 양들을 공급하는 목자들인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벌어지고 있는 부정과 착취와 음모를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성전 제사에 대하여 일찍이 기대를 포기한 사람들일 것입니다.
제사에 사용할 양을 공급하면서도 제사를 종교적인 의식으로보다는 단순한 거래 대상으로만 생각하였던 이들, 제사장들에 의하여 자기들의 수고비에도 해당하지 않는 싼 값으로 양떼를 수탈 당하였을 것입니다. 그들이 당한 착취와 한이 그들로 메시야를 더욱 간절하게 기다리게 하였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저들은 이 시편 말씀을 기억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모든 넘어지는 자를 붙드시며 비굴한 자를 일으키시는도다 중생의 눈이 주를 앙망하오니 주는 때를 따라 저희에게 식물을 주시며 손을 펴사 모든 생물의 소원을 만족케 하시나이다"(시 145:14-15).
습 3:12에 "내가 곤고하고 가난한 백성을 너의 중에 남겨 두리니 그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의탁하여 보호를 받을지라"고 하였습니다. 결국 이런 예언자들의 예언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고, 특히 곤고하고 가난한 백성들 가운데 오시어 그들을 보호하시고 긍휼히 여기신 것입니다. 들판에 양지키던 목동들은 곤고하고 가난하며 억압당한 백성들의 표본이었습니다. 메시야의 오심은 누구보다도 이런 사람들의 기쁨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끝으로, 우리는 아기 예수를 찾아온 뜻밖의 손님인 동방박사를 생각하여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이방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메시야를 기다렸을 리가 없습니다. 아마도 점성을 통하여 한 위대한 아기의 탄생을 알게 되었고, 그들은 그 아기를 찾는 순례의 길을 떠나 마침내 베들레헴에 이르러 아기 예수께 경배 드리고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던 것입니다.
이 동방박사 이야기는 마태복음에 나오는데 원래 이 복음서의 독자들은 유대인입니다. 마태가 이 기사를 여기에 다룬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 암아 이루어진 복음의 역사는 유태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모든 세계 열방의 민족들까지 포함된 역사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들은 남들이 다 자는 밤중에 일어나 어두운 밤하늘을 밤새 지켜보며 별을 연구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다가 그들은 한 이상한 별을 발견한 것입니다. 어두운 밤 하늘에 찬란하게 빛나는 별을 본 것입니다. 짙은 어두움으로 억제할 수 없는 찬란한 빛이 뚜렷한 징조로 나타난 것입니다. 오랜 점성의 연구로 이 별의 나타남은 분명 새로운 역사의 주인공이 탄생할 징조라고 판단한 세 박사들이 이 별을 따라 길을 떠난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결단력과 용기가 있었습니다. 별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이들의 행동은 어리석게 보였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저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막연한 징조와 불확실한 미래를 향하여 그러나 확신을 가지고 길을 떠났던 것입니다.
때로는 주저함과 혹은 되돌아갈 마음이 생겼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마침내 아기 예수를 만날 수 있었고, 확신과 기쁨 속에 고국으로 돌아갈 수가 있었습니다. 그들의 놀라운 통찰력과 결단력이 이방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예수를 만날 수 있게 된 요인인 것입니다. 예수의 오심은 이 역사의 의미를 통찰할 줄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메시야 예수는 당시 사람들이 기대하지 않았던 방법으로 기대하지 않았던 자리에 기대하지 않았던 사람들 속에 오신 것입니다. 그는 비천한 자 속에, 겸손한 자 속에, 가난한 자 속에, 메시야 기대를 갖지 않았던 이방 인들 속에 오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마리아의 노래에서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주께서 그의 팔로 권능을 행하시고 마음이 교만한 사람들을 흩으셨으니 제왕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낮은 사람들을 높이시고 주린 사람들을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하시고 부한 사람들을 빈 손으로 떠나 보내 셨도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희망은 내가 어떤 일에 있어서도 부끄러움 없이 전과 같이 지금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높임을 받게 하려는 그것입니다."
"내게 있어서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요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
이런 말씀이 그들에게 얼마나 위로가 되었겠습니까? 가장 뜻있는 성탄이었다고 그는 말하였습니다.
우리가 성탄의 의미를 바로 알려면 겸손한 자리로 곤궁한 자리로 내려가야만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거기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물질적 풍요 속에서 우리의 가난한 마음을 잃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겸손을 팔아 버리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겸손한 자에게 오시는 것입니다.
이 성탄에 예수 그리스도와의 진정한 만남이 여러분 속에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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